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은 맥주와 같다. 처음에는 치를 떨지만 마실수록 뗄 수 없는 것이다.
- 괴테(J.Goethe)
법학은 여성과 같다. 멀리하면 달려오고 가까이 하면 달아난다.
- 라반트(P.Laband)
법학은 이해적, 개별학적 및 가치관계적 학문(verstehende,
individualisierende und wertbeziehende Wissenschaft)이다.-
- 라드브루흐(G.Radbruch)
1.키르히만의 고발
독일의 검사 출신으로 유명한 문필가가 되었던 키르히만(J.H.von Kirchmann,
1802-1884)은 '학문으로서의 법학의 무가치성'(Uber doe Wertlosigkeit der
Jurisprudenz als Wissenschaft, 1847)이라는 강연을 책으로 발간하여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는 "입법자가 세 마디만 수정하면 실정법이 매우
가변적이며, 그 가변적 법질서 위에 세워진 법학이 과연 학문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적나라한 고발이라 하겠다.
법학을 선택하려는 사람이나 이미 법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도 때때로
키르히만의 이 말을 생각하면서 법학이 학문이 될 수 있을까 회의하는 때가
있다. 물론 이점을 깊이 논하려면 학문이 무엇인가부터 따져야 할 것이고,
그렇게 본다면 학문성이 의심스럽지 않은 분야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는 데까지
논의가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독 법학에 대하여 학문성 자체를 되묻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에 의문의 심각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2.법학도의 유형
독일의 형법학자요, 법철학자였던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 1878-1949)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대학에 오는 젊은이들을 관찰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주1)
첫번째 부류는 학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남들이 법을 공부하면 결코 손해는
안된다고 말하는 바람에 지망해온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로마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법격언 "유스티니아누스가 명예를 준다"(Dat Justinianus Honores!)는
유혹에 끌려 '빵을 위한 학문'(Brotwissenschaft)으로 법학을 선택한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별로 기대할 바가 못되며, 이들이 설령 법률가가 된다고
하더라도 국민생활에 손해를 주면 주었지 이익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오늘날의 시대는 더 이상 이러한 자들을 법률가로 받아들이기를 환영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두번째 부류는 지식만 발달하고 인격성이 부족한 젊은이다. 이들은 대개
중,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한다. 이들은 법학자가 되든 법률실무자가
되든 대체로 유능하다는 평을 받는다. 법률가의 과제가 매우 형식적이고 별다른
창조성을 요구하지 않는 한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전형적인 법률가'라고 해도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라드브루흐에 따르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번째 부류가 있다. 그들은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철학, 예술 혹은 사회와
인도주의(Humanismus)에 기울어지면서도 외부사정 때문에 부득이 법학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이들이다. 예를 들면 가난하여 저술가나 학자와 같은
불안정한 생로를 선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예술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창작활동에 뛰어들 수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당분간 법학을 선택하면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시간과 정력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그 틈을
이용하여 자기 본래의 취미방면에 정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법학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고 때로는 도중에 포기하고마는 수도 잇다. 그러나
이들이 끝까지 법학을 공부하고 나면 누구보다도 훌륭한 법학자와 법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독일에서만이 아니고 한국에서도 대체로 경험상 들어맞는
사실이라고 생각되며, 자신의 법학에 대한 기대와 결부시켜 자문해 봄직한 문제
설정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어떠한 부류에 속하는 법학도이며 장차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각자는 마음 속에 자기가 되고 싶은 인간상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3.법학의 학문성
그러면 다시 법학은 학문인가? 법학의 학문성은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가치 혹은 비가치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태도는 다음 네 가지 양태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주2)
우선 우리는 가치 혹은 비가치에 대하여 완전히 등한시하는 태도를 취할
경우가 있다. 이것을 가치맹목적 태도(wertblindes Verhalten)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태도는 혼돈된 주어진 소여 가운데서 자연의 왕국(Reiche der
Natur)을 이룬다.
반대로 가치 혹은 비가치 자체에 주의를 돌리는 경우가 잇다. 이것을 평가적
태도(bewertendes Verhalten)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태도는 자연에서 독립된
가치의 왕국(Reiche der Werte)을 이룬다. 가치맹목적 태도가 자연과학적 사유의
본질을 이룬다고 한다면, 평가적 태도는 가치철학(논리학, 윤리학, 미학)의
특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제3의 태도는 이상 두 태도와의 관계에서 설명되는 성질의 것이다.
학문(Wissenschaft)이라고 하는 개념은 반드시 진리(Wahrheit)라고 하는 가치와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시대의 학문적 성과뿐만 아니라 오류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학문이라고 할 때에는 그들 모두가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학문은 그것이 실제 진리에 도달했건 못했건 간에
적어도 진리에 봉사한다고 하는 '의미(Sinn)를 가진 실재'이다. 마찬가지로
예술(Kunst)도 미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이 예술사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미에의
노력에 의해 하나의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윤리(Ethik)도 실상은 많은 양심의
미혹을 포함하지만 선에의 노력이라는 의미에서 윤리 혹은 도덕이라는 개념을
구성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문화(Kultur)라고 하는 개념은 결코 순수한
가치만이 아니라 인간애와 잔인, 취미와 무취미, 진리와 오류의 혼합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의미를 가진 소여'로서, 법철학자
슈탐러(R.Stammler, 1856-1938)의 말을 빌리면 '바른 것에의 노력'(Streben
nach dem Richtigen)을 말한다. 라드브루흐는 이와 같은 태도를 가치관계적
태도(wertbezichendes Verhalten)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소여를 문화의
왕국(Reiche der Kultur)에 포괄하여 문화과학의 방법론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치초월적 태도(wertuberwindendes Verhalten)라고 부르는 종교의
세계가 잇다. 종교는 모든 존재의 궁극적 긍정이요, 모든 사물에 대하여
'예'(Ja)와 '아멘'(Amen)을 선언하는 미소짓는 실증주의(lachelnder
Positivismus)요, 사랑하는 것의 가치 혹은 비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행,불행의 피안에 존재하는 법열(Seligkeit)이요, 유죄,무죄를 넘어선
은총(Gnade)이요, 모든 것이 보기 좋았으며, 시련받은 욥(Job)에게는 궁극적으로
그 대립으로서만 생각할 수 있는 가치의 초월을 의미한다. 즉 가치와 비가치는
마찬가지로 타당한(gleich gultig)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관심한
(gleichg ultig) 것이다. 가치와 비가치의 대립과 함께 가치와 실재와의 대립도
지양된다. 종교의 세계에서는 비가치적인 것(das Wertwidrige)도 궁극적
의미에서 가치적(werthaft)이든가 비본질적(wesenlos)인 것이다. 가치가 사물의
존재근거(Seinsgrund)로 파악될 때 그것을 사물의 본질 (Wesen)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종교의 세계는 본질을 대상으로 하는 절대의 왕국(Reich der
Absoluten)이다. 그러나 가치와 비가치의 대립을 초월하기 위하여는 항상 그
대립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종교는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trotz alledem)의 성격을 지닌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운
관대함'은 가치맹목적 태도의 '어리석은 무관심'과 다를 바가 없다. 종교적
긍정의 대상은 일단 가치의 왕국을 통과한 것이다. 즉 종교는 가치의 왕국의
피안에, 자연은 차안에 존대한다. 진정한 종교는 과학과 모순하는 것이 아니며
진실한 신앙은 결코 현실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을 극복하고 이성을
초월하는데서 비로소 참된 종교가 성립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의 경지는 과학,
도덕, 예술의 극치이며, 진, 선, 미의 최고의 이상을 이루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절대적 입장에서 가치세계의 상대성을 지양하는 곳에 종교의 진수가
구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태도를 다시 살펴보면, 자연의 왕국은 존재를 그 대상으로
하고, 가치의 왕국은 당위(Sollen)를, 문화의 왕국은 의미(Sinn)를, 그리고
종교는 본질(Wesen)을 각각 그 대상으로 한다고 하겠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자연(Natur)과 이상(Ideal), 이 양자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뛰어넘어
연결하는 두 개의 것, 즉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문화의 다리(교)와 매순간 그
목표에 도달하는 종교의 날개, 곧 작품(Werk)과 신앙(Glaube)이 그것이다.
라드브루흐는 가치맹목적, 자연과학적 태도와 평가적, 가치철학적 태도 사이에
'다리'로서의 가치관계적, 문화과학적 태도의 독자성을 인정함으로써 높은
이상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낮은 현실을 고려하여 이상과 현실과의 교차
가운데서 인생의 진실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상 세 가지 태도를 법에
적용시키면, 가치맹목적 태도는 법과 무관계하다. 가치평가적 태도는 법의
가치이념을 평가하여 법철학(Rechtsphilosophie)의 영역을 이룬다. 가치관계적
태도는 법과 관련하여 법(과)학(Rechtswissenschaft),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법해석학(Rechtsdogmatik)이라고 부르는 분야를 이룬다. 가치초월적 태도는 법의
종교철학(Religionsphilosophie des Rechts)을 형성하여, 법의
무본질성(Wesenlosigkeit des Rechts)의 문제를 논할 수 있다.(주3)
법학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마찰과 충돌이 없도록 제도적으로 마련한
법이라는 장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매우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학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면서도 천성적으로 이론을 캐기 좋아하는 사람은 법학이
너무 필연성이 없다고 생각하며, 또 활동적인 사람은 법학이 너무나 많은
구속성을 갖는 학문처럼 느낀다. 이 두 성격의 인간에게는 법학으로는 항상
인간이 정한 규칙 때문에 어떤 절대적이고도 무한한 것에 접촉할 수 없다는
번민이 따르게 된다. 또 철학이나 종교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법은
가변적이어서 영원한 것, 초월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같이 느끼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생각과 느낌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감상일 뿐이고 법학의
본질은 오히려 그와 정반대이다.
법학은 법이라는 인간제도적 장치를 연구, 분석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가치와
정의, 그리고 절대적이고도 신성한 것을 다루고 성찰해야 하는 학문이다. 사회가
제멋대로(?) 흘러갈 때 법률가는 언제나 바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며, 정치가가 "어서 가자"고 하면 법률가는 "실수 없이 가자"고 한다. 이런
면에서 라드브루흐는 "법학도의 고민은 젊은 신학도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고민이다"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법학을 신학, 의학과 함께 가장 일찍부터 학문으로
정비하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까지 목사(혹은 신부), 법률가, 의사
이 세 '가운을 입는' 직업을 일종의 성직으로 부르고 있고, 서양에서 아직도
목사의 성복과 판사의 법복이 매우 비슷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법률
가를
'세속적 성직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법률가는 모름지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홈즈(O.W.Holmes)는 "법은 시인이나 예술가가 있을 곳은
아니다. 법이란 사색가의 직업이다"라고 하였다.
[법학과 법률학]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법학이란 명칭과 법률학이란 명칭이 혼용되고 있다.
동양인의 전통적 법에 대한 명칭은 율이었고, 삼국, 고려, 조선시대의 법학을
율학이라 하였다. 그래서 나이든 세대에서는 법률학이란 명칭이 입에 익었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 세대에서는 대개 법학이란 말이 쓰이고 이것이 바르다고
생각된다.
법학은 영어로는 legal science라 하고, 가끔 jurisprudence라는 고전적
표현도 사용하나 이것은 법리학 혹은 법철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독일어로는 Rechtswissenschaft 혹은 Jura라고 말한다. 로마시대에 처음
학문화되어서 유럽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서양법학이 수용되었는데, 그것을
우리의 상황과 토대 위에서 발전시킬 때 '한국법학'이 되는 것이다.
4.법학과 법률가
법학은 사회과학 중에서도 연구영역이 넓고 연구방법이 독특하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사회과학대학에 속하기 보다는 법과대학으로 독립하여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서 가르치는 법학의 내용은 학문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과목과
체계로 학생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이 내용과 체계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거니와, 어쨌든 법학은
오늘날 흔들림없는 확고한 학문으로서의 위치와 진용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사회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응당 법에
호소해야 하고, 법적 해결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법학의 원리와 적용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법학을 배운다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바르게 사는
원리와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법학을 가리켜서 '정의의
학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활인으로서 바르게 살뿐만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만일 법률가가 된다면,
이제는 자기의 바른 삶만이 아니라 남에게 바른 삶의 원리를 가르쳐 줄 주 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때문에 법률가의 사명과 책임은 막중하며, 이를 위하여
심오한 법학지식과 그것을 기초하는 학문적, 사상적 교양이 필요한 것이다.
법률가는 누구보다도 냉철하게 법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감정의 안경을
코에 걸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라드브루흐가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이상적인
법률가상을 보면서 법학의 학문으로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의식해 보기로
하자.
이해와 자신에 충만하여 모든 인간적인 것을 통찰하는 눈을 가지고,원칙에
엄격하면서도 말없는 부드러움을 가지고 당사자의 다투는 심정을 초월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독자성을 추구해나가는 노판사를 우리는 어쩌면 한 번쯤 접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인물, 즉 어그러진 자아의식을 가진
가련한 자조가라든가 자기의 직업을 지탱할만큼 직업적 희열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온 사람들도 있다 세상의 직업 가운데는 항상 성공하지 못하는 직업도 있다.
법학은 그런 직업에는 분명히 속하지 않는다. 법학은 종종 실패하기 쉬운 직업일
뿐이다. 그러나 직업에 실패한다는 것은 커다란 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정신을 위축시키고 불구화하며 파괴시키기 때문이다.(주4)
우리는 법학에 대하여 너무 거창한 이상론적 기대를 걸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법학은 단순히 기술적인 저속한 학문이라고 환멸할 필요도 없다. 인간은 차안적
생을 영위하는 동안에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보다도 오히려 상대적인 것,
무상한 것에 강하게 지배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속에서나마 바른 것, 정의로운
것, 가치있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법을 향한 노력이고, 그것을 학문화한 것이
곧 법학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라드브루흐는 "직업생활이 어떠한 순간에도 자기의 직업이 필연적으로 깊은
문제라는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는 법률가는 훌륭한 법률가가 못된다"고
하였고, 예일대학 로델(Fred Rodell, 1907-1980) 교수는 "저주받으리라,
법률가여"(Woe Unto you, Lawyers!, 1957) 라는 책에서 고대의 마술사, 중세의
성직자, 현대의 법률가를 대중을 착취하는 계급으로 비판하였다. 그러나 법학자
에릭 볼프(Erik Wolf)의 표현처럼, 법률가는 "사랑스럽지는 않으나 없을 수는
없는 존재"인 것이다.(주5)
[법률가, 법조인, 법학자]
법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내지 계층을 법률가 혹은 법조인이라 부르는데,
엄밀하게 보면 각각 다른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서양에서는 법률가, 즉 lawyer나 jurist라 하면 법을 실무적으로 집행하는
사람이나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어쩐지 법률가라 하면 법실무가, 즉 판사, 검사, 변호사를
뜻하고, 연구자는 법학자란 말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법조인이라 하면 더욱 실무중심의 뉘앙스를 풍긴다. 또 한자말로 판사, 검사에는
일 사자를 쓰고, 변호사 혹은 율사(이 말은 시대착오적 말인데도 가끔
사용된다.)라 할 때는 선비사자를 쓰고 있다. 어쨌든 이런 법실무가와 법학자를
포괄하는 뜻으로 법률가라는 말을 더 일반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문제되고 있는 법실무가와 법학자의
법조이원화를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5.법학공부의 방법
젊은 법학도로 하여금 마음껏 법학과 친근하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위대한 법률가의 전기를 읽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직업윤리에 알맞는 인격을
형성하는 데 유효한 방법임에도 오늘날의 대학교육에서는 충분히 이용되고 있지
않다. 라드브루흐는 그의 '법학입문'(Einfuhrung in die
Rechtswissenschaft)에서 안젤름 폰 포이어바흐(Anselm von Feuerbach,
1775-1833)가 직업상의 번민에 빠진 자기 아들 루드비히(1804-1872)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 본의와 어긋나는데도 법학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에게 광명을 주는 교언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법학은 나의 소년시절부터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학문으로서의
법학에 나는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역사와 철학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대학생활의 제1기는 주로 이 두 학과에만 소비되었고 이 밖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아니했으며, 이것 없이는 살 수도 없다고 믿었다. 나는 당시
장차 철학교수가 되려고 이미 철학박사 학위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보아라!
거기서 너의 엄마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철학보다 빨리 지위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전공을 잡을 필요가 있게 되었다. 나는 재빨리 단호한 결심을 하여 나의
사랑하는 철학을 버리고 염증나는 법학으로 전향하였다. 그러나 법학을 공부하는
동안에 차차로 그것이 싫어지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끈기와 의무감에서 나오는
용기만 가지고 - 별로 재주도 없으면서 - 나는 점점 성공을 거두어 2년
후에는 교단에 서게 되었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빵을 위하여 선택한 법학에
저술로서 기여하고 드디어 독자적인 입장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입장에서 나는 급속한 명성과 외적인 행복을 차지하고 자신의 생애가 인류를
위하여 유용하였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리 높이 증명 받을 수
있었다.(주6)
이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어느 직업에 대한 흥미도 적성도 없는
사람이 그 직업에 들어가면 차차로 필요한 흥미와 적성이 생기는 법이며,
'직무는 이해력을 가져온다'는 말은 해묵은 진리이다. 일단 법학을 선택한
사람에게 직업의 실패는 없어야 할 것이다.
법학공부를 시작한 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법학의 효과적인 학습방법 내지
공부비결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알맞는 묘안은 없고, 학문에
왕도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선학의 학습방법은 하나의 타산지석으로서 학생
각자가 자기에게 적합한 학습방법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독일 괴팅겐대학 민법교수 디이데릭센(Uwe Diederichsen,
1933-)이 권장하는 법학공부 수칙을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민법총칙
입문'(Allgemeiner Teil des Burgerlichen Rechts fur die Anfanger)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12개의 수칙을 제시하고 있다.
제1칙: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하라!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아니하고 휴가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법학공부는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제2칙: 한꺼번에 너무 많이 공부하려고 하지 말라!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
규칙적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여야 하며 휴식도 취해야 한다. 규칙적인
학습태도를 길러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급해서는 안 되며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법률가에게 특히 중요한 이해력, 기억력, 그리고 논리적,
체계적 정리능력을 훈련을 통하여 길러야 한다.
제3칙: 학습계획(Arbeitsprogramm)을 세워서 이에 따라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학습자료(즉 교과서나 법전)를 중요도에 따라 쪼개어 우선 중요한
것부터 공부하고 중요도가 낮은 것은 나중에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모든
것을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산더미같은 학습자료에 절망을
느끼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제4칙: 법은 가치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법규의 의미(즉 법규의 목적)를
탐구하여야 한다. 조문을 읽을 때마다 법률이 이 조문(규정)을 통하여 어떠한
목적을 추구하고 있느냐(즉 법률의 목적), 어떤 가치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느냐를 탐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법적 논의를 할 때에는, 법률이 보호하려는
이익이 무엇이냐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법규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제5칙: 읽기와 듣기(강의 수강)만으로 공부가 끝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습성과를 점검해 보는 일이다. 자기가
교과서에서 읽은 것이나 강의에서 들은 것을 진실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항상 검증해 보아야 한다. 읽은 것과 들은 것을 머리 속에서 또는
말(문자 또는 구두)로 되새겨 보고 자기가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잇느냐를
되씹어 보아야 한다.
제6칙: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참고문헌을 참조하여 이해하려고 힘써야
한다. 교수, 조교, 선배 또는 저자에게 질문하여 의문을 풀어야 한다. 질문하기
싫어하는 버릇은 하루 속히 버리는 것이 좋다.
제7칙: 판례를 읽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판례를 읽을 때, 우리는 법원은 왜
그렇게 판결하였으며, 달리 판결하지는 아니하였는가? 원고와 피고 사이에
어떠한 이익의 충돌이 존재하는가? 등등의 문제, 즉 판결의 근거 내지는 이유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야 한다.
제8칙: 여러 개의 교과서들 가운데서 최량의 것으로 생각되는 것 하나를
선택하여 이것을 거듭 반복하여 읽을 것! 어려운 부분은 녹음테이프에 녹음하여
반복해 듣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 하면 이 부분이 기억
속에 박히게 되고 또한 대부분의 경우 이해도 될 것이다.
제9칙: 기본서 이외의 저서들에서 읽은 것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기본서의 해당부분의 페이지의 여백에 써넣거나, 또는 다른 종이에 베껴서
기본서의 해당부분에 붙여 놓는다. 이 경우 시간과 노력을 들여 기록하는 것보다
복사기를 이용하는 것도 효율적이다.
제10칙: 개념규정, 정의를 낱말 하나까지 정확하게 암기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Defintion)를 다시 여러 개의 구성요소들, 즉 개념요소들로
쪼개서 그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암기하여야 한다.
제11칙: 많은 학생들이 그들의 기억력 내지 암기력이 좋지 않다고 호소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기억능력(암기능력)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그들의 기억능력을 효과적 방법에 따라 사용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기억력이 나쁘다고 탓한다. 우리는
기억능력을 끊임없이 사용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면 기억력이 향상될
것이다. 쓰지 않으면 쇠처럼 녹슬게 마련이다. 우리가 배우는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암기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부분은 계속 반복하여 공부해야 한다.
급하게 새것을 자꾸 배우려고 해서는 안된다. 즉 읽은 부분이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아니하였는데도 자꾸 교과서를 앞으로 앞으로 읽어 나가려 해서는
안된다. 오늘 배운 것은 며칠 후 다시 반복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공부는 모래성 쌓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확고한 기본실력을 얻게 될 것이다.
제12칙: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동료 및 선배들과 공부그룹(Arbeitsgruppe)을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공동으로 토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법적 논의의
방법과 기술을 효과적으로 터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초기부터 큰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룹공부는 처음에는 학습에 별로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꾸준히 계속하면 성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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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문제]
1.법학은 어째서 학문인가?
2.키르히만(Kirchmann)의 법학부정론을 비판하라.
3.나는 왜 법학을 배우는가?
4.바람직한 법률가상을 논하라.
5.법학에서의 논리와 감정을 논하라.
6.법학과 인접학문의 관계를 논하라.
7.바람직한 법학공부의 방법을 설명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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