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산업을 주제로 떠올린 배경에는 어떤 특정문화의 보편화 경향과 함께 세계 여타 지역문화 및 문화가치의 위축 내지 소멸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데 대한 깊은 우려가 작용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유리한 경제적 정치적 조건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문화산업이 예술분야의 직업과 일반인의 창조성의 발휘 양상을 크게 변모시킬 수 있고 창조적 예술가들과 일반 대중 간의 접촉기회를 높이는가 하면, 학교 안팎에서의 교육활동에 신선한 자극을 제공하기도 하고, 국민 일반에 의한 문화적 표현에의 효과적 참여를 상당히 강화하기도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말하자면, 문화산업의 역효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국한한다는 것은 잘못이며 현실적이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문화산업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은 흔히 비판이론이라고도 불리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1947)이라는 책의 한 장을 이와 같이 이름 붙인 데서 유례한다. 그들은 다분히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에 접근했는데, 그들이 행한 분석의 진정한 주제는 문화산업이 아니라, 그것의 당연한 산물, 즉 대중문화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말하자면, 문화산업 개념은 대중문화 개념을 올리기 위한 무대일 뿐 그 자체가 연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생산의 산업형태라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재즈와 만화, 라디오와 영화 등을 뭉뚱그려 같은 현상으로 취급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재즈가 텔레비전 연속극과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란 점을 잘 알고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 바 있다.
이에서 보듯이 문화산업에 대한 총론적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영역이 어느 정도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말로 된 자료들 중 가장 표준적이라고 할 만한 유네스코의 《문화산업론》은 문화산업의 범위와 활동분야를 10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도서, 신문·잡지, 음반,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새로운 시청각 제품과 서비스, 사진, 미술품 복제, 광고가 그것이다. 우리 나라에 온 적도 있는 프랑스의 문화정책 전문가 오귀스트 지라르에 따른 이같은 범주들은 다시금 제조방식에 따른 기준에 따라 다시 몇 개의 집단으로 구분된다. 원초적으로 소규모적이고 개인적인 창조품목이 산업기술에 의해 대량 생산되는 제 1 집단으로는 도서, 미술복제, 음반이 손꼽힌다. 이어서 창조적 활동이 처음부터 상당한 기술적 물량투입을 상정할 뿐 아니라, 공급양식도 집단적 성격을 지니는 제 2 집단으로는 영화, 텔레비전이 손꼽힌다. 나아가 사진과 홈무비(자가영화)는 제조과정의 흥미로운 결합을 보여주는데, 사용자는 우선 산업제품을 시장에서 구입하여 이를 원자재로 활용, 자신의 개성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찍힌 필름은 다른 또 하나의 산업에 넘겨지게 되고 그 산업은 ‘현상·인화’된 사진을 되돌려 주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진은 독특하면서도 복제 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문화산업은 또한 사용방식에 따라 분류될 수도 있다. 책, 음반, 영상제품은 사용자가 서로 다른 제품들을 놓고 능동적인 선택을 행사할 수 있는 상품들로서, 사용자가 오래 간직하는 내구적 상품으로 구입하기 때문에 애착이 강하고 지속적이다. 달리 말하면, 공급이 수요에 앞서 가면서, 즉각적 수익성이 없는 품목들(시, 철학, 옛날 또는 현대 음악 등)이 여전히 생산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의 경우는 출판산업이라고도 할 만한 앞의 경우에 비해 그 사용자가 엄청나게 더 크지만, 그들에게 허용되는 선택의 가능성은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그들은 훨씬 수동적이다. 이 분야에서의 생산은 광고를 통해 여타의 비문화적 상품 소비와 연결되는 일반적이고 금방 낡아 버리는 대량소비상품의 생산과 홉사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지라르는 라디오, 텔레비전이 좀더 고상한 출판산업이나 생음악 연주 등의 제품을 일종의 ‘문화저장고’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충분한 설명이 주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이로써 문화생산에는, 그 대량생산의 국면에서조차, 문화의 본질과 관계되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며, 따라서 대량생산된 부품들을 일정 장소나 공장에서 조립함으로써 행해지는 상품생산을 지시하는 ‘산업화’라는 말이 문화에는 적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의 예언대로 새로운 시청각 제품, 그 서비스 및 네트워크(영상제품, 위성 등 전산기술과의 연관에서 파생되는 일체의 기술, 전화와 텔레비전 스크린 등)가 모든 문화제품을 좌우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우리는 “문화산업은 문화의 산업화가 아니다”라는 그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한가를 질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답은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느 경우에라도, 그것이 ‘문화적 저장고’를 그 존립여건으로 삼고 있다는 인식이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이윤의 관점에서 이에 접근하면서, 어떻게 하면 좀더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사리 제작기술과 보급기술의 개선이 절실하다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것이 마치 유행이 강요되고 있는 이른바 ‘세계화’를 문화적으로 손쉽게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라도 되는 듯이 야단법석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가장 기초가 되는 인문교육의 핵심에 속하는 예술교양교육,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예술전문교육은 여전히 방치해 두는 넌센스가 태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산업이 일반대중의 예술수용력을 키우고 예술에의 감수성을 키워주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을 조건반사 속에 몰아넣거나 무감각 상태에 빠뜨리는가 하는 질문은 자칫 질문을 위한 질문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 사용자들에게 진정으로 새로운 가치를 심어줄 수 있고, 메시지 생산자들과 일반대중이 극히 제한되고 암시적인 교류의 범위를 넘어 참다운 대화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하려면, 그리고 시장세력이나 정치적 편의주의가 아니라 사용자들이 좀더 능동적이고 근원적으로 문화상품의 선택에 참여할 수 있게 하려면 아무래도 시민적 차원의 운동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 첫걸음은 아무래도 살되 좀더 사람답게 살려는 노력의 총화로서 문화가 지닌 힘을 믿으면서 비문화적 사태를 개선할 수 있는 지식과 실천을 위한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2.
앞에서 유네스코가 이해하는 문화산업의 범위와 활동분야를 소개한 바 있거니와, 필자가 이 글에서 의미하는 문화산업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항목들을 포함한다.
(1)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문화산업(예, 예술과 디자인, 과학, 문학, 교육, 반성을 위한 노하우를 생산하는 영리·비영리 기관 등).
(2) 펌웨어를 생산하는 문화산업(예, 문화적 소프트웨어에 의해 뒷받침되는 하드웨어산업 ─ 섬유예술 또는 디자인이 가미된 섬유제조, 수공과 도자공예, 디자인 건축 등).
(3) 하드웨어를 생산하는 문화산업(예, 문화 소프트웨어를 위해 필요한 제품을 공급하는 제조업 ─ 비디오 기계, TV 수상기, CD 플레이어, 녹음기, 카메라, 인쇄기 등).
(4) 문화상품·용역의 분배나 배달을 담당하는 문화산업(예, 영화·비디오·인쇄물의 유통체계, 음악의 분배체계, 미술의 네트워크, 관광이나 운동경기 관람 코오디네이팅 등).
문화산업을 엄밀히 정의하기란 매우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화산업을 삶의 질을 지탱하고 향상시키는 재화와 용역을 산출해내는 산업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재화·용역의 수요에 대한 충족은 많은 경우에 생활방식의 변화에 의해서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소비자 생활에서 과학적 지식과 예술적 감각을 접목시키기도 하지만, 예술이나 문화와 구별되는 도박과 놀이를 가져오기도 했다. 후자와 전자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기에 우리는 문화산업을 정의함에 있어서 이들을 함께 다루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의미의 문화산업은 서비스업의 성장과 함께 발전해 왔다. 그런데, 세계 경제 서비스업에 대한 조사에 따르자면, 전체 고용인구에 대한 비율에서 미국의 서비스업 고용인구가 가장 앞서고 있다(1985년에 미국 72.3%, 네덜란드 67.5%, 스웨덴 66.9%, 영국 65.3%, 프랑스 61.7%, 독일 54.2%). 반면에 일본에서의 이와 같은 비율은 57.1%에 그쳤다.1) 다니엘스에 따르자면, 일본과 독일에서 서비스업의 비율이 낮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행해진 재건의 과정에서 강조된 건설업의 역할과 연관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문화산업이 급성장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일본에서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1,600만 명에 달한다. 이것은 일본 국내산업 고용인구의 30%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문화산업 선풍의 배경은 무엇인가? 우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그 원인으로 지적하는 견해에 동의한다.
1) 일인당 국민소득의 증가
1950년, 일본의 경우 일인당 국민소득은 4만1천 엔(명목지수)이었으며, 그것은 당시 미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의 1/14에 해당된다. 그러나 1965년에 일본은 일인당 26만6천 엔(명목)을 달성시켰으며, 1990년에는 2,732엔을 획득했다. 이는 미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미국 일인당 국민소득의 1.1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일인당 국민소득의 증가율은, 같은 기간의 소비자 물가지수의 변화를 감안한다고 해도, 놀라운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인들은 생활방식의 근원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이나 식기세척기, 냉장고와 같은 내구재의 보급률이 1991년에는 97~98%에 달했다. 또한 엥겔지수는 1965년의 36.2%에서 1990년에는 24.1%로 감소한 반면, 가계지출에 대한 서비스의 소비율은 같은 기간에 42.4%에서 52.6%로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교육, 문화, 오락, 교통, 그리고 통신에 대한 지출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2) 근로시간의 단축
일본인의 평균 근로시간이 1965년에는 연간 총 2,311시간이었던 반면, 1990년에는 2,052시간으로 단축되었다. 그 결과로 다수의 일본인은 여가를 활용하고 즐길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본 레저개발재단의 《백서》(1994)에 의하면, 일본인의 대부분이 향후 다음의 활동들을 즐기고자 하고 있다.
(1) 여행이나 관광(국내 및 해외).
(2) 야외활동(등산, 운동으로서의 산책, 스포츠, 그리고 일일여행 포함).
(3) 공연예술이나 미술, 문화재의 감상.
(4) 전통문화 또는 현대문화의 학습, 교양과목의 교육이나 훈련, 독서, 그리고 평생교육의 수혜.
(5) 사회서비스에 대한 봉사활동.
이와 같은 경향은 근로시간의 단축이 문화산업 시장 형성을 초래했음을 암시한다. 현 시점(1993)에서, 일본의 레저시장(769조370억 엔)은 민간부분의 최종소비자 지출의 28.4%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민총소득(GNP)의 16.3%를 점유하고 있다. 시장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스포츠=시장의 8%(경기단체나 교육기관이 그 절반을 차지한다).
(2) 취미, 오락, 그리고 창작=14%(신문, 잡지, 도서가 5.7%, 감상용 제품 ─ 음향기기, 텔레비전, VTR, 음반, 비디오나 CD 등의 소프트웨어 ─ 이 5%를 차지한다).
(3) 놀이, 도박, 가라오케, 그리고 외식=62.9%(놀이=25.5%, 도박=12.2%, 외식=25.6%).
(4) 관광이나 여행=15.1%(국내관광=10.2%).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의 레저 시장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놀이, 도박, 그리고 외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여가활동은 문화와 예술의 수용이나 창조보다는 오히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에 가깝다.
일본 놀이의 상징은 ‘빠찡꼬 홀’이다. 이들 홀은 수십 개의 구슬치기 기계들로 가득 차 있으며, 때로는 도회지의 문화 홀보다도 규모가 크다. 그러나 1990년 이래, 빠찡꼬 홀보다 훨씬 관심을 끄는 문화 홀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홀들은 지역사회에 공연예술과 미술을 홍보하고 있다. 일본에서 빠찡꼬 홀은 증권시장에 주식을 상장할 수 없는 도박업에 속한다. 이제 일본인들의 선호가 변해 빠찡꼬보다는 공연예술을 선호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면, 공연예술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우수한 예술 지원정책이 전개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은 귀기울여 볼 만하다.
3) 수명 연장
일본은 세계에서 평균수명이 가장 긴 나라의 하나이다. 1990년에 65세가 넘는 노령인구는 전체 인구의 12.0%를 차지했다(1950년에는 4.9%, 1965년에는 6.3%). 당국에 의한 공식적 추정에 의하면, 2,000년에는 전체 인구의 17.5%(약 2,170만 명)가 이 연령층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가족들에 의한 노후보장체계에서 사회에 의한 노후보장체계로 삶의 방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수명 연장의 과정은 한 명 또는 두 명의 자녀를 둔 부부로 이루어지는 핵가족의 증가로 성취되었는데, 이는 1960년대에 농촌사회의 공업화에 기인한 이촌향도 현상 때문이다.
새로운 체제는 문화산업 성장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가족들에 의한 상호적 생계보장의 체계에서 노령 가구의 분리를 통해, 노인들은 그들 스스로 저축한 노후보장연금과 사회보장제도에 의해 취미 및 창조적 활동, 그리고 개인주의적 생활방식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에 의해 새로이 개척된 문화산업의 기회들은 다음과 같다.
(1) 중년 및 노년층을 위한 새로운 패션의 의류시장.
(2) 노인들의 새로운 생활방식에 좀더 적합하고, 인생경험에 대한 대화를 더욱 쉽게 만들고, 편리하고, 예술적 감각이 가미된 새로운 식음료품 시장.
(3) 사회로부터의 의료서비스와는 다른 복지 혜택을 받는 새로운 양질의 노인주택 시장.
(4) 근로시간의 단축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포츠, 취미, 오락, 창작, 놀이, 도박, 가라오케, 외식, 그리고 관광 및 여행을 포괄하는, 노인 대상의 레저산업의 새로운 시장.
4) 교육, 고용,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여성의 참여
전통적인 가족제도(가부장제)에서 해방시키고, 평등한 교육기회를 주려는 민주적 개혁의 뒷받침을 받아 일본여성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참정권을 인정받았다. 이들은 자유로운 의사결정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1990년 현재, 전체 노동인구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평생고용제도는 진부한 남성 중심의 관습에 기초를 두고 있어서 많은 경우에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적은 임금(ILO의 보고에 따르자면 남성 평균임금의 52%, 1986~1988)을 받거나, 시간제 고용 상태(1990년, 전체 여성 고용인구의 27.9%)에 있다. 외형적으로 보아서 이들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으며,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은 남성들보다 오히려 높다. 그러나 사업세계 안에서 이들은 남성들과 비교해서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적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사업세계 밖에서 가치 있는 삶의 양식을 찾는 데 열성적이었다. 지역사회의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거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할 기회가 있을 때, 남성들에 비해 진보적인 여성들이 많다. 또한 여성들은 문화 면에서 유행을 주도하는 유행 창조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 일본적 생활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특징은 기업 중심의 사회였다. 즉 기업의 발전이 가정의 행복보다 앞선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사회체제는 남성 중심의 질서에 바탕을 둔 평생고용제도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방식은 평생고용제도에서 소외된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가족 중심적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1980년 이래, 가족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협동·네트워크 기관들이 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오염되지 않은 식품의 확보를 위해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도시소비자와 농촌을 연계하는 유통구조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협동조합을 통해 안전한 농산물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공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여성들에 의해 의식주생활이나 관광과 같은 소비자행태로 확산되었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여성들이 자신의 가정뿐만 아니라, 환경문제나 문화와 예술에도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들은 일본식 생활방식을 바꿀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며, 이들은 스스로의 인간적 향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새로운 경향의 주도자로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재화와 용역에 대한 이전의 선호를 변화시켰다. 이들은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디자인과 성능을 갖춘 전기제품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관광지에서 가족과 본인을 위한 서비스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제 그와 같은 포용력은 일본의 문화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여성들은 최근에 가격만 합리적이라면, 대량생산에 의한 단순한 상품보다는 과학자, 디자이너, 그리고 예술가들을 거느리고 있는 고급제조업에 의해 공급되는 ‘고유가치’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 고조의 반영으로서, 1975년 이래, 직업예술가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디자이너와 음악가들이, 다른 공연예술가들이나 사진작가, 문학작가나 미술가 등의 예술가들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1985년에는 12만에 불과했던 디자이너들의 숫적 증가는 일본 소비자들이 실용적인 기능뿐 아니라, 예술적 감각을 가진 좋은 디자인의 상품 및 서비스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 사회보장 최저 수준의 달성
일본의 의료보험제도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연금제도는 1959년에 성립되었다. 지역사회의 사회보장제도는 그 이후로 탁아, 의료혜택, 노인복지, 장애자복지 등에 대한 수요의 증가에 따라 점차적으로 개발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지방자치단체들 안에서 주민 선택의 여건들을 바꾸어 놓았다. 1969년까지 주민선택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새로운 공장을 도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1970년 이래, 대부분의 주민들은 사회복지에 대한 시의 계획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서, 우리는 일본이 사회보장의 최저 수준을 성취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복지정책이 아직은 미흡해서 노인들이나 아이들, 장애자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 이래, 지방자치단체들의 정책목표의 서열 선두는 문화정책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문화정책의 상징으로서 수많은 문화 홀들이 지방(현)과 지역사회(1993년에 1,000개 이상=1980년의 두 배)에 증설되었다. 이들 홀의 대부분(86.5%)은 시립으로 세워졌다.2)
사회보장의 사회적 최저수준을 달성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업, 병고, 빈곤, 무주택 등의 공포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 아래,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은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요구를 가중시킬 것이며, 생활방식의 변화를 촉진시킬 것이다.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욕구충족을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1) 물질적 조건 또는 사회보장의 최저수준은 언제 달성될 것인가, (2) 언제쯤 반쯤 빈 속에 익숙해져야 하는 삶에서 탈피하는가, 그리고 (3) 언제쯤 인간적 향상의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인간적 향상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은, 1980년대에 사회보장의 최저 수준이 달성됨으로써,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갖게 되는 기대와 연결된다. 이들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적 삶의 정체와 어떠한 삶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자기평가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한 것이 일본인의 생활 방식의 놀라운 변화이다.
가까운 과거 사람들은 “일본인의 생활 방식의 기본적 특징은 엄격성과 획일성이다. 어쩌면 이들은 개인주의에 무관심하고 집단주의에 익숙한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일본의 유행 선도자들, 특히 학생, 여성, 그리고 중·노년층은 그들 스스로의 개성이나 정체성을 앞에 언급한 《레저백서》에 수록된 여가활동들에 의해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일본 레저시장의 가장 큰 부분은 놀이나 도박, 외식 등, 수공의 예술이나 문화와는 구별되는, 대량생산과 연결되어 있는 서비스들에 의해 점유되고 있다. 삶의 질을 지탱하고 향상시키며, 복지나 정신적 행복에 기여하는 산업이 존재하는 한편, 삶의 질 향상이나 지탱과 합일하지 않으며, 단지 일시적인 정신 분산에만 기여하는 산업 또한 존재한다.
3.
앞에서 우리는 일본의 문화산업이 오늘날과 같이 성장한 배경적 요인들을 짚어 보았거니와, 이와 같은 복합적 원인들을 염두에 둘 때, 예컨대 한국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일본에 필적할 만큼 국력이 신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대응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좀더 실제적인 방안을 찾아보자면 일본의 문화상품 중 문화적 가치가 높은 유형들을 선별적으로 유입하는 방안을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일본 내에서도 현재의 문화산업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이른바 ‘고유가치의 경제’를 제창하는 양심적인 지식인이 없지 않으므로 이들과의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만하다. 예컨대 일본 문화경제학회장 이케가미 쥰 교수(쿄토대)는 존 러스킨의 사상을 중시하면서 ‘삶의 질’의 지탱과 향상에 대한 기여와 소비자 선호의 변화를 고려하는 가치이론을 탐색한다.
고유가치는 삶을 뒷받침하는 모든 절대적 힘이다. 일정한 품질과 질량을 가진 밀 한 단은 그 내부에 신체의 생존을 유지시키는, 측정 가능한 힘을 갖고 있으며, 1 평방 피트의 공기는 온도를 유지하려는 일정한 힘을, 아름다운 한 묶음의 꽃은 감각과 정서를 활발하게 하고 자극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인간들이 그것을 멸시하고 거부한다고 해도 밀이나 공기, 꽃의 고유가치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사용되든 않든, 이들의 힘은 그것들 자체의 내부에 있으며, 다른 어떤 것에도 존재하지 않는다.3)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러스킨은 고유가치의 기본적 특성을, 신체의 생존을 유지시키는 밀의 기능에서와 같은 상품의 역량과 기능; 온도를 유지하려는 공기의 기능에서와 같이 천연자원에 의해 제공되는 서비스의 역량; 그리고, 정서와 감각을 자극하고 활성화시키는 아름다운 꽃의 기능과 같이 즐거움을 주는 환경의 역량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량들은 삶의 질을 지탱하고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고유가치를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할 수 있게끔 하는 조건들에 대한 사고가 요청되는데, 그와 같은 조건들을 러스킨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것들의 (고유)가치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수용자가 특정한 상황에 놓여져 있어야 한다. 음식이나 공기, 꽃이 그 가치를 다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소화, 호흡, 그리고 감지 기능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가치의 생산에는 언제나 두 가지 과제가 관여된다. 그것은 먼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의 생산이며, 다음으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수용력의 생산이다. 고유가치와 수용능력이 합치하는 곳에는 효과적인 가치나 부가 생성되며, 고유가치가 부재하거나 수용능력이 부재하면, 효과적인 가치, 다시 말해서, 부가 생성되지 않는다. 승마를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은 사용될 수 있는 부가 아니며,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그림도 마찬가지이고, 고상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어떠한 고귀한 것도 부가될 수 없다.4)
이처럼 삶의 질을 향상시키 위해서는 ① 고유가치를 제공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할 인적 자본 및 능력의 개발, 그리고 ② 수용능력, 다시 말해서, 음식을 소화하고, 공기를 호흡하며, 예술적 감각으로 꽃의 기능을 감지할 수 있는 인적 자본 및 능력의 개발이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생산과 수용능력의 개발을 위한 인적 자본 및 능력의 형성은 다음 두 영역의 확장을 의미한다.
첫째, 기술자와 문화 홀이나 문화기관에 의해 뒷받침되는 전문적 과학자 및 예술가 층의 조성.
둘째, 다양한 종류와 단계의 학교를 포괄하는 평생교육 체계의 조성.
이러한 두 영역이 사회의 다른 산업들처럼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자유경쟁체제를 통해 이들에게 사회적 자원을 분배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보우몰과 보웬이 지적했듯이,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술적 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연예술과 같이 인적 자본의 형성의 대부분은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없다.5) 대개의 인적 자본산업은, 아담 스미스의 시대로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적 자원의 기술이나 솜씨, 판단력에 의존해 왔다. 결과적으로 공연예술산업은 출연 및 입장료의 증가와 수입격차의 증가를 경험해 왔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는 생산성의 격차로 인해 자유경쟁체제에 입각하여 사회적 자원을 합리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많은 문화경제학자들이 가격의 상관관계의 고찰을 위해, 비영리기관과 공적 지원을 포괄하는 지원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던 것이다.
일본에서도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탱하는 문화산업은 효과적인 지원체계의 부재와 비영리기관들의 이탈로 인해 장해를 받아 왔다. 그러므로 인적 자본 관계의 영역과 놀이나 도박 등의 영역의 가격관계는, 이들 인적 자본 영역에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놀이나 도박, 외식업 등이 다른 레저산업들에 비해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된 배경이다. 그렇다고 삶의 질 지탱과 향상에 기여하는 문화산업의 변화양태의 경향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을 소홀히 할 수 없다. 따라서 이케가미 교수는 그와 같은 노력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개의 기본적 요소들에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인간의 복지를 위한 상품 및 서비스의 역량이다. 인적 자본 형성을 내재화한 뛰어난 예술가, 디자이너, 과학자, 기술자, 도시 및 지역 계획자 등에 의해 역량의 실현을 위한 합리적 조정이 이루어지면, 고유가치를 가진 상품 및 서비스의 생산이 가능해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정자들이 인적 자본의 형성을 통해 역량을 올바르게 실현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자원을 올바르게 배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산물의 기능은, 예술적 감각과 효용을 통해, 삶의 질 지탱 및 향상을 위한 인간적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인간의 향상을 증진하는 동기에 의해 뒷받침되는 이러한 역량이 바로 ‘고유가치’라고 명명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고유가치’는 ‘효용’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선호의 변화를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효용이론에서는, 빵은 경제적 인간의 선택 대상의 하나이며, 누군가가 화폐와 교환함으로써 빵을 갖게 되면, 그 빵을 원하는 ‘누구’의 욕구가 충족된다. 그러나 고유가치 이론에 의하면, 누군가 화폐와 빵을 교환한다고 해도, 우리는 빵의 역랑과 기능이 실현되었는지, 그러지 못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누구’의 욕구가 충족되었다고 볼 수 없다. 빵의 역량이 ‘누구’의 수용능력에 부합하고, 빵이 인간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의 욕구가 빵에 의해 충족되었다고 인정하게 된다.
이처럼 삶의 질 변화나 발전을 논함에 있어서 ‘고유가치’는 가장 적합한 개념이 되지만, 여기에서는 고유가치를 받아들이는 소비자의 수용능력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교육체계는 근본적 개혁을 경험했으며,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비율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한편으로, 지방과 지역사회에 전통문화(예, 꽃꽂이, 주조술, 칠보기술, 도예, 전통의복 등)와 그에 대한 교육기관들이 유지되어 왔던 반면, 최근 국경을 초월한 경제활동으로 인해 유럽이나 아시아 등 해외문화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졌다.
이 모든 실천에 의한 학습과 교육에 대한 투자는 일본에서의 문화적 부흥과 일본 문화산업의 발달의 배경이 되었다. 문화산업은 삶의 질을 변화시키고 인간적 향상을 촉진시키는 기능의 효과적인 작용으로 인해, 앞으로 일본 경제를 촉진시키는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부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60년대 미국의 공연예술 지원체계와 같은 문화예술 지원체계의 부재로 인해 문화예술 공급의 소득격차에 직면해 있다. 일본은 아직도 구미 여러 나라보다 수년 뒤쳐져 왔다. 가격의 불이익을 인정하고 열악한 예술지원체계를 탈피하지 못한다면, 일본 문화산업이 더욱 촉진되기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일본의 양식 있는 식자들이 앞서가고 있는 나라들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예술지원체계를 재구축할 것을 절실히 요구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1980년대 일본에서 문예부흥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예술이 경제를 촉진시키는 기능의 중요성이 충분히 연구되지 못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예술지원체계가 구축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상기한 기능들의 중심개념은 ‘고유가치’이며, 그것은 J. 러스킨에 의해 제창된, 예술적 인상과 인간적 생활을 위해 유용성을 지닌 상품이나 환경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을 의미한다. 고유가치의 공급을 위해서는 실천을 통한 학습과 고유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력을 증가시킬 교육체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고유가치 이론을 지역 발전에 도용함으로써 ① 소비자의 선호를 변화·발전시키고 지역발전을 유발하는 지역주민의 수용력을 촉진하는 하부구조를 공급할 수 있으며, ② 이를 배경으로 지역사회의 자원을 올바르게 분배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계획은 소프트웨어, 펌웨어, 하드웨어, 그리고 유통체계를 담당하는 문화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킬 것인데, 이는 문화적 효과라고도 불릴 수 있으며, 지역의 발전의 원동력을 규명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한국사회도 아직 일본에는 못미치지만 196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꾸준히 발전해 왔고, 이에 따라 문화상품에 대한 수요도 꾸준하게 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문화상품을 가장한 채 단순한 정신분산만을 조준하는 상품들에 대한 수요도 급증한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둘러싼 논란이 이는 것도 이와 같은 사태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앞에서 본 일본에서의 문화산업에 대한 전망이 도달한 비슷한 결론을 우리 사회의 미래에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보면서 삶의 향상을 위한 노력을 한층 더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때 일본의 현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키려는 양심세력과 연대하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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