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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일본 문학 이야기(1) -'설국'에서 오에 겐자브로까지

by FraisGout 2020. 8. 23.

  1) 경제의 선진성은 문화의 선진성으로 이어진다
  박경리는 일본 문학을 폄하하지만, 일본 문학은 이제 한국에서도 확실한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문학 이전부터 인기 있던 만화는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일본이 만화로 문화 '침략'을 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침략'이라는 것이 수용
자의 의지를 무시한 폭력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압도적  숫자의 소비자들의 (읽고 싶은)   

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화는 수입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침략'이
라고 부르는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존재하지 않는 일본의 '의도' 만들어내기에 가담하
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읽고 싶은 걸까. '일본' 것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재미
'와 '감동'(이는 대중문화가 소비되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을 추구한다.  언젠가부터 청소년

의 화제에 오른 대상이 '일본'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일 따름이다. 
  서구의 문화가, 그것이 '서구'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필연성-예를 들면 선
진국의 것이라는, 그래서 더 높은 수준의 문화에 접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지적 욕구를 충족
시켜주는-을 갖고 우리와 만나게 되는 것처럼, 한때의 음성적 일본 문화의 유입 역시 '일본
'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진'국이거나 유입조건이 좋은 '이웃'의 것으로서 이루어지고 있
었다. 일본의 만화는 일찍부터 미국으로 아시아로 수출되고 있었고, 한국의 만화 수입 역시 
그러한 흐름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었다.
  경제의 선진성은 필연적으로 문화의 선진성으로 이어진다. 일본이 '경제'대국이지만 '문화
'대국은 아니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은 경제와 문화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오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경제를 뒷받침하는 고도의 기술 역시, 넒은 의미에서는 그 민족
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갈고 닦은 '문화'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과거에 일본의 '선진'국이었던 것처럼, 오늘의 일본이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가고 있음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그들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후진국이 어느새 
훌쩍 앞서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불편해한다. 하지만 그들이 과거에 우리가 문화를 전
해준 후진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쩌면 식민지가 되었을 때 이미 잊어야 했는지도 모
른다.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21세기를 코앞에 둔 오늘이고, 오늘 우
리가 그들에게 뒤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야말로 더 이상 뒤지지 않는 길로 이어
진다. 그 명백한 사실을 보지 않고 90년대의 대부분을 '우리식'으로 하면 된다는 식의 자기
만족에 빠져 일본에 대한 편견과 왜곡에 열광했지만, 이대로라면 우리는 '일본'에 뒤질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도 뒤쳐지고 말 것이다. 
  
  2) 오에 겐자브로의 '상상력'
  일본 문화가 경계의 눈초리를 받는 동안에도 '문학'은 별 문제 없이 유입되었던 분야였다. 
그러나 한 시대 전에 교실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돌려가며 읽혔던 '빙점'이나 노벨상을 받
았다고 해서 유명해진 '설국', 심지어는 임신한 부인들이 태교 목적으로 읽는다는 묘한 수
용형태를 보였던 '대망'을 제외하면, 80년대 말까지의 일반 독자들의 일본 문학에 대한 관
심과 지식은 거의 전무에 가까운 것이었다. 문단에서도 일본 문학은 경시되는 경향이 있었
고, 우리의 눈은 오로지 서구 문학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2,30년.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그 동안 훌쩍 성숙해진 일본 문학, 그리고 그에 따른 일본 문학의 세계화 현상이
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그들은 오늘날 영어로, 이태리어로, 불어로 활발히 
번역되면서(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의 자발적 번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쌓여 가는 무역흑자에 일조하기에 이른 것
일까.
  90년대로 들어선 이후 우리에게는 현대 일본 작가의 작품들이 적지 않게 소개되었다. 지
속적인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고 스테디셀러의 대열에도 끼게 된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해, 
노벨상 수상이라는 화려한 타이틀과 함께 갑작스럽게 알려진 오에 겐자브로, 신세대 작가로 
알려진 요시모토 바나나,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면서 우리에게도 유명해진 교포작가 유미
리 등, 대가에서 신인급까지 활발히 소개된 덕에, 우리에겐 불충분하나마 현대 일본 문학의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는 자료가 주어져 있다. 여기에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와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아사다 지로까지 넣는다면, 우리에게 이미 일본 문학은 생소한 것
이 아니다. 
  우선 먼저 명실공히 현대 일본 문학의 거장으로 우뚝 선 오에 겐자브로에 대해 생각해보
자.
  그가 장애아, 핵 등을 소재로 인류의 멸망이라고 하는 절박한 위기감 속에서 '구원'으로서
의 문학을 지향한 작가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그는 '상상력'이라는 어휘
를 곧잘 쓰는데,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창조적 공상력과는 거리가 있는 단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능력이 그가 말하는 '상상력'인데, 이 말은 
간단하면서도 실천은 간단치 않은(크게는 인류가 이제까지 자행해온 그 수많은 전쟁, 작게
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많은 갈등을 빚어내는 육체적, 정신적, 언어적 폭력들이 바로 그 '
상상력'의 부족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 어휘야말로, 오에 문학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 중의 하나다. 
  그가 시종일관 추구해온 것은 인간에 있어서의 '폭력'의 문제다. 예를 들면 1967년의 작품
인 '만연 원년의 풋볼'은 근대 일본이 낳은 가장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라 단언할 수 있는
데, 그건 거기에 인류의 불행으로 이어지는 '폭력'에 대한 깊은 사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타자 배척-이물감 제거에의 끝없는 지향-이 시작되는 장소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은 우선 자신 속의 폭력으로 향한다. 나아가 그 눈은 자신이 속했던 
작은 시골마을이라는 공동체를 들여다보는 일로 향하게 되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일본이라
고 하는 공동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비판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을 들여다보는 일 그 자체다. 이것이 오에가 이루어놓은 일이다.
  
  3) 일본 작가들이 '타자'와 '폭력'에 맞서는 방식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이 젊은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 세계적인 현
상이지만, 하루키의 문학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문학을 '상실'이라는 어휘에 의
거해 읽는 데는 문제점이 없지 않고, 그가 '태엽 감는 새'에서 처음 시도한 '타자'를 향한 
적극적인 손 내밀기와 '역사' 들여다보기는 꼭 성공한 시도였다고 만은 말할 수 없다. 그러
나 '상실의 시대'라는 감상적 작품으로 알려진 그가 늦게나마 그런 시도에 나섰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을 그러한 시도에 나서게 한 것은, '양심'이라기보다는 '지성'이다. 오늘날의 세계적 
사상가들의 양상은 달리 하면서도 공통적으로 천착하는 문제가 인종차별과 종교분쟁 등이 
야기하는 폭력이라는 점, 나아가 어떻게 하면 이질적인 것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정확히 
말하자면 본능뿐 아니라, 동질성을 강조하는 교육의 결과기도 하지만-을 넘어서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가(예를 들면 데리다는 그 방법의 하나로 '호혜' 개념을 제시한다.) 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하다.
  물론, '타자'와 '폭력'이라는 문제제기라 '역사'면에서의 접근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
니다. 신세대 작가처럼 알려졌지만 이미 중진 작가라 해야 할 야마다 에이미의 경우, '풍장
의 교실'에서 교실폭력의 문제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유발케 하
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며 그러한 '폭력'에 맞서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작가가 제시
한 방법에 대해 '인내'라든가 '사랑'이라는 도덕적 대답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기존의 가치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찾아낸 그 선택은, 최상의 것은 아닐
지라도 주인공 소녀가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택할 수 있었던, 글자 그대로 '현실적
인' 선택이다. 동시에, 흑인이 자주 등장하는 야마다 소설의 또 다른 주요 테마가 인종차별
문제라는 것은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차이'에 대해 '차별'을 행사하는 인간의 본능, 그 
근원을 깊숙이 들여다보려 하는 야마다의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오엔 겐자브로의 작업과 전
혀 달라 보이면서도 맞닿아 있다.
  유미리의 소설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붕괴 직전에 있거나 붕괴 이후의 가족을 주로 다
루고 있었다. 그녀의 소설은 '가족'을 하나의 제도로 인식할 뿐이며, 그에 따른, '혈연'에 대
한 냉정한 거리 두기라는 자세를 취한다. 가족을 다룰 경우 가족의 붕괴를 애석해하는 것이 
중심이었던 우리 문학이 '혈연' 환상에 기대고 있는 것이라는 점, 따라서 '제도'로서의 가족
-현재와 같은 개념의 가족이 정착된 것은 고작해야 100년이 되지 않았고, '가족' 개념은 의
식적, 무의식적으로 타자 배척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의식의 정착되기 전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소설과 유미리의 소설이 서 있는 곳이 한 동안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마다 마사히코의 건조한 소설들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역시 자신 속에 존재하는 '공
동체' 환상을 일찌감치 떨쳐버린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일본'인으로서의 '
주체'성이란 실소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이 아닌 어딘가, 도시가 아닌 '교외', 중심부
가 아닌 주변부에 남기를 그는 희망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떠 있기를 희구하는 
곳은 어딘가에 '속하'지 않아도 되는 '중간지대'다. 그건 그가, 단순한 주변부에의 동경이 
또 하나의 중심부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경우는 얼핏 보기에는 이들과 좀 달라 보인다. 예를 들어 '가족' 개념
만을 두고 본다면, 그녀는 유미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장소에 서 있다. '가족'은 그녀에게
는 거리 두기 곧 상대화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여전히 위안 받는 장소다. 그러나 좀 더 들여
다보면 그 '가족'은 꼭 '혈연'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같은 공간에 살면서 바깥
에서의 상처를 위무해 줄 수 있는 상대, 바나나에게 '가족'의 성립요건은 그것만으로 충분하
다. 그뿐 아니라, 동성연애자라든가 성전환자 등 아직 사회 속에서 용인되지 못하고 있는 존
재도 그녀의 소설 속에서는 이질적 존재가 아니다. 모든 존재를, 자신과 같거나 비슷하기 때
문이 아니라, 다른 채로, 혹은 다르기 때문에 끌어안는 그녀의 소설은, 인류의 비전을 제시
하는 또 하나의 작은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시도의 성공 여부는 놔두고라도 평
가할 만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은 좁은 의미의 '소설'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얻을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그녀의 가치관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가 우선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일본'의 한 작가가, 현대가 아닌 고대의, '일본'이 아닌 '로
마' 이야기를 써서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번역된 히라노 게이치로도 마찬가
지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세계를 대상으로 해 관심사항을 심도 있게 흡수, 소화해내고 충분히 사유해 자신의 것으
로 재창조해내는 일본 자체의 특성이 문학에서도 발휘되고 있는 셈인데, 그 바탕에 예를 들
면 일본 고전문학은 물론 근대 초기의 문학까지도 패러디화되는 강도 높은 흡수력이 있음은 
물론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심도 있는 천착-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전통'의 계승
이 아닐까-이 그 대상을 넓히게 되면, 세계 공통의 자산까지도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게 된
다. 그런 과정을 거쳐 '모방'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 재창조가 일본에서는 눈에 띄게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소재를 넓히는 것은 소재의 진부함과 상투
성을 탈피하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물론 유연한 사고와 폭넓은 지적 호기
심이 필요한데, 시오노 나나미가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을 가지
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화가 세계로 수출되고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
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사해문서'[주: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 사해 근처 동굴에서 발견된 양피지 문
서. 2000년 전의 히브리어로 쓰여진 그 내용은 기존의 성서의 권위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어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음.]등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다.
  
  4) '설국'의 30년 후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작가까지 포함한다면, '폭력'과 '차별'에 대한 관심, 중심화 현상의 
지양, '문학', '모국어', '민족' 등 우리가 자명시 해왔고 또 여전히 하고 있는 개념에 대한 
거리 두기, 폭넓은 지적 호기심 등이, 현대 일본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공
통요소다. 우리 문학이 90년대에 개인의 내면과 '죽음'을 다루고 있을 때 그들은 공동체의 
문제와 죽음을 건너뛴 '삶'을 모색하고 있었다. 단절이니 고립이니 하는 자폐적 문학을 벗어
나 '관계'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자기미화를 벗어나 자기비판을 시도하고 있었다.
  대책 없는 냉소와 감상적 고독과 자기비판 없는 억압의식, 메마른 공허감 등등은 더 이상 
그들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일상의 무의미'를 거론하며 자신을 껍질 속에 가두는 문학이 아
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그것들이 주류가 될 수 없는 것이 현대 일본 문단의 상
황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모두 현대 일본 문학이 종래의 감성적 '문학'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
타자'를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한 데서 일어난 현상이다. 자기 투영적인 타자가 아니라 살
아 있는 '타자'를. 그리고 그건 그들이, '타자'에게 열리지 않는 '자기' 이야기가, 나르시시
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비생산적이라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여전히 인종차별과 종교분쟁이 끊이지 않고, 지구 어디에선가 난민은 생기고 있으
며,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공존을 위한 지혜일 
것이다. 현대 일본 문학은 '타자'를 만나는 길을 각기의 방법에 따라 모색하고 있으며, 그들
의 세계 진출이 순조로운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오에의 문학이 노벨상 수상을 통해 세계문학으로서 자리잡게 된 사실은 이를 증명하는 좋
은 케이스였다. 오에보다 앞서 노벨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은, 최종적으로 총
괄하자면 '설국'이 보여주고 있듯이 '일본의 미'를 추구한 문학이었다. 그러나 오에의 문학
은 '일본의 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오에에게 상이 주어졌다는 것은, 불과 30년이 
채 안 되는 동안에 세계의 문학관이 변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30년 전, 온천마을의 게이샤(기생) 를 중심으로 서술되었던 일본적 아름다움
의 표현을,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평가했던 노벨상 위원회가, 이제는
(30년 동안의 지적 수준의 고양에 따른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라 해야겠지만)  달라졌다
는 말도 되겠다. 가와바타와 같은 자국중심주의적인(바꿔 말하면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문학이 아닌, 비록 무대는 일본의 산 속 작은 마을일지언정 세계인이 '내 이야기'로 공감할 
수 있는 인간 근원의 문제를 다룬 문학을 지금 세계는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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