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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5/문명의 충돌

5. 경제와 인구, 도전하는 문명

by FraisGout 2020. 7. 26.

  토착화와 종교의 부활이 범세계적 현상이긴 하지만, 특히 아시아와 이슬람권에서 서구에 대한 문화적 자긍심과 
도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시아와 이슬람은 지난 2, 30년 동안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한 문명이다. 
이슬람의 도전은 이슬람교의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부상과 그와 맞물린 서구 가치와 제도에 대한 거부로 
표현되고 있다. 아시아의 도전은 중화, 일본, 불교, 이슬람 등 모든 동아시아 문명에서 감지된다. 그들은 서구에 
대한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때로는 흔히 유교로 통칭되는 자기들의 공통성을 내세운다. 아시아와 
이슬람은 오두 서구 문화와 비교하여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앞세운다. 힌두권, 정교권,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나머지 비서구 문명도 자기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하지만 1990년대 중반 시점에 서구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우월성을 노골적으로 표명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시아와 이슬람은 개별적으로, 때로는 힘을 합쳐서 서구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러한 도전의 배후에 자리 잡은 원인들은 서로 관련성은 있지만 성격은 판이하다. 아시아의 자기 주장은 경제 
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의 자기 주장은 상당 부분 사회적 동원력과 인구 증가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도전은 지금도 그렇지만 2I세기에 가서도 세계 정치에 심각한 불안 요소로서 파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파장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중국과 여타 아시아 국기익 경제 발전은 이들의 정부가 대외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와 자원을 제공한다. 이슬람 국가들의 인구 증가, 특히 15세에서 25세 사이 연령층의 폭발적 
증가는 원리주의, 테러리즘, 폭동, 노동력 수출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한다. 경제적 발전은 아시아 정부를 
강화시키고 있지만 인구 증가는 이슬람 정부와 비이슬람 사회에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시아의 자기 주장
  20세기 후반부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이다. 이 과정은 1950년대에 
일본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한동안 일본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도입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한 유일한 비서구 등 
가로 아주 예외시되었다. 그러나 경제 발전의 과정은 네 마리 용(홍콩, 대만, 한국, 싱가포르)으로, 다시 중국 . 
말레이시아 . 태국 . 인도네시아로 파급되었으며 필리핀 . 인도 . 베트남에서도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나라들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연평균 8~I0퍼센트를 상회하는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무역량 또한 처음에는 
아시아와 세계 사이에서, 그 다음에는 아시아 내부에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아시아의 이러한 경제 성장은 
유럽과 미국 경제의 완만한 성장,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계 나머지 지역과 크게 대조된다.
  따라서 예외적 현상은 일본에 국한되지 않고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구를 부국으로, 비서구를 
저개발국으로 단정짓는 시각은 21세기 에는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이 변화의 속도는 가히 층격적이다. 
마부바니(Kishore Mahbubani)의 분석에 따르면 l인당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는 데 영국과 미국이 각각 58년과 
47년 걸린 데 비해, 일본은 35년, 인도네시아는 17년, 한국은 11년, 중국은 l0년 걸렸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현재 세계 2위와 5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가 아시아에 있다. 중국의 경제는 l980년대와 1990년 전반기까지 
연평균 8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였으며 네마리 용이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l993년 세계 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경제권은 미국, 일본 독일과 함께 세계의 4대 성장축이 되었다. 1990년 현재 세계 2위와 3위의 경제 
대국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는 2020년까지는 5대 경제대국 가운데 4개국, 10대 경제대국 가운데 7개국이 될 
공산이 크다. 가장 경쟁력이 뛰어난 국가들도 대부분 아시아의 몫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의 경제 
성장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진정기로 들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미 이루어진 성장의 파급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은 아시아와 서구, 특히 미국과의 세력 균형에 변화를 낳고 있다. 경제 발전은 그것을 
성취하고 거기서 이득을 보는 주체에게 자신감과 자긍심을 준다. 경제력 또한 무력처럼 도덕적, 문화적 우위의 
표현, 미덕의 증거로 간주된다. 경제적 성공을 거두면서 동아시아인들은 자기 문화의 고유성을 역설하고 서구를 
비롯한 다른 사회와 비교하여 자신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이 갖는 우월성을 서슴없이 강조한다. 아시아 사회는 
미국의 요구와 이해 관계를 점점 덜 수용하는 추세에 있으며 미국과 여타 서방 국가의 압력을 거부할 수 있는 
실력을 꾸준히 쌓아가고 있다.
  문화적 르네상스가 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다고 1993년 고(Tommy Koh)대사는 말했다. 자신감의 확대와 
관련 있는 이 현상은 아시아인이 더이상 서구적인 것 미국적인 것을 무조건 최고로 간주하지 않음을 뜻한다.
  아시아의 경제 발전을 원동력으로 삼는 이 르네상스는 개별 아시아 국가들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과 서구 
문화와 구별되는 아시아 문화의 공통성을 두루 강조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감지된다. 이 문화적 부활의 의미는 
동아시아의 두 강대국이 서구 문화를 수용하는 방식에서 나타난 변화에서도 읽을 수 있다.
  서구가 19세기 중반 중국과 일본에 압박을 가했을 때 이 두 나라의 소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철저한 서구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실현 가능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노선이었다. 그 결과 양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개량주의 전략을 택하였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에서 
실권을 장악한 역동적 개혁 집단은 서양의 기술, 관습, 제도를 연구하고 차용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 전통 문화의 본질적 요소들은 고수하였고. 이 요소들은 여러 면에서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자신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전통적 요소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중국에서는 부패한 청왕조가 서구의 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중국은 일본과 유럽 열강에게 패배하여 유린당하는 모욕을 감수하였다. 1910년 왕조가 
무너지자 분열과 내전이 뒤따랐다. 지식인과 정치지도자가 내건 각양 각색의 서양 이념과 중국 정신이 치열한 
경쟁과 갈등을 낳았다. '민족. 민권. 민생'을 구호로 한 쑨 원의 삼민주의, 량 치차오의 자유주의, 마오 쩌둥의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저마다 자신의 정당성을 부르짖었다.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소련에서 유입된 사상이 
서구에서 도입된 사상 -민족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크리스트교-을 완전히 눌렀고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 
정의되었다.
  2차 대전에서 참패한 일본은 완전한 문화적 공황 상태에 직면하였다. 1994년 일본을 깊이 아는 한 서구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 문화 등 일본이라는 나라에 존재하는 정신성의 모든 측면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 동원의 정도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패전은 이 체제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본인의 마음 
속에 들어 있던 모든 것이 무가치해졌고 모든 것이 밖으로 떨려 나가는 체험이었다."
  그런 공황 상태에서 서구와 관련된 모든 것, 특히 전승국 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은 좋고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중국이 소련을 모방하려고 애썼듯이 일본은 기를 쓰고 미국을 모방하였다.
  1970년대 후반 공산주의가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데 실패하고 일본과 여타 아시아 국가들에서 자본주의가 
성공을 거두면서 중국 지도부는 소련 모델로부터 등을 돌렸다. 10년 뒤에 일어난 소련의 붕괴는 그들이 수입한 
사상의 문제성을 한층 부각시켰다. 중국은 서구에 접근할 것이냐 자기 안으로 돌아갈 것이냐 기로에 섰다. 많은 
지식인들은 전면적 서구화를 옹호 하고 나섰다. 그런 움직임은 TV 연속극과 천안문 광장에 세워진 모조 
자유의여신상에서 문화적으로 대중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구 지향주의는 베이징에서 중국을 통치하는 
수백 명의 당 간부와 농촌에 거주하는 8억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완전한 서구화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말에도 실현 가능성이 회박하였다. 중국 지도부는 그 대신 새로운 '중체서용'의 원칙을 내걸었다.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세계 경제에 참여하되 정치적 권위주의와 중국의 전통 문화는 고수한다는 원칙이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혁명성 대신 중국 정부는 증국 문화의 고유한 특징에 기초한 민족주의와 경제 발전에서 합법성을 
찾았다. 천안문 사태 이후 당국은 새로운 합법성의 원천으로 중국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포용하였으며 자신의 
권력과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의식적으로 반미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한 분석가는 지적하였다."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1994년 한 홍콩 지도자가 던진 말에 압축되어 있다. '우리 중국인은 전에 없이 
민족주의 감점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중국인이며 그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1990년대 초반 증국에서는 실제로 
'가부장적이고 자연적이며 권위적인 진정한 중국상으로 돌아가자는 대중의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이런 
복고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는 과거 레닌주의가 수입된 외래 사조로 평가 절하되었던 것처럼 인정을 못 
받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중국 지식인들은 베버(Marx Weber)처럼 중국 후진성의 원인을 유교에서 찾았다. 20세기 
말엽의 증국 정치 지도자들은 서양의 사회 과학자들처럼 증국 발전의 원인을 유교에서 찾는다. 1960년대로 접어 
들어 중국 정부는 유교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기 시작하였다. 당 간부들은 유교를 중국 문화의 주류로 
선언하였다. 리 콴유 또한 싱가포르 성공의 주된 원천을 유교에서 찾으면서 유교적 가치관을 전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가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대만 정부는 자신들이 '유교 사상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고 리 덩후이 
총통은 대만의 민주화는 공자(기원전 5 세기) 맹자(기원전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국의 '문화 유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권위주의를 정당화하건 민주주의를 정당화 하건 중국 지도자들은 그 정당성의 
근거를 수입된 서구 개념이 아니라 국민적 공감을 얻는 중국 문화에서 찾았다.
  중국 정부가 부추기는 민족주의는 한족 민족주의다. 한족 민족주의는 중국 인구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한족 
내부의 언어적, 지역적, 경제적 차이를 무마하는 효과가 있다. 동시에 그것은 인구의 10퍼센트도 못 되지만 
영토는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비중국계 소수 민족들과의 차이를 부각 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중국 
인구의 5퍼센트를 끌어들이면서 모택동 주의와 레닌주의의 붕괴로 생긴 진공을 채우며 교세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크리스트교의 선교 활동에 중국 정부가 족쇄를 채울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1980년대 일본에서는 자국의 성공적인 경제 발전이 미국 경제와 사회 체제의 실패와 '몰락'과는 대비하면서 
서구 모델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자신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이 일본 고유의 문화에 있었다는 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났다. 1945년에는 군사적 재난을 낳았고 그래서 부정되어야 했던 일본 문화가 
1985년에는 경제적 성공을 낳아 다시 포용되었다. 서구 사회에 날로 익숙해지면서 일본은 '서구라는 것 그 자체 
로는 특별하지도 신비롭지도 않으며 서구는 서구인의 제도에서 나왔을 뿐 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의 경제 발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본의 미덕은 미국의 결함과 대비되면서 찬사를 받았다. 메이지 
유신기의 일본인이 아시아를 탈피하여 서구에 합류하는 정책을 추구한 반면 문화적으로 자신감을 얻은 20세기 
말의 일본인은 미국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아시아에 참여하는 정책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조류를 낳은 
원인으로는 첫째, 일본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그런 전통적 가치관을 긍정하려는 추세를 
들 수 있고 둘째, 일본을 '아시아화'하려는 노력, 다시 말해서 독자적 문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체성을 보편적 아시아 문화에서 찾으려는 그리 수월치만은 않은 시도를 들 수 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일본은 증국과 달리 서구에 완전히 경도되었고 철저히 붕괴한 소련과는 달리 서구는 여전히 건재한 상태이므로, 
일본이 서구를 전적으로 거부하려는 의지는 소련과 서구 모델로부터 철저히 거리를 두려던 중국의 의지만큼 
단호하지는 않다. 일본 문명의 독자성, 일본 제국주의가 주변 여러 나라에게 남긴 기억, 아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경제권을 거머쥔 화교의 존재를 감안할 때 일본은 서구로부터 거리를 두기보다는 아시아와 융합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느낄 것 이다. 문화 정체성을 내세움으로써 일본은 자신의 고유성과 서구 및 아시아 문화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중국과 일본은 각자의 고유한 문화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것만큼이나 서구와 비교하여 아시아 문화 
일반이 지니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주장 하고 나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산업화와 그것이 수반한 성장을 등에 
업은 동아시아인은 1980년대와 l990년대에 접어들어 아시아의 자기 주장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에 
찬 발언을 내놓고 있다. 이 복잡한 태도는 네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아시아인은 동아시아가 경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머지 않아 서구의 생산력을 능가하고 그에 
따라 국제 무대에서도 서구와 비교 하여 상대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경제 
성장은 서구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자신감을 아시아 사회에 불어넣고 있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아시아는 독감에 걸리던 시절은 지나갔다 '고 일본의 한 대표적 언론인은 1993년에 선언하였다. 말레이시아의 한 
관리는 한술 더 떠서 '미국이 고열로 신음해도 아시아는 기침조차 안 할 것'이라고 호언 장담하였다.아시아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경외의 시대를 끝내고 말대답을 할 주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아시아의 또 한 지도자는 
말했다 말레이시아의 외무 차관은 또 '아시아가 경제적으로 번영했다는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틀에 대해서 아시아가 중요한 대안을 제시할 위치에 오늘날 와 있음을 의미한다.' 고 주장하였 다. 
그것은 또한 아시아 사회에 인권과 그 밖의 가치와 관련해 서구가 자신의 기준을 관철시킬 수 있는 능력을 
빠르게 상실해 가고 있음을 뜻한다고 동아시아인들은 주장한다.
  둘째, 아시아인은 그들의 경제적 성공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타락한 서구보다 우월한 아시아 문화에 크게 
힘입었다고 믿는다. 일본이 수출, 무역 수지, 외환 보유고 등에서 모두 기록적인 성적을 내던 1980년대에 
일본인은 그 전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오일 달러를 등에 업고 큰소리쳤듯이 자신의 새로운 경제력을 자랑하고 
서구의 침몰을 측은히 여기면서 일본이 성공하고 서구가 실패한 것은 자신의 문화가 우월하고 서구 문화가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1990년대 초반 아시아의 승리는 '싱가포르의 문화적 공세'를 통해 새롭게 
표명되었다. 리 한유를 필두로 싱가포르 지도자들은 아시아의 부상을 서구와 비교해 부각시키면서 아시아의 
성공은 기본적으로 유교에서 비롯된 질서, 규율, 가족적 유대, 근면, 집단주의, 절제 같은 가치관 때문이고 서구가 
기우는 것은 방종, 게으름. 개인주의, 범죄, 부실한 교육, 권위에 대한 경멸, '정신적 경직화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동아시아와 겨루려면 미국도 '사회와 정치 구조에 관한 자신의 근본 가정 들에 의문을 던지고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 사회로부터 한두 가지라도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동아시아인은 개인보다는 집단에 비증을 더 둔 동아시아 문화 덕분에 자기들이 발전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일본, 한국, 대만,흥콩, 싱가포르 처럼 집단의 가치와 관행에 더 무게를 두는 방식이 성장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리 콴유는 주장한다. 집단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세우는 것처럼 동아시아 문화가 
고수하는 가치관은 고속 성장에 필요한 집단적 노력을 지원한다. ', "규율, 헌신, 근면을 강조하는 일본과 한국의 
노동 윤리는 이들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낳은 원동력이 되었다. 이 노동 윤리는 집단과 국가가 개인보다 
중요하다는 철학에서 나왔다.'는 말레이시아 외무 장관의 견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셋째, 동아시아인은 아시아의 여러 사회와 문명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동질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중국의 한 반체제 인사가 강조하듯 이 지역의 대부분 국가가 
공유하고 역사적으로 존중해 온 유교의 가치 체계 특히 근면 가족 . 노동 . 규율을 중시하는 가치관이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개인주의에 대한 공통된 거부감이고 '부드러운' 권위주의 또는 아주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가 폭넓게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에 맞서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고 경제적 
이익을 증대해야 한다는 공통의 이해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ASEAN(동남아시아 국가 연합)이나 
EAEC(동아시아 경제 회의) 같은 기구의 확대를 통해 아시아 역내의 협조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아시아 국가가 당면한 경제적 과제는 서구 시장에 지속적으로 진출하는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 
지역주의가 득세하고 따라서 동아시아는 역내 무역과 투자를 점차 강화시킬 것이다. 특히 아시아 발전의 선두 
주자인 일본은 전통적인 '탈아입구정책'에서 탈피하여 '재아시아화' 또는 싱가포르의 관리들이 주장하듯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아시아의 아시아화'를 들고 나서야 한다는 중책을 떠맡고 있다.
  넷째, 동아시아는 아시아의 발전과 아시아의 가치를 다른 비서구 사회가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모방해야 하며, 
서구가 자기 쇄신하기 위해 채택해야 하는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개발 도상국의 경제를 근대화하고 존럽 가능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서 지난 40년 동안 신주단지처럼 모셔 온 앵글로색슨 모델은 
한물갔다.'고 동아시아인은 단언한다. 그 자리에 아시아 모델이 들어서고 있다. 멕시코와 칠레, 이란과 터키, 옛 
소련 공화국들마저도, 서구의 성공으로부터 배우려던 그네들의 앞 세대와는 달리 이제는 아시아의 성공에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한다. 아시아는 아시아의 가치가 보편성을 지닌 가치라는 사실을 세계 전역에 전파 해야 
한다...... 이러한 이상의 전파는 아시아 사회 체제 특히 동아시아 사회체제의 수출을 의미한다.' 일본과 여타 
아시아 국가들은 태평양 세계 주의를 고취하여 세계를 아시아화함으로써 세로운 세계 질서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강력한 사회는 보편화하며 허약한 사회는 특수화한다. 동아시아의 점증 하는 자신감이 서구에 비견할 만한 
아시아의 새로운 보편성을 낳았다 '아시아의 가치는 보편의 가치이며 유럽의 가치는 유럽의 가치다. 라고 1996년 
마하티르 총리는 유럽 정상들에게 선언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발 맞추어 한때 서구의 오리엔털리즘이 아시아를 
묘사했던 방식처럼 획일적이며 부정적으로 서구를 묘사하는 아시아의 '옥시덴털리즘(Occidentalism)이 나타나고 
있다 동아시아인에게 경제적 번영은 도덕적 우위를 의미한다. 만일 어느 시점에 가서 인도가 동아시아를 제치고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으로 부상하면 힌두 문화의 우월성, 카스트 제도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음을 강조하는 논문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고, 인도는 자신의 뿌리로 돌아간 덕분에 영국 
제국주의가 남긴 서구 유산의 잔재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논리가 득세할 것이다. 물질적 성공은 문화적 자기 
주장을 낳고, 단단한 힘은 부드러운 힘을 낳는다. 
  이슬람 부활
  아시아가 경제 발전을 배경으로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가는 반면 이슬람 국가 대부분은 정체성. 의미. 
안정. 정당성. 발전. 권력. 희망의 근원으로서 이슬람을 향해 한꺼번에 돌아서고 있다. 그들의 희망이 '이슬람이 
해답이다.' 라는 구호에 집약되어 있다. 이슬람 부활은 서구에 이슬람 문명이 적응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등장한 심도 깊은 대규모의 현상이다 이것은 서구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슬람에서 해답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새로운 이슬람은 근대화는 받아들이되 서구 문화는 거부하며, 이슬람에 다시 귀의하는 것을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차원에서 근대 세계의 올바른 생탈 방식으로 이해한다. 199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고위 관리는  
'수입품'은 아주 근사하고 최첨단을 달린다. 그러나 밖으로부터 유입된 무형의 정치 사회제도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 이란의 국왕에게 물어 보라. ... 이슬람은 우리에게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생활 그 자체다. 우리 
사우디아라비아인은 근대화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서구화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슬람 부활은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이슬람 교도들의 노력이다. 이것은 이슬람 세계 전역을 뒤흔드는 광범위한 지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운동이다. 흔히 이슬람의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이슬람 교도 사이에서 널리 번지고 있는 새로운 이슬람 열기와 이슬람 사상 관습. 구호 등 훨씬 광범위한 부활의 
일부분만을 반영한다. 이슬람의 부활은 주된 추세이지 극단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도처에 파고들고 있지 
고립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이슬람 부활은 모든 나라의 이슬람 교도에게, 대다수 이슬람 국가들의 정치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에스포지토(John L. Esposito)에 따르면 개인 생활에서 이슬람이 소생하였음을 알리는 지표는:
  부지기수다. 종교 의식(모스크 참배, 기도, 금식)에 대한 관심이 늘었고,종교 프로그램이나 간행물의 수가 
급증하였으며, 이슬람 의상과 가치관이 더욱 강조되는 추세에 있고, 수피즘(신비주의)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처럼 폭 넓은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소생은 공공 생활에서도 이슬람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슬람 세계관을 지향하는 정부 단체 법. 은행. 사회 복지 시설. 교육 기관이 늘고 있다. 정부는 물론 
반정부 단체까지도 자신의 권위를 끌어올리고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기 위해 이슬람으로 돌아서는 추세에 
있다. 터키와 튀니지 같은 세속적 성격이 더 강한나라까지 포함한 대다수 통치자와 정부가 이슬람의 막강한 
잠재력을 깨닫고 이슬람이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점점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반응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저명한 이슬람학 연구가인 데수키(Ali E Hillal Dessouki)는 이슬람 부활은 서구의 법이 
군림하던 자리에 이슬람의 법을 올려 놓으려는 노력, 종교적 언어와 상징의 빈번한 등장, 이슬람 교육의 세력 
확대(이슬람 학교 수가 늘어나고 정규 공립 학교의 교과목에 이슬람 색채가 짙게 깔리는 현상에서 목도된다.), 
이슬람 교리가 규정하는 사회적 행동 규범(가령 여성의 복장, 금주)을 받아들이는 추세, 종교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의 증가 이슬람 사회에서 세속 정부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저항이 넓은 지지세를 넓혀 가는 현상. 이슬람 
국가끼리의 국제적 연대를 강화시키려는 노력과 맥을 같이한다고 분석하였다. '신의 설욕'은 범세계적 
현상이지만 신은, 아니 알라는, 움마 곧 이슬람 공동체에서 가장 완벽하게 구석구석까지 복수를 실현시켰다.
  이슬람의 부활은 정치적 영역에서는 성전(성전)을 가졌고.완전한 사회에 대한 이상이 있고 근본적 변화를 
지향하고 기존의 권력과 국민 국가를 거부하고 근대적 개량주의자에서 폭력적 혁명주의자에 이르는 다양한 
분파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시즘과 일맥 상통한 면이 있다. 그러나 더 좋은 비교의 대상은 종교 
개혁이다. 이슬람 부상과 서구의 종교 개혁은 기존 제도의 침체와 부패에 대한 대응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그래서 모두 자기 종교의 더 순수하고 엄격한 형태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고 근면 질서 규율을 강조하면서 활력 
있는 새로운 증산층에게 점차 호소력을 얻는다. 둘 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운동이어서 다양한 갈래로 뻗어 
나갔지만 루터파와 칼뱅파, 시아파와 수니파로 세력이 크게 양분된다는 공통점도 있다. 칼뱅과 호메이니 
사이에도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수도자적 규율을 사회 전체에 부과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슬람 부상과 
종교 개혁의 핵심 정신은 모두 근본적 개혁이다. 한 프로테스탄트 목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종교 개혁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모든 장소,모 든 사람. 모든 직업을 개혁해야 한다. 판결이 내려지는 법정, 무능한 치안 
판사를 개혁해야 한다....대학을 개혁하고 도시를 개혁하고 농촌을 개혁하고 열악한 배움의 터를 개혁하고 
안식일을 개혁하고 성찬식을 개혁하고 신에게 올리는 예배를 개혁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알 투라비는 이렇게 
역설한다. '이러한 각성은 총체적이다. 개인적 신앙심에 대한 각성만은 아니란 뜻이다. 이것은 지적, 문화적 
각성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요 정치적 각성에만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들 전부에 대한 각성이다. 
사회를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총체적으로 재건하자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동반구 정치 지형도에 미친 이슬람 
부상의 영향을 무시하는 것은 16세기 후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유럽의 정치 지형도에 미친 영향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이슬람 부활은 서구의 종교 개혁과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후자가 미친 영향은 주로 북유럽에 
한정되었고 스페인. 이탈리아. 동유럽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교두보를 마련하지 못했다. 반면에 이슬람의 부활은 
거의 모든 이슬람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부터 이슬람의 상징물.신앙. 의식. 제도. 정책. 기구는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까지 나이지리아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10억 이슬람 교도 사이에서 점차 
동조와 지지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이슬람화는 처음에는 문화계에서 시작되어 차츰 정치와 사회의 영역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정치 지도자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이러한 대세를 묵살할수 없을 뿐더러 이슬 람에 
동조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을 방도가 없다. 과도한 일반화는 늘 위험 스러우며 종종 오류를 낳는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이란을 제외 하고는 이슬람 인구가 많은 모든 나라가 지금부터 l5년 전에 비해 1995년 현재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이슬람화가 심화되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슬람화를 주도한 요소는 이슬람 사회 기관의 발전과 이슬람 집단의 기존 기관 
장악이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특히 이슬람 학교를 세우고 공럽 학교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실제로 이슬람 집단은 이슬람 '시민 사회' 안에 규모와 활동 면에서 세속 시민 사회의 허약한 
제도와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고 때로는 그것을 능가하는 제도를 실현시켰다. 이집트에서는 1990년대 초반 
이미 이슬람 기관들이 정부가 방치한 공백을 채우면서 이집트의 수많은 빈민들에게 의료, 복지 교육의 혜택을 
제공하는 광범위한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l992년 카이로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이 기관들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거리로 나와 정부의 구호 활동이 굼뜨게 진행되는 동안 음식과 담요를 보급하였다. 요르단에서는 모슬렘 
형제단이 '이슬람 공화국의 인프 라'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발전시키는 정책을 의도적으로 추구한 결과 
1990년대 초반 현재 인구 400만 명의 이 작은 나라에서 대형 병원 하나 진료소 20개소, 이슬람 학교 40개소, 
코란 강습소 120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슬람 기관들은 또 가자와 서안에서 '학생 연맹, 청년 조직, 종교사 회 
교육 연합체' 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것은 유치원에서 이슬람 대학, 진료소, 고아원, 양로원, 이슬람 재판관과 
증재관으로 이루어진 체제를 망라한다. 이슬람 기관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인도네시아에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198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 최대의 이슬람 단체인 '무하마디자'는 600만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세속 국가 안의 종교 복지국가' 를 일구면서 정교한 학교. 병원. 진료소. 대학 수준의 시설을 통해 인도네시아 
각지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정치 활동을 금지 당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이슬람 단체들은 20세기 초반 미국의 종교 단체를 연상시키는 광범위한 사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 이슬람의 부활은 사회적, 문화적 영역에 비해 덜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이슬람 사회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정치적 흐름으로 나타났다. 이슬람 운동에 
대한 정치적 지지의 정도와 양상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중심적 기류는 존재한다. 대개 이런 운동은 농촌 엘리트, 
농부, 노인층으로부터는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이 운동을 지원하는 층은 근대화 괴정에 참여하는 사람, 
근대화 과정에서 자란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은 크게 세 집단에서 나온 사회적 동원성이 뛰어난 근대화 
지향의 청년층이다.
  대부분의 혁명 운동이 그렇듯이 이슬람 부활의 핵심 성원은 학생과 지식인이다. 대개의 국가에서 
원리주의자들이 학생 조직 같은 단체를 장악 하는 것이 정치적 이슬람화 과정의 첫 단계로 나타났다. 대학에서 
이슬람이 '약진'하는 이런 현상은 1970년대 이집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되어 다른 이슬람 국가로 
번져 나갔다. 이슬람의 구호는 특히 기술 대학, 공과 대학, 자연 과학 대학 소속 학생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199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알제리 등지에서는 모국어로 교육을 받는 학생이 늘어나는 그 과정에서 
자연히 이슬람의 영향력에 노출되는 학생의 수도 늘어나면서 '제2대 토착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은 여성에게도 상당히 먹혀 들어가, 터키에서는 세속 지향의 장노년층 여성과 이슬람 지향의 젊은 여성 
사이의 갈등이 눈에 띄게 늘어났 다. 이집트 이슬람 단체의 호전적 지도자들을 분석한 조사에 따르면 그들은 
다섯 가지 주요한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나라의 이슬림 주의자들에게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들은 젊었다. 20대와 50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80퍼센트가 대학생이거나 대학 졸업생이었다. 절반 
이상이 일류 대학 출신이거나 의대나 공대처럼 우수한 성적을 요구 하는 전문 분야 출신이었다. 70퍼센트 이상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가난하지도 않은 중하류 가정에서 자랐고 자기 집안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첫 세대였다. 
그들은 어린 시절을 소도시나 시골에서 보내다가 나증에 대도시로 이주하였다.
  이슬람 운동의 중핵을 이루는 적극적 행동 대원은 학생과 지식인이지만 도시 증산층의 지지기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지지기반은 상인. 증개상. 자영업자 같은 전통적 중산층에 폭넓게 확보되어 있다. 이들은 이란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알제리 터키.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원리주의 운동의 중요한 세력 기반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원리주의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중산층 중에서도 좀더 근대적 집단에서 배출되었다. 적극적 
이슬람주의자 중에는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과학자. 교사. 공무원 등 해당 인구 집단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가장 똑똑하고 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슬람 운동을 지탱하는 세번째 주요 집단은 최근에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1970년대와 l980년대에 이슬람 
세계 전역의 도시 인구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퇴락하고 열악한 슬럼 지역으로 몰려든 이주자들은 이슬람 
단체가 제공하는 사회적 지원을 필요로 했고 또 실제로 그 수혜자가 되었다. 게다가 겔너(Ernest Gellner)가 
지적하듯이 이슬람은 '뿌리 뽑힌 대중'에게 '숭고한 정체성'을 제공하였다. 이스탄불과 앙카라, 카이로와 
아시우트, 알제와 페스, 가자 지구에서 이슬람 정당은 지반 다지기에 성공하여 짓밟히고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파고들었다. '혁명적 이슬람 대중은 거대한 이슬람 대도시 권역의 인구를 폭발적으로 급증시킨 이농 유입민들. 
곧 근대 사회의 산물이다.' 고 로이(OIiver Roy) 는 말한다.
  1990년대 중반 현재 명백한 이슬람 정부는 이란과 수단에서만 정권을 쥐고 있다. 터키와 파키스탄 같은 소수의 
이슬람 국가는 민주적 합헌성을 부분적으로 주장하는 정권이 통치하고 있다. 나머지 이십여 개 이슬람 국가는 
군주, 1당 체제, 군부 정권, l인 독재 또는 이것들이 복합된 구조로 통치되고 있으며. 협소한 족벌. 씨족. 부족적 
기반을 두거나 외국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사회의 요구와 열망으로부터 절연된 억압적이고 부패한 
이들 정권은 무어(CIemenr Henry Moore)의 표현을 빌리자면 '벙커(bunker) 체제'다. 이런 체제는 의외로 오래 
존속할 가능성이 있다. 반드시 무너진다는 법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서 이들이 변화하거나 붕괴할 
확률은 높다. 따라서 l990년대 중반에 던져지는 핵심적 물음은 누가 또는 무엇이 이들을 계승할 것인가라는 
대안의 문제로 집약 된다. 1990년대 중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후속 정권은 이슬람 체제로 
평가된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민주화의 물결이 세계 전역을 휩쓸었고 그 과정에서 몇십 개국이 민주화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물결은 이슬람 사회에도 층격을 미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었다. 민주화 운동이 
남유럽, 라틴아메리카, 동아시아 주변부, 증부 유럽에서 노도 같이 퍼지면서 실권을 잡는 동안 이슬람 운동도 
이슬람 국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슬람주의는 비이슬람 사회에서 일어난 권위주의에 대한 항거와 동일한 
기능을 하였으며, 사회적 동원력의 확대, 권위주의 체제의 합법적 통치력 상실, 변화하는 국제 환경 같은 
비이슬람 사회와 비슷한 원인에서 태동하였다. 변화한 국제 환경의 예로 꼽을 수 있는 유가 상승이 이슬람 
세계에서는 민주화 열기보다는 이슬람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크리스트 국가에서 신부, 목사, 평신도 집단이 
반체제 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이슬람 사회에서는 '울레마', 모스크에 기반을 둔 집단, 이슬람주의자들이 운동을 
이끌었다. 폴장드의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교황이 핵심적 역할을 했듯이 아야톨라(이란 이슬람 시아파 
지도자의 칭호'옮긴이)는 이란 왕조를 분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슬람 운동은 정권 장악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정부 운동을 주도하고 때로는 독점하는 
방식을 통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슬람 운동의 부상은 다른 반체제 운동의 약화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이다. 소련의 붕괴로 국제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면서 좌익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은 불신을 받았고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반체제 집단은 있었지만 
대개는 소수의 지식인이나 서구적 뿌리를 가진 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몇몇 예외는 있었지만 자유 민주주의는 
이슬람 사회에서 안정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였고 심지어는 이슬람 자유주의도 기반을 다지는 데 
실패하였다. 아자미(Fouad Ajami)의 지적에 따르면 이슬람 사회에서 자유주의를 논한다거나 민족적 부르주아 
전통을 거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싸움에 뛰어들었다가 좌절한 사람의 부고를 쓰는 일과 다름없었다. 자유 
민주주의가 이슬람 사회에서 대체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은 1800년대 말부터 한 세기 동안 줄곧 반복되어 
온 현상이었다. 이러한 실패는 서구 자유주의 개념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의 분위기에서 
부분적으로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슬람 세력이 저항 운동을 주도하며 집권 세력의 유일한 대안으로 확고한 입지를 마련하는 데는 집권 정부의 
이슬람 우호 정책에 힘입은 바 컸다 냉전기의 알제리. 터키. 요르단. 이집트. 이스라엘처럼 대다수 국가 들은 
공산주의 운동이나 적대적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슬람 주의자들을 고무하고 지원하였다. 적어도 
걸프전 이전까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 산유국들은 각국에 포진한 이슬람 형제단과 각종 이슬람 단체에게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하였다. 정부의 세속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 역시 이슬람 세력에게 반체제 운동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데 일조하였다. 원리주의자들의 힘은 세속 이념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정당이나 민족주의 정당의 힘에 
반비례하였고, 모든 반체제 운동을 억누른 나라보다는 모 코나 터키처럼 다당제에 입각해 어느 정도의 경쟁을 
허용하는 나라에서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 그러나 세속적 저항 운동은 종교적 저항 운동 에 비해 탄압에 
약하다. 후자는 모스크, 복지 시설, 재단, 그리고 정부가 탄압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이슬람 기관의 연결망 안에서 
숨어서 환동할 수 있다. 자유 민주주의 세력은 그런 엄호물이 없으므로 정부에 의해 쉽게 제압당하거나 
제거당한다.
  이슬람의 확산 추세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정부는 공럽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확대하였다. 
이들 학교는 이슬람 사상과 이슬람 교사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정부는 또한 종교와 종교 교육 기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정부가 이슬람을 밀었다는 부분적인 증거이다. 재정 지원을 통해 이슬람 
단체와 교육에 대한 정부의 통제권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이슬람 가치를 따르는 학생들이 대규모로 배출 
되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구호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많은 경우 이슬람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전사로 
나섰다.
  이슬람이 부상하고 이슬람 운동의 발언권이 강해지면서 정부는 이슬람 단체와 관습을 옹호하고 이슬람의 
상징과 관행을 체제 안에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크게 보면 이들 나라에서 이슬람 색채가 
강화되었거나 이슬람의 자기 주장이 커졌음을 의미하였다. l970년대와 1980년대에 정치 지도자들은 앞다투어 
자신과 자신의 체제를 이슬람에 연결시켰다.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세속 정부는 아랍 세계에서 앞으로 발 디딜 
땅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면서 이슬람 민주주의'와 '이슬람의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모로코의 하산 왕은 자신이 예언자의 후예라는 사실과 '이슬람 교도의 사령관'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슬람에 경도된 듯한 인상을 전혀 주지 않았던 브루나이의 국왕마저도 '점점 신앙이 깊어져서' 자신의 정권을 
'말레이 이슬람 군주국`으로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튀니지의 벤 알리(Ben Ali)는 연설에서 걸핏하면 알라를 
거론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슬람 단체의 지지기반이 확산되는 현상을 저지 하고자 자신을 이슬람의 망토로 감쌌다. 
1990년 초반 들어 인도네시아 의 수하르토는 노골적인 이슬람 강화 정책을 추구하고 나섰다. 방글라데시에서는 
1970년대 중반 이미 세속주의 원칙이 헌법에서 제거되었으며, 1990년대 초반 케말주의에서 비롯된 터키의 강력한 
세속 전통은 처음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외잘, 수하르토, 카리모프 같은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이슬람 
성향을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슬람 각국 정부들은 또한 법령을 이슬람화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법 개념과 관행이 세속법 
체계안에 도입되었다. 그런가하면 말레이시아는 적지 않은 수의 비이슬람 교도 인구를 감안하여 이슬람법과 
세속법의 두 가지 법 체계를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파키스탄에서는 하크(Zia ul-Haq)체제 아래 법과 
경제를 이슬람화하려는 광범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슬람 형벌 체계가 도입되고 '샤리아' 재판 체제가 
확립되었다. 샤리아는 파키스탄의 최고법으로 올라섰다.
  이슬람 부활은 근대화의 산물이자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노력이다. 이슬람 부활의 저변에는 도시화, 사회 활동 
인구의 증가, 문맹률의 축소와 교육의 확대, 통신과 매체의 발전, 서구를 비롯한 다른 문명들과의 접촉 강화 갈은 
비서구 사회의 토착화 조류를 낳은 원인들이 폭넓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전통 마을, 가족 관계를 
파괴하고 소외감과 정체성의 위기를 낳는다. 이슬람 상징물 헌신, 신앙은 이러한 심리적 요구에 부응하며 이슬람 
복지 시설은 근대화의 홍역을 치르는 이슬람 대중들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이슬람 부활은 
또한 서구의 충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서구식 해법에서 좌절을 경험한 이슬람 사회는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서 이슬람 사상 .관습 제도에서 지향점과 근대화의 동력을 얻어낼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처럼 서구에서 
등을 돌리는 현상은 서구와의 접촉 강화가 빚어 낸 현상이기도 했다. 두 문명이 부딪치면서 가치관과 제도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그만큼 컸던 탓이다. 이슬람의 부활은 서구화에 대한 반작용이지 근대화에 대한 
반작용은 아니다.
  "이슬람의 부활은 또한 서구의 세력과 권위가 약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서구의 전체적 상승세가 꺾이면서 
서구의 이상과 제도도 매력을 상실하였다." 는 주장도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슬람의 부활은 1970년대의 
유가 상승에서 자극받았고 거기서 동인을 얻었다. 유가 파동으로 많은 이슬람 국가는 부와 힘을 엄청나게 
축적하였고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서구에 지배되고 종속당하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 
당시 켈리(John B. Kelly)는 다음의 사실을 관찰하였다. '서구인에게 모욕적인 처벌을 가하는 데서 
사우디아라비아인은 분명히 이중의 만족감을 얻는다. 그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힘과 주체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크리스트교에 대한 경멸과 이슬람의 우윌성을 공공연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부유한 아랍 산유국들의 태도는 
역사적, 종교적, 인종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면 크리스트교 세계를 중동 이슬람 세계에 종속시키려는 
대담한 시도다.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은 풍부한 석유 자왼을 이용하여 이슬람의 소생을 지원하고 
자극하였다. 경제력을 갖춘 이슬람 교도들은 서구 문화에 매료당했던 상태를 부정하고 비이슬람 사회에서 
이슬람의 위치와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데 혼신의 힙을 쏟고 있다. 과거 서구의 경제력이 서구 문화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석유 자산은 이슬람의 우위를 알리는 증거로 내세워졌다.
  유가 급등을 등에 업은 아랍 산유국의 기세는 1980년대에 들어와 한풀 꺾였지만 이슬람의 인구 증가는 
지속적인 힘을 불어넣고 있다. 동아시아의 부상이 경이적인 경제 성장에서 추진력을 얻었다면 이슬람의 부활은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서 추진력을 얻고 있다. 이슬람의 인구 증가율, 특히 발칸.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지역의 
인구 증가율은 인접 여러 나라 또는 세계 전체의 평균 인구 증가율을 크게 웃돈다. l965년에서 1990년 사이 세계 
인구는 33억에서 55억으로 불어나 연평균 1.85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였다. 같은 기간 중 이슬람 사회의 인구 
증가율은 내내 2퍼센트를 상회하였다. 주로 2.5퍼센트를 넘었고 때로는 3퍼센트를 웃돌았다. 가령 1965년에서 
l990년 사이에 마그레브(북아프리카 북서부 곧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때론 리비아를 포합하는 지방: 
옮긴이)지역의 인구는 매년 2.65퍼센트씩 성장하여 2980만 명에서 5900만 명으로 불어났다. 특히 알제리 인구는 
연평균 3퍼센트씩 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이집트 인구는 2.3퍼센트씩 늘어나 2940만 명에서 5240만 명이 되었다. 
1970년에서 1990년 사이 증앙아시아의 연 평균 인구 증가율은 타지키스탄이 2.9퍼센트, 우즈베키스탄이 
2.5퍼센트, 투르크메니스탄이 2.5퍼센트, 키르기즈스탄이 l.9퍼센트 카자흐스탄이 1.1퍼센트씩 늘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인구의 거의 절반이 러시아인 이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인구는 매년 2.5퍼센트씩 
늘었고 인도네시아의 인구 증가율도 연평균 2퍼센트를 상회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전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1980년의 18퍼센트에서 2000년에는 23퍼센트로, 2025년에는 3l퍼센트로 늘어날 전망이다.
  마그레브는 물론 그 밖의 지역에서도 인구 증가율은 절정에 이르렀다가 하락세로 돌아섰지만 절대 인구의 
증가세는 여전히 엄청날 것이며 이러한 인구 증가의 여파는 21세기 전반기에 두루 감지될 것이다 당분칸 이슬람 
인구에서 젊은층이 차지하는 비중은 기형적으로 클 것이며 특히 10대와 20대의 인구 증가가 두드러질 것이다. 
게다가 이 연령 집단은 도시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며 상당변가 최소한 중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질 
것이다. 대규모의 인구 증가와 사회적 활동 인구의 폭증이 맞물리면 다음과 같은 중대한 정치적 결과가 
나타난다.
  우선 젊은이는 반항. 불안정. 개혁. 혁명을 지지하는 세력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청년층에 해당하는 인구 
집단이 컸을 경우 사회가 변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역사에 등장하는 두드러진 청년 
운동의 한 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인구 증가는 17세기 중반과 18세기 후반에 유라시아에서 일어난 두 
차례 혁명의 파고에서 핵심적 요소로 등장한다는 논리를 골드스톤(Jack Goldstone)은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 청년의 비중이 눈에 띄게 커진 l8세기의 마지막 몇십 년은 바로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 였다. l9세기의 성공적 산업화와 대규모 이민은 유럽 사회에서 청년 인구가 가지는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그러나 1920년대에 청년 인구는 다시 급증하척 파시즘을 비롯한 극단주의 운동의 인적 자원을 
제공하였다. 다시 40년 뒤 2차 대전 이후의 베이비 붐 세대는 1960년대의 시위와 항거에서 정치적 영항력을 
분출시켰다.
  이슬람의 청년 인구는 이슬람의 부활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1970년대 에 이슬람 부활의 시동이 걸리고 
l960년대에 그 추세가 가속이 붙는 동안 주요 이슬람 국가의 청년 인구(즉 15세에서 24세까지의 연령 집단) 
비율은 급상승하여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를 웃돌기 시작하였다. 상당수의 이슬람 국가에서 청년 인구가 차지하는 
비증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다음 세기 초에 가서 절정에 이를 것으로 
전망 된다. 이들 나라에서 과거 또는 미래의 절정기 청년 인구 비율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20퍼센트가 넘는다. 21세기 초반 10년안에 절정기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청년 인구 비율은 
20퍼센트에 조금 못 미친다. 청년 인구는 이슬람 조직과 정치 운동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제공한다. l970년대에 
들어와 이란 인구에서 청년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치솟아 70년대 후반에는 20퍼센트를 육박한 사실과 
1979년에 이란 혁명이 터진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알제리의 인구 구성이 이런 기준점에 
도달했을 때 이슬람 정당이 대중적 지지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 또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슬람 
청년 인구의 증가는 정치적으로 의미 심장한 다양한 지역적 편차를 드러 내기도 한다. 자료를 신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지만 보스니아와 알바니아의 청년 인구 비율은 금세기 말에 가서 급속하게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그 경우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평화가 조속히 정착될 수도 있지만 이 슬람 교도에 대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공세가 강화될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반면 걸프만 지역의 청년 인구 비율은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다. 1988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왕세자는 자기 조국이 당면한 가장 큰 위혐은 
청년층에서 부상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라고 언급하였다. 인구 변화의 추세로 보아 이러한 위협은 21세기까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랍 국가들(알제리 이집트, 모로코, 시리아, 뒤니지)의 자연 인구 증가율 은 1970년대와 l990년 사이에 절정에 
이르렀으므로 20대 초반의 구직 인구는 2010년까지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1990년과 비교하여 구직 시장에 새로 
들어오는 수는 튀니지에서 30퍼센트, 알제리 .이집트 .모로코에서 50퍼센트 시리아에서 100퍼센트 증가할 것이다. 
아랍 지역의 급격한 문맹률 감소는 글올 읽을 줄 아는 젊은 세대와 대부분 글을 모르는 노인 세대 사이의 
간극을 낳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과 권력의 분열은 '정치 체제에 긴장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인구 증가는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구 밀도가 높거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나라의 국민들은 
밖으로 진출하여 영토를 점유하면서 인구 압박이 덜한 나라에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의 인구 
증가는 그러므로 이슬람 세계의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이슬람 교도와 다른 민족들 사이의 분쟁에 핵심적 
요인으로 등장한다. 인구 압력과 맞물린 경제 침체는 이슬람 인구를 서구와 그 밖의 비이슬람 사회로 
이동시킨다. 그래서 이들 사회에서 이민 증가는 주요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한 문화의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와 다른 문화의 서서히 늘어나거나 성장이 멈춘 인구의 병존 상태는 양 문화 모두에서 경제 정치 구조 
변화의 압력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령 1970년대에 옛 소련 지역에서는 이슬람 인구가 24퍼센트 늘어난 반면 
러시아 인구는 6.5퍼센트밖에 늘어나지 않아 인구 균형에 급격한 변화가 와서 중앙아시아의 공산당 지도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l980년대에 26퍼센트나 증가한 체첸 인구는 러시아와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마찬가지로 
알바니아의 빠른 인주 증가는 세르비아. 그리스. 이탈리아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급격한 
인구 증가를 예의 주시하고 있으며,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0.2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스페인 또한 인구 증가율이 
자국의 10배나 되는 반면 l인당 GNP는 10분의 1 에도 못 미치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동태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변화하는 환경
  두 자리 수의 경제 성장을 무한정 지속시킬 수 있는 나라는 없으므로 아시아의 경제 성장도 21세기 초반 어느 
시점에 가서는 진정세로 돌아설 것 이다. 일본의 고속 성장은 1970년대 중반을 고비로 뚝 떨어져 그 뒤로는 
미국이나 유럽 각국의 경제 성장률과 대동 소이하였다 아시아의 '경제 기적'을 낳은 나라들도 하나둘 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복잡한 경제 구조를 가진 나라들의 '정상' 수준에 접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 운동 이나 
문화 운동을 무한정 지속시킬 수 있는 나라도 없으므로 어느 시점에 가서는 이슬람 부활 현상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점은 그러한 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인구 증가세가 한풀 꺾이는 
21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다. 그 시기가 오면 호전적 이슬람주의자와 이민의 수가 모두 감소하고 이슬람 내부의 
갈등, 이슬람과 비이슬람의 갈등 수준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과 서구가 밀착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분쟁의 소지는 그만큼 줄어들며 국지적 분쟁 대신 냉전이나 심지어는 냉화(cold peace)가 자리 잡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아시아의 경제 성장과 이슬람의 인구 증가가 서구가 주도해 온 국제 질서에 
커다란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히 세계 문제에 대한 발언권과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은 
빠른 경제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몫으로 더 많이 돌아갈 것이다. 다음 10년 동안에도 지금의 추세가 
지속된다면 증국의 발전은 문명 사이의 관계에서 엄청난 세력 변동을 낳을 것이다. 게다가 그때쯤 가면 인도가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면서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의 인구 증가도 
문명의 세력 판도에 중요한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중등 교육을 받은 청년 인구의 급증은 이슬람 부활의 
추진력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슬람의 호전성과 이민 수도 계속 늘어 날 것이다. 그 결과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비서구 문명의 힘이 지속적으로 증대하면서 비서구 문명과 서구 문명의 층돌, 비서구 문명과 비서구 문명의 
충돌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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