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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과거'로서의 일본

by FraisGout 2020. 8. 23.

  이웃나라란 자고로 사이가 나쁜 법이다. 이 말은 크리스테바가 한 이야기지만, 그녀의 말
을 빌리지 않고도 우리는 그 말을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를 보는 것만으로 납득할 수 있다. 
이웃관계란 사사건건이 부딪치고 이해관계가 얽히기 마련이니 그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어업문제나 영토문제에서 아직 문제가 남아 있는 것도 그렇지만, 우리가 식민지가 된 것은 
우리가 다름 아닌 그들의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이웃'을 침략한 일본은 말하자면 인류의 
전형적인 과오를 저지른 셈이다.
  100년 전. 그 시대는 먼저 눈을 뜬 나라가 자국의, 정확히는 각 '개인'들의 부를 꿈꾸며 
제국주의로 내달린 시대였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이었다면 안 그랬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우리는 선한 민족이니 그랬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걸었던 
길에 대한 비판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잘 아는 일본인은, 한 조사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그건 거꾸로 
말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리에게 일본 그 자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침
략 당한 과거의 피해의식이, 일본='침략자'의 등식이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가장 강렬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불과 100년 전의 한일합방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
시일까. 그건 우리에게 무려 400년 전의 역사가 항상 어제의 일처럼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
다. 말하자면 세종로 한복판에 이순신 장군이 서 있어 항상 그 일을 기억시켜주듯이 상대방
에게는 까마득한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을 일을 한국인은 오늘도 '현재'로서 기억하고 있다
는 얘기다. 오늘 무슨 일이 생기면 오늘의 일을 오늘의 일로서 바라보기보다 먼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가 현재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1) 차이를 수용하는 열린 마음을 통한 공존
  어쩌다가 가해자가 된 그들을 우리보다 '불행'하다고 보는 시각을 가져보면 어떨까. 그러
면 조금은 여유로워 질 것이다. 피해자로의 경험도 분명 상처지만, 가해자의 경험도 상처임
에 틀림없다. 자신의 과거를 상처로 인식해야 하는 그들-물론 영광으로 인식하는 어리석은 
이들도 많지만-의 고충을 이해해보면 어떨까.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브로가 한국에서 강연을 했을 때 한 청중이 힐난조로 물었다. 
"당신이 원폭 피해에 대해서 쓰는 일은 일본이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일이 아닌가? 일본이 
원폭 투하를 당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니었나?" 오에는 조용히 대답했다. "글쎄요... 그런데 한
국인 피폭자들도 그렇게 말할까요?"
  원폭 투하에 관해 일본이 말하는 것은, 최소한 오에의 경우 단순히 '피해'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굳이 피해자라 한다면 그것은 국가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하는 한 개인으
로서의 피해자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전쟁은 물론 국가에 의한 것이었다. 전쟁을 일으킬 때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정부는 없다.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국가가 주체가 되어 수행하는 법이다. 그 때 국민
은 대부분 수동적으로 그 전쟁 수행에 따르는 고통을 감수하기 마련이다. 전쟁에서 승리했
을 때 실제로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한 줌의 자긍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승리가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광하기 마련이다.
  일본 근대의 과오는 국가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국민들이 이에 대해 열광한 것도 사실이
다. 그에 대한 비판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국민들의 '피해'에 대한 동
정이 필요 없는 걸까? 오히려 국민의 열광과 환멸=피해를 함께 냉철히 봄으로써 '국민'이라
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일의 우를 깨달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국가공동체의 문제점을 서로 
말하는 일은 생산적인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또 여기에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에는 떨어지지 않은 원폭이 왜 일본에서만 시험되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말하자면 인종차별문제를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런 문제까지도 우리는 '함
께'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일본에 문제가 있다면 비판하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하면서 비판할 필요가 있다. 혹은 절대로 한국에선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없다면, 
그 대신 한국에'만' 일어나는 엄청난 양의 부끄러운 일들을 떠올릴 일이다. 타국의 불행을 
보면서 가위표를 긋고 우월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왜'를 물을 정도의 여유가 필요하다. 
어느 나라나 아픈 부분이 있게 마련 아닌가. 그렇다면 비슷한 병은 함께 고치고 다른 병은 
타산지석으로 삼는 지혜를 갖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인간은, 자신과의 '차이'를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동질성
의 확인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반면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본능적
인 두려움과 혐오를 느낀다. '다르다'는 데 대한 호의는, 상대가 자신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
을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만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그것은 사회 속에서도 학교 속에
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경우 무엇보다도 지역 간 갈등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모
든 공동체의 성립에 기반이 되는, 그래서 정말은 친목과 평화의 기반이 되어야 할 이 죄 없
는 본능이, 때로는 타자를 배제하고 파괴하는 잔혹한 폭력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와 다른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닌가. 공존을 위해 필요한 건 
차이의 배제가 아니라 차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다.
  
  2) '강대국' 일본이 아닌 '이웃' 일본과
  해방 후 55년. 이제 정복당했던 기간 36년보다도 훨씬 많은 세월이 흘렀다. 55년이라면 인
간으로 치면 우리의 해방 후 세월은 중년으로 접어들고도 한참 지났을 나이다. 
  이제는 그만 중년의 성숙함으로 '상처'를 잊고 싶지 않은가. 상처에 거리를 두고, 피해의
식에 기반한 혹은 정설화 되어 있는 일본관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바라보고 싶지 
않은가. 굴욕적인 피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된 이후 어쩌면 100년 동안이나 아파해 온 것일
지 모를 우리 자신을, 이제는 낫게 하고 싶지 않은가. 상처를 딛고 넘어서는 그 날, 아마도 
우리에겐 진정한 '독립'이 가능해질 것이다.
  일본과의 바람직한 관계 구축이라는 명제는, 그들이 강대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으
로 이웃이라는 한일 간의 숙명을 현명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하나의 당위성이다. 무엇보다도, 
이웃 간은 사이가 나쁘기 마련이었던 역사의 어리석음을 21세기에까지 되풀이하지 않기 위
해서도 그건 필요하다.
  21세기, 이제야말로 인접국가로서의 숙명을 슬기롭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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