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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5/문명의 충돌

7. 핵심국, 동심원, 문명의 질서

by FraisGout 2020. 7. 26.

  문명과 질서
  새롭게 형성되는 세계 정치의 판도에서 주요 문명의 핵심국들이 냉전 시대의 두 초강대국을 밀어내고 다른 
나라들의 접근과 배척을 낳는 중심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서구, 정교, 중화 문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경우 문명 집단은 핵심국. 소속국, 인접국에 거주 하는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소수 
집단, 이옷 나라에 거주하면서 갈등 관계에 놓여 있는 문화적으로 다른 민족들로 이루어진다. 문명 블록을 
구성하는 국가들은 대체로 하나 또는 여럿이 핵심국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들 위에 분포하며, 중심으로부터의 
거리는 해당 국가가 그 블록에 편입된 정도나 일체감의 정도를 반영한다. 폭넓게 인정되는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는 이슬람 문명은 공동 의식이 강화되고는 있지만 이슬람 세계의 공동적 정치 구조는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
  무릇 국가는 비슷한 문화를 가진 나라들과 뭉치려는 경향이 있으며 문화적 동질성이 결여된 나라들을 
견제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은 핵심국들의 태도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핵심국들의 중력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집단을 끌어당기고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을 밀어낸다. 안보상의 이유로 핵심국들은 다른 문명에 속한 일부 
민족들을 자신에게 편입시키거나 지배하려고 시도하지만 이들 민족은 다시 그러한 지배에 항거하거나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중국과 티베트 위구르의 관계, 러시아와 타타르, 체첸, 증앙아시아, 이슬람 교도의 관계) 
역사적 관계와 세력 균형을 고려 일부 국가들은 핵심국의 영향력 행사에 저항하기도 한다. 그루지야와 러시아는 
같은 정교 국가이지만 그루지야인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하였으며 러시아와 긴밀한 결속을 맺는데 
저항감을 보여 왔다. 베트남과 중국은 모두 유교 국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나라도 러시아와 그루지야에 못지 
않은 역사적 앙숙 관계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문화적 동질성과 광범위하고 강력한 문명 의식의 발전이 
서유럽 국가들이 뭉친 것처럼 이 두 나라를 결집시킬 가능성이 있다.
  냉전 시대의 세계 질서는 두 블록에 대한 양대 초강대국의 지배와 제 3세계에 대한 초강대국의 영향력 행사의 
산물이었다. 새로운 세계에서 초 강대국은 유명 무실해졌으며 지구 공동체도 요원한 꿈이 되어 버렸다. 미국을 
포함한 그 어느 국가도 세계적 차원의 안보 이해에 예전처럼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오늘날의 좀더 복잡하고 
이질적인 세계 질서를 이루는 성분들이 문명 내부와 문명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세계는 문명의 기초 위에서 
질서를 잡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질서가 확립되기 어려운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문명의 핵심국들은 
문명 내부에 존재하는 질서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다른 핵심국들과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문명과 문명 
사이에 성립하는 질서의 원천이다.
  핵심국이 선도하며 지배력을 행사하는 세계는 영향권들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그러나 핵심국의 영향력 행사는 
그 핵심국이 동일 문명에 포함된 소속국들과 공유하는 공동의 문화로 인하여 완화되고 절제된다. 문화적 
동질성은 핵심국이 소속국들뿐 아니라 외부 권력과 제도에 대하여 주도권을 행사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갈리(Boutros Boutros-Ghali) 유엔사무 총장이 I994년에 공표한 바 있는, 지역 강국이 유엔 
평화 유지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분의 1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영향권 억제'의 원칙은 헛된 구호일 뿐이다. 
그러한 요구는 지배적 국가가 존재하는 지역의 평화는 오직 그 지배국의 주도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지정학적 현실과 상치된다. 유엔은 지역 패권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지역 패권은 같은 문명안의 다른 
소속국들과의 관계에서 핵심국이 행사 할 때에만 일정한 무게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핵심국이 질서 부여 기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소속국들이 핵심국과의 문화적 유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문명은 가족의 확대판이며, 핵심국은 가족 안의 웃어른처럼 친척들을 돕고, 지켜야 할 원칙을 제시한다. 이러한 
유대감이 없을 때는 강한 힘을 가진 국가라도 자신의 지역에서 발생 한 분쟁을 해결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심지어는 스리랑카도 남아시아에서 인도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일본이 지역 패권 국가로 등장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문명에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문명 내부에 질서를 세우거나 다른 문명들과 질서를 구축하고자 
절충을 벌이는 작업도 한결 어려워진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독일이 크로아티아를 도왔던 것처럼 
보스니아를 합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이슬람 세계의 핵심국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부득이 그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역할이 유명 무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설정된 국경선에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걸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미국과 보스니 아사이에 문화적 연결 고리도 없었고 유럽 
각국이 유럽 안에 이슬람 국가 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수단 내전이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는 것도 아프리카와 아랍 세계에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는 데서 그 주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반면 
핵심국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핵심 국이 문명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국제 질서의 중추적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서구의 결속
  냉전 시대의 미국은 소련의 팽창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거대하고 다양한 성분을 
가진 다문명 국가군의 중심국이었다. '자유 세계', '서구', '연합국' 등 다양한 호칭을 가졌던 이들 국가군에는 서 
유럽 국가는 믈론 터키, 그리스, 일본, 한국, 필리핀, 이스라엘, 그리고 좀더 느슨하기는 하지만 대만, 태국, 
파키스탄 같은 나라가 들어갔다. 여기에 맞선 것은 이보다는 이질적 성격이 조금 약하지만 그리스를 제외한 모든 
정교 국가들, 역사적으로 서구에 들어갔던 몇 나라, 베트남, 쿠바, 그리고 좀더 느슨하기는 하지만 인도, 여기에 
때때로 아프리카의 몇 나라가 동참한 국가군이었다. 냉전이 끝나면서 이러한 다문명 국가군은 와해되었다. 소련 
체제의 봉괴 특히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붕괴는 그 극적인 표현이었다. 역시 다문명으로 구성된 냉전 시대의 
'자유 세계' 역시 좀더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서구 문명과 어느 정도 외연이 비슷한 새로운 국가군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다. 서구의 국제 기구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를 두고 현재 이합 집산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유럽 연합의 핵심국인 독일과 프랑스는 먼저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같은 내부 그룹에 둘러싸여 있다 
이 나라들은 모두 서유럽 지역에서 인적 물적 자원의 소통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제거하는 데 동의한다. 그 
다음이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덴마크, 영국, 아일랜드, 그리스 같은 회원국이고 다음이 l995년에 회원국이 
된 나라들(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그리고 1995년 현재 준회원국으로 남아 있는 나라들(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l994년 가을 독일의 집권당과 프랑스의 
고위관리들은 유럽 연합의 차등화 안을 내놓았다. 독일이 제시한 안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원래 회원국들이 '중핵' 
을 이루고 독일과 프랑스가 그 증핵의 핵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중핵 국가들은 빠른 시일 안에 단일 통화를 
제정하고 외교와 국방 정책을 통합하는 데 노력한다고 되어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발라뒤르(Edouard 
Balladur) 총리는 세 고리로 구성된 유럽 연합 안을 내놓았다. 이 안에 따르면 통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5개 
국가가 중심에 오고 나머지 현 회원국 들이 다음 원을 형성하며 장차 회원국이 될 나라들이 가장 바깥 원에 
들어 간다. 프랑스의 쥐페(Alain Iuppe) 외무 장관은 이 안을 더욱 가다듬어 동유럽과 중부 유럽을 포함하는 
가장 바깥 원의 동반 국가들, 몇몇 분야(단일 시장, 관세 연합 등)에서 공동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는 
회원국들로 이루어진 중간 원, 국방. 화폐 통합. 외교 정책 등에서 다른 나라들보다도 더욱 빠른 결속을 
추진하겠다는 적극적 의지와 역량을 가진 국가들 로 이루어진 '강화된 결속체'의 안쪽 원들을 제안하였다. 이 
밖에도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은 다양한 구성안을 내놓았지만 긴밀하게 결속된 내부 그룹과, 회원국과 비회원국을 
가르는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핵심국과의 완전한 통합을 미루는 나라들로 이루어진 외곽 그룹을 빠짐없이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대동 소이하다.
  유럽에서 그러한 경계선을 긋는 것은 탈냉전 세계에 들어와 서구가 직면한 가장 까다로운 숙제이다. 냉전 
시대만 하더라도 전체로서의 유럽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은 유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유럽의 북방, 남방, 서방 경계선은 모두 바다에 의해 확정되어 
있는데 남방 경계선은 뚜렷한 차이점을 가진 문화의 경계선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유럽의 동쪽 경계선은 
어디인가? 누구를 유럽인으로 간주할 것이며, 누구를 유럽 연합 NAT0, 또는 그에 상응하는 기구들의 잠재적 
구성왼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설득력 높고 포괄성 있는 해답은 수세기 전부터 서구 크리스트교권을 이슬람권과 
정교권에서 구분한 거대한 역사적 경계선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선은 서기 4세기의 로마 제국 분열과 10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 성립까지 거슬러올라간다. 현재의 선은 최소한 지난 5백 년 동안 기본적 골격을 유지하여 왔다. 
북쪽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핀란드와 러시아,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러시아의 국경선을 
따라 내려와서 서부 벨로루시를 지나고, 다시 우크라이나 서부의 연합동방 카톨릭 지역과 동부의 정교 지역을 
가르는 선과 포개지면서, 다시 루마니 아에서 카톨릭을 신봉하는 헝가리 인구가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 지역과 
나머지 지역을 나누는 선을 이루고,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를 여타 공화국들로부터 
구분하는 선으로 연결된다. 물론 발칸 지역에서 이 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구분선과도 일치한다. 이것은 유럽의 문화적 경계선이며, 탈냉전 시대에 들어 와서는 유럽과 서구의 정치 경제 
경계선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명 패러다임은 유럽이 어디에서 끝나는가라는 서유럽인 앞에 놓인 질문에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대답한다. 유럽은 서구 크리스트교가 끝나고 이슬람교와 정교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이것이 서유럽인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이다. 서유럽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낮은 목소리로 여기에 동조하며, 많은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들은 공공연하게 그러한 견해를 피력한다. 하워드(Michel Haword)의 지적처럼 소련의 지배를 거치면서 그 
위상이 애매 모호해진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구분을 다시금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중부 유럽에 들어가는 
지역은 한때 서구 크리스트교 세계의 일부를 형성한 지역과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을 이루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폴란드와 독일의 동부 변경 지대다. '동유럽'이라는 말은 정교의 방패 아래 
성장한 지역,다시 말해서 19세기에 와서야 겨우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같은 흑해 
연안의 국가들과 소련의 '유럽'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써야 한다... 그는 서유럽의 중차대한 과제가 '중부 
유럽의 인구를 그들이 당연히 소속되어야 하는 경제적, 문화적 공동체로 재흡수하여 런던, 파리, 뭔헨, 
라이프치히, 바르샤바, 프라하, 부다페스트 사이의 결속을 재구축하는 일이다.' 고 주장한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 베아르(Pierre Behar)는 .새로운 단층선이 출현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은 한편으로는 서구 크리스트교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로 특징짓는 유럽과 다른 한편으로는 동방 정교와 이슬람교로 
특징지워지는 유럽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문화의 경계선'이라고 말하였다. 핀란드의 한 고위 인사도 철의 
장막을 대신하여 유럽에서 중요한 분할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동과 서의 문화적 단충선은 
폴란드와 발트 국가뿐 아니라 과거 오스트리-헝가리 제국의 영토를 서유럽 안에 포진시키고 나머지 동유럽 
국가들을 그 바깥에 내놓는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한 저명한 영국인도 동의하듯이 이것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좀더 넓게는 크리스트교를 로마에서 직접 받아들였거나 켈트인이나 게르만인을 거쳐 받아들인 사람들과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을 통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동부와 남동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르는 거대한 
종교적 구분선이다.
  중부 유럽 사람들도 이러한 구분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공산주의의 유산으로부터 탈피하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면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는 나라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한편으로는 카톨릭,신교와 다른 
한편으로는 동방 정교를 가르는 신에 의하여 구별된다. 몇 세기 전부터 '두 문명'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였던 
리투아니아인은 라틴 세계를 택하여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법치에 바탕을 둔 국가 형태를 받아들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폴란드인도 비잔티움에 맞서 서방 크리스트 교를 선택한 지난 l0세기 이후로 자신들이 서구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동유럽의 정교 국가들은 이 문화적 단층선에 대한 새로운 강조 앞에서 양면적 
태도를 보인다. 불가리아인과 루마니아인은 서구의 일원이 되어 그 제도에 편입될 때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이득을 잘 알고 있지만 동방 정교의 전통에 충실하려고 한다. 특히 불가리아인은 러시아와 비잔틴 문명의 역사적 
친연성을 강조한다.
  유럽을 서구 크리스트교 세계로 정의하면 서방 기구가 새로운 회원을 받아들일 때 명확한 기준이 마련된다. 
유럽에 존재하는 서구의 증추적 실 체인 유럽 연합의 회원국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1994년 문화적으로 서구에 
속한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의 가입이 승인되면서 다시금 재개되었다. 1994년 봄 유럽 연합은 발트 국가들을 
제외하고 옛 소련의 모든 공화국들에게는 회원 자격을 주지 않는다는 잠정적 결정을 내렸다. EU는 또 4개 중부 
유럽 국가(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와 2개 동유럽 국가(루마니아, 불가리아)와 '공동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증에서 21세기를 맞이하기 전에 정식 회원국 자격을 획득할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설령 가입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보다는 중부 유럽 국가들이 더 먼저 EU 진입에 성공할 
것이다. 발트 국가들과 슬로베니아의 EU가입 전망은 아주 밝은 반면, 이슬람 교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터 
키, 너무 왜소한 말타, 정교권에 속하는 키프로즈의 가입 신청이 받아들여 질 전망은 1995년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EU의 범위를 확대하는 작업에서도 문화적으로 서구에 속하며 경제적으로 더 발달한 나라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이런 기준이 적용될 경우 비제그라드 국가군(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와 발트 3국,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말타가 결국 EU에 진입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럽 연합은 역시적으로 유럽에 
존재하여 온 서구 문명과 동일한 외연을 갖게 된다.
  문명의 논리는 NATO의 확대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결과를 예상한다. 냉전은 증부유럽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군사적 지배 확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그것을 저지하고 필요하다면 소련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NATO를 결성하였다. 탈냉전 시대의 NAT0는 서구 문명의 안보 기구이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NAT0는 증부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정치적, 군사적 지배 재개를 막는다는 중요한 당면 목표를 설정하였다. 
서구의 안보 기구로서 NAT0는 여기에 동참할 의사가 있고 군시적 역량, 정치적 민주주의, 군부에 대한 민간의 
통제 같은 기본적 요건을 층족 시키는 서구 국가들에게 차츰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탈냉전 시대의 유럽 안보 체제를 바라보는 미국의 정책이 처음에는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라는 구상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처럼 유럽 국가는 물론 유라시아 국가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보편주의적 발상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접근법은 유럽 안보 협력 기구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런 태도는 1994년 1월 유럽을 
방문한 클린턴 대통령의 연설에도 반영되어 있다. 자유의 경계선은 지난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유럽에 새로운 경계선을 그리려는 모든 당사자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유럽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미래상을 배제해서 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도처에서 꽃을 피우고 시장 경제가 
도처에서 뿌리 내리고 국가들이 공동의 안보를 위헤 협력하는 미래상이다. 우리는 미지근한 성과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미 행정부는 '지난 역사가 정의한 경계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문명적 
차이점이라는 현실을 반영하는 '미지근한 성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이어서 슬로베니아, 나중에는 아마도 발트 국가들까지 포함시키는 NAT0 확대 방안의 
기준과 일정을 적극적으로 마련하였다.
  러시아는 NAT0의 확대를 극력 반대한다. 자유주의와 친서방적 태도를 보이는 러시아 인사들도 NATO의 
확대가 러시아 내의 민족주의 세력과 반서구 정치 세력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여기에 반대하 
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서구 크리스트교 세력권에 들어갔던 나라들로만 NAT0의 확대 범위를 제한할 경우,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몰도바, 벨로루시가, 또 분열되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도 NAT0의 울타리 바깥에 
남아 있으리라는 확신을 러시아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NATO의 가입 자격을 서구 국가에 한정시키는 안은 
또한 서구 문명과 뚜렷이 구분 되는 정교 문명의 핵심국으로서 러시아가 가지는 역할을 존증한다. 러시아는 정교 
문명 안에서, 또 정교 문명의 경계선에서 질서 유지의 책임을 지닌 국가로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국가들을 문명에 따라 차등화하는 전략의 효용성은 발트 공화국들의 예에서 확연히 입증되었다. 발트 3국은 옛 
소련 공화국들 중에서 역사, 문화, 종교에서 뚜렷이 서구적 성격을 가진 나라들이었으므로 서구는 이들의 운명을 
예의 주시하였다. 미국은 소련의 발트 지역 병합을 공식적으로는 한번도 인정한 적이 없고 소련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이 지역의 독럽 운동올 지원하면서 이들 공화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한 합의를 예정대로 실행에 
옮기도록 러시아측에 촉구하였다. 발트 3국은 러시아가 옛 소련 공화국들을 대상으로 확립하려고 노력하는 
영향권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 정부가 러시아에게 보낸 일관된 메시지였다. 
스웨덴 총리가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클린턴 행정부의 노력은 유럽의 안보와 안정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발트 공화국들에 대한 서구의 명백한 지지 앞에서 극우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보복 계획은 헛 된것이라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러시아의 민주주의 세력을 도왔다.
  EU와 NAT0의 확대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느낌이 들지만 이들 기구의 문화적 구조 개편은 이 기구들이 
축소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시사 한다. 유일한 비서구 국가인 그리스는 두 기구에 모두 소속되어 있고 또 
하나의 비서구 국가인 터키는 NAT0 회원국으로서 EU 가입 신청을 한 상태이다. 이 관계는 냉전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얼개가 탈냉전 문명 세계에 서도 존속할수 있을까?
  터키의 유럽 연합 정식 회원국 가입을 두고 적잖은 갈등이 빚어지고 있으며 복지당은 NAT0 가입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복지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거나 터키가 의식적으로 케말의 유산을 부정하고 이슬람의 
지도국으로 자신을 재정의하지 않는 한 터키는 NAT0에 잔류할 것이다. 터키의 이슬람 지향 노선은 개연성이 
층분히 있고 또 바람직한 측면도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채택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NATO에서 어떤 역할 
을 떠맡게 되건 터키는 발칸 지역, 아랍 세계, 중앙아시아에 걸려 있는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점차 강하게 
추구할 것이다.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일원은 아니지만 서구 문명의 모태가 된 고전 문명의 발원지이다.
   그리스는 터키에 맞서면서 역사적으로 크리스트교의 기수임을 자임해 왔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와는 
달리 그리스의 역사는 서구의 역사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그리스는 예외적 존재이며 서구 문명 안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정교 국가이다. 그리스는 EU 와 NATO에서 모범적인 회원국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양기구의 원칙과 관행에 적응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 증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그리스는 군사 
정권의 지배를 받았으며 민주 정부로 이행한 다음 에야 비로소 유럽 연합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지도자들은 서구적 기준으로부터 자주 이탈하면서 서방 각국 정부에 도전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곤 하였다. 
그리스는 EU와 NATO의 다른 회원국들보다 가난하였으며 브뤼셀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비웃는 듯한 경제 
정책을 추구하기 일쑤였다. 1994년 EU의 의장국으로서 그리스가 보인 행동은 다른 회원국들을 격분시켰으며 
서유럽 관리들은 그리스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것이 실수였다고 사석에서 토로하는 실정이다.
  탈냉전 시대의 그리스 정책은 점점 서구의 정책에서 이탈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봉쇄는 유럽 여러 나라의 반발을 사 그리스가 유럽 재판소에 제소되는 불상사를 낳았다.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분쟁에서 그리스는 서방 주요국이 추구하는 정책에서 이탈하여 세르비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세르비아에 대한 유엔의 제재 조치를 노골적으로 위반하였다.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진 오늘날 
그리스는 공동의 적 터키에 맞서고자 러시아에 접근하고 있다. 덕분에 러시아는 그리스령 키프로스에서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하였으며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동방 정교를 공유하는 러시아인과 세르비아인을 환영 
하였다. 1995년 현재 키프로스에 진출한 러시아인 소유의 기업은 2천여 개에 달하며 러시아어 신문과 
세르보-크로아티아어 신문도 이곳에서 간행 되고 있다.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제공받고 있다. 그리스는 또한 러시아와 함께 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의 원유를 터키와 여타 이슬람 국가들을 
경유하지 않고 불가리아-그리스 파이 프라인을 통해 지중해로 수송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전체적으로 그리스의 
대외 정책은 정교 지향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그리스는 의심할 바 없이 NAT0와 EU의 공식 회원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구조 재편이 강화되면서 유럽 기구 회원국으로서 그리스의 지위는 점점 의미를 잃고 
약해질 것이며 관련국들에게 고통을 안길 것이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의 적대국이었던 나라가 탈냉전 시대에는 
러시아의 동맹국으로 돌아서고 있다.
  러시아의 가까운 외국
  차르와 공산주의 제국의 계승자는 유럽에 존재하는 서구 문명과 많은 점에서 평행선을 달리는 문명 블록이다. 
프랑스와 독일처럼 그 핵심부에 존재하는 러시아는 슬라브 정교를 신봉하는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두 나라 
벨로루시와 몰도바, 전체 인구의 40퍼센트가 러시아인인 카자흐스탄,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맹방인인 
아르메니아로 이루어진 내부 원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990년대 중반 현재 이 나라들에서는 모두 선거를 
통하여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서 있다. 러시아와 그루지야(정교 인구가 압도적 다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정교 
인구가 우위)의 관계는 가깝지만 깊지는 않다.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는 민족 의식이 강하고 독립국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정교가 지배하는 발칸 지역에서 러시아는 불가리아, 그리스. 세르비아 키프로스와 밀월 
관계를 누리고 있으며 루마니아와는 덜 가깝게 지낸다. 옛 소련의 이슬람 공화국들은 경제적으로도 안보 
부문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늦다. 반면에 발트 공화국들은 유럽의 견인력에 이끌리면서 러시아의 
영향권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빠져 나왔다.
  전체적으로 보아 러시아는 자신의 주도 아래 정교의 심장부로서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이슬람 국가들로 둘러싸인 완층 지대를 만들어 이슬람 국가들을 다양한 수준으로 지배하면서 다른 열강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하석 노력할 것이다. 러시아는 또한 세계가 이러한 체제를 수용하고 승인하기를 바란다. 
1993년 2월 옐친이 말한 것처럼 외국 정부들과 국제 기구들은 예전의 소련 지역에서 평화와 안전의 보장자로서 
러시아가 갖는 특수한 힘을 인정할 필요성이 있다. 소련이 지구적 관심을 가진 초강대국이었다면, 러시아는 
지역적, 문명적 관심사를 지닌 강대국이다.
  옛 소련의 정교 국가들은 유라시아와 세계 무대에서 응집력 있는 러시아 블록이 발전하는 데 증추적 역할을 
한다.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이 지역의 5개 나라는 처음에는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독립성과 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4개 공화국의 유권자들은 경제적, 
지정학적, 문화적 현실에 부딪히면서 친러시아 정부를 선택함으로써 과거의 친러시아 정책으로 회귀하였다. 이 
지역 국민들은 러시아의 지원과 보호를 기대한다. 유일한 예외였던 그루지야도 러시아의 군사 개입 이후 정부의 
태도에서 비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동일한 이해 관계에 따라 움직였으며 러시아는 인접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아르메니아를 수호한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소련이 붕괴한 뒤로 이러한 관계가 부활되었다. 아르메니아인은 
러시아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의존하며 옛 소련 공화국들과 관계된 문제에서도 러시아 편을 든다. 두 나라의 
전략적 이해는 하나로 수렴한다.
  벨로루시는 아르메니아와 달리 민족 의식이 희박하다. 게다가 러시아의 지원에 대한 의존도가 한결 심하다. 
벨로루시 국민의 상당수는 자신이 조국뿐 아니라 러시아에도 속해 있다고 느끼는 듯하다. 1994년 1월의 선거에서 
중도파와 온건 민족주의 세력이 후퇴하고 친러시아 성향의 보수 세력이 약진하였다. 1994년 7월의 대선에서는 
극단적인 친러시아파로서 지리노프스키와도 절친한 인물이 80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다. 
벨로루시는 독립국가연합에 일찌감치 합류하였고 I993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체결한 경제 연합의 창립 
회원이었다. 또 러시아와 화폐 연합을 맺기로 합의하였고 자신의 핵무기를 러시아에게 양도하였으며 금세기 
말까지 러시아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기로 합의하였다. 1995년 벨로 루시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사실상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소견의 붕괴로 몰도바가 독립 하자 종국적으로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재통합을 점치는 견해가 많았다. 이러한 
사태 전개에 대한 우려는 러시아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동부 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자극하였다. 
오스크바의 은밀한 지원과 러시아 육군 제l4군단의 적극적 지원을 등에 업은 자치 운동으로 트랜스-드네스트르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루마니아와의 통합을 바라는 몰도바 국민의 열기는 두 나라의 경제적 문제와 러시아의 
경제적 압력으로 인해 한풀 꺾였다. 몰도바는 독럽국가연합에 가입하였고 러시아와의 교역량이 늘어났다. 1994년 
2월 친러시아 성향의 정당들이 의 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이 세 나라에서는 전략적, 경제적 이해 관계가 얽혀 국민 여론이 러시아와의 긴밀한 결속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비슷한 경향이 심지어는 우크라이나에서도 결국 나타났다. 그루지야에서는 사태의 전개 양상이 약간 
다르다. 그루지야는 l801년 왕이 터키의 위협에 맞서 러시아에게 보호를 부탁하기 전까지는 줄곧 독립국이었다. 
러시아 혁명이 터진 뒤 3년 동안, 그러니까 1918부터 1921년까지 그루지야는 다시 독립국이 되었지만 
볼셰비키들이 그루지야를 소련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소련이 붕괴하자 그 루지야는 다시금 독럽을 선언하였다. 
민족주의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대통령이 국민을 억압하척 제 무덤을 팠고 결국 폭력으로 
전복되었다. 소련의 외무 장관을 지낸 셰바르드나제(Eduard A. Shevardnadze)가 조국을 이끌기 위해 돌아와 
1992년과 1995년의 선거에서 연달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의 실질적 지원을 받는 압하스의 
분리주의 운동과 쫓겨난 감사후르디아(Gamsakhurdia)가 이끄는 반군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 역시 예전의 
왕처럼 우리에겐 뾰족한 수가 없다. 는 결론을 내리고 모스크바에 도움을 청하였다. 그루지야가 독립국가연합에 
합류한다는 조건으로 러시아 군대가 개입하여 셰바르드나제를 지원하였다. 1994년 그루지야인들은 러시아가 
그루지야 영토에서 3개 군사 기지를 일정한 시효 없이 유지하도록 허용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처음에는 그루지야 
정부를 약화시켰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지탱시켜 준 러시아의 군사 개입은 이처럼 독립 의식이 강한 그루지야를 
러시아 진영에 묶어 두는 성과를 낳았다.
  러시아를 제외하고 옛 소련 공화국들 중에서 가장 인구도 많고 비중이 큰 나라는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모스크바가 
통치하는 정치적 실체의 일부로 머물렀다. 그 결정적 전기가 되는 해는 1654년이었다. 당시 폴란드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코사크 지도자 흐멜니츠키 (Bohdan Khmelnytsky)는 폴란드와의 항쟁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얻는 대가로 차르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 이후 1991년까지, l917년에서 1920년까지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모스크바의 지배를 내내 받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2개의 상이한 문화를 가진 단절국이다. 서구 
문명과 정교 문명의 단층선이 몇 세기째 우크라이나의 심장부를 가로지르고 있다. 과거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오스트리-헝가리 제국의 일부로 여러 차례 편입되었다. 서부 우크라이나 주민의 대다수는 
정교에서 요구하는 종교 의식을 준수하지만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연합 동방카톨릭 신자다. 역사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를 썼고 민족 의식이 유난히 강하다. 반면 동부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정교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대부분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쓴다. 1990년대 초반 전체 우크라이나 인구 증에서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22퍼센트이며 러시아어 사용 인구는 31퍼센트에 이른다. 러시아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의 숫자도 많다. 크리미아 지역은 러시아인이 압도적으로 많이 거주하며 l954년 
흐루시초프가 표면상으로는 500년 전에 있었던 흐멜니츠키의 결정을 인정하여 우크라이나에 할양하기 전까지는 
러시아 연방의 일부였다.
  동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차이는 양 지역 주민의 태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가령 l992년 말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서부 지역에서는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였으나 
동부 지역에서는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동서의 분열은 1994년 7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러시아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민족주의를 표방한 현직 대통령 크라프추크(Leonid Kravchuk) 
는 일부 지역에서 90퍼센트가 넘는 지지율을 과시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의 l5개 주를 장악하였다. 그의 
정적으로 유세 기간에 비로소 우크라이나어를 배운 쿠츠마(Leonid Kuchma)는 역시 압도적인 지지로 동부 
우크라이나의 l3개 주를 장악하였다. 쿠츠마는 모두 52퍼센트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1994년의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은 근소한 차이로 l654년에 있었던 흐멜니츠키의 결정을 추인한 셈이었다. 한 미국 외교관은 
선거는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놓고 서부 우크라이나의 유럽화한 슬라브인과 러시아-슬라브 주민 사이에 
가로놓인 갈등을 반영하였으며 심지어는 이것을 공고히 다지는 측면도 있었다. 이것은 민족적 대립이라기 보다는 
상이한 문화들의 대립이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분열의 여파로서 앞으로 예상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관계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1990년대 초반 두 나라 사이에는 핵무기, 크리미아 반도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권리, 흑해 함대, 
경제 관계 등 중요한 현안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무력 충돌 가능성을 점쳤고 일부 서구 분석가들은 러시아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하여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보유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명의 역할이 
크다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무력 층돌 가능성은 낮다. 이들은 둘다 슬라브 민족이고 인구 중에서 정교 신자가 
다수를 점하며 수세기 동안 가까운 관계를 맺어 왔고 무수히 많은 혼인 관계로 얽혀 있다. 이것은 아주 민감한 
사안들이며 양국의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가하는 압력 또한 거세지만,양국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이견이 상당히 
좁혀 들었다. 1994년 중반에 치러진 선거에서 명백한 친러시아적 노선을 추구하는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두 나라의 분쟁이 악화될 소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옛 소련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이슬람 세력과 크리스트교 세력 
사이에서 심각한 충돌이 발생하고 러시아와 발트 국가들 사이에서 심각한 대립과 분쟁이 표출 되기도 하였지만 
1995년까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실력 대결을 벌인 적은 없었다.
  두 번째의 좀더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는 우크라이나가 단층선을 따라 두 개의 실체로 분리되고 동부 지역이 
러시아에 병합되는 길이다. 분리 운동은 크리미아 지역에서 먼저 불거졌다. 러시아인이 70퍼센트를 차지하는 
크리미아 공화국은 1991년 l2월에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소련으로부터의 우크라이나 독립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1992년 크리미아 공화국 의회는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의결하였다가 우크라이나측의 압력으로 
그 결정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의회는 1954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크리미아 할양 결정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하였다. 1994년 1월 크리미아 지역 주민들은 선거 공약으로 '러시아와의 통합'을 내건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여기에 자극받아 일부에서는 '크리미아는 제2의 나고르노-카라바흐나 압하지아가 될 것인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답은 아니다!로 판명났다. 독립을 묻는 국민 투표를 결행하겠다고 공표하던 
신임 크리미아 대통령이 한 걸음 물러서 우크라이나 정부와 절층을 벌인 것이다. 1994년 크리미아 의회가 사실상 
우크라이나로부터 벗어난 독립국임을 선포한 1992년의 헌법을 부활하기로 결의하면서 다시금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자제력을 발휘하여 이 문제가 폭력으로 치닫지 않았고 두 달 
뒤 치러진 선거에서 친러시아 노선의 쿠츠마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크리미아 지역의 분리주의 
열기도 한풀 꺾였다.
  그러나 그 선거는 러시아와 점점 가까와지는 우크라이나에서 서부 지역이 떨어져 나올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일부 러시아인은 오히려 그것을 환영할지 모른다. 한 러시아 장성은 우크라이나, 아니 동부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5년이나 l0년,아니면 15년 안에 돌아을 것이다. 서부 우크라이나는 지옥에나 가라지!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서구 지향의 우크라이나 연합동방카톨릭 세력은 강력한 의지와 서구의 효과적인 지원이 있어야만 독립 
이후에도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구의 지원은 서구와 러시아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냉전과 유사한 상황에 놓일 때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욱 가능성 있는 세 번째 시나리오는 우크라이나가 분리되지 않은 채 단절국으로 남아 있으면서 
독립국으로서 러시아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다. 핵무기와 군사력과 관련한 민감한 문제가 일단 
매듭지어지면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문제인데, 이것은 문화적 유대감과 활발한 민간 차원의 교류에 
힘입어 원만히 해결될 가능성이 늦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가 동유럽에서 가지는 성격은 모리슨(John 
Morrison)의 지적대로 독일-프랑스 관계가 서유럽에서 차지하는 성격과 유사하다. 후자가 유럽 연합의 핵심을 
이루듯 전자는 정교 세계를 응집시키는 중심 세력이다
  대중국과 공영권
  중국은 역사적으로 자신을 한반도, 베트남, 때로는 일본을 포함하는 '중화 지대', 비증국계가 거주하지만 
안보상의 이유로 증국이 지배하는 만주, 몽골, 위구르, 튀르크, 티베트로 이루어진 '아시아 내곽 지대' 
야만족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칠 것으로 기대되었던 '외곽 지대'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로 이해하였다. 현재의 중화 문명 역시 비슷한 양식으로 구조화되고 있다. 중심부에는 한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이 있으며, 중국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그 바깥의 지역들, 법적으로 중국의 
영토이지만 다른 문명에 속한 비중국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들(티베트, 신장), 일정한 조건 아래 베이징이 
주도하는 중국의 일원이 될 의사가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은 중국계 사회(흥콩, 대만), 점점 베이징에 접근해 
가는 중국계가 주도하는 국가(싱가포르), 화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그리고 증국계는 아니지만 증국의 유교 문화를 상당 부분 공유하는 나라들(북한, 한국, 베트남)이 있다.
  1950년대 중국은 소련의 우방국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중소 분쟁 이후 중국은 두 초강대국에 맞서는 제3세계의 
지도자 역할을 자임하였지만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닉슨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이 바뀌자 
중국은 두 초강대국이 벌이는 세력 다틈에서 제3의 균형추 역할을 맡으려고 애쓰면서, 미국이 약해 보였던 
1970년대에는 미국의 편을 들었고 미국의 군사력이 강화되고 소련이 경제적으로 쇠퇴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 빠졌던 1980년대에는 등거리 노선으로 궤도 수정을 하였다. 그러나 초강대국간의 경쟁 시대가 끝나자 
'중국 카드' 는 효력을 잃었고 중국은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은 
두 가지 목표를 정하였다. 하나는 다른 모든 중국 공동체를 결집시킬 수 있는 중국 문화의 기수, 문명의 
핵심국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l9세기 에 상실한 자신의 역사적 지위, 곧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새로운 중국의 역할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첫째, 그것은 중국이 국제 문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둘째, 해외 화교와 중국의 경제적 결속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셋째, 증국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중국적 색채가 강한 세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관계가 강화되고 있으며, 화교가 증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남아시아 각 국이 중국에 점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증국 정부는 증국 본토를 증국 문명의 핵심국으로 이해하고 다른 모든 중국인 공동체가 이 핵심국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정부는 해외의 각국 공산당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관철한다는 전략을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하고 중국적인 것의 세계적 대변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의하려고 노력해 왔다. 증국 정부는 비록 다른 
국가의 시민이라 할지 라도 중국인의 후예는 중국 사회의 일원이며 따라서 증국 정부의 권위를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체성은 인종적 용어로 정의된다. 한 증국 학자의 말대로 중국인은 같은 
'인종, 피,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다. 1990년대 중반을 고비로 이러한 주제가 중국 관리와 민간인들 사이에 자주 
거론되고 있다. 중국인과 해외의 비중국계 사회에 거주하는 중국인 후예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은 '거울 실험'을 
통해 확인된다.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라'는 것이 외국 사회에 동화하려고 애쓰는 중국인 후예들에게 베이징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이 던지는 충고다. 재외 중국인, 즉 중국 본토에 거주하는 중국인과 구별되는 증국계의 화인은 
자신들의 공동 의식의 상징물로서 중국 문화의 개념을 점차 부각시키고 있다. 20세기 서구의 수많은 공격에 
시달렸던 중국인의 정체성은 중국 문화의 지속적 요소들에 의하여 다시금 복구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정체성은 중국의 중앙 정부와 제외 증국인 집단들이 맺었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유지되었다. 이 문화적 정체성은 여러 중국들 사이의 경제적 관계 확대를 도우며 역으로 이 관계 확대가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중국 본토와 여타 지역에서 급격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이러한 동질감이었다. 증국의 경제 발전은 문화적 정체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물질적, 심리적 발판을 제공 
한다.
  '대중국'은 그러므로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급속히 성장하는 문화적, 경제적 현실이며 이제는 
정치적 현실의 성격까지 띠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극적으로 전개된 동아시아 경제 발전을 주도한 
것은 본토, 호랑이들(네 마리 증에서 한국을 제외한 세 마리가 증국계), 동남아시아의 중국인이었다. 동아시아의 
경제는 점차 중국 중심, 중국 주도로 운영되고 있다. 흥콩,대만,싱가포르의 중국인은 1990년대 본토에서 이루어진 
눈부신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자본을 실질적으로 제공하였던 층이다. 그 밖에도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이 
지역 경제를 틀어쥐고 있다. 1990년대 초반 필리핀 인구 중에서 1퍼센트에 불과한 중국인이 필리핀 국내 기업 
총매출액의 35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l980년데 중반 전체 인구의 2-3퍼센트를 차지하는 
중국인이 국네 민간 자본의 70퍼센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25대 기업 가운데 l7개가 화교 소유였으며, 한 화교 
재벌은 인도네시아 GNP의 5퍼센트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1990년대 초반 태국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화교가 10개 대기업 가운데 9개를 소유하였으며 태국 GNP의 50퍼센트가 화교의 몫이었다. 화교는 말레이시아 
인구의 3분의 l이지만 말레이시아 경제를 거의 장악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경제는 
기본적으로 중국 경제이다.
  대중국 공영권의 출현을 크게 도운 것은 가족 관계와 개인적 친분 관계의 촘촘히 얽힌 연결망과 문화적 
동질감이었다. 해외 화교는 서구인이나 일본인보다 중국에서 사업을 벌이기가 횔씬 쉽다. 중국에서는 신뢰와 
헌신이 계약, 법규 공적 문서보다 개인적 약속에 좌우된다. 서방 기업인들은 인도에서 사업을 벌이기가, 합의의 
존중이 당사자간의 개인 관계에 달려 있는 중국보다는 훨씬 낫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일본의 한 유력 
인사가 1995년에 부러워한 것처럼 중국은 홍콩, 대만, 동남아시아 화교 상인들과 형성된 국경 없는 네트워크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미국의 한 기업인도 비슷한 맥락에서 화교는 기업가식 수완에다 언어 면에서 유리 하며 
가족 관계에 바탕을 둔 연줄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그것은 애이크론이나 필라델피아의 이사회에 꼬박꼬박 
보고를 해야 하는 사람에 비하면 엄청난 이점이라고 실토한다.
  본토와 거래하는 해외 화교가 누리는 이점은 리탄유도 곧잘 지적한다. '우리는 인종적으로 증국인이다. 우리는 
같은 조상과 문화를 통하여 어떤 특질을 공유한다..... 사람들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호감을 가진다. 이러한 친밀감은 그들이 문화와 언어의 토대를 공유 할 때 더욱 강화된다. 이것은 모든 사업 
관계의 기초를 이루는 화합과 신뢰의 분위기를 낳는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화교는 같은 언어와 문화를 
바탕으로 한 '관계'가 법치의 결여, 법규 및 관계에서 투명성의 결여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을 세계 만방의 
회의론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공동 문화에 뿌리를 둔 경제 발전의 저력은 1993년 11월 홍콩에서 열린 제2차 세계 
중국인 기업가 모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 모임은 세계 전역의 중국인 기업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중국 
승리의 자축연으로 되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화 세계에서도 문화의 동질성이 세계의 결속을 강화한다.
  중국 경제가 10여 년 동안 급속히 발전하다가 천안문 사건 이후 서방 각 국이 중국의 경제적 진출이 급속히 
감소하였을 때 해외 화교들은 이것을 호기로 보고 문화적 유대감과 개인적 연줄을 이용하여 중국에 대대적인 
투자를 김행하였다. 그 결과 중국계 공동체들 사이의 경제적 결속이 급격히 강화되었다. 1992년 대 중국 외국인 
직접 투자의 80퍼센트(113억 달러)가 홍콩(68.3퍼센트), 대만(9.3퍼센트), 싱가포르, 마카오 등 화교들 손에 
이루어졌다 반면 일본의 투자는 전체의 6.6퍼센트, 미국의 투자는 4.6퍼센트에 그쳤다 500억 달러 규모에 이르는 
외국인 투자 누적액의 67퍼센트를 화교가 담당하였다. 교역 확대도 인상적이다. 1986년 거의 전무하던 대만의 
중국 수출이 1992년에는 대만 총수출액의 8퍼센트를 차지하였으며 이 해의 수출 신장률은 무려 35퍼센트에 
달했다. 1992년 싱가포르의 전체 수출 증가을은 2퍼센트에 못 미쳤지만 대 중국 수출은 22퍼센트나 늘어났다.
  1993년 웨이든바움(Murray Weidenbaum)이 지적한 것처럼 이 지역은 현재 일본이 지배하지만 증국 주도의 
아시아 경제가 산업, 통상, 금융의 새로운 중심점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이 전략 지역은 기술력과 제조력 
(대만), 경영, 마케팅, 서비스 분야의 탁월한 노하우(흥콩), 첨단 통신망(싱가포르), 막대한 자금력(세 나라 모두), 
풍부한 토지, 자원, 노동력(증국 본토)을 두루 갖추고 있다. 특히 중국 본토는 신흥 시장 중에서도 가장 큰 발전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1990년대 중반 현재 중국에 대한 투자는 수출 보다는 점차 내수 시장을 겨냥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동남아시아 각지의 화교가 현지에 동화된 수준은 다양하다. 현지인들은 중국인에 반감을 표출할 때가 자주 
있는데 이 반감은 1994년 4월에 발생 한 인도네시아의 메단 소요처럼 폭력으로 분출되기도 한다. 일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중국 본토에 대한 화교의 투자를 .'자본 도피' 라고 비난하였다. 수하르토 
대통령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도자들은 이것이 자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설득시켜야 했다. 그에 대응하여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자신들이 선조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층성을 바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l990년대 초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으로의 자본 유출은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에 대한 대만의 대규모 투자로 어느 정도 균형을 회복하였다.
  경제력이 증대하고 동질적 증국 문화라는 바탕 위에서 홍콩, 대만, 싱가 포르와 중국 본토의 결속도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홍콩의 중국 복귀 시기가 임박하면서 홍콩의 증국인들은 런던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홍콩의 기업인들과 각계 지도자들은 중국을 함부로 비판하지 못하며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위를 가급적 피하려고 애쓴다. 중국을 공격하는 세력에게 증국 정부는 지체없이 보복을 가하였다. 
1994년 현재 수백 명의 흥콩 기업인이 베이징의 협조 아래 '홍콩 자문단'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상 예비 
내각과 다를 바 없다. l990)년대 초반에 들어와 흥콩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대폭 강화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1995년 중국의 대 홍콩 투자는 일본과 미국의 투자를 합산한 규모를 능가하였다. 1990년대 증반까지 흥콩과 증국 
본토의 경제적 통합은 거의 완료되었다. 정치적 통합 또한 1997년에 가서 완성될 것이다.
  대만과 중국 본토의 결속은 흥콩보다는 미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1949년 이후 30년 동안 두 중국은 서로의 존재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호 대화를 하지 않았으며 
간헐적으로 해안 도서에서 교전을 하는 준전시 상태에 있었다. 덩 샤오핑이 권력을 장악하고 경제 개혁을 
착수하면서 중국 정부는 일련의 유화책을 제시하였다. 1981년 대만 정부는 이에 화답하여 그때까지의 본토와의 
부담판, 부접촉, 불타협이라는 3불 정책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 5월 양국 대표단이 피랍된 대만 
항공기의 귀환 문제를 놓고 최초로 협상을 벌였으며, 이듬해 대만은 중국 본토에 대한 여행 규제를 풀었다.
  그 이후로 가속화한 대만과 중국의 경제 관계 확대는 '증국적 동질감' 과 거기서 비롯된 상호 신뢰에 크게 
힘입었다. 대만측 협상 대표가 지적한 것처럼 대만인과 증국인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정서를 공유하며 쌍방의 
업적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1993년 말까지 본토를 방문한 대만인은 420만 명에 이르며 대만을 방문한 
본토인은 4만 명에 달한다. 매일 4만 통의 편지, 1만 3천 통의 전화가 오갔다. 대만과 증국의 교역량은 1993년 
l44억 달러에 달하였고 대만의 2만 개 기업이 본토에 투자한 자본은 15억 달러에서 30억 달러 규모에 이르렀다. 
대만의 관심은 점점 본토에 기울고 있으며 대만의 경제적 성공 역시 본토에 좌우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가장 중요한 시장은 미국이었다." 고 대만의 한 관리는 1993년 
보고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우리는 대만 경제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본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내의 노동력 부족 현상에 직면한 대만 투자가들이 가장 큰 매력을 느끼는 요소는 증국의 값싼 
노동력이다. 1994년 두 증국의 자본-노동 불균형을 시정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대만의 어업 회사들이 1만 명의 
증국인 선원을 고용하였다.
  경제 결속의 강화는 두 나라 정부를 대화로 이끌었다. 양국간 대화를 위해 199l년 대만은 해협 교류 
협회(Straits Exchanse Foundation)를 설립하였고 증국은 대만 해협 관계 협회(Association for Relations across 
the Tiwan Strait)를 발족시켰다 그들의 첫 회담은 1993년 4월 싱가포르에서 열렸고 후속 회담은 중국 본토와 
대만에서 열렸다. 1994년 8월 다수의 증요 사안 들을 포괄하는 '획기적' 협정이 타결되면서 양국 정부 최고 
지도자들 사이의 정상 회담 가능성이 점쳐지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중반 현재 중국과 대만 사이에는 대만의 국제기구 참여, 대만이 독립국으로서 스스로를 새롭게 
규정할 가능성 같은 민감한 사안이 엄존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의 독립 선포 가능성은 희박하다.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던 대만의 민진당이 본토와의 기존 관계가 손상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이 문제를 강하게 밀어붙일 경우 
선거에서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민진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집권하더라도 곧바로 독립을 선포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강조 하였다. 두 나라 정부는 또한 남중국해의 
스프래틀리 제도를 비롯한 도서 지역에서 중국의 주권을 확럽하고 중국 본토가 미국으로부터 무역 최혜국 
대우를 받는 문제 등에서 보조를 맞추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두 중국은 느리지만 가시적으로 쌍방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과정에 들어 섰으며 경제 관계의 확대와 문화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공동의 이익을 
발전시키고 있다.
  화합의 추세는 1995년 대만 정부가 국제 기구 가입과 외교적 승인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갑자기 냉각되었다. 리 
덩후이 총통은 '개인'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였으며 대만은 1995년 12월에 총선을, l996년 3월에는 대선을 
치렀다. 그에 대응하여 중국은 대만의 주요 항구에 인접한 해역에서 미사일 실험을 강행하였고 대만이 관할하는 
도서 지역이 가까운 인근 해상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두 가지 증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현 상태에서 대만은 형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지 않고도 민주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앞으로 
대만은 실질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않고도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상 대만과 본토의 관계는 두 단계를 거쳐 바야흐로 세 번째 단계로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자신이 중국 전체의 정부라는 입장을 고수하여 왔으며 이러한 입장은 대만을 
제외하고 전체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l980년대에 들어서자 대만 정부는 이러한 허세를 
포기하고 자신을 대만의 정부로 정의 하였다. 그에 따라 '1국가 2체제'라는 본토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대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 중국이 대만을 지배한 기간이 비교적 짧다는 사실, 
대만어와 북경어가 소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대만 국민과 단체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대만 
사회를 비중국계 사회로 정의하면서 대만의 독립성을 쟁취하려고 시도한다. 대만 정부 역시 국제 사회에서의 
활동을 강화하면서 대만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별개의 국가임을 강조하는 듯한 조짐을 보인다. 요약하자면, 
대만 정부의 자기 이해는 전체 중국의 정부에서 중국 일부의 정부로, 다시 중국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정부로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다. 독립을 사실상 공식화하는 마지막 견해는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중국 정부는 대만의 독럽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할 뜻이 있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중국 정부 지도자들도 1997년의 흥콩 반환과 1999년의 마카오 반환이 이루어진 다음 
대만과의 재통합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앞으로의 사태 발전은 대만에서 공식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여론의 열기. 정치 지도자와 군부의 민족주의 성향을 부추길 증국의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 투쟁의 강도 대만의 
봉쇄나 침공을 성사시킬 만한 중국의 군사력 발전 수준에 달려 있다. 21세기 초반에 들어가면 강압이나 화합, 
또는 이 모두에 의하여 대만이 중국 본토에 더욱 긴밀히 통합될 가능섭이 높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철저한 반공 노선을 걸은 싱가포르와 중국의 관계는 얼어붙어 있었다. 리 콴유를 
비롯한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후진성을 비웃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 발전이 시작된 1980년대부터 
싱가포르는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중국 쪽으로 궤도 수정을 하였다. 싱가포르는 1992년에 19억 달러를 
투자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여 상해 해상에 해상 산업 도시인 제2의 싱가포르를 건설한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리 콴유는 중국 경제의 성공 가능성과 중국의 실력을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중국 예찬론자가 
되었다. "사건은 중국에서 벌어진다". 고 그는 1995년에 말하였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몰려 있던 
싱가포르의 해외 투자는 1993년을 고비로 중국으로 집중되었다. l970년대에 처음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리 
콴유는 중국 지도자들에게 중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말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20년 뒤에도 과연 
그가 그떻게 할 수 있었을까? 
  이슬람: 중심 없는 의식
  아랍국, 이슬람 국가들의 정치 참여 구조는 대체로 근대 서구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서구의 
경우 국민 국가는 정치적 참여의 정점이었다. 협소한 참여는 여기에 종속되었으며 국민 국가에 대한 참여로 통합 
되었다. 국민 국가를 초월하는 집단-언어나 종교 공동체, 또는 문명-은 덜 강력한 참여를 낳았다. 협소한 
실체에서 광범위한 실체까지 이어진 연속선어서 서구인의 참여는 중간점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것은 U자를 
뒤집은 참여도의 궤적을 그렸다. 이슬람 세계에서 참여의 구조는 이와는 거의 정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슬람은 참여의 위계 질서에서 가운데가 텅 비어 있다. 라피두스(Ira Lapidus)가 지적한 것처럼 독보적이고 
지속적인 두 개의 구조는 한편으로는 가문, 씨족, 부족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좀더 거대한 규모로 나타나는 
문화, 종교, 제국의 통합체였다. 부족주의와 종교(이슬람)는 아랍 사회와 정치 체제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발전에서 예나 지금이나 결정적으로 증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상 이 둘은 너무나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아랍의 정치 문화와 아랍의 정치 의식을 규정하고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과 변수로서 간주될 정도이다.' 고 
리비아의 한 학자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한다. 부족들은 아랍 국가들의 정치 판도에서 핵심적 역할을 지금까지 
떠맡아 왔으며, 바시르(Tahsin Bashir)의 지적처럼 그 부족들의 상당수는 단순히 '깃발을 단 부족' 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이 성공을 거둔 주된 이유는 혼인 등의 수단을 통하여 부족간의 결속을 다졌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 판도가 수다이르족과 샴마르족을 위시한 여러 부족들의 경쟁 구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리비아의 성컵에 중대한 기여를 한 부족의 수는 줄잡아 최소한 1s개에 이 른다. 수단에 거주하는 
부족의 수는 500개에 이르며 그 중 최대 부족이 수단 인구의 l2퍼센트를 차지한다. 역사적으로 증앙아시아에는 
국민적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층성의 대상은 부족, 씨족, 확대된 가문이지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이 
지역 사람들은 공동의 언어, 종교, 문화, 생활 양식을 가졌으며, 이슬람은 수장의 권력을 능가하는 강력한 
통합력으로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체첸과 인근의 북부 코카서스 지역에는 l00여 개의 '거대' 씨족과 70개의 '소수' 
씨족이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며 체첸인은 소련의 계획 경제와는 달리 씨족' 경제를 고수하였다.
  이슬람 전역에서 추종과 헌신의 초점은 소수 집단과 거대 신앙 부족과 '움마(이슬람 사회)' 였으며, 국민 
국가는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아랍 세계에서 기존의 국가들은 아주 무원칙하지는 않더라도 대단히 
자의적인 유럽 제국주의의 산물이기에 정통성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들의 국경선은 심지어 베르베르족, 
쿠르드족 같은 민족 집단의 경계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들이 아랍 민족을 나누고 있지만 범아랍 
국가는 아직껏 실현되지 않고 있다. 주권을 가진 민족 국가들이라는 발상은 알라의 통치권과 '움마'의 우위에 
대한 믿음과 공존하기 어렵다. 혁명 운동을 지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마르크시즘이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대동단결을 주장한 것처럼 민족 국가를 거부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요구 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민족 
국가가 취약한 것은 2차 대전 이후 이슬람 교도 집단들 사이에서 수많은 분쟁이 발생하였지만 인접국을 침공한 
이라크 같은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충돌은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에도 반영되어 있다.
  l970년대와 1980년대에 각국에서 이슬람의 부활을 낳았던 요인들은 전체로서의 '움마', 곧 이슬람 문명에 대한 
자각을 높였다. 1980년대 중반 한 학자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탈식민화, 인구 증가, 산업화, 도시화, 무엇보다도 이슬람 국가 사이의 유자원을 둘러싼 국제 경제 질서의 
변화는 이슬람의 정체성과 통일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가증시키고 있다...... 현대의 통신 기술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여러 민족들 사이의 결속은 강화되고 심화되었다. 메카를 순례하는 참배 자들의 수는 급증하여 멀리 
증국, 세네갈, 예멘, 방글라데시를 비롯하여 전세계 이슬람 교도 사이에서 동질감을 고조시켰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남부 필리핀, 아프리카에서 점점 많은 학생이 중동 여러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국가의 경계선을 
넘은 사상의 교류가 번지고 개인적 접촉이 빈번해졌다. 테헤란, 메카, 쿠알라룸푸르 같은 중심지에서 열리는 각종 
회의와 학술 대회의 빈도수가 점점 잦아지고 정례화되자 자연히 이슬람 지식인과 울라마(종교학자)'의 접촉도 
빈번해졌다 .... 카세트 테이프는 국제적으로 모스 크의 예배를 전파하여 이제 영향력 있는 설교자의 말은 지역 
공동체의 울타리를 뒤어넘어 먼 나라의 청중에까지 전달된다.
  이슬람 공동 의식은 국가들과 국제 기구들의 정책에도 반영되며, 그 정책에 힘입어 더욱 증폭되기도 한다. 
1969년 사우디아라비아 지도자들은 파키스탄, 모로코, 이란, 튀니지, 터키 지도자들과 함께 라바트에서 최초의 
이슬람 정상 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태동한 이슬람 회담 기구가 l972년 지다에 본부를 두고 공식 출범하엿다. 
적잖은 이슬람 인구를 가진 거의 모든 국가가 현재 이 기구에 가입해 있다. 이런 종류의 국가간 기구로서는 
이것이 유일하다. 크리스트교, 정교, 불교, 힌두교 국가들은 종교에 바탕을 둔 국가간 기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이슬람 교도는 가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이란, 리비아 정부는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점을 공유하고 
이슬람 교도 사이의 정보와 자원교류에 기여한다고 판단한 세계 모슬렘 의회(파키스탄 발의), 모슬렘 세계 
연맹(사우디아라비아 발의) 등의 비정부 기구를 지리적 거리에 관계없이 후원하고 지원한다.
  이슬람의 결집을 지향하는 이슬람 의식 운동은 그러나 두 가지 역설에 직면한다. 첫째, 이슬람은 이슬람 
세계를 자신의 주도로 결집시키려는 의도에서 '움마'에 대한 이슬람 교도의 헌신을 이용하고자 각축을 벌이는 
중추적 실력 국가들로 나뉘어져 있다. 이러한 각축은 한편으로는 기존 체제와 국제 기구,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 도전하는 이슬람 체제와 이 체제가 만든 국제 기구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당시 
이집트의 나세르가 지배하던 아랍 연맹에 맞서기 위하여 이슬람 협의 기구(OIC)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다. 
1991년 걸프전이 끝난 뒤 수단의 지도자 알 투 라비(Hassan al Turabi)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배하던 이슬람 
협의 기구에 맞서기 위하여 범아랍 이슬람 회담(PAIC) 을 출범시켰다. 1995년 초 카르틈에서 열린 제3차 범아랍 
이슬람 회담에는 세계 80여 개국의 이슬람 조직과 운동 단체에서 모두 수백 명의 대표단이 참가하였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이 공식 기구들 외에도 비공식 지하 전투원들로 구성된 광범위한 조직망을 낳았고 이들은 
그 후 알제리, 체첸, 이집트, 튀니지, 보스니아, 팔레스타인, 필리핀 등지에서 이슬람의 대의를 위하여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은 다와 대학에서 훈련을 받은 전투원들, 아프가니스탄 내의 다양한 파벌과 각각의 파벌을 
미는 외국 후원 세력이 운영하는 캠프에서 훈련받은 이슬람 전사들로 교체되었다. 물론 이슬람 과격 체제와 
운동이 공유하는 이해 관계는 때때로 전통적 반목을 극복하는 데 일조하였다. 가령 이란의 후원으로 수니 
원리주의 세력과 시아 원리주의 세력을 잇는 가교가 마련되었다 수단과 이갈은 긴밀한 군사 협력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란 공군과 해군은 수단의 군사 시설을 이용하였다. 양국 정부는 알제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원리주의 세력을 후원하는 데 공조를 펼치고 있다. 수단의 알 두라비와 이라크의 후세인은 1994년 관계 강화를 
디짐하였으며, 이갈과 이라크는 화해의 길목에 들어서고 있다.
  둘째 '움마'의 개념은 민족 국가의 부당성을 전제로 하지만 '움마'는 현재 이슬람 세계에 결여되어 있는 한 두 
개의 강력한 핵심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때만 통합체로서 나타날 수 있다. 통일된 종교-정치 공동체로서의 
이슬람 개념은 과거의 경우 종교적 지도력과 정치적 지도력-칼리프와 술탄-이 단일 지배 제도로 결합되었을때만 
핵심국이 등장할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 7세기에 이루어진 아랍의 급속한 북아프리카, 중동 정복은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둔 우마이야 왕조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어 8세기에는 바그다드에 기반을 두었으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아바스 왕조가 출현 하였으며 이것은 l0세기에 이르러 각각 카이로와 코르도바에 중심을 둔 두 개의 왕조로 
쪼개졌다. 400년 뒤 오스만 튀르크는 증동을 휩쓸어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1517년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튀르크족은 인도를 침공하여 무굴 제국을 세웠다. 서구의 부상은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을 약화시켰고,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자 이슬람의 핵심국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서구 열강 들에게 상당 부분 분점되었고 이들 국가가 물러나자 이슬람의 전통에는 낯선 서구를 전범으로 
한 허약한 나라들만 남았다. 따라서 20세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다른 이슬람 국가들이나 비이슬람 국가들에 의해 
이슬람의 지도국으로 수용되고 그러한 역할을 맡기에 충분한 실력과 문화적, 종교적 정통성을 가진 핵심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슬람을 특징짓는 내부적, 외부적 분쟁 다발의 주요 원인은 바로 이슬람 핵심국의 부재였다. 증심 없는 
의식이 이슬람에게는 약점이 되었고 다른 문명들에게는 커다란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지속 
될 것인가?
  이슬람 핵심국은 경제적 자원, 군사력, 조직적 능력과 움마를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을 
만한 적극성과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슬람 지도국 후보의 반열에 올랐던 나라는 모두 여섯 나라지만, 
현재로서는 실력 있는 핵심국이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모두 구비한 나라는 없다. 인도네시아는 가장 큰 이슬람 
국가이며 경제적으로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아랍의 중심부에서 한참 떨어진 변방에 
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교는 느슨하게 변형된 동남아시아형 이슬람교이며, 이곳의 문화는 토착 문화, 
이슬람교, 힌두교, 크리스트교, 중국 문화가 뒤섞여 있다. 이집트는 아랍국으로서 거대한 인구를 거느렸으며 
중동에서도 전략적으로 증요한 위치에 있고 이슬람학의 본산인 알 아즈하르 대학도 이곳에 있다. 그러나 
이집트는 가난하며 경제적으로 미국과 서유럽이 주도하는 국제 기구, 아랍의 부유한 산유국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란,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는 모두 자신이 이슬람 국가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으며 움마에 대한 
영항력을 행사하고 움마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 과정 
에서 이들은 각종 기구를 후원하고 이슬람 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아프가니스탄의 전사들을 돕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교도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란은 영토, 지정학적 
위치 인구, 역사적 전통, 석유 자원, 증진국 수준에 이른 경제 발전 등 여러면에서 이슬람 핵심국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인구의 90퍼센트가 수니파인 반면 이란은 시아파가 절대 다수를 점한다. 
이란인이 쓰는 페르시아어를 아랍어 인구가 절대 다수인 나머지 이슬람 교도 는 알아듣지 못한다. 페르시아와 
아랍의 관계는 역사적으로도 분쟁으로 얼룩져 있다.
  파키스탄은 남부럽지 않은 영토, 인구,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며 파키스탄의 지도자들은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협력을 주도하는 역할, 세계 무대에서 이슬람을 대변하는 역할을 자신들이 맡고 있음을 줄기차게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가난한 편이며 내부의 인종적, 지역적 갈등에 시달리는 형편이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하며 
인접한 인도와의 안보 문제에 크게 신경을 써야 할 처지이다. 특히 맨 마지막 문제로 파키스탄은 다른 이 슬람 
국가들과의 관계 발전뿐 아니라 증국, 미국 같은 비이슬람권의 열강들과도 우의를 돈독히 해야 할 형편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의 본거지였다. 이슬람의 성지가 이곳에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어는 이슬람의 
보편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최대의 석유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경제적 영향력도 막강하다. 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여 왔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세계에서 단일 국가로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모스크, 
교과서에서 정당, 이슬람 조직, 테러 단체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역의 이슬람 운동을 후원하는 데 수십억 달러를 
뿌렸으며 지원도 비교적 공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인구가 적고 지정학적으로도 불안하여 
안보상의 이유로 어차피 서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터키는 역사, 인구, 중간 단계에 이른 경제 발전 수준, 국민 적 응집력 군사적 능력과 군사적 
전통면에서 이슬람의 핵심국이 되기에 층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터키를 세속 국가로 노골적으로 
정의하는 과정에서 케말은 터키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의 역할을 계승하는 길을 원천 봉쇄하였다. 터키는 
헌법상으로 세속 국가임을 분명히 명시하였기 때문에 심지어 이슬람 협의 기구의 발기국조차 될 수 없었다. 
터키가 자신을 세속 국가로 계속 정의하는 한 이슬람의 지도국 역할은 터키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터키가 자신을 새롭게 정의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시점에 가서 터키가 서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시정하는 비굴하고 모욕적인 노릇을 중지하고 서구에 맞서 이슬람을 대변하는 훨씬 인상적이고 
자긍 있는 역사적 역할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 터키에서는 원리주의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외잘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터키는 아랍 세계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고자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터키는 증앙아시아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떠맡고자 인종적, 언어적 유대를 십분 활용하였다. 터키는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에게 지원과 
격려를 보냈다. 이슬람 국가 증에서도 터키는 발칸, 중동,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교도와 폭넓은 역사적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입장에 서 있다. 터키는 어쩌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함으로써 자기 문명의 주변국에서 지도국으로 스스로 
탈바꿈한 것처럼 터키도 자신에게 생경한 세속주의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구 크리스트교와 
아파르트헤이트의 장단점을 두루 경험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프리카를 이끌 만한 남다른 자격을 갖추었 듯이 
서구 세속주의와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두루 겪은 터키는 이슬람을 주도할 독특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레닌주의를 청산한 것보다 횔씬 근본적으로 케말주의의 유산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뿐만 
아니라 케말에 버금 가는 카리스마와 터키를 분열국에서 핵심국으로 변모시키기 위하여 종교적 정당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접맥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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