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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2/논리학

하나.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by FraisGout 2020. 8. 1.

    1. 생각하는 방법

  사람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정의한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말할 줄 아는 존재이다."
  "인간은 의심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인간은 웃을 줄 아는 동물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
  이들 여러 가지 정의들 가운데서 가장 사람의 특징을 잘 들러낸 것은 역시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라는 정의일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남도 생각하며 나아가서 나와 남 전체까지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지극히 유치하거나 또는 생각이 매우 모자라는 사람을 일컬어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니 "골이 텅 빈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확실히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그것이 모두 생각다운 생각이 될 수 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릇된 생각보다 올바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생각이 
보다 바람직한 이론과 실천을 세우며, 나아가서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인지 바로 
그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건이나 대상을 검토하고 분석하며 종합하는 태도가 없으면, 합리적 내지 논리적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부분과 전체를 함께 보며 동시에 비판적,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이나 일이든 철저히 검토하고 
분석하며 종합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방법은 경험적 개별사실로부터 어떤 일반 
원리에 도달하든 아니면 어떤 일반 원리를 개별 사실에 적용하든 간에 두 경우 모두 
똑같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들의 
생각에서 선입견 내지 편견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생각은 사실 
수많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편견을 하나씩 저거 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올바른 생각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제 편견이 무엇이고 참다운 앎이 무엇인지 그리고 편견을 벗어나서 참다운 
생각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철학자 플라톤과 베이컨을 인용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희랍 철학자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론" 제 7권 나오는 동굴의 비유는 편견(그릇된 
생각)이 무엇이고 올바른 생각 내지 참다운 앎이 무엇인지 일목요연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동굴의 비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동굴 안쪽의 벽을 향하여 묶여 있어서 그들은 동굴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등뒤로는 동굴 저만치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불과 동굴 입구 사이에는 여러 가지 길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대상들이 널려 있습니다. 이 대상들은 불빛에 반사되어 사람들 앞에 있는 
동굴의 벽면에 희미한 그림자를 던집니다.
  사람들은 손과 발이 묶여있기 때문에 가까스로 고개를 조금 움직여 단지 벽면의 
그림자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림자를 참다운 것으로 생각하고 그림자의 
모습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학문의 과제라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만일 묶여있던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 우연히 손과 발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 동굴을 떠나게 된다면 그는 그림자를 더 이상 사실로 여기지 
않고 대상을 직접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그는 동굴입구를 빠져나와 햇빛 쏟아지는 대지 위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강한 햇빛에 잠시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 동굴 안에서 
본 것이 참다운 대상이 아니며 동굴 안의 불빛도 참다운 빛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동굴을 떠나와 찬란한 태양광선을 체험하고 가장 참다운 빛을 알게되고 이 
빛을 통하여 현실의 참다운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상과 같은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가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은 동굴 안에서의 
생각은 그릇된 생각이라는 것, 그리고 동굴 밖에서의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동굴 안에서의 생각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편견 내지 
선입견입니다. 편견을 벗어나면 우리는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현실생활에도 동굴의 비유와 유사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군대에 
가기 전에 청년은 군대생활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듣고 읽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군대생활을 체험하게 되면 이전에 자신이 가졌던 생각이 
대부분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직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취직시험에 처음으로 합격한 사람은 새로운 
기대감에 벅차 마음이 설레입니다. 그러나 막상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그는 전에 
자신이 가졌던 직장생활에 대한 생각이 대부분 그릇된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베이컨은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상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우상은 그릇된 생각이 원인이 되는 편견 또는 
선입견입니다.
  베이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크게 네 종류로 봅니다: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이 곧 그릇된 생각을 생기게 하는 네 가지 
원인들입니다.

  #1 종족의 우상:인간은 어떤 것이든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고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이컨은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이러한 편견을 버려야만 
객관적 진리가 가능하고 또한 그것을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춘기 소녀를 떠올려 볼까요? 마음이 여립니다. 남의 작은 상처만 보아도 마치 
자신이 당한 것처럼 가슴 아파합니다. 늦가을 산길을 걸으며 소녀는 모든 생명이 
시들어 가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고뇌에 젖어 듭니다.
  뒹구는 한 잎의 낙엽. 시들어 색깔이 변한 코스모스 꽃잎. 소녀는 모든 것이 
서글프게만 느껴져 끝없는 상념에 잠깁니다. 
  "정처 없이 뒹구는 저 낙엽은 얼마나 고독하고 쓸쓸할까.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이 바람 부는 대로 아무 곳이나 흘러가야 하는 운명이 아닌가?
  시들어버린 코스모스 꽃은 또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자신의 청초하고 아름답던 
모습을 다 잃고 저토록 초라해진 자기 모습을 보면 얼마나 서글플까?"

  소녀뿐만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솝우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우화들의 경우, 인간 중심적 견지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외로운 별, 기운 센 폭풍우, 즐거워하는 꽃 등 사물이 마치 
인간이기라도 한 듯 우리편에서 사물을 말하는 습관에 길들여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이러한 편견의 예를 잠시 살펴봅시다.

  예 1) 거북이에게서 인내심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거북이는 말없이 매사를 
천천히 행하기 때문이다.
     2) 장마가 끝나자 찬란한 태양이 솟았다. 햇님의 방긋 웃는 모습을 보니 한층 
기분이 유쾌하다.

  #2 동굴의 우상:플라톤의 "국가론"을 보면 '동굴의 비유'에 처음 등장하는 
사람들은 동굴 쪽으로 앉아 있고 모두 쇠사슬로 묶여 있습니다. 그들은 불빛에 
희미하게 반사된 동굴 벽의 그림자를 참다운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각 개인은 모두 주관에 충실하고 자신의 주관적 앎을 확실한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욕심쟁이 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가 먹음직한 고기 덩어리를 물고 냇물이 흐르는 다리를 지나가다가 아래를 
쳐다보았습니다 저 아래쪽에 웬 개가 큼직한 고기 덩어리를 물고 일그러진 얼굴로 
자기를 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개는 갑자기 욕심이 나서 저놈을 혼내주고 고기도 
뺏을 마음으로 으르렁 하고 크게 짖었습니다. 짖는 순간 그만 고기 덩어리마저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다음 예문,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를 읽어봅시다. 이 글에서 우리는 아다다의 
어머니가 장애인에 대한 주관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질그릇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부엌에 쥐가 
들었나? 샛문을 열어 보려니까, 
  "아 아 아이 아아 아야!"하는 소리가 뒤란 곁으로 들려온다. 샛문을 열려던 
박씨는 뒷문을 밀었다.
  장독대 밑, 비스듬한 켠 아래, 아다다가 입을 헤벌리고 넓적 엎더져, 두 다리만을 
힘없이 버지럭거리고 있다. 그리고 머리 편으로 한 발쯤 다가선 깨어진 동이 조각이 
질서 없이 너저분하게 된장 속에 묻혀 있다.
  "아이구테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년이 동애를 또 잡았구나! 이년아! 너더러 
된장 푸래든 푸래?"
  어머니는 딸이 어딘가 다쳤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데 가는 동정심보다 
깨어진 동이만이 아깝게 눈에 보였던 것이다.
  "어 어마! 아다아다 아다 아다아다..."
  모닥불을 뒤집어쓰는 듯한 어머니의 음성을 또다시 듣게 되는 아다다는 겁에 질려 
얼굴에 시퍼런 물이 들며 넘어진 연유를 말하여 용서를 빌려는 기색이나 말이 
되지를 않아 안타까와한다.
  ...
  "이년까타나 끝이 세누나! 시켠엘 못 가겠으면 오늘은 어드멘든디 나가서 뒈디고 
말아라, 이년아! 이년아! 아, 이년아!"
  어머니는 눈알을 가로 세워 날카롭게도 흰자위만으로 흘기며 성큼 문턱을 
넘어선다.
  아다다는 어머니의 손길이 또 자기의 끌채를 감아쥘 것을 연상하고 몸을 겨우 
뒤재 비꼬아 일어서서 절룩절룩 모퉁이로 피해 가며 어쩔 줄을 모르고 일변 고개를 
좌우로 둘러 주변을 살피며 아연하게도,
  "아다 어 어마! 아다 어마! 아다다다다다!"
  하고 부르짖는다. 다시는 일을 아니 저지르겠다는 듯이, 그리고 한번만 용서를 
하여 달라는 듯싶게.
  그러나, 사정 모르는 체 기어이 쫓아간 어머니는,
  "이년! 어서 뒈데라. 뒈디기 싫건 시집으로 당장 가거라. 못 가간?..."
  그리고 주먹을 귀 뒤에 넌지시 얼메고 마주선다.
  순간, 주먹이 떨어지면? 하는 두려운 생각에 오싹하고 끼치는 소름이 튀해논 
닭같이 전신에 돋아나는 두드러기를 느끼는 찰나, '턱'하고 마침내 떨어지는 주먹은 
어느새 끌채를 감아쥐고 갈지자로 흔들어댄다.
  "아다 어어 어마! 아 아고 어 엉마!"
  아다다는 떨며 빌며 손을 모은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한 번 손을 댄 어머니는 그저 죽어 싸다는 듯이 자꾸만 
흔들어 댄다. 하니, 그렇지 않아도 가꾸지 못한 텁수룩한 머리는 물결처럼 흔들리며 
구름같이 피어나선 얼크러진다.
  그래도, 아다다는 그저 빌 뿐이요, 조금도 반항하려고는 않는다. 이런 일은 거의 
날마다 지나 보는 것이기 때문에 한 대야, 그것은 도리어 매까지 사는 것이 됨을 
아는 것이다. 집에 일이 아무리 밀려 돌아가더라도 나 모르는 체 손 싸 매고 
들어앉았으면 오히려 이런 봉변은 아니 당할 것이, 가만히 앉았지는 못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치에 가까운 성격은 무엇엔지 힘에 부치는 노력이 있어야 
만족을 얻는 듯했다. 시키건 안 시키건, 헐하나, 힘차나, 가리는 법이 없이 하여야 
될 일로 눈에 띄기만 하면 몸을 아끼는 일이 없이 하는 것이 그였다. 그래서 집안의 
모든 고된 일은 실로 아다다가 혼자서 치워놓게 된다.
  ...

  "백치 아다다"에서 어머니는 장애자인 아다다를 극도로 미워하고 구박합니다. 
아다다는 시집에서도 구박덩어리입니다. 사람들은 장애인을 정상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보통 편견을 가지고 있으므로 장애인에게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장애인을 
기피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아다다의 어머니처럼 장애인을 학대하기까지 합니다. 
헬렌 켈러 여사나 스티븐 호킹박사와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 장애인도 정상인보다 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야말로 인간의 
주관적인 동굴의 우상입니다.

  *베이컨이 지적하는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이 동굴과 같은 우물 속에 갇혀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주관적 편견을 
제어하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있는 지방색에 대한 감정 또는 출신학교에 대한 편견은 
모두 '동굴의 우상'에 해당합니다. "평안도는 풀밭의 호랑이, 함경도는 하와이, 
강원도는 감자바위, 경상도는 문둥이, 전라도는 개똥쇠, 충청도는 멍청도..." 
등등으로 말하는 것은 분명히 '동굴의 우상'에 속합니다. 학력이나 출신학교에 대한 
편견과 아울러 지방색에 대한 편견을 없애지 못 한다면 합리적 사고와 행동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3 시장의 우상:말이나 글, 곧 언어가 생각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생기는 편견이 
있습니다. 마치 장사꾼들이 왁자지껄 말로 떠들면서 시장에서 거래를 좌우하는 
것처럼 언어가 생각에 잘못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가 사람 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어를 그릇되게 사용하면 엄청난 편견이 
빚어집니다.
  또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선 말 잘못하면 손해본다는 뜻이 있고 
다음으로는 말이 행동에 앞서기 쉬우니 조심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말 잘하는 사람치고 실천에 있어서 확실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실제 행동은 하잘 것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등의 말을 
합니다. 인간의 매사에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지적하는 
표현들입니다.

  어떤 청년이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배우기 위하여 선가의 어떤 고승을 
찾아갔습니다.
  "스님, 괴로운 이 세상이 하잘 것 없는 것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스님에게 
깨달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고승은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습니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굵은 음성으로 
한마디하는 것이었습니다.
  "너 밥 지을 줄 아느냐?"
  "제가 깨달음을 배우기 위해서 스님을 찾아왔는데 웬 밥은요?"
  "엣끼 이놈!"
  스님은 고함소리와 함께 대짜 고짜 지팡이로 청년을 내리쳤습니다.
  "지금 내가 배고프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고승은 자리를 떴습니다. 그 순간부터 청년은 나무하고 마당 
쓸고 밥하며 허리 꼬부라지게 일했습니다. 그러기를 3 년이 지났습니다. 청년은 
마음을 굳게 먹고 고승에게 다시 한번 애걸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는 남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을 3 년이나 했어. 이젠 스님도 내게 깨달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이 틀림없어."
  청년은 어느 날 고승 앞에 구부리고 앉아 제법 기운찬 음성으로 말을 꺼냈습니다.
  "스님, 저는 꼬박 3 년간 스님의 수발을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고승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감돌았습니다.
  "누가 너더러 내 수발하라고 했더냐? 그래, 할 말이 무엇이냐?"
  "스님, 3 년간 지났으니 깨달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어허 고얀 놈!"
  이번에도 고함과 함께 청년은 지팡이로 세게 얻어맞았습니다.
  "나는 지금 배고프니라."
  고승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습니다. 이날 이후도 청년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서 했습니다. 다시 3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청년은 이번에야말로 
사생결단을 내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오로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6 년이란 세월을 고스란히 스님에게 바쳤어. 
농사를 지었어도, 아니 장사를 했어도 이렇게 열심히 했다면 지금쯤 나는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거야. 이번에도 스님이 깨달음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스님 
곁을 떠날 수밖에. 내가 떠나면 스님도 엄청나게 불편하겠지.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깨달음이 뭔지 가르쳐 주겠지."
  어느 오후, 청년은 다시 고승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떼었습니다. 
  "스님 제가 스님을 모신지 어언 6 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스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젠 깨달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셔야겠습니다."
  "깨달음이 무슨 물건이드냐? 깨달음 자체가 없으니 가르쳐 줄 것도 배울 것도 
없느니라."
  "스님, 이놈을 놀리시렵니까? 제발 깨달음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눔아, 네 밥짓는 솜씨가 그게 무엇이냐? 밥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놈이 
깨달음은 또 웬 깨달음이란 말이더냐?"
  고승이 지팡이를 집어들자 청년은 또 맞을 것 같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산을 내려갈까 말까, 수 없이 망설이다가 남은 힘을 다 해서 고승을 다시 
모시기로 했습니다. 청년은 한결같이 고승을 섬겼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청년은 더 이상 깨달음이 무엇인지 고승에게 묻는 일이 없었습니다. 청년도 나이가 
들어 장년이 되었습니다. 고승이 열반한 후 많은 스님들은 나이 든 청년을 고승의 
후계자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시끌벅적한 시장한 가운데서 상인들이 말 한마디로 돈을 버는 것처럼, 청년도 
처음엔 스승의 딱 부러진 말 한마디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진리가 
한마디의 말로 그 의미를 다 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오히려 은은한 행동 속에 답이 
있는 건 아닐지요. 스승은 청년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 시장의 우상을 버릴 수 없습니다.
  말장난을 마치 참다운 이야기인 듯이 여기거나 또는 언어를 단지 이기적인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시장의 우상'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힙니다. 

  #4 극장의 우상:이 편견은 무대 이에서 벌어지는 선입견을 말합니다. 배우들은 
실제 인물을 흉내내어 그들이 마치 실제 인물인양 연기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에도 
이와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남의 생각을 전혀 비판하지 않은 채 마치 내 것 인양 
주장한다면 커다란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예 1)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으니 너 역시 너 자신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2) 성경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마음이 가난하니 
복이 있다.

  좀더 상세히 말하면 플라톤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이성에 의하여 편견을 
제거함으로써 올바르게 생각하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베이컨은 경험의 
입장에서 우선 편견을 제거한 다음 참다운 생각에 해당되는 모든 경우를 분석하고 
종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 두 사람 이외에도 동서고금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상가들이 
그릇된 생각을 제거하고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방법들은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체계적인 생각이나 합리적인 생각 또는 논리적인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릇된 생각이란 결국 질서와 체계를 도외시한 생각이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입니다. 올바른 생각이란 이치를 따지고 논의함으로써 이치에 어울리는 합리적 
생각입니다.

    2. 설악산과 설악산 지도:구체적인 생각과 추상적 생각

    *구체적일수록 복잡하다

  전람회에 가서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상작품이고 또 하나는 추상작품입니다.
  서양화를 보더라도 미켈란젤로, 르노아르, 세잔느 등의 그림은 얼른 이해가 
갑니다. 그들의 그림에서는 인물이나 풍경 등이 사실 그대로 아니면 사실과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카소, 칸딘스키, 샤갈 등이 추상화를 
보면 말 그대로 추상적이어서 뭐가 뭔지 통 감이 안 잡힙니다. 추상화는 감상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미적 감정을 동원하여 나름대로 이해하면 족하다고 하긴 해도 
도대체 무엇을 그렸는지 감도 잠을 수 없는데 이해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듭니다.

  우리는 대체로 추상이라는 말 자체를 낯설어 하며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구체적이라는 말이나 사실적이라는 말은 우리와 매우 가깝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설악산은 생각해 보십시다. 나는 철마다 설악산을 찾습니다. 산다운 산,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웅대한 자태가 항상 날 반기는 듯 합니다. 대관령을 넘어 아니면 
미시령이나 한계령을 넘어 또는 진부령을 넘어 철이 바뀔 때마다 설악산을 찾아간 
회수가 마흔 번도 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설악산 전체 덩어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또 설악산 구석구석이 어디에 붙어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직접 구체적으로 설악산은 수없이 찾아갔으면서도 구체적인 경험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비약이 있지만 쌀 한 말을 쏟아놓고 쌀알을 전부 
세어보라고 한다면 감히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아무런 설계도나 청사진도 없이 
철근이나 시멘트 등의 토목공사 재료만 가지고 한강다리를 놓으라고 한다면 과연 
한강다리를 시공할 사람이 있을까요?
  통계수치라든가 컴퓨터에 의한 계산도 없이 국가의 일년 예산을 편성하라고 
한다면 또 어느 누가 그럴 수 있다고 답하겠습니까?

    *추상적일수록 단순하다.

  애쓰고 설악산을 찾지 않더라도 설악산 안내책자나 지도를 펴놓고 보면, 설악산이 
바로 어디쯤에 있고 흔들바위가 어디에 있는 지 그리고 소금강이 어느 만치에 있는 
지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지성의 힘에 의해 생각합니다. 지성적 생각이란 바로 추상을 말합니다. 
감각경험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서 맺힌 상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성적 생각은 그 
상을 다시 한번 걸러서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김으로써 추상합니다.

  구체적인 연못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들이 연못을 알 때 이미 우리는 연못을 
추상합니다. 즉 연못의 크기, 물 색깔, 연못 주변의 환경, 연못의 용도 등을 추려서 
연못의 뼈대만 정리합니다. 그리고 그 이외의 잡다한 것은 모두 버립니다.
  현실 세계의 복잡한 연못(구체적)은 일단 추상되면 연못의 뼈대만 갖게 되어 매우 
단순한 틀로 남습니다. 학문이란 바로 구체적 현실을 추상에 의하여 단순화시키는 
지성작업입니다. 예컨대 추상된 연못의 뼈대를 틀 삼아 그 틀을 현실에 적용하여 
우리는 진짜 연못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성의 산물 중에서 가장 고도로 추상된 
것은 다름 아닌 논리학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들 가운데서 가장 추상적이고도 
단순한 것은 논리학과 수학입니다. 구체적인 생각의 뼈대와 틀만 골라내고 나아가서 
생각과 생각 사이의 관계를 추려 내고 기타 상상이나 물음 또는 감정 등을 제외하면 
곧 논리적 생각, 논리적 추리가 성립합니다.
  실제의 건물에 비하여 건축설계도는 매우 단순합니다. 설계도는 건물 자체가 
아니라 건물의 틀만 추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계도는 건물 자체가 아니라 
건물의 틀만 추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설계도를 가지고 우리는 구체적이며 
복잡다단한 재료들을 이용하여 실제의 건물을 쉽사리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추상작업은 (가) 인간으로 하여금 대상 전체를 명백히 파악하게 
해줌으로써 대상을 뜻에 맞게 이용하게끔 하고, (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상의 
원리를 파악하게 해주며, (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참다운 의미라든가 
인간과 세계에 관한 근원 원리에 접근 가능하도록 해줍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구체적인 생각은 우리들로 하여튼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붙잡게 해주는 반면에 추상적인 생각은 현실의 전체 모습과 아울러 현실의 원리를 
파악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생각과 추상적인 생각 두 가지는 모두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능력입니다.

    3. 부분과 전체를 보는 눈

  흔히들 동양사람은 종합능력이 뛰어나고 서양사람은 분석능력이 뛰어나다고들 
말합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동양인은 분석능력이 약하고 서양인은 종합능력이 
뒤떨어진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나라의 청자나 백자 또는 사찰의 건축양식을 보면 그와 같은 말이 어느 정도 
타당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고려나 이조시대의 도공들은 일일이 
계산하고 따지며 도면을 그려서 청자나 백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랜 경험을 
바탕 삼아 빼어난 직관력에 의하여 도자기의 전체를 종합적으로 통찰함으로써 
찬란한 청자와 백자를 구어 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양인들은 꼼꼼히 따지고 계산함으로써 자동차와 비행기 그리고 
컴퓨터와 인공위성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문제는 전체를 종합적으로 볼 때 부분을 분석하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고 그런가 하면 부분의 분석에만 너무 매달릴 경우 전체를 
종합적으로 보는 안목을 상실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부분에만 분석력으로 집중할 경우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그르치기 십상입니다. 
매사에 있어서 문제가 생길 경우 문제를 분석하며 동시에 종합할 수 있는 사고력을 
가져야만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예컨대 최근에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환경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경제적 
효율만 생각한다든가 특정한 생산 산업의 발달만 고려한다면 서로 다른 분야들간에 
마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그 결과 해결하기 어려운 공해문제가 발행합니다.
  그러므로 산업공해를 줄이고 환경을 보전 내지 재생시키기 위해서는 산업전체의 
조화를 반드시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바로 합리적인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범위를 좁혀서 말한다면 
논리적인 생각입니다. 질서와 체계를 가지고 부분을 분석하고 전체를 종합하는 
생각이 곧 논리적인 생각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부분이 체계적으로 질서있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논리적 생각이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ff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

  1.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가지 말들 중에서 가장 적절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2. 분석적인 생각의 예를 들어봅시다.

  3. 종합적인 생각의 장점과 단점을 각각 지적해보십시오.

  4. 편견과 참다운 생각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5. 청자나 백자를 만드는데 있어서 주로 작용하는 생각은 어떤 종류의 
생각일까요?

  6. 자동차나 컴퓨터와 연관된 생각은 주로 어떤 종류의 생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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