본문 바로가기

기타/왜곡24

일본의 '사죄'는 없었는가? 문화개방을 하지 말아야 의견 중에는, 과거사에 대한 '사죄'도 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구 태여 문호를 개방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기 직전, '한일외교 관련 교수 1백인 정책제안'(교수신문,98.9.14)이라는 것이 청와대에 제출되었 다는 기사 속에 있었던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없는 상태에서 일왕 방한 및 일본 문화 개방 반대'라는 조항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일본이 그 때까지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았다는 인식은 아마도 현재까지도 한국인 대 부분의 인식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도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주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일본의 반성과 사죄'는 단 한번도 '없'었던 걸까... 2020. 8. 23.
'저질' 일본문화? 90년대는 이렇듯 정형적인 수사법이 동원되는 반일 담론이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잡은 시 기였다. 90년대 중반, 한 신문이 대학 1학년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조사 결과, 그들이 한 국 문화의 장점으로 '고유문화'를 꼽고 있고 앞으로 경계해야 할 외래문화로 일본 문화(71 퍼센트)를 지목하고 있다고 전하는 것(조선일보,95.10.14)도 그 결과문의 하나다. 이 때 미국 문화는 2퍼센트에 불과했다. 실제로 꼽는다면 유입된 미국 문화는 일본보다 많을 수 있는데 도 말이다. 이 결과는 물론 우리의 의식이 '일본'을 유독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경계의식은 과거 그들에게 지배당한 체험 때문에 '일본' 문화가 우리를 '길들일'것을 두려워한 결과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그토록 반대가 강했던 것도 바로 그.. 2020. 8. 23.
신용하 교수의 반일 수사법 몇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서울대 교수들의 일본 이해도 실은 이 정도 수준이었다. 말하 자면 일본이라는 타자에 대한 인식수준만을 본다면 지식인이나 일반인들이나 다를 바가 없 었던 셈이다. 그리고 거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런데 일문과를 먼저 설치하는 일을 '굴욕'이라 말한 신용하 교수야말로 경직된 모습의 서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예를 들면 쇠말뚝에 관해서는 "일본은 믿지 않았지만, 좌절감을 심어주기 위해 이러한 정책을 취했다."고 단정했고, 대중문화 개방에도 물론 반대했다. 말하자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유발하는 발언을 통해 한국인의 반일의식 을 높이는 데 기여한 대표적 인물인 셈이다. 1)식민지 지배의 '수탈'과 '근대화' 그가 90년대에 중점적으로 주장한 것은 식민지 .. 2020. 8. 23.
서울대 교수들의 일본 '방정식' 일본에 대한 편견과 왜곡은 삼류 소설가나 언론만의 것은 아니다. 쇠말뚝이나 총독부 건 물을 둘러싼 앞서의 이야기에서 학자들 역시 예외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대한민국 최 고의 지성인들로 간주되는 서울대 교수들조차도 일본에 관한 한 편견과 왜곡의 충동으로부 터 자유롭지 않다. 총독부 건물이 파괴된 다음해에 출간된 '교수 10인이 풀어본 한국과 일본 방정식'(삼성 경제연구소, 1996)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일본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서울대 교수 10인 이 최초로 제시하는 학제적 연구성과와 전망"을 제시한다며 "문화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대오각성의 시론이 되"는 것과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입장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이웃들과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고 자"하는 것이 취지.. 2020. 8. 23.
한국인의 '필독소설'-김진명의 반일 소설들 1)'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침략성 나름대로의 노력 끝에 남을 누를 만큼의 지력과 힘을 갖추게 된 아이와, 바깥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 집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만 있다가 미처 힘을 기르지 못한 아이가 있다고 하 자. 그리고 약한 아이를 힘센 아이가 때리고 지배하면서 갖은 방식으로 괴롭혔다고 하자. 이 때 선악의 구별은 분명하다. 강한 아이가 강하다고 해서 남을 괴롭히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고, 따라서 약한 아이에 대해 동정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약한 아이가 언제까지고 자신이 왜 당했는가에 대한 의식은 결여된 채로 피해의식만 키우면서 강 한 아이를 비난하고, 나아가 가능하면 힘을 길러 강한 아이가 했던 것처럼 그 아이를 괴롭 혀주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건 과연 정당화.. 2020. 8. 23.
일본은 '없'는가? 는 학구적 에세이 스타일로 그 정치성을 은밀히 감추고 있었지만, 이에 가세하듯 쏟아지기 시작한 소설과 체험론 형식의 일본론들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더 이상은 감추지 않았다. '일본은(배울 것이)없다'고 말하는, 부정적인 일본관을 전면적으로 내놓으면서 일약 베스 트셀러의 대열에 진입, 90년대 전반의 화제의 책이 된 가 아마도 그 대표격 이 되겠는데, 이 책에 대해 많은 식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비판하지 않은 것은 구태여 비판할 만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였으리라. 그러나 이 책이 수많은 사람들 에게 열광적으로 읽혔다는 사실은 세기말 한국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는 일이었고, 그런 의 미에서 이 책은 무시하고 지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책을 쓴 동기를 말하면서, 그 때까지의 일본론들이 칭송 일변.. 2020. 8. 23.
'역사'인가 '소설'인가-이영희의 <노래하는 역사> 1993년은 세기말 한국의 민족주의 융성의 원년이라 할 만한 해였다. 이 해, 구독률 제1위 라는 조선일보는 일요판에 이영희의 를 연재해 일요일 아침마다 한국인들 이 느긋한 마음으로 일본에 대한 우월감을 다지게 하는 데 공헌했고, 일본을 핵폭탄으로 응 징하는 김진명의 소설 와 일본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목청 높여 외치는 전여옥의 가 출간되었으니까. 유홍준 교수의 가 나온 것도, 또 인기를 끌었던 것도 물론 이런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1) "민족의 우수성을 일본 문헌을 통해 입증하는 고독한 작업" 나 에 비하면 의 인지도는 다 소 약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연재의 공헌이 얼마만큼 지대한 것이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94년 말 어느 날, 조선일보의 (사람들)난은 이 연.. 2020. 8. 23.
파괴와 상실의 사이-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1)억압의 이미지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최대 사업은 구 조선총독부 건물 파괴였다. 93년 8월 10일자 조선일보는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 "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도록 지시하면서 고뇌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고 전 한다. '고뇌'한 이유인즉 '치욕의 역사도 역사'니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던 것 과 '돈'문제 때문이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돈'보다 자존심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고뇌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마치 번민하는 임금과도 같은 말은,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독재가 아닌 민주통치임을 국내외에 과시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실은 스스로를 '나 랏님' 정도로 생각했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어쨌거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찬성이.. 2020. 8. 23.
'쇠말뚝'-민족정기를 말살하는 '풍수침략'? 20세기 말 한국에서 한국인들의 반일의식을 드높이는 데 가장 기여한 것은 무엇일까. 아 마도 '쇠말뚝'일 것이다. 어쩌면 생소한 단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쇠말뚝'은 최근까지도 신문에 가끔씩 등장하는 단어다(농촌마을 단합시킨 일제 쇠말뚝, 한국일보,2000.5.24). 쇠말뚝 을 둘러싼 담론은 실제로는 '진실'임이 증명되지 못한 채로 누구나가 '진실'로 믿어 의심치 않았고, 급기야는 전 국민적 '운동'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세기말 한국을 말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이다. '쇠말뚝' 담론이란 요컨대, 일제가 전국 방방곡곡에 한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쇠말뚝을 박았다는 설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풍수침략'이라고 불렀는데, 구 조선총독부 건물 역시 그 러한 '풍수침략'의 한 케이스였다고, .. 2020. 8.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