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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5/문명의 충돌

3. 보편문명? 근대화와 서구화

by FraisGout 2020. 7. 26.

  보편 문명: 의미
  네폴(V.S. NaipauI ) 이 말한 '보편 문명(universal civiliztaion)' 이 비로소 등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에는 대체로 인류의 문화적 융합,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점차로 공통된 
가치관, 믿음, 지향점, 관습, 제도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심오하지만 진부한 
내용일 수도 있고, 진부하지는 않지만 피상적인 생각일 수도 있고, 그런가 하면 진부하고 피상적인 내용일 수도 
있다.
  첫째 모든 인간은 어디에 살고 있건 간에 가령 살인은 죄악이라고 하는 기본적 가치관, 가족 구조 같은 기본적 
제도를 공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옳고 그름의 기본 관념이 담긴 엇삐슷한 '윤리감'이라고나 
할까 최소한의 '얇은' 도덕을 가지고 있다. 만일 보편 문명이 이런 뜻을 담는 것이라면 그것은 깊이는 있지만 
참신성도 시의성도 떨어지는 생각이다. 인류 역사에서 몇 가지 근본적인 가치와 제도가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상수는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인간 행동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역사는 제대로 
분석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한다. 전체 인류에게 공통된 보편 문명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인간이라는 종의 
차원에는 못 미치는 주요 문화적 집단을 어떤 용어로 지칭해야 할 것인가. 인류는 종족, 민족, 일반적으로 
문명이라고 불리는 더 광범위 한 문화적 실체 같은 하위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문명이라는 용어를 들어올려 
인류 전체의 공통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인류의 보편적 차원에는 못 미치는 사람들의 대규모 
문화 집단을 가리키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하든가 아니면 인류의 범위에는 못 이르는 이들 대규모 집 단이 
증발하는 것을 수수 방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벨은 우리는 지금 단일한 세계 문명 안에서 살고 있지만 이 
세계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밑'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문화, 민족, 종교, 역사적 전통과 역사적으로 형성된 
태도의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면모를 가리거나 숨기는 얇은 베니어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문명'을 
범지구 차원에만 국한시키고 역사적으로 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온 대규모의 문화적 실체들을 '문화' 또는 
'하위 문명'으로 지칭할 경우 의미의 흔란만 가중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둘째, 보편 문명이라는 용어는 문명 사회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문명 사회를 원시 사회, 야만 사회와 
구별해 주는 도시와 문자 해독 같은 요소를 가리키는 데도 쓰일수 있다. 이것은 18세기의 유일 문명 개념과 
직결되며 이런 뜻에서 보편 문명은 분명히 출현하고 있다 비록 인류학자들은 급속히 사라지는 원시 사회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지만 말이다. 이런 의미의 문명은 인류 역사에서 점진적으로 세력을 키워 왔다.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문명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유일 문명의 확산과 모순을 빚는 것은 
아니었다.
  셋째, 보편 문명이라는 용어는 지금 서구 문명의 대다수 사람들과 여타 문명의 일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전제, 가치관, 원칙을 가리키는 것 일 수도 있다. 이것을 다보스 문화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세계 각지 천 여 
명의 기업인, 금융인, 정부 관리, 지식인 저널리스트가 해마다 스위스 의 다보스에서 멸리는 세계 경제 포럼에 
참석한다. 이들은 거의가 자연 과학, 사회 과학, 경영학. 법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또한 
말이나 숫자를 밑천으로 삼아 일하고 영어에 상당히 능통하며 정부나 기업, 학술 기관에 몸담고 있어서 국제 
회의 참석 같은 해외 여행의 기회가 많은 편이다. 이들은 서구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개인주의. 시장 경제,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 있다. 다보스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사실상의 모든 국제 기구와 세계 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다보스 
문화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화를 공유하고 있을까?서구를 
제외하면 이 문화를 공유하는 이들은 세계 인구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5천만 명도 채 못된다 어쩌면 5백만 
명도 되지 않을지 모른다. 이것은 보편 문화와는 거리가 멀며 다보스 문화를 공유하는 지도급 인사들이 자기네 
나라에서 확고한 영향력을 반드시 행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불은 '공통의 지적 문화는 오직 엘리트 수준에서만 
존재하며, 많은 사회에서는 그 뿌리가 깊지 않다...다보스 문화가 외교적 수준에서나마 공통의 지적 문화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공통의 윤리 문화나 가치관을 포함하는지는 적이 의심스럽다.' 고 지적하였다.
  넷째, 이러한 발상은 서구의 소비 양식과 대증 문화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하나의 보편 문명이 태동하고 
있다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깊이도 없고 타당성도 없다. 한때의 문화 유행이 문명에서 문명으로 
퍼지는 것은 과거의 역사에서도 숱하게 볼 수 있다. 다른 문명들은 한 문명 안에서 이루어진 혁신을 꾸준히 
수용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증요한 문화적 결실을 낳지 못하는 단순한 기술 아니면 혁신을 받아들이는 문명의 저 
변에 깔린 문화를 바꾸지 못한 채 왔다가 가 버리는 한때의 유행에 불과하다. 수용자측 문명이 이 수입물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이국적이거나 강요에 의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몇 세기 동안 
중국이나 인도 문화의 다양한 요소가 이국성을 앞세워 서구 세계를 열병 처럼 휩쓸고 지나간 예는 얼마든지 
있다 l9세기에는 서구로부터의 문화적 유입물이 중국과 인도에서 각광을 받았다. 서구의 힘이 거기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팝 문화와 소비재의 세계적 확산이 서구 문명의 승리를 상징한다는 논리는 서구 
문화를 왜소하게 이해한다. 서구 문명의 정수는 맥버거가 아니라 마그나카르타(1217년 영국 국왕 존이 받아들인 
왕권 남용의 제한과 국민의 권리를 보장한 칙허장: 옮긴이)인 것이다. 비서구인들이 맥버거에 환장한다고 해서 
그들이 서구의 기준을 받아들인다고 호언 장담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맥버거를 먹는다고 서구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증동에서도 젊은이들이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랩 음악을 듣는 모습은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지만 바로 그들이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고 
의기 투합하여 미국 항공기를 폭파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미국인은 일제 
자동차, Tv, 카메라, 가전 제품을 무더기로 사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화하지는 않았으며 사실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만 커졌다 서구의 상품을 구입하는 비서구인이 서구화되리라는 기정은 오만하고 안이하게 사고하는 
서구인 특유의 생각이다. 서구인이 자신의 문명을 거품 나는 음료수, 빛 바랜 바지, 지방이 많은 음식으로 이해할 
때 서구가 도대체 타문명에 대해 무슨 발언을 할 수 있겠는가?
  보편적 대중 문화의 위력을 신봉하는 좀더 정교한 논리는 소비재 대신 미디어에, 코카콜라 대신 할리우드에 
초점을 맞춘다. 전 세계의 영화, TV, 비디오 산업에서 미국의 장악력은 미국이 항공 산업 분야를 지배하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I993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은 l00편 의 영화 중에서 88편이 미국 
영화였으며 국지적 차원을 넘어선 세계 뉴스 의 취합과 전파는 미국의 양대 언론사와 유럽의 양대 언론사가 
장악하고 있다. 이 상황은 두 가지 현상을 반영한다. 첫째는 사랑, 섹스, 폭력, 미스테리. 영응주의, 재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보편적이며,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 특히 미국 기업이 이들의 관심을 유리하게 사용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구석구석으로 침투하는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의 출현에서 태도와 
믿음의 의미 있는 수렴을 낳는다는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블라호스(Michael VIahos) 
가 말하듯이 오락물은 문화적 수렴의 등가물이 아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을 자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가치관이나 관점을 바탕으로 해석한다는 사실이다. 마부바니(Kishore Mahbubani)는 말한다. '동일한 화면이 
지구촌 구석구석의 안방에 동시에 전달되지만 그것은 상이한 반응을 낳는 다. 크루즈 미사일이 바그다드를 
강타할 때 서구인은 갈채를 보내지만 나머지 지역 사람들은 서방이 백인이 아닌 이라크나 소말리아에 대해서는 
즉각 응징을 가하면서도 같은 백인종인 세르비아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것은 어느 
모로 보나 위험한 조짐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서구의 힘은 단적으로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서구의 이러한 헤게모니는 비서구 
사회의 대중 정치인들이 서구의 문화 제국주의를 거부하고 자국 문화의 건강한 생존이라는 기치 아래 대증을 
규합하도록 자극한다.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이 서구에 의해 주도되는 만큼 서구에 대한 비서구인들의 원한과 
적개심도 높아간다 거기다가 1990년대 초반에 들어서자 비서구 사회는 그 동안 이룩한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힘입어 지역별로 자기들의 독특한 취향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방송사들을 세우고 있다. 일례로 1994년 
CNN 인터내셔널은 세계 인구의 약 1퍼센트에 해당하는 5500만 명의 잠재 시청자가 있다고 추산하면서(다보스 
문화인의 추정치와 놀라우리만큼 가깝다.) 그 중에서도 2~4퍼센트의 시청자에게만 영어 방송이 호소력을 가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따라서 스페인어. 일본어, 아랍어, 프랑스어(서아프리카 지역을 대상으로 한다.), 그 밖의 
언어로 방송하는 지역별(즉 문명별) 방송망이 자연스럽게 부상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방송은 아직도 바벨탑에 
가로막혀 있다고 세 명 의 학자가 일치된 결론을 내린다. 도어(Ronald Dore) 는 외교관 같은 관리들 사이에서는 
범세계적 지적 문화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그도 커뮤니케이션의 증대가 
야기하는 결과와 관련해서는 아주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강조는 필자) 
커뮤니케이션의 점진적 강화는 국민과 국민 사이의, 아니면 적어도 중산층 사이의,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외교관 
사이의 유대감을 공고히 하는 토대를 구축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같지 
않은 것들이 실은 아주 중요할 수가 있다."
  언어
  어떤 문명이나 문화에서든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는 언어와 종교다. 보편 문명이 출현하고 있다면 보편 언어와 
보편 종교가 나타나는 추세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언어와 관련하여 이러한 추세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세계어는 영어다"라고 (월스트리트 저널)지의 편집인은 주장하였다. 이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질 수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만이 보편 문명의 존재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먼저 이 말은 세계 인구에서 영어 
사용자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이 명제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주 정확하다 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신뢰할 만한 증거는 정 반데의 경향을 보여 
준다. 자료가 확보되어 있는 30여 년(1958~92년)의 기간을 놓고 볼 때 세계의 언어 사용 양태는 전반적으로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영어 프랑스어 . 독일어 . 러시아어 일본어 사용자의 비율은 의미 있는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어 사용지식 비율도 소폭으로 떨어졌다. 반면 힌두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 아랍어 벵골어 스페인어 . 
포르투갈어의 사용자 비율은 늘어났다. 백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서 영어 사용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8년에 9.8퍼센트이던 것이 1992년 에는 7.6퍼센트로 떨어졌다. ({표 5.1} 참조) 5대 서구어(영어 프랑스어 .독일 
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사용자가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l958년의 24.1 퍼센트에서 1992년의 
20.8퍼센트로 하락하였다. 1992년 현재 영어 사용자의 2배에 해당하는 세계 인구의 15.2퍼센트가 북경어를 쓰고 
있으며 그 밖에도 3.6퍼센트가 중국어 계열의 방언을 쓰고 있다. (표.3.2 참고)
  세계 인구의 92퍼센트가 낮설어하는 언어가 세계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다른 언어 집단,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의사 소통을 나누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뜻한다면, 다시 말해서 흔성 
국제어, 언어학적 용어로 세계의 주요 광역 소통어(Language of Wider Communication)를 뜻한다면, 사정은 
물론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의사 소 통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은 의사 소통의 수단을 찾아야 한다. 먼저 그 
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상의 언어에 능통하고 특수한 훈련을 받은 통역 전문가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 다리를 건너다보니 어색하고 시 간과 비용 또한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등장한 것이 국제어다. 
고전 시대와 증세에는 라틴어가 그런 역할을 하였고, 서구에서 몇 세기 동 안 프랑스어도 그런 구실을 하였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는 스와힐리어가 국제어이며 20세기 후반부로 들어와서는 영어가 세계 전역에서 사 
람들의 의사 소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외교관, 기업인, 과학자, 관광객, 관광업 종사자, 항공기 조종사, 관제 
요원 등은 오두 효율적인 의사 소통 수단을 필요로 하는데 오늘날에는 주로 영어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양력이 날짜를 기록하는 세계 공용의 방식으로. 아라비아 숫자가 수를 헤아리는 만국 공용의 
수단으로, 미터법이 세계 주요 지역에서 사물을 측정하는 기본 수단으로 채먹되었던 것처럼, 영어가 이질적인 
문화와 문화의 보편적 의사 소통 수단으로서 확고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 영어는 어디까지나 문화와 문화의 의사 소통을 위한 매개체이다. 이것은 이질적인 문화들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국제어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수단이지 그것을 해소하는 방책은 아니다.그것은 의사 
소통을 위한 수단이지 정체성(정체성)과 귀속감을 낳는 원천은 아니다. 일본의 금융인과 인도네시아의 기업 인이 
만나서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그들의 사고가 영어화. 서구화된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독일어를 
쓰는 스위스인과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인도 만나면 대개 영어를 쓰지만 그들의 생각마저 영어화되지는 않는다. 
네루가 각종 억제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영어가 제2 국어로서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비힌두어 사용자들이 자기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려는 열망이 그만큼 강하고 여전히 인도가 다언어 사회로 
남아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뛰어난 언어학자 피시먼(Joshua Fishman)이 지적하듯이 언어는 특정한 인종 집단이나 종교,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지 않을수록 국제어로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과거의 영어는 이런 특성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 
다. 근래에 와서 영어는 그 옛날 아카드어.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가 그랬던 것처럼 탈인종화되었거나 인중적 
특성이 최대한으로 탈색되었다. '지난 사반 세기 동안(강조는 필자)영어의 영국적 뿌리,미국적 뿌리가 민족적 
혹은 이념적 맥락에서 광범위하고 심도 있게 파악되지 않았다는 것은 제1외국어로서 영어가 누릴 수 있었던 
행운의 하나였다. 영어가 문화와 문화의 의사 소통 수단으로 쓰이면서 사람들의 상이한 문화 정체성은 오히려 
강화된다. 사람들이 영어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또한 점점 다른 영어를 쓴다. 영어는 토착화되며 영국 영어나 미국 
영어와는 다른 지역색을 띄기 시작한다. 극단적인 경우 이 영어들은 중국어의 방언들처럼 상호 소통마저 
불가능해 진다. 나이지리아의 피진(잠탕) 영어 , 인도식 영어 같은 것들은 각각의 주류 문화로 편입되면서 분화의 
길을 계속 걸어가 언젠가는 라틴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여러 로맨스 언어들처럼 유관성은 높지만 확고한 
독자성을 가진 언어로 갈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갈은 로맨스어(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제국 내의 각지에서 라틴어가 지방적으로 분화.변천하여 이루어진 근대어의 총칭' 옮긴이}와는 
달리 영어에서 파생한 언어들은 그 사회에서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쓰거나 특정한 언어 집단 끼리의 의사 
소통에만 주로 쓰일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인도에서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1983년에 인도에서 영어를 쓰는 
사람은 7억3천3백만의 인구 증에서 1천8백만 명이고 l991년에는 8억 6천7백만의 인구 중에서 2천만 명이었다 
따라서 인도 인구에서 영어 사용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2퍼센트에서 4퍼센트 수준을 비교적 안정되게 유지해 온 
셈이다. 비교적 소수인 엘리트 집단 밖에서는 영어가 제구실을 거의 못 하고 있다. 뉴델리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두 교수는 이렇게 단정 짓는다. '캐슈미르에서 최남단의 카냐쿠마리까지 여행을 할 때 영어보다는 
힌두어를 써야 더 말이 통하는 게 현실이다.' 나아가 인도 영어는 다방면으로 독자적 특성을 띠고 있다. 영어가 
인도화되고 있다 상이한 토착어를 쓰는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영어 사용의 차이점이 부각되면서 영어는 
빠르게 현지화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과거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가 그랬 
듯이 영어도 인도 문화로 홉수되는에 있다.
  지난 역사를 보면 세계의 언어 분포는 세계의 권력 분포 현실을 반영하였다.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 곧 영어 
북경어 . 스페인어 프랑스어 . 아 랍어 . 러시아어는 자기 언어를 다른 민족들에게 적극적으로 보급한 제국 
국가들의 말이었다. 권력 분포의 변동은 언어 사용의 변모를 낳는다. 두 세기에 걸쳐 지속된 미국과 영국의 식민 
무역 . 산업 . 과학 .재정분야 에서의 압도적 역량은 세계 전역의 고등 교육 정부 교역 기술 체계에 무시 못 할 
족적을 남겼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에다 자국어를 사용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독럽하고 난 뒤 과거 
식민 통치를 경험한 대부 분의 국가들은 강도는 조금씩 다르고 성공도에서도 차이가 났지만 제국주의 국가의 
언어를 토착어로 대체하려고 시도하였다. 소련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러시아어는 프라하에서 하노이까지 두루 
통용되는 국제어였다. 러시아의 세력이 꺾이자 러시아어도 제l외국어로서의 위치가 위태로워졌다. 문화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만 그 나라의 세력이 강해지면 자국민들의 언어적 자긍심도 덩달아 올라가며 외국인들이 그 나라 
말을 배우려는 열기도 높아진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난 뒤 시대 분위기가 빠른 속도로 바뀌고 통일 독일이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을 때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독일인들이 국제 회의에서 
모국어를 사용하 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일본의 경제력은 외국인들 사이에서 일본어 학습 열기를 
낳았으며 중국의 경제 발전 역시 비슷한 중국어 학습 열기를 조장하고 있다. 흥콩에서는 중국어가 영어를 
몰아내고 지배어로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화교가 차지하는 비증이 실로 막대하므로 이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국제 거래에서 중국어 의존도는 갈수 록 높아진다. 다른 문명들과 비교하여 서구의 힘이 
상대적으로 쇠퇴하면서 다른 문명권에서 사용되거나 이질적인 사회들 사이의 의사 소통 수단 으로 사용되는 
영어와 여타 서구어의 비중도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먼훗날 중국이 서구를 제치고 세계를 주도하는 문명으로 
올라선다면 영어는 국제어로서의 지위를 중국어에게 물려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의 식민지가 독럽을 쟁취하게 될 때 엘리트 민족주의자들은 서구 쇠민주의 세력과 자신을 구별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고유어의 사용을 장려하고 제국주의 국가의 언어를 억누르는 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독럽을 이루고 난 다음 이들 엘리트 집단은 일반 국민들과 자신들을 차별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영어 . 프랑스어 
같은 서구어에 능통해지는 것이 그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비서구 사회의 엘리트들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일반 국민들보다는 서구인들과 또는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 부담을 덜 느끼는 경향도 있다.(비슷한 
현상이 서구에서도 l7. 18세기에 나타 났다. 유럽 여러 나라의 귀족들은 자기들끼리는 프랑스어로 쉽게 의사 
소통을 나누면 서도 자국어에는 무지한 경우가 맙았다.) 비서구 사회에서는 현재 두 가지의 상반된 흐름이 진행 
증인 것으로 보인다. 대학 수준에서는 자본과 고객을 확보하려는 국제 경쟁에서 유능한 일꾼이 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영어교육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는 자국어의 사용을 더욱 밀어붙이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북아프리카에서는 아랍어가 프랑스어를 몰아내고 있고 파키스탄에서는 학교와 관공서에서 
영어 대신 점점 우르두어가 쓰이고 있으며 인도에서는 힌두어 매체가 영어 매체를 압도하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1948년 인도 교육 위원회가 이미 예견한 바 있다. 당시 인도 교육 위원회는 '영어의 사용은 ..... 
같은 민족을 두 개의 국민으로, 즉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로 갈라 놓으며, 이들은 상대방의 언어를 
모르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다보았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영어가 엘리트 언어로 고수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예측이 정확하였음을 입증한다. 이것은 보통 선거에 기초를 둔 살아 있는 민주주의에서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하였다. 영어를 쓰는 인도와 정치 의식이 강한 인도가 점점 갈라져 나가서 영어를 아는 
상층부의 소수와 영어를 모르지만 투표권으로 무장한 다수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비서구 사회가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하고 그 나라 국민들이 정부에 더욱 광범위하게 개입할수록 서구어는 퇴조하고 고유어가 득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련 제국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되자 지금까지 억압당하거나 망각당하였던 언어들이 기운을 되찾고 급속히 
영향력을 넓혔다. 옛 소련에 들어 갔던 대부분의 공화국에서 자신들의 전통 언어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에스토니아어 . 라트비아어 . 리투아니아어 . 우크라이나어 그루지야어 . 
아르메니아어는 이제 독럽 국가의 국어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 공화국들에서도 고유어에 대한 자긍심이 
되살아 났다.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 우즈베키스탄은 예전의 종주국 러시아가 쓰던 키릴 
문자에서 탈피하여 가까운 터키의 라틴 문자를 받아들였고 페르시아어를 쓰는 타지키스탄은 아랍 문자를 채택 
하였다. 또 세르비아는 자신의 언어를 더 이상 세르보-크로아티아어가 아니라 세르비아어로 부르고 크로아티아 
역시 자기말을 크로아티아어라고 부르면서 터키어를 비롯한 외국어의 잔재를 지우려고 애썼다. 그런가 하면 
보스니아에서는 터키와 아랍으로부터의 차용어, 발란 반도에서 450년 을 군림한 오스만 제국의 언어적 침전물이 
다시금 각광을 받고 있다. 언어는 문명의 지형도에 발 맞추어 재배치, 재구축되고 있다.


  종교
  보편 언어의 등장 가능성이 희박하듯이 보편 종교가 출현할 가능 성도 별로 없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세계 
전역에서 종교가 부활하였다. 종교적 자각의 확산과 원리주의 운동의 부상이 이런 현상을 낳았다. 따라 서 
종교적 차이는 한층 심화되었다. 상이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비율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교세에 관한 입수 
가능한 통계 자료는 언어 사용 실태에 관한 자료보다는 단편적이고 신뢰도도 낮다. t표 3.3}은 널리 이용되는 
자료에서 뽑은 수치이다 이 자료와 기타 통계를 종합하면 수치상으로만 따졌을 때 금세기 동안 전 세계 종교의 
상대적 교세에는 두드러진 변화는 없었다. 이 자료에 나타난 가장 눈길을 끄는 변화라면 무종교와 무신론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1900년에는 0.2퍼센트에서 1980년에는 20.9퍼센트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종교로부터의 이반 추세가 대대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종교의 부활 현 상이 
본격화된 것은 19S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그러나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20.7퍼센트라는 증가폭과 
중국에서 토착 종교를 믿는 사람 들의 비율이 1900년의 23.5퍼센트에서 1980년의 4.5퍼센트로 줄어든 것, 즉 
19.0퍼센트라는 감소폭은 너무나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증가폭과 감소폭이 사실상 같다는 것은 
공산주의의 집권 이후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민간 신앙의 범주에서 무신앙의 범주에 포함시켰음을 암시한다.
  이 자료를 보면 지난 80년 동안 전도에 힘을 쏟았던 세계의 양대 종교인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의 신도가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크리스트교 신자는 1900년에 세계 인구의 26.9퍼센트로 
추정되던 것이 1980년에는 30.0퍼센트로 늘어났다. 이슬람 교도는 1900년의 12.4퍼젠트에서 l980년의 16.5퍼센트로 
더욱 큰 폭으로 늘어났다. 일각에서는 1980년 현재 이슬람 교도가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l8퍼센트로 
추정하기도 한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는 아프리카에서 교세를 크게 늘렸다. 특히 
한국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신도수 가 엄청나게 늘었다. 근대화를 빠른 속도로 치러 낸 사회에서는 전통 종교 가 
근대화의 요청에 제대로 적응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해 크리스트교나 이슬람교가 침투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이런 사회에서 서구 문화를 가장 성공적으로 소개하는 이들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나 개혁을 부르짖는 민 
주주의자, 다국적 기업의 경영자가 아니다. 그 역할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선교사들의 몫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스미스(Adam smith)나 제퍼슨(Thomas Jefferson)만으로는 이들 사회의 심리적, 정서적, 윤리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예수도 그런 요구를 만족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마호메트가 성공한다 크리스트교는 주로 개종에 의존하여 교세를 넓히지만 이슬람교는 개종과 
출산으로 교세를 확장한다. 크리스트교 신자의 비율은 1960년대에 s0퍼센트를 정점으로 이후 안정세를 
유지하다가 지금은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그 비율은 2025년에는 세계 인구 의 25퍼센트로 떨어질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대단히 빠른 인구 증가율 덕분에(9장 참조) 전 세계의 이슬람 교도 비율은 비약적으로 늘어나서 
금세 기 말에는 20퍼센트에 도달하고 다시 몇 년 뒤에는 크리스트교 신자 수를 추월한 다음 2025년까지는 세계 
인구의 50퍼센트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보편 문명: 근거
  보편 문명이라는 개념은 서구 문명의 특징적 산물이다. '백인의 책무' 라는 l9세기의 관념은 비서구 사회에 
대한 서구의 정치적,경제적 지배 확산을 정당화하였다. 20세기 말에 와서도 보편 문명의 개념은 다른 사회들에 
대한 서구의 문화적 지배를 정당화하면서 이들 사회가 서구의 제도와 관습을 모방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보편주의는 비서구 문화 앞에 서구가 내놓은 이념이다 주변인이나 전향자에게서 자주 보는 모습이지만 
보편 문명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 중에는 네폴이나 아자미(Fouad Ajami) 같은 이주 지식인이 많다. 보편 
문명의 개념은 그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에 대단히 만족스러운 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비서구적 뿌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한 지식인이 이것을 저버린 사람들을 '백인의 검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보펀 문명이라는 발상은 다른 문명에서 거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서구가 보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비서구는 
서구 것으로 받아들인다. 미디어의 세계적 확산을 서구가 지구의 부드러운 통합이라고 선전할 때 비서구인은 
거기서 사악한 서구 제국주의를 본다. 설령 비서구인이 세계를 하나로 바라본다 하더라도 거 기에는 위기감이 
스며 있다.
  어떤 형태로든 보편 문명이 출현하고 있다는 주장은,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놓고 다음 세 가지 중에서 하나 
이상의 가정에 의존한다 첫째 1장에서 논의한 것처럼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은 역사의 종언과 전 세계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보편적 승리를 의미한다는 가정이다 이 주장은 유일 대안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이것은 공산주의의 
유일한 대안은 자유 민주주의이며 전자가 무너졌으니 후자의 보편성이 획득되었다는 냉전 논리에 근거를 두었다. 
지금 세계에서 수많은 형태의 권위주의, 민족주의, 협동 조합주의(corporatism, 사회 전체를 국가에 종속되는 
협동 조합들로 구성하려는 이론:옮긴이), 시장 공산주의(증국)가 얼마든지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 
못 할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속적 이념 용어로 파악되는 세계의 바깥에는 무수히 많은 종교적 대안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종교는 사람들을 자극하고 동원하는 중심적인,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힘이다. 소련 공산주의가 
몰락하였다고 해서 서구가 세계 역사에서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고 이슬람, 중국, 인도 등이 서구식 자유주의를 
너도 나도 유일한 대안으로 삼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너무도 오만한 발상이다. 냉전이 인류를 분열시키던 
시대는 끝났지만 민족, 종교, 문명에 따른 인류의 더욱 근본적인 분열은 여전히 새로운 분쟁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둘째, 사람들 사이에 교류가 날로 늘어나면서 -무역. 투자, 관광, 방 송,통신의 발전으로-공동의 세계 문화가 
나오고 있다는 가정이 있다 수송 및 통신 기술의 발전은 확실히 자본, 상품, 사람, 지식, 사상, 이미지 의 전 
세계적 이동을 쉽고 빠르게 만들었다. 이런 부문들에서 국제적 교섭 이 늘어났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늘어난 국제적 교섭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적잖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무역은 분쟁의 
가능성을 늘리는가 줄이는가? 무역이 국가들 사이의 전쟁 가능성을 줄인다는 가정은 아직 입증이 안 되었을 
뿐더러 실은 이것을 반증하는 증거가 하나둘이 아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국제 무역은 대폭 증가하였고 
1960년에 가서는 세계 총생산의 15퍼센트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 다음 10년 그 기간 동안에 냉전이 끝났다. 
그러나 1913년에는 국제 무역이 세계 총생산의 33퍼센트를 차지하였음에도 그 다음 몇 년 동안 국가들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살상전을 벌였다. 이 정도 수준의 국제 교역 이 전쟁을 막지 못하였다면, 어느 단계에 가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단 말인 가? 역사적 증거는 무역이 평화를 낳는다는 자유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가정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l990년대에 이루어진 분석은 그러한 가정을 한층 의심스럽게 만든다. 한 연구는 무역 수준의 
증가는 국제 정치에 ... 분열을 낳는 강한 힘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으며, 국제 체제에서 무역량이 늘어난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는 국제적 긴장이 줄어들지도 않으며 국제적 안정이 공고화되지도 않는다.' 고 결론짓는다. 또 
한 연구는 높은 수준의 경제적 상호 의존 관계는 '향후 무역 전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평화를 낳을 수도 
있고 전쟁을 야기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경제적 상호 의존은 국가들이 예측 가능한 미래까지 대규모 교역 
수준이 지속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을 때만 평화를 낳는다. 국가들이 고도의 상호 의존 관계가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국가들이 할 때는 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있다.
  무역과 교류가 평화나 유대감을 조성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사회 과학에서 밝혀진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 
사회 심리학에서 말하는 변별 이론 (distinctiveness theory)은 특정한 상황 안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자신을 구별 
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한다고 본다. '사람은 자기를 다른 인간들, 특히 자신이 일상적으로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과 구분짓는 특성을 통해서 스스로를 파악한다. ..... 다른 직종에서 일하는 십여 명의 여자들과 함께 있는 
여성 심리학자는 자신을 심리학자로 여기지만 십여 명의 남성 심리학 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을 여자로 
본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이 아닌지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한다. 통신 무역 . 여행의 증가로 문명과 문 명의 
접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차츰 자신들의 문명적 정체 성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독일인 한 
명과 프랑스인 한 명이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 이들은 스스로를 독일인과 프랑스인으로 각각 생각할 것이다. 
독일인 한 명과 프랑스인 한 명, 사우디아라비아인 한 명과 이집트인 한 명이 만났을 때는 각자를 유럽인과 
아랍인으로 여길 것이다. 북아프리카인의 프랑스 이민을 프랑스인은 탐탁치 않게 생각하지만 카톨릭이 국교인 
같은 유럽의 폴갈드인 이민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미국인은 캐나다나 유럽 국가가 자국에 더 큰 투자를 해도 
신경을 안 쓰다가 일본이 투자를 하면 아주 과민하게 반응한다. 호로위츠(Donald Horowitz)는 그런 심리를 
재미나게 표현하였다. 이보인(나이지리아 남동쪽에 사는 민족:옮긴이}은 . 나이지리아 동부 지방에서는 오웨리 
이보거나 오넛샤 이보다. 나이 지리아의 수도 라고스에서는 그냥 이보다. 런던에 오면 그는 나이지리아인이다. 
뉴욕에서는 아프리카인이다. 사회학에서도 세계화 이론이 비슷한 결론을 내놓는다. 역사적으로 가히 유례가 없을 
만큼 문명적, 사회적 상호 의존도가 깊어지고 거기에 입각한 의식이 확산되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도 문명적, 
사회적, 민족적 자의식은 심화된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의 부활 '성스러운 것으로의 복귀' 는 세계를 
'단일한 장소 로 보는 측의 견해에 대한 부정적 답변인 셈이다.
  서구와 근대화
  보편 문명의 등장을 옹호하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셋째 주장은, 보편 문명을 l8세기 이후 전개되고 있는 
광범위한 근대화 과정의 결과로 이해한다. 근대화는 곧 산업화요, 도시화다. 문자 해독률, 교육, 부, 사회적 유 
동성의 수준이 높아지고 직업 구조 또한 복잡 다양해진다. 근대화는 18세기에 들어와 과학 기술 지식의 폭발적인 
증가와 함께 시작되었다. 덕분에 인간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로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고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화 과정은 원시 사회에서 문명 사회로의 이행, 다시 말해서 기원전 5천 년을 전후하여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나일 강, 인더스 강 유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출현한 문명의 탄생에 버금 가리 만큼 
혁명적이었다. 근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 가치관, 지식, 문화 는 전통 사회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가장 먼저 근대화에 도달한 문명으로서 서구는 근대화의 문화를 남보다 한 발 앞서 터득하였다. 다른 
사회들도 엇비슷한 내용의 교육, 노동, 부, 계급 구조의 패턴을 도입할 수밖에 없으므로 근대의 서구 문화가 
세계의 보편 문화로 등극하리라는 것이 이 논리의 핵심이다.
  근대 사회와 전통 사회에 증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 문화를 
지녔던 사회들간의 유사성보다 근 대 문화를 지닌 사회들간의 유사성이 더 높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물론 
일부 사회가 고도로 현대화되고 일부 사회가 전통 수준에 머물러 있는 세계는, 모든 사회가 비교적 높은 수준의 
근대화 단계에 이른 세계보다 는 동질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모든 사회가 전통 사회인 세계와 비교하였을 때는 
어떨까? 이런 세계는 불과 몇백 년 전까지도 존재하였다 이 세계 가 보편적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미래의 
세계보다 동질적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브로델은 지적하였다. '중 국의 
명 나라는 .. .. 마오쩌둥의 중국이 제5공화정의 프랑스와 비슷한 정도보다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와 확실히 더 
비슷하였다.
  그러나 근대 사회는 전통 사회보다는 두 가지 이유에서 자기네끼리 더 비슷할 수 있다. 첫째, 근대 사회간의 
교류가 늘어난다고 해서 공동 문화 가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기술, 발명, 관습이 
전달되는 속도는 전통 세계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준에 올라섰다. 둘째, 전통 사회가 농업에 기반을 
두었다면 근대 사회는 산업에 기반을 둔다. 근대 사회는 수공업에서 고전적 중공업으로, 다시 지식에 기초한 
산업으로 꾸준히 발전하여 왔다. 농경 형태와 거기에 수반되는 사회 구조는 산업 형태에 비하여 자연 환경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높다. 농경 형태는 토양, 기후에 따라 달라지며, 이것은 다시 상이한 토지 소유 관계, 사회 
구조, 통치 체계를 낳는다. 비트포겔(KarI August Wittfogel)이 말한 수력학 문명이 전반적으로 얼마나 
타당한지는 차치하고라도 아무튼 대규모 의 관개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해야 하는 농업은 증앙 집권화된 관료적 
정치체제를 낳게 마련이다. 다른 방식은 거의 불가능하다. 비옥한 토양과 양호한 기후는 대규모의 플랜테이션 
농업을 낳으며 그에 따라 사회 구조 도 소수의 부유한 지주층과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다수의 농민, 노예 농 
노로 이루어진다. 대규모 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한 여건에서는 독립농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농경 사회에서는 사회 구조가 지리적 풍토에 의하여 결정된다. 산업은 농업에 비해 자연 환경에 대 
한 의존도가 훨씬 낮다. 산업 구조의 차이는 지리적 풍토의 차이보다는 문화와 사회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산업 구조의 차이는 수렴될 수 있어도 문화와 사회 구조의 차이는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근대 사회는 많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동질성으로 녹아든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녹아든다고 보는 논리는 근대 사회는 단일한 형태, 곧 서구적 형태로 접근하고 근대 문명은 서구 
문명이며 서구 문명은 근대 문명'이라는 전제에 의존한다 이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는 전제다. 서구 문명은 
8세기와 9세기에 출현하여 그 후 몇 세기 동안 자신의 뚜렷한 개성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서구 문명은 17세기와 
18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지 못한 아득한 옛날에도 서구는 
서구였다 서구를 다른 문명들과 구분짓는 중요한 특징들은 서구의 근대화 이전에도 벌써 존재하고 있었다.
  근대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수백 년 동안 서구 사회가 지녔던 남다른 특성들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학자들이 
이 물음에 답변을 내놓았다. 강조점은 약간씩 다를지 몰라도 그들이 서구 문명의 알맹이로 파악하는 제도, 
관습,믿음의 내용은 대체로 일치한다. 그것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그리스-로마의 유산
  서구는 과거의 문명들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았지만 특히 그리스-로마 문명의 영향력은 지대하다.서구가 
물려받은 유산 중 에는 그리스 철학과 합리주의 로마법, 라틴어. 크리스트교가 포함된다. 이슬람 문명과 동방 
정교 문명에도 그리스-로마의 유산이 남아 있지만 서구 문명에 비하면 약소한 수준이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서구 문명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하나만 꼽으라면 처음에는 카톨릭이었다가 나중에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뉜 서방 크리스트교가 먼저 떠오른다. 기원후 첫 1천 년의 대부분 기간 동안 서구 문명은 실제로 서방 
크리스트교국으로 불렸다. 서방 크리스트교 신도들은 지신들의 공동체가 터키, 무어, 비잔틴과는 명백히 
구분된다는 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서구가 16세기에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선 것은 돈도 돈이었지만 신의 
뜻이라는 소명감도 작용하였다.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서방 크리스트교가 북쪽의 프로테스탄트와 
남쪽의 카톨릭 으로 분열된 것 또한 서구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그것은 동방 정교나 
남아메리카의 경우와는 판이한 양상이었다.
  유럽어
  언어는 한 문화의 사람들을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구분 짓는 특성으로서 종교에 다음 가는 중요성을 갖는다. 
서구는 다양한 언어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문명들과 다르다. 일본어, 힌두어, 증국어, 러시아어, 
심지어는 아랍어조차도 자기들 문명의 핵심 언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구는 라틴어를 물려받았지만 다양한 
민족이 등장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민족어들이 로맨스어와 게르만어라는 포괄적 범주 안에 묶이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이 언어들은 대체로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었다. 라틴어는 공동 국제어로서의 자리를 
프랑스어에 내주었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어는 다시 영어에게 밀려났다.
  종교적 권능과 세속적 권능의 분리
  서구 역사를 보면 교회는 국가와는 별개로 존재한 적이 많았다. 교회와 국가, 종교적 권능과 세속적 권능은 
서구 문화를 관통하는 이원론이었다. 서구만큼 종교와 정치가 명확히 분리된 예는 힌두 문명말고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이슬람에서 신은 곧 왕이다 증국과 일본에서 왕은 신이다. 동방 정교에서 신은 왕의 손아래 벗이다 
서구 문명에서 나타나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와 거듭되는 양자의 층 돌은 다른 문명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권능의 
분리는 서구에서 자유가 신장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법치
  문명 사회에서는 법이 중심에 와야 한다는 관념은 로마로부터 계승된 정신이다. 중세 사상가들은 자연법의 
이념을 정교하게 다듬었으며 군주도 자신의 권력을 거기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행사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관습법 전통이 발전하였다. 절대주의가 지배한 16세기와 17세기의 법치는 현실에서 
관철되기보다는 파기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인간의 권력을 외부적 규제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정신은 
유지되었다. 법치의 전통은 재산권을 포함한 인간의 권리를 권력의 자의 적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제도와 
입헌주의의 초석을 깔았다. 다른 대부분의 문명은 법이라는 요소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하는 정도가 
서구보다는 횔씬 미약하였다.
  사회적 다원주의
  역사적으로 서구 사회는 대단히 다원적이었다. 도이치 (K;rrl W. Deutsch)가 지적하듯이 서구의 남다른 특징은 
혈연이나 혼인관계 에 토대를 두지 않은 다양한 자율적 집단의 부상과 존속이었다. 6세기와 7세기에 수도원, 
수도회, 길드로서 출발한 이들 집단은 그 후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한 결사와 조직을 거느리게 되었다. 
조직의 다원성은 계급의 다원성으로 발전하였다. 대부분의 유럽 사회에는 상대적으로 강하며 자율적인 귀족, 
부농, 소수지만 실력을 가진 상인, 무역업자가 나름의 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중세 귀족의 힘은 절대주의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하는 데 증요한 역할 을 하였다. 궁핍한 시민 
사회, 취약한 귀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중앙 집권화된 관료주의를 특징으로 하던 그 당시의 러시아, 중국,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비서구 사회와 유럽의 다원주의는 날카롭게 대비된다. 
  대의제
  사회적 다원주의는 정치 집단을 낳았고 귀족. 성직자, 상인 등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의회 같은 기구를 
낳았다. 이 기구들이 제시한 대 의 형태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근대 민주주의 제도로 발전하였다. 절 대주의 
시기에 이들 대의제는 폐지되거나 권한이 크게 제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곡절을 겪으면서도 예컨대 
프랑스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들은 다시 부활하여 정치적 참여의 통로를 개방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1천 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대의제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 문명은 서구밖에 없다.지방 차원에서도 9세기를 전후하여 자치 
운동이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불붙기 시작하여 북쪽으로 번지면서 교황 지방 호족, 귀족에게 시민과 권력을 
공유하도록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이들을 무릎 끓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국가적 수준의 대의제는 
세계의 다른 문명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방 수준의 대의제에 의하여 보완되었다.
  개인주의
  위에서 말한 서구 문명의 특성들은 개명된 사회 특유의 개인주의 정신과 개인권 및 자유의 전통을 낳는 데 
기여하였다. 개인주의는 l4세기와 l5세기부터 발전하였으며 17세기에 이르면 개인의 선택권-도이치가 말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혁명-은 서구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다. 심지어는 모든 개인의 '동등한 권리를 내세운 주장 
영국에서 가장 못 사는 가난뱅이나 영국 제일의 부호나 똑같은 인간이다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은 분명히 선언되었다. 개인주의는 20세기의 문명들 속에서 서구의 가장 두드러진 면으로 남아 있다. 
50개국을 대 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개인주의 지표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 한 상위 20개국은 
포르투갈과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방 국가였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국가별 차이를 분석한 또 다른 
국제 여론 조 사도 서구에서는 개인주의가 우위에 있는 반면 나머지 세계에서는 집단주의가 우선인 현실을 
강조하면서 서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 세계적으로 가장 경시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개인주의를 서구의 
핵심적 덕목 으로 꼽는다는 점에서는 서구인이나 비서구인이나 차이가 없다.
  위에서 열거한 항목들이 서구 문명의 남다른 개성을 빠짐없이 담아 낸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이런 특성들이 
서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항상 존재하였다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분명히 그런 말은 사실과 다르다. 서양사에는 
법치를 무시하고 대의제를 깔아뭉갠 폭군이 수많이 등장한다. 이런 특성들이 다른 문명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할 생각 또한 없다. 이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코란과 샤리아(이슬람교의 성법: 옮긴이)는 이슬람 
사회의 기본법이다. 일본과 인도.서구에 비견할 만한 계급 체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상당 기간 지속되고 있는 유일한 2개의 비서구 사회인지도 모른다.) 이 요소들 중에서 서구 사회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요소들의 결합은 서구에서만 나타났으며 그것이 서구의 남다른 
특징이었다. 이러한 개념, 관습, 제도는 다른 문명보다 서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것들은 적어도 서구 문 
명에서 본질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정수의 일부분에 해당한다. 그것들은 서구적인 현상이지만 서구에서 근대 
이후에 비로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구가 자신과 세계를 근대화로 이끄는데 앞장설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요소들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서구와 근대화에 대한 반응
  서구의 팽창은 비서구 사회의 근대화와 서구화를 동시에 자극하였다 비서구 사회의 정치 지도자와 지식인은 
서구의 영향 앞에서 다음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의 길을 택하였다. 그것은 근대화와 서구화를 모두 거부하는 길, 
그 둘을 모두 받아들이는 길, 근대화만 받아들이고 서구화는 거부하는 길이다.
  쇄국
  일본은 l542년 서구와 처음 접촉을 가진 이후 l9세기 중반까지 줄기차게 쇄국의 길을 걸어왔다. 무기 구입 같은 
제한된 형태의 근대화만이 허용되었을 뿐 크리스트교를 포함한 서구 문화의 유입은 극도로 억제되었다. l7세기 
중반까지는 서구인이 모두 추방당하였다.이 쇄국 정책은 1854 년 페리 함장에 의해 개국을 강요당하면서 막을 
내렸고 1854년에 시작된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서양 문물을 배우려는 열기가 크게 고조되었다. 수세기 동안 중국 
역시 근대화나 서구화의 기운이 싹트는 것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1601년 크리스트교 사절단의 중국 입국이 
허용되었지만 1722년에는 사실상 다시 빗장을 닫아걸었다. 일본과는 달리 증국의 쇄국 정책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증국인의 관념과 외부 세계에 대한 자국의 문화적 우위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처럼 중국의 고립 주의도 서양의 군사력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1839년에서 1842년까지 영국은 중국을 
상대로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 서구 열강의 막강한 힘 앞에서 비서구 
사회가 순수 고럽주의 전략을 고수하기란 거의 블가능하였다 20세기 들어와 수송 통신 .상호 의존도에서 진전이 
생기면서 고립주의를 택하였을 때 치러야 하는 회생의 대가는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커졌다.
  현대화와 상호 결속이 엄청나게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세계에서, 생존하기에 급급한 소규모의 고립 농경 
사회가 아닌 바에야 근대화와 서구화를 송두리째 부정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파이프스(DanieI 
Pipes)는 이슬람과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 "아주 극단적인 원리주의자들만이 근대화와 서구화를 모두 거부한다. 
그들은 TV 수상기를 강물에 던지고 손목 시계의 착용을 금지하며 내연 기관을 거부한다. 이런 원칙을 앞세우는 
집단은 비현실성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다트의 암살범들, 메카 사원의 공격자들, 
말레이시아의 '다크와(dakwah)' 집단이 실증하듯이 권력 당국과 폭력 대결을 벌여 패배를 겪은 다음에는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20세기 말에 취하는 순수 고럽주의 정책의 운명을 
집약하는 말이다. 토인비의 말대로 열광은 존립 가능한 선택안이 아니다.
  케말주의
  서구에 대한 두 번째로 가능한 반응은 근대화와 서구화를 동시에 추구하는,토인비가 말한 헤롯(로마를 추종한 
유대의 왕:옮긴이)주의다 이 반응은 근대화는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토착 문화는 포기 또는 제거되어야 한다, 
근대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완전히 서구화되어야 한다는 가정에서 나온다. 근대화와 서구화는 서로를 
강화시키는 동반자 관계에 있다. 이러한 발상은 근대화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역사적 언어를 버리고 영어를 
국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19세기 말 일본과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의 주장에 단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생각은 비서구 사회의 엘리트보다는 서구인 사이에서 더욱 인기를 얻었다. 그 골자는 
이렇다. '성공하려면 너희도 우리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의 길이 유일한 길이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이들(비서구) 사회의 종교적 가치관, 윤리적 전제, 사회적 구조는 산업 사회의 가치관과 규범에 이질적이고 
때로는 적대적이기조차 하다.'는 것이다.따라서 경제가 발전하려면 생활과 사회가 획기적이고 파괴적으로 
개펀되어야 하고 그 문명 안에 사는 사람들이 이해해온 존재의 의미가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이프스는 이슬람을 노골적으로 지목하면서 비슷한 논리를 편다.
  혼돈에서 벗어나려는 이슬람 교도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근대화는 서구화를 요구한다. . .. 
이슬람은 근대화에 이르는 대안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세속주의는 블가피하다. 근대 과학과 기술은 거기에 
동반되는 사고 과정은 물론 정치 제도도 흡수할 것을 요구한다.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서구 문명의 우위를 인정해야 서구로부터 배울 수 있다. 유럽의 언어와 서구식 교육 제도를 불가피하게 
도입하여야 한다. 비록 후자가 자유사상과 안일한 생활을 조장하더라도 말이다. 서구적 모범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일 때만 이슬람 국가는 과학과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글이 나오기 이미 60년 전에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I Ataturk)가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폐허로부터 새로운 터키를 건설한 뒤 근대화와 서구화를 위하여 대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의 유산을 거부함으로써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를 자신의 종교, 전통, 관습 제도를 고수하려는 
이슬람 교도와 자기 나라를 근대화, 서구화시켜 서구에 편입시키려는 의지를 가진 지배 엘리트가 공존 하는 
'분열된 나라'로 만들었다. 20세기 후반에도 여러 나라가 케말주의를 추구하면서 비서구적 정체성을 서구적 
정체성으로 바꾸려고 애쓰고 있다. 이들의 노력은 6장에서 분석될 것이다.
  개량주의
  쇄국은 하루가 다르게 조여드는 근대 세계에서 사회를 고립시키는 가망없는 시도다. 케말주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다른 문명에서 수입한,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이식하겠다는 층격적이고 
실현되기 어려운 과업이다. 제5의 길은 그 사회가 간직한 고유 문화의 중심적 가치, 관습, 제도를 유지하면서 
근대화와 조화를 이루겠다 는 시도이다. 이 방안은 비서구 사회의 엘리트들이 당연히 가장 선호한 방식이었다. 
청조 말기 중국의 구호는 '중체서용', 곧 근본 원칙은 중국 것을 익히되 실용 지식은 서양 것을 익히자는 
것이었다 일본의 구호는 '화혼양재`, '일본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이었다. 1850년대 이집트에서도 
알리(Muhammad Ali)가 과도한 문화적 서구화를 수반하지 않은 기술 근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근대적 개혁의 대부분을 포기하도록 영국이 강요하는 바람에 이런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그 결과 
마즈루이(Ali Mazrui)가 지적하듯이 이집트의 운명은 문화적 서구화를 수반하지 않은 기술적 근대화라는 일본의 
운명과는 달랐고 문화적 서구화를 통한 기술적 근대화라는 케말 아타튀르크의 운명과도 달랐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알 아프가니(Jamal al-Din al-Afghani), 압두(Muhammad' Abduh)를 비롯한 일군의 개혁가들은 '근대 
과학과 서구 사상의 정수는 이슬람과 양립이 가능하다'는 주장과 함께 과학, 기술, 정치(입헌제와 대의제) 
분야에서 근대적 관념과 제도를 수용하면서, 이슬람의 원리를 제공하고 이슬람과 근대성을 새롭게 접맥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것은 케말주의에 근접한 광범위한 개량 노선으로서 근대성뿐 아니라 서구의 제도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런 형태의 개량주의는 187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이슬람의 엘리트들이 서구에 가졌던 일반적인 
태도였다. 그러다가 l920년대에 들어가서 케말주의가 처음으로 부상하고 뒤이어 훨씬 순수한 형태의 개량주의가 
원리주의의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이런 태도가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쇄국주의 . 케말주의 개량주의는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두고 상이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쇄국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근대화와 서구화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고 둘 다 거부해야 마땅하다. 케말주의는 
근대화와 서구화가 모두 바람직하고 서구화는 근대화의 전제 조건이며 둘 다 실현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개량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서구화를 대폭 수용하지 않고도 바람직한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쇄국주의와 케말주의는 근대화가 바람직한가를 놓고서 대립하고 케말주의와 개량주의는 서구화없이 근대화가 
가능한가를 놓고서 대립한다.
  (그림 3 .1 )은 이들 3가지 실천 경로를 알기 쉽게 그립으로 나타낸 것이다. 쇄국주의는 A점에 머물러 있고 
케말주의는 B점을 향해 비스듬히 움직 일 것이다. 개량주의는 C점을 향해 수평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사회들은 어떤 길로 나아갔는가? 비서구 사회 하나하나는 이 세 가 지의 전형적 경로와는 현실적으로 
차이가 나는 독자적 경로로 움직인 것이 사실이다. 마즈루이는 심지어 이집트와 아프리카는 기술적 근대화 없이 
문화적으로 서구화 당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D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서구 
사회가 서구에게 나타낸 반응에서 근대화와 서구화의 일반적 양태가 존재한다면 그 양태는 경로 A-E의 범위 
안에서 나타날 것이다. 비서구 사회가 서구 문화의 실질적 요소를 흡 수하여 근대화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초기 단계에서는 서구화와 근대화 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화가 가속화하면서 서구화의 속도는 
하락하고 고유 문화가 소생한다. 근대화가 더욱 진척되면 서구와 비 서구 사회의 문명적 세력 관계에는 변화가 
와서 비서구 사회의 자부심과 힘이 늘어나고 고유 문화에 대한 애착도 커진다.
  변화의 초기 단계에서 서구화는 근대화를 촉진한다. 변화의 후기 단계에서 근대화는 탈서구화를 자극하며 고유 
문화의 부활 현상이 두 갈래로 나타난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근대화는 한 사회의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을 
전체적으로 끌어올려 사회 성원들이 자신의 문화에 자신감을 갖고 그 문화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도록 북돋운다.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근대 화는 전통적 유대와 사회적 관계의 와해와 함께 소외의식과 아노미 현상 을 낳고 
자아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오는데 여기서 종교가 출구를 제시한다.이 인과적 흐름이 (그림 3.2)에 간결히 
묘사되어 있다.
  이 가설적 일반 모형은 사회학 이론이나 역사적 경험과도 두루 합치한다. '불변성 가설(invariance hypothesis)' 
의 증거 자료를 상세히 분석한 뒤 바움(Rainer Baum)은 의미 있는 권위와 의미 있는 개인적 자율성을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추구는 문화적으로 판이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문제에서는 문화를 건너뛰는 동질적 세계로 
나아가는 수렴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발전의 초기 근대화 단계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난 남다른 
양태가 변함 없이 남아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프로베니우스, 슈팽 글러, 보즈먼 등이 가다듬은 차용 이론은 
어떤 문명이 다른 문명의 요소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수정하고 변형 동화시켜 자기 문화의 핵심적 
가치 곧 파이데우마(paideuma)가 존속될 가능성을 더욱 공고히 만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문명은 최소한 천 년 이상 존속하여 왔고 일부는 몇천 년 전부터 있어 왔다. 그들은 다른 
문명으로부터의 차용에 힙입어 자신의 생존력을 높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중국의 '인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인은 불교를 중국인의 목적과 필요에 맞게 고쳤다. 중국 문화는 여전히 
증국의 것으로 남았다. 중국인은 그들을 크리스트 교도로 만들려는 서구의 집요한 기도를 지금까지 번번이 
좌절시켰다. 어느 시점에 가서 중국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홉수하며 자신의 파이데우마를 
지속시키는 데 기여하는 방식으로 뜯어고칠 것으로 예상된다. 마찬가지로 아랍 이슬람 교도들은 헬레니즘의 
유산을 본질적으로 실리적 이유에서 받아들이고 평가하고 이용하였다. 그들은 외적 형식이나 기술적 측면을 
차용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코란이 요구하는 기준과 계율에 확럽된 '진리'와 마찰을 빚을 수 있는 그리스 
사상의 모든 요소를 무시히 는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7세기에 중국 문화를 수입한 
일본은 그것을 경제적, 군사적 압력을 받지 않으면서 주체적으로 변형시켜 고도의 문명으로 발전시켰다. 그 후 
대륙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시기에는 과거에 차용한 요소를 선별하척 유용한 것을 동화시키다가 다시 
접촉이 이루어지면 문화적 차용을 재개하는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이 모든 기간 동안 일븐은 일븐다운 색깔을 
유지하였다. 비서구 사회가 서구화함으로써 근대화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케말주의의 온건 노선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비서구 사회가 근대화에 성공하려면 반드시 서구화되어야 한다는 케말주의의 강경 노선은 보편 
명제로서의 타당성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근대 화를 가로막는 전통 
문화의 저해 요소가 너무 심각한 수준이어서 문화를 아예 서구 문화로 바꾸어야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는 그런 
비서구 사회가 존재하는가? 이론적으로 보아 도구 지향 문화(instrumental culture)보다는 궁극 지향 
문화(Consummatory culture)에서 그런 저해 요소가 많을 수 있다. 도구 지향 문화는 서로서로 떨어져 있고 
궁극적 목표와는 무관한 중간적 목표들이 거대한 영역을 이룬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런 체제는 변화 위에 다 
전홍의 담요를 펼쳐서 손쉽게 혁신한다. ...... 이 체제는 사회 제도가 근본적으로 뒤바뀌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혁신에 이를 수 있다. 혁신은 오히려 불멸성에 기여한다." 반면에 "궁극 지향 체계는 중간적 목표와 
궁극적 목표의 긴밀한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사회, 국가, 정권 등은 모두 종교가 구석구석에서 인식의 좌표 
역할을 하는 고도의 결속력을 가진 정교하게 구축된 체제의 일부분이다. 그런 체제는 혁신을 적대시 한다." 
애프터(David E. Apter)는 이 범주를 동원하여 아프리카 부족 사회 의 변화를 분석한다. 에이젠슈타트 역시 
비슷한 분석틀을 주요 아시아 문명들에 적용하여 유사한 결론에 이른다. 내부 변혁을 크게 촉진시키는 것은 사회 
제도, 문화 제도, 정치 제도의 자율성이다. 도구 지향 문화의 성격이 더 강한 일본과 인도 사회가 유교 사회나 
이슬람 사회보다 근대화의 길에 한 발 앞서, 손쉽게 진입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근대 기술을 
도입하여 기존의 문화를 살찌우는 데 환용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떻다면 중국과 이슬람 사회는 
근대화와 서구화를 모두 포기하든가 아니면 둘 다 수용해야 한다는 뜻인가? 선택의 폭은 그렇게 협소하지 않다. 
일본만이 아니라 싱가포르,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란도 서구화하지 않으면서 산업 사회가 
되었다. 케말주의 노선 을 따르려던 이란 국왕의 노력은 서구에 대한 강한 적개심은 낳았어도 반근대화 운동을 
유발하지는 않았다. 증국은 분명히 개량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이슬람 사회는 근대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파이프스는 이자, 단식, 상속법, 여성의 취업 문제처럼 이슬람과 
근대화가 상층되는 경제적 갈등 을 지적하면서 서구화가 근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로댕송(Maxine Rodinson)의 말을 인용하며 이슬람권이 근대 자본주의의 길로 발전하는 것을 
이슬람교가 막았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고 시인한다. 파이프스에 따르면 경제적 문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제에서
  이슬람과 근대화는 층돌하지 않는다. 독실한 이슬람 교도가 과학을 연구하고 공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첨단 
무기를 활용할 수 있다. 근대화는 단일한 정치 이념이나 제도의 틀을 요구하지 않는다. 선거와 시민 결사 같은 
서구 사회의 특징이 경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신앙으로서의 이슬람은 농부에게도 경영 
컨설턴트에게도 만족을 준다.샤리아는 근대화와 함께 농업이 공업으로, 농촌이 도시로, 사회적 안정이 사회적 
유동으로 바뀌는 현상에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으며, 대증 교육, 첨단 통신, 새로운 운송 형태 보건 진료 같은 
문제에 대하여 월권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반서구주의와 고유 문화의 부흥을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이들도 전자 우편, 카세트, TV 같은 근대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대의를 선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결국 근대화는 반드시 서구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비서구 사회는 자기의 고유 문화를 포기하지 않고도, 
서구의 가치 제도 관습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지 않고도 근대화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발전해 왔다. 서구 문화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구화를 가로막는 비서구 사회의 문화 요소에 비하면, 근대화를 
가로막는 비서구 사회의 요소는 극히 작은 양이다. 브로델의 지적대로 근대화 혹은 '단일 문명의 승리가 세계의 
거대 문명들에서 유구한 역사와 함께 형성된 문화의 다양성을 종식시키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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