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맑스주의는 흔히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철학과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으로서 정치경제학, 그리고 역사유물론이라는 역사 및 혁명이론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엥겔스가 ?반듀링론?에서 맑스의 이론적 요소를 옹호하기 위해 그 구성요소를 세 가지 부분으로 구분하여 서술한 이래, 그리고 레닌이 ?맑스주의의 세 가지 구성요소와 원천?에서 반복한 이래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인정된 것이다. 그리고 헤겔에서 정점에 이른 독일의 철학과 스미스, 리카르도(D. Ricardo)에 의해 과학으로 확립된 영국의 정치경제학, 오웬(R. Owen)이나 생 시몽(Saint Simon), 푸리에(Ch. Fourier) 등으로 대표되던 이전의 공상적인 공산주의 운동이 그 각각의 원천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대부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이나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 등과 구별되는 맑스의 고유한 철학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명시적으로는 알튀세르에 의해 반복하여 던져졌으며,L. Althusser, Pour Marx, 이종영 역, ?맑스를 위하여?, 백의, 1996; L. Althusser et. al., Lire 'le Capital', 김진엽 역, ?자본을 읽는다?, 두레, 1991.
묵시적인 형태로는 루카치나G. Lukcs, 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 Studien uber marxistische Dialektik, 박정호/조만영 역, ?역사와 계급의식?, 거름, 1986.
그람시A. Gramsci, Prison Notebooks, 이상훈 역, ?옥중수고?, 1-2, 거름, 1987/ 1993.
등에 의해 던져졌으며, 우리 역시 근대 철학과의 관계 속에서 나름대로 던지고 대답하려했던 질문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와 유사한 질문을 정치경제학에 대해 던져야 한다: 스미스나 리카르도와 구별되는 맑스의 고유한 정치경제학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는 철학에 대한 질문과 유사하지만, 그 질문이 던져지는 지형은 매우 다르다. 철학의 경우 맑스 자신은 자신의 고유한 입지점을 마련한 이후 어떠한 철학적 저작도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기묘한 ‘부재’가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어쩌면 명시적으로는 부재하는 것을 찾아내려는 질문이며, 당연해 보이는 질문이다. 반면 정치경제학과 관련해서 보자면, 맑스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 방대한 분량으로 남아 있으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관한 매우 체계적인 연구와 서술이 분명히 있다는 점에서,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고, 그런 만큼 부당해보이는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질문이 던져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편으로는 맑스 자신이 자신의 연구를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라는 제목으로 지칭하고자 했으며, 평생을 건 주저인 ?자본?에도 동일한 제목의 부제를 붙인 만큼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기획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을까?유사하게 발리바르는 맑스에게서 ‘정치경제학 비판’의 문제설정을 정치경제학과 구별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맑스의 ‘비판’이 정치경제학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준 바 있다(E. Balibar, Cinq etude de l'economie politique, 이해민 역, ?역사 유물론 연구?, 푸른산, 1989, 111-118쪽).
정치경제학에 대한 그 비판이 또 하나의 정치경제학을 이룬다는 것은 일종의 반어(irony)일까?
다른 한편 ‘자본’에 관한 맑스의 연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로서 정의되는 근대 사회에 대한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비판이다. 고전적 정치경제학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어떤 명제의 추가나 비판적 정정이란 형태가 아니라 근본적인 단절의 지점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맑스는 스미스나 리카르도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구획을 이루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맑스의 비판이 겨냥하고 있는 정치경제학과 다른 또 하나의 정치경제학을 구성하는가?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잉여가치론과 계급투쟁이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개념--비록 그것이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라고 해도--의 비판적 추가로써 정치경제학과 맑스의 ‘정치경제학‘ 사이에 있는 차이가 근본적 단절임을 보여줄 수 있을까? 더구나 비록 매우 겸손한 자평이기는 하지만, 잉여가치와 계급투쟁은 모호하게나마 이미 리카르도에게 있었던 개념이라는 것이 맑스의 생각이라면, 그것은 이미 맑스 이전에 있던 것이고, 고전 경제학 내부에 있던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지 않을까?실제로 신고전주의 경제학자의 일부, 혹은 스라파(M. Sraffa)같은 신-리카르도주의자가 맑스의 개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고전주의와 맑스주의 경제학 간의 구별선을 명확하게 긋는 것이 끊임없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러한 사실의 단면이자 반증이 아닐까?
이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가게 한다. 스미스와 리카르도의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은, 정치와 분리된 경제의 관념에 기초하며 그것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내지 근대의 가장 지배적인 ‘담론’이며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E. Balibar, ?맑스의 계급정치 사상?, 서관모 편, ?역사유물론의 전화?, 민맥, 1993; M. Ryan, Marxism and Deconstruction: A Critical Articulation, 나병철/이경훈 역, ?해체론과 변증법?, 평민사, 1994.
그런데 맑스의 ‘정치경제학’이 스미스와 리카르도의 이론에서 비과학적인 것의 수정이거나, 아니면 거기에 몇 개의 명제를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리하여 그것과 근본적인 단절의 지점을 마련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근대 내지 자본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대로 더욱 철저히 근대적인 ‘담론’ 내지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닐까?실제로 다음 절에서 보다시피, 맑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에서 푸코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맑스에게 고유한 ‘정치경제학’이 있는가 하는 질문은,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고유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근대성과 연관해 맑스주의를 다루려는 우리의 문제설정에서 매우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은 맑스에게 정치경제학 비판이란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무엇을 비판하려는 것이었으며, 그 비판을 통해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맑스가 마련한, 하지만 이후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 의해 가려지고 은폐되었던 공간을 찾아내고 확장하여, 맑스의 근대 비판으로서 정치경제학 비판이 그리는 새로운 탈주선을 좀더 멀리 밀고갈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2.푸코의 정치경제학 비판
?말과 사물?에서 푸코의 연구는 어떤 담론이나 인식, 판단 등이 그 속에서 전개되는 지반을, 그리하여 다양한 담론들의 역사적 한계를 규정하는 무의식적인 인식론적 배치로서 에피스테메(episteme)를 대상으로 한다. 그는 현대에 이르러 근본적 균열과 해체에 당면하고 있는 근대적 사유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상이한 에피스테메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로 흔히 간주되는 15-16세기, 프랑스에서는 고유하게 ‘고전주의 시대’(l'age classique)라고 불리지만, 보통은 바로크 시대라고 불리는, 넓은 의미에선 근대의 일부를 이루기도 하는 17-18세기, 그리고 푸코가 고유하게 제한해서 사용하는 근대로서 19세기가 그 상이한 에피스테메에 해당하는 역사적 시간이다.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ressemblance)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동키호테가 잘 보여듯이 거대하다는 유사성만으로 풍차와 거인은 등치된다.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지리라는 생각, 물개 거시기를 먹으면 정력이 좋아지리라는 생각... 이는 장소적 인접성에 의한 적합(convenientia), 유사성에 의한 모방/경쟁(aemulatio), 가변성과 다가성으로 인해 보편적 적용영역을 갖게 되는 유비(analogie), 사물들을 등가화시키는 위험한 힘으로서 공감(sympathie)의 형식으로 진행된다.M.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이광래 역, ?말과 사물?, 민음사, 45-50쪽.
이는 인간이나 개체 각각이 하나의 소우주(microcosme)로서 대우주의 질서와 일정한 상응관계에 있을 것이라는 관념을 통해 이론적 표현을 얻기도 한다. 16세기 지식이 마술이나 박학(erudition)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럴 필요가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같은 책, 58쪽.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표상’(representation)으로 특징지어진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에서 나의 존재는 생각으로, 즉 표상으로 환원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각된 것이다’라는 버클리의 말에서도 존재는 지각으로, 다시 말해 표상으로 환원된다. 나아가 세계의 질서, 사물의 질서는 이 표상들의 질서로 환원되며, 따라서 표상들의 질서를 통해서 그것은 포착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또 하나의 변화는, 데카르트가 잘 보여주듯이, 이 표상들의 유사성에 ‘속는’ 것은 비이성의 영역으로, 광기의 영역으로 전락하며, 이전과 달리 유사성은 이제 오류의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같은 책, 80쪽.
반대로 표상들의 동일성과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그 차이들이 분지되는 지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표상들은 질서지워진다. 그 질서지워진 표상은 표(表, tableau)로 요약된다. 린네의 분류학은 이런 의미에서 이러한 고전주의적 피스테메에 따라 체계가 만들어져 가는 양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같은 책, 181-182쪽.
동일성과 차이를 가르고, 그것을 통해 질서지우는 시선이 이제 동키호테의 자리를 대체하며, 그것을 비이성이란 이름으로 어둠 속에 묻어버린다.
근대의 에피스테메는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와 대비하여,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객체의 형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칸트는 데카르트와 달리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설정한다. 한편으로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표상을 조건짓는,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물 자체(Ding an sich)가 그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표상이 가능하기 위한 초험적(transcendental) 조건, 표상을 구성하는 선험적(a priori) 형식이 그것이다. 생물학에 도입된 '생명'의 개념 역시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객체의 위상을 가지며, 이는 유기체 내지 유기적 조직의 개념을 낳는다. 이로 인해 이전에는 수, 모양, 위치, 비율 등의 변수를 통해 특징들을 분류하던 것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수행하는 기능을 통해서 다시 분류가 이루어진다.같은 책, 272-274쪽.
언어의 경우 이전에는 어간이 불변인데 어미가 변했다고 보았다면, 이제는 어미는 불변인데 어간이 바뀌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흔히 ‘굴절’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언어 자체 내에,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 좌우되지 않고, 언어를 통한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불변적인 어떤 구조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같은 책, 279-281쪽.
정치경제학이 단순한 ‘부의 분석’과 구별되는 것은 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다. 노동은 가치에 대한 표상(이 옷은 얼마짜리다)으로 환원되지 않는, 반대로 그 표상을 조건짓는 객체로서, 가치에 대한 표상의 척도요 기원이 된다.같은 책, 266-269쪽; 300-302쪽.
노동, 생명, 언어라는 이 세 가지 객체의 형식은 주관적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경험적이지만 동시에 선험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개념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는 인간이란 근대의 산물이라고 하며, 인간학이란 이런 근대적 배치 안에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정치경제학의 역사에 대한 푸코의 비판적 분석은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즉 부와 가치, 그리고 가치의 척도 내지 기원으로서 노동이란 개념들의 배치가 변화되는 양상을 통해 그는 세 가지 에피스테메 안에서 그 역사를 분할한다.
첫째,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 16세기 중금주의는 “부, 그것은 화폐다”라는 명제로 화폐에 대해 강력하게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이러한 화폐의 형태로 부를 축적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때 화폐가 표시하는 가치, 혹은 화폐가 갖고 있는 구매력은 오직 그 금속의 상품가치에 의존한다. 즉 화폐는 그것이 갖는 (귀금속으로서) 상품가치, 사용가치에 의해 그 가치가 정의된다. 화폐는 “단지 부로서의 그 물질적 실재성에 기초해서 부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힘만을 의미했기에 정확한 척도가 될 수 있었다.”같은 책, 210쪽.
이 경우 화폐를 통한 교환은 어떤 공통의 척도라기보다는 화폐로 사용되는, 양과 가격에서 가변적인 금속의 (사용)가치와 유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푸코가 말하는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에 의해 통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금속의 ‘귀중함’이 '척도‘와 ’교환‘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같은 책, 215쪽.
둘째,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 중상주의자들에게 기초의 위치를 갖는 것은 상품 간의 ‘교환’이었고, 부(富)란 이러한 교환을 통해 집적되는 것이다. 교환을 가능하게 하며, 그것을 질서지우는 척도는 이러한 교환에 의해 기초지워진다. 화폐가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요 척도라는 점에서였다. 결국 화폐는 부에 대한 표상이며, 기호고, 분석의 도구였다.같은 책, 215-6쪽.
모든 부는 이제 화폐로 환원가능하며, 그것을 통해 일반적인 크기를 표시하고 비교할 수 있다. 16세기에는 화폐는 금이었기에 소중했다면, 이제는 반대로 금이 소중한 것은 그것이 화폐기 때문이었다. 금은 그것이 갖는 사용가치때문보다는 차라리 견고하고 영속적이며 미세하게 분할될 수 있다는 특징으로 인해, 그 무한한 표상능력으로 인해 화폐가 된다. 여기서 화폐는 금속의 사용가치에서 탈영토화된 것이다.
한편 중농주의자들은 가치를 교환에 선행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중상주의자들과 달랐다. 그들은 교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이미 가치가 선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가치 내지 잉여의 기원에 대한 해명이 그들의 기본적인 문제설정을 구성한다. 이는 보수의 다양한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생산되어야 함을 뜻하는데, 그들은 이를 자연의 생산능력과 교호하는 농업노동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들은 가치의 기원과 생산에 주목했지만, 이러한 가치와 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환이 가능해야 한다고 보았다.같은 책, 235쪽.
다시 말해 자연이 제공하는 것은 ‘재화’일 뿐이며, 이것이 남아서 교환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부’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농주의자 역시 교환과정에서 다른 것과 등가화되고 치환될 수 있는 것을 가치로서 정의하는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의 내부에 있었다.같은 책, 233쪽.
부의 표상능력, 표상된 부의 등가화/교환을 매개하는 척도로서 화폐 내지 가치의 개념은 이런 점에서 고전주의 시대의 인식론적 배치를 보여준다. 즉 화폐는 표상된 가치들의 동일성과 차이를 판단하는 척도로서 위치를 갖고 있으며, 이 경우 화폐는 표상된 가치의 등가성을 매개하는 것이다. 등가화될 수 있는 것을 통한 표상의 분류. 노동은 그러한 부의 소유 내지 분배와 연관된 것으로 위치지워지며, 가치의 생산이나 기원으로 계열화되지 않는다. 여기서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중농주의자들의 경우에도 농업노동은 생산적이지만, 그것이 대가로서 보수를 받는 것은 생산과는 무관하며,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연의 능력이 새로운 가치의 기원을 이루는 것이며, 농업노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적인 것은 그러한 잠재적인 생산적 능력을 현재화시킨다는 점에 기인할 뿐이다.
셋째, 근대적 에피스테메. ?국부론?의 모두(冒頭)에서 스미스는 “교환가치의 진정한 척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화폐는 ‘같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왜 같은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그는 상이한 상품 간의 교환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같은 시간 만큼을 노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표상의 등가화는 노동시간의 등가성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노동은 (교환)가치의 진정한 척도의 자리에 놓여진다. “노동은 모든 상품의 교환가치의 진정한 척도다. 모든 물건의 진정한 가격은 그것을 얻는데 든 노력과 수고다.”A. Smith,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김수행 역, ?국부론?, (상), 동아출판사, 1992, 36쪽.
가치는 단순히 값어치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객체적인 근거를 갖는 객관적인 것이 된다.
절대적인 계량의 단위로서 노동, 그것은 표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표상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가 되며, 반대로 부에 관한 모든 표상이 그것에 기초하게 되는 근원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된다.M. Foucault, 앞의 책, 266-271쪽.
표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러한 독자적 차원의 원리가 성립됨에 따라 고전주의 시대의 인식론적 배치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고전주의 시대의 경우 “부에 관한 성찰은 ‘관념학’ 내부에, 표상의 분석 내부에 자리잡고 있었다.”같은 책, 271쪽.
반면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이란 개념이 부의 분석에서 근본적인 위치에 자리하게 됨에 따라 이제 그것은 한편으로는 부를 인간의 활동 내지 그 결과에 연관짓는 인간학을 향해, 다른 한편으로는 부의 교환이 아니라 부의 생산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정치경제학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리카르도에게 이르러 노동은 이제 단순한 가치 척도가 아니라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위상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이제 가치의 표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차원을 구성한다. 노동은 생명이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객체 내지 실체의 형식으로 새로운 인식론적 배치를 형성한다. 나아가 이제 가치는 부를 관련짓는(등가화, 교환) 기호로부터,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생산물로 변환된다.같은 책, 301쪽.
여기서 푸코는 세 가지 결과를 추론한다. 첫째, 기원의 관념과 결부된 것으로, 가치의 생산에 관련된 새로운 형태의 인과계열의 탄생. 가치의 표상성에서 가치의 형성을 분리함으로써, 경제는 이제 ‘동일성과 차이의 동시적 공간’에서 벗어나 기원과 역사를 갖는 ‘계기적 생산의 시간’과 결부된다.같은 책, 302-3쪽.
둘째, 희소성 개념과 연관된 것으로, 유한성의 관념과 인간학적 기초. 경제는 이제 희소성과 결핍 위에서 성립하는데, 이 경우 경제학은 생명이 죽음과 직면하는 위험지대에서 자신의 원리를 발견하며, 그러한 결핍과 일시적 죽음을 타개하는 방법을 지시한다. 이로써 경제학은 인간학적 영역으로 들어간다.같은 책, 303-304쪽.
셋째, 푸코는 ‘역사의 부동화’라고 부른 것으로, 역사성 내지 경제적 진화와 한계에 관한 것이다. 리카르도가 보여주었듯이, 자본의 축적과 진화가 이윤율 저하라는 결과로 귀착된다는 축적의 역설이 그것이다. 리카르도에게 이는 자본주의의 한계, 역사적 진화가 멈추어 영원히 부동의 상태로 남는 한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역사는 궁핍과 노동, 인구의 과잉 등으로 표상되는 인간학적 유한성에 대한 보충으로 나타난다. “역사에 의해 인간의 유한성은 마침내 역사가 순수한 형상을 나타내는 경계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리카르도의 패시미즘. 반면 맑스에 의해 대표되는 또 하나의 입장에서 역사는 역전되고 말살됨으로써만 인간학적 유한성을 보충한다. 맑스의 ‘혁명의 약속‘.같은 책, 306-308쪽.
그러나 푸코가 보기에 혁명의 약속이 담고 있는 역사의 종언에 대한 관념은 리카르도의 페시미즘과 대칭적인 짝이며, 정확하게 인간학적 유한성과 역사의 종말이라는 근대적 사유의 배치 안에 있다. 결국 맑스의 정치경제학은 스미스에 의해 시작되고, 리카르도에 의해 완성된 양상을 보여주는 근대적 에피스테메 내부에 있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넓게 확산되고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따라서 혁명을 약속하고, 혁명을 부추기는 맑스의 정치경제학은 다만 풀장 속의 폭풍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3.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1)맑스의 노동가치론 비판
거의 모든 정치경제학자나 맑스주의자들에게 ‘노동가치론’은 맑스주의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으로 간주된다. 노동가치론에 대한 해석과 이론들이 매우 다양하고 다기함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관한 한 그다지 다르지 않으며, 그런 만큼 노동가치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전장(戰場, arena)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그러나 고전적인 경제학과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사이에는 결코 정치경제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인 단절이 있으며, 바로 그 단절로 인해 맑스의 자본주의 연구는 고전경제학과는 전혀 다른 개념적 배치를 생산한다. 이러한 근본적 단절과 새로운 배치는 ‘노동가치’라는 개념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통해 포착되고 가능하게 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고유한 지점은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지반인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마련된다. 다시 말해 맑스는 노동가치론자가 아니라 반대로 노동가치론에 대한 최초의 근본적인 비판자였다는 것이다. 단절의 선은 바로 정치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지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바로 이런 의미에서 노동가치론은 정말 가장 중요한 전장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전투는 수많은 맑스주의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노동가치론은 정말 가장 중요한 전장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전투는 수많은 맑스주의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스미스와 리카르도에 의해 발전된 노동가치론은 몇 개의 공리적인 테제에 기초하고 있다. 이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모든 상품은 가치에 따라 교환된다. 즉 모든 교환은 등가 교환이다.
②모든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여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즉 노동(시간)이 가치의 척도다.
③가치는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 즉 가치의 기원은 노동이다.
여기서 ①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가치론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고 가치론의 공리계에 가장 기초적인 공리다. ②는 스미스가, ③은 리카르도가 추가한 것인데, 이를 통해 노동가치론의 공리계가 구성된다. 고전경제학의 자본 개념은 이러한 (노동)가치론의 공리계 안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맑스는 고전경제학이 바로 여기서 딜레마에 봉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자본의 개념은 ‘자기증식하는 가치’로 정의되는데, (노동)가치론의 공리계는 바로 이 자본의 개념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가 노동에 기원하며, 가치량이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면, 그리고 모든 상품이 가치에 따라 등가 교환된다면, 새로운 추가적 가치의 증식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등가교환을 상정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가치는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되고, 그 크기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공리 ①, ②), 가치의 분배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이미 생산된 가치의 총량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이상의 내용이나 이하의 내용이 ?자본?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에 관한 장이다. K. Marx, 김영민 역, ?자본?, I-1, 이론과 실천, 172-209쪽.
요컨대 노동가치론은 자본의 증식을 설명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으로는 자본 내지 자본주의의 본질을 규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맑스는 자본의 증식은 노동가치론의 공리계 안에서는 추론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고, 이 점에서 그는 스미스와 리카르도에 의해 구성된 노동가치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의 증식을 규명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여기서 맑스는 새로운 테제를 제시한다.
① 노동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
② 노동은 노동력이란 상품의 사용가치다.
③ 노동력을 사용하여 생산하는 가치량은 그 구입에 지출된 가치량과 무관하다(물론 가치의 증식이 발생하려면 전자가 후자보다 커야 한다).
여기서 맑스는 “노동이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노동가치’라는, 가치론의 중심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노동 자체가 가치인 것도 아니다. 대신 그는 노동을 ‘노동력의 사용가치’로 정의하지만, 이처럼 노동가치론 입장에서 곤혹스런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왜냐하면 사용가치란 질에 속하는 것인 반면, 가치는 양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사용가치는 가치론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을 사용가치로 정의한다는 것은, 노동이란 가치론의 공리계와는 전혀 별개의 차원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은 노동력 상품이라는 가치의 계열과 전혀 다른 질의 계열에 속하며(명제 ②), 더 나아가 양적으로도 전혀 별개의 계열을 구성한다(명제 ③)는 것이다.
이는 흔히 노동과 노동력의 구별,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를 구별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 양자의 차이에서 잉여가치가 정의된다. 하지만 노동과 노동력의 구별은 흔히 그러하듯 단순히 두 가치 간의 양적 차이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노동이 질(사용가치)에 관한 것이라면, 노동력은 양(교환가치)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베르그송(H. Bergson)이 분명히 했던 것처럼, 질은 양에서 도출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양적인 것(양적 다양성)은 수(數)가 그렇듯이 가분성(可分性)을 가지며, 분할되는 부분 간에 동질성이 있다. 그 요소들은 병렬될 수 있고, 분할된 요소들 간에 ‘공허부’(le vide)가 개제하기에 서로에 대해 외면적이다. 반면 순수 지속의 개념이 잘 보여주듯이 질적인 것(질적 다양성)은 상이한 요소들이 구별되고 병렬되기보다는 서로 뒤섞여 공존하는 ‘순수 이질성’이고, 요소들 간의 가분성이 없으며, 그 요소들은 상호침투하는 계기로서 서로에 대해 내재적(immanent)이다(H. Bergson, Essai sur les donnees immediates de la conscience, ?시간과 자유의지?, 삼성출판사, 1982, 78-94쪽; 김규영, ?시간론?, 서강대 출판부, 1987, 15-38쪽; 김진성, ?베르그송 연구?, 문학과 지성사, 21-25, 52-55쪽 참조).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간에 근본적인 성질의 차이로 인해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 물론 순수하게 질적인 것(순수 지속)은 양적이고 공간적인 지속, 즉 양적인 것이 침투한 것으로 변환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노동에 대한 ‘노동의 가치’의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동일한 문제가 다른 양상으로 반복된다.
따라서 그 자체로 가치를 갖지 않는 노동, 혹은 가치와는 전혀 다르게 질적 차원을 구성하는 노동에서 양적인 것인 가치가 도출될 수는 없다. 사용가치인 노동에서 가치를 추론하는 것은, 그리하여 노동이 가치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을 혼동한다는 점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혼동을 은폐하는” 중상주의적 오류와?자본?, I-1, 189쪽.
동형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은 ‘노동력의 사용가치’라는 명제는 노동이 가치의 기원이라는 노동가치론의 공리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가치의 기원은 무엇인가? 하지만 맑스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는다. 가치의 전정한 척도는 무엇인가? 맑스는 이렇게 질문하지도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가치의 증식이며, 굳이 표현하자면 그 증식된 가치의 원천이다. “리카르도는 잉여가치의 원천에 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그가 노동생산성에 대하여 논하는 경우에도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잉여가치의 존재 원인이 아니라 잉여가치의 크기를 규정하는 원인일 뿐이다...사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잉여가치의 원천이라는 절실한 문제를 너무 깊이 파고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정확한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같은 책, 581쪽. 강조는 인용자.
하지만 여기서 증식된 가치의 ‘원천’에 대한 관심은 ‘기원’(Ursprung)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혈통(Herrschaft)과 발생(Entstehung)에 대한 관심이고, 기원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동질성이라기보다는 혈통의 이질성과 발생의 외부성이다.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에 대한 논문에서, 기원에 대한 관심과 구별되는 혈통 및 발생에 대한 관심을 니체의 계보학에 관련지운다. 전자가 기원과 혈통의 동질성--정통성!--을 통해 어떤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라면, 후자는 발생의 우연성 내지 이질성을 통해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다(M. Foucault, "Nietzsche, geneologie, histoire," ?니체, 계보학, 역사?, 이광래, ?미셀 푸코?, 민음사, 1989, 331- 350쪽). 다시 말해 아버지와의 연관을 찾아내서 적자임을 증명하려는 ‘족보학’과는 반대로, 계보학은 그 연관의 이질성을 통해 차라리 서자 내지 사생아임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는 니체의 방법을 의미와 ‘가치’를, 즉 ‘가치평가’(evaluation)와 그 기준이 되는 ‘가치’(경제학의 개념과 혼동하지 않기를!)의 개념을 비판철학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보며, 계보학을 ‘가치의 기원을 드러냄으로써 기원의 가치를 의문에 부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G.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신순범 외 역, ?니체, 철학의 주사위?, 인간사랑, 1993, 21-24쪽).
즉 자본 증식 및 자본 축적의 원천은 (본원적) 자본이라는 동질적인 기원이 아니라, 잉여가치라는 이질적 혈통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때 증식된 자본의 원천은 자본에 내부적인 무엇이 아니라, 잉여가치라는 외부적인 어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의 증식에 대한 맑스의 관심은 그것이 ‘원천’에 대한 추적의 형태를 취할 경우에도 계보학적 비판의 양상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맑스는 노동이란 노동자와 자연과의 대사과정이고, 생산적인 활동과정이라는 정의에서 다시 시작한다.?자본?, I-1, 213-214쪽.
그리고 그러한 질적인 과정(노동과정)과, 노동을 양적인 가치로 변환시키는 과정(가치화과정)을여기서 가치화과정은 Verwertungsprozeß의 번역인데, 보통 가치증식과정으로 번역되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가치화과정은 언제나 가치증식과정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표시한 것같은데, 사실은 노동의 결과물을 상품 내지 가치로 변형시킴으로써 노동을 ‘가치화’하는 과정을 뜻한다는 점에서, 문자 그대로 가치화(Ver-wert-ung)과정이 정확하다.가치의 증식이 가치화과정에 대재하고, 또 그것이 가치화과정에 대해 본질적인 계기라고 해도, 그것으로 가치화과정을 환원해선 곤란하다.
개념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후자는 생산적 활동으로서 노동이 산출해낸 결과물을 통해 양적인 것의 계열을 구성한다. 이제 여기서 문제는 노동이 산출해낸 결과물의 가치량과, 노동력을 구입하는데 지출된 가치량 간의 관계로 된다. 즉 모든 것은 이미 가치화(Verwertung)된 것 간의 관계로 된다.
하지만 여기서도 양자는 서로 상이한 계열을 구성한다. “노동력 안에 포함되어 있는 과거 노동과 노동력이 수행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노동, 즉 노동력의 하루하루의 유지비와 노동력의 하루하루의 지출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양이다.”맑스, ?자본?, I-1, 231쪽--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노동력을 구입하는데 드는 가치량과 그것을 써서 생산해낸 가치량 간에서는 차이가 있으며, 자본의 증식은 바로 이 차이에 의해 설명된다. 알다시피 이 차이를 맑스는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여기서 맑스는 노동가치론이 자본의 증식을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또 하나의 테제를 제시하는 셈이다: “자본 가치의 증식은 잉여가치에 의해 결정된다.”(이를 명제 S라고 하자.)
이는 가치론의 공리계가 자본의 증식을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명제다. 여기서 명제 S는 매우 기묘한 위상을 갖는다. 한편으로 그것은 분명히 동일량의 가치 간 교환이라는 등가교환의 공리와 상반된다는 점에서 부등가교환을 뜻한다. 즉 그것은 가치론의 공리계로부터 추론되지 않으며,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교환이 행해지는 영역에서는 등가교환의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가치론에 내재적인 명제고, 동시에 그것이 없이는 자본의 개념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치론의 공리계에 필수적인 명제다. 결국 맑스는 등가교환에 내재하지만 결코 등가교환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 점에서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따라서 가치법칙에 대해 외부적인 개념을 새로이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그 개념은 가치론의 공리계에 ‘내재하는 외부’인 셈이다.
이 명제를 통해 가치론의 기본 공리가 타당한 한에서(가치증식은 “등가교환의 영역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그 공리는 또한 부당하다(가치증식이 이루어지는 교환은 “등가교환이 아니다”)는 당착에 빠진다. 가치의 증식을 설명하기 위해 필수적인 명제 S에 대해 가치론의 공리계는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역설에 빠진다. 이를 통해 맑스는 가치론의 공리계를 ‘해체’한다.?자본?의 이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것을 증명하는 장인 ‘자본의 일반적 정식의 이율배반’으로 끝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가치론에 대한 이러한 비판 내지 ‘해체’를 통해서 맑스는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는 가치론의 공리계에서 발생한 역설(paradoxe)을 통해, 가치와 잉여가치 개념을 두 가지 새로운 방향(sens, 의미)으로 밀고 나간다. 하나는 자본 내지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이율배반’(antinomie)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잉여가치의 외부성‘에 관련된 것이다.
(2)자본 증식의 이율배반
힐베르트(D. Hilbert)가 베를린의 어느 역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기하학의 공리에 대해 했다는 다음의 말은 매우 유명하다: “우리는 언제라도 점, 직선, 평면이란 말 대신에 테이블, 의자, 맥주잔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O. Blumenthal, "Lebensgeschichte," 김용운/김용국, ?집합론과 수학?, 우성문화사, 1989, 432쪽에서 재인용.
이 말은 그가 ?기하학의 기초?에서 발전시킨 공리주의적 방법의 한 축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모델로 한 연역적 체계의 함정이, 이미 그 체계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나 용어들에 너무도 친숙해져 있는 것이라고 본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 있는 결함의 대부분은 여기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함정을 피하기 위해 그는 무정의 용어(점, 선, 면)물론 유클리드의 ?원론?에 따르면 점은 ‘부분이 없는 것’으로, 선은 ‘폭이 없는 길이’로, 직선은 ‘그 위에 점들이 고르게 놓인 선’으로, 면은 ‘단지 길이와 폭만을 갖는 것’으로, 평면은 ‘그 위에 직선들이 고르게 놓인 면’으로 정의된다(H. Eves, Foundations and Fundmental Concepts of Mathematics, 허민/오혜영 역, ?수학의 기초와 기본 개념?, 경문사, 1995, 58쪽).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부분, 길이, 폭 등의 무정의 용어를 포함하며, 이것을 새로 정의하려 하면 또 다시 무정의 용어에 의존해야 한다는 무한소급이 발생한다. 정의란 결국 이런 무정의 용어에 의한 것이란 점에서, 점, 선, 면을 무정의 용어라고 간주해도 아무런 차이는 없다.
에서 직관적인 내용을 제거한다. 다시 말해 그것을 X, Y, Z과 같은 기호로 바꾸고, 공리나 명제는 기호들의 열(列)--기호열--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공리나 정리는 모두 그 기호들 간의 ‘관계’에 대한 형식적 진술이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 관계의 진술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H. Eves,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Mathematics, 이우영/신항균 역, ?수학사?, 경문사, 1995, 544쪽 이하 참조.
그 경우 X, Y, Z 등의 기호는 점, 선, 면 대신 테이블, 의자, 맥주잔 등으로 바꾸어도 그것을 사용한 진술은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적 방법은 이후 수학의 기초에 관한 ‘형식주의’라고 불리는 입장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칸토르(G. Cantor)의 집합론 이후 수학의 곳곳에서 터져나온 역설과 모순에 대처해서 수학의 기초를 재건하려는 중요한 방법러셀(B. Russell)과 화이트헤드(A. Whitehead)가 대변하는 논리주의, 브로베르(Brouwer)가 대변하는 직관주의, 힐베르트가 대변하는 형식주의가 그것이다. 여기서 논리주의는 수학의 기초를 논리(학)에서 찾아,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직관주의는 직관적으로 자명한 것에 의거하려 하는데, 수학적으로 존재가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유한 번으로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야지, 부재를 가정한 후 모순을 보이는 식의 증명(귀류법)으론 충분치 않다고 본다(H. Eves, ?수학사?, 561-571쪽; 김용운/김용국, 앞의 책, 462-469쪽; M. Kline, ##, ?수학의 확실성?, 민음사, ##, ##쪽 참조).
가운데 하나였는데, 수학이론을 앞서와 같은 공리주의적 방법을 통해, ‘독립성’, ‘완전성’, ‘무모순성’이라는 세 가지 요청을 만족시키는 공리계로 구성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독립성이란 공리를 다른 공리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증명할 수 있을 경우 그것은 공리가 아니라 정리가 된다.
것으로, 이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간결한 것이 진리’라는 서양의 고유한 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다.김용운/김용국, 앞의 책, 433쪽.
완전성은 ‘공리계가 모든 정리를 증명하는데 충분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 공리들만으로 어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결정가능성). 공리 이외의 다른 전제를 끌어들여야 증명할 수 있는 명제가 있다면 이 명제는 원래의 공리계에 대해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이는 공리계에 대해 내적인 완결성과 폐쇄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모순성은, 상식적인만큼 필수적인 요구로, 공리계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명제가 나타나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힐베르트의 꿈은 1931년 25세의 수학자 괴델(K. Godel)에 의해 산산이 부수어진다. 괴델은 힐베르트의 방식을 따라 명제를 기호열로 바꾼 후, 그것을 ‘괴델수(數)’라고 부르는 자연수들에 대응을 시키는 방법을 이용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제를 증명한다.
1)자연수체계를 포함하는 모든 무모순인 형식적 체계에 결정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한다. 즉 무모순인 형식체계에는 참도 거짓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
2)자연수 체계를 포함하는 모든 무모순인 형식적 체계 안에서 그것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이 정리의 증명 방법에 대해서는, E. Nagel/ J.Newman, Godel‘s Proof, New York University, 1958; 김용운/ 김용국, 앞의 책, 452쪽 이하; H. Eves, ?수학의 기초와 기본 개념?, 507쪽 이하 참조.
이는 흔히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라고 부른다. 이 중 첫째 정리는 자연수론을 포함하는 거의 모든 수학적 형식체계에 결정불가능한 명제가, 즉 공리들만으로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완전성’이라는 힐베르트의 요건이 원리적으로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동시에 이는 어떤 형식적 체계를 이루는 공리계도 그 자체만으로 완결되고 폐쇄되지 않으며, 반대로 이질적인 외부적 요소들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것을 뜻한다.호프스태터는 <서로 그리는 손>이라는 에셔의 그림과 괴델의 정리를 관련지움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Hofstadter, Godel, Escher, Bach, Vintage, 1979, 690쪽).
둘째 정리는 마찬가지로 자연수론을 포함하는 거의 모든 수학적 공리계가 모순을 포함하는지 아닌지를 증명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무모순성’이라는 또 하나의 요건이 원리적으로 충족될 수 없음을 뜻한다.더 나아가 이는 공리계 내적인 무모순성을 진리의 준거로 삼았던 수학적 지식에서 진리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수학자들로선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의미를 담고 있었다. 힐베르트 뿐만 아니라 모든 수학자들이 믿을 수 없었던, 정확히는 결코 믿고 싶지 않았던 이 정리는, 1963년 미국의 수학자 코헨(P. Cohen)이 집합론의 공리계(체르멜로-프랑켈 공리계)에 대해 ‘일반연속체 가설’이나 ‘선택공리’가 결정불가능한 명제임을 보여줌으로써 확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와 괴델이 접속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앞서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는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서 결정불가능한 명제다. 노동이라는 사용가치를 갖는 상품(노동력)의 교환은 등가교환이고 가치법칙과 상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부등가교환이란 점에서 가치법칙과 상충한다. 여기서 가치론의 공리만으로는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를 증명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반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치론의 공리계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가치증식을 해명하기 위해서, 사용가치라는,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전혀 이질적인 계열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인 요소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는 가치론의 공리계가 채택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명제다. 그런데 가치론의 공리계가 자본의 증식이라는,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심적인 현상을 해명할 수 있으려면,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것을 채택하지 않으면, 가치론의 공리계는 불완전성의 양상을 일단 모면할 수 있겠지만, 자본의 증식조차 규명할 수 없다는 난점과 불모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스미스와 리카르도의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이든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이든--이 이론으로서 구성되기 위해서는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를 반드시 채택해야 한다. 즉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는 정치경제학적인 가치론의 공리계에 내재적이다.
특히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가치론’은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가 가치론에 대해 필수적이라고 하면서 채택하며, 가치론의 공리계에 부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여기서 고전적인 정치경제학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간의 차이는 전자는 묵시적으로 그것을 채택하고(할 수밖에 없고) 그 명제를 은폐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시키려 하는데 반해, 후자는 명시적으로 그것을 채택하고, 그 명제의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 뿐이다. 따라서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를 채택한다는 점으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과 고전적 정치경제학 사이에 단절점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맑스는 가치론의 정정과 완성자로 간주된다. 맑스가 완성했다는 이 보완된 가치론은 이제 ‘잉여가치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 경우 그것은 아마도 잉여가치 개념이 가치론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공리로서 가치론의 공리계에 포섭되었음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괴델의 정리가 뜻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공리계 L에서 결정불가능한 명제를 공리로서 공리계 L안에 포섭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포섭된 새로운 공리계 L‘ 역시 불완전하며 결정불가능한 명제를 또 다시 포함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괴델의 정리에 따르면, 이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를 가치론의 공리계 안에 새로운 추가적 공리로 포섭하는 경우에도, 새로운 공리계는 또 다른 결정불가능한 명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가치화와 탈가치화를 통해 작용하는 지점에서, 자본의 축적이 그 외부적 타자인 실업자, 과잉인구를 전제로하여 이루어진다는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에서 발견된다.
여기서는 일단 가치론의 공리계에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가 포섭됨으로써 생기는 또 다른 문제를 보자. 그것은 이율배반에 관한 것이다. 앞서 가치론의 공리계는 잉여가치에 관한 결정불가능한 명제에 대해 채택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가능성에 관한 얘기고, 자본의 증식에 대해 설명하려면 사실상 그것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이 점에서 가치론의 공리계가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를 채택하는 문제는, 집합론의 공리계가 일반연속체 가설이나 선택공리를 채택하는가 여부, 혹은 기하학의 공리계가 어떤 평행선 공리를 채택하는가 여부와 크게 다르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리카르도에게 이미 잉여가치와 계급투쟁이라는 개념이 있었다고 했던 말의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가치론의 공리계는 이율배반에 빠진다. 형식적으로 어떻게 조작을 하든 간에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가 가치법칙과 실질적으로 충돌하고 대립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노동)가치 개념이 증식을 설명할 수 있으려면 그것에 반대되는 개념--잉여가치 개념--을 전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결국 가치론의 공리계에는 가치론의 공리들과 모순되는 명제를 내포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노동)가치 개념의 이율배반을 드러낸 것이며, 가치론의 공리계에 내재하는 이율배반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 공리계의 일관성(consistency, 무모순성)이 무너지는 지점을 표시한다.이는 괴델의 둘째 정리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통해 찾아낸 이 근본적 이율배반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잉여가치가 결국은 자본과 노동의 ‘적대‘를 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본의 증식이라는 자본주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모순’으로 변환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헤겔을 떠올리게 하는 ‘현상의 본질’이요 자본주의의 모든 현상이 그에 기초하는 바 동력이고 중심인가?
하지만 그 이율배반은 차라리 가치론의 일관성이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붕괴하는 지점이요, 가치론의 공리계에 외부적인 명제 내지 개념이 끼어드는 지점이다. 그것은 가치론의 공리계에서 자본의 증식을 추론하려고 하는 한 결코 피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이율배반은 가치론의 공리계가 그 내적인 논리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한계요 경계다. 다시 말해 맑스는 바로 이 이율배반을 통해 가치론의 공리계에 고유한 경계 내지 한계를 찾아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오히려 칸트적인 이율배반에 가깝다. 알다시피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의 말미에서 이성의 종합 능력이 경험의 영역을 넘어섬에 따라 불가피하게 부닥치는 이율배반을 보여주었다.칸트에게 인식론적 판단의 영역인 순수 이성은 감성, 지성, 이성으로 구분된다. 거칠게 말해, 감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직관형식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심급이고, 지성은 범주라는 선험적 판단형식을 통해 지각된 대상들을 분류하고 관계지우는 심급이며, 이성은 그러한 판단에 기초하여 그것을 일반적 형식으로 포착하는 심급이다(예를 들면 ‘모든’ 물체는 땅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이성에 의한 이러한 종합은 경험가능한 영역을 벗어나면 참과 거짓이 동시에 증명되는, 따라서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할 수 없는’ 이율배반에 빠진다(칸트, Kritik der reinen Vernunft, 최재희 역, ?순수이성비판?, 박영사, 1972, 346쪽 이하). 예를 들면 시간과 공간은 시작과 끝을 갖는다/갖지 않는다가 동시에 증명된다. 여기서 칸트의 이율배반이 괴델적인 결정불가능성의 개념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칸트에게 이율배반은 이성의 일관성이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붕괴하는 지점이요, 그런 점에서 이성의 일관된 사유가 불가능해지는 외부며, 따라서 이성이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선 결코 넘어선 안될 이성의 경계다.
그러나 가치론의 공리계가 포함하게 된 저 이율배반은 두 가지 의미에서 칸트적인 것과는 다르다. 첫째로는, 칸트의 이율배반이 이성이 경험의 영역에서 벗어남에 따라 생기는, 조건적이고 외적인 경계라면, 괴델에게서 이율배반은 자연수론을 포함하는 모든 공리계에 내적인 것이고, 마찬가지로 맑스에게서 이율배반은 가치론의 공리계에 내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괴델과 마찬가지로, 맑스가 발견한 그 이율배반은 칸트처럼 안정된 내부를 제공해주는 어떤 외적 구획선, 외적 경계가 아니라, 처음부터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경계며, 가치론의 공리계가 자본의 증식을 통해 작동하도록 구성하는 ‘내재하는 외부’라는 것이다. 외적 경계와 구별되는 내적 경계의 개념, 이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간의 경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해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둘째로, 칸트에게 이율배반이라는 경계는, 일관성이 불가능해지는 혼돈스런 세계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결코 넘지 않아야 할 경계인 반면,이 점은 콜레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맑스주의를 실증주의적 입장과 유사하게 과학으로 정의하고, 거기서 발생한 오류와 혼동을 경험의 경계를 넘음는데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가 중요한 준거로 삼는 것이 바로 칸트였다. 경험가능성의 영역을 넘는다는 것은, 칸트나 콜레티에게는 과학이 넘지 말아야 할 경계, 이율배반이나 혼동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 안에 머물러야 할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고, 헤겔처럼 비과학적 사변에 빠지는 길이다(L. Colletti, Hegel and Marx, 박찬국 역, ?헤겔과 맑스?, 인간사랑, 1988 참조).
맑스에게 그것은 자본의 증식과 배치가 형성하는 적대적 세계를 넘어서기 위해 확인되어야 했던 경계며, 그것을 통해 가치의 공리계가 지배하는 세계를 그 근본에서부터 초극하기 위해 사유되어야 했던 경계다. 아니 어쩌면 내재하는 외부를 구획하는 그 경계는 애시당초 머물 수 있는 안정된 내부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인 셈이다. 머물기 위한 경계와 넘기 위한 경계.
여기서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미 처음부터 발 밑에 있는 경계라면, 그리고 넘어야 할 명확한 지점이 보이지 않는 경계라면. 넘었는가 싶으면 어느새 다시 앞에 서 있고, 안에 있으면서도 또한 넘을 수 있는 경계. 이는 ‘이행’의 문제를 사유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우리는 이 책의 8장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경계, 그리고 이행의 문제를 이 내적인 경계라는 개념을 통해 다시 사유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처럼 자본 자체에 내적인 이율배반이, 그 경계가 자본주의의 처음부터 그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율배반으로 표시되는 그 경계가 바로 자본 자체 안에 있으며, 그런 만큼 정확하게 그 자본과 짝을 이루는 노동 자체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마찬가지 말이지만, 그것은 넘어서야 할 경계가 바로 자본 자체 안에 있으며, 그런 만큼 정확하게 노동 자체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본 자체 안에서, 가치법칙과 그 외부가 만드는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만큼이나 노동 자체 안에서 역시 가치법칙와 그 외부가 만드는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자본에 새겨진 노동의 흔적을맑스의 ?자본?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본에 새겨진 노동의 흔적을 추적한다. 예를 들면 자본의 생산력이란 노동의 생산력이라는 것, 자본의 증식이란 바로 노동이 생산한 추가적 가치라는 것, 따라서 자본의 축적이란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화되는 것이라는 것, 자본 축적의 일반적 법칙이란 사실은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라는 것, 본원적 축적이란 직접 생산자로부터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과정이었다는 것 등등이 그렇다. 맑스는 바로 이러한 흔적 때문에, 순수하게 자본의 논리, 경제적 논리만으로 진행되는 경우에도 자본은, 그것이 가치화와 가치증식을 통해 정의됨에도 불구하고 그것 자체를 부정--탈가치화(Entwertung) 내지 공황이라는 가치파괴--하는 역설에 반복하여 빠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추적하는 것만큼이나 노동에 새겨진 자본의 흔적을이는 대부분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왔다. 그것은 자본에 의해 형성되는 노동 방식 자체의 문제고, 특정한 노동의 체제를 통해 노동 자체 내에 새겨지는 자본의 신체적 효과에 관한 문제며,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동일시하고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본의 ‘주체 효과’의 문제고, 자본을 통해서만 유용노동이 되기에 자본의 일부가 됨으로써만 노동자가 되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계속하여 다룰 것이다.
추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발전이란 자본 안에 존재하는, 종종 적대로 표시되는 그 경계의 발전인 동시에 노동 안에 존재하는 동일한 경계와 적대의 발전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그렇다면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외적인 경계를 긋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혁명의 문제를 다시 사유하는 것이 아닐까?
(3)잉여가치의 외부성
자본에 내재하는 이율배반을 응축하는 잉여가치 개념은 앞서 보았듯이 질적인 것(노동)과 양적인 것(노동력 상품)이라는 전혀 다른 이 두 계열 사이에서 정의된다. 따라서 이 두 계열 사이의 차이는 결코 가치론의 양적 계열로 환원되지 않는다. 잉여가치는 이런 점에서 별개의 계열인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자연과의 대사과정으로서 노동과 그것이 가치로 양화된 것 간의 관계를 표시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잉여가치는 노동이라는 ‘비-가치’를,여기서 ‘가치’라는 말은 맑스가 그렇게 사용했듯이 교환가치, 양화된 가치를 뜻하는 것을 사용한다. 질적인 범주인 사용가치는 이러한 가치의 기초지만, 자본주의에서 그것이 언제나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가치라는 말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보다는 가치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생산한 결과물인 ‘가치’로 환원함으로써 양적 계열로 환원하여 계산되게 된다. 즉 잉여가치는 두 가치량 간의 양적 차이가 된다. 이를 맑스는 m이라고 표시한다.
그런데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가 가치론의 공리계 안에서 결정불가능한 명제라는 말은 잉여가치라는 개념이 그 가치론의 공리계 내부적인 개념이나 관계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이는 가치의 계열과 전혀 다른 질적 계열이 관여되어야 잉여가치가 정의될 수 있다는 것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이는 결국 잉여가치 개념은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잉여가치의 크기인 m 역시 가치론의 공리계 안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잉여가치는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다. 이를 간단히 ‘잉여가치의 외부성’이라고 부르자.
이 점과 관련해 맑스는 리카르도를 비판하고 있다. “리카르도는 잉여가치의 원천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잉여가치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적인[##원문확인 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자본?, I-2, 581쪽. 강조는 인용자.
반면 그는 잉여가치는 가치법칙과 무관한 외적인 강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자연의 혜택이 노동자에게 직접 주는 것은 많은 한가한 시간이다...이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한 잉여노동에 사용하게 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강제가 필요하다.”같은 책, 581쪽. 강조는 인용자.
맑스는 ?자본?에서 이러한 잉여가치의 외부성을 이중적으로 증명한다. 하나는 이론적인 증명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증명이다.
1)첫째, 이론적인 증명. 가치량으로서 잉여가치는 노동이 생산한 가치량(가치생산물--이를 w라고 쓰자)과 노동력 구입에 지출된 가치량(노동력 재생산 비용, 가변자본 v) 간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즉 m = w - v이다. 그런데 노동을 사용해서 새로이 생산된 가치 w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시간과 노동강도, 그리고 노동의 조직방식에 따라 가변화되는 (노동)생산력 등이다.?자본?의 3편(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4편(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및 5편(절대적 및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노동시간이나 노동강도, 노동생산력은 가치법칙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할 의사와 능력을 얼마에 주고 샀는가와는 무관하게 자본가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의 생활을 24시간 유지시키는데 1/2 노동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노동자가 하루종일 일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과정에서 노동력의 가치증식은 전혀 다른 [별개의] 크기다.”?자본?, I-1, 231쪽.
좀더 상술하자면, 노동시간은 생물학적 생존능력의 보존에 필요한 한계 안에서 자본가의 의지에 의해 정해진다. 나아가 그것은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에 의해,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지는 사회적 관습과 법 등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이 중 어떤 것도 가치론의 공리계 안에서 작동하는 가치법칙과는 무관하다. “노동일은 규정될 수 있지만, [가치법칙에 따라, 외적인 강제 없이] 그 자체로서는 규정되지 않는다.”같은 책, I-1, 272쪽.
노동강도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강도의 증가는 같은 시간 안의 노동 지출이 증가함을 의미한다.”같은 책, I-2, 590쪽.
그런데 이러한 노동강도의 증가는 가치법칙과는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다. 예컨대 콘베이어 벨트의 회전 속도를 예컨대 5% 내지 10%, 혹은 그 이상으로 올리는 것은 노동력 구매비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다만 자본가의 의지와 그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사회적 표준 내지 평균적 강도가 있을 수 있겠지만, “노동일의 가치생산물은 그 강도가 사회적 표준 정도로부터 얼마 만큼 벗어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같은 책, 590쪽.
이 벗어남의 정도 역시 가치법칙이나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다. 반대로 외부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강도가 “노동일에 관한 가치법칙을 나라마다 달리 수정하여 적용하게끔 한다.”같은 책, 591쪽. 강조는 인용자.
이는 협업이나 분업에 의해 상승되는 노동생산력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맑스가 협업에 대한 장에서 말하듯이, 생산방식 자체에 관한한 초기의 협업은 동직조합적 수공업과 별다른 차이를 갖지 않지만, 노동자들을 한 곳에 모은다는 것만으로도 생산력은 증가한다. 분업이나 기계의 도입, 공장이라는 ‘완화된 감옥’의 도입 역시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다. 물론 그렇게하여 증가된 생산력은 사회적으로 평균화되면 개별 가치량의 감소로 귀결되어 전체적으로는 생산된 가치량에 변함이 없는 것으로 된다는 가치론의 가정을 인정한다해도, 그것은 외부적 요인에 의한 변화를 가치법칙을 통해 가치론의 공리계 안으로 포섭했음을 뜻한할 뿐이며, 결코 가치법칙이 그러한 변화를 창출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w는 가치법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다.
다른 한편 노동력 재생산비용을 의미하는 v 역시 가치법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의상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정의되지만, 그 구체적인 크기는 나라와 사회마다 상이한 사회적 평균 비용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그 사회적 비용의 평균은 실제로 자연적 및 문화적이고 역사적이며 도덕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생활수단의 총액은 노동하는 개인이 정상적인 생활상태에 있는 노동하는 개인으로서 유지하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 음식물이나 의복, 난방, 주택 등고 같은 자연적인 욕망 그 자체는 한 나라의 기후 및 기타 자연적인 특색에 따라 다르다. 다른 한편 필요 욕구의 범위와 그 충족 방식 자체도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고, 따라서 대체로 한 국가의 문화적 단계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특히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이 어떠한 조건 아래에서, 즉 어떠한 습관이나 생활욕구를 갖고 형성되었는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자본?, I-1, 203쪽.
이러한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조건,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조건은 가치법칙이나 가치론의 공리계와 직접적 관련을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70년대 한국에서라면 중학교 정도의 교육비만이 임금(v)에 포함되지만, 90년대라면 과외비는 아니라해도 대학교 정도의 교육비가 거기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가치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작용하는 조건을 제한하고 규정한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를 뜻하는 v는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다. 그러므로 w와 v의 차로 정의되는 m과 그것의 크기는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서 외부적이다.
2)둘째, 역사적인 증명. 절대적 잉여가치의 크기를 결정하는 노동시간은 가치법칙에 대해 외부적인 요인인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투쟁에 의해서, 그리고 거기서 자본가가 동원한 국가나 법 등의 외부적 권력을 통해 역사적으로 다르게 결정되었다. 표준노동일의 제정조차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몇 세기에 걸친 투쟁의 결과다. 그러나 이 투쟁의 역사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흐름을 보여준다...현재의 공장법이 노동일을 강제적으로 단축하려는 데 비해 이전의 법령들은 그것을 강제적으로 연장하려고 했다. 물론 자본이 겨우 싹트고 따라서 경제적 관계의 힘만 가지고는 어려워 국가권력의 도움까지 받아서 충분한 양의 잉여노동을 흡수할 권리를 확보해야 했던 맹아상태의 자본의 요구는, 자본이 이제 어른이 되어 억지로 마지 못해 할 수밖에 없는 양보에 비하면 정말로 겸손해 보인다.”같은 책, 315쪽.
14세기부터 17세기말까지 자본이 국가의 손을 빌어 강제로 연장했던 성년노동자의 노동시간은 19세기 후반 아동의 피폐화를 막기 위해 국가가 제한했던 노동시간과 거의 일치하며, “미국의 가장 자유로운 주인 메사추세츠 주에서 12세 미만의 아동 노동에 대한 노동시간의 제한은 영국에서는 17세기 중엽까지도 혈기왕성한 머슴이나 거인같은 대장장이의 표준노동일이었다”고 한다.같은 책, 315-316쪽.
또한 노동자들의 저항에 의해 1802년부터 1833년까지 영국의 의회는 노동시간의 제한을 규정하는 법령을 다섯 개나 통과시켰지만, 이를 실시하고 관리할 예산을 한 푼도 배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법들은 곧바로 사문화되었다.같은 책, 324쪽.
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은 이러한 제한조치를 무력화하거나 그것을 피해서 노동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방책들을 다양하고 교묘하게 구사했다. 아동 노동 시간의 제한을 피하기 위한 악명 높은 릴레이 제도, 법률 폐지 운동, 아동 나이의 조작 등등.
심지어 노동시간 축소에 따른 임금의 인하조차 결코 가치법칙에 따른 당연한 결과는 아니었다. 1847년 법에 따라 노동시간을 12시간에 11시간으로 축소한데 대해서는 8.5%의 임금을 인하했고, 10시간으로 축소한데 대해서는 15%,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는’ 25%까지 임금을 인하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불평이 퍼지자, 노동자 사이에서 10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한 그 법을 폐지하자는 선동을 시작했고, 강제로 서명과 청원을 하게 했으며, 신문이나 의회의 입을 빌어 노동자의 이름으로 폐지를 외쳤다.같은 책, 329-330쪽.
이런 점에서 맑스는 분명히 말한다. “1833년부터 1864년까지의 영국의 공장입법의 역사보다도 자본의 정신을 더 잘 특징짓는 것은 없다.”같은 책, 324쪽.
노동강도와 노동생산력에 관한 것은 협업과 분업, 기계와 대공업에 대한 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일례로 공장 체제의 발전은 하나의 공간 안에 노동자들을 가두어두고 강도 높은 노동을 강제하고 ‘새로운‘ 규율로 훈육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자주 인용되는 유어(Ure)의 말대로, “자동공장에서의 주된 곤란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불규칙적 노동습관을 버리도록 하고 그들을 복잡한 자동장치의 변함없는 규칙성에 일치시키는데 있었다.”같은 책, I-2, 484쪽.
일단 이것에 익숙해진 이후에야 자본가는 자신의 의지대로 노동자들에게 견딜 수 있는 최대한의 노동강도를 강요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의사대로 노동의 조직방식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노동의 규율과 어떠한 강제에도 견딜 수 있는 존재로 노동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들은 임금을 줄이고 그것을 강제할 공간적 장치를 만들어낸다.
“대체로 인간이 천성적으로 안락과 나태를 즐긴다는 것은 불행하게도 우리들 매뉴팩춰 서민의 행동으로부터 경험하는 바인데, 이들은 생활수단[의 값]이 등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평균하여 일주일에 4일 이상은 노동하지 않는다...이 나라에서는 임금이 생활수단의 가격에 비해서 훨씬 높기 때문에 4일 노동하는 매뉴팩춰 노동자는 여분의 돈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 돈으로 주일의 나머지 요일을 놀고 지내는 것이다...우리 나라이 공업 빈민이 오늘날 그들이 4일에 버는 것과 동일한 금액으로 6일 노동하기를 감수하게 될 때까지 그들에 대한 치료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익명의 저자, ?산업 및 상업에 관한 시론?, 맑스, ?자본? I-1, 320-321쪽에서 재인용.
여기서 자본가의 대변인이 제시하는 임금을 낮추어야 할 이유 역시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반한다. 그 이유는 단지 지불되는 가치량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그 어떤 외부적 강제에도 복종할 수 있는 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또 ‘나태와 방탕 또는 낭만적인 자유의 환상을 근절하기 위해서, 나아가서 구빈세의 경감과 근로정신의 조장 및 매뉴팩춰에서의 노동가격 인하를 위해서’, 자본의 충실한 대변인인 우리의 에카르트는 공적 자선에 의지하고 있는 이러한 노동자를 하나의 ‘이상적 구빈원’에 가두어 두자는 든든한 수단에 제안한다. ‘이러한 집은 공포의 집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자본의 혼이 아직 꿈만 꾸고 있던 1770년의 피구휼민을 위한 공포의 집이 불과 몇년 뒤에는 매뉴팩춰 노동자 자신을 위한 거대한 ‘구빈원‘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공장이었다.”?자본?, I-1, 321-322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맑스가 보여주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은 가치론의 공리계나 이른바 가치법칙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니며, 그것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 그것이 좀더 많은 잉여가치의 획득을 위해서 행해진 경우에도, 그것은 차라리 가치론이 작동하는 영역 외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반대로 가치론의 공리계는 바로 이러한 비-가치적인 장치와 제도를 통해서, 그것을 기반으로하여 ’발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폴라니(K. Polanyi)는 가치론의 영역인 시장와 자유경쟁이, 전혀 가치론이나 등가교환과는 상관이 없는 국가적 개입을 언제나 수반하고 있으며, 나아가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영국의 구빈법이나 스피남랜드 법 등에 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K.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박현수 역, ?거대한 변환?, 민음사, 1991, 91쪽 이하 참조). 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국가가 시장에 내재하는 외부라는 것이며, 국가적 개입이 자유경쟁과 가치법칙에 내재하는 외부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변자본 혹은 임금의 외부성에 관한 것을 간단히 보자. 맑스가 자주 인용하는 ?상공업에 관한 논의?의 저자는 “영국의 역사적 사명은 영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프랑스나 네덜란드의 수준으로까지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영국 자본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토로했다.”?자본?, I-3, 681쪽.
이러한 사회적 재생산 비용의 저하를 위해 자본가들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만약 우리나라의 빈민(노동자를 가리키는 기술적 표현)들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그들의 노동은 자연히 비싸질 수밖에 없다. 브랜디, 진, 차, 설탕, 외국산 과일, 독한 맥주, 날염된 아마포, 코담배, 연초 따위와 같이 우리나라 공업노동자가 소모하는 엄청난 수량의 사치품만이라도 생각해보라.”같은 책, 682쪽에서 재인용.
그들은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고기를 먹는 일이 좀처럼 없으며, 밀가루가 비쌀 때는 빵조차 먹지 않는다면서, 프랑스 자본가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나아가 벤자민 톰슨이란 사람은 노동자의 비싼 일상 음식을 대용물로 바꾸기 위한, 그리하여 식비를 최소한으로 낮추기 위한 요리법으로 자신의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한다.같은 책, 682-683쪽.
이처럼 “노동자의 소비기금의 직접적 약탈이 잉여가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같은 책, 684쪽.
?자본?의 곳곳에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약탈이 가치론의 공리계와 무관하다는 것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국 w나 v나 모두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거기서 결정적인 것은 w를 극대화하고 v를 극소화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의지(Wille) 및 권력(pouvoir)과, w의 극대화를 위해 요구되는 희생을 극소화하고 v를 가능한 최대한으로 확보하려는 노동자계급의 의지(Wille)와 능력(puissance)의 상호관계며, 그 적대로 인해 (이율배반와 동일하게) 처음부터 불가피한 계급투쟁이다. 그것은 종종 자연적 한계 이하로까지 욕구의 문화적 및 도덕적 수준를 끌어내리기도 하고(산업혁명 직후나 산업화 초기에 특히 그렇다), 반대로 법이 정한 한계 이상으로 그것을 끌어올리기도 한다는 점에서, 다른 요인을 배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미에서 ‘결정적’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잉여가치는 계급적 적대를 응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더불어 잉여가치의 크기는 계급투쟁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맑스가 가치론의 이율배반을 통해 ‘적대’를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하지만 이는 흔히 생각하듯이 자본이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것(노동력의 가치)과 자본이 노동을 통해 획득하는 것(가치생산물) 간의 적대는 아니다. 적대는 차라리 그 각각의 항에 내재적이다. 즉 적대나 잉여가치는 가변자본과 잉여가치 간에, 혹은 임금과 이윤 간에 있는 대립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각각의 항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란 점이다.
이를 가변자본과 잉여가치 내지 임금과 이윤 간의 이해관계의 적대로 이해하는 것은 계급투쟁을 임금을 둘러싼 양적인 대립으로 속화시키고, 그 두 차원의 대립적 범주를 통해 정의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잉여가치의 외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잉여가치를 가치론의 공리계 안에서 가치 개념을 통해 정의하려는 것이며, 이런 한에서 철저하게 ‘정치경제학적인’(!) 것이다.바로 여기서 좌파 리카르도주의자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의 교차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시니어(N. Senior)의 악명 높은 ‘최후의 한 시간’은 결코 근본적으로 비판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니어의 1시간 대신 4시간 내지 5시간을 잉여가치에 할당하는 것으로 적대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즉 가치론의 공리계에 외부적인 것으로서, 계급투쟁에 의해 결정되는 잉여가치가 먼저 존재하며, 임금과 이윤 각각은 바로 이 잉여가치를 통해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맑스가 이윤과 구별되는 잉여가치 개념을 질적으로 상이한 근본적인 위상에 두고 강조한 이유인데, 정치경제학자들은 이를 양적인 우선성과 포괄성(지대, 이자 역시 잉여가치에서 연원하기 때문에)으로 변환시키고는 다시 가치론의 공리계로 ‘내부화’한다.
잉여가치가 정치경제학의 가장 근본적인 파열구며, 이런 점에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가장 결정적인 개념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가치론의 공리계에 내적인 이율배반이 적대와 계급투쟁의 형태로 응축되어 있는 개념이며, 자본의 권력과 노동자 계급의 능력이 항상적으로 공존하며 충돌하는 작용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정치경제학에 의해 끊임없이 양적 대립의 양상으로 변환되어 경제적 이해의 충돌로 속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며, 이를 위해 가치론의 공리계 안으로 포섭되고 내부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치론의 이율배반이 철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헤겔적인 ‘모순’으로 변환되는 것만큼이나, 잉여가치의 외부성은 정치경제학적 변용에 의해 끊임없이 잊혀지고 가치론의 ‘과학적 보충’으로 변환되어 왔다. 바로 이 점에서 잉여가치의 외부성 개념은 정치경제학 비판이 근대적인 정치경제학과 근본적으로 단절되는 이론적 지점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또 언제나 정치경제학으로 변환되는 이론적 지점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것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근대적 사유와 끊임없이 조우하며 대결하는 역사적 지점인 것이다.
(4)자본 축적의 외부성
자본 축적은 말 그대로 ‘자본의’ 축적이란 점에서, ‘자본에 의한, 자본 자체를 위한’ 내적 과정으로 나타난다. 자본의 경쟁은 그러한 축적을 강제하며, 이로 인해 축적은 자본에 의해 자본 규모가 증가하는 반자동적인 과정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 자본가에게 그것은 자본이 획득한 이윤을 자신의 욕망이나 욕구를 위해 소비하지 않고 추가적인 자본으로 돌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금욕과 소명의식에 사로잡힌 자본가의 ‘절제되고 합리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기원으로 설명한다.M. Weber,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as Geist des Kapitalismus, 박성수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88.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에 기초한 ‘실천적 합리주의,’ ‘자본주의 정신’이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라고 본다면, 맑스는 차라리 경쟁의 강제에 따라 자본가가 자본의 대행자, 자본의 인격화로서 행동하게 된다고 본다(?자본?, I-3, 671-673쪽). 자본의 축적을 조건짓는 습속의 형성을 베버는 니체적인 방식을 따라 종교적인 에토스에서 찾는다면, 맑스는 그것과 달리 경쟁에 의해 강제되는 자본 자체의 효과에서 찾는 셈이다. 여기서 맑스는 자본가라는 주체가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이해하는데서 니체와도 다른 또 하나의 방법론적 관점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맑스는 축적을 위한 금욕과 절제가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자본가에게 요구되는 자본의 욕망이지만, 그것이 일정한 발전 정도에 이르면 사치와 과시적 소비가 신용획득의 수단이나 교제 등 사업상 필요한 자본의 욕망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같은 책, 674쪽).
맑스가 ?자본?에서 비판하는 절욕설(節欲設)은 이러한 사고의 속류화된 형태를 보여준다.?자본?, I-3, 671쪽 이하.
알다시피 이 두 가지 관점은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이나 이후 경제학에서 축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그런데 축적을 자본의 내적이고 반자동적인 과정으로 보는 견해와 달리 맑스는 경제학적 관념에 따르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제시한다. 자본 축적의 일반적 법칙에 대해 쓰면서 그는 축적을 좌우하는 어떤 변수나 요인을 찾는데 별 관심이 없다. 반면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 일반법칙은 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실업자와 과잉인구가 많아지는 법칙, 즉 상대적 과잉인구의 법칙이라고 한다.같은 책, 728쪽.
그리고 자본의 축적과정을 다루는 7편 전체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 대한 예증에 관한 절--분량으로는 7편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로 끝나고 있다. 그 예증의 내용은 영국의 공업노동자 중 저임금층이나 유랑민, 최고임금 수혜층, 농업 프롤레타리아트 등을 통해 상대적 과잉인구의 다양한 양상과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이란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라는 명제처럼 당혹스럽고 난데없는 것이 경제학 서적에 또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맑스는 단지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의 효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 경우 그것을 ‘절대적’이라는 강한 말까지 사용하면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알기에 맑스는 수사학적 재능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의 선동적 내지 선전적 목적을 위해 개념이나 단어를 남용하는 사람은 아니며, ?독일 이데올로기?의 유명한 사례에서 보이듯이 적절하지 않은 단어의 사용을 극도로 자제했던 사람이다. ?자본?은 수사마저도 자제된 극히 절제된 문장들로 씌여져 있다. 따라서 그것을 단순한 과장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정말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 대한 명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자본의 축적 과정에 대한 맑스의 연구는, 자본 축적이 자본 자체의 내부적인 과정이라는 경제학적 관념에 대한 비판이다. 알다시피 이러한 관념은 자본의 축적을 가치법칙에 따른, 가치론에 공리계에 내부적인 과정으로 다루는 것이고, 자본의 축적은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내부적이라는 가정 위에 서 있다. 여기서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는 이미 가치론의 일부로 공리계에 포섭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자본의 축적과정에 대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결국 자본의 축적이란 가치론에 입각한 가치론 내부적인 과정이라는 관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한 자본 축적의 외부성에 대한 논증이고, 자본주의적 축적이 자본 자체에 대해 외부적이라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이는 두 가지 수순으로 행해진다. 첫째, 그것은 자본이 ‘기원’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봉쇄하는데서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자본의 축적에 대한 경제학적 논의가 자본의 기원적 가치를 가정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즉 축적에 충용된 추가적 자본은 이전의 자본이 낳은 것이고, 이전의 추가된 자본 역시 그 이전의 자본이 낳은 것이고... 하는 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이란 결국 자본이 자본을 낳는 과정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하는 것과 같은 옛날 이야기와 같다.”같은 책, 660쪽.
그러나 맑스는 그 추가적인 자본이 사실은 잉여가치에 원천을 두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축적되는 추가적 자본이란 “자본화된 잉여가치”고,같은 책, 660쪽.
따라서 축적이란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에 대한 이 명제는 축적의 외부성을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론 축적이 자본 내적인 과정이 아니라 그 외부인 잉여가치에 원천을 두며, 잉여가치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는 계보학적 비판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축적이라는 과정의 발생적 원천이 자본이 아니라 잉여가치라는 점을 통해, 그것의 ‘가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잉여가치가 생산되려면, (최초의) 자본이 먼저 있어야 하는데, 그 최초의 자본, 자본의 아담은 누가 낳았는가? “그[자본의] 소유자는 어디서 그것[본래의 초기 자본]을 손에 넣었는가? 그 자신의 노동과 그의 선조의 노동을 통해서다! 경제학의 대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답한다.”같은 책, 660쪽.
정확하게도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족보학적 방법.
이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이중적이다. 첫째, 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자본화된 잉여가치의 비율은 무한히 증가하며, 반면 최초의 자본이 있었다해도 그것은 이에 비하면 무한소에 가까운 양이다.같은 책, 666-667쪽.
여기서 기원의 ‘가치’는 양적으로 무화된다. 둘째, 최초의 자본(본원적 자본)의 탄생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다양한 재산을 폭력과 사기 등을 이용해 수탈한 결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생산자로부터 생산수단을 수탈한 결과다. 즉 본원적 축적이란 폭력과 강탈로 얼룩진 그런 이중의 수탈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원의 ‘가치’는 질적으로, 도덕적으로 무화된다. 요컨대 자본의 축적은 자본 자체의 기원을 갖지 않는다.
둘째, 축적 과정 자체의 외부성. 이는 자본의 축적이 갖는 자본주의적 성질에 대한 비판을 통해 드러난다.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로 표시되는 자본의 구성(composition)이이 가치구성의 소재적 측면이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고, 가치적 측면이 ‘자본의 가치구성’인데, 양자는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이 관련을 표시하기 위해, 자본의 가치구성이 기술적 구성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한다. 이는 가치가 불변이라고 가정할 때의 기술적 구성을 가치 텀(term)으로 표시한 것으로, 전체 자본에서 불변자본 부분과 가변자본 부분의 양적인 비율을 표시한다(같은 책, 695-697쪽). 여기서 맑스가 유기적 구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축적에 따라 취업노동자의 비율을 포착하려는 관심사 때문인데, 이는 가치 텀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수적 비율의 문제기 때문이다.
불변이라고 가정하면,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자본이 증가함에 따라 증가하며, 그에 따라 노동력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임금도 상승하게 된다. 이를 방지하려면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줄여야 한다. 이는 전체 자본의 구성 가운데 가변자본 부분이 차지하는 비율을 줄이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이 경우 불변자본 부분은 상대적으로 증가한다. 이를 유기적 구성의 상승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취업을 하지 못한 실업자가 증가한다. 이런 점에서 자본의 축적은 프롤레타리아의 증식이다.같은 책, 697쪽.
이처럼 자본의 축적은 언제나 인구의 상대적 과잉을 수반하면서만 이루어진다. 반대로 자본의 운동이 인구의 법칙에 따라, 즉 인구의 다소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경제학자들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구의 과잉에 의해 자본 축적의 양상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의 축적에 따라 과잉인구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721쪽.
이는 인구의 과잉에 대한 맬더스의 이론과 반대되며, 인구의 과다성과 재화의 희소성을 전제로 삼는 경제학적 가정과 상반된다. 이는 앞서 푸코가 정치경제학에서 발견한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특징 중 하나인 희소성의 관념이 맬더스나 다른 정치경제학자에게는 해당될 지 모르지만, 맑스의 경우에는 차라리 반대라고 해야 함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자본의 축적 법칙은 상대적 과잉인구를 끊임없이 수반하는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을 뜻한다.같은 책, 715쪽.
여기서 상대적 과잉인구는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결국은 가치법칙에 작용하는 배경이며 전제지, 그 결과는 아니다.같은 책, 723쪽.
나아가 자본은 가치법칙에 반하는 노동력 상품의 탈가치화를 통해 인구를 과잉화시키고 임금을 저하시킨다. 예를 들어 노동력이 부족하면 높은 임금을 그대로 주거나 노동자들이 늘어나 임금이 하락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노동자를 과잉화시키고 임금을 낮춘다. 이처럼 자본주의적인 과잉인구의 법칙은 노동력 상품의 수요와 공급을 규제하는 가치법칙에 대해, 그리하여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인 것이다. 하지만 가치법칙에 필수적인 전제라는 점에서 내재하는 외부다.
결국 맑스는 자본주의적 축적이란 가치법칙에 반하여 노동력이란 상품의 가치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과정임을, 그리하여 자본이 노동력 상품의 탈가치화(Entwertung)를 통해서만 노동을 가치화한다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축적이 자본 내적인 양상을 취함으로써, 축적을 위한 과잉인구화는 자본의 경쟁력과 생산의 효율성을 위한 자본의 당연한 권리로 나타나고, 보존되지 않는다는 노동력 상품의 특이성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힘을 무력화한다.
또한 자본의 축적은 불가피하게 ‘공황’을 야기한다. ‘공황’은 과잉인구화의 다른 측면이기도 한데, 과잉인구화와 유사하게 상품의 대대적인 탈가치화를 수반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본의 탈가치화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 점에서 자본의 축적이 야기하는 공황은 가치론에 외부적인 과정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자본 축적의 외부성, 그것은 자본 축적의 내부에 가치법칙과 그 외부에 의해 구획되는 경계가 자리잡고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자본 축적의 내적 경계다. 동시에 그것은 자본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그 경계에 반복하여 부딪치고, 그 경계를 반복하여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은 자신의 경계, 축적의 한계를 갖지만, 그것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경계나 한계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자본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는 없다. 차라리 그것은 항상-이미 경계,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자본은 반대로 언제나 그 경계를 넘으면서 존재하며, 넘어야만 존속할 수 있다.
한편 로자 룩셈부르크는 드물게도 이러한 잉여가치의 외부성, 축적의 외부성을 직관적으로 포착한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유기적 구성의 상승이 축적의 내적인 곤란과 결부되어 있음을, 다시 말해 축적의 외부성과 결부되어 있음을 포착한다. 그러나 그는 그 외부성이 ‘내재하는 외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간의 외적인 경계로, ‘비자본주의적 시장’이라는 지역적인 외부를 뜻하는 것으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끊임없이 부딪치지만 반복하여 넘을 수 있는, 항상 넘어야 하는 한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더불어 잉여가치와 축적의 외부성을, 자본 축적의 내적 도식(재생산표식) 안에서 증명하려 함으로써 붕괴론적 결론으로 나아갔다.R. Luxemburg, Die Akkumulation des Kapitals, J. Robinson tr., The Accumulation of Capital, MRP와 비판가들에 대한 응답인 Die Akkumulation des Kapitals, oder Was die Epigonen aus der Marxischen Theorie gemacht haben, Eine Antikritik 참조. 재생산표식이 자본 축적의 균형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방법론적 도구라는 점을 통해 로자가 사용한 방법을 비판한 것으로는 R. Rosdolsky, Makings of Marx's ‘Capital’, Polity 참조.
그러나 정치경제학적 공리계가 그녀를 반자동적인 축적의 내적 과정이라는 벽에 가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 축적에 관한 로자의 분석은 혁명적 직관이 정치경제학의 그 벽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4.근대 비판으로서 정치경제학 비판
앞서 말했듯이 맑스는 자신의 평생을 건 연구를 ‘정치경제학 비판’이란 이름으로 반복해서 지칭했다. 그런데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대체 무엇을, 정치경제학의 무엇을 비판하려는 것이었는가? 정치경제학의 부르주아적 잔영? 혹은 정치경제학이라는 과학 내부의 비과학적 요소? 그리하여 예를 들면 ‘시니어의 최후의 한 시간 개념‘이나 벤덤의 공리주의, 혹은 밀의 절충주의? 맬더스의 인구이론? 바스티아나 세이의 속류 경제학?
?자본? 내지 ‘정치경제학 비판의 주된 비판 대상은 고전 경제학의 가장 중심적 이론가인, 그리하여 그 자신이 과학자로서 인정하는 스미스와 리카르도다. 아마도 맑스가 ’자랑할 수 있는 적‘은 그 두 사람 뿐인 것같다. 그렇다면 그는 스미스와 리카르도의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들의 노동가치론이며, 축적이론을 포함하여 가치론에 기초하고 있는 정치경제학 전체다.
?자본?에서 맑스의 비판은 이중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제목대로 ‘자본’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제대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것이다. ‘자본’에 관한 비판은 직접적인 비판이라는 부정적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차라리 긍정적 분석의 양상으로 진행된다. 상품, 화폐, 자본, 가치화 과정, 축적 등에 대한 개념적 서술의 양상으로 ‘자본’에 의해 작동되는, 노동자의 활동과 활동능력을 포획하는 메카니즘을 분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분명 ‘자본’에 대한 책이며, 자본이 작동시키는 메카니즘, 혹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에기계적 배치는 신체적(corporel) 혼합의 차원에서 정의되고, 언표행위(enonciation)의 배치는 언표와 행위의 효과라는 차원에서 정의된다. 예를 들면 정신병원이 광인을 다루는 기계적 배치라면, 정신병리학은 그것을 위한 언표행위의 배치다. 감옥이 범죄자를 다루는 기계적 배치라면 형법·범죄학은 범죄자를 정의하고 그들에 대한 처벌을 정의하며 또한 정당화하는 언표행위의 배치다. 기계적 배치와 언표행위의 배치 개념에 관해서는 G. Deleuze/ F.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의 4‘장’을 참조.
관한 책이지 ‘자본에 관한 이론’이 아니며, 그런 점에서 ‘자본’이지 ‘자본론’이 아니다(이런 점에서 그가 노동에 대한 이론, 임금에 대한 이론을 따로 쓰지 않았던 이유를 오히려 이해할 수 있다). 좀더 나아간다면, ?자본?에는 맑스의 가치론도, 맑스의 화폐론도, 축적론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의 기계적 배치에 대한 긍정적 형태의 서술은 언제나 그것이 야기하는 부정적 결과로 끝나고 있다. 상품과 화폐에 관한 장은 ‘물신성’으로 끝나고, 절대적 잉여가치에 관한 장은 노동일을 둘러싼 투쟁으로, 상대적 잉여가치에 관한 장은 기계와 공장이 노동자의 삶을 변형시키는 것으로, 자본 축적의 일반법칙은 과잉인구에 대한 것으로, 본원적 축적은 토지에서 분리된 이중으로 자유로운 무산자의 대대적 창출로 끝나고 있다. 이는 자본이라는 기계적 배치가 야기하는 효과에 대한 서술이다. 알다시피 이것처럼 자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
다음으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 이는 자본주의의 개념적이고 언표적인 배치로서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부정적인 양상의 비판으로 진행되며, 종종 명시적으로 그 대상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자본? 1권의 전반부는 정치경제학의 가장 기초적인 영역인 가치론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스미스와 리카르도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이 행해지고 있다. 그 핵심은 한마디로 말해 ‘노동은 가치를 낳지 않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노동가치‘란 개념은 잘못된 말이며, 나아가 그것은 자본주의의 비밀인 ’자본의 증식‘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본이 축적에 대한 비판: 자본의 축적이란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일 따름이며, 자본축적의 법칙은 과잉인구의 축적을 야기하는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라는 것이다. 이는 과잉인구를 생물학적 법칙으로 설명했던 맬더스와 이윤율의 저하를 통해 인구 성장이 정체하리라고 보았던 리카르도 모두에 대한 비판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의 기원과 발생을 설명하는 ’본원적 축적’에 대한 부분은 스미스의 ‘선행적 축적’ 내지 티에르(Thiers)의 ‘본원적 축적’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기묘하게도 ‘계보학적’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언제나 기원을 상기시키고 그 기원에 줄기를 댐으로써 정당성을 찾아내려는 정당화의 방법을, 반대로 기원의 가치를 드러내고 그것을 의문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면 축적과 ‘본원적 축적’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축적에 대한 장은 두 가지 주장을 겨냥하고 있다. 하나는 축적이란 자본가들의 절욕과 금욕의 산물이라는 절욕설이고, 다른 하나는 축적을 통해 확대된 자본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모두 노동자계급이 소비한다는 스미스의 명제다.
이에 대해 맑스는 축적과 추가적 자본의 발생지에서 잉여가치를 드러냄으로써 축적의 기원적 가치를 일거에 의문에 부쳐버린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은 항상적으로 과잉인구를 창출함으로써 작동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최초의 자본’ 내지 ‘본원적(ursprungliches) 자본’을 제시하는 경제학자들을 쫓아간다(이로써 본원적 축적에 관한 장이 가장 뒷부분에 위치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축적이란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해도, 그러한 과정이 시작되려면 언젠가는 이미 축적된 자본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 그리하여 그러한 본원적 자본으로 인해 노동하지 않아도 부가 증대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을 겨냥한다. 즉 본원적 자본의 축적이란 한편으로는 공동의 소유물을 수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을 생산자로부터 수탈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역시 본원적 자본, 기원적 자본의 가치를 의문에 부쳐버린다. 이는 정확하게도 계보학적 비판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의 계보학'과, 그것을 서술하는 '?자본?의 계보학'을 발견할 수 있다. 니체 이전의 계보학.
다음으로 이제 우리는 푸코가 제기한 비판에 대해 적절하게 답할 수 있다. 푸코는 노동가치론과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기원에 대한 관념, 희소성의 관념, 유한성 내지 역사의 종말에 대한 관념을 통해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근대적 에피스테메 안에 있었음을 주장했다.
첫째, 기원의 문제에 관하여. 스미스에게 노동이란 분명히 가치에 대한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객체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리카르도에게 그것은 분명 가치의 기원이라는 관념을 명확히 취하고 있었다. 반면 맑스에게서 노동은 노동력의 사용가치로, 노동하는 자와 자연과의 대사과정으로 정의된다. 이미 보았듯이, 이러한 노동 개념은 가치라는 양적 계열과는 전혀 다른 질적 차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양이 질에서 추론될 수 없듯이, 가치는 노동에서 추론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은 가치의 기원이 아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것은 맑스는 이러한 기원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원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경우에도 그것은 이 증식된 가치의 원천이 외부적이고 이질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에서며, 이런 의미에서 정확히 계보학적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의 노동 개념은 기원의 관념과는 거리가 멀고, 차라리 그것에 대한 비판적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희소성의 문제. 정치경제학은 재화 내지 상품의 희소성과 인구의 과잉에서 경제학의 임무과 위상을 추론했다. 그러나 맑스는 반대로 재화의 희소성과 인구의 과잉이 자본의 축적에 의해 야기된 결과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의 이면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희소성과 경제의 관계는 정치경제학의 그것과 정반대다. 마치 푸코가 유한성을 근대적 인식의 배치라는 조건을 통해 규명하듯이, 맑스는 희소성/유한성을 자본의 배치라는 조건을 통해 규명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역사와 종말의 문제. 푸코의 비판과 달리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자본주의의 한계 내지 ‘유한성’은 자본의 증식에 처음부터 내재하는 경계요 내재하는 외부다. 그것은 한 번의 도약으로 넘어설 수 있고 초극할 수 있는 외적 경계가 아니라, 처음부터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반복하여 넘어서는, 어떤 거대한 도약도 종종 ‘뜻하지 않게’ 다시 조우할 수 있는 내적인 경계다. 따라서 그것은 종말을 전제하는 근대주의적 역사성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차라리 그것을 벗어나 경계와 외부의 개념 자체를 변환시킨다.
그렇다면 ‘자본 축적의 역사적 경향’에서 울리는 ‘자본주의의 조종’은 어떠한가? 그것은 ‘경향’이라는 개념의 맑스적 용법을 통해 본다면, 내적인 이율배반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형성되는, 그리하여 주기적으로 나타나던 단절처럼 내적인 경계, 내재하는 외부를 표시한다. 왜냐하면 이윤율 저하의 경향은 언제나 그것을 상쇄하는--그 경계를 넘어서게 하는--요인과 결부되어 사용되며, 이 경우 그 저하 경향이란 자본에 내재하는 이율배반이 야기하는 경계의 극한적 표현인 것이고, 이윤율과 연관된 양방성의 힘 가운데 하나를, 그러나 내적인만큼 본질적인 힘을 지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근대적 에피스테메에 관한 푸코의 기준와 연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에조차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근대적’이라는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근대의 무의식적인 인식론적 배치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맑스 자신이 자본주의로 포착한 근대 사회를 넘어서려고 하는 만큼 근대적 에피스테메를 넘어서 있다. 물론 이 ‘넘어섬’이 뜻하는 바에 대해, 외부적 경계를 통해 사고했던 기존의 관념을 넘어서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자.
맑스의 ‘비판’은 스미스와 리카르도가 제시한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인 것(결정불가능한 것)으로서 잉여가치 개념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노동 가치론 자체에, 또한 자본 자체에 내재하는 이율배반을 포착한다. 그리고 가치론 공리계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하는 그 이율배반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적대를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전복을 사유하려고 한다.
반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이 잉여가치에 관한 명제는 가치론의 공리계를 과학화하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공리로서 포섭된다(공리화). 이로써 가치론의 확장 내지 정정으로서 잉여가치론이라는 공리계가 구성된다. 이것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기초, 그리하여 이데올로기적 전투가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전장이 된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새로운 공리를 통해 구성된 (잉여)가치론의 공리계 역시 또 다른 결정불가능한 명제를, 그 공리계에 외부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맑스는 가치화/가치증식 과정이 끊임없는 탈가치화(가치파괴; 가치잠식) 과정을 내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자본의 축적이 (상품 및 노동력) 가치의 파괴라는, 그리고 과잉인구라는, 가치론의 공리계와 무관한 외부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 다시 한 번 드러난다.
물론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이러한 외부적 명제를 또 다시 공리로 추가함으로써 이른바 ‘축적론’, ‘공황론’ 등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시도는 결국 ‘과학적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 아래, 스미스, 리카르도에 의해 마련된 근대적인 지반으로 맑스의 돌파지점을 반복하여 재코드화하고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통해 맑스의 사상이 반복하여 근대성 안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근대가 목표로 추구되던 조건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근대의 초극이 정말로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되어야 하는 역사적 조건에서라면, 근대적 정치경제학, 근대적 맑스주의를 넘어서 맑스가 열어놓은 탈근대적 사유의 공간을, 근대 너머로 탈주선이 흘러넘치게 하는 새로운 운동의 창조의 장으로 변환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근대를 넘어선 맑스의 사유의 요소들을 다시 확인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밀고 나아가며 변이의 선을 찾고 새로운 형상으로 구성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구를 지키는 환경과학 (0) | 2020.05.28 |
---|---|
중국 당대 학자산문의 예술적 특징 (0) | 2020.05.28 |
정체성의 미시정치학을 위하여 (0) | 2020.05.28 |
장르로서의 영화 (0) | 2020.05.28 |
잘못된 과학 상식들 (0) | 2020.05.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