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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문학과 민족주의

by FraisGout 2020. 8. 23.

 1) '아웃사이더' 문학과 '모국어'를 지탱하는 문인
  독도문제로 한창 떠들썩했을 때 문인들이 독도를 방문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
었다. 일반적으로 문학은 한 민족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니, 민족 간의 갈
등이 표출되고 있었던 독도에 문인들이 일부러 방문한 것은 당연한 일쯤으로 받아들여졌을
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일반적으로 제도에 저항하는 아웃사이더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은 모국
어의 아름다움에 종사한다는 의식으로 본다면 그 어느 예술보다도 '국가'와 가까운 존재다. 
국어 교과서는 문인들의 글이 주축이 되고, 우리는 그들의 언어를 매개로 '민족'을 배우고 '
국민'화된다. 문학이 문학이라는 것만으로 절대적 가치가 부여되었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문학이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언어'를 지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대립구도 속
에서 문인들이 독도를 방문한 것은, 그 자신들은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이런 구조 때문이다.
  '열려'있는 것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문인들이 곧잘 배타적 성향을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국어'라든가 그를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는 주역이 자신들이라고 하는 의식
(무의식) 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러니칼한 일이지만 누구보다도 '민족'을 지켜야 할 
문인들이 '친일'에 나서고 앞장서서 '일본어'로 쓰기 시작한 데도 이런 배경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문학과 정치의 필연적 관계를 몸소 증명해 보인 셈이다. 
  
  2) 김지하의 '민족정신' 회복운동
  얼마 전에 시인 김지하가 민족정신을 강도 높게 부르짖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학교에 설치된 단군상의 목이 잘린 사건에 자극을 받은 듯이 보이는 그는, 느닷없이 그 사
실을 두고 "한국에 닥친 IMF가 경제적 위기뿐 아니라 '정신적 공황'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상고사'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할 것을 촉구했다. 단군상의 훼손이 "민족 해체
의 조짐이 농후"하게 나타난 현상이라면서 "생명체에는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
다. 그가 말하는 '구심점'이란 '제정신'과 '탁월한 문화'(조선일보,99.7.12) 라던가. 그런데 구
심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만을 뺀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말도 대중소설가 김진명
의 논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김지하가 '민족정신회복 시민운동연합'의 대표라는 것을 보면 그가 명실상부한 이 시대의 
민족주의의 대표자 중의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이런 인물이 일본에 있었다면 명백히 '우경
화'니 '국수주의자'로 낙인찍힐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를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
다. 
  "위기의 시대에 우리의 줏대를 세우고 그 토대 위에 우리의 비전을 끌어오기 위해서 상고
사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시급하다."고 김지하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줏대'는 바로 '민족
정신'일 터인데, 도대체 그가 말하는 민족정신이란 무엇일까.
  먼저 그가 말하는 민족정신 '회복'운동이 어떤 것인지 보자.
  그는 운동의 일환으로 '왜곡된 상고사 즉시 중지를 위한 시민공청회'를 열고 정부에 항의, 
요구사항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천절을 국민대축제로 선포하고 시행
  단기연호 회복
  해외동포의 상고사 중심 민족교육 개혁
  교육부 내 상고사 바로 세우기 특위 설치
  문화관광부가 상고사 바로잡기 문화행사 개최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근대 바로 세우기였다. 그것을 위해 정권은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들여 쇠말뚝을 뽑고 총독부 건물을 파괴했다. 그런데 김지하는 '상고사'를 '
바로 세우'자고 말한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 '단군'을 숭상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민
족정신'이라는 것이 회복된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그런데 김진명 역시 관심을 보이던 단군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가 배운 바로는 그는 한국을 연 개조신이다. 그리고 그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는 
모두 같은 '피'로 연결되는 한 자손이라는 것이 우리가 배운 중심 골자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물론 단일민족사상이다. 그리고 단일민족사상이 강조되는 이유는 
물론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고, '민족'이 강조되는 이유는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
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김지하가 말하는 대로 단군을 강조하는 것은 '구심점'을 만들기 위한 
것인 것이다.
  그러나 '구심점'이란 무엇일까. 지금 현대 세계 사상의 조류는 이 '구심점'을 강조하는 일
의 폐해, 즉 '중심'사상이 만들어온 폐해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중심'주의는 주변부를 소외
시키고 배척하고 급기야는 제거에 나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눈감게 했던 것이 바
로 '뿌리'사상이며 단일민족 환상이며 공동체중심주의였다고 하는 것이 현대 사상의 중요한 
결론이다. 그런 이 시기에 김지하가 새삼스럽게 '뿌리'를 강조하는 것은 '한국의' 독자적 사
상 만들어내기에 전념한 나머지 바깥의 사상에 관심이 없었거나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천황'이라는 구심점이 있어야만 나라가 지속된다고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사고를 갖고 있
거나 한 것일 터이다. 미시마가 구심점의 회복을 외치며 자살한 지 30년, 세기말 한국은 세
계적 조류를 되돌려놓으려 하는 시대착오적인 담론이 횡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본을 답
습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3) '고유'는 있는가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고유'한 단일민족사상이란 과연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단일민족사상이란 어떤 것인가. 태초에 한 인간이 있었다. 그 인간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았다. 한 지역에서 바깥으로부터의 다른='불순'한 피가 들어오지 않은 
채로 수백 수천 년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고 상상하면서 사람들은 '순수'를 상상하고 그에 
따른 '고유' 환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태초'의 인간이 '순수'하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까? 그를 하느님이 손
수 빚어(이것이 바로 단군신화지만) 지상에 떨어뜨려 놓았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그의 순수
란 증명되기 힘들다. 한 사람의 시원의 인간을 상상한다는 것도 무리지만(그들은 이미 그룹, 
즉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을 테니까, 그들이 모두 한핏줄이라는 증거는 없다.) ,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몇 천 년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인간의 피가 그 '순수'를 지켜낼 수 있을까?
  우리가 곧잘 말하듯이 한국은 수없이 외부로부터의 침탈을 받았다. 전쟁이란 필연적으로 
그 나라의 여성을 강간(혹은 사랑이 있었을 수도) 한다는 방법으로, 정복자로서의 증명을 자
신과 상대방 남자들에게 과시한다[하세가와 히로코, {의식으로서의 성폭력}, '내셔널 히스토
리를 넘어서', 도쿄대학 출판부,1998]. 중국계와의 혼혈은 왕족 수준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졌
으며 두 번에 걸친 대대적 일본인의 침략이 한국인의 '순수'한 피를 지켜주었을 거라고 상
상하는 것도 무리다.
  더구나 신화에 의하면 우리는 곰의 자손이 아닌가? 처음부터 '인간'으로서의 순수조차도 
깨진 상태다. '단군은 우리 조상인가'의 저자도 이미 지적했지만, 단군의 실재인물 여부를 
떠나 현재 한국에 사는 우리가 '단군'이라는 한 인물을 조상으로 하는 단일민족일 수 없음
은 분명한 일이다. 한국의 지배계층이 일본을 이루었다는 발상이 가능하다면 중국의 지배계
층이 한국 토착민을 정복하고 국가를 이루었다는 사고도 가능하다. 단일민족임이 주장되는 
한편에서 중국인이 시조였다는 족보들이 당당히 존재하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아마도 그 족
보는 중국과 관계 있다는 사실이 가문의 영광이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민족이 강조되는 것은 그것을 믿는 일이 '구심점' 만들기로 연결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글자 그대로 '순수'한 '고유'란 존재할 수 없다.
  이를테면, 서기가 아닌 단기로 달력을 돌리자는 것을 기독교의 관습이 정한 달력에 전 세
계가 따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겠지만, 서양 중심의 문명을 거부하기에는 이미 서양은 너
무나도 깊숙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자리잡은 것을 언제까지고 '
남'의 것으로 생각하고 거부하려는 사고방식 자체가 민족주의가 시키는 바인 것이다.
  그런 사고라면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와 문명의 자산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의복, 서양 음악, 서양 미술, 학문, 온갖 제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현재의 우리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의 많은 부분이 서양 것이거나 일본 것이다. 일본은 
천황 중심의 연호가 세계화의 움직임에 반하는 것이라고 내부비판이 있는 이 시기에, 우리
는 새로이 고유력을 공존시키는 데 따른 번거로움을 감수하자는 것일까?
  그런 번거로움을 모르는 바 아닐 터인데도 단군력으로 돌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5000년 역
사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대체 역사가 길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길이만으로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우리뿐이다. 진정한 권위는 길이가 아니라 
내용이 만들어내는 법이다. 말하자면 그 주체가 창출하는 가치가 결정하는 법이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나가 아니라 그것이 '현재'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에 따라 권위는 부여되는 
것이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권위란 통용되지 않거나 일부에서 통용될 뿐이다.
  
  4) '단군'이란 누구인가
  물론 '단군'이라는 인물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군신화가 역사이기보다 '신화'일 수
밖에 없음은 무엇보다도 그 내용이 1500년 통치를 강조하고 1908세의 수명을 강조하기 때문
이다. 한 인간에게 보통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요소가 가미되는 순간이야말로 한 인물이 글
자 그대로 '신화'화되는 순간이다. '신화'는 '신화'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과장이라는 
수식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대상의 신화화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상 '신화'의 경우 그 범상한 인간을 뛰어넘은 초월성은 다름 아닌 후예의 존재의 필연성
과 가치, 곧 선민성을 증명한다. 
  단군신화는 일연이 고려 때 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10세기경 몽고가 고려를 침
공했을 무렵 쓰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외부의 위협이 있거나 새로운 왕조(통치자) 가 들어섰
을 경우 인간이 우선 필요로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정당성이다.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통한 '구심점' 만들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정당성을 위해 수많은 도구가 이용된다. 그 중의 하나가 신화 창조다. 일본의 신화집 
'고지키'도 새로운 왕조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물론 그 때는 그
것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이 '만들어진'것이라는 사실을 어느샌가 잊는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
인하는 일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면서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물론 이런 일 자체가 나쁘다거나 좋다고 말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인간은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위기를 맞으면 크게는 국가가, 작게는 무수한 지역공동체와 가족들이 자신들의 
'기원'에 관한 신화를 만들어낸다. 단군신화도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
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 자신의 중심을 파괴하고 해체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만
들어 국가로서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유를 모
르는 채로 우리를 옭아매었던 경직된 '중심'사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어떤 식으로 존
재하는 것이 모두를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면서 타자를 적대시하지 않고도 공동체를 꾸려나
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민족(혹은 종교 등 다른 공동체) 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모
든 전쟁과 살상의 무의미함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세계가 민족분쟁과 
종교분쟁을 넘어서 평화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초등학교마다 커다란 단군상을 세워놓는 일로 한국의 '정신'이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일도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지만, 또 그렇다고 이미 세워진 단군상을 목을 자르는 식으로 훼
손시키는 일도 황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단군은 현재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직동에 있는 단군 
사당은 조잡하고 쓸쓸하다. 그러나 그것이 신화가 되었건 역사가 되었건 이데올로기적인 것
이 아니라면, 가끔씩 바라보고 마음의 위안을 받는 인물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것은 물론 좋
은 일이다. 문제는 그런 것은 인위적으로 강요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다.
  '단군'을 기반으로 한 '민족정신'의 회복이란, 다시 말하지만 시대착오적이다. 구태여 단
군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지나칠 정도로 민족주의적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어떤 '정감'의 회복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강요되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은 무성한데 진정한 어떤 교감, 모두를 서로 
좋아하게 만들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군이나 '민족'을 강조한다
고 해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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