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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논리학

둘. 왜 논리가 필요한가

by Frais Study 2020. 8. 1.

    1. 논리적 생각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들 다음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듣곤 합니다.

  "너는 왜 매사에 덜렁거리고 일 처리를 엉망진창으로 하느냐?"
  "우리 사회는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모두 질서가 없단 말이야. 사회에 정의가 
실현되려면 무엇보다도 질서의식이 싹터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각자가 이기주의에 젖어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질서나 체계를 찾아보기 힘들단 말이야."

  이러한 대화들이 암시하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이 대화들을 마주 대할 때 
우리들은 일상생화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있어서 다분히 질서나 체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즉흥적으로 살아가는 자세에 익숙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들은 우리들이 얼마나 즉흥적인지 잘 알게 해줍니다.

  "어? 중간시험이 이틀 밖에 안 남았네. 또 벼락치기를 해야겠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이런 노래도 있잖아? 젊었을 때 
실컷 노는 거야."
  "저 친구 좀 봐.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대어 
들다니, 이거야말로 말세가 아닌가? 젊은이는 무조건 나이 먹은 사람을 존경해야만 
이 땅에 예의 범절이 바로 설 수 있어."
  "어디까지나 여자는 땅이고 남자는 하늘이지. 도대체 여자가 잘났다고 저렇게 
바락바락 남자에게 감히 대어들다니? 제아무리 남녀평등을 외쳐도 다 소용없는 
짓이야."

  위의 예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이치를 논하고 따지기에 앞서서 
습관이나 관습에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나열한 예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가. 느낌(감정)이나 직관은 논리와 상관없다.
  나. 논리적 생각은 우선 합리적 대화를 위하여 필요하다.
  다. 논리는 학문을 공통되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기본조건으로서 필요하다.

  만일 어떤 남학생이 한 여학생을 죽도록 사랑하면서도 자기가 왜 그 여학생을 
그토록 사랑하는지 꼭 집어서 표현할 수 없다고 합시다. 대부분의 경우 사랑의 감정 
역시 이치를 따져서 논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단풍 짙게 물든 내장산을 앞에 놓고 산이 아름답다고 
직관한다고 합시다. 이 경우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왜 그리고 어떻게 내장산을 아름답다고 직관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정확히 이치를 따져서 적절한 답을 제시하기가 몹시 
힘들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들은 합리적 대화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남존여비라든가 나이 먹은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강요 등은 합리적인 대화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치를 차근차근 따지고 논하는 것을 좀스럽다거나 째째하다고 
여기는 풍조가 모든 사람들에게 배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으면 매사에 있어서 이치를 분명히 따짐으로써 잘못된 것을 고치고 잘된 
것은 한층 더 갈고 닦음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합리적 대화를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논리적 생각은 모든 학문의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문학이나 신학 등은 이치를 논하지 않아도 되는 학문같이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들 역시 학문인 한에 있어서는 학문의 질서와 체계를 위하여 이치를 
꼼꼼히 따지고 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희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일컬어 학문 일반 또는 철학의 예비학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도움말:논리 또는 논리학이라는 말의 뿌리는 희랍 말 로고스(logos)라는 말에서 
왔는데 logos는 말, 단어, 이야기, 명제, 법칙, 계산, 숙고, 의견, 이성 등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여러 가지 뜻 중에서 오늘날에는 주로 법칙, 이성 등의 
의미로 로고스가 풀이되고 있습니다.

    2.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논리적인 생각을 필수적으로 동반합니다. 예컨대 물건을 
사고 팔 경우 아무렇게나 돈을 계산하지 않고 이치에 맞게 헤아립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때도 역시 멋대로 아무 버스나 또는 지하철을 기분 내키는 대로 
타지 않고 목적지로 향하는 차를 이치에 맞게 탑니다. 
  원시사회나 아니면 문명이 덜 발달한 곳에서도 논리적 생각의 싹은 여전히 
있습니다. 6.25가 끝난 후 시골에 가보면 오늘날과 같은 포장도로나 신식 주택이 
없고 흙먼지 나는 신작로와 초가집들이 정겨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무렵, 우리는 신작로와 내를 건너 콩밭을 가로질러 친구네 집으로 놀러가곤 했지요.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걸어 갈 수 있는 곳이면 모두 길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어디나 길 아닌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우리나가 세계의 교통난이 제일 심하고 또 교통사고도 제일 많은 나가 
됐습니다. 서울의 교통상황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걸어갈 수 있는 곳은 어디나 
길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들 앞에 빨간 불, 파란 불이 생기고 횡단보도도 생겼습니다. 
질서와 체계에 대한 훈련이 잘 안됐던 우리들은 서양식의 도로교통에 대해서 낯설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사회는 특히 논리적인 생각 없이는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논리적인 생각을 
체계적으로 취급하는 학문을 논리학이라고 합니다. 논리학은 말과 글에 질서와 
체계를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대할 때 그 대상에 대하여 판단합니다. 
판단은 말이나 글로 표현됩니다. 판단에는 의미 있는 판단과 무의미한 판단이 
있습니다.

  예 1) 아, 서글픈 내 운명이여!
     2) 의지가 강한 사람은 성공한다. 나는 의지가 강하다. 그러므로 나는 성공할 
것이다.

  위의 예에서 첫 번째 문장은 감탄문입니다. 감탄문은 감정에 의해서 성립하는 
문장이고 결코 논리적 사고의 표현이 아니므로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문장은 논리적 사고에 의해서 이루어진 의미 있는 판단입니다. 논리학은 
인간의 사고 전체를 취급하지 않고 논리적 사고만을 다룹니다. 논리적 사고가 
무엇인지 밝혀지기만 한다면 자연히 논리학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질 것입니다.
  논리적 사고란 이치를 따지며 거슬러 올라가는 사고, 곧 추리적 사고입니다. 
다음의 두 가지 예를 살펴봅시다.

  예 1) 모든 삶은 사랑한다.
  최진실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최진실도 사랑한다
  2) 고양이는 동물이다.
  최진실도 동물이다.
  그러므로 최진실은 고양이이다.

  위의 두 예는 모두 논리적 사고, 곧 추리적 사고에 의해서 형성된 판단형식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논리학은 추리의 정확성을 문제로 삼습니다. 첫 번째 예는 
추리의 정확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예는 추리의 형식에 이상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추리의 정확성을 어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논리학은 추리의 심리적 
과정이나 절차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사랑한다. 나는 사람이나. 그러므로 나도 사랑한다."
  라는 추리에서 논리학이 핵심적으로 다루는 것은 추리가 정확한가 아닌가, 곧 
추리가 타당한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심리학이나 문학에서는 어떻게 사랑하는지 그리고 사랑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등 
사랑의 과정이나 절차가 매우 중요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면서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며 서로 공감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모성애도 있고 
형제애, 동포애, 인류애를 위시하여 종교적 사랑도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랑의 
요소들을 분석하기도 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절차를 냉철하게 기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논리학에서는 외부의 자극이 뇌에 전달되어 어떤 감정이나 개념이 
어떻게 생기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문제되지 않습니다. 논리학은 명제(또는 
문장)들로 구성된 논리적 추리의 정확성만을 문제로 삼습니다.
  논리학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산수의 예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산수 역시 논리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5+7=12"는 일종의 판단이며 추리입니다. 산수는 수식으로 표현된 논리적 
추리라고 한다면 논리적 판단은 언어(말이나 글)로 표현된 논리적 추리입니다.
  요사이 국민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대하는 컴퓨터 언어 
또한 가장 대표적인 논리적 언어이며 이 언어에 의해서 논리적 판단이 형성됩니다.

  *도움말:우리는 문장이나 언명 또는 명제를 거의 비슷한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모든 문장이 명제나 언명은 아닙니다. 문법의 형식만 갖추면 문장이 됩니다. 
그러나 문장 가운데서도 참과 거짓을 가질 수 있는 문장만 명제나 언명이라고 
합니다.

    3. 논리적 명제는 서술적 명제

  논리학이 취급하는 문장은 논리적 명제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논리적 명제는 
서술적 명제입니다. 다음의 예들을 잘 살펴봅시다.

  예 1) 선거철이 되면 물가가 오른다.
  2)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면 성적이 좋아진다.
  3) 사랑이란 무엇인가?
  4) 아, 나의 미래여!

  앞의 두 가지 예문은 서술적 명제이고 이들 명제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습니다. 서술적 명제는 항상 일정한 주장을 포함합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주장이 
명제 안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표현되고 있는 지 아니면 부당한 지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이지 못한 문장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문장들은 아무런 주장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문문과 명령문 그리고 감탄문은 논리적 명제에서 
제외됩니다.

  예 1)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2)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해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쳐라
  3) 오, 저 아름다운 장미!
  아, 인생이여!

  위의 예들은 각각 의문문, 명령문 그리고 감탄문의 예들입니다. 의문문, 명령문 및 
감탄문의 문장들은 논리적 명제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장들에서 
우리는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습니다. 다음의 서술문(서술적 명제)에서 우리는 
명제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습니다.

  예 1) 너 아프니?
  2) 공부 열심히 해라.
  3) 산다는 건 정말 멋져!

  위의 세 문장들이 거짓이다 또는 참이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이 바로 명제나 언명이며, 논리적 추리는 곧 명제나 
언명으로 구성됩니다.

  *도움말:의문문, 명령문, 감탄문 등의 문장은 참과 거짓이 가려지지 않으므로 
'무의미하다(meaningless)'고 말하고 이에 반하여 서술적 명제는 참과 거짓이 
가려지므로 '유의미하다(meaningful)'고 말합니다. 논리학의 대상은 유의미한 
명제입니다.

    4. 논리적 추리

  앞에서 우리는 의미 있는 명제만이 논리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들을 잘 살펴봅시다.

  "오, 이런!"
  "저럴 수가!"
  "아이고!"
  "빌어먹을!"

  위의 말들은 단순한 느낌만을 전달합니다. 위의 말들에서 우리는 결코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으므로 그러한 말들은 논리적으로 무의미합니다. 따라서 위의 
말들은 논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서술적 명제가 바로 논리적 명제이고, 논리적 명제들이 
모여서 논리적 추리를 구성합니다. 다음의 예들을 살펴봅시다.

  예 1) 오늘은 일요일이다.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다.
  2) 나는 시험에 합격하였다.
  나는 시험에 불합격하였다.
  3) 오늘은 일요일이거나 일요일이 아니거나이다.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학교에 가야만 한다.
  4) 나는 어제 치른 시험에 합격했거나 아니면 불합격하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대학에 가보니 나는 불합격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후기대 입시를 준비하거나 아니면 
재수해야만 한다.

  앞의 두 가지 예는 의미 있는 명제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위의 두 가지 예는 의미 
있는 명제들로 구성된 논리적 추리입니다.
  어떤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낼 때 우리는 그러한 작업(또는 행위)을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리와 논리적으로 부당한 추리로 구분합니다. 전제들로부터 
결론이 옳게 이끌어질 때 그러한 추리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리입니다. 이와 
반대로 이끌어질 경우 그와 같은 추리는 논리적으로 부당한 추리가 됩니다.

  예 1) 모든 사람은 이성적이다.
  공자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이성적이다.
  2) 모든 사람은 성욕을 가진다.
  공자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성욕을 가지지 않는다.

  위의 예에서 첫 번째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리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예는 
논리적으로 부당한 추리입니다.

  *도움말:논리적 추리를 구성하는 것은 논리적 명제들입니다. 논리적 명제들은 
각각 전제와 결론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전제는 다시 대전제와 소전제로 
구분하여 소전제는 둘 이상도 가능합니다.

  예 1) 모든 인간은 증오한다(대전제)
  나는 인간이다(소전제)
  그러므로 나는 증오한다(결론)
  2) 모든 동물은 식욕을 가지고 있다(대전제)
  개는 동물이다(소전제)
  메뚜기는 동물이다(소전제)
  그러므로 개와 메뚜기는 식욕을 가지고 있다(결론)

  우리들은 논리적 추리에 있어서 대전제와 소전제의 논리적 관계를 통해서 결론을 
추리합니다.

    5. 추리와 추론

  우리들은 상상, 추리, 추론 등의 낱말을 거의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과 추리와 추론을 정확히 구분하라고 물으면 정확한 
답을 빨리 찾아내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논리학에서는 상상과 추리 그리고 추론을 분명히 구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상상은 다분히 감정의 산물이며 비약이 심합니다. 특히 예술활동에 
있어서, 곧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창작에 있어서 "상상의 날개"가 필수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상이라는 낱말은 논리학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논리적 상상'이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리와 추론은 둘 다 논리적이기 때문에 추리와 추론을 혼동하기 
쉽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절차나 과정은 추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추리가 일단 
마무리된 후 그 결과가 말이나 글(언어)로 표현되어 제대로 형식을 갖추면 그것은 
추론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주장들이 다른 주장의 바탕이 될 경우 그와 같은 논리적 추리를 
언어로 형식화하면 그것은 논리적 추론이 됩니다. 주장은 각각 명제로 표현되기 
때문에 추론은 두 가지 이상의 명제로 이루어집니다.
  추론을 잘 살펴보면 전체의 형태는 전체의 형태는 전제와 결론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지적한 일이 있지만 추론에서 전제는 
둘 이상일 수 있고 결론은 하나입니다. 전제는 대전제와 소전제로 구분되며 
소전제는 다시 둘 이상일 수 있습니다.

  예 1) 모든 사람은 명예욕을 가진다(대전제)
  그 신부는 사람이다(소전제)
  그러므로 그 신부는 명예욕을 가진다(결론)
  2) 모든 학생들은 시험 전에 불안감을 맛본다(대전제)
  피군은 학생이다(소전제)
  고양은 학생이다(소전제)
  그러므로 피군과 고양은 시험전에 불안감을 맛본다(결론)
  추론에서 전제는 원인에 해당하며 결론은 결과에 해당합니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꼭 결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결과는 반드시 어떤 원인으로부터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추론이란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도출해내는 증명의 형식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추론에 있어서 
논리학의 할 일은 무엇일까요?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옳게 도출되었는지 아니면 도출과정이 잘못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바로 논리학의 할 일입니다. 즉 전제로부터 결론으로의 추리과정이 
옳은지 아니면 그른 지를 따져보는 것이 논리학의 할 일입니다.
  우리는 추론을 말할 때 흔히 삼단논법과 같은 연역추론을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은 
삼단논법은 연역추론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연역추론에서는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됩니다.
  그러나 추론에는 연역추론 이외에 귀납추론도 있습니다. 경험적 사실이나 경험적 
자연과학에서는 전제로부터 나오는 결론이 필연적일 수 없고 대체로 통계적입니다. 
귀납추론에서는 전제로부터 '아마' 결론이 도출될 것이라는 확률적 내지 개연적 
주장이 성립합니다.

  예 1) 이 사과를 먹어보니 달다.
  저 사과를 먹어보니 달다.
  그러므로 다른 사과를 먹어도 달 것이다.
  2) 이 회사의 김양은 못생겼다.
  이 회사의 오양은 못생겼다.
  그러므로 이 회사의 다른 여사원들도 못생겼을 것이다.

  위의 추론들은 귀납추론입니다. 귀납추론에서 전제로부터 도출된 결론은 "아마... 
일 것이다."라는 형식을 지닙니다. 앞에서 특정한 전제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증명형식을 취하는 것이 추론이라고 했고 논리학의 할 일은 그러한 증명이 옳게 
되었는지 아닌 지를 살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증명이 옳게 외었을 때의 
추론을 타당한 추론이라고 부르고, 증명이 잘못되었을 때의 추론을 부당한 
추론이라고 합니다.

  *도움말:연역추론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들의 순수한 사고형식입니다. 따라서 
연역추론은 수학, 철학, 신학 등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귀납추론을 지배하는 
것은 감각경험입니다. 귀납추론은 주로 경험적 자연과학에서 사용됩니다.

    6.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

  우리들이 옳게 추리하는 지 아니면 옳지 않게 추리하는 지를 알기 위해서는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가려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논리적 추론은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지며, 전제와 결론은 논리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논리적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진 추론은 타당한 추론이고 그러지 못한 추론은 부당한 추론입니다.
  고대 희랍의 궤변철학자들은 부당한 추론을 마치 타당한 추론처럼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고대 중국이나 인도에도 부당한 추론의 형식이 제기되어 
논리 문제가 발달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러한 움직임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컨대 "흼 날은 말이 아니다", "흰 돌은 돌이 아니다"와 같은 명제는 고대 
중국에서 논리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주장된 것들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주변에서 자주 부당한 추론을 대할 수 있습니다. 부당한 추론은 
명백하지 않으므로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형식은 그럴 듯 하므로 항상 문제거리가 
됩니다.

  기형이는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기형이는 1학년을 마친 후 군에 입대하여 
꼬박 2 년 넘게 군생활을 충실히 하고 제대했습니다. 종석이는 기형이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다니는 3학년 학생입니다. 두 사람 사이는 최근에 와서 매우 
나빠졌습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티격태격하다가 며칠 전에는 드디어 주먹질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형씨, 제아무리 군대를 제대하였다고 해도 우리과 행사에서는 학년이 
우선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는 것 알지요? 그러니까 
우리과에서는 기형씨가 어떻든 나를 선배 대접해야 합니다."
  "종석씨, 이거 정말 사람 열나게 만드네. 내가 재수한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또 예비역이라는 사실도 다 알고 있어요.
  종석 씨가 제아무리 삼 학년이라고 해도 대학은 학번을 따지는 거요. 알만한 
사람이 왜 그래? 당신보다 내가 세 살 더 많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데 당신보고 
선배 대접을 하라니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학과가 먼지요, 아니면 인생이 먼저요? 누가 누구를 선배 대접해야 하는지 
한심해서 죽겠구만."
  두 사람은 말이 거칠어지고 감정이 격해져서 치고 받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주장은 옳고 상대방의 주장이 틀리다고 생각하면 의견충돌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한 경우, 추론이 마치 타당한 것처럼 사람들이나 사회에 
받아들여질 때 혼란이 생기고 사회는 퇴보하기까지 합니다.
  부당한 추론의 예는 허다하게 많습니다. 남녀가 죽느니 사느니 잠시도 떨어져서는 
안 될 것처럼 꼭 붙어 다니다가 어느 한 쪽이 변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직도 죽도록 사랑하지만 내 몸이 아프니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간곡히 
애원하는 듯 명령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오래전에 
세상에 알린 배우들도 있습니다.
  부당한 추론은 우선 우리의 생각에 혼란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다음으로는 우리의 
실생활의 방향을 상실하게 합니다.
  우선 간단한 예와 함께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살펴봅시다.

  예 1) 모든 학생은 죽는다(참)
  모든 남학생은 학생이다(참)
  그러므로 모든 남학생은 죽는다(참)
  2) 만일 네가 100억원짜리 빌딩을 가진다면 너는 부자이다(참)
  너는 100억원짜리 빌딩을 가지고 있지 않다(참)
  그러므로 너는 부자가 아니다(거짓)
  3) 모든 여인은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다(거짓)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모든 여인은 미인이다(거짓)
  그러므로 모든 여인은 미인이다(거짓)

  첫 번째 예에서는 대전제, 소전제 그리고 결론이 참이며 추론도 또 한 참입니다. 
두 번째 예에서는 각각의 요소명제들은 모두 참이지만 추론은 부당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네가 100억원짜리 빌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너는 얼마든지 
부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권력욕이 강하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인물들이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참다운 요소명제들을 사용하면서 그릇된 
추론을 교묘히 사용하는 예가 흔합니다.

  서양 철학사를 통해서 부당한 추론을 마치 타당한 추론처럼 사용함으로써 보편적 
사유를 의심하고 감각경험의 사실에 충실하고자 했던 대표적 경향은 희랍의 
궤변철학자들인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등에 의하여 대변됩니다.
  위의 예들 중 세 번째 예에서 각각의 요소명제들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추론은 
타당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어떤 추론에서 전제들만 보고 그 추론이 타당하다거나 
부당하다고 판단한다면 그러한 판단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결론만 
보고 그 추론이 타당하다거나 아니면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추론의 타당성이나 부당성은 어디까지나 전제들과 결론의 논리적 관계에서 
성립합니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요소명제들의 참과 거짓의 연관 속에서 추론의 
타당성과 부당성이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즉 대전제와 소전제 및 결론의 참과 
거짓이 우선 결정되어야만 그것들의 논리적 관계를 통해서 추론이 타당한 지 아니면 
부당한 지의 여부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다음의 예를 
살펴봅시다.

  예 1) 홍수가 나면 물가가 오를 것이다(참)
  물가가 올랐다(참)
  그러므로 홍수가 났다(거짓)
  2) 진급하면 봉급이 오를 것이다(참)
  봉급이 올랐다(참)
  그러므로 진급하였다(거짓)

  첫 번째 예에서 물가가 올랐다고 해서 반드시 홍수가 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예에서도 봉급이 올랐다고 해서 반드시 진급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넓은 의미에서 타당한 추론을 건전한 추론이라고 말하고 부당한 추론을 
불건전한 추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좀더 상세히 말하면, 각각의 요소명제가 모두 
참이고 타당한 추론이 건전한 추론입니다. 그렇다면 건전한 추론의 경우 결론이 
참이면 추론은 항상 타당합니다. 

  *도움말 1:요소명제란 추론을 형성하는 각각의 명제들, 곧 대전제, 소전제 및 
결론을 말합니다.

  예:요소명제들
  모든 사람은 이성적이다(대전제)
  나는 사람이다(소전제)                             
  그러므로 나는 이성적이다(결론)

  *도움말 2:희랍의 소피스트들(궤변철학자들)은 부당한 추론을 내세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몰론 고대 인도의 인명론이라든가 중국의 명가 등에서도 논리적인 
관점에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흰 돌은 돌이 아니다"등과 같은 궤변을 
제시했지만, 사회, 변화를 부정하기 위한 증명을 제시하였습니다.
  물론 제논은 사회,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증명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논리적 의도에서 증명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제논의 
증명은 궤변으로 판정 났으며 소피스트들은 제논의 증명방식을 이용하여 형식에 
있어서 유사한 추론을 사용하였지만 그들의 추론은 출세나 돈벌이를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제논은 사물들의 다수성의 대한 4가지 반대 증명 그리고 운동에 대한 세 가지 
반대 증명을 제시하였습니다.

    (가) 사물들의 다수성에 관한 네 가지 반대 증명

  1) 만일 존재하는 것이 다수라면 그것은 무한하게 작으며 동시에 무한하게 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무한하게 크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여럿일 수 없다.
  2) 만일 존재하는 것이 다수라면 그것은 수적으로 유한하며 동시에 수적으로 
무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수적으로 유한하며 동시에 무한하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다수일 수 없다.
  3) 만일 모든 사물들이 공허한 공간 안에 있다면 모든 사물들 자체는 공허한 
공간과 똑같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사물들 자체는 공허한 공간이 아니므로 
공허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4) 만일 옥수수 한 푸대가 있어서 흔들면 낱낱의 옥수수와 옥수수의 각 부분은 
똑같은 소리를 낸다.

  위의 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예에서 
존재하는 것이 여럿이라면 그것은 한편으로 무수하게 많은 작은 것들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와 반대로 그것은 무수히 많은 최대한의 큰 
것들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성립합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하나라는 추론의 타당성을 결국 주장하게 됩니다.
  두 번째 예에서는, 존재하는 것이 여럿이라면 그것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유한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합니다. 그러나 또한 존재하는 것이 여럿이라면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성립합니다.
  세 번째 예는 공허한 공간을 부정함으로써 공허한 공간에 널려있다고 생각되는 
사물의 다수성을 부정합니다.
  네 번째 예는 세 번째 예와 비슷합니다. 옥수수들의 소리와 옥수수의 각 부분의 
소리는 하나라고 조장함으로써 여러 소리(다수의 소리)를 부정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첫 번째나 두 번째의 예는 감각의 신빙성에 반대함으로써 그리고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예는 공간을 반대함으로써 사물의 다수성을 부정합니다.

    (나) 운동에 관한 세 가지 반대 증명

  1) 한 물체는 무한한 공간을 차지하므로 운동은 부정된다.
  2) 아킬레스는 자기 앞에 있는 거북이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3)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하여 있다. 왜냐하면 화살은 날아가는 매 순간 일정한 
공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예는 어떤 물체가 항상 자신에게 알맞는 공간을 지니고 있으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 예는 번개처럼 빨리 달리는 희랍이 신 아킬레스가 달리기의 출발점에서 
거북이보다 뒤에 자리잡고 있다가 경주를 시작하면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예와 똑같은 내용을 가집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는 
언제나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있으므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예 역시 첫 번째 및 두 번째 예와 유사한 내용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제아무리 날아가는 화살이라도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있고 이 공간 자체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는 추론이 성립합니다.

  제논의 사물의 다수성에 대한 반대는 완전한 이성적 사유와 존재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감각이나 현실 세계를 무시하는 데서 생깁니다. 그리고 제논의 운동에 대한 
반대는 '흐름'으로서의 시간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제논처럼 모든 것을 
공간화하면 운동은 무의미해집니다.

  또, 소피스트들은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의 대표적인 궤변(부당한 
추론으로서의)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 1)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프로타고라스).
  2) 우리들은 어떤 것의 생성이나 존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전혀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도 만일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그것을 알 수 있다면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전달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이란 
사태와 하등의 공통된 것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부당한 추론은 우리들의 사고력을 흐리게 할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적으로 대중을 속임으로써 특정인의 이기적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염려도 있습니다. 부당한 추론을 마치 타당한 추론처럼 주장할 
경우 우리들은 판단의 오류를 겪게되며 나아가서 현실의 행동을 그르칠 염려가 
많습니다.
@ff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

  1. 질서와 무질서에 관하여 토론해봅시다. 또한 질서의식이 무엇인지 생각하여 
봅시다.

  2. 대화와 지꺼림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지적하여 봅시다.
 
  3. 논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4. 느낌이나 직관이 논리와 상관되는 지 그렇지 않은 지를 말하고 또 그에 대한 
이유를 제시해 봅시다.

  5. 합리적 대화가 왜 필요한 지 근거를 제시하여 봅시다.

  6. 논리적 생각이 학문의 기본 조건일 수 있는 이유를 말하여 봅시다.

  7. 논리적 사고의 성격을 설명해 봅시다.

  8. 논리학과 심리학의 차이는 어떤 점이 있을까요?

  9. 명제란 무엇을 말합니까?

  10. 의문문, 명령문, 감탄문 등이 논리적 명제가 아닌 이유를 말하여 봅시다.

  11. 추리와 추론을 구분해 봅시다.

  12. 요소명제란 무엇을 말합니까?

  13. 연역추론과 귀납추론의 차이를 말하고 각각의 예를 들어봅시다.

  14. 타당한 추론과 부당한 추론의 구체적 예를 들고 그것들의 차이를 말해 
봅시다.

  15. 건전한 추론은 어떤 것입니까?

  16. 궤변철학자들(소피스트들)의 부당한 추론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 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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