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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역사란 무엇인가

by FraisGout 2020. 8. 23.

 1) 미화되는 '역사'
  90년대 초반부터 중반의 대표적 구호였던 '역사 바로 세우기'에서 의미하는 역사란 민족
정기가 발현된 '역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완벽한 존재일 수 없듯이 그 인간이 만들
어내는 '역사' 역시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것이다. 실제로 20세기의 역사 운운할 때엔 그 세
계사가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것이기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면서도, 우리 자신의 역사
도 그럴 수 있음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역사(과거) 를 '사랑'할 것이 우리에겐 대
전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며,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긍지를 가질 만한 '아름다운' 역사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에서 미화의 유혹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사'란 한 민족에게 있어 긍정적인 사실만이 '역사'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나라나 다소간 미화된 스토리가 '역사'로서 이야기되는 법이다.
  일본에서 이른바 교과서 '왜곡'이 이루어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부정하
고 싶은 역사, 아름답지 못한 역사를 우리 조상이 이랬다고는 차마 가르치지 못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다. 90년대 이후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들의 반성을 '자학사관'으로 일축하며 
'국민의 역사'라는 '아름다운 역사' 책을 내놓은 것도 말하자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고 싶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살상했다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긍
지'를 갖게 하기 위해서는 하다 못해 그것이 이웃나라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우리 자신이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나라 재건에 힘쓰고 있을 때 그들은 국
가와 정치에 무관심한 수십 년을 지내왔고, 그 결과 일본인들이 국가와 민족에 무관심해진 
것을 우려한 보수적 우국 충정파의 아저씨들이 나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들뿐인가? 그들이 자신의 조상들이 나쁜 짓을 했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해 '침략'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에게 문제가 있어서 침략을 당했다고는 
공적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해방 후 50년이 지나도록 일본의 지배에 대해 '왜' 그런 일
을 당했는가를 돌아보기보다는 그저 '어떻게' 당했는가만 강조돼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잘못된 역사를 고치고 싶다는 것이야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왜 '잘못' 되었던가를 
직시하는 일이 아니라, 침략 당한 역사의 흔적을 남겨놓은 것이, 그래서 그 기억을 하루빨리 
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한 것이 20세기 말 한국의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하루빨리 잊자, 하루빨리 잊고(우리는 그런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아름답고 훌륭한 역사만을 기억하자...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란 그런 것이었다. '자존심'
과 민족'정기'라는 말이 그토록 외쳐졌던 것은 그 때문이다.
  
  2) 기자조선의 역사, 일본 천황가의 역사
  역사의 '왜곡'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항상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역사 서술 자체
가 인간이 살아온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허구'의 요소가 없을 수 없고, 누가 언제 
쓰는가에 따라 허구의 내용은 달라진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사란 왕의 역사, 통치자의 역사였다. 중국의 경우 왕은 처음엔 
혈통으로서 그 정당성을 부여받았지만, 어느샌가 혈통 바깥의 인물이 무력으로 왕이 되는 
일이 생기자 혈통 이외의 '왕'의 근거가 필요해졌다. 그 때 '혈통'을 대신한 것은 '덕'이었
다. 말하자면 누구보다도 지력이 뛰어난 현인이 왕이 된 것으로 간주토록 한 것이었다. 현인
이란 우주의 질서를 파악하는 존재였다. 한 무제 때, 공자의 혜안이야말로 한 왕조의 정통성
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이후 공자의 성인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행설이
란, 국가의 흥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후에 '만들어'내 당시의 왕을 합리화시킨 것이기도 하
다.[가지야마 고이치 편, '세계의 역사', 주오코론신샤, 도쿄,1991]. 말하자면 중국의 역사서
란 당대의 왕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일본의 역사서에도 그런 요소는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기자조선과 위만의 역사는 아마도 중국과의 일체감이 필요했을 때 서
술되었고 문제없이 받아들여진 것일지도 모른다. 또 이들의 존재는 한반도가 실은 식민지였
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식민지사관'이라고 펄쩍 뛸 
이들도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백제 후예가 일본의 천황가
가 되었다는 말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런 생각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들의 후예가 아닌 순수한 한국 민족
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자존심이지만, 우리는 어쩌면 침략자의 후예일 수도 있지 않은가? 설
사 피침략자의 후손이라 해도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역사를 배우는 일은 다만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과거를 '보'는 일이어야 한다. 중요한 건 
'자존심'보다 우리가 속한 이 영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려는 지적 호기심 쪽이다. 
자존심이 중요하다면 과거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만든 오늘과 미래에 바탕해 만족시키고 싶
지 않은가?
  
  3)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 교육
  우리가 반일의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역사에서 어두운 부분은 
가려진 채 일본의 만행만이 강조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학생 때라면 국민학교에서부
터 이어진 반일 교과서와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졸업 후에는 독립기념관의 소름끼치는 고
문장면과 이보다 더 리얼한 무수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해방 후 50년 동안의 한국의 교육방침은 원수를 갚으라는 원한 섞인 것이었고, 그런 의미
에서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교육이었다. 우리의 선생님들은 '사실'을 적개심을 키우는 
방향으로 강조했을 뿐, 왜 그러한 '사실'이 자행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할 시간과 계기는 거의 
주지 않았다. 우리가 오랜 세월 문화를 전달해준 일본이 왜 어느 날 이웃을 '동생'으로 취급
하며 지배하려 했는지, 왜 인도를 침략한 영국과 달리 '말'까지도 빼앗으려 했는지, 반면에 
우리는 왜 그런 식으로 지배받아야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드는 교육은 이루어지
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해방 후 50년이 지나도록 우리의 역사의식은 피해의식으로만 점철된 
미성숙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일본에 관해 어떤 피해가 있었는가를 알되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서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개별적 나라의 문제로 특수화시켜 천인
공노할 극악한 일본과 양순한 한국의 이미지만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문제
로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 지배와 차별의 구조, 민족주의 문제 등과 연결시키면서 
그 속에서 한일의 특수성을 보는 교육이 필요하다.
  한편 일본에 대해 관대하게 '잊'거나 '용서'하자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해결이 되
는 것은 아니다. 과거지사를 그냥 묻어버리고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와 사고와 
행동이 '왜'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는가를 묻는 성숙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 점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지배와 침략을 가르치되 우월감에도 자괴감에도 
거리감을 두면서 자신의 조상들을 대상화하는 일이 물론 그들에게도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
에 의해 자신들을 돌아보는 체험을 한 차세대들은 필요 이상의 피해의식과 자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고, 슬기로운 눈으로 자신과 상대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특수성과 우수성만을 강조하는 일은 언제까지고 서로를 '이겨야' 하는 경쟁상대로만 보도록 
만든다.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길게 본다면 우리의 20세기는 그 이전과 달리 일본 쪽으로부
터 많은 것을 받아들인 시기다. 고대 문화나 언어가 어떻게 건너갔는가에 대한 연구는 언어
와 문화와 기술 등 모든 방면에서 연구가 활발하지만, 근대 이후 어떤 식으로 일본의 '기술'
이(우리가 강조하는 도자기 기술이나 인쇄기술 역시 기술이며 문화다.)  받아들여졌고 소화

었는가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이상 할 것은 없다.
  문화란 줄 수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줄 수 있었던 것을 우월감이 아닌 기쁨으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을 열등감이 아닌 감사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 그 주체는 서로 
바뀔 수도 있음을 조금은 무책임하게 인정한다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나올 수 있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사실을 열등감 없이 인정하는 데서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교과서를 다시 쓸 필요가 있다. 타자에 대한 서술 양식도 바꾸고 자신의 
신화화도 정도 껏 해둘 일이다. 조상의 훌륭함을 매개로 혹은 타자에 대한 적개심을 매개로 
자국에 대한 긍지와 사랑을 갖도록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자신이 어떤가
를 생각하는 일로 애국심을 키울 일이다. 각기의 지난날에 긍지를 갖되 자기미화와 자화자
찬에 빠지지 않을 일이다. 우리는 집안 자랑을 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범위가 민족이 되면 그 자랑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건 이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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