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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5/문명의 충돌

10. 과도기 전쟁에서 단층선 전쟁으로

by FraisGout 2020. 7. 26.

  과도기 전쟁: 아프가니스탄과 걸프전
  모로코의 저명한 학자 엘만즈라빈(Mahdi Elmandjra)는 걸프전이 한창 진행 되고 있을 때에 이 전쟁을 '최초의 
문명 전쟁'이라고 불렀다. 실은 두 번째 문명 전쟁이었다. 첫번째 문명 전쟁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계속되었던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이었다. 두 전쟁은 모두 한 나라의 다른 한 나라에 대한 침공으로 
시작되었으나 문명 전쟁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고 문명 전쟁으로서 새롭게 정의되었다. 사실상 이 전쟁들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간의 단층선 전쟁과 민족 갈등이 지배하는 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 전쟁이었다.
  아프간 전쟁은 소련이 꼭두각시 정권을 지원하고자 아프간 정세에 개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이 여기에 
강력히 대응하여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간 반군을 조직하고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면서 이젓은 냉전 구도 속의 
전쟁이 되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소련의 패배는 공산 정권에 대한 무장 투쟁을 지원한 레이건 독트린의 
실효성이 입증되고 베트남전에서 맛보았던 굴욕을 소련에게 안기는 쾌거였다. 소련의 패배는 소련 사회와 소련의 
정치 체제에 심각한 여파를 미쳤으며 소련 제국의 해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인과 서구인에게 
아프간 전쟁은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승리, 냉전 시대의 워털루 승전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싸웠던 사람들에게는 아프간 전쟁의 성격은 조금 달랐다. 한 서구 학자의 지적대로 그 전쟁은 
민족주의나 사회주의의 원칙에 바탕을 두지 않고 외세를 이겨 낸 최초의 사례다. 아프간 전쟁은 지하드로 
집약되는 이슬람의 대의에 뿌리를 두었고 그것은 이슬람의 자부심과 실력을 엄청나게 키웠다. 아프간 전쟁이 
이슬람 세계에 미친 영향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거둔 승리가 동양에 미친 충격파에 비교할 만하다. 
서구가 자유 세계의 승리로 보는 것을 이슬람 교도는 이슬람의 승리로 간주 한다.
  미국의 자금 지원과 무기 제공은 소련을 패퇴시키는 데 긴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집단적 노력도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아주 다양한 범위의 정부들과 운동 단체들이 소련을 무찌르고 숭리를 쟁취한다는 목적을 
위하여 앞다투어 지원에 나섰다. 이슬람 세력의 막강한 자금줄은 사우디아라비아였다. 1984년과 1986년 사이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아프간 반군에게 5억 2천5백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1989년에는 총 7억 l천5백만 달러 규모의 
지원액 중에서 6l퍼센트에 해당하는 4억 3천 6백만 달러를 선뜻 제공하였고 그 나머지는 미국이 댔다. 1993년 
사우디아라비아는 1억 9천 3백만 달러를 아프간측에 지원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 총액은 
30억 달러에서 33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지원액과 최소한 맞먹거나 그 수준을 웃돌았다. 전쟁 중 주로 아랍의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 모두 2만 5천 명의 의용군이 전쟁에 참가하였다. 대부분 요르단에 집결한 이들 의용군의 
훈련은 파키스탄 육해공 정보국이 주관하였다. 파키 스탄은 또 반군에게 꼭 필요한 후방 기지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군수 물자 보급 같은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지원금을 총괄 관리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의도적으로 자금의 75퍼센트를 좀더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에 제공하였다. 그 결과 전체 
지원금의 50퍼센트가 헤크마티야르(Gulbuddin Hekmatyar)가 이끄는 가장 과격한 수니파 원리주의 세력에게 
집중되었다. 비록 싸움 상대는 소련이었지만 전쟁에 참전한 아랍 의용군들의 압도적 다수는 반서구적 태도를 
보였으며 서구 인도주의 단체의 도움도 이슬람을 전복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소련이 
패배한 것은 미국의 기술, 사우디아라비아의 돈, 이슬람 교도의 수적 우세와 열정이라는 세 가지 요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모든 비이슬람 세력에 맞서 이슬람 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열의를 가진 이슬람 기구들의 불안한 동맹 
관계를 남겼다. 전쟁은 또한 전투 경험 이 많은 노련한 전사들, 막사, 훈련장, 병참 시설, 이슬람 세계를 두루 
연결하는 정교한 인적 조직적 연계, 소재 파악이 안 된 300기에서 500기에 이르는 스팅어 미사일을 포함한 
막대한 양의 군사 장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성취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 새로운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유산으로 남겼다. l994년 한 미국 관리가 "아프간 의용군들이 지하드로서 받은 
신임장은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완전 무결하다. 그들은 세계의 두 초강대국 가운데 하나를 무찌르고 이제 
다른 초강대국과 한판 붙을 기세이다."고 언급하였다.
  아프간 전쟁이 문명 전쟁으로 비화한 것은 세계 전역의 이슬람 교도들 이 그 전쟁을 그렇게 이해하였고 
소련에 맞서 똘똘 뭉쳤기 때문이다. 걸프 전이 문명 전쟁으로 비화한 것은 서구가 이슬람권의 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였고 서구인은 그 개입을 압도적으로 지지한 반면 세계 전역의 이슬람 교도는 그런 개입을 자신들에 대한 
도발로 해석하고 서구 제국주의의 또 한 차례의 폭거에 맞서 똘똘 뭉쳤기 때문이다.
  아랍국들과 이슬람 국가들은 처음에는 전쟁에 대하여 분열된 입장을 보였다. 후세인이 신성한 국경선을 
침해하자 1990년 8월 아랍 연맹은 그의 행동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다수의 지지로 통과시켰다.(찬성 14개국, 반대 
2개국, 기권 5개국) 미국이 결성한 반이라크 동맹군에 이집트, 시리아는 상당수의 군을 파견하떴고 파키스탄, 
모로코, 방글라데시는 그보다 작은 규모의 병력을 보냈다. 터키는 이라크에서 자국 영토를 거쳐 지중해로 뻗은 
송유관을 폐쇄하였고 연합군에 자국 공군 기지를 이용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런 조치의 대가로 터키는 
유럽 연합 가입의 당위성을 강력히 주장할 수 있게 되었고 파키스탄과 모로코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긴밀한 
관계를 재확인하였다. 이집트는 외채를 탕감받았고 시리아는 레바논을 얻었다. 반면에 PL0, 하마스. FIS(이슬람 
구국 전선)뿐 아니라 이란, 요르단, 리비아, 모리타니, 예멘, 수단, 튀니지 등 그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았던 나라들이 이라크를 지지하면서 서구의 개입을 비난하였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여타 이슬람 국가들은 
중간적 입장을 취하거나 입장 표명을 유보하려고 애썼다.
  이슬람 정부들은 처음에는 의견 대립을 보였지만 아랍인과 이슬람 교도의 일반적 정서는 당초부터 압도적으로 
반서구 일변도였다. 한 미국 언론 인은 쿠웨이트 침공이 있은지 3주 뒤 예멘,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고 "아랍 세계는.... 미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들끓고 있으며 세계 최강국에 용감히도 
전장을 내민 아랍 지도자의 기백 앞에서 환회를 금치 못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모로코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슬람 교도들이 후세인의 뒤에서 똘똘 뭉쳐 그를 이슬람의 영응으로 
칭송하였다. 민주주의의 역설은 바로 이러한 분쟁의 커다란 역설이다. 다시 말해서 후세인에 대한 성원은 정치가 
좀더 개방되고 표현의 자유가 덜 제한받는 아랍 국가들에서 가장 열렬하고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모로코, 파키스탄, 요르단,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대규모 시위 군중이 서구와 서구의 하수인으로 간주되었던 
하산 왕, 부토, 수하르토 같은 정치 지도자를 비난하였다. 반이라크 동맹군에 대한 반발은 시리아에서조차 
불거졌다. 시리아에서는 각계 각층의 다양한 시민들이 걸프 만에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인도의 1억 
이슬람 교도 가운데 75퍼센트가 미국의 개입을 비난하였고 인도네시아의 1억 7천1백만 명에 이르는 이슬람 
교도는 절대 다수가 걸프 만에서 미국의 군사 행동을 비난하였다. 아랍 지식인들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 
후세인의 만행을 눈감아 주고 서구의 개입 을 비판하는 정교한 논리를 발전시켰다.
  아랍인과 그 밖의 이슬람 교도들은 후세인이 잔흑한 독재자라는 사실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기에 쿠웨이트 침공은 자민족 안에서 해결되어야 할 집안 문제이며, 국제 
정의라는 거창한 이론을 앞세워 개입하는 세력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득을 챙기거나 서구에 대한 아랍의 종속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랍 지식인들은 이라크 체제를 
경멸하고 이라크의 잔인성과 전제주의를 개탄하지만 한편으로 이라크는 아랍 세계의 거대한 적수인 서구에 
도전하는 중추 세력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랍 세계를 서구의 대립항으로 정의한다. 한 팔레스타인 
교수의 지적대로 후세인의 행위는 옳지 못하지만 서구의 군사적 개입에 도전한 이라크를 규탄할 수는 없다. 
서구와 여타 지역의 이슬람 교도들은 비이슬람 병력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여 이슬람의 성지를 모욕하는 
행위를 거세게 비난한다. 요컨대 아랍 세계의 지배적 여론은, 후세인의 침공은 나쁘고 서구의 개입은 더 
나쁘므로 서구에 맞서 싸운 후세인의 행위는 옳고 우리는 후세인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세인은 단층선 전쟁에 뛰어든 다른 주역들처럼 이제까지 세속적이었던 자신의 체제 앞에 가장 광범위한 
호소력을 얻을 수 있는 구호, 곧 이슬람을 내걸었다. 후세인의 선택은 어떤 면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가 
아랍 민족주의나 제3세계의 애매 오호한 반서구주의 대신 이슬람을 선택 한것은 이집트의 한 평론가가 분석한 
대로 폭넓은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정치 이념으로서 이슬람의 가치를 입증한 것이다. 관습이나 제도면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과 수단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이슬람 국가보다도 이슬람 율법에 엄격하고 전 세계의 
이슬람 집단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이 홀러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슬람 운동 단체도 이라크를 겨냥한 
서방 동맹을 지지하지 않았고 서구의 개입에 하나같이 반대하였다.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이 전쟁이 이슬람의 신성 불가침성이 위기에 처하는 문명간의 전쟁으로 금세 비화되었다.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아프가니스탄 수단 등지에서 온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들은 이것을 
'십자군과 시온주의자'의 동맹이 '이슬람과 이슬람 문명'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라고 규탄하였고 이라크 국민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공격 앞에서 이라크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1990년 가을 메카에 있는 이슬람 대학 학장 
알 하왈리(Safar al_Hawali)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널리 유포된 녹음 테이프에서 이 전쟁은 세계가 이라크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구가 이슬람과 싸우는 전쟁이라고 선언하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요르단의 후세인 왕도 
이것은 이라크만이 아니라 모든 아랍인과 모든 이슬람 교도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메르니시 (Fatilma Mernissi)는 말끝마다 미국을 위하여 신의 가호를 들먹이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에서 아랍인은 
이것이 '종교 전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다. 부시의 발언은 이슬람이 대두하기 전인 7세기에 음험한 
장삿속으로 아랍인을 공격한 서방 세력과 그 후의 십자군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이 전쟁이 서구인과 
시온주의자의 음모에서 나온 십자군 전쟁이라는 논리는 지하드를 정당화시켰고 더욱 광범위한 모병의 필요성을 
낳았다.
  걸프전을 서구와 이슬람의 대결로 정의한 이슬람 교도들의 이해가 이슬람 세계 내부의 반목을 약화시키거나 
유예시켰다. 이슬람 진영의 해묵은 대립은 이슬람과 서구의 긴박한 대립 앞에서 중요성을 잃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이슬람 정부와 운동 단체는 서구로부터 거리를 두는 쪽으로 일관되게 나아갔다. 예전의 아프간 전쟁과 
마찬가지로 걸프전은 이제까지 서로의 숨통을 조이던 이슬람 교도들을 화해시켰다. 아랍 세속주의자, 민족주의자, 
원리주의자가, 요르단 정부와 팔레스타인이,  PL0와 하마스가, 이란과 이라크가, 모든 야당과 정부가 앙금을 털어 
버렸다. 알 하왈리는 "이라크의 바트 당원들은 우리의 몇 시간 원수지만 로마는 지상 최후의 날까지 우리의 
원수다."고 말했다. 전쟁은 또한 이라크와 이란을 화해의 과정으로 이끌었다. 이란의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은 
서구의 간섭을 비난하고 서구에 대항하는 성전을 부르짖었다. 이란 정부는 자신의 과거 적수에게 가해진 
제재책에 거리를 두었으며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란과 이라크의 관계는 점차 호전되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갈등을 감소시킨다. 일례로 1991년 1월 파키스탄이 '반서구론의 열기에 휩싸인` 것으로 
보도되었는데 이러한 열기는 이 나라를 잠시나마 단합시켰다. "일찍이 파키스탄이 이렇게 통일된 적은 없었다. 
토착 신드인과 인도에서 온 이주민 사이에서 5년째 살상극이 벌어지고 있는 남부 신드 주에서 양측 주민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반미 시위에 나선다. 보수적 사고가 강하게 자리 잡은 북서부의 변경 지역에서는 금요 기도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이는 경우가 드문데 이런 곳에서도 심지어는 여인네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왔다."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당초 동맹군에 가담하였던 각국 정부들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서거나 분열된 
입장을 보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정책을 합리화하는 정교한 논리를 개발하였다.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시리아의 
알 아사드(Hafiz al-Assad)같은 지도자는 이것이 이 지역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서구 세력을 
궁극적으로 몰아내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였다고 주장하면서 어디까지나 시리아 병력은 방어적 목적과 성지 
수호에 이용될 것이라는 논리를 펐다. 터키와 과키스탄의 고위 군사 관계자들은 동맹군에 참여한 자국 정부의 
조치를 공공연히 비판하였다. 상당수의 병력을 파견한 이집트와 시리아 정부는 반서구 세력의 압력을 억누르거나 
묵살할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좀더 개방된 이슬람 국가들의 정부는 서구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점차 반서구적인 자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나타난 '이라크에 대한 폭발적 성원'은 
'걸프전의 가장 놀라운 현상 가운데 하나'였다. 튀니지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서구를 규탄하자 알리(Ben Ali) 
대통령은 재빨리 서구의 개입을 비난하였다. 모로코 정부는 당초 1500명의 병력을 동맹군에 참전시켰지만 반서구 
단체가 들고 일어서자 이라크를 지지하는 총파업을 허용하였다. 알제리에서는 40만 명의 친이라크 시위대가 당초 
서구 쪽에 기울었던 벤제디드 대통령에게 입장 전환을 요구하면서 서구를 비난하고 알제리는 형제국 이라크의 
편에 설 것임을 천명하였다. 1990년 8월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정부는 아랍 연맹에서 이라크 규탄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 해 가을 비등하는 국민 감정에 호응하여 그들은 미국의 개입을 비난하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서구의 군사적 노력은 비서구, 비이슬람 문명들로부터도 별다른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하였다. 1991년 1월 
일본 국민의 53퍼센트가 이 전쟁을 반대하였고 25퍼센트만이 지지하였다. 인도 국민은 후세인과 부시를 비난하는 
여론이 엇비슷하였다. (타임스 오브 인디아)지는 이 전쟁이 "강하고 오만한 유대-크리스트교 세계와 허약한 
이슬람교 세계 사이의 종교적 열정을 매개로 한 전면적 대결로 비화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걸프전은 이처럼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전쟁으로 시작되었다가 이라크와 서구의 전쟁이 되었고 다시 이슬람과 서구의 전쟁으로 
변모되더니 종국에 가서는 많은 비서구인들에게 동양과 서양의 전쟁, '백인의 전쟁, 해묵은 제국주의의 새로운 
분출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쿠웨이트 국민을 제외하고는 이 전쟁을 열렬히 지지하는 이슬람 국민은 없었으며 압도적 다수가 서구의 
개입에 반대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런던과 뉴욕에서는 승리의 행진이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하슈미(Sohail H. Hashmi)에 따르면 이 전쟁의 결과는 아랍인들에게 환호 작약해야 할 이유를 
전혀 제공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지배적 분위기는 실망, 환멸, 굴욕, 원한의 감정이었다. 다시 한번 서구가 승리한 
것이다. 아랍의 희망으로 떠오른 최근의 살라딘(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로 십자군과 싸워 예루살렘을 
탈취하였다' 옮긴이)이 이슬람 세계로 밀고 들어온 서구의 막강한 힘 앞에 다시금 무릎을 끓었다. '아랍인은 
이번 전쟁에서 최악의 경험을 하였다.'고 메르니시는 지적한다. "어마어마한 기술력을 가진 서구가 합심하여 우리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것은 치떨리는 두려움이었다."
  걸프전이 끝난 뒤 쿠웨이트를 제외한 아랍의 여론은 걸프 만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에 점차 비판적인 방향으로 
홀렀다. 쿠웨이트의 해방은 후세인의 응징이라는 논리의 정당성을 약화시켰고 걸프 만에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를 허물어뜨렸다. 그 결과 심지어는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도 이라크를 동정하는 여론이 차츰 
높아갔다. 동맹군에 참가한 아랍 정부들은 입장을 바꾸었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뿐 아니라 이집트와 시리아도 
1992년 이라크 남부를 비행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는 데 반대하였다. 아랍 정부들과 터키는 또 1993년 1월의 
이라크 공습에도 반대 하였다. 수니파 이슬람 교도가 시아파 이슬람 교도 및 쿠르드족을 공격하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서구의 공군력을 동원할 수 있다면, 세르비아 정교도들이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공격한 것에 대해서는 왜 
그 막강한 공군력으로 응징하지 않는가? 부시 전 대통령 암살을 모의한 데 대한 보복으로 1993년 6월 클린턴 
대통령이 바그다드 공습을 지시하였을 때 국제적 반응은 문명의 경계선을 따라 첨예하게 나뉘어졌다. 이스라엘과 
서유럽 국가들은 공습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러시아는 그것을 정당한 자기 방어로 받아들였다. 중국은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만의 토호국들은 침묵을 지켰다. 이집트를 비롯한 나머지 이슬람 
국가들은 서구의 이중 잣대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비난하였다. 특히 이란은 미국의 '신팽창주의와 자기 
중심주의'가 낳은 '극악 무도한 공격'으로 규정하였다. 다시금 제기된 물음이 있었다. 왜 미국과 국제 
사회(서구)는 이스라엘의 무도한 행위와 유엔 결의안 위반 행위에는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가?
  걸프전은 탈냉전 시대의 문명과 문명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자원 전쟁이었다. 결국은 세계 최대의 유전을 
서구의 군사력에 안보를 의탁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 토후국들이 관리하느냐 아니면 서구에 석유를 무기로 
활용할 능력이 있고 또 그럴 의사가 있는 독립적인 반서구 국가들이 관리하느냐를 둘러싼 대립이었다. 서구는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걸프 국가들의 안보가 서구에 달려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승리를 거두었고 평화시에도 이 지역에 군대를 주둔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전쟁 전에는 
이란, 이라크, 걸프 협력 회의, 미국이 걸프 만의 주도권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전쟁이 끝난 뒤 걸프 만은 
미국의 호수가 되었다.
  단층선 전쟁의 특성
  씨족, 부족, 인종 집단, 종교적 공동체, 민족 사이의 전쟁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정체성에 그 뿌리가 있기 패문이다. 이 분쟁들은 외부 집단들의 인도주의적 관심은 낳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비당사자들의 직접적 이해가 걸린 광범위한 이념적, 종교적 문제와는 결부되지 않아 어디까지나 개별 
차원에 머문다. 이런 분쟁은 근본적인 정체성의 문제를 건드리므로 심한 폭력과 유혈 사태를 낳곤 한다. 게다가 
지구전으로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휴전과 합의로 전쟁이 잠시 증단되었다가도 갈등이 도져 분쟁이 재연된다. 
이런 전쟁에서 한쪽이 군사적으로 일방적 승리를 거두었을 경우 대량 학살극이 벌어질 확률도 높다.
  단층선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국가나 무리 사이의 집단 분쟁이다. 단층선 전쟁은 폭력으로 비화한 
분쟁이다. 이 전쟁은 나라들 사이에서, 비 정부 집단들 사이에서, 혹은 나라와 비정부 집단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다. 나라 안의 단층선 분쟁은 지리적으로 명확히 구분된 지역에 다수의 인구가 거주하는 집단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층돌이다. 이 경우 정권을 장악 하지 못한 집단은 대체로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며 어느 정도의 요구 
조건이 관철되었을 때는 투쟁을 멈추기도 한다. 나라 안의 단층선 분쟁은 또 지리적으로 혼재되어 있는 집단들 
사이에서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인도의 힌두 교도와 이슬람 교도,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교도와 화교처럼 
지속적인 긴장 관계가 때때로 폭력으로 분출되든가 아니면 신생국이 들어서면서 국경선이 확정되고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려는 야만적 시도가 강행되어 전면전으로 치닫기도 한다.
  단층선 분쟁은 때로는 주민들을 장악히려는 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대개는 영토 분쟁의 양상을 띤다. 
당사자들 증에서 최소한 한 진영의 목표는 영토를 점령한 뒤 다른 진영 사람들을 내쫓거나 죽이거나 둘 다를 
감행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민족 청소를 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다른 사람들이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런 분쟁은 대량 학살, 테러, 강간, 고문 등 추악한 폭력을 동반한다. 갈등을 빚는 영토는 한 진영에게 
또는 양 진영 모두에게 자신들의 역사나 정체성과 관계가 있는, 고도의 상징성이 깃든 지역이다. 그 성스러운 
땅은 신성 불가침의 권리를 가진다고 그들은 믿는다. 요르단 강 서안, 캐슈미르, 나고르노-카라바흐, 드리나 계곡, 
코소보가 바로 그런 곳들이다.
  단층선 전쟁은 일반적으로 집단 전쟁의 특성들을 모두 공유하지는 않고 부분적으로만 공유한다. 단층선 전쟁은 
질질 끄는 전쟁이다. 나라 안에서 벌어질 경우 그 전쟁은 국가간의 전쟁보다 평균 지속 기간이 6배에 달한다. 
집단의 정체성과 힘을 둘러싼 근본적 갈등이기에 이것은 협상과 타협을 통해 해결하기가 어렵다. 타협이 
이루어지더라도 분쟁 양측이 모든 관련 집단의 동의를 구하기 어려워서 그 타협은 대체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단층선 분쟁은 대규모 폭력으로 확 타올랐다가 저강도의 교전이나 껄끄러운 적대 관계로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타오르는 지구전의 양상을 띤다. 집단적 정체성과 적개심의 불길은 대량 학살의 수단이 아니고서는 완전히 
진화시킬 방법이 없다.
  단층선 전쟁은 다른 집단 분쟁처럼 지구전의 양상을 띠므로 자연히 사망자와 난민의 규모도 엄청나다. 
어디까지나 추정치인만큼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지만 1990년 초반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단층선 전쟁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망자 수가 필리핀 5만 명, 스리랑카 5만 명에서 10만 명, 캐슈미르 2만 명, 수단 50만 
명에저 150만 명, 타지키스탄 10만 명, 크로아 티아 5만 명, 보스니아 5만 명에서 20만 명, 체첸 3만 명에서 5만 
명, 티페 트 10만 명, 동티모르 20만 명이다. 이 분쟁들이 낳은 피난민의 규모는 사망자 규모를 훨씬 상회한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상당수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유혈 분쟁 이 최근에 와서 불거진 데 지나지 
않는다. 폭력을 근절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말에 와서도 분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가령 l956년에 
시작된 수단 내전은 1972년까지 계속되다가 남부 수단에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가 1985년에 다시 재발하였다. 스리랑카의 타밀 반군은 1983년에 처음 봉기하였다. 1991년에 
내전 종식을 위한 평화 회담이 결렬되어 1994년 다시 분쟁이 재연되었다가 1995년 1월 어렵사리 휴전 합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넉 달 뒤 타밀 반군이 휴전 협정을 깨고 평화 회담을 거부하자 다시 극심한 폭력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다. l970년대 초반 활동을 개시한 필리핀의 모로 반군은 민다나오 일부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합의를 받아들인 뒤 1976년부터 환동이 뜸해졌으나 반군 세력이 평화 협상을 거부하면서 l993년부터 
차츰 폭력의 빈도가 잦아지고 그 강도도 심해지고 있다. 러시아와 체첸 지도부는 l995년 7월 그 전 해 12월부터 
시작된 무력 충돌을 종식시키기 위한 무장 해제에 합의하였다. 충돌은 한동안 뜸해지나 싶었지만 체첸 반군이 
러시아 지도자나 친러시아 인사를 개별적으로 공격하고 러시아가 여기에 보복을 가하면서 분쟁은 다시 
악화되었고 l996년 1월 체첸이 다게스탄으로 밀고 들어갔고 1996년 초 러시아는 대규모 공격을 퍼부었다.
  단층선 전쟁과 그 밖의 집단 전쟁들은 장기 지속성, 극심한 폭력성, 이념적 혼선이라는 공통점을 갖지만 
단층선 전쟁은 한두 가지의 남다른 특성을 갖는다.
  첫째, 집단 전쟁은 민족, 종교, 인종, 언어 집단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문명을 정의하는 주된 
특성이므로 단층선 전쟁은 거의 예외 없이 상이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일부 분석가들은 
종교라는 요인의 증요성을 평가 절하한다. 예컨대 그들은 피와 언어의 공유, 과거의 평화로운 공존,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과 이슬람 교도 사이의 광범위한 혼인 관계를 지적하면서 프로이트의 '사소한 차이에 대한 자기 
도취'란 표현으로 종교적 요인을 무시한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세속적 단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수천 년의 
인류 역사는 종교가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 차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일반적으로 상이한 신에 대한 믿음은 단층선 전쟁의 빈도, 강도, 폭력성을 높인다. 둘째, 다른 
집단 전쟁들은 개별화 성향이 강하며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반면에 단층선 전쟁은 더 큰 
문화적 전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집단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이다. 대부분의 집단 전쟁에서 A집단과 B집단이 
싸울 때 C, D, E집단은 A나 B가 C, D, E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침해하지 않는 한 전쟁에 개입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나 단층선 전챙와서는 A1집단과 B1집단이 싸움을 벌이고 이들은 전쟁을 확대시켜 문명적 친족 집단인  
A2, A3, A4집단, B2, B3, B4집단의 지지를 끌어내려 노력하며 이들 친족 집단은 전투를 벌이는 당사자들과 
일체감을 느낀다. 현대 세계에서는 교통망과 통신망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연결망의 구축이 용이해졌으며 따라서 
단층선 분쟁의 '국제화'가 가능해졌다. 이민은 제3문명으로의 탈출구를 열어 놓았다. 통신수단의 발전 덕분에 
교전 당사자들은 자기들의 운명을 친족 집단에게 즉각적으로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친족 집단들은 싸움을 벌이는 자기 편에게 정신적, 외교적, 금전적, 물질적 지원을 
보낼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안하기가 훨씬 더 힘들어졌다. 그러한 지원을 제공하는 국제적 연결망이 구축되었고 
지원은 다시 분쟁을 지속시켰다. 그린웨이(H.D.S. Greenway)가 말하는 '친족국 증후군(kin-country syndrome)'은 
20세기 말 단층선 전쟁의 핵심적 특징이다. 좀더 일반적 차원에서는, 상이한 문명에 속한 사람들끼리의 사소한 
충돌도 같은 문명 내부의 충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다. 1995년 2월 카라치의 한 이슬람교 
사원에서 수니파 무장 경비원들이 18명의 시아파 예배자들을 죽였을 때 카라치는 쑥밭이 되었고 파키스탄의 
정국이 들끓었다. 그보다 정확히 1년 앞서 헤브론의 한 성지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29명의 이슬람 교도들을 한 
유대인 정착민이 죽였을 때 중동 평화 회담은 중단되었고 온 세계가 들끓었다.
  발생률: 이슬람의 피묻은 경계선
  집단 분쟁과 단층선 전쟁이 역사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한 추계에 따르면 냉전 기간 동안 아랍과 이스라엘, 
인도와 파키스탄, 수단의 이슬람 교도와 크리스트 교도, 스리랑카의 불교도와 타밀 반군, 레바논의 시아파와 
마론파(주로 레바논에 살며 아랍어의 전례를 쓰는 귀일교회의 일파:옮긴이) 사이의 단층선 전쟁을 포함하여 모두 
32건의 민족 분쟁이 터졌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벌어진 모든 내전 중 절반 가까이는 정체성을 둘러싼 
분쟁이었는데 그 후 몇십 년 동안 그 비율이 5분의 2가까이로 늘었다. 민족 분쟁은 195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 무려 3배로 늘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힘을 가진 두 초강대국이 대립하는 현실에서 이 분쟁들은 몇몇 
두드러진 예외는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고 냉전의 프리즘을 통하여 이해되었다. 냉전의 
상처가 아물면서 집단 분쟁은 전보다 더욱 현저하게 더욱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민족 분쟁의 '폭증' 이라고 
부르기에 걸맞은 현상이 현실로 일어났다.
  이들 민족 분쟁과 단층선 전쟁은 세계 유수의 문명들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지는 않다.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스리랑카의 불교도와 힌두 교도 사이에 대대적인 문명선 전쟁이 벌어지긴 
하였지만, 비이슬람 지역에서 일어나는 분쟁은 상대적으로 정도가 약하다. 단층선 전쟁의 압도적 다수는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와 비이슬람 교도를 가르는 경계선을 따라 일어났다. 세계 
정치를 거시적 지구적 차원에서 고찰하면 으뜸 가는 문명 충돌의 주역은 서구와 나머지 세계이지만, 미시적 
국지적 차원에서 고찰하면 그 주역은 이슬람과 나머지 세계이다.
  이슬람 교도와 비이슬람 교도 사이에 강한 적대감이 있어 이들간에는 폭력적 분쟁이 자주 발생한다. 
보스니아에서 이슬람 교도들은 정교계의 세르비아인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고 카톨릭을 신봉하는 
크로아티 아인과도 유혈극을 벌였다. 코소보에서 알바니아 이슬람 교도들은 세르비아의 지배를 달가워하지 않고 
자기네만의 지하 정부를 별도로 유지하고 있어 두 집단 사이에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알바니아 
정부와 그리스 정부는 상대국에 거주하는 자민족 소수 집단의 권리를 놓고 대립을 벌이고 있다. 터키와 그리스는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에 있다. 키프로스에서 터키 이슬람 교도와 그리스 정교도는 등을 맞대고 별도의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코카시스에서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원수지간 이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귀속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북부 코카서스에서는 체첸, 잉구슈 등의 이슬람 민족이 
랴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200년 전부터 싸워 왔는데 1994년 체첸과 러시아의 해묵은 갈등이 다시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전쟁은 잉구슈 이슬람 교도와 오세티아 정교도 사이에도 터졌다. 볼가 강 유역에서 타타르 
이슬람 교도는 전부터 러시아와 싸우다가 1990년대 초반 제한적 주권을 인정받은 뒤 러시아와 불안한 동거 
관계에 들어갔다.
  19세기 내내 러시아는 무력으로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민족들을 하나둘 집어삼키면서 영토를 넓혔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는 전면전을 벌였고 전쟁이 러시아의 퇴각으로 끝난 뒤 
타지키스탄에서 현 정권을 지지하는 러시아군과 이슬람 반군 사이에서 비슷한 싸움이 재현되었다. 신장에서는 
위구르족을 비롯한 이슬람 민족들이 중국화에 맞서 투쟁하면서 민족적, 종교적 뿌리가 같은 옛 소련의 이슬람 
공화국들과 관계를 강화시키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세 차례 전쟁을 벌였다. 캐슈미르에 대한 인도의 통치는 
이슬람 교도들의 강한 반발을 낳고 있으며, 아삼 지방에서는 현지인들과 이슬람 교도 이주민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인도 전역에서 이슬람 교도와 힌두 교도는 무력 층돌을 일삼는데 두 종교 집단 내부에 부상하는 원리주의 
운동이 이러한 층돌을 부추기고 있다. 방글 라데시에서는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이슬람 교도의 차별 대우를 
불교도가 항의하는 반면, 미얀마에서는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불교도의 차별 대우를 이슬람 교도가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 교도들은 화교의 경제권 장악에 항의하는 폭동을 
주기적으로 터뜨린다. 태국 남부에서는 불교 정부에 맞서 이슬람 교도들이 간헐적으로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이슬람 반군이 카톨릭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카톨릭을 신봉하는 동티모르인들이 이슬람 정부의 억압에 맞서 싸우고 있다.
  중동에서는 유대인이 나라를 세운 이후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이제까지 네 번의 전쟁이 일어났고 팔레스타인 민족은 이스라엘의 통치에 '인티파다(반란)' 로 
맞서고 있다. 레바논에서는 마론파 크리스트 교도들이 시아파를 비롯한 이슬 람교도들을 상대로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역사적으로 이슬람계 민족들을 억압해 온 암하라 정교도들이 오로모 
이슬람 교도들의 반란에 직면해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교를 믿는 북부의 아랍계와 크리스트 정령 신앙을 
가진 남부의 흑인들 사이에 다양한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이슬람 교도와 크리스트 교도의 가장 치열한 싸움은 
수단에서 일어났다. 몇십 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 싸움에서 수십만 명이 목숨 을 잃었다. 나이지리아는 북부의 
이슬람 교도 세력과 남부의 크리스트교 부족들의 대립으로 그 동안 수차례의 쿠데타와 폭동 한 차례의 전면전을 
치러야 했다. 차드, 케냐, 탄자니아에서도 엇비슷한 싸움이 이슬람 교도와 크리스트 교도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모든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 세력과 다른 문명 세력- 카톨릭, 프로 테스탄트, 정교, 힌두교, 중국, 불교, 
유대교-의 관계는 대체로 적대적이었다. 대부분의 관계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한번은 폭력으로 치달았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 폭력의 빈도수가 잦아졌다. 이슬람권의 어디로 눈을 돌리건 이슬람 교도들은 이웃 집단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질문은 20세기 말에 불거진 이슬람 
집단과 비이슬람 집단의 분쟁 양상이 다른 문명에 속한 집단들 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슬람 교도는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 그들은 다른 문명의 
그 어떤 집단보다도 훨씬 자주 분쟁에 휘말렸다. 그 증거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l. 구어(Ted Robert Gurr)의 심층 분석에 따르면 1995 ~94년에 진행되었던 50건의 민족 분쟁 가운데 26건에 
이슬람 교도가 연루되어 있다.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 사이의 분쟁은 모두 20건이었는데 이 중 15건이 이슬람 
교도와 비이슬람 교도의 분쟁이었다. 요컨대 이슬람 문명이 연루된 분쟁이 모든 비이슬람교 문명간 분쟁의 3배에 
달하였다는 것이다. 이슬람 문명 내부의 분쟁 또한 아프리카의 부족 분쟁을 포함하여 그 어떤 문명의 내부 
분쟁보다도 많았다. 이슬람과는 대조적으로 서구는 2건의 문명간 분쟁과 2건의 문명 내 분쟁에 연루되었다. 
이슬람 교도가 연루된 분쟁은 회생자를 많이 내는 경향이 있다. 2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구어가 추정하는 여섯 
전쟁 가운데 셋(수단, 보스니아, 동티모르)이 이슬람 교도와 비 이슬람 교도의 분쟁이었고, 둘(소말리아, 
이라크-쿠르드)이 이슬람 교도간 분쟁이고 겨우 하나(앙골라)가 비이슬람 교도간 분쟁이었다.
  2. (뉴욕 타임스)지는 1993년 현재 약 59건의 민족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58개 지역을 지목하였다. 이 중 절반 
지역이 이슬람 교도가 다른 이슬람 교도나 비이슬람 교도와 충돌한 곳이었다. 59개 분쟁 중에서 31개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간의 싸움이었는데 이 문명간 분쟁 가운데 3분의 2가 이슬람 교도와 비이슬람 교도의 
분쟁으로 파악되어 구어의 분석치와 엇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3. 또 다른 분석에서 시바르드(Ruth Leger Sivard)는 1992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29건의 전쟁(매년 l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분쟁으로 정의)을 확인하였다. 모두 12건의 문명간 분쟁 중에서 9건이 이슬람 교도와 
비이슬람 교도 사이의 분쟁으로 나타나 이슬람 교도는 그 어떤 문명 집단보다도 전쟁을 많이 벌이는 것으로 
다시금 드러났다.
  세 가지 상이한 자료에서 얻은 결론은 동일하다. l990년대 초반 이슬람 교도들은 비이슬람 교도들보다 집단 
분쟁에 더 많이 연루되어 있으며 문명간 분쟁의 3분의 2에서 4분의 3이 이슬람 교도와 비이슬람 교도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슬람의 경계선은 피에 젖어 있으며 그 내부 역시 그렇다.
  이슬람 교도에게 폭력 분쟁으로 치닫는 성향이 높다는 것은 이슬람 국가들의 군사화 정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80년대에 이슬람 국가들의 군사력 비율(military force ratio, 인구 1천명당 군인의 수)과 군사 노력 지수 
(military effort index, 국부로 환산한 군사력 비율)는 다른 문명의 어느 국가보다도 크게 높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크리스트교 국가들의 군사력 비율과 군사 노력 지수는 다른 문명의 국가들보다 크게 낮았다. 이슬람 
국가들의 평균 군시력 비율과 평균 군사 노력 지수는 크리스트교 국가들의 약 2배었다. "이슬람과 전투성 
사이에는 명백한 연관성이 있다." 고 페인(James Payne)은 결론짓는다.
  이슬람 교도는 또한 국제적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 폭력에 의존하는 성향이 남달리 높아 1928년부터 
1979년까지 그들이 연루된 총 142건의 분쟁 중에서 76건을 폭력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그 중 25건은 폭력이 
분쟁을 처리하는 으뜸가는 수단이었으며 5l건은 이슬람 국가들이 다른 수단들과 병용하여 폭력을 사용하였다. 
이슬람 국가들은 폭력을 구사할 때도 아주 강도 높은 폭력을 동원하여, 폭력이 사용된 분쟁 가운데 전면전 
비율이 41퍼센트이고 38퍼센트는 대규모 충돌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슬람 국가들의 무력 의존도가 
53.5퍼센트에 이르는 반면 영국은 자신이 연루된 국제 분쟁 증에서 겨우 11.5퍼센트, 미국은 17.9퍼센트, 소련은 
28.5퍼센트를 무력으로 해결하였다. 주요 강대국 중에서 오직 중국만이 이슬람 국가를 능가하는 폭력 의존도를 
보였다. 중국은 위기의 76.9퍼센트를 폭력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이슬람 교도의 호전성과 폭력성은 이슬람 교도도 
비 이슬람 교도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20세기 후반의 엄연한 사실이다.
  원인: 역사, 인구, 정치
  20세기 말에 들어와 단층선 전쟁이 빈번하고 특히 그러한 분쟁에서 이슬람이 중심적 역할을 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이들 전쟁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난날에 발생한 상이한 문명 집단간의 간헐적인 단층선 
전쟁이 현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며 이것은 다시 양측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인도 대륙의 힌두 
교도와 이슬람 교도, 북부 코카 서스의 러시아인과 코카서스인, 트랜스코카서스의 아르메니아인과 터키인,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유대인, 발란 지역의 카톨릭 교도.이슬람 교도 정교도, 발칸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의 러시아인과 터키인, 스리랑카의 신할리즈인과 타밀인, 아프리카의 아랍인과 혹인 등 이들 관계 모두는 
오랜 세월 불신에 찬 공존과 적대적 폭력 사이를 오갔다.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할 만한 분쟁의 역사적 
유산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관계들에서 역사는 생생히 살아 숨쉬면서 공포를 자아낸다.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살륙의 역사는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왜 20 세기 말에 와서 폭력이 다시 
분출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이슬람 교도는 수십 년 동안 
유고 슬라비아에서 아주 평화로운 공존 관계를 누렸다. 인도에서 이슬람 교도와 힌두 교도도 그 동안 별다른 
마찰 없이 지냈다. 소련의 수많은 민족 집단과 종교 집단도 소련 정부의 강압이 야기한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순탄한 공존을 누렸다. 타밀인과 신할리즈인도 열대의 낙원으로 종종 묘사되는 스리랑카에서 조용히 
어울려 살았다. 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는 역사의 격랑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따라서 역사 
그 자체만으로는 평화의 붕괴를 설명하지 못한다. 20세기의 지난 몇십 년 동안 다른 요인들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인구 구성의 변화가 그런 요인의 하나다. 한 집단의 수적 팽창은 다른 집단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압력을 가하여 반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집단의 인구 팽창이 인구 증가율이 미미한 다른 
집단들에게 군사적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초반 레바논에서 30년 동안 유지되어 온 헌정 
질서가 무너진 것은 마론파 크리스트 교도에 비해 시아파 이슬람 교도의 수가 급격히 불어난 데서 주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풀러(Gary Fuller)의 지적에 따르면 스리랑카에서 1970년대 초 신할리즈 민족주의 세력의 
폭동과 1980년대 말 타밀 반군의 항거가 절정에 이른 시점은 이 두 집단에서 15세에서 24세까지의 '청년층' 이 
총인구의 20퍼센트를 넘어섰던 기간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스리랑카에 근무하는 한 미국 외교관에 따르면 
신할리즈 봉기를 주도한 층은 거의 24세 이하의 젊은이였고 타밀 호랑이(반군)들도 열한 살 먹온 소년, 소녀까지 
동원학는 등 이른바 아동군에 남달리 의존하였으며 이제 열여덟 살을 갓 지난 청소년들이 전장에서죽어갔다. 
(이코노미스트)지의 보도에 따르면 타밀 호랑이들은 미성년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인과 
남부 이슬람 교도 사이의 단층선 전쟁도 인구 증가율의 현격한 차이에서 촉발되었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 
연방의 여성 출산율은 l인당 1.5명인 데 비해 이슬람 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중앙아시아의 여성 출산율은 약 
4.4명에 달하였으며, 순수 인구 증가율(총출생를에서 총사망률을 뻔 수치)은 1980년대 말 중앙아시아 지역이 
러시아의 5배 내지 6배에 이르렀다. 1980년대의 쳐첸 인구는 26퍼센트 늘어 러시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가 되었다. 체첸의 높은 출생률은 수많은 이민과 전투원을 낳았다. 마찬가지로 이슬람 교도의 높은 
출산율과 캐슈미르 지역으로 유입된 파키스탄 이민 인구는 인도의 통치에 저항하는 새로운 움직임을 낳았다.
  옛 유고슬라바야 거역에서 문명간 전쟁으로 귀결된 복잡한 과정들에는 다양한 원인과 발단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이 분쟁을 낳은 가장 중요한 단일 요인은 코소보에서 발생한 인구 구성의 변화였다. 코소보는 세르비아 
공화국 내의 자치주로서 분리 독립권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유고슬라비아의 6개 공화국과 동등한 위치를 누리고 
있었다. 196l년 코소보의 인구는 알바니아 어슬람 교도가 67퍼센트, 세르비아 정교도가 24퍼센트였다. 
알바니아계의 출생률은 유럽 최고 수준이어서 코소보는 유고슬라바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면 알바니아계 인구 중에서 50퍼센트 가까이가 스무 살 미만이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등지고 경제적 기회를 찾아 베오그라드 등지로 떠났다. 그 결과 코소보의 인구 분포는 
1991년에는 이슬람 교도가 90퍼센트 세르비아계가 10퍼센트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르비아인은 
코소보를 자신들의 '성지' 혹은 '예루살렘'으로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 곳은 1389년 6윌 28일 오스만 제국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곳이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세르비아는 500년 가까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980년대 말 인구 구성에 급격한 변화가 오자 알바니아계는 코소보를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의 지위로 격상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세르비아계와 연방 정부는 코소보가 일단 분리 독립권을 획득하면 분리하여 알바니아와 
합병하는 길을 추구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그러한 요청을 거부하였다. 1981년 3월 공화국으로의 승격을 
요구하면서 알바니아계가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세르비아계에 따르면, 세르비아인에 대한 차별, 박해, 폭력이 
그 후 눈에 띄게 늘어났다. "l970년대 후반부터 코소보에서는 ..재산 손괴(택괴), 해고, 희롱, 강간, 싸움 살인 등 
폭력 사건이 빈발 하였다."고 한 크로아티아계 프로테스탄트는 전한다. 그 결과 세르비아인들은 자기네에게 
가해지는 위협이 대량 학살전에 버금 가는 수준이었으며 그런 사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코소보 지역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처한 곤경은 세르비아 전역에 파문을 낳았고 l986년 야당 잡지인 
(프락시스(Praxis)의 편집인을 포함한 세르비아의 지도적 지식인, 정치인, 종교인, 군인 200명이 코소보 지역의 
세르비아계 학살극을 종식시키고자 정부측에 단호한 대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대량 
학살극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과장된 감이 있지만, 알바니아계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한 외국인 관측자는 
"1980년 대에 세르비아계에게 가해진 폭력 행위, 세르비아인의 재산에 대한 파괴 행위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있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였고 
밀로세비치(Slobodan Milosevic)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87년 그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가 대거 운집한 
가운데 우리의 땅과 역사를 지키자는 연설을 하였다. 즉각 공산주의자, 비공산주의자, 심지어는 반공주의자를 
포함한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코소보에 거주하는 소수 세르비아계를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알바니아계를 탄압하여 2등 국민으로 강등시키려는 결의를 다졌다. 밀로세비치는 이내 민족 
지도자로 떠올랐다. 2년 뒤인 1989년 6월 28일 밀로세비치는 계속되는 이슬람 교도와의 전쟁을 상징하는 위대한 
전투 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백만 명에서 2 백만 명의 세르비아인을 거느리고 코소보로 돌아왔다.
  알바니아계의 인구 증가와 세력 확대에 직면한 세르비아인의 공포와 민족주의는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인구 
구성의 변화로 말미암아 한층 고조되었다. l961년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인구의 45퍼센트를, 
이슬람 교도가 26퍼센트를 차지하였다. 1991년에 와서는 이 비율이 거의 정반대로 역전되어 세르비아계가 
51퍼센트로 떨어진 반면 이슬람 교도는 44퍼센트로 껑층 뛰었다. 같은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계도 22퍼센트에서 
17퍼센트로 줄었다. 한 집단의 인구 팽창은 다른 집단에 의한 민족 청소로 이어졌다. "우리는 왜 아이들을 
죽이는가?" 한 세르비아 전투원은 1992년 이런 질문을 던진 뒤 바로 답변하였다. "언젠가는 그 아이들이 자랄 
것이고 그때 가서도 우리는 어차피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덜 잔인하게,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 당국은 자신들의 거주지가 어슬람 교도에 의해 '인구학적으로 점령'당하는 것을 막고자 나섰다고 
주장한다.
  2o세기 후반에 일어난 문명간 충돌의 상당수는 인구 균형의 변화와 청년층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문명간 충돌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충돌은 인구 요인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역사적 요인도 부분적 역할밖에는 못 한다. 크로아티아가 2차 대전 
당시 세르비아인을 학살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민족은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도, 
다른 지역에서도 정치는 분쟁의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1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일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의 붕괴는 새롭게 대두한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민족간, 문명간 분쟁을 자극 하였다. 
2차 대전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주의의 종식은 이와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공산 체제가 무너지자 역시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소련 국민으로, 유고슬라비아 국민으로 정의할 수 없었으므로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열망이 간절해졌다. 
사람들은 그러한 정체성을 민족과 종교라는 해묵은 대용물에서 발견하였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물론적 
명제를 금과 옥조로 받든 국가들의 억압적이지만 평화로웠던 질서는 다양한 신들을 떠받드는 민족들의 폭력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은 새로 등장한 정치 집단들이 민주주의의 절차를 채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한층 악화되었다.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분열되기 시작하였을 때 권력을 잡고 있던 엘리트들은 국민 투표를 시행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국민 투표를 시행하였더라면 정치 지도자들은 증앙 권력을 장악하고자 각축을 벌였을 
것이고 유권자들의 표를 끌어 모으고자 다민족적, 다문명적 호소력을 갖는 공약을 내세웠을 것이다. 그 결과 
의회 내의 연정과 비슷한 정치적 공존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에서 모두 먼저 공화국 
단위의 선거가 실시되어, 정치 지도자들은 중앙에 맞서는 선거 구호를 내세우고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공화국의 
독립을 요구하고픈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보스니아의 1990년 선거 에서도 유권자들은 정확히 민족의 
경계선을 따라 투표하였다. 다민족주의를 표방한 개혁당과 옛 공산당은 각각 10퍼센트 미만의 지지율을 얻었다. 
이슬람 교도의 민주 행동당(34퍼센트), 세르비아계의 민주당(30퍼센트), 크로아티아계의 민주 연합(18퍼센트)이 
얻은 표는 이슬람 교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의 인구비와 대체로 합치하였다.
  옛 소련과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거의 모든 공화국에서 최초로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하고 다른 민족 집단과 맞서 자신들의 민족성을 수호하기 위한 엄격한 대응책을 약속한 정치 지도자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선거 유세전은 민족주의 구호를 학산시켜 단층선 분쟁을 단층선 전쟁으로 중폭시킨다. 
데니치(Bogdan Denitch)의 표현대로 민족 주의가 민주화로 이행할 때 그 최초의 결과는 '논전' 아니면 전쟁이다.
  2o세기 막바지에 이르러 왜 유독 이슬람 교도가 다른 문명 집단들에 비해 집단간 폭력이 훨씬 많이 
연루되는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과거 크리스트 교도들은 같은 크리스트 교도뿐 아니라 다른 문명권 
사람들을 대량으로 죽였다. 인류 역사에 나타난 문명들의 폭력 성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조사가 불가능하다.
  지금 가능한 것은 이슬람 내부와 외부에서 이슬람 교도 집단의 폭력을 유발한다고 추정되는 원인들을 잡아낸 
다음, 만일 그런 원인이 존재한다면 역사 전체를 관류하는 집단 분쟁의 좀더 포괄적인 성향을 설명하는 원인과 
20세기 말에 나타난 성향을 설명하는 원인을 구분하는 작업이다. 개연성 높은 원인으로 우리는 여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셋은 이슬람 교도와 비이슬람 교도 사이의 폭력만을 설명하고, 셋은 이런 폭력과 이슬람 내부의 폭력을 
두루 설명한다. 또 셋은 현재 이슬람 교도의 폭력 성향만을 설명하고 나머자 셋은 그것과 만일 이슬람 교도의 
역사적 성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역사적 성향도 아울러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그런 역시적 성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재하는 역사적 성향을 설명하지 못하는 그 가공적 원인은 현재 구체적으로 드러난 이슬람 
교도의 집단 폭력 성향 또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럴 경우 현재의 이슬람 교도 폭력 성향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20세기 특유의 원인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슬람은 처음부터 검을 앞세운 종교이며 군사적 미덕을 찬양한다고 보는 주장이다. 이슬람은 '전투적인 
베두인 유목 부족들' 사이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러한 폭력적 기원은 이슬람의 토대에 각인되어 있다. 마호메트 
자신도 강인한 전사였으며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다. (예수와 석가모니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런 평가를 내리지 
않으리라.) 이 주장에 따르면 이슬람 교리는 비신자들과는 전쟁을 하라고 지시하며 초기에 이슬람교의 교세 
확장이 한풀 꺾이자 이슬람 교도 집단들은 교리에 어긋나게 자기네끼리 싸움을 했다. '피트나' 곧 내부 분쟁과 
지하드의 비율을 살펴 보면 전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코란을 비롯한 이슬람교의 수많은 
경전들에서 폭력 금지 규정을 찾아보기란 어렵고 이슬람의 교리에는 비폭력의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처음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북아프리카, 중동의 대부분 지역, 나중에는 중앙아시아, 인도 대륙, 
발칸 반도로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교도들은 아주 다양한 민족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그들을 
정복하고 개종시켰으며 그 유산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를 휩쓸면서 도시에 거주하던 
남슬라브족은 대개 이슬람교로 개종한 반면 농촌 주민들은 전통 종교를 지켰다. 그 결과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와 
세르비아 정교도의 구분이 생겨났다. 그런가 하면 흑해, 코카서스, 중앙아시아로 영토를 화대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은 다양한 이슬람 민족들과 여러 세기에 걸쳐 지속적인 갈등을 빚었다.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우위가 
최고조에 달하였던 때에 서구는 유대인의 중동 정착을 후원하였고 이것은 아랍-이스라엘 적대감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슬람 교도와 비이슬람 교도의 육지를 통한 영토 확장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공존하는 이슬람 교도와 비이슬람 교도 집단을 양산하였다. 반대로 서구는 바다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으므로 
비서구인들과 지리적으로 맞부 딪치지는 않았다. 서구인들은 유럽에서 비서구인들을 통치하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우는 예외지만 서구 정착민들이 토착민들의 씨를 말려 놓았다.
  이슬람 교도와 비이슬람 교도의 분쟁 원인으로서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은 한 정치가가 자기 조국과 관련해 
표현한 이슬람 교도의 화합 불능성이다. 그러나 화합 불능은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자국 내에 소수 이슬람 
교도들의 문제를 안고 있는 비이슬람 국가들처럼, 이슬람 국기들도 자국 내에 소수 비이슬람 교도들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슬람은 크리스트교를 능가하는 절대 신앙이다.
  이슬람은 종교와 정치를 통합하여 '다르 알 이슬람(이슬람 교도)' 과 '다르 알 하르브(이교도)'의 구분선을 
날카롭게 긋는다. 그래서 유교, 불교, 힌두교, 크리스트교, 정교를 믿는 사람들은 서로 적응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고 그런 대로 어울려 살아가는 반면 이슬람 교도는 타종교를 믿는 집단과의 화합에 상대적으로 더 
큰 어려움을 느낀다. 중국계 화교는 동남 아시아의 대부분 국가에서 수적으로는 소수지만 경제권을 쥐고 있다. 
그들은 불교 전통이 강한 태국과 카톨릭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필리핀에서 성공적으로 동화하였다.
  이들 나라에서는 주류 집단에 의한 심각한 반중국 폭력 사례를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는 반중국 시위나 폭력이 일어난 바 있으며 이들 나라에서 중국인이 차지하는 
역할은 태국과 필리핀과는 달리 민감하고 폭발 가능성이 높은 사안으로 남아 있다.
  전투성, 화합 불능성, 비이슬람 교도 집단과의 물리적 근접성은 이슬람의 지속적 특성이다. 그리고 이것들로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이슬람 교도의 분쟁 성향(만일 이런 것이 존재한다면)을 설명할 수 있다.시간적으로 제한된 
다음 세 요인들은 20세기 말의 이슬람의 공격적 성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슬람 진영이 제시하는 한 가지 설명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서구 제국주의의 이슬람 사회 
정복은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이슬람이 나약하다는 인상을 낳았고 따라서 비이슬람 집단들은 이슬람 교도를 
만만한 공격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슬람 교도는 역사적으로 서구 사회를 지배한 
반유대주의에 버금 가게 널리 만연된 반이슬람 편견의 희생자다. 팔레스타인, 보스니아, 캐슈미르, 체첸 같은 
이슬람 집단은 존엄성을 잃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밀려나 보호 구역에 감금된 또 하나의 억눌린 집단, 곧 
인디언과 다를 바 없다고 아메드(Akbar Ahmed)는 단언한다. 그러나 이슬람 교도를 희생자로 보는 시각은 수단, 
이집트, 이란,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다수 이슬람 교도와 소수 비이슬람 교도 사이의 분쟁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슬람 내부와 외부의 분쟁을 두루 설명하는 또 하나의 설득력 있는 요인으로 이슬람 세계에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슬람 변호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서구의 이슬람 비판가들이 이슬람 
중심부에 서구와 그 밖의 문명을 상대로 작전을 벌이고 행동을 조율하는 음모 지시세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의 비판가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착오에 빠져 있다. 이슬람이 세계의 불안 
요소로 남아 있는 것은 지배적 증심점이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파키스탄, 터키, 
잠재적으로는 인도네시아처럼 이슬람의 지도국을 꿈꾸는 나라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이슬람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중재할 만한 강력한 지위에 올라선 나라는 아직 없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집단과 비이슬람 집단의 분쟁을 처리할 때 이슬람을 대변하면서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권위를 확보한 나라도 없다.
  마지막으로 가장 증요한 요인이 있다. 이슬람 사회의 인구 폭발과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까지의 연령대에 
다수의 남성 실업자군이 몰려 있다는 점은 이슬람 내부의 분쟁과 비이슬람을 상대로 한 분쟁에서 모두 불안정과 
폭력을 낳는 자연스러운 요인이다. 그 밖의 다른 요인들도 물론 작용을 하겠지만 이 하나의 요인만으로도 
1980년대와 l990년대에 발생한 이슬람 집단의 폭력을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가 약 30년 동안 
이들 세대가 나이를 먹고 이슬람 사회의 경제 발전이 이루어질 경우 이슬람의 폭력 성향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단층선 전쟁의 강도와 빈도도 전반적으로 하강세를 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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