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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일본관의 원형, '국화와 칼'

by FraisGout 2020. 8. 23.

  실은 이러한 일본관의 원형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국화
와 칼'은 일본론의 고전격이 되고 있는 책이지만, '미를 사랑하고 아름다운 국화 만들기에 
온 힘을 기울이는' 아름다운 심성의 일본과 '칼을 숭배하고 사무라이에게 최고의 존경을 바
치는' 잔인한 일본이라는 식으로, 두 얼굴을 가진 일본으로 규정한 것이 바로 베네딕트였다.
  베네딕트는 유교적 가족주의가 일본의 의식을 결정하고 '온'이 일상생활을 지배하며 일본
인들은 '자기 분수에 맞는 위치'에 있으려 하며 '수치감'이 행동을 규정한다고 했다. 이 분
석은 주종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집단주의와 계층사회로서의 일본상을 굳혔지만, 실은 집단이 
아닌 개체로서의 존재방식도 강했고 절대적 수동성의 이미지에 반하는 서민층의 봉기도 적
지 않았다는 식의 반론이 최근에는 강세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베네딕트는 일본에 체재한 적이 없었고 그의 연구자료는 미국에 거주
하던 일본인이거나 문헌이었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뛰어난 분석을 보여주었지만,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언어 해석에서 오류를 범하는 한계를 드러내고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분석대상은 근대 이전의 일본이 중심이었고, 현대라 해도 1944년까지의 일본이었다. 그
런 한계를 보지 못하고서는 기존의 판에 박힌 일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국이 그녀에게 연구를 시킨 것은 전쟁이 끝나고 일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해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일본을 야만국으로 보고 있던 시기였고, 그런 우
월감과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일본인을 세상에 흔치 않은 희한한 종족으로 특수화시킨 부
분이 없지 않다.
  한 대상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하는 일은 대상 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무시하는 일이
기도 하다. 물론 규정은 때에 따라 필요하지만, '차이'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런
데도 그 차이가 무시된 결과 ,서양 사회에도 있는 계층사회가 일본에'만' 있는 것으로 규정
되거나 동양 공통인 유교적 관념을 일본만의 가치관인 것처럼 '국화와 칼'은 서술하고 있
다. 그 결과, 이중적인 일본인상은 평화 속에서도 언제 칼을 빼들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확산
시켰고, '이해할 수 없는 위험한 민족'의 이미지를 유포시켰다.
  이렇게 타자에 대한 분석은 분석자가 속한 시간과 공간과 자질에 의한 한계를 보이는 법
이다.
  최근의 베스트셀러인 '먼 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이원복) 도 기본적으로는 베네딕트적 시
각을 답습하고 있다. 일본은 칼의 문화라거나 사무라이에 대한 이해나 창의성에 관한 설명
이 그렇다. 혹은 이기주의나 '이지메'에 관한 해석, 폐쇄성, 일본어를 퍼뜨리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시각도 기존의 경계성 발언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일본어의 확산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일본어는 이제 세계 사용자수 3위에 달한 언
어다. 언어란 어떤 의미에서 경제 자체기도 해서 강대국의 언어가 항상 세계 속에서 중심이 
되는 건 그 때문이다. 개인이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나라를 알고자 하는 욕구
와 같은 소수의 동기를 제외한다면 그 언어를 배우는 것이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고 최종
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최근의 영어 열기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무지와 편견으로 점철된 여타의 일본론과 비교한다면, 이 책은 편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보이는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류들이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일본에 관한 한 편견의 배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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