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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5/문명의 충돌

4. 서구의 쇠퇴: 세력, 문화, 토착화

by FraisGout 2020. 7. 26.

  서구의 패권: 지배와 하강
  다른 문명들과의 관계에서 서구가 가진 힘을 보여 주는 두 그림이 있다. 첫째는 서구의 압도적 우위를 
나타내는 그림이다. 소련의 와해로 서구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도전자가 사라졌으며, 그 결과 세계는 
지금처럼 서 구의 주요 국가들-경우에 따라서는 일본도 포함-이 설정한 목표,이익, 우선 순위에 따라 
규정되리라는 예상이다. 유일하게 남은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은 영국, 프랑스와 함께 정치와 안보 문제에 관한 
핵심적 결정을 내린다. 또한 미국은 독일, 일본과 함께 경제 문제에 관한 핵심적 결정을 내린다. 서구는 다른 
모든 문명이나 지역에 실질적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고 다른 모든 문명이나 지역의 정치, 경제,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문명이다. 다른 문명에 속한 나라들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이익을 
수호하는 데 서구의 도움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한 연구 자가 요약한 것처럼 서구는,
  * 국제 금융 체제를 주도하고 운영한다.
  * 모든 경화(경화)를 장악한다.
  * 세계의 주요 고객이다.
  * 전 세계 공산품의 대다수를 제공한다.
  * 국제 자본 시장을 지배한다.
  * 많은 사회의 지배적 윤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 대규모 군사 개입 능력을 가졌다.
  * 해상로를 장악한다.
  * 기술 연구와 개발에서 가장 앞섰다.
  * 첨단 기술 교육에서 선두를 달린다.
  * 우주를 선점한다.
  * 항공 산업을 장악한다.
  * 국제 무역을 주도한다.
  * 첨단 무기 산업을 주도한다.
  서구를 묘사한 둘째 그림은 이와는 판이하다. 이 그림에 나타나는 서구는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형도의 비중이 여타 문명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문명이다. 냉전에서 거둔 승리는 서구를 탈진시켰다. 
서구는 완만한 경제 성장, 실업, 막대한 재정 적자, 근로 의식의 저하. 낮은 저축률 같은 내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대다수 서방 국가들은 사회적 와해, 마약 범죄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경제력의 무게추는 
빠른 속도로 동아시아로 옮겨가고 있으며 이 지역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도 아울러 커지고 있다. 인도의 
경제력은 바야흐로 비약의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이슬람 세계는 점점 서구를 적대시하고 있다. 서구의 지시와 
훈계를 수용하고 따르겠다는 비서구 사회의 의지가 빠르게 식어가고, 서구 또한 세계를 주도한다는 자신감과 
의지를 잃어 가고 있다. 1980년대 말 미국의 쇠퇴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지만. 프리드버그 (Aaron L. 
Friedherg)는 1990년대 중반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중요한 여러 부문에서 미국의 상대적 힘은 급속도로 약화될 것이다. 경제력 면에서 미국의 위치는 일본에게, 
궁극적으로는 중국에게 잠식당할 것이다. 군사 영역에서 미국과 다수의 성장하는 지역 강대국들(이란 인도, 증국 
등)이 가진 실력의 균형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이동할 것이다. 미국이 보유한 조직력의 일부는 다른 국가로 
넘어갈 것이고 또 일부는 다국적 기업 같은 비국가 주체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이 대조적인 두 서구상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인가? 대답은 물론 둘 다라는 
것이다. 서구는 지금 압도적 우위에 있고 2l세기에 가서도 실력과 영향력 면에서 여전히 정상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문명의 세력 관계에서 냉혹한 변화가 근본적 차원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서구의 힘은 상대적으로 
계속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 또한 옳다. 서구의 우위가 사라지면 서구의 힘도 아울러 사그러들 수밖에 없으며 
비서구 세계는 주요 거대 문명과 그 핵심국을 중심으로 하여 지역 단위로 흩어질 것이다. 서구의 세계적 
영향력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은 나라로 중국 이 부상하면서 아시아 문명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가장 빠른 
속도로 힘을 키워 갈 것이다. 이러한 문명 차원의 세력 이동은 비서구 사회의 문화적 자긍심과 서구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확산시킬 것이다.
  서구의 몰락은 다음 세 특성을 갖는다.
  첫째.그것은 완만한 과정이다. 서구가 부상하는 데는 400년이 걸렸다 서구가 퇴장하는 데도 그만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1980년대에 영국의 저명한 학자 불은 " 보편적 국제 사회에서 유럽 또는 서구가 누리는 우위는 
1900년 무렵 정점에 이르렀다." 고 주장하였다. 슈팽글러가 쓴 책의 첫 권 이 l918년에 나온 뒤 '서구의 몰락 은 
20세기 역사의 중심 주제였다. 몰락의 과정은 금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한층 가속화할 수 
있다. 경제 발전을 포함하여 각종 분야에서 한 나라의 성장은 S곡선을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완만하게 출발하였다가 가속이 붙고 다시 성장률이 감소하다가 수평선을 긋는다. 한 나라의 몰락도 .S곡선을 
따라 이루어질 수 있다. 소련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처음에는 느리게 기울다가 가파른 하강 곡선을 그렸고 
결국에는 바닥에 이르렀다. 서구의 쇠퇴는 아직은 느린 l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어느 시점에 가서는 여기에 
가속이 붙을 것이다.
  둘째,하강은 직선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서구의 쇠퇴 징후가 나타난 이후에도 하강선은 멈추었다가 다시 위로 
솟는 서구의 힘이 일시적으로 증대하는 등 대단히 불규칙한 양상을 보인다. 서구의 개방된 민주주의 사회는 강한 
소생력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문명들과는 달리 서구에는 세력 증심지가 둘이나 있다. 불이 1900년을 
고비로 하강세로 접어들었다고 본 것은 서구 문명증에서도 본질적으로 유럽이라는 성분이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은 자체 분열을 겪었고 내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l940년대부터 미국이 서구 문명의 전면에 나섰다. 1945년에 미국은 한때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 
지배의 범위는 19l8년 1차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의 점령 범위 못지 않은 것이었다. 전후의 탈식민지화는 
유럽의 영향력을 감소시켰지만 미국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미국은 과거의 영토 제국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초국가 제국주의로 떠올랐다. 그러나 냉전 기간 중 미국의 군사력은 소련과 호각지세를 이루었으며 미국의 
경제력은 일본 경제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군사적, 경제적 부활이 이루어졌다. 
실제로 199l년 영국 학자 부전(Barry Buzan)은 "더 깊은 현실로 들어가 보면 탈식민지화가 시작된 이후 그 어느 
시기보다도 중심 부의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고 주변부의 의존도는 심화되었다."고 말했다.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정확성은 그 인식을 낳은 군사적 승리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면서 빛이 바래고 있다.
  셋째, 힘이란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행동을 변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강압뿐 아니라 유도나 권고가 행동을 변할 수 있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를 요구하는 측이 경제적, 
군사적, 제도적, 인구적, 정치적, 기술적,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 국가나 집단의 힘은 따라서 
이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하는 다른 국가나 집단에 비해 얼마나 가용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를 통해 
평가된다. 중요한 자원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자원에서 서구의 비중은 20세기 초반 정점에 도달하떴다가 
그 후로는 다른 문명들에 비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영토와 인구
  1490년 서구 사회는 발칸 지역을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남극을 제외한 전 세계 육지 면적 
5250만 평방마일 중에서 서구가 지배한 면적은 l50만 평방마일이었다 l920년 영토 확장이 극에 이르렀을 때 
서구는 전 세계 육지의 절반에 가까운 2550만 평방마일을 직접 다스렸다. 1993년 서구가 지배하는 영토는 그 
절반 수준인 1270만 평방마일로 줄어들었다. 서구의 영역은 원래의 유럽으로 되돌아갔고 여기에 백인이 정착한 
드넓은 땅 북미, 호주, 뉴질랜드가 추가되었다 반면에 독립된 이슬람 국가들의 영토는 1920년에는 l80만 
평방마일이었던 것이 1993년에는 1100만 평방마일 이상으로 늘어났다. 비슷한 변화가 인구 규모에서도 나타났다. 
l900년 서구인은 세계 인구의 30퍼센트를 차지하였고 세계 인구의 45퍼센트를 통치하였다. 서구의 통치 인구는 
1920년에 다시 48퍼센트로 늘어났다. 1993년에 이르면 서구는 홍콩 같은 일부 제국주의 시대의 잔재를 
제외하고는 오직 서구인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서구인은 세계 인구의 13퍼센트를 겨우 넘을 뿐이고 2025년에 
가면 그 수치가 다시 10 퍼센트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총인구로 따졌을 때 1993년 서구는 증국, 이슬람, 힌두 
문명에 이어 4위다. 서구인은 수적으로 보아 세계 인구에서 갈수록 소수 집단으로 떨어지고 있다. 질적으로 
보아도 서구와 다른 문명 사이의 균형은 변화하고 있다. 비서구인들은 점점 건강해지고 문맹률도 떨어지며 
.도시에 살고 교육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서남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유아 사망률은 30년 전에 비하여 3분의 1이나 2분의 l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 지역의 평균 수명 
또한 비약적으로 길어졌다. 아프리카의 경우 11년이 길어졌다.동아시아의 경우 23년이 길어졌다. 1960년대 초반 
제3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문맹률은 성인의 3분의 2가 넘었다. 1990년대 초반 현재 아프리카를 제외하면 
문맹를이 절반을 넘는 나라는 극소수이다. 인도 인구의 절반, 중국 인구의 거의 75퍼센트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1970년 개발 도상국의 문자 해독률은 선진국의 41퍼센트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이 I992년에는 71퍼센트 
수준까지 올라갔다. 1990년대 초반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세계의 전 지역에서 사실상 모든 연령층이 초등 
교육을 받았거나 현재 받고 있는 중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 아프리카에서 해당 연령 집단의 5분의 1미만이 중등 교육을 받은 데 비하여 1990년대 초반에는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해당 연령 집단의 절반이 중등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 도시 거주자는 미개발 국가 
인구의 t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1960년에서 1992년 사이에 도시 거주자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49퍼센트에서 73퍼센트로, 아랍 국가의 경우 34퍼센트에서 55퍼센트로, 아프리카의 경우 
14퍼센트에서 29퍼센트로, 증국의 경우 18퍼센트에서 27퍼센트로, 인도의 경우 19퍼센트에서 26퍼센트로 
늘어났다.
  문맹률, 교육, 도시화의 변화는 정치 의식과 기대 수준이 높은 사회적 동원 가능한 인구를 만들어 냈다.사회적 
동원력이 높은 사회는 강력한 사회다. 1953년 이란 국민의 15퍼센트만이 문자를 해독하고 도시 인구가 17 
퍼센트에 못 미쳤을 때만 하더라도,미국 CIA 요원들은 폭동을 간단히 진압하고 국왕을 권좌에 복위시킬 수 
있었다. 1979년 이란 국민의 50퍼센트가 글을 읽고 47퍼센트가 도시에 살게 되자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 
구하고 국왕을 보호할 수 없었다.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 아프리카인과 서구인, 일본인, 러시아인 사이에는 
아직도 현격한 격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격차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동시에 새로운 격차가 생기고 있다. 서 
구인, 일본인. 러시아인의 평균 연령이 꾸준히 올라가면서 비노동 인구의 비중이 늘어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인구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기고 있다. 다른 문명들은 아동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아동은 
미래의 일꾼, 미래의 병사다 
  생산력
  서구의 생산력이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1920년대에 절정에 달하였다가 2차 대전 이후 확연히 
줄어들고 있다. 1750년 증국은 전 세계 공산품의 거의 5분의 1을 생산하고 인도는 거의 4분의 1을 생산한 반면 
서구의 비중은 5분의 1에도 못 미쳤다. 1830년 들어 서구는 중국을 근소하게 앞서가기 시작하였다. 
바이로크(Paul Bairoch)가 지적하듯이 그 후 몇십 년 동안 서구의 산업화는 비서구 사회의 탈산업화를 
야기하였다. 19l3년 비서구 사회 나라들의 제조업 생산량은 1800년 수준의 약 5분의 2에 머물러 있었다. 18세기 
중반을 고비로 서구의 비중은 급속히 증가하다가 1928년에는 절정에 이르러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84.2퍼센트를 
차지하였다. 2차 대전 이후 서구의 성장률이 완만해지고 비서구 사회의 생산력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서구의 
비중도 줄어들고 있다. 1980년 서구는 전 세계 공산품의 57.8퍼센트를 생산하였는데 이것은 l20년 전인 
l860년대의 수준 이다.
  2차 대전 이전까지의 신뢰할 만한 세계 총생산 자료는 없지만 서구는 l950년 세계 총생산의 64퍼센트를 
차지하였고 19S0년대에는 이 수치가 49 퍼센트로 떨어졌다. 1991년의 한 추계에 따르면 세계 7대 경제 강국 
중에서 4개국, 곧 일본(2위), 중국(5위), 러시아아(6위), 인도(7위)가 비서구 국가였다. 1992년 현재 세계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나라는 미국이고 l0개 상위국 가운데 서구 국가가 5개국, 나머지 5개국은 다른 문명들의 주도 
국가인 증국, 일본, 인도, 러시아, 브라질이다. 신빙성 높은 전망에 따르면 2020년에 가서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력을 자랑하게 된다. 5개 상위국은 5개 문명의 몫으로 골고루 돌아가고, l0개 상위국은 중화 문명권 
3개국(증국, 한국, 대만),서구 문명권 3개국(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이 차지한다. l0대 
경제 강국 중에 아시아권이 7개국 포함되고 그 중에서 6개국이 동아시아권이다. 1960년 동아시아는 세계 
총생산의 4퍼센트를 차지하였고 북미는 57퍼센트를 차지하였다. 그러던 것이 1995년에는 똑같이 24퍼센트가 
되었다. 한 보고서는 20l3년경에 가서는 서구는 세계 총생산의 30퍼센트를, 아시아는 40퍼센트를 차지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총생산은 서구의 질적 우위를 부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 둘 가능성이 있다 서구와 일본은 첨단 기술 산업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은 이전되고 있으며, 만일 서구가 우위를 지켜 나가려 한다면 기술 이전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가 만들어 낸 긴밀하게 얽힌 세계로 인하여 기술이 
다른 문명들로 보급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서구의 노력은 점점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냉전 시대처럼 만인이 
동의하는 강력한 단일 위협 세력이 사라진 지금은 기술의 수출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어 기술의 
이전 저지가 어렵다. 중국은 역사의 대부분 기간 동안 세계 최대의 경제력을 자랑하였다. 20 세기 후반에 
진행되고 있는 비서구 사회의 기술 습득과 경제 발전은 지난 역사로의 회귀 현상을 낳고 있다. 이것은 느리게 
진행되고 있지만 빠르면 2l세기 중반에 주요 문명들의 경제력과 제조업 생산량은 1800년과 비슷한 분포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2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서구의 세계 경제 지배는 막을 내릴 것이다. 
  군사력
  군사력은 네 차원에서 고찰할 수 있다. 규모(병력, 무기, 시설, 자원의 수) 기술(무기와 장비의 효율성과 
정교성), 조직력(응집성, 군기, 훈련, 군의 사기, 지휘와 통제의 효과성), 사회적 지원(사회가 군사력의 집행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이다. l920년대의 서구는 이 모든 차원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그 
후 서구의 군사력은 다른 문명들에 비하적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 점은 군사력의 가장 중요한 척도는 
아니지만 병력의 축소 현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근대화와 경제 발전은 군사력을 확층할 수 있는 국가적 
자원과 욕망을 낳는다. 이것은 거의 예외 없이 관찰되는 현상 이다. 1950년대에 일본과 소련은 2차 대전에서 
입증되었듯이 아주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냉전 시대에 소련은 세계의 양대 군사 초강대국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서구는 세계 전 지역에 재래식 군사력을 대규모로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독점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분명한 것은 다가오는 몇십 년 동안 비서구 국가 혹은 
국가군이 그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냉전 이후의 세계 군사력 
지형도에서 크게 다섯 가지 의 흐름이 감지된다.
  첫째, 소련이 붕괴하자 소련의 군사력도 와해되었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고 아직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는 우크라이나밖에 없다. 러시아군은 규모도 대폭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중부 유럽과 발트 해 
국가들에서 철수하였다. 바르샤바 조약은 허물어졌다. 미국의 해군력에 도전한다는 목표도 포기되었다. 군사 
장비는 폐기되거나 방치되어 막대한 전럭 손실을 입었다. 군사비도 예산에서 대폭 삭감되었다 군의 사기 저하 는 
장교와 일반 병사에게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다. 러시아군은 러시아를 수호하고 인접 지역에서 발생한 분쟁을 
처리하는 수준으로 자신의 임무와 작전 목표를 축소 조정하고 있다.
  둘째, 러시아의 갑작스러운 군사력 약화는 서방의 군사비 지출과 군사력 규모의 점진적이지만 뚜렷한 축소를 
가져왔다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가 세운 계획이 예정대로 실행에 옮겨질 경우 미국의 군사비는 1990년의 
3423억달러(1994년 달러화 기준) 에서 l998년에는 2223억 달러로 35퍼센트 줄어들게 된다. 계획이 종료되는 해의 
군사력은 냉전 말기의 절반 흑은 3분의 2수준으로 축소될 전망이다. 전체 병력은 210만에서 l40만 으로 줄어든다. 
증요한 무기 도입 계획의 대다수가 이미 취소되었거나 현재 취소되고 있다. l965년에서 l995년 사이의 연간 주요 
무기 구입 내역을 보면 함정이 29척에서 6척으로, 항공기가 943대에서 127대로, 탱크가 720 대에서 0대로, 전략 
미사일이 46기에서 l8기로 줄었다. I980년대 후반을 고비로 영국, 독일, 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프랑스에서도 
군사비 및 군사력 규모가 축소되었다. l990년대 중반 독일은 군 병력을 37만 명에서 34만명으로,경우에 따라서는 
32만으로 감축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프랑스도 l9S0년의 2S만 명을 1997까지는 22만 5천 명으로 병력을 
줄일 예 정이다. 영국은 이미 I9S5년의 57만 7천1백 명을 1995년에 27만 4천6백 명으로 줄였다. NATO 
회원국들은 군 복무 기간을 축소하였으며 아예 징병제를 폐지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셋째, 동아시아의 조류는 러시아나 서구와는 판이하다. 군사비 확대와 병력 확층이 전 지역으로 번지는 추세다. 
중국은 지역 불안정과 제한전 발발 가능성에 주안점을 둔 새로운 군사 원칙에 따라 지역 맹주로서의 실력을 
갖추고자 군사력 팽창을 선도하고 있다. 경제 발전과 중국의 군사력 확층에 자극받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도 
군사력의 현대화와 증강에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은 고도의 첨단 군사력을 꾸준히 발전 시켜 왔다. 
대만, 한국,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는 군사비 지출을 늘리면서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로부터 전투기, 탱크, 함정을 앞다투어 도입하고 있다. NATO의 군사비 지출은 1985년과 l993년 사이에 
(5396억 딜러에서 4850억 달러로) 약 10퍼센트 줄어든 반면 동아시아의 지출은 같은 기간 동안 898억 달러에서 
1348억 달러로 50퍼센트나 껑층 뛰었다.
  넷째, 대량 살상 무기를 비롯한 각종 첨단 무기가 전 세계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들은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게 되었다. 가령 l960년대와 l980년대 사이에 전투기를 생산할 수 
있는 제3세계 국가의 수는 1개국에서 8개국으로, 탱크는 1개국에서 6개국으로, 헬기는 1개국에서 6개국으로, 전략 
미사일은 전무하던 것이 7개국 으로 늘어났다. 1990년대에 들어와 방위 산업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뚜렷 한 
경향이 나타났고 이것은 서구의 군시썩 우위를 잠식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비서구 국가들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거나(러시아, 증국,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혹은 북한) 핵무기를 보유하기 위해 부심중이거나 (이란, 이라고 
리비아, 흑은 알제리)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즉각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일본)핵무기와 화학 무기, 생물학 무기는 미국과 서구에 비해 재래식 군사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나라들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군사적 대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제반 사태 전개에 따라 탈냉전 세계의 군사 전략과 군사력 지형도에서 
지역화(regionalization)가 증심 기류로 자리잡고 있다. 러시아와 서방의 군사력이 축소되고 여타 지역의 군사력이 
증강되는 현실은 지역화의 틀로 설명이 가능하다. 러시아는 더 이상 전 세계를 감당하는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고 
근접 지역에 초점을 맞추어 전력을 관리한다. 증국의 전략과 군사력은 지역 맹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유럽 국가들은 NAT0와 서유럽 
동맹을 통해 서유럽의 주변부에서 발생하는 불안정에 대처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미국은 전 세계 차원에서 
소련을 저지하고 소련과 싸우는 데서 걸프 만과 동북아시아에서 발생하는 지역 분쟁에 동시에 대처하는 쪽으로 
군사 작전의 목표를 분명히 바꾸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를 격파하기 위하여 현역 배치된 전략 항공기의 
75퍼센트, 현대전 탱크의 42퍼센트,수송기의 46퍼센트, 육군 병력의 57퍼센트, 해군 병력의 46퍼센트를 
동원하였다. 앞으로 군사력이 대폭 축소되면 미국은 서반구 이 외의 지역에서 군사 강국을 상대로 두 곳은커녕 
한 곳의 지역 분쟁에 개입 하는 것도 버거움을 느낄 것이다. 세계의 군사 안보는 점차 초강대국에 의 한 세계적 
차원의 군사력 배치와 결정보다는 한 지역 내에서 이루어 지는 패권 국가와 문명 핵심 국가의 군사력 배치와 
결정에 좌우될 공산이 크다.
  서구는 21세기의 전반기에도 여전히 강력한 문명의 위치를 고수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 토대, 연구 및 
개발 능력, 민간 군사 양면에서 이루어지는 혁신에서 실질적인 우위를 계속 견지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부문에 대한 장악력은 비서구 문명의 핵심국과 주도국으로 점차 분산된다. 서구의 장악력은 192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그 후 불규칙하지만 뚜렷한 하강세에 있다. 절정기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0년대의 서구는 세계 
영토의 24퍼센트(절정기에는 49퍼센트), 세계 총인구의 10퍼센트(절정기에는 48퍼센트), 사회적으로 동원 가능한 
인구의 l5~20퍼센트, 세계 총 생산의 50퍼센트(절정기에는 70퍼센트), 제조업 생산량의 약 25퍼센트(절정기 에는 
84퍼센트) 전 세계 병력의 10퍼센트 미만을 차지할 것이다.
  19l9년에는 미국의 윌슨(Woodrow Willson), 영국의 조지(Lloyd George), 프랑스의 클레망소(Gerorges 
Clemenceau) 세 사람이 세계를 사실상 좌지우지하였다. 그들은 파리에 모여 어떤 나라가 존속하고 어떤 나라가 
사라질 지 어떤 나라를 새로 탄생시킬지, 국경선은 어떻게 정하고 누가 그 나라 를 통치할지, 승전국들이 증동을 
비롯한 세계 나머지 지역을 어떻게 분점 할지를 결정하였다. 그들은 또 러시아에 대한 군사 개입과 중국으로부터 
우려 낼 경제적 특권의 내용을 결정하였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2020년 쯤 되면 그런 막강한 힘을 소수의 
정치인이 휘두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런 소수 집단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5명의 
서구인이 아니라 전 세계 7-8개 주요 문명의 핵심국 지도자로 구성될 것이다 레이건, 대처, 미테랑 콜의 
후임자는 덩 샤오핑, 나카소네, 간디, 옐친, 호 메이니, 수하르토의 후임자와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서구가 
주도하던 시대는 막을 내릴 것이다 서구의 몰락과 지역 맹주들의 부상은 토착화와 비서구 문화의 부활을 낳고 
있다. 
  토착화: 비서구 문화의 부활
  문화의 판세는 힘의 판세를 반영한다. 정복은 교역을 동반하지 않을 수 도 있지만 힘은 거의 예외 없이 문화를 
동반한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한 문명의 힘이 팽창하면 동시에 문화가 융성하였고 그 문명은 막강한 힘으 로 
자신의 가치관, 관습, 제도를 다른 사회에 확산시켰다. 보편의 문명은 보편의 힘을 요구한다. 로마의 힘은 고전 
세계의 한정된 범위 안에서 준보편 문명을 낳았다. 서구의 힘은 l9세기에는 유럽의 식민주의로 20세기에는 
미국의 헤게모니 장악으로 표출되었고, 이 힘은 서구 문화를 세계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유럽의 식민주의는 막을 
내렸고 미국의 헤게모니 또한 퇴조하고 있다. 고유 역사에 뿌리를 둔 습속, 언어, 믿음, 제도가 도처에서 
자신감을 되찾으면서 서구 문화는 움츠러들고 있다. 근대화가 낳은 비서구 사회의 점증하는 힘이 세계 전역에서 
비서구 문화의 부활을 낳고 있다.
  나이(Joseph Nye) 는 '딱딱한 힘(hard power)'과 '부드러운 힘(soft power)'을 구분한다. 딱딱한 힘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힘이고, 부드러운 힘은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른 나라들이 원하도록' 만드는 한 나라의 힘이다. 나이도 인정하듯 이 딱딱한 힘은 세계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어 가므로 강대국들이 과거에 비하여 자신의 전통적 무력 자원을 목표 달성에 활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 
고 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나라의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매력적이면 다른 나라는 기꺼이 따라을 
것이며, 따라서 부드러운 힘도 명령을 내리는 딱딱한 힘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화의 
이데올로기를 매력적으로 만들까? 문화와 이데올로기는 그것들이 물질적 성공과 영향력에 뿌리를 둔 것으로 
파악될 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부드러운 힘은 딱딱한 힘의 토대 위에서만 힘을 갖는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단단해지면 자신감과 자부심도 올라가며, 자기 문화 혹은 부드러운 힘의 상대적 우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진다. 
덩달아 다른 나라들도 그 나라의 문화에서 매력을 느낀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내리막길을 걸으면 자기 회의와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오고 다른 문화에서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성공의 열쇠를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비서구 사회가 자신의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을 끌어올릴수록 자기의 가치관, 제도, 문화에 대한 자신감은 
커진다.
  1950년대와 I960년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세계적인 호소력을 가진 것은 이 시기에 소련이 경제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다. 소련의 경제가 침체에 빠져 군사력을 지탱하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지자 그 호소력은 사라졌다. 서구의 가치나 제도가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 위력을 발휘한 것은 
이것들이 서구가 가진 힘과 부의 원천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맥닐(William McNeill)이 지적하듯이 서기 1000년에서 I3O0년 사이에 헝가리인,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은 
크리스트교, 로마법을 비롯하여 서구 문화의 각종 요소를 받아들였는데, 서구 문명을 수용하게 된 저변에는 
서구의 군주들이 가진 무력에 대한 공포와 외경심이 뒤섞인 심리가 자리 하고 있었다. 서구의 힘이 감퇴하면 
서구가 다른 문명들에게 서구의 인권, 자유주의. 민주주의 개념을 강요할 수 있는 능력도 줄어들고, 다른 문명들 
또한 이런 관념들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몇 세기 동안 비서구인들은 서구 사회의 경제적 번영, 고도의 기술력, 
군사력, 정치적 응집성을 부러워했다. 그들은 이런 성공의 비결을 서구의 가치관과 제도에서 찾았고, 그들이 
생각해 왔던 것이 바로 그 열쇠였음을 확신하게 되자 그것을 자기네 사회에도 적용하려고 시도하였다.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서구처럼 되어 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케말주의적 태도 가 
사라졌다. 동아시아인들은 자기들의 눈부신 경제 발전이 서구 문화의 도입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자기네 문화를 
고수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자신들이 성공하는 것은 서구와 다르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자신 이 
서구보다 약하다고 느꼈을 때 비서구 사회는 서구의 지배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하고자 자결, 자유주의, 민주주의, 
독립성 같은 서구의 가치를 부르짖었다. 이제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비서구 사회는 예전에 자신이 
변호하던 것과 동일한 가치관을 가차없이 공격한다. 서구에 대한 반항은 원래 서구적 가치의 보편성을 
주장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 이제 그것은 비서구적 가치의 우월성을 주장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이런 태도의 부각을 도어(Ronald Dore)는차세대토착화현상(second-generation indigenizatIion 
phenomenon)이라고 표현하였다. 서구의 식민지 였던 중국이나 독럽국이었던 일본 같은 나라의 '근대화' 세대나 
'해방' 세대는 대개 외국(서구) 대학에서 서구어로 교육을 받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처음 외국에 나갔다는 
이유도 부분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은 서구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빠르게 흡수하였다. 반면에 2세대는 l세대가 
만든 자기 나라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며 외국어가 아니라 자국어로 강의를 듣는다. 이 대학들은 세계적 본토 
문화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며 지식은 대체로 범위가 제한되었거나 수준이 낮은 번역에 의해 
토착화된다. 이 대학을 나온 학생들은 서구에서 교육받은 1세대의 지배에 반감을 느끼며 그래서 외세 배격 
운동에 쉽게 동조할 수 있다. 야심 만만한 젊은 지도자들은 서구의 영향력이 퇴조하면서 부국 강병의 길을 더 
이상 서구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자기 사회의 가치관과 문 화로 복귀한다.
  토착화의 과정이 반드시 2세대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태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유능하고 통찰력 
있는 l세대 지도자들은 스스로 토착화의 길로 들어선다. 대표적 인물이 진나(Mohammad Ali Jinnah), 리(Harry 
Lee), 반다라나이케(SoIomon Bandaranaike) 등이다. 그들은 영국의 명문 대학을 졸업한 유능한 변호사였으며 
자기네 사회의 엘리트 집단에서도 완벽하게 서구화한 부류에 들어갔다. 진나는 철저한 세속주의자였다. 리는 한 
영국 각료의 말을 빌리자면 수에즈 동쪽에서 가장 영국인다운 영국인이었다. 반다라나이케는 크리스트교의 
울타리 안에서 컸다. 그러나 나라를 독럽시키고 독럽된 나라를 이끌기 위해서 그들은 토착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선조의 문화로 돌아갔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정체성, 이름, 의복, 믿음까지 바꾸었다. 영국인 변호사 
진나는 파키스탄인 아잠 (Quaid-i-Azam)이 되었고 리는 리 콴유가 되었다. 세속주의자였던 진나는 파키스탄의 
국교인 이슬람교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골수 영국인이었던 리 콴유는 중국어를 익혔고 유교의 명쾌한 
대변자가 되었다. 크리스트교를 믿었던 반다라나이케는 불교로 개종하여 스리랑카 민족주의를 이끌었다.
  l980년대와 1990년대의 토착화는 비서구 사회에서 일상의 질서가 되었다. 이슬람의 부활과 '재이슬람화'는 
이슬람 사회의 중심에 놓인 주제다. 인도의 지배적 기류는 서구적 형식과 가치를 배격하고 정치와 사회를 힌 
두화 하는 데 있다. 동아시아 정부들은 유교를 선전하며 정치인과 지식인 은 '아시아화' 를 부르짖는다.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일본인론'이 각광을 받았다. 일본의 한 대표적 지식인은 '역사적으로 일본은 외래 문화를 
수입하는 여러 번의 주기를 거쳤는데 모사와 정련을 통한 외래 문화의 포착화 가 이루어지고 나서 수입된 
창조의 열기가 소진되면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혼란을 겪은 뒤 다시 외부 세계로 문을 열었다 '고 주장 하면서 
지금 일본은 '이 주기의 두 번째 단계에 올라서 있다.' 고 진단하였다. 냉전이 끝난 뒤 러시아는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의 전통적 대립이 재부상하면서 다시 분열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대세는 
서구주의자에서 슬라브주의자 쪽으로 기울었다. 서구주의자 고르바초프는 서구적 믿음을 표명하지만 슬라브 
기질을 가진 옐친에게 무릎을 끓었고 옐친은 다시 극우 지리노프스키(Vladimir Zhrinovsky)와 러시아 정교를 
앞세운 여타 민족주의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민주주의에 내재된 역설이 토착화를 앞당기고 있다. 비서구 사회가 서구의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면서 
반외세, 반서구 정치 세력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졌다. 1960년대와 1970년대만 하더라도 개발 도상국의 친서방 
정부를 위협하는 것은 쿠데타와 혁명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에 들어와서는 이들이 선거에 의하여 정권을 
내줘야 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민주화는 서구화와 갈등을 빚는다. 민주주의는 사해 동포주의가 아니라 
국수주의로 치달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서구적 가치를 신봉하는가를 내세우는 비서구 사회의 
정치인은 선거에서 패배한다. 후보자는 승리를 위해 일반인에게 가장 호소력이 큰 정견을 내놓으며 그것은 
대체로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 결과 서구에서 교육받은 서구 지향의 엘리트들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된다 이슬람권에서 치러진 지난 몇 
차례의 선거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약진하였으며, 1992년의 알제리 총선에서는 군부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정권을 장악할 뻔하기도 했다. 인도에서는 유권자들을 사로잡으려는 치열한 지역주의가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스리랑카에서는 민주주의 덕분에 1956년 스리랑카 자유당이 친서방 엘리트들이 이끌던 통일 국민당을 
누르고 집권하여 1980년대에 신할리즈 민족주의 운동이 부상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1949년 이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서구의 엘리트 들은 모두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서방국으로 간주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본격화하면서 서구 엘리트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서방 진영에서 서서히 떼어 낸 반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들은 자신들을 여전히 서구인으로 여겼다. 그러나 서방의 국제 질서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서구식 교육을 받은 흑인 엘리트들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차세대 
토착화의 원리가 여기서도 작용한다면 그들의 후계자들은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나설 것이고 
남아프디카 공화국은 자신을 점점 아프리카 국가로 규정하려 들 것이다.
  19세기 이전까지 역사의 다양한 시기에서 비잔틴, 아랍, 중국, 오스만, 무굴, 러시아는 서구에 대하여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구의 문화적 열등성, 제도적 후진성, 부패, 타락을 경멸하였다. 서구의 승리가 
상대적으로 퇴색하면서 그런 태도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긴다. 
이란이 극단적인 경우지만 한 연구자는 '서구의 가치는 방식은 달라도 그에 못지 않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중국, 일본에서도 강하게 부정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서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진보 시대의 종언'을 목도하고 있으며 복수의 다양한 문명들이 교류하고 
경쟁하고 공존하고 화해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토착화의 과정은 세계 전역에서 일고 있는 종교의 부활에서, 
특히 경제와 인구의 활력이 낳은 아시아와 이슬람 여러 나라의 문화적 부활에서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신의 설욕
  20세기 전반의 지식인들은 경제와 사회의 근대화가 인간 생활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핵심적인 비중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가정에 대체로 동의하였다. 이런 조류를 반기는 사람이건 개탄하는 사람이건 현상에 대해서는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화를 추구하는 세속주의자들은 과학, 합리주의, 실용주의가 기존 종교의 뼈대를 
이루던 미신, 신화, 비합리성, 구습 을 몰아내는 현상을 반겨 마지않았다. 관용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용주의 
적이고 진보적이고 인간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새로운 사히가 나타나리라고 그들은 내다보았다. 반면에 근심에 찬 
보수주의자들은 신앙과 종교 단체가 사라지고 개인과 집단의 행동 규범을 이끌어 온 교리가 사라진 뒤의 황폐한 
결과를 우려하였다. 그들은 무질서, 타락, 시민 생활의 붕괴가 뒤 따를 것이각고 내다보았다. 엘리어트(T. 
S.ELIOt)는 '그대에게 신이 없다면 히틀러나 스탈린을 받들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20세기 후반은 이런 희망과 공포가 전혀 근거 없었음을 입증하였다. 경제적, 사회적 근대화는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었지만 동시에 전세계에서 종교의 부환 현상이 일어났다. 케펠이 '신의 설욕(la revanche de Dieu)' 이라고 
표현한 이 부활은 모든 대륙. 모든 문명, 모든 나라에서 예외없이 나타났다. 1970년대 중반 케펠은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세속화 조류, 종교와 세속주의의 화해 조류는 방향을 거꾸로 틀었다. 세속적 가치에 적응하는데 더 
이상 목표를 두지 않고 사회 조직의 신성한 기초를 재발견하여 가능하다면 사회를 변혁하려는 새로운 종교적 
기류가 자리잡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이러한 기류는 실패한 근대화와 결별할 것을 요구하면서 근대화가 
좌초하여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이유는 신을 등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쇄신이 아니라 유럽의 2차 
복음 전도이며 목표는 이슬람의 근대화가 아니라 '근대성의 이슬람'화다.
  일부 종교가 새로운 지역으로 선교 활동을 확대하여 신도 수를 늘린 것도 이러한 종교의 소생 현상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나 종교의 부활을 낳은 근본 원인은 사람들이 자기들 공동체의 전통 종교로 돌아가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유대교, 힌두교, 불교, 정교는 한때는 건성으로 
믿었던 신자들이 신앙에 전념하고 교리를 받들고 의식을 엄수하는 경험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교리와 종교 제도의 정화를 전투적으로 앞세우면서 교의에 합당하게 개인, 사회, 대중의 행위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리주의 운동이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리주의 운동은 극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막대한 정치적 파급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말을 살아가 는 인간의 삶에 새로운 틀을 
부여하는 밑바닥의 훨씬 광범위하고 훨씬 근본적인 조류 그 표면에서 넘실거리는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의 소생은 원리주의 종파의 활동 차원을 넘어서 있다. 종교의 부활은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노동에서, 정부의 관심사와 정부가 세우는 계획에서 두루 감지된다 세속적 유교문화에서 아시아적 가치를 
긍정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문화적 부활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종교적 가치를 긍정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와이글(George Weigel)이 말하듯 세계의 비세속화는 20세기 말의 지배적 사회 조류 가운데 
하나다.
  종교의 부각은 옛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감지된다. 이념의 붕괴가 남긴 공백을 채우면서 
종교적 부활이 알바니아에서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전 지역을 휩쓸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정교가 크게 세력을 
만회하였다. 1994년의 한 조사에서 25세 미만의 러시아 국민 가운데 30퍼센트가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 전향한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는 모스크바의 교회 수는 1988년의 50곳에서 I993년에는 250곳으로 
늘어났다. 정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종교를 존중하게 되었고 정부 역시 종교를 지원하고 있다. 1993년 한 
예리한 관찰자는 '러시아의 도시에서 교회 종소리가 다시 허공에 메아리치고 있다. 새롭게 단장한 둥근 지붕이 
햇살 아래 빛난다. 얼마 전까지도 폐허 상태에 있던 교회에 장엄한 성가가 울려 퍼진다. 교회는 도시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정교가 슬라브 국가에서 기세를 떨친 것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는 
중앙아시아를 휩쓸었다. 1969년 중앙아시아에는 예배를 보는 모스크가 I60군데였고 '메드레사(이슬람 신학교)' 는 
단 한 군데였다. 1995년에는 모스크가 약 l만 군데로, '메드레사는 열 군데로 늘어났다 이슬람의 부활은 원리주의 
종파의 활동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파키스탄의 외곽 지원에도 기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대단히 광범위한 문화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와 같은 종교의 범세계적 부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개별 국가와 개별 문명 단위에서 특수한 
원인이 작용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질적인 수많은 원인들이 전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한꺼번에 
비슷한 사태를 낳았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보펀적 현상은 보편적 설명을 요구한다. 개별 국가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무리 특수한 원인의 지배를 받았다 하더라도 어떤 일반적 원인이 분명히 작용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범세계적으로 종교의 부활을 가져온 가장 명백하고 두드러지고 강력한 원인은 종교의 죽음을 야기할 것으로 
예측되던 원인이었다. 그 원인은 바로 20세기 후반부의 세계를 휩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근대화 과정이었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정체성의 원천과 권위 체계가 산산조각 났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뿌리를 잃고 
새로운 직업을 가지거나 실업자로 전전하였다. 그들은 낯선 군증 속에 섞이고 새로운 관계틀에 노출되었다 
그들에게는 정체성의 새로운 뿌리가 필요하였다. 안정된 공동 체의 새로운 형식,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새로운 
도덕률이 필요했다. 주류 종파이건 원리주의 종파이건 종교는 사람들의 그런 욕구에 부응하였다. 리 콴유는 
동아시아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한두 세대만에 산업화에 도달한 농경 사회다. 서구에서 200년 이상에 걸쳐 일어난 일이 여기서는 
50년도 안되는 기간에 걸쳐 벌어졌다. 모든 것이 아주 빠듯한 시간틀 속에 우겨 넣어지고 있어 흔란과 기능 
장애는 불가피하다. 한국, 태국, 흥콩 싱가포르처럼 고속 성장을 해 온 나라들을 보면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그것은 종교의 부상이다... 과거의 관습과 종교-조상 숭배, 샤머니즘-는 이제 사람들의 성에 차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는 왜 여기 있으며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차원 높은 설명을 갈구한다. 이것은 
사회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는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은 이성만으로 살지 않는다. 자아를 정의내리지 못하는 한,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행위할 수 없다. 이익 추구는 자기 정체성을 전제로 한다. 사회가 급속히 변하는 시기에는 확립된 
정체성이 무너지므로 자아가 새롭게 정의되고 새로운 정체성이 발견되어야 한다. 정체성을 따지는 물음은 이익을 
따지는 물음에 앞선다.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필요성을 느낀다. 종교는 
이에 대한 강력한 답변을 제공하며, 종교 집단은 도시화로 상실된 공동체를 대신하는 작은 사회적 울타리가 되어 
준다. 알 투라비(Hassan al Turabi)가 말하듯 모든 종교는 사람들에게 삶의 정체감과 방향성을 제공한 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역사적 정체성을 새로이 발견하거나 창조한다. 아 무리 보편적 목표를 내건 종교라 해도 신도와 
비신도, 우월한 내집단과 열 등하고 이질적인 외집단의 기본적인 구분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귀속감을 준다.
  루이스(Bernard Lewis)는 이슬람 세계에는 "위기의 순간에 이슬람 교도들이 종교적 공동체에서 근본적 
정체성을 찾는. 다시 말해서 인종이나 영토의 기준보다는 이슬람으로 정의되는 공동체에 헌신하려는 경향이 거듭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케펠도 정체성을 향한 탐구의 증요성을 강조한다. '밑으로부터의' 재이슬람화는 
무엇보다도,의미를 잃은 무정형한 소외의 세계에서 정체성을 재건하려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인도에서는 근대 
화가 야기한 갈등과 소외에 대한 반응으로 새로운 힌두적 정체성이 구축 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종교가 
되살아나는 것은 러시아의 천 년 역사와 연결된 유일한 고리로서 교회만이 줄 수 있는 정체성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다. 이슬람 공화국에서 종교가 되살아나는 것도 수십 년 동안 모스크바에게 억눌렸던 
정체성을 되찾겠다는 중앙아시아인의 강한 열망에서 기인한다. 특히 원리주의 운동은 근대적 사회 정치 제도 
세속주의, 과학 지향적 문화의 급속한 유입과 경제 발전과 함께 나타난 흔 돈의 경험, 정체성, 의미, 안정된 사회 
구조의 상실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맥닐도 '원리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이 부각된 인간적 욕구 에 
부응하거나 부응하는 것으로 보여서 사회적 지지를 광범위하게 넓혀 나가고 있는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이 
모두 토지에 가해지는 인구 압박 때문에 국민 대다수가 종래의 부락 생활 방식을 고수할 수 없게 된 나라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또 도시에 기반을 둔 통신 시설이 농촌으로 침투하여 
유서 깊은 농촌 생활의 틀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며 이 점에 동의하였다.
  좀더 넓게 보면 전 세계적인 왼리주의의 부상은 세속주의, 윤리적 상대주의, 자기 방종에 대한 반작용이며, 
질서, 규율, 노동, 상부 상조, 인간적 유대에 대한 긍정이다. 종교 집단은 국가 관료주의가 방치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한다. 여기에는 의료 혜택, 유치원과 학교, 양로원, 시설, 신속한 구호 활동, 불황기의 각종 복지 지원 등이 
포함된다. 질서와 시민 사회의 와해가 낳은 공백을 이들 종교 집단, 특히 뭔리주의 종파가 자주 메우곤 한다.
  전통 종교가 뿌리 뽑힌 사람들의 정서적.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다른 종교 집단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서 그 과정에서 교세를 크게 확장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한국은 역시적으로 불교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크리스트교 신자는 1950년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서 5 퍼센트 수준이었다. 한국이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어 도시화와 직업의 분화가 대규모로 진행되었을 때 불교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도시로 
유입된 수백만의 한국인과 변화한 농촌에 남아 있던 수많은 한국인에게 농경 시대의 침묵하는 한국 불교는 
호소력을 잃었다. 개인의 구원과 운명을 설파한 크리스트교는 혼돈과 변화의 시대에 확실한 위안을 
주었다.1980년대에 오면 장로교와 카톨릭 신자가 다수를 점하는 한국의 크리스트교 신도는 한국 인구의 최소한 
30퍼센트를 차지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추세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감지된다. 라틴아메리카의 개신교 신자는 1960년의 약 700만 명에서 
1990년에는 5천만 명으로 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카톨릭 주교들은 1989년 이러한 약진의 이유를 카톨릭 교회가 
도시 생활의 복잡 다단한 측면을 수용하는 데 게으르고 현재를 살아 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구조적으로 못 갖춘 경우가 많았다는 데서 찾았다. 한 브라질 신부는 개신교 교회가 카톨릭과 달리 
인간적 따뜻함, 치유, 깊은 성령의 체험 같은 개인의 근본 욕구에 부응하였다고 보았다. 라틴아메리카의 빈민 
지역에서 개신교 인구가 늘어 난 것은 한 종교가 다른 종교에게 밀려났다기보다는 명목상의 수동적인 카톨릭 
신자가 열성적이며 적극적인 개신교 신자로 돌아선 데 따른 종교적 열기의 확산으로 이해된다. 가령 1990년대 
초반 브라질에서 전체 인구 의 20퍼센트가 개신교 신자라고 응답하였고 75퍼센트가 카톨릭 신자라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일요일에 개신교 교회에 가는 사람은 2천만 명임에 비하여 카톨릭 교회를 찾는 사람은 1200만 명에 
불과하였다. 세계의 다른 종교들처럼 크리스트교도 근대화와 연결되면서 부활하였으며 라틴아메리 카에서는 
그것이 카톨릭보다는 개신교의 형태로 나타났다.
  한국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변화는 불교와 제도화한 카톨릭이 근대화의 충격에 휩싸인 사람들의 심리적, 
정서적, 사회적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였음을 반영한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기존의 종교가 그런 욕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그 지역의 종교적 판도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정서적 호소력이 강하지 못한 
유교가 그 점에서는 가장 취약하다. 개신교가 라틴아메리카에서, 크리스트교가 한국에서, 원리주의 종파가 이 
슬람권과 인도에서 일으킨 돌풍이 개신교와 카톨릭에 의하여 유교권 국가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하면서 1980년 후반 중국에서는 크리스트교가 특히 젊은층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중국의 
크리스트교 인구는 줄잡아 5천만 명이다. 중국 정부는 목사, 선교사, 전도사를 투옥하고 종교 집회를 금지하고 
억눌러 크리스트교의 확산을 저지하려고 한다. 1994년에는 외국인의 전도 행위나 신학교 및 종교 시설 설립을 
금지하고 해외 지원을 받는 종교 단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싱가포르는 전체 인구의 5퍼센트가 
크리스트교 교인이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 싱가포르 정부는 싱가포르의 비묘한 종교적 균형'을 
뒤흔들지 말 것을 전도사들에게 경고하면서 카톨릭 단체에 소속된 종교 활동가를 구금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크리스트교 관련 집단을 탄압하였다. 냉전 종식과 함께 정치적 구멍이 뚫리면서 서방 교회들은 동방 정교를 믿는 
옛 소견 공화국들로 진출하여 다시금 부활한 정교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지역에서도 증국과 마찬가지로 
외국인의 전도를 막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1993년 러시아 정교측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 의회는 러시아 
당국의 승인을 얻거나 러시아 종교 조직에 흡수된 외국 종교 단체에게만 선교 및 교육 활동의 기회를 부여학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옐친 대롱령은 이 법안의 서명을 거부하였다. 근대화에서 유발되는 종교적 욕구를 
전통 신앙이 채워 주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더 큰 만족감을 주는 외래 종교로 기우는 것이 일반적 
추세이다.
  종교의 부활을 자극하는 요소로는 근대화에 따른 심리적, 정서적, 사회적 충격 외에도 서구의 퇴조와 냉전의 
종식을 들 수 있다. 19세기 이후로 서구에 대한 비서구 문명의 반응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이데올로기의 전진 
으로 나타났다. 19세기의 비서구 사회 엘리트들은 서구의 자유주의 가치관을 홉수하였고 그들이 서구에게 보인 
최초의 저항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의 형태를 띠었다. 20세기에 도입된 사회주의와 마르크시즘은 그 지역의 
상황과 조펀에 맞게 변형되고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는 견인차의 역할을 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러시아, 중국, 베트남에서 서구에 맞서기 위한 수단으로 개발되고 수정되고 활용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심하게 변질되고, 사회주의 경제가 견실한 성장을 
유지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면서 이념적 진공이 생겼다. 서구의 정부,단체, IMF나 세계 은행 같은 국제 기구는 신 
고전주의 경제학과 민주주의 정치학의 원칙으로 이 진공을 채우려고 시도 하였다. 그러나 이 원칙이 비서구 
문화에 얼마나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칠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실패한 세속 종교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에 필적할 만한 다른 세속 종교가 등장하지 않을 경우 진짜 종교에서 위안을 얻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념의 자리에 종교가 들어앉았다. 종교적 민족주의는 세속적 민족주의를 밀어내고 있다.
  종교 부활 운동은 반세속적이고 반보편적이며 크리스트교를 제외하면 반서구적이다. 그것은 또한 로렌스(Bruce 
B. Lawrence)가 '근대성 (modernity)'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의미에서 모더니즘 (modernism)' 이라고 부른 
현상과 관련 있는 상대주의, 이기주의, 소비주의를 배격한다. 그러나 도시화, 산업화, 개발 자본주의, 과학, 기술 
그리고 이것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뜻에서 이것은 반근대주의와는 다르다. 
리 콴유가 지적한 대로 이것은 근대화를 받아들이고 과학과 기술의 불가피성과 그것들이 가져오는 생활 양식의 
변화를 수용하지만, 서구화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 알 투라비의 주장에 따르면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이슬람 세계의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발전의 원동력이며 정화된 이슬람교는 서구 역사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맡았던 역할을 떠맡게 될 것이다. 근대 국가의 발전과 종교는 양립 가능하다.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알제리, 이란, 이집트, 레바논, 튀니지처럼 더 발전되고 일견 더 세속화된 이슬람 국가에서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원리주의 운동을 비롯하여 오늘날의 종교 운동은 현대의 통신 장비와 조직화된 기술로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 탁월한 적응력을 보여 준다. 그 단적인 예가 중미에서 TV선교를 통해 거둔 개신교의 엄청난 
성공이다.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은 각양 각색이지만 특히 두 부류의 집단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모두 도시에 살며 
이동성이 뛰어나다. 최근에 도시로 이 주해 온 사람들은 대개 정서적, 사회적, 물질적 지원이라든가 안내를 갈망 
하는데, 무엇보다도 종교 단체가 그것을 제공한다. 드브레(Rogis Debray)에 따르면 종교는 그들에게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약자의 비타민이다' 또 한 부류의 집단은 도어가 말한 차세대 토착화 현상의 주역인 새로운 
중산층이다. 케펠의 지적에 따르면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의 행동 대원들은 늙은 보수주의자나 무식한 농군이 
아니다. 그들은 아주 젊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대개는 자기 집안에서 대학이나 전문 대학에 처음 들어간 
세대로서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기술자, 과학자, 교사, 공무뭔, 장교로 활동하고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 
젊은이는 종교적이고 부모는 세속적이다. 힌두 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종교 부활 운동의 
지도자들은 토착화한 차세대에서 나오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성공한 기업인이나 행정가이다. 이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인도의 견고한 중산층, 곧 상인, 회계사, 변호사, 엔지니어'와 '나이든 공무원, 지식인, 
언론인'에서 점점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 1990년대 초반의 전반적 추세이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동일한 계층의 사람들이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를 채워 나갔다.
  토착 종교이든 외래 종교이든 종교는 근대 사회의 새롭게 부상하는 엘리트들에게 의미와 방향성을 제공한다. 
도어는 전통 종교에 가치를 귀속 시키는 것은 '다른 지배' 국가들에게, 그와 동시에 그 지배 국가들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수용한 자국의 지배층에게 동등한 예우를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맥닐은 무엇보다도 이슬람의 
재긍정이 어떤 종파의 형태로 나타나건 자국의 정치, 사회, 윤리에 대한 유럽과 미국의 영향력을 거부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이런 의미에서 비서구 종교의 부활은 비서구 사회에서 반서구주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강력한 예증이다. 그러한 부활은 근대화의 부정이 아니라 서구의 부정, 서구와 결부된 세속 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타락한 문화의 부정이다. 그것은 비서구 사회를 좀먹는 이른바 서구 독소의 부정이다. 그것은 
우리는 근대화하겠지만 너희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자신 만만한 발언이 응변하듯 서구로 부터의 독립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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