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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장르로서의 영화

by Frais Study 2020. 5. 28.

1. 장르로서의 영화
(1) 영화 형식

표현물로서의 영화 형식에 대한 고찰은 한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시 실천적인 대안으로서의 문제와 그 방법적 소재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하다. 즉 다시 말해서  형식이 내용을 규제하는 문제, 예를 들면 pc통신에서 채팅으로 여자를 만난다고 할 때 거울보고 여드름 짤 이유가 있는가 말이다. 하나의 이론을 설명하고자 할 때나 내러티브적 스토리를 보여줄 때 영화는 카메라 앵글이나 조명, 사물의 공간과 배치와 같은 형식으로서의 장르적 양식의 문제를 이용한다. 영화가 영화답다고 하고 그것이 좋은 영화라는 것은 다른 장르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만의 형식적 특성을 살릴 때 유효한 것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과 똑같은 공간의 재현이 아니라 조작되어진 이미지의 문제이다. 걷고 있는 사람을 묘사 할 때 영화는 ‘발’같은 일부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여러 의미를 담을 수 있다(즉 여기서의 발은 운동감의 표현이나 사회적으로 하부 구조의 모습을 암시하는 다중적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창조된 상황’과 ‘새로운 사물’ 곧 예술적 층위에서 변형된 사람과 사물을 묘사함을 말한다.(카메라쪽에서 보면 스크린 면적의 고립이나 관객이 보는 시선의 제한 같은 방법으로) 

영화의 구성 단위는 쇼트이며 쇼트들은 잇따르는 형태로 펼쳐지지 않고 단계적으로 배열된다. 쇼트와 쇼트 사이의 간격은 마디로서 관객이 참여하는 상상적 공간을 허락한다. 여기서 몽타주 이론이 나온다. 몽타주는 화면접착의 수단이자 스토리 상황의 설명 수단이며 지각되지 않고 감추어진 것이자, 기본적으로 관객에게 상상의 공간을 주는 리듬으로 작용한다. (여기 유명한 이론가 ‘에이젠 슈타인’이 있다. 그의 영화 ‘파업’에서 군인들에 의해 동맹 파업자들이 무자비하게 학살과 살육당하는 상황을 도살장 안에서 황소의 목따는 장면을 삽입시킴으로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 황소 도살 장면에서 흐르는 피는 자본주의 잔혹성이나 노동자들의 상황을 관객들이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영화는 스토리와 플롯의 문제를 해결할 때 고유의 재료와 양식에 반드시 주목해야 함을 필요로 한다. 영화가 아무리 진실하더라도 심지어 다큐멘타리에서마저 현실적 신빙성은 파괴된다. 이는 예술 형식으로서의 장르의 문제가 특별한 소재선택의 문제, 그리고 표현 내용의 문제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가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코미디 영화에서의 플롯 전개는 스토리밖에   존재한다(이야기 바깥에서 영화로서 표현할 수 있는 장르를 동원하여 코미디 영화는 웃기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연극에서와는 달리 디테일(표정, 대상) 등을 볼 수 있고 , 상상되어지듯이 장소를 수월히 이동할 수 있고 다양한 거리에서 다양한 얼굴로 다양한 조명을 통해 인물과 사물을 볼 수 있다. 
스크린은 상상의 공간이고 그것에서 고정된 부동성이란 없다. 

영화도 시간의 흐름으로 지각되는 예술이라 할 때 시간이 지각되는 형식으로서의 일종의 마디를 가져야 하고 그 마디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화의 언어가 된다(즉 쇼트와 쇼트 사이의 간격이 관객에게 말하는 상상적 공간으로서 언어가 된다). 마디는 자체의 특성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성분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제 지각할 수 있는 구조적 부분에 이른다. 영화는 자연을 재료로 그것을 변형시켜 생긴 자기 고유의 인위적으로 구축된 조건적인 것이며 어떤 점에서는 이러한 ‘이차적인’ 특성을 기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 언어는 다른 장르의 언어 이상으로 현실과 긴밀히 연결된 조건적인 특성을 가진다. 영화의 기반은 일상의 사용을 통해 익숙해져 스크린에서도 곧바로 이해 가능한 표정과 제스처로 되어 있다. 문제는 너무 빈약하고 다의적이란 사실이다. 게다가 일상에서 사용되지 않는 의미 시스템들을 만들어 내는 대중매체로서의 경향도 지닌다. 
영화의 연속성은 몽타쥬가 완벽한 연결이 아닌 단속적인 연결들을 야기하기 때문에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여기서 ‘심리 기호학’의 문제와 만난다. 영화 구조에 나타난 모든 요소들을 자세히 읽는 방법을 통해 영화와 관객의 정체성에 대한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기표’로서는 스토리, 배우, 무대 공간, 조명, 배우들의 동작 등이 될 수 있겠고 ‘기의’로서는 관객의 집단의식에 의하여 이러한 기표로부터 나오는 의미나 메시지 등이 될 것이다. 영화 속에서 기호의 의미를 통제하는 일련의 가치, 신념, 보는 방식 등을 연구하여 기호에 담겨지는 이데올로기의 흔적에 초점을 주는 노력이 필요해진다. 더 이상의 논의는 기호학과 무의식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므로 이를 설명한 후 논의를 발전시켜 보고자 한다. 


(2) 영상매체적 기호학

소쉬르에 의해 구조주의와 연관됨으로써 기호학과 언어학은 맑스의 경제학적 사회 진단에 대한 비판으로서 그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다. 
우리가 ‘학교’라는 말을 한다고 할 때 ‘학교’라는 말은 기표가 되고 그 실제 학교는 기의가 된다. 문제는 그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하나의 학교라는 이미지가 그려진다는 것이고 그 학교는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으로 결정되어진 구조화된 학교이다. 또 개인에게 있어서 ‘학교’라는 이미지가 생성되어진다는 점은 같으나 각각 상상되어지는 학교는 개인적 차가 있다. 여기에 오해와 해석의 차이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기호학은 현재 시각 매체들이 생산하는 이미지들과 모조 실재성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학문이며 그런 이미지들에 숨겨진 전략이나 신화들을 밝히는데 유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이미지를 이용한 전략은 광고에서 비교적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상품화 같은).

‘힘’ ‘체력’ ‘권력’ ‘권능‘ ’지배력’ 등등은 언어의 내면적 특성인 ‘기의’들이다. 특히 이런 사전적 의미들을 ‘외시의미’라고 하며 외시의미는 객관적 의미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POWER' 라는 말을 들으면 누가 듣든 어디서 듣게 되든 그 뜻은 분명하다. ‘함축 의미’란 단어를 읽는 사람의 과거 경험에 따라 이 단어가 그에게 주는 의미가 다르다. 예로 권력이 없는 사람이 ‘POWER'라는 말을 듣고 느끼는 것은 어떤 결핍이거나 ’열등의식‘이거나 권력자에 대한 증오 아니면 공포 같은 함축적 의미들이다. 함축 의미들이 이데올로기(혹은 신화)를 작동시키며 문화적 집단을 일으킨다. 하나의 기표는 두 개이상의 다른 수준에서 수많은 기의들을 불러내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기표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관념이나 개념)을 가지기 때문에 기표들은 일반적으로 다중의미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기의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추상적인 생각이나 느낌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 우리의 인지 작용에 나타나지 못한다. 그것이 표현되려면 지각이 가능한 어떤 것에 실려야 한다. 기표는 기의의 운반체이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어떤 생각이나 느낌, 달리 말하면 의미의 표현과 전달을 위해 불가피한 수속절차이다. 

의미 작용을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하나로 묶어 냈을 때 하나의 기호를 얻게 된다. 예를 들면 ‘POWER/ MASTER' 맥주 상표 자체는 ’강력한 지배‘ ’의욕‘을 나타내는 의도적인 기호이다. 기호는 어떤 다른 것을 대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에 의지해서 우리는 체험들을 기호로 표현하고 표현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거나 혹은 적당한 매체에 저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매체들은 기호들을 생산 조작하는데 도움을 주는 테크놀로지이다. 
기표와 기의의 암호를 제대로 해득하기 위해 2가지의 기본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로 ‘약속’이다. 어떤 약속 밑에 기표와 기의가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근데 이 약속은 암호 사용자들 사이에만 알려지는 것이고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다. 코드(부호화)는 타인들을 속이기 위해 기호에 거짓을 삽입하고 타인들에게 혼돈을 일으킨다. 따라서 기호학적 해석은 호두알을 깨듯이 기호를 만들고 있는 코드를 깨뜨려 그 약속의 내막을 알아보는 행위이다. 둘째로 기호들로 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알아야 한다. ‘약속’과 ‘상황’이 모호하게 될 때 거짓이 일어날 수 있다. 앞의 ‘P/M'예에서 왜 하필이면 ’POWER'와 ‘MASTER'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 어떤 의도가 이 상표에 이런 기표들을 사용한 맥주 상품에 숨겨져 있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지각 작용에 처음으로 포착되는 것은 기표다. 라깡은 기표들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세 가지 중요성이 있다. 
첫째, 기표가 기의를 소용없게 만들거나 혹은 기표가 기의의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일단 기의가 파악되면 기표는 불필요해 질 수 있지만 기표가 기의를 어떻게 표현하며 어떻게 기의를 운반해 주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파악하는 기의가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술에 있어서도 형식이 바뀌어서 내용이 극단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기표는 본질상 ‘은유’ (한 평면의 것을 다른 평면에 의해 표현한 것)이면서도 ‘환유’의 역할을 할 때가 있다. ‘환유’란 ‘어떤 부분적인 것에 의해서 그것에 연결되어 있던 전체를 대표하는 것’ ‘인접성’을 말한다. 
모든 기호가 근본적으로 은유다. 은유의 근본적인 특징은 기표와 기의가 서로 다른 세계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불연속체라는 것이다. 시각 매체의 영향으로 은유를 사실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무수히 생기고 있다. 
이런 진리의 도착이 일어나는 이유는 저 밖의 현실적 실재성들이 매체에 의해 ‘내파’되었기 때문이다. ‘내파’에 의해서 기표와 기의의 두 다른 세계가 하나의 연속 체위에 겹치게 된다. 마치 은유가 어떤 실재성과 직접 닿아 있는 것처럼 혼돈하게 될 것이다. 거짓이란 은유가 가리키는 모호성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진실을 증폭하고 고의적으로 생산되는 거짓을 극복할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참고적으로 ‘내파’는 알뛰세의 개념이다)

‘내파’의 개념은 20C중반 이후 현실체들이 매체에 의해 내부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는 데서 시작한다. 이 현상은 TV같은 시각 매체에 대해서 일어났는 것인데 이러한 언어의 내파로 말미암아 시각 문화에서 현실 체들의 대상적인 진실성은 죽었다고 본다. 그 결과 매체들 스스로가 저 밖의 실재성인 것처럼 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TV뉴스를 보면서 마치 실제로 사건 현장을 보는 것처럼 믿는다. 
시각 매체의 거짓된 ‘과실재성’의 생산함에 있어서 실재성이나 근원이 없는 어떤 실재성의 모형들을 채용함을 ‘모조화’라고 한다. 이런 모조화의 특성은 첫째, 모조화는 실재성의 매력을 죽인다. “미디어는 사건 물체 지시 대상을 사라지게 한다.”(쟝 보드리야르)  둘째로, 모조화는 추상 즉 개념의 마력을 죽인다. 이것은 원물체의 기의가 증발됨을 뜻한다. 과실재성이 전통적 기의들을 모두 무의미하게 만들고 그 자체의 새로운 기의 체계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문제는 시각 매체들이 등장하면서 꿈의 진실된 이상향을 잃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지각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내용들이란, 어떤 실재성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아니고, 커뮤니케이션에 채용된 테크놀로지가 저 밖의 실재성에 일차적으로 해석을 가한 것을 우리의 의식이 얻게 되는 것, 말하자면 이차적 경험이 되는 것이다. 
영상들의 대부분은 과실재성들로서, 허위라기 보다는 조작에 의해 완성되는 대체 비실재적인 것들이다.
영상 테크놀로지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눈이 되었다. 이 직사각형의 외눈은 우리의 거실과 안방, 휴게실 회의실 등 곳곳에 있고 우리와 직접 닿고 있지 않은 외부 세계를 마치 우리에게 직접 연결된 세계처럼 문자 그대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게 된다.(여기서는 ‘타자’에 대한 개념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몸매가 TV 속의 영상의 것에 비해 비둔하다고 느낀다. 그 눈을 통해서 우리가 사사로운 여가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탐지되고  그 눈짓에 의해서 우리의 여론은 달라진다. TV는 우리에게 실재성을 변형시켜 과실재성(꾸밈에 의해서 진짜보다 더 진자로 보이는 영역)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호학적 연습’이다. 기호학적 담론을 통해 어떤 공감대를 형성할 때 개인적 해석 관계와 집단적 관례 사이의 문제성이 있는 차질은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3) 정신분석학: 무의식과 언어: 라깡의 이론을 중심으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성되어 있고 무의식이란 ‘타자’의 영향하에 있다.(헤겔의 언어로는 ‘타자’는 ‘대자’가 되고, 사회학적인 용어로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는 언어가 무의식의 조건이라는 말인데 중요한 것은 ‘타자’의 개념이다. ‘타자’란 언어에서 기표들이 기의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강요된 이미지들의 흐름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언어는 그 구조가 은유(대체)와 환유(인접성, 연속성)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프로이트의 꿈작업에서 사회에서 금지된 욕망이 꿈으로 나타나는 경우 꿈의 내용이 압축되어 어떤 물건이나 이미지로 바뀐다(대체). 이번에는 옆의 것과 자리를 바꾼다(인접성). 그러므로 꿈에서는 자꾸만 여분을 남기는 어긋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라깡의 이론에서 3살 이전의 어머니와의 완전한 동일시 단계를 ‘상상계’라 하며 그후 거울상 단계(타인은 의식하지 않으나 의식을 가지게 되고 통일된 영상을 부여해 가는 단계)를 거쳐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위기는 상징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 존재하는 모녀의 일치감을 깨뜨리면서 아이가 어머니와 어머니의 몸에 다가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법은 아이에게 분리와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곧 어머니의 몸의 상실인데 어머니를 향한 욕망이나 어머니와의 상상계적 일치감도 억압되어야 한다. 상상계에 남아 있다는 것은 도착으로서 정신병이 된다. 따라서 아이가 하나의 주체로서 말을 한다는 것은 억압된 욕망이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결핍’ 또는 ‘손실’의 환유로 본다. 인간은 언어로 말미암아 무의식의 세계를 떼어 낼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잃었다. 모계 질서의 대륙을 잃었다. 인간은 이 손실을 되찾기 위한 영원하고도 절대적 욕망을 갖는다. 욕망은 언어의 이면이다. 인간은 언어로 말미암아 타자로 되어 버린 것들과 그것들의 세계를 욕망한다. 인간의 욕망을 존재를 위한 바램의 환유로 본다. 인간은 스스로를 불완전한 조각으로 보고 타자와의 연합에서 총체를 성취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이미지는 하나의 은유이기 때문에 환유적 연계는 결국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은유는 또 하나의 무의식적 과정이다. 욕망은 손실로 말미암아 일어나며 잃은 것과 잃은 자 사이의 거리를 나타낸다. 이 공간에 의식은 존재하고 언어로 욕망을 표현한다. 이미지는 잃은 것의 실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잃은 것의 환영에 의해서 이 거리를 -따라서 욕망을- 지워 없애려고 한다.

라깡의 이론중에서 무의식은 기표들의 창고와 같이, 혼선된 곳이나 기표들이 담화를 통해 이야기체로 바뀐 것의 통합체라고 부른다. 무의식 속에서 기표들은 은유의 조작되어지는 공정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를 일으킨다. 즉 한 기표는 다른 기표의 은유가 됨으로서 임의의 새 의미들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돼지가 길몽이라고 생각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상의 언어들은 은유와 환유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의식을 진부화시키고 비이성화시키는 담론을 이룰 뿐이다. 이미지의 환유 과정은 우리를 환영으로 속이고 그것의 은유는 우리를 불가사의한 세계로 덜어 드린다. 이미지는 우리의 에덴을 신기루처럼 보여줄 분, 거기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 이미지의 유혹에 우리를 내 맡기는 한 우리는 우리를 잃을 뿐이다.
이렇게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 때부터 아버지에 의해 영향받듯이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언어의 세계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이를 라깡은 타자의 ‘응시’라고 한다. 즉 우리의 의식 속에는 타자에 의해 보여진다는 생각과 대상을 바라본다는 주체적 시선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우스개인 공주병시리즈도 농담도 타자의 응시와 주체의 시선에 대한 것에 다름 아니다. 
주체가 대상의 응시를 알아채거나 자신의 욕망을 대상의 욕망과 일치시킬 때 이미지의 환상은 깨어지고 도착증이 발생한다. 

대상의 응시가 너무 과도하다는 측면에서 포르노 영화는 전체주의적이다. 여기서는 주체는 대상의 응시에 압도당하여 환상을 가지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주체의 대상의 응시를 알아채지 못할 때 그 대상에 매혹되는 법인데, 포르노 화면은 관객을 유혹하려는 욕망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노골적인 혐오밖에 유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환상이란 주체의 시선과 대상의 응시가 교차되는 어느 시점에 생긴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응시란 주체가 대상에 의해 보여짐을 듯하고 이것은 타자를 품는 다는 듯이다. 예를 들면 양들의 침묵에서 관객이 범인의 응시를 통해 다가서기에 그녀의 불안과 상태 등이 리얼하게 고조되는 것이다. 
환상은 현대사회에 있어 주체가 삶을 영위하는 수단이다. 인간은 추구하는 대상이나 목표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바라봄과 보여짐의 교차에서 생겨나는 이미지, 그 매혹 없이 인간은 고통스런 현실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내부에 낯선 섬이 있다는 것, 타자가 있다는 것은 대상을 일방적으로 단정짓거나 해석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타자 의식’이다. 우리는 볼뿐만 아니라 대상에 의해 보여지기 때문에 이미지를 볼 뿐이다. 즉 타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자아 중심주의의 ‘해체’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성당에서 성화가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욕망에 의해 보여진다고 자아가 착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환상적인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4) 영화 ‘피아노’의 기호학적 읽기; 페미니즘의 영화로서

기호학적 페미니즘의 영화로 소개되어질 수 있는 것이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이다. 복잡한 추리 물도 아니고 복잡한 사건이 얽힌 것도 아닌 진부한 삼각 관계의 연애 영화가 왜 사람을 매혹시키는가?  ‘피아노’는 여성자아찾기로서의 영화이다. 여기서 피아노는 기표가 떠돌아다니듯 대상을 미끼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여주인공과 피아노는 떼어놓을 수 없는 아주 친밀한 관계로서 그 여성에 있어 이미지로서 작용한다. 
바닷가에 다른 이삿짐과 함께 도착한 피아노는 여느 것과 다른 거였다. 남편은 길이 험하니 피아노를 가져 갈 수 없다며 여자는 아쉽게 돌아본다. 남편이 없는 날 모녀는 이웃 남자에게 청하여 해변가로 나와 하루종일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는 어릴 적부터 말을 못하는 그녀가 자아에 갇히지 않고 사회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그녀의 자존심이었고 그녀가 기대어 삶을 영위하는 환상이었다. 그러기에 해변가에 버림받는 순간부터 피아노는 광취를 얻는다. 피아노는 기표가 된다. 여자에게는 없으면 살 수 없는 환상이고 남편에게는 돈 가치가 없는 귀찮은 물건이요 연인에게는 그녀의 영혼에 이를 수 있는 통로이다.
버림받은 피아노를 남편에게 땅을 주고 사들인 연인은 피아노를 매개로 그녀와 조심씩 가까워지려 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사랑을 얻지 못한다. 그는 분노로 피아노를 돌려주고 그 일은 엉뚱하게 그녀의 가슴에 움츠린 사랑을 끌어낸다. 피아노가 들어오자 자아를 되찾은 그녀는 연인과 함께 섬을 떠난다. 남편은 그녀의 소중한 환상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소유물로 생각할 뿐이었고 연인은 그녀의 환상을 존중했고 사랑이란 육체를 통한 영혼의 교감이라고 믿었다. 
캠피온은 두 남녀의 차이를 설명보다는 한 장면으로 관객의 뇌리에 새긴다. 남편이 아내의 밀회를 훔쳐보는 장면이다. 그는 땅에 대한 욕심으로 아내가 연인의 품에 안기는 것을 묵인한다. 아니 묵인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장면을 훔쳐보며 제 스스로 성적 만족을 찾는다. 그에게 사랑은 관음이요 정욕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피아노는 또 한 번 자리를 옮긴다. 이번에는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피아노를 찾았고 연인을 얻었는데 그녀는 왜 피아노와 함께 물 속으로 뛰어드는가? 여자와 피아노를 묶은 밧줄이 물 속에서 풀어져 다시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녀의 이런 자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편에 의해 손가락이 짤렸기에 그녀는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가 닫혀 버린 것이다. 피아노는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고 그녀가 그것을 칠 수 있을 때만이 그녀에게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이에 대한 답은 피아노는 그녀의 삶을 지속시키는 동인이요, 그 것 없이는 살 수 없는 환상이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미하기에 사랑보다 앞선다. 정체성을 잃지 않을 때만이 진정한 사랑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대화보다 상징적인 장면으로 말을 하고 비록 배경이 과거인 낯선 원주민의 세계라 할지라도 여성의 자아 인식을 강조한 오늘날의 페미니즘 영화다. 또한 소유가 아니라 경험의 교환이라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추구하는 보편성을 지닌다. 
깊은 물 속으로 잠기는 피아노는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때 억압되는 부분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다시 떠올라 사회 속에서 한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물 속에 잠겼다 떠오르는 행위는 원주민이 사는 섬(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사회(아버지의 이름)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겪어야 했던 상징계적 경험이다.


(5) 영화에서 나타나는 성에 대하여

현 사회에 있어 성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건 쾌락이건 인간 존재의 근원성을 표현한 것이건 간에 하나의 자기 발견의 도구로서 쓰여지고 있다.
영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드라마가 끝날 무렵 형무소에 복역 중인 주인공을 면회하러 멀리 미국서 애인이 찾아온다. 면회실 유리창 너머로 굶주린 눈을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애인에게 옷을 벗으라고 말한다. 만져 보고 싶어도 만져 볼 수 없는 유방을 쳐다보며 면회실 바닥에 누워 , 자의 행위를 한다. 극한 상황에 빠진 인간에게 있어 섹스는 다른 어떤 인간의 말보다도 인간의 구원임을 통감케 한다.

섹스는 모친의 품속에 안기며 안심하는 것과 같은 행위다. 광폭한 청년의 여성 편력을 그린 영화는 성적 억압을 사회적 억압의 일부로 파악했다. 강간으로밖에   성적 쾌감을 얻지 못하는 한 변질자의 행동을 추구한 작품도 있다. 그것은 억압이 앙금처럼 내면화하여 비합리적이고 파괴적인 충동으로 전환하는 필연성을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섹스는 갖가지 정신적 억압과 행방을 가장 생생하게 상징하는 것이긴 하나 그것은 지배와 피지배, 화합과 투쟁, 권력과 예속, 자유와 고독, 노예의 행복과 자립하는 불안, 등등 정치 사회학의 문제로 설정될 수 있는 인간관계의 기본 점이 된다.



2. 우리 시대의 문화
(1) 문화의 통치: 부르디외의 문화적 계급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 지배계급의 지배 전략으로 사용되어지는 문화의 사회적 활용에 대해 얘기 해 보고자 한다. 
부르디외에 있어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가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경제적 수단만으로 지배의 유지가 불가능해지자 경제와는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가진 문화를 통해 지배 구조가 재생산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문화라는 후기 자본주의 게임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으며 계급 구조가 그 속에서 재생산된다고 본다. 따라서 노동계급에 대한 논의보다는 계급투쟁 자체가 문화적이고 상징 재화를 둘러싼 투쟁이 문제시 되고 문화적 자본이 부족한 대중들은 이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과거의 자본주의 단계에서는 경제적 자원과 문화적 자본은 제도화되지 않았고 서로 분리되지도 않았다. 과거에 있어서는 경제적 지배 관계는 단지 일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폭력의 사용으로 직접적이고 인격적이고 재생산적이다. 현대 후기 자본주의에 와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던 경제적 자본은 개인의 명예와 같은 상징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으로 위장한다. 그러나 상업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시장은 경제적 자본을 제도화하고 객관적이고 비인격적으로 만들었다. 산업화는 또한 경제적 자본으로부터 문화적 자본이 자율적이게 했다. 피지배 계급의 교육과 수입의 증가는 대중의 대 규모의 문화적 소비를 만들고 그 결과 지배 계급의 문화적 제도들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피지배 계급을 의한 대중문화 생산 영역에서의 제작자, 생산자들은 가능한 최대한의 시장을 추구하는 경제적 이익에 의해 자극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과 나란히 제한된 생산의 분리된 영역이 출현하고 문화적 재화들은 탈 이해적인 심미적 기준들에 집착됨으로써 상징적 이익의 추구에 있어서 다른 문화적 생산자들을 위해 생산되어 지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로 접어들면서 결과적으로 계급 지배의 정당성은 경제적 자본의 문화적 허위 인지로의 회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허위인지:: (misrecoginition) :: 권력 관계가 인지되는 과정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자들의 눈에 정당화하게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 지배 계급은 거의 모든 문화 자본의 독점을 통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하다고 인지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계급 관계를 강화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가 대량생산을 통해 모든 계급이 어느 정도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됨에 따라 기존의 불평등 구조를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문화는 보다 더 자율성이 있는 개념으로 규정되고 단순한 은폐의 기능을 넘어서서 “허위인지”라는 상징 투쟁의 과정을 통해 지배 계급에 의해 활용된다. 

문화적 자본이 없는 노동자 계층은 문화 투쟁에 참여 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된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 문화 투쟁은 부르조아지 분파 내에 국한되며, 이러한 계급 내부의 투쟁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계급 구조에 결코 도전하지 않는다. 모든 부르조아지 분파들은 노동계급에 대한 그들의 연합 지배에 대한 이해관계를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배 계급 내의 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각 분파들이 소유하는 자본의 종류를 확장하려는 전략적 의도와 함께 특정한 지배 원리의 사회적 정당화이다. 그러므로 투쟁은 상징 투쟁의 장으로 국한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상징 투쟁에는 상징적 자본의 소유자들만이 참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 계급은 실제 그들의 종속적인 지위에 의해 그들 앞에 놓여 있는 문화적 실천과 대화에 대한 취향을 가질 뿐이다. 대중들은 철저하게 부르조아지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조직화하는 외부 문화로부터 제공된 상징적인 수단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내면화한다. 

 현체재의 문화적 통제는 언어의 이미지 조작이 따르는 것이다. 즉 하나의 대상에 대해 이미지가 생기면 그것은 보다 더 중요한 실재성이 되는 것이다. 그 반대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 사회의 특징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일단 순응을 요구한다. 즉 주변의 사물들을 그 이미지의 형틀에 따라 모양을 새로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지란 심리학에서 말하는 편견이나 선입관과 거의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남들을 모방하려는 행위는 이미지들이 일으키는 현상이다. 얼마나 많은 대중들이 광고 속의 영상들을 모방하려고 하는가?  대중들이 행동하는 기준은 이러한 순응의 대상이 진실 되냐? 라기보다는 믿을 만하냐? 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가상적 외형이 자리잡고 있는 유혹적 공간이다. 
이미지는 대중들에게 자유로운 기의의 생산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자기 예언 충족을 만족시켜 주기도 하는 환상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가 요구하는 것은 탈 구성화이다. 즉 지배되는 것에 대한 망각이란 것이고 주어진 사실들을 내파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변모의 공간이다. 대중들은 자유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러한 오류를 신성시하는 우스운 의식에 스스로를 속인다.
이미지의 불투명한 기표에 사로잡힌 자들은 탈의식화하고 스스로를 속인다. 

언어의 이미지화라는 기작에 대해 설명해 보자.

이는 거의 기호학에서 설명되어지고 있다.
기호학은 현재 시각매채들이 생산하는 이미지들과 실재성들을 설명한다. 이미지 주변에 담론을 일으켜 그것들이 숨기고 있는 신화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기호는 어떤 느낌이나 생각을 전제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닭”이라는 말을 했을 때 순수한 닭이란 말은 기표가 되고 닭이라는 사물은 기의가 된다. 그러나 실제 사물인 닭을 가리키는 기의에 있어 개인마다 느끼는 이미지는 다르다. 
즉 먹는 치킨을 생각하는 사람과 시골에서 움직이는 닭을 생각하는 사람들같이 여러 부류들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기호가 하나의 자유를 허용한 반면 여러 의미들과 복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힘· ·체력· ·권력· ·지배력· 등등 이러한 이미지들을 대중매체에 의해 지배 계층과 연관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거짓된 관념들의 연관은 우리 실제 생활 통제의 기본이 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진실을 증폭하고 고의적으로 생산된 거짓을 파괴할 수 있겠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기호학적 담론들은 그것이 드러날 때만이 파괴되어 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호학적 연습이 필요하다. 
지각되어지는 대중매체의  내용들이란 ,어떤 실재성에 근거한 직접적인 것이 아니고 매체가 해석하고 남은 찌끄러기적인 이차적인 것이 된다.
영상 테크놀로지는 대중의 눈이 되었다

(2)문화론:알뛰세르의 이론을 중심으로                                                        

 문화는 이미지화되었다. 수많은 가짜 사건들(예를 들면 20주년 행사)은 장소의 해방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나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는 이미지에 대한 것이다. 즉 이 이미지가 현실의 실재성을 능가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말해 준다. 
탈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가짜의 재현이 현실을 능가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혁명운동마저 이미지 화되고 가상실재화된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 대안들을 나타낼 수 있을까?
이러한 논의는 1930년대 구조주의 등장 이후로 계속 제기된 이데올로기 타파와 개인간의 의사 소통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정치적 입지에 관한 이론으로 헤게모니 이론이 있다. 
알뛰세르에 있어 헤게모니에 대한 정의는 정치적 대의체가 그것이 재현 또는 대표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노동계급의 정체성이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만이 그것을 규정한다고 한다. 이는 이미지 화된 현실을 깨닫는 기호학적 훈련을 통해 실천하는 행동만이 사회에 진정한 변혁과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말하는데 다름 아니다.
이런 언어 생활 속에서 주체는 국가,  민족, 신 같은 권력이며 무의식이다. 즉 하나의 언어생활 체계인 담론 구성체에서 자유는 부르조아의 자유가 된다. 각 개인이 주체라고 생각되어지는 형태는 이러한 담론 구성체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이제 자신을 자신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나타난다.  언어의 이미지는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권력 유지의 방편으로 작용하기에 이러한 효과는 피지배자에 대한 물질적 과정의 망각과 이데올로기적 망각을 가져온다. 이는 계급 사회에서 재생산되어지기 위해 작용하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현 사회에 있어 특징은 계급 모순이 감춰짐에 따라 이 사회에 있어 연대는 각 헤게모니적 개인들이 각자의 상호관계에 대한 불균등 발전이 있음을 드러내고 상호소통 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언어 속에 감춰진 이미지는 의식뿐만 아니라 ,실제 사물에도 현실화된다.  이를 ‘의미 효과’라고 부른다. 언어의 의미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담론 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는 각 개인이 담론 구성체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언어 과정은 권력을 행사하고 행사 당하는 관계이며 ‘권력에 대한 의지’이기도 하다. 이런 의지의 표출은 가상적 관계를 의미함과 동시에 인간들의 관계에서 의식하건 못하건 간에 구체적으로 몸과 몸이 부딪히는 실제 관계인 것이다. 
궁극적인 문제는 언어와 의미 화의 과정을 사회적 구조 생산에 있어서 배타적일 정도로 중심이 되려는 시도에 있다. 
의미의 기호학적 생산을 주장하는 상황하에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실천의 효율성은 전부 사라질 위험이 있다. ( 여기서 이데올로기란 개인들이 자신들이 실제적인 삶의 조건에 대해서 갖게 되는 가상적인 관계에 대한 표상 체계, 허위 의식이다) 이는 현 자본주의가 가진 특징 중에 하나로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를 “후기 자본주의”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 담론 구성체란 어떤 주어진 이데올로기적 구성체내에서 죽 계급투쟁의 상태에 의해 규정된 어떤 주어진 국면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연설, 보고, 팜플렛, 보고서, 강령 등의 형태로) 규정하는 상황을 말한다.


3. 영화 속의 여성 이미지


할리우드 영화 속에 반영된 여성 이미지는 크게 소녀 타입의 청순가련형과 창녀 타입의 요부형으로 유형화해 볼 수 있다. 이는 보수적인 사회 이데올로기의 요구와 시대상에 따라 약간씩 변형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제 2차 세계대전 기간에 남성 노동력의 공백을 여성들이 메울 필요가 생기자, 할리우드 영화들은 ‘여성의 힘’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온 남성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야 했고, 다라서 그때까지 강조되었던 여성의 힘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화면 위에는 희생양으로서의 여성과 위협적인 악녀라는 두 가지 이미지의 여성들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연구는 지나치게 경험주의적 관점에 의존할 뿐 만 아니라 영화의 생산 기제나 관개의 수용 과정을 너무 단순하게 파악한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따라서 영화의 생산 메카니즘이 여성 표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또 그 표상들은 한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과 무의식적인 충동들을 어떻게 반영하는가 하는 것들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1) 90년 이전의 한국영화에 나타나는 여성 이미지

70년대에는
이장호 감독의 1974년 데뷰작 ‘별들의 고향’은 흔히들 일컬어 ‘호스티스물’의 효시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상품 가치로 치환된 여성의 성이 전면적으로 그려져 있다. 한 평범한 여사무원이던 경아가 직장 상사에게 농락 당하고 점차로 매춘의 길로 접어들어 마침내 파멸하기까지가 멜로터치로 그려져 있는데, 경아라는 여성은 경제 성자의 하부구조로서 필연적으로 형성된 향락 산업, 그리고 즉물화되기 시작한 성개념을 대별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남성들은 가해자. 경아는 피해자로 이분되어 있는데, 결국 순결을 잃어버린 날부터 경아라는 여성은 사회의 양지에서 살지 못하고 음지를 전전하다 자살하게 되고 만다. 한 여성의 기구한 운명에 무게 중심을 두고 순결 상실이 여성에게는 인간 상실로 이어진다는 유교적 도덕관에 기초하고 있긴 하지만 70년대 성의 상품화 현상을 전면에 내세웠다는데 그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1975년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별들의 고향’에서의 감상적인 한계를 다소 극복한 여성 중심주의 영화다. 여기에는 소외 계층의 문제가 성의 상품화보다 더 강조되어 있는데, 영자라는 여성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팔을 잘려 한 맞힌 창녀로 전락, 악다구니를 벌이며 생존해 나가려 애쓰는 속에 때밀이 청년 창수등 동류항으로 묶일 수 있는 인물들이 나타난다. 수출 수억불 달성을 위해 부속처럼 일하다가 효용가치가 없어지면 흡사 산업 폐기물처럼 버려져야 했던, 부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도시 빈민의 삶이 영자와 창수를 통해 프리즘 되고 있다. 

80년대에는
80년대에 들어서 여성 영화는 그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인 발전은 거의 없었다. 
영화 ‘매춘’이 만들어지고 관객 동원에 성공 한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팽배해 질대로 팽배해진 향락 산업으로 인해 퇴폐 풍조가 만연해진 80상황이다. 20대 여성 5명중 1명이 매춘 여성이라는 통계와 영동이라는 이상 환락가를 중심으로 주택가까지 파고들게 된 퇴폐 영업소, 거기에 사회 계층간 균등한 부의 배분이 이뤄지지 않은 데서 오는 절망적 한탕주의 등이 그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영화계 내적인 상황 변화, 곧 검열 완화를 틈탄 과감한 노출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6·29 선언 이후 민주화 물결은 영화계 안에 소생의 기운을 일으켰고 제도적으로는 사전 심의제 폐지등 기존의 억압 책이 완화되었다. 현대의 매춘 행위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결부되어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영화 ‘매춘’은 적나라한 성희 장면에 다분히 구시대적인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 비판 의식이 결여된다면 이런 영화들은 여성의 지위를 한갓 상품으로 포장된 성의 개념으로 전락시키는데 앞장서는 역할을 할뿐이다. 
‘애마 부인’에서 애마 부인들은 여러 남자들을 전전한다. 그 이유는 한가지, 성욕에의 갈증 때문이고 그 갈증은 남편에 대한 성적 불만족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육체파 배우들이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쩔쩔매는 화면을 보며 남성들은 성적 우월감을 느끼게 되며 그 여자들을 정복해 나가는 화면속 남자들에게 자신을 대입시켜 우월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여성에게 성행위가 이념적으로 허용되는 유일한 경우는 사랑이기 때문에 낭만적 사랑의 개념은 남자가 자유롭게 착취할 수 있는 정서적 조작의 방편을 제공한다.’는 여성 학자 케이트 밀레트의 지론처럼 애마부인들은 성욕을 저당 잡힌 남성들의 포로에 다름 아닐 뿐이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형성된 관점은 여성은 현모양처가 아니면 요부 내지는 창녀라는 시각이다. 
남녀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성욕으로 부풀려진 왜곡된 여성상을 창출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2) 대상으로서의 보여지는 여성의 영화에 대한 극복; 영화 여성 해방 주의

이론이란 현실계에 발을 담그고 그것과 끊임없이 변증법적인 관계를 행하고 변형되는 담론적 실천이다. 
영화 여성 해방 주의에는 2가지 사항이 중시된다. 
첫째,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
둘째, 여성들이 대중매체에 많이 진출하여 여성 이미지를 제고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의 영화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 재현되지 못하고 단지 감성이 아닌 존재로 표현되고 있음이다. 
그러면 가부장제 사회의 무의식이 영화의 보기 체계와 서술 형식에 어떻게 성차를 새겨 넣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에 관한 이론으로 로라 멀비의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영화’ 가 선구자적으로 위치해 있다. 그녀에 따르면 영화, 특히 할리우드 고전 영화들은 ‘거세된 여성 이미지’에  크게 의존하는데 , 이것은 불가피하게 남성들의 ‘거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할리우드 고전 영화는 이런 거세 공포를 완화하기 위한 방식들을 발달시켜 왔는데 관음증과 물신 주의가 그것이다. 
물신 주의란 변태적 심리상태의 남성이 성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평범한 여성 속에서 남성의 성기와 같은 성적인 대치물을 찾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일상적으로 전혀 성적이지 않은 긴 머리 구두, 귀고리 등을 숭고하게 만듦으로써 물신화를 완성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여성은 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치장시킨 이유가 된다. 물신 주의는 여성 속에 남성의 성기를 부착시키는  행위이기 대문에 남성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성기 거세 컴플렉스를 부추긴다. 따라서 여성의 물신화는 그것 자체의 성적인 쾌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성기를 소유한 여성은 거세되어야 한다는 서술 구조로 가게 되어 여성이 제거되거나 처벌받는 결말을 보게 된다. 
관음주의라함은 영화의 수용자는 들여다보는 쾌락으로 영화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영화 화면은 창문에 비유되고 영화 감상은 어두운 객석에서 몸을 숨기고 밝은 방을 들여다보는 것에 비유된다. 그 환한 방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지배적인 위치에 서게 되며 이는 눈을 통한 즐거움이며 실제 화면 위에서 남성 주인공은 여성의 몸을 훑어보는 남성의 즐거움이다. 여성 등장 인물은 남성보다 덜 눈에 띄고, 여러 측면에서 더 약한 성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다소 덜 성숙한 어른처럼 보이고, 덜 교육받고 낮은 지위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들은 개인적 관계 및 성이라는 사적인 영역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남자들은 직장, 사회적 관계 및 성이라는 공적 영역으로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남성은 관음증을 통해서 여성을 시각적으로 지배하는데, 이런 식의 보기 체계상의 지배는 내러티브상의 지배로 이어진다. 즉 시선의 주체인 남성에게는 동시에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영화적 환상을 맘껏 표출 할 수 있는 권력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응시’와 ‘행위’라는 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의 지배는 여성이 환기하는 거세 위협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킨다. 
그렇다면 영화라는 도구는 여성이 보여 질 수 없을 정도로 남성 중심적이고 남성 지배적인가?
몇 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여성 관객은 여성적인 쾌락을 가질 수 있는가?
여성이 영화 속의 여성과의 동일시를 어떻게  하면 끓을 수 있는가?
여성 관객이 남성적인 쾌락을 갖게 되는 것일까?
결론은 여성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여성 공동체의 구축만이 남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된다. 
90년대 이후 영화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한 이론과 실재성에 있어서 차이를 억압적으로 분석하는 기존의 입장에서부터 차이를 해방 적인 것으로 또는 효과적인 변화의 유일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구체화하는 입장으로의 뚜렷한 움직임의 변화가 있다. 즉 대안적 영화들이 기존의 고전 할리우드 영화와 구별되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인데 가부장적 사회의 무의식이 영화 형태를 어떻게 구성해 놓았는가 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정치적 무기로 사용되어지는 영화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안적 영화의 하나로 ‘쇼걸’을 들 수 있다. 
‘쇼걸’은 그 제목이 암시하듯이 남성 등장 인물은 물론이고 남성 관객의 관음증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보기 체계는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난다. 삼류 클럽의 스트리퍼로서의 노마 멀론(엘리자베스 버클리분)과 라스베가스 최고의 여신 쇼 댄서로서의 노마 멀론은 물론 ‘보여지는 자’의 의치를 갖지만 그 두 지점 사이에 자신이 꿈꾸던 여신 쇼를 객석에서 지켜보는 그녀의 욕망에 찬 응시가 끼여든다. 그 결과 기존의 보기/보여지기라는 기존의 폐쇄적인 대립 구도가 깨지면서, 보여지기/보기/보여지기라는 순환과 균형이 창출되고, 그녀는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응시의 소유자가 된다. 
또한 라스베가스 쇼의 여신이 되고 싶어하는 노마의 욕망이 기존의 여신인 크리스탈을 향하고 있다면 크리스탈은 노마의 성애적 이미지에 매혹된다. 따라서 두 여성의 관계는 욕망의 논리에 다라 움직이고, 그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는 항상 짙은 에로티시즘의 색채가 감돈다. 크리스탈이 자신의 애인 앞에서 춤을 추는 랩댄싱 (육체적인 접촉은 없이, 손님을 흥분시킬 목적으로 스트리퍼가 추는 춤)을 지켜보는 장면이나,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서 두 여성이 춤을 추는 장면은 포르노 코드를 통해서 상당히 성애적으로 그려진다. 또 노마의 계략으로 부상을 당한 크리스탈과 병원을 찾아온 노마는 키스를 나누는데, 이 키스는 한편으로는 옛 여신과 현재의 여신간의 작별 인사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라는 느낌을 줌으로써 여성 동성애를 나타내는 기호로도 사용되고 있다. 
결국 ‘쇼걸’은 여성의 욕망과 성애적 응시가 전면화 될 때 기존의 남성의 보기 /여성의 보여지기라는 구도가 얼마나 쉽게 전복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고, 도 여성 이미지가 갖는 치명적인 매혹이 어떻게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을 향한 것 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성애적 관계의 남녀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굳건하게 성애 적으로 맺혀져 있는 여성들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다뤄지는 것은 이제 여러 관례 중 하나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여성들 사랑은 영화 속에서 종종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이성애에 대한 대안과 반발로 그려지기도 한다. 


(3) 진정한 이론을 찾아서

여성만의 공간을 찾아 나선 이론가들은 있는가? 그들만의 언어와 이론들을 찾으려는 노력가들 중에 가장 많이 거론되어지는 루스 이리가레이와 줄리앙 크리스테반의  이론들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루스 이리가레이는 그녀의 박사 학위 논문 ‘타자인 여성의 반사경’ 으로 유명해졌다. 그녀에 따르면 거세 공포나 응시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 모두 ‘시선’에 의존함을 간파했다. 그녀는 새로이 ‘반사화’라는 개념을 세우는데 이는 서구 철학의 담론 체계에 딸려 있는 전제로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반성할 수 있는 주체 설정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 필요한데 모든 철학자의 메타 담론은 자기 명상을 통해서 가능한데 이는 자기 도취적이다. 따라서 기존의 어떤 논리도 반사적인 남성 위주의 담론을 세우게 되므로 여성적인 것의 논리를 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대안으로는 동양적인 신비주의 명상에 주목하고 거기서 새로운 여성상을 점검해 나가야 함이 필요함을 말한다. 조금 현실 적인 대안으로는 로고스의 경제성으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전된 주체의 재생산으로부터 드러나는 방식을 반복하고 재생산함으로서, 여성들이 남성들의 논리를 능가하고 교란시키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의 본성은 흐름의 특성을 망각하지 않는 언제나 유동적인 것이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자유로움은 기존의 모든 형식, 관념들에 저항하고 파괴한다고 말한다. 
줄리앙 크리스테반은 데리다의 해체 철학을 빌어 여성이 가지고 있는 성이 가진 정체성을 깨려고 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성의 차이는 개념적인 고정성이 아니라 계속 늘어가는 의미의 환치와 증폭된 그물망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수많은 언어 체계 속에 우리가 있다고 말한다. 의미란 무한히 계속되는 부재 하는 다른 기표를 잠재적으로 지칭하는 과정을 통해 구성 될 뿐 현존하지는 않는다고 하며 어떤 정체적인 해결책이든 억압적인 담론과 생산 관계를 거치게 될 것이기 대문에 의미의 ‘해체’는 그녀의 중심 개념이다.



4. 코르셋에 나타난 대안적 영화 엿보기


들어가는 말 

이 사회에서 성문화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 영화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어떠한 것인가? 라는 물음은 동성연애와 계약 결혼 같은 여러 가지 논의가 새로이 떠오르는 지금 시점에서는 이미 유행이 되어 버린 문제들이다. 이에 답하는 영화중 하나로  “코르셋”을 얘기해 보고자 한다. 이 사회에서 자본의 속성은 항상 지켜지고 있고, 현혹적인 사물은 항상 풍부하다. 드러난 체계들과 기호는 결속되며 쾌락의 법칙은 이미 신화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 되어져 있다. 영화 ‘코르셋’을 ‘한 뚱뚱한 여성이 날씬함이라는 기준이 유행하는 사회에서 소외를 받고 그 관습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적 관념을 모은 오락 영화’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그리고자 할 때 동일 적인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중적이고 분산된 위치를 가지며 유동적, 역사적이고 상징적이다. 즉 이 영화에서의 ‘육체’의 모티브는 교환가치로서와 기능적인 것으로서의 육체이며 성적 아름다움으로서의 육체 문제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만큼 영화 ‘코르셋’의 표현 도구인 처음 영화 도입 부분에서의 애니메이션 삽입, 중간 중간에 관객에게 말하기로서 유도되어지는 환기, 인물의 성격이 의미하는 구조적 의미 등은 이 영화가 끊임없이 관객에게 영화에 몰입되어지기보다는 생각되어지기를 요구하며 치밀하게 내적 연관되어 있고 그 내적 구조의 반영은 독해의 차원을 넘어 현 사회에 대한 체재 개입의 역할까지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가벼운 웃음을 주는 오락 영화와 무거운 사회 물의 ‘경계 허물기’는 이 영화의 특징이자 그 자체로서 현실 반영물 로서 그 뛰어넘기를 제공한다. 이는 아도르노의 명제인 “자본주의를 통하여서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 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영화는 대중매체이다. 대중매체가 이 사회에서는 대중 조작의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할 때 이런 자본의 특성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헤게모니가 가능한지 이 영화는 묻고 있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 기호학, 알뛰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미지의 분석이 중요함은 스크린이 상상의 공간이기 떄문이다. 여기서 자본이 어떻게 사람의 상상력을 제어하는지를 알아보며 또 이 자본주의 문화가 남성 위주의 이분법적인 분리 사고를 조장한다고 할 때 그 대안으로의 “코르셋”이라는 영화가 가지는 그 치밀함을 엿보고자 한다.  


환각의 옷: 육체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

코르셋의 유래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녀의 못 생긴 얼굴을 감추고 가는 허리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어지기 시작한 코르셋은 당시 여성들의 기절, 급사, 심장마비 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것이 왜 오늘날에 와서 ‘살 빼기’라는 형태로 변모되어 등장하는가? 현대 사회에 있어 육체는 단지 나체나 성욕의 대상으로서의 피부가 아니라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복으로서의 기호화된 육체다. 자본의 언어가 우리 모두에게 선험적으로 작용됨을 안다면 육체의 아름다움은 행복이나 성공, 자신감과 같은 기호들과 결합하여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간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이 은폐된 자본의 공격성 뒤에 숨은 육체의 기호는 개인의 자율적 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되고  욕망 되어져서 결국 소비되는 이윤과 관련된 경제 규범으로서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미용, 식이요법, 옷차림에 대한 관심은 자기 도취적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타자를 의식하는 경쟁적 의미를 가지고 경제적인 투자의 대상이 된다. 영화 ‘코르셋’에서도 보여 지듯이 강과장이 공선주에게  살을 빼기 위한 방법으로 헬스 기구를 권장하고, 공선주의 살 빼는 시도는 반드시 에어로빅 음악과 체조에 관련되는 점은  이미 살을 뺀다는 것이 이 사회의  ‘자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고 육체의 기호는 상품화 된 것이다 
 
* 주: 기호와 이미지: 소쉬르에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언어학은 현대 구조주의와 결합함으로써 그 영역을 넓혔다. 어떤 단어를 말할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하나의 연상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학교’라는 말을 발음하는 즉시 우리의 머리에는 학교의 모습이 그려지게 된다. 또 학교의 건물 모양이나 선생님, 칠판, 학생, 교육문제등과 같은 학교를 둘러 싼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인 모든 구조적인 것을 포함하여 복합적으로 연상되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연상의 연관은 개인마다 다르다. 또 이 연상을 통해 개인은 상상적 자유, 즉 환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대중매체의 힘은 점차 이 언어 속에 감추어진 개인의 이미지를 통제하고 획일화한다. 이것이 대중매체의 소유자로서 자본이 가지는 속성이다.
 

날씬한 몸이 유행하는 것은 우연한 미의 선택일 뿐인가?

미셸 푸코는 그의 책 ‘성의 역사’에서 “성은 노동력과 관련되며 노동력이 조직적으로 착취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허용하는 최소한의 한정된 쾌락 이외의 다른 쾌락을 통해 노동력이 흩어지는 것을 자본주의 사회가 용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즉 성은 이 사회에서 생산 동인으로서의 욕망밖에는 가질 수 없고 성은 억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을 둘러싼 지배와 억압의 관계는 노동, 언어의 이미지 문제와 함께 자본주의 체재 유지의 기본 틀이 된다. 그렇다면 노동하는 인간에게 있어 억압당하는 성의 나르시시즘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뚱뚱함보다는 날씬함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뭔가 조절되고 제약받는다는 느낌은 누구나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가지고 있을 것이고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닮은 날씬함 쪽이 우리에게 더 가까운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사회에 직업을 가지고 참여한다는 것은 이 주된 담론에 동의하기이며 이 사회에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성적 욕망의 정치적인 교육, 억압에 대한 묵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공선주가 직업여성으로 회사에 참여하고 있고,  회사의 이윤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고,  회사의 남성들이 이윤의 대상으로 여성을 대하기는 이러한 현 사회를 반영하는 상징인 것이다.


호기심과 욕망의 생산

남성의 시각은 이미지로서의 여성을 상상한다. 대개 지금까지의 영화가 그래 왔듯이 여성들은 영화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위한 성적인 대상물로서 또한 관객을 위한 성적인 대상물이 되어 왔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남성은 여성과 동일시를 하지 않는다. 여성과의 동일시는 ‘거세’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의 동일시는 남근 부재의 확인과 언어의 습득을 위해 아버지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그 진입 시기에 오이디푸스 단계도 거치게 된다. 즉 어머니와의 동일시는 3살 전에 이루어지며 우리들 모두의 가상적인 이상으로 작용할 뿐 충족 될 수 없는 영원한 불만족이 된다.) 아버지의 세계는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벗어난 세계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분리와 상실이다. 곧 어머니와 아기의 일체감으로서 가지고 있던 몸의 상실인데 이에 반해 아버지의 세계는 어머니를 향한 욕망이나 어머니와의 일체감도 모두 억압되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의 주체로서 말을 한다는 것은 억압된 욕망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세계는 언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환상적 이미지를 낳을 뿐 본질적인 충족을 낳을 수는 없다. 그 충족을 위해서 평생 떠돌아다닐 뿐 어디에서고 만족은 없다. 이 영화에서  강과장(김승우 역활)은 공선주(이혜은 역활)를 단지 호기심의 욕구를 만족하기 위해 접근한다고 말한다. 단지 욕구 때문에!  강과장의 욕구는 영원히 충족 될 수 없는 분리적 상실을 의미하는 남성 일반과 다르지 않다. 우연한 한 남자의 개성으로 돌릴 수 없는 이 호기심으로서의 욕망 충족은 개인의 도덕적 잘못이라고 비난 되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자본과 언어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가 된다. 
욕구 하기와 그것이 충족되어지기는 사회적으로 통제되며 그 내부 자체적으로 사회구조를 반영한다. 욕구와 생산력 사이의 깊은 유사성. 이미 일상화된 욕구는 도덕이나 존재 의식에 대한 탐구를 의식함이 없이 단지 채워지지 않고 무한히 확장되어지는 소비적 인간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언어적으로 채워 질 수 없는 불만을 끊임없이 소비라는 형태로 유도하며 상품은 성의 형태를 띠고 광고됨으로써 그 유혹을 강화한다. 
‘코르셋’에서는 영화 내부의 보여지는 여성으로서의 역할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관객의 영화에 대한 관음적인 응시도 거부한다. 영화 화면은 창문에 비유되고 영화 감상은 이를 통해 들여다보는 아이의 심정이므로 스크린을 통해 관객이 느끼는 지배적인 바라보기는 눈을 통한 즐거움이며 영화 보기의 즐거움인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코르셋’에서 뚱뚱한 기존 일반의 여성 주인공들과 다른 모습을 지닌 여성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소격적인 효과를 가지게 된다.                
* 주: 물신 주의:: 변태적 심리 상태의 남성이 성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평범한 여성 속에서 남성의 성기와 같은 성적인 대치물을 찾는 것. 예를 들면 빨간 구두, 귀고리 목걸이 등을 숭고하게 만듦으로써 물신화를 완성한다. 이 물신주의는 영화에서 자주 이용되는 여성 표현이기도 한데 남성들은 보편적으로 이 남성적 상징물을 가진 여성이 거세되어지기를 기대한다. 즉 여성은 제거되거나, 숭배되어지는 현실화되지 않는 여러 기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는 남성적 영화 보기의 전형으로 타파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소외의 연대 : 이분법적 세계관의 극복

억울하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게임의 법칙에 뛰어 들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막말로 예뻐지고 싶으면 성형수술하고, 키 작으면 호르몬 주사 맞아서 키크면 될 거 아니냐고. 남자 선호 사상만 봐도 아들 낳기에 더 극성인 건 여자들 쪽이 아니었냐고 등등. 하지만 그 게임의 승자는 정해져 있고 수많은 반칙이 허용된다면 공정하지는 않겠지. 여자들이 지금까지 분명히 소외되는 계층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자. 문제는 그 소외의 극복은 좀 더 체재에 대한 본질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경제적 문제 이외에 일상생활의 심리적 문제, 예를 들면 의복 스타일, 성적 관계, 교육, 언어, 제스처 등은 남성적 가치관인 지배와 억압에 싸여 있다. 체계적으로 왜곡된 이 얽힘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우리가 판단하기 전에 언어 안에 갇힌 이미지를 통해 선입견을 물려받는다면 이러한 근원적인 남성적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 영화에서 제시하는 답은 문화의 껍질을 벗기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대안이 정치적으로 고려되고 전적으로 다수에 의해 결정되어 버린다면 그건 또 하나의 억압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담론들은 개인에게 있어 징후로서만 해석되어 져야 하고 그 실천적 감응은 성찰의 토대 위에 서야 하는 외로운 투쟁이 된다(하버마스의 이론). 개인이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성찰 한 후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대중의 헤게모니인 것이다. 여기서 알뛰세르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우리에게 이미지로서 작용하는 것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적인 환경의 창출자인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전개 양상은 이를 잘 설명한다. 공선주는 마치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듯 타인과는 떨어져서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힘과 강요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억압되어 흩어져 있던 자아를 통합하는 것이다. 거울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심리학에서 ‘리비도’를 상징하기도 하며 이는 라깡에게 있어 거울상 단계를 말한다 즉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를 벗어나 어릴 적부터 그 이미지의 생성 과정을 되밟아 감으로써 그 동안 가지고 왔었던 환상들을 깨 버리는 것이다. 거울상 단계란 상징계이전의 단계이고 상상계이후의 단계로서 자신의 몸을 단순히 살펴보는 단계로서 이를 통해 타자를 의식하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공선주의 회상장면 중 숲 속에서 뛰노는 아이 장면 같은것은 지배적 담론이 형성되기 이전의 공간을 상징하며 그 해소를 시도하는 모습이다. 욕망의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서 자연과 만나고(왜냐하면 자연도 남성적 사회에 있어서는 지배당하는 관계에 있으므로) 눈길을 걸을 때 발자국이 찍히는 것을 하나하나 새기 듯 그 현재의 직관적 성찰에 충실하다면 이 자본주의 사회의 담론은 벗어날 수 있는 탈주는 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조직 사회에 떨어져 있기에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횟집 주인과 슬쩍 지나가는 동성연애자들은 서로를 구속하지도 모략이 난무하지도 않는 이 사회에 대한 능동적인 사회 지켜보기가 가능한 것이다. 이 영화의 결론인 횟집 주인과의 결혼은 소외된 자들이  상호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가치관 창출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 밖의 추측들

하나의 주제로서 묶어내기에 벅찬 것들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간간한 재미를 주지만 쉽게 전체와 연관되어지지 않고 파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신선함을 더해주는 것들이다. 
영화를 보면 꽤나 웃기게 상어 달라고 주정하는 사람이 있다.  상어는 하나의 신화적인 ‘기호’로써 우리 의식에 내재된 언어의 이미지를 설명하는 것인데 이는 감독이 영화를 만듬에 있어서의 형식에 대한 노골적인 설명이다. 즉, 상어는 기호화되어있어 가상공간화된 인간 언어 현실을 상징한다. 주정꾼이 상어를 말할 때의 상어는 직접적 관계의 상어가 아니다. 이는 언어의 의미에 걸러진 상어, 타자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가짜상어가 되어져 있어 간접적으로 지켜보기나 상상되어지기만이 가능한 기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영화에서 횟집 주인은 상어를 주지 못한다. 도다리를 주며 상어라 속이고 주정뱅이는 그것을 상어라 속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어에 대해 나타나는 관계를 통해 감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호가 가지는 속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woman & pride 라는 회사를 공선주가 차린 것은 경제적 토대를 쌓음으로써 시도되어지는 여성일반의 사회에 대한 거부를 말하는 것이다. 즉 여성의 에너지와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경제적 ,심리적 부담감들을 강화시키는 자본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여성들의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로서 작용되어지는 ‘물질적 토대’는 새로운 가치에 대한 공간을 제공하고 이는  정신적 기초까지도 제공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욕구는 그걸 먼저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실현 시킬 수 있을 때,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넘어서 기존의 문화에 반대하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물질적인 토대는 대안적 정신문화창조에 대한 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마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함은 언어적인 훈련, 경제적 토대와  지배에 대한 상호 의사 소통을 통한 깨닫기 등이 중요하다고 하버마스는 말한다. 이 영화는 사회를 반영하기 위해 사실주의적 재현을 거부하고 전체 상황을 다소 웃기게 그려놓음으로서, 여기서 나타난 이중성은 관객에게 대하여 단지 오락 영화로 그칠 함정을 가지고 있다(물론 이는 관객이 처한 상황이나 반응이 다른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맑스주의적인 실천으로서의 리얼리즘이라는 사회적 담론은 이 영화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 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상상력을 가지되 사회와의 동질성의 끈 놓치지 않기’ 는 이 영화의 큰 장점이다. 보는 이마다 여러 방면으로 읽힐 수 있음은 좋은 작품의 조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며 웃긴다고 해서 웃기다고 떠들지는 말자. 누군가 울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1. 주제

   대중매체중의 하나인 영화를 통해서 본 여성상에 대한 고찰



2. 주제 설정 
  
   대중매체는 현 사회에 대하여 가장 극명한 이해를 보여준다. 그 중에서 영   화를 선택하여 그 형식적 특성과 관련된 여성상에 대하여 고찰하고  대안에   대해 얘기 해보고자 한다.   


3. 목적과 동기

   몰입되어지는 것으로서의 영화 읽기를 배제하고 새로운 영화 독법을 찾음   으로써 올바른 시각을 기른다.


4. 조사방법

  영화의 느낌은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그러므로 바르게 읽는 법은 설문지   를 통해서는 진실이 드러나기 어려우므로 조원들간의 일정한 이론적 수준을   쌓고 그 실제 비평을 해보기로 한다. 3부분으로 나누어 자료를 모은다.
 영화  형식에 대한 것
 페미니즘과 현사회 전반에 대한 진단과 이론에 대한 것
 한국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일반적 비평과 그 실례들을 모으는 것
 그리고 같이 협의하여 영화 ‘코르셋’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의 이해와 얼마나 차이 나는지 조사해본다.


5. 결과 
   
   대중의 이해에 관한 부분에서는 실제 다가가기 보다는 책속에 자료에 그친    부분이 많다. 나머지는 모두 자료를 구할 수가 있어서 할 수 있었다.

 

6.  느낀점
   생각보다 우리의 문제와 관련된 자료가 적어 다른 주제의 자료로서 유추할   수밖에 없어서  조원들이 애를 많이 먹었다. 
   여성운동 이론서들이 단지 자료 나열에 그치거나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것이 없어 이론을 세우는데 많은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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