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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일본은 '없'는가?

by FraisGout 2020. 8. 23.

  <노래하는 역사>는 학구적 에세이 스타일로 그 정치성을 은밀히 감추고 있었지만, 이에 
가세하듯 쏟아지기 시작한 소설과 체험론 형식의 일본론들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더 이상은 
감추지 않았다. 
  '일본은(배울 것이)없다'고 말하는, 부정적인 일본관을 전면적으로 내놓으면서 일약 베스
트셀러의 대열에 진입, 90년대 전반의 화제의 책이 된 <일본은 없다>가 아마도 그 대표격
이 되겠는데, 이 책에 대해 많은 식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비판하지 않은 
것은 구태여 비판할 만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였으리라. 그러나 이 책이 수많은 사람들
에게 열광적으로 읽혔다는 사실은 세기말 한국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는 일이었고, 그런 의
미에서 이 책은 무시하고 지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책을 쓴 동기를 말하면서, 그 때까지의 일본론들이 칭송 일변도였다고 저자 전여옥은 지
적한다. 그러나 실은 일본을 말하는 수식어로서는 '친절', '근면'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제고 
'저질'과 '교활'도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은 없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의 등장은, 말
하자면 긍정적 인식에 가려 표면화되지 못했던 부정적 인식이 자신감과 함께 수면 위로 드
러난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분명 제목만으로도 '팔릴'수 있는 책이었다. 게다가 
88올림픽을 치르고 90년대에 이른바 문민정부가 등장하면서, 이제는 정치와 경제면에서 우
리 모두가 꿈꾸던 곳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던 93년 말에 이 책이 등장한 것은 시기
적으로도 절묘했다. 이룰 것을 이룬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없'을 것으로 모두가 
생각한 시기였으니까.
  
  1)페미니스트의 여성차별
  먼저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이 할애되고 있는 일본 여성론을 보자.
  일본 여성은 "남편이 말하지 않아도" 의식주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거나, '여성다운 여성'이
 되기를 강요받고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사항인가? 
물론 아니다. 그것은 한국에도, 어쩌면 한국에 '더' 해당되는 사항이며, 나아가 지구상의 대
부분의 여성들이 아직껏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다. 그런데도 이런 일들이 이 책에서는 
마치 일본만의 치부인 양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최대의 문제점은 바로 이런 식의 
오류가 전체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정년을 맞은 남편과 이혼하는 여성들을 두고 "불쌍한 인간을 거두지 못하고" 떨쳐버리는 
이기주의로 간주하는 것도 물론 이런 맥락에서다. 이미 한국에서도 문제시되고 있는 내용이
니(전여옥의 발언은 이혼을 원하는 할머니에게 가해진 남성 재판관의 질책과 닮아 있지 않
은가?) 새삼 이런 발언의 문제점을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저자
가 상상하는 것처럼 '퇴직금'이 아니라 '정년' 자체다. 즉, 둘만의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는 
정년을 맞아, 그 동안 '일'을 명목으로 밖에서만 살아온 남편과의 사이에 이미 공통의 화제
도 취미도 없음을 발견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친 종속적인 삶을 청산하려 하는 의식의 발로
가 바로 정년이혼인 것이다. 
  물론 '거두'는 일에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남
(자식 혹은 타인)을 의식한 나머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
는 의욕과 용기의 부족에 의한 수동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각
자의 가치관이 정할 문제일 뿐, 한국적(남성중심주의적) 도덕관으로 단죄될 문제는 아니다.
  일본 여성이 "자기 실속을 철저히 챙긴다."(여기서 강조되는 일본인=이기주의의 도식은, 
후에 다시 말하겠지만, 편견과 자의적 해석이 만들어내는 일본 비판의 대표적 케이스다.)고 
소리 높여 비난하지만, 그것은 아이들이 다 커서 자립할 때까지 기나긴 생활을 인내 속에서 
견뎌온 그들의 아픔과 여성으로서의 불리한 입장에 대한 이해가 없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
다. 말하자면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 일본이 우리보다 좀 빨랐다는 이야
기인데, 실제로 저자가 이런 비난을 한 지 불과 몇 개월 후에 이런 식의 '황혼이혼'이 한국
에도 늘고 있다는 것이(중앙일보 94.5.1<50대 이후 이혼은 늘어만 가는데>)한국에서도 보도
되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결혼을 둘러싼 보편적이 '여성'의 문
제를, 저자는 일본의 특수한 현상으로 생각했을 따름이다.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고 여자가 남자로부터 보석을 받는 일, 남편과 부모 이외의 남자에
게 술을 따르는 일, 서양 남자를 애인으로 삼는 일 등 비판은 이어지지만, 이런 비판들은 어
디까지나 '한국'의, 그리고 '여성'으로서 길들여진 감성이 시키는 비판일 뿐이다. 그리고 바
로 그런 보편적 '한국 여성'의 사고방식은 일본 여성들에게는 정조관념이 없다는 질타로 이
어진다. 그러나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정조' 개념이란 여성을 억압해온 남성적 사고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그뿐인가. 이런 식의 논리야말로 여성차별 담론을 강화시키는 
근원에 있는 것이다. 후에 저자가 페미니스트를 표방하고 나선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다른 것은 죄악'?
  이런 식으로,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사고와 행동을 무조건 비판하는, '다른 것은 죄악' 
식의 논지가 이 책의 전체 기조를 이루고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갈 때 나중에 신기 좋게 돌려놓는 일, 잔돈에 정확한 일등의 문화적 차
이조차도 저자는 '긴장이 풀어진 편안함'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
은 질서와 정돈에 '편안함'을 느끼는 타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저자가 상상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비판이다. 굳이 말한다면 그런 식의 정신적 긴장이 때로는 '유비무환'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반대로 저자가(대부분의 한국인이)좋아하는 편안함의 추구야말로 때로는 '무비유
환'을 유발할 수도 있다. 더치페이에 대해 잔돈까지도 정확한 것을 두고도 저자는 비인간적
인 일로 문제시하고 장사꾼 같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장사'라고 하는 상행위에 대한 경멸
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한국적 사고일 뿐이다.
  도표와 도면이 곧잘 이용되는 뉴스의 브리핑까지 '지나치게 친절'한 가르침이라며 비아냥
거리고(얼마 안가 한국에서도 모방이 시작되었던가?), 최고급 물건을 찾는 여성들을 '상식을 
뛰어넘는 여성'이라고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급 레스토랑을 찾는 사람이 저자와 같은 
'기자'일 때는 "역시 기자들이란 까다로운 족속, 그리고 일본의 부를 제법 즐길 줄 아는 부
류"라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모순도 보인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사하지 않은 채 선입견만으로 비판적 언사를 퍼붓고 있는 것도 이 책
의 또 다른 문제점이다. 예를 들면 "일본이란 사회는 모든 것이 돈으로 결정되는 지극히 비
인간적인 사회"(우리는 어떻던가?)라거나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나은 사회"라고 저자는 거
리낌없이 말하는데, 어디가 어떻게 '돈으로 결정'되고 있는지, 또 우리는 어디가 그렇지 않
아서 더 '나은'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지나친 지출을 하지 않기 위해 카드 아닌 현금을 쓰는 
것조차도 그들이 유달리 현금, 즉 '돈'을 좋아해서이며, '돈'을 '오카네'라고 말하는 것도 저
자에 따르면 그들이 배금주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돈에까지 공경의 접두어 '오'를 붙인 
결과다. 그러나 일본어의 기호만 알아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의 '오'는 단어에 대한 존경심
의 표현이 아니라 말 자체의 품격을 생각한 어법이다. 일본어는 목욕에도 맥주에도 '오'가 
따라다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맥주나 목욕도 존경하고 있다는 걸까? 배금주의라면 한국 
쪽에 '더'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저자가 <나비부인>의 여성을 두고 일본인은 "사랑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결국 아무 
것이나 사랑이고 희롱 당한 것마저 사랑으로 분류"한다고 말하고, 전통극인 가부키를 중간
에 식사를 끼워 장시간 즐기는 모습까지도 '퍼질러앉아' 즐긴다고 해석하는 악의적 시각도 
물론 이런 시각의 연장선에 있다. 문제는 그런 시각이 언제까지고 문화의 '차이'를 '차이'로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이다. 
  
  3)일본어에 문제 있다?
  일본론자들이 곧잘 빠지는 오류지만, 여기서도 외래어를 표기하는 가타카나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일본어의 비합리성이 강조된다. 하지만 가타카나는 외래어를 표기하는 구
실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외래어가 많다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외래어가 들어 있지 않는 순수한 고유어란 존재할 수 없다. 언어란 원래 살아 있는
(변화하는)것이며 자신이 접한 수많은 '타자'의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저자는 외래어를 표기할 고유어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을 두고 일본 국어학자의 직무유기
라지만, 언어란 국가가 '만들어' 확산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텔레비전'이나 '컴
퓨터'를 표현할 고유어를 따로 만들지 않는 것은(묘하게도 이 때는 한국도 그렇다는 것은 
잊혀진다.) 거기에 들어가는 노력이 인력과 시간의 낭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실은 국가주의적 발상이라는 걸 저자는 알고 있을까. 
  그들의 외래어 사용은 중학교까지의 의무교육의 결과에 따른 전 국민의 영어 이해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그들이 영어를 잘하는 민족은 아니지만, 일본어보다 영어 쪽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을 영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때 그 어휘는 이미 '
외래어'로 인식되지 않는다. '파파', '마마'와 같은 가장 일상적인 어휘부터가 외래어라는 현
상이 증명해주듯, 그들에게는 그런 단어는 이미 '외래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본어'인 
것이다. 이 현상은, 그들의 남의 것(타자)에 대한 놀랄 만한 적응과 수용력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러한 성향이야말로 그들의 변화와 발전의 기반을 이룬 것이
었고, 우리와는 현저하게 다른 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근대화를 일본을 통해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과거는, 근대라는 틀이 필요로 한 새로운 
언어들에 관해 일본어를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철학', '물리학' 등
의 학술용어부터 기술용어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친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도 이미 외래어를 사용해온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근대적 사고의 근간이 돼온 언어시스템들을, 이제 와서 모
두(고유어로)뜯어고치는 작업을 해야 할까. 오늘도 한편에서는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지
만, 그건 조선총독부 건물을 파괴하는 일만큼이나 무의미하고도 소모적인 일이다. 그런 곳에 
사용할 수 있는 인력과 시간이 있다면 현재와 미래를 위한 일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
이다. 
  
  4)'분노'-일본에 대한 굴절된 피해감정
  저자는 공원에서 평화로이 거니는 일본인들을 보면서까지,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는 그들
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현재의 부와 평화는 어디까지나(물론 미
국의 도움과 6.25 등의 호기도 있었지만) 패전 이후의 그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의 '죄'에 대한 벌을 주고 싶은 나머지 그런 사실은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백조의 탈을 쓴 흑조"라는 식으로 일본을 바라보는 식의 굴절된 피해의식
의 발로인 것으로 보이지만, 한 나라가 완전한 백조거나 흑조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가 너무나도 단순하고 순진한 발상이다. 그리고 그런 식의 단순한 사고야말로 복합적 존재
로서의 인간(나라)이해를 가로막고 있는 주범이다. 대상의 복합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
흑조'로 치부하는 일은(단순한 흑조일 뿐 흑조가 백조의 '탈'을 쓰고 있다는 말로 일본은 
두 번 단죄된다.) 자신의 가치관이 옳은가 하는 재고 없이 타자를 흑조로 판단하고 배척해
왔던 단순함과 경솔함을(우리가 과거에 겪어왔던 그 수많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배척-예를 
들면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랬다-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분노'라
는 '감정'은 일본을 제대로 보게 해줄 '이성'까지 방해한 것으로 보인다.
  IMF가 시작되었을 무렵 그 원인을 일본에 돌리는 의견이 심심치 않게 들린 적이 있다. 
  한 국가의 경제적 파탄이라는 것은 경제 자체가 그 구조가 단순하지 않은 것만큼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당시, 원인을 일본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물론 이미 경제구조 자체가 일본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만큼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이미 반성한 것처럼, 그 원인은 금융부실과 정경유착, 과
도한 소비성향 등 국가와 사회의 제반 구조에 있었다. 그런데도 모든 원인을 일본에 돌리는 
것이 우리의 의식이다. 한편, 당시 한국을 가장 많이 도와준 나라는 일본이었는데도(선진국 
지원 80억 달러 중 일본 30억 달러, 미국 17억 달러. 동아일보, 98.1.8), 그런 사실은 별로 신
문에 보도되지 않는다. 혹은 보도되더라도 아주 작게 보도되어 국민들의 일반인식이 되기는 
힘들다(그러한 속에서의 예외적 케이스로, 경향신문,97.12.27, <일, 한국 살리기에 나섰다>가 
있다). <일본은 없다>에는 그런 의식의 원형이 있다.
  
  5)정상과 비정상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건, 저자가 눈앞에 놓인 대상을 '정상', '비정상'으로 구분하고 
싶어하며 그 때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을 '정상'으로 보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때 저자
가 한국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 만큼, 우리와 다른 일본은 당연히 '비정상'으로 매도된
다. 타자의 '차이'를 '차이'로 보려는 노력 없이 일본이라는 타자를 향해 '비정상'이라는 단
언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 양쪽이 겪었던 대형 비행기사고 현장에서 나타난 양국인들의 모
습은 양쪽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국인들은 통곡과 실신과 울부짖음으로 슬픔을 표
현했지만, 일본인들은 눈물을 참으려 애쓰고 있었다. 물론 슬픔에 맞닥뜨려 울부짖고 통곡하
는 한국적 행동을, 참고 억제하는 일본적 행동양식보다 인간적이라고 느낄 수는 있다. 그러
나 그것은 감정표현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어느 쪽을 아름답게 느끼는가는 실은 보는 이가 
속한 공동체의 성향, 혹은 개인의 성향이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정상'이란 
하나의 공동체가 편안하게 느끼는 생활양식과 사고를 지칭하는 말일뿐이다.
  타자를 '비정상적'이라고 단정하는 일은 자신만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와 오만이 빚
어내는 것이다. 자신의 시각을 상대화하지 못하는 데서 오만은 시작된다. 그런데 때로 이른
바 '정상'인들이 , 그들이 규정한 '비정상'인들을 지배하고 배척하고 심지어는 제거하는 폭
력을 행사해온 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기도 했다.
  저자의 일본 체험이 "일본여자들, 참 못생겼다."는, 그 나라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말로 시
작된다는 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이 한마디가 나타내주는 저자의 피상적이고 주관적인 시
점이 저자로 하여금 미녀보다는 추녀의 발견에 정력과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었고, 2년 여 
동안 단 한 명의 미녀도 발견하지 못한 채로 결국 "일본은 없다."고 외치게 만든 셈이니까. 
그리고 바로 그 결과가, 일본을 선진국으로 느낀 적이 "한차례도 없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역할을 방기한 뻔뻔스러운 나라", "한심한 나라", "나라가 국민을 조종하고 억압하고 못 살
게 구는 나라"니, 고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없다"는 단정이었다.
  배워야 할 것이 없으니 '우리식'으로 하자는 의식의 종착역은 물론 일본을 따라잡자는 의
식일 터이다. 그런데 도대체 극일이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을 경제적인 것을 염두에 
둘 것이다. 경제와 기술이 발전해서 일본보다 잘 사는 날, 그 날을 이 책도 꿈꾼다.
  그러나 어떤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보다 수치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혹 우위에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 나라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일일까?
  한국은 경제적 발전을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한국인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모든 조사에
서는 대부분의 항목에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경제적으로 '잘'사는 일이 아
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마음 편히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야말로 '잘'사는 일
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라면 단언컨대, 일본이 우리보다는 더 '잘'살고 있다. 물론 그들도 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고 직장인들은 구조조정바람에 떨고 있으며 주택사정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
다. 그러나, 그래도 일요일이면 동네에서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혹은 동네 어른들과 함께 축
구나 야구를 즐기며,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가벼운 운동을 담소와 함께 즐긴다. 돈이 없어도 
도서관에 가서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거나 테이프나 비디오 시디를 빌려 정신을 풍요롭
게 할 수도 있다. 여름이면 동네축제에 참가해 하루쯤 들뜬 기분으로 보낼 수 있으며, 겨울
이면 동네 신사에 들러 한 잔의 감주를 얻어 마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과 합격과 건강을 
기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사회에는 신뢰가 있고, 불신에 따른 스트레스와 갈등이 적다는 바로 
그 점이 현대 일본 사회를 결정적으로 '살기 좋은'사회로 만들고 있다. 물론 가끔씩 끔찍한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미국의 테러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을 나
타내고 한국의 모든 사건이 한국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사건이듯, 각기의 나라가 가진 문제
점이 표출된 사건일 뿐이다. 
  문제점이 있으면 선진국이랄 수 없다면 그 어느 나라가 선진국일 수 있을까. 일본이 '경
제라는 측면을 제외하면 선진국이 아니'라는 말은, 경제적인 풍요가 정치, 문화의 안정과 발
전에 기여하며, 그 안정이야말로 선진국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당연하고도 기초적인 사실
을 모르는 데서 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일본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나라건 '있'는 부분도 '없'는 부분
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 개인이 그런 것처럼 정상이고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점
만 보면서 일본을 '있다'고 말하는 일 역시 일본은 '없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문제는 유독 못 생긴 곳만을 보면서 그것을 상대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일, 즉 자신의 눈
이 나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또 내 눈에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얼굴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 때문에 어쩌다 바른 부분을 보게 되면 그것은 '위
선'이나 '거짓'쯤으로 간주된다. 하긴 일본에 관한 이런 경향은 저자뿐 아니라 적지 않은 한
국인들이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6)목수가 되고 싶은 아이들
  <일본은 없다>에서는 신분이동에 대한 야망이 없는 것도 부정적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건 사회적 시각보다도 자신이 그 일을 좋아하는가 아닌가다(물론 예외는 
있다).
  일본 아이들이 가장 되고 싶어하는 것은 목수다. 99년에 초등학생과 유치원생들을 대상으
로 한 '장래 되고 싶은 직업' 조사 결과는, 남자아이는 목수, 학자, 음식점 주인, 야구선수, 
축구선수, 의사, 경찰관, 우주비행사, 드라이버, 게임 프로그래머, 소방수 등이었고, 여자아이
는 음식점 주인, 간호사, 수의사, 사육담당, 꽃집 주인, 보모, 의사, 가수, 성우, 선생님, 복지
관계 직원 등의 순서였다.
  이전에는 야구선수나 축구선수가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96년까지만 해도 4위에 머물었던 
목수가 99년, 21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 화창하고>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다.
  고교를 졸업한 한 소녀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성들의 영역인 목수에 도전해 꿈을 
이루어낸다는 스토리다(소녀의 외할아버지는 목수의 우두머리였다). 소녀는 타고난 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고전을 거듭하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주위의 몰
이해와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갔고, 그런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드라마였다.
  일본에서도 일본 아이들의 목수 지향은 이 드라마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있었지
만, 다른 직업 역시 이른바 '잘 나가는' 직업은 아니다. 우리는 이른바 전문직이 아니면 돈
이나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을 선호하지만, 인간 사회는 물론 그런 이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문직'의 꿈 아
닌 '전문'적 의식=직업의식이 필수적이고, 그런 의미에서는 소박해 보이는 이 꿈들이야말로 
그들의 저력이 아닐 수 없다. 소방수가 되고 싶어서 되는 아이와 되고 싶은 다른 것이 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소방수가 되는 아이 중 어느 쪽이 더 우수한 소방수가 될 수 있
을까.
  여자아이들의 꿈 역시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소박한 것들이다. 온 사회에 자신의 이익과 
편의보다도 상대방에게 배려하는 음식점 주인과 간호원과 보모와 복지관계 직원들이 존재한
다면, 그 사회는 얼마나 편안할까. 여자아이들이 하고 싶은 음식점이란 아이스크림 집, 빵집, 
케이크 집 등 훈훈한 느낌의 직업이다. 어릴 때부터 빵집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 경영하는 
빵집이란 얼마나 푸근하고 기분 좋으며 맛있는 집일까? 2위는 간호사고, 간호사는 최근 10
년 간 언제나 '베스트5'안에 든 직업이다. 그 동안 가졌을 병원에서의 체험이 아이들에게 긍
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우리는 이미, 꼬마들이 동경할 만한 아름다운 
간호사들이 지금의 일본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노인과 실직자 등 약한 입장의 사람들을 돕는 복지관계 직업이 꼬마들의 동경의 대
상이 되고 있는 일본에서 아직 희망을 본다. 이 앙케이트 결과에서 보이는, 평화 지향적이며 
약한 사람을 돕는 일을 아름다운 직업으로 생각하며 권력 지향적이기보다는 보통사람이기를 
원하는 일본 아이들의 꿈에서 아름답지만은 않은 과거와 현재를 이겨나갈 일본의 저력을 본
다. 물론 앙케이트 결과는 단순히 동화나 드라마의 영향에 의한 이행기적 희망사항일 수도 
있지만, 또 그 중에는 돈과 권력에의 길로 방향 전환할 아이들도 적이 않겠지만, 그래도 어
릴 때의 꿈이나마 소박할 수 있는 일본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본다.
  무엇보다도 일본인의 72퍼센트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조선일보,95.8.22)한다는 사실은, 이
미 현재의 일본인들 대부분이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며 마음 편안하게 살고 있으며, 그들이 
이른바 '애국심'에 의존하지 않아도 자신이 있는 공간을 사랑하는 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국민들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 그것이야말로 일본이 '없
'지는 않은 나라임을 웅변해주고 있다.
  지난 7년 동안 일본의 대외원조예산은 세계에서 가장 많았고, 아시아 경제를 위해서는 다
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8백억 달러를 지원했다[오부치 전 일본 수상의 발언, 조선일
보,99.5.1]. 물론 이런 것조차도 일본에 악감정을 갖는 사람들은 그것은 대외홍보용이라고 말
할 것이다. 그러나 설사 대외홍보용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안 하거나 적게 하는 나라보다 나
은 건 물론이며,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선진국'일 수 있다.
  
  7)일본 성토물과 1990년대의 행복한 만남
  일본은 '비인간적'이며 역사적으로 '불결'하며 '국민을 억압'한 나라로 간주한 결과, <일
본은 없다>가 도달하는 곳은 '내 나라, 국민이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가를 알았다.'는 한국 
칭송이다. 그런 식의 자화자찬에 90년대 전반의 한국인들은 열광했던 것이다. 그건 물론 때
마침 세간에 나돌던 '민족정기' 혹은 '자존심'이라는 단어의 뒷받침 덕분이었고, 그런 의미
에서도 이 책은 세상과 행복한 만남을 이룬 셈이다.
  이제 말하자. 이 책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바로 이런 식의, 타자의 부정이 자신의 긍정으로 
이어지는 데 있었다. 거기에서 이루어진 타자 부정은 대부분이 오해와 왜곡이 빚어낸 것이
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식은 나쁘니 '우리식'으로 하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
이었다. 그러나 자부심이란, 상대방을 부정하면서 얻어지는 상대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되돌
아본 자신의 모습에 대해 긍정할 수 있으면서 얻어져야 할 그 어떤 것이다.
  어쨌거나 일본에 관해 "나라는 부자지만 국민은 가난하다."고 주장한 이 책의 메시지는 
확산되었고, 이후 이 이야기는 한국인들 사이에선 여지껏 진실인 양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1만 달러 벌어 3만 달러 소비하는 한국과 4만 달러 벌어 1만 달러 소비하는 일
본을 두고 한 소리였다.
  이런 식의 무지와 편견과 분노와 질시가 깔린 감정적 '일본 성토'물들이 일본을 모르는 
이들에게 사실처럼 읽혀지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이 한국의 90년대였다. 논리의 모순
이나 왜곡에는 눈감은 채, 사람들은 우리의 국민성을 치켜세우는 국수주의적 발상에 환호했
다. "21세기는 한국의 세기가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는 저자의 말은 한국인의 무의식적 
갈망을 표현한 말이었고, 때마침 타오르던 민족주의 열풍에 결정적으로 불을 붙였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자기도취는 발전보다는 퇴보로 몰아갈 뿐이다. 그리고 우리
는 몇 년 후 위기를 겪었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미래는 '없'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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