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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왜곡

'진출'인가 '침략'인가-확장주의적 민족주의

by FraisGout 2020. 8. 23.

  1) '진출'인가 '침략'인가
  99년 7월 21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광활한 평야를 배경으로 한 전면광고를 보자. 거기에
는 {광개토대왕님, 야후는 '다음'이 꺾겠습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
다.
  우리의 국토가 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신 분, 천육백년전에 이미 세계화
를 몸소 실천하신 분. '다음'은 야후를 실력으로 꺾고 대왕님의 자랑스런 후손이 되겠습니
다.
  '다음'뒤에는 250만 대군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네티즌 중 약 절반은 이미 '다음' 회원이
며...
  이 광고에는 '우리의 국토가 대륙이라는 사실'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이 보인다. 김진명식
의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발상과 다를 바 없는데, '대륙'에 대한 동경과 환상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는 이미 앞에서 본 대로다. 여기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천육백년 전에 이미 세계화
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정벌이라는 이름의 침략을 '세계화'라고 생
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일본이 설령 교과서에 침략을 침략이라 하지 않
고 '진출'이라 적었다 해도 그것을 은폐나 미화라고 비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교과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인다면, 실은 80년대 초반의 교과서 왜곡이란 꼭 우리가 
상상하는 것 같은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도 한일 간의 관계에 언제고 따르는 오해는 없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일본의 교과서가 '왜곡' 일색만이 아니며 "가해의 역사가 기록"(이준호, 
'후지산과 대장성', 경운,1997,201-3쪽) 되어 있다는 사실, 혹은 일본 교과서 중에도 (아시아
를)  '왜 침략했으며 상대국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가를 정리해보자.'는 과제가  수록되는 
등 
사실의 직시와 반성의식이 나타난 교과서도 존재한다는 지적(지명관, '벚꽃은 오래 피지 않
는다', 동아일보사, 1993,248쪽) 이 이미 있지만, 그러한 사실은 여전히 우리의 일반 상식은 
아니다.
  교과서를 문제삼는다면, 오히려 기존의 교과서보다도 90년대 중반 이후의 민족주의에 입
각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 운동이 일어나면서 쓰여지고 있는, 과거를 합리화하는 자화자찬식 
교과서 쪽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때는, 그런 식의 자화자찬 내지는 왜곡이 우리
와는 무관한 일은 아니라는 자각도 필요하다.
  다시 광고로 돌아가자면, 물론 '야후를 실력으로 꺾는 일'이야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250만 대군'에의 칭송에는 군국주의의 무의식적 긍정이 있다. '다음'이 사업을 잘 하는 것
이야 좋은 일이겠지만, 이런 식의 민족주의적 성향이야말로 배타성과 반목으로 이어지는 것
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개봉된 '철도원'은 자신의 일(공적인 부분) 을 가족(사적인 부분) 보다 중요시했
던 지난 시대의 한 슬픈 이야기다. 근대는 개인이 국가나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당연
시하는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던 시대였고, 폐쇄 운명에 처한 지방 간선철도의 역장 역시 그
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철도원'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
는 것은 쉽다. 한 신문은 '철도원'과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결부시키고 
있었는데, 국가주의를 곧 군국주의와 동일시하는 문제점은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빗
나간 분석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경우 그런 일들이 실은 우리 자신 역시 그런 분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거나 혹은 독자들로 하여금 잊도록 만드는 교묘한 수사법
이 쓰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이미 충분히 본 것처럼.
  민족주의는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할 때 혹은 국가의 힘을 길러야 할 때, 
구심점을 만들어준다는 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족주의가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남에게는 관대하지 않다. 말하자면 나는 힘을 기르는 것이 당연시되면서 남의 
힘이 커지는 것은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 것을 해외에 파는 것은 권장되지만 
남의 것은 못 들어오게 하는 식이다. 더구나 그렇다는 사실에조차 눈감게 만드는 것이 민족
주의다.
  때로 부당한 상황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주지만, 민족주의는 궁극적으로는 자국의 이익
을 보호한다는, 모두가 수긍할 만한 이념 아래 실은 '보호' 차원을 벗어나 '증대'시키는 일
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침략자로서의 광개토대왕을 보기보다는 정복자로서의 모습만 보며 
열광하도록 만드는 것도 바로 이런 민족주의적 심성이다.
  
  2) 우루과이라운드 반대가 '보호'한 것
  90년대 초 불붙었던 우루과이라운드에 대한 반대도 민족주의 열풍을 되살린 것 중의 하나
다. 쌀 개방 반대란 농민들을 보호하자는 발상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농본국가'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심정적인 동의를 얻기 쉬운 것이었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현대와 같은 글
로벌 시대에 농민이나 어민'만'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고에는 설득력이 없다. 과거와 달리 농
민이나 어민보다도 훨씬 열악한 생활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시노동자도 우리 앞에는 
있다.
  어업이나 농업은 '토지'와 관련된 것이고 그런 만큼 지켜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국가주의의 본질을 잘 말해주는 사고방식이다. 공동체란 당연히 자신들이 존
재할 영토를 필요로 하고, 그 영토의 필요성은 대개 '예전부터' 그 곳에 있었다고 하는 의식
을 기반으로 강조된다. 말하자면 '토지'(바다도 물론 영토다.) 와 관련된 담론이야말로 국민
을 민감하게 만들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독도에 
관한 열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는 제 땅에서 나온 것이 몸에 좋다는 '신토불이'를 외치면서 캐나다
의 곰이며 녹용을 먹고 있으니 모순 아닌가? 한국의 꽃이며 야채가 수출되는 일은 자랑스럽
게 보도되면서, 중국산 나물은 농약 투성이인 것으로 보도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불매운동
이 벌어지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우리 야채는 농약 세례에서 자유로울까?
  또 한편에서, 기계가 만드는 상품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 그리고 양주니 보석이니 
골프채니 하는 고급 상품일수록 그 관대함은 커진다. 그 뒤켠에서 죽어갈 수도 있는 기계산
업이 우리의 관심권에 들어오는 일은 없다. '보호'를 말한다면 어민과 농민뿐 아니라 산업노
동자도 그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것을 팔고 싶다면 당연히 외부의 것에 무조건 배타적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해
외의 우리 민족이 그 곳에서 따뜻하게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우리 역시 외국인에 대해 가슴
을 열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우리는 외국에서 인정을 받은 음악가니 스포츠선수를 자랑
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들이 바깥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타자로서의 그들을 한국인 이
전의 개인, 혹은 지구민의 한 사람으로서 따뜻하게 맞아주고 키워준 그 나라의 토양이 있었
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일 교포에 대한 차별을 그 실상은 잘 알지 못하는 채로 목청 높여 비난하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에 대한 법률도 뚜껑을 열어보면 별다를 것 없을 뿐 아니라 더 못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오히려 정신적인 배척과 차별은 더하다고도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 사
람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도 그렇지만 해외교포인 조선족이나 고려인들에게까지 원성을 사
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배척의식이 실은 일본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을 함부로 대하게 만드는 것은 민족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순혈주의와 우리보다 경제
가 못한 계층을 무시하는 배금주의다. 순혈주의는 단일민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세계로 
고아를 수출하고 있는 우리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앞장서서 각 나라의 순혈성을 해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혼혈의 가능성을 앞장서서 높이고 있으면서 우리만은 순혈주의를 고
수하겠다는 것은 모순 아닌가?
  세계는 하나가 되고 있고 그런 속에서 지금 활약하고 있는 인물 중엔 혼혈인이 많다. 혹
은 적어도 다른 땅에 던져져 자라난 경우가 많다. 그들의 성공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의 '피'에 구애할 수 없었던 만큼 타인의 '피'에 상관하지 않는 공간적 조건이 그들에
게 부여되어 있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다른'것을 포용하는 능력이야말로, '
다른'이들이 섞여 살 수 밖에 없는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능력이다.
  
  3) 배타성의 기원
  민족주의뿐 아니라 공동체를 단위로 하는 모든 '주의'는 원천적으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
다. 공동체주의, 가족주의 등의 '주의'들은 필연적으로 그 바깥에 있는 이들과 안을 구별지
음으로써 가능한 개념이고, 구별하는 순간이 이미 '배척'의 순간이다. 구별과 '배척' 없고서
는 자기존립 자체가 위험해지니까.
  어떤 단위의 '민족' 개념이 정해지는 순간, 그 공동체가 정한 요소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민족'으로서 인정받지 못할 수밖에 없다. 배타성은 자신의 존립을 위협할 그들의 
'침범'에 대한 경계의식에서 생겨난다. 
  한국이 배타적이라는 자각은 IMF 이전에는 별로 없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에게도 
넉넉한 마음을 쓸 줄 아는 정 많은 민족으로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리의 오랜 미덕으로 
여겨져 온 '정'이란, 실은 모르는 이한테는 거의 발동되지 않는 폐쇄적 공동체 내부의 것일 
뿐이다. 실제로 현대 한국 사회는 지연과 혈연과 학연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누군가와의 '관계'틀이 모든 방면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가? 당연히 
그러한 사회적 요구로서의 관계틀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는 혹독하리 만큼의 배타성이 발휘
된다.
  모르는 사람이나 대상을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성향은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줄리아 크리
스테바도 말했듯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한국적 배타성의 수준은 급기야는 아시아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살기 힘든 나라로 꼽을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왜 우리는 아는 사람에게는 온갖 정성을 다해 마음을 표시하면서 모르는 이에게는 무관심
할 뿐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한가? 왜 배타의식을 조장하는 삼류 민족주의 소설이 지치는 
일도 없이 되풀이 쓰여지며 그에 열광하는 독자는 끊이지 않는가?
  
  4) 상처는 내면화하고 대상화할 수 있을 때 치유된다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경계의식을 조장한다. 그래야만 국가=민족이 존속될 수 있기 때문
이다.
  우리의 경계의식이 특히 강하게 발동되는 대상은 물론 일본이다. 그것은 일반인들뿐 아니
라 지식인층에서도 예외가 없다. 예를 들면, 한일 문학 심포지움에서 한 한국 평론가는, 심
포지움 개최에 대해 (일본 문인들에게)  "상대 국민문학에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든지 심지

는 상대국의 번역문학 출판시장에 자신을 홍보하고자 한다든지 하는,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
운 의도들도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이는 구조
적으로 IMF 이후 한동안 그럴 듯하게 유포되었던 외국자본 음모설과 멀지 않다.
  그런데 우리의 그런 배타성은 근대화(일단 그것을 긍정적 가치로 간주한다고 할 때) 로의 
길을 가로막기도 한 주범이기도 하다. 두말 할 필요도 없지만, 서구라고 하는 타자에 대한 
배척이야말로 한국과 중국으로 하여금 근대화에 눈감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의 태
도는 현대의 한자 배척에서 볼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정책에서 압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강렬한 주체
의식과 동일성 환상이다. 그것은 근대국가의 반열에 끼기 위한 조건이기도 했지만 여지껏 
그것에 구애하는 나머지 이제 우리는 다른 나라로부터 '배타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한 일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온 것이 아닐까. 물론 그것은 근대 이후 '국가'체계 갖추기에 뛰어들었던 나라라면 모두
가 한 번씩은 겪었던 일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것은 어른=근대국가가 되기 위한 통과
의례 같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국가를 지나 '탈 근대'를 말하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난 20세기 말까지도 한국은 민족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을(일본을)  언제까지고 침략자로 간주하는 사고는 지나친 경계의식의 소산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의 배타성의 기원, 곧 뿌리깊은 경계의식은 잦은 외세의 침략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의식 속에 가장 깊게 각인되어 있는 일본이 그 주 대상인 것은 당연
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원'을 볼 수 있는 지점에까지 와 있으니, 말하자면 냉정한 자기분
석도 가능한 시점에 와 있으니, 이제 그만 해묵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나서도 되지 않을
까. 그럼으로써 일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어렵게 만들어왔던 기억과 경험들로부터 자유로워
져도 되지 않을까.
  상처란, 내면화하고 대상화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자신의 상처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분
석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그 치유가 가능해지는 법이다. 상처의 원인을 알면서도 언제까지
고 그 일에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들이대지 않고는 타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유아적 수준의 나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본에 대해 언제까지고 피해자로서의 우리를 강조하는 일은 '유아'로 머무르겠다고 말하
는 일이기도 하다. 이젠 그만 성숙해지고 싶지 않은가? 그들의 과거에 대해 분노하고 거부
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고뇌까지도 이해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가?
  '선진국'이란 어쩌면 경제적, 정치적 지표보다도 국민의식의 성숙도가 정해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토록 지향하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도, 그런 의식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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