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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쇠말뚝'-민족정기를 말살하는 '풍수침략'?

by FraisGout 2020. 8. 23.

  20세기 말 한국에서 한국인들의 반일의식을 드높이는 데 가장 기여한 것은 무엇일까. 아
마도 '쇠말뚝'일 것이다. 어쩌면 생소한 단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쇠말뚝'은 최근까지도 
신문에 가끔씩 등장하는 단어다(농촌마을 단합시킨 일제 쇠말뚝, 한국일보,2000.5.24). 쇠말뚝
을 둘러싼 담론은 실제로는 '진실'임이 증명되지 못한 채로 누구나가 '진실'로 믿어 의심치 
않았고, 급기야는 전 국민적 '운동'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세기말 한국을 말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이다.
  '쇠말뚝' 담론이란 요컨대, 일제가 전국 방방곡곡에 한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쇠말뚝을 
박았다는 설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풍수침략'이라고 불렀는데, 구 조선총독부 건물 역시 그
러한 '풍수침략'의 한 케이스였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물방송에서 보도하는 대로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진실이었을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85년 2월, 한 산악회가 서울 근교의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서 '일
제가 박았다'는 길이 45센티미터, 직경 2센티미터의 '말뚝'을 발견했고 제거에 성공했다. 대
학교수라는 발견자(서경대 서길수 교수)의 신분도 보증서 역학을 했는지 이 '발견'은 화제
를 모았고, 이후 비슷한 쇠말뚝이 있다는 제보가 잇따르면서 쇠말뚝 전설은 대중화되고 일
반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서길수 교수는 등산이 취미여서 산을 오르내리던 
중 이것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마침내는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조직까지 결성해 이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80년대 한국은, '민족'보다는 '민중'문제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이런 움직임에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고, 이 사실이 일
반에게 널리 아려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 90년대에 접어든 이후였다. 
  
  1)'명산 정수리'의 쇠말뚝
  1992년 8월 15일자 서울신문은 (일제의 풍수침략 잔해 제거... 민족정기 살린다-명산 정산 
쇠말뚝 뽑기 10년)이라는 제목으로 '일제가 끊어놓은 우리 명산의 맥을 살리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전국의 산하를 누비며 일제가 우리명산의 정수리에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아내는 작업을 
10년째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되찾는 데 앞장서온 '우리를 생각
하는 모임' 회원들.
  구 회장 등 이 모임의 회원들은 광복 47주년을 맞아 지난 12일부터 일제의 간교한 '풍수
침략' 의 상흔인 속리산 문장대에 올라 정상에 박힌 쇠말뚝의 제거작업을 벌이고 있다.(중
략)
  북한산 등반에 나섰던 회원들이 백운대 정상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정체불명의 쇠말뚝을 
발견하고 이들 쇠말뚝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각종 사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구한 끝에 우
리 겨레의 정기를 차단하기 위해 일제가 설치해놓은 쇠말뚝임을 밝혀내게 됐다.(중략) 
  그 동안 뽑아낸 쇠말뚝 가운데 비교적 잘 보존된 15개는 독립기념관에 기증, 역사교재로 
활용하게 했다.(중략)
  확인한 자료 등을 살펴보면 풍수침략의 유형도 갖가지여서 산 정수리에 쇠말뚝을 박은 것  
말고도 산등성이에 혈을 지나는 구조물을 설치하거나 산봉우리에 쇳물을 녹여 부은 것 등 
간교하다 못해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중략) 서길수 교수는 "앞으로 이 사업을 범국민운동
으로 확산시켜 일제 침략의 잔재를 제거해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강조는 인용자, 이하도 같음)
  이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리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간교한' 일본이 한국의 '민
족정기를 차단'하기 위해 전국의, 보통 산도 아닌 '명산'의, 그것도 '정수리'에 쇠말뚝을 박
았고, 그것은 우리에게 '몸서리가 쳐질 정도'의 끔찍한 '상흔'을 남겼으며, 그 '잔재'를 제거
하는 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려는 사람들이 있다(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이 몇 개의 단어를 나열하는 것만으로 이미 '정상적' 한국인들을 분노케 하기는 충분하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몹쓸 일본놈들 같으니라구... 아마도 이 정도가 대부분의 사람
들이 보인 반응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잘 읽어보면 묘한 기사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우리 명산'이란 어디인가? 산의 '정수리'란 도대체 어디고, 누가 정한 건가? '풍
수침략'이라는 발상은 풍수사상을 믿어야만 가능한 발상인데, 이 기사를 쓴 기자는 풍수사
상을 믿고 있는 건가? '각종 사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구'했다는데 왜 그에 대한 구체적 설
명은 없는가? 무엇보다도, 쇠말뚝을 뽑으면 되살아난다는 '우리 민족의 정기'란 뭔가? '일제 
침략의 잔재를 제거해'야만 높아진다니, 이제까지 우리는 잔재 때문에 '민족적 자긍심'이 낮
았나?...
  괜한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실제로 풍수설을 믿었
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이들이 말하는 풍수설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이 기사를 썼으리라는 
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사실 확인 없이 '사실' 추구야말로 언론이 (그 생명으로 
여기는 것 아니었던가?) 문제의 쇠말뚝을 제보자가 말하는 대로 일제의 행위로 단정할 뿐 
아니라 '몸서리쳐질 정도의' '간교한' 행위라는 식으로 감정이입까지 해 보이고 있는 것이
다.
  앞으로도 말하게 되겠지만, 바로 이런 것이 한국인들의 90년대 식 반일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한 언론의 공통적 자세였다. 사건이 일본에 관한 것일 경우, 사실 확인추적을 하지 않는 
안일한 자세, 무조건적 성토, 심지어는 국민의 감정을 단순히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새로 비난어조를 '만들어'가는 감정적 기사... 위의 기사는 그 전형적인 것이다. 
  93년 9월 13일자 조선일보는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 회원들은 국립공원 속리산 문장대 쇠
말뚝 바위틈에 박혀 있는 쇠말뚝이 일제가 우리 국토의 혈을 끊고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
해 설치한 것이라며 11,12일 이틀 동안 이를 제거하는 작업을 벌였다."고 소개하면서 1.8미
터 간격으로 박혀 있는 지름 2.5센티미터의 쇠말뚝 일곱 개를 뽑았고, 그들이 "이 같은 사실
을 하늘에 알리고 원래의 지기를 회복시키기 위한 속리산 민족혼 대제를 봉행할 계획"이라
고 보도하고 있다. 앞에서는 '차단'이라고 표현되던 것이 여기서는 '말살'이 되고 있다. 의
미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차단'보다는 '말살'쪽이 일제가 악랄함을 강조하는데는 물
론 훨씬 더 효과적이다.
  다음은 95년 2월 17일자 한국일보. 
  <민족정기 되찾자-광복 50년, 통일로 미래로>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기 위한 사업과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돔 일부가 8월 15일 철거되며 이에 앞서 3월 1일에는 이 건물의 철거를 
알리는 고유제가 치러진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차단하기 위해 우리 국토의 혈맥 곳곳에 막아놓은 쇠말뚝을 뽑아내고 
일제에 의해 개악된 지명은 고유지명으로 바꾼다. 정부는 이 같은 민족정기 되찾기운동을 
올해 3.1절 기념행사에 포함시켜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기로 했다.(중략)
  조선 풍수지리서에 의하면 이 쇠말뚝이 박힌 곳은 갈룡음수형(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세)의 명당으로 연구가들은 "일제가 용의 코 해당 지점에 쇠말뚝을 박아 인재가 나는 것
을 막으려 했다."고 보아왔다.
  여기서도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세'와 '명당'과 '용의 코'는 '연구가'들이 말하는 
대로 그럴 듯하게 강조된다. 보통 용도 아닌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것을 막았다니, 읽
는 사람들의 분노는 커지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기사는, 92년 서길수 교수가 희망했던 사항, 즉 '범국민운동'화가 3년 만에 
드디어 현실화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김영삼 정부 때의 강력한 슬로건이
었던 '민족정기 되찾기'가 쇠말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련의 전말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조사한 (필자가 알기로는) 유일한 언론인이었던 <
월간 조선> 김용삼 기자에 따르면, 쇠말뚝 뽑기는 원래 경상북도청이 8.15 기념사업으로 시
작한 것이었고, 도지사와 내무부장관을 통해 대통령에게까지 전해진 것이었다(<월간 조선
>,1995.10).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얼마 후엔 내무부가 '민
족정기 회복운동'의 하나로 지정했고, '쇠말뚝 제거사업'이라 칭해지는, 세상에도 묘한 '운
동'이 정부 주도 하에 시작되게 된다. 물론 신문들은 "민족정기 회복과 민족자존 되찾기 차
원"(조선일보, 1995.7.21)이라는 내무부의 설명을 그대로 전했고, 사람들 역시 대부분 그렇게 
이해했다.
  이후에도 신문의 논조는 "그들의 간교한 책략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통해 총체적, 상징적
으로 드러났던 것이다."라든가 "조선 민족의 정수리에 쇠못을 박음으로써"라는 말들로 우리 
산의 '정수리'에 못을 박은 일본의 '간교'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또한 일본의 간교성에 대
한 강조는 쇠말뚝에 한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보다 앞서 1992년 10월 17일자 조선일보는, 문화재 관리국이 창경궁의 일각
에 있는 장서각 철거를 결정했다는 뉴스를 전하면서도 장서각을 "조선의 기맥을 누르기 위
해, 경복궁의 정전인 명정전 옆의 자경전을 부수고 일본 건축양식인 천수각을 본 따 만들어 
박물관 서고로서 이용해온" 건물이라고 전한다. 또 창경궁에 가로세로 5센티미터 크기의 쇠
말뚝이 1.5미터 간격으로 박혀 있는데, 이곳은 "궁내에서는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는 곳"이라
며 서울시 문화관계자들은 그것을 일제가 '민족혼과 맥을 끊기 위해 박았던 것으로 추정"했
고, 한국풍수지리개발중앙회 회장은 "일제가 북악산에서 창경궁으로 흐르는 맥을 끊기 위해 
길지인 이곳에 쇠말뚝을 박은 것 같다."(중앙일보, 1995.3.25)고 말한다. 풍수관계자들이야 그
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하달 수 있겠지만, 신문도 '문화관계자'도 일본의 흔적들을 별다른 증
거 제시 없이 한국의 '기맥을 누르'는 일본과 연결시키면서 '간교한' 일본의 이미지를 확산
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었던 셈이다.
  2)사실과 사실, 진실과 전설
  이렇게, 9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정체불명의 쇠말뚝이 정말로 일제가 박은 것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배제된 채로 제거 '운동'은 진행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증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은 채로 일제의 쇠말뚝 이야기는 어느샌가 '사실'의 차원을 가볍게 넘어 
누구에게나 자명한 '사실'로 자리잡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앞서의 김용삼 기자의 기사에는 이 '사실'의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야기가 있다.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 회장에 따르면, "처음에 철주를 봤을 때는 무언지 몰
랐고 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미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백운산 산장 할머니의 증언을 얻
었고(필자 주; 열여섯 살 때 일본인이 박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 그래서 이후 3,4회 산에 올
라 철주를 뽑았더니 매스컴이 언급해 화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최초의 쇠말뚝에 대한 증
언은 일본인이 박는 것을 '보았다'는 것일 뿐 '왜' 박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후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은 쇠말뚝 전문가처럼 간주되면서 다른 쇠말뚝에 관
한 제보를 받고 가서 확인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 가보면 최근의 것
이거나 한 경우가 많았다는데, 이런 사실은 웬일인지 세간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물론 그건 
이미 나간 기사와 위배되는 내용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쇠말뚝 뽑기가 어느새 국가적 '
운동'이 되고 공무원들의 '실적'으로까지 간주되는 시점까지 진행되었기 때문이리라. 개중에
는 일제의 쇠말뚝은 아닌 것으로 판정된 것까지도 일제가 박은 것으로 해달라는 부탁을 받
는 사례가 있었다고 김 기자는 전한다. 이런 과정에서 실제 이상으로 그 숫자가 부풀려졌을 
가능성은 물론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은폐된 채로 쇠말뚝 전설은 텔레비전(MBC<일제 36년, 또 하나의 
역사-일제 풍수침략의 실체 규명>등)이라는, 신문보다 영향력이 더 큰 언론매체의 지원까지 
받으며 전 국민적으로 확산, 유포되게 된다.
  신문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런 일들이 어느새 전 국민적 '진실'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쇠말뚝은 일제가 우리나라의 인물 탄생과 정기를 끊기 위하여 산과 강의 맥에 말뚝을 박
은 것이니 만큼,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를 모두 뽑아버려야 한다.(강원 황00, 동아일보, 
97.1.7) 혹은 다음과 같은 단정.
  일본은 한국 침략을 위해 역사, 풍수지리 등을 열심히 연구했다. 침략 후에는 모든 관사를 
명당자리에 지었다. 일제는 '상일 하한'의식 등을 심기 위해 실로 교묘한 수법을 썼다. 일제
는 쇠말뚝을 위치표시용으로 위장했을지 모르나 실제 목적은 정기 말살이었음이 분명하다.
(유왕기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 연구위원, 동아일보, 99.6.7)
  '우리 문제'를 '연구'한다는 이의 발언이지만, 여기에서 말해지는 건 '연구'의 결과라기보
다는 세간에 이미 유포된 '상식'일 뿐이다. 그러나 설령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왕궁 터라고 하는 명당에 총독부를 짓고 조선의 '명산'을 훼손시켰으니, 일본이야말로 언
제까지고 번성했어야 풍수지리설의 원칙에 맞는 것 아닌가? 일본은 총독부 건설 이후 20년 
남짓밖에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땅의 '맥'이나 '지기'가 원래의 주인을 알아
보고 한국인에게만 좋게 작용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제 와서 새삼
스럽게 제거할 필요도 없지 않았나?
  쇠말뚝=민족정기 파괴설은 일제가 조선인의 반항이 두려워 "민족의 지도적 인재가 태어나
지 못하도록 쇠말뚝을 박았다."고도 말하지만, 이런 식의 기맥침략설이 성립되려면 발견자와 
추종자가 풍수설을 믿어야 가능하듯이 행위자(일본)역시 그것을 믿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에서 풍수에 대한 믿음은 일반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풍수 연구가들은 일
본이 한국인들의 풍수신앙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여 사기를 죽이기 위해 한 일이었다고 주장
하지만, 유명한 무라야마 치쥰의 연구서 <조선의 풍수>(민음사,1990)가 쓰여진 것은 1931년
이다. 그런데 백운대에 쇠못이 박힌 것은 1926년으로 밝혀져 있다. 쇠말뚝은 일본이 한국의 
풍수신앙을 숙지하기 전에 박힌 것을 공산이 큰 것이다.  
  설사 일본이 합방 이전부터 한국의 풍수신앙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일본이 
박은 쇠말뚝의 목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속단이다. 설령 일본이 어떤 목적
을 갖고 쇠말뚝을 박았다 해도 그것이 한국의 '기맥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곧바로 단정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김용삼 기자의 기사는, 발견된 쇠말뚝 중에는 해방 이후 다른 목적으로 일본인이 아닌 '
한국인'들이 박은 것도 적지 않았음을 추정케 해준다. 그렇다면, 쇠말뚝에 관해 분명히 했어
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누가' 박았는지와 '왜' 박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서길수 교수가 모았다는 풍수침략의 사례를 보면, 쇠말뚝만 풍수침략의 도구로 간주된 것
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풍수침략사](무크, 친일문제연구 창간호, <일제 잔재 19
가지>,가람기획, 1994)에 따르면, 1985년 3월부터 154건의 사례를 수집했는데 그 중 62건이 
일본인에 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판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어쨌거나 이 글이 정리해놓고 있는 <풍수침략 조사 현황표>의 내용을 보자. 
  우선 많이 보이는 것이 '혈을 찔렀다', '혈을 잘랐다'다. 이는 맥 부분을 끊기 위해 산등
성이를 잘랐다는 뜻이라는데, 방법이 다양하다.
  예를 들면, '뜸을 떴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산에 구멍을 파고 며칠 간 불을 놓는 일'이
라고 한다. 그밖에도 사발을 엎어서 묻었다거나 '쇳물을 부었다', '목을 끊었다', '쇠꼬챙이', 
'길을 냈다', '숯단지', '명태, 명주실을 묻었다', '북어대가리를 묻었다', '북어를 베에 싸서 
묻었다', '쇠문고리', '9구멍에 혈을 찔렀다', '쇠몽둥이', '고개 능선 끊었다', '태실을 캐감', 
'사리탑 받치는 거북이 발가락을 잘랐다' 등등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이 모두에서, '근대'의 얼굴을 하고 한국을 침략한 일본보다는 '전근대'적인 한국 
쪽 무속의 냄새가 나지는 않는가? 일제가 일부러 산에 가서 '사발을 엎어서 묻'거나 '북어
대가리를 묻었'다지만, 이런 식의 주술적 냄새가 나는 행위란 통치자, 그러니까 권력을 가진 
자보다는, 말하자면 내놓고 당당히 적을 해할 수 있는 자보다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이 
남몰래 하는 행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비고'난이다. 여기에는 '한석봉이 공부한 곳'이니 '남이 장군 탄생지
'라는 표현이 보인다. '한석봉'이나 '남이 장군'이라는 고유명은, 물론 그것이 '한국의 위인'
을 해하려는 것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말일 텐데, 일제는 과연 '한석봉이 공부한 
곳'까지 알고 있었을까? 심지어는 땅에서 '피가 나왔다', '피가 3개월이나 흘렀다'(피에 관
한 이야기는 중국인 이여송이 박았다는 곳에 많이 보인다.)느니, '엿 사먹으러 캐러 다녔다', 
'산신에게 혼났다'는 등의 말도 보인다. 이쯤 되면 '진실'이라기보다는 '전설'이라 해야 할 
판이다.
  김용삼 기자가 전하는 마산 무학산의 쇠말뚝 이야기에도, "쇠말뚝을 잘라 엿가위를 만든 
엿장수는 가위를 한 번 치자마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 '전설
'에 불과하다 해야 할 쇠말뚝을 뽑기 위해 KBS는 60만원을 지원했다던가.
  그런데 일본뿐 아니라 중국인도 풍수침략을 했다는 말은 우리에겐 익숙지 않은 이야기다. 
왜 그럴까. 오래 된 일이기 때문에?
  물론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수백 년 전의 임진왜란 때의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
가?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이른바 '사실'이라는 것이 실은 적지 않은 부분이 '선택'되어 유포
되면 그 과정에서 과장('피' 운운하는 것이 그렇다.)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 항상 '선택'되고 각인되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 존재는 중국보다는 '일본'이
었다는 점을 이 조사표는 보여준다. 
  
  3)제국주의의 본질을 놓치는 민족정기 말살론
  역사학자 이이화씨도 '민족정기 말살'론에 대해, "근거가 없는 말"이며 "지도나 해도를 작
성"(<이이화의 역사풍속기행>, 역사비평사, 1999)하기 위한 것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일제가 박았다는 쇠말뚝은 방향 펴시거나 길을 내기 위한 것이었거나 철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일본인들이 철도를 놓으면서 혈을 끊었기 때문에 장수
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지금도 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철길'은 쇠고, 당
시의 한국인들은 땅과 철을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 철도를 놓는 것
을 '혈'을 끊는 것으로 생각한 것은 당시의 한국인들로서는 당연한 이해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로'와 '철도'는 분명 근대화의 이름으로 행해진 한국 '침략'의 전형
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인들의 거부감과 공포감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화'에 맞닥뜨리게 된 한국인들의 혼란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풍수침략'에 대한 공포를 조성하고 만 것이 아닐까. 일본이 조선의 '기맥'을 끊
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장수와 지도자가 나지 않는다는 식의 자학과 패배감은, 풍수가들이 주
장하듯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심은'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쪽의 해석이 '조장'한 것이 아니
었을까.
  풍수가들은 일본이 풍수설을 믿는 한국인의 심성을 이용해 패배의식을 심어주려 했다면서 
그들의 '의도'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신앙'이었다면, 일본은 그것을 야만국의 
'미신'으로서 무시했어야, 이른바 '문명'의 이식에 의해 자신들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당시의 일본의 자세에 더 걸맞지 않을까? 그들의 행위를 무조건 '간교한' 의도를 품은 
'풍수침략'이었다고 비난하는 일은 실제로 제국주의의 본질을 보는 일과 멀어지는 일이다. 
  굵은 쇠못 몇 개가 그 '상흔'을 강조하면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당당한 '역사적 사실'
의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하게 된 데는 다름 아닌 이런 경과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그럴 듯한 해설도 붙어 있다. 
  일제는 무력으로 병합한 후, 식민지 지배를 고수하기 위해 온갖 치졸한 책동까지도 주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제는 영웅적 인물이 명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다고 믿는 민간신앙
에 착안, 계룡산, 북한산 등 전국의 명산의 정상에 보기 흉한 철주를 박아 전통신앙에 입각
한 민족적 희망마저도 말살하려 했다.(오르내림 산악회, 단 인용은 노자키 미쓰히코, <한국
의 풍수사들>,동도원,2000)
  '심지어'라는 부사는 쇠말뚝이 일제의 만행 중에서도 특히 악랄한 행위라고 강조하는 말
이다. 그런데, '오르내림 산악회'가 '기증'했다는 그 쇠말뚝에 대한 해설을, 독립기념관은, 그
리고 학계는 '사실'로서 인정했던 것일까? 그것이 그리 간단치 않았다는 것은, 이 쇠말뚝이 
96년 5월 일찌감치 전시실에서 옮겨져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 사학자도 그것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 백운대에서 "내 눈으로 보
았다."고 그는 말했다. 문제는 쇠말뚝이 박혀 있다는 점 자체보다도 누가 어떤 목적으로 박
았는가일 텐데 말이다.
  이 모임의 주도자가 "우리가 철주를 뽑아냈기 때문에 한국이 더 한층 발전한 건지도 모르
지요."(노자키 미쓰히코, 앞의 책, 212쪽)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은 풍수설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여준다. 혹여 1997년 말의 한국의 위기도 쇠말뚝을 미처 다 뽑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앞서의 <조선의 풍수>에서 무라야마 치쥰은 "조선 문화의 이면적이고 근본적인 현상 중 
하나가 풍수이고 오랫동안 조선 민족신앙의 지위를 지켜왔기 때문에 한반도 어디를 가도 믿
지 않는 다가 없"었다고 쓰고 있다. 독립기념관의 쇠말뚝 '사건'은 그런 상황이 100년 가까
이 지난 현대 한국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임을 웅변하고 있다. 
  하지만 풍수설을 믿는다면, 수 센티미터 지름의 쇠말뚝보다도 산등성이 자체가 파헤쳐져 
끊임없이 아파트로 변하는 상황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중에 '명산'은 없는지, 혹여 
민족정기가 서린 '정수리'를 잘라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에 신경 쓰는 
건축업체가 있다는 말은 물론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 풍수지리설이란 그저 집터와 조상의 묘를 잘 쓰면 자손이 대대로 번성한다는 정
도의 소박한 믿음이었다. 하지만 풍수지리설은 결국 환경론이며 운명 지배론이다. 또 조상 
숭배적으로 보이면서 실은 내 몸의 안녕에 더 관심이 많은 사상으로도 보인다. 물론 환경을 
좋게 하자는 데야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환경이 실제로 인간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
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옭아매는 이
데올로기로 작용한다면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아파트가 전 국민의 주거
양식으로 정착하면서, 또 토장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확산되면서부터는 풍수설은 실제 우리 
생활과는 관계가 거의 없었다. 그렇게 평상시에는 풍수설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지냈던 많
은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그 설을 믿었던 사람들의 말에 따라 일본이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으려 했다는 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결과적으로 그런 풍수설에 근거하여 나라 정책을 결정한 셈이었다(이를 비
판한 사람은<월간 조선>의 김용삼 기자뿐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언론과 우리 모두
가 그에 합세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물론 그렇게 까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일본'
이었기 때문이다.
  
  4)역사 '바로 세우기'와 역사 '새로 만들기'
  99년 봄에 이회창 씨 조상 묘에서 쇠말뚝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그때 풍수가들은, 예전부
터 한국에서는 "자손들을 저주하기 위해 조상 묘 훼손이 자행되어왔다."고 설명(조선일보, 
99.4.1)했는데, 그 때 그들은 이에 덧붙여 "묘 자리의 반경 50미터 이내에 철탑만 지나가도 
집안에 액운이 낀다는 게 풍수지리상의 믿음"이며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한다며 
전국의 명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일제'를 상기시키는 일을 잊지 않았
다.
  충무공 집안의 묘소에서 식칼과 쇠막대가 나왔을 때도 경우는 다르지 않다. 신문은 "이씨 
문중에 대한 원한이나 집안 내부의 불화로 인한 사건"이고 "힘있는 사람의 기운을 빌려 난
치병을 고치거나 퇴치하기 위해"했을 것이라면서도, "일본 극우세력에 의한 소행이 아니냐
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며 "일제가 조선 병탄 이후 우리 명산명소에 쇠막대를 박
은 '전력' 때문"(조선일보, 99.4.21)이라고 일제의 쇠말뚝을 거론할 뿐 아니라 '전력'이라는 
말로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또 거기에 더해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인재가 못 나
오도록 정기를 끊기 위해 명산 대혈에 무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부터 있어 
왔다. 일제는 철길을 놓을 때도 평지 대신 일부러 산허리를 끊어 철길을 놓기도 했다."(위의 
조선일보)며 그 '의도'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고 새 시대가 시작된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도(그것
은 분명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겠다는 대외적 선언이었는데) 한 쪽에서는 여전히 반
일의식을 조장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장'이라 말하는 건, 물론 
터널조차도 '일부러'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행위라도 목적성이 있는 것
으로 해석할 경우 그 행위에 대한 증오의 감정은 더 커지는 법이니까. 그런데 '산허리를 끊'
지 않는 터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아직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여부 자체가 아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항을 온 나라가 나서서 사실화했다는 점,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세기말 한국에서는, 쇠말뚝의 제거를 위해 활약하는 인물을 그린 소설(<혈맥>)까지 쓰여
지면서 쇠말뚝을 둘러싼 '간교한' 일본의 이미지가 확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해방된 지 50년
이나 지난 시기에 새삼스럽게 대두된 '기맥'이니 '민족정기'니 하는 담론은 우리에게 마치 
바로 직전까지 억눌리고 짓밟히기라도 한 것 같은 억압감을 느끼도록 강요했다. 90년대 초
반이란 , 실은 몇 년 전에 올림픽을 치르고 모두가 선진국 진입에 부풀어 있었던, 말하자면 
20세기 이후 최고조로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던 시기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억눌린' '
정기'를 상상하는 일이야말로 분노로 다져진 반일로 연결되는 일이었다.
  "그 작은 철심에 들어있는 악랄한 음모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기록문학회, <
부끄러운 문화 답사기>, 실천문학사, 1997,19쪽)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기말의 한국은 '민족정기'라는 이름의 망령에 씌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전
설과 소문을 '사실'화하여 '사실'이라는 '역사 새로 만들기'에 나서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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