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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5/문명의 충돌

8. 서구와 비서구: 문명간의 문제

by FraisGout 2020. 7. 26.

  서구 보편주의
  새로운 세계에서는 상이한 문명에 속하는 국가들과 집단들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고 대체로 적대적이 경향을 
띨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관계는 문명간의 관계다. 미시적 
차원에서 보면 폭력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단층선은 이슬람과 이웃한 정교, 힌두, 아프리카, 서구 
크리스트교 문명 사이에 놓여 있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지배적 대립은 서구 대 비서구의 양상으로 
타타나겠지만, 가장 격렬한 대립은 이슬람 사회아 아시아 사회, 이슬람 사회와 서구 사회에서 나타날 것이다. 
미래의 가장 위험한 충돌은 서구의 오만함, 이슬람의 편협함, 중화의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것이다.
  문명 중 유일하게 서구는 다른 모든 문명에게 대대적인, 때로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서구이슬람  
힘과 문화, 다른 문명들의 힘과 문화의 상대적 힘이 증가하면서 서구 문화의 매력은 반감되며 비서구인들은 점점 
자신들의 고유 문화에 애착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서구 문화의 보편성을 관철하려는 서구-특히 미국-의 노력과 서구의 현실적 능력 사이에서 생겨나는 부조화라고 
말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이 지구적 차원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서구의 이념이 
보편타당하다는 견해가 확산되면서 부조화는 한층 심화되었다. 서구, 그 중에서도 특히 예로부터 민주주의의 
선교사 역할을 자임해 온 미국은 비서구인들이 민주주의, 시장 경제, 제한된 정부, 인권, 개인주의, 법치주의 같은 
서구의 가치에 동조해야 하며, 이러한 가치들을 자신들의 제도에 구현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문명들 내의 
소수 집단은 이러한 가치를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선전하지만 비서구 사회의 지배적인 태도는 대체로 회의주의 
아니면 격렬한 반발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서구의 보편주의가 비서구에게는 제국주의로 다가온다.
  서구는 자신의 주도적 위치를 고수하고자 지금도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세계 공동체'의 이익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러한 이익을 수호하려고 한다. 이러한 구호는 
미국과 여타 서방 국가들의 이익이 반영된 행동에 범지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완곡한 집합명사('자유 세계를 
대체하는')가 되어 버렸다. 가령 서구는 비서구 사회의 경제를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 경제 체제로 끌어들이려고 
애쓴다. 서구는 IMF 같은 국제 경제 기구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다른 국가들에게 자신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경제정책을 강요한다. 비서구인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할 경우 IMF는 경제각료를 
비롯한 소수집단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거의 모든 응답자가 IMF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다. IMF에 대한 부정적 인상은 IMF 관리들을 다른 사람의 돈을 몰수하고 비민주적으로 생경한 정치, 경제 
간행의 규칙을 강요하면서 경제적 자유의 숨통을 틀어막기를 일삼는 네오볼셰비키로 그린 아르바토프(GEORGI 
Arbatov)의 묘사에 집약되어 있다.
  또한 비서구인들은 서구의 원칙과 서구의 행동 사이에서 나타나는 간극을 서슴지 않고 지적한다. 위선, 
이중잣대, 단서 조항은 보편주의가 한낱 체스처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민주주의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집권을 돕는다면 재고의 대상이 되고, 이란과 이라크에게는 군축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방치하고, 자유 무역은 경제 성장을 낳는 만병 통치약이지만 농업은 예외이고, 중국의 인권은 문제 
삼 아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은 문제 삼지 않고, 석유 자원을 가진 쿠웨이트에 대한 침공은 기를 쓰고 막아도 
석유 자원이 없는 보스니아가 공격을 받으면 나 몰라라 한다. 이중 잣대는 어설픈 보편주의가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대가이다.
  정치적 독립을 달성한 비서구 국가들은 서구의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서구에 필적할 만한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아시아와 이슬람 국가들은 단시일 안에 서구와 
군사적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지름길을 모색하고 있다. 서구 문명의 보편주의에 대한 집착과 서구의 상대적 세력 
감소. 다른 문명들의 점운하는 문화적 자긍심은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 소지가 높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의 성격과 적대감의 정도는 다양하며 크게 세 범주로 구분된다. 서구는 도전 의식이 강한 이슬람 
문명, 중국 문명에 대해서는 늘 긴장감을 느끼며 이들의 관계는 대체로 적대적이다. 세력이 약하며 서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와의 관계에서는 갈등의 소지가 높지 않고 특히 라틴아메리카와 서구의 
관계는 원만할 것이다. 러시아 일본 인도와 서구의 관계는 이 두 범주의 증간적 성격을 띠면서 협력과 갈등의 
요인을 모두 안고 있다. 이 세 나라는 사안에 따라서 때로는 이슬람, 중국의 편에 서고 때로는 서구의 편을 들 
것이다. 이들은 서구 문명과 이슬람, 중국 문명 사이에서 '그네' 역할을 하는 문명이다.
  이슬람과 중국은 판이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둘 다 서구에 대한 크나큰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문명의 실력과 자긍심은 서구와의 관계에서 나날이 늘어나고 있으며 가치관과 이익을 둘러싼 서구와의 층돌 
역시 다각화되고 심화되고 있다. 이슬람에는 핵심국이 없으므로 이슬람과 서구의 관계는 나라별로 크게 다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로 서구에 대한 반감이 지배적 추세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추세는 원리주의의 
부상, 이슬람 각국에서 나타나는 친서방 정권에서 반서방 정권으로의 권력 교체 현상, 일부 이슬람 집단과 
서구의 준전시 상태 돌입, 일부 이슬람 국가와 미국 사이에 존재했던 냉전적 안보 결속의 약화에 반영되고 있다. 
특정한 사안들을 놓고 벌어지는 대딥의 근저에 깔린 것은 향후 세계에서 이들 문명이 서구에 견주어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2l세기의 세계 기구, 권력의 분포, 각국의 정치와 경제는 서구의 가치와 
이익을 대변할 것인가, 아니면 이슬람과 증국의 가치와 이익에 의하여 주로 규정될 것인가?
  현실주의자들은 비서구 문명의 핵심국들이 연합하여 서구의 지배에 맞서는 견제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사안에서는 이것이 이미 현실로 나다나고 있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 안에 대대적인 반서구 
연합이 출현할 것 같지는 않다. 이슬람 문명과 중국 문명은 종교, 문화, 사회 구조, 전통, 정치, 생활 방식의 
뿌리에 놓인 근본적 가정이 판이하게 다르다. 두 문명의 공통점은 두 문명이 각각 서구와 갖는 공통점보다도 
미약하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에서는 공동의 적이 공동의 이해를 낳는다. 서구를 주된 적수로 간주하는 이슬람과 
중국은 히틀러에 맞서 연합국과 스탈린이 협력했던 것처럼 서구에 맞서 협력을 모색할 만한 층분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협력은 인권. 경제 등의 다양한 사안에서 일어나지만, 무엇보다도 군사력. 특히 대량 살상 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여 서구의 군사적 우위에 도전하는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초반 이미 '유교-이슬람 결합'이 구축되어 한편에서는 중국, 북한과 다른 한편에서는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알제리가 다양한 수준으로 공조를 필치면서 군사 부문에서 서구에 대적할 수 있는 길을 
도모하고 있다.
  서구와 이들 국가의 대립을 낳는 사안들이 국제 무대에서 점차 무게를 얻고 있다. 이러한 사안들은 서구의 
다음과 같은 의중과 맞물려 있다 (1) 서구는 핵무기, 생물 무기, 화학 무기와 이 무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 
의 확산 방지와 축소 정책을 통해 군사적 우위를 고수하려고 한다. (2)서구는 다른 국가들에게 서구적 개념의 
인권을 존중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도록 압박을 가함으로써 서구의 정치적 가치관과 제도를 확산시키 
려고 한다. (3)서구는 비서구인 이민자나 망명자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서구 사회의 문화적, 사회적, 인종적 틀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 세 부문에서 서구는 비서구 사회의 이익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어려움을 겪을 공산이 크다.
  무기 확산
  군비 확산은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파생물이다. 일본 중국, 아시아 각국은 경제력이 커지면서 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슬람 국가들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경제 개혁이 성공할 경우 러시아의 군사력 강화도 
예상된다. 20세기의 지난 몇십 년 동안 비서구 국가들은 서방국, 러시아, 이스라엘, 중국으로부터 첨단 무기를 
확보하였으며 한 걸음더 나아가 고도의 첨단 무기를 자국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방위 산업을 육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21세기 초반에 들어가서는 더욱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들어가서도 상당 기간 동안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군시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문명은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 아래 주도하는 서구 문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 공습을 감행할 수 있는 공군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는 여전히 미국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미국을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게 하고 서구를 세계의 주도적 문명으로 남아 있게 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서구와 
비서구의 군시적 균형에서 서구의 압도적 우위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첨단 재래식 무기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엄청난 시간과 노력, 비용 때문에 비서구 국가들은 서구의 재래식 
군사력에 맞설 수 있는 별도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유혹을 강하게 받는다. 가장 손쉬운 길은 대량 살상 
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다. 문명의 핵심국들과 지역 패권을 누리고 있거나 
패권을 지향하는 국가들은 특히 그런 무기 확보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러한 무기는 먼저, 그것을 보유한 
국가들이 자기네 문명이나 지역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 주며,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외세가 
자기네 문명이나 지역에 쉽게 개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억지력을 제공한다. 이라크가 핵무기를 손에 넣을 때까지 
후세인이 쿠웨이트 침공을 2, 3년만 늦추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쿠웨이트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도 독차지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서구 국가들은 걸프전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북한의 군사 
관계자들이 얻은 교훈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군사력을 배치할 여유를 주지 말라. 공군력을 증강할 틈을 주지 
말라. 미국이 기선을 잡지 못하게 하라. 미군의 인명 피해를 최대화하라." 인도의 한 고위 군 장성의 지적은 더 
노골적이다. "핵무기가 없거든 미국과 싸우지 말라 ?" 그러한 교훈은 비서구 세계의 정치 지도자와 군 
관계자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면서 다음과 같은 개연성 높은 전망을 낳았다. '미국은 핵무기를 가진 나라와는 
싸우지 않는다.
  핵무기는 예전처럼 패권 정치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패권국들이 맡은 역할이 축소되고 
국제 체제의 분열 추세를 공고히 한다.' 고 프리드먼(Lawrence Freedman)은 지적하였다. 탈냉전 세계에서 
핵무기가 서구에게 지니는 의미는 냉전 시대의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냉전 당시 미국의 애스핀 국방 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서구는 핵무기를 통하여 소련에 대한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하였다. 핵무기는 '균형추' 였다. 
그러나 탈냉전 세계에서 미국은 재래식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이제는 미국의 잠재적 
적수들이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한다. 과거의 소련처럼 미국은 군시적 우위를 잃게 될지 모른다.
  따라서 러시아가 자국의 방위 계획에서 핵무기의 역할을 새삼 강조하면서 1995년에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추가로 대륙간 미사일과 탄두를 구입하기로 합의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1950년대에 우리가 러시아측 
에게 했던 말을 지금 그대로 되듣고 있다." 고 미국의 한 무기 전문가는 지적한다. 이제는 러시아측이 이떻게 
말한다. 우리가 핵무기를 도입하는 것은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다." 비슷한 역전 현상으로, 냉전 
시대의 미국은 전쟁 억지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선제 핵 공격 포기 의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탈냉전 세계에서 핵무기가 갖는 전쟁 억지력을 새롭게 주목하면서 러시아는 1993년 과거 소련이 
견지 하였던 선제 핵 공격 포기 의지를 사실상 철회하였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탈냉전 시대의 제한적 억지력에 
입각한 자신의 핵전략을 발전시키면서 1964년에 표명한 바 있는 선제 핵 공격 포기 의지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며 그 의지를 약화시켰다. 다른 핵심국들과 지역 강국들도 핵무기나 기타 대량 살상 무기를 확보하면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 서구의 재래식 무기에 자신의 무기가 갖는 억지력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핵무기는 서구를 더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핵 탄두를 장착한 탄도 미사일을 유럽과 
북미에 보낼 수 있다. 북한, 파키스탄, 인도는 미사일의 사정 거리를 계속 넓히고 있으며 언젠가는 서구를 직접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핵 무기는 다른 수단으로 전용될 수도 있다. 
군사 분석가들은 테러, 산발적 게릴라전 등의 저강도전에서 제한전, 재래식 무기가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전면전, 
나아가 핵전쟁까지 충돌의 다양한 수위를 상정한다 역사적으로 테러는 약자의 무기, 곧 재래식 군사력을 갖지 
못한 세력의 무기였다. 2차 대전 이후 핵무기는 약자가 재래식 군사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과거의 경우 테러리스트들은 제한적 폭력밖에 행사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여기서 몇 명 죽이고 저기서 건물을 
파괴하는 정도였다. 대규모 폭력을 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사력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면 
소수의 테러리스트가 대규모 살상, 대규모 파괴를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테러와 핵무기는 
약자인 비서구 세계의 무기이다. 이 둘이 결합할 때 약자인 비서구 세계의 힘은 강해질 것이다.
  탈냉전 세계에서 대량 살상 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이슬람권과 
유교권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어쩌면 파키스탄과 북한은 소수의 핵무기를 가졌거나 아니면 적어도 단기간 
안에 핵무기를 조럽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할 것이며, 핵무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거나 
입수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라 크는 상당 수준의 화학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생물 무기와 핵무기를 
입수하고자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란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포괄적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시정 거리를 
확대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988년 라프산자니 이란 대통령은 '이란은 화학 무기, 박테리아 무기, 
방사능 무기를 공격적으로도 방어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무결하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다시 3년 뒤 이란의 부통령은 이슬람 회담에서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가 지속되는 한 우리 이슬람 
교도는 핵 확산을 저지하려는 유엔의 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합심하여 원자 폭탄을 개발해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l992년과 1993년에 미국의 고위 정보 관계자는 이란이 핵무기를 입수하고자 심혈을 쏟고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l995년 크리스토퍼 미 국무 장관은 '현재 이란은 핵무기 개발에 총력을 쏟고 있다.' 고 못 박았다.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가진 여타 이슬람 국가들로는 리비아,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거론된다. 마즈루이의 
화려한 표현대로 버섯구름 위에 걸린 초승달(이슬람을 상징:옮긴이)은 서구 외의 다른 지역에도 위협을 가할 수 
있다. 이슬람은 결국 남아시아의 힌두교 세력과 중동의 시온주의, 유대주의 세력을 대상으로 핵무기를 통한 
러시안 룰렛 게임을 벌일지도 모른다.
  군사 부문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유교-이슬람 결속에서 중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게 재래식 무기와 비재래식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연구용임을 표방하지만 상당수의 
서방 전문가들이 플루토늄 생산 능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알제리 사막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를 받는 
원자로 건설, 리비아에 대한 화학 무기 원료 판매,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CSS-2 중거리 미사일 제공, 이란, 
리비아, 시리아, 북한에 대한 핵 기술 및 핵 물질 공여, 이라크에 대한 막대한 규모의 재래식 무기 판매의 주역은 
모두 중국이다. 1990년대 초반 증국에 뒤이어 북한이 이란을 거쳐 시리아에 스커드 미사일을 제공하였으며 다시 
그것을 발사할수 있는 이동 포대를 제공하였다.
  유교-이슬람 군사적 유대의 핵심 고리는 한 축에 중국과 북한이 있고 다른 한 축에 파키스탄과 이란이 있다. 
1980년부터 l991년까지 중국의 무기를 주로 도입한 나라는 이란과 파키스탄이었고 그 뒤를 이라크가 따랐다. 
1970년대 초반부터 중국과 파키스탄은 대단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1989년 양국은 향후 
l0년간 무기 구입, 공동 연구와 개발, 공동 생산, 기술 이전은 물론 상호 합의에 의한 제3국 수출 분야에서 
군사적 협력을 도모한다는 양해 각서에 서명하였다. 파키스탄의 무기 구입에 중국이 보증을 하는 내용이 추가로 
들어간 협정이 1993년 체결되었다. 그 결과 중국은 사실상 거의 모든 군사 관련 수출품을 파키스탄군의 모든 
부분에 양도함으로써 파키스탄에게 가장 신뢰할 만하고 가장 광범위하게 군사 하드웨어를 제공하는 나라가 
되었다. 중국은 또한 파키스탄의 제트기, 탱크, 대포, 미사일 생산 시설의 건설을 도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중국이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결정적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다. 증국은 파키스탄에 농축 우라늄을 
제공하고 탄두 설계에 조언을 제공하였으며, 증국의 핵실험 지역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다시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고 300킬로미터의 시정 거리를 갖는 M11 탄도 미사일을 파키스탄에 
공급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약속을 파기하였다. 그 대가로 중국은 파키스탄으로부터 공중 급유 기술과 스팅어 
미사일을 확보하였다.
  1990년까지 중국과 이란의 무기 교역 또한 강화되었다. 19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중 중국은 이란 
무기의 22퍼센트를 제공하였으며 l989년에는 단일 국가로서는 이란에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중국은 또한 핵무기를 확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이란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최초의 중국-이란 공동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두 나라는 1990년 1월 과학 기술 협력과 군사 기술 이전 분야에서 10년 기한의 양해 
각서에 서명하였다. 1992년 9월 라프산자니 대통령은 이란의 핵 전문가들을 대동하고 파키스탄을 방문한 뒤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핵 협력 조약을 체결하였다. 1993년 2월 중국은 이란에 300메가와트급의 원자로를 건설하는 데 
동의하였다. 이들 조약에 따라 중국은 핵 관련 기술과 정보를 이란에 이전하고 이란 과학자와 기술자를 
훈련시켰으며 이란측에 우라늄 농축 장비를 제공하였다. l995년 미국의 계속되는 압력 때문에 중국은 2기의 
300메가와트급 원자로 판매를 미국의 표현에 따르면 '취소' 하였고 증국의 설명에 따르면 '유예'하였다. 중국은 
미사일과 미사일 관련 기술을 이란에 제공한 주요국이었다. 그 중에는 1980년대 말 북한을 거쳐 제공한 실크윔 
미사일과 1994~95년에 제공한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에 이 르는 미사일 유도 시스템과 컴퓨터 기기가 포함된다. 
증국은 또 증국 지대지 미사일의 이란 현지 생산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지원에 동참하여 북한도 스커드 미사일을 
이란에 선적하였으며 이란의 미사일 생산 시설 건설을 도왔고 1995년에는 사정 거리가 600마일인 노동 1호 
미사일을 이란에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삼각 공조의 세 번째 축으로서 이란과 파키스탄도 핵 부문에서 광범위한 협조를 전개하였다. 파키스탄은 
이란의 과학자들을 훈련시켰으며, 1992년 l1월 파키스탄, 이란, 중국은 핵 개발을 공동 추진하는 데 합의하였다. 
파키스탄과 이란의 대량 살상 무기 개발 계획에 대한 중국의 광범위한 지원은 이들 국가간에 대단히 긴밀한 
공조와 협력이 펼쳐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서구의 이익에 잠재적 위협이 되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은 서구 
안보 레이더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가령 1990년 미국인의 59퍼센트가 핵무기 확산 저지를 가장 중요한 
외교적 목표로 지적하였다. 1994년 미국 일반 국민의 82퍼센트, 외교 전문가의 90퍼센트가 가장 시급한 해결을 
요하는 과제로 이 문제를 꼽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I993년 9월 핵 확산 저지에 중점을 두겠다고 선언하였으며, 
1994년 가을에는 핵무기, 생물 무기, 화학 무기의 확산과 그러한 무기를 실어 나르는 수단의 확산으로 야기되는 
미국의 국가 안보, 외교 정책, 경제에 미치는 유례 없는 엄청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였다. 1991년 CIA는 l00명의 상근 직원을 거느린 비확산 센터를 창설하였으며, l995년 12월에는 애스핀 
국방 장관이 새로운 확산 저지 방위안을 발표하고 핵 안보 및 확산 저지 담당 차관직을 신설하였다.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은 첨단 핵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수 단을 거듭 개발하면서 고전적인 무기 
경쟁을 벌였다. 그것은 증강 대 증강의 겨룸이었다. 탈냉전 시대의 지배적인 군사력 경쟁은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서구를 적대시하는 세력은 대량 살상 무기를 손에 넣으려 하고 서구는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그것은 증강 대 증강이 아니라 증강 대 억제의 싸움이다. 서구의 핵 군사력은 규모나 파괴력 면에서, 
허세를 부린다면 모를까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증강 대 증강의 구도로 펼쳐지는 무기 개발 경쟁은 결국 
양측의 자원, 의지, 기술력에 따라 좌우 된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하다. 반면 증강 대 억제의 구도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는 예측 가능하다. 서구의 억제 노력이 다른 국가들의 무기 증강 속도를 늦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중지시키지는 못한다. 비서구 국가들의 경제 발전, 무기, 기술, 정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는 경제적 
유흑, 자신의 지역 헤게모니를 수호하려는 핵심국과 지역 강대국의 정치적 욕구 등은 서구의 억제 노력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하다.
  서구는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을 저지하는 것이 국제 질서와 안정에 기여하고 모든 국가의 이익을 낳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은 이것을 서구의 헤게모니 고수 전략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을 놓고 미국과 지역 강국이 보이는 불안의 차이에도 반영된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지역이 
한반도이다. 1993년과 1994년에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위기 의식을 가졌다. 1993년 l1월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핵 폭탄 개발을 좌시하지 않겠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하여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상원, 하원, 부시 행정부에서 활약한 관리들은 북한의 핵 시설물에 대한 선제 공격의 필요성을 
검토하였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우려는 상당 부분 세계적인 핵 확산 추세에 대한 불안 심리에 그 뿌리가 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활동을 제약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고 만일 북한이 핵 
기술이나 핵무기를 수출할 경우 남아시아와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는 크게 약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한국은 핵무기를 지역적 이해의 구도에서 파악하였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북한의 핵무기를 한민족의 
핵무기로 이해하였다. 핵 폭탄을 같은 동포의 머리 위에 떨어뜨릴 리는 만무하므로 일본과 그 밖의 잠재 위협 
세력으로부터 한민족의 주권을 수호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북한의 핵 무기를 받아들였다. 한국의 관리들과 
군관계자들은 통일 한국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공공연하게 피력하였다. 한국의 이해는 잘 
반영되었다. 핵무기 개발에 뒤따르는 희생과 국제적 오명은 북한이 짊어져야 하는 반면 한국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승계받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와 한국의 발달한 산업이 결합하면 통일 한반도는 
동아시아 무대에서 실력 국가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다질 수 있을 것이다. l994년에는 한반도에서 커다란 위기를 
감지하는 워싱턴과 이렇다 할 위기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서울 사이의 현격한 인식 차이는 양국 수도의 공포 
격차를 낳았다. 1994년 5월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한 저널리스트가 지적한 것처럼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싼 대치 상태에서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은 한반도에서 멀어질수록 위기감이 높아진다는 점이었다. 
비슷한 인식의 격차는 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안보 이해와 그 지역 강대국들의 안보 이해 사이에서도 발생하였다. 
이 지역에서 미국은 핵 확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데 비해 정작 이 지역 사람들은 그리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두 나라의 핵무기를 동결, 축소하거나 아예 폐기하도록 하자는 미국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상대국이 가하는 핵 위협을 무난히 수용하는 편이다.
  대량 살상력을 가진 '균형추' 무기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서방의 노력은 제한된 성공밖에 거두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클린턴 대통령의 공언이 
있은지 한 달 뒤 미 정보부는 북한이 한두 개의 핵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 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그 후 
미국의 정책은 북한이 핵무기를 증강하지 못하도록 북한에 당근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철회시키거나 중단시키는 데 실패하였으며 이란의 핵 개발에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l995년 4월에 열린 핵확산 금지 조약 회의에서 핵심적으로 부각된 사안은 이 조약을 25년 동안 한시적으로 
연장할 것이냐 아니면 무기한 연장할 것이냐였다. 미국은 무기한 연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국가들은 5대 핵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대폭 감축하는 조치가 수반되지 않는 한 무기한 연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맞섰다. 거기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조약에 서명하고 핵 안전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무기한 연장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미국은 압력, 회유, 협박을 유효 적절하게 구사학는 전략으로 무기한 연장안을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통과 시켰다. 이집트와 멕시코만 하더라도 무기한 연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입장을 무직정 고수 할 수만은 없었다. 조약은 무기한 
연장되었지만 최종 토의에서 7개 이슬람 국가(시리아, 요르단, 이란, 이라크, 리비아, 이집트, 말레이시아)와 
아프리카 1개국(나이지리아)은 반대 견해를 공표하였다.
  1993년 미국의 정책이 강하게 반영된 서구의 일차적 목표는 핵 확산 금지에서 핵 확산 대응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핵의 부분적 확산은 불가피하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앞으로 미국의 정책은 핵 확산 
대응에서 핵 확산 조절로, 그리고 만약 미국 정부가 냉전 시대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핵 확산을 
통하여 미국과 서구의 이익을 도모 하는 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버뀔 가능성이 높다. 1995년 현재 미국과 
서구는 억제 정책을 고수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핵 을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은 
다문명 세계에서는 느리지만 필연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 분산의 중심적 현상이다.
  인권과 민주주의
  1970. 80년대에 독재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한 나라는 30개국이 넘는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정치적 변화의 배후에 깔려 있는 주된 요인은 의심할 나위 없이 경제 발전이다. 그러나 
스페인, 포르투갈, 라틴아메리카 각국, 필리핀, 한국, 동유럽의 민주화에는 미국, 서유럽 국가들, 국제 기구의 
정책과 노선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민주화는 크리스트교와 서구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남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새롭게 출현한 민주주의 
정부가 가장 큰 안정을 보이고 있으며 정도는 덜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도 조기에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 동아시아에서는 카톨릭 신자가 많고 미국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필리핀이 1980년대에 
민주주의로 복귀하였고 한국과 대만의 민주화에는 크리스트교 지도자들이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옛 소련의 발트 공화국들도 안정된 민주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교권 국가들의 민주화 
수준과 안정도는 나라마다 상이하며 미래의 전망도 불투명하다. 이슬람 공화국들의 민주화 전망은 희박 하다. 
l990년대까지 쿠바를 제외하고 서구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거나 크리스트교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들이 대부분 
민주화로 돌아섰다.
  이러한 민주화 추세와 소련의 붕괴는 서구, 특히 미국에게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으며 
머지않아 서구적 인권 개념과 서구적 민주주의 정치 형태가 세계를 장악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민주주의의 전파를 고무시키는 것이 자연히 서구인의 으뜸가는 정책 목표로 자리 잡았다. '업압 너머에는 
민주주의가 있다.' 탈냉전 세계를 맞아 부시 대통령은 우리의 새로운 임무를 민주주의의 고취와 공고화로 
규정하였다.' 고 말한 1990년 4월 베이커 미 국무 장관의 발언에 부시 행정부의 입장이 요약되어 있다. 1992년 
선거 유세 기간 중에 클린턴은 민주주의의 고취가 클린턴 행정부의 최우선 정책 목표임을 거듭 천명하였다. 
민주화는 그의 선거 유세 연설에서 나온 거의 유일한 외교 정책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되자 클린턴은 국가적으로 
민주주의를 고취시키는 부처의 예산을 3분 의 2나 증액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의 국가 안보 보좌관은 클린턴 외교 
정책의 핵심 과제를 '민주주의의 확대'로 규정하였다. 국방 장관도 민주주의의 지원을 4대 주요 목표의 하나로 
설정하면서 국방성 내에 그런 정책을 전담하는 고위직을 신설하려고 시도하였다. 미국보다 강도는 약하고 덜 
직접적이긴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후원은 유럽 각국의 대외 정책에서 우선적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서구 
주도의 국제 경제 기구는 개발 도상국에게 주는 차관과 원조에서 이러한 기준을 내세웠다.
  l995년 현재 유럽과 미국의 그러한 노력은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거의 모든 비서구 문명들은 서구의 
이러한 압력에 반감을 드러냈다. 여기에는 힌두교, 정교, 아프리카, 심지어는 일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포함된다. 서구의 민주화 정책에 대한 가장 큰 저항은 이슬람권과 아시아에서 나왔다. 이 저항은 이슬람 부활과 
아시아의 자기 주장으로 구체화된 폭넓은 문화적 자각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이 아시아에서 실패한 것은 일차적으로 아시아 지역의 점증하는 경제력과 자긍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서구에 대한 의존과 종속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1940년대까지 세계 경제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유엔을 지배하며 만국 인권 선언을 기초한 서구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싱가포르의 한 관리는 "아시아에서 인권을 신장하려는 노력은 탈냉전 세계의 변화된 세력 
구도도 감안해야 한다....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고 지적하였다.
  그의 지적은 옳다. 미국과 북한 사이의 핵 문제를 둘러싼 합의는 '타협적 굴복' 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강국들에게 인권을 들이밀었던 미국의 정책은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귀착되었다. 인권 
개선의 조짐이 보이지 않을 경우 중국에 무역 최혜국 대우를 철회하겠다는 위협을 가한 후 클린턴 행정부는 
자국 국무 장관이 베이징에서 난생 처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 보아야 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손상된 
체면을 되살리는 의례적 몸짓조차 하지 못하고 종전까지의 정책을 되집어 무역 최혜국 대우와 인권 문제를 
분리시킴으로써 중국의 강수에 기민하게 대응 하였다. 그러자 중국은 미국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서 클린턴 
행정부가 반대하는 행동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미국은 한 미국 시민에게 체벌을 가하는 문제에서 
싱가포르와 벌인 대립에서도 비슷하게 물러서야 했고 동티모르 지역의 폭력 진압에 대해서도 인도네시아 정부에 
강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서구의 인권 압력에 저항하는 아시아 각국의 능력은 여러 가지 요인에 힘입어 강화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은 이 급속하게 신장하는 지역에서 투자와 교역을 어떻게 해서든 늘려야 할 입장이므로 자국 정부에게 
기업의 경제 활동을 저해하는 정책을 펴지 말도록 강한 압력을 넣었다. 뿐 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의 
인권 압력을 주권 침해로 간주하고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공조를 취하였다. 중국에 투자한 대만, 일본, 흥콩의 
기업인들은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무역 최혜국 대우를 계속 부여받을 수 있는가에 막대한 경제적 이해가 걸려 
있다.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미야자와 일본 총리는 우리는 '추상적 인권 개념'이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ASEAN 국가들은 미얀마에 압력을 넣는데 동의하지 
않았으며 1994년에는 미얀마 군사 정권이 ASEAN 회담에 참석하는 것을 환영하였다. 반면 유럽 연합은 그 
대변인의 표현대로 유럽 연합의 정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미얀마에 대한 ASEAN의 입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밖에도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는 점증하는 경제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을 비난하거나 자신들이 거부감을 갖는 행동에 관여하는 국가나 기업에 대하여 역제재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은 성장하는 경제력 덕분에 인권과 민주주의와 관련한 서구의 압력에 점차 면역력을 
갖게 되었다. 1994년 닉슨은 '오늘날 중국의 경제력 앞에서 인권에 대한 미국의 강의는 경솔해 보인다. 10년 뒤 
증국은 그런 강의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20년 뒤에는 코웃음을 칠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그 시점에 
가면 아마 중국의 경제 발전은 서구의 강의를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경제적 발전이 서방 정부들과의 관계에서 
아시아 정부들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아시아 정부들과의 관계에서 아시아 시민사회들의 
입지를 강화시킬 것이다. 만약 아시아에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점점 강력해지는 아시아의 
부르주아와 중산층이 민주주의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핵확산 금지 조약의 무기한 연장안을 관철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유엔 안건으로 
상정하려는 서구의 노력은 번번이 좌절을 겪었다. 이라크 제재와 같은 몇 가지 예외적 사안을 제외하면 인권 
결의안은 유엔 표결에서 거의 예외 없이 부결되었다. 일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만 동참하였을 뿐 나머지 
국가들은 인권 제국주의의 색채가 농후한 결의안을 지지하는 대열에 동참하기를 거부하였다. 일례로 l990년 
스웨덴이 20개 서방 국가들을 대표하여 미얀마의 군사 정권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였지만 
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지역 국가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인권 유린을 이유로 내건 이란 제재 결의안 역시 
부결되었다. 중국은 1990년대 초반 내리 5년간 아시아 각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중국의 인권 유린에 대한 우려가 
표명된 서방 주도의 결의안을 좌초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94년 파키스탄이 유엔 인권 위원회에서 캐슈미르 
지방에서 발생한 인도의 인권 유린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상정하였다. 인도에 우호적인 나라들이 이 결의안에 
반대하였음은 물론이지만 과거 비슷한 결의안의 표적이 되었던 증국과 이란도 난색을 표하면서 우방국 
파키스탄으로 하여금 결의안 상정을 철회하도록 설득하였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인도가 캐슈미르에서 자행한 
잔학한 행위를 비난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유엔 인권위원회는 직무 태만으로 그 행위를 재가한 꼴이 되어 버렸다. 
다른 국가들도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터키, 인도네시아, 콜롬비아, 알제리 모두 지탄을 
받지 않았다. 유엔 인권 위원회는 창설한 사람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살륙과 고문을 일삼는 정부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고 비판하였다.
  서구와 다른 문명들 사이의 인권을 보는 견해 차이와 자신의 목표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서구의 한계는 1993년 
6월 빈에서 열린 유엔 세계 인권 회의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한쪽 진영에는 유럽과 북미 국가들이, 반대편 
진영에는 50개국에 이르는 비서구 국가들이 있었다. 후자에서도 가장 적극적이었던 15개 나라의 면면을 보면 
라틴아메리카 1개국(쿠바), 1개 불교국(미얀마), 정치 이념, 경제 제도, 발전 수준에서 다양한 편차를 가진 4개 
유교국(싱가포르, 베트남, 북한, 증국) 9개 이슬람 국가들(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예멘, 수단, 리비아)이었다. 이 아시아-이슬람 그룹을 주도한 나라는 증국, 이란, 시리아였다. 이 두 그룹 사이에 
주로 서구를 지지하는 편이었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사안에 따라 서구의 입장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반기를 
들 때가 더 많은 아프리카, 정교 국가들 이 포진하였다.
  문명의 선을 따라 국가들을 대팁으로 이끈 사안 중에는. 인권과 관련한 보편주의 대 문화 상대주의, 정치적. 
시민적 권리와 개발권을 포함한 경제적. 사회적 권리 중에서 어느 것을 상대적으로 우선시할 것인가,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압력의 연계, 유엔 인권 감독관의 신설, 같은 기간에 빈에서 회의를 갖고 있던 비정부 인권 
단체들을 정부간 회의에 어느 수준으로 참석시킬 것인가 외에도, 달라이 라마가 유엔 본회의에서 연설하도록 
허용할 것인가, 보스니아 내의 인권 유린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비난을 가할 것인가 하는 좀더 구체적인 문제들도 
망라되어 있었다.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중요한 견해 차이는 서구 국가들과 아시아-이슬람 블록 사이에서 불거졌다. 빈 인권 
회의가 열리기 두 달 전 아시아 국가 들은 방콕에서 만나 인권은 국가적, 지역적 특수성과 다양한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의 맥락 안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인권에 대한 감시는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고 인권 
상황의 개선이라는 전제 조건 아래 경제 지원을 하는 것은 개발권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입장 차이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5월 초 제네바에서 빈 회의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예비 
회담에서 작성된 문건의 거의 대부분은 한두 개국 이상의 반대로 괄호로 묶여 있었다.
  서구 국가들은 빈 회의에 대한 준비가 덜 되었고 수적으로도 열세를 면치 못하였으므로 본회의에서 
상대측보다 많은 양보를 하였다. 그 결과 여성의 인권 신장에 대한 강력한 촉구를 제외하면 합의된 내용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한 인권 운동가의 지적대로 그 문건은 '결함과 모순'을 안고 있었으며 아시아-이슬람 
연합의 승리와 서구의 패배를 의미하였다. 빈 선언은 언론, 출판, 집회, 종교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요구를 담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많은 점에서 1948년 유엔이 채택한 만국 인권 선언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 세력의 약화를 반영한다. "1945년의 국제 인권 체제는 사라졌다. 미국의 헤게모니는 약화되었다. 
1992년의 통합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일개 반도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이제 서구 만의 것이 아니라 아랍, 
아시아, 아프리카의 것이기도 하다. 만국 인권 선언과 국제 규약은 이제 2차 대전 직후와는 달리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명 무실한 것이 되어 버렸다.' 고 미국의 한 인권 운동가는 지적하였다. 아시아의 한 서구 비판가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1948년 만국 인권 선언이 채택된 이후 처음으로 유대교-크리스트교와 자연법 전통에 
완전히 치우치지 않은 나라들이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 유제 없는 상황은 인권의 새로운 국제 판도를 규정할 
것이다. 또한 분쟁의 빈도를 증폭시킬 것이다.
  또 다른 관측통에 따르면 "빈의 최대 승리자는, 설득을 통해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을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면, 누가 보아도 중국이었다. 베이징은 자신의 덩치를 슬쩍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회담 내내 우위"를 
유지하였다. 빈에서는 전략에서도 지고 표결에서도 졌지만, 서구는 몇 달 뒤 중국을 상대로 적지 않은 숭리를 
거두었다. 중국 정부는 2000년 하계 올림픽 베이징 유치를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중국 국민도 올림픽 유치 
열기 에 휩싸여 여론의 기대 수준도 올라갈 대로 올라가 있었다. 중국 정부는 다른 나라 정부를 상대로 자국 
올림픽 위원회에 압력을 넣어 달라고 활발한 득표 작전을 펼쳤다. 대만과 홍콩도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반면 
미국 의회, 유럽 의회, 인권 단체들은 베이징의 올림픽 유치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표결은 
비밀 투표를 따르지만 투표는 명백히 문명의 선을 따라 이루어졌다. 1차 투표에서 베이징은 알려진 바로는 
아프리카의 폭넓은 지지를 등에 업고 시드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이스탄불이 탈락한 뒤 2차 투표에서 
유교-이슬람 연합이 중국에 몰표를 던졌다. 그러나 베를린과 맨체스터가 탈락한 뒤 이들의 표가 시드니로 쏠리는 
바람에 시드니는 4차 투표에서 아슬아슬하게 중국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다. 중국은 미국의 음모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다. '미국과 영 국은 증국을 평가 절하하는 데 성공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인권' 
이었지만, 진정한 이유는 서구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고 리 콴유는 주장하였다. 
의심할 나위 없이 전 세계인의 대다수는 인권보다는 스포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지만, 서구가 빈을 비롯한 
각종 국제 회의에서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번번이 패배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올림픽에서 드러난 서구의 
제한된 영향력은 서구의 힘이 그만큼 축소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서구의 힘이 줄어들었다는 요인 외에도,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역설 또한 탈냉전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신장시키려는 서구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냉전 시대의 서구와 미국은 '우호적 독재자'라는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것은 철저한 반공 노선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냉전의 유익한 동반자가 될수 있는 군사 
정부, 독재자와 협력하는 데서 오는 딜레마였다. 이들 독재 정부가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하였을 경우 그러한 
협조는 불안과 때로는 당혹을 낳았다. 그러나 그들과의 협력은 정도가 덜한 악으로서 합리화할 수 있었다. 이들 
정부는 대체로 공산주의 체제처럼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하지는 않았으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입김에 덜 
반발하고 더 높은 호응도를 보이리라는 기대를 걸 수 있었다. 더 잔인하고 적대적인 독재자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는 덜 잔인하고 우호적인 상대와 손을 맞잡아야 한다는 발상이었다. 탈냉전 세계에서는 우호적 독재 
국가와 적대적 민주 국가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훨씬 어려운 상황에 직면 한다. 민주주의의 절차를 통해 
집권한 정부는 친서방적이고 서방의 노선에 협조적이리라는 서구의 안이한 가정이 비서구 지역에서 반드시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선거를 통해 외세를 배격하는 민족주의 세력과 원리주의 세력이 집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리주의 세력이 명백한 승리를 거둔 1992년의 알제리 선거에서 군부가 개입하여 선거를 
무효화하였을때 서구는 안심하였다. 터키의 복지당과 인도의 힌두교 정당이 1995년과 1996년의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쟁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에는 실패하였을 때 서구는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혁명이라는 
분위기를 감안해야 하지만, 이란은 어떤 면에서는 이슬람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를 포함한 대다수 아랍 국가에서 민주적 선거가 치러질 경우 비민주적이었던 과거 정부에 
비해 서구의 이익에 덜 동조하는 정권이 들어서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중국에서 투표를 거쳐 집권하는 
정부는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띨 것이다. 비 서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적 절차가 서구에 적대적인 
정권을 탄생시 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서구의 지도자들이 깨달으면서, 선거에 영향을 끼치려 노력하면서도 
민주주의를 신장시키는 데 대한 열의를 점차 잃어 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민
  인구 통계학이 숙명처럼 작용한다면, 인구 이동은 역사의 원동력이 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상이한 인구 
증가율, 경제적 조건, 정부 정책이 그리스인, 유대인, 독일인, 노르웨이인, 터키인, 중국인 등의 대규모 이동을 
낳았다. 이러한 이동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극심한 폭력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의 유럽인들은 인구 침략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1821년에서 1924년 사이에 5500만 명의 
유럽인이 해외로 이주하였는데 그 증 5400만 명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서구인들은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고 때에 
따라서는 말살시켰으며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을 개척하고 거기에 정착하였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구의 
부상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요소를 단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인구의 수출이다.
  20세기 말에 와서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이민이 더욱 늘어났다. l990년에 합법적인 국제 이민의 수는 1억 명에 
달하였으며, 망명자가 1900만 명, 불법 이민자가 최소한 10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새로운 이민의 
물결은 탈식민화, 새로운 국가의 성립, 사람들의 이주를 장려하거나 강제적으로 추진하는 국가 시책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근대화와 기술 발전의 산물이기도 하다. 교통 수단의 발전은 이민을 더욱 쉽고 빠르게 그리고 
저렴한 비용으로 할 수 있게 하였으며, 통신 기술의 향상은 경제적 기회를 추구하려는 욕망을 자극하고 이민자와 
본국에 있는 가족간의 결속을 강화시켰다. 19세기에 서구의 경제적 발전이 이민을 자극한 것처럼 20세기에 
들어와 비서구 사회의 경제 발전도 이민을 자극하고 있다 인구 이동은 자기 운동적 과정이다. '인구 이동의 
유일한 법칙이 있다면, 일단 인구 이동이 시작되면 그것은 자체적으로 새로운 이동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민자는 이민을 떠나는 방법에 관한 정보, 이주를 용이하게 하는 재정적 도움, 일자리와 집을 구하는데 필요한 
조언을 제공함으로써 고국에 있는 친구와 친척의 이민을 돕는다' 고 와이너(Myron Weiner)는 주장한다. 그 결과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세계적 이민 위기가 나타난다.
  서구인은 일관성 있게 또 압도적으로 핵 확산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원해 왔다. 반면에 이민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애매 모호하였고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중요한 세력 변화와 함께 그 견해가 바뀌었다. 
1970년대까지 유럽 국가들은 대체로 이민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특히 독일과 스위스는 노동력 
부족 현상을 타개하고자 이민을 장려 하였다. 19S5년 미국은 l920년대에 수립된 유럽 지향의 이민 수용 정책을 
획기적으로 수정하고 관련 법규를 조정하여 l970년대와 1980년대에 비유럽 지역에서 대대적인 이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l980년대 말부터 높은 실업률, 이민자 수의 폭증, 비유럽계의 대대적 증가 
등으로 유럽인의 태도와 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몇 년 뒤 비슷한 우려 때문에 미국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이민 정책의 변화가 나타났다.
  20세기 후반의 이민과 망명은 주로 비서구 지역 내부에서의 이동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서구 
사회로 유입되는 이민자의 수는 절대량에서 l9세기 말 해외로 나간 서구인의 수에 육박한다. 1990년 현재 
미국에는 이민 1세대가 2000만 명에 이르며 유럽에는 1550만 명, 호주와 캐나다에는 800만 명의 이민 l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이민자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퍼센트에서 8퍼센트에 이른다. 
1994년 현재 전체 미국 인구의 8.7퍼센트가 이민자인데 이 수치는 l970년의 2배이며, 캘리포니아 인구의 
25퍼센트, 뉴욕 인구의 l6퍼센트가 이민자다. 1980년대에 미국은 모두 830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였으며 
1990년대의 전반기 4년 동안 450만 명의 이민자가 미국에 정착하였다.
  새로운 이민은 압도적 다수가 비서구 사회에서 왔다. 1990년 현재 독일에 거주하는 터키인의 수는 167만 5천 
명에 이르며 그 뒤를 이어 유고슬라비아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이 대규모 외국인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이민자의 주요 출신국이 모로코, 미국(대부분 고향으로 돌아온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추정됨), 
튀니지, 필리핀 순서로 분포되어 있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이슬람 교도의 수는 400만 명에 
이르며 서유럽 전체에는 1300만 명의 이슬람 교도가 살고 있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으로 유입되는 
이민자의 3분의 2가 유럽과 캐나다 출신이었다. 1980년대에 와서는 수적으로 훨씬 늘어난 이민자의 35퍼센트가 
아시아 출신, 45퍼센트가 라틴아메리카 출신, l5퍼센트가 유럽과 캐나다 출신이었다. 미국의 자연 인구 증가율은 
낮은 수준이며 유럽의 경우는 제로에 가깝다. 이민자들의 출산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서유럽 지역의 인구 
증가율은 아주 높아질 전망이다. 따라서 이제는 군대나 탱크가 아니라,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신을 경배하고 
다른 문화에 속해 있으며, 자신들의 일자리를 앗아가고 자신들의 땅을 차지하고 복지 제도를 잠식하고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위협하는 두려운 이민자들이 자신들을 침략하고 있다는 불안이 서구인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인구 증가의 상대적 열세에서 기인하는 이러한 공포는 호프먼(Stanley Hoffman)의 지적대로 본격적인 문화적 
충돌과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접맥되어 있다.
  1990년대 초반 유럽 이민자의 3분의 2가 이슬람 교도였다. 이민에 대한 유럽인의 우려는 무엇보다도 이슬람 
이민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위기는 인구 서유럽 신생아의 10퍼센트를 이민자들이 차지하며 브뤼셀의 경우는 
신생아의 50퍼센트가 아랍계다.- 와 문화의 양면에서 나타난다. 독일에 거주하는 터키인이건 프랑스에 거주하는 
알제리인이건 이슬람 공동체는 현지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조짐을 보여 주지 않아 
유럽인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다. 이슬람 공동체가 유럽의 국경선을 잠식하면서 말하자면 유럽 공동체에서 
열세번째 나라로 부상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전 유럽에 팽배해 있다.' 고 1919년 도므나슈(Jean Marie 
Dome-nach n)는 지적하였다. 이민자에 대하여 미국의 한 언론인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유럽인의 적대감은 묘하게도 선별적으로 나타난다. 동유럽의 침공을 우려하는 프랑스인은 거의 없다. 
폴란드인은 어차피 유럽인이며 카톨릭 신자이다. 또한 비아랍계 아프리카 이민자들도 두려움이나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적대감은 대개 이슬람 교도에게 쏠린다. '이미그레(immigre)'라는 단어는 현재 프랑스에서 
제2종교가 된 이슬람과 사실상 동의어로 쓰이는데, 이것은 프랑스 역사에 깊이 뿌리 박힌 문화적 인종적 편견을 
드러낸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프랑스인은 인종주의자라기보다는 문화주의자이다. 그들은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아프리카 흑인을 헌법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슬람 교도 여학생이 두건을 두르고 등교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l990년 현재 프랑스에 아랍인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프랑스 국민은 76퍼센트, 흑인이 많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46퍼센트, 아시아인이 많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40퍼센트, 유대인이 많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22퍼센트였다. 1994년 독일 국민의 47퍼센트가 아랍인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응답하였고, 
39퍼센트는 폴란드인과, 36퍼센트는 터키인과, 22퍼센트는 유대인과 이웃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답하였다. 
서유럽에서는 유대인을 겨냥한 반유대주의가 아랍인을 겨냥한 반유대주의로 바뀌었다.
  이민에 대한 여론의 반대와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은 이민자 사회나 개인에 대한 폭력 행위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1990년대 초반 독일에서 크게 사회 문제가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극우주의, 민족주의, 
반이민정책을 표방하는 정당들에 대한 지지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지지도는 아직은 
미미하다. 독일의 공화당은 1989년의 유럽 선거에서 7퍼센트를 상회하는 표를 얻었으나 1990년의 국내 
선거에서는 고작 2.1퍼센트의 지지율만 얻었을 뿐이다. 프랑스의 경우, 198l년 에는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던 
극우 국민전선에 대한 지지표가 1988년에는 9.6퍼센트로 뛰어올랐고. 그 후 지방 선거와 의회 선거에서 
12퍼센트와 15퍼센트 사이에서 지지율이 오르내리고 있다. 1995년 대통령 후보로 나선 민족주의 성향의 두 
후보가 얻은 지지율은 도합 19.9퍼센트였으며, 국민전선은 툴롱과 니스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시장을 
당선시켰다. 이탈리아에서는 MSI/국민동맹에 대한 지지율이 1980년대의 5퍼센트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10퍼센트에서 15퍼센트 사이로 껑충 뛰어올랐다. 벨기에에서는 플랑드르의원연합/국민전선이 l994년의 총선에서 
9퍼센트의 지지도를 얻었으며 특히 앤트워프에서는 28퍼센트의 지지를 얻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1986년 
총선에서 10퍼센트 미만에 머물렀던 자유당의 지지율이 1990년 총선에서 15퍼센트로, 다시 1994년에는 
23퍼센트로 뛰어올랐다.
  이슬람 교도 이민에 반대하는 유럽 정당들은 대체로 이슬람 국가의 이슬람 정당들과 유사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이들은 모두 부패한 기존 체제와 기존 정당들을 비난하고 특히 실업 같은 경제적 불만에 편승하며 
인종적 종교적 구호를 내걸고 자국에 대한 외세의 영향력을 거세게 비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 두 
진영의 극단론자들은 테러와 폭력에 개입하기도 한다.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과 유럽의 극우 정당은 모두 
총선보다는 지방 선거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 국가와 유럽 각국의 기존 정부는 이러한 사태 
전개에 유사한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이슬람 국가 정부는 과거보다 이슬람 색채가 짙게 
깔린 노선, 상징, 정책을 추진하였다. 유럽의 주류 정당들도 극우 반이민 정당의 구호와 대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 민주주의가 효과적으로 가동되고 이슬람 정당이나 민족주의 정당과 겨루는 둘 이상의 정당이 
존재하는 경우, 이 들 우익 정당의 지지율은 20퍼센트를 넘지 못하였다. 알제리, 오스트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탈리아에서도 확인되었듯이, 다른 효과적인 대안 정당이 존재하지 않을 때만 이들은 20퍼센트의 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경쟁적으로 반이민 정서에 대응하였다. 프랑스에서 시라크(Jacques 
Chirac)는 1990년 이민을 완전히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파스쿠아(Charles Pasqua) 내무 장관은 1993년 제로 
이민을 내걸었다.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크레송(Edith Cresson), 데스탱(Valery Giscard d'Estaing) 같은 
주요 정치인들도 반이민 정책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민은 1995년 의회 선거의 증요한 쟁점이었으며 
보수당의 승리에 분명히 기여하였다. 1990년대 초반 프랑스 정부의 정책은 외국인 자녀의 시민권 획득, 외국인 
가족의 이민, 외국인의 망명 신청 요건, 알제리인의 프랑스 입국 비자 취득을 한층 까다롭게 만드는 쪽으로 
바뀌었다. 불법 이민자는 강제로 추방되었으며, 이민을 전담하는 경찰력과 정부 기관도 증강되었다.
  독일에서도 콜 총리를 비롯한 여러 정치 지도자들이 이민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가장 중요한 조치로서, 
독일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탄압 을 받는 사람들' 의 망명 자격을 보증하는 독일 헌법 16조를 수정하고 망명 
신청자들에 대한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였다. 1992년 43만 8천 명이 독일 망명을 신청하였지만 1994년에는 불과 
l2만 7천 명이 망명을 신청하였다. 1980년 영국은 망명자 수를 매년 약 5 만 명으로 대폭 축소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므로 이 지역에서는 이민에 대한 반감과 적대감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1992년과 
1994년 사이 영국은 망명 허용자 수를 2만 명에서 l만 명으로 줄였다. 유럽 연합 내에서 이동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영국 정부는 비유럽계 이민이 유럽 대륙으로부터 몰려들 가능성을 무엇보다도 우려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1990년대 증반의 시점에서 서유럽 국가들은 비유럽계의 이민을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더라도 그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정책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민 문제가 뒤늦게 부각되었으며 유럽처럼 강한 정서적 반감은 유발하지 않았다. 미국은 스스로를 
이민자들의 국가로 이해하는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민자들을 성공적으로 동화시킨 역사적 
경험이 있다 게다가 l980년대와 l990년대에 미국의 실업률은 유럽에 비하여 현저하게 낮았다. 이민에 대한 
미국인의 입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은 실직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미국으로 유입되는 이민자들의 
출신국 분포가 유럽보다 다양하므로, 단일 외국인 집단에 의하여 압도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지역에 따라서는 
현실성 있는 불안임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두 최대 이민자 집단과 평균 
미국인의 문화적 거리 또한 유럽보다 가깝다. 멕시코인은 카톨릭 신자로서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필리핀인 역시 
카톨릭 신자로서 영어를 능숙 하게 구사한다.
  이러한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와 라틴계 이민의 수를 크게 증가시킨 기폭제의 역할을 한 법안이 
1965년에 통과된지 사반 세기가 흐른 후 미국의 일반 여론이 크게 바뀌었다. 1965년에는 국민의 33퍼센트가 이민 
축소를 원하였다. 그러던 것이 1977년에는 42퍼센트, 1986년에는 49퍼센트, 1990년과 1993년에는 61퍼센트가 이민 
제한을 원하였다. l990년대에 이루어진 일련의 여론 조사들에서 국민의 60퍼센트 이상이 이민 규제를 원하는 
일관된 흐름이 확인되었다. 경제 불안과 악화되는 경제 상황이 이민의 여론 추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꾸준히 반대 여론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문화, 범죄, 생활 방식 등이 
더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한 분석가가 1994년에 지적한 것처럼 상당수의, 아니 대다수의 미국인은 
아직도 자기 나라를, 영국의 법 전통을 계승하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영어를 써야 하고 서구의 고전적 
전범에 따라 각종 기관과 건물을 지었고 유대교-크리스트교를 신봉하고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에서 발전의 
원동력을 찾은 유럽인이 개척한 나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듯 한 여론 조사에서 미국 국민의 
55퍼센트가 이민이 미국 문화에 위협을 가한다는 응답을 하였다. 유럽인이 이슬람 국가나 아랍인에서 이민 
위기를 본다면 미국인은 아시아인과 라틴아메리카인, 특히 멕시코인에게서 이민 위기를 감지한다. 미국이 
지나치게 많은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를 묻는 1990년의 여론 조사에서 압도적 다수가 멕시코를 꼽았고 그 
다음이 쿠바, 동양(광의의), 남미와 라틴아메리카(광의의) 일본, 베트남, 중국, 한국이었다.
  1990년대 초반의 점증하는 이민 반대 여론은 유럽과 비슷한 정치계의 대응을 낳았다. 미국의 정치 제도를 
감안할 때 반이민 노선을 표방하는 극 우 정당이 대세를 잡기는 어렵지만 반이민 정책을 요구하는 선동주의 
정치가와 이익 집단의 수가 늘었고 이들의 활동 범위도 확대되었으며 목소리도 높아졌다. 미국인의 원성은 주로 
350만 명에서 400만 명에 이르는 불법 이민자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정치권도 즉각적으로 여기에 호응하였다. 
유럽처럼 미국에서도 가장 강력한 대응은 이민자들에 대한 부담을 고스란히 떠맡는 주 단위, 지방 단위에서 
나왔다. 1994년 플로리다주는 다른 여섯개 주의 동참을 이끌어 내면서 불법 이민자들 때문에 추가로 발생하는 
교육, 복지, 치안, 기타 경비를 매년 8억 8천 4백만 달러씩 연방 정부가 부담해야 한다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절대 숫자로 보거나 상대적 비율로 보거나 이민자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 주의 윌슨 주지사는 불법 이민자의 
자녀에 대한 교육 기회를 박탈하고, 불법 이민자의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으며, 불법 
이민자를 위한 주 정부의 응급 치료 예산을 폐지하는 법안을 제출하여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l994년 l1월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윌슨 주지사의 제안 187호를 압도적으로 승인하여 불법 외국인들과 그들의 자녀에 대한 
보건, 교육, 복지 혜택을 없앴다.
  또한 1994년 클린턴 행정부는 당초의 입장과는 달리 이민을 엄격히 규제하고 정치 망명자의 자격 요건을 
강화하고 이민 귀화국을 확대하고 국경 순찰대를 강화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선에 물리적 장벽을 세우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1990년 의회가 출범시킨 이민 개혁 위원회는 1995년 합법적 이민자의 수를 매년 80만 
명에서 55만 명으로 줄이고 자녀와 배우자에게 우선권을 주되 현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의 다른 친척에게는 
우선권을 주지 않는 안을 권고함으로써 아시아계와 히스패닉계의 분노를 샀다. 이 위원회의 수많은 권고안을 
구체화한 다수의 법안과 이민 축소를 겨냥한 각종 시책들을 1995~96년도 의회에서 면밀하게 검토하였다. 
1990년대 증반에 이르러 이민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의 하나가 되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부캐넌(Patrick Buchnan)은 이민 규제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미국은 비서구인의 자국 
유입을 대폭 줄인다는 점에서 유럽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이 이민의 유입을 근절시킬 수 있을까? 1970년대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킨 라스파유(Jean 
Caude Chesnais)의 소설로부터 1990년대에 나 온 셰스네(Jean -Ciaude Chesnais)의 학문적 분석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인구 분포와 관련한 비관적 시나리오를 일관되게 경험해 왔다. 그것을 l991년에 를루슈(Pierre Lellouch) 
는 이떻게 요약한 바 있다. '역사, 근접성, 빈곤으로 프랑스와 유럽은 필시 남쪽의 실패한 국가들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과거의 유럽은 백인과 유대교-크리스트교 신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미래의 유럽은 그떻지 않다. 그러나 미래는 변경 불가능한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미래도 영속적이지 않다. 문제는 유럽이 이슬람화할 것이냐 아니냐 또는 미국 이 히스패닉화할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과 유럽이 상이한 문명들에서 유래한 두 개의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대규모 공동체를 
포함하는 단절국이 될 것이냐의 여부이다. 이것은 다시 이민자의 규오와 그들이 유럽과 미국을 지배하는 서구 
문화에 어느 정도까지 동화되느냐에 달려 있다.
  유럽 사회는 대체로 이민자들이 자기네 문화에 홉수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슬람 교도 이민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동화될 것인지도 
지금으로서는 불투명하다. 따라서 적지 않은 수의 이민이 지속적으로 유입될 경우 유럽 국가들은 크리스트교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로 분열될 가능성이 있다. 유럽의 정부들과 유럽인들이 이민 축소에 따르는 비용을 
기꺼이 감당할 자세가 되어 있을 경우 이런 사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용에는 이민 저지를 위한 시책에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재정 비용, 기존의 이민자 공동체를 더욱 소외시키는 데 따르는 사회적 희생, 노동력 
부족과 인구 증가율 저하가 낳는 장기적 경제 희생 가능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슬람 교도의 인구 잠식 문제는, 이미 일부 국가가 그런 단계에 도달하였지만 북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의 인구 증가율이 절정에 달한 뒤 감소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 심각성이 차츰 약화될 것이다. 인구 
압력이 이민을 억제한다면, 이슬람 교도 이민자 수는 2025년까지는 크게 떨어질지도 모른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사정이 다르다 만약 서부 아프리카와 중부 아프리카에서 경제 발전이 이루어져 사회적 이동성을 
촉진한다면, 유럽이 느끼는 '이슬람화' 의 위협은 '아프리카화' 의 위협으로 바뀔 것이다. 이러한 위협이 얼마나 
현실화할 것인가는 AIDS와 그 밖의 질병으로 아프리카 인구가 얼마나 줄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프리카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이민을 얼마나 흡수할 수 있을 것인지에 좌우될 것이다. 이슬람 교도가 유럽에 직접적인 문제를 
야기한다면 미국의 고민은 멕시코인이다. 현재의 추세와 정책이 계속될 경우, (표 8.2)에서 볼 수 있듯이 21세기 
전반기에 가서는 미국의 인구 분포가 극적으로 변화하여 백인이 50퍼센트 가까이를 차지하고 히스패닉계가 
25퍼센트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처럼 이민 정책이 바뀌고 효과적인 이민 억제책이 마련 될 경우 
이러한 예측은 빗나갈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히스패닉 인구가 과거의 이민 집단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 
사회에 얼마나 잘 동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2세대, 3세대 히스패닉 집단은 그런 동화에서 많은 
이득을 볼 수 있고 또 동화를 향한 강한 압력을 받는다. 그렇지만 멕시코 이민은 다른 이민 집단들과 증요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유럽이나 아시아의 이민자들은 바다를 건너왔다. 반면 멕시코 이민자들은 걸어서 
국경선을 넘거나 강을 건너서 왔다. 게다가 교통 수단과 통신 수단 덕분에 본국과 잦은 접촉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본국의 동포들과 긴밀한 유대감을 공유할 수 있다. 둘째, 멕시코 이민은 미국의 남서부에 집중되어, 
유카탄에서 콜로라도 강까지 연결되는 광범위한 멕시코인 사회를 형성한다.(지도8.1}) 셋째, 동화에 대한 
저항감이 다른 이민 집단들보다도 멕시코 이민 집단이 유독 강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부분적 증거들이 있으며 
1994년 캘리포니아에서 나온 제안 187호에 대한 반대 시위에서 입증되었듯이 멕시코 이민자들은 자신들을 
미국인이 아니라 멕시코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넷째, 멕시코 이민자들이 정착하는 지역은 l9세기 중반 
미국이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합병한 곳이다. 멕시코의 경제적 발전은 틀림없이 멕시코 국민들 사이에서 실지 
탈환 의식을 확산시킬 것이다. 21세기에 미국이 군사적 팽창을 통해 얻은 결과가 21세기 초에 들어가 멕시코 
인구의 팽창으로 위협받거나 역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명간의 세력 판도 변화 때문에 서구는 핵무기 확산, 인권, 이민 등의 문제에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서구는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경제 
적 자산을 당근과 채찍으로 유효 적절히 사용하고, 다른 국가들이 서구 국가들을 이간질시키지 못하도록 결속을 
다지고 정책 공조를 공고히하며 비서구 국가들간의 차이점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활용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을 서구가 얼마나 추구할 수 있는가는, 한편으로는 서구와 서구에 도전하는 문명들 사이의 갈등의 성격이나 
강도에 좌우되고, 또 한편으로는 서구가 중간적 문명들과 얼마나 유대감을 가지고 그들과 얼마나 공동의 이해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올 것인가에 좌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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