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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일본인은 창의성이 없다?

by FraisGout 2020. 8. 23.

  실은 90년대 이전부터 우리에겐 일본에 대한 공통적 이미지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일본 대중문화 유입이 한국에 줄 피해를 강조하는 한 신문 4컷 만화에 보이는 
기모노와 게타와 뻐드렁니의 일본인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전통이며 특징이지만 결코 
긍정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는 없는 것들이 한국에서는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잡
고 있다는 한 예다.
  현대인이라 해도,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인은 여전히 순사거나 헌병이거나 
그나마 최근 들어와 추가된 모습이 야쿠자다. 김진명 소설에서처럼, '보통사람'은 좀처럼 등
장하지 않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도 순사나 헌병이 아닌 일본 사람은 당연히 존재했을 터인
데도, 해방 후 50년, 국교정상화 후 30년 이상이 지났어도 그 상황에 큰 변화는 없다. 그리
고 그것은 물론, 우리 속의 일본상이 가해자, 악인으로서의 일본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악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정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생각해 보라. 현대 한국에 대해 언급하는 외국의 신문잡지가 상투 틀고 짚신 신은 한국인
을 등장시킨다면, 그것을 우리는 자신의 모습으로 수긍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 우리의 
모습이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조상'의 모습일 뿐 현대 한국을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는 생활과 행동양식과 사고 모든 면에서 100년이나 200년 전의 우리 조상보다
도 어쩌면 오늘을 함께 사는 이웃나라 사람들과 공통점을 더 많이 지닌다. 말하자면 우리는 
'한국' 인이되 그보다도 더 '현대' 인이다.
  미국이나 유럽을 표현할 때는 그런 현상이 거의 없다. 우리는 구태여 그들을 그들의 수백 
년 전 모습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왜? 그것은 그들의 전통적인 모습보다 현대의 모습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 대한 관심이 근대화를 둘러 싼 것이었고 그들에 대
해 아는 일이 근대화 자체기도 했던 만큼, 그 이전의 모습은 알고 있더라도 이미지의 중심
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일본과 함께 중국도 그들의 고전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왜일
까. 그들의 전통적인 모습은 대개가 희화화된 모습이다. 그것은 친근감이기보다는 조소를 내
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시각은 그들의 현대를 우리가 이미지화 할 만큼 알고 있
지 못하다는 증거기도 하다. 당연히 그들의 전통적인 모습은 상대방에 대한 이제까지의 '상
식'에 갇힌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예를 들면 김진명의 소설에 나오는, 한반도 통일에 일본인들이 부정적이라거나, 일본이 기
술이전을 고의적으로 해주지 않음으로써 한국을 후진국으로 만들고 싶어한다거나, 그들이 
한국의 산업을 파괴하고 한국 지배에 나설 것이라는 이야기는, 실은 다른 수많은 매체와 일
반인들도 반복하던 이야기다. 혹은 '일본은 없다'가 보여주는, 대중문화 개방에 대해 일본
이 '문화적 주도권'을 쥐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에겐 그것이 '오랜 숙원사업'이었으며, 
일본인에게 (우리 같은)  도덕관이나 윤리관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일본인이란 '순진 
무구한 얼굴, 모기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약자를 가장'하는 사람들이며, '칼과 돈
과 힘 앞에 무릎꿇'고 '강자 앞에서는 쉽게 약자로 탈바꿈'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보자.
  몰개성적 산업사회에서는 일본인들과 같은 집단주의적 사고가 효율적이지만 앞으로 다가
올 철저한 개성적 사회에서는 한국인들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우수한 것이 더 낫다.(김진명, 
'가즈오의 나라', 프리미엄북스,1995) 
  일본은 집단적으로는 큰 힘을 발휘하지만 개인의 창의력은 우리보다 뒤진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약점이요, 우리의 강점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력이 빈약한 집단주의는 집단의 지
도자의 철학에 따라 매우 위험한 집단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일본은 지금 그 위험한 방향
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한영우, 법고창신과 동도서기의길, '교수 10인이 풀어본 한국과 
일본 방정식'.49쪽) 
  일본의 고급문화란 것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이렇다 할 것이 없고 대중문화는 범속과 저
속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은, 또 응용기술에 비해 기초과학의 수준이 크게 뒤지는 것은, 분
명히 개인의 창의성을 억압하는 일본의 집단주의 문화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김영명, '일
본의 빈곤', 미래사,1994,33쪽) 
  일본인은 팀워크를 이루면 훌륭하지만 한 개인을 놓고 보면 한없이 볼품 없다.(유재순, '
일본 여자를 말한다', 창해, 1998,67쪽) 
  
  1) 그들의 모방은 재'창조'였다
  '집단주의'와 '몰개성', '창의성' 부족과 그에 따른 '모방'은 일본을 말할 때의 정형화된 
수식어다. 이것은 이들만의 독창적인 개념이나 판단이 아니라 이전부터의 일본론들이 말해
왔던 이야기의 변형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개인적으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거나 모방만 하고 아이디어를 스스로 
만들어낸 적이 없다는 식의 우리에게 익숙한 설은, 과연 맞는 말일까. 
  도대체 개인이 약한데 어떻게 집단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일까? 기술이건 문화 건 
스포츠 건 종합적으로 뛰어난 분야의 저변에는 항상 뛰어난 '개인'이 존재하는 법이다. '집
단'이란 '개인'의 집합이 아니던가? 한국의 일본론은 이미 비판되고 수정되고 있는 낡은 일
본문화론들을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인은 모방을 잘 할 뿐 창조적 능력은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한때 모방했지
만 적어도 모방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다시 되팔 수 있는 물건을 만들었고, 그것
은 주어진 기술을 철저히 흡수, 연구하여 다시 창조한 것이었다. 모방하되 다시 그들 나라에 
되팔 수 있는 것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의 모방은 어디까지나 재'창조'
다. 단순한 모방에 그치는 경우는 한국에 더 많지는 않았던가?
  실은 모방과 어떤 기술이나 문화의 유입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또 엄밀하게 
말하자면, 완전한 제로로부터의 '창조'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말하자면 어떤 상품이건 
문화건 완전한 '무'에서 생산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창조는 정도의 차이
는 있어도 모방에서 시작된다. 그림은 사물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되고 작가가 '쓸'수 있는 
것은 남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건 창조행위에는 모방이 따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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