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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일본의 '사죄'는 없었는가?

by FraisGout 2020. 8. 23.

  문화개방을 하지 말아야 의견 중에는, 과거사에 대한 '사죄'도 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구
태여 문호를 개방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기 
직전, '한일외교 관련 교수 1백인 정책제안'(교수신문,98.9.14)이라는 것이 청와대에 제출되었
다는 기사 속에 있었던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없는 상태에서 일왕 방한 및 일본 문화 개방 
반대'라는 조항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일본이 그 때까지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았다는 인식은 아마도 현재까지도 한국인 대
부분의 인식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도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주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일본의 반성과 사죄'는 단 한번도 '없'었던 걸까.
  
  1)만날 때마다 반성과 사죄가 있었다
  실제로는, 90년대 이후만 해도 대통령의 방일 혹은 일본 수상의 방한 등 양국의 수뇌가 
만날 때마다 '반성'과 '사죄'는 있었다.
  예를 들면, 노태우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는 가이후 수상이 "겸허히 반성하며 솔직히 사죄
를 드리고자"한다고 말했고, 92년에 미야자와 수상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마음으로부터 
반성의 뜻과 사과의 기분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93년 호소카와 수상 방한 때도 그는 "우리
가 한 일을 겸허히 반성하며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진사 드리고자"한다고 말했다. 94년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우리 국민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깊은 반성 위에
서..."라는 소리를 들었고, 95년에는 무라야마 수상이 '전후 50주년 담화'에서 "역사의 진실
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 한 번 통렬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
명"한다고 말한 바 있다(조선일보,98.10.10)
  이렇게 거듭되었던 '반성'과 '사죄'라는 단어를 보는 한 일본이 '사죄'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정부가 바뀔 때마다 사과를 되풀이해야 했던 것은 각 정부가 그 이전까지의 사과를 인정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까. 앞서의 정권을 부정하는 것으로 일관되었던 우리의 오랜 전통을 
참고한다면,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 새롭게 수립된 새 정부가 자신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일쯤으로 생각되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
  매번 '사과'라는 것이 있었는데도 우리에게 그렇다는 인식이 없는 데는 실은 이유가 있다.
  90년대 초반, 일본 법무상의 이른바 '망언'이 문제화되면서 격렬한 일본 비판으로 신문이 
가득 채워지던 때가 있었다. 사설이나 시사만화는 물론 독자난에 까지 매일이다시피 망언에 
대한 비판이 게재되고 있었는데, 그 비판들은 일본 정부가 문제 해결에 나서서 문제의 장본
인을 사임시키고 하타 수상이 대외적인 사과를 한 후에도 사그러 들기는커녕 반대로 그러한 
행동조차도 정치적 필요에 의한 '사과'와 '망언'의 되풀이가 아니냐며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일본의 호소카와 수상이 방한했고 그도 사과를 했지만, 일본 국내에서도 그
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받은 그의 진솔한 사과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
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발언을 보자.
  일본은 분명히 한국에 관한 한 과거를 정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제법적인 문제는 한일 
국교정상화 때 '정리' 됐으며, 민족적인 문제는 몇 차례의 '사과'와 '통석의 념'으로 충분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같은 '말장난' 뒤에 일본의 뻣뻣한 자세와 한국
에 대한 우월 의식을 느낄 수 있기에 그것을 진정한 회오와 반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이다. 우리가 바랐던 바는 몇 마디 말보다 폴란드의 국립묘지 앞에 무릎꿇은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의 자세 그것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본은 절대로 그런 자세를 취할 사
람들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의 긍정이다. 일본은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도덕적, 정신적, 
문화적, 국제적 자질을 인정받지 못했다. 세계의 많은 나라가 일본과의 거래에서 일본의 얕
음, 실물거래적 사고방식에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는 
그 부에 걸맞는 진정한 친구나 이웃이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일본과 더 이상 '과거'를 얘기하고 반성을 거론하는 것을 접어둘 필요성
을 느낀다. 그럴 도덕적 인식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일본에 반복해서 '과거문제'를 꺼내
는 것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뿐이다.(김대중 칼럼, 조선일보.93.11.7)
  이어서 이 글은 '극일'을 다짐한다. 그리고 "바라건대 이 상처받은 민족적 자긍심에 불을 
붙여 우리를 국제화, 세계화의 대류에 합류시키며 우리의 위상과 실력을 탈 일본의 영역으
로 끌어올릴 지도자의 출현은 진정 없는 것일까?"라는 우국의 말로 글을 맺는다. 
  일본이 경제적인 성공은 했지만 "도덕적, 정신적, 문화적, 국제적 자질을 인정받지 못했
다."는 강변이나 일본이 '얕'고 '실물 거래적'이라는 인식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자. 이런 
말들은 이미 '일본은 없다'를 통해 익숙한 것이니까. 그는 일본에게 '진정한 친구나 이웃'
이 없다고 단정하지만, 정말 그런가? 일본을 좋아해서 가서 살고 싶어하는(일본은 한 조사
에 따르면, 세계인이 살고 싶어하는 나라 2위로 꼽히고 있다.) 수많은 세계인들은 일본의 '
친구'도 '이웃'도 아닌 걸까?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 우리의 '진정한 친구'나 '이웃'으로
는 어디를 생각하는 것일까?
  그는 모두에게 익숙한 부정적 일본관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식의 
선입견 때문에 분명 있었던 '사과'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일본의 사과를 '말장난'으로 단정할 수 있는지, '사과'의 말 뒤에 어떻게 '뻣
뻣한 자세'와 '우월 의식'을 느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사과를 '말'에 그치는 것이었다
고 말하면서 '행동'을 보여야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그 때까지보다 진
전된 '말'-그들이 우리에게 한 일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사과하는-조차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면, '사과'는 어떤 식으로 해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일까.
  그가 바란 것은 서독의 수상처럼 '엎드려 사과'하는 것이었던 듯 한데, 일본의 수상이나 
천황이 국립묘지에서 무릎꿇고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보인다면 그런 의심은 사라질까. 그렇
지 않을 것이다. 불신감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번에는 그 행위는 표면적인 '행동'일 뿐이며,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고 비난할 것이다. '불신'은 언제까지고 대상의 진실을 보는 것을 
가로막는다.
  '사죄'문제는 끝없는 숨바꼭질과도 같은 존재다.
  
  2)'망언'이 터지면 '원상회복'?
  그들이 표면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사죄'한 건 사실이다. 그것을 그들의 본심이 아니라거
나 정치적 퍼포먼스로 보는 일은 비생산적일 뿐이다.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비판은 또 다

른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문제다.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들은 언제고 이중적이며 진실을 말하지 
않아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뿌리깊은 일본인 상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
지지 않는 한, 그들의 사죄가 어떤 것이든 진정한 화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사과를 사과로 인정하는 일이 보상과 바꿔쳐지는 사태를 두려워하는 담론도 이 시기에 적
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불신과 집요함이 바로 당시 일본에서 일어난 '혐한' 감정의 주
범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측의 사과에 대해 언제까지고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실은 
'말'보다는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한국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과거에 있었던 일은 한두 마디의 사과만으로 잊어버리기
에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사과조차도 받아들이지 
않는 인색함이 한일관계를 언제까지고 과거에 얽매이도록 만든다. 용서란 받아들이는 일로
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미래지향적 관계를 모색한다고 해서, 일부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과거가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문화개방 때 개방이 과거지사를 '청산'하는 것이라고 오해했던 것처럼, '사과' 역시 
그 어떤 보루로 인식되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방문 때 더 이상 과거지사는 논하
지 않을 것으로 약속했고 정중한 사과를 다시 한 번 듣고 왔지만, '사과하지 않는 일본'은 
여전히 모두의 공통인식이다. 
  그 때문에 새로운 사과가 있고 나서도 신문에는 "일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진실된 사과를 
한 적이 없고 과거사 왜곡을 심화시킬 뿐이었다.(중략) 일본은 진정한 참회를 해야만 우리의 
미래 동반자로 인정될 수 있다. 독일이 2차대전 후 진정한 참회와 배상을 통해 유럽의 한가
족으로 받아들여졌듯이..."라는 의견(조선일보 독자,98.10.10)이 여전히 실린다. 이 거듭되는 
반복, 항상 독일을 거론하는 사고의 빈곤...
  독일과 유태인의 경우와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다르다.
  독일이 저지른 일은 인종차별에 근거한 대량학살이었고, 일본이 저지른 일은 식민지화에 
따른 차별과 억압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도 물론 비판되어야 하지만,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진 
유태인들의 비극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독일이 '참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내용이 워낙 경악할 만한 범죄였기 때문이다. 죄의 경중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그 
'진정한 참회'라는 것이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최근
의 신 나치의 움직임을 보더라도 독일에서 '참회'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일본에도 사과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물론 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의 '사과'가 
있었다면 그건 '사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신용하 교수와 같은 지식인들까지 나선 '국민여론'의 조성은 끊이지 않는다.
  이번 사과는 과거와 비교할 때 전혀 진전된 것이 아니다.(중략) 총리의 사과를 문서에 담
았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의원이 망언 한 마디 하면 원상회복이다. 최소한 의회 결의라도 
있었어야 의미가 있다. 정부가 만일 이를 끝으로 과거사문제를 덮는다면 국민여론을 등지는 
것이다.(조선일보,98.10.10)
  앞으로도 '망언'이 터지면 '원상회복'으로 간주해야 할까. 하지만 설령 일본의 전 국민이 
참회했다고 해도 망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느 나라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있기 마련
이니까.
  과거의 일본을 미화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일본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분명 존재한
다. 다시 말해서, 우경화하는 일본도 분명 일본이지만(실은 그들의 국가중심주의적 움직임은 
그들만의 것은 아니다.) 그런 움직임을 비판하는 이들도 분명 또 다른 일본의 얼굴이다.
  그런데도 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일본에 관한 한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두 
개의 얼굴 중 바르지 못한 부분만이 '일본'의 진짜 얼굴인 것으로 믿고 싶어하고, 반대로 올
바른 부분은 소수거나 위선이거나 돌연변이일 것으로 간주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일본은 
없다'식의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선입견이, 바르지 못한 쪽의 발언만을 일본 전체의 의견, 혹
은 진짜로 간주하고 싶어하게 하고 또 다른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망언만이 그들의 '본심'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일본의 한 부분일 뿐이고, 우리가 볼 필요
가 있는 것은 일본 '정부'가, 즉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가기구가 그러한 그들을 경질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긴 그것도 대외적 퍼포먼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그런 부분이 없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그런 선택을 
하는, 즉 '망언'에 문제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현재의 일본 정부라는 사실이다. 일본이 모두
가 의심하는 것처럼 이상한 길을 진짜로 걷고 있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닌가.
  국가란 어떤 의미에서는 보수나 우익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국가시
스템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언제고 우익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의 누구를 
상대로 교류해야 하는 것인지 분명해진다. 사과와 용서와 화해로 힘들여 쌓은 신뢰관계를 
몇몇 반일 인사와 몇몇 국수주의자들 때문에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젠 망언이나 불충분한 보상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더라도 어느 쪽이 대다수의 의견이며,(그
리고 설령 소수라 하더라도) 그들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밝은 눈과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3)과연 한국의 '사죄'는 있었는가
  현재 베트남에는 월남전 때 한국인들에 의해 뿌려진 2세들이 1만 명이 넘게 살아가고 있
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자행한 만행들은 이제까지 은폐되어왔다. 30년
이 지난 최근에야 겨우 일부 언론에서 문제삼기 시작하고 있을 따름이다.('한겨레21'305
호,308호 등).
  그런데 이에 관해 한국은 베트남에 사죄한 적이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이 사죄할 때까지 
어쩌면 우리는 아무도 베트남에 대한 죄의식은 갖지 않았던 건 아닐까. 일본을 비판할 때는, 
우리의 오빠나 아버지도, 그 숫자가 얼마가 되었건, 혹은 고의적이었건 우발적이었건, 베트
남에서 강간하고 민가에 불지르고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도 한 번쯤 떠올릴 필요가 있
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경우는 그 상황도 규모도 시기도 다르지만, 성적, 민족적, 차별과 지
배의식의 그 근본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닮은꼴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일본만
의 특수문제로 돌리기보다 인류 공통의 문제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비판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과오에도 눈을 돌리면서 비판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 때의 비판 대상은 '
일본'이라는 고유명사 이전에 전쟁이거나 남성이거나 국가거나 군대, 혹은 근대 자체가 될 
것이다.
  일본이 저지른 학살과 세균전과 생체실험에 대해 비판할 때, 사람을 껍질 벗겨 나무에 매
달아놓기도 했다는 우리의 6.25와 4.3사건과 광주사건도 한 번쯤은 떠올려보자. 월남전에서 
'자랑스런 대한 남아'가 엄청난 인명을 사살했고 '잔인한 한국군'의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려보자. 물론 우리도 그랬으니 그들도 용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잔학상을 규탄할 때 동시에 우리 자신의 허물을 직시하는 일은, 그 곳에 존재하는 집단의 
광기라는 문제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서의 '인간'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때야말로,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생산적 비판이 가능
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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