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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5/문명의 충돌

6. 세계 정치의 문화적 재편

by FraisGout 2020. 7. 26.

  집단성의 모색: 동질성의 정치학 세계
  정치는 근대화의 자극을 받으면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국가끼리 
뭉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념과 강대국을 중심으로 정의되던 제휴 관계가 문화와 문명으로 정의되는 제휴 
관계로 바뀌고 있다. 정치적 경계선이 문화적 경계선 곧 민족적, 종교적, 문명적 경계선과 일치해 가는 추세에 
있다. 냉전 시대의 블록을 대신하여 문화적 결속이 등장하였으며 문명과 문명의 단층선이 세계 정치에서 주요 
분쟁선으로 변모하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한 국가가 다른 많은 나라들처럼 비동맹 노선을 고수할 수 있었으며 또 일부 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동맹 관계를 바꿀 수도 있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들은 자국의 안보 상황에 대한 
독자적 판단, 세력 균형에 대한 자기 나름의 계산, 이념적 선호를 바탕으로 관계 변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서는 문화적 동질성이 한 나라의 우방과 적국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냉전 구조에 
편입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국가가 문화 정체성없이 존재할 수는 없게 되었다. 너는 어느 편인가? 라는 
물음은 너는 누구인가? 라는 훨씬 근원적인 물음으로 바뀌었다. 모든 나라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답변, 곧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세계 정치에서 그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 그 나라의 친구와 적수를 
규정한다.
  1990년대에 들어와 정체성의 위기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폭발하였다. "우리는 누구인가?"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우리가 아닌 쪽은 누구인가?" 하고 묻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이런 물음들은 옛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처럼 새로운 민족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l990년대 
중반 현재 국가의 정체성이 활발히 논의되는 지역은 알제리. 캐나다. 중국. 독일. 영국. 인도. 이란. 일본. 멕시코. 
모로코. 러시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리아. 튀니지. 터키. 우크 라이나 미국 등이다. 물론 정체성의 문제는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상당 규모의 인구 집단들을 거느린 분열 국가에서 특히 강하게 표출된다.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주로 의지하는 것은 혈연. 믿음. 신앙. 가족이다. 사람들은 비슷한 
조상. 종교. 언어. 가치관. 제도를 가진 사람들과 뭉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거리를 둔다. 냉전 시대에 
유럽의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은 문화적으로는 서구의 일원이면서도 서구와는 거리를 두고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화적 동질성을 가진 유럽 공동체에 참여하였다. 과거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들어갔던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같은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EU와 NATO 가입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발트 제국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럽 열강들은 EU 안에 이슬람 국가인 터키가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들은 또한 유럽 대륙 안에 또 하나의 이슬람 국가인 
보스니아가 등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북쪽에서는 소련의 몰락과 함께 발트 공화국들 사이에서 또 
이들과 스웨덴, 핀란드 사이에서 새로운(그러나 오랜 역사를 가진) 동맹 형태가 출현하고 있다. 스웨덴 총리는 
발트 공화국들이 스웨덴의 "가까운 이웃"이며 러시아가 이들 국가를 침공할 경우 스웨덴은 중립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점을 러시아측에게 분명히 못 박았다.
  이와 비슷한 형세 변화가 발칸지역에서도 나타난다. 냉전 시대만 하더라도 그리스와 터키는 함께 NATO에,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같은 바르샤바조약 기구에 소속된 동맹국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 노선을 
고수하였으며 알바니아는 한때 중국과 유대 관계를 맺었던 고립 국가였다. 이제 이러한 냉전 구도는 이슬람과 
정교에 뿌리를 둔 문명 구도로 바뀌고 있다. 발칸 지도자들은 그리스-세르비아-불가리아의 정교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스 수상은 이떻게 단언한다 "발칸 전쟁은...... 정교의 끈이 갖는 호소력을 
수면으로 끌어올렸다....... 그것은 유대다. 그 동안 잠복되었다가 발칸 지역의 사태 전개와 함께 구체적 실체로 
드러나고 있다. 변화 무쌍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정체성과 안전을 찾는다. 사람들은 미지의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뿌리와 연줄을 찾아 나선다." 이러한 견해는 세르비아의 한 주요 야당 지도자의 발언과 일맥 상통한다. 
현재의 남동부 유럽 정세로 보아 이슬람의 잠식을 저지하기 위하여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를 포함하는 
새로운 발칸 정교국 동맹이 조만간 결성될 필요가 있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같은 정교국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는 
카톨릭 국가인 헝가리와의 관계에서 안고 있는 공통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긴밀한 공조를 펴고 있다. 소련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그리스와 터키의 '부자연스러운' 동맹은 사실상 의미를 잃었다. 이 두나라는 에게해,키프로스, 
군사적 균형, NAT0와 EU에서의 역할, 미국과의 관계를 놓고 사사건건 층돌하고 있다. 발칸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하는 터키는 보스니아를 지원한다.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러시아는 정교 
세르비아를, 독일은 카톨릭 크로아티아를, 이슬람 국가들은 보스니아 정부를 합심해서 지원한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 알바니아 이슬람 교도와 싸운다. 전체적으로 보아 발칸 지역은 종교적 
경계선을 따라 다시금 발칸화 되었다. '두 개의 축이 등장한다.' 고 글레니(Misha Glenny)는 지적한다. 하나는 
동방 정교의 의상을 입었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 복장을 하고 있다. 베오그라드-아테네 축과 알바니아-터키 축 
사이의 주도권을 들러싼 분쟁이 가열될 가능성이 상존 한다."
  정교를 믿는 옛 소련의 벨로루시. 몰도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쪽으로 접근한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싸움을 벌이고, 러시아와 터키는 분쟁 당사국들을 지원하면서 서로를 견제한다. 러시아군은 타지키스탄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체첸의 이슬람 민족주의자들과 싸운다. 반면 터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신생국들과의 
관계를 다지고자 막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캐슈미르를 놓고 반목을 벌이며 인도 내에서도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힌두 원리주의 세력 사이에서 새로 운 갈등이 싹 트고 있다.
  여섯 개의 상이한 문명이 발생한 동아시아에서는 군비 확산 경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영토의 분쟁이 전면에 
표출되기도 하였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점차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본토에 
접근하고 있으며 본토 의존도도 커지는 추세이다. 한국과 북한은 더디기는 하지만 통일의 길로 전진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한편으로 이슬람과,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과 크리스트교 사이에 긴장이 증대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것이 폭력으로 분출되기도 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경제적 결속체 메르코수르(남미 공동 시장), 안데스 조약. 삼각 조약(멕시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중미 공동 시장-가 새로 나타나, 경제 통합이 문화적 동질성에 바탕을 두었을 때 더욱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는 EU의 교훈을 다시금 입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과 캐나다는 NAFTA(북미 
자유무역 지대) 안에 멕시코를 끌어들이고자 노력 중이다. 장기적으로 이 과정이 성공할 수 있느냐는 멕시코가 
스스로를 라틴아메리카 문화에서 북미 문화로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냉전 질서가 무너지면서, 세계 각국은 새로운 대립과 제휴를 진전시키거나 해묵은 대립과 제휴를 소생시키고 
있다. 집단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비슷한 문화, 동일한 문명을 가진 나라와의 관계에서 그러한 집단성을 발견한다. 
정치인들이 민족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더 큰' 문화적 공동체를 부추기면 대중들은 거기서 일체감을 맛본다. 
그래서 나오는 구호가 '대세르비아', '대터키', '대헝가리', '대크로아티아', '대아제르바이잔, '대러시아', 
패알바니아', '대이란', '대우즈베키스탄' 이다.
  정치와 경제의 지형도는 문화와 문명의 지형도와 늘 일치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세력 균형을 고려하게 
되면 때로는 프란츠 1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 오즈만과 손을 잡듯이 문명의 울타리를 넘어선 연합이 가능 
하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한 시대에 어떤 국가들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형성한 결합의 형태는 다음 시대까지 
지속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점점 느슨해지고 의미를 잃어가게 마련이며 새로운 시대의 목표에 맞게 
수정되곤 한다. 그리스와 터키는 앞으로도 NAT0 회원국으로 분명히 남겠지만 NATO의 여타 회원국들과 이들의 
관계는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일본. 한국의 관계, 미국과 이스라엘의 사실상의 동맹 관계, 미국과 
파키스탄의 안보 관계도 변화를 겪을 것이다. ASEAN 같은 다문명 국제 기구는 자신의 정합성을 유지하는 데 
점차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냉전 시대에 상이한 강대국들의 동반자였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제 자신의 국가 
이익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문화적 정치 지형도의 현실을 반영하는 새로운 결속을 추구한다. 소련의 영향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서구가 제공한 지원에 의존하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점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도력과 원조를 
바라고 있다.
  문화적 동질성이 사람들의 결속과 응집을 낳고 문화적 이질성이 반목과 갈등을 낳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모든 사람은 친척. 직업. 문화. 제도. 영토. 교육. 당파 이념 등의 다양한 차원에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협력하는 복수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한 차원의 정체성은 상이한 차원의 정체성들과 층돌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1914년 독일 노동자들은 국제 프롤레다리아에 대한 계급 정체성과 독일 민족과 독일 
제국에 대한 민족 정체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현재 세계에서 문화적 정체성은 다른 차원의 정체성들에 
비해 그 중요성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다.
  정체성은 대체로 얼굴과 얼굴을 직접 마주 대하는 수준에서 가장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정체성이 넓은 의미의 정체성과 반드시 갈등을 빚는 것은 아니다. 군 장교는 자신의 증대, 연대, 사단에 대한 
제도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개인은 자신의 씨족, 민족 집단, 국적, 종교, 문명에 대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낮은 수준에서 문화적 정체성이 부각되면 늦은 수준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버크는 이렇게 지적한다. '하위의 파당성이 전체에 대한 애정을 절멸시키지는 않는다....... 하부 단위에 애착을 
느낀다는 것.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작은 소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국민 정서의 제1원칙(말하자면 근간)을 
이룬다.' 문화가 중요성을 갖는 세계에서 소대는 종족, 중대는 민족, 군 전체는 문명에 해당한다. 전 세계적으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사람들이 재편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은 문화 집단들 사이의 갈등이 점차 
중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은 가장 광범위한 문화적 실체이다. 따라서 상이한 문명에서 유래한 집단간의 
갈등은 세계 정치에서 점점 중요한 뜻을 갖는다.
  둘째, 3장과 4장에서 살펴 보았듯이 점차로 문화 정체성이 부각되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혼란과 소외의 
한복판에서 더욱 의미있는 정체성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비서구 사회의 실력과 힘이 
증대함에 따라 토착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는. 사회적, 경제적 근대화의 결과이다. 세계의 
주요한 종교에서 천리주의 운동이 동시 다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사태 전개의 뚜렷한 조짐이다. 그러나 
'신의 설욕'은 원리주의 운동 집단에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셋째,정체성은 어떤 차원에서건 개인적, 부족적, 인종적, 문명적- '타자', 곧 다른 개인, 부족, 인종, 문명과의 
관련성 속에서 정의된다. 과거의 역사를 보아도 동일한 문명 안에 들어가 있는 국가들이나 그 밖의 정치적 
실체들 사이의 관계는 상이한 문명에 속한 국가들이나 정치적 실체들 사이의 관계와는 달랐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규정하는 원칙과 우리와 같지 않은 '야만인'들에 대한 태도를 규정하는 원칙은 같지 
않았다. 크리스트교 국가들끼리 서로 교섭하는 원칙과 터키라든가 그 밖의 '이교도들'을 다루는 원칙은 달랐다. 
이슬람 교도들은 '다르 알 이슬람 과 '다르 알 하르브 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행동하였다. 중국인은 해외 화교와 
비중국계 외국인을 다르게 대우하였다. 문명화된 '우리' 와 문명 외곽의 '그들'은 인류 역사에서 늘 나타나는 
변수이다.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에서 유래한다
  1.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우월감(때로는 열등감)
  2. 그런 사람들에 대한 신뢰감의 결여나 두려움
  3. 언어라든가 예의 바른 행동에 대한 기준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의사 소통의 어려움
  4. 다른 사람들의 전제, 동기, 사회적 관계, 사회적 관습에서 느끼는 생소함 
  교통과 통신이 발전하면서 상이한 문명에 속한 사람들 사이의 교섭 또한 더욱 심층적이고 포괄적이며 균형 
잡힌 방식으로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문명적 정체성이 점차로 부각된다. 프랑스인, 독일인, 
벨기에인, 네덜란드인은 점점 스스로를 유럽인으로 생각한다. 중동의 이슬랍 교도는 보스니아인과 쎄첸인을 
지원해야 한다는 공동의 사명감을 느낀다. 동아시아 지역에 흩어진 중국인은 중국 본토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노력한다. 러시아인은 세르비아를 비롯한 정교권의 민족들을 지원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광범위한 수준의 문명적 
정체성을 통해 문명간의 차이와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내용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잘 알 수 있다.
  넷째, 상이한 문명 배경을 가진 국가나 집단 사이의 갈등 원인은 인간 집단 사이에서 갈등을 낳아 왔던 
원인들과 대체로 유사하다. 인구, 영토, 부, 자원, 상대적 권력을 장악하여, 다른 집단이 자기 집단에 가하는 수준 
보다 자신의 가치관, 문화 제도를 다른 집단에 조금이라도 더 이식하려고 애쓰는 데서 야기되는 싸움이다. 
그러나 문화 집단 사이의 갈등은 문화적 사안을 담고 있다. 가령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세속 
이념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해소되지는 않더라도 논의는 할 수 있다.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의견 대립은 절충이 
가능하며 원만히 타협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문화적 사안은 그렇지 않다. 아요드햐에 신전을 지어야 
하느냐, 모스크를 지어야 하느냐를 놓고 힌두 교도와 이슬람 교도가 벌이는 갈등은 그곳에 두 건물을 다 
짓는다고 해서, 혹은 아예 어떤 건물도 짓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모스크와 신전을 절충한 형태의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코소보 지역을 둘러싼 알바니아 이슬람 교도와 세르비아계 
정교도의 대립, 예루살렘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아랍의 대립같은 영토 주권의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기 어렵다. 이 
지역들이 양 진영 모두에게 깊은 역사적, 문화적,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틀에 한 
번 여학생들에게 이슬람 의상을 입고 등교할 수 있게 하는 절충안은 프랑스 당국도 이슬람 교도 학부모들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을 공산이 크다. 이러한 문화적 사안들은 전부 아니면 전무, 다시 말하여 제로섬 선택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분쟁의 보편성이다. 증오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행동 
욕구를 느끼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하다. 사업 분야의 경쟁자, 성취도를 놓고 다투는 라이벌, 정치적 앙숙이 
필요하다. 자기와는 다르고 자기를 해칠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사람들은 대체로 불신하며 거기서 
위협을 느낀다. 하나의 분쟁이 해소되고 하나의 적수가 사라지면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압력이 작용하여 새로운 
적수를 만들어 낸다. 마즈루이(Ali Mazrui)는  '우리' 와 '그들' 이라는 대립 구도는 정치 영역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양상이다.' 고 지적하였다. 현대 세계에서 그들'은 다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점점 사용되고 있다. 냉전의 종식은 분쟁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 문화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체성,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는 문명을 형성하게 될 상이한 문화에서 유래한 집단들 사이의 새로운 갈등 양상을 낳았다. 
아울러 공통의 문화는 그 문화를 공유하는 국가나 집단 사이의 협조를 낳는다. 이것은 특히 경제 부문에서 
국가들 사이의 지역 연합이 출현하는 현상에서 확인된다.
  문화,경제의 협력
  1990년대 초반에 세계 정치의 지역주의와 지역화에 대한 언급이 늘고 있다. 지역 분쟁이 세계 안보의 중요한 
사안으로 전면에 등장하는 사례 또한 늘고 있다. 러시아, 중국, 미국 같은 주요 강대국은 물론 스웨덴, 터키 같은 
중진 국가들도 자신의 안보 이익을 지역적 용어로 노골화하고 있다. 지역 내부의 무역은 지역과 지역 사이의 
무역보다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인, 북미인, 동아시아인의 지역 경제 블록의 대두를 점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지역주의'라는 용어는 현실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 지역은 지리적 실체이지 정치적 또는 문화적 
실체가 아니다. 발칸과 중동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지역은 문명 내적, 문명 외적 갈등으로 갈갈이 찢길 
수 있다. 지역은 지리와 문화가 일치하는 경우에만 국가들 사이의 협조를 낳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문화적 
이질성이 크면 지리적 근접성은 동질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갈등을 증폭시킨다. 군사 동맹과 
경제 협력은 회원국 사이의 협조를 요구하는데, 이 협조는 상호 신뢰에 기초하며, 신뢰는 다시 공통의 가치관과 
문화로부터 가장 쉽게 얻어진다. 시대 분위기와 정책 목표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지만 지역 기구의 전체적 
효율성은 회원국의 문명적 다양성에 대체로 반비례한다. 일반적으로 단일 문명 기구가 복수 문명 기구보다 
효과적으로 움직인다. 이 원리는 정치 기구와 안보 기구는 물론 경제 기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NAT0가 성공을 거둔 것은 그것이 공동의 가치관과 철학적 전제를 가진 서유럽 국가들의 중추적 안보 기구로 
출범한 데에 크게 힘입었다. 서유럽 연합(WEU)은 공통된 유럽 문화의 소산이다. 반면 유럽 안보 협력 기구 
(OSCE)는 판이한 가치관과 이해 관계를 지닌 최소한 3개 문명권의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의미 있는 
제도적 동질성을 발전시키고 활동 반경을 넓히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영어가 공용 
어로 사용되는 13개국으로 구성된 단일 문명 성격의 카리브 공동체 (CARICOM)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발전시켰으며 일부 회원국들 사이에서는 더욱 긴밀한 공조 체계를 낳았다. 그러나 카리브 지역에서 
영어권과 스페인어권의 단층선을 더욱 포괄적인 카리브 기구로 연결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마찬가지로 1985년에 결성된 지역 협력을 위한 남아시아 연합은 7개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국가로 구성되어 
있어 거의 유명 무실한 기구가 되었으며 회의 한번 제대로 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문화와 지역주의의 관계는 경제 통합의 영역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국가간의 경제 연합은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자유무역 지대
  2. 관세 연합
  3. 공동시장
  4. 경제 연합 
  EU는 공동 시장과 함께 경제 연합의 수많은 요소들을 받아들여 통합 단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나아갔다. 
비교적 동질성이 강한 메르코수르와 안데스 조약은 1994년 현재 관세 연합을 체결하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복수 
문명으로 이루어진 ASEAN의 경우 자유무역 지대를 향한 첫걸음을 1992년 이제 막 내디뎠을 뿐이다. 다른 복수 
문명 경제 기구는 이보다 훨씬 지지 부진한 상태에 있다. l995년 현재 NAFTA를 제외하고 복수 문명 경제 기구 
중 경제 통합은 고사하고 자유무역 지대 발족에 성공한 사례조차 없다.
  서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지역 기구가 효율적으로 가동하면서 의미 있는 협력 관계가 뿌리 내리는 데 
성공한 것은 문명적 동질성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서유럽인과 라틴아메리카인은 자신들이 공통의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동아시아에는 5개(러시아를 집어넣을 경우 6개)의 문명이 존재한다. 따라서 
동아시아는 공통의 문명에 뿌리 않고서도 의미 있는 지역 기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NATO에 비견할 수 있는 안보 기구나 다자간 군사 
동맹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복수 문명 지역 기구인 ASEAN은 1967년 중화권 1개국, 이슬람권 2개국, 불교권 
1개국, 크리스트교권 1개국에 의해 발족되었다. 당시 이들은 내부의 좌익 혁명 세력과 북베트남과 중국의 잠재적 
위협이라는 공동의 안보 위기를 앞에 두고 뭉쳤다.
  ASEAN은 혼히 효과적인 다문화 국제 기구의 한 예로서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러한 기구의 한계를 
드러내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ASEAN은 군사 동맹이 아니다. 회원국들은 군사적 쌍무 협조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서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군사비가 감축되는 현상과는 대조적으로 ASEAN 각국은 군사 예산을 
경쟁적으로 늘리면서 무력 증강에 힘쓰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만 국한시켜 보더라도 ASEAN은 출범 당시부터 
경제 통합보다는 경제 협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지역주의는 완만한 페이스로 발전하였으며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까지 아직 자유무역 지대 하나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하고 있다. 1978년 ASEAN은 각료급 회담을 
출범시켜 회원국 외무 장관들과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국. 유럽 연합 등 '대화를 위한 동반 
국가'의 외무 장관들이 만날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기본적으로 2자 대화를 위한 포럼의 
성격이 강하였으며 중요한 안보 사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1993년 ASEAN은 더욱 광범위한 토론의 
장으로서 아세안 지역 포럼을 발족시켰으며 여기에는 회원국과 동반 국가 외에도 러시아. 중국. 베트남. 라오스 
파푸아뉴기니가 가담하였다.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이 기구는 집단 대화를 위한 장이었지 집단 행동을 위한 장이 
아니었다. 1994년 7월 첫 회담을 가지면서 회원국들은 지역 안보 문제에 대한 각국 견해의 발표'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중요한 사안은 누락시켰다. 한 관리의 지적대로 그러한 사안이 거론될 경우 관련 참가국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나설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ASEAN과 그 후속 기구들의 활동은 복수 문명 지역 기구에 내재된 
한계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의미 있는 동아시아 지역 기구는 그 기구를 지탱할 만한 동아시아의 문화적 동질성이 층분히 확보될 때만 
무르익을 것이다. 동아시아 사회에도 이 지역을 서구와 구별시키는 공통성이 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이러한 공통성은 EAEC의 출범을 위한 밑바탕을 제공하였다고 주장 한다. 이 기구에는 ASEAN 회원국과 
미얀마. 대만. 홍콩. 한국.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과 일본이 참여한다. 마하티르는 EAEC가 공동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EAEC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다는 이유로 단순한 지리적 그룹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화적 집단이다. 동아시아인은 일본인이건 한국인이건 인도네시아인이건 문화적으로 
어떤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유럽이 자기네끼리 뭉치고 아메리카인이 자기네끼리 뭉치듯이 우리 아시아인은 
아시아인끼리 뭉쳐야 한다.' 마하티르의 한 측근 인사가 밝히듯이 EAEC의 목적은 동질성을 지닌 아시아 
국가들끼리 역내 무역을 증진하는 데 있다.
  따라서 EAEC의 저변에 깔린 전제는 경제는 문화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이 EAEC에서 
배제된 이유는 이들 국가가 문화적으로 아시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EAEC의 성패는 일본과 중국의 참여 
여부에 달려 있다. 마하티르는 일본에게 합류할 것을 역설한다. 일본인은 아시아인이다. 일본인은 
동아시아인이다. 그는 일본인 청중들 앞에서 그렇게 못 박았다. '여러분은 이 엄연한 지리 문화적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여러분은 이곳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지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일본이 
아시아에 소속감을 느껴야 하는지를 놓고 내부적으로 의견 수렴이 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EAEC에 선뜻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만일 일본이 EAEC에 참여할 경우 일본이 EAEC를 주도할 가능성이 
높으며 회원국들이 불안과 우려를 느끼겠고 중국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유럽 연합과 NATFA에 맞서기 
위하여 일본이 아시아를 '엔 블록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일본은 이웃 
국가들과 문화적 공통성이 지극히 적은 외로운 국가이며 l995년 현재 엔 블록이 구축된 듯한 조짐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ASEAN이 굼뜨게 움직이고 엔 블록이 한낱 공상으로만 머물며 일본이 휘청거리고 EAEC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적 상호 의존도는 비약적으로 커졌다. 이러한 무역 규모의 확대는 
동아시아 화교권의 문화적 결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결속은 중국에 기반을 둔 국제 경제의 지속적인 
비공식 통합을 낳으면서 사실상 중국 공동 시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과정은 여러 면에서 과거 유럽의 한자 
동맹에 비견할 만하다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에서도 문화적 동질성은 의미 있는 경제적 통합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냉전의 종식은 새로운 지역 경제 기구를 출범시키거나 과거의 지역 경제 기구를 부활시키는 자극제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성패는 관련국들의 문화적 동질성에 크게 의존한다. 페레스(Shimon Peres)가 l994년에 
내놓은 중동 공동 시장 구상은 당분간 사막의 신기루로 남아 있을 공산이 크다. 한 아랍 관리는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이 참석하는 제도나 개발 은행의 설립 필요성을 못 느낀다.' 고 지적하였다. 1994년 CARICOM을 
아이티와 이 지역의 스페인어권 국가들과 연계시키고자 발족한 카리브 국가 연합은 회원국들의 다양한 성격과 
과거 영국 식민지였던 국가들의 편협성, 그들의 압도적인 미국 지향성을 극복하는 듯한 조짐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문화적으로 좀더 동질적인 기구를 만들려는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 하위 문명의 경계선을 
따라서 나뉘어져 있음에도 불구 하고 파키스탄, 이란,터키는 1977년 자신들이 출범시켰다가 거의 유명 무실해진 
지역 개발 협력체를 다시 부활하면서 경제 협력 기구(ECO)로 명칭을 고쳤다. 그 후 관세 인하를 포함한 후속 
조치가 뒤따랐으며 1992년 ECO 회원국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옛 소련의 6개 이슬람 공화국이 추가로 들어왔다. 
그런가 하면 199l년 옛 소련의 5개 증앙아시아 공화국이 공동시장을 창설하자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하였으며 
1994년에는 가장 큰 두 나라인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이 상품, 서비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고 
양국의 재정, 금융, 관세 정책을 조율하도록 규정한 조약에 서명하였다. 199l년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는 경제 통합 의 정상적 이행 단계를 크게 앞당기기 위해 메르코수르에 동참하였으며 1995년까지는 
부분적인 관세 연합이 출범하였다. 1990년에는 이제까지 지지 부진하던 중미 공동 시장이 자유무역 지대를 
창설하였으며 l994년에는 마찬가지로 활동이 미진하던 안데스 그룹이 관세 연합을 본격 가동하였다. 1992년에는 
비제그라드 국가군(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이 중부 유럽 자유 무역 지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하였고 
1994년에는 그 실현 일정을 앞당기기까지 했다.
  경제 통합은 교역 확대를 낳는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역내 무역은 역외 무역에 비해 증요성이 더해 
갔다. 1980년 유럽 연합의 역내 무역은 이 지역 무역량의 50.6퍼센트를 차지하였지만 1989년에는 그것이 58.9 
퍼센트로 늘어났다. 역내 무역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는 북미와 동아시아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도 메르코수르의 출범과 안데스 조약의 부활과 함께 l990년대 초반 라틴아메리카 역내 무역량이 급격히 
치솟았다. 1990년에서 1993년까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무역량이 3배로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무역량이 
4배로 뛰었다. NAFTA가 출범하면서 미국과 멕시코의 교역량 역시 크게 치솟았다. 동아시아 지역의 역내 
무역량도 역외 무역량보다 빠르게 늘어났지만 자국 시장을 폐쇄하려는 일본의 경향으로 그 팽창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반면 중국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ASEAN, 대만, 홍콩, 한국, 중국)끼리의 무역량은 1970년 이 지역 
무역량의 20퍼센트에서 1992년에는 30퍼센트로 증가하였다. 반면 일본의 역내 무역량은 23퍼센트에서 13퍼센트로 
줄어들었다. 1992년 증국권의 역내 수출량은 이 지역의 미국에 대한 수출량, 일본과 유럽에 대한 수출량을 더한 
값보다도 많았다.
  독특한 사회 구조와 문명을 가진 일본은 동아시아와의 경제적 결속, 미국 및 유럽과의 경제적 이견 조정에 
애를 먹고 있다.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아무리 무역량을 늘리고 투자를 강화한다 하여도 일본은 이들 나라와의 
문화적 차이, 특히 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는 화교 경제 엘리트들의 견제로 NAFTA나 유럽 연합에 견줄 만한 
경제 블록을 일본의 주도로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와의 문화적 차이는 일본과 미국, 
유럽과의 경제적 관계에서 오해와 적대감을 악화시킨다. 경제 통합이 문화적 동질성에 달려 있다면 문화적으로 
고립된 나라 일본의 미래는 경제적으로도 암울하다.
  과거의 경우 국가간의 교역 양태는 동맹에 뒤이어 나타나거나 그와 맥락을 같이하였다. 앞으로의 세계에서 
무역의 양태는 문화가 결정한다. 기업가들은 서로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대와 거래를 한다. 국가들은 서로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비슷한 성향의 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적 결사체에 주권을 양도한다. 경제 협력의 
뿌리는 문화적 동질성에 놓여 있다. 
  문명의구조
  냉전 시대의 국가들은 양대 초강대국과 동맹국, 위성국, 종속국, 중립국, 비동맹국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탈냉전 시대의 국가들은 문명들과 소속국(member state), 핵심국, 고립국(lone state), 단절국(clefr state), 
분열국(torn state) 으로서 관계를 맺는다. 부족이나 민족처럼 문명 또한 정치적 구조를 갖는다. 소속국은 한 
문명에 문화적으로 완전히 동질감을 느끼는 나라다. 아랍-이슬람 문명에 동조하는 이집트와 유럽_서구 문명에 동 
조하는 이탈리아가 좋은 예다. 하나의 문명은 그 문명을 공유하고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물론 다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밑에 거느린다. 대부분의 문명은 그 문명의 소속국들이 
자기 문화의 근원 또는 뿌리로 간주하는 한 군데 이상의 성지를 가지고 있다. 이 장소는 일반적으로 핵심국, 
다시 말해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문화적 중심 국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핵심국의 수와 역할은 문명마다 다르고 시대별로도 다르다. 일본 문명 은 하나로 존재하는 일본 핵심국과 
사실상 일치한다. 중화, 정교, 힌두 문명은 압도적 지배력을 가진 하나의 핵심국, 다수의 소속국, 상이한 문명권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살아가지만 자기 문명의 뿌리를 잃지 않고 있는 사람들(해외 화교, 독립국가연합 
곳곳에 포진한 러시아인,스리랑카의 타밀인)을 거느린다. 역사적으로 서구에는 다수의 핵심국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둘이다. 하나는 미국이고 또 하나는 독일-프랑스다. 영국은 그 중간에서 준중심국으로 떠 있다. 이슬람,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는 핵심국이 없다. 이것은 아프리카와 중동을 분할하였고 정도는 덜하지만 과거 몇 
세기 동안 라틴아메리카를 분할한 바 있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서 부분적으로 그 역사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슬람 세계에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5장에서 논의하였듯이 이슬람 사회와 비이슬람 사회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점이 되고 있다. 라틴아 메리카의 경우는 스페인이 스페인어권, 나아가서는 이베리아 문명의 핵심국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스페인의 지도자들은 과거의 식민지들과 문화적 유대는 계속 유지하면서도 유럽 
문명의 일원으로 남는 길을 의식적으로 선택하였다. 영토, 자원, 인구, 군사력, 경제력 면에서 브라질은 라틴 
아메리카를 주도하는 나라가 될 자격이 있고 가능성도 많다. 그러나 브라질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는 이란과 
이슬람의 관계와 비슷하다. 핵심국으로서의 자격은 층분히 갖추었지만 하위 문명 수준의 차이점(이란은 종교, 
브라질은 언어) 때문에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 
멕시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등이 주도권을 놓고 공조와 경쟁을 동시에 벌이는 복잡한 양상이 벌어진다. 
멕시코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떨어져 나와 북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칠레 등이 그 뒤를 
따르면서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은 한결 복잡해졌다. 장기적으로 라틴아메리카 문명은 하나로 녹아들어 세 갈래를 
가진 서구 문명의 한 변형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하나의 중심국이 그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제약이 많다. 이 지역이 프랑스어권과 영어권으로 
양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코트디부아르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의 핵심국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의 진정한 핵심국은 예나 지금이나 프랑스라는 데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프랑스는 과거의 
식민지들이 독립한 다음에도 그 들과 긴밀한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맺어 왔다. 아프리카의 핵심국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나라는 나이지리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들은 모두 영어권 국가다. 나이지리아는 영토, 
자원, 위치 면에서 핵심국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갖추었지만, 내부 분열, 부패의 만연, 정치 불안정 정부의 억압적 
정책, 경제 난국 때문에 몇몇 예외적 사안을 제외하고는 핵심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타협을 통하여 흑백 인종 차별 구조에서 민주 체제로 평화롭게 이행하였고 막강한 산업 생산력과 풍부한 
자연 자원, 군사력을 가졌으며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앞섰고 흑백 정치인들이 무난히 
국정을 이끌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남부 아프리카, 나아가서는 영어권 아프리카,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전역을 주도해 갈 가능성이 가장 높다.
  고립국은 다른 나라들과의 문화적 동질성이 결여되어 있다. 가령 에티오피아는 이 나라의 국어이며 
에티오피아의 고유 문자로 표기되는 암하라어, 룹트 정교(크리스트 교파의 하나로 5세기 증엽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주도 아래 로마, 콘스탄티노플 교회로부터 분리함: 옮긴이), 제국주의 역사, 인접한 이슬람 국가들과의 
종교적 차이 때문에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아이티의 지도층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의 문화적 유대를 소중히 
여겼지만 이 나라의 국어인 크리올어, 부두교, 봉기한 노예들이 세운 나라라는 특수성, 피로 얼룩진 역사 때문에 
고립국으로 남아 있다. 민츠(Sidney Mintz)도 모든 국가는 특수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아이티는 비길 데 없이 
특이하다.' 고 말했다. 그래서 1994년의 아이티 위기 때만 하더라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이 사태를 
라틴아메리카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으며, 쿠바 난민은 받아들였어도 아이티 난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나마의 
대통령 당선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아이티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로 인정되지 않는다. 아이티인은 다른 언어를 
쓴다. 그들은 상이한 인종적 뿌리, 상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판이하게 다르다."고 말했다. 아이티는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카리브해의 여러 나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한 평론가의 지적에 따르면 아이티는 
아이오와나 몬태나 출신뿐 아니라 그레나다나 자메이카 출신에게도 낯설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이웃' 아이티는 
그야말로 천애고아다.
  가장 중요한 고립국 일본은 일본 문명의 유일한 국가이자 핵심국이다. 일본의 특이한 문화를 공유하는 국가는 
전혀 없으며 일본에서 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극히 소수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그 나라의 
문화에 동화되었다.(가령 일본계 미국인) 일본의 문화가 매우 특수하며 보편화가 가능한 
종교(크리스트교,이슬람교)나 이념(자유주의,공산주의)을 외국에 수출하여 그 나라들과 문화적 연계를 맺을 
가능성 또한 없다는 점에서 일본의 고립감은 한층 깊어진다.
  거의 모든 나라는 성격이 판이한 둘 이상의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집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질적이다. 많은 나라들은 이 집단들의 차이점이나 갈등이 그 나라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분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분열의 깊이는 대체로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 한다. 한 국가 안의 깊은 분열은 
대규모 폭력으로 치닫거나 그 나라의 존립 자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자치나 분리를 지향하는 운동은 
문화의 차이가 지리의 차이와 일치할 때 분출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문화와 지리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민족 
청소나 강제 축출을 통하여 일치를 낳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도 있다.
  동일한 문명에 속하지만 뚜렷한 문화의 차이를 지닌 국가들은 분리를 경험하였거나(체코슬로바키아) 분리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캐나다) 그러나 깊은 분열은 대규모 인구 집단들이 상이한 문명권에 속한 단절국에서 
출현할 가능성이 늦다. 그러한 분열과 여기에 수반하는 갈등은 한 문명권에 속한 다수 집단이 자신의 정치 
체제로 온 나라를 규정하려고 시도하고 자기의 언어, 종교, 상징을 국가 전체에 강요하려고 시도할 때 악화된다.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에서 힌두교도, 신할리즈인, 이슬람 교도가 바로 그런 시도를 하였다.
  문명과 문명 사이의 단층선에 걸터앉은 단절국은 국가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특히 어려움을 겪는다. 
수단에서는 북부의 이슬람 교도와 남부의 크리스트 교도 사이에서 수십 년째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똑같은 
문명적 분열이 나이지리아의 정치를 비슷한 기간 동안 광기로 몰아넣었으며 쿠데타, 폭동, 폭력과 한 차례의 
대규모 분리주의 전쟁을 촉발하였다. 탄자니아에서는 크리스트교 정령 신앙을 떠받드는 본토와 아랍 이슬람 
교도가 다수를 점하는 잔지바르섬이 분열되어 여러 가지 면에서 사실상 별개의 국가로 나뉘었으며, l992년에는 
잔지바르가 비밀리에 이슬람 협의 기구에 가입하였다가 탄자니아의 설득으로 이듬해 탈퇴하였다. 이와 동일한 
크리스트교-이슬람교의 분열은 케냐에서도 긴장과 분쟁을 낳았다. 아프리카 동부에서는 크리스트 교도가 다수를 
점하는 에티오피아와 이슬람 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에리트레아가 l993년 결국 갈라섰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는 아직도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적잖은 수의 오로모족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문명의 단층선으로 
갈라진 국가들은 인도(이슬람 교도와 힌두 교도), 스리랑카(신할리즈 불교도와 타밀 힌두 교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증국인과 말레이계 이슬람 교도), 중국(한족, 티베트 블교도, 터키계 이슬람 교도), 
필리핀(크리스트교도와 이슬람 교도), 인도네시아(이슬람 교도와 티모르의 크리스트 교도) 등이 있다.
  문명 단층선의 분열 효과가 두드러지는 지역은 냉전 시대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내건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에 의하여 강제로 통합된 단절국이다.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결속과 배척을 낳는 원동력은 이념이 
아니라 문화가 되었다.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은 문명의 경계선을 따라 뭉친 새로운 단위들로 분리되었다. 옛 
소련은 발트 공화국(프로테스탄트 및 카톨릭), 정교 공화국, 이슬람 공화국으로 갈라졌고, 유고슬라비아는 
카톨릭을 믿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이슬람 교도가 부분적 세력을 잡고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정교 
인구가 다수를 점하는 세르비아-몬테네 그로와 마케도니아로 갈라졌다. 이들 분리 지역에 여전히 다양한 문명 집 
단이 존재한 경우 거기서 다시 2차 분열이 이루어졌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전쟁을 통하여 세르비아 지역, 
이슬람 교도 지역, 크로아티아 지역으로 쪼개졌으며,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로 갈라졌다. 
알바니아 이슬람 교도가 다수를 점하는 코소보 지역은 정교를 신봉하는 슬라브계 세르비아 내부에 있는데 
아직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 지역은 늘 일촉 즉발의 긴장이 감돈다. 마케도니아에서도 소수파인 알바니아 
이슬람 교도와 다수파인 슬라브계 정교 인구 사이에서 긴장이 고조 되고 있다. 옛 소련의 많은 공화국들이 
문명의 단층선에 걸쳐 있다. 이것은 소련 정부가 국경선을 인위적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러시 
아인이 거주하는 크리미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제르바이잔에 속하게 되었다. 러시아 영토에 거주하는 이슬람 교도의 수는 비교적 적으며 이들은 주로 북부 
코카서스와 볼가 지역에 산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카자흐스탄에는 적잖은 수의 러시아인이 거주하는데 이들을 
이 지역에 거주시킨 것도 상당 부분 소련 당국의 정책적 고려였다. 우크라이나는 연합동방카톨릭 신자가 다수를 
점하며 민족주의 의식이 높아 우크라이나어를 공용어로 쓰는 서부 지역과 동방 정교를 믿으며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많은 동부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다.
  단절국의 경우 둘 이상의 문명권에서 유래한 주요 집단들은 사실상 서로가 다른 민족이며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배척하는 힘 때문에 분리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의 자기와 동일한 문명이 지닌 
흡인력에 끌려간다. 분열국은 한 문명 안에서 어엿한 지배력을 가진 단일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나라의 
지도부가 다른 문명으로 옮겨 가기를 바라는 국가다. 그들은 '우리는 같은 민족이며 모두 같은 세계에 속해 
있지만 우리가 사는 땅을 바꾸고 싶다 '고 말한다. 단절국의 국민들과는 달리 분열국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 통일을 보지만 어떤 문명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국론이 갈라져 
있다. 일반적으로 지도층의 상당수는 케말주의 전략을 수용하면서 자기들 사회가 비서구 문화와 제도를 배격하고 
서구에 합류해야 한다고 보면서 근대 화와 서구화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이후로 자신이 서구 문명의 일부인가 아니면 뚜렷한 독자성을 지닌 유라시아 정교 문명의 주축인가를 놓고 의견 
통일을 이루지 못한 분열국으로 남아 있다. 케말 아타튀르크의 조국은 물론 분열국이다. 터키는 1920년대 부터 
줄곧 근대화와 서구화의 길을, 서구의 일원이 되는 길을 추구하여 왔다. 멕시코가 미국에 대항하여 자신을 
라틴아메리카 국가로 정의한지 거의 두 세기가 지난 l980년대에 이 나라의 지도부는 북미 세계의 일원으로 
새롭게 정의하였고 그 결과 멕시코는 분열국이 되었다. 반면에 호주 지도자들은 l990년대에 들어와 서구로부터 
탈피하여 호주를 아시아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 애쓰고 있다.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분열국인 셈이다. 분열국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분열국의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가 두 문화를 잇는 '가교' 라고 선전하는 반면 외부인들은 
그 나라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고 묘사한다. 서쪽을 보다가 동쪽을 보는 러시아', '터키': 동인가 서인가, 
무엇이 최선인가?', '호주 민족주의: 분열된 충성'은 분열국의 자기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신문 기사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제목이다.
  분열국: 문명 이동의 실패
  분열국이 자신의 문명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째,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엘리트가 이러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서야 한다. 둘째, 
일반 대중은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셋째, 그 나라가 지향하는 문명(대개는 
서구 문명)의 주요 구성원들이 개종자를 수용할 의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과정 앞에는 
숱한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으며 그것은 정치, 사회, 제도, 문화적으로 크나큰 고통을 동반한다. 그리고 지난 
역사의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다.
  러시아
  1990년대 현재 멕시코가 분열국으로 들어선 기간은 불과 몇년에 지나지 않고 터키도 기껏해야 수십 년이다. 
반면 러시아는 수세기 전부터 분열의 길에 들어섰다. 또 터키나 멕시코와는 달리 러시아는 주요 문명의 
핵심국이다. 터키나 멕시코가 자신을 서구 문명의 일원으로 새롭게 정의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슬람 문명이나 라틴아메리카 문명에 미치는 여파는 미미하거나 제한적일 것1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서구에 
편입될 경우 동방 정교 문명은 존럽 기반을 잃는다. 소련의 몰락은 두 가지 증요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러시아는 
서구와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내려야 하는가? 러시아는 동방 정교와, 또 소련 제국의 일원이었던 신생 
공화국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러시아와 서구 문명의 관계는 크게 네 단계로 발전하여 왔다. 1단계는 표트르 대제(재위 1689 ~1725)까지 
이어졌다. 그때까지 키예프 루시와 모스크바 공국은 서구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서유럽 국가와 거의 접촉이 
없였다. 러시아 문명은 비잔틴 문명의 지류로서 발전하였으며 러시아는 l3세기 중반부터 15세기 중반까지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러시아는 로마 카톨릭, 봉건제, 르네상스, 종교 개혁, 해외 영토 개척과 식민화, 계몽주의, 국민 
국가의 형성 등 서구 문명을 역사적으로 규정하는 현상들에 거의 노출된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 서구 문명의 
뚜렷한 특징으로 파악되던 8가지 특성 중에서 7가지-종교, 언어, 정교 분리, 법치, 사회적 다원주의, 대의제, 
개인주의 -를 러시아는 서구와 거의 공유하지 못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예외는 그리스-로마의 
유산이었는데 이것마저도 비잔틴을 통해 한 다리 건너서 온 것이었지 서구처럼 로마로부터 직접 주입받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성격이 크게 달랐다. 러시아 문명은 키예프 루시와 모스크바 공국의 토착 뿌리위에 비잔틴 문화가 
가세하고 여기에 몽골의 장기 지배가 복합적인 영향을 미쳐서 출현하였다. 이러한 영향력들은 성격적으로 다른 
힘들의 영향 아래 서유럽에서 발전한 사회나 문화와는 극히 유사성이 적은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 냈다.
  17세기 후반의 러시아는 유럽과 판이하게 달랐을 뿐 아니라 유럽에 비하여 크게 낙후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표트르 대제는 1697 ~98년의 유럽 시찰에서 절감하였다. 그는 조국 근대화와 서구화의 단호한 의지를 품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자기 국민이 유럽인과 흡사해지도록 터키 모자의 착용을 금지시켰다. 
비슷한 의도에서 표트르는 모스크바에 돌아오자 우선 귀족들의 턱수염을 강제로 밀고 긴 가운과 원뿔형의 
모자를 착용하지 못하게 했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아랍 문자 대신 로마 문자를 채택하였다. 표트르는 키릴 
문자를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문자 체계를 개선하고 서구식 단어와 표현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주안점을 
둔 것은 러시아 군사력의 확층과 현대화였다. 그는 해군을 창설하고 징병제를 도입하였으며 방위 산업을 
육성하고 각종 기술 학교를 세우는 한편 서구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무기, 선박, 조선, 항해. 행정 조직 같은 
군대의 효율성 제고에 필요한 선진 지식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는 조세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확층하였고, 재위 말년에는 정부 조직을 개편하였다. 러시아를 단순히 유럽 안에 
있는 한 나라가 아니라 유럽 안에 있는 열강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는 모스크바를 버리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으며, 발트 해 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을 확립하고 유럽 무대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고자 
스웨덴과 북방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러시아를 근대화와 서구화의 길로 밀어 넣는 과정에서 표트르는 전제주의를 완성하고 사회적 
다원주의나 정치적 다원주의의 잠재적 발전 동인을 제거하여 러시아의 아시아적 특성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귀족은 한번도 권력을 잡아 본 적이 없다. 표트르는 귀족을 더욱 몰아붙여 귀족의 군대 복무를 
의무화하고 혈통이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에 바탕을 둔 관등표를 만들었다. 귀족도 농민처럼 
국가에 대한 병역 의무를 져야하는 '굽신거리는 귀족 사회'는 외국의 귀족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농노는 
토지와 지주에게 더욱 항구적으로 예속되어 자율성이 한층 약화되었다. 예전부터 광범위한 국가의 통제 아래 
있었던 동방 정교회는 새로운 조직 개편을 거쳐 차르가 직접 임명하는 종교 회의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차르는 
또 당시의 상속 관행을 따르지 않고 후계자를 자신이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였다. 이 일련의 
변화를 통하여 표트르는 러시아에서 근대화와 서구화가 전제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증하였다. 표트르의 전범에 따라 레닌, 스탈린, 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 알렉산드르 2세도 
다양한 방식으로 러시아를 서구화하고 근대화하면서 중앙 독재를 강화하는 길로 나아갔다.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러시아의 민주주의자는 대체로 서구주의자였다. 그러나 서구주의자가 모두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우리는 러시아에서 권력의 중앙 집권화가 사회 경제 개혁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l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측근들은 글라스노스트가 경제의 자유화 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양산한 각종 
장애물을 거론하면서 자신들이 이러한 사실을 진작에 깨닫지 못한 점을 한탄하였다.
  오스만 제국과 달리 러시아 제국은 유럽 국제 체제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국내에서 표트르의 개혁은 
일련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러시아는 이질적 사회로 남아 있었다. 상층부에 포진한 소수 엘리트를 제외하면 
아시아적.비잔틴적 생활 방식, 제도, 믿음은 러시아 사회를 여전히 지배하였으며 러시아인도 유럽인도 러시아를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러시아를 할퀴면 타타르가 상처를 입는다." 고 메스트르(de Maistre)는 말하였다. 
표트르는 분열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는 이런 불행한 현실을 함께 
개탄하면서도 철저한 유럽화를 통하여 이런 상태를 종식시킬 것이냐 아니면 유럽의 영향력을 일소하여 진정한 
러시아의 영혼으로 복귀할 것이냐를 놓고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차다예프(P. Ya. Chaadayev) 같은 서구주의자는 
"태양은 서구의 태양"이라고 주장하면서 러시아는 이 햇볕을 기존의 제도에 투사하여 변화를 도모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닐레프스키(N. Ya. Danilevskiy) 같은 슬라브주의자는 유럽화를 추구하는 노력이 민중의 생활 
방식을 외래의 형식으로 대체하여 민증의 삶을 왜곡시키고 외국에서 빌려온 제도를 러시아 토양에 이식하고 
러시아인의 삶의 문제와 대내외 관계를 유럽이라는 외래의 관점을 통하여, 즉 유럽인의 굴절 각도에 맞춘 렌즈를 
통하여 파악한다고 비판 하였다. 그 뒤의 러시아 역사에서 표트르는 서구주의자의 영웅이 되었지만 그에 맞선 
세력에게는 사탄의 수괴로 받아들여졌다. 러시아의 특수성 을 강조하는 세력은 1920년대에 표트르를 반역자로 
낙인찍었고, 유럽에 맞서 서구화를 거부하면서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긴 볼셰비키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와 서구의 관계를 다음 단계로 이행시켰다. 이 관계는 애매 모호하게 유지되어 오던 
지난 두 세기 동안의 관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은 서구에서 탄생한 이념이지만 서구 
에서는 존립할 수 없는 새로운 정치 경제 체제를 만들었다. 그때까지 서구 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는 서구에 
뒤처지지 않고도 러시아가 서구와는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는가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공산주의는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였다. 러시아가 서구와 다르고 서구에 근본적으로 대항하는 이유는 러시아가 서구보다 
앞섰기 때문이라고 공산주의는 설명하였다. 러시아는 궁극적으로 세계 전체를 휩쓸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주도 
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러시아는 낙후된 아시아적 과거가 아니라 선진적 소련의 미래를 구현하고 있었다. 혁명을 
통하여 러시아는 서구를 껑층 뛰어넘었고 이제 러시아와 서구의 차이점은 슬라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너희는 
다르고 우리는 너희처럼 되지 않을 것 이라는 논리가 아니라 '우리는 다르고 결국 너희는 우리처럼 될 것' 
이라는 논리로 설명되었다. 그것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메시지였다.
  공산주의는 소련의 지도자들이 서구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여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와의 
강력한 연결 고리도 제공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인이었다. l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들의 사상에 
동조한 주요 인사는 서유럽인이었다. l910년에 이르면 서구 사회에서 수많은 노동 조합과 사회 민주주의 세력이 
이들의 이념에 동조하면서 유럽의 정치 무대에서 무시 못 할 주역으로 점차 부상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좌익 정당은 공산당과 사민당으로 갈라졌지만 이들은 유럽 각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서구의 대부분 
지역에서 마르크스의 세계관이 득세하였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미래의 대세로 받아들여졌으며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이 이런 저런 형식으로 그것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수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놓고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가 벌인 논쟁은 유럽에서 서구의 미래는 무엇인가. 소련이 그 미래를 선도하는가를 
놓고 벌인 좌우의 논쟁으로 바뀌었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실증된 소련의 힘은 서구와 특히 서구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비서구 문명에서 공산주의의 호소력을 높였다. 서구가 지배하던 비서구 사회에서 서구를 설득하려 애쓰던 
엘리트들은 자결과 민주주의를 외쳤고 서구에 맞서기 원하던 엘리트들은 혁명과 민족 해방을 부르짖었다.
  서구의 이념을 채택하고 그 이념을 서구에 맞서는 데 활용함으로써 러시아는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서구에 가까워졌고 서구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양쪽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일한 언어로 말하였다.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련이 붕괴하면서,서구와 
러시아의 이 정치적-이념적 상호 교섭도 끝났다. 옛 소련 제국 곳곳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두리라고 
서구는 희망하기도 했고. 그렇게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는 서구의 바람대로 홀러가지는 않았다. l995년 
현재 러시아를 비롯한 동방 정교 국가군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이 
마르크스주의자로 처신하기를 포기하고 차츰 러시아인답게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와 서구의 골은 한층 
깊어졌다.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이념 분쟁이었으며, 판이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근대적이고 세속적이며 자유, 평등, 물질적 복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하척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구의 민주주의자는 소련의 공산주의자와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의 민주주의자가 
러시아 정교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와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소련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솔제니친의 추종파와 사하로프의 추종파가 모두 공산주의라는 결집체에 맞섰으므로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의 대립이 표면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 결집체가 허물어지자 러시아의 진정한 
정체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봇물처럼 터졌다. 러시아는 서구의 가치관, 제도, 관습을 받아들여 서구의 일원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아니면 러시아는 뚜렷한 정교와 유라시아 문명을 구현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특이한 운명을 가졌다는 점에서 서구와는 분명히 구별되는가? 지식인과 정치인, 일반 대중은 이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의견이 엇갈려 있다. 한쪽에는 코즈모폴리틴, 대서양주의자로 지칭되기도 하는 서구주의자가 있고 
또 한쪽에는 '민족주의자', '유라시아주의자' 혹은 '데르자브니키(강한 정부 응호론자)'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슬라브주의자의 후예가 존재한다.
  이 두 집단은 경제 정책과 국가 구조를 두고 견해 차이를 보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외교 정책에서 나타난다. 
한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으로 이어 진 연속체 위에 다양한 의견이 분포되어 있다. 한쪽 극단에는 고르바초프가 
제창한 '신사고 와 '유럽 공동의 집 구상이 있으며, 러시아가 '보통 국가'로 나아가 서방 선진 공업국 모임인 
G-7에 여덟 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바람을 가진 옐친과 그의 고위 측근 다수의 견해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스탄케비치(Sergei Stankevich) 같은 온건 민족주의자는 러시아가 '대서양주의자'의 노선을 
거부하고 재외 러시아인을 보호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하며 터키를 비롯한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를 증시하고 
러시아의 자원, 정책 우선권, 결속, 이익을 아시아 쪽으로, 혹은 동쪽 방면으로 상당량 재투입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옐친이 러시아의 국익을 서구의 이익에 종속시켰고 러시아의 군사력을 약화 
시켰으며 세르비아 같은 전통 우방에 대한 지원을 소홀히하고 러시아 국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방식으로 경제와 
정치의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비난 한다. 이러한 여론의 추세를 대변하듯 러시아는 독특한 유라시아 문명이라고 
주장한 1920년대에 주장한 사비츠키(Peter Savisky)의 사상이 요즘 러시아에서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좀더 극단적으로 흐르는 민족주의자들도 있다. 솔제니친은 러시아의 울타리에 러시아인, 또 러시아와 밀착되어 
있으며 슬라브 정교를 신봉하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포함시키되 그 나머지 세계는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리노프스키(Vladimir Zhirinovsky) 같은 제국주의 성향의 민족주의자는 소련 제국을 부활하고 
러시아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자의 견해에 동조하는 세력은 반서구주의 성향을 보일 뿐만 
아니라 때때로 반유대주의 자세를 취하면서, 러시아의 외교 정책을 동쪽과 남쪽으로 궤도 수정하고 남부의 
이슬람 세력을 제압하든가(지리노프스키의 주장) 아니면 이슬람 국가군, 중국과 공조하여 서구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 한다. 민족주의자들은 또한 이슬람 교도와 싸우는 세르비아를 광범위하게 지원하라고 요구한다. 
코즈모폴리턴과 민족주의자의 차이점은 제도적으로는 러시아 외무부의 견해와 군부의 견해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차이점은 또한 옐친의 외교 안보 정책이 자주 바뀐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의 엘리트처럼 러시아 국민도 분열되어 있다.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2069명의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하여 
시행된 19S2년의 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40퍼센트가 러시아는 '서구에 대해 열려 있다.', 36퍼센트가 '서구에 
대해 닫혀 있다.', 24퍼센트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1993년 12월에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개혁 정당은 
34.2퍼센트의 지지를 얻었고 반개혁 정당과 민족주의 정당은 43.3퍼센트의 지지를 얻었으며 중도 정당은 
13.7퍼센트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마찬가지로 1996년 6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러시아 국민은 서구를 대변하는 
옐친에게 43퍼센트의 지지를 보내고 민족주의 후보와 공산주의 후보에게 52퍼센트의 지지를 보내 다시금 분열된 
양상을 보였다 정체성이라는 중요한 문제에서 러시아는 l990년대에 들어와서도 분열국으로 남아 있으며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의 대립은 '이 나라를 규정하는 특성의...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터키
  1920년대와 l930년대, 주도 면밀한 계산이 깔린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케말은 터키 민족을 오스만과 이슬람의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케말주의가 내건 기본적 원칙, 곧 '6개의 화살'은 인민주의, 공화 주의, 
민족주의, 세속주의, 국가 사회주의, 개혁주의였다. 케말은 다민족 제국의 이상을 거부하고 동질적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을 축출하고 학살하였다. 그는 술탄을 폐위하고 서구식 
공화정을 정치 체제로서 도입하였다. 케말은 칼리프의 영토, 종교적 권위의 특권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전통 
교육과 전통 신앙의 대변자들을 제거하였으며 종교 단체에서 세운 각종 학교를 폐쇄하고 공공 교육 분야에서 
통합된 세속 체계를 수립하였다. 또 이슬람 율법이 적용되던 종교재판소를 없애고 그 대신 스위스의 민법에 
바탕을 둔 새로운 법률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전통 종교를 상징하는 터키모자의 착용을 금지하고 일반 모자의 착용을 장려하였으며 전통 달력 대신 
서양 달력을 도입하였고 이슬람교가 터키의 국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으며 터키어를 아랍 
문자가 아닌 로마 문자로 표기하도록 규정한 포고령을 선포하였다. 이 마지막 개혁이 특히 증요한 의미를 
가졌다. '문자 개혁이 시행되어 로마 문자로 교육받은 새로운 세대는 막대한 분량의 전통 문헌에 접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유럽 언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고조되었다. 또 점증하던 문맹률도 낮아졌다. 터키 
국민의 민족적,정치적,종 교적 문화적 정체성을 재정의한 케말은 19S0년대에 터키를 경제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억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서구화는 근대화의 동반자이자 근대화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었다.
  l939년에서 l945년까지 벌어진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터키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종전 뒤 터키는 서구와의 
밀착 속도에 박차를 가하였다. 서구의 정치 체제를 모방하려는 뚜렷한 의도를 나타내면서 터키는 일당 통치에서 
다당 경쟁 체제로 나아갔다. 터키는 꾸준한 로비를 벌여 1952년 NAT0의 정식 회원국이 됨으로써 자유 세계의 
일원임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터키는 서방으로부터 수십억 달러 규모의 경제 군사 지원을 받게 되었다. 터키 
군대는 서방의 무기를 도입하고 군사 지도를 받았으며 NAT0의 지휘 체계에 편입되었다. 미국의 군사 기지도 
받아들였다. 서방은 터키를 지중해, 중동, 걸프만에 대한 소결의 팽창을 억제하는 동부의 증요한 보루로 
간주하였다. 터키의 이러한 서방과의 밀월 관계는 l955년 반둥 회의에 모인 비서구 비동맹 여러 나라의 지탄을 
받았으며 특히 이슬람권 국가들의 격분을 샀다.
  냉전이 끝난 뒤 터키의 엘리트들은 터키가 서구와 유럽의 일원으로 남아 있는 것을 여전히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터키가 NATO의 회원국 지위를 고수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발판으로 서구와 긴밀한 구조적 
연대를 맺을 수 있고 그리스와의 긴장 완화에도 이것이 긴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NAT0 가입으로 
구체화된 터키와 서구의 긴밀한 관계는 냉전의 산물이었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그러한 결속의 중대한 이유가 
사라졌으므로 터키와 서구의 관계는 약화되었고 그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터키는 북방으로부터의 중대한 위협을 저지하는 보루로서 더 이상 서구에게 유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터키는 
걸프전에서 입증되었듯이 남부로부터의 덜 심각한 위협을 함께 처리하는 하나의 동반자 역할을 할 뿐이다. 
걸프전에서 터키는 자국 영토를 거쳐 지중해로 연결된 이라크의 파이프라인을 봉래하고 미군기가 터키 기지를 
이용하여 대 이라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반 후세인 연합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잘 
터키 대통령의 이러한 결정은 터키 국내에서 적잖은 비판을 받았으며 미국과 긴밀한 공조를 편 외잘의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그 여파로 외무 장관, 국방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이 사임하였다. 그 후 새로 
정권을 잡은 데미렐 대통령과 실레르 총리는 터키에게도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되는 이라크에 대한 UN의 
제재를 조기에 종결하라고 요구하였다. 남부에서 오는 이슬람의 위협을 서구와 함께 막아 내려는 예전의 터키의 
의지는 소련의 위협을 서구와 함께 막아 내려던 의지처럼 확고하지 않다. 걸프전 위기에서 전통적으로 터키의 
우방국이었던 독일이 이라크의 터키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NATO에 대한 도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터키가 서구에 의존하척 남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할 수는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준 사건이었다. 
소련과의 냉전적 대치 상황은 터키의 문명적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탈냉전 시대의 아랍과의 
관계는 그러한 근본적인 물음 앞으로 터키를 내몰았다.
  I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서구 지향적인 터키의 엘리트들이 외교 정책의 우선적 목표로 설정한 것은 유럽 
연합의 회원국 자격 획득이었다. 터키가 공식적으로 회원국 가입 신청서를 낸 것은 1987년 가을이었다. 터키는 
1989년 12월 유럽 연합으로부터 가입 신청에 대한 검토는 l993년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이라는 통보를 반았다. 
1994년 유럽 연합은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의 가입 신청을 승인하였으며, 몇 년 안에 폴란드, 
헝가리, 체코, 다음 단계로는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발트 공화국들이 유럽 연합에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유럽 연합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독일이 터키의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그 대신 
중부 유럽 국가들의 가입을 지원하는 현실을 보면서 터키는 다시금 실망하게 되었다. 미국의 압력을 받고서야 
유럽 연합은 터키와 관세 동맹을 체결하였지만 터키의 정식 회원국 가입은 아직도 요원하며 그 가능성도 분명치 
않다.
  터키는 왜 냉대를 받으며 왜 번번이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가? 공식적으로는 유럽 연합 관리들이 터키의 
낙후된 경제 발전 수준과 북구 여러 나라에 한참 못 미치는 인권 보장 수준을 거론한다. 그러나 사석에서 
유럽인과 터키인은 그리스가 격렬하게 반대하고 더 중요하게는 터키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유럽 각국은 인구가 6천만 명을 넘고 실업률이 높은 이슬람 국가에게 자신의 국경선을 
개방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더욱 중요한 원인은 유럼인들이 문화적으로 터키인이 유럽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는 점이다. 1992년 외잘 대통령은 '터키의 인권 기록은 터키의 EU 가입을 막기 위해 날조된 것이다. 진정한 
이유는 우리가 이슬람 교도이고 그들이 크리스트 교도이기 때문이다.'고 발언하였다. 외잘 대통령은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점을 말하지 않는다.' 유럽의 관리들 또한 유럽 연합이 '크리스트교 국가들의 
모임'이라는 점을 시인하면서 터키는 너무 가난하고 너무 인구가 많고 너무 이슬람적이고 너무 거칠고 
문화적으로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한 관 계자의 지적처럼 유럽인들이 내심 지니는 악몽은 사라센이 
서유럽을 침공하여 터키인이 빈의 문턱까지 왔었던 지난 역사의 기억이다. 이러한 태도는 다시 '서구는 이슬람 
터키를 유럽 안에 넣어 줄 의사가 없다.' 는 공감대를 터키 국민들 사이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메카를 거부한 뒤 브뤼셀로부터도 거부당한 터키인들은 소련의 몰락으로 생긴 기회를 포착하여 타슈켄트로 
접근하였다. 외잘 대통령을 비롯한 터키 지도자들은 터키계 민족의 공동체라는 야심 만만한 구상을 내놓고 
아드리아해에서 중국 국경선까지 터키의 '가까운 외국'에 있는 재외 터키 민족을 결속하고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터키는 그 중에서도 특히 아제르바이잔과 터키어를 쓰는 중앙아시아의 4개 공화국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991년과 1992년에 터키는 이 신생 
공화국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 지역에 대한 터키의 영향력을 높이고자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기 
에는 l5억 달러 규모의 장기 저리 융자, 7900만 달러 규모의 직접 원조, 위성 방송(러시아어 방송을 대체하는), 
전신망, 항공 서비스, 터키 정부가 수 천 명의 유학생에게 지급하는 장학금, 증앙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 출신 
은행가, 기업인, 외교관, 군사 요원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터키 연수 등이 포함된다. 이들 신생 공화국에서 
터키어를 가르칠 교사들도 대규모로 파견되었으며 2천 개의 합작 회사가 문을 열었다. 문화적 동질성은 경제 
관계를 순탄하게 만든다. 한 터키 기업인은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 탄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일이다. 터키인에게는 이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 우리는 같은 문화, 그럭저럭 뜻이 
통하는 언어를 기졌으며, 같은 요리를 먹는다.'고 지적하였다.
  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를 향한 터키의 방향 선회에는 튀르크 민족 공동체의 수장이 되겠다는 야심도 깔려 
있지만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려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의도를 
저지하겠다는 계산도 숨어 있다. 터키는 '터키 모델' 혹은 '터키 이상' -시장 경제를 가진 세속적 민주주의 
이슬람국가을 제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터키는 러시아의 영향력이 되살아나는 것을 
누르려고 한다. 나아가 터키는 러시아 카드와 이슬람 카드를 내세워 유럽 연합의 지원을 이끌어 내고 궁극적으로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는 야심도 품고 있다.
  증앙아시아 공화국들과 터키의 교류는 1995년에 들어와 터키의 제한된 자원, 외잘 대통령의 서거에 뒤이은 
데미렐 대통령의 취임과 그에 뒤따른 어수선한 상황, 자신이 '가까운 외국'으로 간주하는 곳에서 다시금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의 노력 등으로 한동안 소강 상태에 빠졌다. 옛 소련의 터키계 공화국 지도자들은 
독립하자마자 앙카라로 달려와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후 러시아의 압력과 회유가 시작되면서 이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문화적 사촌국과 과거의 제국주의 상전국 사이에서 '균형 잡힌' 관계를 추구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화적 동질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경제적,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터키는 관련 당사국과 기업들을 설득하여 중앙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를 
터키를 거쳐 지증해로 수송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로 합의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옛 소련의 터키계 공화국들과 결속을 강화하고자 진력하던 터키의 케말 주의에 입각한 세속적 정체성은 
국내에서 도전을 받았다. 첫째, 냉전의 종식과 함께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일대 흔란을 겪었다는 점에서 터키도 
다른 여러 나라들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고 그 와중에서 '국가적 정체성과 민족적 자기 확인' 이라는 중요한 
물음이 제기되었다. 종교가 그 해답을 제공하였다. 70여 년에 걸쳐 지속되어 온 케말과 터키 엘리트들의 세속적 
전통은 점차 공격을 받았다. 터키인의 해외 체험은 국내의 이슬람 정서를 자극하였다. 독일에서 귀국한 
터키인들은 "그곳에서 겪은 적대감에 대한 반발심에서 낯익은 것에 기울어졌다. 그것이 이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국민 여론과 지배적 풍습은 점차 이슬람화하였다. 터키에서 이슬람 복장을 하고 거리를 다니는 여성이 
늘어났고 이슬람 사원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으며 서점은 이슬람의 역사, 가르침, 생탈 방식을 찬양하고 
예언자 마호메트의 세계관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 오스만 제국의 역할을 칭송하는 서적, 잡지, 카세트, 콤팩트 
디스크, 비디오 테이프로 메워지고 있다는 보도가 1993년에 나왔다. 최소한 290여 개의 출판사와 인쇄소, 4개 
일간지를 포함한 300여 개 간행물, 수백 개의 허가받지 않은 라디오 방송국과 역시 허가받지 않은 30개의 TV 
채널이 이슬람 이념을 전파하고 있었다.
  고조되는 이슬람 정서에 부응하여 터키 정부는 원리주의 관습을 채택하고 원리주의 세력을 흡수하려고 애썼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터키 정부는 종교 문제국의 예산을 일부 부처의 전체 예산보다 많게 책정하였다. 이러한 
재정적 뒷받침 아래 모스크가 세워지고 공립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시행되었다. 이슬람 학교에 대한 지원도 대폭 
늘어났다. l980년대에 이런 학교의 수는 5배로 늘어나 중등 학교 숫자의 l5퍼센트나 차지하였다. 이슬람 교리를 
가르치는 이런 학교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의 상당수는 뒤에 공무원이 되었다. 터키 정부는 케말이 터키 모자를 
금지시킨지 70년 만에 여학생이 이슬람 머리 두건을 하고 등교하는 것을 허용하여 프랑스 정부와 극적인 대조를 
보였다. 터키 정부의 이러한 시책은 상당 부분 이슬람 주의자들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무튼 정부의 노력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이슬람의 열풍이 얼마나 거세게 불었는지를 반증한다.
  둘째, 이슬람 부활은 터키의 정계 판도를 흔들어 놓았다. 대표적인 예가 외잘 대통령인데, 터키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이슬람의 상징과 정책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터키에서도 민주주의는 토착 정서와 종교로의 복귀를 강화한다 일반의 지지와 유권자의 표를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는 의도에서 정치인들-심지어는 세속주의의 보루이며 수호차라 할 수 있는 군부마저도- 은 국민의 종교적 
열망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물러선 몇 가지 시책에서 인기 영합주의의 냄새가 풍겼다. 대중 운동은 
종교? 밀착되었다. 엘리트 집단과 관료 집단, 특히 군부는 세속주의에 기울어 있지만 군 내부에도 이슬람 정서는 
확산되어 1987년에는 사관 학교에서 수백 명의 생도가 이슬람 정서에 물들어 있다는 혐의를 받고 퇴교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주요 정당들은 케말이 인정하지 않았던 이슬람 교도로 이루어진 '타리카', 곧 선택된 
사회의 지지표를 점점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1994년 3월에 시행된 지방 선거에서 터키의 주요 5개 정당 
증에서 유일하게 원리주의 노선을 걸었던 복지당은 19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크게 약진하였다. 실레르 총리의 
정도당은 2l퍼센트익 지지를 얻었고 외잘 대통령의 조국당은 20퍼센트의 표를 얻었다. 복지당은 터키의 양대 
도시인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장악하였으며 특히 터키 남동부 지역에서 강세를 보였다. 1995년 12윌 선거에서 
복지당은 가장 많은 의석을 획득하였으며 터키와 세속주의를 대표하는 두 정당은 이슬람 세력인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연정에 합의하였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터키에서도 원리주의를 
지지하는 층은 주로 청년, 외국에서 돌아온 노동자, 짓밟히고 못 가진 사람, 도시 유입민과 대도시의 과격파이다. 
  셋째, 이슬람의 부활은 터키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터키는 외잘 대통령의 주도 아래 유럽 연합 
가입을 염두에 두고 걸프전에서 서방을 결정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몽상으로 끝났고 터키 국내 
에서 정부의 친서방 정책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소련의 붕괴로 터키와 서방을 연결하던 주된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서, 걸프전에서 터키가 이라크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놓고 NATO가 
보인 미적지근한 반응을 지켜 본 터키는 장차 비러시아 세력의 침공을 받을 경우 NAT0의 지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에 터키는 아랍과 여타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를 점차 
확대하였으며 l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아제르바이잔과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를 대대적으로 지원하면서 이슬람의 
권익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발칸 지역, 증앙아시아, 중동에서 모두 터키의 외교 정책은 눈에 띄게 친이슬람 
노선으로 기울고 있다.
  오랫동안 터키는 분열국이 자신의 문명적 정체성을 바꾸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세 가지 요건 가운데 두 
가지를 층족시켜 왔다. 터키의 엘리트 집단은 그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대중도 거기에 반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맞은편에 있던 서구 문명의 엘리트 집단은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하고 있는 동안 터키 내부에서 세력을 키운 이슬람 세력은 국민들 사이에 반서구 정서를 확산시키면서 터키 
엘리트의 세속주의적, 친서방적 성향을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터키가 완전한 유럽 국가로 진입하는 데 가로놓인 
장벽, 옛 소련의 터키계 공화국들 사이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터키의 일정한 한계성, 케말의 
유산을 잠식하는 이슬람주의의 발흥을 감안할 때 터키는 앞으로도 분열국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내부적 갈등을 반영하듯이 터키의 지도자들은 터키가 두 문화를 잇는 가교라는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1993년 실레르 터키 총리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 이면서 동시에 '중동의 일원`인 터키가 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두 문명을 연결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애매 모호성을 반영하듯 실레르 총리는 국내에서는 공식 
석상에서 자신이 이슬람 교도임을 강조하는 반면 NAT0에 대해서는 지리적, 정치적 현실로 보아 터키는 엄연한 
유럽 국가라고 역설한다. 같은 맥락에서 데미렐 대통령은 터키가 서에서 동까지, 유럽에서 중국까지 뻗어 있는 
대단히 중요한 지역적 가교 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교는 두 단단한 실체를 연결하는 인공물일 뿐 그 실체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터키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나라를 가교라고 부를 때 그들은 터키가 분열국임을 
완곡하게 인정하는 셈이나 다를 바 없다.
  멕시코
  터키는 1920년대에 분열국이 되었지만 멕시코는 1980년대에 와서야 분열국이 되었다. 그러나 터키와 멕시코가 
역사적으로 서구와 맺은 관계를 보면 일정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터키처럼 멕시코도 뚜렷한 비서구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파스(Octavio Paz)가 언급한 것처럼,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멕시코의 정수는 인디언 문화이며 
그것은 비유럽적이다. 19세기에 멕시코는 오스만 제국처럼 서구 열강에 의하여 분할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멕시코는 터키처럼 혁명을 거치면서 국가 정체성의 새로운 토대와 일당 통치 제체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터키에서 일어난 혁명은 전통 이슬람 문화와 오스만 유산을 배격하고 서구 문화를 수입함으로써 
서구에 편입하려는 시도였다. 멕시코의 혁명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의 여러 가지 요소를 통합하고 
수정하였지만 이것이 서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를 낳았다. 터키가 60년 동안 
자신을 유럽 국가로 규정하려고 노력하였다면 멕시코는 비숫한 기간 동안 미국에 대항하는 존재라는 데서 
자신의 정체감을 찾았다. 193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멕시코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이익에 도전하는 경제 정책과 
대외 정책을 폈다.
  l980년대에 들어서자 사태가 일변하였다. 마드리드(Miguel de ls Madrid) 대통령과 그 후임자인 
살리나스(Carlos Salias Gortari) 대통령은 멕시코의 국가 목표, 관습,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재규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1910년의 혁명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개혁이었다. 살리나스는 사실상 멕시코의 케말이 되었다. 
케말이 당대 서구의 중심 조류였던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를 지향한 것처럼 살리나스도 서구를 특징짓는 양대 
축의 하나인 경제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다. (또 하나의 축인 정치 민주주의는 수용하지 않았다.) 
케말처럼 살리나스의 개혁 정책도 멕시코를 지배하는 정치 경제 엘러트 집단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살리나스와 마드리드처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살리나스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잡았고 수많은 
국영 기업체를 민영화하였으며 외국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조세와 보조금을 삭감하였으며 외채를 건실하게 
운영하고 노동 조합의 힘을 꺾었으며 생산성을 높이고 미국, 캐나다와 함께 북미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케말의 
개혁이 터키를 증동의 이슬람 국가에서 세속 유럽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있었듯이 살리나스의 개혁 목표는 
멕시코를 라틴아메리카에서 탈피시켜 북미 국가로 진입시키는 데 있었다.
  그것은 멕시코의 불가피한 선택은 아니었다. 멕시코의 엘리트 집단은 그들의 선배들이 20세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고수해 온 민족주의, 보호주의적 제5세계 지향의 반미 노선을 견지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일부 
멕시코인들이 주장하듯이 스페인, 포르투갈, 남미 국가들과 함께 이베리아 국가 연합을 결성하는 방법도 있었다.
  북미 국가를 지향하는 멕시코의 시도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멕시코의 정치, 경제 엘리트와 지식인 
대다수는 이 노선을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또한 터키가 직면하였던 상황과는 달리 멕시코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있는 북미 두 나라의 정치 경제 엘리트와 지식인 대다수는 멕시코와의 문화적 제휴를 압도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이민이라는 중요한 문제에서 터키와 멕시코의 차이점은 극적으로 대비된다. 대규모 터키 이민에 
대한 공포는 유럽의 지도층과 대중으로 하여금 터키를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반면에 대규모의 합법, 비 합법, 멕시코 이민이 엄존하는 현실은 살리나스가 NAFTA 회담에서 이용한 
카드의 하나였다. 그는 '우리 상품을 받아들이든가 우리 국민을 받아들이라!'고 몰아세웠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와 미국의 문화적 거리는 터키와 유럽의 문화적 거리보다 좁다. 멕시코의 종교는 카톨릭이고 언어는 
스페인어이며 멕시코의 엘리트들은 역사적으로 유럽에 기울다가(그들은 자녀를 유럽으로 유학 보냈다.) 최근에는 
미국으로 기울었다.(요즘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앵글로-아메리카 문화를 가진 북미와 스페인-인디언 
문화를 가진 멕시코의 조화는 크리스트교 문화를 가진 유럽과 이슬람 문화를 가진 터키보다는 쉬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NAFTA가 비준된 이후 늘어나는 미국 공장의 남부 이전 추세, 멕시코가 
북미의 자유와 법치개념을 준수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우려의 표명과 함께, 이민 제한을 요구하면서 
멕시코와의 지나친 밀착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분열국이 정체성 이행에 성공하는 데 불가결한 셋째 조건은 일반 국민 이 반드시 지지를 보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인의 중요성은 국민 여론이 그 나라의 정책 결정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친서방 정책은 1995년 현재까지는 아직 민주주의의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잘 조직되고 폭넓은 지지를 받는 무장 세력이 일으킨 치아파스 봉기는 그 
자체로는 멕시코의 북미화를 가로막는 심각한 걸림돌은 아니었다. 그러나 멕시코의 지식인, 언론인, 그 밖의 여론 
주도 세력이 치아파스 반군에게 보인 동정적 반응은 크게는 북미화, 작게는 NAFTA 가입이 멕시코의 엘리트 
집단과 일반 국민으로부터 점차 도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살리나스 대통령은 
의식적으로 정치 개혁과 민주화는 뒷전에 미룬 채 경제 개혁과 서구화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고 
미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멕시코 정치 제도의 진정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이 입지를 강화할 것이다. 
멕시코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다음 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근대화와 민주화가 탈서구화를 일정 
수준까지 자극하여 멕시코가 NAFT에서 한 발을 빼고 그에 따라 NAFFA가 급격히 약화되어 1980년대와 
1990년대 서구 지향 엘리트들이 멕시코에 심어 놓은 체제에 변화가 나타날 것인가? 멕시코의 북미화는 멕시코의 
민주화와 양럽할 수 있는가? 
  호주
  러시아, 터키, 멕시코와 달리 호주는 원래부터 서구 사회이다. 20세기 내내 호주는 처음에는 영국과 그  
다음에는 미국과 밀착 관계를 맺어 왔다. 냉전 시대의 호주는 서구의 일원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영국-캐나다 
을-호주를 잇는 군사 첩보 연결축의 핵심 성원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에 들어와 호주의 정치 지도자들은 
호주가 서구에서 탈피하여 아시아 국가로서 새롭게 탈바꿈하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 나라들과 결속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키팅(Paul Keating) 총리는 호주가 '제국의 지부 노릇을 그만두고 공화국이 되어야 
하며 아시아에 섞여 들어가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호주가 독럽 국가로의 정체성을 찾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호주는 아무리 헌법상의 용어에 그칠지언정 지금처럼 파생적 사회로 남아 
있는 한 전 세계에 자신을 다문화 사회로 알리고 아시아에 참여하고 관계를 맺어 그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내실있게 유지해 나갈 수 없다.' 그 동안 말은 못 하였어도 호주는 오랜 세월 영국 승배와 무기력증에 시달려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국과의 특수한 관계가 계속 지속되면 호주의 국민 문화, 호주의 경제적 미래, 아시아와 
태평양 안 호주의 운명이 쇠락할 것이라고 키팅 총리는 단언하였다. 에반스 (Gareth Evanr) 외무 장관도 비슷한 
견해를 토로하였다.
  호주를 아시아 국가로 새롭게 정의하자는 주장은 국가의 운명을 규정하는 요인으로서 문화보다는 경제가 
중요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발상을 더욱 부채질한 핵심적 요인은 동아시아 지역의 역동적 
발전이었다. 동아시아가 발전하자 호주와 아시아 지역의 무역량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71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호주 수출의 39퍼센트를 받아들였으며 호주 수입의 21퍼센트를 제공하였다. 그러던 것이 
1992년에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호주 수출의 62퍼센트를 차지하고 호주 수입의 41퍼센트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199l년 호주의 대 유럽 연합 수출은 11.8퍼센트였고 대 미국 수출은 l0.1퍼센트였다. 이처럼 
아시아와 경제적 결속이 강화되면서 호주인들의 의식에는 세계가 5대 경제 블록의 구축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호주는 동아시아 블록에 속한다는 믿음이 점차 뿌리를 내렸다.
  경제적 유대가 이렇게 강화됨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아시아 전략은 분열국이 문명 이동에 성공하는 데 철요한 
요건을 하나도 층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첫째, 1990년대 중반 현재 호주의 엘리트들은 이러한 노선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문제는 어느 정도는 이런 노선에 애매 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반대 입장을 펴는 자유당 지도자들과 노동당 지도자들의 정책 갈등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키팅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각계 각층의 지식인과 언론인으로부터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호주의 엘리트 집단 내부에서는 
아시아 지향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국민 여론이 애매 모호하다. 1987년에서 1993년 사이에 
군주제의 종식을 지지하는 호주 국민의 비율은 21퍼센트에서 46퍼센트로 늘었다. 그러나 군주제 종식의 지지율은 
그 단계에서 머물더니 다시 서서히 떨어지고 있다. 호주 국가에서 영국 국기를 삭제하는 것을 지지하는 비율은 
1992년 5월의 42퍼센트에서 1993년 8월의 35퍼센트로 떨어졌다. 1992년 한 호주 관리는 "국민은 이것을 
감내하기가 어렵다. 호주가 아시아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틈나는 대로 밝힐 때마다 나는 얼마나 많은 
항의 편지를 받는지 모른다." 고 지적하였다.
  셋째, 이 점이 가장 증요한데, 아시아 각국의 엘리트들이 호주의 친아시아 정책에 보이는 호응도는 유럽 
엘리트들이 터키의 유럽 접근에 보인 호응도의 수준을 밑돈다. 그들은 호주가 아시아의 일원이 되려면 진정한 
아시아 국가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실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자신들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인도네시아 한 관리는 '호주가 성공적으로 아시아에 편입되느냐의 여부는 오직 하나, 아시아 
국가들이 호주의 의도를 얼마나 환영하느냐에 달려 있다. 호주가 아시아에 수용되느냐는 호주 정부와 호주 
국민이 아시아 문화와 사회를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고 말했다. 아시아인들은 호주의 아시아 
지향적 수사와 그와는 동떨어진 서구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의식한다. 한 호주 외교관의 지적에 따르면 태국인은 
자신이 아시아 국가라는 호주의 주장을 어리둥절하게 받아들인다.
  1994년 10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문화적으로 호주는 여전히 유럽이며 우리 또한 호주를 
유럽국이라고 생각한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호주는 EAEC의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아시아인은 다른 나라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거나 다른 나라를 심판하는 것을 가급적 자제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유럽에 속하는 호주는 다른 나라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권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 (호주의 EAEC 
가입을)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은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다. 요컨대 
아시아인은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하는, 유럽인이 터키를 거부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호주를 자기네 
모임으로부터 배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키팅 총리는 호주를 '아시아 외부의 이방인에서 내부의 이방인으로 
탈바꿈시키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된 발언이다. 이방인은 낯선 집단에 들어가지 못하는 
법이다.
  마하티르 총리의 지적처럼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는 호주가 아시아에 합류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아시아와 호주는 민주주의, 인권, 언론 자유에 대한 호주의 발언과 인접한 나라의 인권 유린 사태에 대한 호주의 
항의를 놓고 거듭 층돌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호주가 당면한 진짜 문제는 국기가 아니라 근본에 놓여 있는 
사회적 가치관이다. 이 지역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자신들의 가치관을 단 하나라도 포기할 호주인은 아마 
없으리라고 생각한다.'고 호주의 원로 외교관은 언급하였다. 성격, 기질, 행동 양식의 차이도 거론된다. 마하티르 
총리가 지적하였듯이 아시아인은 대체로 미묘하고 간접적이고 완곡하고 무비판적이고 비규범적이고 
비대결적이고 에두르는 방식으로 남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목표를 추구한다. 이와는 달리 호주인은 영어권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무뚝뚝하고 노골적이고 혹자는 둔감하다고 표현할만한 방식으로 처신하는 국민이다. 이러한 
문화적 층돌은 키팅 총리 자신이 아시아인들과 접촉하는 자리에서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다. 키팅은 호주인의 
국민적 특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타고난 천성이 도발적이고 호전적이며 말뚝박개 같은 정치인으로 
묘사되었다. 키팅은 자신의 정적들을 서슴없이 쓰레기 같은 놈, 향수나 뿌리고 다니는 샌님, 대가리가 돈 
미치광이로 몰아세웠다. 호주는 아시아 국가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키팅은 자신의 무지막지하리만큼 거침없는 
성격 때문에 아시아 지도자들의 반감을 사고 그들을 충격과 격분으로 몰아넣었다. 문화의 격차가 얼마나 컸던지, 
문화의 수렴을 주창하던 당사자가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이 문화적 형제라고 우기던 사람들의 반발을 사고있다는 
사실마저 인식 못 할 지경에 이르렀다.
  키팅 총러와 에반스 외무 장관의 선택은 경제적 요인을 과대 평가하고 호주의 문화를 쇄신하기보다는 
무시하는 근시안적 판단으로, 또한 호주의 경제 문제를 호도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동아시아의 점증하는 경제력, 정치력, 궁극적으로는 군사력의 중심부에 호주를 포진시키기 위한 구상에서 
나온 원대한 장기적 계획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 점에서는 호주는 수많은 서구 국가 가운데 서구로부터 
벗어 나 새롭게 부상하는 비서구 문명에 합류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22세기 초두의 
역사가들은 키팅-에반스의 선택을 서구의 몰락을 예고한 중대한 전환점으로 기록할지 모른다. 그러나 호주가 
그런 노선을 견지한다고 해도 호주의 서구적 유산은 사라지지 않올 것이며 키팅이 한탄한 것처럼 '제국의 
지부'로서, 또 리 콴유가 경멸적으로 빗댄 '아시아의 새로운 백색 쓰레기'로서 영원히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것이 호주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국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호주인의 심정은 층분히 이해하지만 호주의 지도자들은 호주를 아시아 국가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키팅의 전임자 호크 총리가 시도하였던 것처럼 태평양 국가로 정의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만일 영국의 
군주제로부터 떨어져 나와 공화국으로서 새 출발을 하고 싶다면 호주는 마찬가지로 영국에 뿌리를 두었고 
이민자들이 세운 국가였으며 광대한 영토를 가졌고 영어가 공용어이며 세 번의 전쟁에서 호주와 함께 싸웠고 
유럽인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호주처럼 아시아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미국의 선례를 따를 수도 있다. 
문화적으로 보아 호주인의 정서에는 아시아 국가의 가치관보다 미국이 1776년 7월 4일에 단행한 독립선언의 
정신이 더 맞는다. 경제적으로 보아도, 문화적으로 낮설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호주를 거부하는 나라들의 
모임에 들어가려고 기를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호주의 지도자들은 NAFTA를 확대하여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하는 북미-남태평양(NASP) 협정을 체결하자는 안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런 집단화는 문화와 
경제를 조화시키고, 호주를 아시아화하겠다는 헛된 노력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견고하고 지속 가능한 정체성을 
호주에 제공할 것이다.
  서구의 바이러스와 문화적 정신 분열증
  호주의 지도자들은 아시아를 지향한 반면 다른 분열국-터키, 멕시코,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자기사회를 서구에 
통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고유 문화가 얼마나 완강하고 회복력이 강하고 끈끈하며 
스스로를 쇄신하고 서구로 부터의 유입물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억누르고 수정하는 능력이 뛰어난가를 똑똑히 
보여 주었다. 서구를 무조건 배격하는 입장도 불가능하지만 서구를 무조건 긍정하는 케말주의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비서구 사 회가 근대화에 성공하려면 서구의 방식이 아닌 자기 고유의 방식을 추구해야 하며 
일본처럼 자신의 전통, 제도, 가치관의 바탕 위에서 차곡차곡 쌓아 나가야 한다.
  자기 나라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에 젖어 있는 정치 지도자는 반드시 
실패한다. 서구 문화의 요소들을 도입할 수는 있겠지만 자기 고유 문화의 알맹이를 영원히 억제하거나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 일단 어떤 사회에 이식된 서구 바이러스는 좀처럼 말살하기가 어렵다. 그 바이러스는 
고질적으로 남아 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 환자는 살아 남지만 다시는 정상을 되찾지 못한다. 정치 지도자들은 
역사를 만들 수 있지만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들은 분열국을 만들 수는 있어도 서구 사회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문화적 정신 분열증에 감염시켜 그 수렁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하게 
만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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