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어의 시대 구분
(북방)
(남방)
고려의 훈민정음 임진왜란 갑오개혁
건국(10C) 창제(15C) (16C 말) (19C 말)
고대 국어 중세 국어 근대 국어 현대 국어
1. 고대 국어
① 시기 : 삼국 시대 - 통일신라( - 10세기 이전)
② 특징 : 신라의 삼국 통일로 경주어 중심, 최초의 언어 통일
- 신라어는 원시 한어(韓語)에서 이어져 온 말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상도 지방이 중심이 되어 발전하였다.
이렇게 통일된 언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고려어에 이어진다.
- 신라 시대의 기록은 한자(漢字)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며, 당시의 표기 체계로 고유 명사 표기(固有名詞表記), 서기체 표기(誓記體表記), 이두(吏讀),구결(口訣), 향찰(鄕札) 등을 볼 수 있다.
2. 중세 국어
① 시기 : 고려 건국 - 임진왜란 전까지(10세기 - 16세기)
② 특징 : 언어의 중심지가 경주에서 개성으로 이동, 완전한 언어 통일, 우리말의 탄생
③ 구분 : 훈민정음 창제를 기준으로 중세 전기와 중세 후기로 나눔
1) 전기 중세 국어(고려시대~훈민정음 창제 전)
- 신라어도 신라가 멸망하고 국권이 고려로 넘어감에 따라 점점 그 세력이 약해지고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말이 세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어가 남방계 언어, 고려어가 북방계 언어가 섞여 있었으리라 추정되는데, 고려어의 성립 의의는 현대 중부 방언(서울말)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 있다.
- 고려어의 자료로는 계림유사(鷄林類事),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조선 관역어(朝鮮館譯語) 등의 문헌에서 볼 수있다.
2) 후기 중세 국어(훈민정음 창제 후~임진왜란)
- 조선 전기 국어는 조선의 건국에서 임진왜란까지 약 200년 간의 국어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특히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어 우리 언어 생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 조선 전기 국어의 자료로는 훈민정음의 창제로 말미암아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의 많은 문헌에서 볼 수 있다.
3. 근대 국어
① 시기 : 임진왜란 후 - 갑오개혁(17세기 - 19세기)
② 특징 : 현대 국어 체계 형성
- 임진왜란 이후에서 갑오경장에 이르는 약 300년 간의 국어를 조선 후기 국어, 또는 근대 국어라 부른다. 이 시기의 국어는 임진·병자 양 난 이후의 변화된 생활 양식 및 의식 구조 속에서 간편하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 국어의 문자 체계가 자음 17자 중 ㆆ, ㅿ, ㆁ 의 소멸로 14자로 바뀌었고 모음은 조선 초기의 11자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 ․ '음가는 소멸되었으나 글자는 1933년 한글 맞춤법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함.)
[학습 내용 정리]
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언어의 속성은?
⇒ 역사성
② 언어를 변화시키는 요인은?
⇒ 사회의 변동, 사회 구성원의 의식 변화, 외래 문화의 유입 등
③ 국어의 형성 과정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이 갖는 의미는?
⇒ 언어 통일을 이루어 현대 국어의 모태가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국어의 중심지를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시킴
④ 국어사의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과 기준은?
⇒ 방법 : 고대 국어, 중세 국어, 근대 국어, 현대 국어
기준 : 언어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정치사와 언어 자체의 변화
(2) 고대 국어의 특징
1. 국어의 계통과 형성
(1) 국어의 계통 : 몽골 어군, 만주-퉁구스 어군, 튀르크 어군 등과 함께 알타이 어족(語族)에 속할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은 분명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아 가설 단계에 머물러 있다.
(2) 국어의 형성 : 북방(北方)의 부여어는 고구려어로, 남방(南方)의 한어는 백제어와 신라어로 분화된 후 신라의 통일로 경주 지방의 말을 중심으로 언어가 통일되었다.
<국어와 알타이 어족의 공통 특질>
① 모음조화 현상이 있다.
② 두음법칙 현상이 있다.
③ 교착성이 있다.(첨가어 성격 - 어미와 조사의 결합 가능)
④ 관사, 관계 대명사, 전치사가 없다. / 성(性)의 구별이 없다.
⑤ 꾸미는 말은 꾸밈을 받는 말 앞에 놓인다. (‘수식어 + 피수식어’ 어순) / 목적어가 서술어의 앞에 놓인다. (주어+목적어+서술어)
⑥ 음절 끝소리 규칙이 있다.
2. 고대 국어 표기 - 차자 표기(借字表記)
(1) 고유 명사의 표기 : 인명이나 지명을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표기
(2) 이두(吏讀) : 국어의 문장 배열 순서에 따라 단어를 재배열하고 토를 붙임
(3) 구결(口訣) : 한문 구절에 토를 달아 우리말로 읽음. 구결을 제거하면 온전한 한문이 됨
(4) 향찰(鄕札) :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국어 문장을 전면적으로 표기함
3. 고유어와 한자어의 경쟁
삼국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기 시작할 무렵부터 국가적 차원에서는 한자어를 사용하는 양의 증가로 고유어의 사용이 감소되어 고유어와 한자어의 경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 국어의 뿌리와 줄기 → 통시적 고찰(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상 연구)
국어는 아득히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와 그 일대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
한 때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고대의 언어 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
문헌 자료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국사기>, <삼국유사>, 금석문 등
아서 국어의 뿌리는 무엇이며, 어떤 모습으로 변모해 왔는지 분명하게 알기 어렵다.
우리말의 옛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임
이런 점에 유념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언어가 어떠했을지 그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상황1] 통역에 대한 기록이 없음 → 삼국 간의 의사 소통 가능 - 방언적 차이
때는 서기 642년. 뒷날 신라의 왕이 될 김춘추가 백제를 무찌를 구원병을 보내 줄 것을 고구려 보장왕에게 청한다.
신라 27대 선덕여왕 11년(642년) 김춘추가 구원병을 청하러 고구려에 갔을 때, 보장왕이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그를 대접하게 하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 삼국사기 권 제5 선덕왕 조와 권 제 41 김유신 조에 기록되어 있는 데 통역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직접 대화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통역 없이도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고대 삼국의 언어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 부여계 언어와 남방 한계 언어의 방언적 차이는 존재했을 것이다.)
[상황2] 백성들은 문자(한자)를 몰라 의사 소통과 일상 생활에 어려움을 겪음
삼국시대에도 백성들은 가옥이나 토지를 소유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문서로 기록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는 없고 한문은 너무 어려워 일반 백성들은 사용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지배층만이 한문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 지배계층과 백성들 간의 의사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자의 필요성 증대
2. 고대의 국어 생활
(1) 한자어의 전파
① 한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7세기경부터 많이 형성되어 사용되었다.
② 상류 계급(지배층) 한학자들이 주동이 되어 사용하였다.
③ 한자어의 침투 원인은 높은 문화의 언어가 낮은 문화의 언어에 침투해 온다는 문화적인 것과, 상류 특권 계급은 유식한 언어 (높은 문화의 언어)를 쓰려고 하고, 일반대중은 이를 모방하려는 심리적 작용에 있다.
④ 신라·고려 시대에 한자어 형성 사용은 완만했고, 이것이 조선 시대에 들어와 급속도로 빨라졌다.
★(2) 한자 차용의 이유
① 고유 문화 및 전통에 대한 기록의 필요성 인식하여 고유의 문자가 없던 상황 하에서 선진 문명국인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차용하였다.
② 삼국의 국가 통치 체계 정비 과정에서 통치의 한 수단으로 한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1. 우리 조상이 왜 한자를 빌려 썼는지에 대해 말해 보자
① 우리 조상들은 문자가 없었으므로 한자를 매개로 중국 대륙의 앞선 제도와 문화를 수입했을 것이다.
② 국가의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한자를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2. 우리가 고대에 살았다면, 다음 경우에 한자를 빌러 우리말을 어떤 방법으로 표현했을지 대해 이야기해 보자.
(1) 인명(人名)과 지명(地名) 적기
․인명 : 음을 한자의 음을 따서 적은 경우 예) 이가람 - 李可藍 / 김슬기 - 金霧氣
․지명 : 한자의 뜻을 따서 적은 경우 예) 안골 - 內里 / 버들골 - 柳里 / 새터 - 新垈
(2) 노랫말 적기
[한자의 음과 뜻을 따서 적은 경우]
예)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羅衣 薩多隱 故鄕隱 花皮隱 山骨, 福崇亞花 薩九花 牙器 進達來)
2-1. 고유 명사의 표기 - 한자 차용
음독 - ‘소나’로 읽음 훈독(석독) - ‘쇠내’로 읽음 → 이후에 ‘금천’으로 읽는 방식으로 변함
素那(惑云 金川) 白城郡 蛇山人也
소 나 혹 운 금 천 백 성 군 사 산 인 야
소나(素那)〔또는 금천(金川)이라고 한다.〕는 백성군(白城郡) 사산(蛇山) 사람이다.
동일 인물 당시에는 훈독하여 ‘뱀뫼’로 읽었을 것으로 추정
― ‘삼국사기’ 권 제47
‘素那(흴 소, 어찌 나)’ - ‘金川(쇠 금, 내 천)’
⇒ 다른 표기의 두 이름이 같은 사람이라고 전제함
⇒ ‘소≒쇠, 나≒내’의 공통점을 발견함
⇒ 당시에는 ‘소=쇠, 나=내’가 동일 발음이었을 것으로 추정함
⇒ 동일인의 이름을 ‘음차’와 ‘훈차’의 두 방식으로 표기했음
옛날 조상들은 국어를 표기할 고유한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한자를 가지고 국어를 표기했다. 초창기에는 한자를 이용하여 단어를 국어식으로 표기하였다. 그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 한자의 의미를 버리고 음만 빌려 오는 경우(음차) (예) ‘소나’를 표기하기 위해 ‘素那’로 적고 그 음을 빌려 옴.
․ 한자의 음을 버리고 의미만 빌려 오는 경우(훈차) (예) ‘소나’를 표기하기 위해 ‘金川’으로 적고 그 뜻을 빌려 옴
1. 한 사람의 이름을 ‘素那(소나)’와 ‘金川(금천)’으로 표기한 사실을 참고하여 고대 시기의 표기 방법을 설명해 보자.
☞ ‘素那(소나)’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것이고 ‘金川(금천)’은 동일한 사람의 이름을 한자의 뜻을 빌려 표기한 것입니다. ‘金川’의 ‘金’의 경우 그 뜻이 ‘쇠’인데 ‘素’와 음상이 유사합니다. ‘川’의 경우 뜻이 ‘내’인데 이 역시 ‘那’와 음상이 유사합니다. 옛날에 ‘素那’를 정말 ‘소나’로 읽었는지 아니면 ‘쇠내’ 혹은 ‘쇠나’로 읽었는지 정확히는 말할 수 없지만 ‘素那(소나)’와 ‘金川(금천)’은 동일한 사람의 이름을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표기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고대에는 우리말의 인명이나 지명을 한자의 음이나 뜻을 빌려 표기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다음은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 ‘소라’에게 은수가 쓴 편지의 일부이다. 화면에 나타난 표기를 보고,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왜 이런 식으로 편지를 썼을지 추측하여 말해 보자.
☞ 은수는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우리말로 편지를 쓰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친구의 컴퓨터가 한글을 인식하지 못할 것 같아 영어 알파벳을 택하여 의사를 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영어의 알파벳은 표음 문자이기 때문에 문자 하나가 소리 하나에 대응합니다. 따라서 우리말 소리를 영어의 알파벳에 기대어 표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2) 이런 식으로 표기한 방식이 고대 국어 시기의 고유 명사 표기법과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 비교하여 발표해 보자.
- 공통점 : 다른 나라의 문자를 빌려 표기함
- 차이점 : ① 고대 국어 시기의 고유 명사 표기법 : 한자의 음과 뜻을 모두 빌려 표기함
② 인터넷 시대의 영문 편지 표기법 : 알파벳의 음을 빌려 표기함
2-3. 고유 명사의 표기 - 고유어와 한자어의 경쟁
훈독 → 현대와 같은 음독으로 변함 음독
永同郡 本吉同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영 동 군 본 길 동 군 경 덕 왕 개 명 금 인 지
영동군(永同郡)은 본래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 이를 그대
길 영 길할 길 지명(地名)의 중국식 개명 고려
로 쓰고 있다.
― ‘삼국사기’ 권 제34
고유어의 우세 ⇒ 고유어와 한자어의 경쟁 ⇒ 한자어의 우세 吉同(길동) - 음차 吉同(길동) - 고유어(음차) 永同(영동) - 한자어 永同(길동) - 훈차 永同(길동) - 고유어(훈차) 永同(영동) - 한자어 문자 없음(한자 차용) 차자 표기와 한자어의 공존 한자어의 정착 차자 표기 방식 공존 |
⇒ 길동군(吉同郡)에서 영동군(永同郡)으로 변화
① 음차 방식에서 훈차 방식으로 변화
② 차자 표기에서 한자어 자체 사용으로 변화
예) 새말(신촌新村), 벌말(평촌坪村), 새재(조령鳥嶺), 한밭(대전大田)
1. 경덕왕은 ‘길동군(吉同郡)’을 ‘영동군(永同郡)’이라고 고쳤다. 이것은 고유 명사 표기 방식 중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말해 보자.
☞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吉同郡’과 ‘永同郡’을 모두 ‘길동군’이라고 읽던 방식에서, ‘永同郡’을 ‘영동군’으로 읽는 방식으로 변하였다. 이것은 한자의 음을 빌리는 방식에서 뜻을 빌리는 방식으로 변한 것이며, 한자를 우리말에 맞게 빌려 쓰는 차자 표기의 방식에서 현대와 같이 한자어 자체를 쓰는 방식으로 변환된 것이다.
2. 다음 자료를 참고하여 현대의 우리말에서 고유어와 한자어가 대체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독자의 소리> 저는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입니다. 제가사는 곳은 ‘평촌(坪村)’이라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하철역 이름도 ‘평촌’입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이곳을 ‘평촌’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곳 이름은 ‘벌말’이었습니다. ‘벌말’은 ‘넓고 평평하게 생긴 땅’이라는 의미인 ‘벌’과 ‘마을’의 준말인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잘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벌말’을 한자어인 ‘평촌’으로 바꾸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벌말’이라고 하면 어쩐지 시골 같은 느낌이 나고 현대적이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벌말’은 ‘평촌’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저는 아직까지도 ‘평촌’이라는 이름이 어색합니다. ‘벌말’이 무엇 때문에 촌스러우며, ‘평촌’이 무엇 때문에 세련되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평촌’과 ‘벌말’은 한자어냐 고유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담고 있는 의미는 같습니다.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써 온 이름을 굳이 한자어로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벌말’이라는 이름이, 들을 때 훨씬 정겹고, 말할 때도 자연스럽습니다. 저는 지하철역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평촌’이라고 말할 때마다 ‘벌말’이라는 이름이 생각납니다. 요즘 고유어를 살려 쓰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작업의 일환으로 ‘평촌’을 다시 ‘벌말’로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
☞ 한자어의 뿌리 깊은 영향으로, 고유어에 비해 한자어가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어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역사적 상황에서, 한자어의 사용이 사회적 지위의 높음을 보여 준다는 생각을 아직까지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3. 종합적인 표기 체계 - 향찰(鄕札)
서동요(薯童謠)
‘○’는 훈독
훈 : 착할 될 귀인 님 님 숨은
善 化 公 主 主 隱 선화공주니믄 (선화 공주님은)
음 : 선 화 공 주 주 은
훈 : 남 그윽할 다만 얼 좋을 둘 옛
他 密 只 嫁 良 置 古 그지 얼어 두고 (남 몰래 결혼하고)
음 : 타 밀 지 가 량 치 고
훈 : 마 아이 방 새
薯 童 房 乙 맛둥바 (맛둥서방을)
음 : 서 동 방 을
훈 : 밤 어조사 토끼 새 안을 보낼 갈 다
夜 矣 卯 乙 抱 遣 去 如 바 몰 안고 가다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음 : 야 의 묘 을 포 견 거 여
※ 고어 풀이는 양주동의 해독을 따름
․ 그지(密只) : 그윽히, 몰래 ․ 얼어(嫁良) : 정을 통하여, 결혼하여
․ 바(夜矣) : 밤에 ․ 몰(卯乙) : 몰래
★1. 향찰의 표기 체계 이해 : 실질 형태소(체언, 용언의 어간)는 한자의 ‘뜻’을 빌리고, 형식 형태소(조사, 어미)는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 문장 전체를 적는 종합적 표기
★2. ‘主主’의 표기 방식 파악 : 앞의 ‘主’는 한자의 ‘음’을 빌리고, 뒤의 ‘主’는 한자의 ‘뜻’을 빌림
★3. ‘隱’의 기능 파악 : 주제 보조사 ‘은’을 표기하기 위해 음을 빌림
★4. ‘음차(音借)’와 ‘훈차(訓借)’의 구별
1. ‘善化公主主隱’을 현대 국어로 풀어 보면 ‘선화 공주님은’이 된다. 이 구절을 중심으로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主’는 다른 방식으로 두 번 쓰였다. 각각 음과 뜻을 어떻게 따온 것인지 말해 보자.
☞ 첫째 번 ‘主’는 음을 딴 것이고, 둘째 번 ‘主’는 뜻을 딴 것이다.
2) ‘隱’의 기능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
☞ 보조사 ‘은’을 나타내기 위해 ‘隱’의 음을 따온 것이다
3) ‘隱’의 기능에 비추어 보아 이전 시기의 고유 명사 표기와 향찰 표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지 이야기 해 보자.
- 교유 명사 표기 : 단순히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인명 명사나 지명 명사를 표기함.
- 향찰 표기 : 조사, 어미 등의 문법적 요소까지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함으로써, 우리말 문장 전체를 더 체계적으로 표기함.
★ 1. 국어의 계통과 형성 파악
․ 국어는 알타이 어족에 속함(추정)
․ 삼국의 언어가 신라에 의해 통일됨
→ 경주 지방의 말 중심
★ 2. 삼국 간의 언어적 차이 파악
․ 삼국의 언어는 방언적 차이를 지님
→ 의사 소통 가능
★ 3. 지배층과 백성 사이의 의사 소통 상황 파악
․ 음성 언어를 통해 의사 소통 가능
․ 문자 언어를 지배층이 독점하여 백성들은 지배층과 의사 소통에 곤란을 겪음
※ 소나(素那) : 신라 장수 심나(沈那)의 아들. ‘사산’은 백제와의 경계로 많은 전투가 있던 지역. 문무왕 15년(675) 아달성에서 노략질을 하러 온 말갈의 군사와 싸우다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함
★향찰
①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한 문자
② 실질적 의미(훈) / 문법적 의미(음)
③ 의의 :
㉠ 한자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 국어 문장을 표기
㉡ 국어를 완벽하게 표기하기에는 부족
㉢ 실제 신라인들은 한자로 읽지 않고 우리말로 읽음
(예) 石乙 投多(돌을 던지다),
山伊 高古 花伊 美多
(산이 높고 꽃이 예쁘다)
[서동요]
․ 지은이 : 백제 무왕
․ 갈래 : ① 형식상 - 4구체 향가 ② 내용상 - 참요(讒謠(모함의 노래), 참요(讖謠)-예언·암시의 노래), 민요, 동요
․ 주제 : 선화 공주에 대한 연모의 정
․ 특징 : 주체의 전도
․ 내용 : 선화공주(善化公主)를 아내로 맞기 위한 노래. 아내로 맞기 위하여 선화공주의 거짓 비행을 계략적으로 풍자함.
․ 출전 : 삼국유사
․ 의의 : 가장 오래된 향가, 향가가 동요로 정착한 유일한 노래
․ 감상 : 이 노래는 일종의 참요로, 서동의 잠재적 갈망을 선화공주라는 상대편에게 전가시킨 것이다. 따라서,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수사적 특징이 있다. 국경을 뛰어 넘고 신분의 귀천을 초월한 낭만적인 한 소년의 사랑이 이 노래에 응집되어 있으며, 그 꿈이 장애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는 동요의 단순성은 발견해도 어떤 깊은 문학적 배경은 의식하기 어렵다. 다만 설화적 내용에서처럼 한 영웅의 일대기가 차지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