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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가족 법론

제17장 한국법의 사적 발전

by Frais Study 2020. 5. 10.

    @[(89) 제1절 상고시대의 법제@]
   I. 고조선시대
  (1) 단군과 신정
우리 역사상 최초로 나타난 국가가 서북행렬사회의 단국조선이라는 설이 있다 (주1). 이 단군조선은 단군신화로 시작되었다 (주2). 단군이 국도를 왕검성이라 칭하고 왕에 즉위하였다(기원 전 2333년 10월 3일). 이후 1500여년간 대대로 신정(제정일치)을 펴오다가 장당경(구월산)으로 옮겨 천제를 맡아 보면서 구월산 산신으로 화하였다고 한다.
단군의 정치는 처음부터 연방정치였다고 하는데, 다수의 소국가에는 소국왕이 있었고, 또 그 소국에는 각촌이 있었고, 촌장이 그 촌락을 자치관리 하였다고 한다. 단군은 평양을 중심으로 각 소국의 최고지도자, 즉 군왕으로서 통치하였다고 한다.
* 주 1: 진단학회, 이병도, 김재원, 한국사(고대편), 1967 을유문화사, 66--67면(삼국시대 이전의 고대사회의 분포행렬을 (i) 서북행렬의 제 사회: 서북해안지대에 위치한 조선, 진번계통, (ii) 후방행렬의 제 사회: 남방인 삼한사회로 삼대별하고, 우리 나라 최고발상지는 서북행렬이라고 한다.
* 주 2: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하늘에 있는 단인천제가 그의 아들 환웅이 청원함에 따라 천부인 3개를 주어 천하에 내려가 인간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환웅은 부하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정의 신단수아래에 내려와 그곳을 청정한 신역으로 삼고, 천신의 뜻을 받아 신령과 정사를 논의하고 신단을 만들어 제천의식을 올렸다고 한다. 이것이 곧 신시이며, 이 신시를 선포하고 왕이 되었다. 그리고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으며, 이 단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구병삭, 한국고대법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4, 2--3면). @p365
  (2) 팔조법금
고조선사회에서는 일찍부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관습법이며 고대 인류사회에 공통된 만민법(jus gentium)적 성질을 가진 팔조법금이 행하여졌다 (주3). 법금(범금)팔조의 모든 내용은 전하여지지 않고, 그 중 2--3조의 다음과 같은 내용만 한서지리지(연조)에 기재되어 있다.
제1조는 ‘상살, 당이시상살’으로 인명치사에 관한 조항으로서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제2조는 ‘상상, 이곡상’ 으로 상해죄에 관한 조항으로서, 타인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서 배상한다는 뜻이며, 오늘날의 제도로는 일종의 위적료(배상)이다.
제3조는 ‘상도, 남몰입위기가노, 여자위비, 욕자속자인오십만’으로 윤도죄에 관한 조항으로서, 타인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원칙적으로 소유자 집에 잡혀 들어가 남자는 가노가 되고, 여자는 비가 되지만, 자속(배상)하려는 자는 매인당 오십만전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에서의 ‘욕자속자오십만’은 일종의 단서로서 팔조 본래의 법이라기 보다 중국법의 영향을 받은 조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주4). 그러나 단서가 본래부터 있었다면 그것은 속전이 아니라 물건(공물)으로 배상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제3조에 계속하여 ‘수면위민, 속유차지, 가취무소수(필)’ 이라는 일절이 있다. 이것은 법금의 조항이 아니라 제3조에 관련된 그 시대의 국속을 말한 것이다. 즉, 유도죄인이 비록 배상(자속)하여 자유민(양인)이 된다 하여도 국속은 이를 수치로 여겨 혼인의 상대(배필)로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 주 3: 이병수, 김재원, 전갈서, 144--145면.
* 주 4: 이 시대(한대) 중국에서는 실제로 사죄인에게 속전 오십만을 징수하고 사일등을 감하여 준 법례가 있었다고 하나, 고조선시대에 화폐제도가 이미 행하여졌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단서는 한군현 초에 중국법례에 기하여 개정된 것이라고 보며, 윤도죄에 대하여 살인죄에 상응한 속전법을 적용한 것은 신식민지에 있어서의 한인 자신들의 재산보호책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상갈서, 146면). @p366
또 한서지리지에는 계속하여 ‘이이, 기민종불상도, 무문호지폐, 부인정힌, 부음피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것은 법금이 엄하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도둑질 하지 않고,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여자들은 정조가 있어 음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조선의 엄벌주의가 존법정신을 낳게 하였으나, 그 중 밤에 문을 닫지 않았다는 것은 최근까지 우리 농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므로, 고대사회에서는 시골이나 도시를 막론하고 널리 이러한 습속이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부녀가 음란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래 정조관념이 있었다기 보다는 간음을 금하는 법속이 엄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그렇다면 팔조 중에는 이러한 금간의 1조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주5).
이상은 문헌에 불완전하게 전해진 고조선 팔조법금의 내용, 즉 살인(생명), 상해(신체), 윤도(재산), 금간(정조)등에 관한 금약법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사회에 공통된 법규범이기도 하다. 특히 팔조법금 중에는 상해죄를 곡물로 배상하도록 되어 있어 Hammurabi법전과 비교하면 훨씬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III. 부여시대
부여는 우리 상고시대 민족으로서 가장 먼저 완전한 나라로서 건설되었다. 부여의 정치제도는 귀족정치로서 왕과 그 밑에 가축의 명시를 붙인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주6)와 대사, 대사자, 사자등의 관직이 있다.
사회생활을 규율하는 법제도는 응보주의에 입각하여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이 때에 이미 노비제도가 완전히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도범에 대하여는 ‘일책십이’의 법, 즉 도물 1에 대하여 12배의 배상을 하게 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사유재산제도가 비교적 엄격하게 시행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부녀의 간음과 투기에 대하여는 사형에 처하여 산에 기시하였다. 이것으로 일부다처제 혹은 축첩제도가 일반적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주 5: 상갈서, 147면(부여에서는 간음녀를 사형에 처하고, 백제에서는 비로 삼았다).
* 주 6: 여기서 가는 귀인, 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씨족장, 부족장을 말한다(상갈서, 212면--215면 참조). @p367
또 풍속에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처로 삼았다. 이러한 풍속은 부여뿐만 아니라 북방계제민족사회에 공통된 관습이었으며, 흉노에서도 그러하였고, 일본에서도 행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은 재산상속과도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주7).
   III. 삼한시대 (주8)
  (1) 종교규범
삼한사회의 종교적 규범으로 제사법이 있다. 즉, 각 국읍에 제사에 제사장 1인씩을 두어 전군이라 하고, 제사지역을 소도라 하였다. 소도의 대목은 처음에는 수목숭배에서 출발하였고, 후에는 신의 강하계급 및 주처로 삼아 신역의 표시로 하였다. 그리고 대목에 달린 방울과 북은 제사시에 신을 맞이하여 즐겁게 하는 신악이다. 이 성지에는 죄인이 피신해와도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잡아가지 못하였다. 일종의 도돈읍이다 ((21) V 참조). 그러나 제사와 정치는 분리된 체제였다. 그것은 정치단체의 장(군장)의 칭호와 제사단체의 장(제주)은 서로 다르고 또 맡은 지역도 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또한 농경경제를 최대 근원으로 하는 낙종(5월)제와 추수(10월)제가 성행하였는데, 이 때에는 촌락민이 공동으로 신에게 제사지내고 가무와 음주로 즐겼다. 이러한 관습법은 오늘날에도 5월의 단오와 10월의 시제 등이 유속으로 전하여오고 있다.
  (2) 노비법제
마한의 하호 의책법은 “기속, 호의책, 하호, 지군조갈, 고가의책, 자복인수의책천유여인”이라 기록되어 있다. 즉, 하호(하층군을 지칭함)는 낙랑군이나 대방군에 들어갈 때에는 의책을 빌려 입었는데, 그 중 천유여인은 자기의 의복, 인수, 의책을 착용했다고 한다.
* 주 7: 상갈서, 218--219면
* 주 8: 진한, 마한, 변한은 본래 낙랑한인이 불렀던 이름이며, 북방 유이민과 토착민이 합한 하나의 대집단체인데 진왕을 중심으로 한 통치행정단위로서 삼한으로 구분된 것 같다(김삼수, 한국사회경제사, ‘한국문화사대계,’ 정치, 경제사 1965, 고대민족문화연구소, 622면). @p368
 이것은 사유재산이 있는 계층으로 보인다. 또한 처음에는 일상노동의 편의상 머리털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두건을 쓴 것이 점차 비천자의 상징으로 제복화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마한시대에는 비천자인 노비군이 사회의 한 신분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한의 하호가 자기 종족내의 노비계급의 존재를 의미하는 데 진한의 경우는 이민족의 노비도 존재하였다.
  (3) 결언
삼한시대에 어떠한 관조직이 있었으며 어떠한 법제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으며,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사이가 노예적 사회를 거쳐 신국가형성의 명아형태로 노비도 존재하였다.

    @[(90) 제2절 삼국시대의 법제@]
   I. 고구려
  (1) 토지제도
 (가) 상층권자의 토지소유
고구려의 토지는 국유제 및 공유제를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재산제도가 발달하고, 그 발달에 따라 국공유제 토지의 일부가 점차 사유지로 귀속되어 각 신분계급에 따라 토지가 좌우되었다. 왕실의 직할지가 있었으며, 전쟁에서 논공이 있는 자, 기타 공노자에게 국가의 일정한 토지를 증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전쟁에 논공이 많은 사람에게 행상으로서 일정한 지역을 식읍으로 주어졌다.
 (나) 일반인의 토지소유
일반인의 토지소유는 옹, 귀족, 호족들의 토지소유보다는 미약하나 소규모의 경작지였다. @p369 즉, ‘역전자급’이라 하여 개인의 경작지로서 개인소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의 농토라 할지라도 상층권자들의 간접적인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언제 수획이나 강점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있었다.
  (2) 형사제도
 (가) 사법기관
대무신왕 11년(A. D 28)에 “10악중률에 저촉되는 자는 마땅히 처벌하고 여타죄자로서 중장에 해당하는 자는 일체 미속석방하라”는 뜻의 명과, 소희림왕 2년(A. D. 372)에 ‘왕은 염서에 죄인 누번의 고통을 진념한 나머지 상결을 속히 하여 연체함이 없게 하라“는 령 등은 미숙하나마 그 당시 사법기관의 사법절차를 의미하고 있다. 사법기관으로는 부족장의회인 제가평의제 (주9)가 있다. 이 제가평의제는 재판의 임무를 겸한 국가최고의 재판기관이다. 그러나 사소한 형사사건은 대개 지방의 족장들이 임으로 관습법에 의하여 처리하였다.
 (나) 반역죄에 대한 형벌
반역자에 대한 형벌은 극형주의를 채댁하였다. 즉, 구당서에 의하면 “모반죄를 범한 자에게는 군중으로 하여금 거화를 갖게하여 소작을 경쟁기키고 전부 초란된 후에는 다시 그 시체를 참수하는 동시에 그 집을 몰수한다”라고 하였고, “성을 지키지 못하고 적에 항복한 자와 적진에서 패망한 자 및 살인한 자는 모두 참수형에 처한다”라고 하였다. 또 수서에도 “반역행위를 한 자는 목주에 결박하고 엽각하여 참지하는 동시에 가산을 몰수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른바 가중형, 즉 연좌제와 같은 것으로서 형사책임을 그 가족에게까지 묻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반역자에 대한 극형주의는 왕권의 유지와 국내질서의 확립을 위해서 당시 사회진화상으로 당연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 살인죄 및 절도죄에 대한 형벌
살인죄를 범한 자에게는 구당서에 ‘살인행각자참’과 당서에 ‘살인표가자참’를 볼 때, 살인자에게는 다 같이 참형을 규정하고 있다. 이런 것은 당시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살인범에 대한 최고형이 사형이란 점을 감안할 때(형법 250조 참조)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 주 9: 제가평의회는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최고기관으로 국내의 질서유지 내지 공권력 강화기관으로도 존재한 것 같다. 제가의 ‘가’는 ‘간’과 같이 존장을 의미한다. @p370
절도죄에 관하여는 수서, 북서, 당서 등에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사람의 물건을 절취한 자는 그 절취품의 10배를 배상하거나 능력이 없으면 엄한 형벌을 받거나 혹은 노비가 된다. 그리고 공채나 사해도 상환하지 못한 채무자는 자신의 자녀를 그 대상으로 바쳐 노비로 삼았다 (주10). 이것은 민사, 형사혼합형태의 법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실제 고구려 사회에 어느 정도 시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배상제도는 소유권의 보호를, 그리고 질서유지를 위하여 집권자들의 강한 공권력 발휘에 그 기본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형법원은 부여의 ‘일책십이법’에 그 연유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라) 특사제도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같이 왕의 특사제도가 있다. 또한 고구려는 군주국가의 체제가 확립되고 유지, 발전됨에 따라 사력구제가 공권력구제로 발전되어가는 현상이 백제나 신라와 같다.
   II. 백제
  (1) 토지제도
 (가) 국유제
백제의 토지제도는 고구려나 신라와 마찬가지로 국유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농민이 영원히 자기의 농토를 소유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국가에서 각종 수획과 전쟁에의 동원, 특권층의 강분등으로 언제 자기의 농토를 빼앗기게 될지 모르는 실정에 있었으므로 사실상 국가소유의 농토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주 11). 뿐만 아니라 왕실은 항상 국가의 최대의 지주로서 광대한 농토를 직할지로 설정하고 곡부로 하여금 국고수지를 담당케 하였으며, 또 이외에도 왕릉, 행궁, 이궁, 제단사원전 등 광할한 토지가 국유였다.
 (나) 일반인의 토지소유
일반인의 토지소유는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고 상층권자들의 지배세력 강화에 따른 세수원으로 개인의 토지소유가 많았을 것임을 예상케 한다 (주12). 이 예상이 옳다면 오히려 사유지가 국유지보다 다 많았을지도 모른다.
* 주 10: 공채는 국가가 비황정책으로 진대에 의한 환곡을 의미하여, 사채는 일반인 중에서 빈곤한 자기 상층민으로부터 얻어 쓴 채무를 의미한다. 따라서 공채에 의한 자는 공노비, 사채에 의한 자는 사노비가 된다.
* 주 11: 강보철, 한국토지제도사 상, ‘한국문화대계’ II, 1965, 고대민족문화연구소, 1190--1191면 참조. @p371
  (2) 형사제도
 (가) 사법기관
고이왕 27년(A. D. 260)의 ‘직조연좌평 상형옥사’를 볼 때 이것이 1700여년 전에 처음 생긴 우리 나라의 사법기관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13). 그러나 당시 백제 사회전체의 사법기관으로서 과연 이 조정좌평이 완전히 사력구제를 공권력구제화했다고 하기에는 의문이 간다. 당시의 귀족들의 세력다툼과 인접국가와의 전쟁 등 분주한 상황에서 존법이 어느정도이루어졌으며, 법의 기능이 올바르게 발휘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다루왕 2년(A. D. 28)에 지방관의 람형을 방지하고자, 사형인의 경우는 경옥에서 복심하고 왕의 재가를 얻어야 집행케 한 복심제도가 있었다.
 (나) 수뢰죄와 절도죄
고이왕 29년(A. D. 262)의 자령에 관리가 수뢰죄와 절도죄를 범하였을 때에는 그 관리로부터 각각 원물의 3배를 추징하고 종신금고형에 처하였다. 또 주서인 북서에 의하면 절도죄를 유형에 처하고 원물의 배를 추징하였다.
 (다) 반역죄와 살인죄
시, 수당서에 의하면 ‘살인자, 이노비삼, 속죄’라 하여, 살인자는 그 벌칙으로 노비 3명을 내놓으면 속죄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서에는 ‘살인자참’이라 하여, 이러한 벌칙은 일률적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라 왕에 따라 또는 살인범의 정상에 따라 사형 또는 벌금형에 처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반역퇴군자는 모두 극형인 사형에 처하였다.
 (라) 간통죄
주서와 북서에 ‘부인범간자, 입부가, 위비’라 되어 있는데, 이것은 남자와 간통한 부인은 그 부가의 비로서 끌어가는 것으로, 이러한 형벌은 일존의 재산형으로서, 계급사회의 특징인 노비공급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부여에서는 간통자는 남녀를 모두 사형에 처하여 쌍벌죄였으나 백제의 간통죄의 규정은 부인만 처벌하는 편벌규정이다.
* 주 12: 구승삭, 전갈서, 117면
* 주 13: 상갈서, 122면 @p372
 (마) 특사제도
삼국유기에 ‘다수왕 28년(A. D. 55), 춘하한, 노인사사죄’라하여, 왕은 한재가 들면 죄수를 모두 특사하였다. 이것은 종래 부여에서와 같이 전통적으로 한재의 책임을 왕이 진다는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III. 신라
  (1) 토지제도
 (가) 국유제
신라의 토지제도는 그 성격이 고구려나 백재와 근본적으로 같으며, 이른바 ‘왕토사상’에 입각한 토지 국유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국가의 논공자에게 주는  양전제가 있었으며 (주14), 고구려나 백제와 같이 전쟁에서 특별히 공훈이 많은 자에게 일정한 호수에서 조세, 부역을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 식읍제도가 있었다 (주15). 이와 같이 통일 전후를 통하여 특별한 국가적 유공자에게 준 *&전과 식읍은 왕권지배의 한 수단으로 행사되었다.
또한 불교가 국가의 보호아래 전도사업을 하고 많은 사원의건립과 재산을 투자하여 신라의 사원은 대토지소유자가 되었고 대개가 고리대금업자들로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사원들은 대토지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큰 재벌로서 국가 다음 가는 물적, 인적 예속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나) 일반인의 토지소유
넓은 국토 전역은 상층권자 외에도 많은 일반인이 소유하여 경작하였으며, 과거로부터 내려온 촌락공유 기타 제전 등 여러 가지 종류의 토지가 있었다. 그리고 통일신라 성덕왕 21년에 국가가 농민에게 반급한 ‘정전’과 일본정창원에서 발견된 신라장적(촌락문서, 민정문서)에 나타나는 ‘연수유전답’은 신라의 특수한 구체적 균전제하에 토지소유자인 국가가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장년에 이르는 농민에게 경작권을 분여한 토지가 있다.
* 주 14: 예컨대 영천의 왕 아음부가 그 부하를 거느리고 항복해 오므로 왕은 그에게 전택을 주고 편히 살게 하였으며, 또한 전쟁에서 큰 논공을 세운 자에게 전답과 노비를 주었다.
* 주 15: 예컨대 통일전쟁에서 가장 공로가 큰 김경신에게 문무왕은 식읍 5백호를 주었고 또 신문왕은 장보고에게 왕 옹위에 공로가 크다고 하여 식읍 2천호를 주었다. @p373
이것은 농민보호지, 즉 민전인 것이다 (주 16). 그러나 신라의 토지제도는 일종의 전통적 관습으로서 강자의 것이며, 약자에게는 혜택이 적었다.
  (2) 형사제도
 (가) 사법기관
입법과 사법기관의 시초는 진덕여왕 5년(A. D. 651)에 좌리방부가 설치되었고, 문무왕 7년 (A. D. 667)에 우리방부가 설치되었다. 좌리방부에서는 일반율령을 입법 관장하고, 우리방부에서는 형률에 관한 입법과 장리를 한 것 같다. 효소원년(A. D. 692)에는 좌우이방부로 고쳤다. 그러나 이 기관은 극히 사무적인 것을 취급하고 실제 중대한 범죄사건이나 중요입법 및 국가적 중대사에 대하여는 남당이나 화백같은 데서 결정하거나 혹은 왕이 직접 최종적으로 판정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앙의 기관으로서 중요한 감찰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사정부(숙정대)가 있다. 사정부는 귀족, 관인들이 저지른 부정행위를 규탄하고 기강확립과 풍속을 바로잡는 관서이다. 집장은 지방제도의 확립에 따라 구주, 오소경을 중심으로 하여 사법이 확립된 것 같다. 물론 이 때에는 중앙집권 아래 각 지방은 군주와 사신등이 실질적으로 그 지방의 통치자로서 군사는 물론 사법과 조적까지 일체의 권한을 가졌다 (주17).
 (나) 반역죄
신라의 형벌 중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반역죄이다. 즉, 반역을 하면 친족연대책임으로 구족을 공개처형하였다. 이것은 재래의 형벌사상에서 나온 예방과 위혁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 공무유기와 항명죄
공무를 유기하거나 항명죄에 해당하면 그 일족을 멸하였다.
 (라) 부고지죄
오늘날의 부고지죄에 해당하는 범죄자에게는 그 당사자와 적자 1인에 한해서만 자진하게 하고 이를 원근에 포고하였다.
 (마) 전투에서 퇴각자
전투에서 퇴각하는 자에게는 고구려나 백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형에 처하였다.
* 주 16: 김옥근, 한국토지제도사연구, 대왕사, 1980, 59면
* 주 17: 이병도, 김재원, 전갈서, 635면 참조. @p374
 (바) 살인, 절도죄 등
사람을 살해하면 사형에 처하였고, 절도범에 대하여는 도적인을 놓아두되, 그만한 재물을 변상할 수 없고, 사는 곳의 땅이 좋지 못하여 수획할 수 없으면 원금과 이자를 면제해 주고, 땅이 좋은 곳에 사는 사람이면 금년 수획에서 원금만 갚게 하였다. 이것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 9년(A. D. 669)에 민심온화의 한 정책으로 보여진다.
시정을 비방한 자에게는 해당 비방의 영향과 대소에 따라 형량이 결정되었다. 또한 골무를 배반하고 사리를 취한 자에게는 일백장의 처형과 섬으로 귀양을 보냈고 공서양속을 위반한 자에게도 처형을 하고 귀양을 보냈다. 이와 같이 살인, 절도 등에 대해서는 모두 처형을 하고 또는 노비화하였으며, 간통죄 역시 처형 또는 노비화하였다.
 (바) 특사제도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신라에서도 종종 특사령이 내려졌다. 대개 왕이 즉위한 후이거나 축하의 뜻에서, 또는 인심을 얻기 위해서, 또는 한재가 심할 때 기원의 뜻에서 내려졌다.

    @[(91) 제3절 고려@]
   I. 고려의 확립과 법제의 정리
신라 말기의 혼란한 사회는 호족의 승리자인 왕건의 정권 획득으로 아시아적 봉건제의 한 유형으로서의 토지국유제를 기초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하의 봉건국가가 확립되게 되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제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신라시대에 흡수한 당의 제도는 다시 재정비를 거쳐 고려의 법제에 있어 주목할만한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신라로부터 이어받은 당률의용의 법제는 봉건국가로서 고도의 사회경제적 기초가 확립됨에 따라 봉건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무기로서 그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었고, @p375 당률의 철저한 계수와 그에의 사회적 동화가 현저히 진행된 것이다. 그 결과 고려률 71조가 성전되었고, 법제도 제도적 체제를 완비하게 된 것이다.
   II. 고려율
  (1) 고려율의 편찬
고려의 중요한 법으로서는 고려사 형법지가 있다. 이 고려사 형법지에 기재된 고려율은 편찬년대나 편찬자는 불분명하나 제4대 광종과 제6대 성종대 사이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율은 당율을 모법으로 하여 당시의 실정에 알맞도록 편찬되었다. 여기에 약간의 송율이 도입되었고 또 전래의 고유법도 참작하였다. 이 고려율은 일상의 지침이 될 기본적인 규정을 국가적 법전으로 편찬, 시행된 조문형식을 갖춘 우리 나라 초유의 법전(형율)이라 하겠다 (주18).
  (2) 고려율의 내용
고려율은 성문법과 불문법으로 나눌 수 있으며, 성문법은 71조로 된 고려율과 역대 제왕의 교지와 명사의 격, 식, 방장 등을 말하며, 불문법은 관습을 말한다. 그런데 고려는 전제왕정의 신분사회로서 귀족계급, 양민계급, 천민계급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신분에 따라 같은 입법내용도 그 적용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주19).
고려율은 원나라의 침략으로 고종부터 공민왕 초기까지 폐지되고 원율인 지정조격을 의용 시행하였다. 그 후 공민왕의 자각과 대륙의 국제정세 속에서 구법인 고려율의 부활 등이 논의되는 동안 고려는 내부적으로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에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정몽주는 명율과 원율을 취사선택한 신정율을 초안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시행하지 못하고 이성계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었다.
* 주 18: 정봉휘, 신법학통론, 창문각, 1985, 234면.
* 주 19: 최이권, 연정열, 법학원론, 법경출판사, 1986, 29면 @p376
고려율은 우리 나라 최초의 조문형식을 갖춘 법전인데 그 전문이 전해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총 71조의 고려율은 옥관령(2조), 명례(12조), 위금(4조), 직제(14조), 호혼(4조), 기고(3조), 단흥(3조), 도적(6조), 투공(7조), 작위(2조), 잡율(2조), 포망(8조), 단옥(4조)등으로 되어 있다 (주20).
 (가) 명례율
명례율은 오늘날의 형법총칙과 같은 것으로, 명은 오형의 형명이고, 례는 오형을 적용하는 법례을 말한다. 오형은 사형, 장형, 도형, 유형, 태형의 다섯 가지 형을 말한다. (i) 사형은 오형 중 으뜸가는 형벌로서 국가반역범이나 인륜을 해치는 극악무도한 범인에게 과하는 형벌이다. (ii) 태형은 형구를 사용하여 신체에 가하는 형벌로서 최고 백태까지 처한다. (iii) 도형은 노역을 복역케 하는 형이다. (iv) 유형은 인적이 없는 도피지에 옮겨 자유롭게 지내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유배형이다.
(v) 태형은 오형 중 가장 가벼운 형벌로서 장형과 재산형의 복합형이다.한편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실형 대신에 속을 납부하게 하는 등 양자택일케 하는 제도도 있었다.
 (나) 위금율
위금율은 궁성의 경위에 관한 사항과 관새의 경비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다) 직제율
직제율은 궁사의 직무상의 사항과 그 비위에 관한 벌칙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라) 호혼율
호율은 호적, 탈세, 경작에 관한 사항을, 혼율은 혼인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마) 기고율
기고율은 마우의 미발, 단속에 관한 사항을, 고율은 병갑재금을 수장하는 창고의 단속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바) 단흥율
단율은 마음대로 병을 일으키고 공을 일으키는 자를 처벌하는 규정이고, 흥율은 군을 일으키고 공을 일으키는 것에 관한 사항을 단속하는 규정이다.
 (사) 적도율
적율은 국헌을 문란케 하거나 또는 투쟁, 절도 이외의 목적을 가지고 타인을 살해하는 것을 처벌하는 규정이고, 도율은 재물의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사항을 처벌하는 규정이다.
* 주 20: 송두용, 한국법제사고, 진명문화사, 1985, 72--200면 참조. @p377
 (아) 투공율
투공율은 투구와 고소에 관한 율을 총칭하는 것을 말한다. 투구란 목율의 투구수족타물상의 조에 ‘상쟁위투, 상격위구’라고 하였으며, 투쟁의 결과 상격하기에 이르른 것이며, 복수가 아닌 행위를 말한다. 한편 고소란 소송상의 절차에 관한 사항을 말한다.
 (자) 작위율
작위율은 관사의 문서, 관사인의 위조, 변조, 도용, 작위취재, 관명모칭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차) 잡율
잡율은 위령, 부응위, 기타 제반 사항에 관한 경미한 범죄를 규정한 것이다.
 (카) 보망율
보망율은 범인의 강보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타) 단옥율
단옥율은 재판, 형사피고인의 인금, 형의 집행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III. 토지제도(민전)
민전은 봉건사회에서 농민이 점유, 경작하는 보유지를 지칭하는 것이며, 민전의 소유권자는 봉건국가이다. 봉건적 구성체의 기초는 봉건적 토지소유에 있으며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에 의거하는 봉건제의 기본특징은 토지의 독점적 소유자인 영주 또는 아시아적 봉건국가가 자립적 소경영자인 토지보유농민을 농노적으로 예속 지배하고 그들의 잉여부분을 지대로서 취득하는 데 있다. 따라서 토지의 사적 또는 공동체적 점유나 이용은 농민에게 있었으나 사적 토지소유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21). 이와 같이 민전은 국가에게 농민에게 분여한 경작지로서 국가에 대하여 봉건 제지대(전조, 공적, 역역 등)를 부담하는 농민 보유지이다. 농민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봉건국가에 예속되어 봉건 제지대를 부감하는 농노적 존재였다.
이러한 민전제도는 인종기(1123--1146)에 이르기까지 약 2세기 동안 유지되어왔다. 즉, 고려 초기의 국가의 권력과 지배질서가 유지되는 동안에 공전제도 유지되어 왔으나, 중기 이후 국가의 지배질서가 문란해짐에 따라 공전(국유지)은 점차로 봉건귀족들의 사유지로 전환되어 농장화되어 갔고, 국가의 전호로서 공전 이민전을 경작하던 다수의 공민도 농장에 흡수되어 귀족 세도가의 사전호, 즉 사민으로 전환되어 갔다.
* 주 21: 농민 보유지로서의 민전의 용어가 사료에 처음으로 발견되는 시기는 고려 초기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삼국시대에 존재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90) III (1) (나) 참조). @p378
이와 같이 대토지승병이 공전의 점탈현상은 효종 24년(1170)으로부터 고종 45년(1258)에 이르는 무신집권기에 주로 일어났다. 이 기간에 집권자는 새로운 공전을 점탈할 뿐만 아니라, 정권이 교체될 때만다 이미 점탈된 새로운 공전을 패배자로부터 탈취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공전침분이 확대, 재생산되어갔다. 고종 45년으로부터 려말의 공민왕조(1374)에 이르기까지의 몽고지배시대 및 행우기에 있어서는 왕실과 그 주의의 내료배, 공신, 관인 등 왕실과 부원배를 중심으로 하는 광범한 권력층이 토지승병자로 등장하여 공전침분의 주체를 이루었다.
공전과 사전을 탈취하여 대토지 사유자로 등장하는 봉건지배층(국왕, 왕, 공신, 궁인, 승여(사원), 향사, 토호 등)은 토지의 사적 지배에만 그치지 않고 양민과 노비를 탈취하여 사민으로 지배하였다. 양민의 점탈은 국가의 공호를 감소시켜 지대(조세)수입의 감축을 초래하여 재정위기를 가져온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IV. 혼인 및 상속제도
  (1) 혼인
고려의 혼인형태 가운데 근친혼은 왕족이나 귀족에게 많았다. 즉, 고려초기 이래로 종자매는 물론 질녀와의 혼인이 이루어졌고, 중기 이후도 동성혼만은 금지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율에는 동성간의 금지규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단계적으로 동성혼을 금지시킨 것 같다.
고려가 동성근친혼을 금지하기 시작한 것은 문종 12년(1058)에 사촌간의 혼인에서 출생한 자에 대한 금고령(관리의 등용을 금하는 것)이 있었고, 선종 2년(1085) 4월에는 동부이모자매와의 혼인에서 출행한 자에 대한 금고령이 있었으며, 숙종 원년(1096) 2월에는 6촌간의 소생자에 대한 금고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금지령은 직접적인 금지가 아니라 혼인 그 자체는 유호하되 출생자의 관리 등용을 급하는 간접적인 금지에 지나지 않았다. @p379 고려말인 충선왕 즉위년(1309) 11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문무양반의 동성동본금혼령이 내려졌다. 이 금혼령은 유교철학인 성리학의 도입과 교육이라는 새로운 시대적인 기운과 상응한 것이다.
  (2) 상속
고려의 상속제도의 특징은 비록 최하위지만 자녀에게도 상속권을 부여한 점이다. 자녀(여손)가 상속인으로 되는 것은 적서의 남자, 남손이 없는 경우이다. 이 경우 상속순위는 (i) 적처장자, (ii) 적출장손, (iii) 적처장자동모제, (iv) 서손, (v) 여손의 순서였다. 토지에 대한 상속은 적장자손의 단독상속이 이루어지고, 노비 기타의 재산에 대하여는 자녀까지도 포함한 균등상속이 이루어졌다 (주22). 이 경우 여자는 출가여부를 불문하고 아들과 함께 상속이 이루어졌다.

    @[(92) 제4절 조선@]
   I.  조선의 전제적 봉건제와 법제의 정비
1392년 이태조의 즉위로 건국된 조선은 고려봉건사회를 계승받아 이를 한층 전제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발전시켰으며, 전조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가로 하였다. 유교는 그 자체가 배불사상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보수주의적이고 정통주의적인 귀족적 윤리는 엄격한 동양적인 전제적 봉건주의를 유지하는 데 절대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당시 중앙집권적, 관료적, 봉건국가의 중심인 왕실을 비롯하여 그 밑에 양반, 중인, 상인(농공상), 천민(백정, 창기 등), 노예 등의 계급사회를 형성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유교의 역할과 함께 봉건사회유지와 국가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필연적으로 강력한 권력체제와 법제와 정비가 요구되었고, 여기에 우리 나라 법제사상 획기적인 법전편찬이 이루어진 것이다.
* 주 22: 송두용, 전갈서, 104--107면 참조. @p380
태조는 1397년(태조6년) 검양조례사에 명하여 시정의 방침을 정할 법규인 경국대전을 제정하였으며, 명율인 대명율을 조준 등을 시켜 사독문으로 옮겨놓은 것이 대명율직해이다. 이 대명율직해는 후일 경국대전이제정된 때 승록 등의 법전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앞서 1394년(태조3년)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건국의 이상과 조직의 대강을 집약한 조선경국전을 엮어 내놓았다. 그 후 호전을 시초로 하여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영조 때는 경국대전을 보완하여 속대전을 제정, 공포하였으며, 정조 때는 이 속대전을 보완하여 대전통편을 제정하였다. 조선말기에는 대전회통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법전을은 모두 전왕조인 고려조와 같이 국가안위와 사회질서유지를 그 입법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전제왕정사회인 조선도 고려와 같이 귀족계급, 양민계급, 천민계급으로 나뉘어져 계급에 따라 동일법규도 그 적용효과가 다르게 나타났다 (주23).
   II. 경국대전
  (1) 경국대전의 편찬
조선의 중요한 법으로서는 경국대전을 들 수 있다. 경국대전은 조선의 각 분야에 걸친 법제를 담은 조선의 대표적, 근본적인 법전이다. 이것은 고려말 무진년 위화회군을 계기로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무진년을 기점으로 성종 15년에이르기까지 약 1백년간 왕명의 교지, 조례 중 영세존수할 것을 모아 엮은 흠정(황제가 친히 제정함)의 법전이다. 그 편찬은 이조 7대 세조의 어명으로 시작하여 숙종원년에 완성한 것으로 형식상 법의 효력을 가진 최초의 통일법전이 성립한 것이다 (주24).
* 주 23: 정봉휘, 전갈서, 235면: 최이권, 연정열, 전갈서, 30면.
* 주 24: 박승호, 한국법제사고(근세의 법과 사회), 법문사, 1974, 411면. @P381
  (2) 경국대전의 내용
경국대전은 율령체계의 관점에서 볼 때 령에 속하는 법전이고, 그 내용이 행정법규를 중심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율에 해당하는 처벌규정을 다수 포함하고 있으며 형사, 민사의 소송절차규정, 형사, 민사의 실체법적 규정, 친족, 상속의 신분법적 규정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경국대전은 사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 등 육전체계로 되어 있고 각 전마다 필요한 항복으로 분류하여 규정하였다. 또한 조문도 추상화, 일반화 되어 있어 건국후 100여년에 걸친 연마의 결정답게 명실상부한 훌륭한 법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주25).
 (가) 이전: 이전은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면, 서임의 제한 등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관제는 문과, 무과와 하급기술관을 위한 잡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전에는 문과를 주로 규정하였고, 무과에 관한 규정은 병전에, 잡과는 예전에 수록되어 있다.
 (나) 호전: 호전은 호적제도, 토지제도, 조세제도, 봉급, 통화, 부채, 상업과 잡업, 창고와 환곡, 조운, 어장과 염장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특히 토지, 가옥, 노비, 우마의 매매계약의 취소기한과 토지, 가옥, 노비를 매매한 경우 오늘날의 등기 내지 증명 해당하는 입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변제에 관한 것 등의 민사적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다) 예전: 예전은 문과와 잡과의 시험, 조신의 의장, 외교, 제례, 상장과 묘지, 관인과 각종 공문서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상복제도(친족의 범위), 봉사(제사상속), 입후(양자제도), 혼인 등 친족법규범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라) 병전: 병전은 군관제와 훈련, 취재(무과시험), 우역성보, 봉등 등 군사에 관한 사항을 수록한 것을 말한다. 정년에 달한 남자는 누구든지 부담하는 국민개병의 제도가 있었으며, 군역에 복역하지 않는 자는 군역세로 미포를 납부하였다.
* 주 25: 전봉덕, 한국근대법사상사, 박영사, 1981, 18--29면 참조. @p382
 (마) 형전: 형전은 대명율에 대한 특별형법으로서 형벌, 재판, 공사노비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특히 재판에 관한 규정과 사노비에 관한 규정 중에는 재산상속규범이 포함되어 있는 데, 이것이 형전에 포함되어 있는 이유는 당시 재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노비에 관한 분쟁이 상속분쟁이며, 그것이 재결을 통해 판례법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법기관은 법사라 일컬었고, 중앙에 사헌부, 의금부, 형조, 한성부, 당예원 등이 있고, 지방에는 각 도 관찰사와 각급 부, 목, 군, 현의 장인 수령이 관할 구역 안의 재판사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형벌에는 특정한 범죄에 관하여 그의 일족에게까지 미치는 연좌제와 관원의 범죄에 있어 동직 관료로서 연대책임을 지거나 임명추천자로서 연대책임을 지는 연좌의 제도도 있었다. 재판상의 원칙으로 지방에서는 모든 사건을 추분에 개시하고 춘분에 정지하여 농번기를 피하였다. 서울에서는 연중 재판이 계속되었지만 당사자가 지방에 있는 자는 귀농의 편의를 보아주었다.
 (바) 공전: 공전은 도로, 교량 등 교통, 도량형, 식산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3) 경국대전의 사적 의의
법치주의 (주26)를 표방한 태조는 창업군주다웠고, 이를 계승하여 법전편찬에 전심전력한 제왕도 또한 정치의 요제를 체득한 명군들이었다. 왕에 의한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는 법치주의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으며, 그 정치를 실현하는 최대의 도구, 즉 국가의 정책을 구현하는 수단이 법인 것이며, 따라서 통일적, 획일적인 법전편찬은 통치의 필연적 요청이다. 경국대전의 편찬은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 즉 통치규범체계가 확립되었다는 데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
경국대전이 담고 있는 조문은 모두가 그 당시로서는 신진적인 것이며, 특히 민사적 규정들은 우리의 고유한 관습법, 판례법 등을 성문화, 즉 조종성헌화함으로써 외국법(즉,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에 대해 방파제의 역임을 한 점에 있어서도 커다란 의의가 있다.
* 주 26: 경국대전은 정치의 요제는 법이 있으며 려말의 문란한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은 법률의 정립에 있다고 서약선명한 태조의 이상의 종국적 결정이다. @p383
태조의 경위교서에서 ‘의초법제는 고려 고사에 따른다’고 하였음은 급격한 개혁을 피함으로써 민심의 안정을 꾀하는 목적이 있었다. 생소하고 혁명적인 법을 제정하거나 국법을 강제함으로써 법의 실효성이 상실되는 것보다는 전통적이고 현실적인 치자와 민중의 법의식을 존중함으로써 법의 타당성과 실효성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태조 이래 제왕을 비롯한 귀족관료들의 정치적 권력의 확립을 위해서는 중국적 국가체제나 사회체제의 수립을 이상으로 하여 중국법을 계수한 제정법에 의존하는 것이 신속 편리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유의 사정에 적응한 조치를 취하였음은 지극히 현명하였으며, 경국대전의 완성을 정점으로 조선왕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법전편찬에 전력함으로써 법전편찬왕조라고까지 불리울 정도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경국대전의 완성을 바로 조선왕조 존속의 철력이며 고유법 계수의 초석인 것이다. 또 경국대전은 우리 고유의 법률사상을 담고 있는 고유법전이라고 할 수 있다 (주27).
   III.  토지제도(과전법)
조선왕조의 토지제도의 기반을 형성한 것은 과전법이다. 과전이란 봉건적 특권 신분인 양반관료들에게 지대(전조)를 분배할 목적으로 관계에 따라 일정량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이 이양된 토지를 말한다. 과전법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가 지배(소유)하는 공전으로 삼고, 지대의 일부인 전조의 수조권을 왕실, 사원, 양반, 관료 및 국가기관에 분급하는 수조권의 배분관계를 재편성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과전법의 목표는 봉건적 토지고유제를 재생산하는 데 있었다. 즉, 중기 이래로 발전한 부수조의 사전을 혁파하고 모든 토지를 일단 국가적 소유(공전)로 환속시키는 것이 전제개혁의 최고 목표였다. @p384
이같은 과전법에 나타난 민법에 관한 규정은 (i) 타인에 의한 민전분취의 금지(민전의 보호), (ii) 민전의 매매, 증여의 금지(민전처분권의 제한), (iii) 수조권의 공정(제한)으로 되어있다. 과전법에 이같은 민전보호규정을 둔 이유는 봉건적 생산양식의 기층적 토대를 형성하는 소농경영을 확보하고 또한 려말에서 보는 바와 같은 차경제를 막기 위해서는 보유지(민전) 집적을 억제하는 시책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민전농민은 조선조농민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민전은 그 소유형태에 있어서는 국가의 소유지(공전)이고 경작(생산) 관계에 있어서는 생산자인 농민의 보유지이다 (주28). 과전법 아래에서의 농민은 일정한 토지를 세습적으로 점유, 경작하는 관습적 토지보유농민이다. 이 민전농민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최고 지주인 봉건국가의 지배, 예속하에 있는 농노적 농민 이었다. 이러한 민전으로 불리우는 보유지에 지주, 소작관계가 합법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세종6년에 토지보유권(민전)의 매매, 양도가 공인된 이후부터이다 (주29). 이로 인하여 보유지를 방매하는 무전농민이 나타나게 되고, 반면에 광대한 보유지를 집적한 지주계급이 형성되어 종래의 보유지(민전)는 자작지와 지주경영지(소작지)로 분화되고, 후자에 있어서는 토지, 소작관계가 성립되었다.
과전법에 있어서 사인에 대한 급전의 객체는 토지 자체가 아니라 봉건적 토지국유제 아래의 공전에 대한 지대(조세)에 기인한 분기인 전조를 취득하는 수조권이다. 따라서 과전법 아래의 공전, 사전은 수조권의 귀속에 따른 구분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 양자는 모드 국가가 지배하는 공전이다. 봉건적 지배계급은 국가로부터 과전, 공신전, 별장전 등의 이름으로 공전수조권을 이양받고, 그 경작자로부터 피급지에 대한 조를 수취하였다. 이러한 이른바 사전은 양반귀족들에게 지대를 분배해주기 위하여 설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공역부하담자에게 지급한 토지가 있다. 이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은 행리전, 역전 등이 있고 사원, 서원, 왕실, 궁방과 같은 사적 기관에 수조권이 이양된 토지(이른바 사전)도 있다.
* 주 28: 보유지는 원칙적으로 농민이 관습적 보유권을 가지고 경영, 경작하는 토지이며, 통일신라기의 정전의 제보를 이은 것으로, 고려 초기로부터 민전으로 불리워진 토지이다.
* 주 29: 김옥근, 전갈서, 196면. @p385
   IV. 혼인, 상속제도
  (1) 혼인
조선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사회의 모든 면에서 고려적인 기반 위에서 서서히 개혁과 재조직이 실시되어 제9대 성종시에 이르러 왕권이 확립됨과 동시에 조선적인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고려조 이래의 근친혼의 관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 못하였다. 그러나 근친사이의 난륜이나 근친혼에 대하여는 유교를 국시로 하는 관계로 상당히 엄격히 논의 되어 동성불혼제가 확립되었고, 외친도 6촌까지 혼인할 수 없도록 하였다. 즉, 성종 2년(1471)에 내외재종형자매, 종이의 자녀간(6촌), 외당숙질간, 외당고질간(5촌) 등의 혼인을 금하였다. 더 나아가 처족도 4촌까지는 금혼케 하였으며, 입양 (주30)으로 인한 양가모족 근친간의 혼인도 6촌까지 금지되었다.
사대부의 개취는 처가 사망 후 3년이 지나거나 40세를 지나도 자식이 없는 경우에 허가되었으며 처의 개가는 금지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모가 사망한 경우에는 탈상할 때까지 혼인할 수 없었다. 부모 상중에 혼인하는 것은 불효가 되었다. 또한 토서불혼 또는 양천불혼의 관습이 매우 엄격히 지켜지기도 하였다.
혼인년령은 경국대전에서는 남자 15세, 여자 14세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조혼을 해왔다. 또 경국대전에 의하면 양가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오랫동안 병석에 있거나 50세가 넘었을 경우에는 자녀가 12세만 넘으면 관청에 신고하고 혼인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주31).
* 주 30: 양자는 동족동본에 한하여 허가되었으며 별도로 기아나 고아를 위하여 수양자, 시양자의 제도가 있었다.
 * 주 31: 이것은 부모의 생존 중에 혹은 늙기 전에 며느리를 맞이하여 효도를 받고 손자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남자 7, 8세 여자 12, 13세에 혼인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조혼은 혼인 당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부모를 위하고 조상 또는 가를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혼의 폐단은 조선말에까지 계속되어 고종 31년(1897) 7월에는 남자 20세, 여자 16세로 정했으며, 다시 융희 원년(1907) 8월에는 남자 만 17세, 여자 만 15세 이상으로 정한 정한 일도 있다. @p386
  (2) 상속
과전법에 있어서 공신전의 자손상속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별장전은 개국, 정사, 좌명의 삼공신전과 양비에 자손상속이 허용되었고, 그밖의 모든 양전은 수전자가 사망하면 국가에 반환하였다. ㄴ전도 임진란 이후에는 상속이 허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산상속은 법정상속으로 자유재량은 거의 인정되지 않았다. 상속의 제1순위는 자녀로서 아들, 딸을 포함하고 있으며, 제2순위는 자녀가 없는 경우로서 생존한 배우자가 상속하는 데 처가 재가하지 않고 수절할 것을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유처가 만약 양자를 들이면 그 양자가 상속인으로 되었다. 제3순위는 생존한 배우자가 양자를 들이지 않고 사망하거나 개가하는 경우에 죽은 배우자의 본족이 상속하였다. 본족은 죽은 사람의 4촌이내의 자로서 사손이라고도 하며, 동생(2촌)이 없으면 3촌, 3촌이 없으면 4촌의 순위로 상속하였다. 상속분은 적출자 사이에서는 남녀의 차별이나 출가여부의 구별없이 균분상속이 원칙이었다. 다만 장남은 고유상속분의 2할을 더 가급하고 동시에 종폐가 있는 가옥을 상속하였다.

    @[(93) 제5절 한국근대법제의 형성@]
   I. 서구법의 계수
  (1) 조선말기의 법제개혁
우리 나라에 서양법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7세기 북경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온 서학의 한역서적을 통해서였다. 그 중에서 알려지고 있는 것은 중국에서 선교사로 있던 알레니(Aleni)가 편술한 서범학(1623)과 직방외기(1623)이다. 그 속에서 서양문화와 함께 서양의 법학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의과가 외신생사지권에 관한 문제를 주관하는 데 대하여, 법과는 내외생지권, 즉 정신과 육신의 생사를 다루는 학문이다”라고 하였고, 법관은 천의와 정의를 구현하여야 하기 때문에 성현을 본받아야 하며  고전에 밝아야 한다고 하였다. @p387 이와 같이 서양법문화와 그 사상이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초기에는 국내의 젊은 학자들과 실학파와 그 후의 새화파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특히 갑오경장은 확실히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었다. 이때에 비로소 한국사회는 근대사상(서구사상)을 받게 되었으며, 구시대의 봉건주의에 대한 반항으로서 근대적 민권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수반하여 법제도 대개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서구화가 시작된 것이다. 고종 31년(1894) 자령 제30호로서 참형등의 만형을 폐지하고 다음 해에 유형처분등급과 가감형 그리고 미역형처단례도 제정, 시행하였으며, 건양 원년(1896)에는 ‘형율명례’를 정하여 형사법제의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개국 503년 홍범 14조 중에 “민법 형법 엄명제정 불불잠행 감금미벌 이보전인민 생명 급 재산”이라는 방침 아래 민저 재판소구성법을 제정하였고, 이어 광무 9년(1905)에 드디어 전문 905조의 형법대전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실로 한국법제사상 신기원을 이루는 대개혁으로서 구래의 중국법계로부터 서구적 신법전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주32). 그 후 융희4년에 한국법전(1910)을 편찬하였으며, 곧 이어 한일합병으로 그 정상적인 발전은 저지되고 말았다.
  (2) 일제의 식민지법제
일본은 고종 13년(1875)의 병자수호조약 이후 우리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고 (주33), 청일, 노일 양전쟁을 거쳐 1910년 8월 29일에는 한일합병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의 총독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제령 (주34)을 공포하였다. 또한 1912년 3월에는 제령 제7호로 ‘조선민사령’을 공포하여 특별한 규정이 없는 경우에는 일본민법이 의용된다고 하였다.
* 주 32: 정봉휘, 전갈서, 237면.
* 주 33: 1894년에는 청일전쟁의 승세를 몰아 우리 나라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각부와 각  ㅕ문에 일본인 고문을 1인씩을 두어 모든 각령, 부령, 청령, 훈령, 지령에 대한 사전사열을 하여 국정전반을 간섭하였다. 군국기무처의 급격하고 졸속한 전반적인 법제개혁은 이니 식민지화 정책을 겨냥한 것이었고, 그 후 노일전쟁중인 1905년에는 강제로 체결한 을사5조약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1910년에는 일본의 총감부가 설치되었다.
* 주 34: 일본은 1911년 법률 제 30호로 ‘조선에 실시할 법령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법률로 정해야 할 사항을 제령, 즉 총독의 명령으로 정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일본의 총독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즉, 총독부는 실질상의 입법권자이고 행정권의 총수이기도 했다. @p388
원래 일본의 법제는 프랑스 고전학파에 이론적 근거를 둔 것으로 한일합병으로 형식적으로는 총독정치의 법제가 약용되었으며, 특히 제2차 대전 중에는 전시체제에 맞춘다는 이유로 전시범죄의 특례에 관한 법,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의 전시특례, 조선에 있어서의 재판절차간소화를 위한 국가보안법 및 치안유지법의 전시특례에 관한 건 등으로 침략적 억압을 받아 왔었다.
한편 3. 1독립운동이 일어난지 40여일 만인 1919년 4월 11일에 상해에서 수립한 망명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미 서양의 근대사상에 접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임시의정원의 개원에서부터 민주적 정치와 입법을 표방하였고, 그 기본법인 임시헌장(전10조)에서 임시정부의 정체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의회우위의 통치체제와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규정하였다.
여기서 일제의 주요 식민지 법체계를 간단히 개관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화함에 있어서 특히 부동산소유권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였다. 조선민사령에 의한 근대적 사소유권제도의 도임과 사소유권자의 확정이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동산 소유권자의 확정이란 작업은 대다수 우리 농민을 소작인으로 몰락시키고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공대한 토지를 국유지화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헐값으로 불하하여 이를 비호하였다.
가족제도에 관하여는 고유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미명하에 관습에 맡겼다. 이것은 가부장제적 가족제도하에서 복종과 순종에 익숙한 인간을 육성하여 지배의 안정을 꾀하고, 가족공동체에 속하여 가장지배하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노동자나 농업노동자로서 독립생계임금이 아닌 가계보조적 임금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나아가서 회사제도에서는 민족자본의 육성을 저지하기 위하여 회사설립을 허가제로 하여 한인의 회사설립을 억제하였다. @p389
한편 식민지법제의 특성은 형사법상의 탄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치안유지법 등으로 응징적, 징벌적 탄압과 함께 문화정치란 이름으로 한국인의 민족 분열을 위한 자주의식과 독립성을 마비시켰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국가총동원법에 의하여 인적, 물적 수탈이 극에 달했다.
일제의 식민지법제는 서양법제의 변조, 개악판으로서 법치나 기본권존중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온존, 육성, 역이용은 자주적인 시민이 육성될 사회적 소지를 거세하고 더우기 각종 결사에 대한 전면적 통제는 가족주의, 파벌주의, 연고주의를 격하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민족분열정책과 친일세력의 비호, 육성은 민족간에 불신감을 돋구어 놓았다. 특히 친일매판세력 이외의 민족자본의 육성을 거세하고, 토지제도를 반봉건적 소작제도화하였고, 노동운동과 단체협약을 일체 인정하지 아니 하였으며 수탈을 자행해 왔다. 이로써 우리는 일제를 통한 근대서양법의 간접적 계수에서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점은 법률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 속에 심어 놓게 되었다.
  (3) 미군정의 법제
일본 제국주의의 패전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었다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해방은 아니었다. 이는 남북이 미, 소 양국 군대에 의해 분할점령되고 나라가 분단되는 시초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1945년 우리 나라에 해방을 가져 왔으나 1948년 독립시까지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당시 미군정으로서는 일제식민통치기구를 일거에 해체시키고, 일제세력을 전면적으로 숙청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어 가려는 것도 아닌 어디까지나 점령군이었고 (주35), 또 그들이 한국에 대해 사전에 계획된 정책이 짜여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군정은 ‘가능한 한 한국내에 현존하는 실체법 및 절차법을 존속’ 시키는 방향에서 법제를 정비하였다. 미군정의 최고의 입법, 행정권자로서 군정장관이 있고, 그 아래 각 관료기구가 있었다.
* 주 35: 38도선 이남을 점령한 미국 군대는 해방군이라기 보다는 점령군이라는 사실은 1945년 9월 7일 태평양방면 미육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의 포고 제1호에 잘 나타나고 있다(한상범, 연기영, 법학개론, 법문사, 1988, 143--144면 참조). @p390
군정장관은 사실상 조선총독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에 의하여 수시로 필요한 법령이 발하여졌고, 그 밖에는 일제의 군국주의적 악법을 일부 폐지한 것 (주36) 이외에 일제법령이 그대로 유효하였다. 사법분야와 형사법분야에서는 일제법령이 그대로 존속하였고, 이것은 1948년 건국 후에도 당분간 마찬가지였다. 이는 당시 국권을 통합할 정부의 수립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한 조치로 보아진다. 그리고 건국후에는 법제정비에 있어서 기존질서를 이어 나간다고 하는 뜻과, 일거에 법령의 전면개혁으로 인한 혼란을 피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점을 조치로 보아진다.
   II.  대한민국 법전의 제정
1948년 2월 27일 UN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 내에서의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였고, 미군정은 동년 5월 10일에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5. 10선거의 결과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이 1948년 5월 31일에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을 보게 되었다. 이 결과 미군정이 종료되고 명실공히 독립정부가 수립되게 되었다.
헌법은 1948년 6월 3일에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7월 12일에 국회를 통과하여 7월 17일 공포 실시하게 되었다((29) I 참조). 이로써 근대민주적인 헌법을 우리 손으로 제정하게 되었으며, 이 헌법의 정신에 따라 제법률의 제정이 진행되었다. 그 후 수 많은 법률이 제정되어 법체계를 정비하여 왔으나 6, 25의 민족적 비극과 사회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여러차례의 헌법을 위시한 각종 법률의 제정, 개정, 폐지 등이 단행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헌법을 비롯하여 오늘날 우리의 법률은 약 3만여건에 달하고 있으며, 기본육법으로서 형법이 1953년에, 형사소송법이 1954년에 민법과 민사소송법이 1958년에, 상법이 1962년에 제정 실시되고 있다. 
* 주 36: 미군정은 일제의 기본법령체계는 그대로 존속시키며, 정치적, 사상적 탄압법령으로서 일본 군국주의와 관계되는 악법은 폐지하였다. 일제법령중 악법으로서 폐지조치가 된 것은 1945년 10월 9일 군정법령 제11호에 의한 치안유지법, 보호관찰령, 예방구금령, 출판법, 국가총동원법 등 12개이다. @p391
   III. 한국법학의 과제
  (1) 한국법의 흐름
우리 법제는 오랫동안 중국법계의 영향하에 제정, 운영되어 왔다. 고려시대에는 당률이, 조선조시대에는 명률과 청률이 계수되어 동양사회의특색인 ‘예’ 로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예는 사회적 생활규범으로서 이 규범을 실현하는 것이 곧 정치이고, 도덕이며 법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예본형말’ 또는 ‘예주형종’이라 하였고, 법을 ‘예지표’라 하여 모든 법은 예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예의 실행을 강요하고 위례행위는 범법행위로 처벌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조선조의 유교의 윤리사상과 결부되어 가정에 있어서는 가부장제도를, 사회에 있어서는 분신계급을 낳게하여 철저한 부권과 계급제도, 관존민비, 남존여비 등의 동양적 권위주의를 형성하였고, 이러한 예본위의 동양적 윤리사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법의 제정이 요구되고, 법운영의 근본이념이나 기본원칙도 예를 실현하기 위한 발전이었던 것이다.
갑오경장을 계기로 우리의 법제는 주로 일본을 통하여 법계론적으로는 대륙법계의 법률제도를 계수하였다. 독일, 프랑스와 같은 법전의 형식을 갖추고 그 체계와 내용에 있어 두드러지게 독일법의 영향을 받아 왔으며, 법기술적인 면에서도 대륙법계를 본받아 왔다. 그러나 제2차대전 이후 우리 법제는 1948년 7월 대한민국헌법이 제정된 이후 ‘법의 민주화’란 기치 아래 일제의 식민지 지배법령으로 적용되어 온 각종의 특별법령을 정비하면서 기본입법사업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륙법계 이외의 영미법, 특히 미국법의 요소가 많이 도입되어 우리 법학의 전개에 일대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과정에서 정부형태를 헌법에 반영할 때도 그러하였고, 6, 25 이후에 행정법, 형사법, 상사법, 사회법, 민법 등 각 분야에서 영미법적 요소의 도입를 엿볼 수있다. @p392 따라서 오늘날 법질서는 영미법과 관련을 갖지 않고는 법을 논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한국법학의 과제
한국법학의 근 1세기 동안의 파란만장 속에서도 그 명맥을 끊기지 않고 면면히 유지되어 왔다. 다행히도 개화기의 선각자들로부터 출발하여 계속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법학에 입문하였다. 법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양반이나 특권층이 아닌 대체로 가난하고 평범한 시민이 많이 지망하여 왔다. 문학이나 예숙, 인문과학에서처럼 학문적 여유가 사고 결핍될 수 밖에 없는 원인은 여기에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적, 서민적’ 인 법학은 그런대로 학문성을 유지하면서 각계 각층에 많은 인재들을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법학이 민주화에 이바지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법학은 해방 후 민주화와 함께 45여년의 역사 밖에 되지 않으며, 이 짧은 역사를 극복하고 한국법학의 발전을 위하여는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가) 한국법의 수립요구: 우리 법제는 중국법계의 요소위에 대륙법계 위주로 구성되어 왔으며, 여기에 영미법적 요소가 가미되어 혼성법계를 이루고 있어 사상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체계적으로 혼란을 자아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성과 고유성 그리고 대륙법과 영미법적 요소를 잘 조화시켜 새로운 의미의 한국법의 수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나) 우리 고유의 전통적 법의식에 대한 탐구: 우리는 유구한 민족사의 대부분들 동양사회 고유의 전통적 문화 속에서 생활하여 왔다. 근대문명이 형식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우리의 생활 속에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세기 내외이다. 우리가 아무리 서구의 법을 계수하였다 하더라도 그 배후에 있는 법의식이나 법사상까지 계수될 수는 없다. 근대화가 반드시 서구화가 아니라면 이제 우리는 고유의 전통적 법의식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며, 또 한편 서구의 합리주의적 법제도의 계수도 배제하여서는 안되고, 이 양자를 조화발전시켜 우리의 주체적 법률문화의 창조에 노력하여 세계 속의 한국법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p393
 (다) 권위주의의 극복: 5. 16군사정변은 하향식 획일주의적 강권지배와 군사주의적 발상의 일방통행시대의 시작이 되었다. 하향식 강권지배와 법절차를 무시한 결과위주의 행정능률의 극대화라고 하는 편의주의적 행정은 법치의 운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관료주도하의 행정우위의 권위주의적 체계로 변형되고 확대되어 가게 되었다. 관료가 시민의 사생활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기본원칙이 우리 국민 스스로에게 투철하게 인식되지 못했다. 유교적인 관료지배의 형태를 수긍하는 시민의식의 빈곤과 관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있는 여건이 작용하여 한국법적 관료주의의 폐단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하겠다. 또한 여기에 일부 학자들의 출세주의적 정치참여가 부채질을 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관료주의를 합리화시키는 법의 방법으로는 법률만능주의를 들 수 있다. 법률만능주의하에서의 관료의 사고방식은 ‘법대로 하겠다’는 데 있다. ‘법대로 하겠다’는 것이 ‘법의 지배’를 강조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이 말은 이른바 ‘의법처리’ 또는 ‘공권력의 발동’이라고 하는 시민을 내려다 보고 겁을 주는 데 있으므로 문제가 된다. 따라서 관료에 의한 권위주의의 사고는 반드시 극복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관료에 의한 권위주의의 사고는 반드시 극복되어져야 한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진실한 의미의 ‘법의 지배’ ((25) III (2) 참조) 나 민주와는 이 땅에서 찾아 볼 없게 된다.
 (라) 기초법학의 육성: 법학의 학문성을 위하여는 특히 대학에서 기초법학의 분야가 육성되어야 한다. 법철학, 법사학, 법사회학, 비교법학 등 폭넓고 철저한 학문훈련이 바탕이 되어야 법학의 뿌리가 튼튼히 성장할 수 있다.
 (마) 인접분야의 연구: 법학이란 학문을 탐구하기 위하여는 기초법학뿐만아니라 법학의 인접분야에 대하여도 연구하여야 한다. 정치학, 경제학, 행정학, 사회학 등 넓은 분야에서의 연구가 필요하다.
 (바) 법학교육의 재검토: 법학교육에 대한 재검토가 시급히 요청된다. 동시에 오늘날의 사법시험제도의 사법시험제도의 개선도 요청된다. 법학과의 교육뿐만 아니라 오늘날 시민생활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는 교양으로서의 법학도 중요시되고 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2) II 참조). @p394
 (사) 제6공화국을 한국법학 중흥의 기회로: 우리의 많은 과거는 관료주의,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법을 경시한 역사 속에서 흘러왔다. 그러나 1988년의 제6공화국에서는 한국법학의 중흥의 기회로 삼아 서로가 노력하여야 하겠다. 법은 법률가의 독점 전유물이 될 수는 없다. 시민의 것이고 또한 시민이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법의 생활화가 되고 법을 존중하는 사회가 된다. 또한 현대의 민주주의는 ‘법의 지배’를 통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으므로 모든 국민과 위정자는 법의 소리를 경청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히 법학도는 민주, 법치국가로서의 한국을 건설한다는 긍지와 책임의식 속에서 누구보다도 진지한 자세로 역사 앞에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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