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칭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1편 칭찬은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된다.
1. 칭찬할 줄 모르는 나를 돌아보자
오래 전에 '하나를 가르칠 때, 일곱 가지를 칭찬하고 세 가지를 꾸짖어 착한 아이를 만들
자'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그때 젊었던 나는 이 말을 듣고 '아, 야단치기보다는 칭찬을
더 많이 하라는 뜻이구나.' 라는 정도의 소감만을 느꼈던 것 같다. '일곱 가지'와 '세가지'는
단순히 많고 적음을 나타낼 뿐, 엄밀한 (?) 숫자라는 생각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단순해 보이는 이 격언에는 자신의 언동 속에 칭찬과 꾸짖음이 어느 정
도의 비율로 섞여 있는가를 되돌아보라는 교훈이 숨어 있었다. 나는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
지 않은 나머지 이런 소중한 교훈을 간과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격언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노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돌아보는 노
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을 탓하는 일은 많아도 칭찬하는 데
는 인색하다. 데이비드 캠벨의 두뇌조깅이라는 책을 보면 ' 한 대의 손수레'라는 제목의 이
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캠벨은 독자에게 하나의 과제를 제기한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손
수레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에 대한 감상을 다섯 가지 쓰라는 것이다.
그 그림은 한눈에 보기에는 중심이 앞쪽으로 너무 많이 쏠려 균형을 잃고 있었다. 물리적
으로 보든 경험적으로 보든 마찬가지였다. 이런 손수레를 끈다면 밀고가기는커녕, 손수레 자
체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다가 지칠게 뻔했다.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손수레였
다. 나도 독자의 입장에서 그와 같은 감상을 적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켐벨의 설명을 읽
고 나는 깜짝놀랐다. 캠벨은 '나는 이 그림에 대한 감상을 적으라고 했지, 그림에 대한 비평
이나 비판을 요구 하지 않았다.'라고 한 게 아닌가! 나는 그 설명을 읽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적은감상은 그림에 대한 비판과 비평, 나아가 비난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켐벨은 사람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접하면 그것을 자신의 기존 사고에 비추어 비판하고
비난하며 배척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을 했는데 이 지적을 보고 나는 '사람이란 일
반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며 배척하려는 경향이 있다'가 아니라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에
게 그런 경향이 있다'고 받아들이고 충격을 받았다. 캠벨의 지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를 두고 한 말이었다. 나는 무엇을 대하더라도 결점부터 들춘다. 아니, 결점이 먼저 눈에 띈
다. 이런 나의 모습을 깨우치고 나는 창피하고 한심해서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2. 자신이 하는 칭찬의 말을 되돌아보자
나는 가정과 학교에서 하루에 얼마나 칭찬의 말을 하는지 진지하게 되돌아 보았다. 생각
이 나지 않았다. 어떤 때 어떤 기분으로 어떤 말을 어떻게 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무
의식적으로 말하고 웃었던 것이다. 아니, 인간에게는 원래 그런 면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신경써서 말을 하나하나 고르며 완곡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할 때는 언제인가, '내
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이렇게 받아들이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면 일을 망칠 거야. 그
러니 대놓고 말하지 말고 한바퀴 돌려 말해서 알아듣도록 하는 쪽이 좋겠다.'는 식으로 계
산하는 것은, 사업상의 문제를 매끄럽게 처리하려고 신경을 쓸 때처럼 주로 이쪽에 어떤 속
셈이 있을 때 쓰게 되지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그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냥 입에서 나오
는 대로 말해 버린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도 의식적으로 칭찬의 말을 사용하는 것도 의
미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하루에 적어도 10번은 고마
워라고 말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겠다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있다.
고마워, 정말 잘했구나, 너는 참 침착한 아이구나, 글씨를 퍽 예쁘게 쓰는구나, 이 그림 참
멋진데, 너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따위는 엄밀하게는(?) 칭찬의 말이라고 할 수 없는 면
도 있지만, 그 말 속에 흐르는 감정은 상대를 칭찬하는 감정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상대의 언동에서 기분좋은 느낌을 받고 그 느낌을 순수하게 드러낼 때, 자신도 좋은 기분
이 될 수 있다. '고맙습니다'가 대표적인 말이다. '고맙습니다'는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말
가운데 하나로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모두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기분이
초조하다거나 어떤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 있을 때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마음에서 우러
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상대를 비판하기는 쉽지만, 상대의 장점
을 찾기는 어렵다. 학생들의 결점은 흔히 눈에 띈다. 부족한 점, 불만스러운 점은 눈에 잘
띄지만, 그들이 잘하는 일, 노력하는 일에는 시선이 미치기 어렵다. 그럴 때는 '고마워'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반대로 어떤 학생이 아주 마음에 들 때는 그 학생의 모든 행동이 좋
게 보이고 단점도 장점으로 느껴진다. 별것 아닌 행동도 자신에 대한 호의로 받아들여진다.
턱 밑에 난 사마귀도 예뻐 보이고, 손자녀석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껄껄 웃는 심리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소
리를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말 인간이 제멋대로이다.
우리의 견해나 느낌, 사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우리 나름대로의 색안경이 걸쳐 있다.
사람은 누구나 습벽에 가까운 사고를 한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처럼 보인다'
라는 속담처럼 어떤 사람이 미워지면 그 사람이 보고 듣는 모든 것까지 미워지는 법이다.
자신의 견해와 느낌이 언제나 객관적으로 옳다고 느끼는 사람은 잘난 체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면은 많건 적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세상에는 칭찬보다 비
방이 많아진다. 우리는 이 점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3.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반성한다
학생들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교사에게 묻고 싶다. 학생들 전체를 뭉뚱그려서
어떻게 느끼는가가 아니라, 학생들 개개인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를 솔직하게 듣고 싶다.
어떤 교사는 다음과 같은 일을 꾸준히 실천했다. 수업이 끝난후, 텅 빈 교실에 앉아서 공
책을 펼친다. 공책의 위쪽 구석에는 학생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 면에 한 학생씩 이름을 고
무도장으로 찍어놓은 것이다.
교사는 공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펼친다. 양면에 있는 두 학생의 이름을 보며, 오늘 그들
에게 어떤 말을 했고 교사로서 어떻게 처신을 했는지, 그리고 그 학생들이 어떤 반응을 보
였는지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넣는다.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으면 다음 면으로 넘어
간다. 이렇게 공책과 마주하고 있는 시간은 고작 5분에서 10분정도이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그 공책은 교사에게 적지 않은 일깨움을 주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공책 전체를 훑어보니 내용이 대게 세 종류로 나뉘어 있음이 드러났다.
우선 백지로 남은 면. 그것은 교사인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학생들이다. 지금까지
학생들을 편애하거나 차별하지도 않고 지도하려 애를 써왔으나 하루하루의 인상을 기록한
이 공책에, 이렇듯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학생이 여러 명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학
생이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 학생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고 말해도 어쩔 도
리가 없다. 그들은 분명히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너무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는 학
생들일 것이다. 그러나 교사인 자신에게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고 해서 만족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기 표현이 서투른 학생, 내성적인 학생들일 것이다. 이
런 학생들의 심정을 교사인 나는 얼마나 헤아렸을까? 이 교사의 마음에는 이러한 반성과 부
끄러움이 밀려왔다.
다음으로, 빽빽하게 기록된 면은 두 종류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자신이 호감을 갖고 있는
면, 다시말해서 칭찬의 말들이 가득 차 있는 면이다. 또 하나는 정반대, '이런 아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 반이 엉망이야'. '이 녀석이 또 말썽을 저질렸어'와 같이 교사 자신의 불안정한
마음이 줄줄이 적혀 있는 면이다. 지금까지 이 교사는 색안경을 쓰고 학생들을 대한 적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 공책을 보니 자신이 색안경을 쓰고 학생들을 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교사는 갑자기 기분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공책을 훑어보며 스스로에게 과제를 던졌다.
'백지로 남겨진 학생들의 좋은 점을 찾아내서 말을 걸자. 부정적인 이미지밖에 적혀 있지
않은 학생들의 장점을 찾아보자. 그리고 웃는 얼굴로 대하자.' 이 교사는 이와 같은 실천을
계속해서 자신의 느낌과 사고방식을 되돌아보았던 것이다.
교사 쪽에서 느낌과 생각을 바꾸었더니 학생들의 반응도 당연히 바뀌었다. 자극이 바뀌면
반응도 달라지는 법. 학생들의 장점을 발견하고자 하는 교사의 자세가 학생들에겐 좋은 자
극이 되었고 여기에 응하는 학생들의 무의식적인 반응 또한 교사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 마
침내 학급 전체가 밝은 분위기를 이루에 되었다.
이 학급이 밝은 분위기를 이루기까지 담임 선생이 자신이 학생들을 어떻게 느끼는가 알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주목하기 바란다.
2편 표정으로 칭찬한다.
1. 칭찬하는 얼굴, 야단치는 얼굴
칭찬하는 방법을 생각할 때, 우리는 말을 사용한 칭찬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칭찬뿐만 아
니라 야단을칠 때나 분발을 촉구할 때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얼굴의 표정과 말투이다.
A. 멜라비안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의사소통에서 작용하는 언어의 요소는 고작 8퍼센트
이며, 얼굴표정이 55퍼센트, 목소리가 37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사춘기 학생들은 "우리가 어떤 말을 들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말투의 말을 들었느냐가 중
요하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말보다는 얼굴표정과 말투가 더 문제가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실 우리는 의사소통에서 얼굴표정이 55퍼센트, 목소리가 37퍼센트 차지한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인식하고 있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지 않느냐'는 의식이 저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족끼리 고마워, 훌룡해, 상냥하구나, 감탄했어 따위의 말을 쓰는 것
을 어색하고 겸연쩍게 느낀다. 그리고 가족과 같은 관계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얼굴만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이러한 기질이 좋으냐 나쁘냐를 따질 생각은 없다. 따진다고 해서 가족끼리의
감정표현이 단숨에 개선될 리도 없다. 그보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써서 좀더 바람직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어떤 교수는 자신의 그릇을 크게 만드는 방법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
했다.
<우리는 사람을 칭찬할 때 판에 박힌 말을 사용한다. 참 착하구나, 똑똑하구나, 머리가 좋
구나, 참 잘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따위의 말만 남발한다. 상대의 장점을 보고 칭찬하는 게
아니라 그저 결과만 보고 칭찬한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해냈느냐 못 했느냐가 어린시절부터
문제가 된다. 명랑하다, 남을 잘 돌본다, 몸놀림이 재빠르다, 침착하다, 주의깊다, 생각이 깊
다, 책을 많이 읽는다, 차분하다, 독립심이 있다, 정의감이 있다, 자제심이 있다, 책임감이 있
다, 부지런하다, 정직하다, 적극적이다, 끈기있다, 협동심이 강하다, 결단력이 있다, 성실하다,
착실하다...등등 칭찬할 소재는 얼마든지 많다. 아이들이 이러한 태도를 갖는다면, 인생에서
부딪치는 갖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시큰둥하고 어색한 겉치레의 말은 좋지 않다. 상대가 지닌 장점을 발견하면 주저없이 칭
찬하도록 하자. 상대에게 장점을 자각하도록 하는 것은 그를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칭찬이
란 망설임없이 하는 것이다.>
나는 결론적으로, '말은 중요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얼굴의 표정과 일치된 말을 쓰는 것
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 그것이 칭찬의 말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면 칭찬하는 사람도 기쁘고 칭찬받는 사람도 기쁠것이다.
말과 마음이 일치하는 것은 심리학에서는 자기일치라고 한다. 자기일치가 되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자기일치 상태에서는 마음이 평온하기 때
문에 아무런 스트레스도 일어나지 않는다. 교사의 자기일치 상태는 학생들의 마음에도 영향
을 미친다. 웃는 얼굴과 고운 말씨는 자기일치에서 비롯된다.
칭찬하는 말 뒤에는 칭찬하는 얼굴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칭찬하는 마음이 있다. 가장 중
요한 것은 바로 이 마음이다. 반대로 꾸짖는 말 뒤에는 찡그린 얼굴이 있고, 또 그런 마음이
있다. 왜 우리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꾸짖을까?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마음이 메마르고
초라하기 때문이다.
2. 모습과 마음은 연동한다.
모습은 마음을 만들고 마음은 형태를 좌우한다고 한다. 모습이란 실체가 있는 것, 눈에 보
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체를 접하면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느낀다. 그
느낌이 마음이다. 모습은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은 자신의 형태를 좌우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그 사람의 인품을 느낀다. 첫대면에서 받는 느낌, 첫인상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그림자를 드리운다. 첫인상을 잘못 느끼는 일도 있지만, 대개는 처음에 받
는 인상이 맞아 떨어지는 일이 많다. 상대의 얼굴표정, 옷차림새, 머리모양, 소지품, 몸짓과
손짓, 미세한 동작, 말투나 목소리의 높낮이, 간격을 두는 방식 등, 우리는 그 사람의 모습
전체에서 인품을 느낀다.
독일의 정신의학자 슐츠는 심리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을 관찰하여 그 사람들의 모습에 나
타난 특징을 찾아냈다. 그 특징은 호흡이 깊고 손과 발이 따뜻하고 이마가 차고 몸이 경직
되어 있지 않은 것등으로, 슐츠는 환자들에게 의식적으로 그들의 흉내를 내게 한 결과, 기분
이 가라않고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는 것을 발견했다. 모습을 흉내냄으로써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율훈련법의 창시자인 슐츠의 치료원리이다.
의식적으로 칭찬하는 표정을 짓는다, 의식적으로 칭찬의 말을 많이 사용한다, 칭찬하는 편
지를 쓴다, 칭찬하는 전화를 건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칭찬하는 일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
며 노력하면 우리의 마음은 남의 흠이나 잡고 헐뜯는 마음에서 칭찬하는 마음으로 바뀔 것
이다. 마음은 쓰는 쪽으로 발달한다. 남을 친절하게 대하면 마음속에 자리잡은 친절함은 점
점 늘어날 것이고 반대로 퉁명스럽게 굴면 마음속의 퉁명함이 점점 번질 것이다. 상냥하게
굴면 상냥함이 늘 것이고 헐뜯으면 헐뜯는 마음이 크게 번질 것이다. 칭찬을 하면 할수록
칭찬하는 감정이 뿌리를 굳게 내려 마음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고 사람을 헐뜯고 비난하면
상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눈만 커져서 스스로의 마음을 더욱더 천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흠이나 잡고 험담을 늘어놓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는 사이에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정해지고 더러워지는가
를 깨닫지 못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를 마음 깊이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원수
를 대할 때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와 똑같이 이성적인 언동을 취하라는 뜻이다.
웃는 얼굴, 고운 말씨로 남을 대하려면 먼저 웃는 얼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의
식적으로 칭찬하도록 노력하라고 권하고 싶다.
3편 칭찬하는 마음의 표현인 '화답'
1. 중요한 '화답'
젊은 부부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물건을 사러 나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
던 나는 옆에서 들리는 부부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아니 대화랄 것도 없었지만, 어
쨌든 인간의 미묘함을 느끼게 하는 한 장면이었다.
남편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참, 부엌의 형광등도 새것으로 갈아야 되지?" 그러
자 젊은 부인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당연한 거 아녜요?" 아내의 한마디에 남편은 실망어
린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 부부는 각자 같은 층의 다
른 매장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에 어린 딸이 칭얼거렸다. 그러자 엄마는 딸을 아빠 쪽으로
떼밀며 말했다. "어머, 저것 좀 봐. 아빠가 아주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네. 아빠한테 가보
렴." 아이는 아빠가 있는 쪽으로 아장거리며 걸어갔다. "아빠, 재미있는 거 나도 볼래요."
"재미있는 게 어디 있어?" 아빠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빠가 매정하게 자기를 뿌리쳤다
고 느낀 아이는 다시 엄마에게로 갔다.
"엄마, 아빠가 재미있는 거 없대." 그러자 아내는 남편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괜히 볼
이 부어서 난리네." 아내는 어린 딸 앞에서 남편에 대한 화풀이를 한 셈이다. 나는 그렇게
내뱉는 부인을 보며, 저 사람의 마음도 점점 참담해지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물건을 사러 오기 전에 그들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설령 일
이 있었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일이 있었을수록 처음으로 하는 대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
다. "아참, 부엌의 형광등도 새것으로 갈아야 되지?"라는 물음에, "그래요, 그 형광등 꽤 오
래 썼어요." 라고 대답했으면 분위기가 얼마나 화기애애했을까? "그래요."라고만 대답했어도
분위기가 그렇게 어색해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대의 말에 처음 하는 대답에는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야 한다. 아내가 남
편의 말을 존중하는 첫 대답을 했다면, 그 젊은 부부의 대화는, 그리고 그들 틈에 끼여 있던
어린 딸의 기분은 그토록 상하지 않았을것이다.
2. 학교에서 있었던일
1학기가 끝나갈 무렵, 학부형회에 관한 계획을 둘러싸고 같은 학년 교사들이 의논을 하고
있을때 였다. A라는 젊은 교사가 말했다. "이번 학부형회의 좌석배치는 1반이 맡기로 했지
요?" 그러자 노련한 S선생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런 일이야 체육시간이 끝난 뒤에 아이들
을 시키면 2,3분이면 돼요. 체육관을 쓰는 학급에게 시키면 되잖아요." 순간 A선생은 맥이
탁 풀렸다. S선생이 첫말을 "그래요"라든가 "그랬던가요"? 정도로만 받았다면 그 뒤에 어떠
한 말을 해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일은..."하고 부정적인 대답을 하자 A
선생은 그만 화가 치밀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흔히, "어떤 말을 들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말
투의 말을 들었느냐가 중요합니다."라고 말한다. 교직원끼리라고 해서 그것이 예외일 리는
없다. "그런 일은...에게 시키면 된다." "그러는 것보다...하는 게 좋다." 이런 말투는 처음에
말을 꺼낸 사람의 말이 무시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이번 학부형회 좌석배치는 1반이 맡기로 했지요?"라고 물었을때 "그래요. 지난번에 차례
를 정했어요."라고 먼저 말을 받고 나서, "하지만 체육관을 쓰는 반의 아이들을 시키는 방법
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일단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면, 그 뒤의 대화는 산뜻해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대방의
말을 부정하면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질 리가 없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관계의 핵심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간단한 것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땐 자기 위주로 생각한 말들을 하고 자기 마
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부정한다. 회사의 상사나 선배들과 대화를 나눌 때는
조심하면서도, 후배라든가 학생들과의 대화에서는 거리낌없이 말한다. 상대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늘 대답에 신경을 쓰고 조심하는 사람을 주변 사람들은 이
렇게 말할 것이다. "저 사람은 분별력도 있고 역시 품위가 돋보여. 얼굴표정이 야무지면서도
어쩜 저렇게 자상할까?"
3. 말에는 말하는 사람의 기분이 담겨 있다.
본인은 의논할 생각이었지만, 일방적으로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것 같은 말투가 있다.
어떤 부부의 외아들이 해외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그 말을 듣고 아내가, "그 아이의 경비는
내가 내겠어요."라고 말했다고 치자. 이처럼 단정적인 말을 해도 될까? 아내는 남편과 의논
할 생각으로 말을 한 것이겠지만 그 말 속에는 "일단 말은 해두지만, 그렇게 하는 걸로 아
세요."라는 일방적인 통고가 숨어 있다. 말하자면 남편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의
경비를 내가 내기로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괜찮겠어요?"하고 말하는 말투와는 뉘앙스
가 다르다. 뉘앙스란 결국 느낌이다. 느낌은 중요한 것이며, 사람은 느낌에 민감하다. 상대가
둔감해서 느끼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섣부른 말 한마디에 남편은 무시당했다고
느끼고 기분이 나빠진다. 그것을 두고, 아내가 "무슨 남자가 그만한 일로 화를 내요? 어쩜
그렇게 속이 좁을까?"라든가, "그만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다니, 마음이 왜 그렇게 너그럽
지 못하세요?"라고 따지고 든다면 그것은 둔감함을 넘어서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 마음속에 불만이나 울분이 있으면 그것이 얼
굴표정과 말투로 표출된다. 마음이 온화하면 말도 자연히 부드러워진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
짐이다. 아무리 부부간이라 해도 상대가 미워지는 일이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앙금을 나
중까지 남기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부간이라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 아무리 친
하더라도 예절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남남처럼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러면 어색할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이 남편의 도리이고 아내의 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
다. 인간관계란 원래 그런 것이다. 분별없이 함부로 행동해서도 안 되며, 버릇없이 덜렁대서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느낌을 주어서도 안 된다. 고개 위의 구름 이라는 책을 보면, 어느 무
사의 말을 빌어 무가의 마음가짐을 나타낸 장면이 있다.
<오늘 밤 우리 집에서 혼례의 축하연을 베풀 생각이오. 그러나 같은 시간에 부모를 잃고
비탄에 잠겨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불운하게도 집에 불이 나서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오. 그렇게 생각하면 축하연이라고 하더라도 우연한 행운일 뿐, 혼자서 기
뻐 날뛰는 경박한 행동은 삼가도록 하시오.>
자신을 억누르는 신중함과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때, 우리는 자율적
인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4. 믿음에도 절도가 필요하다.
학생과 선생 사이의 인간관계에서는 앞에서 예를 든 어느 무사의 경우처럼 자기를 억제하
는 것이 더욱 중요한다. 흔히 말하듯이 '자기 기분에 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교사는 자기 기분에 취해 빚은 실패담을 이렇게 술회했다.
단숨에 마음이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 해에 내가 맡은 반의 첫인상은 무척 좋았다. 똑
똑해 보이는 얼굴, 밝은 표정의 아이들은 무슨 일을 하더라고 활발하고 적극적이었고, 모두
들 사이가 좋아서 분위기도 좋았다. 김차돌이라는 남학생과 한시내라는 여학생이 반장이었
는데, 발표력도 좋았고 서로 협력도 잘했다.
'올해는 우리 반이 잘 되겠는데, 무엇이든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학기초
부터 들어 나도 적극적이 되었다. 내 의식 속에는 반장인 두 학생에게 무슨 일을 시키더라
도 잘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사실 두 학생도 담임인 나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나의 생각과 의도를 먼저 알고 미리 일을 처리하고는 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나와 학생들은 서로를 신뢰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 한 사람의 생
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는 일단 생겨난 신뢰관계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내
가 속단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 학생, 특히 김차돌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켰다. 그에게 기
대는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그에게 이것저것을 시키며 내 뜻대
로 좌지우지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줘", "그렇게 하면 좋겠는데"하는 식으로 나의 요구수준
은 점점 높아졌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아무래도 김차돌에게는 무리겠다 싶은 일들에
대해서도 일방적으로 요구를 계속했다. 직접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차돌이도 자신을 신뢰하는 나의 마음의 증표
로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반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차돌이만 편애한다는 느낌을 줘서는 안 되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내 마음에는 김차돌과, 한시내, 특히 차돌이를 편애하는 심정이
있었다. 편애까지야 아니라고 할지라도 반 아이들이 그렇게 느끼는 눈치가 보였다.
아직 경험이 짧았던 나는 나의 마음을 감추려는 의도로 일부러 차돌이를 들볶았다. 내가
뜻하는 대로 학급일이 잘 안되면, "차돌이는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나? 그런 것도 몰랐단
말이야?"하고 일부러 차돌이를 깎아내리는 말을 했다. 그래서 반 아이들에게, 차돌이라고 특
별히 봐주는 게 아니라는 인식을 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의 내면에는 내가 아무리
차돌이의 행동을 야단치는 말을 하더라도 차돌이는 내 마음을 알아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
었다.
그러나 그것 내멋대로의 생각이었다. 어느 누구라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야단을 맞는다면
참담한 기분을 맛볼 것이다. 아무리 서로간의 믿음이 깊었다 하더라도 야단맞은 차돌이의
감정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차돌이는, '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선생님께서 나를 그렇게 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울분이 울
컥울컥 솟구쳤을 것이다. 김차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
다. 그는 그날부터 급격하게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태도도 시큰둥해졌다. 지금까지 화기애
애하던 반 분위기도 어색해졌고 학급의 단결도 깨지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담임인 내가
차돌이에게만 신경을 쓰다 보니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일단 어색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데에는 꽤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나
혼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가장 믿음이 가는 김차돌을 야단친 것이 무엇보다 큰 실수였다.
교사인 내가 스스로 나와 김차돌과 우리 학급을 불안한 상태로 몰고간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예의와 절도는지켜야 한다. 이것이 내가 이 실패를 통해서 절절이 깨달은 것이다.
4편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칭찬한다.
1. 아이들은 칭찬하는 어른의 심리
칭찬에도 잘하는 칭찬과 서투른 칭찬이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어떤
것을 잘하는칭찬이라고 하고 어떤 것을 서투른 칭찬이라고 할까? 여기서는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갓난아기를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순하기도 해라"라든가 "아유, 귀여워.". "참 똘
똘하게 생겼네."하고 말한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보면 누구라도 한마디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순하기도 해라'와 '아유, 귀여워' 같은 말들이 칭찬의 말에 속한다면, 그
런 말을 할 때 우리는 칭찬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한창 말썽을 부리는 두세 살의 아기는 아무리 장난을 쳐도 귀엽게만 보인다. 그래서 아이
를 타이를 때 사람들은, "아가야, 착하지. 착한 아이는 그런 장난을 하는 게 아니란다."라고
부드럽게 말한다. 이때는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이 부모와 교사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좀더 자라면 부모나 교사의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계산이 자리잡는다. '
아이들을 치켜세우자, 치켜세워서 더 잘 행동하게 만들자'라는 의식이 싹튼다. 결국 아이들
을 치켜세워서 어른들이 뜻하는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의도를 갖고 아이를
치켜세우는 것은, 갓난아이를 착하지, 귀엽지 하고 어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어른들은 그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 아이들을 치켜세운다.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이들을 치켜세우는 것이다. 어른들은 치켜세우는 수단을 이용해서 아
이들을 좌지우지 하려든다.
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해서 어른들의 의도와 계산을 꿰뚫어보게 되면 더 이상 어른들에게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면 부모들의 입에서는 당장 이런 말이 터져나온다.
"국민학교 때까지는 치켜세우면 좋아라 하더니, 중학생이 되더니 시건방져서 콧방귀나 뀌
고 정말 아이들 기르기 어렵다, 어려워..."
이런 이유에서 중학생들은 칭찬하는 것이 국민학생을 칭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1. 칭찬하다, 치켜세우다, 비위를 맞추다
중학생을 칭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건 결국 중학생을 어른 뜻대로 이끌고 가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노골적으로 하게 되면 어른들의 속셈을 인정하고 자각
하는 꼴이 되므로 어른들은 좀처럼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자립심을 키우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교사가 사실은 학생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싶어하고, 자기가 생각한 대로 이끌고 가고자 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어떻게 되
겠는가? 자기 멋대로이고 역겨운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지 않겠는가?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
럽고 겸연쩍지 않은가? 회사나 학교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서로 입에 발린 칭찬을 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배려를 토대로 하고 있다.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추종이나 영합,
겉치레의 말, 심지어는 간사한 아부등 칭찬의 말을 쉽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암묵적으로 양해가 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위해
이런 말을 주저없이 하고 있으며, 듣는 사람도 즐거움을 느낀다. 어른의 사회에서는 상대를
자신이 뜻하는 대로 이끌기 위해 치켜세우고, 칭찬하고, 높여 주는 것은 일종의 게임이며 거
래인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칭찬할 때 이처럼 겉치레말이나 거래의 냄새가 풍기는 말을 쓰면, 그들
은 무언가 불순한 느낌을 받는다. 자신을 속이고 어른이 뜻하는 대로 이끌고 가려고 미끼를
던진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꺼림칙하고, 어른의 계산에 놀아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
은 것이다. 칭찬이란, 칭찬을 함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행위여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염두에 둘때 잘하는 칭찬과 서투른 칭찬을 구별할 수 있다. 칭찬을 함으로써
상대가 이쪽의 의도대로 되었는가, 적어도 의도에 가깝도록 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서투른
칭찬을 낳는다. 그때는 칭찬한 결과와 효과만이 문제가 된다. 그 극단적인 예가 그저 머리를
숙이고 굽신거리거나 상대에게 아첨하는 모습이다.
3. 산뜻하게 칭찬하는 것
교사가 학생의 언동을 보고 진심으로 좋다고 느끼고, 그 기분을 담백하게 드러내는 것, 이
것이야말로 자신의 기분을 산뜻하게 드러내는 칭찬법이다. 칭찬법은 테크닉이 아니다. 산뜻
하게 칭찬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언동을 보고 좋다고 느낄 수 있는 힘, 감수성을 갖추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풍부한 감수성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좋은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읽는 것, 결국 좋은 것을 많이 접하는 것이다.
좋다고 느낀 정서를 담백하게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칭
찬법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무리하지 않고 상대를 칭찬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 스
스로도 행복한 기분을 맛본다.
그러나 사람은 제각각이라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칭찬의 말을 꺼내는 사람이 있고, 제3자
의 좋은 점을화제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꾸로 누군가를 헐뜯기 일쑤인 사람이 있다.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느끼고 그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좋은 점을 느끼는
감수성을 스스로 연마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점을 느끼는 감수성이 점
점 늘어난다. 그러나 남을 헐뜯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험담만을 키울 뿐이다.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면 자신의 마음도 부드러워지는 법이다. 남을 헐뜯고 미워하는 사람
은 자신의 마음에 험담과 증오의 감정을 자꾸 쌓음으로서 정서가 불안해지고 갈수록 마음이
메말라서 그 사람의 삶의 문제, 성격의 문제로 심화된다.
4. 처음 하는 말의 중요함
그렇다면 상대를 무조건 좋게만 생각해야 할까? 아이들이 어떤 언동을 하더라도 눈을 질
끈 감고 웃기만 하면 될까? 마음속으로는 화를 내면서도 얼굴에는 웃음만 띄우면 그만일
까? 마음속의 느낌과 자신의 언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 자기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칭찬은
마음속에 모순을 낳는다. 그렇게 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의 결점만이 눈길을 끄는 까닭은 마음이 메말라 있기 때문이다. 따
라서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면 웬만큼 눈에 거슬리는 것도 용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아이가 갓난아기였을 때는 부모의 눈에 아이의 결점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법이다. 결점이 눈에 띄더라도 사랑스러움과 귀여움 때문에 녹아 없어지거나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을 정도로 미미할 뿐이었다. 아이를 받아들이고 감싸안기 때문에 아이는 부
모의 품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이를 거부하고 기피한다면, 아이는 반발
하고 반항하다가 마침내는 부모와의 관계를 끊으려 할 것이다.
가령, 아침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신문 좀 갖고 오너라."하고 심부름을 시켰다고 치자. 아
이는 "네".하고 대답하고는 현관으로 달려가서 신문을 가지고 온다. 이때 "아빠, 신문 가져왔
어요."라고 말하면서 신문배달 소년처럼 신문을 아버지에게 휙 집어던졌다고 치자. 이럴 때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많은 아버지들은 "아니, 이 녀석이!"하고 말할 뿐,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그대로 놔둘것
이다. 그리고 조금 잔소리가 많은 아버지라면,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야! 아니, 아
버지한테 신문을 던지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런 것도 몰라!"하고 꾸짖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중에는, "어이, 신문 배달 소년, 수고했어."하고 그대로 받아 주는 아버지도 있을
법하다. 이상과 같은 반응 가운데 어느쪽이 좋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앞의 두 가지 방식은
교육적으로 좋다고 할 수 없다. 아버지는 일단 아들이 자신이 시킨 대로 신문을 가져온 것
에 대해 고맙다라든가 수고했다는 말로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런데 얘야,
어른에게 물건을 갖다 줄 때는 이러저러해야 한단다."하고 타일러야 한다. 처음부터 "아니,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야!"라고 꾸짖으면 그것은 아이의 행위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 나중에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타일러도 아이는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먼저
긍적적인 태도와 수용하는 자세가 전제될 때 비로소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성립된다는 사
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중학교에서 본 광경을 소개하겠다. 한 학생이 청소를 마치고 교무실에 있는 담임 선
생에게 알리러 갔다. "선생님, 청소 마쳤습니다." 바쁘게 서류를 꾸미던 선생님이 말했다. "
아니, 뭐? 벌써 청소를 끝냈다고? 빨리도 했네, 깨끗하게 잘했겠지?" "예, 깨끗하게 했습니
다." "좋아, 나중에 확인하겠어.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렇게 전해. 만일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
다거나 책상줄이 조금이라도 비뚤어져 있으면 내일부터 일 주일간 청소당번이다! 알았나?"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학생은 선생님에게 꾸벅 절을 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죄를 지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이 "선생님, 청소 마쳤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우선 "그래, 수고했다."라고 격려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다음에 "빨리도 했구나. 모두들 열심히 했는가 보지?"라는 말
을 덧붙였다면 또 얼마나 좋았을까. 그 교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그의 마
음이 그만큼 메말랐기 때문일 것이다. 교사가 "야아, 정말 빨리 했네. 아마 모두들 힘을 합
쳐서 열심히 했나 보지?"라고 말하고, "아니에요. 꾀를 좀 피웠어요. 서클활동 하러 빨리 가
고 싶어서요."하고 학생이 받았다면 좀더 부드러운 대화가 되지 않았을까?
'모두들 힘을 합쳐서 열심히 했나 보지'라든가 '능률적으로 했군' 따위의 말은 칭찬의 말
이다. 아까 선생이 말한 '나중에 확인하겠어...내일부터 일 주일간 청소당번이야' 하는 말과
는 하늘과 땅 차이다.
교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짜증이 날 때가 있다. 무리를 해서라도 기한내에 끝내야 하는 일
도 있고 학생들의 지도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때도 있다. 그런데 거기다 청소지도까지 하려
니 정말 시간이 없다고 변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학생들에게 주는 첫 대답에 주의해야 한다. 첫 대답이 학생에게 좋
은 인상을 주기도 하고 나쁜 인상을 주기도 한다. 평소에 하는 첫 대답에 그 교사의 인품이
담겨 있다. 그 인품을 느낀 학생은, 선생님이 무언가를 부탁했을 때 협조적이 될 수도 있고
비협조적이 될 수도 있다. 이렇듯 첫 대답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5. 교사가 생각해야 할 것
첫 대답은 처음에 자기가 무엇을 느꼈느냐에 달려 있다. 같은 경우를 만나더라도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이 달라진다. 그 점에서 누구나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기본위의
태도가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학생들 중에는 교사 마음에 드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있다. 어딘지 우수가 서려
있고 어른스로운 아이를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보다 좋다고 느끼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조
금 덜렁거리고 가벼운 맛이 있지만 아이답게 거리낌없는 아이를 좋아하는 교사도 있다.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던 아이가 어떤 일을 하면, 교사는 아이를 안 좋게 생각하던 마음
때문에 그 학생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받아 들인다. 반대로 솔직하고 착해서 평소부터 좋아
하던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면 그저 좋게만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배광
효과라고 하지만, 나는 이것을 인간의 약점이라 말하고 싶다.
학생들은 자신이 교사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민감하게 알고 있다. 학생들의 말을 빌리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교사의 표정에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학생들은 자신이 교사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가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학생들이
문제삼는 것은 교사가 그들에게 어떤 말투를 썼는가이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투를 썼는
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말투의 문제인 것이다. 미움이 담긴 말투, 귀찮다
는 말투, 시치미떼는 말투, 의심쩍은 말투 등등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말투가 있다. 이러한
말투들은 말하는 사람이 상태의 태도나 언어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이다.
교사는 자신의 느낌이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다. 학생
들의 말을 들으면, 선생님의 안색만 봐도 누가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는지 알 수 있다고 한
다. 안색이 곧 얼굴 표정이니 무턱대고 부정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나는 모든 학생들을 공평하게 대한다. 편애라고는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사의 얼굴표정만 보고도 느끼기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변명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 이점에서 A선생의 태도는 여느 선생들과 다르다. 그는 학생들이 어떤 말
을 한다면 자신이 그것을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만일 학생
들이 '선생님은 누구누구를 편애한다'
고 수군거리면, A선생은 학생들의 말을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이 학생을 편애하는
가 하지않는가가 아니라, 지극히 일부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6. 교사가 사과의 마음을 보이면 학생들도 변화한다.
앞에서 말한 A선생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이런, 미안해. 미안, 미안."하고 말한다. 자신
이 미흡한 점을 일일이 사과한다는 점에서 조금 유난스럽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런 사과가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수업종이 울린 뒤에 조금 늦게 교실로 들어올 경우 A선생은 떠
들고 있는 학생들에, "미안미안, 전화가 좀 길어져서 늦었어. 자, 그럼 수업을 시작할까?"라
고 말한다. 다른 교사들처럼, "자자, 조용히 해, 시작종이 울렸으면 빨리 자리에 앉아서 수업
준비를 해야지."라든가 "이따위로 떠들면 수업할 기분이 나겠어?"하고 학생들을 나무라는
일은 없다.
수업중에 학생이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하면, '그래? 미안해. 다시 한 번 설명할 테니, 어
디를 모는는지 말해 봐." 하고는 설명을 되풀이한다. 다른 교사들처럼, "설명할 때 안 듣고
뭐했어? 좋아, 다시 한 번 설명할 테니 이번에는 정신차리고 들어. 딱 한 번뿐이야."라든가
"정신을 딴 데다가 파니까 못알아듣지. 이렇게 간단한 설명도 못 알아듣다니, 창피한 줄 알
아."하는 말로 학생들을 나무라는 일이 절대로 없다.
설명을 다시 들은 학생이, "아, 그렇군요. 이젠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오, 그래, 정말
잘됐다. 고마워."라고 진심으로 기쁘게 말한다.
학생이 그래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미안, 내 설명을 알아듣기 힘들지?"하고 사
과한다. 이때 A선생의 사과는 상대 학생을 탓하는 소리가 아니라 교사가 자신을 책망하는
소리로 느껴진다. 그러니 학생 쪽도,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잘 못 알아듣기 때문이에요.
정말 죄송해요."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선생님과 더불어
화기애애하게 배운다는 느낌을 받는다.
학생들이 장난을 친다든지 문제를 일으켰을 때도 꾸짖은 방법에 따라 뉘앙스가 크게 다르
다. "미안하지만 너의 그런 면이 내 마음에 걸려."하고 말하는 교사가 있다. 마음에 걸려 하
는 자신이 나쁘다고 자책하고, 학생의 특정한 행동을 싫어하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이다. "네 녀석은 그 점이 틀려먹었어. 고쳐. 고치지 않으면 모두들 너
를 싫어할 거야.", "돼먹지 못한 놈. 다시 한번 그러기만 해봐라." 따위의 말투와 비교해 보
고 학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기 바란다. A선생은 지금까지의 실천을 통해 다음
과 같은 좌우명을 터득했다. '학생을 무시하면, 그것이 교사에게 되돌아 온다.' 그러나 A선
생은 의식적으로 칭찬을 남발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솔직하게 사과하는 기
분을 표현하다 보니, 학생들도 솔직 담백한 태도로 그를 대하는 것이다.
5편 교사의 자세
1. 몸과 입과 뜻을 바로 갖추자
인간의 행동에서는 '몸'과 '입'과 '뜻'의 세 가지 조화가 중요하다고 한다. '몸'을 바로 갖
추려면 몸가짐, 의복, 태도, 자세, 청결, 정리정돈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가지런해야 한다.
'입'에 관하여서는 말이나 말투, 입으로 섭취하는 음식이나 마실 것도 해당된다. 과음과식은
말할 것도 없고 편식이나 음식을
아예 입에 안대는 것도 문제가 된다. 입과 관련된 것 가운데 하나가 호흡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호흡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이나 요가의 명상법에서는 호흡이 중요한
요소를 이루듯이, 호흡과마음의 상태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호흡에 대해서
좀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뜻'은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가지과 정서안정의 문제이다. 결국 교사는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자신의 '몸'과 '입'과 '뜻'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 자기조절의 기초를 이룰 수 있는 것
이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이 있다. 교사의 버릇이나 학교의 관습이 교사와 학교
의 성격을 규정한다. 그래서 한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그 학교의 습관이나 관습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조금만 벗어난 시각에서 바라보면 기묘하
고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일이 있다.
예를 들면 교사들이 거리낌없이 학생들에게 작업을 시키는 일이 있다. 그 자체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교사가 학생들에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작업을 시킨다면, 이것
은 결국 교사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든다.
학교 행사중에 체육관에 의자를 배치해야 할 일이 있을때 교사들은 아주 손쉽게, "의자배
치는 학생들만 시키면 돼요."라든가 "학생들을 시켜서 치우면 돼요."라고 말한다. 교사인 자
신이 시키는 일은 학생들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믿는 듯한 말투이다. 이런 말투는, "의자배
치는 학생들의 도움을 받도록 하지요."라든가 "학생들에게 부탁해서 치우는 게 어떨까요?"
와 같은 말투와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개중에는 학생들에게 일을 시키고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안 하는 교사가 있다. 오히려 학생들이 한 일이 시원치 않다고 탓하고 지도하려 들기
까지 한다.
"수고했어", "고마워"하고 '몸'과 '입'과 '뜻'이 조화를 이루는 고마움을 표한 뒤에, 그들의
부족한 점을 지적해도 늦지 않다. 처음부터 학생들의 행위를 무시한 채 가르치려고 들면, 학
생들은 교사의 가르침을 외면한다. 먼저 "고마워"하고 아량있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고
그 다음에 뭔가를 가르치면 학생들도 그 지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자신이 부탁한 것을 실행한 학생들에게 교사는 몸과 마음으로 고맙다고 표시를 해야 하
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몸과 입과 뜻의 합일이라고 한
다. 그저 빳빳한 자세로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내뱉으면 무뚝뚝하게 들린다. 고맙다는 마음
이 학생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고맙다는 말이나 몸짓도 없이 그저 속으로만 고
맙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심정이 학생들에게 전달될 리 만무하다.
마음으로 좋다고 느끼고 그것을 몸과 언어로 나타낼 때, '몸'과 '입'과 '뜻'이 합일을 이
룰 때, 상대는 이쪽의 의사를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몸으로 나타내지는 것을 얼굴표정, 자연
스로운 태도, 섬세한 몸짓이다. 그것은 교사 자신이 순수한 기쁨의 표현이기도 하다.
2. 몸가짐을 바로 갖추자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 갖추려면 먼저 건강해야만 한다. 건강이 모든 행동의 원점이다. 두
뇌의 기능도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 사물을 어떻게 느끼고 판단하는가에도 건강이 영향을
미치고, 연상이나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발상도 신체의 건강과 관련이 깊다. 허리나 머리,
이가 아플 때 좋은 생각이 떠오를리 만무하다.
따라서 자기를 되돌아보고자 할 때는 먼저 건강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물론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해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먼저 생각하기 쉬운 신체의 건강에 대해 살펴보자.
건강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자세'이다. 많은 사람을 접하려 하고 하
고자 하는 의욕이 넘치는 사람, 나아가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대개 등이 곧게 퍼져
있다. 푹신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나눌 때에도, 처음에 자리에 앉을 때와 똑같은 자세
이다. 인간은 원래 머리라는 컴퓨터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할 때에는 등을 곧게 편다.
반면에 어떤 일에 풀이 죽으면 무의식적으로 등이 굽어진다. 허세를 부릴 때는 배를 쑥 내
민다. 등의 모양을 보면 두뇌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사에 의욕적인 사람은 뒷모습을 보아도 어깨에 힘이 넘치고 등이 곧게 펴져 있다. 인생
의 뒤안길을 서성이는 사람들의 등줄기에서는 전혀 패기를 느낄 수 없다.
건강과 관련해서 두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청결'이다. 청결하지 않으면 인생이 잘 풀리
지 않는다. 가족 중에 환자가 끊일 날이 없고 불길한 기운이 음산한 기를 뿜으며 주위를 맴
돈다. 활기가 넘치고 좋은 운세를 가진 가정은 밝고 약동하는 느낌을 준다. 가족간의 대화도
활기가 넘치고 분위기가 신선하다. 따라서 커튼과 형광등 같은 것들을 새것으로 갈아서 실
내의 분위기를 바꾸는 등의 기분전환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정리정돈과 깔끔한 청소는
우리의 마음상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개인적인 정신위생에 유의하는 것이 절
제의 기본이다.
3. 엄청난 말의 힘을 느끼자
말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한마디의 말로 인생
이 뒤바뀌었 다는 사람도 있다. 그와는 반대로 오랫동안 사귀었던 친구가 어처구니없는 소
문을 퍼뜨려 사이가 멀어졌다는 사람도 있다.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말에는 그 말에 부수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운이
좋은 사람이 나 진취적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긍적적이고 미래를 지향하는 말, 좋은 말
로 일관되어 있음을 알 수있다. 대화의 내용도 밝고 꿈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인생을 소극적
으로 사는 패기없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늘 퇴보적이고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경향이 있다.
말은 입에서 나오지만,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힘으로 변해 그 사람의 의지를 좌우한
다. 상대뿐만이 아니라 말을 한 당사자도 자신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 의욕적인 말을 하면
마음도 의욕적으로 변한다. 이것을 자기암시라고 한다.
4. 입의 문제-말과 음식과 호흡
좋은 말이란 누가 들어도 기분좋은 말을 가리킨다. 들어서 기분 좋은 말로는 감사의 말,
칭찬의 말, 격려의 말 등이 있다. 듣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말하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말, 그것이 바로 좋은 말이다.
거친 말을 일삼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비행을 저지를 확률이 높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집에서 매일 푸념과 욕설, 그리고 불평만 듣고 자라기 때문이다. 홧김에 아이들을
야단치기 보다 아이들의 좋은 점을 칭찬한다면, 그들의 행동도 올바른 쪽으로 변할 것이다.
교사는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좋은 말을 의식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잘 어울리는군요, 보기
좋은데요. 젊어지셨네요, 잘하는군요, 정말 잘됐어요, 큰일날 뻔했네요, 피곤하시지요 등등
조금만 신경을 써서 좋은 말을 쓰면 상대의 마음뿐만 아니라 본인의 마음도 편안해진다.
편안한 마음에서 다정다감한 말이 나오는 걸까, 아니면 다정다감한 말을 하기 때문에 마
음이 편안해지는 걸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입과 관련해서는 말 이외에도 음식과 호흡이 중요하다. 적절한 것을 적절한 시간에 적절
한 양만큼 먹어야 하며, 호흡은 깊게 해야 한다.
숨을 짧게짧게 토해내는 흉식호흡으로는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싸움을 한 뒤와 같
은 흥분상태에서는 복식호흡이 불가능하다.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복식호흡에 가까운
깊은 호흡을 하는 게 좋다. 명상 혹은 좌선을 할 때는 몸과 호흡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자세를 바르게 하여 호흡을 조절함으로써 마음까지 조절한다고 한다. 입과 관련된 숨쉬기,
호흡을 조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호흡이 올바른 몸가짐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
는가를 잊지 말기 바란다.
5. 실감나는 연기는 실제로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정다감한 마음을 갖추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리 노력
해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제 경우, 챙피한 일이지만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아이가 있습니다. 지도하고 싶은 마음도 일지 않습니다. 학생을 미워하면 좋은 방향으로 이
끌 수 없다는 것을 난들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 걸 잘 알면서도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리기 어렵습니다. 약간 결벽증이 있는 나는 그
학생의 지저분한 몸과 흐트러진 복장과 자세를 보면 속에서 화가 치밉니다. 이런 아이에게
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습니다. 교사로서 학생을 미워하다니, 나는 교사의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감정도 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인가 봅니다."
옛날에 석가는 이 세상을 사고팔고라 했다.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에다, 미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사람을 대해야 하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는 고통, 용솟음치는 육체적 욕망으로 인한 고통을 더해서 여덟 가지 고통
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통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설파했다.
필자도, 도망가면 쫓아오고,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 고통을 체험한
일이 있다.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해 인간의 적극성이란 신체와 말과 의식을 조절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신체란 구체적으로 밖으로 나타나는 태도이다. 얼굴표정이나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말
은 마음의 거울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의식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능하면 고쳐나가는 것이
자기억제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율훈련법을 확립한 슐츠는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사
람의 태도를 흉내냄으로써 그 사람의 마음상태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러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학생들을 대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나아가 어떤 목소리로
어떻게 말을 걸고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스스로 분석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럴 때의 자
신의 상태를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흉내낼 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마음이나 기분이 어떻든, 모든 학생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학생을 대할 때와 똑같은 태도
와 표현으로 대하도록 노력하자. 이것은 연기라면 연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연기를 감
쪽같이 할 수 있도록 쉬지 않고 노력하자. '자극이 다르면 반응도 다르다.' 당신이 지금까지
지어왔던, 상대를 기피하고 적대시하는 표정과는 사뭇 다른 표정, 비록 그것이 연기라고 하
더라도 다정다감한 표정을 짓는다면 학생들은 새로운 자극을받는다.
학생들이 당신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라도 그 연기를 계속해
보자. 연기가 몸에 익을 무렵이면 학생들의 반응도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처음에는 연기였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실제로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모습을 갖춤으로써 마음도 갖출수 있는 것, 이것은 인간의 미묘함 가운데 하나이다.
제2장 칭찬하는 마음을 뒤돌아보자
1편. 칭찬하는 감성
1. 지각한 국민학교 2학년 꼬마
어느 국민학교에 갔다가 체험한 일이다. 그 학교에 볼일이 있어서 아침 9시가 좀 넘어 교
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뒤에서 숨을 헐떡이며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조그만 아이가 있었다.
국민학교 2학년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로 진지한 옆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내
가 먼저 "안녕"하고 말을 걸었겠지만, 그 아이의 얼굴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나도 그만 심각
해져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 녀석, 지각했구나.' 나는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 아이는 곧장 옆에 있는 교실로 들어갔다. 쥐죽은 듯이 조용한 길다란 복도 끝에 나는 우
두커니 서 있었다. 아이가 들어간 교실에서 젊은 여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아주 힘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훌룡해, 정말 훌룡해!" 바로 뒤이어서 짝짝짝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에 응
답이라도 하듯이 반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박수를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훌룡해, 훌룡해."하는 병아리 합창 같은 소리도 들렸다. 교실 분위기가 복도까지 전해 오는
것 같았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2. 교사가 들려 준 이야기
나는 교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서 그 반 담임 교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
다. 그 선생은 조금 수줍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가람이라고 합니다. 가람이는 어머니,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오빠와
함께 살고 있답니다.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고, 남아 있는 빚 때문에 어머니는 밤늦게까
지 일을 하신다나 봐요. 철이 든 가람이 오빠는 어머니에게, '밤일을 하실 때 저희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하지만 너무 힘이들면 쉬도록 하세요. 어머니가 밤에 안 계셔도 공부 열심
히 할게요. 동생 가람이도 제가 잘 돌 볼테니 걱정하지 마시구요.'라고 말하면서 어머니를
격려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가람이는 한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아
침에 지각을 했습니다. 가람이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나에게 다가와서는, '선생님, 저...시계
가 안 울려서요...엄마도...늦잠을 주무셨고... 그만 지각을 했어요.'하고 떠듬거리면서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숨이 턱까지 차서 헉헉대며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모든 정황을 깨달았
지요.
'아, 어머니가 늘 머리맡에 두고 자는 자명종이 고장났거나, 깜빡 잊고 시간을 맞추지 않
아서 울리지않았구나. 그래서 피곤에 지친 어머니도 늦잠을 자고 말았구나.' 이렇게 해서 세
가족이 모두 늦잠을 잔 겁니다. 가람이는 지각을 하게 됐으니 학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썼
을 테고, 오빠는 지각해도 괜찮으니까 어서 학교에 가라고, 쓸데없이 결석하는 것보다는 늦
더라도 학교에 전화를 걸어 준다고 말씀했겠지만 가람이 오빠는, '나는 지각해도 학교에 갈
거야, 창피하기는 하지만 선생님께 왜 늦었는지 솔직하게 말씀드릴 거야. 자, 빨리 서두르
자.'하며 동생과 함께 집을 나서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가람이가 나에
게 지각한 이유를 진지하게 설명한 겁니다.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훌룡해, 훌룡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저는 멍하니 있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 여러분, 가람이는 늦잠을 자서 지
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 이유를 아주 잘 설명했어요. 선생님도 늦잠을 자서 지각할 뻔한 적
이 있어요. 창피하니 그냥 하루 쉴까 하고 생각도 했지요. 모두가 한창 공부하고 있는데 교
실에 들어가기가 너무 챙피해서 말이에요. 그래요, 지각하는 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선생
님도 잘 알아요. 그러나 가람이는 교실에 혼자 들어와서 그 이유를 잘 설명했어요. 선생님은
그런 가람이가 정말 훌룡하다고 생각해요. 가람이, 훌룡해, 정말 훌룡해!'
그러자 반 아이들도 제 말을 따라서 '훌룡해, 정말 훌룡해!'하고 외치면서 박수를 친 거지
요.'
3.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지도
가람이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아주 기쁜 표정이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 교사들은 여러 가지
지도방법을 택할 것이다. 가람이에게, "자자, 좀 침착하게 차근차근 말해 보렴."이라든가 "그
렇게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말해 봐."라고 말하는 교사도 있을 것이고, "숨이 가라앉을 때까
지 심호흡을 해봐."라든가 " 엄마가 일러 준 대로 차근차근 말해 봐."라고 말하는 교사도 있
을 것이다. 이런 지도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너무
형식적이고 딱딱하게 느껴질 뿐 다정다감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람이와 반 아이들의
가슴에 뭔가를 심어 주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젊은 여선생이 가람이나 반 아이들의 가슴에 뭔가를 심어 주겠다는 의
도로 가람이를 대한 것은 아니다. 그 여선생은 그저 순수하게 가람이의 마음을 공감하고 가
람이와 한마음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 자세와 태도는 노력해서 몸에 익힌 것이 아니라, 순수
한 삶을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향기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교사의 풍부한 감수성에 주목해야 한다. 남을 생각하는 인간미와 깊은 감수성
을 지니고 있기에 그런 행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4. 감성은 경험이 많고 적음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나는 그 여교사의 따스한 인간미와 깊은 감수성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
서 그 교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것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교사는 자신이 풍부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자신은 있는 그대로
의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동화를 좋아하고, 아이들에게 동화 읽어 주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문학을 사랑하고 시를 좋아하는 아주 평범한 교사였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그
날그날의 상념을 기록하는 일기를 빠짐없이 쓰는데 그 내용은 일기라기보다는 수필, 혹은
자유로운 마음의 편력을 기록한 산문 같은 정도 라고 했다.
이 여교사의 경우, 이런저런 상념을 자유롭게 기록함으로써 감성을 키우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그 교사가 감성을 키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일기를 쓴 것은 아니다. 그냥 좋
아서 써나간 것이다. 나날의 감정을 글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상념을 객관화한 것이다.
'노력은 좋아하는 것에 못 미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에 못미친다'는 공자의 말씀이
있다. 이 말은 무슨 일인가를 노력해서 하는 사람은 그것이 좋아서 하는 사람을 따를 수 없
고 좋아서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는 필적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감성은 경험이 많고 적거나, 나이가 많고 적음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2편 자식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어머니
1. 칭찬으로 해맑게 키워야겠다고 결심하기는 했지만
'꾸짖음보다는 칭찬을'이라든가 '야단쳐서 아이들을 주눅들게 하기보다는 칭찬해서 아이
들을 해맑게
키우자'라는 말을 들으면 부모와 교사들은 머쓱해진다. 대개 칭찬보다는 야단치는 일이 많
기 때문이다.
그래서 '맞아, 이제부터는 사소한 일에 야단치지 말고 칭찬을 많이 해야지.'하고 결심한다.
그러나 며칠 지나서 생각하면, 역시 칭찬보다는 야단을 많이 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
(?)과 현실
사이의 간격이라고나 할까.
진실한 사람일수록 '내가 부모로서(교사로서) 아이들 교육에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닐까.
나는 부모(교사)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하는 회의에 빠진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들을
야단치지
않고 적절하게 칭찬하면서 해맑게 키우고 있다는 자괴심에 젖기도 한다.
나는 어떤 어머니와 상담을 한 뒤에 이 점에 대해 더욱더 절실히 느꼈다.
이제 나이 40줄에 들어선 베테랑급(?) 어머니였지만 이 어머니에게는 고민이 많았다. 자
식이 셋이
있는데, 큰아이, 작은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문제아들이었다. 열여덟 살 먹은 맏아들은 고등
학교를
중퇴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머니가 보기에는 너무나 우유부단해서
도무지
믿음직하지 못한 아이였다.
둘째아들도 학교에 가는 둥 마는 둥 공부에 열의가 없었다. 학교 다니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사에 무책임했다. 학교에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는 식이어서 도무지 야무진
구석이
없었다. 셋째아들은 완전히 비행소년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숨어서 담배를 피우지 않나, 술
을 마시지
않나, 밤늦게 돌아디니지를 않나, 친구와 가출을 하지 않나. 이렇듯 자식들이 한결같이 엉망
이었다.
어머니는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는 대로 아이들을
야단치는게
아니라 칭찬하면서 키우려고 애를 썼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번도 홧김에 야단을 친 적이
없답니다.
아니, 오히려 아이들이 어떤 일을 하면 잘한 점, 훌륭한 점을 찾아서 칭찬을 했습니다. 칭찬
을 해서
아이들에게 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려고요.
아이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너는 원래 착한아이야. 너같이 착한 아이가 그런 잘못
을 저지르는
데는 무언가 까닭이 있을 거야. 너는 잘못한 까닭을 스스로 알고 반성할 수 있어. 엄마는 그
렇게 믿어.'
하고 타일렀지요.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대답했답니다. 언젠가는 아이들
이 이런
어미의 마음을 알아 주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착실해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
되리라고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속으로는 얼마나 분
노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화를 삭이고 또 삭이고, 참고 또 참으며 아이들을 야단치는 대신 칭찬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허무하고 진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조차 대하기 싫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얼마
나 싫어졌으
면 야단치지 말고 다독거리자고 생각하는 순간 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질 정도입니
다.
도대체 제가 잘못한 게 뭘까요? 저는 아이들,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나 자신에게조차
죄를 지었다
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부터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2. 너무 무리한 어머니
나는 그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칭찬이란 입으로 하는 말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형태
도 아니다. 그것은 마음 그 자체이다. 제대로 되지 못한 칭찬은 의미가 없다. 칭찬이란 칭찬
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도 나에게 상담하러 오기 전에-아니, 와서도라고 표현하는 게 어울릴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다.-나에게-학교측에-거짓말을 했다.
예를 들어 세째아들이 가출했을 때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 "아이가 감기가 걸려서 학교에
못 갔어요."
라고 둘러댔었다. 그런 태도가 가정과 학교의 협력관계를 틀어놓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주변
세계를
대하는 처신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 어머니는 자신이 어떤 처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깨
닫지 못했다.
그런 처신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꽁꽁 닫혀졌고, 결국 그렇게 속앓이를 해
야 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햇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살던 어머니가 교장과 면담하려고 달려오기까지는, 그 어머니 자신의 내면
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재촉한 것은 자식들의 문제행동과 비행이었던 것
도 분명했다.
그리고 자식들은 무의식중에 어머니에게, '우리들 심정도 알아주세요, 이젠 어머니의 세상
사는 방식을
바꾸세요.'하고 문제행동과 비행이라는 형태로 호소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3. 마음의 편력에 담긴 의미
여러 차례에 걸쳐 그 어머니가 털어놓은 심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의 술회는
선생인 내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털어 놓은 이야기였다. 그 어머니의 술회를 듣자니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고쳐간다는 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상담이란 그런 메카니
즘을 갖는 것
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인간 마음의 불가사의함을 절감
했다.
"...저는 제가 원해서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제 친정에서는 결혼을 반대했지요. 이유는 집
안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거였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저에게, '저쪽은 커다란 회사를 경영하는 자산가의
아들인데
이쪽은 변변치 못한 봉급쟁이의 딸이야. 게다가 저쪽은 일류대학 출신인데 이쪽은 고작 지
방 고등학교
를 졸업했을 뿐이야. 집안 따위는 옛날 이야기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생각하는 방식이나
느끼는 방식
이 크게 달라. 아마 너는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할거야. 아니, 일상생활 하나하나가 모두 낯
설 거다.'
하시며 반대하셨지요.
나중에 들으니 남편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해요. 어쨌든 우리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
쓰고 결혼을
했어요. 지금 '우리는'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제 자발적인 의사보다는 남편의 고집에 이끌
려 결혼한
면이 컸어요. 그때 우리는 젊었으니까요.
어렵사리 들어간 시댁이었기에 저는 무리할 수밖에 없었어요. 집안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모든 행동을 조심하며 신경을 썼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구요.
시어머니는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쁜와중에서도 며느리인 저에
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도법, 꽃꽂이, 예법, 때로는 서예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시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그런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나
싶어요.
당신은 결코 속이 좁지 않은 화통한 시어머니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는지 모르죠.
저는 시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나쁜지 아
니면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지, 아마 두 가지 다라고 생각하지만, 무엇을 하더라도 시원찮은 며느
리라는
평가를 받았답니다. 직접 대놓고 그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시어머니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지요. 저는 지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무렵, 저는 아이를 가졌습니다. 임신을 계기로 저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분가를 하
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한 말이었지만 남편은 뚱한 얼굴로 이렇다저렇다
말을 하지
않았지요. 저는 집안에서 외톨이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니 외로움도 가셨습니다. 시어머니는 손자를 귀여워하셨지요. 시어머
니는
당신 친구들에게 '손자가 생겼지만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건 사양하겠어.'하고 지적이고
차분한 말투
로 말했지만, 식구들과 지낼 때는 정반대였습니다. 시어머니의 처세술과 허세를 보는 듯했습
니다.
유모도 있었지만, 아이는 저 혼자의 힘으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나부
터
열까지 제힘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틈나는 대로 그건 이렇게 하는 거란다라든가
그것을
이렇게 하면 좋단다 하는 식으로 참견을 했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가 보는 데서는 시키는 대
로 했지만,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제 방식대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잇따라 태어나 세 명이나 되
었지만
모두 제 방식대로 키웠습니다 저 나름대로 '세상살이에 제법 도가 텄는 걸.'하고 생각했습니
다.
시어머니와 남편을 대하는 얼굴과 자식을 대하는 얼굴도 달랐습니다. 저는 그렇게 때와 장
소에 따라서
처신을 달리 하는 것이 세상사는 요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할머니가 안 계시니까 이걸 먹어도 돼.'하고 단것을 주거나, 아이들을 데리
고 외식을
나갔다 들어오면서 '아버지에게는 비밀이야.'하는 식으로 일렀습니다.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아이들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제 말을 잘 듣고 안 듣고를 떠나
서 제가 살아
가는 방식 그 자체를 비판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상대의 안색부터 살피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처신, 그래서 하루도 마음편할 날이 없는 생활방식에 물들까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을
참지 못하고 가출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파묻히고, 반항했는지도 모릅니다."
4. 자기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이 어머니처럼 이런 칭찬을 하면 상대는 기분이 좋아져서 내가 하는 말도 잘 듣겠지 하는
속셈을
갖고 칭찬을 하면 자신의 마음도 영 개운치가 못하다. 그것은 자기일치를 이루지 못한 칭찬
이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영합이나 추종과는 같은 것이다. 자기일치를 이루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기분
과 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칭찬을 하면 할수록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커진다. '내가 왜 이렇게 알
랑거리지!'. '
둘러대기는!', '나는 위선자야!'와 같은 기분이 일고 갈등이 생긴다. 자기혐오감에 빠지는 것
이다.
따라서 칭찬을 하면서도 기분은 조금도 상쾌하지 못하다. 마음에도 없는 겉치레말을 할 때
는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자기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칭찬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벌컥 화가 나서 호통을 치려 할 때, 부모는 스스로 '이 무슨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람
'하고 반성하면서 화를 삭이려고 하지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호통을 치고
만다.
여기에서는 일종의 자기일치가 이루어진 셈이다.
개중에는 화를 삭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 사람이 더 소탈
할 수도
있다. 벌컥벌컥 화를 잘 내는 대신, 뒤끝이 없는 단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한 사
람이라고
해도 좋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그런 부모나 교사가 더 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런 사람의 호통은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아이구, 또 화통을 삶아 잡수셨
군.'하면서
야단이나 호통을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다. 꾸짖는 게 아니라 화풀이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이런 사람이 칭찬을 하면 고맙게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어쩌다 기분좋아서 하
는 소리려니
하고 귓전으로 스쳐 듣는 것이다.
5. 정직한 것과 자연스러운 것
인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정직해야 하는가? 스스로의 감정을 속이고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칭찬은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럽다.
정직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의미가 깊은 개념이다.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한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어머니도 자신에게 정직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어머니에게 칭찬받고 싶고, 잘보이고 싶다는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이의 학교에 전화를 걸어서 얼렁뚱땅 둘러댄 것도 체면이 깍이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심
정 때문
이었다. 이 모두가 그때그때의 기분에 정직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정직이란 스트레스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경우, 마음속으로는 보다 자유롭
고 싶지
않았을까? 그녀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기분을 헤아리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억눌렀다. 그
렇게 하는
길만이 가정에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살이란 다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를 무리하게 타일렀다.
그러나 그 무리는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내부에 심리
적인 우울,
스트레스로 쌓였다. 게다가 그 여파가 어머니와 밀착되어 있는 아이들에게까지 미쳤던 것이
다.
그녀가 말한 대로 아이들을 기르면서 야단치지 않고 칭찬하려고 했다는 것은 야단치지 않
고 칭찬하려
고 무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녀의 답답하고 일그러진 처신이 아이들의 삶을 속박하고
답답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
고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보다 자유로워진다면 아이들도 마음의 문을 열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
다.
그녀는 몇 차례에 걸친 나와의 대화를 통해서 "앞으로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요?"하는 의문은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말을 하면 좋겠느냐는 행동과 말의 문제가 아
니라 마음
그 자체의 문제임도 자각했다.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가질때 거기에서 바람직한 말과 행
동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그때까지와는 달리 안정된
마음을 쌓아
갈 수 있었다.
3편 칭찬하는 것도 칭찬받는 것도 겸연쩍다
1. 사람들 앞에서 자식을 야단치는 부모
학교에서는 학생과 학부형, 그리고 교사가 한자리에 모여 생활이나 진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상담을
자주 개최한다. 학생과 학부형이 한자리에 모여 교사와 대화를 나눌 때면, 세 사람이 서로
독특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단란한 가족 사이에 낯선 사람이 끼어든 듯한 느
낌을 받을
것이다. 교사가 아무리 친근감을 주더라도 학생이나 부모의 입장에서는 교사가 타인임에 틀
림없다.
교사 또한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보통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
다.
그래서 학부형이 수업을 참관하는 날에는 모든 행동을 조심하고 보통 때보다 세심하게 수업
을 준비해야
겠다는 심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학부모나 학생도 교사라는 제3자에게 좀더 좋은 인상을 주려고 평소보다 들뜬 행동을 보
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식을 칭찬하는 것은 팔불출이라는 일반적인 관념 때문인지,
되레
아이를 야단치는 부모도 적지 않다. 아마 자식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모양이다. 어떤 어머니는 이렇게 하소연을 한다.
"애가 옛날처럼 고분고분하지가 않아요. 국민학교 때는 안 그랬는데 중학생이 되고 나서
는 얼마나
점잖을 빼는지, 글쎄 지난번에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유, 얘는 어쩜 이렇게 착할까, 중학
생이 되어서도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나오구. 정말 보기 좋네요.'하고 칭찬하길래 제가 '얘는 원래 그래
요.'하고
맞장구를 쳤지요. 아, 그랬더니 이 녀석이 '쓸데없는 소리들을 하고 계시네. 듣기 싫어 죽겠
어, 정말.'
하고 중얼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내가 '엄마는 정말 네가 예뻐서 하는 소리야.'라고
했더니
'그만 좀 하세요!'하고 금방 뚱한 얼굴을 하는 거예요. 겸연쩍어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
만 그렇다고
그렇게 부어 있을 것까지는 없잖아요, 선생님. 정말 애키우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렇게 하소연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 별로 걱정스러운 표정이 어려 있지도 않다. 그
런 말을
하면서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반면에 아들은 자신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피면서 말하
는 어머니에
게, '선생님 앞에서 정말 별말을 다 하고 있네!'하는 표정을 짓는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갈
등을 느끼는
순간이다.
착하다, 순하다,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아이라는 것은 결국 부모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는
아이라는
느낌을 주므로 학생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반면에 어머니 쪽은, '아이구, 좀 컸다고 되
게 으시대네.'
하고 생각하면서 조금 놀려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놀려주고 싶다는 것까지야 이해가 가
지만, 개중에
는 정도가 지나쳐서 아이들을 정말로 화나게 만드는 어머니도 있다. 그리고는, "이젠 이 녀
석이 진저리
가 나요. 자기 자식을 싫어하다니 나는 어미 자격도 없어요."하고 푸념하기도 한다.
그럴 때 교사들은, "아니에요, 얘가 얼마나 착실한데요."하고 얼버무린다. 왜냐하면 대부분
의 어머니들
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선생님이 그렇게 주고받는 말을 옆에서 듣는 학생들은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자
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어머니와 선생이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쓸데없는 말
들을 하고
있네.' 아니면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뭐하러 하는지 몰라.' 혹은 '정말 보기 싫어 죽겠
어.', '그런 말을
하다니 누워서 침뱉기지 뭐.'하고 속으로 투덜대곤 한다.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
기 때문이다.
나는 상담이 끝난 뒤에 아이를 따로 불러 물어 보았다.
"상담 시간에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데 왜 그랬니?" 그 학생은 뭔가 할 말을 찾는 듯
하더니
이렇게 불쑥 한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모르겠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
니고 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더더욱 그렇다.
아까 그 학생이 입을 연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무리 선생님 앞이라지만, 엄마가 저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화
가 나요.
어머니도 어머니지만 선생님도 우리 가족문제에까지 파고들어와서 이건 이렇다, 그건 그렇
다고
지도하려 드세요. 그러시는 건 정말이지 참기 힘들어요.'
지나친 간섭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2. 자식을 칭찬하는 것을 꺼리는 마음
여러분은 자라면서 어떤 경우에 어떤 일로 칭찬을 받았는가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때 자신은
어떤 기분이었는지 떠올려 보자
나는 부모에게 제대로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다. 언젠가 아버지가 "그림 솜씨가 좋구나."
라든가 "
세세한 부분까지 잘 그렸구나." 하고 말씀하신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즐겨 보던 잡지에 실린 사진을 베껴 그린 그림이었다. 그때 난 사진을 보고 베낀 것이지 정
말 내 솜씨
로 그린 그림이 아니었기에 굉장히 겸연쩍었었다. 더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칭찬하시는 아버
지가 안쓰럽
기까지 했었다.
아버지도 아버지려니와 어머니도 도무지 칭찬하고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이만하면 칭찬해 주시겠지 하고 기다려도 "그만한 일이야 당연히 해야지."하고 넘겨 버리셨
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렇게 쌀쌀맞은 어머니가 다른 사람은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시곤 했
다.
"훌룡한 아이구나. 너는 효자야.", '기특하구나. 나이도 어린데 생각이 깊기도 하지."하고
당사자에게는
물론이고 나에게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칭찬을 했다.
누군가가 선물을 하면 그야말로 허풍스럽게 인사를 하고 반드시 답례를 했지만, 아들인
내가 선물을
하면 그저 무덤덤하게 받으셨다. 그래서 내가 주워온 자식이기 때문에 귀여워하지 않으시는
건가 하고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고마워, 정말 기쁘구나."라고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 겸연쩍
었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너를 고생해서 키우는데 요런 물건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
하는 심정도
있었던 듯하다. 1910년대에 태어나신 어머니에게는 그런 완고한 구석이 있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좀처럼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어머니가 모성애를 발휘해서 아들인 나의 역성을 들었던 일이 있다. 내가 국민학
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는데 뭣 때문인지 과자를 훔쳤다는 의심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어머니는
얼굴색이 확 바뀌시더니 나를 질질 끌듯이 하고 그 가게로 갔다.
"얘가 내 자식이오. 얘가 댁의 과자를 훔쳤다구요? 잘 보세요, 이 아이가 그런 짓을 할 아
이로 보여요?
남의 집 귀한 외동아들한테 그 무슨 해괴망칙한 말을 하고 그래요!"
어머니는 위세당당하게 큰소리를 치셨다. 어머니는 나는 너를 믿는다고 겸연쩍은 말씀은
하지 않으셨
지만, 무조건 믿어 주셨던 것이다.
3. 칭찬하는 것도 칭찬받는 것도 겸연쩍다.
어린시절에 부모에게 많은 칭찬을 들으며 자랐느냐는 물음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
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니, 어른이 된 오늘날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칭찬을 듣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일부러 ㅇㅇ상이라는 표창규정을 정해 놓고 관청이나 단체에서 정기적으로 사람을 뽑아 표
창하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의 칭찬인심이 얼마나 각박한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칭찬받고 싶어서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평판이나
세상의 평가
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인간이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기
본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A. 마슬로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기표출의 욕구와 사회적 승인의 욕구라는 두 가지의
욕구가
있는데, 이 두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고 한다.
자기표출의 욕구란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고, 사회적 승인의 욕구
란 그 집단
에서 자기 주장이 인정받는 것을 말한다. 개인은 이 두 가지 욕구가 충족될 때 존재감을 느
낀다고 한다.
칭찬받는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심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칭찬받고 싶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다, 다른 사람의 존경
을 받고
싶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좀더 소극적으로 말하면 적어도 남들이 싫어하는 사람은 되
고 싶지 않다
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에게서 외면받을 짓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
떤 일에서나
역시 탁월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칭찬받고 싶다는 욕구를 전면에 내세우면 천박해 보이므로 스스로 나서서 다른 사
람의 장점을
칭찬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인
간의 그릇이
크다. 장점을 칭찬할 줄 아는 사람과 굳이 깎아내리려고 하는 사람의 차이는, 세상을 어떻게
사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타인의 장점을 칭찬하는 사람은 굳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의 장점
을 느끼는 그대로 칭찬하는 것에 만족한다.
4. 겸연쩍어서 칭찬 대신 역정을 낸다
A선생은 학생들을 칭찬하는 일이 없다. 학생이 어떤 대회에서 우승을 하건, 이러저러한
콩쿠르에서
입상을 하건 "정말 잘했어, 축하한다."하고 말을 할줄 모른다. 상장을 줄 때도, "이 정도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너는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야."라든가 "뭐, 이 정도에 상장을 주다니, 하여간
요즘 세상은
너무 얄팍해.",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누구나 그 정도는 했어.", "으시댈 것 없어.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상장을 주는 거니까."하는 식으로 사사건건 사족을 달았다. 학생들이 보기에 A선생
은 인정미라
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A선생은 칭찬하는 게 겸연쩍어서 일부러 엉뚱한
말을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야단을 치는 일이 많다. 개중에는
칭찬을 하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거나 괜히 우쭐대다가 타락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너
무 지나친
기우이다.
사람들이 칭찬에 인색한 까닭은, 그들이 지금까지 올바른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내 자식이건 남의 자식이건 아이들의 좋은 점을 발견하면, 훌룡한 아이구나, 어쩌면
그렇게
훌룡할까 하고 기쁜 목소리로 스스럼없이 칭찬하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다.
반면에 마음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은 마음이 비뚤어져 있어 사고나 느낌이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성격이 비뚤어지고 뒤틀린 사람이 마음이 깨끗할 리 없다.
A선생처럼 언제나 벌레씹은 얼굴을 하고 살면 본인은 물론이려니와 주변까지 어두워진
다. 그런 얼굴
에서 밝은 분위기가 나올 리 없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이 불행해지게
된다.
물론 당사자는 자신이 어둡고 심각한 까닭은 세상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생
각하겠지만.
이윽고 A선생은 반 아이들이 자신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고 눈치껏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
했다. 야단을 치면 처음엔 먼 산을 바라보곤 하더니 나중에는 몇몇 학생들이 반항을 했다.
교사와 학생
간에 반목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A선생은 마음속으로 고민했다.
'적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면 그들을 물리칠 방법이 자연히 떠오를 것이다'라는 옛말이 있
다.
A선생의 경우, 먼저 적과 아군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의 눈으로
현재의
자기모습을 바라보고 학생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가를 실감해야 한다. 이를 가르켜
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A선생 한 사람뿐
만 아니라
모든 부모와 교사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되풀이 해
서 언급할 것
이다.
4편 도무지 칭찬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1. 아이들의 결점만 눈에 들어온다
"칭찬이 좋다는 것은 잘 압니다. 칭찬을 하면 내 기분도 좋아지니, 가능하면 학생들의 잘
하는 점을 찾아내서 그들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학생들과 부딪치며 생활하다
보면, 그들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하고 하소연하는 교사가 적지 않
다.
그리고 "용돈이 궁할 때는 갖은 아양을 다 떨다가도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내가 무슨 말
을 해도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아요. 게다가 말은 그럴 듯하게 하면서도 실천은 하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 꼽자면 한이 없을 정도니 어떻게 칭찬할 마음이 생기겠어요?"하고 하소연하
는 부모도 적지 않다.
어떤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을 칭찬하는 방법에 관한 글을 쓰신다
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거칠고 덜렁대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들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습니다. 이런 교사들이 많다는 점을 참작하시고 글을 써주세요."
이 말이 나를 비난한 것인지, 빈정거린 것인지, 아니면 솔직한 기대를 털어놓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세 가지 모두가 뒤섞이지 않았나 싶다.
사실 국민학생이나 중학생들의 언동을 보노라면 심하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까불고, 제
멋대로 행동하고, 놀기만 좋아하고, 선생님을 무시하고, 딴청을 부리기 일쑤이고, 반항도 하
고, 사람들을 백안시하고, 반발하고... 형편없는 개구쟁이들의 한복판에서 생활하는 교사의
눈에 '칭찬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책이 곱게 보일 리 없다.
2. 내가 겪은 경험
1983년에 나는 A라는 중학교에 부임했다. 학생수가 1,300명에 달하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학교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절도가 없고 제멋대로인 학생들은 처음이었
다. 천박하고 조잡한 말투, 너저분한 복장, 될 대로 되라는 태도, 사람을 의심하는 듯한 눈초
리, 초점없는 눈빛, 흐리멍텅한 표정. 이런 학생들을 칭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
다. 붙임성이라고는 없는 학생들의 언동은 그저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풍겼다. 복장도 머리끝
에서 발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복장부터 그러니 다른 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생들의 거친 마음은 거친 행동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교사인 나의 마음까지 거칠
게 만들었다. 마음이 거치니 학생들의 좋은 점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고 칭찬하고 싶은 마
음도 들지 않았다. 칭찬은 커녕 화내고 야단치기 일쑤였다. 큰소리로 호통이나 치는 나 자신
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억지로라도 감정을 억제하면 스트레스가 쌓였고 그러면 인내가 한계에 달
해 폭발하고 또 폭발했다. 고래고래 악을 쓰며 아이들을 야단치고 나면 내 자신이 너무 비
참해져 자기혐오에 빠지곤 했다. 나는 어떻게든 학생들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초조감에 시달
렸다. 초조감에 시달리니 감정이 불안정해졌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체념해도 불만은 차곡차곡 쌓였고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
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나 자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가질 수 있다면 나의 모든 언동이 차분해
질 것이고, 그러면 차분한 나의 언동이 주위에 영향을 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의 마음도 차분해져서 그들의 언동도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학생들을 변화시키려고 기를 쓸 것이 아니라 교사인 나 자신을 변화시키자. 그것은 나의
의지와 지혜에달려 있다. 그래,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자.'
3. 가장 큰 방해물은 선입관이다.
나는 '자극이 달라지면 반응도 달라진다.' 그리고 '과거와 다른 사람의 마음은 뒤바꿀 수
없다'라는 관점에 입각해서 내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기로 결심했다.
자극이 달라지면 반응도 달라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나의 말과 얼굴표정, 말투가 학생들
에게 자극이 되어 전달된다는 뜻이다. 나는 학생의 반응을 보고 내 의사가 어떻게 전달되었
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느낀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자각하지 않으면 종종 터무니없는 오해가 발생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항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어쨌든, 자극이 달라지면 학생들의 반응도 달라지며, 그것이 새로운 자극이 되어 이쪽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자극이 달라지면 반응도 달라진다는 말의 핵심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현을 하는가, 어떤 얼굴표정을 짓는가에 따라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게 된다.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을 거는 것과, 기분 나쁜 얼굴로 소
리를 꽥꽥 지르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교사가 처음에 주는 자극, 예를 들면 학생의 이름을 호명하는 방식, 그때의 말투, 얼굴표
정 등등이 종합된 것이 바로 자극이지만, 그것은 교사 자신의 기분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학생을 보고 '이 녀석, 또 지각을 했구나. 정말 한심한 놈이야.'라고 상대를
부정적으로 느낀다면, 어떤말을 하더라도 부정적인 감정이 배어나온다.
우리는 왜 그런 선입관을 가지는가? 선입관은 결국 기억의 산물이다. 전에 이 녀석이 이
런 나쁜 짓을 했고, 이런 비행을 저질렀고, 이런 폭언을 했다는 기억에 구애가 되어, 앞으로
도 폭언을 내뱉고 반발하고 반항하지 않을까 미리 예견하는 것이다.
그런 선입관을 깨끗하게 털어낸다면 학생들과의 관계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4. 자기분석을 한다
1983년 당시에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정말 형편없었다. 창피하게도 나는 학교에 출근하기
조차 싫었다. 그래서 이런 비참한 심정에서 빠져나오려고 갖가지 시도를 했다. 아니, 하려고
노력했다. 명상이나 선에 관한 서적, 자율훈련법을 담은 책과 테이프 등등을 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력했다.
그런 노력의 와중에서 내관이라는 심리요법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일 주일 동안 숙박을 하
면서 자기 분석을 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 결과 내가 인생을 살아온 과정을 철저하게 돌아
볼 수 있었다. 그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사물을 느끼는 방식이나 보는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마침내 나는 전혀 새로운 면모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수업중에 내가 복도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줍자 어떤 학
생이 어슬렁 어슬렁 다가와서 말했다.
"교장 선생님, 여기도 휴지가 떨어져 있는데요." "그래? 고맙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
답했다. 예전 같았으면, "뭐라고! 쓰레기가 있으면 냉큼 주워야지!"하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녀석이 나를 조롱했다고 생각했을테니까.
예전에 내가 같은 일로 호통을 친 까닭은, 교장인 내가 손수 휴지를 줍는 것이 대단한 일
이나 되는 듯이 여기는 묘한 자존심, 자기 과시욕에 사로잡혔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장이 휴지를 주으면 주위의 교사나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자기가 휴지를 줍겠다고 나
서는 게 당연하다. 만약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세가 글러먹었기 때문이다. 장유
유서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내가 휴지를 줍는 행동은 예전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심리적으로 억지로
버티는 상태, 체면상의 솔선수범이었다. 내가 쓰레기를 주으면 학생과 교사들도 각성해서 쓰
레기를 주으리라는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 여기도 휴지가 떨어
져 있는데요."라는 말을 들으면 조롱을 받았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5. 자연스럽게 나온 말, '그래? 고맙다'
그러나 2학기에 접어들자 그런 감각이 사라졌다. 굳이 내관이라는 자기분석법에 의해 그
렇게 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나의 감정을 깊이 고찰함으로써 행동의 의미를
자각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여튼 나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래! 고맙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빈정거림에 대한
맞장구도 아니었고 내 인내의 한계를 자랑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아니, 무슨 학교가 이렇게 지저분하지." 학생은 쓰레기를 주워서 휴지통에 넣었다. "고맙
다"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다시 개탄스러운 듯이 말했다. "정말 지저분
하네." "정말 그렇지?" 학생의 말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청소를 해. 어차피 너희들이 어질러 놓은 거니까. 저기 있는 낙서도 너희들 솜씨
잖아!" 라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고맙다"라든가 "정말 그렇지?"라는 말은 상대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거나 상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말이다. "선생님,
여기도 지저분한데요." 이번엔 학생이 소화기호스를 넣어두는 상자를 가리켰다. 그 상자에는
휴지가 잔뜩 들어 있었다. 우리는 상자 속을 말끔하게 치웠다.
"지금 수업중 아니니? 수업을 받으러 가야지?" "알아요. 하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요. 그래도 수업은 들어야지요." 학생은 말을 마치고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모르는 게 있
으면 질문을 해." "알았어요." 쓰레기를 실마리로 해서 불과 1,2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저 학생도 변한 거야. 마음이 밝아진 거지.'하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한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한 것은 내가 그때까지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학생을 대했기 때문이었다.
자극이 달라지면 반응도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저 녀석이 나를 조롱하는 말을 했다고 생
각하지 않고 저 학생이 쓰레기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고 받아들였을 때, 내 마음에는 '
저 녀석'이 아니라 '저 학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6. 잊는다는 것의 중요성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도원 법사의 <정법안장수문기>를 읽었다. 그 책에는 '불법을
배우는 것은 자신을 배우는 것이며,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자신을 잊는다는 것이다.'라는 구
절이 나온다.
나는 이 구절에 내포된 의미를 '교육을 배우는 것은 자신을 배우는 것이며, 자신을 배운다
는 것은 자신의 선입관이나 집착을 잊는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선입관, 집착, 고집과 같은 것에 좌우되면 사물을 올바르게 볼 수 없다. 따라서 학
생들의 장점도 눈에 띄지 않게 된다. 그저 천방지축으로 행동하기만 하는 듯이 보이는 학생
들에게도 장점은 얼마든지 많다. 다만 우리의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장점이 보이지 않으므
로 언제나 그 학생을 부정하게 된다. 그리고 학생은 자신을 부정하는 교사를 부정하게 된다.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부정하면 자신도 상대를 부정하게 된다.
나는 내관이라는 자기분석법에 힘입어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상대
의 언동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해석이나 억측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상대를 보는 게 아니라 상대의 언동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느낄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학생들의 모습이 점차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초조와 불안과 분노
를 억제하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는 따위의 행동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렵고 싫은 것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것을 느끼고 생각
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렇게 때때로 자신을 되돌아보면, 상대를 부정하는 일이 없
어진다. 상대를 부정하면 상대도 나를 부정하게 된다. 대개의 대립은 나의 부정적인 마음으
로 인해 일어난다.
게다가 상대를 부정적으로 느끼면 본인의 마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부정적인 마
음에 안정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안정이 된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상대의
장점에 공감을 느끼고 상대를 칭찬하는 일 따위는 생길 수 없다.
선에 '부드러운 얼굴 사랑스런 말투'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나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면 자기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 애정어리게 들린다'라고 해석
한다. 나는 바로 이 점을 내관이라는 자기분석의 훈련을 통해서 체험적으로 배웠다.
제3장 산뜻하게 칭찬하는 방법
1편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가
1. 세 가지의 마음가짐
사람들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자연스러운 마음과 태도로 상대를 칭찬할 수 있기 위해서
는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고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는가?
먼저, 느긋한 기분으로 마음에 여유를 지녀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신경이 날카롭고 화가 난 사람의 눈에 상대의 좋은 점이 들어올 리 없
다. 상대를 칭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과 태도로 상대의 좋은 점을 칭찬하
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풍요롭고 느긋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사실 이와 같은 문제
엔 어떤 뾰죽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 있는가를 의식하는 것과 의
식하지 않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무언가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말하는 것은 온통 불평과 불만뿐이다. 다른 사람
의 결점, 약점, 흠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그 점이 틀려먹었다, 그것이 불충분해,
그런 점이 모자라,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등등 만사를 불만스럽게 표현한다.
만사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니 상대와의 관계가 소월해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런 체험
이 있기 때문에 불만을 말하고 싶어도 꾹참게 되고 이런 식으로 자기일치가 이루어지지 않
으니 알게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똑같은 행위를 보고도 불평이 많은 사람과는 다르게 느낀다. 마음
에 들지 않는점을 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볼줄도 안다. 그래서 적절한 균형이
잡힌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말하자면 여유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머리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연예인들이나 입는 복장을 하고 등교를
했다고 하자. 마음의 여유를 지닌 교사라면, 저 녀석 옷을 참 희한하게 입고 다니네 하고 생
각한다. 그리고 저 녀석 어떤 마음으로 저런 복장을 하고 다닐까? 남의 눈길을 끌고 싶은
게로구나. 남의 눈길을 끌고 싶다는 건 어떤 욕구일까하고 생각을 발전시킨다. 거기서 더 생
각이 나아가면,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유아기질이 있구나라든가 인간에게는 깜짝상자로 상대를 놀라게 하려는
장난기가
있는 법이야. 그렇다면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오히려 녀석의 어깨를 으쓱거리게 만들겠는걸
하는
정도로 발전한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막돼먹은 자식, 저런 차림으로 학교에 오다니! 학교 전체로 퍼지면
큰일이니
당장 혼구멍을 내야겠다! 하는 식으로 시야를 한정시키고 허풍스런 위기감을 가지지 않는
다.
학생들의 엉뚱한 행동이나 이상한 말을 접하더라도 그것이 그 학생의 전부인 양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여기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위기감을 갖지 않는 게 좋다거나 허풍스럽게 행동하지
않는 쪽이
좋다는 차원이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교사의 마음의 여유를 문제로 삼고 싶다.
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 다음 세 가지 마음가짐을 항상 실천한다.
첫째, 하루에 열 번은 '감사합니다'하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는다.
둘째, 봉사는 아무도 모르게 한다.
셋째,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은 듣기 좋은 이야기를 준비해서 들려준다.
자, 그러면 위의 세 가지 마음가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나하나 설명하겠다.
첫째, 하루에 열 번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는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상대의 언동을 받아들이는 말이다. 상대의 언동을 받아들이겠다는 마
음이
없을 때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거꾸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의 언동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그것을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표현하겠다는 태도이다.
예를 들어, 교사가 학생에게 어떤 일을 부탁하는 경우가 있다. 분필을 갖다 달라든지, 수
업교재를
갖다 놓으라든지, 체육관으로 의자를 나르라든지, 청소를 하라든지, 교구를 정돈하라든지, 헤
아리자면
한이 없을 정도이다.
이 중에서 한 가지 골라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가령, 어떤 학생이 교사가 교실에 놓고
온 교구를
교무실에 갖다 주러 와서는 교사의 책상에 탁 던졌다고 하자.
그럴 때, 교사는 대뜸 "아니, 이게 무슨 벼르장머리없는 짓이야! 이따위 버릇을 어디서 배
웠어!"하는
식으로 야단을 친다. 야단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야단을 맞는 학생은 금세 뾰루퉁해진
다.
그러면 교사는 또 "뭐야, 뭘 잘했다고 입을 내밀어!"라고 면박을 준다. 그런 다음에야 "어른
에게 물건을
드릴 때는 이러저러하게 하는 거야!"라고 물건 건네는 법을 지도한다. 그러나 학생은 여전히
입을 내민
채 선생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만다. 이와 같은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심부름을 시켜 놓고 잔소리를 한다고 떫은감을 씹은 듯한 감정이 든
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할 것이지'라는가 '학생이라고 함부로 시켜도 되는 거야'하는 불평이 입 안
에서 빙빙
도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가 학생에게 부탁을 했다면, 학생이 어떤 방식으로 건네 주었던지간에 일단 "
고마워"라든
가 "수고했다"라고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런데 말이다, 어른에게 물건을
건넬 때는
이렇게 하는 거란다"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학생도 그 말을 새겨듣게 된다. 자극이 달
라지면
반응도 달라진다. 먼저 고맙다 혹은 수고했다와 같이 학생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말을 건네
면, 교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학생의 반응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사는 고맙다라든
가 수고했다
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상대의 행동을 너그럽게 받아들인 다음에 지도를 시작해
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루에 적어도 열번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보자고
한 것이다.
둘째, 봉사는 아무도 모르게 한다
예를 한 가지 들어 보자. 파손된 기물을 관리인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고쳤다고 치자. 나는
그 사실을
조회시간에 교직원들에게 소개할 때, "관리인 아저씨가 3층 문이 부서진 것을 고쳐 주었습
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관리인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고치도록 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두 가지 말은 모두 똑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이 말을 듣고 보이는 교직원들의 반응
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교직원들은 관리인을 만나면, "아저씨 덕분에 학교가 늘 깨끗해요. 정말 감사
합니다."라고
인사말을 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고 나서 그 일의 노고를 남에게 돌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내가 했
지요.",
"누가 했겠어, 바로 나지."와 같은 자화자찬은 듣기가 거북하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노고를
소개하면서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산뜻한 기분을 맛보
게 되고
분위기도 부드러워진다.
이 점은 가정교육이나 학생지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봉사는 남모르게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행한 봉사는 서슴없이 소개하고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
어야 한다.
단란한 가정에서는 대체로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은연중에 아버지의 위신을 세우는 말을
한다.
"아버지는 너그럽고 성실한 분이야. 게다가 믿음직한 분이기도 하시지." 아버지 쪽도 마찬
가지이다.
"엄마는 자신보다도 나나 너희들을 더 깊이 생각하신단다. 엄마는 정말 좋은 분이야."
이렇게 어머니의 위신을 세워 준다. 부부 사이가 원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의 위신을 세
워 주는
걸까, 아니면 서로 위신을 세워 주기 때문에 부부 사이가 원만한 걸까. 아마 양쪽 다일 것이
다.
이것은 얼핏 보면 상대의 위신을 높이는 듯하지만, 사실은 스스로의 위신을 높이는 결과
가 된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이란 그만큼 그릇이 크고 아량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
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부모를 보면서 이 점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보는 사람마다 푸념을 늘어놓고 험담을 일삼으며 욕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말을
듣기도 거북하고 듣고 나서도 기분이 좋지 않다.
사람은 정말 재미있는 존재이다. 입으로는 "난 정말 왜 이런지 몰라. 머리도 나쁘고 얼간
이에다
바보 멍청이야..."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옆의 사람이 맞장구를 쳐서 "정말 너는 멍청하기 짝
이 없어."
라고 말하면 벌컥 화를 낸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다.
다른 사람이 잘하는 점을 인정하고 고마움을 표하면 주변 사람들도 안정이 되고 말하는
당사자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렇게 되면 말하는 당사자도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그것이 인간심리의 본질
이다.
이 점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무실 분위기가 그 녀석은 지긋지긋해, 그 반은 너무
엉망이야와
같이 결점을 늘어놓고 미운 감정을 강조하는 쪽으로 흐르면 교사 자신도 심리적으로 안정을
잃는다.
그러면 학생들의 장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이것은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불행이 아
닐 수 없다.
학생들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하는 교사의 지도를 받는 아이들의 마음이 안정될 리 없다.
학생들이 "
그 선생님 시간에는 불안해서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아요."라고 하소연하는 일이 많이 있다.
교사가 먼저 학생들의 장점을 발견해서 그들을 치켜세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결점이 조금
있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덮어 주는 자세를 취하면 학생들도 "우리 선생님이 최고야!"하고 선생님의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한다.
이 경우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원만하기 때문에 서로 상대를 치켜세우는 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그런 말을 서로 하기 때문에 학생과 교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걸까. 이것 역시 양
쪽 다 일 것
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사와 학생 사이에 좋은 관계가 맺어지는 밑바탕은 학생
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교사의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셋째,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은 듣기 좋은 이야기를 준비해서 학생들에게 들려준다.
교사가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도 좋아할 뿐 아니라 교사 자신의 기분도 부드러워
진다.
고함지르고, 야단치고, 결점을 지적하면서 불평하고, 잔소리를 퍼부어대면 듣는 학생도 학생
이려니와
말하는 교사의 기분도 좋을 리가 없다.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은 의도적으로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노력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좋은 점을 찾아내야 한다. 책을 읽을 때나 텔레비전을 볼 때도 인간의 좋은 점을
잡아 내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은 듣기 좋은 이야기를 준비해서 들려 준
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내 생각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교장실통신'이라는 편지를 학생과 학부
형, 그리고
교직원들에게 보낸다. '교장실통신'은 평범한 8절지 시험지에 쓰며, 일 주일에 한두 번 정도
보낸다.
원고지로 일곱 장 정도의 양이며, 내용은 학생들을 보고 느낀 감상과 교육에 관한 나의 견
해, 발전적인
이야기 등 갖가지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내용은 다르지만 어쨌든 좋은 정보나 좋은 이야
기가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일주 일에 한 번은 전교생들을 상대로 3분에서 5분 가량 훈시를 한다. 이 훈시
의 내용을
발전시켜서 '교장실통신'을 쓰는 일도 있지만, 전혀 별개의 내용을 쓰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사소하더라도 학생과 교직원들의 위신을 세우는 이야기를 하려고 애
를 쓴다.
따라서 편지를 쓸 대도 단어를 선택할 때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 학생들의 마
음에 와
닿도록 세심한 신경을 쓴다.
일 주일에 한두 장의 '교장실통신'을 쓰느라 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좋은 이야기를 준비
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굳이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지는 않지만, '교장실통신'을 이야기투로 쓰려고 하
는 편이다.
글을 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쓰고, 그리고 쓰면서 말하고, 말하면서 쓰면서 나의 생각
을 글로
만든다.
한 번 쓴 글은 반드시 소리를 내서 다시 읽어 보는데 그냥 읽는 게 아니라 내 나름대로 감
정을 넣어
읽는다. 감정이 이입된 읽기이다. 눈앞에 학생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
며 나의
마음을 호소한다는 기분으로 읽는다. 그것은 내 나름대로의 읽기 훈련 혹은 훈시의 준비라
할 수 있다.
읽다가 보면 어색하거나 더듬거려지는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은 대부분 지나치게 문어체이
거나
하나의 문장이 너무 길거나 비슷한 발음이 반복되는 부분이다. 이런 부분은 수정하면서 몇
차례나
반복해서 읽다 보면 원고가 일단 완성된다. 바로 이것이 내 나름의 좋은 이야기의 준비이다.
2. 스스로의 마음을 안정시켜라
지금까지 나는 내가 늘 염두에 두고 생활하는 세 가지 마음가짐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그것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다 보면, 그 연장선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파생된다.
예를 들어, '교장실통신'에 조금만 감상을 곁들이면 개인적인 편지가 된다. 내가 보낸 감
사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 날아오고 전화가 오기도 하기 때문에 상당히 바빠진다. 그 가운데는 상담을 위
한 편지나
전화가 오기도 하며, 직접 상담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어려운 점에 직면한 교사가 상담을 요청해왔는데 시간이 충분치 못
할 때에는
그 교사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 학교의 교사를 상대로 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같은
학교에
있으면서도 여유를 갖고 상담할 시간이 나지 않는 경우가 뜻밖에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서
로 편지로
심경을 나누다 보면 상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의
기분도
이해할 수 있다는 실감이 새삼스럽게 들게 된다.
문제학생과 편지를 주고받는 일도 있다. 실제로 편지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문제학생이 스
스로의
문제를 발견해서 다시는 비행을 저지르지 않게 된 사례도 있다.
학생과 학부형과 교사에게 참고가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나 비디오를 소개하거나 경
우에
따라서는 빌려 준 일도 있다.
"그런 경우라면 ㅇㅇ선생님도 고심하고 있어요."라고 소개를 해서 교사끼리의 토론을 추
천하거나,
때로는 그 대화에 끼어들어 대화의 내용에 깊이를 더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개개인의 문제에 쓸데없이 너무 깊게 개입하지는 않는다. 교장이라는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얼마든지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상담을 요청받으
면 최선을
다해서 상담에 응하지만, 내 쪽에서 이렇다저렇다 답을 주지는 않는다. 이것은 아직 수양이
모자라서
그런지 내 나름대로의 해석이나 생각을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지러울 때가 있는 나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학생은 물론이려니와 학부모나 교직원들까지도 가능한한 잘 살피려고 한다. 그들
은 잘 모르면
칭찬할 수 없기 떄문이다. 상대를 잘 살핀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잘 살핀다는 뜻이다. 이
것은 나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과도 연결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항을 바꿔서 살펴보도록 하
자.
전체적인 문제나 과제라고 느끼는 것은 '교장실통신'에서 다룬다. '교장실통신'에는 '대화
의 실마리'라
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상과 같은 것이 나의 실천사항이다.
'노력하는 것은 좋아하느니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느니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지금
까지 설명한 내용들을 즐겁게 실천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2편 잘 살핀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상대를 잘 살피는 일의 어려움
앞에서 나는 '학생들은 물론이려니와 학부모나 교직원들까지도 가능한 한 잘 살피려고 한
다.
그들은 잘 모르면 칭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를 잘 살핀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잘
살핀다는
뜻이다.
이것은 결국 나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과도 연결된다.'라고 말했다. 여기에서는 이 점
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
끼는가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음미한 일도 없지 않을까 싶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과
도 같아서
스스로 직접 볼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자신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렇다면 당신은 아무런 견해도
없이 세상을
산다는 말입니까?"하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는 않지만, 잘 모르
겠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그럴까.
교사는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감상을 글로 쓰도록 시킨다. 새학기를 맞는 감상, 독후감,
소풍을
다녀온 감상 등등. 그러나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런 감상을 쓰라고 시키면서도 정작 본인은
글을 쓰지
않는다. 학교신문에서 일 년에 한두 번 원고청탁을 해도 교사들은 꽁무늬를 빼기 일쑤이다.
내가 무슨 글을 쓰겠느냐든가 글재주가 워낙 없어서 라는 궁색한 핑계를 대면서 거절한다.
진지한 자세로 감상문을 써보면 자신이 어째서 글을 제대로 못쓰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어째서
자신이 세상을 표면적으로밖에 보지 못하는가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어제 경험한 일을 글로 써보는 거다. 어떤 일이라도 좋다. 인상에 남는
일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써보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견해, 느낌, 사고를 스
스로 깨닫겠
다는 심정으로 써보는 거다.
이것을 실행하면 자신이 얼마나 사물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가를 알 수 있다. 나아가 자세
하게 살피는
것, 잘 살피는 것이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인가도 한 끄트머리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
이다.
..
2. 스케치를 하면 잘 보인다
친구 몇 명과 여행을 떠난 일이 있었는데 어디를 가더라도 틈만 나면 스케치북을 펼쳐놓
고 연필로
스케치를 하는 친구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사진을 찍을 때 그 친구는 어느 한 곳에 시선
을 집중하고
는 열심히 연필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스케치를 하면 사물이 잘 보이는 법이야."하고 혼잣
말을 했다.
내가 그 말에 찔끔했던 까닭은 조금이라도 경치가 좋고 신기한 곳이 나오면 정신없이 사
진을 찍어대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만 찍어대던 내 행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니 내가 사물
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사진은 한순간 셔터를 누름으로써 경치를 박제해 버린다. 사진 전문가라면 모를까 사진에
대해선
문외한인 나로서는 사진이 경치를 감상하는 방법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스케치를 하는 것
만큼 잘
살필 수는 없다. 무턱대고 셔터를 찰칵찰칵 누를 뿐 사물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보고도
보지 못하거
나,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결과가 된다는 반성이 들었다.
교사는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관성적으로 학생을 살핀다. 관성적으로 학생을 대하면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틀에 얽매여 학생을 본다. 더구나 자신의 틀을 깨닫지 못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가 무조건 옳다고 잘못 확신한다. 이렇게 그릇된 확신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지나친 자신감은 자신감이 결여된 애매한 태도보다 훨씬 나쁜 영향을 미친다.
3. 읽기, 쓰기, 그리기에도 깊이의 차이가 있다
글을 읽는 방법도 사진과 스케치만큼의 차이가 난다. 사진을 찍듯이 읽으면 표면만을 훑
다가 만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에는 무언가가 재미있어서 키득거리지만 책을 덮고 나면 남는 게 아
무것도 없다.
책을 보다 깊이있게 읽으려면, 주인공의 심리 변화나 작가가 호소하고자 하는 주제를 잡
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책의 깊이를 음미하면서 읽는 독서법을 나는 스케치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싶다.
스케치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가볍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스케치에
상응하는
독서법은 한 글자 한 글자, 어구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를 생각하고 문맥을 이해하
고 나아가
작가의 생각을 음미하면서 읽은 방법이다. 꼼꼼이 읽고 되풀이 해서 읽는 독서법인 것이다.
이것을 정독이라고 말해도 좋다.
보다 잘 살피기 위한 독서법은 읽는 글을 그대로 한번 써내려가는 방법이다. 작가는 대개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 봄으로써 그 분위기를 음미한다고 한다. 베끼는
과정에서
그 작품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한다.
이것은 명화라고 일컬어지는 그림을 베껴 그려 봄으로써 그 작품의 숨결을 맛보는 것과
같은 이치
이다. 베껴 그리기 위해서는 그 작품을 꼼꼼하게 살핀 뒤에 그림을 그린 작가의 심정이 되
어 붓끝을
놀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작가의 숨결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기법이나 필치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 만큼
미술애호가를
설레이게 하는 일은 없다. 글을 통째로 베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쓰면서 '아, 작가는 여기
이 부분을
이런 심정으로 썼구나.'라든가 '아, 여기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하는 식으로 그 작
품을 쓸
당시의 작가의 심정에 젖어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글읽는 힘이 붙게 되고, 나아
가 스스로
글을 쓸 수 있는 힘도 길러진다.
4. 스케치식으로 글을 쓰는 것은 마음의 묘사이다
그리고 보니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책을 읽을 때 크게 소리를 내서 읽었다. 소리를 내
서 읽으면
눈으로 읽을 때는 깨닫지 못하는 문장의 형태나 리듬, 그리고 억양을 실감할 수 있다.
소리내어 읽는 이 방법도 스케치식의 읽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나 산문은
특히 문장의
가락이나 운율에서 미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음악을 예로 들자면, 처음에는 좋아하는 곡이나 리듬을 흥얼거리면서 따라하지만 거듭해
서 흉내내는
동안 자기 나름의 영역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도 말하자면 스케치식의 방법이 아닐까.
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쓰면서 계속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자신에게 계
속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이런 말로 쓰는 네 심정은 무엇이지?' '아니야, 억지로 기분을
자아내려고
하고 있어.' '거짓, 꾸며내기, 아첨 따위로 읽는 사람들에게 영합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나?'
이런 자문으로 자신을 몰아붙인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는 괴롭다. 그러나 괴롭기 때문에
글쓰기는
자신을 단련시키는 행위이다. 자신을 단련시키지 않는 글쓰기는 허접쓰레기에 불과하다.
5.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견해를 알자
자시상이 변하면 인간관계도 변한다. 삶의 방식이 변하고 그에 따라서 상대가 받는 느낌
이 변하면
인간관계가 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화의 방식도 변하게 되는데 이
것 역시 지금
까지와는 다른 인간관계를 맺게 만든다. 커뮤니케이션이란 결국 인간관계로 귀착되는 것이
다.
그 사람과 있으면 왠지 즐겁고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일이라도 터놓고 이야
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바로 그런 사람을 두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반면에 함께 있으면 어쩐
지 마음이
불편한 사람도 있다.
조금 전에 '어떤 일이라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것은
결국 '마음을
쏟아놓은 사람'을 의미한다. 마음을 쏟아놓으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선에서
쓰는 말 중에
'집착을 떨치라'는 말이 있다. 물론 이 말은 범인이 실천하기에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자신의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 집착, 아부 따위를 떨치면 심리적으로 대단히 편안해진다.
편안하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거리가 짧아지고 사람끼리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
다고 해서
인간관계의 거리를 제로로 줄이라는 뜻은 아니다. 거리감이 제로라는 것은 밀착된 상태를
뜻하며,
밀착상태에서는 마찰이 생긴다. 1밀리라도 틈이 있으면 마찰은 생기지 않는다. 이를 일러 여
유라고
부르는데 인간관계에도 여유가 필요하다.
유리와 같은 딱딱한 재료가 딱 달라붙으면 한쪽이 움직일 때 다른 쪽도 따라 움직여 양자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고 이것이 내력이 되어 남는다. 바로 스트레스이다. 그것이 한계를 넘어서면
마침내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부드러운 관계, 양자 사이에 마찰이 없는 관계에서는 균열이 생기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딱딱하기 때문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지한 자세로 학생을 지도하는 교사일수록 학생과 갈등이 자주 일으켜, 신경
이 날카로워
지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자세로 열심히 노력하는 교사에게
는 절로 고개
가 숙여지지만 상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면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지기도 한다. 그
야말로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오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진지한 인물은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을 품는
일이 많다.
스스로 '이래서는 안 되는 데, 좀더 아량을 지녀야 하는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영
개운치가
못하다.
마음이 올곧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의 허튼 행동을 보고 쉽게 화를 낸다. 너무 단단하
기 때문에
균열이 생기기 쉽다고 하면 '단단한 게 왜 나빠, 균열이 조금 생기면 어때!"하고 항의한다.
6. 유연한 사고, 넓은 아량을 갖자
이런 성격의 사람들은 대체로 사물을 좋고 싫다는 이분법으로 판단한다. 나 역시 진지하
고 있는 힘껏
노력하려고 하지만, 그 때문에 아량이 좁은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나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도 어느 정도는 있으리라고 사료된다.
술주정은 널리 봐주면서 금전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융통성이 없다든지, 아니면 금전관계
는 허술하면
서도 옷차림이나 예의범절에 대해서는 깐깐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인간의 아량에는 하나의
경향과 습벽
이 있다. 자신은 추레한 잠바 차림이면서 학생들에게는 "복장이 그게 뭐야!"하고 소리치는
교사도 있다.
나는 어떤 일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그 까닭은 무엇인가, 또 어떤 일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왜 그런가 따위를 곰곰이 따져보는 것이 자기분석으로 연결된다.
자신의 심리가 보이는 경향을 자각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뜻
이다.
따라서 느닷없이 고함을 지른다든지 다짜고짜 주먹이 올라가는 일은 없어진다. 교사들은 모
두 교육분석
이라는 정신분석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교육분석을 받으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다. 자신의 느낌과 사고의 경향이 어떠한
가, 무엇에
집착하는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는 심리적 배경을 깨달아 자신의 무
의식을 의식
화함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자세를 알아내는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자세를 알면 굳어 있던 마
음도 풀리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부드러워진다.
7.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 피상적으로 밖에 알지 못한
다. 교사의
자세라는 것이 있다. 애송이 교사였을 무렵, 나는 선배 교사들에게 교사의 마음가짐과 자세
에 대해
배웠다.
ㅇ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수업하지 말 것.
ㅇ 복장은 단정히. 원칙상 양복에 넥타이 차림의 정장을 할 것.
ㅇ 멋부리지 말고 단정할 것.
ㅇ 머리를 단정하게 할 것.
ㅇ 칠판 앞에서 왔다갔다하지 말 것.
ㅇ 학생들에게 담배냄새를 풍기지 말 것.
ㅇ 항상 등을 곧게 펼 것.
등이 주요내용이었다. 교사의 몸가짐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거울이었다. 오늘날에도 위와 같
은 교사의
자세는 지켜져야 한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특유의 느낌이 전해진다. 좋은 느낌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
쁜 느낌을
받으면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교사는 위에서 말한 교사의 자세를 포함해서 자신이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아
야 한다.
학부형과 학생이 교사인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자신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는가를 아
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입구이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방법에는 직접적인 방법과 간접적인 방법이 있다. 두 가지를 꼭 구별
하여 논할
필요는 없지만 여기에서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편의상 직접적인 방법부터 설명하기로 한
다.
8. 자신을 되돌아본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직접적인 방법은, 자신의 모습을 실제로 거울에 비춰보는 것이다. 자신
의 복장,
머리모양, 얼굴표정과 같은 외양을 밖에서 바라보았을 때 어떻게 보이고 어떤 느낌을 주는
지를 살피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말을 풀어나가는 방법, 말투, 목소리 등에 대해서는 자신의 말을 녹음해서 들으면 좋다.
녹음된 자신
의 말을 듣는 것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외모를 보는 것과 같다.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옮기는 것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방법 중의 하나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을 읽어
보며 고치는 작업 역시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
쓰기를 싫어
한다. 협의회나 연구회 따위의 공식모임에서 정식으로 발언을 하거나 어떤 정리된 생각을
발표하는
것도 가능하면 피하려고 한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이얘기 저얘기 수다를 떨다가도 조
금만 색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긴장을 한다. 전화통을 붙잡고 되는 얘기 안되는 얘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
는 사람도
편지를 쓰라고 하면 꽁무늬를 뺀다.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글을 쓰면 자신이 쓴 글이 남고, 그것
을 스스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이 쓴 글을 읽는 것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거나
자신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자기자신의 모습을 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점잔빼는 사람이
쓴 글은
점잖은 척하는 모습이, 자기변명을 일삼는 사람이 쓴 글은 자기 변명투성이의 모습이 글 속
에 확연히
드러난다. 어리석은 사람, 속좁은 사람의 글도 그 사람의 인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다른 사
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없다.
사람들은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쉽다고 의식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고역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말하는 것이 쓰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신
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설명하면 알아듣겠거니 생각한다. 말솜씨에도
차등이 있어
서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의식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말하기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쉽게
생각한다.
한 번 쓴 글은 다시 보고 고칠 수 있다. 필요 없는 말은 지우고, 추가하고 싶은 말은 더
넣으면서
퇴고할 수 있다. 시간을 갖고 충분히 검토해서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고 여길 때까지는 발표
를 늦출수
있다. 그러나 말은 그렇지 않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어담을 수 없다. '지금 한 말은
나의 실수입
니다. 취소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 상대의 용서를 구한다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석연치 않
은 응어리가
남는다.
말하는 방법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자기훈련을 하고자 하는 교사는 의외로 많지 않다. 뿐
만 아니라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학생들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든가 학생들의 능력
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수업을 녹음한 내용을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뭔가 정리된 이야기를 할 때는
소형녹음기에
녹음을 해두자. 그리고 나중에 혼자서 그 녹음내용을 들으면 자신이 한 말을 들을 수 있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결과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말이 담긴 녹음내용을 듣고 창피하다는
생각에
쥐귀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교사들 중에는, 뭐하러 힘들게 녹음을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말
하면서
자신의 의사전달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보면 게으른 사
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저 선생님의 수업은 정말 재미있어'. '저 선생님의 말씀은 참 유익해'. '저 선생님이 수업
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라'하고 평가받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그 선생님 시간이다, 아이구 지
겨워라',
'저 선생님은 뭐라고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하고 학생들이 진저리를 치는 교사
도 있다.
보다 나은 강의를 하고자 자기훈련을 하는 교사, 할 말을 준비하고 말솜씨를 갈고닦는 교사
가 있는
반면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느끼는 대로 즉흥적으로 떠들면서 시간을 때우는 교사도 있다.
이런 차이는 단순히 수업의 차이만을 낳지 않는다. 교사로서 삶을 대하는 자세의 차이, 학
생과 학부형
의 신뢰를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 하는 차이, 인간의 덕성을 쌓는가 쌓지 못하는가의 차이로
연결된다.
'저 선생님의 구수한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저 선생님의 수업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라고 학생들
이 고대하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성실성이 필요하다.
수업의 기본은 말솜씨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면서 말솜씨의 매력을 소홀히 여기는 교사는
교사의
자격이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알아보기 쉬운 문장이 있듯이 알아듣기 쉬운 말이 있다.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말솜씨도 있다.
반대로, 어딘지 듣기 싫은 느낌을 주는 말솜씨가 있는가 하면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주위
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말도 있다.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솜씨도 연구하고 훈련해야 한다.
일단 연구하고 훈련해야겠다는 자세를 갖추면 배울 수 있는 실마리는 얼마든지 있다. 동
료의 말솜씨
로부터 배울 수도 있고, 좋은 강연을 듣고 자신의 말솜씨를 키울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거
울삼아
나 자신을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간접적인 방법이다.
다른 교사의 교무일지를 읽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하나의
방법이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화술에 관한 테이프를 사서 공부하며 자신의 말투를 생각하는
것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방법의 하나이다.
중요한 것은 자발적으로 자기연마를 하는 것이다.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지 말고 배우고
또 배우자.
이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인생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3편 긍정적인 이미지를 암시한다
1. 타자암시와 자기암시
암시에는 사람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규정하는 힘이 있다. 날마다 '오늘은 건강해 보이
는군요',
'안색이 참 좋으신데요'라는 말을 들으면 실제로도 건강해진다. 가벼운 병에 걸렸다면 병이
저절로 낫는
일도 있다. 반대로 '어디 안 좋으세요?', '낯빛이 나빠요'하는 말을 되풀이해서 들으면 정말
로 기운이
떨어진다. 심인성 질병에 걸리는 일조차 있다.
암시를 할 때의 철칙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색을 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슬며시 파고들어야 한다. 낯빛이 안 좋다는 말을 듣더라도 한 사람이 정색을 하고
하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볼 때마다 그런 말을 한다면 훨씬 마음에 걸린다. 텔레비전 광
고의 효과와
같은 이치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동물, 나아가 스스로 생각한 바에 따라 행동하고 싶어하는 동물
이다.
'이것은 내 스스로 생각해낸 아이디어다.'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앞장서서 그것을 행동에 옮
긴다.
타자가 한 암시가 자기암시로 발전한 경우, 그 암시의 효과는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암시에는 부정적인 암시와 긍정적인 암시가 있다는 사
실이다.
말할 나위 없이 불평하고 거부하는 말은 부정적인 암시가 되며, 칭찬하고 인정하는 말은 긍
정적인
암시가 된다.
부모와 교사가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이래서는 곤란해, 아직도 노력이 부족
해 하며
부정적인 부분을 강조하면, 그것은 부정적인 암시로 연결이 된다. 그러면 학생들이 나는 아
무리 노력해
도 안 되는 놈이야, 역시 나는 머리가 돌대가리야, 나는 집중력이 모자라, 끈기가 없으니 틀
렸어 하고
자기 암시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부정적인 암시를 할 때는 특히 주의해야 하며,
이런 이유
때문에 교육이 칭찬 위주로 이루어져야 한다.
2.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한다
부모나 교사는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암시를 주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긍적적인 암시를
주기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학생들의 장점을 찾아내서 그것을 강조하다 보면 교
사들도
자신의 견해를 좋은 쪽으로 넓힐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긍정적인 암시를 주는 효과를 낳
는 것이다.
기업재건의 귀재로 일컬어졌던 한 기업가는 '쓰면 쓸수록 늘어나는 것은 지혜와 빛이다'
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빚을 함부로 지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지혜에 대해서는 별다
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는 쓰면 쓸수록 늘어난다'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관점이라는 사
실을 인식해
야 한다. 나는 여기서 '어떤 생각을 마음속에 두면 둘수록 그 생각은 늘어난다'는 점을 강조
하고 싶다.
상대의 장점을 깨닫고 그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장점은 늘어나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단점과
결점을 들추기 시작하면 단점과 결점만 끝없이 눈에 띄고 장점은 전혀 시야에 들어오지 않
는다.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면 마음이 더욱 부드러워지고,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면 친절심이 점
점 늘어나
안정된 사람이 된다. 상대의 장점을 찾아내서 그것을 칭찬하면 자신의 마음까지 풍요로워지
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를 밉게 여기면 마음속의 미움이 점점 늘어나 자신의 마음도 거칠어진다.
그러나 마음은 실체가 없는 것, 손으로 보거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역이다. 느낌만의 영
역, 느낌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영역에 있는 것이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중요하다.'라는 말의 의미도 이 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느끼는가이다. 자신의 감성이 중요한 것이다. 상대가 이쪽의 감성을
어떻게
느끼는가가 중요하다. 본인 스스로 아무리 나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주장해도 주
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성격이나 품성은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
대가 느끼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내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느끼는가가 상대와 나와의 관계를
결정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나는 기력과 체력, 표현력, 공감, 수용, 포용력을 기르는 것을 나를 연마하
는 토대로
삼고 있다.
3. 교사는 평소에 어떤 말투를 써야 하는가
자신은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자부심, 자신은 나름대로 좋은 교사라는 자부심, 자만이
아닌,
겸허하고 몰래 감추어둔 자부심은 교사로서의 여유를 낳는다. 교사로서 여유가 있을 때 학
생들의
장점도 눈에 잘 들어온다. 교사로서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분야에 자신감이 생기면 다른 분야까지 자신감이 확산된다. 이것은 곧 한 가지 재
능이 다양한
재능으로 발전된다는 의미이다.
자신감과 자만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교사가 자신감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스스로
자신감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자만에 빠져 있다고 말해도 좋다. 자신감이 있다고
들떠서는
안 된다. 교사는 겸허해야 하며 수행을 거듭해야 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침시간, 학생 몇 명이 모여 잡담을 하고 있다. 시작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와도 이야
기는 쉽게
멈춰지지 않는다.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슬금슬금 자리로 돌아가는 학생도 있고 아직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어서 아쉬운 표정을 짓는 학생도 있다. 늘상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들
의 태도를
보고 교사인 당신은 뭐라고 말하는가.
"야, 아침부터 참 활기차구나.", "아이구, 귀 따가워라, 즐거운 일이 있나 보지."하고 싱글
벙글 웃는
교사도 있을 것이고, "뭐야, 조용하지 못해. 시작종이 울렸으면 자리에 앉아야지!" 혹은 "야,
이녀석들아,
나이가 몇 살인데 어린애처럼 떠들어. 한심한 녀석들!"하고 면박을 주는 교사도 있을 것이
다. 이렇게
출발부터 크게 다르다. 학생들을 대하는 출발이 다르다는 것은 교사 자신의 출발이 다르다
는 뜻이다.
자극이 달라지면 반응도 달라진다. 교사의 말투는 학생들에게 자극으로 작용하고 나름대
로의 반응이
돌아온다. 그리고 그 반응이 교사에게는 자극이 된다. 부정적인 자극을 주면 상대에게서도
부정적인
자극이 돌아온다.
학생들의 똑같은 얼굴을 보고도 "야, 얼굴이 밝은데! 싱글벙글 웃는 걸 보니 뭐 신나는 일
이라도
있나 보지?"라고 말하는 선생이 있는가 하면 "무슨 일 있어? 왜 그렇게 풀죽은 얼굴이야?",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아침부터 왜 그렇게 축 처져 있나?"하고 말하는 선생도 있다. 이것은 양극
단이지만,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반응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학생이 어떤 일을 했을 때도 "야, 단단히 결심했구나.", "정말 수고했구나."라고 인정하는
말투와
"뭐야, 아직 멀었어.", "노력이 부족해, 노력이."라고 면박을 주는 말투는, 그말을 듣는 학생
의 기분을
크게 다르게 만든다.
그와 같은 말투의 차이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한쪽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또 한쪽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음을 표출한다.
어떤 학생이든 교사가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면 즐거워한다. 반면에 부
정적인
이미지로 비쳐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의 문을 닫는다.
4. 교사의 사고방식
말투는 교사의 인격을 반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교사의 자질로서 빼놓
을 수 없는
것이 기력, 체력, 표현력, 공감, 수용, 포용력이라고 하고 싶다.
특히 대화의 첫마디를 어떻게 푸는가는 표현력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표현력은 기력, 체력, 표현력, 공감, 수용, 포용력의 한 부분으로서의 표현력이 아니
라 그것들이 모두 서로 어우러져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사 자신이 전
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기력이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상태를 말하며 체력은 교사의 얼굴표정과 목소리로 드러난다. 학생의 분위기를 알아내
는 것은 공감하는 능력이며, 학생들의 분위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교사의 포용력이다. 이와
같은 교사의 전인격이 학생에 대한 말투가 되어 드러난다.
말투 하나를 보면 교사의 인격을 알 수 있다. 말투는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교사
는 자신이 첫마디를 어떻게 시작하는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의 첫걸음이라고 말해도 좋다. 학생들의 긍정적인 면을 잘 보는 교사가 있는
가 하면 처음부터 부정적인 면을 보는 교사도 있다.
학생들의 작품을 볼 떄도 그저 흠만을 찾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교사도 있
다. 학생의 작문을 보면서 잘못 쓴 맞춤법과 띄어쓰기에만 온통 신경을 쓰다가 작문 전체가
말하는 주제를 간과하는 사람도 있다. 학생들이 책을 읽을 때도 한 단어 한 구절을 제대로
읽나 신경을 쓰느라 학생이 전체적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무시하는 교
사도 있다. 이런 교사는 부분의 결점에 지나치게 집착하느라 전체를 조감하지 못한다.
교사는 자신이 어떻게 사고하고 느끼는가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하는 사고의
습벽, 혹은 편견이나 경향을 잘 검토하면 그것이 자신의 정신분석, 자기분석이 된다.
인간은 자신이 예전에 크게 압박을 받았던 문제에 직면하면 경원하거나 기피하게 되는 메
카니즘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4편 저 선생님은 '우리 편'이라고 믿게 만들자
1. 칭찬과 꾸중은 동전의 양면이다.
학생들을 칭찬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이 세상은 좋은 일로만 가득 차
있지도 않고 나
쁜 일로만 가득 차 있지도 않다. 한쪽에 좋은 면이 있으면 다른 한쪽에는 나쁜 면도 있기
마련이다.
칭찬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늘 상 칭찬만 받는 아이가 있다고 치자. 그 아이의 경
우, 혹시라도 칭
찬을 받지 못하는 날이 있다면 극단적으로 말해 그 날은 벌을 받는 것처럼 여길 것이다.
또 학생이 하는 말에 언제나 기분 좋게 맞장구를 치던 선생이 있다고 치자. 어느 날 대화
도중에 선생님
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면 학생은 선생님에게 무시당했다고 느끼고 크게
상심할지도 모른
다. 여느 때 같으면 응석까지 받아 주던 선생님이 오늘은 그렇지 않다고 느낄 때 학생은
자신이 거부당했
다고 판단한다. 그 동안 관계가 좋았던 선생님일수록 충격은 더욱 크다.
성적표를 보여 드리면 언제나 칭찬하던 부모님이 아무 말도 안하면 아이는 꾸중보다도 더
한 압박을 느낀
다. 칭찬과 꾸중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칭찬을 들으며 자란 아이는 하루라도 칭찬을 듣지 못하면 그 사실만으로도 불안
감에 휩싸인다.
그래서 더욱더 열심히 해서 또 칭찬을 듣고자 한다. 그러다 정도가 심해지면 상대의 구미에
맞추어 행동하
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어린아이가 부모나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순둥이로 행동하는 것은 보기 좋다. 그러
나 자아에 눈뜨
기 시작하는 중학생이 되면 상대에 영합하려고 행동하는 자기 자신이 밉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
서 상대의 칭찬을 들어도 내심으로는 별로 기쁘지 않다. 자신에 대해 분노가 솟구치는 복잡
한 심정에 사로
잡히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러 부모나 교사가 싫어하는 일을 하거나 시키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거나 좀
더 직접적으로 반항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사자는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확실하게 모른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고
모든 게 마음
에 들지 않아서 울적해질 때도 많다.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가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모든 일을 제멋대
로 하려드는 것
같고 야단이라도 치면 한층 더 삐뚤어져서 점점 애물단지가 된다. 정말로 다루기 어려운 나
이에 접어든 것
이다.
2.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을 칭찬하는 방법
아이들의 자아가 형성되고 자립욕구가 높아지는 시기에는 직접 대놓고 칭찬하기보다는 그
들이 보이는 언
동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충족감과 안정
감을 느끼기 때
문이다. 상대가 자신의 언동을 이해할 때 자기표출의 욕구와 사회적 승인의 욕구라는 두 가
지 욕구가 충족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두 가지 욕구가 만족될 때 심리적으로 안정된다고
A. 마슬로는 말했다.
국민학교 고학년생,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대하는 부모와 교사는 이 점을 특히 염두에 두
면서 칭찬의 내
용과 칭찬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국민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칭찬하는 방식으로 상급학년의 아이들을 칭찬하면 '뭐야, 누
굴 바보로 아시
나?' 라든가 '내가 아직도 코흘리개인 줄 아시나 보지?'하고 반발심을 일으키게 된다.
중학생들 가운데서도 3학년생과 1학년생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3학년생을 졸업시
키고 다음 해에
1학년생을 맡으면 특히 귀엽게 느껴진다. 녀석들 참 귀엽기도 하네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
에 그들의 마음
속에 자라는 자아와 자기욕구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쉽다.
어떤 중년 여교사의 경우가 그랬다. 그 교사는 신입생을 대할 때 "꼬마야", "얘들아","얘,
네가 한 번
말해 보련"하는 식으로 말했다. 그건 그 교사딴에는 친밀감의 표시였고 농담 반 진담 반으
로 한 말이었지
만 학생들의 반발을 사고 말았다. 학생들이 그 선생의 지시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
업시간에 마구
떠들고 질서도 안 지켜 도무지 통제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른 교사들이 나서서 아
이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여교사가 학생들을 아기 취급하는 바람에 불만이 들끓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와 같은 사례를 듣고 성장단계에 있는 아이들의 기분을 모르는 데도 정도가 있지 하고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이 사례는 중학교 교사라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보여 준 것이다. 겉으로는
아기취급을 하
지 않았더라도 교사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으면 학생들은 교사의 속마음을 알아차린다.
아기처럼 취급받기를 좋아하는, 유아기질이 남아 있는 학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아기취급을 받
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학생도 있다. 바로 이것이 중학교 1학년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학생을 칭찬할 일이 생기면,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의 이름을 숨기고
학급전체에 알리
는 게 좋다.
"어떤 학생이 이런 행동을 했는데 이것은 이러저러한 의미에서 높이 평가될 만하다."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기본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3. 학생의 선행을 소개한다.
어떤 교장이 다음과 같이 편지를 받았다. 이 교장은 다음날 아침 조회시간에 이 긴 편지
를 전교생 앞에
서 읽었다. 이 교장의 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전교생 앞에서 읽은 의도를 생각하면서 다
음 편지를 읽기
바란다.
글월로 처음 인사 올립니다.
저는 귀 학교 가까이에 살고 있을 뿐, 귀 학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노인입니다. 그런
제가 면식도
없는 교장 선생님께 편지를 올리는 결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토요일이었습니다. 오후 4시쯤, 저희 집에 아주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교장 선생
님 학교의 학생들이었습니다. 네 명의 여학생이 한아름 꽃을 안고 와서는 "저희 학교에서
기른 꽃인데요,
적지만 받아 주세요"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잘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어 머리가 둔해진 탓인지
도 모르겠지만,
난생 처음 보는 어린 학생들에게 꽃을 받으니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종이
로 싼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 꽃은 저희가 학교에서 기른 것입니다. 저희는 이 꽃을 학교 주변에 사는 분들께 집
집마다 방문하여
나누어 드리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성의를
봐서라도 이 꽃
을 받아 주세요."
"고마워요."
나는 고작 이렇게 서투른 인사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꽃을 기른 적이
없어서......"하
고 변명하듯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저희들이 꽂아 드릴까요?"하고 말하며 별로
깨끗하지 않은
집안으로 올라오려고 했습니다. 창피하기는 했지만 "여기에다 꽂으면 어떨까?"하면서 우유
병을 씻으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마치 어린 소년처럼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많은 꽃을 어떻
게 조그만 우
유병에 꽂을 수 있겠습니까? 이윽고 방과 현관 그리고 마루까지 꽃이 만발했습니다. 노인
혼자서 사는 쓸
쓸한 집의 분위기가 싹 바뀌었습니다.
사람의 인정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아주 오랜만에 그런 생각에 젖어들
었습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제가 어색하게 말하자 학생들은 "고맙습니다."하더니 "저희가 끓이지요."하고는 손을 바지
런히 놀렸습니
다. 함께 차도 마시고 과자도 먹으면서 스스럼없이 웃고 이야기하며 뒷정리까지 깨끗하게
마친 뒤 학생들
은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차 잘 마셨습니다."하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돌아갔습니
다.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뻤습니다. 제가 사는 집 근처에 이렇게 상냥하고 해맑은 학생
들이 있다는 사
실 하나만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세상천지에는 낯선 사람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모
두 이 여학생들
과 같은 부드러움이 있어.'
이렇게 생각하자 거리에 나서기가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나는 그 여학생들로부터 살아
갈 용기를 얻었
습니다.
제 마음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저처럼 혼자 살아가는 노인에게는 그게
솔직한 심정입니
다.
한 사람 한 사람 앞으로 정성껏 편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이렇게 교육을 잘 시키신 교장
선생님께 편지를
드림으로써 대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노인네의 두서없이 긴 편지를 읽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학생들에게도 안부 전해 주
시기 바랍니다.
귀 학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그 편지에는 학생들 하나하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교장 선생님은 그 이름을 거론하지
는 않았다. 왜
냐하면 그 미담을 학생 개개인의 이름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4. 학생들 사이에 정이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자
장애자 학급을 병설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학교에서는 매주 월요일 조회 때
교사들이 돌아가
면서 3분 가량 이야기를 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 중 어느 교사가 한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
다.
어제 독감 예방주사를 맞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E조(장애자 학급)의 A가 주사를 맞을 차
례가 왔습니다.
A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주사라면 십리는 도망갈 정도로 싫어합니다. 싫어한다기보다는
공포스러워한다
는 쪽이 어울릴 겁니다. A는 3년 동안 한 번도 주사를 맞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A가 주
사를 맞았습니다.
그것은 A에게 '나도 이젠 3학년이다. 내 밑으로 후배들이 많이 있는데 언제까지나 무서워할
수는 없다.'는
상급생으로서의 자부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차례가 돌아오자 A는 마치 저승사자에게 잡혀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돌오돌 떨고 한
발짝도 걷지 못
했습니다. 선생님이 빨리 앞으로 나가라고 주의를 줄 정도였습니다. A 뒤에는 C조와 D조
의 남학생 열 명
정도가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A의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A는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이 학교에 입학한 이래 처음으로 남들과 더불어 주사를
맞았습니다. 비록
얼굴은 찡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A는 나름대로 마음을 다잡고 하나의 벽을 넘은 것입
니다.
"야, 정말 큰일했다."
의사 선생님도 A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빙그레 미소를 보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A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열 명의 3학년 학생들이 모두 A의 얼굴을 바라
보며 일제히 박
수를 쳤습니다. 정겨운 박수였습니다. "해냈구나, 정말 멋져!"라고 축하하는 박수이기도 했습
니다.
A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던 A 가 웃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아, 우리 학교 학생들은 정말 멋있는 아이들이구나. 정이 넘치는 아
이들이야'하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나름대로 노력을 합니다. 그 피나는 노력을 통해 도무지 넘을 수 없었던
벽을 넘었을 때
우리는 만족감을 느낍니다. 게다가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축하와 격려까지 받는다면 더욱 멋
진 일이겠지요.
그때 양호실에 있던 3학년 학생 모두에게 뜨거운 사랑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렇게 멋진
상급생들이 다니
는 이 학교의 선생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지금 나는 기쁨에 넘쳐서
어쩔 줄을 모르
는 심정입니다.
이 학교의 선생님들은 조회시간의 발표를 통해서 가능하다면 학생들의 좋은 점을 알리려
고 한다. 그럴
때면 개인의 이름을 밝히는 일도 있지만 가능한 한 삼가는 편이다. 왜냐하면 중학생쯤 되면
칭찬을 겸연
쩍어하는 경향도 있고, 친구들 사이에서 모범생이라고 놀림을 받을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배려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위에 든 예에서 교사가 느낀 심정만을 언급한 것에도 그런 배려의 자취가 배어 있다. 특
정 개인의 이름
을 들어서 칭찬을 하면 화제가 그 학생만의 좁은 범위로 줄이들기 쉽다. 전교생이 공감하기
위해서는 일부
러 개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5편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떤 경우에도 칭찬할 수 있다.
1. 여름 방학 숙제, 우스꽝스러운 작품
어느 국민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름 방학 때 그 학교에서는 전교생에게 아이디어 발명품을 작품으로 만들어 제출하라는
숙제를 주었다.
9월이 되어 새학기가 시작되자 아이들은 이리저리 머리를 짜내 만든 작품을 들고 학교에
왔다. 1학년에
서 6학년까지 전교생들이 제출한 작품들을 모아 체육관에 전시를 했는데 갖가지 작품들로
체육관은 장관이
었다.
교사들이 함께 그 작품들을 관람하는데 1학년 담임인 M선생이 불쑥 말했다.
"이야, 역시 고학년의 작품이 멋있군요.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요. 1학년생의 작품은 영
보잘것없군요.
뭔가 만들려고 애쓴 흔적은 보이는데 말이죠......"
그러더니 가까이에 있는 작품 하나를 들고서 시시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도대체 이건 뭡니까? 종이상자에 구멍을 세 개 뚫어 놓은 게 전부라니 원......"
그 말을 들은 교장 선생님이 말했다.
"쓰임새를 모르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시시해 보이지만 그 아이에게 물어 보면 무엇을 만
들었는지 의미를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별로 대수로운 걸 만든 것 같지는 않지만 하여튼 물어 보겠습니다."
M선생은 다음날 그 상자를 만든 학생에게 구멍을 세게 뚫은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2. 그게 있기 때문에 놀 수 있어요
그 작품을 만든 학생은 A였다. M선생이 이유를 묻자 A가 대답했다.
"그게 있기 때문에 놀 수 있어요."
"아, 어떤 게임을 하는 도구로구나."
"......"
A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걸로 어떻게 놀지?"
M선생의 물음에 A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있기 때문에 놀 수 있어요."
M선생이 자세히 물은 결과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아냈다.
A의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지금은 어머니하고 단둘이 살고 있다. 편
물기술이 뛰어나
신 어머니는 주문이 밀려서 늘 바쁘시기 때문에 A는 곧잘 어머니의 일을 돕곤 했다. 보통
은 실을 감는 것
을 도왔는데 실을 감을 때면 어머니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어머니는 고사
리 같은 아들의
두 팔에 실타래를 걸고는 둥글게 실을 감았다. 그러나 한창 뛰어 놀 나이인 A로서는 실을
다 감을 때까지
앉아 있는 것은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친구들은 골목에서 신나게 뛰어 노는데 자기만 어머
니의 일을 돕고
있으니 딴 생각을 하게 된다.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놀까?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이런 생각에 빠져 있으면 금방 어머니에게서 꾸지람이 떨어진다.
"어디다 넋을 팔고 있어!"
두 팔에 걸린 실타래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지 않으면 실감는 것이 엉망이 되기 때문에
어머니가 짜증을
내시는 것이었다. A와 호흡이 잘 맞아서 실이 잘 감기는 날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는데 그
렇지 않은 날은 보통 딴 데 정신을 판 날이었고, 실타래는 영락없이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A는 자기 두 팔을 쓰지 않고도 실을 감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유병 두
개를 세워놓고 그 위에 실을 걸어 보았다. 어머니는 그런 A를 보고 말했다.
"그런 걸로는 소용이 없어. 그래도 한 번 해보자."
그러나 병이 금방 쓰러져 버려서 어머니 말씀대로 역시 쓸모가 없었다.
우유병이 쓰러지지 않도록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 A는 병이 쓰러지지 않도록 토대를
만들어서 구멍을
뚫고 그 속에 우유병을 꽂았다. 두 개의 우유병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도록 조정하느라 갖
가지 시도를 했
다. 그런 후에 실타래를 걸고 어머니에게 감아 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병이 쓰러지지 않았
지만 실타래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병의 높낮이를 이렇게저렇게 바꿔 보았다. 어머니는 몇 차례고 거듭되는 실타
래기계의 실험을
끈기있게 도와 주셨다. 맥주병으로도 해보았다. 역시 두 팔보다 나은 실타라기계는 없었다.
그러나 거듭되
는 실험을 통해서 병의 높이와 간격이 어떠해야한다는 감이 잡혔다.
바로 그때 A는 실타래에도 두 종류가 있음을 깨달았다. 큰 것과 작은 것, 종이상자에 구
멍이 세 개가 뚤
린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실타래기계를 만들고 부수고, 또 만들고 부수고 하던 A는 마침내 두 팔 대신에
실타래를 감을 수
있는 병의 거리와 높이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며칠이 걸렸다. 실타래의
길이가 길고
짧은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은 실파는 집 아줌마를 통해서 알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구멍이 세 개인 종이상자 덕분에 A는 친구와 재미있게 뛰어놀 수 있게 되었
다. 그러니 구멍
난 상자의 쓰임새가 뭐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그게 있기 때문에 놀 수 있어요."하고 대답했
던 것이다.
3. 미리 부정부터 하기 쉬운 교사의 마음
M선생은 깜짝 놀랐다. 체육관에 놓여 있던 그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M선생은 작품의
의미를 몰랐다. 그
저 종이상자에 세 개의 구멍을 뚫어놓았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1학년생의
작품은 영 보잘
것없군요. 뭔가 만들려고 애쓴 흔적이 보이기는 하지만요."하고 미리부터 부정했던 것이다.
교장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쓰임새를 물으면 무엇을 만들었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고 말하지 않았다면, M선생은 그 아이의 심정을 몽땅 부정하고 발로 밟았을지도 모른다.
A의 어머니가 A
의 탐구열의를 참을성있게 도왔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무심코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M
선생이 끼고 있
던 색안경엔 그런 위험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1학년생이 뭘 만들 수 있겠어.'하는 교사의 편견이 A의 뛰어난 통찰력과 발명가 자질을
짓밟을 뻔했던
것이다. M선생은 이 일로 자신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를 실감했다.
그리고 새삼스
럽게 어른의 고정관념이 어린이들을 어떻게 망칠 수 있는가를 실감하고 크게 반성했다고 한
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어떤 경우에도, "야, 만들어 왔구나. 이건 뭐에 쓰이는 거지?", "이건
또 어떻게 쓰
는 거지?"하는 식으로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교사는 순수한 흥미와 관심을 지
녀야 한다. 그것
을 일컬어 교사의 지적 호기심이라고 해도 좋다.
4. 고정관념을 버리자
어떤 경우에도 미리부터 부정하지 않은 세가 중요하다. 얼핏보기에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
을 때도 마찬가
지이다.
지각한 학생은 교사에게 지각한 이유를 해명한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당연하게 여겨지는
관례이다. 그러
나 한창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중학생, 특히 학년이 높은 중학생은 교사 앞에서 이러쿵저
러쿵 변명하기를
꺼린다. 쑥스럽기도 하지만, 같은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어린애나 하는 짓을 하는 건 창
피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의사표시로 손을 들고는 입속말로 "죄송합니다."혹은 "지각했습니다."라고 중
얼거리는 학생
이 있는가 하면, 개중에는 수업중인 교사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기 자리로 들어가 앉는
학생도 있다.
심지어는 반 친구들에게 "지각생 왔다."하고 떳떳한 듯이 선언하는 학생도 있다.
그런 학생을 보면 교사들은 대개, "어떻게 된 거야? 왜 지각했지?"하고 묻는다. 그러면
학생은 "늦잠을
잤어요."라고 아주 천역덕스럽게 대답한다.
이런 학생들에 비한다면 교사에게 다가와서 "선생님, 지각했습니다."라고 퉁명스러우나마
예의를 갖추는
학생은 나은 축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학생을 대하는 교사의 태도도 천차만별이다.
(예1)
교사:"지각한 건 나도 알아. 내가 알고 싶은 건 왜 지각했느냐야."
학생:"......"
이때 학생은 선생님이 부정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고 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교사는
또 참지 못하고 면박을 준다.
"뭐야, 왜 뚱한 표정을 짓고 그래!"
이러면 학급의 분위기도 어두워진다.
(예2)
교사:"음, 지각했구나. 무슨 일 있었니?"
학생:"늦잠을 잤습니다."
교사:"......"
교사는 빙그레 웃고 만다. 면박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교실 분위기는 여전히 밝다.
(예3)
교사:"어떻게 된 거야? 늦잠 잤니?"
학생:"......"(고개만 끄덕인다)
교사:"선생님한테 고개만 끄덕이면 되나."
학생:"늦잠 잤어요."
교사:"알았다. 앞으로 지각하면 안 돼."
학생:"......"(고개만 끄덕인다)
교사:"그 녀석 고개 끄덕이기 대장이네."
교실에는 미소가 감돌지언정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지는 않는다.
(예4)
교사:"무슨 일 있었니?"
학생:"늦잠 잤습니다."
교사:"그래?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했나 보구나. 건강에 주의하거라."
각별한 애정이 담긴 말만큼 좋은 느낌을 주는 것도 없다. 애정이 담긴 말은 교사가 그
학생의 생활실태
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 때만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 교실의 분위
기, 마음과 마음
이 연결되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도 있다.
어떤 중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업 중 지각상습범(?)인 A가 살그머니 기어 들어
왔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변명하고 주의를 들은 A지만 워낙 행동이 꿈적대는 모양이었다. 교실의 분위기
도 아이고 저 녀
석의 지긋지긋한 지각사유가 오늘도 재방송되겠구나 하는 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그날 아침 B선생의 태도는 달랐다.
"A, 지금까지 나는 너에게 지각하지 말라고 수도 없이 주의를 줬고 너도 지각한 이유를
수도 없이 말했
다. 수도 없이 주의를 듣고도 지각을 하는 까닭이 뭐라고 생각하지? 지각하고 또 지각하는
이유가 뭐냐고
생각하느냐 말이야."
순간, A는 고개를 푹 숙였다. 반 아이들의 분위기도 평소와는 상당히 달랐다. B선생은 조
용하게 말했다.
"A, 수도 없이 주의를 줬는데도 지각을 하는 까닭은 네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야."
A와 반 아이들은 깜짝 놀라는 얼굴로 선생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B선생도 그런 분위
기를 충분히 염두
에 두고 말하기 시작했다.
"......인간 이외의 동물은 음식이나 매로 길들이면 어느 정도는 길들인 사람의 생각대로
움직인다. 이
것을 가리켜 조련이라고 하지. 개나 고양이, 원숭이, 강치나 물개, 심지어 호랑이나 사자 같
은 맹수도 마
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은 달라.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행동은 자신이 결정하지. 다른 사람
이 아무리 지
시하고 명령을 내려도 자신의 태도나 행동은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한다.
A가 지각하는 것은 스스로가 지각하자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야. 이유는 얼마든지 갖
다붙일 수 있어.
그러나 지각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너 자신이야. 너는 자주적으로 지각이라는 행동을 선택한
거지.
이것은 지각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야. 숙제를 잊고 하지 않는 것도,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도 모두 자
주적으로 스스로 선택한 태도이고 행동이다.
인간이 아주 어릴 때는 부모나 선생이 자신의 모든 것을 결정해 주지. 그 이유는 너무 어
려서 아직 스스
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아는 아직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중학생은 유아와는 다르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주체성을 지니게 된다.
주체성이 없다면 너는 내가 말한 대로 지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내 말대로 행동
하지 않는 까닭
은 스스로 자신의 태도와 행동에 책임을 지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너는 주체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지각한 것이다......"
학생들은 아연한 표정으로 B선생의 지각사유를 들었다.
B선생의 말투는 아주 덤덤했다. 비꼬거나 야유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태도나 행동의
주체성은 자신
에게 있다. 이 점을 깨닫고 자신의 언동을 스스로 규율하는 인간이 되기 바란다'는 심정을
절실하게 전하
고 있었다.
A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웃음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각한 경험이 있다. 지각했을 때 "네가 지각한 까닭은 너 스스로 주체
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반사적으로 부정한다. 그렇게 부
정을 하면서도
'역시 내가 칠칠치 못하기 때문이야'라든가 '나는 아직 사리판단을 할 줄 모르는 인간이구
나'하면서 자기
의 태도와 행동을 반성한다.
그러나 지각한 학생을 앞에 두고 "왜 매일 지각을 하는 거야! 반성해!"하고 면박을 주면
'내 입장은 생
각하지도 않는군. 누군 지각하고 싶어서 하나'하고 반발하며 자기합리화로 기울기 쉽다. 그
렇게 반발하는
까닭은 자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욕구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미묘함이
라고 할 수 있
다.
B선생의 예는 자립하고 싶고 하나의 당당한 인격체로 대접받고 싶다는 중학생의 기본욕
구를 어떻게 충족
시켜야 하는가를 잘 보여 준다.
그후 A는 눈에 띄게 지각하는 회수가 줄어들고, 매사에 늘쩡거리던 행동도 차츰차츰 고
쳐졌다고 한다.
6편 따지고 드는 학생을 대할 때
1. 또 한 편의 지각 이야기
C는 따지고 들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머리는 좋은 편이었지만 진지한 자세가 부족했
다. 공부, 운동,
어떤 작업을 할 때도 몰두하지 못했다.
가정적으로 불행한 편이기 때문에 순수한 면이 조금 모자란 것 같았다. 그 학생이 겪는
불행은 어른 입
장에서 보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가정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
고 어떻게 집착하느냐였다. 경제적인 빈곤, 좁은 집,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 C는 그런 현실
에 좌절하고 회
피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집이 그 모양인데 뭘 할 수 있겠어......'라든가, '아버지
가 분명히
못 하게 하실 거야.'와 같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앞세우며 매사에 비뚤어진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소
극적인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런 C가 어느 날 지각을 했다. 지금까지 좀처럼 없었던 일이었다. 마침 국어시간이라 국
어담당인 D여선
생은 별다른 생각없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지각을 다하고?"
그랬더니 C가 말대꾸를 했다.
"이유는 뭐하러 들으려고 하세요?"
D선생은 무척 당황한 듯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왜 지각을 했는지 이유는 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나 C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알아서 뭐하시게요? 제가 지각한 이유하고 국어수업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는
데요."
C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다.
D선생은 '그 녀석 따지고 드는 폼새가 영 못마땅한데......'하고 느꼈지만 부드럽게 말했다.
"야, 너한테 한방 먹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너는 참 논리적이구나. 하지만 나
는 여자라 조
금 정서적이잖아?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돼서 별다른 의미없이 물었던 거야. 지
금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어. 이런,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 하지만 쓸데없는 소리가 없다면
세상은 너무
삭막하지 않겠어?
그래, 지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 까닭을 말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겪는
모든 경험을 상담하고 싶어. 그래서 선생님이 됐는지도 몰라. 이런, 또 쓸데없는 소리......자
자, 수업이
나 하자."
D선생은 마지막에는 혼잣말처럼 말하고 서둘러 수업으로 들어갔다.
그날 방과후, 무슨 볼일이 있는지 교무실에 들른 C가 D선생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오늘 아침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C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응? 왜?"
D선생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C가 사과하러 왔다는 것을 깨닫고
는, '이 아이에게
이렇게 순진한 면이 있었구나.'하고 느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C는 차츰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2. 논리적으로 굴복시켜도 응어리는 남는다.
E는 따지고 드는 데 선수였다. 지각을 하거나 준비물을 잊고 안가지고 와도 모두 자신의
손해지 친구나
선생의 손해는 아니므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잔소리를 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주장
했다.
선생이 지각을 했다고 주의라도 줄라치면 E는 이렇게 따지고 들었다.
"내가 지각을 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없습니다. 지각을 해서 공
부를 못 하더라
도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지 반 아이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교실
분위기가 어수선
해진다든지, 다른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영향을 줄 생
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영향을 받은 녀석이 모자란 놈입니다. 자기만 똑똑하면 설령 주변이 어수선해도 전
혀 영향을 안 받
을 겁니다. 어쨌든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제가 지각을 하든 말든 교실분위
기가 영향받을
게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너는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멋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
하니? 너 좋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냐 말이야?"
선생이 이렇게 물으면 E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요, 나는 혼자서도 잘 해나가고 있어요."
이런 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설득을 하겠다고, "인간이란 독불장군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거야."라
든가, "부모나 사회, 그리고 친구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녀석이
야." 혹은, "네가
입고 있는 옷과 네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누가 만들었지? 바로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해서
만든 물건이야.
너는 이 세상 사람들이 땀흘려서 만든 물건과 다른 사람의 노력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거
야."하는 말들 따
위로 아무리 입이 아프게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다. 아무리 논리적인 이야기를 듣더라도,
"남은 남이고
나는 나일 뿐입니다."하며 말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만다. 이런 학생의 정서에는, '내 개인의
일을 두고 시
시콜콜하게 지도하거나 명령하려 드는 선생님이 꼴보기 싫다.'는 심정이 깔려 있다. 더구나
그런 자신의
심정을 스스로도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말이 이치에 닿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3. 학생의 감정을 수용한다.
이런 학생을 대할 때는 그의 정서나 감정을 수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생의 정서
와 감정을 수용
하면서 기분을 대변하는 쪽으로 말해 보는 거다.
"지각하거나 준비물을 잊었을 때는 스스로도 바보짓을 했구나, 실수했네 하고 화가 치밀
거야. 그런데
거기다 한술 더 떠남에게 지각하지 마, 준비물을 잊지마 하고 지적을 받거나 왜 지각했지,
어째서 준비를
안 해왔지 하고 추궁을 당하면 울화통이 터지는 게 당연할 거야. 그래서 속으로 시끄러워
하고 소리치거나
이왕 이렇게 되었는데 그런 소리하면 무슨 소용이야 하는 반발심도 들겠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런 경험
이 있단다. 경험자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거야. 나도 실수보다는 잔소리에 더 화가 난 적
이 있어.
그리고 너는 아주 논리적이구나. 다른 사람과는 관계가 없다든지, 혼자서 살고 싶다든지,
자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지.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좋지만
누구나 간섭은
정말 싫어한단다."
이런 교사의 말이 그 자리에서는 학생들에게 별 효과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학생이
자신의 심리상태를 되돌아 볼 실마리를 제공한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인간의 눈은 외부의 사물을 바라보도록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보려면
거울이 필요하다.
어떤 교사는 신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학급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설명이 재미
있다.
"해마다 찍은 사진을 보면 내 모습의 변화를 알 수 있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도
자신의 변화에 놀라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요.
반이 원활하게 돌아갈 때의 내 모습은 보기좋지만, 어떤 문제가 생겨서 시련을 겪을 때는
딱딱하고 험상
궂은 표정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몸 상태가 나쁠 때는 얼굴과 몸에 정기가 없어 보
입니다. 그럴 때
는 자세도 다릅니다.
자세를 한문으로 쓰면 모습의 기운입니다. 확실히, 기운이 있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전혀
기운이 느껴지
지 않는 모습도 있습니다. 박력이 느껴지는 자세, 기개가 느껴지는 자세가 중요하지요. 저는
제가 찍은 사
진을 통해 제 자신을 보면서 이런 점을 자주 느낍니다.
사람의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하지요. 보기 좋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와 그
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보기 좋은 얼굴이란 잘생겼다, 멋지게 생겼다는 것과는 다릅니
다. 나이하고도
관계가 없지요. 예를 들어 사람의 얼굴을 보고 복스러운 얼굴인가, 빈상인가를 구분할 수 있
답니다."
결국 이 선생은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 학기초에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였
다.
많은 학교에서는 커다란 거울을 설치해 놓고 학생과 교직원들이 스스로 복장을 살필 수
있도록 하고 있
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거울로 스스로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기 때
문이다.
4. 스스로를 알기가 가장 어렵다.
우리는 주변 사람이 자신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제발 좀
내버려두세요.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라고 말하며 반발한다. 그러나 사실 자기 자신만큼 알기 어려운
것도 없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거나 아니면 너무 과소평가한다. 그만큼 객관적이
고 공정하게 자
신을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과대평가는 자만, 자기과신으로 연결되고 과소평가는
비굴과 자기
상실로 연결된다.
대개의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알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따라
서 판단하지 않을까.
만일 당신이 스스로를 '나는 아주 친절하고 부드러운 교사다'라고 생각한다고 치자. 그러
나 당신이 아무
리 스스로를 친절하고 부드러운 교사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실로 굳어지지는 않는
다. 당신이 아무
리 굳게 믿는다고 해도, 당신을 대하는 학생들이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당신
이 어떤 성격의 교사인가 하는 점은 학생들의 느낌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이점을 분명하
게 인식해야 한
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신들의 느낌을 좀처럼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대개 교사의 귀
여움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할 때도 미움이 아니라 호감을 살 말을 하려
고 노력한다. 어
떻게 하면 내가 선생님의 마음에 들까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며, 교사의 낯빛을 살피면서
말을 하는 것이
다. 그러면 위선적인 냄새를 풍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마음씀씀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며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푸는 데도 중요한 것이다.
사실 교사 자신도 때와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언동에 변화를 주며 사람을 대한다. 그것이
사회생활의 기
본자세인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지나치게 의식하면 입바른 겉치레말이나 아부, 아첨으로 여겨져 상대에게
오히려 역겨운
느낌을 준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아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5. 자신의 과거는 삶을 바라보는 거울
일본에는 <대경(大鏡)>혹은<증경(增鏡)>과 같은 역사 이야기책이 있다. 옛날에는 역사를
'거울'로 판단
한 듯싶다. '경(鏡)'과 '감(鑑)'은 모두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뜻이다. 옛날 사
람들은 역사란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을 비춰보고, 나아가 그것을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를 배우는 거울
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듯 어떤 것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자신의 모습과 형상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울
에 비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반성하고 바꾸어 나간다면 그것이 우리의 인간
적 성장으로 연
결되기 때문이다.
인간 이외의 생물체 가운데에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갖추고 자신
을 규율하는 존
재는 없다. 인간만이 거울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성격은 스스로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성격은 주위 사람들이라는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약
한 존재이기 때
문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을
받아들이는 좁은 범위의 동료들하고만 사귀려는 경향을 보인다. 거기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
는 것이다. 그
러나 이런 경우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볼 수 없어서 자기만족 속에
서 살아가기 쉽
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의 태도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
려 우리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해주기 쉽다. 그 중에는 우리가 듣기에 뼈아픈 내용도 포
함되어 있을 것
이다. 그런 충고를 들을 때는 가슴이 쓰리지만 이 뼈아픈 충고야말로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재료가 된다.
우리는 상대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볼 수는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의 표면에 나타난 태도와
행동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인 태도와 행동을 되돌아봄으
로써 자기 자신
을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의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평가할
수 있으며, 나아
가 앞으로의 삶을 바라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발견하는 거울이다.
따라서 교사는 자신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학생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학생들의 정서에 호소하는 게 중요하다.
7편 가출한 모범생
1. 상대의 입장을 인정하는 것은 칭찬으로 연결된다.
칭찬의 반대는 학생들의 태도나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보는 것과
정반대에 위치하
는 것은 상대의 입장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의 입장에 서서 학생들의 정서에 공감
을 느낄 때 비
로소 그들의 정서를 받아들일 수 있다.
교사와 부모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공부를 하거라. 공부는 조금씩 차곡차곡 쌓아가는 거란다."
"책을 읽으면 시대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실력의 기본이 된단다. 독서습관을 지니는 것은
우리 몸에 무엇
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을 갖추는 것과 같단다."
"일기를 쓰면 하루하루를 반성하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단다. 일기를 쓰는 것은 중요하고
좋은 습관이니
실행에 옮기도록 하거라."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개중에는 아예 처음부터, "어른들은 너무 바빠서 그런 일을 할 시간이 없단다."라든가, "
선생님은 다른
일이 많아서 말이야."하는 식으로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른과 아이가 다른 입장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나 학생들에게 권하
는 것을 스스로
도 실행한다면, 권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이고 아이들이 우리의 말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도
차이가 생길 것
이다. 학생들과 함께 청소를 하거나 그 밖의 일을 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무엇인가를 함께
한다는 것은 분
위기의 공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교사도 예전에는 학생이었다. 학생이라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교사는 자신이 학생이었
을 무렵의 정서
를 까맣게 잊고 학생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 교사가 자신도 옛날에는 학생이었음을 자
각할 때 학생과
의 관계가 크게 개선될 수 있다.
그 사례를 보도록 하자.
어떤 중학교에서 여름방학 중의 하루를 잡아서 교사를 대상으로 교내연수회라는 이름의
모의수업을 열었
다. 모의수업에서는 교사역을 맡은 사람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학생'이 되어 '학생으로
서 수업을 받는
체험'을 한 것이다.
시작종이 울림과 동시에 교실에 앉은 학생역의 교사들에게 교사역을 맡은 선생이 도덕자
료를 나누어주었
다. 다소 긴장한 '교사'가 그 자료를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 서로 이야기를 해보자고 지시했
다.
"누가 한번 읽어보겠어요?"
'교사'가 말하자 조금 술렁거렸다. '학생'이라면 당연히 누군가 읽어야 하는데도 다소 긴
장한 것이다.
"OO군."
'교사'가 지명을 하자 지명된 '학생'교사는 더욱 긴장을 했다. 다른 교사들은 한숨 돌리는
표정이 역력
했다.
'학생'들은 '이 나이에 이런 일로 마음이 두근거리다니, 나 원 참.'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자료를 읽는
'학생'은 우습게도 더듬거렸다. 겸연쩍기도 하고 잘 읽어야 할 텐데 하는 걱정도 들어서 도
무지 평정심을
지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학생들의 마음은 늘 이럴까.'하고 느끼는 동시
에, '아, 교사
는 밀실에서 일을 하는 직업이구나. 다른 직업과는 달리 수업이라는 일을 다른 성인들에게
보이지 않아도
좋았으니까.'하고 깨달았던 것이다.
교사역을 맡은 선생이 설명을 하자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등 일거수
일투족에서 학생
들의 심정을 실감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2.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모범생들의 강박관념
모의 수업을 받은 A교사의 감상은 이러했다.
......요즈음 학생들은 입시경쟁이라는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달린다고 해
도 과언이 아
닙니다. 우리는 길가에 서서 "힘내라, 힘내라!"하고 성원을 보내고 아이들은 달리기를 멈
추지 않습니다.
부모의 기대, 교사의 성원에 보답하는 길은 자식과 학생으로서 모범생이 되는 길뿐이니 기
권하거나 되돌아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생각이 강박관념이 됩니다. 달리면서 그런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심
정은 어떨까요?
도망쳐 버릴까, 반항할까, 마음을 닫을까, 옆길로 새서 비행으로 내달릴까. 많건 적건 요즈음
아이들은 그
런 상황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니, '요즈음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은 우리들이 학생이었
을 때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나도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적지 않게 무리를 했으니까요.
다행히 그때는 지금처럼 진학열이 뜨겁지 않았기 때문에 극단적인 무리를 하지는 않았습
니다. 그런데도
때때로 부모님에게 반항, 반발하는 형태로 자기주장을 했지요. 말하자면 에너지를 발산하면
서 달렸던 것입
니다. 그러나 반발하고 반항해도 결코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장이라는 변
화에 따르는 피
할 수 없는 위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오늘 모의수업을 통해 학생의 입장을 실감하고 이제 학생들에게 "힘내라, 힘내라!"
하고 성원하는
길가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습니다. 적어도 달리는 학생과 더불어 달리는 동
반자가 되어야겠
다고 생각했습니다.
3. '모범생'노릇에 지친 A
중학교 3학년인 A는 정말 착한 소년이었다. 부모님도 사리분별이 뛰어난 분들로 일류대
학을 나와 일류기
업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A가 태어나자마자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 기르기에 전념했
다고 한다. 현재
는 모 교양대학의 강사를 맡고 있다.
A는 온화한 부모님이 꾸려가는 훌륭한 가정에서 부모의 지적인 애정을 담뿍 받으며 반발
이나 반항을 모
르고 자랐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에도 순탄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는 당연히 학교성적도 좋았고 운동
도 잘했다. 성
격도 밝고 예의 바라서 학급이나 학생회의 일도 잘했다. 한마디로 팔방미인이었다.
그런 A가 귀가길에 충동적으로 작은 물건을 훔쳤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
두들 귀를 의심
했다. '설마 그 아이가......'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것이다.
A는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파고 들어갈 듯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 누가
보더라도 반성의
빛이 역력했다. 그래서 경찰과 가게주인도 순순히 용서해 주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A의 부모님은 A가 다른 일도 아니고 도둑질을 했다는 데 경악을 금치 못했고, 두 번 다
시 그런 짓을 못
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왜 도둑질을 했는가 하는 배경에는 생각이 미
치지 못했다.
부모님은 사건의 개요를 학교에 알리고 학교의 명예를 떨어뜨려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가정에서도 사건의 통지를 받은 학교에서도 A의 도둑질 이면에 숨은 의미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
다. A의 도둑질은 부모, 교사, 그리고 적지 않은 친구들이 보내는 기대와 선망이 섞인 힘내
라는 성원에 가
위눌린 나머지 마음이 빗나간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음날 A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표정으로 학교에 왔다. 선생님들도 전날의 사건을 완
전히 잊은 듯했
다. A의 비뚤어진 마음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4. A의 가출
그로부터 며칠 후, 아침에 학교로 전화가 왔다. A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이가 아침 5시에 조깅을 한다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요. 돌아오는 대로 학교에 보내
겠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군. 설마 교통사고는 아니겠지. 유괴도 아닐 테고 싸움을 한 건 더더욱 아
닐 테고......
그렇다고 어디 가서 연락을 안 할 아이도 아닌데......'
바쁜 아침시간이라 교사들은 이렇게 궁금해 할 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몇 차례 통화
를 하는 동안 사
건의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도 학교에서 좀 늦게 돌아왔어요. 왜 늦었냐고 물었더니 반에서 회의가 있어서 늦
었다는 거예요.
귀찮아서 대답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억지로 앉혀놓고 물었지요. 시험날짜가 다가오는데 회
의는 무슨 회의
냐고요. 그랬더니 그저 귀찮다는 듯이 건성으로만 대답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캐물으니
내일은 영어 단
어시험이 있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깜짝 놀라서 왜 일찍 말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
도 안 하더군요. 그러더니 퉁퉁 부은 얼굴로, '그걸 엄마가 알아서 뭐하게요?'하고 쏘아붙이
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잠자코 있었더니 이 녀석도 입을
꾹 다물고는 책
엔 손도 대지 않는 거예요. 텔레비젼을 보거나 컴퓨터오락이나 하면서 도무지 영어단어를
공부할 생각을
않더라구요. 그래서 조금 호되게 꾸짖었지요.
그랬더니 느닷없이, '시끄러워요! 제발 그만 하세요!'하고 고함을 치는 거예요. 그 아이가
어미한테 그
런 식으로 대드는 건 처음이라......하여간 나는 너무 놀라서......"
그래서 어머니와 아들이 옥신각신했다는 거였다. 사실 어머니가 어머니의 입장에서 말을
한 것이기 때문
에 이 이야기는 말한 사람의 입장에 치우친 감도 있었다. 게다가 전화로 대화를 나눈 것이
라 그 상황을 충
분히 전달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도 너무 심한 말을 한 것 같아요. 어쩐지 요즈
음에는 공부도
잘 안 하고......"라든가, "그 일에 대해서는 다시는 얘기하지 않기로 해놓구선, 그 약속을
깨뜨린 제가
나빴어요......"라는 말을 하는 걸 미루어 보면 도둑질을 했던 일을 다시 입에 담은 걸 몹시
반성하는 눈
치였다.
"그래서 걱정이 되어 그 아이 방에 들어갔더니......"
어머니의 말인즉, 아이의 방엘 들어갔더니 배낭이 보이지 않고 속옷도 몇 벌 없어졌고, 현
금카드도 사라
졌다는 것이다. 가출할 각오로 집을 나간 게 분명해서 아이 아버지와 친척분들이 수소문하
며 찾고 있다고
말했다.
5. 동반자로서 A와 함께 달렸다면
그날 오후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A는 스스로 전화를 걸어왔다. 교장 선생님은 A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
지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A의 부모님은 지금까지 달리는 A에게 힘내라고 외치는 응원자일 뿐이었습니다. 그건 교
장인 나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자신만이라도 A의 동반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날 A가
학교에 오면 A의
동반자로서 이런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풀베개>라는 작품을 쓴 유명한 작가도 가출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풀베개>의 머리말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단다.
'산길을 오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는 것이 많으면 원만하지 아니하고 정에 치우치면
괴롭기만 하다.
의지대로 살자니 궁핍만 따르는 이 세상. 아, 정말 살기가 고달프다. 살기가 고달파질수록
살기 좋은 곳으
로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나도 말이다. 바가지나 박박 긁는 할망구를 떼버리고 나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단다. 실제
로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와 술집에서 시간을 때운 적도 있지.
네 어머니나 우리 집 할망구나 결코 우리에게 나쁜 말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오히
려 정을 담아 말
을 하지.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귀찮아지고 나를 속박하는 것 같아 지겨워지는 거야. 그래
서, '제발 혼
자 있게 내버려 둬요.''제발 내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내 영역까지 침범하지 말아요.'하고
외치고 싶어
지지.
하지만 그렇게 내뱉었다가는 세 배, 네 배나 되는 잔소리를 들을게 뻔해서 입을 꾹 다물
고는 하지.
그래도 계속 종알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반발하거나 도망치고 싶어지는 거야. 반발하면
그것이 싸움으로
이어지고, 싸우면 도망치고 싶어지지. 무단결석은 도망치고 싶다는 심정과 반항이 합쳐져서
나타난 결과
야.
가출은 도망치는 것이지만, 도망치려 한 것은 자기 자신이야. 너는 네 의지에 따라 집을
나왔어. 나는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다른 아이들이, '그까짓 가출해 버려!'라든가, '우리 같이 도망
치자.'라고 유
혹해서 거기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혼자 결정했다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지.
가출이라는 행동이 결코 칭찬 받을 짓은 아니지만, 모든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좋은
현상이라는 말만은 하고 싶다.
너는 가출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체험했을 거야. 이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을 깨닫지 않았
니? 그러니 스스로 집에 전화를 걸었겠지. 잠시 빗나간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 집으로 돌아
갈 결심을 하고
돌아온 것은 잘한 일이야.
이제는 네가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차례야. 잔소리로 여겨질만큼 너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은 유치한 어린아이들은 할 수 없는 일이야. 스스로를 주장할 수 있는
어른이 아니라면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법이란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너는 어른의 모습에 한 걸음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인생공부
의 하나야. 누구
나 할 수 있는 체험은 아니지만 이 체험에서 얻은 것을 소중하게 간직해서 진정한 효도를
하도록 해......
사실 실패로 점철된 인생을 산 내가 이런 말을 하기가 쑥스럽기는 하지만 말이야......"
A와 어머니가 겪은 알력은 어느 집에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복잡한 감회에 젖어, '
학생들이여, 힘
내라.'하고 마음속으로 외쳐 본다.
6. 학생과 함께 달린다
며칠 후 드디어 A가 교장 선생님을 찾아왔다.
A가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교장 선생님은 정작 준비했던 말은 하
지 못하고 어뗜
사람이 스승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만을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토끼와 거북이에 나오는 이야기를 두고 스승이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시합을 했다는 이야기를 알고있지? 그런데 왜 사람들은 토끼가
시합에서 졌는가
만 생각하지 거북이가 어떻게 해서 시합에 이겼는가는 생각하지 않는 걸까? 거북이는 상대
가 토끼가 아니
라 어떤 동물이었더라도 시합에서 이겼을 거야. 왜냐하면 거북이는 절대로 상대를 보지 않
고 저 멀리 보이
는 목적지인 산기슭만을 쳐다보며 달리기 때문이지.'
자신의 목표를 분명하게 쳐다보고 자기 페이스대로 달려야 한단다. 절대로 옆사람에게
눈길을 주어서는
안돼. 멋진 녀석이라는 소리도 듣고 싶고,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고 싶고, 대단한 학생으로
여겨지고 싶다
는 욕심에 눈길을 주면 진정한 목표를 제대로 볼 수 가 없기 때문이지......"
교장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A에게 하면서 그 이야기가 A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
는 말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고 한다.
8편 문제학생과 함께 달린다
1. 무슨 행동을 해도 부정적인 눈길을 받는다
지금까지 많은 문제학생들을 대하면서 문제학생들은 세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인
눈길로 바라보고
있으며, 자라오면서 많은 면에서 끊임없이 부정당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로
부터 칭찬을 받거나 인정을 받은 일이 거의 없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까지
도 뒤집어썼다.
그들은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부정하며 살았고 '못난 놈'이라는 딱지가 떨어진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
자신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도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 살고 있었다.
그들 부모의 머리속에는, '어차피 우리는 밑바닥 인생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돼.
이 세상에서는
약삭빠른 녀석이 결국 득세하기 마련이야.'하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부모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사
고방식은 구조적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대학교수의 조사에서도 이것과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문제학생들에게 가정과 학교, 미래와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으면, 모든 면에
걸쳐서 음습
하고 부정적인 견해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나 같은 건 죽어도 괜찮아요.", "죽어도 편하지 못할 거예요. 죄를 많이 지었으
니까요."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설자리가 없는 자신, 갈 곳이 없는 자신에 대해 초조감을
느낀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뭔가 소동을 피우고 싶어한다. 엉뚱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
고 놀라게 하고 싶은 것이다. 나중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다. 어차피 부평초처럼 떠돌
다 가는 인생
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자포자기하고 이렇게 말한다.
"제 인생은 어차피 틀렸어요. 부자도 아니고 머리도 나쁘지요, 아버지는 가난뱅이이고 형
은 경찰서에 몇
차례나 들락거린 건달이지요, 게다가 어머니도 천박한 사람이에요. 집도 좁고 지저분한데다
사는 지역도
빈티가 줄줄 흘러요."
"어른들은 술만 마시고, 경마나 화투 같은 노름으로 돈벌 궁리만 하고 있어요. 여자들만
밝히고 음란한
소리나 해대고, 매일 밤 술 마시고 와서는 소리나 꽥꽥 질러대곤 하지요. 어른들이 정말 이
상해요."
"이놈의 세상 콱 뒤집어졌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내게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한 살이라
도 젊었을 때 많
이 놀아야지요. 어른이 되면 고생밖에 더 하겠어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개미처럼 일이나
해야겠죠. 그러
니 놀 수 있을 때 열심히 안 놀면 나만 손해잖아요, 안그래요?"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러는 자신을 혐오한다. 스스로를 좋아할 수가 없다. 그들의 마
음 깊은 곳에
는 자기혐오가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업(業)과도 같은 인생의 때이다.
하수구에 가
라앉은 침전물이다.
그들이 볼 때 교사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인간이다.
'누가 뭐래도 선생님은 대학출신이다. 차도 몰고 다니고 머리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 성적
을 쉽게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하고는 근본이 다르다. 그러니 우리 기분을 어떻게 알겠어! 우리
심정은 우리만
이 알 수 있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선생님과의 대화를 거부한다.
'건달은 건달하고 어울려야 제격이야.'
이렇게 해서 비행소년끼리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하다. 늘 신경이 곤두서 있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피해의식, 피
해자의식, 지나친 자의식, 그들은 그러한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으며,
거기에 에너
지를 소모한다. 만사가 헛되다고 생각한다. 아니, 헛된지 아닌지 판단할 힘조차 없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좋은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밝은 장래가 보장되는지를 모른다. 그런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것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2. 교사 자신의 시야가 좁지는 않은가
자포자기에 빠진 문제학생들을 보며 교사들은 초조해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지도하면 좋을까?"하고 자문하면서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교사들이 생각해내는 해결책은 '
어쨌든 그런 빗
나간 행동이나 태도는 고쳐 주어야겠다'는 것이다. 문제학생의 태도나 행동이 교사의 눈에
왜 문제로 비치
는지, 문제라고 느끼는 것은 교사 자신의 마음의 문제는 아닌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비뚤어진 행동에 집착하면서도, 문제학생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자신의
문제는 꺠닫지
못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성장하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
가. 자신의 삶을
한탄한 적은 없는가. 자신의 무능력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며, 이렇게 대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
움을 느꼈던 적은 없는가. 자기를 부정하고 회의에 깊게 빠졌던 적은 없는가. 그래서 자기
혐오에 빠졌던
적은 없는가. 우리는 모두 많건 적건 그런 시기를 거쳤고, 지금도 자신을 전면적으로 긍정하
지는 못한다.
인간은 대개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쓸데없이 발버둥치지 않고 물결치는 대로 살
아가고자 한다.
대개의 어른들이 그렇다. 젊은시절의 무모함은 버렸지만 그와 동시에 순수함도 잃었다. 세
상을 원만하게
살아가는 처신을 몸에 익혔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깊이 만족하지는 못한다. 어쩔 수가 없
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분노도 쌓인다. 그러나 분노가 쌓이는 원인을 캐낼
용기도 없다. 그
것을 캐내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지혜라고 치부해 버린다.
어른, 그렇다, 나 자신도 그런 과정을 거치며 어른이 되고 말았다. 나도 한때는 나쁜 짓을
했다. 너무나
부끄러워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책에서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것을 남에게 알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은 한두 가지 기억
이 있다.'
누구나 그런 수치스런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는 말을 듣고 안도감이 들지는 않는가. 이
사람저사람 모두
한두 가지씩 파렴치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훨씬 가벼워지지
않는가. 우리
는 모두 그런 인간이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모두들 마찬가지야. 나도 그렇단다.' 이런 심정으로 문제학생들을
바라보자. 그
러면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가슴속에 와 닿을 것이다. 그래서 업과도 같은 그들의 짐을 나
누어 질수는 없
을까 하는 고민도 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그들이 진 짐은 그들의 것이다. 그들 스스로 그
것을 버려야 한
다. 어른들이 모두 그랬듯이.
'후배녀석들아, 빨리 따라와!" 나는 이런 기분으로 문제학생들을 대한다. 그러면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
다. 그리고 학생들도 나에게 다가오고 싶은 심정을 맛본다.
그런 자세로 문제학생들을 대하는 것이 바로 그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3. 오토바이를 훔쳐서 타고 다닌 학생
<1>가정 분위기
중학교 3학년인 T는 훔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가 잡혔다. 연락을 받은 T의 어머니가
허겁지겁 경찰서
로 달려왔다. 그녀는 한창 바쁜 시간에 이런 일로 엄마를 경찰서까지 오게 하다니 하는 표
정으로 아들을
노려보고 고함을 질렀다.
"이, 머저리 자식아! 가자, 집에 가서 얘기하자!"
그녀는 아들을 잡아끌고 조사실을 나섰다.
T가 집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아버지가 고래고래 악을 썼다.
"이제부터 학교에서 돌어오면 집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마. 학원에 가는 건 좋지만 다른
곳에 갔다간 다
리몽둥이를 부러뜨릴 줄 알아!"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할 생각이었다. 용서를 빌면 화를 풀고, "이제 됐
다. 마음껏 놀러
다니거라."하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이 자식, 방
구석에 틀어박혀서 어디 고생 좀 해봐라."하고 되는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에 아
들이 반항이라
도 하면, 그걸 실마리로 해서 녀석의 기분을 풀어 줄 작정이었다. T의 아버지는 원래 자식
을 무조건 야단
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퉁퉁 부어 있는 아들에게 뭔가 말을 걸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밉기만 했다. 그래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옆길
로 새고 말았다.
가출할 생각은 없었지만 집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쁜 친구들의 집
으로 발길을 옮
겼다.
T는 이틀만에 친구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달여온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아버
지가 아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서였을까? 아니, 그보다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입을 열면, "바보자식!"이라든가, "이런 멍청이!"같은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서 입을 다물
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 생각하며 침묵을 택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어
떻게 대해야 좋
을지 몰라 그저 안절부절 못 할 뿐이었다. 부모가 모두 자신들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
할 능력이 모자
랐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열 차례 이상 면담하면서 T가 나에게 한 말을 정리한 내용이다. 형
식을 갖춘 면담
이 아니라 마음이 내킬 때마다 내 방에 찾아와서 털어놓았던 T의 이야기와 몇 차례의 가
정방문을 통해 들
은 부모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2>자신의 심정을 전달하는 능력
부모님은 T가 평범한 아이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들이 평범한 부모가 아니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 평범한 가정, 평범한 부모의 생활이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T
의 부모는 전
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머리속에는 그저 돈벌이에 대한 생각만이 꽉 차 있었다. 아버지는 어떤 회사의 야
간경비원이었는
데 낮에는 경마나 빠찡꼬와 같은 도박에만 신경을 쓰면서 생활다운 생활을 하지 않았다. 어
머니는 낮에 시
간제로 일을 했는데 이렇게 어렵게 사는 것은 모두 불운 탓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가난은 타고난 거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난이 숙명이라 벗어날 길이 없어.
세상에는 운이
좋아서 아무런 고생도 하지 않고 즐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과 달라. 젠장, 우리는
부모를 잘못
만났어. 죄가 있다면 그것뿐이야.'
T의 부모는 그런 울분을 안고 살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도박을 즐겼다.
'운이 좋으면 큰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어. 그 돈을 잘 써서 버젓한 생활을 해야지.'
이런 심정으로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에 도박을 했지만, 경마장
에 드나들면서
짜릿한 맛에 사로 잡히고는 도박자체가 인생의 낙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생활은 그런 식으로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돈문제로 부부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다. 경마로
돈을 벌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돈을 잃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T의 집안은 불화
가 끊이지 않았
고 가정의 포근함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T의 정서불안은 이런 분위기에서 싹텄다.
T는 오토바이광이 되었지만 자기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못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면 속이 후련해져요."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왜 속이 답답한지
는 몰랐다. 왜
늘 기분이 우울한지, 왜 늘상 불안하고 초조한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T는 빨리 부모에게서 독립해 자립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혼자서 아파트를 빌려서 무
언가를 하고
싶어요. 돈을 벌어서 잘살고 싶어요. 아무튼 지금은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
었으면 좋겠어
요. 밤 12시에 집에 들어가도 잠자코들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 학교에 친구가 한 명도 없어요. 친구들은 학원에서 사귄 다른 학교 아이들이에요.
그들은 나를
이해하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요. 사람들은 내 친구들을 깡패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좋은 친구들이에
요. 그 아이들도 집에 가봐야 좋은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돌아 다니는 거예
요.
나도 마찬가지에요. 집에 들어가 봤자,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는 잠만 자요. 가끔 깨어 있
으면 무슨 잔소
리가 그렇게 많은지, 공부해라, 좀 성실해라,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느냐, 끝도 없는
잔소리를 퍼부
어요.
아버지다운 모습은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으면서 저런 녀석은 빨리 죽어야 된다는 둥,
자기는 경마장
에서 돈을 펑펑 날리면서도 나에게는 돈만 뜯어간다는 둥, 쓸데없는 짓만 하고 다닌다는 둥,
우리 아버지
는 자기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나만 들들 볶는 사람이에요.
형은 또 어떤 줄 아세요?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는 집을 뛰쳐나갔어요. 어쩌다 집에 들
어와도 나하고는
말도 하지 않아요. 그래요, 우리 집은 그런 집이에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살고 있지만 고
등학교만 졸업
하면 나와 버릴 거예요......."
<3>마지막까지 함께 달리겠다는 각오와 능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것뿐이었다. 그의 불행은 가정의 불
행, 가정의 불행
은 부모의 불행, 부모의 불행은......하는 식으로 생각하니 T의 불행은 그의 가정의 구조적인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T에게 나 같은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의 울분
을 함께 나누며 공감을 느끼는 것뿐이지 않은가? 더구나 끝까지 그와 공감을 나눌 수 있을
까하는 불안도
들었다. 그의 불행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힘든 일
이었고, 도망치
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교사들은 T와 같은 아이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중간
에 자르고 비판
한다. 학생이 털어놓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감정이 북받친 절규인데 우리는 그것을 판에
박힌 논리로 반
박하려고 한다.
"그건 네가 너무 제멋대로 생각한 거야."라든가, "부모님에게는 네가 모르는 고충이 있단
다."라고 판에
박힌 말을 하면서 입을 막아 버린다. 그러나 그런 판에 박힌 반박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
움도 되지 않는
다. 아니, 오히려 그들과 교사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뿐이다. 그래서 결국 학생들은 '이
선생님도 우리
부모와 마찬가지야. 어른들이란 다 그렇지 뭐. 우리들의 심정은 조금도 알려고 하지 않아.
우리를 이해하
는 것은 역시 우리 친구들 뿐이야.'라는 확신을 굳히게 된다.
왜 교사들은 판에 박힌 사고와 충고를 좋아하고 학생의 감정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하
지 않는 걸까.
그들의 짐을 나누어지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재빨리 입막음을 하려는 의도가 강한 것은
아닐까.
그들의 감정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
을 느끼다 보면
우리의 감정도 어둡고 괴로워진다. 그것은 비참한 전쟁영화를 몇 시간이나 지켜보는 심정과
비슷하다. 굶
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난민들, 말라 비틀어져서 뼈만 남은 아이들을 지켜봐야 하는 심
정과 조금도 다
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학생들의 한스런 절규를 듣다 보면, 솔직히 말해서 피곤해진다. 대개는 참지
못하고 중간에
서 잘라 버린다.
"너만 그런 고민에 쌓여 있는 게 아니야."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나 한 일이야?"
"아무리 엉망진창이더라도 그게 네 집인 걸 참아야지 어떻게 하겠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집에나 고민은 있는 법이야."
이런 판에 박힌 설교를 하면서 이야기를 끊는다.
물론 교사들도 그들의 불행을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
면 그들의 감정
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들과 함께 헤맬 위험이 있다.
교사 자신이 확고한 주체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면 함께 쓰러지고 만다. 우리는 위와 같은
우려를 무의식
중에 마음 깊이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렵다. 산산이 부서진 가정을 타인인 내가 행복하게 되돌려 줄 수는 없다. 아니, 행복하
게 되돌리겠다
는 발상자체가 오만이고 주제넘은 생각일 수도 있다.
산산이 부서진 가정을 행복하게 되돌리는 것은 역시 당사자의 몫이다. 교사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포자기에 빠지기 쉬운 그들을 떠받치는 것, 그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T와 같이 문
제가 있는 아이들에게 삶의 보람을 찾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가정에서 혹은 학교에서 어떤 문제가 발행했을 때, 그것은 부모 혹은 교사인 우리들이 삶
을 살아가는 방
식에 아이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생각하자.
T와 끝까지 함께 달리는 교사가 되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
아야 하는가를
각오하는 일이다.
제4장 칭찬할 때 배려해야 할 것
1편 함께 달린다는 것은 상대를 인정하고 잘 살펴 칭찬하는 것
1. 함께 달린다는 의미
함께 달린다는 입장에 서서 함께 달린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함께 달린다는 것은 발
맞추어 달린다는
뜻이다. 학생과 같은 페이스를 지켜야 한다. 자동차에 앉아서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힘
내, 속도를 올
려!"하고 분발을 촉구하는 코치와는 다른 것이다.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감정에 차이가 생긴
다.
코치가 고마운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달리는 당사자가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
수록, '가만히
앉아서 편한 소리하고 있네.'하고 속으로 투덜거리게 된다.
평론가가 아무리 정당한 소리를 하더라도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현장의 고통도 모르면
서 부처님 가운
데 토막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런 이상적인 일이 실제로 가능한지 한 번이라도 좋으니 현
장에 와서 해보
라고 해. 입만 갖고 일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부러워.'하며 비꼬기 마련이다.
함께 달린다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함께 달리는 것은 이런 것이다.
O 상대의 이야기를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듣는 것
O 전화로 아무리 길게 하소연해도 불평 없이 듣는 것
O 아무리 답장이 없어도 장문의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는 것
O 언제나 같은 말투로 말을 거는 것
O 상대가 듣고 싶지 않아 하는 일에는 침묵하는 것
O 상대가 원할 때는 언제라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것
O 원한다면 상대를 내버려 두는 것
O 잘못된 길로 빠져들려고 할 때, 슬며시 주의를 주는 것
O 상대가 은혜를 입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이와 같은 점이 학생과 심리적으로 함께 달리는 요소이며 카운셀링의 기본방침이다.
2. 당사자는 어디까지나 자력으로 달여야 한다
함께 달린다는 것은 심리적인 지원이다. 함께 달리는 사람은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함께 달린다는
의미가 아주 잘 드러나 있는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6월의 어느 일요일, 체육대회가 열렸다. 도회지의 아이들이 끈기가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
서 일찍부터 문
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나는 이번 체육대회에서는 장거리달리기에 비중을 두기로 하고 원칙
적으로 모두 출
전시키기로 했다.
그날, 여자 800미터 달리기에 장애자학교의 F가 참가신청을 했다. F가 키가 작고 뚱뚱한
데다 심장에 가
벼운 이상이 있어 호흡이 다른 아이들보다 가쁜 편이었다. 그런 F가 800미터 달리기에 참가
신청을 한 것이
다.
우리는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F는 "저는 꼭 800미터 경주에 나갈 거예요"하고 고집을
피웠다. 우리는
그 학생의 의지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참가신청을 받기로 했다.
그날, 30여 명의 선수들과 함께 F도 출발을 했다. 그러나 학생들과의 간격이 순식간에
벌어졌고, 다른
학생들이 골인지점에 모두 들어왔는데도 그녀는 아직 두 바퀴만 남아 있었다.
F에게는 아무래도 벅찬 것 같아서 나는 천막 속에서 소리쳤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뛰어! 힘내!"
그러나 나의 고함이 그 학생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창백한
얼굴의 땀을 닦
으며 달리는 F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힘내라!"라고 소리치면
서 힘차게 박수
를 쳤다.
그때 천막 가까이에 있던 일반학급의 3학년 여학생 두 명이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없이
F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F의 두 팔을 굳게 잡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힘내!"
"이제 한 바퀴 남았어."
이 학생이 F를 격려하는 소리가 천막 안에 있는 내 귀에까지 들렸다. 정말 멋진 동반자였
다. 박수소리와
함성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그것은 F를 사이에 끼고 달리는 두 여학생의 우정의 동반에
공감하는 박수소
리, 함성소리였다.
마침내 F는, 아니 F와 그녀를 사이에 낀 두 여학생 등 세 사람은 골인을 했다. F는 탈진
한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다시 한 번 하늘을 찌르는 환성이 터졌다. 나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함께 달린다는 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두 여학생이 함께 달렸지만 물리적으로는 F에게 아무런 힘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
이 달리는 것은
기계가 달리는 것과 다르다. 일반학급의 상급생이 함께 달린 게 F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
었겠는가! 나는
새삼스럽게 교육은 동반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불운하고 불행한 환경에 처한 아이에게는 특히 함께 달리는 사람이 필요하다. 곁에서 함
께 달리는 사람
이 있을 때 당사자도 쉬지 않고 자력으로 달리는 것이다.
3. 보이지 않는 동반
체육대회를 치르며 나는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달려 주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동반도 얼마든지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7시 50분이면 교문을 들어선다. 역에서 학교까지가 그리 먼 거리는 아니
지만, 그 골목길
에서 나와 엇갈려 지나가는 학생을 한 명 만난다. 이 학생은 학교와는 반대방향으로 걸어가
곤 했다. 그 학
생이 교문을 달려나갈 때도 몇 차례나 있었다. 학생들의 등교시간은 8시 30분이기 때문에
이 학생은 일단
학교에 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바쁜 아침시간이기에 서로 인사만 하고 스쳐 지나가곤 했다.
처음에는 준비물을 잊고 와서 가지러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같은 행동이 매일 반복되자
난 무슨 일인
가 궁금해졌다.
그날 아침에도 같은 시각에 똑같은 장소에서 그 학생과 마주쳤다. 무척 추운 아침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아침마다 어디를 그렇게 가냐?"
내가 물었다.
"저, A를 데리러 가요."
나는 깜짝 놀랐다.
"아, 그래? 수고하는구나."
나는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후에 나는 학교를 향해서, 그리고 그 학생은 A
의 집을 향해서
걸어갔다.
A는 무단결석이 잦은 학생이었다. 최근에 들어서야 간신히 학교를 다시 나오기 시작했는
데 A가 다시 학
교에 나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나는 A가 학교에 나오게 된 것이 담임인 Y교사 덕
분인 줄 알았다.
매일 아침 스쳐 지나가는 이 학생의 숨은 노력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놀라움보다
는 감동을 느꼈
다. 담임인 Y선생의 말로는 그 학생은 매일 아침 7시 40분에 학교에 와서 교실에 가방을
놓고, 자기 집과
는 반대방향에 있는 A의 집까지 15분이나 걸어서 A를 데리러 간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반
년이나 계속된 일
이라고 했다. A는 중학교 2학년인데 1학년 2학기부터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교사는 학생에게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그 이유를 곧바로 알고 싶어한다. 원인
을 알아야만 마
음이 놓이는 것이다. A가 무단결석을 할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궁금했다.
A는 자전거를 좋아해서 작년 여름에는 자전거 종주대회에 단독으로 참가해서 완주를 했
다. 자전거 종주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하고, 협회에 편지로 참가신청을 알리는 등 각종 절차를
밟았다. 그리
고 A는 비행기로 현지로 날아가 그 자전거를 타고 며칠 동안 어른들과 함께 자면서 완주
를 했다는 이야기
다. A의 어디에 그런 활동력이 숨어 있었는지 신기했지만, 이 아이가 학교에 오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
다.
대부분의 교사는 그렇게 활동적인 아이가 학교에 오기를 꺼린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다. 게으르다는
둥, 주변 사람들이 너무 잘해 줘서 그렇다는 둥 비판이나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아무리
비난과 비판을
퍼붓더라도 A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집에 틀어박혔던 A가
대문을 나서기
까지 담임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그리고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아침마다 A
의 집으로 데리
러 가는 K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A가
다시 등교를 시
작한 것이다.
K는 바로 A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 체육대회에서 보았던 동반자와는 달리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동반
자였다. 더구나 교장인 나까지도 몇 개월이나 지나서 알았다.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동안 K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니 아무도 모르도록 조심하면서 자기 집과는 정
반대 방향에 사
는 A를 데리러 다녔다. K의 동반이야말로 참된 봉사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머리가 절
로 숙여졌다.
4. 함께 달리는 교사
함께 달리려면 상대의 속도를 알고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수업을 할 때나 누군가에게 무엇을 설명할 때면 "여기까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모
르는 거 없지
요?"하고 상대의 표정과 기분을 살피게 된다. 상대가 이해하는 속도를 알아 거기에 맞추려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의 수업에는 함께 달리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함께 달리겠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이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거나
전달하거나 주입
시키기만 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미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마치 텔레비
전에 나오는 탤
런트가 수업하는 것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기계와 함께 달리는 인상을 받는 것이다.
보시라는 말이 있다. 절에 바치는 돈을 보시라고 하는데, 크게는 상대에게는 없고 자기에
게는 있는 것을
나누며 서로 기뻐하는 것을 일컫는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서로 감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이다.
나날의 인간관계 속에도 보시의 마음은 이르는 곳마다 있다. 어떠한 사람도 반드시 남에
게 나눠 줄 수
있는 것을 지니고 있다.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도 보시라면, 상냥한 말투로 사람들을
대해 편안함
을 주는 것도 보시이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늘 정감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것도 보시이며,
사람을 대할
때 늘 상냥하고 화사한 표정으로 대하는 것도 보시이다. 일을 할 때 남을 거드는 것도 보시
에 속한다.
생각하면,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마음도 보시에 가깝지 않을까? 학생과 함께 달린다. 학생
의 고뇌를 함
께 나눈다. 혹은 조금 거리를 둔다. 자세히 지켜본다. 이러한 교사의 자세는 그야말로 사심
없는 순수함에
서 비롯된다. 자기에게 돌아올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한 모습은 앞에서 말한 보시의 정
신과 비슷하다
는 생각이 든다.
5. 베푸는 행복
누군가가 곤란한 처지에 놓이면 가여운 마음이 들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도움
을 주게 된다.
재해를 겪은 사람들, 불운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적으나마 위로의 금품을 전
달한다. 그러면
자신이 선행을 했다는 작은 만족감을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
는 일이 있다.
나름대로 정성껏 도왔는데 상대가 고맙다는 말 한마디 변변히 하지 않는 일이 있다. 그럴
때 당신은 어
떻게 생각하는가?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도와줬는데......신세진 걸 모르다니......'하면서
섭섭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섭섭한 마음을 갖는 것은 감사의 인사를 받고 싶거나 선한 사람이
라는 인정을 받
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교사도 마찬가지이다. 열심히 가르쳤는데도 학생들이 잘 따라주지 않거나 교사의 말에 귀
를 기울이지 않
는 일이 있다. 또 도움을 줬는데도 학생들이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일도 있다. 아니, 오히
려 은혜를 원수
로 갚는 일이 생기기조차 한다. 그럴 때면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가르치려 했던 내가 바보
야.'라든가 '부
모의 마음을 자식들이 모르듯이 교사의 마음을 학생들이 알 리가 있겠어?'하는 푸념을 내뱉
는다.
그러나 그런 푸념을 내뱉는 것은 결코 좋은 자세가 아니다. 마음이 빈약하기 때문인 것이
다.
그런 푸념을 학생들에게 직접 한다면 학생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정도 도와주고 은혜가 어쩌고저쩌고 한다면 차라리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게 낫겠
다."
"내가 언제 도와 달라고 매달렸나 뭘!"
인간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내가 그렇게 해줬는데 하고 푸념을 하기
때문이다. 이정
도 해줬으니 감사하다는 말이 있겠지. 그렇게 도왔으니 무언가 보답이 있겠지 하고 바라면
그것은 이미 보
시가 아니다. 대가를 바라면 인간관계가 무너지게 된다.
함께 달려 줄 수 있으면 기쁜 것이다. 도움을 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기쁨을 느끼며 상
대에게 쓸데없는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보시의 마음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나는 그 선생님에게 은혜를 입
었어.'하는 생
각을 조금이라도 갖도록 알게 모르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보시가 아니다. 그런 교사는 학생
을 위해서가 아
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 도움을 준 것이다.
학생이 스스로 교사의 은혜에 고마운 마음을 갖는 건 좋은 일이다. 좋다기보다 자연스럽
고 순수한 감정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사 자신이 나서서 학생에게 "내 은혜를 조금이라도 느껴야
해."라고 말한다
면 그것은 엄청난 잘못이다. 은혜는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은혜의 보답을 상대에게 강요해
서는 안 된다.
따라서 내가 그렇게 해줬는데 하는 푸념이 터져나오지 않는 범위내에서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 일도
학생을 돕는 것도 기쁨에 넘쳐서 해야 한다. 열심히 사는 것 자체가 기쁨이라면 학생에게
감사의 말을 듣
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6. 학생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
보답이나 감사를 바라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참된 보시가 아니다. 보답을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해줬는
데 하는 푸념이 따르는 것이다.
어떤 일을 베풀었으면 잠자코 잊어야 한다. 푸념을 하려면 아예 베풀지를 말아야 한다. 그
것이 산뜻하게
인생을 사는 법이다. 도움을 줄 학생이 있기에 베풀며 산다는 보다 근본적인 삶의 기쁨을
깨닫는 게 중요
하다. 따라서 스스로 돋보이려고 무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푸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도움
의 양을 줄여
야 한다. 그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몸을 너무 사려가면서 도우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
가면서 얻는 보
람이 너무 왜소해지지 않겠는가.
텔레비전을 보면 씨름해설자가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지금 선수들이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지 못하군요. 져도 좋으니까 기량을
마음껏 발휘했으
면 하는 바람입니다. 씨름이란 원래 이기고 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때 보는 사람이
즐거워하는 운동 아닙니까."
지나치게 인색하면 우리의 능력을 있는 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주저해서도 안 되고 꾸물
대서도 안 된다.
따라서 만족한 삶이란 무리도 하지 않으면서 지나치게 인색하지도 않으면서, 지극히 당연
하고 지극히 자
연스럽게, 조금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보시를 행하는 삶이다.
무리도 하지 않고 인색하지도 말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체면이나 다른 사람의 평판에 흔
들리지 말고 항
상 자기의 본심과 의지대로 살라는 뜻이다.
보시의 정신은 봉사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자원봉사란 사회와 타인을 위해서 아무런 대
가도 바라지 않
고 자주적이고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자원봉사의 세 가지 조건, 자발성,
복지성, 무상성
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특별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자원봉사의 정신은 일반가정에도 늘
상 살아 있다.
아버지는 출장에서 돌아오실 때 가족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사오신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면서 음식을 만든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구두를 닦고 쓰레기를 가지런히 모
아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이런 것들은 모두 가족들을 위해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는 행
동들이다. 자발
성, 복지성, 무상성의 세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행동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행동을 가리켜
봉사정신이라
고 하지 않고 배려, 마음씀씀이라고 한다. 가족간의 배려나 마음씀씀이를 지역사회에까지 확
산한다면 얼마
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되겠는가. 이것이 서구에서 외치는 자원봉사의 정신이다. 앞에서 예를
든 K와 같은
행동이야말로 존경스러운 봉사정신의 발로이다.
우리는 누구나 기꺼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도움을 주면서도 무리하거나 인색하지 않으면
서 살고 싶어한
다. 교사는 학생들을 향해서 베푸는 존재이다. 그러한 자각을 때때로 확인하기 바란다.
2편 중학생들의 미묘한 마음
1. '선생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칭찬하지 마세요'
칭찬받고 기분나쁠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칭찬
하는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자존심이 강해지거나 친구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춘기의 중학생
들을 대할 때는 특히 그렇다. 칭찬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 일이 적지 않다.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면 약간 건방져진다. 심지어는 평소에 자기가 존경하지 않는 교사에
게 칭찬을 들으
면, "저런 사람에게 내가 칭찬을 듣다니, 소름이 끼친다!"라고 내뱉는 아이도 있다.
어떤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볼일이 있어서 교무실에 들른 A가 담임 선생에게 다가
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다른 아이들 앞에서 저를 칭찬하지 마세요." 어안이 벙벙한 담임 선생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뭐라고 했지?"
"나 혼자 모범생인 척하는 것 같아서 쑥스럽거든요."
"아, 그랬구나."
그제서야 담임인 S선생은 A의 복잡한 심정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 작은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렇다.
그날 아침에 담임 선생은 정말 흐뭇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전날은 바람이 몹시 불었는데,
방과 후 교장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출장을 갈 일이 생겨서 자전거 보관소에 갔더니 자전거 몇 대가 바
람에 쓰러져 있
었다. 자전거가 겹겹이 쓰러져 있어서 타고 갈 자전거를 꺼내려면 몇 대의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이거 시간도 없는데 큰일인걸."
교장 선생님은 끝에서부터 자전거를 한 대씩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핸들이 옆 자전거의
바퀴상에 끼여
서 그것을 빼내자니 여간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혼자서 힘겹게 자전거를 세우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야구부 학생
한 명이 달려
왔다.
"교장 선생님, 힘들지 않으세요?"
"응? 고마워. 이게 아주 힘이 드는걸."
"선생님, 제가 할께요."
야구부 유니폼 차림의 학생은 겹겹이 쓰러진 자전거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말했다.
교장 선생님은 정장을 하고 있어서 옷이 더럽혀질까 봐 손으로만 자전거를 빼내려고 했었
다. 학생은 쉽
게 몇 대의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도와 줘서 정말 고맙다."
교장 선생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별것도 아닌걸요, 뭘."
학생은 씩씩하게 말하면서 야구모를 벗어 인사를 하고는 운동장쪽으로 달려갔다. 이 학생
이 S선생 반의
A였던 것이다.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S선생은 반 아이들에게 소개하고는 A를 칭찬했
다.
"A, 곤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고 재빨리 뛰어가서 도움을 준 것은 정말 훌륭한 행동이
다. 너는 멋있는
아이야."
이것이 A가 "선생님,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칭찬하지 마세요"라고 말한 이유였다.
2. 중학생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잘 알자
A가 어떤 기분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A의 말대로, 반 아이들 앞에서 자기만 칭찬하면, 친구들이 교장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한 짓이라고 싫
어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몇 명이 함께 교장 선생님을 도왔다면 칭찬을 받아도
별 문제가 없지
만, A 혼자서 한 행동이기 때문에 친구들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를 수 있다. 말하자면 친
구들이 시샘의
표적이 되기 쉬운 것이다.
이럴 때 S선생은 A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무슨 소리야, 선행을 한 것이 기특해서 반 아이들에게 모두 알렸을 뿐이야. 창피하게 생
각할 것 없어."
이렇게 조근조근 설명해야 할까.
"선행을 해서 칭찬을 했으니 좋은 일 아니야? 부끄러워하는 게 틀렸어."
이렇게 A의 생각을 바꾸어 주어야 할까.
"친구들이 놀려서 그래? 놀리는 녀석들이 나쁜 거야. 앞으로도 용기를 갖고 착한 일을 많
이 하렴."
이렇게 토닥거려야 할까.
"누가 너를 놀렸어? 그 녀석 생각이 비뚤어진 거야. 내가 주의를 줘야겠군."
이렇게 초점을 다른 학생에게 맞춰야 할까.
A의 심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교사로서 어떤 말을 할 것인가는 한 가지로 정해져 있지
는 않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모두 교사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럴 때는 굳이 담임을 찾아오기까지 한 A의 심정을 잘 헤아려서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
좋다.
"내가 한 칭찬 때문에 난처했나 보구나. 그렇다면 내가 잘못했는걸. 미안하게 됐다." 이렇
게 공감을 표
한 뒤에, "그런데 왜 난처했지?" 하고 물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왜냐하면 아이들이 자주
비꼬면서 놀
려서요."하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저, 교장 선생님은 나이드신 분이잖아요. 그런
분이 무거운
자전거를 들어올리는 게 힘들어 보이기도 하고 딱해 보여서 도와 드린 것뿐인데......"하면서
자신의 기분
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심정을 털어놓으면, "그래, 그랬었구나."하고 맞장구를
치고는, "너는
정말 인정이 많은 아이로구나."하고 다시 칭찬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담임과 A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3. 흔들리는 중학생의 마음
어떤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서 우수상에 뽑혀 표창을 받게 된 B가 미술 담당 C선생에게 상장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실은 선생님, 저 혼자 그린 게 아니고 형이 도와 줬어요. 그래서 상을 받을 수 없어
요."
"그래? 너는 정직한 아이구나. 형이 도와 줬다는 걸 말하려면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인데."
C선생은 감탄했다.
"얼마나 마음에 걸렸는지 몰라요. 저는 정직하지 않아요. 형이 그린 걸 내가 그린양 속이
고 냈으니 거짓
말쟁이일 뿐이에요."
B는 단숨에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면도 있어. 하지만 나도 경험한 일이지만, 일단 거짓말을 한 다음에
그것을 거짓말
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상당히 용기있는 일이야."
미술 선생은 자신도 거짓말을 스스로 고백한 일이 있는 양, 나도 경험한 일이지만 하고
서두를 꺼냈다.
"일단 말을 내뱉고 나면 그 말이 틀리다는 것을 알아도 고치기가 그리 쉽지 않아. 사실
자기 생각이 틀
렸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기란 힘든 법이지. 인간에게는 원래 그런 면이 있기 때문에 네
가 장하다고 말
하는 거야."
여기서 미술 선생이 이 학생의 잘못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약점과 장점에 대해 말하
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바란다.
미술 선생은 약한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B의 잘못을 치부한 후에 B에게 직접 물었
다.
"자, 네 우수상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만일 네가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니?"
이것은 B에게 자기가 저지른 부정한 행위에 대한 대처를 묻는 질문이었다.
"우수상은 취소......"
말을 하려는 B를 막으며 미술 선생은 말했다.
"한번 발표한 것을 취소하려면 그 이유가 분명해야 돼. 선생님이 잘못 판단했다고 해도
아이들이 믿지를
않을 거야. 왜냐하면 작품이 우수하다는 걸 전람회에서 모두 보았으니까. 취소하는 이유를
밝히면 아이들
에게 네 거짓말을 드러내게 돼."
"......"
"선생님이 보기에 너는 이미 충분히 반성했어. 반성을 했으니 나에게 와서 솔직하게 잘
못을 시인했지.
그 동안 얼마나 창피하고 속상했겠니. 나름대로 꽤 고민이 많았을 걸로 안다. 고민 끝에 용
기를 내서 나에
게 잘못을 밝히러 온 거잖아. 선생님은 그만하면 충분히 잘못을 빌었다고 생각해."
"......"
B는 잠자코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진지한 얼굴에는 사라지는 줄만 알았던
중학생의 순수
함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감동을 받은 미술 선생은 조용히 말했다.
"우수상은 그냥 받아. 그리고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에게 가지고 와. 가족들에게
는 오늘 나에게
했던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너에게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알지만,
네가 너 스스로
에게 주는 벌이라고 생각하고 그 고통을 이겨내기를 바래. 너는 순수한 아이니까 반드시 해
낼 수 있을 거
야. 아버지와 어머니도 솔직하게 고백하는 네 말을 듣고 마음 깊이 기뻐하실 거야. 자, 용
기를 내서 극복
해."
"......해보겠습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B는 이렇게 말하고 머리를 푹 숙였다.
"아니야, 나야말로 너에게 고맙다고 하고 싶어. 정말 오랜만에 순수함을 맛봤는걸."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건 약속의 악수이기도 했다.
3편 칭찬할 때는 거리를 두자
1. 편지로 칭찬한다
교사가 학생들의 태도나 행동이 훌륭하다고 느끼고 그것을 말로써 칭찬하는 것은 자연스
럽고 순수한 행
동이다.
학생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글을 정말 감정이 풍부하게 읽는구나.", "음악을 잘
아는구나."하
는 이야기를 들으면, 교사의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기뻐한다. 게다가 교사가 그런 마음
을 편지를 통해
서 학생들에게 보내면 더욱 의미가 깊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면, 교사에게는 자기가 느낀 감정의 확인이 되며, 편지를 받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그
러한 교사의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몇 차례고 다시 읽음으로써 자신의 언동이나 그때의
기분을 되돌아보
게 된다.
병원에 오래 입원했던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가족들이 문병 오는 것도 기뻤지만 가족
이 보낸 위로편
지는 너무 감동적이어서 퇴원한 뒤까지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과
딸의 편지를 몇
차례고 되풀이해서 읽었고,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학생이 선생님에게서 개인적인 편지를 받는 일이 매우 드문 경우다. 교실에서 날마다 대
하는 선생님이었
지만, 선생님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의 기쁨이란 말을 걸었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선생님이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시는구나.','우리 선생님이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시다
니.','선생님이
내가 한 일을 높게 평가하시는구나.'하며 학생들은 감동한다. 그래서 선생님에 대한 깊은 정
을 느끼고 믿
음도 더욱 깊어진다.
어떤 중학교 교사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학생 개개인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쓰자. 편
지에서는 학생
의 장점을 들어 칭찬하자'라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설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 교사는 나에게, "이렇게 자기 과제를 가짐으로써, 나는 의식적으로 학생들 하나하나의
좋은 태도나
행동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학생들을 대하는 그 교사의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
었다.
어떤 학생은 그 교사에게 받은 편지를 아직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한다면서 보여 주기도 했
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OO군에게.
오늘 친구와 함께 관리인 아저씨의 일을 거들어 드렸다면서? 그 아저씨가 아주 기뻐하면
서 나에게 말씀
하셨단다. 너와 같은 학생이 있어서 내가 얼마나 으쓱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모른단다. 정말
고마워.
매주 월요일은 학교에서 쓰레기를 모으는 날이잖니. 그런데 다른 관리인 아저씨가 결근을
하시는 바람에
혼자서 무척 바쁘셨단다. 커다란 비닐봉지를 끙끙거리면서 밖에까지 옮기느라 아주 쩔쩔맸
다는 거야.
그런데 네가 "아저씨 도와 드릴게요."하면서 도와 드렸다지? 게다가 지나가던 네 친구까
지 불러서 함께
도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저씨는 이 학교에 온 지가 꽤 오래 되었지만 이렇게 마음 뿌듯
한 적이 없었다
는구나.
좋은 일을 하려면 공연히 쑥스럽고 겸연쩍은 법이야. 하지만 그런 어색한 마음을 떨쳐 버
리고 선행을 한
네가 선생님은 정말 자랑스럽단다.
정말 고맙다.
관리인 아저씨도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일상에서 일어나는 빛나는 선행을 빠뜨리지 않고 챙기는 이 교사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2. 전화로 칭찬한다
전화는 이쪽이 원할 때 상대를 부르는 도구, 상대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르는 채 이쪽
의 기분을 전하
는 기계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전화는 참으로 자기본위의 도구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
보고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전화를 통해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학생들을 칭찬하고 싶어도 겸연쩍어서 못 할 때가 있다. 칭찬을 듣는 학생도 기쁜 표정을
지으면 친구들
의 시샘을 살까 봐 그러는지 겸연쩍어하는 일이 많다. 개중에는 오히려 입을 삐죽 내밀고
화가 난 듯한 표
정을 짓는 학생도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정신박약의 장애가 있는 학생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얼
마 전에 걷기가
불편한 A와 함께 몇 시간동안 등산을 한 일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기운차게 등산코스를 올랐지만 나는 쉬운 길을 골라 쉬어가며 그 여학생과
함께 걸었다.
A는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러는지 아니면 원래 그러는지 내키는 대로 불쑥불쑥 쉬면서 좀
처럼 걸으려고 하
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말을 걸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는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기분이
내키면 자기가
말을 걸었다. 긴장과 이완의 변화가 심한 아이인 듯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A가 불쑥 물었다.
"선생님 전화번호는 몇 번이세요? 제 전화번호는 O O O O 번이에요."
그래서 나는 전화기를 들어올리는 흉내를 내며 번호를 말하면서 다이얼을 돌리는 시늉을
했다.
"여보세요. A양입니까?"
그러자 A는 의외일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내 물음에 대답을 하였다.
"네, 그런데요."
그녀는 왼손을 주먹 쥐어 귀에 대고 있었다. 나와 전화놀이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건강하지요?"
"네, 건강해요."
"피곤합니까?"
"아니오, 피곤하지 않아요."
"지금부터 어디로 갈 거죠?"
"산을 올라 산장까지 갈 거예요."
"걸을 수 있습니까?"
"네,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걸으면서 계속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A에 대해서 뜻밖에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한 뒤, 나는 전화의 효과에 대해서 기존의 관념을 바꾸었다.
요즈음 아이들은 사람과 직접적인 연결을 맺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
을 보조라면, 친구를 대하듯 하는 말투를 쓰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런데 전화로 통화하면 달
라지는 것은 재
미있는 일이다.
학생들은 교사가 전화를 걸어 칭찬을 하면, "아니에요. 선생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예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칭찬하시면 정말 창피해요."라면서 자신의 기분을 말로써 똑똑하게 표현
한다.
이렇게 자신의 기분을 말로써 표현하는 건 자기 기분을 확인하고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큰 의
미를 갖는다.
3. 제3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칭찬한다
교사에게 직접 칭찬 받아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친구로부터, "야, 선생님이 네 칭찬 많이
하시더라."하
는 말을 들으면 하늘을 날 듯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선생님에게 직접 칭찬을 들으면 쓸데없는 억측이 발동한다. 그래서, '저 선생님이 비행기
태워놓고 또
뭘 시키려고 저러시나.'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기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친구에게 자신을 칭찬했다는 말을 들으면 억측을 할
여지가 없어진
다. 그래서,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하면서 관심을 보인다. "너는 책을 읽는 감각이나
글을 쓰는 감
각이 날카로워서 시인기질이 엿보인대."하고 친구가 말하면 겸연쩍어서, "뭐, 나보고 시인
기질이 있다고?
시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걸."하고 말은 하면서도 나중에 슬그머니 도서관에 가서 시집 몇
권을 빌리는 일
이 있다. 이와 같이 학생들은 간접적으로 들은 자기 이야기에 대단히 큰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교사들이 학생들의 개인적인 결점을 다른 학생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
이다.
따라서 교사는 동료교사나 학생들에게 학생 개개인의 결점, 단점, 부정적인 이미지 따위를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네 담임 선생님이 너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 걱정 좀 끼쳐 드리지 말아라."
"네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요즘 네가 하도 말을 하지 않아서 외롭다고 하시더구나. 어머니
는 너에 대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거야."
엉뚱한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아이들은 '나원참, 걱정이 되면 나에게 직접 말씀하
실 일이지'하고
불만을 품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네 담임 선생님이 너를 무척 믿으시더라."라든가, "어머니가 너를 꽉 믿
으시더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다 한다면서?"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에요."하고 말은 하면서도 상
쾌하고 안정된
기분을 맛보게 된다.
학생들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그 좋은 점을 칭찬하면, 다시 말해서 '칭찬'이라는 씨앗을
뿌리면, 어디
선가 '좋은 싹'이 돋아나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4편 주변을 칭찬하자
1. 학생들의 흥미에 관심을 기울이자
우리는 자기가 관심이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 주는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프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고, 골프에 빠진 사람은 질리지도 않는지 골프얘기로 날을 지
샌다.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은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십년지기 만큼이나 공감을 느낀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선생님이 긍정적인 관심을 기울
인다는 사실만으
로도 친밀감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취미를 깔보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교사를 멀리 하
게 되고 그 교
사가 담당하는 과목까지 싫어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교사들도 독서를 좋아하는 교사는 독서를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호감을 갖기 마련이고,
운동을 좋아하는
교사는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이러한 일방적인 경향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교사로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
지 않는 것, 싫어하고 기피하는 것일지라도 헐뜯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록큰롤 따위가 음악 축에나 끼냐?"
"텔레비젼에 넋을 잃는 사람치고 똑똑한 놈 못 봤다."
"그 나이에 전철에서 만화책이나 보다니 한심하다 한심해."
"해가 뜨나 해가 지나 축구만 하다니, 입시과목에 축구가 있냐?"
학생들은 이런 소리를 들으면 분해서 화를 삭이지 못한다.
남을 비난하는 말을 하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기호의 문제일 뿐 논리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같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 긍정적으로 말해야 듣는 사람도 마음이 편안하고
또한 말하는 사
람도 편안해진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과장을 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취미나 기호가 자신과
항상 일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명한 교사는 학생들의 흥미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은 학생들과 함께 달리는 교사가
지녀야 할 기본
자질이다.
2. 반 전체를 칭찬한다
"이 반은 언제나 활기차고 밝아."
"너희 반은 정리가 잘 되어 있구나."
"이 학급에서 수업하면 피곤을 모르겠단 말씀이야."
이와 같은 칭찬을 반복해서 들은 학급은 정말 그렇게 변한다. 그러나 반대로,
"이 반은 통 반응이 없어서 마치 절간에 온 것 같아."
"뭐야, 왜 이렇게들 제멋대로야? 반장, 아이들 좀 제대로 통솔해."
"왜 이렇게들 의지가 약해?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입시까지 버틸 수 있겠어? 그렇게 동태
눈을 하고 앉아
있어서야 되겠어? 어디 대답 좀 해봐! 정말 한심한 녀석들이군."
이렇게 계속해서 면박을 주면 그 반은 더욱더 분위기가 가라앉아 버린다. 암시가 학급 천
체에 먹혀든 것
이다.
실제로, 반에 활기차고 재담이 뛰어난 아이들이 몇 명 있으면 반 전체의 분위기가 밝아진
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따라 학생들 개개인도 활동적으로 변한다. 반대로 그렇게 앞장서서 분위기를 이끄
는 아이가 없는
집단에서는 전체가 소극적으로 가라앉는 경우가 많다.
교사들은 대체적으로 적극적인 것을 좋아하고 소극적인 것은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
서 활동적인 분
위기를 높게 평가하고 쳐진 분위기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각 개인의 개성은 다르다. 활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성적인 사람도 있다. 한
지역의 주민
성을 가리켜 좋다, 나쁘다 하고 말할 수 없듯이 개인의 성향을 어떤 기준에 따라 재단할
수는 없다. 교사
는 적어도 학급의 경향이나 특징을 부정하지 않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3. 학생들의 가정을 칭찬한다
학생들의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정은 그 가족 구성원에게는 운명공동체이다.
누구나 자기 가
정을 최고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가정과 가족이 비난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때문에 자기의
가정이나 가족에 대해서 불만이나 울분을 터뜨리더라도 교사가 거기에 동조해서는 안된다.
어떤 비뚤어진 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집은 말이죠, 어머니는 안 계시고 잔소리꾼인 아버지만 계신데 판자집에 가난뱅이
죠. 생각하면 할
수록 넌덜머리가 나요. 이따위 집구석에서 빨리 나오고 싶어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너희 집에 대해 그렇게 느끼다니, 참 괴롭겠구나."정도로 대꾸해
야 한다.
혹시라도, "그래, 게으른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 있으려니 얼마나 고달프겠니."하고 가족
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어떤 아이라도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좋은 부모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부모님을 존경할 수 없을 때 자포자기하는
수가 많다.
그럴 때 교사들은, "네 아버지는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분이시다. 네 아버지 덕택에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큰 도움을 받는지 모른다."라든가, "이런 말을 해서 어떨지 모르지만, 네 어머니는
묵묵히 자기 일
에 전념하는 분이란다. 모두들 참 성실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지."라고 좋은 점을 지적해서 학
생들이 다소라
도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개 불만이나 불평을 지니고 있을 때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가 비굴해진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불안할 때는 가정과 가족의 결점, 자기 집의 부족한 점에
집착한다. 그
래서 어둡고 음습해지기 쉽다. 그럴 때 교사가 다른 각도에서 본 생각을 일러주고 학생의
가정과 가족의
장점을 지적한다면, 그것이 정서적 안정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4.지역을 칭찬한다
중학교는 대개 가까운 지역의 학생들이 다닌다. 그리고 지역마다 그 지역의 독특한 주민
감정과 생활감정
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좋고 나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때때로 교사들은 자신의 기호에 맞으면 '좋다'고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나쁘다'고 느낀
다.
교사들끼리, "우리 지역 주민은 기질이 나빠.", "부모의 문화수준이 낮으니 애들이 그 모
양이지.", "지
역에 지적인 분위기가 없어."하는 말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스스로를 반성
해야 한다.
지역이나 가정,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는 알게 모르게 학생들을 깔보는 태
도와 행동이 되
어 나타난다. 개중에는, "이따위 지역에서 무슨 교육이 되겠어?", "지역과 가정이 바뀌지 않
는 한 학생들
도 가망이 없어."라고 포기하는 교사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학생은 물론 교사 자신에게도 큰
불행이다. 교
사는 지역에 대해 보다 잘 알아야 하며,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감정에 파고들어 그 장
점을 체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활을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지역에 살면서 출퇴근을 하는 교
사가 많겠지만,
지역집회를 학교가 주최하거나 운동회나 체육대회에 지역주민들을 초대하거나 공개수업을
개최하는 등 학
교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그리고 교사는 지역행상 등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 필요가 있다. 지역주민과 더불어 생활하고 봉사하는 교사상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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