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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이중적인 일본인, 교활한 일본인?

by FraisGout 2020. 8. 23.

  '독한' 일본인의 이미지는 그 정적인 모습과 함께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중성을 가진 일본인과도 연결된다. 또 잔혹한 일본인상과 대치되는, 벚꽃을 사랑하고 차를 
즐기며 부드럽게 미소하는 일본인상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중적'인 일본인상으로 연결
된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속마음'을 따로 갖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정
말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도 이런저런 이유로 (그건 공적 관계일 수도 있고 사적 관계일 
수도 있으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일 수도 있고 의식적 거짓에서일 수도 있다.)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어떤 집단에게나 있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일본인이 유독 표적이 되는 것은 그들에게 그 경향이 강하기 때문일지는 모르겠
다. 굳이 말한다면, 한국인이 비교적 속내를 잘 보이는 경향이 강한 데 반해 일본인들은 속
을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해두는 정도가 정확할 텐데, 그것은 앞에서 말한 
거리감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혹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공공성의식의 차이에서 
오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일본인의 이중성 이미지가 '교활' 혹은 '간교'한 이미지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앞
에서 본 것처럼(정대균, 앞의 책)  한국에서의 일본인의 대표적 이미지는 '식민지 지배/2차 
대전'과 함께 '간사/야비'였다.
  
  1) 100년 전엔 한국인, 중국인이 '교활'했다?
  그런데 100년 전의 일본 서적들을 보면,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에 대한 표현으로 다름 아닌 
'교활'이라는 표현이 자주 눈에 뜨인다. 재미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간사'나 '교활'은 어
떤 한 민족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이민족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이미지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인간은 어떤 때 상대방을 '간교'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상대방이 자신의 이
익을 위해 타자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에 말해지는 단어다. 말하자면 이 쪽의 상상력을 넘
어설 정도로 머리를 굴려 나쁜 일을 획책할 경우에 그 형용사는 쓰여진다. 앞서의 조선총독
부나 쇠말뚝을 둘러싸고 '간교'의 단어가 많이 쓰여진 것도 그 한 예다.
  하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있을 때, 즉 막연한 경계와 피해의식이 그런 단어를 떠올리도록 
하는 경우도 많다. 말하자면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되는 경우 사람들은 상
대를 '간교'하다거나 '교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49년의 일본인의 한국인 이미지 조사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것도 '교활'이었다(정
대균, '일본인은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강,1999) . 당시 한국인은 해방감에서 얼
마간의 폭력을 행사했고 그 때문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존재로 경계되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교활'이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아 조사는 한국인을 두고 '군중심리'가 강하다거나 '집단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
여주고 있다. 또 '단결력이 있다'고도 말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 형용사들은 모두 우리가 
일본인에 대해 즐겨 쓰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이 결과는 양국 국민이 실제로 그런가 아닌가
를 나타냈기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이 대부분 어떤 상황 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미지란, 대부분이 이런 구조를 거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은, 그렇게 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리 주입된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교육일 수도 있고 언론 매체를 통해 얻은 것일 수도 있다.
  다음 글은 우리의 왜곡된 일본 인식의 대표격이라 할 만한 글이다.
  (한국이)  생명에 대한 추구, 삶의 문제 등을 상당히 도외시하고  있어요. 그것은 내가 요
즘 
가만히 보면 일본서 들어온 풍조예요. 그런데 상당히 기성인들 속에도 일본 문화를 찬양하
는 경향도 있고, 일본 문학이 우리보다 앞서가 있는 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있어요.
  4-3 일본을 바로 알자고 말하는 박경리
  일본의 전통, 문학이라는 게 그 역사의 시작이 하나의 칼로 시작했고, 간단히 이야기하자
면 우리 연표를 보면요, 우리는 마디가 굉장히 길어요. 그런데 일본은 많이 짜개져요. 그게 
뭐이냐? 끊임없는 전쟁에서 모든 말하자면 변혁이지요. 새로운 강자가 나오면 또 뺏고, 그러
니 일본은 전통적으로 칼을 숭상하는 나라였어요. 이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살았어요. 힘 앞
에서는 수동적으로 살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그 본질이 능동
적인 것이거든요. 이런 거(앞서 말한 일본인의 수동성) 는 전부 수동적이지마는 우리가 손가
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다 생명 가진 능동성 때문에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한 마디로 일
본 국민들은 수동적으로 살아온 민족이에요. 왜냐 하면 집단을 하나로 만들려면 국민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일본을 단결이 잘 된다고 부러워하거든요. 단결이 뭡
니까? 수동적이어야만 단결을 할 수 있어요. 개성을 죽이고 시키는 대로하는 거, 이것을 단
결을 잘 한다 해 가지고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일본을 칭찬하는 거예요. 단결을 잘하는 것
은 수동적인 것이고 수동적이라는 것은 창조적인 능력이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디서 본
을 가져오면 갈고 닦고 기능은 되지만 창조적인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창조적인 능력이 있고 일본에는 기능적인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그 기능적인 능력이 자본
주의가 들어오면서 이게 맞아떨어진 거지요. 기능 가지고 하는 게 자본주의 아니에요? 왜냐 
하면 자꾸 복제품을 만들어 파는 거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을 찬양하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오히려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문학은 어떤 형태로 나
타나냐? 이건 도피주의, 허무주의로 나가거든요. 그래서 일본 문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이 거
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 그러니까 생활과 예술이 유리되어 있는 상태지요. 그런데 이것
이 일본에서 들어와 가지고 난 요즘 작품 잘 안 읽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라든지, 아쿠타
가와 그 사람도 공언화 했잖아요. 자기는 예술을 위해서 살겠다고, 그러나 예술을 위해서 산
다면 인생에 최후가 없어요. 흔히 일본에 얼마나 많은 문인들이 자살을 했습니까? 다 그런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인제 탐미주의의 아류가 되거나 질이 떨어지면 에로티시즘이 
되는 거예요. 또 칼로 갖다 매일 싸우기 때문에 밤낮 피를 연상하게 되고 그게 그로테스크
예요. 그로테스크하고 에로티시즘이 일본의 탐미주의예요. 그런데 그로테스크나 에로티시즘
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뭐 우리가 알다시피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가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 종교도 형식만  갖추고 있지 진정한 종교가 없어요.(중략)   이런 식으로 

본의 종교라는 것이 갈팡질팡 아무 것도 완전히 없는 거예요. 완전히 없는 거예요.
  여기에는, 나쁜 것은 일본에서 온 것이고, 일본은 칼의 문화기 때문에 나쁜 문화이며, 강
자가 나오면 권력이 교체되었던 역사가 일본을 수동적으로 만들었으며, 그 수동적 자세가 
집단성을 유지했고, 모방은 잘 하지만  창조적인 능력이 없다(한국엔 있다)  는, 한국인들의 

반적 일본관의 총체적인 모습이 있다. 어쩌면 오늘의 한국인들의 일본관은 이대작가의 영향
을 받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쁜 것은 일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나 일본을 '칼의 문화'로 해석하는 일의 문제점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라. 일본인=수동적이라는 생각 역시 한국적인 정형적 일본관
이다. 권력 앞에 굴복하는 것을 '수동적'이라 표현한다면, 이것은 한국은 물론 어느 나라에 
대해서나 말할 수 있는 일이다. 수동적이고 얌전해 보이는 것이 일본의 일반적인 이미지지
만, 일본도 농민들의 반란 같은 것은 적지 않았고, 이른바 '하극상'으로 불리는 쿠데타도 적
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수동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단결력이 있다는 긍정적인 해석조차도 여기서는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부정적으로 해석되며, 창조적이 아니라는 말로 일본인은 모방'만' 한다는 많이 듣
던 말이 되풀이되고 있다. 기능적 능력과 자본주의를 연결시켜 말하는 일은 기술에'만' 능한 
일본, 경제적 동물 일본을 연상시키도록 만드는 부분이다.
  이 모든 것과 함께, "칼로 매일 싸우고..."나 "위대한 철학가가 없다."는 말도 왜곡과 편견
일 뿐이다.
  또 종교 역시 부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은 일본에
는 '진정한' 것,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데 있는 듯하다.
  
  2) '섬나라'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가 '섬나라'라고 우습게 보고 싶어했던 일본의 지형적 입지는,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
면 실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미완성'의 입지를 자각함으로써 자신들이 '받아들이는' 입
장임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새로운' 것에 대해 탐욕스러우리 만큼의 호기심을 
갖게 만든 입지기도 했다. 말하자면 아이덴티티 부재의 상태를 고수함으로써 '순수'니 '고유
'에 집착하지 않는, 이른바 '잡식문화'에만 가능한 저력을 길러준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재래 종교에 유교와 불교를 사이좋게 접목시키고 마는=종교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사람들한
테는 배척되어야 할 '불순'성이겠지만-일본의 유연성은 바로 이러한 그들의 특성에서 비롯
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그 특성을 살려 유불선을 합친 종교를 만들었다. 그나마 생활을 '지배'하는 
종교는 아니다. 그들에게 종교란 어디까지나 일상생활의 뒤편에 숨어 있다가 필요할 때 나
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종교라는 것을 절대시하지는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는 종교보다 생활이 더 중요했던 셈인데, 그들이 결혼식은 신도식으로,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한다고 해서 비웃을 일은 아니다. 왜냐 하면 그들에게 있어 '식'이란 어디까지나 의식일 뿐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잡식'이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결혼식은 서구식으로 하
면서 식이 끝나자마자 폐백이라는, 남성 우위를 만천하에 공고하는 전통의식이 시작되지 않
는가?
  인간은 의식을 위해 뭔가의 형식을 필요로 한다. 일본인의 경우 그러한 형식을 여러 종교
로부터 빌어 왔을 뿐이다. 그것은 '종교'를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분개하는가? 당신이 그렇
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종교의 '내부'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문명개화에 성공한 것도 이 특질을 적극적으로 발휘했기 때문이다. 서구의 생활양
식과 사고방식을, 다르다고 해서 이단시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일축하는 대신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키며 배우려 했고 끝내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1500년대에 이미 총을 만들어낸 
것도 다름 아닌 그런 그들의 특성이 가능케 한 일이다. 
  여기서 비판되는 탐미주의 문학은 다니자키 준이치로나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몇몇 탐미
적 작가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서양에서 가장 일찍 받아들여지고 평가
된 작품들은 바로 그런 작품들이었다. 물론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반영된 평가였지
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정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들의 문학이 혹은 그 어떤 것이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사고방식과 우리가 
여러 가지 자기 규제 하에서 드러내지 않는 부분을 그들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말들 역시 박경리의 시각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일본의 실용주의적 적응능력은 근대화를 이룩한 정신적 토대가 되기도 했지만, 이는 곧 
일본의 정신적 빈곤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외형적으로는 세계 최고수준의 경
제대국이 된 지금도 그 대외적 행동이나 문화수준에서는 대국이나 선진국의 그것에 크게 미
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원칙과 이념, 철학이 외국 문물의 수용과 근대화과정에서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김영명, '일본의 빈곤',53쪽) 
  자기도취에 빠진 일본인들의 대세계관은 이처럼 독선적이고 편협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부터 넓은 시각을 갖지 못하고, 다른 국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알지 못
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에서 당연히 생겨나는 그들의 큰 한계이다.(신평, '일본땅 일본바람', 
세대,1990,253쪽) 
  물론 일본에도 문제는 있다. 그러나 일본인은 '원래부터' 편협하다는 생각은 그것을 그들
의 태어날 때부터의 '특성'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편견을 조장한다.
  여기에는 한 민족을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지으려 하는 본질주의가 있다. 그것은 민족을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균일한 집단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민족구성원들의 역사적, 계층
적, 성적 차이를 무시할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한 대상을 표현하는 단어에 대한 열망은 어
쩔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경우엔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
고 거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에 관한 담론에 대해서도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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