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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5/문명의 충돌

2. 과거와 현재의 문명

by FraisGout 2020. 7. 26.

  문명의 본질
  인류사는 문명사다. 인류의 발전을 문명 아닌 다른 용어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인류의 발전사는 고대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그리스, 메소아메리카(증미의 고대 문명:옮긴이) 를 거쳐 서구와 이슬람 문명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대를 통하여 전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과 인 도 문명 또한 지속적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역사 속에서 문명은 사람들에 게 가장 폭넓은 자기 동일성의 틀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뛰어난 
역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가 문명의 원인, 등장, 부상, 교섭, 성숙, 쇠락, 몰락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왔다. 가령 
베버(Max Weber), 뒤르켐(EmiI Durkheim), 슈팽글러(Osward Spengler), 소로킨(Pitirim Sorokin),
토인비(Arnord Toynbee), 베버(AIfred Weber), 크뢰버 (A. L. Kroeber), 백비(Philip Bagby), 퀴글리(Carrol 
Quigley), 쿨본( Rushton.Coulborn), 도슨(Christopher Dawson), 에이젠슈타트(S. N. Eisenstadt), 브로델, 
맥널(WiIIiam H.McNeill), 보즈먼(AddaBozeman), 월러스틴(ImmanuelWaIIerstein), 아르메스토
(FelipeF=rnindez-Armesto)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을 비롯한 많은 연구가들 이 문명을 수준 높고 정밀하게 
비교 분석한 방대한 문헌을 내놓았다. 이 문헌은 관점, 방법론, 초점, 개념에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본질, 주체, 변동 양태에 관한 중심적 명제에 대해서는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첫째, 단일(.singular) 문명과 복수(plural) 문명의 구분이다. 문명이라는 개념은 18세기 프랑스 사상가들이 
`야만'의 개념과 반대되는 뜻으로 발전시켰다 문명 사회는 정착 생활을 하며 도시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서 원시 사회와 다르다. 문명화되었다는 것은 좋은 것이고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나쁜 것이다. 문명의 
개념은 사회를 평가하는 판단 기준을 제공하였으며. 19세기 내내 유럽인은 비유럽 사회가 유럽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의 일원으로 층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문명화되었는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잣대를 정교하게 
구축하는 데 상당한 지적, 외교적,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람들은 문명의 복수성을 주장하는 
발언을 점점 많이 쏟아냈다 이것은 브로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이상, 아니 유일 무이의 이상으로 정의되는 
문명을 폐기하고 소수의 특권적 개 인이나 집단, 인류의 엘리트에게만 국한된 문명화의 단일한 기준이 있다 는 
전제와 결별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문명은 여러개이며 각각의 문명은 독자적 방식으로 문명화되었다. 요컨대 
단일 문명론의 위세가 약간 꺾였다. 복수적 의미의 문명은 단일 의미의 문명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대단히 
비문명적으로 보일 수가 있다.
  이 책의 관심은 복수 문명에 있다. 그러나 단일 문명과 복수 문명의 구분은 이 책의 주제와 관련을 맺고 
있으며, 단일 문명의 관념은 보편적 세계 문명이 존재한다는 논증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논증은 유지되기 
어렵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논의되듯이 문명들이 점점 더 문명화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여러모로 유익하다.
  둘째, 문명은 독일을 제외하고는 문화적 실체로 파악된다. l9세기 독일의 사상가들은 기계, 공학, 물질적 요소와 
결부되어 있는 문명(civilization)과 한 사회의 가치관, 이상, 지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예술적, 윤리적 특질과 
결부되어 있는 문화(culture)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이러한 구분은 독일 사상에 지금도 뿌리 깊게 남아 있지만 
독일 외부에서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이 관계를 역전시켜 문화는 원시적이며 항구적인 
비도시 사회의 특성인 반면 더 복잡하고 발전되고 도시적이고 역동 적인 사회는 문명을 향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화와 문명을 구분지으려는 노력은 폭넓은 동의를 얻지 못하였으며, 독일을 제외한 지 
역에는 독일처럼 '문화'를 그 저변의 '문명'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것은 기만적인 시도라고 지적한 브로델의 
시각에 동조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문명과 문화는 모두 사람들의 총체적 생활방식을 가리키고 있다. 문명은 크게 씌어진 문화다. 문명과 문화는 
모두 주어진 사회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세대들이 우선적으로 증요성을 부여한 가치, 기준, 제도, 사고 방식을 
담고 있다. 브로델에 따르면 문명은 하나의 공간, 하나의 문화 지역 문화적 특성과 현상의 집약이다 월러스틴이 
정의하는 문명은 모종의 역사적 총체를 형성하면서 이런 현상의 이형들과 공존하는(반드시 동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세계관, 관습, 구조, 문화(물질 문화와 정신 문화 모두)의 특수한 연쇄다. 도슨이 이해하는 문명은 
'특수한 민족의 업적인 문화적 창조 성의 특수하고 독창적인 과정'의 산물인 반면, 뒤르켐과 모스에게 있어 문 
명은 그 안에서 개별적 민족 문화는 전체의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다수의 민족들을 포괄하는 일종의 
윤리적 환경이다. 슈팽글러는 문명을 '문화의 피치 못할 '운명' ..... 발달한 인류의 종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외 
현(외현)적이고 인위적인 상태...... 하나의 결론,과정물을 승계한 완성물 이다 '라고 파악했다.   문화는 문명의 
정의에서 사실상 빠짐없이 등장하는 공통 주제다.
  문명을 정의하는 문화의 핵심적 요소들은 페르시아에 빌붙어 스파르타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한 
아테네인들이 고전적 형태로 표현한바 있다.
  설사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결행을 굳세게 가로막는 다수의 고려 사항들이 존재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파괴되고 불태워진 신상과 신전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우리는 그런 짓을 저지른 자들과 타협 
해서는 안 되며 기필코 복수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리스인은 같은 피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신전과 제례도 
공통적이다. 관습도 비슷하다. 아테네 사람이 이들을 배신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인은 혈연, 언어, 종교, 생활 방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여타 
비그리스인으로부터 그리스인을 구분짓던 특성이었다. 그러나 문명을 정의하는 객관적 요소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테네인이 강조하였듯이 종교라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주요 문명들은 세계 유수의 종교들과 
상당한 수준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민족적 뿌리를 갖는 사람들도 레바논, 옛 
유고슬라비아, 인도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일 수 도 있다.
  문화적 특성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문명권으로 가르는 것과 신체적 특성을 기준으로 인종을 가르는 것 
사이에는 의미 있는 일치점이 발견된다. 그러나 문명과 인종은 동일하지 않다. 같은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도 
판이한 문명에 들어갈 수 있으며, 다른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도 같은 문명에 통합 될 수 있다. 특히 예로부터 
선교 활동을 증시해 온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 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사회들을 거느리고 있다. 인간 집단을 
가르는 핵심적인 구분선은 가치관, 믿음. 제도. 사회 구조이지 몸집, 두상, 피부색이 아니다.
  셋째, 문명은 포괄적이다 다시 말해서 문명을 이루고 있는 구성 단위는 전체로서의 문명과 관련 짓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토인비가 강조하듯이 문명은 다른 문명들에 포섭당하지 않는 포괄성을 갖는다. 멜 코( 
Matthew Melko) 에 따르면 문명은,
  일정 수준의 통합성을 가지고 있다. 문명을 이루는 구성 단위들은 자기들끼리의 상호 관계나 전체와의 
관련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어떤 문명이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국가들은 문명권 바깥에 있는 국가들보다 
자기들끼리 더 많은 관련을 맺을 것이다. 그들은 더 많이 부딪치고 더 자주 외교적으로 접촉할 것이다. 
경제부문의 상호의존도도 두드러질 것이다. 미학적, 철학적 조류에 대한 공감대도 횔씬 폭넓게 형성되어 있올 
것이다.
  문명은 가장 광범위한 문화적 실체다 마을, 지역, 민족, 집단, 국민, 종교 집단은 모두 문화적 혼합성의 상이한 
수준에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마을의 문화는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마을의 문화와 
다르겠지만, 양자는 독일의 마을과는 구별되는 이탈리아 문화의 특성을 공유할 것이다. 유럽 공동체는 다시 
중국이나 인도와는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을 공유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인도, 유럽은 더 포괄적인 문 화적 
실체의 일부분이 아니다. 이들은 독자적인 문명을 이룬다. 문명은 따라서 가장 상위 수준에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결집체이며 가장 광범위한 수준의 문화적 동질성이다. 그것은 인간을 다른 종으로부터 구분지어 주 는 
본질적 특성이다. 문명은 언어, 역사, 종교, 관습. 제도 같은 공통된 객관적 요소와 사람들의 주관적 귀속감 
모두에 의해 정의된다. 사람들은 다양한 수준에서 귀속감을 느낀다.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로마 시 
민으로, 이탈리아 국민으로, 카톨릭 신도로, 크리스트 교도로, 유럽인으로, 서구인으로 각각 다양한 강도로 정의할 
수 있다. 한 개인이 속해 있는 문명은 그가 강렬한 귀속감을 느끼는 가장 광범위한 수준의 공동체다. 문 명은 
우리가 저 밖에 있는 그들'과는 구별되게 그 안에 있으면 문화적으로 친숙감을 느끼는 가장 큰 '우리'다.문명은 
중국 문명처럼 방대한 인구를 거느릴 수도 있으며 영어권 카리브 문명처럼 아주 적은 수의 인구를 가질 수도 
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작은 인구 집단들이 광범위한 문화에 소속되지 않고 독특한 문화를 견지해 온 예가 
수없이 많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크기와 비중을 기준으로 문명을 중심 문명과 주변 문명(백비)으로, 흑은 증심 
문명과 발전이 중지되었거나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는 문명(토인비)으로 구분한다. 이 책은 인류사에서 주요 
문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관심을 두었다.
  문명은 뚜렷한 경계선이 없으며 딱 부러지게 시발점과 종착점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따라서 문명의 구성 요소와 형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다. 사람들의 문화는 뒤섞이고 겹쳐진다. 여러 문화가 얼마나 비슷하고 다른지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의미 있는 실체이다. 문명들 사이의 경계선은 명확하게 긋기 
어렵지만 아무튼 모종의 경계선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넷째, 문명은 유한하긴 하지만 아주 오래간다. 문명은 진화하고 적응하며 인간의 결속체 중에서도 유독 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그것은 극단적인 '장기 지속'의 현실이다. 문명의 독특하고 특별한 본질은 바로 그 장구한 
역사적 지속성이며 사실상 가장 오래 된 이야기는 문명이다. 제국은 일어섰다 무너지고 정권도 왔다가 
사라지지만 문명은 유지되며 정치적 사회적,경제적,이념적 격변의 와중에서도 살아 남는다. 보즈먼은 "정치 
체제는 문명의 표면에 떠 있는 일시적 부표이다. 언어적, 윤리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개별 공동체의 운명은 
연속된 세대들이 중심으로 삼고 뭉쳐 있는 그래서 사회의 연속성을 상징하게 된 특정한 근원적 구성 원리의 
존속 에 궁극적으로 달려 있다는 명제가 타당하다는 것을 국제사는 여실히 입증한다."고 결론짓는다. "', 
20세기의 사실상 거의 모든 주요 문명들은 1천 년이 넘게 지속되어 왔거나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처럼 다른 
장구한 문명의 직접적 파생물이다.
  문명은 유구하지만 한편으로는 진화한다. 문명은 역동적이다. 발흥하고 쇠멸하며 융합하고 분열한다. 그리고 
모든 역사학도가 잘 알고 있듯이 문명은 사라져서 시간의 모래 속에 묻힌다. 문명 진화의 발전 단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형화할 수 있다. 퀴글리는 문명이 혼합, 숙성, 팽창, 갈등, 보편 제국, 쇠퇴, 외침의 일곱 단계를 
거친다고 본다. 멜코는 강고한 봉건 체제에서 과도적 봉건 체제를 거쳐 강고한 국가 체제에 이르고 다시 그것이 
과도적 국가 체제, 강고한 제국 체제로 바뀌는 변화의 모델로 문명의 진화 과정을 일반화한다. 토인비는 문명이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부터 일어나며, 창조적 소수의 주도로 환경에 대한 지배력 강화의 과정을 거쳐 시련의 
시기를 맞이한 뒤 보편 국가가 성립하였다가 해체의 과정으로 들어선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차이점은 있지만 이 
모든 이론들은 문명이 시련과 갈등의 시기를 거쳐 보편 국가로 발전했다가 쇠락과 분열로 치닫는다 고 본다.
  다섯째, 문명은 정치적 실체가 아니라 문화적 실체이므로 치안을 유지하거나 정의를 세우거나 세금을 거두거나 
전쟁을 수행하거나 협상을 벌이거나 그 밖의 정부가 하는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 문명을 구성하는 정치적 
요소는 문명마다 다르고 한 문명 안에서도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문명은 하나 이상의 정치적 단위를 거느릴 수 
있다. 도시 국가, 제국, 연합, 연방, 국민 국가, 다민족 국가가 모두 그런 단위가 될 수 있으며 이들은 다양한 
통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문명이 진화하면서 대체로 문명을 이루는 정치 단위의 수나 성격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극단적인 경우는 문명과 정치적 실체가 일치할 수 있다. 루시언 파이(Lucian Pye)가 지적하듯 중국은 
국가를 가장한 문명이다. 일본은 국가가 곧 문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명은 국가와 같은 정치적 실체를 둘 
이상 거느리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서구, 동방 정교, 라틴아메리카, 이슬람, 힌두, 심지어는 중국 문명도 둘 
이상의 국가를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안에는 중국, 인도, 러시아 같은 핵심국 흑은 지배국이 있다. 
서구는 역사적으로 다수의 일반 국가들과 소수의 핵심국(가령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핵심 국가들의 영향력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전성기의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문명의 핵심국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이슬람의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주요 문명과 지금 세계의 주요 문명이 무엇인가에 학자들은 대체로 일치된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존재한 바 있는 문명의 총수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퀴글리는 열여섯 개의 
뚜렷한 역사적 실례와 여덟 개의 부수적 실례를 제시한다 토인비는 처음에 그 수를 스물하나로 잡았다가 나증에 
스물셋으로 고쳤으며 슈팽글러는 여덟 개의 주요 문명을 명시한다, 맥닐은 역사를 통틀어 모두 아홉 개의 문명을 
논의하며, 백비는 일본과 동방 정교를 중국과 서구로부터 따로 떼어 내느냐 안 떼어 내느냐에 따라 아흡 개 혹은 
열한 개의 주요 문명을 열거한다. 브로델은 현대의 주요 문명을 아흡 개로, 로스토바니는 일곱 개 로 파악한다. 
이런 차이는 인도나 중국 같은 문화 집단이 통시대적으로 단일한 문명을 가졌다고 보느냐, 둘 이상이 밀접하게 
관련된 문명들- 하나가 다른 것의 산물이 되는- 을 가졌다고 보느냐의 차이에서 부분적으로 유래한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주요 문명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론이 제기되지 않는다. 멜코가 관련 문헌을 검토한 뒤 
결론짓듯이 최소 한 열두 개의 주요 문명에 대해서는 무리 없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일곱 
개(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크레타, 그리스-로마, 비잔틴, 중미, 안데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다섯 
개(증국,일본.인도 이슬람,서구)는 지금도 존재한다. 다수의 학자들은 여기에다 그 모체인 비잔틴 문명이나 서구 
크리스트교 문명과는 별개로 러시아 정교 문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 여섯 개의 문명에다,현재의 세계를 좀더 
잘 반영하기 위하여 라틴아메리카., 나아가서는 아프리카 문명을 추가하는 것이 유익할 듯하다. 현재 세계에 있는 
주요 문명은 다음과 같다. 
  중화
  모든 학자들은 최소한 기원전 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어쩌면 그보다 천 년을 앞섰을지도 모르는 하나의 
뚜렷한 중국 문명이 있었다고 믿거나 기원후 최초의 몇 세기 동안 연속적으로 나타난 두 개의 중국 문명 이 
있었다고 믿는다 {포린 어페어스}지에 실린 논문에서 나는 이 문명을 유교 문명이라고 블렀다. 그러나 증화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정확하다. 유교는 중국 문명을 이루는 중요한 성분이기는 하지만 중국 문명은 유교를 
넘어서며 정치적 실체로서의 중국도 넘어선다. 많은 학자들이 쓰는 '중화(sinic)' 라는 용어는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증국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화교 공동체, 나아가서는 베트남과 한국을 비롯한 인접국의 
공통된 문화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본
  일부 학자들은 중국과 일본 문화를 동아시아 문명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묶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며 기원후 100년에서 400년 사이에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일본 문명 을 
독자적으로 인정한다
  힌두
  최소한 기원전 1500년부터 인도 대륙에는 하나의 문명 흑은 그 이상의 연속된 문명들이 존재한 것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들을 인도 문 명이나 힌두 문명으로 일컫는데 최근의 문명에 대해서는 힌두라는 용어가 
선호된다.힌두교는 기원전 2천 년부터 인도 대륙의 문화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아 왔다. 일개 종교, 일개 사회 
제도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것은 인도 문명의 핵심이다. 인도라는 나라가 비록 막강한 이슬람 공동체를 비롯하여 
다수의 문화적 소수 집단을 거느리고 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런 역할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중화와 마찬가지로 힌두라는 표현도 문명의 이름을 그 문명의 핵심국 이름과 구분하는데, 이는 바람직 하다. 두 
경우 모두 문명의 영역은 국가의 수준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슬람
  비중 있는 학자들치고 독자적 이슬람 문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기원후 7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이슬랍교는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로 빠르게 전파되었고 동으로는 중앙아시아, 인도 대륙, 
동남아시아 일대를 휩쓸었다 때문에 이슬람 안에는 아랍, 터키, 페르시아, 말레이 등 개성 있는 다수의 독자 
문화와 하위 문명이 공존 하고 있다
  정교
  여러 학자들은 서구 크리스트교권에서 독립해 러시아에 그 증심을 두고 있는 정교 문화를 독자적인 문명권에 
포함시킨다. 정교권은 비잔틴에서 갈라져 나와 다른 종교와 200년의 몽골 지배, 관료 독재주의를 경험하고 
르네상스, 종교 개혁, 계몽주의와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접촉하면서 형성된 문명이다.
  서구
  서구 문명의 등장 시기는 대체로 기원후 700년에서 800년 사이로 본다. 학자들은 서구 문명을 크게 유럽, 북미, 
라틴아메리카의 세 부분으로 나눈다.
  라틴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는 유럽, 북미와는 약간 다른 경로로 발전해 왔다. 유럽 문명의 직계 자손이긴 하지만 
라틴아메리카는 북미나 유럽에서 는 찾아볼 수 없는 토착 아메리카 문명의 요소들을 다양한 수준으로 받아 
들였다. 라틴아메리카는 집단주의적, 권위주의적 문화를 가지고 있다. 유 럽은 그 정도가 훨씬 덜하며 북미는 
그런 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과 북미는 종교 개혁의 여파를 반영하여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문화를 
결합하였다 비록 차츰 변하고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는 오직 카톨릭 일변도였다. 라틴아메리카 
문명은,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북미에서는 싹쓸이된 토착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토착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멕시코, 중미, 페루, 볼리비아 같은 지역과 아르헨티나, 칠레 같은 지역이 서로 다르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발전과 경제 발전은 북대서양 일원 국가들이 발전해 온 양상과 판이하게 다르다. 개개인의 
차원으로 들어가 보아도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자기 정체성은 분열되어 있다. 어떤 이는 서구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고유의 독자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라틴아메리카와 북미에서 나온 방대한 
연구 논문들은 이 두 지역의 문화적 차이점을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서구 문명 안의 하위 
문명으로 볼 수도 있고, 별개의 문명이지만 서구와 남달리 가까운 관계에 있고 자신이 서구에 속하는지는 분 
열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 문명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에는 라틴아메리카, 또 한편에는 북미와 유럽,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포함하는 문명의 국제 정치적 함의에 초점을 둔 분석을 하는 데는 후자의 시각이 더 적절하고 
유익하다.
  서구는 유럽,북미 호주와 뉴질랜드처럼 유럽인이 정착한 나라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서구를 구성하는 두 중심 
지역 사이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건국 이후로 미국인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자기들의 사회가 유럽과 
대립관계에 있다고 이해하였다. 미국은 자유, 평등, 기회, 미래의 땅 인 반면, 유럽은 억압 계급 갈등, 신분제, 
후진성을 상징하였다 미국은 독자적 문명이라는 주장도 한때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미국과 유럽이 이처럼 맞서게 
된 데는 미국이 적어도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비서구 문명들과 제한적인 접촉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도 
상당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일단 미국이 세계 무대로 나오면서부터 유럽과의 폭넓은 일체감 이 형성되었다."' 
I9세기의 미국은 자신을 유럽과 다르고 유럽에 맞서는 존재로 이해하였지만 20세기의 미국은 유럽을 포함하는 
좀더 포괄적인 서 구라는 실체의 일원이며 선도자로서 스스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서구'라는 말은 이제 예전의 서구 크리스트교 국가권을 일컫는 말로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볼 때 서구는 
특정한 민족이나 종교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나침반의 방위로만 확인되는 유일한 문명이다. 서구는 자신의 역 
사적, 지리적, 문화적 울타리를 넘어섰다. 역사적으로 서구 문명은 유럽 문명이다. 근대 이후의 서구 문명은 
유럽아메리카 문명 흑은 북대서양 문명이다 유럽, 미국 북대서양은 지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서구는 그렇지 
못하다 '서구'라는 이름은 또한 '서구화'의 개념을 낳았으며 근대화는 곧 서구화라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주장을 
확산시켰다. 사람들은 그래서 일본이 '서구화'되었다고 하지 유럽미국화'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서구 문 명은 
대체로 '유럽미국' 문명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기에,심각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서구라는 말을 
쓰기로 하겠다.
  아프리카
  브로델을 제외하고 명망 있는 학자치고 아프리카를 하나의 뚜렷한 문명으로 인정하려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프리카 대륙의 북단 과 동부 해안 지역은 이슬람 문명에 들어간다. 역사적으로 에티오피아는 독자적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는 유럽의 제국 주의와 정착민을 통하여 서구 문명의 요소가 
도입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우 네덜란드계, 프랑스계, 영국계 이주민들이 복수 성분으로 이루어진 유럽 
문화를 건설하였다. 가장 중요한 측면은 유럽 제국수의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대륙 대부분 지역에 
크리스트교를 이식하였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 전역에 강한 부족 의식이 여전히 지배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점차 아프리카인으로서의 동질감 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사하라 이남 지역의 
아프리카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핵심국으로 하는 독자적 문명으로 상정하려면 굳이 못할 것도 없다.
  종교는 문명을 규정하는 핵심적 특성이다. 도슨이 말하듯이 거대 종교는 거대 문명이 의지하는 토대이다. 
토대이다. 베버가 말한 5대 세계 종교 중에서 넷은-크리스트교,이슬람교,힌두교,유교-거대 문명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슬람교, 크리스트 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일찌감치 2개의 
가지로 갈라졌으며 크리스트교처럼 자신이 발생한 땅에서는 살아 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원후 1세기에 들어와 
중국에 유입된 대승 불교는 다시 한반도, 베트남, 일본으로 전파되었다.이들 사회에서 불교는 다양한 방식으로 
토착 문화(가령 중국의 경우는 유교와 도교)에 의해 변형 수용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억압당하였다.불교는 이들의 
문화에서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지만 이 사회들은 스스로를 불교 문명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지 않다. 그러나 소승 불교에 바탕을 둔 문명은 지금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에 존재하고 
있다.
  한편 티베트, 몽고, 부탄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대승 불교의 변형인 라마 블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이들 사회는 
제2의 불교 문명 지역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 구도로 보았을 때 불교는 인도에서 사실상 소멸의 길을 
걷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기존의 문화에 편입되고 통합된 데서 알 수 있듯 이 불교는 거대 종교이기는 하지만 
거대 문명의 바탕이 되지는 못했다.
  문명과 문명의 관계
  조우
  문명간의 관계는 두 단계를 거쳐 발전하였으며 지금은 세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 문명이 처음 등장하고 3천 
년이라는 기간 동안 문명들 사이의 접촉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혀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제한적이거나 간헐적이었다. 이러한 접촉의 성격은 역사가들이 즐겨 쓰는 '조우(encounter)' 라는 표현에 잘 
반영되어 있다. 문명들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한 시기에 존재하던 문명의 수도 몇 안 되었을 뿐더러
 슈워츠(Benjamin Schwartz) 와 에이젠슈타트가 강조하듯이 축 시대(AxiaI Age)문명과 전축 시대(pre Axial 
Age)문명 사이에는 초월적 질서와 세속적 질서의 구분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전축 시대 문명과 달리 축 시대 문명은 특권적 지식 층에 의하여 보급되는 초월적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의 예언자와 제사장,그리스의 철학자와 소피스트,중국의 문사, 불교의 승단, 이슬람의 울라마가 이들 
지식층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친연 관계에 있는 문명들이 이삼 세대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 경우 한 문명이 소멸한 뒤 잠시 공백 기간이 있은 뒤 다음 세대의 문명이 이를 계승하였다. (그림 
2.1)은 주요 유라시아 문명들의 관계를 시기별로 단순하게 정리한 도표이다. 문명은 또한 지리적으로도 분리되어 
있었다 l500년까지만 하더라도 안데스 문명과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다른 문명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음은 물론 
자기네끼리도 교섭이 없었다. 나일 강,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 황하 유역에서 발생한 초기 문명들도 
상호 교류가 없었다. 그러다가 동지중해, 서남아시아. 북인도를 중심으로 문명들 사이의 접촉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문명들 사이의 지리적 거리와 그런 거리를 극복할 수 있는 운반 수단의 한계로 통신과 교역 관계는 
제한되어 있었다. 지중해와 인도양에서는 해상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150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리되어 있던 세계의 여러 문명들을 미미한 수준으로나마 연결시켜 주던 주요한 교통 수단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가 아니라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었다.
  사상과 기술은 문명에서 문명으로 전파되었지만 그러기에는 몇 세기가 족히 걸렸다. 정복의 결과가 아닌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문화적 전파로 꼽을 수있는 것은 북부 인도에서 출현한 지 약 600년 만에 이루어진 
불교의 중국 전래라 할 수 있다. 인쇄술은 기원후 8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되었고 활자는 11세기에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 기술이 유럽에 전달된 것은 14세기였다. 종이는 기원후 2세기에 중국에서 만들어져 7세기에 일본에 
전달되었지만 서쪽으로는 8세기경 중앙아시아에, l0세기경 북아프리카에, l2 세기경 스페인에, 13세기경 북유럽에 
전해졌다. 역시 중국이 9세기에 발명한 화약은 몇백 년 뒤 아랍에 보급되었으며 유럽에는 I4세기에 들어가서야 
소개되었다.
  문명과 문명의 가장 극적이면서 의미 심장한 접촉은 한 문명권의 사람들이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을 정복하여 
제거하거나 자기들 밑으로 복속시켰을 때 일어났다. 이런 식의 접촉은 짧은 기간 동안 폭력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기원후 7세기를 기점으로 이슬람과 서구, 이슬람과 인도 
사이에서 비교적 지속성이 있고 때로는 강렬한 문명간의 접촉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업적 문화적, 
군사적 교류는 같은 문명 안에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중국과 인도는 경우에 따라 이민족(무굴인,몽고인)의 
침입을 받아 정복당하기도 하였지만, 두 문명 모두 자기 내부에서 기나긴 내전 상태를 경험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인은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여타 비그리스인과 싸우고 교역하기보다는 자기들끼리 횔씬 더많이 싸우고 
교역하였다
  격돌: 서구의 부상
  유럽의 크리스트교권은 8세기와 9세기 무렵에 독자적 문명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의 
문명 수준은 다른 문명들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중국은 당, 송, 명 시대에, 이슬람은 8세 기에서 l2세기까지 , 
비잔틴은 8세기에서 11세기까지 유럽을 훨씬 능가하는 경제력, 영토,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술적, 학술적, 
과학적 성취도면에서도 유럽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유럽 문화는 l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슬람과 비잔틴의 
고등 문명으로부터 적절한 요소들을 활용하려는 열성적이며 체계적인 노력과 이러한 유산을 서구의 특수한 
조건과 이익에 맞게 수용한 데 힘입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기간 동안 헝가리,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발트 
해 연안은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였으며 그에 따라 로마법을 비롯하여 서구 문명의 제반 측면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덕분에 서구 문명의 동쪽 변방은 커다란 변화 없이 안정을 유지하였다. 12세기와 13세기에 서구인들은 
스페인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확대하려고 애썼으며 지중해에서는 확고한 우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그 뒤 터키가 
세력 을 확장하면서 '서유럽의 일차 해양 제국' 은 무너지고 만다. 1500년에 이르러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는 
이미 안정기로 접어들었으며 사회적 다원주의, 무역의 팽창, 기술 발전은 세계 정치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문명과 문명 사이의 제한적, 간헐적 접촉은 다른 모든 문명들에 대한 서구의 지속적, 일방적, 압도적 영향력 
행사로 성격이 바뀌었다. l5세기 말이 되자 무어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침내 축출당하고 포르투갈의 아시아 
정복과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250년 동안 서반구 전역파 아시아 주요 지역은 유럽의 
지배를 받거나 그 주도권 아래 들어간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유럽의 직접적 통치는 처음에는 미국에서. 그 
다음에는 아이티에서 축소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이 유럽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 에는 재부상한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의 거의 전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아시아에서도 인도를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권 아래 끌어들였다. 20세기 초반으로 접어들면 
터키를 제외한 증동의 거의 모든 지역이 서구의 직간접적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유럽인 또는 (아메리카 대륙 의) 
과거 유럽 식민지 이주민은 1800년에 이르러 세계 육지의 35퍼센트를 점유하였다. l878년에는 그 비율이 
67퍼센트로 높아졌고 l914년에는 다시 84퍼센트로 껑층 뛰었다. 1920년에 가서도 오스만 제국이 영국,프랑스. 
이탈리아에 의하여 분할되면서 그 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1800년에 영국은 150만 평방마일의 영토와 2천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태양이 지지 않는다던 l900년 빅토리아 시대의 대영 제국은 1100만 평방마일의 영토와 
3억 9천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세력 팽창 과정에서 안데스 및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효과적으로 제거되었으며, 인도 와 이슬람 문명도 아프리카 문명과 함께 서구에 복속되었다. 중국도 서구의 
침략을 받고 서구에 종속당하는 운명에 놓였다. 고도로 중앙 집권화된 통치 집단이 지배하던 러시아, 일본. 
에티오피아만이 서구의 침탈에 저항하여 의미 있는 독자적 위치를 고수하였다. 대체로 400년 동안 문명과 문 
명의 관계는 서구 문명에 대한 다른 문명들의 종속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독특하고 극적인 사태를 낳은 원인으로는 서구의 사회 구조와 계급 관계, 도시와 무역의 발전, 세속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 사이의 권력 분산. 서구 민족들 사이에서 나타난 민족 의식의 고양, 국가 관료제의 발전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직접적 원동력은 기술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원정을 할 수 있게 한 대양 항해술의 발명과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정복할 수 있게 한 군사력의 
발전이었다. 파커(Geoffrey Parker) 는 '서구의 부상은 대체로 무력 행사의 산믈이었다. 유럽과 그 경쟁 세력의 
군사적 균형이 유럽 쪽으로 서서히 기울었다는 사실이 유럽을 부상시킨 것이다....... 서구인이 1500년에서 1750 년 
사이에 최초의 진정한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것은, 군사적 혁명 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전쟁 수행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는 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서구의 팽창은 또한 군대 조직과 군사 훈련의 
우위, 산업 혁명을 선도하면서 얻은 무기. 수송 수단, 병참술, 의료 서비스 면에서의 우위 때문에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서구는 사상,가치 관, 종교의 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이것들은 다른 문명의 개종을 별로 낳지 
못했다.) 조직화된 폭력의 우위로 세계를 정복하였다. 서구인은 종종 이런 사실을 잊지만, 비서구인은 결코 이 
점을 망각하지 않는다.
  l910년의 세계는 인류 역사의 어떤 시기와 비교해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더욱 통합되어 있었다. 국제 
무역은 세계 총생산의 33퍼센트라는 전무후무한 수치를 기록하였다. 총투자액 중에 국제 투자가 차지하는 비율 
역시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문명은 서구 문명을 뜻하였으며 서구는 세계의 대부분을 통제하거나 지배하였다. 
국제법은 그로티우스의 전통에서 비롯된 서구 국제법이었다. 국제 체제는 주권을 가진 꾼명' 국가들과 이들이 
지배하는 식민지들로 이루어진 베스트팔텐 체제에 다름 아니었다.
  서구에 의해 정의되는 이 국제 체제의 출현은 1500년 이후의 세계 정치 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발전 양상에 
해당한다. 서구 사회들은 비서구 사회들과 지배증속의 양식으로 교섭을 가졌을 뿐 아니라 자기네끼리도 더욱 
동등해진 바탕 위에서 교섭을 가지게 되었다. 단일 문명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실체들간의 이러한 교섭은 
증국, 인도, 그리스 문명 안에서 발생한 교섭의 양상과 아주 흡사하다 이러한 교섭은 언어, 법률, 종교, 통치 술, 
농업, 토지 소유, 나아가 친족 제도 면에서의 문화적 동질성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유럽 민족들은 공통의 문화를 
지녔고, 활발한 무역망, 인력 의 꾸준한 교류, 유력한 가문끼리의 복잡한 혼인 관계를 통하여 광범위한 접촉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또 자기네끼리 하루가 멀다하고 싸웠다. 유럽의 국가들 사이에서 평화는 일상이 아니라 
예외였다. 이 시기의 상당한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일반적으로 유럽으로 간주되는 지역의 4분의 1 을 
다스렸지만 오스만 제국은 유럽 국제 체제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0년 동안 서구 문명 내부의 정치 역학을 지배한 것은 대규모의 종교적 분열과 종교 전쟁, 그리고 왕조 
전쟁이었다 다시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로 한 세기 반 동안 서구 세계의 갈등은 주로 자신의 관료 체제를 팽창 
하려고 기도하는 황제와 절대 군주와 입헌 군주, 그들의 적수, 상업에 기반을 둔 그들의 경제력, 그들이 다스리던 
영토에서 촉발된 분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서구인은 국민 국가를 만들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로 분쟁의 주역은 
군주가 아니라 국가였다. 1793년에 팔머(R.R Palmer)는 이렇게 썼다. "왕들의 전쟁은 끝났고 민족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I9세기의 이 러한 양상은 l차 대전까지 지속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국민 국가들 사이의 분쟁은 처음에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자유 민주주의 사이의 
대결로, 그 뒤에는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사이의 이념 대결로 바뀌었다. 냉전 시대에 이 이념들은 두 
초강대국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념에서 찾았고 둘 다 유럽적 의미의 전통적 
민족 국가가 아니었다. 마르크시즘이 처음에 러시아에서, 곧 이어 증국과 베트남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유럽식 
국제 체제는 탈유럽적 다극 문명 체제로 이행하였다. 마르크시즘은 유럽 문명의 산물이었음에도 유럽에서는 
뿌리를 내리지도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다.
  그 대신 근대화에 눈뜬 혁명적 엘리트들이 이것을 러시아, 중국, 베트남에 도입하였다. 레닌, 마오쩌뚱,
 호치민은 마르크시즘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수정하여 서구 세력에 맞서고자 인민을 동원하고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는 데 활용하였다.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증국과 베트남에서 
공산주의가 크게 수정되었다고 해서 이들 사회가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입하리라는 보장은 없 
다. 그 점을 낙관하는 서구인들은 비서구 문화들의 창조성과 융통성, 개성 앞에서 깜짝 놀랄 것이다.
  교섭: 다문명 체제
  그리하여 20세기에 들어와 문명간의 관계는 한 문명 이 나머지 모든 문명들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던 
단계에서 벗어나 모든 문명들 사이에서 다각적인 교섭이 강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전 
시대의 문명 관계에서 뚜렷이 드러나던 두 가지 특징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첫째, 역사가들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서구의 뱅창'은 끝나고 '서구에 대한 반항'이 시작되었다.균일한 양상은 
아니고 때로는 중단과 역전도 있 었지만 서구의 힘은 다른 문명들의 힘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1990년의 세계 지도는 1920년의 세계 지도와 닮은 구석이 거의많다. 군사력,경제력의 균형과 정치적 영향력의 
판또가 바뀌었다.(이 문제는 뒤에 가서 자세히 분석할 것이다.) 서구가 다른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꾸준히 미쳐 
왔지만 서구와 다른 문명들 사이의 관계는 이들 문명에서 나타나는 발전에 서구가 대응을 하는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 비서구 사회들은 서구가 만든 역사에서 단순한 대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 는 자기 
자신의 역사는 물론 서구의 역사도 이들이 조금씩 만들고 움직이게 되었다.
  둘째, 이러한 발전의 결과로 국제 체제는 서구를 넘어서 다문명 체제로 확대되었다. 동시에 서구 국가들 
사이의 분쟁-몇 세기 동안 그 체제를 지배해 온-도 시들해졌다. 문명 발전의 단계로 보아 2o세기 후반의 서 
구는 '전투 국가'의 단계를 벗어나 보편 국가 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서구의 국민 국가들이 유럽과 북미에 
자리 잡은 두 개의 준보꾄 국가로 응집된 상태이므로 이 단계는 아직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응집체 
와 그들을 구성하는 단위는 공식, 비공식의 제도적 끈으로 대단히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다. 과거 문명의 보편 
국가는 제국이었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정치 형태는 민주주의이므로 지금 태동하는 서구 문명의 보편 국가 는 
제국이 아니라 연방, 연맹, 국제 제도 및 국제 기구의 혼합체다.
  20세기의 거대한 정치 이념으로 우리는 자유주의,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협동 조합주의, 마르크시즘, 공산주의, 
사회 민주주의, 보수주의, 민족 주의 파시쯤, 기독교 민주주의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서구 문명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정치 이념 은 한결같이 서구에서 나왔다. 반면에 
서구는 주요한 종교를 낳지 못하였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모두 비서구 문명의 산물이며 대부분의 경우 
서구 문명보다 앞서 탄생하였다 서구가 주도하던 단계를 세계가 벗어나 먼저 후기 서구 문명의 쇠락과 운명을 
같이한 이념들의 자리를 종교 또는 문화에 바탕을 둔 정체성과 헌신의 형식이 차지하게 되었다. 서구 문명의 
독특한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종교와 국제 정치의 베스트팔렌식 분리는 막 을 내리고 모티머(Edward 
Mortimer)가 강조하듯 종교가 점차 국제 문제로 침투해 들어가는 경향이 나타난다. 서구가 잉태한 정치 이념 
사이의 문명 내적 층돌은 문화와 종교의 문명간 층돌로 대체되고 있다.
  국제 관계의 다극적 서구 체제는 양극적 준서구 체제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이것은 다시 다극적, 다문명 체제로 
바뀌었다. 세계 정치의 지형도는 1920년의 한 세계에서 l960년대의 세 세계로, 다시 1990년대의 예닐곱 개 이상의 
세계로 변화하였다. 그와 아울러 1920년의 서구 제국들은 1960년 대에 와서 훨씬 제한된 '자유 세계' (여기서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다수의 비서구 국가들도 포함되었다.)로 축소되었고, 1990년에는 더더욱 협소한 '서구'로 
움츠러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1988년에서 1993년 사이에 자유 세계라는 이념적 용어의 사용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서구라는 문명적 용어의 사용이 늘어났다는 사실에도 언어적으로 반영되어 있다(t표 2.1} 참조) 뿐만 
아니라 문화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이슬람, 대중국, 러시아와 '인접국들', 유럽연합에 대한 언급이 늘고, 문명적 
내용을 담은 각종 용어들의 사용이 큰 폭으로 증가한 데서도 이런 추세를 읽을 수 있다. 이 세번째 단계의 문 
명간 관계는 첫번째 단계보다 훨씬 빈도가 잦고 강하며 두 번째 단계보다 훨씬 평등하고 호혜적이다 또한 냉전 
시대와는 달리 하나의 간극이 지배 하지 않으며 서구와 다른 문명들 사이에, 또 많은 비서구 문명들 사이에 
복수의 간극들이 존재한다.
  불(Htdley Bull) 에 따르면 둘 이상의 국가가 상호 층분한 접촉을 가지고 적어도 어느 수준까지는 전체의 
일부로서 행동할 수 있도록 쌍방의 결정에 서로가 층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국제 체제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 사회는 국제 체제 안의 국가들이 '공통된 이익과 공통된 가치'를 지니고 '공통된 
일련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고' '공통된 문화나 문명'을 가지고 있을 때만 존립한다. 과거 수메르, 그리스,  
 중국, 인도, 이슬람이 그랬듯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유럽의 국제 체제는 국제 사회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유럽의 국제 체제는 사실상 다른 문명들의 모든 사회를 포함하는 범위로 확대되었다. 
유럽의 일부 제도와 관습은 이들 사회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회들에는 유럽 국제 사회의 저변에 
깔린 공통의 문화가 결여되어 있다. 영국식의 국제 관계 이론으로 설명하자면 세계는 국제 체제로서는 잘 
발전되어 있지만 매우 원시적인 국제 사회의 틀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든 문명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며 자신의 역사를 인류사의 주역으로 인상 깊게 기술한다. 그런 성향은 
다른 문명보다도 특히 서구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 유일 문명적 관점은 다문명 세계에서 타딩성 과 
실효성을 잃고 있다.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자명한 원리를 일찍 부터 깨달았다. l918년 슈팽글러는 오직 
서구에게만 적용되는 고대 .중세 .근대의 명쾌한 단계 구분을 특징으로 하는 서구에 만연한 근시안적 
역사관을 비판하였다. 그는 '역사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적 관점'을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으로 대체하고 '단선적 
역사의 허무 맹랑한 허구를 다수의 강력한 문화들이 펼친 드라마'로 교체할 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몇십 
년 뒤 토인비는 '세계는 자신의 둘레를 공전하고 동양은 언제나 제자리 걸음이기에 서양의 전진은 필연적'이라는 
자기 중심적 망상에서 드러나는 서구의 편협성과 자기 도취를 매섭게 꼬집었다. 그도 슈꽹글러처럼 통일된 
역사라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문명의 강줄기는 오직 우리 것 뿐이며 다른 강줄기들은 모두 지류이거나 
아니면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진다는 전제 또한 배격하였다. 토인비의 발언이 있은지 오십 년 뒤 브로델은 
비슷한 맥락에서 좀더 거시적인 관점을 지향하면서 세계의 대규모 문화적 갈등과 문명들의 다양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학자들이 경고한 환상과 편견은 여전히 살아 남았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서구의 유럽 문명이 전 세계의 보편 문명이 되었다는 만연한 편협된 자부심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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