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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일본인은 잔혹하다?

by FraisGout 2020. 8. 23.

  사무라이의 나라의 칼 쓰는 '기술'은 '잔혹한' 일본인상으로 쉽게 연결된다. 실제로 한 조
사에 따르면(정대균, '한국인에게 일본은 무엇인가', 강,2000) , 한국인들이 품고 있는 일본
인에 대한 이미지 중 가장 많은 것은 '간사/야비하다'고 그 다음이 '잔인/무섭다'(27쪽) 다. 
이 책이 정리해놓은 한국인의 일본인 이미지를 보자.
  일본인은 간사하고, 잔인, 잔악, 야비하며, 이기적이고, 나쁜 놈들이며, 독한 면이 있고, 경
제동물이며, 교활하고, 이중적이며, 실리적이고, 경계할 필요가 있지만, 근면하고, 친절하며, 
단결력이 강하고, 성실 검소하며, 질서를 잘 지키고, 예절바르고, 생활력이 강하다.(36쪽) 
  
  1) 일본인은 다른 민족보다 더 잔인한가
  그런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잔인'하다는 설은 맞는가?
  우리는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드라마 혹은 현대 범죄드라마 등에서 피가 난무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고, 눈을 가리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표현을 역겹게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일본인'만'의 잔혹성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잔혹성-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
겠지만 폭력 행사에 필수적인-이란 인간이 어떤 순간에 범하는 폭력의 한 표현이다. 그들은 
다만 그 '폭력'의 표현을 좀더 직접적으로, 직설적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근대 일본이 저지른 범죄 중 남경대학살은 분명 나치에 버금가는 잔혹성을 보여준 사건이
었지만, 그런 식을 잔혹성이 우리에게는 없었을까? 그들의 폭력은 해방 후부터 제주 4.3사건
을 거쳐 6.25이후까지 이데올로기 대립 과정에서 일어났던 우리 자신의 수많은 끔찍한 일보
다 '더' 잔혹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광주사건 때의 잔혹성은 어떤가? 그들은 일부이거나 
특수한 상황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잔혹 행위란 대부분이 일부
에 의해, 특수한 상황에서 저질러지는 법이다.
  유태인에 대한 독일은 어떤가? 인디언에 대한 미국은 어떤가? 죄 없는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산 채로 불태워 죽였던 중세 유럽은 어떤가?
  다시 말하지만, 잔혹성이란 '인간'이 어떤 상황 하에서 드러내고 마는 어떤 충동적 감성이
며, 그 표현에 금기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들의 잔혹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사슴의 피를 받아먹는 일은 잔혹하지 않은가? 살아 있는 곰의 가슴을 열고 웅
담즙을 착취하는 일은 잔혹하지 않은가? 그것들은 어쩌면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 즉 인간이 
광기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용납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일상 속에
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 잔혹하다고도 할 수 있다. 단순히 보신을 위해 다른 종의 생명
을 빼앗는 것은 잔혹할 뿐 아니라 추하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나 한 시대와 어떤 환경 안에서 잔혹할 수 있다. 일본인'만'을 잔인한 민족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범죄를 그들만이 저지른 '특수한' 일로 생각하는 사고 때문이며, 
우리 자신의 체험을 망각하고 있거나 면죄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사람을 죽여 장기를 먹는 사건이 최근에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예전
에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을 두고 '일본은 없다'는 일본에만 있을 수 있는 사건으로 비난
하고 있었지만, 그건 일본 내에서도 '특수'한 사례였다. 그런데도 일본 쪽 사건이 더 기억되
는 건 우리가 그러한 사건을 크게 사회문제시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학생이 초등
학생을 살해한 사건을 둘러싸고 전 일본이 들끓었지만, 한국에서 초등학생이 유치원생을 살
해했을 때 한국 사회는 그 사건을 별로 문제삼지 않았다. 장기를 먹은 사건이 일본에서는 
소설의 소재로 쓰여지며 '인간'을 탐구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지만, 한국에서 그런 문제
에 관심을 쏟은 소설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어느 쪽이 '더' 잔혹한가가 아니다. 잔혹성 자체는 보편적이며, 공간과 시간에 따
라 달리 표현되는 것이고, 그 공간과 시간의 바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더' 잔혹하
게 느껴지는 법이다. 민족성이 잔혹성을 결정하는 건 아니다. 
  
  2) '왕따'는 일본에서 '수입' 되었는가
  '칼의 나라 일본', '잔혹한 일본인' 상은 곧바로 '일본 문화=폭력'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조장하기도 했다. 한때 학원폭력이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그것을 쉽게 일본 만화 탓으로 돌
리는 단순하고도 순진한 분석가들이 전문가에서 일반인까지 적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본' 것을 모방하는 존재라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이야기다. 인간은 태어난 직후부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을 모방하
고 익히면서 서서히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니까.
  그러나, 인간이 부정적인 매체에 접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 행위를 따라할 것이라는 생각
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어떤 현황을 받아들이는가 거부하는가는 어디까지나 주체의 가
치관에 달려 있다. 바른 가치관이 심어져 있다면, 어린이라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나아가 비판할 수도 있다. 만약 어떤 폭력을 보고 모방할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때는 이미 
그럴 만한 폭력에 대한 욕구를 키워왔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말하자면 이미 
그러한 폭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폭력적인 대중매체가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사건'의 
원인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법이다. 단순사고는 언제까지고 문제의 원인을 보지 못하
도록 만들 것이며, 결국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게 만들 것이다. 
  학원폭력문제는 그런 의미에서 어디까지나 우리의 '상황'이 빚어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런 점에서, 입시위주 교육-이것까지 일본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
나 해방된 지 이미55년이다. 50년 이상 비판 없이 모방해놓고,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해서 그
것을 제공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과 전반적인 '현대병'이 학원폭력을 발
생시키는 황폐한 심성의 원인이다. 그런 면에서 결과적으로 일본 사회와 비슷하다면 비슷하
지만, 그것은 '수입'일 수는 없다. 구태여 '수입'이라 한다면 현대병의 수입이며 근대화에서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닮고 만 우리의 필연적이며 특수한 현상일 뿐이다.
  최근 이근안이 자수했을 때도, 이근안이 사용한 고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전부 '일제에
게서 배운 것'이라는 말이 어김없이 나왔다. 마치 일제가 가르치지 않았다면 한국에는 그러
한 고문이 없었을 거라는 것처럼, 하지만 한국에도 방법은 다를지언정 갖가지 끔찍한 고문
은 있었다. 
  이렇게, 나쁜 사항은 '일본'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것이 여전히 우리의 의식이다. 그 이
전과 그 이후의 모습에는 눈감은 채로.
  인기리에 방송되던 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왕따' 당하는 아이를 소재로 다루면서 등장
인물 중 한 여성은 이렇게 말하며 분개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여간 일본 거라면 뭐든지 수
입한다니까. 왜 그런 것까지 수입할까?"
  이 말은 드라마작가 자신의 의식이기도 하고 대중의 무의식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다. 그
것이 얼마만큼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가는 열린 사고를 가진 지식인들까지 비슷한 소리를 하
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의 왕따가 한국과 비슷한 입시경쟁체제를 갖고 있는 일본에서 수입된 것은 이상한 일
이 아니다.(홍세화, 앞의 책) 
  하지만 '이지메'란 자신과 '다른' 사람(경제력, 외모, 능력 등에 있어 우월하거나 반대로 
열등한) 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적 심리현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일일뿐이다. 그 구체적 
양태와 심각성에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 차이가 있을지언정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현
상이다. 학교에서의 이지메만 하더라도 그렇다. 미국이나 유럽에는 이지메가 없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다만 양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90년대 초 학원폭력문제가 대두되었을 무렵 처음에 '이지메'라는 말이 쓰였던 
것은, 그것이 일본 것이어서가 아니라 한국어에 그 현상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가 없었기 때
문이다. 얼마 안 가 '집단 괴롭힘'이라는 말이 쓰이더니 어느 사이에 '왕따'가 일반화되었는
데, 이 경과는 이미 잊혀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처음에 '이지메'라는 말을 썼던 것이 그 
현상 자체가 일본에서 '수입'된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리라. 하지만 수입된 것은 그 내
용이 아니라 개념을 표현할 '명사'였다. 그 배경에는 명사에 강한 일본어의 특성이 있다.
  
  3) '독한' 일본인의 '타자에 대한 거리감각'
  타자에게 '잔혹한' 일본의 이미지는 스스로에게도 '독한' 일본인으로도 쉽게 연결된다. 물
론 독하다는 말은 과거의 탄압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더 일본인들이 
감정표현을 잘 안 하는 일을 두고 말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가족과 친지의 죽음
-인간사에서 가장 슬픈 일 중의 하나인-에 맞닥뜨려 취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텔레비전에 
비치는 한국인은 곧잘 통곡하고 심한 경우 실신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릴지언정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려 노력하거나 아예 눈물을 비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통곡이란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였으며 산 자
에 대한 외교적 수단이기도 했다. 슬픔을 가능한 한 격렬하게 나타내는 것이 한국의 의식으
로서의 미덕이었고, 여성들의 실신은 그 전통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 반대였다. 그들은 타인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했고, 눈물을 억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일상을 지배하는 큰 
차이 중의 하나인데, 일본인이 이른바 '속마음'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이 연장선상의 일이
다.
  한국과 일본은 타자에 대한 거리감각이 기본적으로 다르다. 한국인은 거리를 두지 않는 
것에 익숙하고 일본인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을 편해한다. 거기에는 단지 '차이'가 존
재할 뿐이다. 한국적 행동양식-풀고 헤치는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어진 우리 자
신의 감수성에 바탕을 둔 판단이 우리 자신을 긍정적으로 판단하도록 만들고 있을 뿐이다. 
어느 쪽을 더 '쾌적'하게 느끼는가는 개인, 혹은 그 개인이 속한 집단, 공동체의 취향에 의
해 정해진다. 어느 한 쪽에 절대적 우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의 직설적 발로는 '인간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그것을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
도 실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은  결과지만)  미성숙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반대로, 

타내지 않는 것은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기제어가 가능한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
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억제하는 쪽을 누가 '인간적'이라고 한다고 해서, 뭐라
고 반격할 수도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자체가 아니다. 어떤 평가든 거기에는 평가하는 사람의 
개인적 자질과 그가 속한 공동체적 사고가 필연적으로 관여하기 마련이라는 사고가 필요하
다.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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