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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서울대 교수들의 일본 '방정식'

by FraisGout 2020. 8. 23.

  일본에 대한 편견과 왜곡은 삼류 소설가나 언론만의 것은 아니다. 쇠말뚝이나 총독부 건
물을 둘러싼 앞서의 이야기에서 학자들 역시 예외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대한민국 최
고의 지성인들로 간주되는 서울대 교수들조차도 일본에 관한 한 편견과 왜곡의 충동으로부
터 자유롭지 않다.
  총독부 건물이 파괴된 다음해에 출간된 '교수 10인이 풀어본 한국과 일본 방정식'(삼성
경제연구소, 1996)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일본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서울대 교수 10인
이 최초로 제시하는 학제적 연구성과와 전망"을 제시한다며 "문화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대오각성의 시론이 되"는 것과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입장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이웃들과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고 자"하는 것이 취지라고 머리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실제로는 일본의 실상을 제대로 전해준 부분보다는 일반인
들의 일본 인식을 그대로 되풀이하거나 좀 더 '논리적'으로 왜곡한 부분이 훨씬 많다는 점
에서 잘 푼 '방정식'이랄 수는 없는 책이 되고 말았다. 
  
  1)'생리적'으로 침략성이 있는 나라?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
  일본은 외형상으로는 지극히 서구화된 나라로 보이지만 정서적으로는 국수주의 기풍이 강
하고 생리적으로 침략성이 있는 나라이다.(25쪽)
  일본이 국수주의가 강하다고 지적하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제 시대 때 이야기라고 토
를 달았어야 했다. 또 일본이 과거에 타국을 '침략'한 것은 사실이지만, '생리적'으로 침략
성이 있다는 말은 일본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침략'적 기질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말이 다. 그런데 '생리적'으로 침략적인 국민이 있다는 건 맞는 말인가?
  '침략'이나 전쟁이란, 어떤 경우 건 정치적, 경제적 혹은 종교적 '상황'(실은 그 모든 저변
에 '경제'가 작용한다.)이 야기하는 폭력이다. '침략성'이라는 말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
으로 규정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나쁜' 일본인상을 재생산하고 일본인을 언제까지고 경계하

도록 만드는 말이다.
  혹은 다음과 같은 말.
  일본인의 국민성과 정서는 종교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일본 종교는 
철저하게 국수적이고 배타적이다.(중략) 한국 불교나 기독교는 국수 배타성이 없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35쪽)
  국민성과 정서란 '종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국민성이란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풍토 등 수많은 요소가 개입하여 보여주는 어떤 상일 뿐이다. 더구나 일본은 
'종교적'이지도 않다.
  일본 종교는 '철저하게 국수적이고 배타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종교란 기본적으로 '배타적
'
 속성을 갖고 있다. 종교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그 교리들이 예
를 들면 여성 차별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비판 없는 무조건적인 숭상을 계속하는 한 
종교는 언제까지고 '배타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배타적'인 것은 종교 
자체의 문제일 뿐 일본만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국수적이고 배타적'이라는 말을 일본의 
특성으로서 강조하고 싶은 나머지 종교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격인데, 이는 맞는 말이 아니다. 
  일본에 관한 대부분의 글들이 그렇듯이, 그 비판의 귀결점으로서의 한국 미화는 여기서도 
빠지지 않는다. 한국은 '국수 배타성'이 없다지만, 현대의 한국 불교며 기독교가 내부갈등을 
일으켜 외부에까지 추태를 노출하고 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원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 한국인의 '국민성'이 종
교를 국수적이고 배타적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일본인들은 최첨단의 전자기구들을 비롯한 경쟁력 높은 상품을 가지고 전 세계 시장을 압
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 종교, 일본혼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은 상품 제조에 있어 혼을 
매우 강조하는데, 인간의 혼을 넣기 위해 자동 생산라인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키는 경우도 
있다.(36쪽)
  일본 상품이 '종교'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터무니없는 발상이지만, '일본혼'을 강조하는 
이 글은 그들이 상품을 생산할 때 어떤 그들만의 비의적인 의식을 행하고 있는 듯한 기괴한 
인상을 심어놓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혼을 넣기 위해' 생산라인을 축소시키는 일까지 있다
는 말에서 그 효과는 극점에 달한다. 그들이 상품 생산에서까지 뭔가 종교적이고 비의적인 
의식을 행한다는 식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일은 그들의 생산품이 실은 건전한 사고와 기술
에 바탕을 둔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그럼으로써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희한하고도 특수한 종족임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의 상품생산방식이 나름대로의 미학과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리고 바로 그런 점이 '세계시장을 압도'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런 긍
정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것은 아니다. 자동생산공정 중 사람의 체크가 필요한 부분은 있겠
지만, 그런 것을 '인간의 혼' 운운하는 일은 일본을 우리와는 '다른' 기괴한 종족이라는 이
미지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우리에게 항상 일본이 '먼 나라'였던 데는 이런 담론
들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일본에는 음식점을 대물림하여 2백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국수 집이나 추어탕 집이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장인정신은 따지고 보면 조선에서 배워간 것이지만, 그들의 절제된 생활과 
신분상승이 어려웠던 일반 서민들로부터 발현된 자구책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 이후 출판인쇄의 발달로 교육기회가 넓었으며, 배움이 있으면 과거
를 통해 입신출세가 가능한 사회였다. 반면 일본의 서민들은 우리에 비해 교육의 기회가 적
고, 또 배움이 있더라도 과거와 같은 출세의 사다리가 없었다. 일본에서의 출세수단은 칼 솜
씨이지 학문이 아니었다.(36쪽)
  사실 일본인들의 장인정신도 우리나라에서 배워간 것이다. 백제인들이 건너가서 일본 고
대 예술과 기술을 발전시켰고, 왜란 때 잡혀간 수많은 장인들이 도쿠가와 시대의 과학기술
을 발전시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유교 때문에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했
다는 속설은 근거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갖지 못한 인문적 교양과 전인적 사고
력은 우리가 일본을 능가하는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라고 보아야 한다.(37쪽)
  읽어나갈수록 이런 식의 한국의 칭송이 많아지는 것은 일본에 관한 글이니 당연한 것이라 
해야 할까.
  일본의 전통적 대물림이 '신분상승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석되는 것을 곧잘 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상황적 요소일 뿐 전제는 아니다. 한국이 '과거'를 통해 신분상승
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고, 일본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
에 근거한 암묵의 비판이겠지만, 실은 그러한 신분상승이 초래한 폐해도 적지 않다. 사람들
이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라 더 큰 부와 권력이 보장되는 일만 지향할 경우 한 사
회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의 일을 최고의 경
지로 몰아갈 때야말로 그 사회는 건강하면서도 저력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장인
정신'을 칭송할 때는 원래는 '한국'것이었다고 강조하면서(한국은 그 후 어찌되었던가?), 일
본에서 그것이 지속된 것은 "출세의 사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폄하하는 것이 이 글의 
어법이다. 
  "일본의 출세수단은 칼 솜씨이지 학문이 아니었다."는 말도,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
칼의 문화/붓의 문화' 혹은 '문의 문화/무의 문화'로 한국과 일본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사고
에 의한 오류다. 바로 앞에서 '신분상승이 어려웠다'면서 '출세수단은 칼 솜씨"였다면, 서민
들이나 상인들이 갑자기 '칼 솜씨'를 익혀 '출세'했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칼솜씨
'를 익혀 '출세'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단 '사무라이'가 된 연후의 일이다. 
  왜란 때 잡혀간 장인들이 어떻게 에도 시대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는 건지에 대한 설명 
없이 '잘 알려진 사실'로 간주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러면서 돌연 '유교'를 우리한테 '인문
적 교양과 전인적 사고력'을 준 것으로 간주하면서 갑자기 '일본을 능가하는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라고 칭송하는 것도 문제다. 실은 일본에서도 유교는 융성했다. 다만 그들

 종교로서가 아니라 학문으로서 받아들였을 뿐이다. 우리가 교양과는 상관없는 야만적 계
층으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무라이도 그 정신기반은 유교에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오늘날 일본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면서도 "일본
의 장점은 우리의 역사전통 속에 그 뿌리가 있으므로 우리 조상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말
에 숨은 의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일본의 장점까지도 실은 우리 
것이었다고 강조하는 일, 그것은 우월 의식으로 보이지만 실은 열등의식일 뿐이다.
  
  2)농경민족의 평화 사랑, 기마 민족의 웅대한 기상
  '한국, 이런 면에서 일본을 앞선다'는 노골적인 제목의 글은, 한국의 국토환경이 중국이
나 일본보다 뛰어나다고 강조하면서 "우리 국토가 얼마나 좋은가를 알게 된다."(169쪽)고 자
랑한다. "지진, 해일이 없고 사계절이 뚜렷... 자연경관이 좋다."면서 "중국인들이 이동 중 일
본으로 가서 못 살고, 한국에 정착하였을 것"이고, 그러므로 "동아시아인 중 제일 지혜로운 
사람들이 한반도에 정착했을 것"이며 "현재 한국인들은 이들의 후손"(177쪽)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의 의견은 한국인들은 중국인의 후손이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쨌거나 
국토의 아름다움이니 사계절을 강조하는 일이야말로 오래 전부터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고취
시키기 위한 기본수단의 하나였다. 일본에서도 이미 100년도 더 전에 그런 담론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기마 민족은 무엇보다 기동성이 높은 인종이다. 사실 한국인들은 추석이나 설날에는 무려 
국민의 2천6백만명이 이동하는 등 고도의 기동성을 보이기도 한다.(177쪽)
  한국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임을 강조할 땐 농경민족으로, 웅대한 기상을 강조하고 싶
을 땐 기마 민족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곤 한다. 어느 쪽이나 민족주의가 시키는 무의식적 발
상이지만, 이 교수는 명절 때의 귀향까지도 기마 민족의 기동성과 연결시킨다. 귀향이라면 
한여름과 신정 때 우리처럼 고향을 찾는 습관이 있는 일본인도 기마 민족 이어서일까.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
  일본말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은 한글의 우수성을 당장 깨달을 수 있다. 일본사람들은 
서울을 '소우르'로, 을지로는 '우루지르'로, 택시는 '타구시'로, 한글은 '한구르'로 , 갈비는 '
가르비'로 표시한다. 김치도 '기므치'로밖에 표시하지 못한다.(181쪽)
  이 역시 일본어를 한국어보다 비하하고 싶은 발상이 만들어낸 예전부터의 속설인데, 이와 
똑같은 얘기는 한국어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어를 어떤 소리 건 표현할 수 있
는 훌륭한 언어라고 배웠지만, 과연 그럴까. 많은 소리의 표기가 가능하다는 것과 다른 나라
의 특정 발음을 그 글자로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영어 건 일본어 건 
한국어로 써놓고 외국인에게 들려줘 보라. 우리가 아무리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해도 그들은 
우리의 기대만큼 알아듣고 이해해주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음운체계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생각일 뿐이
다. 일본어는 한국어 발음을 표기하기에 부적절한 언어일 뿐, 그것이 곧 언어의 수준을 나타
내는 것은 아니다. 설령 받침이 없는 것이 다른 나라의 말을 발음하는 데 불리하다 하더라
도 받침(자음)없이 모음자로 끝나는 그들의 언어의 특성은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쉽고 기억
하기 쉽다는 장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고유명사의 예를 든다면, 현대보다 도요타, 박춘식
보다는 히라노 다카노리를 서양인들은 더 정확히 발음하고 잘 기억한다. 한국 직장인들이 
최근 기억하기 어려운 한국이름 대신 영어이름을 하나씩 만들어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그런 
면세서 시사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쪽 언어가 더 우월하다는 식의 발상 자체가, 전라도 사투리보다 경상도 사투
리가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를까. 
  이번엔 '한반도의 경쟁력'이라는 글을 보자. "우리 국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쓰여졌다."는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음과 같은 말들로 점철되어 있다.
  한반도는 비단에 수를 놓은 듯이 참으로 풍광이 곱고...
  물은 얼마나 좋고 풍족한가... 한국인의 삶에서 물을 빼놓고는 되는 일이 없다.(중략)물을 
넣고 끓여 만드는 '찌개'라는 음식도 다른 나라에서 보고들은 적이 없다.
  사계절의 변화는 우리네 한국인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철에 따라 색깔과 질감까지 자연의 변화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샌들과 
하이힐, 부츠를 제 철에 맞게 갖추어 신어야 대접을 받는다. 한국인들이 옷을 철마다 바꾸어 
입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생활이다. 한국인들이 옷매무새에 까다롭고 그 색감과 조화에 뛰
어난 감각을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막 현장에서 일하다가 시베리아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은 한국의 근로자밖에 없다.
  한반도는 이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폭넓은 가능성을 지닌 땅이다.
  이쯤 되면 당혹감을 넘어 황당해지지 않을 수 없다. '풍광'이 고운 나라가 우리뿐인가? '
물'을 사용한 음식, 곧 국이나 스프류를 먹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있는가? '사계절'은 우리
만의 것인가? 설혹 사계절이 없더라도 옷을 기온에 따라 바꿔 입지 않는 나라가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특성은 일본에도 해당된다는 데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있다.
  물론 또 한편으로는 한국은 "나라의 수준에 비해 개인의 생활수준이 너무 높다."고 적절
한 지적을 한 학자도 있고, "더 중요한 과제는 일본과 더불어 사는 일이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일본에 대한 정상적 인식을 방해하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볼 수 있는 
것, 또는 보아야 마땅한 것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보되 왜곡된 시각이나 굴절
된 시각이 인식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다."며 '편견이나 좁은 시각'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
고 "우리가 참으로 성숙 하다면 간과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어떤 사실들을 확대
하고 과장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78쪽)고 말하는 신뢰할 만한 학자도 있다.
  그러나 '왜곡된 시각'이나 '굴절된 시각'이 '정상적 인식을 방해"하고 우리의 미'성숙'이 
일본 인식을 '확대하고 과장하는 경향'을 키우고 있음을 우리는 바로 이 글과 이웃한 글들
에서 볼 수 있으니 서글픈 일이다. 이 역시 90년대라는 시대가 낳은 한계라 해야 할까.
  90년대 초반, 서울대는 '학문적 언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어를 제2외국어 선택에서 제
외한 적이 있다. 서울대는 교양강좌에서도 일본어를 배제하면서 일본 쪽의 한국에 대한 무
관심을 들곤 했지만, 실은 일찍부터 동경대와 와세다, 게이오 등 일본의 주요 대학들에는 일
찍부터 한국어강좌가 개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총체적인 모습에 눈감고 귀막
으며 지내는 동안 그 한국어를 바탕으로 한 우수한 한국 전문가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언어는 '타자'에게 다가가는 소중하고도 중요한 수단이다. 서울대의 일본어 배척은 그들이 
일본이라는 타자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음을 만천하에 대외적으로 공개한 일이었다. 
하다 못해 그들은 언어와 문화에 대해 아는 일이 그들이 갈망하는 '극일'을 위한 일본 전문
인력 양성의 첫걸음일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2000년을 맞아 동경대와 협약을 맺으며 서울대는 조금은 변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동경
대보다 앞선 일문과 설치는 '굴욕'(조선일보,2000.6.29)이라고만 생각하는 그들의 '자존심'이
란 실은 자신감을 상실한 자존심일 뿐이다. '민족을 대표하는 국립대'라는 자부심으로 뭉친 
서울대가 더 유연해지는 날, 아마도 그 날이야말로 그들과 함께 우리 모두가 일본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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