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에게는 언젠가 한번은 풍부한 색채의 세계를 일곱 가지 기본색 속으로
던져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식할 때가 올 것이다.
- 라드브루흐(G.Radbruch)
1.서 론
인간생활을 규율하는 법률은 단순한 조문의 집합체가 아니라 법규범의
통일체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법의 체계(legal system, Rechtssystem)라고
한다. 법학에서도 체계가 중요하며, 법률가를 가리켜 '체계병자'라고 부를만한
이유도 있다. 법은 물론 시대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기초하여
제정되지만 그 내면에서는 모순과 대립되는 요소를 간직하면서도 통일성을 갖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과 적용에 혼란을 초래함은 물론 법의 일관된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법의 체계는 관찰의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대체로 국내법과 국제법의 구별문제, 국내법에 있어서 공법과 사법,
그리고 사회법의 구별문제가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 법학도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럼으로써 복잡하면서도 정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2.국내법과 국제법
국내법은 한 국가에 의하여 인정되어 그 국가에 적용되는, 국가와 국민 또는
상호간의 권리, 의무관계를 규정하는 법인 데 반해, 국제법(international law,
Volkerrecht)은 국제사회에 통용되는 국가 상호간의 권리, 의무와 국제기구에
관한 법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국내법과 국제법을 일원적으로 보느냐 이원적으로 보느냐,
이원적이라면 국내법이 우위에 있느냐 국제법이 우위에 있느냐에 대하여
학자들의 이론이 분분하다. 이에 대하여는 국제법 시간에 상세히 배우겠고,
다만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국제공법과 국제사법(Internationales
Privatrecht)이 있는데 국제사법은 국제법이 아니라 국내법에 속한다는 점이다.
국제사법(혹은 섭외사법)은 국가 상호관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국가
안에서의 국민과 외국인과의 법률관계를 정함에 있어서 자국법을 적용하느냐 그
외국인의 본국법을 적용하냐를 정하는 법이 대부분이다. 모두 자국법을 적용해도
좋겠지만 사정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없는 때도 있으므로 각 경우에 준거해야 할
법을 지정해 두는 것이다.
3.공법과 사법
로마법은 일찍부터 법을 공법과 사법으로 구별하여 체계화하였다. 그로부터
법학에서는 집요하게 공법과 사법의 이분체계가 논의되어 왔다. 그렇지만
무엇이 공법이고 무엇이 사법이냐를 어떤 표준에 의하여 구별하느냐 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으며, 따라서 구구한 학설들이 등장하였다.
1)이익설: 법이 공익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공법, 사익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사법이라고 하는 견해이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의 실정법은
이익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공익만을 위하고 사익의 보호만을 규정한 것은
거의 없다. 법은 원래 국가, 사회생활에 관한 규범이므로 공익의 실현과 함께
공익에 반하지 않는 범위에서 사익의 보호를 위한 규정이 있겠고 반면 사익의
보호와 아울러 공익의 실현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
공법인 헌법이 보장하는 각종의 자유권 등은 국가적 이익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반면 개인적 이익의 기본이 된다. 그리고 민법상의 등기제도, 친족, 상속
등에 고나한 법규는 개인적 이익의 보호에 관한 것인 동시에 국가적 이익에도
깊이 관련되다.
2)주체설: 법률관계의 주체를 표준으로 공법과 사법을 구별하려고 하는
설인데, 국가 기타 공법인이 법률관계의 주체로서 규율하는 법을 공법이라고
하고, 사인 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을 사법이라고 한다. 옐리네크(Georg
Jellinek, 1851-1911)가 주장한 견해이다. 그러나 이 설은 왜 국가 기타의
공법인에 대하여 법인 상호간의 관계와 다른 취급을 하는가를 명확히 설명하지
낳고 있다. 가령 국가 기타 공법인과 사인간에 매매, 임대차 등의 사적거래를
맺을 경우에도 사법인 민법의 규정에 의하여 규율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있다.
3)법률관계설: 법률관계의 성질을 표준으로 하여 공법과 사법을 구별하려고
하는 설인데, 권력, 복종의 관계, 상하평등의 관계, 즉 종적, 수직적인
생활관계를 규율하는 법은 사법이라 한다. 그러나 이 설에 의하면 국제법은
공법인 데도 국가간의 평등한 관계를 규율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법으로
간주되는 모순이 생긴다. 떠 민법의 친족관계는 평등, 대등한 관계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친족법을 공법이라 해야 할 모순이 나타난다.
4)생활관계설: 인간의 생활을 국가생활관계와 사회생활관계로 나누고, 전자를
규율하는 법을 공법이라고 하고, 후자를 규율하는 법을 사법이라 한다. "인간이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에서 이용하는 법규범의 사법이다"고
푸흐타(G.F.Puchta)는 말하였다.
생활관계설이 오늘날의 통설적 견해이다. 공법은 국가권력의 직접 지배하고
규제하는 공적, 정치적 생활관계에 관한 법이며, 사법은 국가권력이 일단
후퇴하고 간접적인 지배체제하에서 어느 정도의 사적 자치의 원칙을 용인하는
사적, 경제적 또는 가족적 생활관계에 관한 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표준들에 의하여 공, 사법을 구별하려고 하는 실익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래서 공, 사법의 구별을 부정하는
학설도 등장하는데, 예컨대 프랑스의 공법학장인 레온 뒤기(Leon Duguit,
1859-1928)는 권리부인론, 개인주의법 비판과 함께 공, 사법의 구별을
부정하였다.
또한 켈젠 역시 공, 사법의 구별은 근대법학에 대한 정치의 침입을 옹호하는
이론이며, 법학의 순수성 또는 과학성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배격하였다.
그렇지만 복잡한 근대법체계를 무엇인가 구분, 설명해야 할 필요는 점점 더
절실해진다. 라드브루흐는 공법과 사법의 구별은 '선험적'(a priori)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이라는 설명으로는 불충분하며,
오히려 아래와 같이 역사적, 경험적 법의 발달과정에서 법의 이해해야 할
것이다.
4.공, 사법과 법발전
로마인들이 공, 사법을 구별한 것은 소송을 합리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로마법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게르만법에서는 공, 사법의 구별을 몰랐다
동양법에서도 공법에서 분리된 독립된 사법을 알지 못하였고, 사생활까지도
공법이 으레 지배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서양에서도 공, 사법의 구별이 크게 부각된 것은 자본주의가 생성된
18,19세기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사회경제체제 아래서였다. 이 체제에서는
인간의 사적 자치(Privatautonomie)가 최대한 인정되고, 국가는 최소한 개인
생활에 간섭을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리하여 법질서도 국가적 공법질서
외에 개인적 사법질서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여러 가지 사회병리현상이 속출하게 되었다.
부익부 빈익빈의 부조리가 근대시민법의 사적 자치라는 미명 아래 팽배해 갔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가가 다시금 적극성을 띠고 사회적 강자는 누르고
약자는 떠받치는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사법의 공법화 경향이라고도 하고, 전통적인 공, 사법의 구별이 불분명하게 된
제3의 법역으로서의 사회법(Sozialrecht)의 등장이라고도 말한다. 이에 대하여는
뒤에 설명하겠다.
공법과 사법을 구별해야 할 필요성은 현실적으로 사법제도에서도 남아 있다.
프랑스나 독일 등 이른바 대륙법계의 국가에서는 사법재판소(Tribunal
judiciare)와 계통을 달리하는 행정재판소(Tribunal administrative,
Verwaltungsgericht)가 있어서 민사사건과 형사사건 이외의 다른 행정사건을
관할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법원들의 관할권을 배분하기 위하여도 공법과
사법의 구별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국, 미국과 같은 영미법계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행정재판제도는 원칙적으로 두지 않으며, 모든 법률상의 쟁송은 종국적으로
사법재판소의 관할에 속하기 때문에 대륙법계 국가에서처럼 공, 사법의 구별이
절실하게 요청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법은 대체로는 대륙법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잇지만 영미법계처럼
행정재판제도를 실시하고 있지 아니하고 행정사건도 사법재판소에서 재판하게
되어 있으며 고등법원이 제1심 법원이 된다. 그러나 행정소송사건의 범위는
정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행정소송법 제1조는 공법상의 권리, 의무 관계에
관한 소송만이 행정소송사건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공법과 사법의
구별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 법학에서 공,
사법의 구별은 그 이론적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논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5.제3의 법역
라드브루흐는 근대법에서 현대법에로의 발전을 '개인주의법에서
사회법에로'(vom individualistischen zum sozialen Recht)라는 표어로 설명한
바 있다. 자본주의사회는 사회주의자들이 예언하듯이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황금을 낳는 오리'로서 자체 속에 수정원리와 대체재를 포괄하면서 계속
발전해가고 있다. 국가가 복지국가(Wohlfahrtsstaat)를 이념으로 기업과
근로자의 이해를 조절하며, '소유와 이용의 조화'을 꾀하고, 독점기업의 횡포를
억제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이러한 사명을 띠고 나타난 사회법은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의 부분적
모순을 수정하기 위한 법이지 자본주의의 부정을 의미하는 사회주의법은 아니다.
사회법은 근로자들에게 '인간다운 생존'(menschenwurdiges Dasein)을 보장하기
위하여 사법 중에서 일부를 특별히 분리하여 발전시킨 것이다.사회법이란 개념도
넓은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 속에 노동법(Arbeitsrecht),
경제법(Wirtschaftsrecht), 사회보장법(Sozialversicherungsrecht)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이에 대하여 경제법은 사회법과 그 원리가 다른
독립영역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광의의 사회법과
협의의 사회법의 개념을 그때그때 적절히 구별하여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법의 체계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체계화해 볼
수 있을 것이다(국내법).
1)공법: 실체법(헌법, 행정법, 형법), 절차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2)사법: 민법, 상법
3)사회법: 노동법, 경제법, 사회보장법
이렇게 법을 삼분체계화하는 것이 오늘날의 통설이라고 하겠지만, 이 3분 체계
안에 구체적인 법역들을 어디에 소속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또한 간단치
않다. 예컨대 사법이나 저작권법을 포함한 무체재산법(Immaterialguterrecht),
환경법 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세부까지 공, 사법의
구별을 논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오늘날은 과거에 상상치도 못한 영역에까지
법이 규율하여 법역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은 법체계론은 자본주의체제세서의 법체계론이고, 사회주의적
법체계에서는 근본적으로 부정된다. 레닌은 "모든 법은 공법적이다"라고
말하였듯이 공사법의 구별 자체가 부정된다. 그렇지만 사회주의법의 '붕괴'를
보고 있는 오늘날 법체계는 새로운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6.법학의 체계
이처럼 복잡다기한 법의 체계를 어디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도서관에 가서 분류표(Katalog)을 보면 가장 빠르다. 그런데 한국에는 법학에
관하여 제대로 정리된 도서관이 없어서 실제로 정리된 실물을 볼 수 없고, 다만
서울대학교에 법학도서관이 존재할 뿐이다. 법학 전체의 체계와 구성을 알고
어느 분야에 무슨 책이 있는가, 그 저자가 누구인가를 알아두는 것만도 중요한
지식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특정한 목적이 없더라도
도서관에 가서 목록만 뒤적이는 것도 공부가 된다고 하겠고, 그런 가운데 무언가
얻는 것이 있으리라.
[참고문헌]
최종고, '한국법입문', 박영사, 1994
장경학, '법학통론', 법문사, 1985
라드브루흐/최종고 역, '법철학', 삼영사, 1975, 174-179면
김철수,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위하여', 고시계, 1986
E.Jenks, Digest of English Civil Law, 4th ed., Butterworth, 1947
K.Engisch, Die Einheit der Rechtsordnung, Heidelberg 1935
R.Dabid, Major Legal Systems in the World Today, London, 1978
[연습문제]
1.법의 체계를 논하라.
2.공법과 사법의 구별을 논하라.
3.사회법의 성립배경과 내용을 논하라.
4.'현대법'의 체계를 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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