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체의 도전과 포스트모더니즘
“다양한 눈들이 있다. 스핑크스도 역시 이러한 여러 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진리들’이 존재한다. 고로 어떤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Friedrich Nietzsche, Sa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anden (Munchen- Berlin-New York, 1986), Bd.11, 34(230), p.498. 아래에서는 KSA로 줄여서 권수와 쪽수만을 밝혀서 인용함.
니체는 “실험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1885년의 잠언에서 그가 예언하고 있는 20세기와 21세기의 허무주의의 상태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니체가 허무주의의 도래를 예언한지 이미 한 세기가 지나간 현시점에서 허무주의는 이미 현대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표출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역사적 필연성을 꿰뚫어 보았던 니체의 철학적 통찰력 없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허무주의는 오늘날 “일상적 현실”이 되어버렸다.
니체 철학이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예언이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인식에 기인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글을 읽으면 니체의 이름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꼬리표를 붙이는 프랑스의 사상가들, 예를 들면 바르트, 블랑쇼, 들뢰즈, 데리다, 푸코 등은 몯 글읽고 글쓰는 방식에 있어 니체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W.Hamacher(Hrsg.), Nietzsche aus Frankreich (Frankfurt a.M./Berlin, 1086)을 참조할 것
한 마디로 말해서 니체는-하버마스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J.Habermas,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Zwolf Vorlesungen (Frankfurt a.M., 1985). p.104. 하버마스는 1968년 니체의 인식론적 글들을 편집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니체에 의해 감염되지 않는다”고 단언했으나, 1985년 <새로운 불투명성>에서 이 말을 번복하면서 자신이 착각하였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J.Habermas, Die Neue Unubersichtlichkeit. Kleine Politische Schrfiten V (Frankfurt a.M., 1985), p.60 을 참조할 것.
그렇다면 니체는 어떤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인가? 그리고 세기 전환기에 표출되고 있는 새로운 정신적 불투명성을 극복하는데 니체의 도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니체는 허무주의의 도래를 예언하는데 그치지 않고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였는가? 이 물음은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기전환기의 문화현상을 서술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신적 태도를 지칭하는가 하는 물음과 직결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의 허무주의가 진리의 해체, 절대적 가치의 탈가치화라는 부정적 현상만 아니라 진리의 다원성을 철저하게 수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예술적 태도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허무주의는 인간의 삶과 행위에 절대적 타당성을 가졌던 진리의 해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분열과 소외를 현대화 과정의 부정적 결과로 평가하지만, 조금만 신중히 생각하면 현대화를 야기하고 촉진시킨 것은 바로 분화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으로 파악되고 있는 진리의 다원성은 세계를 특정한 관점에서 인식하려는 학문적 태도의 절대화에 기인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관점을 취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이해의 수단에 불과한 이 관점이 세계 자체로 절대화되어서는 안된다. 허무주의는 “전체가 진리다”라는 전통적 세계이해에 대해 “부분이 진리다”라는 명제를 대립시킨다. 모든 대립적 명제는 그 선명성만큼이나 오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부분의 자율성과 다원성을 강조하는 니체는 결코 전체를 부정하고 부분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니체의 관심은 오히려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부분의 관점에서- 그것도 예술의 시각에서-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친화관계에 있는 것이 분명한 허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다원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전체와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를 실체화하지 않고서도 통일성을 사유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포스트모던적 사유의 화두를 이룬다.
니체의 허무주의에 관한 평가는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이성중심적 계몽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하버마스는 니체가 미래지향적 철학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전현대적 전통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자들은 니체의 사상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읽어낸다. 그러나 니체를 상반된 관점에서 평가하는 하버마스나 리오타르 모두 니체의 사상이 예술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합의한다. 하버마스는 현대적 계몽정신과 이성비판이 추구하였던 해방적 내용이 니체에 의해 처음으로 포기된다고 평가한다. 니체는 “주체중심적 이성을 이성과는 전혀 다른 ‘이성의 타자’와 대립시킨다” J.Habermas,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앞의 책, 117쪽
는 것이다. 니체가 이성에 대해 반대힘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인식과 도덕, 유용성과 목적활동의 모든 제한과 명법으로부터 해방된 탈중심적 주체성이다. 그런데 니체가 목적합리성에 대립시키는 “이성의 타자”는 오직 예술을 통해 타당성을 획득하며, 이 타자의 모습은 서양의 태고적 근원으로 되돌아갈 때 드러날 수 있다. 결국니체는 역사적 이성의 사다리를 이용하여 근원으로 되돌아가지만, 이성의 타자라는 신화에 도달하면 이 이성의 사다리를 던져 버린다고 하버마스는 비판한다.
하버마스의 철학적 반대자인 장-프랑스와 리오타르는 니체가 진단하고 있는 진리-다원주의를 적극 수용한다. “전체로부터 다원주의로”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표어가 말해주듯 이 전체의 해체는 탈현대적 다원주의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와같은 붕괴와 해체 현상에 대한 진단에 그치지 않고, 해체 자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함축하고 있다는 통찰로 발전된다. 진리의 다원성은 위기의 표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사유의 토대라는 리오타르의 통찰은 니체의 능동적 허무주의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니체에게 있어 허무주의가 삶의 양식이듯이 리오타르에게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를 토대로 하는 “정신적 태도” J.-F.Lyotard, Philosophie und Malerei im Zeitalter ihres Experimentierens (Berlin, 1986). p.97.
이다. 탈현대적 삶을 규정하는 특징 중의 하나는 “상실된 이야기에 대한 동경마저 사라져 버렸다.” J.-F.Lyotard, La Condition postmoderne. Rapport sur le savoir (Paris, 1979), p.68.
는 사실이다. 이렇게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두 전체의 해체를 직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상실된 전체에 대한 노스탤지어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는 다원성이다. 니체를 비판하는 하버마스 역시 현대의 특성이 다원성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다원성으로 말미암은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합의에 이르는 합리적 담론에서 찾는다. 이성의 문제점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려는 하버마스와는 달리 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예술 뿐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맥락에서 리오타르는 “유희”의 개념을 탈현대적 삶의 양식으로 부상시키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J.-F.Lyotard, "Das postmoderne Wissen", Theatro Machinarum, Heft 3/4(1982), pp.127-150에서 131쪽을 참조할 것. “서로 얽혀 있는 다양하고 번역불가능한 언어유희들이 가지고 있는 자율성과 특수성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것이 정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일 수 있는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그것은 ‘유희하게 내버려 두자. 그리고 조용히 유희하자’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절대적 진리가 탈가치화되어 다양한 형태의 진리로 해체된 허무주의 시대에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예술을 새로운 삶의 형식의 패러다임으로 설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허무주의 시대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 즉 인간이 의미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였다는 사실이다. 삶의 의미가 더 이상 전체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의미의 문제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니체에 의하면 의미는 주어져서 단지 발견만 하면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반전을 거듭하는 생성의 관점에서 보면 의미는 유한한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생성과정에 내맡겨져 있는 자신의 유한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예술에 다름 아니라고 니체는 단언한다. 이렇게 니체는 전통적으로 통용되어 왔던 학문과 예술, 진리와 허구의 관계를 전도시켜 예술이 학문에 선행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허무주의의 맥락에서 예술의 가치를 복권시키는 니체의 철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니체가 형이상학적으로 평가절상하는 예술은 전통적 예술과 어떤 점에서 구별되는가? 과연 예술은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으로 정착될 수 있는가? 우리는 진리와 허구라는 두 개념을 가지고 이 물음에 접근하고자 한다. <비극의 탄생>이 출간된지 12년 후에 덧붙인 머리말에서 니체는 “학문을 예술가의 시각에서 고찰하고, 예술을 삶의 시각에서 고찰하는 것” F.Nietzsche, Die Geburt der Tragodie, KSA 1, 14.
이 자신의 기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명제에서 우리는 예술이 학문과 삶, 학문적 진리와 삶의 의미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니체가 해명하고자 하는 학문-예술-삶, 진리-허구-의미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학문과 예술에 관한 전통적 견해를 거부한다. 학문은 진리를 추구하고, 예술은 허구를 표현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니체는 학문과 예술이 모두 삶의 표현이라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양자가 동일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학문과 예술의 동근원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언어”라고 말한다. 이 점은 <비극의 탄생>과 거의 같은 시기에 쓰여진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허위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언어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언어에 관한 니체의 견해는 학문과 예술의 관계를 규정하는데 핵심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삶의 의미에 관한 탈현대적 해석을 함축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Henk Manschot, "Nietzsche und die Postmoderne in der Philosophie", Dietmar Kamper(Hrsg.), Die unvollendete Vernunft: Moderne versus Postmoderne (Frankfurt a.M., 1987), pp.478-496을 참조할 것.
니체는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언어의 본질을 성찰함으로써 학문과 예술, 진리와 허구의 관계를 재규정하고 있다. 앞의 강령적 명제가 말해주고 있듯이, 그는 첫째 학문을 예술가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둘째 예술의 본질을 삶의 시각에서 해명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이 순서에 따라 우리는 우선 에술의 관점에서 학문과 진리의 허구성을 밝히고자 한다. 이 단계에서 학문과 옛ㄹ은 대립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학문은 근본적으로 학문의 영역을 넘어서는 예술에 의존함이 폭로될 것이다. 예술을 삶의 관점에서 규정하는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삶 자체가 예술이라는 점을 니체의 탈현대적 언어이해를 통해 분석할 것이다. 이 단계에서 거론되는 예술은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과 대립적으로 인식되는 예술이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과 대립되는 예술(예술1)이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삶 자체로서 파악되는 예술은 학문과 의미 창조라는 형이상학적 의미의 예술(예술2)이다. 니체는 이 형이상학적 예술이 비로소 미의 예술(예술1)과 진리의 학문이라는 이원론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끝으로 니체의 탈현대적 언어이해가 포스트모던적 삶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개진하고자 한다. 니체에 의하면 허무주의적 삶의 가치를 잴 수 있는 잣대는 “정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견뎌내고, 또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감행하는가?” F. Nietzsche, Ecce homo, Vorwort 3, KSA 6, 259.
하는 물음이다. 만약 진리의 다원성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다른 형태의 삶읽기와 글쓰기 방식이 필요하다. 니체의 언어이해와 예술이해에 함축되어 있는 탈현대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개진함으로써 허무주의 극복의 실마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2. “진리의 허구성”과 해석의 의미
문학과 학문은 모두 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문학은 상징적 언어를 통해 세계를 드러내려고 한다면, 학문은 개념적 언어로써 세계를 판단한다. 어떤 대상을 보고 “이것은 뱀이다”하고 말한다면, 뱀이라는 낱말과 이 낱말이 지시하는 대상이 일치해야 이 명제는 참된 말이 된다. 이렇게 학문은 특정한 대상을 지시하는 개념을 사용하여 세계를 판단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의 마음은 뱀이다”라고 말할 때, 어느 누구도 이 말이 대상으로 하는 사람이 뱀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이 경우 뱀이라는 낱말은 특정한 대상을 지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 전체를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뱀이란 낱말이 어떤 경우는 대상을 지시하는 개념이 되고, 또 어떤 경우는 사람의 전체를 드러내는 상징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와같은 차이는 단지 언어의 사용에만 있는 것인가? 니체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학문과 예술을 모두 인간의 세계이해 방식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문이 세계에 대처하는 인간의 특정한 방식이라면, 예술도 역시 인간이 세계와 만나는 특정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만약 학문과 예술을 인간의 자기이해와 세계이해의 방식으로 파악하면, 학문과 예술의 대립모델은 상당 부분 약화된다. 적어도 학문과 예술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견해가 상대화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니체는 학문과 예술이 비록 방법적 수단과 서술형식의 선택에 있어 차이가 있을지라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토대’위에 서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관해서는 Brigite Scheer, "Die Bedeutung der Sprache im Verhaltnis von Kunst und Wissenschaft bei Nietzsche", M.Djuric/J.Simon(Hrsg.), Kunst und Wissenschaft bei Nietzsche (Wurzburg, 1986), pp.101-111에서 101쪽을 참조할 것.
그렇다면 니체가 학문과 예술의 공통적 근원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비극의 탄생>에 덧붙인 자기비판의 시도에서 니체는 이 물음에 대한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니체는 우선 학문과 예술을 “삶의 증후”로 파악한다. 여기서 우리는 생리학적 용어인 “증후”(Symptom)에 주목하고자 한다. 증후는 한편으로 병이난 상처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나 사태를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조짐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양면성에 착안하여, 니체는 증후라는 낱말을 세계 내에 처해있는 인간의 실존적 상태와 세계에 대처하는 인간의 이해방식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이렇게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세계에 처해 있는 인간의 상태가 암묵적으로 전제되고 있다. 전통철학에서 세계이해의 방식은 로고스로 그리고 세계에 처해있는 인간의 상태는 파토스로 규정되어 왔다는 점을 상기하면, 니체는 로고스보다 파토스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로고스를 가지고 세계를 인식하고 통제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신체로 말미암아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인간은 신체에 다름아니라고 단언한다.
신체는 인간과 세계가 만나는 통로이다. 세계는 신체에 수많은 자극을 주고, 인간은 이러한 자극을 이성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세계에 대처한다. 만약 인간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세계의 자극에 그냥 내맡겨져 있다면, 인간은 실존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범람하는 자극의 홍수에 익사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이 서있을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다.그러나 세계 자체가 영원한 생성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생성 속에 세워진 토대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보존 욕구에 의해 창조된 ‘상징’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도덕, 학문, 예술 등은 모두 인간이 자신의 결핍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허구라고 니체는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학문과 예술의 이원론 마저도, 다시 말해 진리와 허구의 분리마저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학문과 예술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양자가 분리되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학문의 문제는 결코 학문의 영역에서 인식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F.Nietzsche, Die Geburt der Tragodie, Versuch einer Selbstkritik 5, KSA 1. 19.
니체에 의하면 진리와 허구, 참과 거짓이 구분되기 이전의 원초적 삶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다” 니체의 학문 비판에 관해서는 Gunter Aber, Wissenschaft und Kunst, M.Duric/J.Simon(Hrsg.), Kunst und Wissenschaft bei Nietzsche, 앞의 책, 9-25쪽을 참조할 것.
. 다시 말해 삶의 본질은 선악의 피안에서 찾아야 하며, 진리와 허위가 구분되기 이전의 상태로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원초적 삶의 관점에서 진리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하여 대체로 세 단계의 전략을 구사한다. 니체는 우선 삶의 원초적 방식이 “권력에의 의지”이며, 이 의지가 형이상학적 전제 조건인 “진리에의 의지”보다 우선함을 밝힌다. 두 번째로 니체는 전통적 진리이론인 대응성을 해체함으로써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실체론적 견해를 부정한다. 끝으로 니체는 세계에 내재하고 있는 의미를 전제하였던 “해석”(Interpretation)을 인간에 의한 의미 창조의 영역으로 확대함으로써 인간의 실존방식 자체가 해석임을 해명한다. 그렇다면 니체가 세계의 본질로 파악하고 있는 “권력에의 의지”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니체가 말하는 권력은 인간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서 형이상학적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권력은 한편으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 가능성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토대를 뜻한다. 만약 인식이 인간에 의한 세계지배의 수단이라고 한다면, 인식과 학문은 근본적으로 권력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허위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니체는 우화의 형식을 빌려 인식의 도구적 성격을 폭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인식을 발명함으로써 비로소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체로 보아 유약하기 그지 없지만 인간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이성 때문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고찰하면, 이러한 이성과 인식도 사실은 인간의 자기 보존을 위하여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렇게 기존의 전제 조건을 전도시킨다. 세계가 본래 규칙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연법칙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규칙성 없이는 실존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에 법칙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설사 세계에 법칙이 내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유한한 까닭에 이 법칙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고통을 느끼는 인간의 감각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자신의 상태를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전달할 수는 없다. 자신의 상태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반성을 가진 언어가 필요하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보존하기 위하여 보편적 구속력을 가진 세계이해를 발전시켜야 하며, 또 상호이해를 가능케하는 공동체적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오직 상대적 정당성 아래서만, 특히 자신의 지각이 일정 정도 규칙성을 가질 때에만 번성하는 동물의 종” F. Nietzsche, KSA 13, 14(122), 302.
이다. 자신의 삶과 행위에 정당성과 규칙성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실존의 보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공동체적 경험과 행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으며, 이 상호의존성은 언어를 통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다. 다시 말해 언어는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해 세계에 대처하는 특정한 방식의 결정체이다. 인간의 언어에 내재하고 있는 규칙성은 바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부여한 규칙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이론적 관심의 결과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기보존의 유용성에서 기인한다. 만약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 “세계를 지배하고 자신에게 예속시키기 위해서라면” 같은 곳.
, 인식과 학문은 근본적으로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 규정된다.
그렇다면 본래 권력의지의 산물인 이성과 인식이 선척적이라는 믿음이 정착된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생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삶의 과정에서 실존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인식과 존재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원래 허구적 성격을 상실하고, 본래부터 실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본래는 생성이 우선이고 존재가 부차적으로 만들어졌다면, 이 관계가 전도되어 존재가 우선하고 생성은 파생적인 것으로 굳어졌다고 니체는 말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성은 결국 인간의 세계이해방식에 규칙성을 부여하고, 이러한 규칙에 따라 인간은 세계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이론적 인간의 유형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론적 인간의 보편화와 더불어 주체와 객체, 존재와 인식의 이원론이 절대적 타당성을 가지고 자리잡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실존의 보존을 위해 이성과 인식이라는 허구를 만들었는데, 결국 인식에 의해 기만당하여 존재와 진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된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니체는 전통형이상학의 진리론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철학은 진리를 “지성과 사태의 일치”(adaequatio intellectus et rei) 이에 관해서는 M.Heidegger, Sein und Zeit, §44 (Tubingen, 1979), p.214를 참조할 것.
로 파악한다. 니체는 이 명제에서 지성과 사태의 본질이 이미 자명한 사실로서 전제되고 있음에 주목한다. 과연 우리는 지성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또 지성이 지향하는 사태와 존재의 본질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인가? 니체는 지성과 존재에 관해서는 어떤 확실성도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오직 특정한 형태로 이루어진 지성과 사태의 관계일 뿐이다. 전통적 진리론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그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 볼 필요가 있다. “대응적 표현방식에 대한 요청은 무의미하다. 표현수단인 언어는 본질 상 단지 관계만을 표현하도록 되어 있다. ‘진리’ 개념은 반의미적 모순이다. 참과 거짓의 모든 영역은 오직 두 존재 사이의 관계와 연관되어 있지, ‘즉자 존재’(An sich)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 ‘인식 자체’가 있을 수 없듯이 ‘존재 자체’도 있을 수 없다. 관계가 비로소 존재를 구성한다.” F.Nietzsche, KSA 13, 14(122), 303.
이 인용문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직접 관련된 몇가지 관점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일치로서의 진리는 언어와 관계가 있다. 둘째, 언어는 주체와 객체, 참과 거짓이 판단되기 이전의 관계를 표현한다. 셋째, 존재를 비로소 구성하는 관계의 설정은 일종의 허구적 해석 과정이다.다시 말해 주체와 객체가 미리 존재하고 다음에 진리로 진리로 판단될 수 있는 주-객-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세계-관계가 형성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주체와 객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주체와 객체와 같이 절대적으로 상이한 두 영역 사이에는 어떤 인과성, 정당성, (대응적) 표현도 없으며, 기껏해야 예술적 태도만이 존재한다” F.Nietzsche, Ueber Wahrheit und Luge im aussermoralischen Sinne, KSA 1, 884.
고 단언한다. 인식주체와 객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는 관계의 창조적 설정은 학문적 인식을 넘어서는 예술(예술2)의 영역에 속한다.
이론적 인간유형과 전통적 진리론을 비판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니체는 전통철학에서 열등한 것으로 배제된 기만, 허위, 허구, 상상 등의 낱말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진리는 추악하다. 우리는 진리로 인해 멸망하지 않도록 예술을 가지고 있다.” F.Nietzsche, KSA 13, 14(40), 500.
“진리는 오류의 일종이다.” F.Nietzsche, KSA 11, 34(253), 506.
“살기 위해서는 거짓이 필연적이다.” F.Nietzsche, KSA 13, 11(415), 193.
“허위는 권력이다.” F.Nietzsche, KSA 13, 11(415), 194. 니체에게 있어 진리와 허위, 예술과 권력이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M.Bindschedler, Nietzsche und die poetische Luge (Berlin, 1966)를 찹조할 것.
오해되기 쉬운 이와같은 명제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니체가 사유의 방식으로 수사학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항상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니체가 허구와 상상의 의미를 재평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성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바로 허위(Luge)” F.Nietzsche, KSA 12, 2(152), 141.
라고 니체가 단언할 수 있는 철학적 배경은 무엇인가? 앞에서 사펴본 바와 같이 니체는 예술(예술1)과 학문이 구분되기 이전의 삶을 예술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전제조건을 설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술(예술2)의 작업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은 영원히 변화하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유한성의 관점에서 보면 “무의미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삶의 토대를 건립하고자 한다. 이렇게 영원한 생성의 흐름 속에서 몰락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의 창조는 아름다움을 실현하는 통상적 에술과는 다른 형이상학적 예술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와같은 “가상에의 의지”를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속해있는 본성으로 파악한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세계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유한한 인간이 세계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허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무의미한 인간존재의 의미창조도 역시 해석의 한 양식이다. 모든 유기체가 살아가기 위하여 주위의 환경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관찰하면, 모든 생명은 지속적 “해석”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활동이 하필이면 왜 해석인가? 해석은 통상 문헌학적 관점에서 텍스트 속에 침전된 의미를 끄집어 내는 인식행위를 지칭한다. 그러나 니체는 해석의 행위를 이와같은 이와같은 의미추출의 활동에만 국한하지 않고, 의미투입의 근원적 행위까지 확대한다.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는 근원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텍스트는 의미를 창조하는 창조적 예술가의 활동에 의해 짜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은 의미를 ‘끄집어 내는’(aus-legen) 허구창조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세계의 법칙을 인식하고자 하는 학문과 세계의 본질을 아름다움으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예술(예술1)은 모두 의미를 끄집어 내는 파생적 해석에 속한다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형이상학적-예술적 근거 설정(예술2)은 근원적 해석에 속한다. 그러므로 “‘사유되기’ 이전에는 이미 무엇인가가 ‘허구적으로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F.Nietzsche, KSA 12, 10(159), 550: "Bevor 'gedacht' wird, muß schon 'gedichtet' worden sein".
무한한 흐름의 과정에서 생성과 반대되는 존재의 세계가 설정되고 난 다음에야 우리는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상상을 통해 만들어 놓은 것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해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행위는 인식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이 분명하다.
3. 언어의 이중성: 의식의 언어와 신체의 언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니체가 말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방식으로서의 해석과 의미를 창조적으로 쓰는 방식으로서의 해석은 모두 언어를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세계이해의 방식도 언어 속에 농축되어 있으며, 또 이러한 방식이 망각되게 된 원인도 언어 속에 내재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언어의 발생이 인간의 권력의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언어는 한편으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권력의지의 산물이며, 동시에 인간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의사소통 수단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와같은 언어의 이중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언어의 발생과정을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니체는 “지성의 주된 힘은 기만을 통해 전개된다.” F.Nietzsche, Ueber Wahreheit und Luge im aussermoralischen Sinne, KSA 1, 876.
는 사실을 밝힘으로서 언어도 역시 자신의 본질을 왜곡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폭로한다. 니체는 한편으로 개념의 생성과정을 역으로 추적하여 비유(Metapher)가 언어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 언어의 힘을 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한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비유로부터 발생한다. 니체의 이 주장은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비유는 통상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나타내는 수사학적 표현방법의 한 가지로서 인식된다. 예를 들면 “그녀는 뱀과 같다”고 말할 경우 뱀이라는 낱말이 표현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원관념은 숨기고 보조관념만 드러내어 표현하려는 대상을 설명하거나 그 특징을 묘사하는 방법을 우리는 은유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 비유와 은유는 본래 표현하려는 대상을 개념을 통해 규정하는데 한계가 있을 때 사용하는 보조수단으로 사용되었지만, 인간의 언어가 대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문제시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개념이 선행하고, 비유와 은유는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의 본래기능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니체는 이와같은 전통적 견해를 뒤집어, 비유가 본래 우선하며 개념은 비유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보여주기 위하여 니체는 뱀이라는 낱말을 예로 든다. 언어의 지시기능의 관점에서 뱀은 파충강 뱀목의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전적으로 정의된다. 과연 이러한 사전적 설명으로 뱀의 뜻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뱀의 뜻을 알기 위하여 또다른 낱말의 뜻을 알아야 한다면, 결국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비유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뱀이라는 낱말을 통해 머리 속에 떠올리는 영상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이 낱말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뱀이라는 기호가 “구불구불 휘감아 도는 모양”에 대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앞의 책, 878.
특정한 대상이 우리의 영혼 속에 각인한 이 영상에 대해 뱀이라는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순전히 자의적이다. 언어 자체가 근본적으로 비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길이 뱀처럼 산을 휘감아 돈다” 또는 “사람들이 창구 앞에 뱀처럼 늘어서 있다”는 표현은 근본적으로 뱀이라는 낱말이 본래 가지고 있는 비유의 힘에 근거하고 있다.
비유는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세계는 우리에게 수많은 자극을 한다면, 우리 인간은 이 자극들을 상징으로 옮겨 놓는다. 이렇게 외부의 자극을 상징화하는 능력을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언어는 “인간의 환상이라는 근원적 능력” 앞의 책, 883.
으로부터 발생한다는 니체의 통찰은 정확한 것이다. 만약 세계에는 해석될 수 있는 원형이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접근할 수 없다면,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해 번역된 자극들은 근본적으로 “기호언어”(Zeichensprache)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언어는 특정한 표현대상을 지시하고 대변하는 기호로서 기능한다. 여기서 문제는 지시대상이 근본적으로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에 내맡겨져 있으며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형태로 고정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즉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X" 앞의 책, 879.
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호는 결국 ”어떤 것을 대변하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면 운동이라는 개념은 운동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원천적 과정을 눈과 촉감의 기호로 번역한 것“ F.Nietzsche, KSA 13, 14(122), 302.
에 불과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다양한 언어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언어가 근본적으로 세계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념은 왜 특정한 대상을 지시한다는 편견이 지배하게 되었는가? 뱀이라는 낱말에서 보았듯이, 모든 언어는 비유와 은유로 환원된다. 니체는 외부의 신경자극(pathemata)이 영혼에 각인한 영상(symbola)을 제 1 비유라고 명명하고, 이 영상이 음성적 청각영상(phone)으로 번역된 것을 제 2 비유라고 부른다. 이 점에서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철학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Aristoteles, Peri hermenieias, IV, 16 b를 참조할 것.
여기서 우리는 낱말을 듣고 이해하는 과정은 거꾸로 진행됨을 알 수 있다. 니체는 특히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것은 신경자극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어떤 언어도 사물의 본질을 서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개념은 특정한 대상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인식되는 것인가? 니체는 언어가 인간의 근원적 체험을 기억하는 것을 포기할 때 일반적 개념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즉 언어가 표현대상의 개별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수많은 대상들에 대한 일반적 기호로서 기능할 때 개념이 된다는 것이다. 은유와 상징은 여전히 개별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면, 개념은 근본적으로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화함으로써” 앞의 책, 880.
생겨난다. 예를 들면 나뭇잎이라는 개념의 경우 세계에 실제로 존립하는 것은 수많은 나뭇잎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한 나뭇잎들이 나뭇잎이라는 개념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나뭇잎이라는 이데아가 존재하고 수많은 구체적인 나뭇잎들은 이데아의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개별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간과함으로써, 즉 다양한 사물들의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개별이 형성된다면, 개념은 결국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는 기만과 허위의 결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리들은 “본래 그것이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환상들”에 지나지 않으며, “닳아 없어져 감각적 힘을 상실해 버린 은유들”에 불과하다. 앞의 책, 881.
물론 언어의 은유적 성격을 망각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에게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직관적 은유는 똑같은 것이 없을 정도로 개별적이기 때문에 의사전달과 사회적 유대를 위해서는 일반적 법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념의 거대한 건축물은 인간의 삶에 규칙성, 안정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인간은 본래 자신의 창조적 성격을 망각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언어의 힘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언어는 자연상태로부터 문화상태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신에게 미친 세계의 자극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일반적 언어는 필연적이다. 거꾸로 보면 사회적 필요에 의해 생성된 일반언어는 다양한 개인들의 욕구, 의견, 사상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합의를 전제로 하는 일반언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종결하는 평화계약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에 함축되어 있는 권력의지를 “진리에의 의지”로 위장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이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 구속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진리인가?”가 동시에 결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 사회계약과 더불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타당하고 구속력을 가진 사물의 명칭이 발명된다”는 것이다. 역사과정을 되돌아 보면, 우리는 특정한 대상에 대해 시대적으로 항상 다르게 말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언어를 만드는 입법은 동시에 진리의 첫 번째 법칙을 제정한다. 이때부터 진리와 허위의 대립이 처음으로 생겨난다.” 앞의 책, 877.
이 인용문에서 니체는 사물에 대한 개념적 명명과 사회질서의 정립이 동근원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사회는 질서를 확립하고, 규칙을 정립하는 진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권위의 상징으로서 “진리”를 허구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사회적 질서이다. 진리와 허위, 참과 거짓 사이의 경계를 긋는 것은 다름 아닌 권력이라는 니체의 통찰은 이미 푸코의 권력이론을 선취하고 있다. 진리와 허위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이미 진리의 영역에 있어야 하며, 그는 이 경계선이 허구의 결과라는 점을 은폐할 수 밖에 없다고 푸코는 말한다. 이에 관해서는 M.Foucault, Die Ordnung des Diskurses (Frankfurt a.M./Berlin/Wien, 1977), p.15을 찹조할 것.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적 질서의 건립과 동시에 개념이 비유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형성과 진리에의 예속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결합되어 있는 동일한 사건의 양면을 형성한다. 일반적 개념의 생성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맥락에서도 진리는 질서, 규칙, 법칙으로서 서술된다. 다시 말해 진리의 언어는 사회적인 것을 개별적인 것, 유일한 것 보다 더욱 높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니체의 이러한 주장을 거꾸로 고찰하면,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인 한 일반적 언어는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사회는 추상적 도식화와 개념적 언어를 구체적이고 은유적인 언어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언어의 본래적 원천은 망각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이 “예술가적으로 창조하는 주체라는 사실” F. Nietzsche, 앞의 책, 883쪽
을 망각함으로써만 안정과 질서 속에서 살 수 있다. 그러나 본래 허구적으로 설정된 안정의 토대, 즉 진리가 경직되고 고정되면 근본적으로 생성의 과정을 왜곡하기 때문에 오히려 삶에 해가 된다. 결국 언어는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허구와 이상을 만들어 내고, 이 이상은 삶의 규칙을 부여하는 진리를 창조한다. 이 진리가 새로운 삶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인간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하여 언어가 가지고 있는 비유적 능력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
그러므로 전통적 진리가 삶에 유해하다는 것이 보편적인 허무주의 시대에 요청되는 것은 예술가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회복하는 일이다. 니체가 언어를 개념적 언어와 시적인 언어, 의식의 언어와 신체의 언어로 구분하면서, 이 모든 언어의 양식들이 본래 비유로부터 발생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학문과 예술, 개념과 비유, 담론과 직관은 모두 “삶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라고 니체는 말한다. 인간은 과학적 인식을 통해 획득하는 규칙성으로 외면적 위협에 대처하기도 하며 또 예술을 통해 허상과 아름다움으로 가장된 삶만을 실제적인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세계와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러나 허무주의 시대에는 과학적 인간과 예술적 인간, 담론과 직관이 아무런 관계없이 따로 존재한다. 이에 관해서는 앞의 책, 889쪽을 참조할 것.
따라서 니체의 궁금적 관심은 무한한 삶의 흐름으로부터 도피하는 개념적 언어를 은유적 언어로 환원시킴으로써 경직된 삶의 토대를 창조적으로 변형시키는데 있다. 왜냐하면 한 때 삶에 유용하였던 인식의 틀이 이제는 삶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에 의해 설정된 허구와 이상은 유한할 수 밖에 없는데도,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이상을 절대화함으로써 결국 이상의 노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냉정시대에 겪었던 이데올로기의 폐해는 이런 사실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결국 모든 문제는 인간의 “유한성”을 망각한데서 기인한다.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현세적 위로의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관해서는 F.Nietzsche, Die Geburt der Tragodie, Versuch einer Selbstkritik 6, KSA 1, 22를 참조할 것.
인간의 유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의 신체이다. 언어가 신체에 전달된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발생하였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니체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전도시킴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이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데까르트는 존재를 정신과 신체로 구분하면서 상상력과 오류의 가능성을 신체와 연관된 인식능력에 부여한다. 인간에게 있어 신체와 연관된 지성은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시간이 걸려야만 진정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데카르트에게 있어 오류와 편견의 제일원인이다.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자신의 의도가 전통형이상학자들과 같이 사물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자의적으로 발명하려는데” R.Descartes, Tait'e de la Lumi`ere 6, AT, XI 36. 니체의 데까르트 비판에 관해서는 T.Borsche, "Intution und Imagination. Der erkenntnistheoretische Prspektivenwechsel von Descartes zu Nietzsche", M.Djuric/J.Simon(Hrsg.), 앞의 책, 26-44쪽을 참조할 것.
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도 역시 오로지 그와같은 허구를 통해서만 신체적 본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상상력이 인간의 신체와 관련된 해석능력이라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체적 인식능력” Aristoteles, De Anima, III 3, 428 a 1-4.
으로 규정한 상상력(phantasia)은 감각과 오성 사이를 매개하며, 기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수동적 표상능력으로서 상상력은 오성과 감각에 의해 각각 상징과 기호를 공급받으며, 능동적 표상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은 직접적으로 지각된 것을 그것이 부재할 때에도 표상하고 또 이 표상들을 새롭게 구성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철저하게 사유하고자 하는 니체에 있어 본질적인 것은 바로 인간의 신체이며, 신체와 연관된 인식능력과 언어이다. 니체에게 있어 신체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 통로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전도시켜 신체에 우선성을 부여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신체를 “커다란 이성”으로 규정하고, 신체의 도구에 불과한 의식은 “작은 이성”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F.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KSA 5, 38.
커다란 이성은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허구를 창조할 수 있는 상상력이며, 반면 작은 이성은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전제조건 내에서 법칙과 안정을 정립하는 오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은유적 언어는 살아있는 신체의 언어이며, 개념적 언어는 모든 것을 지배의 대상으로서 고정시키는 의식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바로 의식의 언어가 신체의 언어를 지배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상상력을 말살하였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도래했다고 진단한다.
4. 허구의 진실성: 철학에서 수사학으로
언어의 이중성에 대한 니체의 통찰은 “언어가 세계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한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언어를 통해 모사되고 서술되고 판단되어야 할 물자체, 세계 자체, 존재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언어는 세계를 특정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까닭에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에 요청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실성”(Redlichkeit, Wahrhaftigkeit) 이에 관해서는 Jean-Luc Nancy, "Unsre Redlichkeit! Uber Wahrheit im moralischen Sinne bei Nietzsche", W.Hamacher(Hrsg.), Nietzsche aus Frankreich, 앞의 책, 169-192쪽을 참조할 것.
이라고 말한다. 말머리에서 언급하였듯이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의 특징을 진리의 다원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양한 진리들이 존재한다. 고로 어떤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에서 니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니체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한다고 해서 진리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니체는 진리를 주장함에 있어 그것이 허구와 상상력에 근거한 창조적 예술 행위의 결과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실성은 허구가 진리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면서도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 즉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태도를 의미한다.
우리는 진리를 진실성으로 대체하는 니체의 관점에서 탈현대적 글읽기와 글쓰기의 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학문과 예술, 진리와 허구에 관해 전통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위계질서를 전도시킨 니체의 철학은 “다른” 세계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니체가 비록 진리로부터 허구에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이론 역시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상대주의의 입장을 철저하게 고수하고 있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이 “진실성에 의한 도덕의 자기 극복” F.Nietzsche, Ecce Homo, Warum ich ein Schicksal bin 3, KSA 6, 367.
을 추구한다고 고백한다. 즉 형이상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성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관점의 변화를 통해 도덕과 진리의 의미가 변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의미의 문제” 자체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리가 절대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실체와의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은 결코 인간본성으로부터 도출된 정언명법을 뜻하지 않는다. 진리와 도덕은 오히려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적 관점”(focus imaginarius) I.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 672 (Hamburg, 1956), 606. 칸트는 이 곳에서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을 추론해 내는 이성의 필연적(apodiktisch) 사용과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을 설정하는 가언적(hypothetisch) 사용을 구분하고 있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예술의 관점에서 이성의 가언적 사용을 규정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을 말한다. 만약 일반적 진리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일반적 규칙을 구체적 삶에 적용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삶에 타당한 일반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에 유용한 의미를 실험적으로 창조해야만 한다. 진리는 본래 다원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산출된 다양한 진리들은 어떤 것도 결코 절대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양한 진리들에 대해 유일하게 구속력있는 공통지평은 자신의 진리가 허구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진실성"뿐이다. 허무주의 시대의 "마지막 덕성" F.Nietzsche, KSA 12, 1(145), 44: "이 마지막 덕성, 즉 우리의 덕성은 바로 진실성(Redlichkeit)이다."
으로 제시되고 있는 진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는 일종의 오류와 허구라는 사실을 직시할 것을 요청하며, 어떤 형태의 도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가능성은 결국 허구와 허위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길 뿐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다양하게 존립하는 도덕과 진리들에 현혹되지 않고 삶을 촉진시키는 유용한 환상들을 찾는 자유로운 사유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의미창조의 예술가로 이해할 때에만 "인간은 오직 허구만을 만들어낸다"는 허무주의적 인식을 견뎌 낼 수 있다. 그렇지만 니체가 말하는 허구는 진리 또는 현실과 대립되지 않고,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 바로 현실과 진리로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니체가 모든 도덕주의자들에게 요청하는 진실성은 탈현대적 삶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진리와 진실성을 언어의 이중성과 연관시켜 파악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단순히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만이 아니라 그 자체 세계이다. 따라서 언어는 세계이해에 있어 한편으로는 포괄적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가 언어 밖에서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가 한편으로는 포괄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리와 문자로서 가지는 물질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항상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물질성 때문에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세계를 일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으로 모아진다. 이 문제는 결국 어떻게 자신의 관점에 묶일 수 밖에 없는 다양한 개인들이 어떻게 하면 공동체적 지평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도덕적 물음과도 직결되어 있다. 탈현대적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도덕적 위기가 다양한 것을 종합적으로 사유할 수 없는 이성의 무능력 때문에 발생하였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공동체적 지평이다.
그렇다면 다원성을 토대로 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공동체적 지평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 언어가 일반적인 것을 지향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사용되는 순간에만 나와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니체의 통찰은 탈현대적 합의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니체는 절대적 진리에 의한 합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만 언어자체가 의사소통의 필요성에 의해 발생하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비록 담론을 통해 합의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언어가 비유를 통해 본래 전달하려는 세계이해는 약한 합의의 토대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자체가 본질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공동체적 세계이해는 결국 기호들의 상호작용과 유통과정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따라서 감각적 기호들의 풍요로움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물론 니체의 이러한 관점은 경직된 개념으로부터 언어를 해방시켜 비유의 힘을 다시 부여하면, 언어는 스스로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니체는 언어의 본질인 비유를 실현할 수 있는 글읽기 글쓰기의 전술로 수사학과 아포리즘을 제안한다. 주지하다시피 수사학은 오랫동안 진리의 관점에서 매도되어 왔다.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과는 달리 수사학은 언어를 오직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표면적 수단으로 인식하여 왔다. 예컨데 플라톤은 수사학을 쾌락과 오락을 산출하는 예술로 파악함으로써 수사학을 철학의 하위 분야로 설정한다. 그러나 언어는 근본적으로 표면적 물질성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수사학과 철학의 관계를 전도시킨다. 특정한 효과를 얻기 위하여 언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수사학이라는 전통적 견해에 반대하여, 니체는 언어의 생성 과정에는 '무의식적 예술'의 수단이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언어 속에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인간의 권력의지가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언어가 권력의지의 표현이라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권력의 요소를 뽑아내는 수사학은 다름아닌 언어의 본질이라고 니체는 강조한다. 진정한 의미의 수사학은 삶의 의미를 확보하려는 인간의 무의식적 예술을 언어 속에서 발견하고 고정시키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이렇게 언어는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작용하는 장소이다. 따라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이해를 포착하려면 언어의 수사학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언어 양식들은 동시에 언어 자체에 작용하고 있는 예술의 양식이다. 다시 말해, 은유, 환유, 대유는 언어를 가지고 유희할 수 있는 장식의 수단이 아니라 언어의 근본적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허상이 진리와 대립되지 않듯이 수사학적 은유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다. 니체는 형식을 단순히 표면적인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형식은 내용을 규정하고, 내용은 오직 형식을 통해서만 표현되고 전달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형식과 내용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아포리즘을 "다른 모든 사람이 한 권의 책에서 말하는 것을 열 문장으로 말하는 것" F.Nietzsche, Gotzen-Dammerung 51, KSA 6, 153.
이라고 정의한다. 대상을 지시하고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 언어라는 전통철학은 근본적으로 생성과정에 있는 세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지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언어를 가지고 대상으로 고정될 수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이 바로 아포리즘이다. 따라서 니체는 "기호의 숫자와 규모에 있어서는 최소이지만 기호의 에너지에 있어 최대를 추구하는" F.Nietzsche, 앞의 책, 155쪽.
글쓰기 방식을 추구한다.
그런데 아포리즘의 탈현대적 글쓰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진실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포리즘은 한편으로 진리의 근원이 되는 허구라는 허무주의적 인식에 근거한다. 그러나 니체는 다양한 진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로운 가치 창조의 단초로 삼는다. "근원에 대한 통찰과 더불어 근원의 무의미성이 증대된다"고 주장하면서 니체는 근원으로부터 배제된 주변적인 것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근원의 무의미성을 간파하고 나면,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것,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것이 점차 색깔과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풍부한 의미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F.Nietsche, Morgenrothe, Erstes Buch 44, KSA 3, 52.
탈현대적 글쓰기는 이렇게 주변의 것, 무의미하다고 여겨진 것의 의미를 들어냄으로써 삶의 새로운 중심을 창조해 가는 해석의 작업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설정한 허구의 허구성을 인식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너의 사상의 반대로서 사유될 수 있는 것에 대해 물러서거나 침묵하지 말라" F.Nietzsche, Morgenrothe, §370, KSA 3, 244.
고 제안한다. 결국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설정한 허구를 진리로서 고정시키거나 절대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니체가 전통적 도덕을 파괴하면서 더욱 커다란 자기극복의 도덕을 요구하고, 전통적 진리를 부정하면서 더욱 힘든 진실성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삶의 방식을 일구어 나갈 수 있는지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다원주의적 사회라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문제를 이미 해체되어 버린 전체성과 통일성을 복원함으로써 해결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원주의 시대의 삶에 맞갖는 다른 형태의 이상과 허구를 필요로 한다. 인간이 유한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초월성을 극복하려는 이중적 존재이고 또 인간의 언어가 전체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특정한 대상을 지시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면, 새로운 허구와 이상은 이러한 이중성을 철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허구와 이상이 결국 세계를 창조하는 인간의 문제라고 한다면, 예술과 예술가의 문제는 탈현대적 인간에게 던져진 "새로운 물음표" F.Nietzsche, KSA 13, 11(328), 140.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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