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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전통이란 무엇인가

by FraisGout 2020. 8. 23.

  1) 민족의식과 한글 사용
  역사교육에서 강조되는 것은 항상 '전통'의 존중이다.
  한때 한자를 병행 사용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둘러싸고 논란이 인 적이 있다. 한글을 '지
키'자는 각 관련단체들의 항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부 언론까지 나서서-이 때 역시 한 텔
레비전 방송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 때처럼 즉각 전화조사를 행하더니 국민은 반대한다고 전
했다-정부에 대해 '재고'할 것을 촉구했다. 그건 자신들의 의견(방송사 사장일까? 아니면 앵
커나 프로듀서?) 이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으로  착각한 오만이 아니었을까. 설사 그것
이 
순수한 '국민의 의견'이었다 해도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국민'이라
는 이름의 공동체는 집단의 그늘에 숨어 과오를 저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어쨌거나, 거리에 나서서 한자 병행을 반대하는 할아버지들의 보습을 보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하긴 원래는 남자들과 권력계급에 비해 지성이 부족한(?)  아녀자들과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한글 보존을 위해 할아버지들과 남성들이 나서고 있는 20세기 말 한국의 모
습을 세종대왕께서 보셨다면 의아해 하시면서도 즐거워하셨을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한자가 
남성들만이 사용하는 '권력'의 상징이었는데, 이제 한자 대신 '한글'이 민족주의적인 발상을 
등에 업고 자신만이 살아남아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은 배격해도 좋다고 주장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조선 시대, 그것도 4대 임금님이라고 하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한글은 만들어졌지만, 실제
로 조선 시대에 그것이 보급되지는 않았다. 한글은 '여성'의 문자였고, 힘없는 계층의 문자
였다. 남성권력계급들은 여전히 한자를 사용했고, 한자라고 하는 어려운 것을 알기는 지력이 
부족한(부족하다고 간주되었던)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그러던 한글이 본격적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아니 그 이전에 본격적으로 쓰여져야 
한다고 의식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다
름 아닌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유'나 '전통'의 관념이 높아지는 것은 그것이 손상될 것 같은 위기
의식, 타자의 침략/지배/침범이 발생할 때다. 근대 이후의 한글 사용 의식도 말하자면 그 일
환이었다. 일제에 대항해 나라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의식의 발로였던 셈이다. 동시에 한글
보급운동이 일어난 것은 문맹의 숫자를 줄인다는 신문들의 '부수 늘리기 작전'의 성격도 없
지 않았다.(강준만,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인물과 사상사, 1998,95-96쪽) 
  해방 이후의 한글 사용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순히 그런 필요성이 주장되었다
기보다는 이런저런 이유로 민족의식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시기의 주장이었다.
  
  2) 선택되어야 할 '전통'
  '한글세대'라는 말은 자부심 섞인 뉘앙스로 말해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글'을 우리
가 갖고 있다는 것 자체보다도 혹은 '전통'보다도, 어제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
게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 하는 일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야말로 
중요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전통'을 말한다면, 한글보다 먼저 쓰였고 조선에서도 압도적 
다수에 의해 쓰였던 '한자'야말로 그 때 중심적이었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전통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한글'만'을 사용할 것을 고집하는 것은 '전통' 보존이니 민족유산을 주장
하는 사고방식에 오히려 배치되는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과거의 유산을 배우기 위해서도 
한자가 필요하다고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한글은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이 우리 '고유'의 것이고 '전통'이기 
때문에 써야 한다는 주장만으로는 설득력이 없다. 한글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쾌적
하게 느끼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필요하다. 실제로 한글만의 문장은 읽기 쉽다는 장점이 있
다. 하지만 영어에 관한 노력이 세계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면, 한자를 쓰는 일은 아시아와
의 소통을 우선 가능하게 해준다. 일본에 이어 중국이 관광객들이 많아지고 있는 지금, 그것
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아니면 한국에 왔으니 한국어를 알아야 한다는 식의 
경직되고 배려 없는 주장으로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배척하고 마는 걸까?
  영어에 대한 논쟁이 결론이 나 있는 만큼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한글'만' 써야 
우리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용하는
가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일 테니까.
  한국어를 모두 한글로 바꾸자는 주장이 일부 있지만-그들은 한국어가 순수한 우리말이라
고 착각하고 있다-이런 사고방식의 문제점도 '전통'에 대한 사고 자체에 있다. 과거의 것을 
무조건 현대로 되살려 놓는 일만이 '전통'의 계승에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3) '전통'이 만들어지기까지
  하나의 사고가 힘을 얻으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그것은 물론 순수하게 공감을 얻어
서 전파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그 시기의 권력집단의 필요에 의해 선택되고 지켜
지는 과정에서 하나의 진리로 간주된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습속으로 굳어지게 되고 그 
한 시대가 지나면 '전통'이라는 말로 정착되게 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이란 실은 어떤 한 시대, 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한 생활양식이
며 사고방식일 뿐이다. 그것이 후대에 이런저런 이유로(대개는 민족주의 등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목적으로)  무조건의 숭배와 존중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지만 '전통'이란 그 시대의 생활양식일 뿐이며, 일반인들의 것이 아닌 경우엔 권
력계층의 가치관일 경우가 많다. 이른바 유교 전통 역시 마찬가지다. 유교는 말하자면 그 가
치관이 자신들의 권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남성 지배층에 의해 그 '가치'
가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전통'이라는 말은 그 가치 여부가 음미되기도 전에 근원적인 가치로서 인정된
다. 그것이 하나의 생활양식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사랑할 자유도 거부할 자유도 있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강요된다. 서양에서도 볼 수 있었던 여성차별 이상의 '
칠거지악'이라는 엄청난 족쇄까지도 한 치의 의심 없이 유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져 
온 것이 불과 100년 전 일이다. 그리고 현대 한국 여성들은 아직도 이 족쇄에서 자유롭지 
않다.
  물론 과거의 것이라도 우리를 아름답고 지혜롭게 해주는 것이라면, 또 현대의 우리에게도 
쾌적하게 느껴지는 것이라면 지키고 즐겨야 마땅하다. 의식적으로 지키려 하지 않아도 그 
내용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자연히 이어지는 법이다. 그것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
랑'하는 마음들에 의해, 그리고 그 때의 전통을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우리를 또 다른 질곡에 빠뜨리는 가치관과 습관까지도 동시
에 '전통'이라는 이름만으로 존중된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전통의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그들의 '전통'으로 생각하는 영구 왕실의 고전적 의식이나 타탄체
크무늬의 스커트, 백파이프 등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된 인공적
인 것이었다[에릭 홉스봄. 테렌스 레인저, '창작된 전통', 기노쿠니야 쇼텐, 도쿄,1992]. 그
런 '전통'의식은 대부분의 경우 '민족'의식과 함께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민족주의가 강화되
어야 될 필요가 있을 때 '전통'은 강조되는 것이다. '민족'이 만들어지고 유지되기 위해 '전
통'은 필요했던 셈이다. 그것은 전통이 '자기 이미지'(자신들의 구체적 모습을 상상하는 일)  
구축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고, 그것이야말로 구심점을 만들어 국가라는 공동체의 존속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전통에는 끊임없이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다.
  '문화'와 전통은 우리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지
는 것이며, 타자에 의해 '발견'되고 이름 붙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초기에 일본인 야나
기 무네요시가 '조선'을 보며 명명한 '곡선미/애상미'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본 모습을 우
리는 오랫동안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런 자신의 모습에 
반발한 이들은 반대로 강하고 진취적인 한국상을 내놓았다.
  그러나, 곡선의 가녀린 모습이 허구라면, 강하고 진취적인 모습도 실은 허구다. 인간은 필
요에 따라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일 따름이다.
  
  4) 이 100년, 10년 사이에 우리가 만든 문화
  전통은 문화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지켜진 문화를 전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100년 동안, 또는 10년 사이에 어떤 '문화'를 만들어냈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끝마무리가 거칠거나 쓰면 금방 부서지는 얼마 전까지의 우리 상품
은 분명 그 당시 우리의 '문화' 수준이었다. 우리는 골동품의 정교한 장식과 쓰기 편하도록 
한 조상의 지혜를 '문화'로 자리 매김 하지 않는가.
  300년 전의 문화만 '문화'인 것은 아니다. 90년대의 우리가 만들어낸 상품 중 소비자가 쓰
기 편하고 아름다운 물건이 생산되었다면 그것은 새로운, 또는 1990년대의 한국 문화로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혹여 베끼기만 존재했다면 그 자리에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타국인들이 주목하지 않는 상품은 후대에 우리의 문화로 기록될 수 있을까? 한 상품이 주
목받아 유행하기만 하면 유사품이 쏟아져 나와 원래의 상품에까지 식상하도록 만들어버리고 
마는 문화는 문화일 수 있을까?
  일본 유치원 졸업식에서 졸업하는 아이들이 후배 아이들에게 사뭇 엄숙하게 넘겨준 것 가
운데 유치원에서 기르는 닭과 토끼 돌보는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대자보 만한 종이
가 있었다. 다음 세대를 위해 그 때까지의 '지혜'를 전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치 계승으로
서의 '전통'의 이름에 걸맞는 것이 아닐까?
  
  5) '자존심'과 '보신탕'
  한국적 민족주의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자존심'이다.
  그 때의 자존심이란 기가 죽지 않는 일이거나 다른 나라를 '이기'는 일쯤이다. 동시에 우
리의 부정이나 비판에 연결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자존심이 표출되는 상대는 '일본'이었다. 이겨야 할 분야는 과거의 
전통이거나 문화유산이거나 축구시합이거나 했다.
  그런데, 자존심이란 도대체 어디서 찾아지는 것일까. 개인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자아의식이며, 무시당할 수 없다는 기개이며, 글자 그대로 자신을 존중하고 나아가 존경할 
수 있는 기분이다. 한국 영화의 자존심이니 한국 음악의 자존심이 지켜졌다 거니 하는 말이 
곧잘 사용되지만, 자존심에 관해 말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계시민으로서의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아닐까.
  예를 들어, 남이 싫다는 것을 강요로만 간주하고 보신탕을 먹는 일이 자존심을 살리는 일
은 아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전통'의 개념이 실은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
전통'이라 해서 무조건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관습을 '전통'의 이름으로 무조건 지키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은 아니다. 그런 일을 
'정체성'을 지키는 일로 착각하는 일은 실은 우리 자신의 부정적 '정체성'을 확산시키는 일
일뿐이다. 보신탕을 먹더라도 최소한 '전통'의 이름으로 먹을 일은 아니다.
  이제는 화장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없어진 듯하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화장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가 오랜 전통으로 생각해왔던 토장이 뿌리를 내린 것은 실은 조선 시대 이후의 
풍습인 것이다. 조선 시대의 풍습이 '전통'으로 기억된 것은 물론 그것이 최근의 일이고 그
것이 바뀌기 전 일이 잊혀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런 식으로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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