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왜곡

일본 문학 이야기(2) -문학의 세계화에 대하여

by FraisGout 2020. 8. 23.

  1) 왜? 우리 문학이 일본에 어디가 뒤지는데?
  1994년 가을, 일본의 오에 겐자브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사람들은 일본이 '로비
'를 잘해서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건 물론 언론의 은근한 부추김과 그렇게 생
각하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욕구가 만나 빚은 분위기였는데, 그러한 분위기 뒤에 "왜 우리
는?" 이라는 물음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왜? 우리 문학이 일본에 어디가 뒤지는데? 이렇게
도 우리를 감동시키는 문학이 있는데 우리가 못 탈 이유가 뭐지?...
  아마도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당시, 언론들은 오에가 
일본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임에 안도하며 호의적으로 보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노
벨상 심사위원들이 이미 대부분 노인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노벨상의 권위를 깎아 내리는 것
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안심하라, 한국인들이여. 이번 수상은 일본의 경제력에 주어진 것이
지, 그들의 문학이 우리보다 특별히 훌륭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신문들은 이런 메시지를 
알게 모르게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오에의 수상은 결코 그런 맥락으로 생각될 수 없는 일이었다. 설
령 오에 개인의 문학성이 수상에는 불충분한 것이었다고 누가 주장한다 치더라도, 이 수상
은 오에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일본 문학 전체의 수준이 세계로부터 인정받았음을 나타내주
는 것이었다. 일본 작가들은 1968년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수상하기 전부터 이미 미시마 
유키오, 이오우에 야스시, 아베 코보 등이 해마다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는 일본 내의 기대가 컸던 것으로 보이는 아베 코보나 이오우에 야스시가 운 나쁘게도 세상
을 떠나버린 다음, 얼마쯤은 그들의 몫이라고도 할 수 있을 상이 '오에 겐자브로'라고 하는 
한 개인에게 주어졌다고 간주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말하자면 1990년대 초반의 
그들의 일본 문학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깊고 폭넓은 것이었고, 그런 의
미에서도, 오에 자신이 겸허하게 말했듯이 그 해의 상이 '일본 문학' 전체에 주어진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이는 것이다. 일찍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 후보로 거론되었던 미시마 
유키오가 가와카타 대신 노벨상을 수상했더라면 미시마의 자살이라는 저 희극적이고도 비극
적인 마지막 순간은 없었으리라는 설이 회자되고 있다는 것도 이미 3,40년 전부터 일본 문
학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2) 아베 코보의 충격
  미시마 유키오나 다니자키 쥰이치로는 가와바타와 함께 비교적 일찍부터 해외에 소개되어 
높은 평가와 인기를 누렸던 행복한 작가였다. 다니자키의 경우는 인간에 있어서의 '성'의 문
제를 철저히 추구한 작품이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깊이 다룬 것으로 평가받았고, 미시마 역
시 일찍부터 희곡집 등이 번역, 상연되는 등 그 센세이셔널한 죽음과 함께 해외에서 가장 
유명해진 일본 작가기도 했다. 이들은 분명 '그로테스크'나 '에로티시즘'의 요소를 갖고 있
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부정적 평가로 이어져야 할 것은 아니다.
  가와바타, 미시마, 다니자키 등은, 해외에 소개되어 일정 수준의 평가를 획득한 제1세대라
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주로 '일본'이라는 주체를 강조한 '일본'적인 작품으로 어필했다고 
한다면, 이후의 세대, 제2세대는 이들과는 반대로 '일본'과는 별로 관계없는 주제로, 말하자
면 어떤 보편성을 추구하는 자세로 외국 독자들에게 다가갔다.
  예를 들면, 한 프랑스인의 술회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아베 코보의 충격은 그의 작품들이 
너무나도 '일본'의 이미지와 동떨어진 것이었다는 사실-벚꽃도 농염한 에로티시즘도 없고, 
애매한 미의식 대신 명석한 논리가 존재하며, 황폐한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자신
과 타자의 탐구라는 테마-에 의한 것이었다. 그 아베 코보에 열광한 한 서양인 독자에 의해 
아베 코보는 번역되었고,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해외에 소개되고 평
가받았을 뿐 아니라 일정한 독자층을 획득하게 된 작품들은 대개가 어떤 보편성을 내포하는 
작품들이었다.
  오에 겐자브로의 작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소개되었고, 그의 대표작 '만연 원년의 풋볼'
은 작품 발표 4년 후인 1971년에 번역되었다. 말하자면 거의 동시대적인 관심과 소개가 서
양에서는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현재의 평가는 그러한 축적이 쌓인 끝의 평가였던 
것이다.
  차별받는 계층의 고통에서 야기되는 성과 육체의 폭력에 깊이 천착한 나카가미 겐지도 영
어권과 불어권에서 높은 평가를 얻고 있으며, 다자이 오사무의 딸이기도 한 쓰시마 유코도 
이미 20여 년 전에 서구에 소개되어 소설이 드라마화 되기도 했는데, 자명한 것으로 여겨져 
온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높이 평가받고 있다. '겐지 이야기'와 같은 고전의 전
통을 이어받는 섬세한 여성문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지적 훈련을 쌓은 이
에게만 가능한 현대적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쓰시마 유코가 평가받게 된 이유기도 하
다. 현재 세계 각지에서 이들 1,2세대의 문학에 관한 국제 심포지움이 심심치 않게 열리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연구의 대상으로서, 말하자면 인류의 자산의 하나로서 자리잡게 되었
음을 말한다. 
  그들에 이어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이후에 소개된 제3세대의 특징은, 그들에 관한 홈페
이지가 외국인 팬에 의해 제작,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평론가들의 평가
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열광적인 독자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언뜻 
젊은이들의 세련된 일상을 그리고 있는 것 같으면서 인간의 깊은 곳을-'우물'로 상징되는-
들여다보려 하는 진지함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경우는 온갖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하
는 따뜻함으로 읽는 이에게 어떤 위안을 주는 것이 인기의 이유라 할 수 있겠다. 또 시마다 
마사히코와 같은 작가는 아이덴티티의 파괴 욕구 혹은 존재의 근거 없음에 관한 인식이 루
트를 부정하는 일본인의 새로운 모습으로서 공감을 얻었다. 그 결과 외국어로 번역되어 독
자를 확보하게 되면서 20세기 말 현재의 일본 문학은 가벼운 오락으로서의 지적 엔터테인먼
트의 역할까지-즉 생활 속에 자리잡는다고 하는 세계화-해내기에 이른 것이다.
  
  3) 한국 문학이 세계화에서 뒤지고 있다면
  그들이 왜, 어떤 점을 평가받고 있는지는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고, 한 나라의 문학이 해외에 소개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번역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앞서의 일본 문학들이 소개된 과정을 보면, 대부분 일본으로 유학했던 유학생들이 기여한 
바가 컸음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계기로 자국에서 일본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되었던 
학생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그러다가 한 작품과 만나, 그 작품에 대한 열광이 그를 '번
역'이라고 하는 지난하고도 힘든 과정에 발을 들여놓고 나아가 연구하도록 하며, 자신의 나
라로 돌아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반인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한사람에 의해 번역과 작품 평가와 독자 
확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고, 앞서 '로비'설을 부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인데, 여기
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현재까지의 일본 문학 소개가 대부분 번역자의 자의에 의해 이루
어졌다고 하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의욕을 갖게 된 이들에 대한 후원 시스템이 일찍부터 
잘 구축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일 뿐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
소한 계기로 시작된 한 나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그 나라의 문학을 소개하는 열정으로까
지 발전해 수많은 번역자와 연구가들을 산출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관심이, 패전 직후였다면 동양의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라는 부정적인 모습, 그 이
후라면 경이로운 경제발전의 나라라는 긍정적인 모습 중 어느 쪽 인가로부터 야기된 사람들
이 많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개중에는 한 일본인과의 만남, 짧은 
일본 여행과 같은 사소한 계기 역시 적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계기가 어떤 것이든 일본
을 더 잘 알고자 한 그들에게 일본이라는 존재가 더욱 큰 매력을 가진 존재로 다가왔으리라
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의 관심과 열정을 지속시킨 것은 바로 이점이었을 것이고, 이점이야
말로 중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관심을 끌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고 그 관심을 지속적
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 이것이 현대 일본 문학의 세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문학이 일본 문학보다 세계화에서 뒤지고 있다면, 그 이유는 이미 분명하다. 우선은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의 애정을 유발하는 조건이 부족했던 데서 오는 번역 인력의 
부족이다. 나라로서의 매력을 지닐 것,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그것은 제도적인 번역가의 
'양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물론 작품 자체의 문제도 있다.
  우리는 한국의 토속적 정신이 잘 녹아나 있는 작품을 훌륭한 것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
고, 박경리의 '토지'가 높이 평가되는 것도 그와 같은 가치관과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
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우리 것이 세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에의 '만연 원년의 풋볼'의 경우, 그 배경은 일본의 산골이지만, 거기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그 '토지'의 미화가 아니라 공동체성에 대한 비판이고 '타자'에 대한 열린 시각이다. 
한때 신문에 났던 '토지'의 광고는, 프랑스인 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 한국인들을 사랑하
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는 말을 전하고 있었는데, 그런 식의 말에 기뻐할 일은 아니다. 그
건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이 반영된 말에 지나지 않으니까.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은 그들이 '한국인들을 사랑'해주는 일이 아니라, 말하자면 인류학적
인 관심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 이야기'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즉 
특수성을 그리지만 인류 공통의 문제로 심화된 문제의식을 느끼도록 해주는 점을 그 작품이 
갖고 있는가를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며, 바로 그러한 작품만을 우리는 세계 속의 공동자산
으로 내보일 수 있다. 예컨대 아프리카 문학이나 남미 문학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아프리카 사람이나 남미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문
제, 시대와 공간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 있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작품이 지속적으로 읽히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리가 '문학'을 
찾는 이유, 위안, 구원, 즐거움 등등을 충족시키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한국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인간' 문제로서의 공통적인 어떤 발견이 있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을 알
기 위한' 작품은 문학으로서보다는 사회학적, 인류학적 자료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고, 
그것으로써는 지속적인 독자층이 형성되기가 쉽지 않다. 오에의 작품이 인류의 보편적 테마
에 다가간 이야기였음을 참고로 한다면, 우리가 어떤 문학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는 분명하
다.
  지금 우리가 좋은 작품으로 생각하는 작품이 다른 나라의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가? 우리의 '가치'는 그들에게도 '가치'일 수 있는가? 우리의 '감동'은 그들에게도 '감동'일 
수 있는가? 우리 문학의 세계화를 향한 출발은 그것을 묻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문
학 역시 '유통'되는 '상품'인 이상, 현재 세계 속에서 '팔리'는 상품이 어떤 것인지를 인식
하는 일은 중요하다. 물론, 우리에게 그런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누가 그들을 밝
은 눈으로 평가하고 '읽는' 일로 밀어줄 것 인가다. 세계화의 여부는 거기에 달려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