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왜곡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by FraisGout 2020. 8. 23.

  1) 민족의식의 기원과 '고유한 정체성'
  '민족'의식이란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개는 근대가 시작되면서 근대 '국가'의 필요성이 
생김에 따라 구심점으로서의 '민족'의식이 신문 등의 매체를 통해 유포된다(베네딕트 앤더
슨, '상상의 공동체', 리브로포토, 도쿄,1987) . 그 때까지 사람들은 '국가'의 개념이나 '민족
'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사는 공동체의 경계인지
를 알지 못했고, 군주의 존재도 실상은 희박한 것이었다.
  근대 체제로 개편되면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를 넘보는 일이 생겼고, 혹은 그에 대항해 지키는 일도 필요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한 한 커다란 힘을 가진 공동체인 게 바람직했다.
  타국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필요해지는 것은 물론 군대다. '국가'의 이름으로 장정들을 동
원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위해 '죽을'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과거에 그것은 군주에 대한 
충성이었지만 새로운 근대국가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것이 곧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피를 
나눈 '민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민족' 개념이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민족' 개념이 성립되려면 순수와 고유에 대한 집착과 환
상이 필요해진다. 근대국가들이, 혹은 현재 근대국가로 받돋움 하려는 수많은 작은 공동체들
이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민족주의 비판에 대해 '열린' 민족주의가 말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열린 민족주의란 근원
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민족'을 실체화하는 일 자체가 타자와 나 자신을 '구별'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그러한 '차이'의 발견은 필연적으로 차별과 배타성을 낳게 하는 것이기 때문
이다. 민족의식은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다른 한편에서 민족주의
는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한다.
  문화를 개방하면 '일본화'된다고 우려했던 사고에는 지켜져야 할 어떤 '고유'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져야 할 것으로 상상하는 우리의 '고
유'한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순수한 의미에서의 '고유'란 민족 수준이라면 아직 민족 간의 혼혈이나 교류가 이루어지
지 않은 태초의 시점, 개인 수준이라면 태어나서 아직 주위의 '문화'를 흡수하지 못했을 당
시에나 가능했을 어떤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태어나자마자 먹는 분유는 우리 것인가? 
우리가 듣고 본 모든 것은 우리 것이기보다는 서양 음률이었고 서양적 풍경이 많지 않았는
가? 그림책과 비디오 중 우리 것은 얼마나 있었을까.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많이 보았던 디즈니 만화는 우리 안에 미국식 감성을 심어놓았을
까? 일본 만화는 우리 속에 '일본적' 정체성을 형성시켰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외국 문물에 노출되어 외국 것을 흡수한다는 의미에서는 우리는 태
어나면서부터 '정체성'이 훼손된 상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교육을 통해 '한국적' 
사고방식과 입맛이 더 편안한 한 개체로 길들여지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미국인도 일본인
도 아닌 어디까지나 '한국적'인 '한국인'일 뿐이다. 동시에 미국인과도 일본인과도 공유할 
수 있는 동시대적 공간을 마음속에 갖고 있기도 하다.
  모든 지구인들은 외국 문화를 즐기지만, 잊지 않을 만큼은 그러한 문화에 대한 경계심을 
키울 것을 교육받는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반드시 그 순수성이 지켜지는 것도 아니며 따라
서 경계의식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 있다.
  
  2)'민족'이면서 '개인'으로 존재하는 일
  그렇다고 '민족'을 잊거나 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이 아니기만 
하다면, 민족은(민족주의가 아니라) 이 지구상에 '다른' 것을 존재하게 하여 그 다름을 즐길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지구가 즐거울 수 있는 건 나와 다른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존재
하기 때문이 아닌가? 다른 문화, 다른 음식, 다른 풍경은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유혹하고, 
다른 세상에 접하는 일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볼 수도 있다. 
  민족이라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각자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을 때, 그것
은 의식하지 않아도 '한국 정신'=모두가 그렇게도 원하는 '민족정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나타
날 수 있다. '민족'이 필요하다면 각자가 '즐길'수 있는 것으로서, 나아가 권리보다 의무의 주
체로서 '민족'이면 될 것이다. 김치와 불고기를 즐기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으로 특별
시하지 않고 한국 땅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되 이 역시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을 일이다. 
우리 문화를 사랑하더라도 이 역시 타국 문화보다 '우수'하다는 비교확인을 하고 싶은 욕망
을 버릴 일이다. '우월성'의 확인은 필연적으로 그 주체를 특별시하는 욕망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그것은 최종적으로 다른 종족을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하는 비극을 낳기도 한다.
  '민족'이면서 '개인'으로 존재하는 일은 민족을 버리거나 의식하지 않는 일이 아니라 한국
인이되 이제까지의 '한국인'적 감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방식이다. 그로써 우리는 
정치적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필요'할 때 민족일 수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실은 '한국'인이라는 민족의 개체기에 앞서 '학생'이고 어떤 '직업인'이
고 '주부'고 '아빠'가 아닌가? 말하자면 민족적 아이덴티티만이 우리를 구성하는 아이덴티티
는 아니라는 얘기다. 민족 아이덴티티가 강조되는 것은 항상 국가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때다.
  우리는 지역감정이라는 우리 내부의 타자문제를 이미 갖고 있다. 그것도 말하자면 '다름'
을 참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이 야기한 것이지만, 다름을 참지 못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연령의 수준을 나타내는 일이다. 어린아이가 모르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처럼.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한국인의 기질은 일본인에게는 버겁고 일본인의 기질은 한국인
에게는 이해되기 어렵다. 인간관계에서 거리를 두지 않는 한국인의 성질이 일본인에게는 버
겁고, 거리를 두는 일본인의 성질이 한국인에게는 냉정한 인물로 비쳐진다. 말하자면 한일 
간에는 성격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부부였다면 성격 차이로 이혼할 가능성이 많은 
부부다.
  하지만 깔끔한 사람을 인간미가 없다고 완전 부정하거나 털털한 사람을 칠칠치 못하다고 
완전 부정하는 일은 어리석지 않은가? 결별보다는 융화 쪽이, 최소한의 거기에는 존중과 우
호의 감정이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지 않은가?
  
  3)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한국에 대해 추상적인 애국심을 품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애정'을 가진 사람
들은 드물다. 한 조사는 이 나라의 청소년 중 70퍼센트가 이민을 희망한다는 충격적 사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애국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설령 우리의 애국심이 추상적인 민
족주의 구호에 호응하는 '애국심'이라 할지라도.
  애국심이란 어떻게 교육되는 것일까. 그것은 '자랑스런' 역사와 '아름다운' 국토를 인식시
키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국가의 '국민'은 그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 의식적 혹은 무
의식적으로 (대부분은 무의식적이지만)  '국가'를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받고 배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계절의 아름다움이니 지구 어디보다도 빼어난 풍광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적지 않은 과장과 무리한 '발견'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말이다. 앞
서의 서울대 교수가 국토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은 그 한 예다.
  말하자면 국토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사계
절이 없어도 사막은 사막대로, 초원은 초원대로, 북극은 북극대로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거쳐 비로소 '국민'으로 거듭난다. 실은 별다른 의식 없이 태어
난 각기의 존재를 '민족중흥이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으로 생각하도록 교
육 받는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그것이 보수, 국수로 흐른다는 
의미라면 한국이야말로 해방 이후 내내 '우경'의 길을 걸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학교에서는 '국가'를 존중할 것을 배우고 '국민'으로 길들여진다. 이제는 바뀌었지만 '국
민학교'란 바로 그것을 위한 곳이기도 했다. 일제가 패전 후 국민학교를 '소학교'로 고친 것
은, 바로 그러한 '국민'으로 길들여져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 기억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50여 년의 교육의 결과 이제 일본인들은 국가의식도 민족의식도 우리의 생각 
밖으로 희박하다.
  우리는 몇 년 전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국민'화 교육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
서는 '국민학교'란 오히려 우리 쪽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교육받은 국민으로서
의 자각은 '국민정서'라는 말을 신격화하고 '국민정서'라는 말은 가치관과 정서의 획일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국민정서는 무조건적인 애국심을 강요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