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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정체성의 미시정치학을 위하여

by Frais Study 2020. 5. 28.

1.정체성의 문제설정

 

사회학적 통념에 따르면 정체성(indentity; 동일성)은 자기 자신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의 집합이다. 그것은 헤겔 식으로 말하면 주체의 자기의식이다. 나아가 그것은 반복적 실행을 통해 어느덧 습속화되고 무의식화되어 버린, ‘특정한 상황에서의 전형적 반응과 태도의 집합을이를 피아제는 도식’(Schema)이라고 부른다. J. Piaget, The Psychology in Intelligence, 1950, C. Noberg-Schulz, Exsistence, Space and Architecture, 김광현 역, ?실존, 공간, 건축?, 태림문화사, 12쪽에서 재인용. 이와 연관해 공간 도식에 대해서는 같은 책, 11-15쪽 참조. 노베르그-슐츠는 이를 현상학적 지향성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재전유한다(C. Noberg-Schulz, 앞의 책; C. Noberg-Schulz, The Intentions in the Architecture, 1968, 윤재희 외 역, ?건축론?, 세진사).

한편 부르디외(P. Bourdieu)는 파노프스키에 의거하면서, 어떤 문화에 고유한 사고, 행동, 지각을 낳게 하는 내적 도식의 체계를 하비투스(Habitus)라고 정의한다(P. Bourdieu, "Postface," in Panofsky, tr. by Bourdieu, Architecture gothique et la pensee scolasique, Minuit, 1967, 152). 그 역시 이를 현상학적 개념인 지향성(intention)과 연관시키는데, 이 경우 지향성은 선험적 현상학의 개념에서 벗어나 사회적 규범과 규칙의 산물로 간주된다(P. Bourdieu, La distinction, 최종철 역,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 새물결, 1995, 59-63).

형성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그때그때의 개별적인 행위는 하나의 일관된 전체로서 통일성을 갖게 되고, 행위하는 주체 역시 그러한 통일성을 통해 정의되는 자기-동일성을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체성은 사회적 주체가 자신을 하나의 동일한 주체로 인지하게 되는 일종의 공통감각’(sens commun)인 셈이다.G.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95-96쪽 참조.

 

자명한 주체의 범주에 기초하고 있는 데카르트의 철학이나, 마찬가지로 자명한 주체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출발하고 있는 홉스의 근대적 사회이론에게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실체로 간주되었던 주체의 당연한 통일성이고, 끝없는 의심을 하는 경우에도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전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개념이 실체적 확실성을 갖지 않으며 어떤 단일성도 가정하기 힘들다는 흄의 비판으로 인해 주체의 동일성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양한 표상이나 판단의 분열을 넘어서, 혹은 능력들(facultes) 간의 분열을 넘어서 그것을 하나로 통일하고 종합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가 칸트에게서 중요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즉 그러한 통일성과 확실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선험적 종합판단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의 성공은 무엇보다 그러한 종합의 능력을 이성이 갖는다는 것, 그리고 공통 감각이라고 불리는 종합능력이 상이한 심급의 능력들을 통일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데 있었다.이와 연관된 칸트의 공통 감각개념에 대해서는 G. Deleuze, 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 PUF, 1963, 서동욱 역, ?칸트의 비판 철학: 이성 능력들에 관한 이론?, 민음사, 1995, 44-50쪽 참조.

 

한편 사회의 분열이 대개의 경우 극단적 대립과 적대로 드러나게 되면서, 그리고 그러한 분열이 이론적으로 인지되면서, 그러한 동일성은 또 다른 맥락에서 그 자명함의 옷을 벗게 되었다. 그 분열과 대립을 치유하여 사회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적어도 그러한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고자 했던 사회학자들에게, 이제 정체성/동일성은 이론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실천적으로 확보되어야 했던 대상이었다.이는 뒤르켐의 근본적인 문제설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설정은 철학자들을 대신해서 사회학자들이 국가적 사유의 모델을 제공하게 된 것과 역사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철학이 스스로 지반의 지위를 차지한 이후 그것은 끊임없이 기존 권력을 축복했으며, 자신의 분과원칙을 국가의 권력기관 위에서 모사해왔다...근대적 국가에서 사회학자는 철학자를 대체할 수 있었다(예컨대 뒤르켐과 그의 제자들이 공화국에 사유의 세속적 모델을 제공하기 시작했을 때).”(G. Deleuze/ F.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466)

이런 맥락에서 정체성은 사회학의 가장 중심적인 자리에 들어선다. 이미 헤겔이 저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보여주었던, 적대가 상호 인정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하나의 동적인 동일성에 이르는 과정은, 미드(G. H. Mead)에게서는 적대없는 관계를 통해 완화된 양상으로 반복되었고, 이는 사회적 정체성의 형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논리가 되었다.이러한 논리는 의사소통과 합의라는 개념을 이론적 중심으로 부각시킨 하버마스에게서 변형된 방식으로 반복되는 것같다. ‘헤겔적맑스주의자라는 자신의 언명은 이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반면 맑스가 보기에 보편성이란 특수한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허구며, 사회나 인간이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보편적 본질의 동일성이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광범위한 적대로 인해 해체되어 마땅한 허상이었다. 즉 노동자계급에게 사회적 동일성’(identity)이란 불가피하게 계급적 허위의식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었고, 부르주아적 질서를 뜻하는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의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여기서 맑스는, 비록 정체성이라는 사회학적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적대적인 정체성의 존재, 지배적인 정체성이 포함하고 있는 권력, 그리고 그 권력에 대한 저항을 처음으로 사유하려 한 셈이다. 이것은 정체성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의 문제를 사회학적 전통과는 다른 맥락에서 사유하고, 그런 면에서 정체성을 둘러싼 정치를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다시 제기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2.주체화와 동일시

 

주체들이 순수한 자아나 순수 주체, 혹은 순수한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의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그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이하게 규정되는 사회적 존재요, 세계--존재(In-der-Welt-Sein)라면, 이 주체는 개인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역사적 관계 속에서 각이하게 정의된다. 이러한 입장은 구조주의 이후 근대 철학이 전제하는 주체 개념에 대한 명시적 비판으로 발전하며, 전제되는 주체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주체, 구성되는 주체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상이한 관점으로 나누어 대비할 수 있다. 하나는 언어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기초한 것으로 일종의 집합표상을 통해서 주체화와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습속의 도덕과 니체적 권력 개념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전자에는 라캉, 알튀세르가 대표적이고, 후자에는 푸코, 들뢰즈/가타리가 대표적이다.

라캉은 주체가 되는 과정과 메카니즘을 욕망과 언어를 통해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오이디푸스기를 통해서 개개의 사람은 그 상징적 질서 안으로 들어간다. 생물학적 욕구(besoin)는 이제 그러한 상징계의 질서 안에서 요구(demande)되지만, 욕구와 요구 간의 간극과 격차는 메울 수 없다. 욕구와 요구 간의 이러한 간극을 욕망(desir)이라고 하는데,J. Lacan, “The Signification of the phallus," Ecrit: A Selection, tr. by A. Sheridan, W.W.Norton, 1977, 286-287; “욕망은 요구가 욕구로부터 분리되는 그 한계지점에서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The Subversion of the Subject and the Dialectic of desire in the Freudian Unconscious," 앞의 책, 311). 이와 연관하여 주체의 구성과정에 대한 라캉의 이론에 대해서는 이진경, ?자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철학의 탈주?, 새길, 1995 참조.

이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근본적 대상을 언제나 결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욕망이란 결여(manque)라고 한다. 욕망은 언제나 그 대상을 갖지만, 이러한 근원적인 결여로 인해 그 대상은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욕망은 근본적으로 타자(l'Autre), 특히 아버지나 어머니로 대표되는 타자로부터 남근(Phallus)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다.같은 책, 312.

여기서 남근은 현전하는 질서의 중심이요 모든 기표가 그로부터 발원하는 로고스다(J. Derrida, "Le facteur de la verite," La carte postale, 김보현 편역, ?라캉의 음성중심 형이상학?, ?해체?, 문예출판사, 1996, 399-403쪽 참조).

데리다는 여기서 라캉이 말하는 남근이란 기표가 그것을 상징화하는 신체기관이나 음경이나 음핵이 아니라 남근으로 은유되어온 로고스를 상징한다고 본다(같은 책, 402). 이런 점에서 남근이라는 라캉의 특권적 개념에는 프로이트의 남근중심주의와 소쉬르의 음성중심주의, 그리고 전통적인 서구 형이상학의 로고스중심주의가 복합되어 있다고 하며, 이런 의미에서 남근로고스중심주의(Phallogocentrisme)이라고 비판한다.

타자 안에서 의 자리, 그에 대한 상징적 동일시, 그리고 자아의 이상. 이러한 인정욕망으로 인해 스스로를 타자가 욕망하는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 만들어간다.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J. Lacan, "The Agency of the letter in the unconscious or reason since Freud,", 앞의 책, 164-165.

이는 생각하는 나에서 나의 존재를 추론했던 데카르트를 직접 겨냥하여 뒤집는 명제인데, ’라고 불리는 주체가 사실상 타자로서, 타자의 응시 속에서 구성되며, 따라서 라는 존재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그리고 그는 거울단계에 대한 유명한 이론을 통해,J. Lacan, "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 I as revealed in psychoanalytic experience," 앞의 책, 1-7.

이처럼 획득된 자아의 이상을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상적 자아)이라고 오인하는 상상적 동일시가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주체의 정체성은 이런 메카니즘을 통해 구성된다.같은 책, 2; 이진경, ?자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앞의 책, 34-36쪽 참조.

따라서 주체란 언어적으로 구조화된 무의식을 통해, 타자인 상징계가 구성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으로 정의하고,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개개인은 주체로 구성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그는 호명‘(interpelation)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즉 이데올로기 안에서 작동하는 큰 주체(Sujet)가 개개인을 주체(sujet)로서 호명하며, 이에 대답하고 그에 따름으로써 개개인은 주체화(subjectification)된다고 한다(L. Althusser,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김동수 역, ?아미엥에서의 주장?, , 1991, 115-121).

페쇠는 동일시하지 않는 경우를 반동일시와 비동일시로 구분하여 동일시로 포괄할 수 없는 경우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면 교사와 규범에 반하여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학생들의 경우를 반동일시라고 하고, 교사와 규범에 동일시하지 않으며 나름의 방향을 취하는 학생들의 경우를 비동일시라고 부른다(M. Pecheux, Language, Semantics and Ideology, St. Martin Press, 1982).

이로써 동일시로 포괄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는 그 모두를 동일시의 일종으로 만든다는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렇지만 왜 모든 방향으로 열린 다양한 행동들이 모두 동일시의 일종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는 동일시라는 개념이 그가 전제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전제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전제 내지 출발점을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동일시를 통한 주체화.

한편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주체와 지식 사이의 근대적인 관계 설정을 뒤집는다. 그는 주체란 특정한 담론 안에서 정의되는 기능이며, 이 점에서는 그 짝인 대상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이 양자가 연관되는 방식을 표시하는 개념이나 전략 역시 담론 안에서 정의되는 것이다.M. Foucault, L'archeologie du savoir, Gallimard, 1969, 이정우 역,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1992, 83-106

예를 들면 정신병리학에서 주체는 의사라고 불리는 어떤 기능이며, 정신병원에서 언표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의사 (및 간호사) 뿐이다. 환자들은 의사 등이 행하는 조치(진료, 치료)의 대상일 뿐이며, 의사 등이 행하는 조치에 대해 따라야 한다. 환자에게 적절한 것으로 간주되는 말들이나, 의사의 조치에 항의하는 말들은 언표가 되지 못한다. 즉 말하되 들리지 않고, 즉시 무효화된다. 환자 아닌 방문자 역시 이 점에선 마찬가지다. 어떠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조치조차 치료의 이름이 붙으면 정당한 것이 된다. 거기서 사유하는 주체는 오직 의사의 기능을 수행하는 자에게만 허용될 뿐이다.

결국 주체란 이처럼 정신병리학이나 병원과 같은 배치 안에서 정의되고 그것들에 의해 유지되는 특정한 기능이다. 정체성이란 그러한 배치 안에서, 그리고 그 배치를 통해서 담론적 및 비담론적인 방식으로 정의되는 주체의 위치를 고정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사의 역할을 하는 개인으로 하여금 치료라는 이름으로 환자들에 대해 조치하고, 진리의 이름으로 환자들의 말에 귀를 닫게 한다. 또한 정체성은 단지 의사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환자라는 대상또한 가져야 하는 것이고, 갖도록 반복하여 강제되는 것이다. 그것을 갖는 순간 환자들은 스스로를 환자로서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의사나 간호사들의 도움이 여러 가지 형태로 행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임을 인정하도록 강제된다. 환자가 스스로 동일시하지 않는 경우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동일시할 때까지는 동일시없는 강제가 그를 환자로서 유지한다. 차라리 동일시는 그러한 반복적 강제의 결과 형성된 동일시하는 습관이다. 감옥이나 학교, 군대, 공장 등에서 수인이나 학생, 군인, 노동자들의 주체화는 이처럼 처음에는 동일시없는 행위의 반복적 강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이에 대해서는 M.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 1994 3부 참조.

동일시없는 주체화.

여기서 주체화와 동일시의 문제에 관해 몇 가지 논점을 요약하자면, 첫째, 동일시는 자명한 전제가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다. 둘째, 동일시는 정체성의 형성에는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음이 분명하지만 주체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다시 말해 배제나 강제를 통한 동일시없는 주체화가 가능하다. 셋째, 동일시는 주체화과정의 출발점이 아니라 반대로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되는 그 과정의 결과물이다.

 

 

3.정체성과 권력

 

정체성(identity)은 사회학적 정의가 보여주듯이, 내가 누구며,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의 집합이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지위와, 그 지위에 결부된 역할에 관한 일련의 정의들로 구성된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러한 일련의 정의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동일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주체화된 결과를 보여준다.

그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동일성(identity)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는, 지위로 요약되는 사회적 관계가 라는 주체가 서있는 자리와 동일하며, 역할로 요약되는 규범의 집합이 내가 선택하는, 혹은 당위로 간주하는 행동의 집합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서 동일성. 이것은 내가 하는 행동이고, 따라서 나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라는 관념. 그것이 대개는 사회적 규범에 따르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나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를 이루는 것(동일한 것)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의 모습과 위상이 이전의 와 동일하며, 이후에도 여전히 일 것이라는 의미에서 동일성. 그것은 언제나 나를 나로서 고정한다. “길동아라고 불리는 15세의 홍길동 씨라고 불리는 40세의 사이에, 중학교에 다니는 와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이에, 혹은 일찍이 전복과 저항을 꿈꾸던 와 이제는 돌아와 가족을 걱정하며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이란 얼마나 취약한 것일지! 그러나 정체성은 이러한 상이한 모습과 상이한 태도들 사이에 동일성의 등가선을 설치하고 고정한다. 신원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증명서(예를 들면 주민등록증)는 이러한 동일성을 법적으로 고정한다. 그것은 적어도 새로운 변이와 변화를 항상-이미 방지하고, 발생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최소한의 폭으로 제한하는 효과를 갖는다. 주체화가 포함하는 가변성은 이러한 정체성을 통해 고정화되고 안정화된다.

이처럼 정체성은 자신에 대한 복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에 대한 복종이며, 과거와의 동일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삶의 반복이다. 그러나 주체화(subjectivation)가 언제나 주어진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며, 그런 만큼 단지 예속화(assujettissement)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주체화는 벗어나고 이탈하는 주체화의 점(point de subjectivation)에서 시작한다. 들뢰즈/가타리의 말을 빌면 주체화는 신에게서 얼굴을 돌리는 배신에서, 기존의 상징적 질서를 담지하고 있는 언표(enonce)의 주체로부터 벗어나는 독자적인 언표행위(enonciation)의 주체를 통해 시작한다.같은 책, 160.

나는 생각한다라는 언표행위의 주체 는 신이 제공한 창조와 계시의 언표에서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주체화의 점을 창출한다. 하지만 좀더 근본적인 것은 차라리 그러한 이탈을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서 정염(情炎, passion)이다. 그것은 예속화하는 모든 기표에서 벗어나려는 힘이며, 질서의 중심으로서 이성에 포섭되지 않은 힘이다. 요컨대 주체화는 탈주선을 타는데서 시작한다.

주체화의 선은 단지 탈주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탈주선 상에 있는 주체화의 점을 사회적 질서의 체제로 연결한다. 자본주의는 직접 생산자를 생산수단으로부터, 토지로부터 분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기초를 마련하지만,K. Marx, Das Kapital, Bd. 1, 김영민 역, ?자본?, I-3, 이론과 실천, 1987, 801쪽 이하.

그 결과 양산된 탈영토화된 생산자들의 부랑을 그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부랑을 금지하는 법과 부랑을 처벌하는 강력한 제도들, 혹은 부랑자를 감금하는 장치들이 빈민의 구제같은 책, 823쪽 이하.

내지 종합병원’(L'Hopital general)의 이름으로M. Foucault, Histoire de la folie a l'age classique, Gallimard, 1972, 59쪽 이하.

탈주선을 절단한다. 그리고 새로운 주체화의 선이 그려진다. 감금과 노동을 통한 갱생, 감시와 엄격한 규율에 따른 신체의 훈육, 감시자 없이도 작동하는 감시장치 등등.

그러나 정염 내지 욕망의 유목적인 운동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한, 이러한 주체화의 선은 불안정하다. 더구나 주체화가 주체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한, 주체화의 선은 또 다른 새로운 주체화의 점을, 새로운 탈주선의 생성을 피할 수 없다. 주체화를 작동시키는 권력은 그것의 안정성을 위해 현존하는 주체화의 선을 고정시키려 한다. 정착과 통합(integration). 정체성/동일성은 현존하는 형태로 동일하게 주체화의 선을 고정시키고 그 선으로 대상을 포섭하고 통합하려는 힘이다.

정체성은 당연시된 통념 내지 다수적인’(majeur) 통념을 통해 주체화의 벡터를 사회적 질서 내지 지배 권력과 상응하는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하려 한다. 양식(bon sens)과 공통 감각(sens commun)은 이처럼 다양한 잠재성을 갖는 욕망의 의미/방향(sens)을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고정시킨다.G.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93.

 

예를 들면 노동자는 생산하는 자로서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위상을 통해 노동자 계급 내지 프롤레타리아트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동시에 자본에 의해 고용되고 자본의 지휘 아래 노동해야 한다는 위상을 통해 자본의 일부인 노동력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 각각은 두가지 방향(deux sens, 두 가지 의미)을 갖는다. 그런데 대개는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경제학적 양식’, 그것을 위한 성실성과 순종이라는 도덕적 양식에 따라, 그리고 좀더 근본적으로는 자본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 단위의 부분적 기관(organe)sens commun에서 sens는 감각, 기관의 의미를 갖는다. G.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95.

이라는 공통 감각을 통해 하나의 방향을 취한다. 노동자의 정체성 역시 다수자’(majorite)로서 자본을,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규정성을 지향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정체성을 지배적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다수성(majorite)이란 개념에 대해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다수자/소수자나 다수성/소수성의 문제는 단지 양적인 차원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Mille Plateaux, 133

그것은 분자적인 움직임 혹은 대중들에 대해 영향력을 뻗칠 수 있는 경로의 다수성이며, 그것을 포획하기 위해 확보한 장치의 다수성이고, 그것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권력의 다수성이다. 이런 점에서 다수성이 권력과 지배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같은 책, 133.

예를 들어 민주주의는 다수자에 의한 다수자의 지배지만, 여기서 다수자가 노동자나 민중처럼 수적인 다수로 생각하는 것처럼 순진한 일은 없을 것이다.

반면 소수성(minorite)은 그러한 다수적 가치와 다수자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와 활동을 생성하는 것이고, 언제나 권력과 대결하는 변이의 힘이다. 다수성은 동질적이고 항상적인 것의 체계지만, 소수성은 창조적이고 잠재적인 생성(devenir)이다. “다수자는 그것이 추상적 척도 안에서 분석적으로 포착되는 한에서 결코 누구도 아니며, 또한 아무도 아니다(Personne). 반면 소수자는 만인이 되는 것(deenir tout le monde)이며, 사람이 모델로부터 벗어나는 한에서 잠재적으로 만인이 되는 것이다.”같은 책, 133-134.

 

덧붙일 것은 이러한 소수성이 주변성(marginaite)를 뜻하는 것도 아니란 점이다. 주변성은 많은 경우 다수성의 대칭적 양상을 취하며, 다수성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예컨대 조직폭력단). “나는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해 미셸[푸코]이 가지고 있던 공포를 공유한다. 광기와 범죄, 변태, 마약 등등에 관한 낭만주의는 점점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탈주선들, 즉 욕망의 배치는 주변인들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객관적인 선들이, 주변인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는 사회를 횡단하면서 매듭과 소용돌이를 만들고 재코드화를 야기한다.”G. Deleuze, "Desir et plaisir," 이호영 역, ?욕망과 쾌락?,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편,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푸른숲, 1997, 109-110.

 

정체성은 사회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어떤 개인이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정의의 집합만은 아니며, 자신이 누구며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상상적 설명을 제공해주는 표상체계만도 아니다. 차라리 정체성에는, 혹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메카니즘에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체성은 각각의 개인에게 현재 주어진 위치를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위치에 걸맞는 역할을 안정적으로 수행하라는 지시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현재의 주체 형태를 고정시키고 그것을 통해 그를 사회적 질서 속으로 통합해내는 메카니즘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그것이 동일성인만큼 동일자(le Meme)의 작동 아래 있다. 그것은 동일성을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차이와 이질성을 배제하거나 하위적으로 위계화하여 통합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 역시 자본가나 중산층처럼 다양한 자기-가치화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배치할 수 있다. 대금을 부는 일용공, 첼로를 연주하는 버스 운전수, 조각을 하는 선반공, 밴드와 함께 드럼을 치는 페인트공, 발레를 하는 미싱사, 테니스를 치는 점원... 그러나 노동자의 정체성은 이러한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자가 무슨...” 다만 부지런히 일하는 성실한 노동자, 기계를 잘 다루고 어떤 고장에도 훌륭하게 대처하는 유능한 노동자만이 쉽사리 떠오른다. 정체성은 동일성의 형식으로 차이를, 상이한 가치와 삶의 가능성을 억압한다.

이는 성적인 정체성이나 민족정 정체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독일은 자국민의 나치즘과 전쟁범죄에 대해 분명히 인정하고 사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찌감치 그에 대해 비판하면서 전쟁에 반대하여 징집을 거부했거나 탈영을 했던 사람들은 아직도(!) 복권되지 않았다. 비록 전쟁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들은 민족의 배신자인 것이다! 전쟁에 대한 자기비판도 민족적 동일성 안에서만 인정되는 것일까?

 

 

4.근대적 정체성의 모델

 

근대적 정체성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혹은 정체성의 권력이 작동하는 근대적 양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는 근대인을 생산해내는 권력의 도식(diagramme)을 통해서 검토할 수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원형감시장치(panopticon)에서 이러한 권력의 모델을 추출하고 있다. 이는 다른 두 가지 유형의 모델과 유효하게 비교된다. 그것은 나병과 페스트의 모델로서, 이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 권력의 도식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첫째, 나병의 모델. 나병은 신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었으며, 신의 통치 아래 있던 서구 중세 사회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외부였다. 서양의 중세 사회는 이들을 배제하고 추방함으로써 정상성을 정의할 수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있었던 나병환자의 수용소는 중세 사회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중세말에 이르면 나병 환자가 거의 사라지면서 그 수용소들은 비게 되었다. 17세기에 오면서 그 수용소는 이제 부랑자, 가난뱅이, 게으름뱅이, 광인, 범죄자 등을 감금하는 새로운 수용소가 된다. 종합볍원(L'Hopital general)이란 간판이 거기에 걸린다. ‘거대한 감금’(Le grand renfermement).M. Foucault, Histoire de la folie a l'age classique, 2.

이는 나병의 모델이 제공한 배제 내지 추방의 형식을 보여준다. “나병은 배제(exclusion)의 제의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거대한 감금의 모델 및 그 일반적 형식을 어느 정도까지 제공했다.”M.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박홍규 역, ?감시와 처벌?, 강원대출판부, 1989, 258.

이를 배제와 감금의 도식이라고 부르자.

둘째, 페스트의 모델. 여기서는 페스트의 전염을 막기 위해 공간을 엄격하게 분할하고 해당된 도시와 지방을 봉쇄했으며, 거기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고,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 “폐쇄되고, 세분되고, 모든 면에서 감시받는 이 공간에서 개인들은 고정된 자리에서 꼼짝못하게 끼워지고, 가장 사소한 움직임도 통제되며, 모든 사건들이 기록되고, 끊임없는 기록작업이 중심부와 주변부를 연결하고, 권력은 끊임없는 위계질서의 형상으로 완벽하게 행사되고, 개인은 줄곧 기록되고 검사되며, 생존자, 병자, 사망자로 구별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규율적 장치(dispositif)의 축약된 모델을 만든다.”같은 책, 257.

여기서 페스트의 모델은 분할되고 고정된 공간을 구성한다. “공간은 세분화되고 고정되어 있으며 동결되어 있다.”같은 책, 256.

 

그리고 이 분할되고 고정된 공간 속에 사람들을 가두고 그들을 치밀하고 세심하게 감시한다. “감시의 기능은 끊임없이 작동한다. 감시의 눈길은 도처에 있다...성문에는 감시초소를 두고, 모든 거리의 끝부분에는 보초를 세운다. 감독관은 매일 감독지구를 순찰하고...마찬가지로 동장이나 읍장은 매일 자기 담당구역을 다니면서 집집마다 그 앞에 멈춰서서 온 가족을 창가에 불러 모으고...한사람 한사람 호명하여 모든 사람들의 상태를 개별적으로 조사하고...창문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이유를 반드시 물어보도록 한다.”같은 책, 256.

 

요컨대 페스트의 권력 모델은 분할·고정과 감시의 도식이다.

셋째, 원형감시장치의 모델. 알다시피 중심의 감시탑과 그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이라는 건축적 형상을 취하며, 빛이 개개의 방에서 감시탑을 향하게 들게 하는 빛의 배치를 이용하는 원형감시장치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감시효과를 거두려는 공리주의적 사고의 극한에서 탄생한 것이다. 건물의 배치와 빛의 효과로 인해 감시탑에서는 매우 효율적으로 갇힌 자들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으며, 감시자는 한명이면 충분하고 심지어 없어도 상관없다. 그것은 독방의 수만큼작은 무대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 각각의 배우는 홀로고, 완전히 개별화되어 있으며, 항상적으로 가시적이다. 원형감시적인 이 장치는 멈춤없이 볼 수 있고, 즉각적으로 판별할 수 있는 그러한 공간 단위들을 구획 정리한다.”같은 책, 260.

 

여기서 대중은 통제가능한 개인으로 나누어지고, 항상적인 감시의 시선이 그에게 주어진다. 그들은 항상 감시되고 있으며, 반면 감시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감시자가 있건 없건 간에 개인은 항상 감시하고 있는 시선 아래 있다. 감시자가 누구인지, 권력을 누가 행사하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권력의 근원은 어떤 인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면, , 시선 등의 신중한 구분 속에, 그리고 내적인 메카니즘이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 개개인들이 포착되는 그러한 장치 속에 존재한다...따라서 그 관리책임자가 부재 중이라면 그의 가족이나 측근, 친구, 내방객, 그리고 하인조차 그 일을 대신할 수 있다.”같은 책, 263.

항상 보여지고 있다는 생각은 의식을 넘어 습속이 된다. 감시자가 없어도 그는 감시당한다. 감시를 의식하는 습속 아래서 자신의 시선이 감시의 시선을 대신한다. 어느 곳을 가든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감시의 시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시선이다. 이제 권력은 자동적인 것이 된다.이런 맥락에서 원형감시장치와 유사한 또 다른 감시장치를 현대 자본주의의 한 구석에 찾아내려는 시도(예를 들면 G. Swell/ B. Wilkinson, "'Someone to Watch Over Me': Sirveillance, Discipline and the Just-In-Time Labour Process,"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 감시, 규율, 그리고 저스트--타임 노동과정?, 강석재/이호창 편역, ?생산혁신과 노동의 변화?, 새길, 1993)는 적어도 푸코에 관한 한 일반화된 유명한 오해를 보여준다. 그 오해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단지 감시장치에 대한 연구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벤덤의 연구일 수는 있어도 푸코의 연구는 아니다.

알다시피 감옥뿐만 아니라 공장, 행정부에까지 확장시키고자 했던, 그리하여 공리주의적 유토피아의 뼈대를 이루던 벤덤의 꿈은 어디서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으며, 푸코도 지적했듯이 그것이 원형적으로 실현된 감옥에서 훈육과 교정은 실패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푸코에게 원형감시장치가 중요했던 것은, 그것이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근대적 권력의 도식을 극한적인 양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다.

 

따라서 페스트에 감염된 도시와 원형감시장치의 차이는 중요하다. 전자는 예외적 상황으로서 비정상적인 악성유행병에 대항하여 권력이 발동한 것이고, 그 권력은 고정하고 정지시키며, 반대로 움직이는 것은 죽음을 전달하고 또한 죽음을 당한다. 반대로 원형감시장치는 감시의 대상을 개별화함으로써 항상적으로 감시하는 메카니즘을 작동시키며, 감시자없이 작용하는 시선은 자신의 시선으로 감시의 시선을 대행하게 함으로써 일반적인 상황에서 일상적으로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그 기능을 일반화할 수 있는 권력의 모델이며, “인간의 일상생활과 권력의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식이다.”같은 책, 266.

보되 보이지 않는 권력의 도식,G. Deleuze, Foucault, 조형근/권영숙 역, ?들뢰즈의 푸코?, 새길, 1995

그것은 일상화되고 일반화된 자기감시의 도식을 그 이면에 창출한다.

이러한 권력의 도식을 통해서 우리는 정체성의 몇 가지 상이한 형태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다. 배제와 감금의 도식으로 작동하는 나병의 모델에서 개인은 언제나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 앞에 있다: 신의 저주와 배제, 그리하여 추방과 감금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 끔찍한 외부 세계와 달리 신의 축복이 있는 안정되고 정상적인 세계 속에서 살 것인가? 저주의 징후를 가진 신에게서 배제되고 버림받은 자와 그것을 갖지 않은 신의 어린 양.

하나의 동일한 두 가지 동일성(정체성)이 나타난다. 나병과 저주의 동일성, -나병과 축복의 동일성. 순종하는 이 이런 양들로 구성된 순수한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그 저주받은 자들을 인간의 집단에서 배제함으로써 구성된다. 이제 그들은 저주의 낙인을 감수하며, 추방된 자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한다. 동일시?

한편 페스트의 모델에서 개인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진 고정된 자리에 동결되고 구속된다. 개인들은 권력에 의해 분할되고, 건강한 자와 병든 자, 감염의 위험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움직이고 옮겨 다니며 죽음을 전파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등등으로 분류된다. 고정된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죽음과 조우하게 된다. 페스트에 의한 것이든, 처벌에 의한 것이든 간에. 권력이 분배하는 그 고정되어야 할 위상들은 참된이름, ‘참된위치, ‘참된신체, ‘참된질병에 대한 결정의 분류된 집합이다.?감시와 처벌?, 258.

그리고 감시는 그 위상들과 개인들의 대응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고 받아들이도록 훈련된 사회에 대한 몽상.

따라서 여기서 정체성이란 권력이 분배하는 그 고정되고 동결된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을 참된자신의 자리로 인정하는 것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분배된 위상과 자신의 동일성(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은 죽음이라는 극단적 처벌을 동반하는 권력에 의해 강제되고 확인되며 강요되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시는, 개인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는가 여부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동일시는 없다.

마지막으로 원형감시장치의 모델에서 개인은 고정되지 않으며 움직이고 유동한다. 권력은 규범과 규칙, 의무를 분배하지만, 그것을 위한 어떤 고정된 공간도 만들지 않는다. 보되 보이지 않는 권력, 그것은 차라리 원형감시장치를 벗어나서 작동한다. 가족이 있는 공간, 부부만의 가장 은밀한 행동이 행해지는 공간, 심지어 혼자만의 공간에서도 감시자없이 작용하는 감시의 시선은 작동한다. 자기 자신의 신체, 자기 자신의 행동, 나아가 자기 자신의 사고에까지 미치게 된 자신의 시선.

하지만 그것은 자기의 시선이기에 강제와 강요의 형식을 벗어난다. 그것은 내가 선택해서 내가 행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이성, 나 자신의 양식, 나 자신의 양심. 따라서 여기서 동일성(정체성)은 감시하는 시선과 자신의 시선, 보되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시선과 이성 내지 양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기감시의 시선 사이의 동일성이다. “나는 선생인데, 선생답게 행동해야지,“ “나는 학생인데...,“ ”나는 남잔데...,“ ”나는 한국인인데...,“ ”나는 성실한 사람인데...“ 등등.

동일시란 바로 이처럼 감시하는 시선, 어디선가 보고 있는 듯한 시선과 자신의 시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조건처럼 처음부터 주어지는 작용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이 주위를 의식하게 되면서, 그리고 주위의 눈총을 염두에 두는 습속이 만들어지면서, 그리하여 그로부터 벗어나면 어떤 비난과 처벌이 쏟아질 것이라는 알게 되면서, 그를 피하기 위해선 좋든 싫든 감수해야만 하는 조건으로 강제되는 조건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시선이고 자신의 선택이라는 착각과 오인으로 인해 동일시로 간주되는 조건이다.

알다시피 근대는 자유로운 개인,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고,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이란 개념 위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어떤 초월적인 권력이나 전제적 지배자도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사회가 근대 사회다. 그러나 일찍이 홉즈가 던졌던 질문처럼 사회적 질서가 가능하기 위해선 이 자유로운 개인들을 특정한 질서와 권력에 의해 통제하고 지배해야 한다. 지배자없는 지배.

이를 아렌트(H. Arendt)익명의 지배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H. Arendt, The Human Condition, 이진우/ 태정호 역,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6, 93-94.

하지만 아렌트 말처럼 이러한 익명의 지배, 지배자없는 지배가 가능하기 위해선 특정한 종류의 인간, 특정한 종류의 개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주어진 어떤 질서와 규범에 알아서 복종할 수 있는 그런 개인이다. 엄격한 감시와 통제가 가능한 어떤 고정된 자리에 머물지 않지만 이동하고 유동하면서도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개인.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시선을 언제나 잊지 않으며, 그 시선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개인, 그리하여 결국은 자신의 시선으로 그 감시의 시선을 대신하여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개인.

 

국가로서는 입법자와 주체의 동일성(identite)을 사유할 수 있는 조건 하에서 그 양자를 구별해야 한다. 언제나 복종하라. 당신이 더욱 복종할수록 당신은 더욱 주인이 될 것이다. 이는 당신의 복종이 순수한 이성, 다시 말해 당신-자신에 대한 복종이기 때문이다.”Deleuze/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466

 

 

바로 이런 점에서 원형감시장치의 모델이 창출해낸 형태의 동일성/정체성은 근대적 정체성의 모델이요 일반적 형식이다. 자기복종의 형식으로 복종하게 하는 정체성/동일성.푸코는 자신이 성의 역사에서 17세기 이후 강화된 고백 장치와, 네 가지 전략을 통해 성립된 근대의 성적 장치에서, 가장 은밀한 성이라는 영역에서조차 작용하는 권력을 발견한다. 그는 이를 생체권력(bio-pouvoir)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권력의 요체 역시도 건강하고 건전한 신체와 성을 위한 자기관리 형식으로 작용하는,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권력이었다. 여기서도 자기-복종, 자기-감시 형식의 정체성 모델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M. Foucault, La volonte de savoir, Gallimard, 1976, 이규현 역, ?성의 역사? 1, 나남, 1990).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알아서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이 근대적인 동일시와 정체성은 바로 보되 보이지 않는 권력을 작동시키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5.자본주의와 근대적 정체성

 

맑스의 ?자본?에서 분석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의 조직은 시간, 공간, 기계의 축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는 근대적인 노동의 체제를 구성하는 세 가지 축을 이룬다.

첫째 시간의 축. 도자기를 만들던 웨지우드가 새로운 기계의 도입없이도 생산성 상승을 이루어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 비결은 노동에 시간적인 규율과 통제를 도입했다는 점에 있었다.E. P. Thompson, “Time, Work-Discipline and Industrial Capitalism," Customs in Common, Merlin Press, 1991, 385.

이러한 시간적 통제와 규율은 19세기에 들어와 매우 일반화되며, 엥겔스가 극명한 사례를 보여준 것처럼,F. Engels, Conditions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박준식 역,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 두리, 219-220.

잘못하다간 하루치의 일당 전체보다도 많은 벌금을 물어야 하는 극단적인 처벌의 체계와 결부되어 있었다.

 

노동의 시한이나 한계, 중단을 시계종 소리에 따라 군대 식으로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이러한 세밀한 규정은 결코 의회적 사고의 산물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근대적 생산양식의 자연법칙들로서 점차적으로 갖가지 관계들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그것들의 정식화나 공인 및 국가적 선언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계급투쟁의 결과였다.”K. Marx, ?자본?, I-1, 328-9

 

 

이러한 시간-기계의시간-기계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13-116쪽 참조.

도입은 한편으로는 규율을 노동자들에게 시간적으로 강제하고 생활을 시간에 따라 통제하기 위해서였고, 이를 통해 일관성없는 작업습관을 폐기하기 위해서였다.Ure, The Philosophy of Manufactures, pp.15-16, Marx, ?자본론?, 1(I-2) 484쪽에서 재인용.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분업의 발전에 따라 작업장에서 노동을 공시화(synchronazation)하기 위해서였다.E. P. Thompson, 앞의 책, 370.

여기서 근대의 직선화된 시간은 단위시간에 의해 분할되면서 분명한 양끝을 갖는 선분이 된다. 더불어 그것은 선분적으로 분할된 시간마다 특정한 형태의 행동이나 동작이 대응시킨다. 시간-기계와 선분화.

둘째, 공간의 축. 집이나 학교, 공장에서 보이듯이 근대의 공간-기계는 각각의 부분공간과 다른 공간 사이에 불연속성과 단절을 도입함으로써 공간의 구획화를 달성한다.이에 대해서는 이진경, 앞의 책 125-136쪽 참조.

 

 

좀더 많은 수의 노동자가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에서...동일한 종류의 상품을 위해 동일한 자본가의 지휘 아래 일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을 형성한다. 생산방식 자체에 관해서 말한다면 가령 초기의 매뉴팩춰는 동시에 동일한 자본에 의하여 사용되는 노동자의 수가 많다는 것 말고는 준프트적 수공업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프트 장인의 작업장이 확대된 것뿐이었다.”?자본?, I-2, 375. 이탤릭은 원저자 강조, 고딕은 인용자 강조.

 

 

그것은 노동자의 공간적 집결과 특정한 공간적 배열을 포함하며, 분배된 각각의 노동에 대해 일정하게 양식화되고 동질화된 노동을 대응시킨다. 여기서 노동의 양식적 동질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노동자들의 특성과 무관하게, 분배되고 요구되는 노동을 표준화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공간-기계의 구획화와 노동의 표준화.

셋째, 기계의 축. 산업혁명 이후 노동은 기계와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기계가 작업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사람이 기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되며, 기계에 일치하도록 노동자들을 훈련시키는 결과가 만들어졌다.

 

어떠한 자본주의적 생산도 노동자가 노동조건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노동조건이 노동자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노동수단의 규칙적 운동에 노동자를 기술적으로 종속시켜야 하며, 그리고 남녀노소의 구별없는 개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노동체의 독특한 구성은 하나의 병영적인 규율을 만든다.”?자본?, I-2, 483-484.

 

 

여기서 좀더 나아가 기계는 노동 자체를 기계에 의해 정의한다. 마치 역학이 복잡한 기계들의 운동을 단순한 기계적 과정의 복합과 반복으로 환원했듯이, 기술공학은 기계화될 수 있는 형태로 운동을 분석하여 노동에 요구되는 작업을 단순하고 동질적인 동작의 요소들로 환원시켰다. 나아가 기계적 리듬에 노동의 리듬을 통합시킨다. 이런 점에서 기계는 노동 자체를 기계화(mecanisation)한다. 그것은 노동 자체를 특정한 양상으로 절단하고 채취하는 기계(machine). 기계-기계.

자본주의적 공장에서 노동은 이러한 세 가지 축을 따라서 표준화되고 규범화된다. 그리고 노동자는 그 규범과 표준에 따라, 혹은 그것을 강제하는 규율에 따라 근대적 노동자로 훈육되고 생산된다. 벌금으로 강제되며 결국은 해고라는 결정적 절차를 통해 노동자에게 작용하는 규율, 시간적으로 처지거나 노동의 질이 평균에 못미칠 때 그것을 상기시키고 제대로 할 것을 요구하는 바로 옆의 동료 노동자, 그리고 시간적으로나 양식화된 동작이란 면에서나 적절하지 않은 것을 결코 허용하지 못하는 기계 등이 특정한 양상의 노동을 반복하게 강제한다. 그리고 그것은 채플린이 매우 극명하게 잘 보여주었듯이 노동하는 자의 신체에 새겨진다.

다른 한편 이러한 규율과 강제가 노동자의 신체와 무의식에 침투하는 또 다른 경로가 있다. 상대적 과잉인구화를 야기하며 진행되는 자본의 축적. 그것은 실업화 압력을 통해 취업자나 실업자 모두을 자본의 요구 아래 포섭한다. 실업화 압력은 실업자나 취업하려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좀더 나은 노동능력의 소유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으로 몰아넣으며, 취업자로 하여금 잠재적 실업자로 만듦으로써 자본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축적의 규모 및 활력에 알맞도록 유지하고 있는 그 법칙은 불칸 신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시킨 것보다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시킨다.”?자본?, I-3, 708.

 

과잉인구화하는 이 자본 축적의 메카니즘은 고용되는 인구를 개별화함으로써, 취업을 생존을 위한 노동자들 간의 경쟁으로 만들며, 그 성패의 문제를 개별적 능력으로 환원한다. 이로써 고용을 위한 노력은 자신 스스로 선택한 문제욕망의 문제가 되며, 실업은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환원된다. 맑스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이 노예제에서는 사람들을...근면하게 만드는 폭력적 방법이 있었다...그때[노예제] 사람들은 타인의 노예였기에 노동을 강요당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욕망의 노예기에 노동을 강요당한다.”같은 책, 731쪽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이제 노동자는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의 신체와 자신의 능력을 본다.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언행, 자신의 처신을 자본의 눈으로 보며, 자신의 행동과 언행, 신체와 사고를 자신의 시선이 실어나르는 자본의 욕망에 동일하게 한다. 가치증식(Verwertung)의 욕망과 가치화(Verwertung)된 시선, 그러한 자본의 시선과 노동자 자신의 시선의 동일성/정체성. 그것은 좋든 싫든 저 험한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에는 생존을 위해서는 스스로 선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동일성/정체성이다.

자본주의가 작동시키는 근대적 정체성의 메카니즘. 경쟁과 과잉인구화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의 권력은 노동자 자신의 눈으로, 노동자 자신의 신체를 자본의 시선에 따라 만들어내게 한다. 노동자의 정체성. 자본으로서 생산되는 노동자. 그렇지만 여기서 노동자의 정체성은 원형감시장치로 환원될 수 있는 형식과는 다른 시선의 권력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노동자가 동일시하는 시선은 감시의 시선이라기보다는 증식능력을 추구하는 가치화된 시선이고, 노동자의 동일시는 (자신의) 욕망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물론 자본가는 감시한다. 그러나 이 감시의 시선은 공장의 범위에 국한된다. 오히려 그 외부에서 자기-감시의 형식을 취하는시선은 원형감시장치를 모델로 하는 시선이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결국 노동자의 신체에는 이중의 시선이 작용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화되고 일반화된 자기-감시의 도식을 여기서 새로운 양상으로 발견한다. 이는 두 가지 정체성의 형식이 갖는 근대적 동형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하지만 여기서도 주어진 노동의 규범을 자신의 욕망으로 간주하는 동일시와 동일성/정체성은 경쟁과 실업화 압력, 근본적으로는 생존 그 자체의 위협의 이면이요 효과라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6.탈근대적 정체성?

 

요약하면, 지배자없이도 지배받는 주체, 스스로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주체는, 개인들의 동등한 자유 위에서 지배와 질서를 구성해야 했던 근대 사회의 이율배반에 대한 대답이었다. 사회적 규율 내지는 자본의 욕망을 통해 자기-감시 내지 자기-복종 형식으로 규범화하고 훈육하는 권력은 그러한 근대인을 일상적으로 생산해낸다. 그것은 규범화된 틀 안에 이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사고와 행동의 폭을 제한하고 고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정체성은 권력이 작용하는 메카니즘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체성이 권력의 문제라면, 이제 우리는 정체성의 정치에 대해서 사고해야 하지 않을까? 정체성을 통해 작용하는 권력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투쟁과 저항의 문제를.

맑스는 이미 정체성을 둘러싼 적대와 투쟁의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그것은 개념을 달리해 표현하자면, 분명히 자본의 시선과 자본의 욕망에 따른 노동자의 생산을, 노동자 자신의 욕망과 시선으로, 또는 노동자 자신의 이해에 의한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비록 그가 계급의식의 개념으로, 그리하여 의식화대자화의 개념으로 포착할 수밖에 없었지만, 노동자가 노동자 계급으로 변환되는 것을 사유하려고 했다. 그것은 자본으로서 생산되는(이런 점에서 이는 허위의식으로 간주되었다) 노동자의 정체성을 변환시키는 문제고, 기존의 정체성에 대한 투쟁과 전복의 문제다. 혁명은 그런 정체성의 변환없이는 불가능하다.주체화하고 고정시키는 정체성은 벗어나고 이탈하며 누출하는 흐름을 막을 수 없으며, 사실 그런 흐름은 언제나 도처에 있다. 원형감시장치의 모태인 감옥은 근대 이래 언제나 실패해왔으며, 반대로 범죄자를 양산해왔다. 자기-감시하는 메카니즘을 가르치고 훈육하려는 학교 역시 평균적인 모범생보다도 적지 않은, 종종 낙오자로 불리는 이탈자들을 만들어낸다. 또한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실업인구는 자본의 욕망에 맞추기를 포기한 자들을 불가피하게 만들어내며, 과잉인구가 표상하는 일상화된 생존의 위협은 빈번히 원치않는 이탈자--‘자전거 도둑’--를 만들어낸다.

물론 정체성의 메카니즘은 그들에게 할당할 자리와 낙인을 준비해두고 있으며, 그것에 많은 사람이 속는다--상상적 동일시 혹은 오인‘--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규범이 정의한 범죄자, 낙오자, 이탈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언제나 그 낙인을 자기화하리라는 생각은 너무도 순진한 것이다. 혁명적 운동으로 나아가는 노동자 계급, 범죄와 폭력을 조직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 속도에서 새로이 삶의 자리를 찾아내려는 폭주족... 이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한다. 때론 반-근대적인, 때론 근대적인, 때론 탈-근대적인.

 

정체성의 변환, 그것은 한편으로는 항상-이미 주어지는 다수화하는 규범이나 자본의 욕망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변환시키는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론 그것을 실어나르는 시선의 권력을 빗겨나는 것이다. 횡단(橫斷)의 정치와 유목적 정체성은, 또 지각불가능하게-되기(devenir-imperceptible)는 이러한 변환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다.

가타리가 사용하는 횡단성(transversalite)이란 개념은 이미 구획되어 있는 틀을 뛰어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횡단성 개념에 대해서는 F. Guattari, "La transversalite,"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e, Maspero, 1972, 彬村昌昭/毬藻 , ?精神分析橫斷成?, 法政大學出版局, 1994; 허재영, ?정신분석과 정치는 어떻게 만나는가??,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편,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푸른숲, 1997; 윤수종, ?제도요법과 집단적 주체성?,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편, 앞의 책 참조.

이는 자유로운 흐름을 가로막는 수직적 장애와 수평적 장애 모두를 넘어서 소통과 생성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첫째, 그것은 여러 요소들 사이에 흐름을 가로막는, 권력이 장착한 벽을 트거나 새로운 창을 만드는 것이다. 계와 과, 부 등등으로 분할하는 벽; 신경학과 심리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등등으로 분할하는 벽; 육체노동자와 사무노동자, 금속노동자와 섬유노동자, 용접공과 도장공 등등으로 분할하는 벽을 넘어서는 횡단적 접속. 둘째, 그것은 여러 요소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를 돌파하고 뛰어넘는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그것은 의사와 환자, 간호사와 환자 사이에 만들어진 위계를 부수는 것이다.

횡단의 정치는, 흐름을 정해진 지대 안에 고정하는 정체성의 벽을 넘어서 새로운 지대로 생산적 힘과 활동, 사유가 흘러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상하좌우로 그어진 정체성의 경계선을 가로지르고 넘나드는 것이며, 그 경계선 자체를 가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체성을 정의하는 규범과 규칙의 획일적인 선을 변이시키거나 복수화하는 것이고, 경계들을 가변화하거나 교착 내지 중첩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정체성에 영토화(territorialisation)된 사고와 행동을 탈영토화한다.

따라서 정체성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의 정치는 그 횡단성 계수에 따라 정체성 자체의 고정성을 가변화시킨다. 이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성되는, 하지만 지속적으로 가변화되기에 고정시키지 않는 유목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고정된 자리에 대한 머무는 동일성이 아니란 점에서, 반대로 변이를 통해 끊임없이 유동화되는 새로운 장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이미 정체성/동일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되기(devenir). 여기서 정체성의 권력, 정체성의 정치는 생성의 정치로 대체된다.

횡단의 정치와 유목적 정체성은 단지 기존의 고정하는 권력에 대한 속임수가 아니라, 다시 말해 기존의 오인을 대신하는 또 다른 오인이 아니라 차라리 그로부터 얼굴을 돌리는 것(detournement)이고, ‘배신’(trahison)이다. 그것은 단순히 주어진 자리들을 옮겨 다니는 것이나 주어진 자리들의 상이한 조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라클라우/무페는 주체위치를 상이한 정체성 요인들--계급적, 성적, 민족적, 인종적 등등--로 분해한 뒤, 적대에 의해 정의되는 조건 속에서 정체성들의 접합을 통해 주체위치를 가변화하려고 한다(E. Laclau/ Ch. Mouffe,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Verso, 1985, 김성기 외 역, ?헤게모니와 사회변혁?, , 1990). 그러나 각각의 정체성과 그것을 통해 고정화시키는 권력은 문제되지 않으며, 단지 접합의 효과를 통해 가변화되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접속을 통해 기존의 정체성 자체가 변이되지 않는다면, 접합되는 정체성의 조합이 아무리 다양해도 근본적인 변환을 생각하긴 힘들지 않을까?

오히려 그 자리들을 구획하는 경계선의 변환이요, 겹침과 뒤섞임이며, 그것을 통해 기존의 경계조차 중의화(重意化)하는 변이다.

그것은 구획된 선을 넘는 흐름 간의 접속에 의해, 그리고 그것의 미시적 전염에 의해 이루어진다. 또한 말벌의 오르키데-되기(devenir-orchidee)와 오르키데의 말벌-되기가 그렇듯이, 다른 것이 되기는 일정한 블록과 집단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자주-관리는 자본(정확히는 생산수단)과 노동이라는 블록을 전제하며, 생산단위와 연관된 특정한 형태의 집단을 통해 이루어지며, 여기서 노동자의 자기-관리를 통한 자본의 노동’-되기와 노동자의 자본’-되기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노동과 자본이라는 말은 이전의 그것과 경계를 달리한다.왜냐하면 이제 노동은 더 이상 상품을 통해, 양화된 가치를 통해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고, 자본은 더 이상 가치화와 착취를 통해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중첩과 뒤섞임이 그 의미를 중의화하고 변환시킨 것이다. 따라서 예전의 관념으로는 그것은 인지불가능한 것(l'imperceptible)이 된다. 인지불가능하게-되기. 자신의 시선이 대신하던 감시의 시선, 자본의 시선은 여기서 무력화된다. 왜냐하면 그 시선이 그것을 따라 작용하던 기준선들이 중첩되고 뒤섞였으며 중의화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이상 초점이 맞지 않게 되어 버렸고, 감시하고 추적할 대상을 놓쳐 버린 것이다. 자신의 시선조차 그것을 추적할 수 없다. 이를 새로이 감시하기 위해선 시선은 새로운 초점을 찾아야 하고 새로운 기준선을 마련해야 한다. 혹은 기존의 선들로 그 새로운 대상을 다시 분절하여 기존의 격자 안에 다시 위치지우려 할 것이다. 그러나 횡단과 유목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다시 초점을 잃을 것이다.이 점에서 파우스트의 계약은 시사적이다. 그것은 멈추는 순간 패배하는 계약이다. 이 계약은 계약 자체가 주어진 질서에 대해 외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마와의 계약이고, 기존의 선악의 격자 외부에서 행해진 계약이며, 기존의 정체성을 변환시키려는 계약이기 때문이다. 허용될 수 없는 저 악마와 함께 파우스트는 멈추어선 안되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끝없이 변이한다. 그것은 그레트헨의 타락과 죽음으로 시작하는 와 고통, 근심 등을 수반하지만, 그리고 결국 근심으로 눈멀지만 즐거운 여행이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수로를 만들며 자신이 할당받은 땅을 개척하는데서 멈추라고 선언한다. 그는 근대적 개척, 혹은 자본주의적 산업의 상징 앞에서 멈추어 선다. 패배.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그 패배는 천사와 성모, 예전에는 그레트헨이라 불리던 속죄하는 여인에 의해, 결국은 신과 교회에 의해 구원된다. 죄많은 유랑의 대속(代贖). 신은 메피스토펠레스를 속이고, 파우스트의 영혼을 다시 신의 질서 아래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그가 멈춘 지점을 그 계약 이전으로 돌리는 것이며, 그로써 그가 멈춘 지점의 역사적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거기가 괴테가 멈춘 지점이기도 하다. 결국 멈추지 않기로 한 운동은 이 교묘하고 거대한 속임수에 의해 질서 속으로, 정착과 안정, 선함과 속죄의 격자 속으로 포획된다. 절대정신의 반성(Reflexion)과 자기내 복귀. 괴테의 정신현상학.’

반면 카프카의 K는 멈추지 않으며, ??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및 정부>에서 멈춘 자는 패하고 죽는다.

그리고 또...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체성은 한편으로는 자본의 시선, 자본의 권력을 대신하는 노동자 자신의 권력과 정치를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횡단의 정치와 유목적 정체성을 통해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지배를 대체하는, 동시에 자본에 의해 부여된 정체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집합적 주체성의 생산, 그것은 생산수단과의 직접적 결합 위에서, 혹은 그러한 조건이 부재한 상태에서 그것을 지향하는 생산자들 자신의 집합적 접속을 통해 형성되는 새로운 노동자-되기를 뜻할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정체성의 변이가 만드는 멈추지 않는 무한의 프랙탈한 선들이 그리는 코뮨적인 일관성의 구도(plan de consistance)요 내재성의 장(champs de immenance)이다.‘일관성의 구도내재성의 장에 대해서는 Mille Plateaux, 3(도덕의 지질학)11(리토르넬로에 관하여); 혹은 G. Deleuze/F.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ophie, Minuit, 1991, 윤정임/이정임 역,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4 참조.

그것을 맑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이라고 부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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