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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5/문명의 충돌

11. 단층선 전쟁의 역학 관계

by FraisGout 2020. 7. 26.

  정체성: 문명 의식의 대두
  단층선 전쟁은 심화, 확산, 견제, 방해, 그리고 드물게는 해결의 괴정을 밟는다. 이 과정은 대개 연속적으로 
일어나지만 때로는 중첩되고 반복되기도 한다. 단층선 전쟁은 일단 터지면 다른 집단 분쟁들처럼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작용-반작용의 양상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 이제까지 복수적으로 우연히 존재하던 정체성이 
응집되고 공고해진다. 집단 분쟁을 '정체성 전쟁'으로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폭력이 늘어나면서 처음 갈등을 
빚었던 문제들은 '우리' 와 '그들'의 대결 구도로 더욱 노골적으로 재규정되고 집단의 단결심과 충성심은 한층 
강해진다. 정치 지도자들이 민족적, 종교적 헌신에 호소하는 구호를 심화 확대시키면 문명적 정체성이 다른 유의 
정체성들에 비해 강화된다. 서로에 대한 공포와 불신, 증오가 맞물리면서 악순환을 그리는 '안보 딜레마' 에 
비견할 만한 '증오의 역학'이 등장한다. 양측은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의 구분을 극적으로 부풀리면서 
궁극적으로는 그 구분을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별로 변형시키려고 노력한다.
  혁명의 진전 과정에서 온건파, 지롱드당, 멘셰비키는 급진파, 자코뱅당, 볼셰비키에게 밀려난다. 단층선 
전쟁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연출된다. 독립보다는 자치 같은 상대적으로 제한된 목표를 추구하는 온건파는 협상을 
통해 그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처음에는 십중팔구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폭력을 통해 극단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급진파에 의해 보충되거나 밀려난다. 모로-필리핀 분쟁에서 주요 반란 세력인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은 처음에는 더 과격한 노선을 걷는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에게 밀렸다. 그러나 나증에는 더욱 과격한 
입장을 취하면서 다른 세력들이 필리핀 정부와 타결한 휴전 협정을 거부한 사야프(Abu Sayyaf) 세력이 
목소리를 높였다. 수단에서는 1980년대에 들어와 정부가 점차 극단적 이슬람 노선을 추구하였는데, 1990년대 
초반 크리스트교 반란 세력의 분열로 새롭게 등장한 남부 수단 독립 운동 집단은 단순한 자치가 아니라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지속되는 분쟁에서 주류 세력인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0)가 이스라엘 정부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쪽으로 기울자 이슬람 형제단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민중의 지지를 놓고 PL0에 도전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정부가 협상을 추구하자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극우 종교 집단의 항의와 폭력이 잇따랐다. 
l992 ~93년 체첸과 러시아의 분쟁이 격화되자 두다예프(Dzhokhar Dudayev) 정부는 모스크바와의 어떤 절충도 
거부하는 체첸 민족주의 집단에서도 가장 과격한 파벌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온건 세력은 재야로 밀려났다. 
타지키스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1992년 분쟁이 심화되자 타지키스탄의 민족주의-민주주의 세력은 
농촌의 빈민층과 도시의 불만 청년층을 동원하는 데 훨씬 탁월한 역량을 보인 이슬람 집단에게 점차 영향력을 
내주었다. 좀더 실용적 노선을 걷는 전통 종교 질서에 도전하는 젊은 지도자들이 등장하면서 이슬람의 구호 또한 
점점 과격해졌다. 외교적 어휘는 질색이라고 한 타지키스탄 지도자는 말하였다. "나는 싸움터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것은 조국이 러시아에게 유린당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합당한 언어다." 보스니아의 이슬람계 
민주 행동당광(SDA) 내부에서는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c)가 이끄는 급진 민족주의 진영이 좀더 
관용적이며 다문화의 공존을 추구하는 실라지치(Haris Silajdzic)가 이끄는 진영에 비해 점점 세력이 
커지고 있다."
  전쟁이 발발하면 복수적 정체성은 퇴색하고 분쟁과의 관련성이 가장 높은 정체성이 전면에 나선다. 그 
정체성은 거의 예외 없이 종교가 정의한다. 종교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이교도 세력과의 싸움을 정당화시키는 
심리적 위안과 자긍심을 제공한다. 현실적으로 종교 공동체 또는 문명 공동체는 분쟁에 연루된 국지적 집단이 
지원을 호소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공동체다.
  두 아프리카 부족간의 국지전에서 한 부족이 자신을 이슬람 집단으로, 다른 부족이 자신을 크리스트교 
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전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이란의 무기와 군사 
고문단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고, 후자는 서방의 경제적 인도주의적 지원, 서방 각국으로부터의 정치적 외교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보스니아의 이슬밤 교도처럼 자신이 대량 학살극의 회생자임을 설득력 있게 
부각시켜 서구인의 동정심을 자아내지 못할 경우 분쟁 집단은 자신과 문명적 친족 세력으로부터만 의미 있는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제외하고는 이제까지의 현실은 그랬다. 정의상으로 
단층선 전쟁은 더 광범위한 유대 관계를 가진 국지적 집단 사이의 국지전이며, 따라서 분쟁 당사자들의 문명의 
정체성을 고조시킨다.
  다른 문명들에 속한 집단들의 단층선 전쟁에서도 문명의 정체성은 강화 되었지만 이런 현상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역이 이슬람권이다. 단층선 전쟁의 발단은 가문, 씨족, 부족 갈등일 수 있지만, 이슬람 
세계의 정체성은 U자형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으므로 분쟁이 심화되면 분쟁에 연루된 이슬람 교도들은 재빨리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대시켜 모든 이슬람 집단에게 호소한다. 하다 못해 이라크의 후세인처럼 이슬람 원리주의에 
반대하는 세속주의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서구인의 관찰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아제르바이잔 정부도 이슬람 
카드를 활용하였다. 타지키스탄의 경우도 내부의 지역 갈등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반란 세력은 이슬람의 대의를 
점차 전면에 내걸었다. 19세기에 벌어진 북부 코카서스 민족들과 러시아인의 전쟁에서 이슬람 지도자 샤밀은 
자신을 이슬람주의자로 규정하면서 '이슬람이라는 정체성과 러시아의 공격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 분모 아래' 
수십 개의 언어적, 민족적 이질 집단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1990년대에 들어와 두다예프는 비슷한 전략을 
추구하고자 1960년대에 코카서스 지역에서 나타난 이슬람의 부상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는 이슬람 성직자와 
이슬람 정당의 지지를 받았으며 코란의 의식 절차에 따라 취임 서약을 하였으며(옐친도 러시아 정교 총대주교의 
축복을 받았다.) 1994년에는 체첸이 이슬람법 '샤리아'의 지배를 받는 이슬람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체첸 병사들은 체첸어로 성전을 뜻하는 '가바자트' 라는 단어가 새겨진 녹색천을 두르고 '알라는 위대하다.' 는 
구호를 외치며 전장으로 나갔다. 마찬가지로 캐슈미르의 이슬람 교도들이 자신을 정의하는 내용도 이슬람 교도, 
힌두 교도, 불교도를 총괄하는 지역적 정체성이나 인도 세속주의와의 연대성을 강조하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제3의 길로 나아갔다. 그래서 캐슈미르에서 부상하는 이슬람교 민족주의와 범이슬람 원리주의 가치관의 확산은 
캐슈미르의 이슬람 교도들에게 파키스탄과 이슬람 세계의 일원이라는 귀속감을 심어 주었다. 1989년 인도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은, 원래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는 '비교적 세속주의적인 단체가 
주도하였다. 파키스탄의 지원은 얼마 뒤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으로 기울었고 그 후 이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 원리주의 집단에는 희망이나 결과와는 관계없이 무작정 '지하드'만을 고집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이는 
골수 강경파들이 포함되었다. 또 다른 관찰자의 보고에 따르면 "민족 주의 감정을 고조시킨 것은 종교적 
차별성이었고 범지구적으로 나타난 이슬람 전투성의 부상은 캐슈미르의 반란 세력에게 용기를 주었고 힌두교- 
이슬람교의 관용이라는 캐슈미르의 전통을 희석시켰다." 는 것이다.
  보스니아에서도 특히 이슬람교 집단에서 문명의 정체성이 급부상하였다. 역사적으로 보스니아에서는 집단적 
정체성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이슬람계는 이웃으로서 평화롭게 살았다. 상호 
결혼도 흔하였고, 종교적 정체성은 미약한 편이었다. 이 지역의 이슬람계는 모스크에 가지 않는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계는 성당에 가지 않는 보스니아인, 세르비아계는 정교 교회에 가지 않는 보스니아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국민으로서의 광범위한 정체성이 효력을 잃자 이 미약한 
종교적 정체성들은 새로운 역할을 갖게 되었고 일단 전투가 벌어지자 종교적 정체성은 강화되었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는 극단적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되어 대세르비아, 세르비아 정교 교회, 나아가 더 광범위한 정교 
공동체의 일원임을 부르짖었다. 보스니아의 크로아디아계는 가장 열렬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가 되어 자신들이 
크로아티아 국민, 카톨릭 교도임을 강조하면서 서구 카톨릭 세계와의 일체감을 부르짖었다.
  이슬람 교도의 문명 의식 부상은 더욱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보스니아의 이슬람계는 
대단히 세속적으로 생활하고 스스로를 유럽인으로 여겼으며 보스니아의 다문화 사회를 가장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1990년 선거에서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는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처럼 다 문화 공존을 주장하는 정당을 거부하고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이슬람계의 
민주 행동당에 몰표를 던졌다. 그는 열렬한 이슬람주의자로 1970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이슬람 선언(The 
lslamic Declarationl)에서 '이슬람 체제와 비이슬람 체제는 양립할 수 없다. 이슬람 종교와 비이슬람 사회 정치 
제도 사이에는 평화도 공존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슬람 운동의 역량이 강화되면 정권을 장악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출범시켜야 한다 고 그는 강조하였다. 이 새로운 국가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교육과 언론이 
이슬람의 윤리적 지적 권위에서 추호의 의심도 받지 않는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보스니아가 독립의 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제트베고비치는 과반수에 못 미치는 이슬람계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다민족 국가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통해 보스니아가 이슬람화하는 것을 막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슬람 선언"에서 자신이 주장하였던 내용을 공식적으로 명백히 부인하는 것을 그가 주저하자 
비이슬람 교도들은 공포를 느꼈다. 전쟁이 벌어지자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 정부가 
지배하는 지역에서 빠져 나갔으며, 남아 있던 사람들은 좋은 직장과 사회 단체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자신들에게서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슬람은 이슬람교 공동체 내부에서 점차 비중을 넓혀 갔으며...... 
강력한 이슬람 정체성은 정치와 종교의 일부가 되었다 ' 보스니아의 다문화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이슬람 
민족주의가 언론에 자주 둥장하였다. 학교에서 종교 수업이 확산되었으며 새로운 교과서는 오스만 통치의 혜택을 
강조하였다. 세르보-크로아티아어와 구별되는 보스니아어가 장려되었으며 터키어와 아랍어에서 들어온 단어들이 
보스니아어로 통합되었다. 정부 관리들은 이민족간의 결혼과 '침략자' 세르비아 음악의 방송을 성토하였다. 
정부는 이슬람교를 지원하고 취업과 승진에서 이슬람 교도를 우대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스니아군이 
이슬람화되었다는 사실이다. 1995년에 이르면 군인의 90퍼센트 이상을 이슬람 교도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군 부대들이 하나둘 늘어났으며 이들은 이슬람교 관습을 따르고 이슬람교 상징물을 
받아들였다. 특히 고위 장교들은 거의가 이슬람 교도였고 그 수는 확산 일로에 있었다. 추세가 이렇게 흐르자 
보스니아의 5인 지도부(2명의 크로아티아인과 2명의 세르비아인을 포함)는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에게 
항의하였지만 대통령은 그것을 묵살하였다. 결국 1995년 다문화 공존을 주장하였던 실라지치 총리가 사임하였다.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민주 행동당은 보스니아 사회에 지배력을 넓혀 나갔다. 1995년에 이르면 민주 
행동당은 군, 관청, 공기업'을 장악하였다. 비이슬람 교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당원이 아닌 이슬람 교도는 
괜찮은 직장을 잡기가 어려운 분위기였다. 민주 행동당에게 "공산 정권의 구습을 따온 듯한 이슬람 권위주의의 
선봉장이 되었다. 는 비난이 빗발쳤다." 한 관찰자의 보고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이슬람 민족주의는 극단으로 흐르고 있다. 이제는 다른 민족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슬람 민족주의는 
새로 권력을 장악한 이슬람계의 재산, 특권, 정치적 수단이 되었다....
  이 새로운 이슬람 민족주의가 낳은 주된 결과는 민족의 동질화를 지향하는 움직임이다.. 이슬람의 종교 
원리주의는 국익을 결정하는 데 차츰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전쟁과 민족 청소가 유발한 종교적 정체성의 강화,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편향성,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과 
압력이 보스니아를 발란의 스위스에서 발칸의 이란으로 완만하지만 분명하게 탈바꿈시켰다.
  단층선 전쟁에서 양측은 자신의 문명적 정체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문명적 정체성도 부각시킨다. 
국지전에서 분쟁 당사자들은 그 지역의 다른 민족 집단과 싸운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다른 문명과 싸운다고도 
생각한다. 따라서 위협은 거대한 문명의 차원으로 확산되고 증폭되며, 패배는 지역 집단뿐 아니라 그 집단이 
속한 문명 전체에 파급 효과를 미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분쟁이 벌어졌을 때는 자신이 속한 문명의 
성원을 등에 업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낀다. 국지전이 종교전으로, 문명 간의 충돌로 재정의되며, 인류의 거대한 
문명 단위에까지 여파가 미친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 정교가 다시 러시아 민족 정체성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이슬람을 필두로 러시아의 다른 종교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러시아인들은 타지키스탄에서 벌어지는 
씨족간, 지역간 전쟁이라든가 체첸과의 전쟁을 수세기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정교와 이슬람교의 더 광범위한 
충돌의 일부로 정의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맞서 싸우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이슬라마바드, 테헤란, 리야드, 앙카라의 꼭두각시라고 보았다.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크로아티아인은 정교와 이슬람의 팽창에 맞서 서구를 수호하는 용감한 국경 수비대로서 
자신들을 이해하였다 세르비아인은 자신들의 적수가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나 이슬람 교도뿐 아니라 
'바티칸'과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수세기 동안 크리스트교 세계를 위협한 '악랄한 터키인'이라고 보았다. 한 서방 
외교관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지도자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카라지치(Radovan Karadzic)는 이것을 
유럽에서 벌어지는 반제국주의 전쟁으로 파악한다. 그는 유럽에서 오스만 터키 제국의 마지막 잔재를 소탕해야 
할 사명에 대해서 역설한다. 그런가 하면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들도 자신들을 종교적 차이 때문에 서구에게 
외면당하는 대량 학살극의 희생자로 여기고 따라서 당연히 이슬람 세계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모든 당사자들과 대부분의 외부 관찰자들은 이것을 종교 전쟁 또는 민족 종교 
전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글레니(Misha Glenny)가 지적하듯 이 분쟁은 점차 유럽의 3대 종교인 로마 카톨릭, 
동방 정교,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 전쟁으로서의 특성을 띄게 되었고 제국들의 경계선이 맞부딪쳐 그 종교적 
파편이 보스니아에 쌓이게 되었다.
  단층선 전쟁을 문명간 층돌로 이해하면 냉전 시대의 도미노 이론도 부활된다. 차이점이라면 국지적 분쟁에서 
패배할 경우 일련의 후속 분쟁에서 잇따라 패퇴하여 엄청난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을 느끼는 세력은 
미국과 소련이 아니라 주요 문명의 핵심국들이라는 사실이다. 인도 정부가 캐슈미르 분쟁에서 강경하게 나가는 
것은 여기서 물러설 경우 다른 소수 민족 집단과 종교 집단이 덩달아 독립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고 자칫하면 
인도가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코지레프 외무 장관은 러시아가 타지키스탄의 
정치 폭력을 종식시키지 못할 경우 폭력 사태가 키르기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 연방의 이슬람 공화국들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리라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붉은 광장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사태를 우려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옐친의 말대로 
아프가니스탄-타지키스탄 국경선은 '사실상 러시아의 국경선'이다. 유럽인들도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서서 이슬람 교도 이민과 이슬람 원리주의 전파의 중심 기지가 마련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프랑스의 시라크는 그것을 유럽 안의 '이슬람 향수' 라고 표현 하였다. 크로아티아의 국경선은 사실상 유럽의 
국경선이다.
  단층선 전쟁이 격화되면 양측은 적을 악마로, 인간 이하의 부류로 묘사하면서 살상 행위를 정당화한다. 옐친은 
체첸 게릴라들을 언급하면서 "미친개들을 쏘아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버릇없는 족속들은 죽여 마땅하며 
......우리는 그들을 죽일 것"이라고 199l년 동티모르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과 관련하여 인도네시아의 수트리스노 
장군은 말하였다. 과거의 악마는 다시금 부활한다. 크로아티아인은 '우스타셰'가 되고 이슬람 교도는 '튀르크'가 
되며 세르비아인은 '체트니크'가 된다. 집단 살해 고문, 강간, 민간인의 잔흑한 추방은 집단적 증오와 맞물린 
집단적 증오로 정당화된다. 대립하는 문화들의 중심적 상징물과 유산은 공격의 표적이 된다. 세르비아계는 
이슬람교 사원과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조직적으로 파괴하였고 크로아티아계는 정교 수도원을 폭파하였다. 문화 
유물의 보고인 박물관과 도서관은 취약하기만 하다. 신할리즈 보안군이 자프나 공공 도서관을 불살라 타밀 
문화와 관련 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문학적 역사적 자료' 를 파괴하였다. 세르비아 포병대는 사라예보 국립 
박믈관을 박살 냈다.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의 즈보르니크시에 거주하던 4만 명의 이슬람 교도를 쫓아내고, 
1463년 터키인들이 정교 교회를 파괴하고 세운 오스만 제국의 탑을 폭파한 뒤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웠다. 
문화와 문화의 전쟁에서 패배자는 바로 문화다.
  문명의 단합: 친족국과 재외 동포
  40년의 냉전 기간 동안 초강대국들이 자신의 동맹국과 우방을 규합하고 상대방의 동맹국과 우방을 전복시키고 
회유하여 중립화하려는 시도를 경쟁적으로 벌이는 가운데 분쟁은 위에서 아래로 전파되었다. 물론 그 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무대는 제3세계였다. 신생국과 약소국은 초강대국의 압력을 받아 범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된 대립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탈냉전 세계에서는 초강대국간의 단일 분쟁 대신 복수의 집단 분쟁이 
나타났다. 이 집단 분쟁에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이 연루될 경우 분쟁은 확산되고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분쟁이 격화되면 양측은 자신의 문명에 속한 국가들과 집단들로부터 지원을 얻으려고 애쓴다. 공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으로, 공공연하게 또는 비밀리에 이런 저런 형태로 이루어지는 물질적, 인도적, 외교적, 금전적, 상징적, 
군사적 지원은 늘 하나 이상의 친족국이나 친족 집단으로부터 나온다. 단층선 분쟁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친족국들이 지원역, 견제역, 중재역에 나서게 된다. 이런 '친족국 증후군' 때문에 단층선 분쟁은 문명 내부의 
분쟁보다 전면전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이 분쟁을 억제하고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문명간의 협조가 
요구된다. 냉전과는 대조적으로 단층선 분쟁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분출된다.
  단층선 전쟁에 국가와 집단이 개입하는 수준은 저마다 다르다. 1순위에는 실제로 전투에 가담하여 살상극을 
벌이는 당사자들이 있다. 이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전쟁, 이스라엘와 이웃 아랍 국가들의 전쟁처럼 국가일 수도 
있고, 보스니아나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세력처럼 국가는 아니며 기껏해야 국가로서의 틀을 
막갖추려고 하는 지역 집단일 수도 있다. 이 분쟁에는 2순위의 관여자들도 끼여드는데, 이들은 1순위의 
당사자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국가들이다.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 정부, 코카서스 
지역의 아르메니아 및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여기에 해당한다. 분쟁에 이보다 더 원거리로 연결된 3순위 국가들은 
전투 현장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분쟁 당사자들과 문명적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각각 연결 고리를 가진 독일, 러시아, 이슬람 국가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의 러시아, 터키, 
이란이 여기에 해당한다. 3순위 참가국들은 대개 문명의 핵심국이다. 세계 어디에 거주하건 1순위 당사자들의 
재외 동포도 단층선 전쟁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다. 1순위 분쟁에 투입되는 병력과 무기가 소수임을 감안할 
때 자금, 무기, 지원병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외부의 별로 않지 않은 지원도 전쟁 결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분쟁 당사자들과 여기에 간접적으로 연루된 세력의 이해 관계는 같지 않다. 1순위 당사자들에 대한 가장 
헌신적이고 열렬한 지원은 대개 자신들의 고향에 일체감을 가진 '교항보다 더 카톨릭적인' 재외 동포들로 부터 
나온다. 2순위와 3순위에 위치한 나라들의 이해 관계는 좀더 복잡하다. 그들은 분쟁 당사자들을 지원한다. 적대 
관계에 있는 집단들은 이들이 지원을 하지 않더라도, 지원을 보낸다고 의심하면서 자신들의 지원을 정당화 한다.  
그러나 동시에 2순위와 3순위의 국가들은 분쟁의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하며, 전투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려 든다. 따라서 분쟁 당사자들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그들을 자제시키고 그들의 기대 수준을 낮추려고 
애쓴다. 또한 상대 진영의 2순위, 3순위 국가들과 협상을 벌여 국지전이 핵심국을 망라한 전면전으로 치닫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그림 11.1)은 단층선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참여자들의 관겨를 보여 준다. 
모든 단층선 전쟁에 이런 도식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옛 유고슬라비야 지역과 코카시스 지역의 전쟁을 
포함한 다수의 분쟁은 이런 구도로 이해할 수 있으며, 거의 모든 단층선 분쟁은 이 모든 수준의 참석자들을 
끌어들일 만한 잠재력을 다분히 갖고 있다.
  1990년대 벌어진 모든 단층선 전쟁에서는, 재외 동포와 친족국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였다. 그런 전쟁에서 
이슬람교 집단이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이슬람 국가들은 2순위, 3순위 자리에 가장 자주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활약을 많이 한 나라들은 사우디아라비아, 파키 스탄, 이란, 터키, 리비아였다. 
이들은 때때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레바논, 보스니아, 체첸, 코카서스, 타지키스탄, 캐슈미르, 
수단, 필리핀에서 비이슬람 교도와 싸우는 이슬람 교도를 다양한 수준으로 지원하였다.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지원말고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가하였던 이슬람 국제 의용군들은 다수의 단층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알제리에서 체첸,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한 
분석가의 지적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파견된 의용군, 이슬람에 반대하는 
나라들을 상대로 벌이는 연합 선전전, 전쟁을 벌이는 모든 이슬람 교도들의 정치적 구심적 역할을 하는 이슬람 
본부를 세우는 행위'가 모두 이런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문명간 분쟁에서 아랍 연맹과 이슬람 협의 기구도 
이슬람 교도 집단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회원국들의 노력을 지원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하였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1순위 당사자였고, 탈냉전 시대에는 러시아가 체첸 전쟁에서 1순위로 참가하였고 
타지키스탄 분쟁에 2순위로 참여하였으며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내전에는 3순위로 관여하였다. 인도는 
캐슈미르에서 1순위로 연루되었으며 스리랑카에서는 2순위 역할을 하였다. 주요 서방국들은 유고슬라비아 
분쟁에서 3순위 역할을 하였다. 재외 동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지속적인 분쟁뿐 아니라 아르메니아, 체첸, 
크로아티아의 분쟁을 지원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TV, 팩스 전자 우편을 통해 재외 동포들의 조국애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고향과의 지속적 접촉에 의해 불꽃처럼 타오르기도 한다. 고향은 더 이상 과거형이 아니다.
  파키스탄은 캐슈미르 전쟁에서 반란 세력에게 외교적,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 파키스탄 군사 
소식통에 따르면 상당량의 자금과 지원은 물론 훈련, 병참 지원, 피신처까지도 제공하였다. 파키스탄은 또 반군 
을 위해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게 로비를 벌였다. 1996년 현재 반군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수단으로부터 
최소한 1200명의 '무자혜딘` 전사들을 층원받았으며 소련과 전쟁을 벌일 때 미국이 제공한 스팅어 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무기도 이들 손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의 모로 반군은 한동안 말레이시아로부터 자금과 
장비 지원을 받았고 이와는 별도로 아랍 국가들에게 자금을 제공하였으며 수천 명의 모로 전사들이 리비아에서 
훈련을 받았다. 가장 과격한 반란 세력인 사야프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원리주의자들이 조직하였다. 
아프리카에서 수단은 에티오피아와 싸우는 에리트레아 이슬람 반군을 꾸준히 도왔고 에티오피아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수단과 싸우는 '크리스트교 반도들' 에게 병참 지원과 피신처를 제공하였다. 수단의 반란 세력들과 강한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유대감을 갖고 있는 우간다도 이들을 도왔다. 반면 수단 정부는 3억 달러 상당의 중국 
무기를 이란으로부터 지원받았다. 이란은 또 군사 고문단을 보내 수단 정부군의 훈련을 도왔다. 덕분에 수단 
정부군은 1992년 반군에 대해 대대적 공세를 퍼부을 수 있었다. 다양한 서구 크리스트교 단체들은 수단의 
크리스트교 반군에게 식량, 의약품, 물자를 지원하였으며 수단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무기까지 제공하였다.
  스리랑카에서 힌두교 계열의 타밀 반군과 불교 계열의 신할리즈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당초 인도 
정부는 반군에게 막대한 지원을 제공하여 남부 인도에서 타밀 반군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자금을 보냈다. l987년 
스리랑카 정부군이 타밀 반군을 거의 진압할 단계에 이르자 이 대량 학살극을 규탄하는 인도 국민의 여론이 
들끓었고 인도 정부는 타밀 진영에 식량을 공수하면서, 자예와르데네 대통령에게 타밀 호랑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인도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뒤 인도와 스리랑카 정부는 스리랑카가 타밀 
지역에 상당 수준의 자치를 허용 하는 대신 반군이 인도군에게 무기를 반환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인도는 합의 
내용에 따라 5만 명의 병력을 스리랑카에 보냈지만 타밀 호랑이들은 무기 반환을 거부하였고 인도 정부는 한때 
자신이 지원한 게릴라들과 교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인도군은 1988년 초 스리랑카에서 
철수하였다. l991년 인도의 간디(Rajiv Gsndhi) 총리가 암살당하였을 때 대다수 인도 국민은 이것이 타밀 반군의 
사주라고 믿었고 인도 정부의 타밀 반군에 대한 감정은 한층 악화되었다. 그러나 인도 정부는 남부 인도에 
거주하는 5천만 타밀인들이 반군에게 보내는 공감과 지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여론을 반영하듯 타밀나두 
지방 정부의 관리들은 인도 정부에 도전하여 타밀 호랑이들이 자기네 주의 500마일에 이르는 해안선을 '사실상 
자유륨게 활보' 하도록 허용하고 비좁은 팔크 해협을 통해 스리랑카의 반군에게 물자와 무기를 보내는 것도 
묵과하였다.
  1979년부터 소련은 그리고 이어서 러시아는 남부 지역의 이슬람 교도들과 세 차례의 대규모 단층선 전쟁을 
벌였다. 그것은 1979 ~89년의 아프간 전쟁, 그 연장선에서 1992년에 시작된 타지키스탄 전쟁, 1994년에 발발한 
체첸 전쟁이다. 소련이 붕괴한 뒤에도 타지키스탄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공산 정부는 
l992년 봄 세속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가 망라된 지역 집단과 민족 집단으로 구성된 세력으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유입된 무기로 무장한 이들 저항 세력은 1992년 9월 수도 두산베에서 친러시아 정권을 
축출하였다. 러시아 정부와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을 경고하면서 여기에 강경 대응하였다. 
타지키스탄에 주둔하던 러시아의 제20l기계화 사단은 정부군에게 무기를 제공하였고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국경선 방위를 위해 증원군을 투입하였다. 1992년 11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은 
표면적으로는 평화 유지를 내걸었지만 사실상 전투 참여를 목적으로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의 군사 개입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지원과 러시아의 무기 및 자금 제공에 힘입어 타지키스탄 정부군은 두산베를 탈환하고 
타지키스탄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민족 청소 과정이 이어졌고 저항 세력은 아프가니스탄으로 
피신하였다.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러시아의 군사 개입에 항의하였다.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반군에게 
자금, 무기, 군사 훈련 지원을 강화하였다. 알려지기로는 1993년 수천 명의 반군이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들에게 훈련을 받았고, 1993년 봄과 여름에 걸쳐서 타지키스탄 반군은 아프가니스탄 국경선에서 공세를 
퍼부어 러시아 국경 수비대에게 커다란 인명 피해를 입혔다. 러시아는 여기에 맞서 타지키스탄에 병력을 추가로 
투입하고 아프가니스탄 내의 목표 지점에 대대적 포격과 공습을 감행하였다. 그러자 아랍 정부들은 공습에 
맞서기 위해 스팅어 미사일을 구입할 수 있는 자금을 반군에게 제공하였다. 1995년 현재 러시아는 약 2만 5천 
명의 병력을 타지키스탄에 주둔시키면서 정권 유지에 필요한 자금의 절반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한편 반군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여타 이슬람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루빈(Barnett Rubin)의 지적대로 국제 
단체나 서구가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의미 있는 지원을 제공하지 않은 결과 타지키스탄은 러시아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고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친족국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오늘날 외국 원조를 회망하는 
아프가니스탄의 군사 지휘관은 아랍과 파키스탄 같은 후원국들의 비위를 맞추든가 마약 거래에 뛰어들어야 
한다."
  러시아가 이슬람 교도와 세 번째로 벌인 전쟁은 북부 코카서스의 체첸에서 발생하였다 이 전쟁의 서막은 l992 
~93년 인접 지역인 정교 계열의 오세티아와 이슬람 계열의 잉구슈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2차 대전 중에 
잉구슈의 이슬람 교도는 체첸을 비롯한 여타 이슬람 교도들과 함께 증앙아시아로 추방되었다. 그대로 남아 있던 
오세티아인이 잉구슈 사람들의 재산을 차지하였다. l956~57년 추방당하였던 민족들의 귀환이 허용되면서 재산과 
영토의 소유권을 놓고 갈둥이 빚어졌다. 1992년 11월 잉구슈는 소련 정부가 오세티아측에 양도한 프리고로드니 
지역을 되찾기 위해 공세를 퍼부었다. 러시아는 정교계의 오세티아를 지원하기 위해 즉각 코사크 부대를 
투입하는 등 대대적으로 개입하였다. 한 외부 관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였다. 'l992년 11월 오세티아에 
있는 잉구슈 마을들이 러시아 탱크 부대에 에워싸여 집중 포화를 받았다. 포격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은 
살해당하거나 추방되었다. 오세티아의 오몬 특무대가 대량 학살극을 자행하였지만 이 지역에 평화 유지를 위해 
파견된 러시아군은 오세티아를 싸고돌았다. (이코노미스트)지의 보도에 따르면 불과 일 주일도 안되는 사이에 
그런 대량 파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것은 러시아 연방에서 벌어진 
최초의 민족 청소 작전이었다. 러시아는 이 분쟁을 이용하여 잉구슈와 우호 관계에 있는 체첸을 위협 하였고 
이것은 (이슬람 교도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는)체첸과 코카서스 민족 연합(KNK)의 즉각적인 군사 동원으로 
이어졌다. KNK는 러시아군이 체첸 영토에서 물러나지 않을 경우 50만 명의 의용군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날카로운 대치 끝에 러시아는 북오세티아-복잉구슈 분쟁이 지역 전체로 확산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철수를 
결정하였다.
  1994년 12월 러시아가 체첸에 전면적 군사 공격을 퍼부으면서 좀더 격렬하고 광범위한 층돌이 빚어졌다. 두 
정교 공화국인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의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군사 행동을 지지하였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선에서 그치는 외교적으로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교 계열인 북오세티아 
정부도 러시아의 군사 작전을 지지하였고 북오세티아 주민의 55 ~60퍼센트도 지지를 보냈다. 반면 러시아 연방 
안팎의 이슬람 교도들의 압도적 다수가 체첸을 두둔하였다. 아제르바이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수단 
등지에서 온 이슬람교 전투원들이 이 지역에 투입되었다. 이슬람 국가들은 체첸 쪽으로 기울었고, 터키와 이란이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어 러시아로서는 이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체첸 반군을 위한 무기가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러시아 연방 안으로 꾸준히 유입되자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 
국경선을 봉쇄하고 의약품을 비롯한 각종 지원이 체첸으로 들어가는 유입로를 막았다.
  러시아 연방의 이슬람 교도들은 체첸의 편에서 똘똘 뭉쳤다 코카서스 지역의 이슬람 교도들이 요구한 
러시아와의 성전은 불발로 끝났지만 6개 볼가-우랄 공화국 지도자들은 러시아측에 군사 행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 하였고 이슬람교 코카서스 공화국의 의회들은 러시아의 지배에 맞서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추바시 공화국 대통령은 추바시 징집병들 이 같은 이슬람 교도들과 싸우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전쟁에 대한 
가장 격렬한 항의'는 체첸의 두 인접 공화국인 잉구슈와 다게스탄에서 일어났다. 잉구슈 사람들은 체첸으로 
이동하는 러시아군을 공격하여 급기야 러시아 국방 장관은 잉구슈 정부가 사실상 러시아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으며 다게스탄에서도 러시아군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이에 맞서 러시아는 
잉구슈와 다게스탄의 마을에 포격을 가하 였다. 체첸이 키즐랴르 시를 침공하고, 1996년 1월 러시아가 
페르보마이스코예 마을을 초토화시키면서 러시아에 대한 다게스탄의 적대감이 악화 되었다.
  체첸의 저항은 19세기 말 러시아가 코카서스의 산악 거주 민족들을 공격하면서 발생한 많은 재외 거주 
체첸인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체첸 재외 교포들은 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조달하였으며 체첸군에 지원병을 
보냈다. 체첸 교포는 특히 요르단과 터키에 많이 거주하였으므로 요르단은 러시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고 터키도 기꺼이 체첸 반군의 지원에 나섰다. 1996년 1월 전쟁이 터키 쪽으로 확대되자 체첸 재외 교포 
여객선 나포와 러시아 인질 억류에 공감하는 터키의 국민 여론도 확산되었다. 체첸 지도자들의 호응으로 터키 
정부는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에 나섰고 그 결과 그렇지 않아도 껄끄러웠던 터키와 러시아의 관계는 한층 
악화되었다.
  체첸의 다게스탄 침공과 러시아의 대응, 1996년 벽두에 터진 여객선 나포 사건은 하나의 지역 분쟁이 19세기 
말에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양상으로 러시아와 산악 민족들 사이의 전반적인 분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많음을 보여 주었다. 북부 코카서스는 화약고라고 1995년 힐(Fiona Hill)은 경고하였다. "이곳 한 공화국에서 
일어난 분쟁이 지역 전체의 분쟁으로 점화되어 국경선을 넘어 러시아 연방 전체로 확산되고 그루지야 아제르바 
이잔, 터키, 이란과 이 지역에 거주하는 북부 코카서스 교포들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높다. 체첸 전쟁에서 
드러났듯 이 지역의 분쟁은 누르기가 쉽지 않으며...... 전투는 체첸 인접 공화국들과 영토에 홀러 들어가고 있다. 
한 러시아 분석가도 문명의 괘선을 따라 비공식 동맹'이 결성 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비슷한 견해를 표명한다.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나고르노-카라바흐, 북오세티아의 크리스트교 세력과 아제르바이잔, 압하지아, 체첸, 
잉구슈 이슬람교 세력이 대결하고 있다." 타지키스탄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통해 이미 러시아는 이슬람 세계와의 
장기적 분쟁에 휘말려들 위험성을 감수한 셈이었다.
  또 하나의 정교-이슬람교 단층선 전쟁에서 1순위 당사자는 고립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와 
이들을 에워싼 아제르바이잔인이다. 아르메니아계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독립하고자 싸우고 있다. 2순위 참여자는 
아르메니아 정부이고 3순위 참여자는 러시아, 터키, 이란이다. 이 밖에도 서유럽과 북미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아르메니아 교포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전투는 소련이 붕괴하기 전인 1988년에 시작되어 1992~ 95년에 
격화되었다가 1994년의 휴전 회담 이후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터키와 여타 이슬람 국가들은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였고, 러시아는 아르메니아를 돕는 한편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하여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터키의 영향력을 견제하였다. 이 전쟁의 밑바닥에는 과거 흑해와 코카서스 지역의 지배를 놓고 몇 세기 동안 
계속된 러시아 제국와 오스만 제국의 대립, 20세기 초 터키인이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에서 비롯된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반목이라는 중층의 역사가 깔려 있다.
  이 전쟁에서 터키는 일관되게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였고 아르메니아를 견제하였다. 터키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한 것은 비발트해 지역 공화국의 독립에 대한 첫 국제적 승인이었다. 분쟁 기간 동안 
터키는 아제르바이잔에 재정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아제르바이잔 군인을 훈련시켰다. 1991~92년 폭력이 
격화되어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밀고 들어오자 터키의 국민 여론이 들끓었고 터키 정부는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가까운 혈맹국을 도우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터키 정부는 이것이 
이슬람교-크리스트교의 대립을 부각시켜 서구에 아르메니아 지원 열기를 불러일으키고 NAT0 동맹국들의 
비위를 거스를까 우려하였다. 터키는 단층선 분쟁에 2순위로 관먹한 국가의 고전적 교차 압력에 시달린 
셈이었다. 터키 정부는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고 아르메니아를 견제하는 것이 국익에 합치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한 터키 관리는 "친척이 살해당하는데 수수 방관하기란 불가능하다." 면서 "우리는 압력올 받고 있다. 
터키 신문들은 피살된 시체들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싣고 있다....... 우리는 아르메니아를 향해 이 지역에 거대한 
터키가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외잘 터키 대통령도 "터키가 아르메니아인에게 약간 겁을 
주어야 한다." 고 언급하여 비슷한 입장을 나타냈 다. 터키는 이란과 함께 아르메니아측에 국경선의 어떠한 
변화도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였다. 외잘 대통령은 식량과 각종 물자가 터키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들어가는 길을 봉쇄하였고 그 결과 아르메니아인들은 1992 ~93년 동절기에 기아선상을 헤매었다. 그러자 
러시아의 샤포슈니코프 사령관은 이 전쟁에 '제3자(터키)가 개입할 경우 3차 대전이 벌어질 것' 이라고 
경고하였다. 1년 뒤에도 외잘 대통령은 여전히 호전적 자세를 고수 하였다. "총을 쏜다 한들 아르메니아가 
어쩌겠는가?" 라고 그는 비아냥거렸다. "....터키로 밀고 들어오겠는가? 그렇다면 터키는 본때를 보여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1993년 여름과 가올 아르메니아가 대공세를 펼쳐 이란 국경선까지 진격 하자,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하여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경쟁하던 터키와 이란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터키는 이 공세가 터키의 안보를 위협한다며 아르메니아군이 아제르바이잔 영토에서 즉시 무조건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선에 증원군을 파견하였다 이때 러시아군과 터키군이 아르메니아 국경선에서 몇 
차례 교전을 벌였다는 보도도 나왔다. 터키의 실레르 총리는 아르메니아군이 터키에 인접한 아제르바이잔계의 
고립 지역 나히체반을 침공할 경우 터키가 선전 포고를 하겠다고 공표하였다. 이란 역시 표면적으로는 아르 
메니아의 공격에서 발생한 난민들을 수용할 시설을 세운다며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군을 투입하였다. 터키는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추가 조치를 취할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이란의 움직임을 내심 반겼고 
한편으로는 이란에 선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더욱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할 뀔요성을 느꼈다. 결국 분쟁은 
모스크바에서 벌인 터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지도자들의 협상 아르메니아 정부에 대한 미국의 압력,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떼니아계에 대한 아르메니아 정부의 압력으로 한풀 꺾였다.
  빈약한 자원에 사방이 육지로 막히고 적대적 터키계 민족들에게 에워싸인 아르메니아인은 역사적으로 같은 
정교를 믿는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보호에 의지하였다. 특히 러시아는 맏형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면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분리 독립을 들고 나왔을 때 고르바초프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공산주의 이념을 충실히 고수한다고 판단한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지원하고자 군을 
파견하였다. 소련이 붕괴한 뒤 이러한 정책적 고려는 오랜 역사적, 문화적 유대감 앞에서 설 자리를 잃었고, 
아제르바이잔측은 러시아 정부가 180도 전향하여 같은 정교 계열의 아르메니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고 
비난하였다. 아르메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 지원은 사실상 이미 소련군 내부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아르메니아 출신이 이슬람 교도에 비해 군 고위직에 오를 기회가 많았고 야전군에도 더 많이 
배속되었다. 내전이 발발하자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육군의 제566기계화 연대는 1천 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피살된 것으로 알려진 코드잘리 시에 대한 아르메니아 공격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뒤 
러시아 부대도 전투에 가담하였다. 1992 ~93년 겨울 터키의 경제 봉쇄로 고통을 겪던 아르메니아는 러시아가 
제공한 수십억 루블의 차관 덕분에 총체적 경제 붕괴를 모면하였다. 그 해 봄 러시아군은 아르메니아 정규군과 
합세하여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잇는 연결로를 뚫었다. l993년 여름에 감행된 카라바흐 공세에는 
40대의 탱크로 구성된 러시아 기갑 부대가 가담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힐과 주웨트의 지적대로 아르메니아로서는 
러시아에 바짝 달라붙는 길 외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르메니아는 자원, 에너지, 식량 지원은 물론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역시적 앙숙 아제르바이잔과 터키가 야기하는 안보 위협 차원에서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독립국가연합의 모든 경제 및 군사 협정에 서명하였고 러시아군의 자국 주둔을 허용하였으며 
옛 소련의 자산에 대한 소유권 문제를 러시아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타결지었다.
  아르메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은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높였다. 1993년 6월에 발생한 
쿠데타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지도자 엘치베이마(Abulfez EIchibey)는 축출되고 과거 공산주의자였으며 친 
러 성향으로 알려진 알리예프(Gaider AIiyev)가 권좌에 올랐다. 알리예프는 아르메니아를 견제하고자 러시아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독립국가연합에 불참하기로 한 아제르바이잔의 종전 입장을 
뒤집었으며 러시아군의 자국 주둔을 허용하였다. 또 아제르바이잔의 원유 개발을 위한 국제 컨소시엄에 러시아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 군대를 훈련하기 시작하였으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대한 지원을 증단하고 아제르바이잔 영토에서 철수하도록 아르메니아측에 압력을 
넣었다. 러시아는 양 진영을 오가면서 아제르바이잔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주어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이란과 
터키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따라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은 러시아와 코카서스 지역에 있는 
우방과의 결속을 강화시켰을 뿐 아니라 이 지역에 있는 러시아의 이슬람교 경쟁 세력들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의 지원과는 별개로서 유럽과 북미에 거주하는 다수의 부유하고 영향력이 강한 아르메니아 교포들도 
조국을 크게 지원하였다. 미국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약 100만 명에 이르고 프랑스에는 45 만 명이 거주한다. 
이들은 터키의 경제 봉쇄를 아르메니아가 극복할 수 있도록 자금과 물자를 제공하였고 아르메니아 정부에서 
일할 수 있는 인적 자원과 아르메니아 군대를 위한 지원병을 보냈다. 1990년대 중반 미국애서 모금된 아르메니아 
구호 자금의 규모는 매년 5천만 달러에서 7천5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아르메니아 교포들은 또 현지 정부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아르메니아 교포들은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 매사추세츠, 뉴저지 같은 
부유한 주에 거주한다. 그 결과 미국 의회는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외국 원조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아르메니아는 세계에서 국민 1인당 미국의 원조를 세 번째로 많이 받는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해외로부터의 
지원은 아르메니아가 살아 남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고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의 이스라엘' 이라는 그럴싸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세기 러시아가 북부 코카서스를 침공하였을 때 해외로 이주한 난민들이 뒷날 체첸의 
러시아 항전을 지원한 것처럼 20세기 초반 터키가 아르메니아 인을 대량 학살하였을 때 해외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훗날 조국이 터키에 저항하고 아제르바이잔을 패퇴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옛 유고슬라비아는 1990년대 초반 가장 완벽한 단충선 전쟁이 가장 복 잡하고 혼미한 양상으로 전개된 
지역이다. 1순위로서는 크로아티아에서 크로아티아 정부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가 싸웠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보스니아 정부가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및 크로아티아계와 싸웠다.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 역시 서로 전투를 벌였다. 2순위로서는 세르비아 정부가 '대세르비아'를 
부르짖으면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를 지원하였고, 크로아티아 정부 역시 '대크로아티아'를 
내세워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를 지원하였다. 3순위에는 주요 문명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독일, 오스트리아, 
바티칸을 비롯한 유럽의 카톨릭 국가와 카톨릭 단체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미국까지 크로아티아를 
옹호하였다. 러시아, 그리스, 기타 정교 국가와 정교 단체들은 세르비아를 도왔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리비아를 주축으로 한 이슬람 국가들은 대체로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지원하였다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는 또 
미국의 도움도 받았는데, 이것은 친족국끼리 돕는 보편적 양상의 예외적 현상이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 교포와 터키에 거주하는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 교포는 자신들의 조국을 지원하는 데 앞장섰다. 
교회와 종교 집단은 세 진영에서 모두 적극적으로 활동 하였다. 최소한 독일, 터키, 러시아, 미국의 정책은 이들 
나라의 압력 집단과 국민 여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2순위 국가와 3순위 국가의 지원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 역할을 하였고 이들에 대한 압력 또한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크로아티아 정부와 세르비아 정부는 다른 공화국에서 싸우는 동족에게 무 
기, 물자, 자금, 피신처, 때로는 병력까지도 지원하였다.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이슬람교계는 모두 옛 
유고슬라비아 외부의 문명적으로 결속된 세력으로부터 자금, 무기, 물자, 의용군, 군사 훈련, 정치 외교적 지원의 
형태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비정부 차원에서 싸우던 세르비아계와 크로 아티아계는 가장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내걸면서 과도한 요구를 앞세웠고 자신들의 목표를 가장 전투적인 방법으로 추구하였다. 2순위로 관여한 
크로아티아 정부와 세르비아 정부는 처음에는 1순위의 동족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지만 자신들의 다양한 이해 
관계를 고려하는 과정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3순위의 독일, 
러시아,미국 정부도 자제와 타협을 모색하도록 2순위 국가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추구, 서유럽의 강대국들에게 지원을 호소하면서 
시작되었다. 서구의 대응을 주도한 것은 독일이었다. 그리고 독일의 대응을 주도한 세력은 독일의 카톨럭 
집단이었다. 독일 정부는 카톨릭 교단, 바바리아 지역의 기독교 사회 연합당(기사연),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를 비롯한 언론의 압력을 받았다. 특히 바바리아 지역의 언론은 독일 국민의 여론을 독립 승인 쪽으로 
이끌어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루이스(Flora Lewis)는 "매우 보수적인 바바리아 정부, 크로아티아 내의 
교회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강력하고 발언권이 센 바바리아 카톨릭 교회의 입김 아래 바바리아 TV는 
네르비아와) 전쟁이 시작되자 전 독일을 대상으로 전황을 적극적으로 보도하였다. 그 보도 내용은 매우 
편향적이었다."고 하였다. 독일 정부는 승인을 주저하였지만 독일 사회의 압력을 감안할 때 독일 정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크로아티아에 대한 독일의 승인을 주도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여론이었다." 독일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유럽 연합에 압력을 넣어 일단 긍정적 반응을 얻어내자 1991년 
12월 유럽 연합이 이들의 독럽을 승인하기 한발 앞서 먼저 독립을 승인하였다. 1995년 한 독일 학자는 "분쟁이 
벌어지는 동안 독일 정부는 크로아티아와 그 나라의 지도자 투즈만(Franjo Tudjman)을 독일 외교 정책의 
하수인으로 여겼다. 투즈만의 괴벽스러운 행동이 독일에게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투즈만은 여전히 독일의 굳건한 
지원을 힙입을 수 있었다." 고 말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는 두 신생국을 곧바로 승인하였고 미국을 포함한 기타 서방국들도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바티칸 교황청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황은 크로아티아가 '(서구)크리스트교의 보루'임을 선언 
하고 유럽 연합에 앞서 두 나라에 대한 외교적 숭인을 확대하는 작업에 발벗고 나섰다. 그리하여 바티칸은 
분쟁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1994년 교황이 세 나라를 방문하고자 했을 때 그 결과가 나타났다. 세르비아 
정교 교회측의 반대로 교황의 베오그라드 방문은 좌절되었으며, 사라 예보 방문도 교황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는 세르비아 당국의 비협조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교황은 자그레브를 방문하여 세프티나치 추기경을 
추어올렸다. 세프티나치 추기경은 2차 대전 당시 세르비아인, 집시, 유대인을 처형한 크로아티아의 파시스트 
정권에 연루된 인물이었다.
  서구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은 크로아티아는 1991년 9월 유엔이 옛 유고 슬라비아 지역의 모든 공화국들에게 
취한 무기 수입 금지 조처에도 불구하고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였다. 독일, 폴란드, 헝가리 같은 유럽의 
카톨릭 국가와 파나마, 칠레, 볼리비아 같은 남미 국가를 통해 크로아티아로 무기가 흘러 들어갔다. 전쟁이 
격화되었던 1991년 스페인의 무기 수출은 단기간에 6배로 늘어났으며 이 무기의 대부분이 루블랴나와 
자그레브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크로아티아가 폴란드 정부와 독일 정부의 묵인 아래 여러 대의 미그 
21기를 수입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세르비아 공산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에 맞서 크리스트교 십자군으로서 
전투에 참여하려는 열의에 불타는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서유럽, 크로아티아 교포, 동유럽의 카톨릭 국가'출신 
의용군이 크로아티아 국방군에 자원 입대하였다. 서구 각국의 군사 전문가들은 기술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이 
친족국들의 도움에 힘입어 크로아티아는 막강해진 군사력으로 세르비아계가 주축을 이룬 유고군에 반격을 
퍼부었다.
  서구의 크로아티아 지원은 세르비아계가 거듭 지탄받는 민족 청소, 인권 유린, 포로 학대 등의 문제에서 
크로아티아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는 양상으로도 나타난다. 1995년 전력을 재정비한 크로아티아군이 
크라주나를 공격하여 그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 온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계를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로 몰아냈을 
때 서구는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크로아 티아는 또 입김이 강한 재외 동포의 덕도 보았다. 서유럽과 북미에 
거주하는 부유한 크로아티아인들은 무기와 장비 구입을 위한 자금을 모아 보냈다. 재미 크로아티아인 협회는 
조국을 대변하여 미국 의회와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펼쳤다.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독일에 거주하는 60만 
크로아티아인이었다. 캐나다, 미국, 호주, 독일의 크로아티아 공동체는 수백 명의 자원병을 크로아디아군에 
보내면서 독립국으로 막 태어난 조국의 수호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l994년 미국도 크로아티아의 전력을 구축하는 지원 대열에 합류하였다.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를 대대적으로 
위반한 크로아티아의 사례를 눈감아 주면서 미국은 크로아티아의 군사 훈련을 도왔고 미국의 고위 퇴역 
장성들을 고문관으로 파견하였다. 미국 정부와 독일 정부는 l995년 크로아티아의 크라주나에 대한 공격에 앞서 
파란 불을 켜 준 셈이었다. 미국 군사 고문단은 미국식 공격 작전 수럽에 관여하였다. 크로아티아측에 따르면 그 
작전은 또한 미국의 첩보 위성이 제공한 정보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크로아티아는 사실상 전략적 동맹국이 
되었다고 미국 국무성의 한 관리는 선언하였다. 이러한 사태 전개의 밑바탕에는 궁극적으로 2개의 지역 강대국 
워싱턴과 밀착된 자그레브(크로아티아 세력), 모스크바까지 뻗은 슬라브 블록에 편입된 베오그라드(세르비아 
세력)-이 이곳을 지배하리라는 장기적 계산이 깔려 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정교 국가는 거의 만장 일치로 세르비아 지원 대열에 동참하였다. 러시아의 
민족주의자, 군 장교, 의원, 정교 교회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세르비아를 지지하며 보스니아의 튀르크족을 
헐뜯고 서구와 NAT0의 제국주의를 비난하였다.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합심하여 두 나라에서 
서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규탄하는 여론을 볼러일으켰다.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는 러시아 국민은 적지 않았다. 
일례로 모스크바 시민의 60퍼센트 이상이 1995년 여름에 감행된 NAT0의 공습을 반대하였다. 러시아 민족주의 
단체들은 '슬라브 형제의 대의에 동참할 러시아 자원병을 주요 대도시에서 모집하여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 
알려지기로는 천 명이 넘는 러시아인이 루마니아, 그리스 출신의 자원병과 함께 이른바 '카톨릭 파시스브' 및 
'이슬람 전사' 와 싸우기 위해 세르비아 군에 입대하였다. l992년 코사크 군복을 입은 러시아 부대가 
보스니아에서 작전을 벌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1995년 러시아인은 세르비아의 정예 부대에서 복무하였고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와 그리스 출신의 전투원들이 유엔이 설정한 제파 안전 지역의 세르비아 공격에 참여 
하였다.
  무기 금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교 우방국들은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세르비아에 제공하였다. 1993년 초 
러시아의 군사 첩보 조직은 3억 달러 상당의 T55 탱크, 미사일 요격 미사일, 대공 미사일을 세르비아에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군사 전문가들이 세르비아에 가서 이 무기들을 운용하고 다루는 기술을 지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르비아는 다른 정교국 들로부터도 무기를 조달하였다. 루마니아와 블가리아가 가장 적극적인 무기 
제공국이었으며 우크라이나도 한몫 거들었다. 뿐만 아니라 동부 슬로베니아에 평화 유지군의 일원으로 주둔 
중이던 러시아 부대는 유엔이 제공한 물자를 세르비아 쪽으로 전용하고 세르비아군의 이동을 도왔으며 그 들의 
무기 조달을 지원하였다.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는 루마니아 정부 관리들이 루마니아의 국경 도시 티미쇼아라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 정부의 묵인 아래 처음에는 이탈리아 기업들이, 나증에는 그리스 기업들이 알바니아를 통해서 
제공한 막대한 양의 연료와 기타 믈자를 밀수한 덕분에 그럭저럭 버텨 나갈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 실은 식량, 
의약품, 컴퓨터, 기타 물품은 마케도니아를 거쳐 세르비아로 들어갔으며 그에 못지 않은 양의 세르비아 수출품이 
같은 통로를 통해서 밖으로 나왔다. 달러의 매력과 친족국에 대한 연대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세르비아에 
대한 유엔의 경제 제재는 모든 옛 유고슬라비아 공화국들에 대한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와 마찬가지로 유명 
무실해졌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그리스 정부는 NAT0의 서방 회원 국들이 추진한 정책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스니아 지역에서 이루어진 NAT0의 군사 작전을 반대하였으며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철회하도록 
미국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펼쳤다. 1994년 그리스의 총리는 세르비아와 정교권의 결속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1991년 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서둘러 승인한 바티칸, 독일, 유럽 연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옐친은 5순위 관여국의 지도자로서 한펀으로는 서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이득을 얻고 싶은 
욕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에 굴종적이라고 자신을 비난하는 정적들을 무력화시키고자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후자의 욕망이 더 강해 서세르비아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은 일관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또 1993년과 l995년에 세르비아에 더 강력한 경제 제재를 하는 데 반대 하였으며 
러시아 의회는 기존의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 철회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거의 만장 일치로 가결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교도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의 강화와 크로아티아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요구 하였다. l993년 
12윌 러시아는 동절기를 맞아 세르비아에 천연 가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경제 제재의 완화를 요구하였으나 
미국과 영국은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1994년과 1995년에 러시아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 대한 NAT0의 
공습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l995년 러시아 의회 두마는 공습을 거의 만장 일치로 규탄하고 발칸 지역에서 
러시아의 국익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코지레프 외무 장관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러시아는 또 
세르비아계에 대한 NAT0의 학살극을 비난하였으며, 옐친 대통령은 공습이 지속될 경우 NATO와의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를 포함한 러시아와 서구의 협조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NAT0가 
세르비아인을 공격하는데 우리가 어찌 NATO와 호흡을 맞출 수 있겠는가?' 라고 옐친은 반문하였다. 서구는 
명백히 이중 잣대를 사 용하고 있다고 그는 보았다. '이슬람 교도가 세르비아계를 공격할 때, 혹은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계를 공격할 때는 왜들 가만히 있는가?" 러시아는 또 옛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공화국들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중지 시키려는 노력에 줄곧 반대하였다.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가 유리해지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오히려 무기 금수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러시아는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 기구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비중을 이용하여 세르비아의 이익을 지키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1994년 l2월 이슬람 국가들이 발의한, 세르비아에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로의 연료 이동을 금지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1994년 4월 세르비아계의 
민족 청소를 비난하는 유엔 결의안도 러시아가 앞장서서 봉쇄하였다. 러시아는 유엔 전범을 기소하는 검사로 
NAT0 회원국 출신 인사를 임명하는 데도 반대하였다. 세르비아인에 대한 편견이 작용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러시아는 보스니아 세르비아 계의 군사 지도자 믈라디치(Ratko Mladic)를 국제 전범 재판소에 
기소하는 데 반대하면서 믈라디치에게 망명처를 제공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l993년 9월 러시아는 옛 
유고슬라비아에 주둔하는 2만 2천 명 규모의 유엔 평화 유지군의 지위를 유엔이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1995년 여름 유엔 평화 유지군을 l만 2천 명 증강한다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반대하였지만 거부권은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크라주나에 대한 크로아 티아의 공세와 그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은 서방 국가들을 
비난하였다.
  가장 효과적이고 펑범위한 문명적 결속은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위한 이슬람 세계의 지원으로 나타났다. 
보스니아의 대의는 이슬람 국가들의 폭넓은 성원을 얻었다. 보스니아에 대한 지원은 공식 창구와 민간 창구를 
망라한 다양한 통로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란과 사우리아라비아는 경쟁적인 지원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수니파와 시아파, 세속주의자와 원리주의자, 아랍 이슬람 국가와 비아랍 이슬람 국가 모두가 지원 
대열에 동참하였다. 이슬람의 보스니아 지원은 인도주의적 지원(199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제공한 9천만 달러를 
포함한)에서 외교 지원, 폭력 행위도 불시 하는 대규모 군사 지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태로 전개되었다. 가령 
1995년 알제리에서는 보스니아에서 목이 잘린 동료 이슬람 교도들의 대량 피살에 대한 보복으로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이 12명의 크로아티아인을 살해하였다.
  이슬람 세력이 함께 결집한 것은 전쟁의 전개 양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초 세르비아계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한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들이 나라를 잃지 않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할 수 있었던 데는 같은 이슬람 
세력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자연히 보스니아 사회의 이슬람화에도 가속이 붙었으며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들의 
이슬람에 대한 소속감도 크게 강화되었다.
  이슬람 각국은 개별적으로건 집단적으로건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에 연대감을 거듭 표명하였다. 1992년 이란은 
그 선두 주자로서 이 전쟁을 세르비아 크리스트 교도가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상대로 학살극을 벌이는 종교 
분쟁으로 묘사하였다. 아자미(Fouad Ajami)의 관찰에 따르면 이란이 앞장서서 '보스니아 국가를 위한 불입금'을 
내면서 모범을 보이자 터키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이슬람 강대국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란의 주동으로 
이슬람 협의 기구(OIC)는 이 문제를 정식으로 다루고 유엔에서 보스니아를 대변하여 로비를 펼 수 있는 
대표단을 결성하였다. l992년 8월 이슬람 대표단은 유엔 총회에서 대량 학살을 규탄하였으며 OIC를 대표 하여 
터키는 유엔 헌장 7조의 규정에 따른 군사 개입을 요구하는 결의안 채택을 발의하였다. 1993년 초 이슬람 
국가들은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의 보호를 위해 서구가 가시적 조치를 취해야 하는 최종 시한을 못 박고 그 
이후로는 보스니아측에 무기를 자유로이 제공하겠다고 선언하였다. 1993 년 5월 OIC는 이슬람 교도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고 세르비아와의 국경선을 감시하되 어떤 군사적 개입도 포기한다는 서방 각국과 러시아가 
마련한 계획안을 일축하였다. OIC는 무기 금수 조치의 철폐, 세르비아 중화기에 대한 무력 발동, 세르비아 
국경선의 적극적 순찰, 평화 유 지군에 이슬람 국가 병사들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다음달 OIC는 서방 
국가들과 러시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엔 인권 회의에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공격을 비난하고 무기 금수 
조치의 해제를 촉구하는 결의안 을 채택하게 하였다. 1993년 7월 OIC가 이란, 터키, 말레이시아, 튀니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구성된 1만 8천 명 규모의 유엔 평화 유지 군을 제공하여 서방 국가들을 
곤혹스럽게 하였다. 미국은 이란 부대의 파병에 거부권을 행사하였으며 세르비아측은 터키 부대를 맹렬히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블구하고 터키군이 1994년 여름 보스니아에 도착하였으며 1995년 현재 2만 5천 명의 유엔 
방위군에는 터키,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출신의 장병 7천 명이 포함되어 있다. 1993년 
8월 터키 외무 장관이 이끄는 OIC 대표단이 세르비아의 공격으로부터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보호하기 위해 
NAT0의 즉각적 공습을 지지해 달라고 갈리 유엔 사무 총장과 크리스토퍼 미 국무 장관에게 촉구하였다. 서구가 
이런 조취를 취하지 않는 바람에 터키와 NAT0 동맹국들 사이에 심각한 긴장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터키와 파키스탄의 외무 장관은 이슬람권의 관심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고자 대대적인 흥보와 함께 
사라예보를 방문하였고 OIC는 보스니아에 대한 군사 지원을 다시금 요구하였다. l995년 여름 서구가 세르비아의 
공격으로부터 안전 지역을 방어하는 데 실패하자 터키는 보스니아에 대한 군사 지원을 승인하고 보스니아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말레이시아는 유엔의 무기 금수 조치를 파기하고 무기 판매에 뛰어들었다. 또 
아랍에미리트연방은 군사적 목적과 인도주의적 목적에 쓰일 자금을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1995년 8월 OIC의 
9개국 외무 장관들은 유엔 무기 금수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어 9월에는 OIC의 52개 회원국들이 보스니아에 
대한 무기와 경제 지원을 승인하였다.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의 참상처럼 이슬람 세계의 전폭적인 성원을 얻은 것은 유례가 없을 정도이지만 특히 
터키에서는 심한 공분을 볼러일으켰다. 보스니아는 실질적으로는 1878년까지, 명목상으로는 190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존재하였으며, 보스니아 출신의 이민자와 피난민은 터키 인구의 약 5퍼센트를 차지했다. 
보스니아의 대의에 대한 공감과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보호하지 못하는 서구에 대한 터키 국민들의 분노감이 
만연하였고 야당인 이슬람 복지당은 이 문제로 정부를 물고 늘어졌다. 그에 뒤질세라 터키 정부 관리들은 터키가 
발칸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이슬람 교도의 안위에 각별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의 
보호를 위한 유엔의 군사 개입을 틈나는 대로 역설하였다.
  이슬람 세계가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에게 제공한 가장 큰 도움은 뭐니 뭐니 해도 군사 지원이었다. 여기에는 
무기, 무기 구입 자금, 군사 훈련, 자원병이 망라된다. 전쟁이 터지자 보스니아 정부는 곧바로 무자헤딘을 
불러들였다. 알려지기로는 자원병의 수가 모두 4천 명에 육박하여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를 위해 싸운 외국인의 
숫자를 웃돌았다. 이 중에는 이란 공화국 수비대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웠던 다수의 전투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자원병들의 면면도 파키스탄, 터키, 이란,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수단의 국민과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일하던 알바니아 및 터키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까지 광범위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 단체도 
많은 활동 인력을 보냈다. l992년 전쟁이 터지고 처음 몇 달 동안 이십여 명의 사우디아라비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세계 청년 이슬람 교도 회의는 치료를 목적으로 부상당한 전투원들을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까지 
호송하였다. 1992년 가을 레바논의 시아파 조직 헤즈볼라 소속 게릴라들이 도착하여 보스니아 군대를 
훈련시켰다. 나중에는 이란의 공화국 수비대가 훈련을 도맡다시피하였다. l994년 봄 서구의 정보 소식통은 
400명의 이란 공화국 수비대원들이 과격 게릴라 및 테러리스트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한 
미국 관리에 따르면 이란은 이것을 유럽 의 말랑말랑한 급소를 파고들 수 있는 호기로 보았다. 유엔에 따르면 
'무자헤딘'이 특수 이슬람 여단의 창설을 위해 3천 명에서 5천 명 가량의 보스니아인을 훈련시켰다. 보스니아 
정부는 '테러, 비합법, 전격 작전'에 '무자헤딘'을 투입하였는데 이들은 현지 주민들을 자주 괴롭히는 등 
보스니아 정부에게 또 다른 골칫거리를 안기기도 하였다. 데이튼 평화 협정은 모든 외국 전투원들이 보스니아를 
떠나야 한다고 못 박았지만 보스니아 정부는 보스니아 시민권을 부여하거나 이란 공화국 수비대원을 구호 
요원으로 등록시켜 일부 전투원의 보스니아 체류를 도왔다. "보스니아 정부가 이들 집단, 특히 이란에게 각별한 
신세를 졌다. "고 l996년 초 미국의 한 관리가 경고하였다. 보스니아 정부는 이들에 맞서기 힘든 것으로 
판명났다. 12개월 안에 우리는 떠나겠지만 무자헤딘은 여전히 남겠다는 생각이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처럼 이슬람 부국들은 보스니아의 전력 증강을 위해 막대한 자금 지원을 하였다. 1992년 
전쟁 초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공식 비공식 경로를 통해 보스니아에 1억 5천만 달러의 원조금을 제공하였다. 
겉으로는 인도주의적 목적을 내걸었지만 이 돈의 대부분이 군사 목적에 전용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보스니아측은 전쟁 발발 후 처음 2년 동안 1억 6천만 달러 상당의 무기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3 ~95년에 보스니아는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추가로 3억 달러의 군사 지원을, 5억 달러의 명목상 인도주의적 
지원을 받았다. 이란도 주요한 군사 원조국이었다. 미국 관리들에 따르면 이란은 매년 수억 달러어치의 무기를 
보스니아에 제공하였다. 또 다른 보고서에 따르면 전쟁 초기 몇 년 동안 보스니아로 유입된 총 20억 달러 규모의 
무기 가운데 80퍼센트에서 90퍼센트는 이슬람 국가들이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자금 지원에 힘입어 보스니아측은 
수천 톤의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수송 과정에서 몇 차례 무기가 압수되었는데 제일 처음에는 4천 정의 
소총과 1백만 발의 탄약, 그 다음에는 l만 1천 정의 소총과 30문의 박격포, 75만 발의 탄약 세 번째에는 지대지 
로켓, 지프, 권총 탄약이 포함되어 있었다. 압수된 무기들은 모두 주요 무기 공급국인 이란에서 적재되었지만 
터키와 말레이시아도 상당량의 무기를 제공하였다. 일부 무기는 보스니아로 직접 공수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자그레브로 공수된 뒤 거기서 육로로 옮겨지거나 해로를 통해 스플리트나 크로아티아의 여타 항구로 
선적되었다가 다시 육로로 수송되는 등 모두 중간에 크로아티아를 거쳤다. 무기 수송을 허용하는 대가로 
크로아티아는 무기의 5분의 l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으며 나중에 보스니아와의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탱크와 중화기의 반입은 금지시켰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기타 이슬람 국가들이 제공한 자금, 인력, 훈련, 무기에 힘입어 보스니아는 
누구나 '오합지졸'로 부르던 군대를 상당히 짜임새 있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l994년 
겨울 보스니아군의 조직적 응집력과 군사적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는 보고가 외부 관측자들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왔다. 새롭게 구축된 군사력을 앞세워 보스니아는 휴전을 깨뜨리고 먼저 크로아티이에 공세를 
퍼부어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봄에는 세르비아까지 공격하였다. 1994년 가을 보스니아 제5군단은 비하치의 
유엔 안전 지역을 벗어나 세르비아군을 몰아세우며 개전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면서 밀로세비치 대통령의 
지원 중단으로 잠시 주춤하던 세르비아계로부터 잃었던 영토를 상당 부분 되찾았다. l995년 3월 보스니아군은 
다시 휴전을 파기하고 투즐라 부근에서 대공세를 펼쳤으며 5월에는 사라예보 인근까지 밀고 올리 왔다. 
보스니아지역에서 이슬람 교도가 군사적 균형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 올 수 있었던 데는 같은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고 볼수 있다.
  보스니아 전쟁은 문명들의 전쟁이었다. 3개 1순위 참여자들은 모두 상이한 문명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이한 종교를 믿었다. 하나의 부분적 예외를 제외하면 2순위, 3순위 관여국들은 모두 정확히 문명의 경계선을 
따라 움직였다. 이슬람 국가와 단체는 너나 할 것 없이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지왼하며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에 맞섰다. 정교 국가와 단체는 너나 할 것 없이 세르비아계를 후원하며 크로아티아계와 이슬람 
교도에 맞섰다. 서방 국가와 서방 지도층은 크로아티아를 밀고 세르비아를 규탄하였으며 대체로 이슬람 교도를 
무시하거나 두려워하였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상이한 집단들 사이의 적대감과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으며, 
종교적, 문명적 정체성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슬람 교도 사이에서 이런 현상은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보스니아 전쟁이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단층선 분쟁의 1순위 당사자들은 같은 문명 
친족국들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 둘째 이런 도움은 전쟁의 전개 과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셋째 한 문명의 정부와 일반인은 단층선 분쟁에서 싸우는 다른 문명 사람들을 돕기 위해 피를 홀리거나 
돈을 내지 않는다.
  이 문명 펀가르기의 일부 예외가 있었다면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지도자들은 수사학적으로는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의 편에 섰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의 지원은 제한되어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유엔 안전 지역을 
보호하고자 미국의 공군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지상군 투입에는 반대하며 무기 금수 조치의 철회를 
주장하였다. 미국은 무기 금수 조치의 철회를 위해 동맹국들에게 압력을 넣지는 않았지만 이란에서 보스니아로 
들어가는 무기를 눈감아 주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무기 구입 자금 제공도 묵인하였다.
  1994년에는 무기 금수 조치의 관철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에는 알력이 생겼으며 
NAT0 내부에 중대한 대립이 발생할 조짐이 보였다. 데이튼 평화 협정이 타결된 이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여러 이슬람 국가들과 함께 보스니아군의 훈련과 무장을 위해 협력하는 데 동의하였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 전쟁 기간 중에 또 전쟁이 끝난 뒤에 미국이 문명의 형틀을 깨부수고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의 이익을 수호하면서 이슬람 국가들과 공조를 도모한 유일한 비이슬람 국가가 되었는가? 미국의 이 
일탈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 가지 가능성은 이것이 일탈 행동이 아니라 주도 면밀하게 계산된 문명적 현실 정치의 산물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은 보스니아 편에 서서 비록 성공은 못 거두었지만 무기 금수 조치의 철회를 위해 노력함으로써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들의 영향력이 이제까지 세속적이며 유럽 지향적이던 
보스니아에서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미국의 목적이었다면 미국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왜 묵인하였고 서방의 합법적 지원을 가능케 하였을 무기 금수 조치 철회를 왜 좀더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않았을까? 미국 관리들이 발칸 지역에 이슬람 원리주의가 확산될 가능성을 왜 좀더 
공공연하게 경고하지 않았을까? 미국의 행동을 풀이하는 또 하나의 설명은 미국 정부가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이슬람 우방국들의 압력을 받았고 그들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의 요구는 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이슬람 우방국들의 우호 관계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조성된 것이지 보스니아와는 직접적 
상관이 없으며 미국이 보스니아를 돕지 않는다고 해서 훼손될 관계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미국이 다른 
문제에서는 이란과 사사건건 부딪쳤고,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스니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놓고 이란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상황에서 왜 미국이 이란에서 보스니아로 흘러 들어가는 막대한 양의 무기를 암묵적으로 
승인하였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문명적 현실 정치의 고려는 미국의 태도를 규정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테지만 다른 요인들이 더 
중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인은 모든 국제 분쟁을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으로 구분하면서 전자의 펀에 
서려는 경향이 강하다. 전쟁 초기에 자행한 만행 탓에 세르비아는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악당들'로 
묘사되었고 반면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는 무력한 희생자로서의 이미지를 가꿔 나갈 수 있었다. 전쟁 기간 중 
미국 언론은 크로아티아계나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가 자행한 민족 청소나 전쟁 범죄, 보스니아군이 앞장선 유엔 
안전 지역 및 휴전 위반 행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미국인에게 보스니아는 웨스트(Rebecca 
West)의 표현을 빌리면 영원히 학살만 당하지 절대로 학살은 저지르지 않는, 무고하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 
발칸의 착한 민족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미국의 여론 주도층도 보스니아인에게 호의를 품었다. 미국은 문화 다원주의에 입각한 국가의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 초반 보스니아 정부가 자신의 이미지를 그런 쪽으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책은 다민족 보스니아를 일관되게 
고수하였다. 미국의 지도층은 한 민족 집단이 다른 민족 집단을 대량 학살하는 상황에서 다민족 국가의 건립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그들은 이 모순된 이미지의 공존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에 대한 연민을 확산시켰다. 미국의 이상주의, 도덕주의, 인도주의 본능, 단순함, 발칸 지역에 대한 
무지가 공통적으로 작용하여 미국은 친보스니아, 반세르비아 노선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미국은 
보스니아에 중대한 안보 이익이 걸려 있지 않았고 보스니아와 문화적 유대 관계도 전혀 없었으므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스니아의 무장을 지원하도록 허용하는 것말고는 딱히 보스니아를 도울 만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정부는 동맹국들을 소외시키고 전쟁을 
장기화로 이끌었으며 발칸 지역에 이란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이슬만 국가의 등장에 일조하였다. 결국은 
보스니아측도 말만 요란하게 하고 제 대로 지원을 하지 않는 미국의 태도에 환멸을 느꼈으며, 자신들이 생존하고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데 필요한 자금과 무기를 들고 달려온 이슬람 형제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보스니아는 우리의 스페인" 이라고 레비(Bernartl-Henri Levy)는 말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편집인도 그 
말에 동의하였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서 벌어진 전쟁은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즘을 상대로 벌였던 투쟁과 
정서적으로 일맥 상통한다. 이곳에서 전사한 사람들은 동료 이슬람 교도를 구하려다 산화한 순교자로 
추앙받는다." 참으로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문명의 시대에 보스니아는 만인의 스페인이다. 스페인 내전은 
정치 제도와 이념의 싸움이었고 보스니아 전쟁은 문명과 종교의 싸움이었다. 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파시스트들은 자신의 이념적 동지와 같은 대열에 서서 싸우고자 스페인으로 갔고, 민주주의 정부, 공산주의 정부, 
파시스트 정부는 그들에게 지원을 제공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서방 크리스트교 
국가들, 정교 국가들, 이슬람 국가 들의 외곽 지원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정교권, 이슬람권, 서구권의 주요 
강국들이 이 전쟁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4년 뒤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 세력의 승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발칸 지역에 거주하는 상이한 종교 집단들 사이의 전쟁은 소강 상태에 들어가거나 일시적으로 중단될 기능성도 
있지만, 누가 결정적 승리를 거둘 가능성은 별로 없으며 한때의 승리가 분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스페인 내전은 2차 대전의 전주곡이었다. 보스니아 전쟁은 문명들의 지속되는 층돌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유혈극이다.
  단층선 전쟁의 억제
  "모든 전쟁은 끝이 나게 마련이다." 이것이 기존의 상식이다. 이 상식은 단층선 전쟁에도 들어맞는가? 
들어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하다. 분쟁은 일정 기간 동안 완전히 중단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종식되는 
경우는 드물다. 단층선 전쟁은 잦은 휴전과 정전이 특징이지만, 핵심이 되는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포괄적 
평화 협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단층선 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사이의 지속되는 적대 관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걸핏하면 재발한다. 단층선 분쟁은 또 두 사회의 지리적 근접성, 상이한 종교와 문화, 
이질적 사회 구조,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된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사회가 성숙하여 저변의 갈등이 
사라지는 수도 있다. 혹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절멸시켜 분쟁이 야만적인 방식으로 신속하게 제거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닌 한 분쟁은 지속되며 폭력 사태는 거듭 재연된다. 단층선 전쟁은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단층선 분쟁은 영원히 이어진다.
  단층선 전쟁이 잠시라도 증단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결 조건이 충족 되어야 한다. 첫째는 1순위 참여자들이 
탈진하는 것이다. 인명 피해가 수 만에 이르고 수십만의 난민이 발생하며 도시들-베이루트, 그로즈니, 
부코바르-이 초토화되는 시점에 가서 사람들은 전쟁에 환멸을 느끼게 마련이며 양 진영에서 과격파들은 대중의 
적대감을 더 이상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한계점에 봉착한다. 그렇게 되면 몇 년째 질질 끌던 협상이 활기를 띠게 
되며 온건파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살륙전을 종식시킬 수 있는 타협점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놓고 6년 동안 이어진 소모전은 1994년 봄에 이르러 '기진 맥진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측이 
휴전에 동의함으로써 끝났다. 1995년 가을 보스니아에서도 '모든 진영의 탈진'으로 데이튼 평화 협정이 조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한 휴전은 그러나 자체적으로 한계를 안고 있다. 휴식 기간 동안 양 진영은 자원을 비축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어느 한쪽이 자신감을 갖게 되면 전쟁은 재발한다.
  일시적 정전에 도달하려면 또 하나의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 전쟁 당사자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협상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비1순위 참가국들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1순위 
당사자들 간의 직접 협상이나 이해 관계가 없는 세력들의 중재로 단층선 전쟁이 중단되는 법은 거의 없다. 
문화적 거리감, 강한 적대감, 서로에게 가한 폭력 행위 때문에 1순위 당사자들이 한자리에 앉아 어떤 형태가 
되었든 휴전을 위한 생산적 논의를 벌이기가 여간해서는 어렵다. 누가 어떤 조건으로 영토와 주민을 지배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근본적 대립이 거듭 수면으로 부상하여 좀더 제한된 문제들에 대한 합의마저도 어렵게 
만든다.
  공통된 문화를 가진 국가 또는 집단 사이의 분쟁은, 그 문화를 공유하고 그 문화 안에서 공인된 정통성을 
확보하고 그 문화의 가치관에 토대를 둔 해결책을 찾아낼 만한 적임자로서 양 진영의 신뢰를 받는 중립적인 
제3자 의 중재로 해결의 가닥을 잡기도 한다. 교황은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 분쟁을 효과적으로 중재할 수 
있다. 그러나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사이의 분쟁에서는 중립적인 제3자를 찾기란 여간해서 어렵다. 양 
진영이 모두 신뢰를 보내는 개인, 기관, 국가를 발견하기란 극히 어렵다. 중재에 나설 만한 후보자가 갈등을 빚는 
문명 가운데 어느 한쪽에 속하든가 또 다른 문화와 이해 관계를 가진 제3의 문명에 속하게 마련이어서 분쟁 
당사자들로부터 모두 신뢰를 얻지 못한다. 체첸인과 러시아인, 타밀인과 신할리즈인으로부터 교황이 중재 요청을 
받을리 만무하다. 국제 기구도 신통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분쟁 당사자들에게 증요한 희생을 감내하도록 
요구할만한 능력이나 의미 있는 혜택을 제공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단층선 분쟁은 이해 관계가 없는 개인, 집단, 기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친족국을 위해 결집하였고 
한편으로는 상대측과 평화 협상을 벌일 능력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친족국에게 평화 협정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할 능력이 있는, 이해 관계를 가진 2순위, 3순위 참여국들에 의해 종식된다. 문명별 세력 결집이 전쟁을 
격화시키고 장기화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을 중단시키는 데 충분 조건은 아닐지 몰라도 필요 조건이 
되기도 한다. 2순위. 3순위 관여국들은 전쟁 당사자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으므로 확전을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 
든다. 그들은 또 전쟁에만 몰입되어 있는 1순위 당사자들보다는 다채로운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복합적인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 가서는 전쟁을 끝내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친족국을 위해 결집하였으므로 그 친족국에 대해 영향력을 갖는다. 동조자는 이렇듯 
만류자가 된다.
  2순위, 3순위 관여국이 없는 전쟁은 확전될 가능성은 낮지만 핵심국이 결여된 문명에 속한 집단들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처럼 끝맺기는 그만큼 더 어렵다. 안정된 국가에서 일어나는 반란의 양상으로 전개되는 단층선 
전쟁과 의미 있는 문명 단위의 결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단층선 전쟁의 경우는 특히 까다롭다. 전쟁이 어느 정도 
지속되면 반란 세력의 요구는 일정한 형태의 자치를 원하는 수준에서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단계로 격상되는 
경향이 있는데 정부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정부는 대체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첫번째 단계로 반군에게 
무기를 버릴 것을 요구하지만 반군은 이를 거부한다. 정부는 또한 순전한 내정 문제라고 이해하는 사태에 외부 
세력이 개입하는 것에 당연히 반감을 갖는다. 사태를 내정 문제로 규정하면 다른 나라들도 개입을 피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된다. 체첸 사태에 접근하는 서방 국가들의 태도가 그러하였다.
  분쟁에 관련된 문명들에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을 때 문제는 더욱 꼬인다. 예컨대 l956년에 시작된 수단 내전은 
교전 당사자들의 힘이 소진된 1972년에 가서 막을 내렸다. 세계 교회 평의회와 범아프리카 교회 평의회가 비정부 
국제 기구로서는 이례적으로 눈부신 중재 활약을 벌여 남부 수단에 자치를 허용하는 아디스아바바 협정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l0년 뒤 수단 정부가 협정을 파기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반군의 요구는 과격해졌고 
정부의 입장도 강경해졌으며 또 한 번의 협상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도 실패로 돌아갔다. 교전 당사자들에게 
압력을 행사할 만한 실력이나 이해 관계를 가진 핵심국이 아랍 세계나 아프리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카터(Jimmy Carter)와 여러 지도자가 벌인 중재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케냐, 에리트레아, 우간다, 
에티오피아 같은 동아프리카 국가들의 노력도 무산되고 말았다. 수단과 아주 적대적 관계에 놓인 미국도 
이렇다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미국은 수단과 가까운 이란, 이라크, 리비아에게 중재 요청을 할 입장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사우디아라비아를 내세우는 수밖에 없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단에 대한 극향력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휴전 협상은 분쟁 양 진영에서 2순위, 3순위 세력이 동일한 수준으로 개입할 때 활발하게 
진척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일 핵심국이 분쟁을 종식시킬 만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1992년 유럽 
안보 협력 회의(CSCE)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의 중재에 나섰다. 이를 위해 분쟁의 1순위, 2순위, 3순위 
관척 세력(나고르노-카라바흐 거주 아르메니아인,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터키)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체코, 벨로루시, 미국으로 구성된 민스크 그룹이 발족되었다.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미국, 프랑스를 제외하면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체코, 벨로루시는 전쟁 종식에 힘써야 할 절박한 
자체적 이유도 없었고 또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다.두 3순위 관여국인 러시아와 터키가 미국과 협조하여 만들어 
낸 정전안을 나고르노-카라바흐 거주 아르메니아인이 거부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별도로 모스크바에 
아르메니아측과 아제르바이잔측을 불러 놓고 여러 차례 협상을 벌였고, 이것은 민스크 그룹과는 별개의 안을 
도출하여 국제 공동체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었다. 결국 분쟁 당사자들의 힘이 소진되고 러시아가 협상의 보장 
세력으로 이란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휴전 협정이 성사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은 2순위 관여자로서 
타지키스탄에서도 간헐적인 성공을 거둔 바 있는 휴전 협정을 도출하는 데 공조를 펼쳤다.
  러시아는 여전히 코카서스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또 국익에 보탬이 되는 한 자신이 후원하는 휴전을 
성사시킬 만한 능력을 앞으로도 보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보스니아와의 관계에서 미국이 처한 상황과는 
대조를 보인다. 데이튼 평화 혐정은 관심있는 핵심국들(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구성된 접촉 그룹이 
발전시킨 제안을 바탕으로 구축되었지만 최종 협정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다른 3순위 관련국들은 개입하지 
못하였으며 1순위 당사자 셋 중에서 둘은 협상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이 협정의 준수는 미국이 주도하는 
NAT0의 군사력에 의존한다. 만일 미국이 보스니아에서 군대를 철수할 경우 협정의 관철에 굳이 애써야 할 
이유가 유럽의 강대국들이나 러시아에게는 없으며, 따라서 보스니아 정부, 세르비아 계, 크로아티아계는 일단 
전력의 재정비가 끝나면 바로 전투를 재개할 공산이 크고, 세르비아 정부와 크로아티아 정부는 대세르비아와 
대크로아티아의 야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유혹을 느낄 것이다.
  퍼트넘(Robert Putnam)은 국가들 사이의 협상은 외교관들이 자기 나라 국민만이 아니라 상대국 국민과도 
교섭을 벌여야 한다는 점에서 '2단계 게임' 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헌팅턴은 권위주의 정부 
내의 개혁 세력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문제를 야당의 온건파와 논의 할 때 정부 내의 강경파와도 교섭을 
벌이거나 담판을 벌여야 하며 온건파는 온건파대로 야당의 강경 세력과 절충을 벌여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 2단계 게임의 참여자는 최소한 4명이며 그들 사이에는 최소한 세 관계 또는 네 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복잡한 단층선 전쟁은 적어도 6명이 참여하고 그들 사이에 적어도 7개의 관계가 존재하는 3단계 
게임이다.(그림 11.l 참조) 먼저 1순위, 2순위, 3순위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단층선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각 문명 내부에서 상이한 수준에 있는 관련자들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 존재한다. 이 
모델을 고스란히 따르는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다음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 2순위, 3순위 관련자들의 적극적 개입
  *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3순위 관련자들이 포괄적 조건으로 벌이는 교섭
  * 2순위 관련자들과 1순위 관련자들이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3순위 관련자들이 구사하는 당근과 채찍 
  * 2순위 관련자들이 1순위 관련자들에게 지원을 중지하거나 사실상 등을 돌리는 조치
  * 이런 압력에 따라 1순위 당사자들이 조건을 수락하는 것(물론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판단이 설 때)
  보스니아의 평화 정착 과정에서는 이 요소들이 모두 작용하였다. 펑화 협정을 이끌어 내려는 미국, 러시아, 
유럽 연합의 개별적 노력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주요 서방국들은 협상 과정에 러시아를 주역으로 끌어들이는 
데 거부감을 보였다.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맺어 온 역사적 관계 발칸 지역이 러시아에게 갖는 남다른 의미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배제를 격렬히 항의하였다. 러시아는 분쟁 타결을 위한 노력에서 자신이 주역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방적으로 조건을 관철하려는 미국의 성향을 강력히 비난하였다. 러시아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사실의 불가피성은 1994년 2월에 가서 명확해졌다. NAT0가 러시아의 견해를 묻지 않은 채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를 향해 라예보 일원에서 중화기를 철수시키지 않을 경우 공습을 감행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계는 이 요구를 일축하였고 NATO와의 정면 대결은 시간 문제였다. 옐친은 '러시아의 참여 없이 
보스니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 지적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얼마 뒤 러시아 정부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러시아가 사라예보 지역에 평화 유지군을 파견 한다는 
조건으로 그 지역에 배치된 무기를 거두어들이도록 세르비아계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외교적 쿠데타가 
분쟁의 악화를 예방하였고 서방에 러시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였을 뿐 아니라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와 세르비아계가 분쟁을 벌이는 심장부에 러시아군을 투입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 조치를 통하여 러시아는 
보스니아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서구와 평등한 동반자로서의 위치를 효과적으로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4월에 NAT0는 러시아의 의견을 묻지 않고 세르비아 진지에 대한 포격을 결행하였다. 이것은 러시아 
정치계에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옐친과 코지레프 외무 장관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그 후 관련 3순위 강대국들-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은 접촉 그룹을 결성하여 분쟁 
타결을 도모하였다. 1994년 6월 이 모임은 보스니아 영토의 5l퍼센트를 이슬람 교도-크로아티아 연합에 넘기고 
49퍼센트를 세르비아계에 할양할 것을 규정한 안을 만들어 데이튼 평화 협정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데이튼 협정의 이행을 위하여 부득이 러시아군의 평화 유지군 참여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3순위 관련국들이 아무리 합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2순위, l순위 주역들이 그 합의에 따라 주어야 한다. 
러시아의 외교관 추르킨의 말대로 미국은 보스니아에 의존하고 독일은 크로아티아에 기대며 러시아는 
세르비아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러시아는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 제제에 
동의함으로써 중요한 양보를 하였다. 세르비아가 신뢰할 수 있는 친족국으로서의 러시아는 때때로 세르비아에게 
압력을 넣어 세르비아가 거부하였을 법한 협상 조건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가령 1995년 러시아는 그리스와 
함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가 인질로 잡고 있던 네덜란드 평화 유지군을 석방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이 러시아의 압력 아래 받아 들인 조건을 파기하여 러시아를 
당혹감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일례로 1994년 4월 러시아는 고라즈데에 대한 공격을 증지한다는 약속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로부터 얻어냈지만 세르비아계는 얼마 뒤 그 약속을 깨뜨렸다. 러시아는 격노하였다. 러시아의 한 
외교관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가 "전쟁에 광분하였다." 고 선언하였으며 옐친도 "세르비아 지도부는 러시아와 한 
약속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러시아는 NATO의 공습에 반대하던 종전의 입장을 철회하였다.
  크로아티아를 지지하고 후원하던 독일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크로아티아의 행동에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투즈만 대통령은 카톨릭 국가인 크로아티아가 유럽 국가로서 승인받고 유럽 연합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이 크로아티아에 제공한 외교적, 경제적, 군사적 지원과 유럽의 
일원으로 수용되기를 갈망하는 크로아티아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투즈만 대통령이 많은 문제의 협상에 
응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1995년 3월 투즈만은 서구의 일원이 되려면 유엔 방어군의 크라주나 주둔을 
허용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서구에 합류하는 것은 투즈만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는 세르비아와 러시아를 흔자 
상대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한 유럽 외교관은 지적하였다. 투즈만은 또 크라주나를 비롯하여 세르비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점령 지역에서 민족 청소를 중지하고 동부 슬라보니아에 공격을 자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또 
다른 문제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은 만일 이슬람 교도와 결성하는 연방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서구로 들어갈 수 
있는 문호는 영영 막힐 것"이라는 위협도 받았다. 크로아티아에 대한 재정 지원을 주도적으로 떠맡은 독일이 
크로아티아의 태도에 특히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크로아티아와 발전시킨 긴밀한 관계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로 분할하겠다던 적어도 l995년 한 해 동안 거듭되었던 
투즈만의 거듭된 공언이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도록 막는 데 일익을 담당 하였다.
  러시아 독일과는 달리 미국은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와의 문화적 동질성이 희박하므로 강한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 게다가 미국은 입으로만 떠들었지 이란을 비롯한 이슬람 국가들이 무기 금수 조치를 
위반하며 보스니아에 무기를 반입하는 것을 묵인하는 것말고는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들을 뾰족하게 도운 일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들은 광범위한 이슬람 공동체에게 점차 고마움을 느끼고 자신을 그 
일원으로 여기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쿠웨이트가 공격당하였을 때는 즉각 응전에 나섰던 미국이 자신들에 
대해서는 '이중 잣대'를 구사한다고 비난하였다.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들은 어디까지나 희생자일 뿐이라는 
세인의 의식이 워낙 강하였으므로 미국은 그들이 강경한 입장을 누그 러뜨리도록 압력을 가하는 데 그만큼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들은 평화 제안을 거부하고 이슬람 우방국들의 지원을 얻어 군사력 
확충에 박차를 가하였고, 덕분에 주도권을 되찾아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타협에 가장 심하게 저항하는 세력은 1순위 당사자들이다. 코카서스 지역의 분쟁에서 재외 아르메니아인들의 
강한 지지를 등에 업은 극우 민족 주의 세력 아르메니아 혁명 연합(다슈나크)은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장악하고, 
아르메니아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도 수용한 1993년 3월의 터키-러시아-미국 평화안을 거부하면서 군사적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것은 민족 청소로 이어져 확전의 가능성도 높아졌고 좀더 온건한 아르메니아 정부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공세가 성공을 거두자 전쟁 및 터키의 봉쇄 조치 때문에 겪던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타개 하고자 터키 이란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던 아르메니아 정부는 곤흑스러운 입장에 
빠졌다. "알맹이는 카라바흐로 다 가고 예레반은 죽도록 고생만 한다'고 한 서방 외교관은 이 상황을 
묘사하였다." 아르메니아의 페트로시안 대통령은 국내의 민족주의 세력이 가하는 압력과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적 
이해 관계 사이에서 옐친 대통령처럼 균형점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l994년 말 아르메니아 정부는 
다슈나크당의 국내 활동을 불법화시켰다.
  나고르노_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처럼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도 강경으로 치달았다. 평화 
정착에 기여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던 크로아티아 정부와 세르비아 정부는 보스니아 내의 동족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느꼈다. 크로아티아 정부의 입장은 한결 수월하였다.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가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일지언정 이슬람 교도와 의 연방 구성에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대통령 과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지도자 카라지치 사이의 갈등은 개인적 반목까지 보태져 더욱 증폭되고 노골화되었다. 
1994년 8월 카라지치는 밀로세비치가 승인한 평화안을 거부하였다. 경제 제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부심하던 
세르비아 정부는 식량과 의약품을 제외하고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와의 모든 무역 거래를 증지한다고 
선언하였다. 그에 부응하여 유엔은 세르비아에 대한 제재를 완화시켰다. 이듬해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계를 
크라주나에서 몰아내는 크로아티아군의 움직임을 묵인하였고, 크로아티아계와 이슬람 교도가 세르비아계를 북부 
보스니아로 되돌려 보내는 조치를 눈감아 주었다. 그는 또 세르비아계가 점령한 동부 슬라보니아를 단계적으로 
크로아티아에 넘겨 준다는 데 투즈만 대통령과 합의하였다. 이어 밀로세비치는 강대국들의 성원 아래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를 데이튼 평화 회담에 사실상 넘기고 그들을 세르비아 정부의 대표단 일원으로 펀입시켰다.
  밀로세비치의 조치로 세르비아에 대한 유엔의 경제 제재는 철회되었다. 예상을 벗어난 그의 행동에 국제 
사회도 조심스러운 찬사를 보냈다. l992년까지만 하더라도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앞장서서 민족 
청소를 주도한 바 있는 전쟁광이 1995년에는 평화 구축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그를 
반역자로 여겼다.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정교 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비난하였고 크라주나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는 그를 반역자로 몰아세웠다. 그것은 PL0와의 평화 혐정에 서명한 이스라엘 정부를 
맹렬히 비난한 요르단 강 서안 정착자들의 복사판이었다. 단층선 전쟁을 평화적으로 끝내기 위하여 치러야 하는 
대가는 민족의 배신자라는 낙인이다.
  전쟁으로 탈진되고 3순위 관련국들의 압력이 거세지면 1순위, 2순위 관련국들의 행동에도 변화가 온다. 
온건파가 강경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거나 아니면 밀로세비치의 경우처럼 강경파가 온건 노선으로 재빨리 돌아 
서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반역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적보다도 더 
격렬한 증오의 대상이 된다. 캐슈미르의 이슬람 교도, 체첸, 스리랑카의 신할리즈 지도자들은 대의를 저버리고 
철천지 원수들과 타협을 모색하였다는 이유로 이집트의 사다트와 이스라엘의 라빈처럼 언제 암살당할지 모르는 
운명에 놓여 있다. 1914년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의 대공을 암살하였다. 데이튼 평화 협정 이후 
암살의 1순위 표적은 밀로세비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단층선 전쟁을 중지시키는 합의에 적어도 잠정적으로라도 도달하려면 그 합의 내용에 1순위 당사자들의 지역적 
세력 관계와 2순위, 3순위 국가들의 이익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보스니아를 51퍼센트-49퍼센트로 
나눈다는 것은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 영토의 70퍼센트를 점령한 1994년 당시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상이었지만 크로아티아계와 이슬람 교도가 공세를 펼쳐 세르비아계의 점령 지역을 거의 절반 가까이로 줄이자 
현실적 가능성으로 떠올랐다. 평화 과정의 정착은 또 민족 청소의 결과로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 인구의 
5퍼센트 미만으로 줄어들고 보스니아 내에서 세 집단의 구성원들이 폭력에 의해서건 자의에 의해서건 
분리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힘입었다. 뿐만 아니라 2순위 관련국과 대개 문명의 핵심국인 3순위 관련국은 가능성 
있는 분쟁 종식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동의 이해 관계나 현실적 안보 필요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분쟁을 
종식시키고 지역 분쟁이 지구 규모의 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세계 주요 문명의 핵심국들이 
자신의 이해 관계를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단층선 전쟁은 밑에서 끓어오르지만 단층선 평화는 위 
에서 똑똑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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