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학(cultural economics)이라는 학술용어가 정착된 것은 대체로 1960년대 이후로서, 미국 학자들이 중심이 된 문화경제학회가 국제적 규모로 성장한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이미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예술을 생활 및 노동과 연관시키면서 예술이 경제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가 특히 주목의 대상이 된다.
1.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러스킨은 중산계급 상층 출신으로서 그의 양친은 러스킨이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에서 회화나 고딕건축의 평론과 문학작품의 창조 활동에 종사하면서 자립적인 문화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근대화가론》 제1권(1843)에서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진실로서, 아름다움으로서 그려낸 작품들을 상찬하고 있다.1) 《베니스의 돌》(1851~52)에서도 그는 고딕양식을 근거로 하여 예술가의 창조 활동과 시민의 감상능력의 상호자극이 지니는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예술이 인간의 생명과 생활을 발전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2) 나아가 그는 영국 산업사회가 초래한 사회문제들의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제학적 연구와 사회개혁의 방향 검토에 몰두하게 된다.
미술평론과 경제학 연구의 양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경력으로 인해 그를 경제학자로 보지 않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 이미 그의 논문은 종종 잡지 편집자로부터 게재를 거부당하기도 했는데, 거기에는 아마도 돈 때문에 인간성을 희생시킨다고 러스킨이 비판한 부유계층의 기피와, 노동자에 대한 금전적인 대우 개선보다는 노동이나 생활에서의 인간성 회복을 중시하는 그의 사회개혁론을 경영자와의 타협을 주장하는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한 사회주의 진용의 비판이 동시에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화사상이나 예술평론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인정받아 그는 여러 학회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했고, 19세기 말에는 영국과 미국 각지에 러스킨협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소년시절부터 영국은 물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예술과 자연을 폭넓게 접촉할 수 있었던 그로서는 산업사회가 강요하는 기계화와 획일화를 비인간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획일화되지 않은 개성적인 인간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연미의 재생산을 건축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달성하려는 그의 사상은 1880년에 공간된 《예술경제론》에서 가장 뚜렷해진다.
사회적인 환경미를 추구하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는 《두 길》(1857~59)에서도 읽혀지는 바, 여기에서도 그는 예술은 당연히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한 것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새로운 경제학이 구체적으로 탄생되는 과정은 1860년대로서, 그는 여러 저작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가 금전을 축적하기 위해 노동자를 도구로 삼아 그의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동시에 경영자의 인간성도 박탈해 갔다는 사실을 종래의 경제학이 외면해 왔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 결과 종래의 경제학으로는 고용자와 노동자의 대립을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최후의 것에》(1862)와 《무네라 풀베리스》(1862~1872)로 요약되는 저술활동 이 외에도 그는 노동자의 주택 개선작업, 절멸에 직면한 전통직물 부흥을 위한 협동조합사업(성 조지 길드), 그리고 비영리적인 출판사업 등 그의 이상을 실현할 많은 실험을 시도한다. 그러나 계급적인 대립이 격화되었던 당시의 경제사회는 그의 실험들을 무화시키고 만다. 그러나 실험이 실패했다고 해서 그와 연결된 이론마저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인지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그의 문화경제학에서 핵심을 이루는 고유가치(intrinsic value)와 유효가치(effectual value) 이론을 요약함으로써 그의 이론이 가진 현대적인 의의를 조명해보는 것으로 만족코자 한다.
러스킨의 경제학은, 그 자신에 따른다면, 과학이나 예술을 기초로 하여 그것들을 상업이나 소비생활 속에 살려냄으로써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인간행동의 기준(윤리)과 규칙(법 포함)의 체계를 뜻한다. 여기에서는 각 개인의 인권이나 개성, 또는 다양성의 상호인정이 요청된다. 그와 동시에, 사회가 이에 입각하여 개개인에게 공통되는 이익을 가능케 하는 규칙을 만들어내고, 이 규칙을 존중하면서 경제나 정치를 운영할 것을 요청한다. 그의 경제학에서는 독립된 생계를 영위하고, 토지나 주택을 사적으로 소유하며, 전문적인 직인적 기능이나 기술을 갖추고, 그것들을 기초로 일과 소비생활에서 과학 및 예술을 살려내어 인간성을 높여나가는 인간이 상정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종래의 경제학이 상정해 온 경제인처럼 경제적인 동기로 행동하고 금전의 증식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인간이 아니라, 예술과 과학을 이해하고, 일이나 소비생활을 사는 보람이나 자기실현의 기회로 포착하여 인격의 전면적 발달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러스킨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 역사상 우수한 예술가나 예술적인 감각을 전통산업 등에서 살려낸 직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들이, 현대의 시장경제나 노사관계가 강요하는 생존경쟁으로 인해, 많은 경우 생존의 기회조차 잃고 말았다. 따라서 그에게는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면서도 인권이나 예술, 또는 인류의 오랜 지적 유산을 보존할 수 있는 사회적인 합의와 규칙을 형성하여 새로운 기술의 기초 위에 직인적인 노동이나 비영리적인 기업경영을 조성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긴요했다. 그렇게 되면 시장도 단순히 돈을 불리는 장소가 아니라, 예술작품이나 예술을 생활에서 살릴 수 있는 생활용품과 사는 보람을 요구하는 인간이 만나는 장소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의 경제학에서 말하는 풍요는 단순한 금전의 축적이 아니라, 생명과 생활의 충실이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어떤 상품이 얼마만큼의 화폐액수와 교환되는지를 설명하는 기본원리인 교환가치보다는 어떤 재화나 토지 등의 가치는 생활과 생명의 충실에 공헌할 수 있는 본질을 이루는 고유가치가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고유가치란 토지 등의 자연 자체나 문화재나 도서, 예술작품 등의 ‘진품’에 의해 창출되고, 다양한 상품 속에 디자인이나 기능으로 살려지게 마련이다. 만일 예술 문화성을 결여한 채 인간의 생명과 생활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그 제품은 무가치할 뿐 아니라, 이를 위한 자원배분은 낭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예술가와 주민의 대화가 있고, 예술작품에 둘러싸인 채 역사적인 건조물들을 보존하고, 뛰어난 주거환경이나 조용한 분위기에 둘러싸인 마을은 고유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한다.
물론 이러한 고유가치는 예술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주민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서, 고유가치는 향유능력이 있는 주민에 의해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유효가치가 된다. 러스킨에 따르자면, 역사도시 베니스는 역사적인 건물이나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와 이를 감상하고 향유하는 능력을 갖춘 시민에 의해서 비로소 고유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와 같은 가치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인간이란 모두 예술문화를 향수할 잠재능력이 있고, 이 향수능력(acceptant capacity)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야말로 정의로운 사회라는 그의 신념이 작용한다.
나아가 그는 인류가 과거로부터 고유가치를 계승하고 새롭게 창조하여 다음 세대에게 인계함으로써 고유가치가 이어진다고 보는데, 이를 위한 기본틀은 창조자에 의한 향수자 교육에 있다. 예술문화의 창조자와 향수자의 관계를 현대적인 시장경제 체제에서 계속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예컨대 현대산업의 특징인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에서도 전통적인 섬유산업에서 이루어진 숙련공적 노동이라든지, 예술가가 창조하는 우수한 디자인이라든지 하는 것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문화 관련산업이나 예술문화사업은 영리사업의 대상이 될 만큼 양산이 적용되기 어렵기 때문에, 이 분야의 산업적 발전은 비영리조직(협동조합이나 공익단체 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러스킨의 본의에 가깝다.
이처럼 지식이나 정보를 산업이나 소비생활에서 살리는 방안, 다시 말해서, 삶을 충실하게 만드는 방안을 가진 사람들의 손에 돈이 쥐어질 때, 돈은 비로소 제 몫을 하게 된다. 그는 삶을 위해 화폐를 살릴 수 있는 사람들 손에 들어 있는 화폐를 잠재적 축적(store)이라고 부른다. 달리 말한다면, 화폐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참된 풍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참된 방안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은 만남을 통해 균형이 갖춰지도록 하는 것이 사회 규칙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 전체가 삶에 공헌하는 사업을 위해 화폐를 사용하는 활동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이를 위해 장려조치를 강구하는 동시에, 투기나 생명활동의 쇠퇴로 이어지는 사업에 대한 투자는 규제하는 일이 필요하다. 최신 용어로 바꾼다면, 필란스로피의 장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화폐가 예술문화를 진흥하고 삶을 충실하게 발전시키는 활동을 위해 사용되도록 하려는 의지야말로 건전한 화폐윤리의 핵심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전제 아래 상업활동이 전개되고 법이나 행정, 또는 의회제도가 기능해야 하겠는데, 그 기초는, 러스킨에 따른다면, 아무래도 ‘정직’이다. 거래자간에 이루어지는 정보의 상호공개, 기회의 공평,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는 헌법, 사유의 범위와 공정분배의 기준을 정하는 규칙, 그리고 민법 상의 계약이나 손해배상의 규칙 등이 이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러스킨이 구상하는 사회에서는 생명의 담당자로서 인간이 그 근본에 놓여 있고, 삶을 발전시키는 예술문화의 창조와 향수의 기본관계가 고유가치의 축적과 계승으로서 산업이나 소비의 중심문제가 되고, 따라서 인간의 전면적 발달에 공헌할 수 있는지가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자본이나 화폐의 흐름이 이에 따를 때, 사회는 인권과 사유재산의 존중을 기초로 공정한 분배의 기준을 갖게 된다.
2.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
윌리암 모리스(1834~1896)는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 하나로서, 이 시대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추악성과 사회적 불의로 악명이 높은 때였다. 모리스는 바로 이 시대와 철저히 맞섰던 인물이다. 예술가이자 공예가로서 그의 영향은 특히 디자인의 영역에서 아주 막강하다. 그리고 그는 산문과 운문에서도 상당한 정도로 성공한 문인이었다. 1986년 10월에 그가 죽자 화가이자 삽화가인 월터 크레인은 그의 사랑하는 스승에 대해 짧게 연설한 바 있다. 그에 따르자면, 모리스 자신이 ‘여섯 명의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들 중 과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고 한다.
1892년 테니슨이 죽은 이래 그 시대가 배출한 유일한 계관시인으로 추대될 만한 시인이자 작가가 그일까? 아니면 벽지·스테인드글라스·의류·태피스트리·융단을 위한 디자인 등을 만들었던, 그래서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인기가 있는 예술가이자 공예가가 그일까? 19세기 말로서는 막대한 거금인 5만5천 파운드의 유산을 남겨 놓은 사업가가 그일까? 그가 발행한 켈름스코트 신문은 상업적인 인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사립신문운동을 촉진시키기도 했는데, 그러한 언론인이 그일까? 진지한 사회주의자, 또는 그 자신이 이름 붙인 바에 따르자면, 공산주의자가 그일까? 즉, 영국의 혁명적 변혁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목적을 위해 막대한 재산과 노력을 쏟아부은 이가 그일까? 아니면 무엇보다도 하나의 개인으로서 고도한 정신력과 뜨거운 기질에 가득 찬 채, 아름답기로 이름 높았던 부인과 결혼하여 두 딸을 얻고도 행복하지 못했던 남자가 그일까?
물론 모리스는 이 모든 특성을 한데 모아놓은 인물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중 하나만으로도 크게 만족했을 것이지만, 그는 놀라운 정력으로 이 모든 방면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아버지 쪽의 가계로 본다면 모두 단명했고, 그래서 그 자신이 좀더 단순하고, 좀더 아름답고, 좀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원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결과로 그러한 생각들이 그의 삶을 붙들어 주고 그의 영향력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1834년 런던 교외지역에서 윌리엄과 엠마 모리스의 세번째 아이로 태어났는데, 남자아이로서는 첫째가 된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증권중개인으로서 이제 막 움트는 자본주의체제의 중심에서 활약한 셈이다. 이것이 어린 모리스에게 어떤 영향을 남겨 놓았을 수도 있다. 즉 그가 많은 유산을 남겨 놓은 성공한 기업가이면서도 동시에 공산주의자로 자처한 배경에는 그의 성장과정이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어쨌든 그는 많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자랐지만, 큰 누나가 되는 엠마 이외에는 그의 성장에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엠마는 윌리엄과 비슷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누나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 자신이 아름다운 부인과 만족할 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으리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의 아버지는 윌리엄이 열한살 되던 해인 1849년에 죽었지만, 그는 생전에 이미 자신의 가정을 전형적인 빅토리아시대의 가풍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말하자면 돈을 벌고 이로써 성공하는 것을 존중한 19세기 영국의 가치기준이 이 가정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먼저도 말했지만 모리스 자신이 빅토리아시대의 이러한 사업기술과 조직을 활용하여 부르조아 세계 속에서 성공을 거둔 후, 뒤이어 이에 등을 돌렸던 셈이다. 즉, 그는 그 자신의 계급과 세상 사람들을 갈라 놓는 경제적 장애들을 부숴버리는 것을 그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관심들을 추구할 수 있게 한 것이 자신의 강력한 재정적 위치였음을 잘 인식하고 있다. “내가 만일 부유한 또는 넉넉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게 도둑질과 불의의 체계로 보였던 것에 저항하는 단순한 반역아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3)
우리의 관심과 좀더 밀착되는 사실로서 우리는 모리스가 어린 나이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낭만주의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음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이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지속되었는데, 종국적으로는 그의 정치적인 이상주의와 결합된다. 그러나 낭만주의가 혁명적 열정 속에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모리스는 자유롭게 반성하도록 허용된 상상력으로 가득 찬 어린 시절의 환상과 풍요를 지녔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조금씩이나마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노라고 말해 버리면 그뿐이지만, 그에게는 특히 그러한 기회가 평생을 통해 그의 모든 작업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때로 그는 버릇없는 아이처럼 행동했고, 벽에 머리를 짖찧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게 우아하게 그리고 성숙한 관심을 가지고 반응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좋게 보아준다면 그것이 모두 그의 개성을 키워가는 하나의 과도기적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특히 조랑말을 타고 숲 속을 헤매기도 했는데, 그때 그는 자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장난감 무장을 단단히 차리고 나섰다. 후대에 이르러 그가 중세를 일종의 이상사회로 설정했던 것과 이러한 소년시절을 분명히 서로 맥이 닿아 있다.
그는 또한 일찌기 읽기를 배워 월터 스코트경의 소설들을 탐독했는데, 그것이 그의 낭만적 상상력을 채워주었다고 본다. 아울러 서로 방향은 달랐지만 어머니와 큰 누나의 종교적 영향이 그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일종의 종교적 헌신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의 시와 산문에서 종종 현재의 사회보다 좀더 나은 사회의 요소들을 마련했던 과거를 미래와 관련하여 묘사하곤 하였다.
모리스의 교육이 대부분은 독서와 그 자신의 계발에 의해 얻어졌지만, 또한 좀더 형식적인 학교교육도 받았다. 아홉 살 때 그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예비학교에 보내졌고, 열세 살 때에는 1843년에 설립된 말보로 공립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중산계층에 의해 주도된 이 학교는 세운 지 4년밖에 안되어 아직 그 틀이 잡히지 않았던 셈인데, 그것이 모리스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숲 속을 헤매거나, 고대문명의 유적지들 사이를 방랑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지역들은 학교가 그에게 가르쳤던 것보다 좀더 효과적으로 그의 낭만적 기질을 길러내었던 셈이다.
그는 공립학교 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물론, 큰 누나의 결혼으로 인해 가정은 이미 그에게 옛날 같지 않게 되었다. 그는 1852년 6월 옥스포드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자아발견의 좀더 넓은 모험길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그가 옥스포드로 떠나기 전 해에 그의 생애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경험을 갖게 된다. 그는 하이드파크에서 있던 대전시회에 참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대전시회는 영국이 산업혁명의 약속을 충족시켰다는 것과 1815년에 프랑스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영국의 위치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내세웠다.
모리스의 성숙된 생애는 그러한 가정을 위한 기초에 도전하는 것에 바쳐지게 되는데, 그러한 생애는 그가 1851년에 그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기를 거부했다는 사실로 상징된다. 그는 그 안이 추하고 보잘것 없는 것들로 가득 찼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취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한 사실의 진위는 어떠했든간에, 그가 적어도 예술가 또는 공예가로서 기술과 예술(미)의 결합을 꿈꾸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의 생각들을 밑받침하는 이론적인 기초는 기계문명에 대한 혐오였는데, 모리스의 문학세계가 사라진 황금시대의 이념을 경하했던 것도 위에서 설명한 소년시절과 무관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부유한 계층이나 중산계층을 위해 디자인을 만들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는 ‘부자들의 돼지 같은 사치’를 위한 생산은 거부했다. 그의 야망을 현재나 미래에서, 사회적 내지 미적 혁명을 통해 모든 사람을 위해 좀더 아름다운 세상을 마련해 보려는 것이었다. 삶의 질에 대한 그의 관심, 사회 속에서의 예술의 위치에 대한 그의 관심, 사회의 불만에 대한 그의 분석, 현대적인 노동소외에 대한 그의 인식 등은 모리스를 마르크스나 러스킨에 버금가는 사상가로 자리잡도록 만든다. 그는 실제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개성 있는 생활과 예술과의 만남, 또는 성공적인 예술생활을 위한 자유로운 소년시절의 경험이 갖는 비중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리스가 학교생활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자유로운 독서와 환경과의 자유로운 만남에서 독립된 인격을 위한 풍부한 영감을 얻었음을 확인해 보았다. 자연과의 만남도 실상은 예술경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만큼 우리는 소년시절에 갖게 되는 예술경험이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서 일생 동안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 놓는다는 정당화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와 같은 다양한 면모를 지닌 그가 꿈꾸었던 것은 결국 삶을 좀더 단순하고 아름답게, 좀더 살 만한 것으로 가꾸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가 예술의 초연하고도 관조적인 성격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하면서, 1861년에 동료인 마샬(P.P. Marschall), 포크너(Charles Faulkner)와 함께 예술가-장인(artist?raftsman)의 회사를 세워 그의 사고를 실천하려 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다른 한편, 그는 진보의 시대로 상징되는 빅토리아 시대에 대해 강하게 반발한 낭만주의 예술가적 풍면도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발은 그를 일종의 중세주의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윤과 자본의 효용적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빅토리아 사회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중세의 공동체적 이상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는 차별성을 지닌 자본주의 비판가였다. 그가 1880년대에 이르러 사회주의자로 전향하였을 때, 낭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양자의 전통을 접목시키고자 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4)
그의 이러한 낭만적 중시주의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칼라일과 러스킨이었다.5) 모리스는 옥스포드대학 재학시 칼라일(Thomas Carlyle, 1795~ 1881)의 《과거와 현재》를 접하게 된다. 이 저서는 특히 12세기의 성 에드먼즈버그(Edmunsburg) 수도원의 공동체 생활을 이상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산업자본주의의 윤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로 인해 모든 인간의 가치가 화폐가치로 전락되어 버렸다는 칼라일의 주장은, 모리스가 훗날 강연을 통해 화폐와 이기심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가 일종의 전쟁상태라고 고발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모리스는 칼라일로부터 노동의 존엄성이라는 사고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칼라일은 노동을 종교적 행위로 간주하였을 뿐 예술의 차원으로 확대시키지는 않았는데, 모리스는 러스킨을 통해서 인간 생활에서의 창조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6)
러스킨은 앞에서 보았듯이 시대의 예술은 보편화된 생활양식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심미적 판단, 도덕적 판단, 사회적 판단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문화개념을 제시하였다. “내가 나의 불만을 구체화시키는 법을 배운 것은 바로 러스킨을 통해서였다”7)고 밝히고 있는 모리스는 ‘즐거운 노동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예술관을 가지고 진정한 예술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적 조건을 탐색하는 작업에 그의 정열을 쏟았다. 그의 이상이었던 중세 예술과 장인의 양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중세의 장인들은 우리보다 짧게 노동하면서…… 더 많은 휴일을 가졌다. 그들은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찬찬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작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솜씨와 재능에 따라 노동하였으며, 아름다움과 멋을 드러내는 데 있어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8)
그가 볼 때, 가히 노예적이라 할 수 있는 임금노동은 장인노동의 매력과 생산품의 아름다움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노동시간을 연장하고, 노동자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시끄럽고 불결하며 붐비는 공장 안에 밀어넣고, 사람들을 도시와 산업지역에 집결시킴으로써, 그리고 노동자의 기술을 기계적 수단에 의해 균일화시킴으로써 노동은 그 매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자체가 즐거움인 동시에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노동에 인간의 행복이 달려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산업화된 사회에서 노동의 수행이 점점 형식적인 것으로 되어 가고, 임금 획득에 필요한 작업들이 더욱더 밥맛 없는 것으로 되어버리는, 그리하여 노동과 삶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 그는 자본주의체제를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생산과정에 예술적 수행을 결합시키고자 시도했다.
예술과 노동, 노동과 삶, 삶과 예술을 융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정치와 예술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다양한 활동과 작품이 보여준 도덕적, 미적, 상업적, 정치적 영역의 상호의존 내지 상호연관은 그의 유토피아 개념에 핵심적인 것인데, 그는 《없는 곳으로부터의 소식》에서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미적인 견지에서 고려하고, 미적인 문제들을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고찰들과 불가분한 것으로 보려는 강한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자본주의의 확산에 대해 쓸 때, 그는 “예술은 자본주의에 의해 족쇄에 묶여 있으며 이 체제가 지속되는 한, 예술은 자본주의적 문명에 의해 압살될 것이다”9)라고 주장한다. 또 영국 문화 속에 신선한 생명성이 필요하다고 논할 때, 그는 그것의 해결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예술의 새로운 탄생을 향한 최초의 발걸음은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는 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없는 곳으로부터의 소식》은 개별성 또는 다양성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공동체 속에서 삶을 영위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회를 제시하고 있다. 이 다양한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 적어도 모리스가 “일상적이고 평범한 작업의 고상화, 즉 예술의 민주주의”10)라고 한 의미에서 ─ 예술가들이다.
《없는 곳으로부터의 소식》은 모리스의 전 생애에 걸친 작업의 요약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 책이 출판된 19세기보다 20세기에 더욱 중대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대다수가 자신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닌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은 ‘발전된’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여전히 사실이며, 1890년에 모리스가 제기한 질문들은 미구에 우리가 당면하게 될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장 살 만한 사회를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효율적인 대량생산을 무엇보다도 가치있게 여기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산업이 만들어낸 생산품들을 진정으로 원하는가? 우리는 실질적인 필요와 욕망을 민족시키기 위한 일에 우리의 인생을 보내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적 필요가, 끝없이 증가하는 상업성의 요구에 종속되는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고 있는가? 우리는 가끔씩이라도 우리가 삶으로부터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묻고 있는가? 《없는 곳으로부터의 소식》에 나타난 모리스의 주된 목적은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하며, 우리로 하여금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색하도록 고무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 《미래의 사회》라는 글에서 미래 사회의 이상을 첫째로는 구속이 없는 삶이고, 그 다음으로는 단순하고 자연스런 삶이라고 제시한다. 우리는 먼저 자유로워야 하고, 삶의 모든 미세한 세부들에서 즐거움을 얻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 개별성, 창조성, 그리고 단순성이 그가 꿈꾸는 미래 세계의 핵심요소들이다.
그의 이상들은 오늘날에도 퇴색하지 않은 채 여전히 유효하다. 예술과 노동과 삶이 결합된 공동체적 사회는 현대인에게도 역시 이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노동은 유용하고 흥미롭고 가치로우며, 쾌적한 환경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다른 이들이 아니라 스스로 직접 통제해야 한다.
이처럼 개인의 창조성이 충분히 발휘되고 자발적으로 노동하는 사회, 그리고 노동과 예술이 결합하여 삶이 예술이 되는 그런 사회가 모리스의 이상이었다. 그는 그런 사회를 이루고 그런 사회에서 즐겁게 일하자고 권하고 있다. 공동선을 위해, 즉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인간의 최상의 행복과 완전한 발전을 위해 협력의 조화로움 속에서 일하는 친구가 되자는 것이다.
그와 러스킨의 사고가 발전하여 멈포드(Lewis Mumford)와 같은 문명비판가를 낳지만, 경제학적으로 볼 때, 케인즈가 더 주목할 만한 대상이므로, 그에 대해 언급해보기로 한다.
3. 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
러스킨과 모리스의 영향은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케인즈는 그때까지의 자유방임주의에 입각한 안이한 정부라는 생각을 180도로 전환시켜 정부가 민간의 경제활동을 적극적으로 보조하는 혼합경제라는 생각을 등장시킨 이른바 ‘케인즈 혁명’의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동시에, 문명과 경제, 경제와 사회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하여 적극적인 발언을 계속한 사상가로서 이러한 영향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는 또한 20세기 영국 예술운동의 하나인 ‘블룸스베리(Bloomsbury) 그룹’에의 참가(1907~25), 카마고 발레협회의 설립(1930), 캠브리지 예술극장의 건설(1936), ‘음악 및 예술장려 위원회’의 설립(1942), 그리고 예술평의회(British Art Council)의 초대회장 취임 등 일생 동안 변함없이 예술과 문화에 관여했다. 그에 따르자면, 예술이나 문화는 문명 그 자체이며, 이를 보호하려는 사회에는 이상이 아직 살아 있다. 경제도 이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쓴 《젊은 날의 신조》, 《자유방임의 종언》, 《나는 자유당원인가》, 《러시아 관견》 등 일련의 글을 바탕으로 ① 예술문화에 대한 공적 지원의 근거, ② 이를 위한 정부의 역할, ③ 공적 지원의 원칙을 밝힌 분권적 자치론에 대한 케인즈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케인즈에게 있어서 예술은 목적이고, 경제는 이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리오나드 및 버지니아 울프, 화가 던켄 그랜트, 예술비평가 클라이브 벨 등이 회원이었던 캠브리지 대학 시절의 ‘블룸스베리 그룹’시대를 회상하면서 “인생의 주 목적은 사랑이고, 심리적 체험의 창조와 향수이며, 지식의 탐구였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예술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는 능력에다 최고의 인간적 가치를 두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현명하게 관리되는 한 아마도 지금까지 나타난 어떤 다른 제도보다도 유효하게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소용이 될 것이지만, 그 자체로 보는 한 많은 점에서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파한다. 이는 곧 경제문제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생의 참된 목적을 추구한다는 이상이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물질적 이익을 위하여 도덕적 이익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모름지기 과학자나 예술가가 된다는 행운아를 별도로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적은 ‘화폐애’에 불과하다는 것이 케인즈의 자본주의관이었다.
이처럼 ‘화폐애’에 지배되고 있는, 도덕적으로 바람직스럽지 못한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우선 실업이나 불황과 같은 경제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가 보기에 경제문제만 해결되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게 된다. 그런데 경제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화폐애’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를 급격하게 변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의 유지가 필요하다고 하는 데 그의 특징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화폐애’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가 계속되는 한, 사람은 인생의 참된 목적을 위해 살 수 없다는 그의 견해가 바뀐 것은 아니다. 단지 그로서는 경제가 진보해도 예술문화에 대한 유효수요, 즉 화폐의 실제지출이 뒷받침하는 수요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술문화의 창조나 향수는 개인적 노력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예술문화의 교육기능에 기대하여 사람들의 향수능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케인즈는 바로 여기에서 예술문화에 대한 공적 지원의 필요성의 근거를 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술문화에 대한 공적 지원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정부의 역할 변화이다. 케인즈는 《자유방임의 종언》에서 정부의 새로운 역할을 말하는 가운데 ‘국가가 해야 할 일’의 기준으로서 다음과 같은 점을 들고 있다. 즉,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개인이 담당할 수 있는 기능 범위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국가가 실행을 결의하지 않는다면 어느 한 사람도 실행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정부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전혀 착수되어 있지 않은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케인즈가 정부의 새로운 역할을 옹호하는 것은, 정부가 만능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밖에는 생활의 다양성을 보증하고 개인의 창의를 끌어낼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의 간섭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케인즈는 자유방임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비판함으로써 그 토대를 전복시키려고 하였다. 그 때까지 경제학은 경제란 완전고용 수준에서 균형을 발견하고, 완전고용에서 그것을 받쳐주는 수요가 나온다는 법칙의 세계를 고수하고 있었다. 즉 공급은 그 스스로가 수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에 케인즈는 제아무리 실업자가 존재해도 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하여 실업과 불황의 원인을 분명히 하였다. 즉, 화폐의 실제지출이 뒷받침하는 유효수요의 부족이 그것이다. 이리하여 케인즈는 이자율의 인하, 정부의 직접투자에 의한 민간투자의 확대, 유산상속세와 누진과세에 의한 평등화의 추진을 주장하여, 자유방임주의 경제에 대체하여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한 혼합경제 이론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관의 전환은 당시 하나의 흐름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제 1 차 세계대전을 통해 갖게 된 사회화된 생산조직에서의 경험을 평화시에도 되풀이하고 싶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경제학에서는 이에 필적할 사고의 전환이 뚜렷하지 않았던 바, 케인즈는 이에 주로 동료 경제학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1936)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20세기를 상징하는 새로운 정신의 반영이기도 했던 바, 영국의 역사가 E. H. 카가 20세기를 특징짓는 새로운 가치로서, ‘인간의 이성이 지배하는 영역의 확대’와 ‘자기의식의 발전’을 들면서 “자유방임으로부터 계획으로, 무의식적인 것으로부터 자기의식적인 것으로, 객관적인 경제법칙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인간은 자기행위로써 자기의 경제적 운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신앙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지성주의의 흐름은 한편으로는 과학이나 예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변경시켜 예술문화에의 공적 지원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문화경제학에 대한 케인즈의 가장 큰 공헌은 이처럼 정부의 새로운 역할을 분명히 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공공성의 영역을 설정하고 이에 대한 견해를 전개했다는 데 있다.
예술평의회의 발전에 관한 BBC 방송에서 케인즈는 대담을 통해 “예술평의회는 이 나라의 연극, 음악, 미술활동을 분권화하고 분산시키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그 설립목적을 밝힌 바 있다. 물론 이 기구는 가능한 한 독자적인 행동은 삼가한 채,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하여 지방의 공공기관이나 협회 또는 지방기업의 주도권을 존중한다. 이로써 예술평의회가 예술활동을 분권화하여 이를 여러 계층 사람들의 교육을 위해 쓸모있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과 아울러 그것이 분권화 구상(공적 지원 시스템에 관한 케인즈 모델)에 상당한 정도로 힘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의 원형을 1924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행한 강연 <자유방임의 종언>에서 찾는 이들이 없지 않다. 여기에서 케인즈는 “지배 및 조직 단위의 이상적인 규모는 개인과 근대국가의 중간 어디쯤엔가에 있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반자치제’(semi?utonomous bodies)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이 조직의 활동을 사회 전체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 한정하며, 통상적으로는 자주적으로 운영되지만, 최종적으로는 의회제도의 틀 속에서 행해져야 할 것으로 제안하고 있다. 케인즈는 이와 같은 제안을 분권적 자치라는 중세적 개념으로의 복귀라고도 했지만, 1925년에 자유당 하기 대학에서 행한 <나는 자유당원인가>라는 강연에서는 이 제안의 내용을 달리 표현하고 있다. 즉, 가능한 한 어떤 권한도 중앙에서 지방으로 분할·이양하는 것, 그리고 특히 반관반민의 법인과 행정기관을 설립하여 정부의 의무를 위탁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라는 것이다.
케인즈 하면 우선 ‘큰 정부’를 연상하기 쉽지만, 케인즈 자신은 사실상 국유화와 같이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에는 반대하였다. 즉,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경우에도 이자율의 조작이나 공공투자와 같이 시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케인즈는 또한 정부의 관여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와 생활의 다양성이 보장될 수 있을지 하는 의문에도 그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그 성질상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것이며, 훈련이나 조직화 내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케인즈는 자신의 ‘분권적 가치론’에 의거하여 예술문화를 지원하는 조직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정했을 것이다.
첫째로, 정부는 예술문화를 지원하는 조직에게 자주적 운영과 그것을 보증하기 위한 여러 가지 권한을 넘겨줄 것.
둘째로, 중앙은 필요한 권한을 지방에 넘겨주고 독립된 지방의 단위로 하여금 집행케 할 것.
셋째로, 예술문화를 지원하는 조직은 정부(중앙 및 지방), 협회(비영리조직), 기업 등과의 연대를 강화할 것.
오늘날 예술지원을 목표로 한 많은 공공기관들이 이와 같은 느슨한 연방적 연계, 즉 광역적인 지방자치단체의 자주성을 중시하면서 중앙정부의 조정력도 작용하는 체제를 갖추게 된 데에는 케인즈적 발상이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문화경제학에 남긴 공헌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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