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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파괴와 상실의 사이-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by FraisGout 2020. 8. 23.

  1)억압의 이미지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최대 사업은 구 조선총독부 건물 파괴였다. 
  93년 8월 10일자 조선일보는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 "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도록 지시하면서 고뇌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고 전
한다. '고뇌'한 이유인즉 '치욕의 역사도 역사'니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던 것
과 '돈'문제 때문이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돈'보다 자존심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고뇌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마치 번민하는 임금과도 같은 말은,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독재가 아닌 민주통치임을 국내외에 과시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실은 스스로를 '나
랏님' 정도로 생각했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어쨌거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찬성이 반 정도에 
불과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강력한 반대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혼자의 
'결정'대로 일은 행해졌다. 그리고 그건 20세기 말 한국이 실은 말 그대로의 민주국가는 아
니었음을 드러낸 일이었다.
  수천억 원이나 드는 박물관 파괴와 이전작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는 '전적으로 찬성 
28.9퍼센트, 찬성하는 편 22.5퍼센트'였다. 국민의 여론은 50퍼센트밖에 찬성이 아니었던 셈
이다. 그것이 의식되었는지 이 신문은 "그러나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다른 조사에서는 총독
부 철거 찬성이 80퍼센트를 넘었다고 말하고 있다."고도 전한다.
  물론 50퍼센트인지 80퍼센트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결론이 옳은 결정
인가일 터이다. 문제는 "돈보다는 민족자존심을 중시했"다는 선택을 뒷받침한 것이 실은 풍
수학자들의 '민족정기' 숭상론이었다는 데 있다. 
  총독부 건물 파괴가 결정되었을 때의 기사를 보자.
  지난 1926년 완공된 식민통치의 상징물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는 정부 방침에 대
해 풍수지리학계는 끊겨진 수도 서울의 정기를 67년 만에 있게 됐다며 크게 환영하고 있다. 
풍수학자들은 이 건물이 일제가 조선의 맥을 끊기 위해 건립한 대표적 '풍수침략 조형물'이
라고 규정하고 해방과 더불어 진작 철거해야 했다고 말한다. 해방 이후 역사학계에서는 이 
건물의 형상을 두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일'자가 가로누운 형상이다", "건물에 원형돔 지붕
을 설치해 조선인의 혼을 잠재우려 했다", "경복궁의 정기를 약화시키기 위해 정남향에서 
일부러 몇 도 비뚤어지게 건축했다."는 등 끊임없이 철거의 당위성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풍수학자들은 총독부 건물이 철거돼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건물의 외형보다 그 '터'에서 
찾는다. 일제가 조선 왕궁의 정궁이요 명당 중의 명당인 경복궁 앞에 식민통치의 본산인 총
독부를 지어 북악에서 종로, 남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맥을 끊어버리려 했다는 것이다.(중
략)
  일제는 이 근정전 바로 앞 광화문 홍려문을 헐고 총독부를 지어 민족정기의 근원을 말살
하려 했다는 것. 특히 풍수학자들은 일제가 총독부 건물과 함께 1927년 경복궁 내 과거장 
등을 허물고 총독의 관저 (현 청와대)를 지어 "조선의 입을 막고 목을 누르려 했다."고 풀이
한다(경복궁 터에서 총독부 자리는 기구 즉 인체의 '입'에 해당되고 청와대 자리는 구기처, 
'목'과 같다고 해석). 따라서 경복궁을 헐고 총독부와 총독관저를 건립함으로써 왕조와 민족
의 숨통을 억압하려 했다는 게 풍수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풍수지리 전문가인 최창조 
씨(전 서울대 교수)는 "당시 풍수지리를 신앙과 같이 믿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를 파악한 일
제가 서울 중심지에 총독부를 지어 조선인의 사기를 끊으려 했다."며 "뒤늦게나마 경복궁이 
복원되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중앙일보, 93.8.10)
  우리는 여기서 총독부를 '대표적 풍수침략 조형물'이라고 규정한 이들이 풍수학자들이었
고, 이들이야말로 최종적으로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인들의 정서를 '파괴'쪽으로 몰아가는 결
정적 역할을 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67년 동안 한국의 정기가 '끊겨' 있었다고 강조함으로써 7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
이나 올림픽으로 절정에 달했던 80년대 한국의 약진을 우리로 하여금 잠시 잊게 만든다. 그
만큼 조선의 "입을 막고 목을 누르려 했다."든가 왕조와 민족의 "숨통을 억압하려 했다."는 
신체이미지는 강렬하다. 말하자면 일본의 악랄성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풍수학자는 첨탑이 잘린 이후에도 비슷한 표현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
을 유발시키고 있다. 
  지난 7일 옛 조선총독부 철거를 위한 첫 단계로 중앙돔 첨탑이 잘렸다. 다음날 중부지방
과 영동지방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오랜 가뭄으로 시달리던 남부지방에도 많
지는 않지만 비가 내렸다. 이것은 물론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풍수를 배우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렇게 생각 되지만은 않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조선총독부의 철거는 
요컨대 우리 국토라는 생명체의 틀어 막혔던 익을 열어준 것이 되기 때문에...(생략)
  일제는 조선 왕국의 중핵지인 경복궁을 괴멸시키기 위해 우리 민족이 거의 종교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믿고 의지하던 풍수사상을 이용했다. 경복궁 위쪽에는 그들 총독의 관사(구 
청와대 본관)를 세워 우리 국토의 목줄을 눌렀고, 남쪽 아래에는 총독부를 세워 입을 틀어
막는 상징적 풍수침략을 감행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민족 터전이 영원히 목숨을 잃었음을 
알려주려 했던 것이다. 구 청와대 본관은 이미 헐렸다. 그러니 목을 죄고 있던 손아귀에서는 
풀려난 셈이지만 아직 호흡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총독부 건물이 계속 입을 막고 있었
던 까닭이다. 이제 그 총독부 건물까지 없어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7일 약속에 하늘은 비로
써 화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의 일본대사관 터가 바로 그들의 선조가 한 나라의 왕비를 참살하고 그 나라를 빼앗
았으며 수많은 애국지사를 죽여버린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
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그들이 의도 없이 우연히 그런 입지처를 선정했던 것이라 해도 자신들의 범죄현장
을 쉼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대사관 터를 잡았다는 것은 
인의 있는 군자의 대도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일본대사관은 또한 그들의 과거 조선 지배의 
대표적 상징물인 국립박물관 건물을 역시 쉼 없이 바라보고 있다.(최창조, 중앙일보, 95.8.14)
  파괴 후에 비가 온 것도 여기서는 하늘이 감응한 소치로 간주된다. 그뿐인가. 국토를 '생
명체'로 간주하면서, 그 위에 세워진 총독부가 "목줄을 눌렀"거나 "목을 죄고"있었고 "입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 "호흡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고 민족 터전이 "목숨을 
잃었"었다고 하는 신체이미지가 여기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식의 신체이미지
야말로 '국토'라는 땅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직접, 과거가 아닌 바로 어제, 그리고 우리 조상
이 아닌 나 자신이 당한 것과도 같은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국
토를 '생명체'라 가정하고 그 생명체가 당하는 잔혹한 고통을 상상한다면 그 누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이는 의도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단지 본인이 풍수 신앙적 해석을 믿었다는 것뿐이라
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고조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대사관 위치까지도 근정전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라고 말해 일본이 그 
자리를 의도적으로 선정한 것처럼 왜곡하면서, 곧 이어 "그들이 의도 없이 선정한 것이라 
해도 군자의 대도는 아니다."며 대사관을 이전할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의도 없이 선정한" 
사람들이 왜 일부 한국인의 풍수설에 따라 이전이라는 엄청난 경제적, 시간적 손실을 감수
해야 한다는 걸까?
  교활함의 강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대사관은 국립박물관 건물을 "쉼 없이 바라
보고 있"고 결국 "대사관 건물이 꼭 몰래 숨어서 범죄 현장을 훔쳐보는 범죄자의 눈길처럼 
되어버렸다."고 대사관 건물을 의인화하는 수사법으로 또 다시 독자들의 상상력을 지휘하고 
분노를 촉구한다.
  그러나 그 장소가 '기맥'을 막는 것이었다고 생각한 것은 앞에서의 쇠말뚝처럼 일부의 풍
수가일 뿐이거나 최소한의 한국인이다. 일본인들이 그 위치를 선택한 것은 분명 노골적인 
지배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의도를 읽는 것은 과장이고 왜곡일 뿐이다.
  
  2)옆으로 누운 일자, 거꾸로 선 본 자
  '대 일본' 설을 기억하는가. 총독부는 위치뿐 아니라 그 구조까지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일자형의 총독부 건물은 대자형인 북악산과 본 자형인 서울시청 건물과 아
울러 공중에서 보면 대 일본의 형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한가운
데 자리를 잡은 것이나 설계 등에서 우리민족사의 기맥을 절단하고 식민통치를 영구화하려
는 일제 측의 치밀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조선일보, 96.6.12) 
  일자가 가로누운 형상? 첨탑으로 조선인의 정기를 잠재우려 했다? '일부러' 몇도 비뚤어
지게 설치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한 일본인이 항의하고 있기도 하지만, 일자는 옆으로, 본 자는 거꾸
로 선 형상이다(구로다 가쓰히로, <한국인의 역사관>, 분게이슌쥬, 1999,도쿄) '대 일본'자를 
만들기 위한 것치고는 우스꽝스러운 형상 아닌가?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하는 그들이 자신들
의 모습을 그런 식으로 어정쩡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말들을 다른 사람도 아닌 
'학자'들이 했다는 것이 서글프지만, 그들이 다름 아닌 '학자'의 권위를 내세워 한 말들이기
에 '간교한 일본' 이미지는 오래도록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다. 
  
  3)파괴가 말해준 것
  결국 총독부 건물은 철거되었고, 대부분의 신문은 파괴를 칭송했다. 조선일보의 홍사중 씨 
만은 파괴를 비판했지만(조선일보, 94.2.15) 동아일보는 "우리 겨레의 오욕과 회한의 역사를 
말끔히 씻어주는 감동을 안겨주었다."며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고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선
린과 동반자로서의 한일관계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 "이런 점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의 상
징이었던 옛 총독부 건물을 철거키로 한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의 역사에 기록될 것"(동아일
보 사설, 96.11.15)이라고 대통령의 결정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파괴는 '오욕과 회한의 역사를 말끔히 씻어'냈는가? 그 후 '굴절된 역사'는 '바로
잡'아졌는가? '해로운 선린과 동반자로서의 한일 관계'는 구축되었는가?
  식민지로서의 '오욕과 회한의 역사'는 변한 바 없고, '굴절된 역사'가 '바로잡'아질 리도 
없었으며, '새로운 선린과 동반자로서의 한일 관계'는 김영삼 대통령이 물러나고서야 그 물
꼬가 트였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다. 다만 박물관으로 용도 변경할 때의 공사비와 
이전비 310억원, 건물해체비용 48억원, 임시박물관 증개축비 237억원, 복원사업비 535억원, 
박물관 건립비 3천수백억 원 등(<부끄러운 문화 답사기>,91쪽)수천억 원이 실체 없는 '자존
심'의 복구를 위해 날아갔을 뿐이다.
  총독부 건물이 "일본인에게는 추억과 자긍심을, 조선인에게는 치욕과 몰지각한 역사의식
만을 안겨주고 있다."(정운현, <서울시내 일제 유산 답사기>, 한울, 1995, 26쪽)는 말은 총독
부 건물을 둘러싼 움직임을 지켜보던 사람들을 찬성 쪽으로 몰고 갈 만한 의견이었다. 하지
만 중앙청과 박물관으로 쓰였던 그 건물을 보며 '자존심'이 짓밟히는 체험을 한 사람이 도
대체 얼마나 있었을까. 일반인들에게는 총독부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좀 멋진 건물 중의 
하나였고 '우리의' 박물관이었을 뿐이다. 총독부를 바라보며 언제까지고 '치욕'을 느껴야 한
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에게 언제까지고 열등감과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을 요구하는 
사고다.
  물론 '추억과 자긍심'에 기반한 우월 의식을 느끼는 일본인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총
독부 건물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는 보는 사람의 의식수준이 결정할 문제다. 피지배
자였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치욕'의 감정만이 당연한 것이 아닌 것처럼, 조상의 지배 흔적을 
보는 일이 무조건 '자긍심'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수치감'으로 연결될 수도 있
으며, 그 때 과거의 흔적은 우리에게보다도 그들에게 더 '산 교육장'이 될 수도 있다. 타자
를 지배한 일이 자긍심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은 지배를 실은 자랑스러운 일로 여기게 만드는 
폭력적인 사고다. 그것은 오히려 아득한 옛날인 수백 년 전의 광개토대왕의 치적에 자긍심
을 느끼고 싶어하는 한국다운 발상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 일본의 의식수준은 전체
적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성숙한 곳에 와 있다. 만약 '자긍심'을 느끼는 일
본인이 있다면, 그들을 경멸하면 될 일이다.   
  일본의 한 평론가는, 박물관이 경복궁을 가로막듯 세워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까지 노골
적이었다니..."하며 수치스러워했다. 진정한 역사교육을 위해서라면 첨탑만을 잘라 일반인이 
가기도 힘든 독립기념관에 놔둘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놔두었어야 하지 않을
까. 풍수가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조선총독부 건물은 바로 그 위치만으로 우리에게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일본의 조선 통치의 가장 결정적이고도 흉물스러운 역사의 '증거품'일 수 
있었다.
  총독부 건물은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20세기 동양의 제국주의의 증거기도 하다. 그토록 
세계화를 부르짖었으면서도 그것을 인류의 삶의 한 증거로서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한국에는 없었거나 소수였다는 것을 총독부 건물 파괴는 증명해 보였다. 하긴 당시이 박물
관장조차도 파괴에 찬성했다. 말하자면 박물관장에게도 박물관을 세계 속의 한 유물로 보는 
시각은 없었고 한국인들에겐 '복원'되어야 할 '한국의 유물'만이 특별시 된 셈이다. 그건 물
론 '우리 것'이 아닌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는 한국적 사고방식의 소산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유물들이 그나마 소중히 다루어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사할 박
물관이 세워지기도 전에, 해방 50년을 단지 '기념'하기 위해서, 영원히 안주할 새 집을 마련
해준다면서 몇 년 동안이나 열악한 환경에 있을 것을 강요했을 뿐 아니라 유물 자신의 훼손
마저 요구한 셈이었으니까. 한국 유물이 일본이 만든 건물에 들어가 있는 것은 유물들에 대
해 미안한 일이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미안해해야 했던 건 오히려 이쪽이 아니었
을까.
  그런 의미에서, 총독부 건물을 뛰어난 건축이라고 간주한 일부 사람들의 보존 주장은 적
어도 인류적 차원의 시각이 엿보이는 것이었다. 일본의 (부정적)유산이지만 인류의 유산이기
도 하다는 인식. 외국의 경우, 피지배의 흔적이라도 그 발굴에 힘쓰는 것은 종종 보는 일이
다. 우리는 멀쩡한 건물까지 돈 들여가며 파괴하는 판에 그들은 왜 묻혀진 채로 놔두지 않
고 일부로 발굴하는 것일까. 그건 물론 그들의 '역사'의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글자 그대로라면, 일어난 일 모두가 역사다. 말하자면 역사란, 그 토지 위에 살았던 사람
들의 기분에 따라, 없던 일처럼 그 흔적을 지워버려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4)과거의 은폐는 미래의 왜곡이다
  도대체 대통령과 그를 추종한 이들이 생각한  '굴절'되고 '잘못된' 역사란 어떤 것이었을
까. 일본에게 지배당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그 총독부 건물을 그냥 놔둔 일이었을까?
  '청산'이란 무엇을 청산한다는 것이었을까? 시청이니 서울역 등 일제의 '잔재'는 많은데 
총독부만을 파괴한다고 해서 잔재 청산이 되느냐는 질문에, "적군으로 치면 적장만 제거하
면 끝난다."(정운현)는 이도 있었지만, 그가 '끝난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통치당했다
는 사실이었을까? 그것은 과연 '끝'날 수 있고 '끝'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총독부를 때려부수는 일은 그들이 생각한 과거의 '극복'이나 '청산'과
는 실은 관계없는 일이었다. '극복'이란 파괴하고 보지 않는 일이 아니라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청산'했어야 했던 것은 우리 자신의 피해의식이었
다. 
  한국에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이 아직 있다면, 그것은 일부 풍수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통치의 결과로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당한 기억
이 아직도 새로워서, 언제까지고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배제하지 못한 채로 그들을 대하는 

일이다. 
  생각하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정권의 주체가 바뀔 때마다 그 때까지
의 모든 것을 뿌리째 부정하면서 파괴해온 것이 바로 우리 역사의 모습이기도 했다. 왜 그
랬을까? 그건 물론 어제까지의 '정통'의 흔적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오
늘의 내 모습만이 '정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부정하는 일만이 현재의 자신의 권위
가 정착되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개 새로운 주체의 창출과정으로 정당화되었
지만, 그 결과 우리의 문화유적은 '흔적'만 남은 것이 적지 않다. 오죽하면 어느 사학자가 "
정말로 통일신라니 고려라는 나라가 존재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우리의 유적은 너무
나 빈약하다."고 탄식했을까. 
  조선은 고려의 흔적을 대부분 없앴고, 그 때문에 우리는 고려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무
신정권이었다거나 불교국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힘들다. 경복궁을 '복원'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즉 민족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총독부를 파괴한 일도, 그 속에 흐르는 감성은 
수 백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의 '문민정부' 역시 그 때까지의 정부와 '다른' 정부임을 
'파괴'로 증명하려 했고, 그로써 우리 민족이 유달리도 이전의 역사를 파괴하기 좋아하는 민
족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된 셈이다. 
  그러나 경복궁이 한국의 역사인 것처럼, 경복궁의 일부가 훼손된 사실도 우리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 총독부가 들어섰고 이후 중앙청 시대를 거쳐 박물관이었다고 
하는 것 역시 모두 한국의 역사다. 
  부끄러운 과거의 흔적을 없애는 것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자신을 상상하는 일은 즐거운 일
이다. 그러나 과거의 은폐와 부정이 반드시 새로운 오늘을 약속하는 건 아니다. 개인의 삶이
건 한 나라의 역사 건, 어차피 역사란 항상 그 때까지의 문화 위에 새로운 문화가(정치도 
넓은 의미에선 문화의 하나다.)덧칠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설령 타민족의 손에 의한 것
이었다 하더라도 파괴는 그 땅에서 분명히 진행되었던 역사의 증거물의 인멸이다.
  최소한 이 역시 그럴 듯하게 말해지던 고문실이 정말 있었는지, 혹은 '대 일본'설은 정말
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남겨두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파괴 이후에 남는 것은 과장과 
오해의 증폭일 뿐이다. '진실'이 알려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불확실한 정보만이 '진실'화된 
채로, 총독부는 파괴된 셈이다. 
  역사에 접하는 일은 '기억'하는 일이다.
  치욕의 역사라고 해서 보려 하지 않거나 잊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역사가 주는 교훈마
저 잊어버릴 수 있다. 최악의 경우 그 망각은 과거의 재현을 초래할 수도 있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도, 체코에서 역사가 날조되고 역사적 기념물들이 파괴되는 것을 보며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국가는 서서히 자기 자신마저도 상실해 가는 것이다."(<사유하
는 존재의 아름다움>, 청년사, 1994)라며 탄식한 바 있다. 
  과거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현재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90년대 한국은 과거를 부정하려고만 했을 뿐 과거를 직시하거나 현재의 자신을 돌아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과거를 직시하며 더 나은 오늘과 내일을 만드는 일보다는 
단순히 찬란했던(찬란했다고 말해지는)과거의 문화에 연연하며 허황된 자부심을 기르는 일
에 치중했을 뿐이다.
  
  5)진짜 '자존심', 민족정기를 살리는 법
  문제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던 우리의 수천억 원이 정말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는지에 있다. 오히려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 같은, 일본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해 
썼다면, 국가가 과거에 국민을 지키지 못한 죄를 보상한다는 의미에서도 가해자에게만 요구
하는 것보다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민족정기'를 
위해 수천억 원을 낭비했지만, 시내 한복판의 먼지와 소음이 오히려 정신적, 육체적 '민족건
강'을 훼손시킨 건 아니었을까?
  외국인을 의식한 자존심이라면, 편리하고 안전한 지하철,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 아름
답고 깨끗한 환경, 청결한 화장실과 서비스 좋은 택시기사를 대량으로 확보하는 편이 백 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들은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질 것이고, 그들이 한
국을 좋아하게 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민족정기'가 고취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
는 그렇게는 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우리는 돈이 없어 외국에서 돈을 꾸어다 
썼다.
  총독부 건물 파괴는, 김영삼 대통령이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 지향적이었고 실질적 
이득보다는 이념의 만족을 추구했다는 것을 증명해준 일이었다. 말하자면 과거에 연연하다 
현재를 망친 셈이었다.
  문민정부 시대란 적이 없어진 시대였다. 북한과도 나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도 노사문제
도 사라졌고 독재도 사라진 시대였다. 그러나 자신의 입지를 존속시키기 위해 습관처럼 '대
립' 세력을 적절히 이용하곤 했던 한국의 정치가들은 90년대에는 '반일'을 국민통합의 수단
으로 삼았다. 그것은 한 시대 전의 '반공'과 다를 바 없었다. 대통령의 "(일본의)버르장머리
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은 일본을 '응징'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고, 사람들은 그것
을 '자존심'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일제가 '민족정기의 근원을 말살'하려 했다는 것은 그들이 '동화' 정책을 선택해 '한국'의 
존재를 지우려 했으니 만큼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 총독부의 위치를 한 나라의 궁전을 가
로막듯 세운 일에서 한국의 지배자가 더 이상 한국의 왕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것을 보여주
려는 의도를 읽는 일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의도를 풍수설로 포장하는 일은 왜곡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일본의 간교함을 
강조하는 일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언제까지고 감성적 '비난'에 얽매이게 하고 이성적 '비판
'의 주체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야말로 한국인들을 과거의 피해의식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언제까지고 일본을 용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피지배의 상징을 언제까지고 '자존심 상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실은 피
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음
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다.
  과거의 상처란 결코 '없어' 질 수는 없다. 또 상처는 부정하거나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차
라리 끌어안는 쪽이, 상처받은 이를 훨씬 강인하게 만들고 남의 상처에도 민감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다. 안 보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고 보면서도 초연할 수 있는 경지까지 가
는 것만이 진정한 상처의 '극복'이다
  쇠말뚝 소동과 총독부 건물 파괴를 뒷받침한 것은, "쇠말뚝을 뽑아내는 것은 우리 마음속
에 내재해 있는 열등의식 뽑는 것과 같다."(<부끄러운 문화 답사기>, 15쪽, 서길수 교수 인
터뷰에서)면서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문화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없는 데 있으며, 그것은 
우리 것이 없어서"이며 "문화 개방을 앞두고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문화의 위대성을 깨달아 
면역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민족주의였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촉진위원회'
를 결성하고 "이 건물은 반드시 현 정권 임기 내에 철거되어야 한다."고 촉구(중앙일보, 
93.8.14)한 것은 '광복회', '한글학회' 등 11개 관련단체 및 학회 대표들이었다는 대목을 보
면,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란 말하자면 반일주의와 민족주의가 만나 이룬 사업이었던 셈이다.
  총독부 건물 파괴 후 땅속에 9천여 개의 말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처음에는 쇠말
뚝과 같은 류의 '풍수침략'으로 해석되었고 그것도 뽑아버려야 한다는 논의가 심각하게 제
기되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는 지반을 다지기 위한 말뚝이라는 해석이 받아들여져 그냥 놔
둔 채로 공사가 진행되었다던가. 
  그뿐인가. 이 역시 일제의 '잔재'임에 틀림없는 서울역사(도쿄에 가면 그와 너무나도 똑같
은 도쿄 역사가 있다.)는 '보존'되어야 할 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 최근에는 들려온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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