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왜곡

일본은 '칼의 나라'?

by FraisGout 2020. 8. 23.

  집단주의는 어떤 맹목성과 힘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사무라이의 나라라는 
전제가 있다.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이며 한국은 선비의 나라라는, 한일을 문의 문화와 무
의 문화로 양분하는 사고는 우리에겐 극히 익숙한 것이다.
  조선에선 붓을 든 선비가 있었는데 일본에는 칼찬 다이묘들이 할거했고 그 밑에 역시 칼
찬 사무라이들이 있었다. 조선의 당쟁에선 그대로 말이 앞섰는데 일본에선 칼이 앞서 있었
다. 조선에선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거나 귀양살이를 갔지만, 일본에선 일족
이 완전히 칼 아래 목숨을 잃었고 마을 전체가 불타 없어지기도 했다.(중략) 
  우리에겐 그런 대로 토론문화의 실마리가 있었지만 일본에는 그런 실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중략) 
  일본의 단결이란 한 마디로 강요된 단결이었다. 섬나라에서 칼찬 다이묘를 따르지 않았다
간 죽음밖에 없는데 어찌하겠는가...(중략)  그들이 죽고 사는 것은 대의를 위한 것이라기보
다 
오야붕을 위한 것이었다...(중략)  이와 달리 조선인들은 오야붕을 섬겼던 게 아니라 대의를 
섬겼다.(홍세화,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한겨레신문,1999,104-105
쪽) 
  '붓을 든 선비'와 '칼찬 다이묘'의 대비, '말'과 '칼'의 대비, '토론문화'의 유무, '강요된 
단결', '대의' 존중과 '오야붕' 존중이라는 이분법은 전부 한국의 우위를 증명하는 논법의 
자료로 쓰여지고 있다.
  
  1) '칼=폭력=성'의 도식
  하지만 '다이묘'란 '칼'만 차고 다닌 무식쟁이가 아니었다. 그들의 학문에 대한 정열은 놀
랄 만한 것이었고, 뛰어난 유교적 학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토론문화'가 없었다는 것은 
오해다.
  설사 그런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정치가 '칼'만으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
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일본의 근세, 즉 본격적 무사정권 시대는 실은 전국통
일이 이뤄지고 유례 없는 국내적 평화가 유지된 시대였다. 싸울 일이 없어 사무라이 중 실
업자가 속출하기도 했던 시대였다. 그들에게 지적 자산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일 
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칼의 나라다. 일본 중세 전국시대에는 약 280개의 봉건국가들이 
있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싸움, 칼싸움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늘 죽음이 일상
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김경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바다,204
쪽) 
  일본의 성 개방 문화는 기후와 칼 때문에 빚어진 것들이다. 더운 지역이기 때문에 노출이 
많고, 그 끈적거리는 일본의 여름을 지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주 씻어야 한다. 그러다 보
니 성적인 유혹과 접촉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206쪽) 
  또 다른 하나는 앞의 폭력문화 부분에서 살펴본 것처럼 칼의 문화가 빚은 성폭행들 때문
이다. 수시로 유린되는 여성들 역시 나름의 합리화가 필요했으며, 그 합리화가 조금 느슨한 
정조관념으로 바뀐 것뿐이다. 조선의 여인들처럼 자살을 하지 않을 바엔 마음 편한 편이 나
을 것은 뻔한 이치다. 일본인 특유의 현실타협심리들은 모두 이렇듯 조금은 슬픈 역사를 지
니고 있다. 무조건 욕만 할건 아니다.(207쪽)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유교적 사고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음을 가르쳐주었던 김경일 
교수도 '일본=칼의 나라'라고 하는 정형적 일본관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물론 
이 글은 일본을 "무조건 욕만 할건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니 일본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글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 개방 경향이 '기후와 칼' 때문이라는 해석이 너무나도 단
선적인 이해임은 초등학생이라도 알 만한 일이다. 그의 논리에 따른다면 일본의 성 개방 풍
조는 여름에 한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걸까. 하긴 한국은 '추워서' 일본과는 다르다고도 
하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본이 한국에 비해 '성의 홍수'로 뒤덮인 나라로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성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일을 금기시하지 않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일 뿐이다. '칼의 문
화'와 '성폭행'의 연결은 아마도 '칼'이 '폭력'을 연상시켰기 때문이겠지만, 여성들은 그의 
말처럼 '수시로 유린'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성을 팔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합리화'
가 필요할 리도 없다. 물론 이것은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자살하지 않
을 바에야...'라는 말은 여성들이 강간이라는 폭력에 대항하지 못해 자살했던 일을 미화시키
는, 결과적으로 여성 억압으로 이어지는 위험한 발상이다. 성 의식에 관한 한,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유교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칼'과 '폭력'과 '성'은 그들만
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한 이 글 역시, (일본의)  "저열한 성문화 때문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며, "일본인들
의 
성 의식을 초월할 수 있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우리만의(강조는 필자)   성문화를 우리 청소

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일본의 저질 성문화를 극복하는  유일한 대안"(207쪽) 이라고 강조하

서 '저질' 일본에 대비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한국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데서, 우리는 
일본에 관한 우리의 담론들의 공통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쪽도 이미
지일 뿐 '실체'는 아닌데도, 일본을 비판하는 글은 거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긍정과 미화
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노골적으로 비판적인 글보다도 이처럼 호의적으로 보이면서 실은 
자신의 편견을 의식하지 못한 글들이, 그 편견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편견의 재생
산에 더 기여할 수 있다.
  '사무라이들의 폭력적 성문화'(207쪽) 라는 말은, 사무라이=성=폭력이라는 간단히 연결로 
우리의 편견을 심화시키고 있지만, 일본에는 이토 진사이를 비롯한 뛰어난 유학자 및 사상
가가 있었고, 그들은 무사들의 브레인으로서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또 사무라이의 최
고봉에도 막부의 장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쇄국정책을 완화시켜 네덜란드를 통해 18
세기 전반에 이미 서양학을 받아들인 장본인이다. 일본이 19세기 중반에 남보다 빨리 근대
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부를 쓰러뜨리고 새 정부를 세
워 근대화에 앞장선 것도 다름 아닌 사쓰마와 조슈번의 '칼찬 사무라이' 들이었다. 그뿐인
가. 무엇보다도 그들은 조선 통신사를 정중히 대접할 만큼은 '문화'에 대한 지적 욕구가 컸
다.
  
  2) 선비는 사무라이보다 훌륭한가
  우리는 스스로를 '문의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것은 조선 시대의 선비 계층만이 우
리 머릿속에 강하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불과 
5백여 년 지속된 전체 역사 중의 한 시대일 뿐이다.
  원나라가 침략해왔을 무렵 고려는 80여 년 간의 무신정권 시기였다. 그리고 조선은 고려 
시대의 무신정권의 체험에 근거해 이러한 전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문관을 우위에 
놓고 무관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했다. 때문에 군대의 중요한 포스트까지 문관이 차지했다. 
문관을 통해 출세하려는 의식은 그런 맥락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데 지나지 않는 것이
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무관이 되려는 사람은 적었고, 방위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중국에 
의지해야 했다. 당연히 군대는 약화되었고, 1592년에 3주일만에 수도가 함락된 것은 그 때문
이었다. 1637년에 청나라에 한 달만에 제압 당한 것과 19세기 말 일본에 병합 당한 것도 그
런 '무'의 취약함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이순형, '일한병합', 후지제록스 
고바야시 후시타로 기념기금 1998년도 연구조성논문, 도쿄) .
  그런 부분을 도외시하고 우리는 '문'의 나라였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
방식이 '문'을 우위에 두는 것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이순신 장군은 무관이 아니던가? 을지문덕은 어떤가? 최
영 장군은? 그들을 우리는 선비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하는가? 그들은 지적 능력이 부족했
을까?
  현대의 스포츠선수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신체적 능력은 실은 정신의 능력과 무관하지 않
다. 더 나아간다면,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정신과 신체를 나누어 생각하는 일 자체가 
근대 이후의 사고방식이다. 우리에겐 '선비'라는, 일상에서 정치까지 '현실'에는 관심을 두
지 않고 '학문'만 하고 있어도 어느 날 출세가 가능한 직업계층이 있었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는 '무'라는 '기술'을 경시하지 않는 가치관이 
존재했을 뿐이다. 
  무관을 경시하는 발상처럼 일면적인 이해에 머문다면, 우리의 선비 역시 얼마든지 부정적
으로 말해질 수 있다. 처자식이 굶어죽거나 말거나 언젠가 출세할 날을 꿈꾸며 글만 읽고 
있었던(과거는 창의성을 보기보다는 얼마나 잘 외우고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에 중점이 주어
졌다던가.)  독서인에 불과하다고 누가 선비를 매도한다면, 우리는 수긍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여기서 사무라이가 선비보다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우리의 시각이, 정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사고와 시스
템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도록 길들여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사무라이가 경멸되는 다른 한 쪽에서는 대표적인 사무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
('대망') 가 "우리에게 역경을 극복하는 방법과 기회를 기다리는 인재의 종요로움을 일깨워
주는 '인간 치세의 경략서'"(조선일보,1998.10.10 광고) 로 권장, 소개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모습이다. 아이러니 아닌가.

'기타 > 왜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인은 잔혹하다?  (0) 2020.08.23
일본에는 기술'만' 있다?  (0) 2020.08.23
일본인은 창의성이 없다?  (0) 2020.08.23
일본은 남북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0) 2020.08.23
일본의 '사죄'는 없었는가?  (0) 2020.08.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