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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한국인의 '필독소설'-김진명의 반일 소설들

by FraisGout 2020. 8. 23.

  1)'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침략성
  나름대로의 노력 끝에 남을 누를 만큼의 지력과 힘을 갖추게 된 아이와, 바깥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 집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만 있다가 미처 힘을 기르지 못한 아이가 있다고 하
자. 그리고 약한 아이를 힘센 아이가 때리고 지배하면서 갖은 방식으로 괴롭혔다고 하자. 이 
때 선악의 구별은 분명하다. 강한 아이가 강하다고 해서 남을 괴롭히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고, 따라서 약한 아이에 대해 동정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약한 
아이가 언제까지고 자신이 왜 당했는가에 대한 의식은 결여된 채로 피해의식만 키우면서 강
한 아이를 비난하고, 나아가 가능하면 힘을 길러 강한 아이가 했던 것처럼 그 아이를 괴롭
혀주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일까.
  눈치 빠른 독자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려 4백만 부
나 팔렸다는 베스트셀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이하'무궁화')의 모티프다. '무궁화'
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핵무기를 소유하게 된 한국이 일본에 핵을 투하한다는 식의 가상결말
만으로 한국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줄 수 있는 책이었고, 반일을 무기로 때마침 높아
가던 민족주의 열기에 불을 붙였다는 점에서는 '일본은 없다'에 못지 않은 역할을 한 책이
었다.
  '무궁화'는 과거의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갚을 것을 꿈꾸고, 또 그것을 당연시한 책이다. 
하지만 '눈에는 눈'식의 이런 결말을 20세기하고도 말엽에 한국인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받
아들였다. 물론 소설상의 설정은 일본의 공격에 대한 반격이라는 구도를 취하고 있지만, 이
는 식민지 시대의 원한이 실린 염원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책은 우리 안의 무의식-침략을 당연시하는 폭력주의/군국주의-을 드러내 보여준 책이었
던 셈이다. 
  90년대 초반, 한국인들은 김진명식의 사고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광함으로써, 
그런 무의식이 실은 저자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실은 한국인들 대다수의 것이었음을 증
명했고, 그런 의미에서 '무궁화' 현상은 20세기 말 한국의 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가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힘과 기회만 있으면 같은 류의 '폭력'을 타자에게 가해도 된다는 무의
식적 폭력긍정론에 누구나가 호응한 셈이니까. 그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90년대 한국의 치
부를 드러낸 일이었다. 
  '무궁화'가 독자들을 향해 발신한 것은 약소국가로서 강대국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핵을 
소유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인도나 파키스탄의 핵실험에 대해 전 세계가 항의했듯
이, 그런 사고가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런 생각을 
두고 약소국에게만 핵을 허용하지 않는 강대국의 '음모'쯤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
만,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무기 소유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핵 소
유의 길로 치닫는다면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지구의 평화적 분위기는 곧바로 깨질 것이 분
명하다.
  비핵화선언이란 불충분하나마 평화에의 염원을 담고 있는, 글자 그대로 '위험'에 몸을 노
출시키며 행하는 하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김진명의 비핵화선언 비판은 '평화'의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실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침략이 나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당위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게 만든 것 무
엇이었을까. 그건 바로(침략의)정당성이다. 그리고 정당성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상대편에 대
한 증오와 함께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기방어 차원일 뿐이라는 합리화가 필요하다. '무궁화
'의 인기는 바로 이 두 가지를 완벽히 갖춘 데 있었다. 
  
  2)조작된 분노
  하지만 '무궁화'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판한 바 있으니, 여기서는 몇 년 후
인 1998년 초에 나온 책 '하늘이여 땅이여'(이하'하늘')를 보도록 하자. '하늘'은 '무궁
화'만큼 압도적인 베스트셀러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몇 달 동안은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고, IMF 사태를 맞은 직후의 한국의 고달픈 처지를 절묘하게 이용한 광고를 통해 독자
들의 '감성'에 호소해 성공한 케이스였다. 
  이제 가슴속에 맺혀 있는 분노와 슬픔을 이 소설 하나로 풀어버리십시오. 
  위기에 처한 한국의 금융시장에, 교활하고 악랄한 수단으로 뛰어든 투자 자본가의 거대한 
음모!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최고의 천재들이 벌이는 세계와의 전쟁. 그들의 운명은, 또 
한반도와 일본의 21세기 국운은... 지구상의 단 한 사람, 교황에게만 공개된 파티마 제3예언
의 실체. 중앙청 철거도 드러난 지하의 석주. 그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일본의 간교한 음
모.
  '가슴속에 맺혀 있는 분노와 슬픔'이란 물론 이 책이 출판된 98년 직전의 충격, 그러니까 
1997년 11월 말에 맞게 된 IMF 사태로 야기된 사회정서를 말한다. 아마도 이 문구를 읽으
면 독자들은 마치 우리 모두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던 듯한 착각에 빠지지 않았을까.
  물론,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나름대로 '분노'했을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간파
하지 못하고 과소비로 치달았던 자신들에 대해서, 자신을 해고한 조직체에 대해서, 또는 나
라를 망쳐놓은 정치인, 경제인들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해야 할 대상은 다른 누구보다도 
한국인들 우리 자신이었는데도, 이 광고(소설)는 그 분노의 방향을 교묘하게 돌려놓고 있다. 
우리 자신이 아닌 제3자,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으로 그 분노의 화살이 돌려지도록 만들
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사태가 마치 우리를 해하려 하는 그 누군가의 '교활'하고 '악랄'하
며 '간교'한 '음모'에 의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 문구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광
고 문안은, 우리의 위기는 실은 "교활하고 악랄한" "투자자본가의 거대한 음모"와 "일본의 
간교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실제로 사태 직후에 우리의 위기를 일본의 탓 혹은 미국의 탓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고, 이 광고는 그런 분위기에 호소한 것이기도 했다. 증권회사를 둘러싼 외국 투자가들
의 '암투'에 관한 상상력에 불을 붙이려 하는 이런 식의 경계의식이야말로 당시 환영받던 
것이었으니까. 예를 들면 말레이지아의 마하티르 수상은, 말레이지아에 경제위기가 닥치자, 
자신들에겐 문제가 없었는데 서양의 '음모'때문에 잘 나가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외국 
음모론을 공공연히 펼치곤 했다. 문제를 외국 탓으로 돌리려 하는 김진명의 의식 역시 '위
기'의 원인에 대해 분석은 없이 피해의식만을 조장했다는 점에서 마하티르와 완전히 닮은꼴
이다. 그런데 마하티르에게 돌아온 것은, 외국기술 유입정책을 취해 발전했는데 이젠 그 외
국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는 야유와, 외국자본의 이탈이었다.
  김진명은 실제로 "지금의 위기가 비틀린 역사와 빼앗긴 문화, 서구 자본의 횡포에서 비롯
"(한국경제신문,98.2.12)되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하늘'에서도 위기의 원인이 타자에게 있
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들어 근거불충분한 경계의식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여기서 
김진명이 말하는 '비틀린 역사'란 다름 아닌 일본과의 과거다. 광고에서 보이는 '석주' 운운
은 바로 그 부분에서 이용되어 쓰여지는 대목이다.
  '하늘'은 우리의 '기'를 일본이 합방 초기에 묶어놓았다고 주장하는 풍수학자들의 의견
을 빌려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물론 그건 이미 앞에서 본, 산에 쇠말뚝을 박았다거나 
박물관 자리에 석주를 박았다는 이야기들이다. 김진명이 '석주'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어하
는 것은, 현재의 위기를 타자, 그 중에서도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일본의 '음모'임을 강조
하고 싶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민족정기를 둘러싼 허구성 담론들은, 진실처럼 유포되었던 만
큼 몇 년 후 나타난 소설의 리얼리티를 높이는 데 기여한 셈이다.
  
  3)추악한 일본인/멋진 한국인
  '하늘'이 일본이 '아마테라스오미카미'라는 조상신을 숭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면서, 경
멸과 조소에 가득한 시선으로 일본이 신화 속의 인물을 실제 역사상의 인물인 것처럼 만들
려 한다고 비난한다. 일본에서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역사상의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
은 사실도 아니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단군이라는 신화적 인물을 굳이 역사 속
의 인물로 강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 텐데 말
이다. 
  이런 식의 잘못된 지식과 편협한 애국심은 김진명의 다른 소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인들이 화투를 한국인에게 퍼뜨려 '타락'시켰고 그것은 '무서운 흉계'였다는 
이야기. 이는 쇠말뚝에서처럼 일본과 관여된 부정적인 요소는 모두 일본의 '의도'로 보고 싶
어하는 한국인 전체의 뿌리깊은 피해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화투는 
현대 일본에서는 보통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었고, 한국에서의 화투판은 일본 문
화의 한국식 전파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김진명의 소설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일본을 실제 일본의 
모습인 것처럼 묘사하고 '일본의 야욕'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수사법이 부정적 일본상을 
유포시킬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당연하게도 그의 소설에는 보통사람으로서의 일본인, 생활인으로서의 일본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존재하는 것은 '영악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이며, 독도문제로 일장기를 몸
에 두르고 자결하는 전근대적인 희한한 일본인들이다. 그것은 '독도 회복의 광풍'으로 표현
되지만, '광풍'이라는 표현을 굳이 쓴다면, 그것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까지 만들
어 전  국민에게 유포시켰던 한국 쪽 분위기의 표현에 더 적합하다. 독도문제에 대한 관심 
자체를 보기 힘든 현대 일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한 
나라의 '정신'을 지키는 것으로 자부하거나 간주되는 문인들이 앞장서서 독도를 방문하는 
적극성을 띠었던 것도 일본이 아니라 한국 쪽이었다.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일본의 '독도 침략'을 가상하는 소설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 소설
들은 구성의 차이는 있지만 독도가 '석유자원'을 내장하는 등 경제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상
상과 '일본'이 테러리스트를 동원해 독도를 '침공'한다는 등 일본이 먼저 침략한다는 설정
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이 소설들의 무의식이 김진명의 소설들과 멀지 않은 것임은 물론이다. 
  어쨌거나 '하늘'의 일본인들은 대부분이 악인이거나 신뢰할 수 없는 교활한 사람들이고, 
야비하고 난폭하다. 한 일본인의 괴괴한 살기는 삼류 검객소설에나 나올 법한 모습인데, 이
는 물론 김진명의 의식에 비추어진 관념적 일본인상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실제 일본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일본인인 것이다. 하긴 유일하게 인간
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일본인이 한 사람 있기는 한데, 그는 알고 보면(아니나 다를까)한국인
의 피가 섞인 인물이다. 그런 일본인들에 반해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미모와 천재성을 겸비
한 인물이거나 쾌활하고 남성다움이 넘치는 인물들이다. 그러고 보면, 김진명의 첫번째 소설 
'무궁화'의 주인공 이휘소도 천재적인 인물이었던가.
  
  4)총독부 철거 3년 후의 '정신문화'의 실종
  김진명은 "경제위기를 비롯한 민족적 시련은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가 파괴된 데서 비롯"
되었고 "문화의 힘이 약한 민족은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힘이 왜 약해
졌는지에 대한 반성이 이번 소설의 출발"이었는데, 그가 찾아낸 결론은 "고유의 정신문화가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를 외면하
고 정신세계를 망각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한 민족의 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어져오고 
있으며, 모두가 힘겨워하는 시기에 우리를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고도 말한다. 
  그것이 어떤 위기건, 위기라는 것이 종래의 '힘'의 쇠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 힘이 약해졌다."는 김진명의 진단 자체에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 물론 '약해졌다'는 말은 이전에는 강했다는 전제가 필요하고, '강한 한국' 상이란 
실은 적지 않는 부분이 거품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그러나 97년 한국의 위기는 '정신문화의 파괴'나 '전통문화'의 외면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어디까지나 88올림픽 이후의 한국인들 개인과 사회와 국가
의 구조와 의식에 있었다. 그런데도 김진명은 위기를 '전통'이나 '정신문화'파괴와 연결시킨
다. 우리와 비슷한 양상으로 위기에 처했던 일본이나 태국에서, '정신문화'가 파괴되었기 때
문에 자신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리가 나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만약 일본인
들이 '일본혼'이 부족해서 경제위기에 처했다고 떠들었다면 우리는 그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국가에 위기가 닥쳤다고 생각될 때 '정신문화'니 '고유문화'의 실종을 부르짖으며 한탄하
는 것은 실은 김진명이나 한국뿐 아니라 '근대 국가'가 형성된 이래 많은 나라에서 행해져
온 일이다. 그것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공동체(국민)의 힘을 결집하려는 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민족주의의 기원이었다. 김진명
의 '하늘'도 그런 움직임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위기 때 태동되는 민족주의에는 항
상 경계의식에 기반한 배타성이 전제되었고, 김진명의 소설이 배타적인 건 바로 그 때문이
다.
  김진명은 "잘못의 출발점은 문화의 상실", "고유문화의 맥을 잘리운 겨레에게는 타락한 물
질문화에 대한 노예적 종속뿐"이라면서, 구체적으로 '굿'의 소멸을 들어 "정신세계를 망각"
했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정신'의 강조야말로 항상 민족주의에 붙어 다니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세계'의 다른 말인 '민족정기'를 지킨다는 구실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파괴하
기까지의 과정을 앞에서 보았다. 그건 다름 아닌 '정신'='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해 소음과 공
해와 혼잡도 마다 않고 멀쩡한 건물을 천억이라는 엄청난 돈을 들여 파괴한 일이었다. 그런
데 그로부터 불과 3년도 되지 않아 김진명은 '정신문화'가 실종되었다고 말한다. 김진명이 
의미하는 것이 '민족정기'라면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살아 있었는데 말이다. 자신이 '한국인
'임을 의식하는 민족주의적 감성이 강하기로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나라가 현재의 
한국이다. 일본 문화에 빠져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일 10대 청소년들도 반일감정만은 실은 
어느 세대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아니면 죄책감을 느끼고 있거나. 
  설령 그들에게 '정신세계의 망각'이 있었다 한들 '하늘'이 말하는 것처럼 '굿'이나 '무당
'의 상실이 곧 '정신'의 파괴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외래종교인 기독교 때문에 우리의 굿
이나 전통적 샤머니즘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굿이 사라진 것은 
근대화 이후 '종교'적이고 '풍습'적인 면이 사라진 사회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는 '파괴'당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와 함께 '변형'된 것일 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네
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굿이 우리의 일상생활로부터 사라지게 된 것은, 그것의 '효험'에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된 우리의 근대적 의식의 결과일 뿐, 외래종교의 침투 때문은 아니다.
  그가 비판하는 기독교가 오늘날 한국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기
독교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국가를 초월하여 신도들을 얻어 세계 종교화할 수 있었던 이유
는, 그것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하나의 
'이념'으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굿은 분명 우리 문화의 한 모습이지만, 
세계적 종교가 가진 '이념'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는 굿과 기독교를 동일선상에 
놓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교황청을, 기독교만을 유일한 가치로 생각하고 그것의 전파를 위해 수단방
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처럼 묘사해 기독교가 의도적인 문화 '침범'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왜곡한다.
  실은 모든 문화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침략'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김진명
의 발언에는 그런 인식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의 말에 따른다면 미국의 농구에 열광하고 
햄버거를 먹는 일도 우리의 '정신문화'를 잃는 일이다. 말하자면 그것도 '파괴'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김치를 먹고 한국 춤에 열광한다고 해서, 우리가 미국인들이 그들의 '정
신문화'를 잃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국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즐기는 일
일  뿐이다. 설령 김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정
신문화'(실은 이 정신문화 자체도 실체적인 것은 아니지만)를 잃은 것은 아닌 것처럼, 햄버
거를 먹는 일은 물론 '정신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상이 너무나 범속한 레벨인가? 그렇다면 불교의 좌선을 예로 들어도 좋다. 우리는 서양
인들이 동양의 정신에 심취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태에 대해서는 경계하기 쉽다. 물론 서양의 문명과 문화의 전파란 실제로 제국주
의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러한 사실에 대한 자각은 필요하다. 그
러나, 외국 것을 단지 외국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해야 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정
신문화'의 풍요가 아니라 빈곤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문화에 대한 대응에서 볼 수 있
는 지나친 경계 의식을 김진명은 남의 것 모두에 대해 발동시키고 있지만, 인류문화에는 엄
밀한 의미에서의 '고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도에 따라 더 '고유'하거나 덜 '고유'할 뿐, 
모든 문화는 필연적으로 교류하며 또한 교류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풍요로워지는 법이다.
  물론, 김진명이 강조하는 '정신문화'의 파괴가 혹여 수긍할 만한 반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라면 그 자체에 대해 비판할 필요는 없다. 또 그럴 때의 '정신문화'야말로 배타적 애국심이 
아닌 진정한 '정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그러나 김진명의 주장은 그런 방향을 향하고 있
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5)"한국인의 필독소설"
  그런데 이렇게 배타적인 소설이 독자들을 어떤 식으로 감동시켰는지를 살펴보자.
  "피눈물나는 현실 속에 정신까지 엎드릴 수 없다는 이야기, 가슴이 뭉클했다."
  "고단한 하루 하루를 단번에 통쾌함으로 바꾸어버린 소설."
  "가슴속의 고통과 눈물, 지금 이 소설 하나가 닦아주고 있다."
  "통쾌하다."
  "우리 현실에 눈물이 난다."
  "기운 나게 하는 소설이다."
  "누가 우리의 천기를 끊으려 하는지 알겠다."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하고, 신선한 자극과 깨달음을 준다."
(31세, 교사)
  "아버지께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며 읽어보라고 하셨다. 첫 장을 읽고는 그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18세, 고등학생)
  "이 책이 나오자마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읽었는데,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위치를 재확인
하는 시간이었다."(19세, 고등학생)
  "민족적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20세, 대학생)
  "우리나라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자신을 반성한다."(22세, 군인)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19세, 고등학생)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다."(39세, 주부)
  "요즘처럼 힘든 시기에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일깨워 이 난관을 헤쳐나갈 용
기를 주었다."(23세, 대학생)
  광고에 게재된 독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신뢰한다면, 독자들의 반응이 앞서의 광고가 요구
하던 것과 너무나도 일치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분
노'이며, 보이지 않는 '적'의 확인이며, '한국인'으로서의 자의식이며,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는 '용기'다. 그들은 김진명이 사주하는 대로 '천기'라는 실체불명의 대상의 상실에 대해 '
가슴속의 고통'과 함께 '눈물'을 닦으며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우리 민족의 우수함'에 도
취한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위치를 재확인'하며 '통쾌함'이라는 카타르시스를 얻
는다.
  아마도 바로 이들이, 외국과의 마찰이 있을 때면 화형식과 타국 대사관에 돌을 던지거나 
방화하는 일도 마다 않는(우리의 그런 모습들은 외국인의 눈에는 어떤 '정신'의 발현으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야만행위로 비칠 따름이다.)이들로 크는 것일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언론도 이구동성으로 이 소설을 칭찬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투기자본의 음모와 일본의 민족말살 기도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의 활약상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경향신문)
  "'당신은 진정 한국인으로서 살고 있는가'를 날카롭게 묻는 책이다."(조선일보)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모두가 힘겨워하는 오늘 우리를 일으켜 세울 힘의 근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동아일보)
  "한국 혼과 민족정기를 주제로 한 박진감 넘치는 소설이다."(중앙일보)
  이 역시 광고에 이용된 것이지만, 조작이 없었다고 한다면, 일반 독자들의 감상과 하등 다
를 바 없는 이러한 평가가 대중을 선도한다는 한국 언론의 모습이다. 그들 역시 '음모'와 '
말살 기도'를 확인한 후 실체불명의 '한국 혼'과 '민족정기'에 대한 자각을 새로이 하는데, 
상대가 '일본'이라는 점이 그런 의식을 강고히 하는 데 기여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어쨌거나 언론까지 밀어준 덕분에 '하늘이여 땅이여'라고 하는, 제목부터가 다분히 감상
주의적인 이 소설은 "40만 독자의 애간장을 태우며 전국 서점 연속 베스트 1위를 기록"했고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독자의 가슴조차 쥐어뜯는 단 하나의 소설로 떠"올랐다.
  하지만, '하늘'은 서양의 과학이 동양의 문화를 파괴했다고 비난하면서 정작 한국의 위
기는 컴퓨터-20세기 말의 서양 과학의 대표적 소산으로 보아야 할-가 서양의 '음모'를 물리
친다는 식의 모순을 드러낸다. 일본과 최종적으로 화해하는 결말은 '무궁화'와 다르지만, 
그것은 서양이라고 하는 또 다른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은 것일 뿐 진정한 화
해로 보기 어렵다.
  90년대 후반, 일본과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되면서 21세기에는 일본과 동반자가 되어야 한
다는 담론이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한 예를 들자면, 한 정부산하기관이 모집한 한일엑
스포를 위한 캐치프레이즈 응모작품 중에는 한국과 일본이 손잡고 다음 세기의 주역이 되자

는 내용들이 많았다.
  일단은 90년대 초의 무조건적 반일주의보다는 진전된 것으로 보아야겠지만, 그 근간에 자
리하고 있는 것이 실은 또 다른 패권주의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미국에 이기는 동양'의 환상은, 동양을 삼키는 서양의 소설만큼이나, 어쩌면 그것이 과거
에 대한 복수의 성격을 띨 소지가 있기 때문에 훨씬 위험하다. "통일을 완수할 건강하고 힘
찬 정신은 문화를 회복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데서 얻어질 것"이라는, 김영삼 대통령 말씀 
같은 김진명의 말은 지극히 평화주의적이지만, 그가 말하는 '힘찬 정신'이란 "21세기에는 우
리나라의 '기'가 온 세계에 뻗칠"것이라는 꿈의 표현이다.
  '기'를 뻗치고 싶은 의식은 군국주의적 또는 자본주의적 세계패권의 꿈을 꾼다. '무궁화'
에서 우리는 이미 그의 무의식적 침략주의를 확인한 바 있다. 김진명은 "그 옛날 만주 벌판
을 달리던 웅혼한 민족의 기상"을 그리워하지만, 그가 말하는 '웅혼한 민족의 기상'이란 다
른 민족에 대한 '침략'을 수반한 것이었다. 이는 김진명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약소국가에 오
랫동안 고난을 겪은 불행한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남 몰래 꿈꾸는 한국인 전
체의 무의식이기도 하다. '만주'를 우리가 '잃은' 땅 정도로 생각하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일본의 '식민지 조선'을 둘러싼 망언을 비판할 자격은 없는 
것 아닐까. 
  김진명은 '피'의 동질성을 중요시한 끝에 북한을 미화하기도 하는데('가즈오의 나라'), 
90년대 한국인들은 이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물론 그것은 '피'의 동질성이 한국인에게는 다
른 무엇보다도 우위에 두어져야 할 '가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그런 식의 '동질성' 찾
기야말로 배타적 민족주의의 근원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동질성'의 확인을 위해 김진명은 '기'를 강조한다. "모두가 힘겨워하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보이지 않는 힘-팔만대장경과 북악의 지기와 또 우리에게는 무슨 신
물이 있을까."에서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힘'이 그것이다. 그가 말하는 또 하나의 '신물'이
란 '단군'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어려운 시기'에 대처할 수 있는 것으로서 김진명은 '팔만
대장경'이라거나 '북악의 지기'라거나 '단군'이라고 하는 '과거'의, 혹은 실체불명의 외부적
인 대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대로 그 세 가지를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긍정적 가치를 부여한다
고 하더라도, 다시 말해 그것들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나타내주는 것이고, 우리가 '뿌리 
있는' 민족이며 '기'가 넘치는 천혜의 땅에 살고 있는 선택받은 민족임을 증명해주는 것이
라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그것도 잠재적인 '조건'일 뿐이다. 그런 것
들이 20세기 말의, 즉 현재의 한국의 힘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실제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쨌거나 '기=민족정기'의 상징으로서 등장하는 '토우'는 한국을 해하려는 이들을 멸하는 
정의의 사도다. 보통 소설이라면 그 황당함이 비판의 가치조차 없어 무시되었을 설정이 호
응을 얻은 것은, '고유의 전통문화'니 '민족의 맥'이니 하는 단어가 한국에서 마패와도 같은 
절대적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진명이 신화 속의 인물을 역사상의 인물로 만들기에 진력하는 이유는, 그러한 
시도가 곧 '역사'의 유구함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가 길다는 
사실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문제는 역사의 길이가 아니라, 그 역사가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고 결과적으로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가 아닐까. 21세기 초에도 세
계 최강대국의 자리를 놓지 않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역사가 짧다는 것은 수치인가? 
역사의 길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6)상상력의 해방, 상상력의 빈곤
  90년대, 김진명 이외에도 일본을 공격하는 소설들이 적지 않게 쏟아졌지만 전쟁을 긍정하
는 시각이 문제시된 적은 없다. '대한제국 일본 침략사'라는 책을 쓴 고원정은, 일본이 '까
불어서' 우리가 한 번 혼내준다는 스토리를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소설에서 우리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풀고 싶었다. 한때 우리가 놓쳐버린 우리
의 가능성을 가상의 역사 속에서나마 후련하게 펼쳐 보이고 싶었다.('횃불'광고)
  '우리가 놓쳐버린 가능성'이란 물론 우리가 일본을 침략, 지배한다는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김진명의 소설과 닮은꼴이다. 그러나, 이 말 속에 숨어 있는 폭력적 침략주의야말
로 바로 우리가 과거 몇 십 년 동안 일본의 전유물로 간주하고 비난해왔던 바로 그것이 아
니던가. 이러한 가상소설을 '상상력의 해방'이라 칭송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던 것도 90년
대였다. 힘을 길러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복수-타국의 침략이라는 건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내는 일일뿐이다.
  과거뿐 아니라 미래-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까지 악의적으로 이용하여 선동하려는 움직
임도 있다. 윤선호의 '위험한 동반자'라는 소설의 광고 문고를 보자.
  일본, 세계 청소년축구 결승 진출! 이러다 월드컵도 일본이 독식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서서히 드러나는 일본의 월드컵 단독개최 음모...
  미국의 팍스아메리카나 정책에 당하기만 하던 일본은 드디어 미국에 대한 역공의 기회를 
마련하고 2차대전 후 최악이라는 경제난 탈출을 시도한다. 그들은 일본의 경제회복을 최상
의 가치라 믿고 그를 위해 또 다시 정의로운 사람들을 희생시키려 한다. 그 무서운 음모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저지하려던 정의로운 사람들은 하나 둘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마침내 위험에 빠진 한일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두 나라의 젊은 남녀가 하나로 뭉쳤다. 이
제 그들의 모험과 사랑이 시작된다. 
  궁극적으로는 양국의 남녀가 협력하여 해결한다는 상황인 것 같지만, 여기에는 김진명의 
'무궁화'식의 왜곡된 선동이 있다. 일본이 '미국의 팍스아메리카나 정책에 당하기만'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의 '역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겠지만, 일본이 미국에 '당하기만'하고 
있다는 이해 자체가 사실과는 다르다. 더구나 그들에게 경제회복은 중요한 과제지만, 그것을 
'최상의 가치'로 믿는 것으로 단정하는 일은 '경제적 동물'로서의 일본의 이미지를 강화시
키는 일일뿐이다. 물론 여기서도 일본의 '무서운 음모'는 빠지지 않는다. 
  90년대 이후, 철주니 혈맥이니를 소재로 등장시킨 반일 소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올림픽을 치른 이후 눈에 띄게 강해진 한국인의 민족적 자부심이 배타적 공동체주의로 표출
된 첫 번째 현상이었다. '무궁화'는, 한국인들을 실체 없는 '강한 한국' 환상에 젖게 함으
로써, 이미 내부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는 대신 폭력적 가상게
임을 통한 대리만족감에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한국의 90년대는 말하자면 가상의 일본 공격
을 꿈꾸면서 대리만족을 추구한 시기였던 것이다. 
  만약 일본에서 한국을 침략하는 설정의 소설이 나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소설 
속의 야욕을 '실체'화하는 전 국민적인 항의가 있지는 않았을까.
  전쟁이란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살인이다. 그들의 과거를 비판하면서 우리는 '사과'
를 요구하지만, 기회만 된다면 같은 일을 하고 싶어한 것이 90년대 한국의 무의식이기도 했
다. 한국의 일본 비판이 아직 설득력 있는 비판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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