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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당신의 아이를 꾸짖는 방법

by Frais Study 2020. 6. 20.

    제 1장 꾸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1 꾸짖는 것은 누구인가?
    피상적인 훈계는 약이 되지 않는다.
  나는 중학교 교장이다. 교장은 학생 개개인과  직접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그래서  학급 
담임을 맡았을 때가 그립기도 하다. 담임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상대를 
이해하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그래서 서로의 마음을  통해 커다란 기쁨을 얻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최근에 새삼스럽게 그런 기쁨을 느낀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과장
된 감이 없지 않으나, 비교적 평온한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에게는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이
었다.
  2학년 남학생 네 명이 다방에서 담배를 피우다 발각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2학년 선생
님들은 네 명을 분담해서 조사하기로 했다.  왜 그런 짓을 했는가,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는가, 어떤 기분이었는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뭐 이런 것들을 추궁하고, 그들
의 부모님도 학교에 오게 해서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서 교장인 나와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학생과 부모님들은 교장에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
습니다." 하고 약속했고, 교장은 '꾸짖어야 하는'  자리였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새삼스럽게 
교장은 정말로 재미없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난 그 자리에서 추상적인  훈계밖에 하지 못했다. "실수로 어리석은  행동을 했지만, 
그것을 교훈삼아 앞으로는 착실하게 생활하도록 하거라." 라는  상투적인 말밖에 하지 못하
는 내가 답답하기만 했다.
  나는 학생들이 어떤 심정에서 담배를 피웠는지 좀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학생들은 아마
도 지금까지 자신의 심정을 철저하게 되돌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런 짓을 
했지?" 하는 질문을 받아도, "그저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라든가, "특별한 이유  따위는 
없어요. 장난스런 심정으로 무심코..." 하는 정도의  대답으로 얼버무렸을 것이다. 그렇게 얼
버무리며 적당히 넘어가면 교사나 부모는,"그런 바보같은 짓일랑 두 번 다시 하지 마라" 하
고 설교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예." 하고 대답하고는 홀가분한 마음이 된다.
  이렇게 해서 결국 아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갈 수 있는 모처럼의 기
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 친구에게 '다방을 출입한다'
고 뽐내고 싶고, 그냥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는 시시한 것 같고, 누가 다방  창문으로 
들여다보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쩨쩨한 소견 같고, 친구녀석들보다 내가 어른이라는 기분
을 맛보려고 담배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는 마음과, 그런 일들을 해냈다는 '뿌듯함'도 느끼
고 왜 나는 그런 것에 집착하는가, 집착해서 얻는 가치는  무엇인가 곰곰이 따져 보는 과정
을 거치면서, '어른'에 한걸음 더 다가간 자신을 응시하게 된다. 그러나 교사인, 아니 교장인 
나는 그런 과정을 배려하며 대화하지 않고 피상적인 '훈계'와 '꾸중'으로  얼렁뚱땅 마무리를 
했던 것이다.
  며칠 후, 출장에서 돌아오던 나는 학교  근처에서 A와 맞닥뜨렸다. A는 다방에서 담배를 
피운 사건의 장본인이었다.
  "이런 시간에 웬일이야 조퇴했니?"
  내가 물었다.
  "책방에 가는 길이에요."
  A가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은 점심시간이 아니냐? 선생님에게 허락은 받았니? 수업이 끝나고 책방에 가
면 안 되겠니?"
  그러자 A가 서슴없이 대꾸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오늘 나오는 잡지를  사는 것까지 선생님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나
요?"
  녀석은 방향을 바꾸어 후다닥 뛰어가더니 학교  담을 훌쩍 뛰어넘어 안으로 사라져  버렸
다.
  순간, 불러세워서 야단을 칠까 생각했지만, A의 얼굴표정이나 말투가 워낙 서슴없었기 때
문에 '녀석, 젊고 발랄하구나' 하면서 빙긋 웃고 말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방에서 담배를 피우다 야단맞은 사건이 A의 마음에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 느낌을 받은  까닭은 내가 교장이기 때문일까. 이럴  때 A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사소한 잘못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가
  'A의 담임에게 알릴까.'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지난 번에 야단맞던 A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때 A의 담임은 A의 어머니를 불러놓고 어떻게 했던가 .A의 친구관계를 들추고, 1학년 때의 
생활상태를 평가하고, 앞으로 다방에 들어가거나 담배를 피우면 바람직한 사람, 남들에게 신
뢰받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꾸짖었다. 그러고 나서는 그것을 A에게 다짐받으려고 했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A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자 담임은 다시 다그쳤다.
  "알아들은 거야, 못알아들은 거야, 말 좀 해봐."
  그러자 A의 엄머니가 거들고 나섰다.
  "잘 알아들었지,그렇지?"
  "예."
  그제서야 A는 고개를 끄덕임며 툭 내뱉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생활지도 교사에게 알릴까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똑같은 결과를 낳을 
게 뻔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그냥 넘기자. A는 서둘러 잡지를  사고 싶은 마음에 점심시간이지
만 교문 밖으로 나왔던 거야. 무슨 잡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뭐 별 일 아니지 않은가.'
  나는 결국 이렇게 생각하고 덮어두기로 했다.
  그러나 그래도 마음이 꺼림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 채 며칠을 보냈다.
  아무리 사소한 잘못이라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확실히 그럴 경우도 있다. A
는 담을 뛰어넘어 학교에 들어갔으니 교칙을 위반한 것이다. 그것도 교장인 내가 뻔히 바라
보는 데서 그런 짓을 했다. '이런 일을 용서해서는 안  돼. 녀석은 교장을 완전히 무시한 게 
아닌가. 왜 그때  그녀석에게 호통을 치지 못했을까. 잘못을 무작정 눈감아 주는 것은 교사
로서 직분을 태만히 한 것이 아닌가. 그래,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야.'
  이렇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생각할 것 있나. A는 교장을 무시할 생각이 없었어. 녀석은 멋적어서 응
석을 부리고 싶었고, 게다가 완전히 굴복하기는 싫으니까 담을 뛰어넘었을 뿐이야. 내  말을 
듣고 다른 아이보다 잡지를 빨리 사고 싶은 것을 단념했으니  내 권위를 인정한 거야. 그러
면 됐지 않을까.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어떤 잡지에 흥미가 있는지나 물어 보자.'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왜 A에게 이다지도 신경을 쓰는 걸까. 같이 걸렸던 B와  C의 경우
에는 마음에서 홀가분하게 털어버렸는데 말이다.
  
    학생이 교사를 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번에 이런 일이 있었다. N이 교장실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는 1학기 때 졸업생들
과 함께 학교 근처 공원에서 불량배들과 대판 싸움을 벌였던 녀석이었다. N은 경찰에서 조
사를 받을 때 자신은 전혀 싸움에 끼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졸업생 몇 명과 
어울렸으니 문제가 있는 아이임에는 분명했다. 바로 그 N이 자신의 의자를 들고, 조금 무례
한 태도로 교장실로 들어선 것이다.
  나는 가볍게 인사말을 건넸다.
  "너니? 요즘 어때?"
  "예? 어떻다뇨? 뭐가요?"
  N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반문을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고쳐 물었다.
  "공부, 부모님 대하기, 친구관계, 그밖의 여러 가지들 말이다."
  N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잘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마세요."
  "그래? 참 기쁜 일인걸. 하지만 교장실에 들어올 때는 의자를 복도에 놓고 문앞에서 공손
하게 인사하면서 들어오는게 예의야.'
  "예, 죄송합니다. 마침 학생회 모임 때문에 의자를 들고 체육관으로 가는 길이라서..."
  지나가는 길에 불쑥 들렀다는 이야기였다. 녀석이 귀엽지 않은가? 그런 N의 행동을 두고 
여기저기 어정거려서는 안 된다, 예의를 모른다, 앞으로 버릇없는 행동을 삼가라 하고  꾸짖
어서야 되겠는가.
  N이 나간 뒤에 나는 흐뭇한 기분을 맛보았다. 아마 N은  조금 늦었다고 선생님에게 꾸중
을 들었을 것이다. 3학년인 N이 교실에서 체육관으로 가는 길에 1층에 있는 교장실까지 왔
으니 상당히 먼 길을 돈 셈이다. 일부러 마음먹고 온  것이다. N은 어떤 마음으로 교장실까
지 왔을까 N 스스로도 자기 마음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N이 나를 피하지 않
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녀석이 나를 피한다면 아무리  지도하고 
교육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내가 너무 달콤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인가를 저질러 놓고 교장
실 분위기를 엿보러 왔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의심은 지나친 억측이어서 싫었다. 그
래서 N의 밝은 표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화를 내고 뛰쳐나간 아이, 어떻게 야단치면 좋을까
  K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침에 직원회의가 열리기 전이었다. K가 교무실로  들어왔다가 3학년 선생님의 눈에 띄
었다. 머리에 무스를 발랐던 것이다.  3학년 선생님이 야단을 쳤다.  K는 볼이 퉁퉁 부어서 
서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K의 머리에 코를 박듯이 바짝 대고 물었다.
  "멘즈 무스지?"
  "예."
  K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인정을 했는데도 담임은 계속 다그쳤다.
  "이건 교칙 위반이야. 왜 이런 짓을 하지?"
  K는 울컥 화가 치민 모양이었다. 녀석은 삐딱하게 서서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K는 시정하라고 꾸짖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무시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K를 불러
세우고 주의를 주었다.
  "자네, 꾸중을 들어서 화가 날 테지만 선생님 앞에서 태도가 그게 뭔가?"
  "죄송합니다."
  K는 대답을 했지만 아무래도 교무실의 모든 선생님이 나를 야단쳤다는 사실에 화가 뻗친 
얼굴이었다. 일단 화가 뻗치니 도무지 냉정해질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하고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어쨌든 K는 일단 교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분을 삭이지 못하고 교실을 뛰쳐나가 근처에 
무단으로 결석중인 친구의 집으로 가버렸다.
  워낙 버릇이 없는 녀석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꾸짖는 법이 적절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평소에 학생들과 밀접하게 
어울리는 교사가 아니라 일 주일에 한  번씩 조회시간에 5분 가량 이야기를 하는게  고작인 
교장 선생님에게서 그런 주의를 받았다는 것이 학생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간단하게 주의를 줄 생각이었지만 학생으로서는 교장 선생님에게 직접 야단맞
은 꼴이 된다. 그것도 담임 선생님이 무스를 발랐다고 허풍스럽게  창피를 준 뒤에 교장 선
생님에게 꾸중을 들었으니 어떻게든 분풀이를 하고 싶은 감정으로 치달렸을 것이다.
  
    2.꾸짖음을 당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꾸중에 대한 반발은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생긴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꾸중을 듣고 그것을 약으로 삼았던 일이 있는가?  아니 그
런 체험까지는 하지 못했어도 누군가에게 꾸중을 듣고 스스로 기벘던 일이 있는가?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정말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진지한 자세로 성심성
의껏 잘못을 지적해주면 그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꾸짖는 쪽에서 본다면 이것은 상당한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행위이다. 학생이 꾸
중을들으면서 '나도 나를 꾸짖고 싶은 심정이에요' 하고 공감을 느끼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말미암아 선생님이 나를 오해해서 야단을 친다고 생각한다면 선생님에게서  신
뢰와 애정을 한꺼번에 잃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나를 의심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는 참담한 심정과 선생님은 나를 신뢰하지 않고 계셨다는  자괴감은, 꾸중하는 상대가 존
경하던 선생님일수록 충격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게 한다. 그러므로 꾸짖는 것, 혹은 꾸짖음
을 당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꾸짖는 방법이 서투르면 아이들에게서 반발을 사는 일이 많다. 아니, 꾸짖는  방법
이 서툴다기 보다는 자신이 야단을 맞았다는 쓰라림때문에 반발을  한다. 그것은 현실을 회
피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반사작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대학 재수생인 아들이 어느 날 기분 전환이나 한다며 친구와 
하루 놀러가겠다고 말했다고 치자. 그 말을 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앞다투고 나서서 꾸짖
는다.
  "벌써 시월하고도 중순이야. 본격적으로 공부에 매달려도 부족할 판 아니냐?"
  부모로서는 아들의 게으름이나 속편함을 꾸짖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들로서는  급소, 
정말로 아픈 곳을 찔린 것이다. 아들은 반사적으로 투덜거리며 반발한다.
  "누가 그걸 몰라요. 듣기 싫단 말예요!"
  투덜거리며 반발하지 않더라도 동작이 갑자기 거칠어지며 마음속으로 불평을 할 수도  있
다.
  '그래 나는 재수생이야. 친구들은 거의다 대학생이 됐는데 나는 부모에게 쓸데 없는  부담
이나 주는 쓰레기야. 나 나름대로는 기를 쓰고 노력하지만 왠지  초조해서 공부가 안 될 때
도 있단 말잉야. 그런데도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단정짓고, 본격적으로 
공부에 매달려도 부족할 판이 아니냐고  비웃듯이 말씀만 하시지. 제발 아픈  곳 좀 찌르지 
마세요.'
  재수생 아들은 이렇게 참담한 심정과 반발심을 느낀다.
  
    꾸중이란 스스로가 스스로를 바꾸는 것
  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행위는 과연 자신들의 심정을 바르게 전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되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서먹한 공기가 흐를 뿐이다.  말하고 싶은 것을 탁 털어 
놓으면 그만이나, 양쪽 다 꾹 삼키고 마니까 뒷맛이 더욱 찜찜하다.
  그러다 아들은 부모의 본심을 깨닫는다. 아니, 꾸중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부모의  본심을 
알고 있다. 알면서도 진저리가 난다고 생각한다.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감정이 뒤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모순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헤
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하기야 그런 것이 응석이 섞인 자식의 감정이리라.
  자식을 깊게 생각하기 때문에 꾸짖는다고 느끼면서도 꾸중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
것은 자존심이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는가 하
는 문제이다. 특히 인간의 심리에는 자기방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자기방어가 강한  아이를 
꾸짖는 행동은 그를 더욱 고집세고 비뚤어지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그로 하여
금 사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언동을 바꾸게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활기차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꾸중이란 스스로가 
꾸짖는 것, 스스로가 스스로를 바꾸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꾸중이란 실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부모니까 야단칠 수 있다. 교사니까 
야단칠 수 있다, 선배니까 야단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 결코 아니다. 꾸짖는 
심리, 꾸중듣는 심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점을 생각해 보자
  
    3. 교사 여러 명이 한 학생을 지도할 때
    어떻게 지도해야 좋을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아이
  중학교 3학년인 S는 두 형제 가운데  막내이다. 형은 열여덟 살인데 어떤  기술자 밑에서 
기술을 배우는 모양이었다.S는 공부를 싫어했다. 그래도 소심한 탓인지 학교는 빠지지 않았
다.  결석을 하고 싶지만 배짱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와 함께 농땡이를 피운 
적은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되었는데 여름방학동안 마음껏 게으름을 피운 것이 습관
이 되어 아침에 일어나면 골치가 지끈 지끈 아프거나 아예 늦잠을 자고는 해서 나흘째 연거
푸 지각을 했다. S는 공부에는 흥미가 없고 운동도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이 그저 지루
하고 귀찮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왜 학교에 다녀야만 할까,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
까' 하고 회의조차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골치 아팠기 때문이었다. 성
가시고 귀찮다는 느낌 때문에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주변 사람에게 말
하면 게으른 녀석이라는 말이나 들을게 뻔했다
  그는 수업중에도 자주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곤 했다. 수업시간이  도무지 재미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엎드려 자는 것은 주변  친구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아니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도 그런 그를 주의를  주기는 했지만 내버려 때
도 있었다.
  선생님이 아무리 재미있는 얘기를 해도 그는 그저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와하고 웃음을 터뜨리는데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S는 175센티미터의 키에 피부가 하얗고 호리호리한 소년이었다.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하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S가 바로 그런 유형의 아이였다. 무엇을 하더라도 태도나 말투가 
애매했다. 그가 확실하게 보이는 태도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것과, 그러니  공부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뿐이었다.
  "공부는 상급학교에 진학학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야. 인간에게는 배우는 것 자체가 중요
한 거야."
  선생님이 아무리 타일러도 소 귀에 경읽기 격으로 그의 마음은 움직일 줄 몰랐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에 모습을 나타낸적이  없었다. 가정방문을 해도 언제나 집에  없었다. 
어쩌다가 전화통화를 하게 되면 성의없는 답변을 할 뿐이었다.
  '무식한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리고 그 녀석이야 어차피 멍청한데 배워서 뭐합니까."
  이렇게 담임인 젊은 여교사에게 비비 꼬아 말하고는 곧바로 아내에게 수화기를 넘겨 버리
곤 했다. S의 어머니는 그래도 교사를 정중하게 대했지만,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한 반
응을 보이며 피하려고 했다.
  담임교사는 딱하고 답답한 가정환경을 가진 S를 어떻게 지도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S는 학습의욕이 극단적으로 저하되어 있었지만 수업을 방해하거나 수업중에 마음대로 돌아
다니지는 않았다. S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알 수 없었다.
  
    부드럽게 주의를 줬는데도 대들려고 했을 때
  그날도 S는 지각을 했다. 그러나 그날은 어머니가 학교로 전화를 걸어왔다.
  "애가 배가 아프다고 해요. 약을 먹인 뒤에  학교에 보내도 좋을지요?"
  그 말투에서 핑계를 대는 듯한 느낌이  풀풀 풍겼다. 담임인 M선생은 '이 거짓말쟁이  녀
석, 또 배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있구나.' 하고 짐작하면서도 어쨌든 대답을 했다.
  "아, 그래요? 그럼 약을 먹인 뒤에 학교로 보내세요."
  그리고 참 지긋지긋한 녀석이라고 진저리를 쳤다.
  S가 학교에 온 것은 점심급식이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그가 교실로 들어와  잠자코 자기 
자리에 앉자, 짝이 무언가 말을 건넸다. S는 짧게 이것저것 대답하는 눈치였다. M선생은 관
심을 갖고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짝이 급식쟁반을 들고와 S에게  넘겨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M선생은 S의 짝이 마음이 따뜻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S가 짝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아 내게도 마음을 열고 심정을 털어놓지 않을까.'
  그렇기는 하지만 담임인 내게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으니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가. 아
무리 어머니가 지각한다고 연락을 했다고는 하지만 본인이 교실에 들어와서 담임에게  인사
도 하지 않으니 주의를 줘야 하지 않을까.'
  M선생의 마음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그러나 급식준비중이라 교실이 소란스러웠다. S를  불러서 주의를 주기에는 적당치  않은 
시간이었다. M선생은 주저주저했다.
  급식시간에도 M선생은 S의 동작에 신경이 쓰였다. S는 급식쟁반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역시 배가 아픈가? 하지만ㄴ 녀석은 언제나 저런 식으로 대하지 않는가. 점잖게 품위있게 
먹는 것과는 거리가 먼 아인걸.'
  담임선생은 S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급식과 뒷정리가 끝나자 S는 얼른 복도로 나갔다.  이 아이에게는 사이좋은 친구, 왁자지
껄 시끄럽게 떠들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S는 혼자서 복도 창 너머의 공원을 멍하니 바라보
았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공원에는 강아지  한 마리 없었다. 키가 우뚝한 나무가  더위에 
지쳐 보였다.
  '이 아이는 무엇을 생각하는걸까.'
  M선생은 S곁으로 다가갔다.
  "S,앞으로 지각하지 않도록 하렴."
  M선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S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제도 그제도 지각했잖아."
  S가 흘끗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어두운 눈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좀더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오도록 해."
  M선생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S는 갑자기  주먹을 휘둘러 선생님을 후려쳤다. 아니 후려
치는 시늉을 했다. 아니,후려치는 시늉을 했다기보다는 주먹으로 교사의 얼굴을  후려치려다
가 도중에 그만두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S는 선생의 얼굴을 후려치는 시늉을 두  세 번 되
풀이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발로 차 쓰러뜨렸다. 쓰러진 의자가 M선생의 발등을 찧었다. 
M선생은 분노했다기보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야, 그만두지 못해!"
  바로 곁에 있던 학생이 고함을 쳤다. S는 그 이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S는 근처를 지나던 교사에게 불려갔다.
  M선생은 너무나 놀라 교장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S에게 전혀 자극적인 언행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고 하소연했다.
  
    집단지도보다는 단둘이서 대화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곧바로 3학년 교사들이 몰려들어 S를  꾸짖기 시작했다. 교장인 나는  선생님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먼저 나와 S, 단둘이 이야기 좀 나눠도 될까요?"
  나는 S와 단둘이 교장실에서 마주앉았다.
  S는 그렇지 않아도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3학년 교사 
전원이 몰려들어 꾸짖는다면 S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교사가 모두 모여들어 제각기 한 마디
라도 지도하려고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여럿이서 한 사람을 에워싼다는 것 자체
가 당사자에게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S가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궁
지로 몰리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그에게 그가 한 행동에 대해 교사들 모두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S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3학년 교사들은 담임과 똑같은 심정이었다.
  '돼먹지 못한 녀석, 저런 녀석을 용서해서는 안돼.'
  교사들은 격앙된 감정으로 S를 둘러싸고  그가 한 행동을 호되게 야단쳤다.  그런 때에는 
야단치는 쪽이 정의이고, 야단맞는 w족은 악이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그래서 교사들의 말이 
곧 법이요 진리가 된다. 이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빠져 나올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기 쉽다. 빠져 나올 수 없는 궁지로 몰리면 S가 반발할 수
도 있는 일이다. 그가 앞 뒤 가리지 않고 반항하면  교사와 학생간에 극단적인 대립이 생기
게 된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런 우려를 하고 S와 단둘이 교장실에 마주앉은 것이다. 단둘이 마주앉
아 S에게 여기서라면 무슨 말을 해도 좋겠다는 분위기를 맛보게 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는 않더라도 내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리, 무조건 부정만 당하지 
않는 자리가 있음을 실감하게 하고 싶었다.
  
    훈계하기 전에 학생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자
  그와 단둘이 마주앉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을 때리고 싶었니?"
  그는 나를 경계하는지 입을 꽈 다물고 열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좋아."
  S는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는 눈치였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교장실에서 교장 선생님
과 단둘이 마주앉아 있으니 학생인 그로서는 당연히 긴장이  되었으리라. 더구나 스스로 생
각해도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는가.  S의 하얗고 마른 얼굴에  식은 땀이 흘렀다.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자꾸만 두 손의 손가락을 모아 꼼지락거렸다. 마음이 불안한 것이다.
  "학교생활이 재미있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학교의 어떤 점이 싫어?"
  S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의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공부요."
  "아, 그렇구나. 하지만 친구들은 재미있지?"
  "예."
  S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친구들하고는 사이가 좋은 모양이구나"
  "예."
  내가 말을 받아주자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방학에는 뭘 했지? 친구들하고 같이 재미있는 일 한 거 없어?"
  친구 이야기를 꺼냈더니 대화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여름방학 중에 친구 몇 명과 함께 경치 좋은 곳으로  캠핑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즐거
웠었다고 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때도 전혀 활기가 없었고 너무 작은 소리로 소근거려서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응, 그랬어? 혹은 "와, 그래?" 하는 식으로 간단히  응수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기
만 했다. 그러다가 집안 이야기를 꺼냈다.
  "집은 어때? 아버지가 잔소리 많이 하셔?"
  "예."
  이번에는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S는 아버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린다고  했다. 어머니는 우는 타입이고, 자기보
다 머리통 하나는 크고 고집스런 아들을 어려워하는 듯했다.
  S는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엄마는 어쨌든 내가 고등학교까지만은 졸업하기를 바라세요. 그렇지만 나는 공부가 정말 
싫어요. 고등학교를 다닌 것 따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형도,'중학교야  의무교육이니까 
다니기만 하면 졸업시켜 준다구. 그러니까 잠자코 다녀. 졸업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또 어떻
게 되겠지.' 하는 식으로 말해요.
  엄마나 선생님은 입만 열면 공부하라고 그래요. 정말이지 귀찮고 지긋지긋해요. 엄마나 선
생님은 부드럽게 말씀하시지만 하는 말은 언제나 정해져 있어요. '공부해서 고등학교 정도는 
가라. 고등학교라도 나오지 않으면 변변치 못한 사람이 된다.' 하고 말예요 담임인 M선생님
도 마찬가지예요. 여자라 그런지 더 집요하기까지 해요."
  S가 하는 말의 요지는 대강 이랬다.
  "그래, 네 심정 이해가 간다. 그래도 선생님을 때리려고 한 건 잘못한 거야."
  "네."
  S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는 훌륭해. 때리려고 하다가 중간에서 멈추고 때리는 흉내만 냈으니 말이야. 자
기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
  내가 칭찬을 하자 S는 대답했다.
  아니에요, 전 잘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래?"
  "선생님께 사과하겠습니다."
  가 대답했다.
  "그래? 참 잘 생각했어. 그러면 선생님들을 모시고 올래?"
  내가 S의 용기를 북돋았다.
  "예."
  S는 대답하고 조금 불안정하게 일어나 교무실 쪽으로 갔다.
  ]
    집단지도의 역작용을 인식한다.
  이윽고 여섯 명의 교사가 S와 함께 들어와 그를 에워싸듯이 둘러앉았다. 숨막히는 분위기
였다. 교사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있었다. S가 못된 짓을 한데다, 교장과 단둘이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불분명한 게 영 떨떠름해서 분노가 솟구친 모양이었다.
  "얘가 뭐랍니까?"
  직선적인 A선생이 물었다. S가 교장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듣고 싶은 것이다.
  "S는 선생님들에게 죄송하다면서 사과하고 싶다고 했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A선생은 S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 한 번 해봐."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S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하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M선생도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
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A선생이 내뱉듯이 말했다.
  "농담하지마. 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지? 그래,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그렇게 
쉽게 사과하면 끝나는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쉽게 사과하는 걸 보니 아직도 반성하
니 못했어."
  A선생은 반쯤은 교장인 나를 향해서 말했다. 분이 좀처럼 삭지 않는 눈치였다.  S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
을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테니 용
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정중하게 사과하면  될까? 그러나 그런 말은 어른이나  할 수 있는 
사과지 S와 같은 아이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S는 곤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며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똑바로 고개 들어!"
  다른 교사가 따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서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S에게 이렇게 말했다.
  "S학생, 지금 자네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을 거야. 그래서 이렇게 하
면 좋지 않을까 하는 내 생각을 말해 주마.
  우선,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에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쳐 나가도록 하자.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가는 스스로 잘 반성해 보도록 하렴. 그 다음에는 그런 점을 태도로 보이는 
거야. 주변 사람들이 '요즈음 S가 변했어' 라고 말하도록 만드는 것, 그게 바로 태도로 보이
는 거야,
  두 번 째로, 무언가 불안한 일이 있으면 선생님과 상담하도록 하자. 선생님은  인생경험이 
풍부하니까 상담에 잘 응해 주실 게다. 물론  나를 찾아 와도 좋아, 부디 혼자서 끙끙  앓니 
않도록 해. 친구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아. 그리고 공부란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거야.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 졸업을 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야.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렴. 성적이 나쁜 것하고 공부하고는 별개야, 알았니?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해주마. 자,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선생님들의  가르
침을 받으렴."
  나는 S를 이렇게 타이르고, 교사들에게 S의 구체적인 지도를 부탁했다.
  그 뒤에 교사들이 S를 어떻게 지도했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단지 선생님에게서 들으니 S
가 어느 사이엔지 순해져서 선생님 말씀을 잘 듣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어머니에게 학교
로 오시라고 해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어머니가 M선생에게 사죄하고 S를 야단쳤다고 한
다. 어머니가 야단쳐도 S는 고분고분 듣기만 했다니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S를 지도한 일을 계기로, 나는 여러 명의 교사가 한 명의 학생을 집단으로  지도할 때 생
기는 역작용을 새삼스럽게 인식했다.. 집단의 압력, 쓰다 달다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분위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요구를 동료교사들의 힘을 빌어 들이미는 무모함, 그리고 학생을 책망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착각, 학생에게 겉으로 만이라도 복종하는 체하기를 은연중에 강요하
는 것 등 역작용은 너무나 많았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이것은  뜻밖
에 깊은 사고와 경험을 요구하는 질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찌는 듯한 밤공기가 더
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4 미워하면 미움을 받는다
    교사에게 앙심을 갖고 교실 유리창에 돌을 던진 아이
  어떤 중학교에서 한밤중에 돌이 날아와  유리창이 깨진 사건이 일어났다.  더구나 며칠에 
걸쳐서 여러 번이나 같은 사건이 되풀이되니 의도적이고 집요한  짓이 분명했다. 학교에 앙
심을 품은 자가 하는 짓이었다.  유리창이 깨지는 장소는 대개 학교  창고의 서쪽과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공원 쪽이었다. 공원 쪽에는  특별교실이 있는데, 그 한쪽에 있는 주방을  노린 
돌팔매질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대개 짚이는 구석이  있는 법이다. 선생님들은 T라는 학생을 염두에 
두었다. 가정을 담당하는 그의 담임 선생은 T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T도 자주 담임 선생에
게 대들었었다. T는 학교를 결석하는 등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멋
대로 이유를 갖다 붙였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까탈스럽고 잔소리가 너무 심해요."
  일전에도 담임 선생에게 반항한 T를 학년  교사들이 모여 지도한 일이 있었다. 여럿이서 
지도했다고 하면 지도가 상당한  효과를 올렸을 법하지만  그렇지가 않다.T는, "선생님들이 
몽땅 몰려와 나 하나를 두고 들들 볶았다." 라든가 "담임 선생님 혼자서는 버거우니까 여럿
이 몰려와 나를 협박했다."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돌팔매질 사건은 그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돌팔매질뿐만  아니라 학교건물이 여기저기 크
고 작게 부서지는 일도  일어났다. 그렇지만 T가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나타나면 급우들은 겁에 질려 그를 슬슬 피했다.
  어떤 아이는 담임인 여선생님에게 걱정스럽게 충고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선생님,T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지 마세요.T는 난폭해져 있어요."
  담임교사 입장에서 보면 T가 앙심을 품었다는 것은 낙심천만한 일이다. 그리고 선생님에
게 앙심을 품은 T가 한심하고 답답한 녀석이란 생각도 지울 길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가정
에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머니에 대한 반발이 여자인 담임 선생에 대한 반발로
까지 이어졌다 하더라도, 학교 입장으로는 돌팔매가 날아들고 시설이 부서져서는  곤란하다. 
학교 분위기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고 학생들의 정서도 메마르고 불안정해진다. 수업을 하든 
청소를 하든 주위가 산만해진다. 한 사람이 학생전체에게 끼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은 것
이다.
  T는 무단으로 결석을 하기도 했는데  교사나 학생이 데리러 가도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T는 자신을 데리러 온 선생님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왜 데리러 오고 난리예요 .날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냥 놔두면 이번에는 그냥 놔둔다고 펄펄 뛰었다.
  "나를 이렇게 내팽개치다니!"
  그러나 다시 데리러 가면 화를 내기는 마찬가지였다.
  '꼴보기도 싫으니까 당장 꺼져."
  T를 데리러 가거나 데리러 가지 않는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법도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떻게 대하든  녀석은 
불같이 화를 내며, '너희들이 나를 그렇게 몰아세우니까 내가 유리창에 돌을 던지지.'
 하고 생각했다.  T를 지도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T는 학교에 오기만 하면 말썽을 부려
서 친구들의 빈축을 샀다. 게다가 T가 말썽을 피우면 그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아이들을 선
동하는 격이 되어 일부 학생들이 따라서 말썽을 피웠다. 문제아들은 '어차피 우리는  틀려먹
은 놈들이야. 모두들 우리를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걸  뭐.' 하고 자신들이 비슷한 처지라는데 
공감하는 것 같았다.
  
    남이 미워하면 자기를 꾸짖어라
  이렇듯 어수선하고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 때 교장선생님이 조회시간에 훈시를 했다.
  "어제 저녁에 또 유리창이 깨졌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엇이 안타까운가 하면, 
우리 학교에 앙심을 품은 학생이 있지 않나 하고 교장인 내가 여러분을 의심하는 것이 안타
깝습니다.
  우리는 유리창을 깨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것은 올바르고  좋은 마음은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는가. 미워하는 마음이 곧 악인 것을'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고승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악을 미워하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미워하는 감정을 학교 유리창에 내던지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나 역시 유리창이 깨지니 마음이 편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리창을 깬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불운과 불행이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불행한 부분
이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자신이  불행한 부분만을 끄집어내서 남을  원망하고 시샘하고 
미워하지 말도록 합시다. 남을 미워하면 자신의 불행이 점점 더 커질 뿐이니까요.
  남을 미워하고 싶을 때는 자기 자신을 꾸짖으세요. 누구나 남을 미워할 때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나쁘다, 내가 저 
녀석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바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그 자체가 좋지 않은 마음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한 말을 틈이 날 때마다 생
각해보기 바랍니다."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말을 끝맺고, 나중에 '악을 미워하는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는가. 미
워하는 마음이 곧 악인 것을'이라고 쓴 액자를 각 학급에 배포했다.
  며칠 후에 경찰서 소년계의 형사가  학교의 유리창을 깬 장본인이라며  T학생 패거리 몇 
명을 데려와 인계했다. 선생님의 손에 넘겨진 T학생 패거리는  안심이 되는 얼굴이었고, 표
정도 밝았다고 한다. 교내의 학생들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그들을 색안경 
끼고 보지 않았다. T와 친구들은 각각 개별적인 지도를 받고 어느 때보다 안정된 학교생활
을 했다.
  그들을 속마음까지야 알 길이 없지만 이 사건을 통해 나는 '미워하면 미움을  받는다'라든
가 '남을 부정하면 그도 나를 부정한다'와 같은 성구의 깊은 의미를 새삼스럽게 절감했다.
  
    5 꾸짖음의 연수
    급우들의 쌀쌀한 눈길을 받는 I군
  요즘 들어 아무래도 학급 분위기가 이상했다. 학생들의 말투나  행동이 생기를 잃은 것이
다. 아무래도 학생들 사이에 무언가 응어리가 맺힌 듯하다고 느낀 C선생은 아이들을 조심스
럽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I를 쌀쌀하게 대하는  듯 했다. I는 이른바 
좋은 학군을 찾아 전학온 학생이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가  되면 많은 학생들이 학업성적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데 I의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I의 어머니는 I의 얼굴만 보면 이렇게 말했다.
  "너를 이 학교로 전학시킨 것은 K고교에 보내기 위해서야."
  어머니 쪽에서는 그저 I를 독려할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I쪽에서 보면 K고교 입
학은 지상명령이었다. 자기도 그 학교에 입학할 생각으로 전학을  하기는 했지만 그 목표가 
너무나 힘겹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어머니의 기대는 무거운 짐으로 변했다. I도 나름대로 노
력하기는 했지만, 이제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너무 무리한 요구에 시달리는구나.'
  C선생도 I를 보며 이따금씩 그렇게 느꼈다.
  그런데 최근 들어 I를  대하는 반 아이들의 태도가  냉랭해진 것이다. 확실하게 따돌림을 
받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의 주위에 냉기가 흘렀다. I는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어울
리기는 했지만 이쪽 아이들과 저쪽 아이들 사이를 떠돌아다닐 뿐, 어느 한 곳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C선생은 I를 살짝 불러서 물었다.
  "요즘 공부하기는 어때?"
  잠시 공부에 관해 이런저런 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I가 불쑥 말했다
  "요즈음 아이들이 저를 쌀쌀맞게 대해요.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요. 저는 
아무런 실수도 하니 않은 것 같은데 아이들이 저를  냉랭하게 대하거든요. 지금까지는 내가 
어떤 놀이를 하자고 하면 아이들이 자기도 끼어달라고 몰려오고는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에
는 딴판으로 변했어요. 아이들이 무언가를 해도  나는 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아요.  실제로 
'뭣들 하니?' 하고 물을 분위기가  못 돼요. 용기를 내어 물어보면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
야.' 하며 얼버무리고는 모두가 그 자리를 떠나요."
  
    커닝한 I를 비난할 수 있을까
  C선생은 다음날, 학급임원인 학생을 불러서 물었다. 학생이 대답했다.
  "아니, I가 짐작도 가지 않는다고 해요? 그럴 리가 없는데. 하기야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
긴 하니만..."
  C선생이 뒷말을 재촉했다.
  "왜 똑바로 말하지 않고 입안에서만 우물거리지?"
  그러자 학생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중간고사 답안지를 돌려 받을 때 I가 돌려 받는 답안지를  고쳐서 점수를 올렸다는 거예
요. I는 맨 뒤에 앉잖아요. 아이들이  답안지를 돌려 받는 사이에 틀린  문제를 살짝 고쳐서 
선생님께 가지고 갔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선생님, 정답에 *가 되어 있어요.' 하고 말했다지 
뭐예요. 국어 받아쓰기하고 사회 O*문제를 고쳐서  점수를 올렸어요. 아이들 눈을 피해 I가 
몰래 답안지를 고치는 걸 본 아이가 있어요. 그것이 소문으로 떠도니까 아이들이 특별히 짠  
것도 아닌데 모두들 I를 쌀쌀맞게 대하게 된 거지요. 학급회의에서 다룰 문제도 아닌 것 같
고 직접 I에게 물을 수도 없고, 하여튼 기분이 꺼림칙하기만 해요."
  C선생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에 빠졌다. 문제는 간단치 않았
다. I가 자기가 왜 소외당하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고 하소연한  심정도 이해가 갔다. 학급 
아이들이 I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기분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유야 어쨌든 반 아이들의 태도는 음습하고 옳지 못했다. 한  아이가 불쑥 저지른 잘못을 모
두들 비난하면서 자기는 커닝을 하지 않았으니 옳다는 우쭐대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건 너
무 얄팍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I는 가끔 첫 번째로 답안지를 받았다. 자기가  어떤 문제를 틀렸는가는 미리 알고 있을 것
이다. 그 문제를 고치면 점수가 몇 점 올라간다. 주위의 아이들은 돌려 받은 답안지를  숨기
듯이 보고 있을 뿐, 다른 아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기 자리는 맨 뒤다. 아무도 엿
볼 수 없다. 점수를 올리고 싶다. 후다닥 해치우면 된다. 아무도 모른다. I는 그 순간의 유혹
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I가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과연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I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누
구라도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I는 반 아이들에게 이렇게 직접 물을 수도 없다.
  "왜 요즈음 모두들 나를 피하지?"
  그렇게 묻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 깊은 곳에 자기의 잘못에 대한 뼈저린 후회가 있기 때문
일 것이다. 누구라도 빠질 수 있는 잘못을 저지르고  하루하루를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면서 
친구들에게 속마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리석고 실수 투성이이다. 자기의 실수와 잘못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
는 곳, 이런 곳에서 우리는 성실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게 아닐까. 인간이란 원래  어리석고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사랑스러운 것이 아닐까. 물론  누구나 훌륭한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모두가 완벽한 인간이어서 실수 따위는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갑갑하고 따분할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안고 괴로워하는 I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학급을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한  사람을 제물삼아 자신들은 옳다
고 우쭐거리는 분위기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 C선생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스스로를 꾸짖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실천
  다음주, C선생은 반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오늘은 내가 추억 하나를 더듬어 줄 테니 편안한  마음으로 듣기 바란다. 추억이라고 해
봐야 고작 젊었을 때 본  영화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야. 미국  영화지. 제목은[운명의 향연]  
이야. 나는 이 영화를 잊지 못하고 때때로 떠올리곤 한단다.
  미국의 어느 시골 가난한 작곡가가 살았어. 아니 작곡가라기보다는 작곡가를 지망하는 사
람이라고 하는 쪽이 적당할 게다. 벌써 쉰 고개를 바라보는데 아내도 없고 여전히 무명이었
지. 빌린 피아노가 한 대 있을 뿐 가재도구라고는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아파트에  살았지만, 
그래도 음악을 좋아해서 작곡만 할 수 있으면 행복을 느끼는 인물이었다. 그 마을은 도시에
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말 그대로 벽지였지. 작곡을 해봐야 발표할 기회도 별로 없는  곳이
었어.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그 벽지에 당대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오케스트라가 들르게 되었어. 
더구나 스토코프스키라는 세계적인 명지휘자가 그 오케스트라를 인솔하고 이 시골마을을 찾
아온 거야. 그런데 그야말로 우연히 그 가난한 작곡가의  곡을 그 오케스트라에게 연주시키
자는 제안이 나왔어.
  '지휘는 당연히 당신이 맡아야지요.'
  스토코프스키는 그 작곡가 지망생에게 말했지.
  그 남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분이었어  그는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분을  맛보며 
이게 꿈이 아닐까 의심했어.
  그러나 그는 생각지도 못한 냉혹한 현실과 부딪쳤지. 연주회에 입고 갈 프록 코트(예복)가 
없었던 거야. 당시에는 정식 연주회에 참석할 때는 연주자는  물론이고 청중도 모두 야회복
을 입어야 했어. 찢어지게 가난했으니 그에게 연주회용 프록 코트가  있을 턱이 있겠어? 옷
이 없어서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잃을 지도 모를 상황이 되자 그는 새파랗게 질렸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된 그는 마을의 헌옷장수를  찾아다녔지. 헌옷밖에 살 수 
없는 처지였지만, 그 돈도 즉시 지불할 수는 없었어. 얼마 되지도 않는 가재도구를 전부  팔
아치우고 헌옷장수에게 빌다시피해서 가까스로 아주 낡은 프록 코트를 손에 넣었지. 그나마 
프록 코트가 작아서 뚱뚱한 그의 몸에 꽉 꼈어.
  마침내 연주회가 열리는 날이 밝았어. 오케스트라가 온다고 하니까 공연장에는 정장을 한 
신사와 숙녀가 구름같이 몰려들었지. 연주회장은 막이 오르기 전부터 열기가 대단했단다.
  이윽고 그 가난한 작곡가 지망생의 연주가 시작되었어. 연주회장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
용해졌지. 정말 멋진 연주였어. 신비스럽기까지 한 선율이 흘렀지. 스토코프스키씨를 비롯해
서 연주회장의 청중은 모두 그의 곡,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넋을 잃었지. 중앙의 지휘대에 선 
그도 지휘에 몰두했어. 그는 한껏 손을 올려 지휘봉을 저었고, 곡은 절정에 달했어.
  그때였어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한껏 고조된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던 거야. 그가 입은 
프록 코트가 찌이익 흉물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찢어지고 말았지. 등  한복판에서부터 하얀 
와이셔츠가 삐져 나왔어.
  관람석 저쪽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쪽에서도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어. 
그러자 지금까지 그토록 엄숙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깨지고 연주회장은 비웃는  웃음소리로 
가득 차고 만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멋진 곡에  심취했던 청중들은 어느새 가난한 작곡
가를 비웃는 심술궂은 관객으로 돌변해 버렸어. 이미 연주회장이라고 할 수도 없었어.
  저주받은 운명의 작곡가는 지휘봉을 꺾고 지휘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오열했지. 온몸이 
들썩이도록 서글피 울었어, 그러나 청중의 비웃음은 그치지 않았고 소란도 가라앉지 않았단
다.
  그때였어 청중 한가운데 앉아 있던 세계적인 지휘자 스토코프스키가 벌떡 일어났어. 그는 
외쳤지.
  '조용히! 조용히들 하세요!'
  스토코프스키는 자기가 입고 있던 프록 코트를 순식간에 벗어서 통로로 내팽개쳤어. 그리
고는 단상에서 쓰러져 우는 초로의 작곡가에게 우렁차게 말했지.
  '선생, 연주를 계속하시오!'
  그 우렁찬 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린 청중들은 여기저기서 웃옷을 벗어 던지며 입을 모아 
합창을 했지.
  '연주를 계속하라, 연주를 계속하라.'
  그 소리에 용기를 얻은 작곡가는 자신도 그 흉한 프록 코트를 벗어 던지고 지휘대에 다시 
서서 다시 연주를 계속했어. 그는 정말로 활기에 넘쳐 지휘를 했고, 그 연주는 한층 더 광채
를 발하는 빛나는 연주가 되었어.
  이것이 내가 잊지 못하는 영화의 줄거리다. 오늘은 어쩐지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단다. 끝까지 들어 줘서 고맙다."
  다음날, 학급 낙서장에 이런 사연을 적어 넣은 학생이 있었다.
'...우리는 I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그저 부정을 저질렀다, 교활하다며 험담을 퍼부었을 뿐이
다. 이따위 험담밖에 못하는 우리를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한 학급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
료라고 할 수 있을까. 부끄럽다.  잘못이나 들춰내서 비난이나 하는  우리가 무슨 친구인가. 
더구나 험담까지 퍼부었으니 우리는 얼마나 졸렬한 녀석들인가. 우리 역시 반성해야 한다...'
  이윽고 I에 관해 새로운 소문이 돌았다. 그가 선생님께 가서 자기의 부정행위를 고백하고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I의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평판도 돌았다. 이 학급이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화기애애하게 변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군소리를 붙이자면, I의 담임 선생은 그 누구도 꾸짖지 않았다.  그러나 반 아이들 하나하
나의 마음에, 스스로를 꾸짖는 자기 자신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실천이야말로 꾸짖음의  정
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6 칭찬하는 방법, 꾸짖는 방법이라는 방법론에 머물러도 좋은가
    꾸짖음은 애정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칭찬에 서투르다.
  선생님은 학생시절부터 우등생이거나 준우등생이었다. 그래서 자기들하고는 영 딴판인 '게
으르고 말썽을 피우는' 아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100점 만점에 10점밖에 받지 못한  학
생을 칭찬하려고 하니 영 어색하고 서투르게 되고 만다.
  수업 시간에 교사가 학생들과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을 때 장난꾸러기가 어쩌다  발언을 
한답시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일이  있다. 그럴 때 "음, 참  기발한 생각을 해냈구나." 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마음속 깊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교사의 칭찬은 공허하게 들리
게 된다. 그러면 교실의 흥이 깨진다. 선생님이 억지로 칭찬하고 계시구나 하는 공기가 교실
을 짓누른다.
  이것은 자기가 느끼는 것과 말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색해진 것이다. 결국 
칭찬은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정으로 드러낸 꼴이 된다. 
아이들은 민감하기 때문에 그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국민학교와 중학교에서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 중엔 본성은 착하나 외로운 아이들이 많다. 
이런 아이들은 선생님의 주의를 끌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그래서 주목을 받기 위해 말썽
을 부린다. 선생님에게 꾸중은 듣겠지만 꾸짖음을 당해도 교사의 주목을 받았으니 일시적으
로나마 기쁨을 맛본다.
  꾸짖음을 받고 울적한 마음이 해소되는가  아닌가는 꾸짖는 방법에 달려  있다. 아이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이해하고 (혹은 이해하려고  하면서) 야단치는 것과, 단지 밖으로  표출된 
말썽을 타이르는 것과는 천지차이가 있다.
  꾸짖을 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단둘이 마주앉아  꾸짖어야 하며, 한 마디라도 
아이가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말을 하고 나서 꾸짖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말이 일부러 꾸민 
말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왔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정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네가 그런 짓을 했다고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
  "이번 실수를 어떻게 하면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까 우리 함께 생각해 보자. 자
신이 저지른 실수를 생각하는건 괴롭겠지만, 실수를 약으로 삼기  위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래."
  이런 말투 속에는 교사의 따뜻한  애정이 배어 있다. 그런 마음씀씀이와  배려가 있을 때 
꾸중도 큰 효과를 내는 것이다.
  교사는 처음부터 효과를 올리려고  야단치거나 칭찬하지는 않는다.  야단치거나 칭찬하는 
것은 교사의 자연스러운 일상활동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꾸짖는 효과, 칭찬하는 효과는 존재
한다. 얼마나 지혜롭게 꾸짖고 칭찬하는가는 교사의 인간관이나 학생관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것은 교사가 지닌 전문성의 하나라고 해도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꾸짖음의 효과란, 꾸중을 당하는 당사자가 다음부터는 똑같은 잘못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학생들이 그저 입으로  "죄송합니다."라든가 "다음부터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
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사가 마음을 쓰고 배려를 하는 것은, 교사의 꾸중이  학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
떤 효과를 거둘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교사의 꾸중은 효과를 고려하기 때문에 주체적이다. 교사가 학생을 부드럽게 대하는 것은 
효과를 고려한 주체적 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무른 것과는  다르다. 교사가 부드러운 태도
를 갖추는 것은, 교사 자신이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으로 여겨지기를 원하기 때문도 아니
다. 칭찬하거나 꾸짖는 행위는 상대방의 마음, 아이들의 심정에 호소해서 상대방을 변화시키
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그 밑바닥에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있다.
  
    어떤 마음으로 꾸짖었는가
  칭찬하거나 꾸짖는 사람이 상대방의 호감을 사거나 감사의 말을  듣고 싶다는 마음, 다시 
말해서 일종의 자기애가 한 조각이라도 있다면 상대방은 그의 비천함과 추함을 단숨에 간파
한다. 꾸짖거나 호통치는 목적이 교사의 자기만족에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경
우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부른다.
  어떤 행위를 바로잡아 주려고 꾸짖었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부르는  일이 있다. 그럴 경우
에는 야단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든가, 좀 더 엄하게 야단치지  못해서 그런 결과를 불렀다
든가 하는 식으로 꾸짖는 방법이  문제가 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꾸짖는 당사자의 
마음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아이들을 꾸짖었는가, 우리가 어떤  심정으
로 학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의지가 약하고 차분하지 못한 부모가, 한 가지를 해도 끝까지 야무지게 물고 늘어지지 못
하거나 이것 조금 저것 조금 쓸데없이 깔짝거리는 딸을 보면서 짜증내는 일이 있다. 스스로
가 생각해도 싫기만 한 자신의 성격을 그대로 빼닮은 아들과 딸을 보면서 심한 좌절감을 느
끼는 것이다. 아들과 딸은 부모의 태도와 성격을 보면서 그대로 배운 것인데도 부모는 그것
을 자식들의 탓으로 돌린다. 인간에게는 이렇게 제멋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내
가 이렇게 애를 써서 너희들 뒷바라지를 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이다지도 몰라 줄 수가 있
느냐!"며 상대방의 탓으로 돌린다.
  교사도 똑같다. 게다가 자신과 똑같은 입장에 있는  동료가, "그래그래, 좀더 엄하게 다루
는 편이 좋아!"라든가, "우리가 오죽하면 학생들을 야단치겠어"하며 거들면  결국 꾸짖는 자
신의 마음에 대해서 곰곰이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가게 된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꾸짖었는가,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
것은 정말 아이만을 위해서인가 따위를 하나하나 파헤치며 생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
다.
  마지막으로 선현이 하신 말씀을 마음깊이 새기자.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상대방이 그것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주는 것이다.
  
    제 2장 꾸짖는 자신을 돌아보자
    1 꾸짖는 까닭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제멋대로인 우리의 마음
  여러분이나 나나 평범한 교사, 평범한 부모이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호가 뻗쳐서  아이
를 꾸짖을 때가 있다. 아니, 꾸짖는다기보다 화가 뻗쳐서 이성을 잃고 고함을 지르고 주먹을 
불끈 쥐는 등 경박스런 행동으로  치달리는 일이 있다. 그러고 나면  자기 자신이 싫어지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한심하고 꼴불견스럽다.  그리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미친 
듯이 분노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유야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떠  이유를 
붙이더라도, 결국 상대방의 언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토록 불끈 화를 냈던 것이다. 참으
로 단순하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에 든다, 혹은 들지 않는다고 해서 야단치거나 꾸
짖는다. 그러고 보면 실로 자기위주이고 제멋대로이기 짝이 업ㅂㅅ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
려고 해조 이것은 사실이다. 자기 마음에 들 때는 꾸짖는 일이 없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
을 때는 그것이 어떤 일이건 화가 뻗친다. 그래서 돼먹지 못한 녀석이라고 투덜거린다. 며느
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처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정말로 제멋대로인 것이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 복장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소지품은  저러저
러해야 한다, 그리고 인사하는 방법은 이러이러하고 말을 주고받을 때는 저러저러해야 한다. 
이런 것을 일일이 문장으로 만들어 놓고 준수하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어른들은 아이들을 
자기가 원하는 틀에 끼워맞추려고 한다. 그 틀 속으로 얌전하게 들어ㅗ는 아이는 '모범새'으
로 존중하지만, 틀에서 벗어나는 아이는ㄴ '틀려먹은 녀석'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그런 아이
는 모범생과는 크게 구별되는 꾸중의 대상이다. 즉 자신의 마음속에 '모범생'의 이미지, 이상
적인 학생상'이 마련되어 있어서,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아이는 부정한다는 도식이  성리반
다.
  
    옳다고 확신할 때는 오만해졌을 때
  꾸중이 자신을 합리화하는 방편일 때가 적지 않다. 그래서  자신은 학생을 꾸짖는다고 생
각한다. 자신이 학생을 꾸짖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좀더 착실한  아이
가 되기를 바란다거나, 공부에 진지하게 몰두하기를 바란다거나, 인생을 좀더 진지하게 대하
기를 바란다거나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올바른 근거에 따라 올바른 목적
을 위해 학생을 꾸짖었으니 자신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할 때 반성하기가 더더욱 어려운 법이다. 사실 우리의  '올바
름'은 한심한 우쭐함이나 천한 오만함과  이웃하는 일이 많다. 방심은  가장 무서운 적이다. 
바로 이럴 때 학생을 꾸짖으려다가 오히려 학생들의 야유를 뒤집어쓰는 결과를 얻기 쉽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잇었던 일이다. 담임인 X선생이 한 아이에게 '관광안내'를 
읽으라고 했다. 관광안내에는 '이 지방은 산과 강의 겨치가 모두 빼어나서 요산요수의  흥취
를 아는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온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관광안내를 읽던 학생이 한자
를 못일고 머뭇거리자 X선생이 '락산락수'라고 읽으며 '가르쳐'주었다. 학생들이 그  말을 듣
고 웅성거렸다.
  "에이, 락산락수라뇨, 요산요수 아닙니가?"
  한 학생의 지적에 X선생은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했다.
  "어느 쪽으로 읽어도 좋아. 락산락수라고 해도  상관없어. 너희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락산락수라고 읽은 거야."
그러자 아이들이 와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우하하,락산락수, 락산락수,"
  수학여행을 떠나는 들뜬 분위기의 열차 안이라 아이들도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지만 X선
생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차라리 그때 X선생이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어, 그런가? 그렇구나. 요산요수구나. 이것 참 창피한걸. 내가 미처 몰랐다."
  이렇게 싹싹하게 시인했으면 위신이 떨어지는 일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상대방이 학생이
라고 해서 얼렁뚱땅 넘기거나 속여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어리숙한 사람이라면 이쪽이 더더
욱 겸허해야 하는 법이다. 정직의 본질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것이다.
  
    2 교사의 깊이 없는 감각은 학생의 불행
    교실에서는 교사가 주체성을 갖는다는 착각
  교사가 자기 마음에 들고 안 들고에 대한 뚜렷한 주관이 있어서 언제나 확고한 기준을 적
용한다면 좋겠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변덕이 있어서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미묘하게 변한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꾸짖거나 
칭찬하다 보니 학생들의 눈에 선생이 칭찬을 하거나 꾸중을 하는데 불공평한 것처럼 비치는 
수가 있다. 상대가 아직 나이어린 소년 소녀들이기 때문에 교사는 무심결에 전지전능하다는 
착각에 빠져 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쉬운 것이다.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고 치자. 교사는 양쪽의 해면을 듣고 "너는 이래서 잘못이고, 
또 너는 이래서 틀렸어." 하고 판결을 내린다. 그런  상황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잇다. 선악을 
결정할 권리는 교사에게 없지만,  교실에서의 결정권은 교사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 사이의 옥신각신까지 교사가 판정을 내린다. 교사의  주도권을 쥔 사람은 교사
라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착각인 것이다.
  교사는 수업을 할 때나 생활 지도를 할 때 학생들의  현실에 맞추어 지도를 한다. 그것만
을 놓고 보아도 교실에서의 주체성을 지닌 쪽은 학생이다.
  교사는 커다란 포용력과 깊은 인간미를 지니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눈물로 호소하러 학교에 온 졸업생
  이런 일이 있었다.
  9월이 끝나갈 무렵, 졸업생인  T가 점심시간에 학교를 찾아왔다.  T는 그해에 이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 바로 어떤 건축회사에 취직했는데, 일이 힘들다고 몇 개월만에  그만두
고 도심지의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녀석은 재학  중에도 속을 썩이던 말썽꾼
이었다. 경찰서 신세도 몇 번이나 졌고, 작년에 우리 학교로 전학온 뒤에 양호교사의 핸드백
에서 돈을 훔친 일도 있었다.
  T에게는 어머니가 없고 아버지만 계셨는데 아버지는 미장이로 일을 해서 일하러 멀리 떠
나 집을 비우는 때가 많았다, 그리고 삐뚤어진 형이 한  명 있는데, 무슨 까닭에선지 T와는 
사이가 지독하게 나빴다. T는 이렇게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였다.
  교사들 가운데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T군과 똑같은 처지에 잇는 아이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니만 그 애처럼  삐뚤어지고 
빗나간 아이는 없어요. 가정적인 불행이 그 애에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아무리  가정
환경이 나쁘다고 해도 그 애가 빗나간 까닭은 녀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라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많은 아이들은 따스한 가정의 맛을 안다. 그들은 가정의 따스함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기 
방도 갖고 잇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어울리는 단란한 한때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을  특별
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T에게는 그것 하나 하나가 모두 선망의 대상이었다. T는 자
연히 급우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가정환경이  같은 다른 학교의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담임 선생은 그런 아이들을 사귀는 T를 꾸짖었다.
  "뭐야, 너는 왜 그따위 삐뚤어진 녀석들하고만 어울리는 거야!"
  그러나 꾸짖으면 꾸짖을수록 T의 마음은 담임 선생에게서 멀어졌다.
  T는 이렇게 생각했다.
  '선생님들이 내 마음을 이해할 리가 없어.'
  T는 아이들에게도 소외당했다. 아이들은 학급 일에 협력하지  않는다고 T를 비난하고 들
볶았다.  T의 불행은 이렇게 해서 커져만 갔다.
  그래도 T는 나름대로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졸업을 했다. 취직도 했지만 며칠만에 감기가 
걸려 쉬어야겠다고 상사에게 이야기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감기 정도로 쉬겠다고? 땀내서 일하면 감기 정도는 멀리 도망가는 거야. 그게 젊음이야."
  t는 화가 솟구쳤다.
  "감기에 걸려서 열이 펄펄 끓는데 일하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지독할 수가 있어요. 죽어
도 이런 곳에는 못 있겠어요. 당장 그만두겠습니다."
  t는 이런저런 사연을 눈물로 호소하려고 학교를  찾아왔다.. 어느 한 곳 마음 편히  울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T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받아 주는 어머니의 품이 필요했던 것
이다.
    멱살을 맞잡은 교사와 졸업생
  그런 T가 점심 시간 무렵에 학교를 찾아왔다. 교사들은 묘하게 긴장했다. T도 그런 분위
기를 직감적으로 느꼈다. 몇몇 교사와 의례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교사들은 급식 지도를 위해서 일제히 서둘렀다. T는 그래도 상대해 주는 A선
생에게 무슨 이야긴지를 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돌아갈까,  그래 이곳에서도 나를 받아 
주지는 않아.'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 B선생이 느닷없이  T의 어깨를 붙잡고 호통을 쳤다.
  "이봐,T. 할말이 있으니 잠깐 이리 와!"
  순간 험악한 공기가 흘렀다. 그때까지  T와 얘기를 나누던 A선생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봐 당황했다. B선생이 갑자기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T! 너, 우리 집에 전화해서 협박했지?"
  T는 열이 뻗치는 듯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 나를 때려죽이겠다고 했지? 공짜가 아니라 돈 받고  때려죽이겠다고 함부
로 지껄였지!"
  B선생은 서슬퍼렇게 T를 닦아세웠다. T도지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뭐가 잘못됐어요?"
  "뭐야, 이놈의 자식 좀 보게. 남의  집에 전화를 걸어서 협박해 놓고 뭐가  잘못됐냐고 물
어?"
  두 사람은 어느새 멱살을 맞잡았다.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교사 몇 사람
이 모여들었다. 서로 치고 받는 데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소문을 믿고 교사 집에 협박 전화를 건 아이
  "도대체 이게 무슨 일들이오?"
나는 두 사람을 별실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B선생은 T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고야 말겠다는 자세였다. 그래서 나는 T옆에 앉아 두 
사람을 달래면서 경위를 듣는 형세가 되었다.
  T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3학년 때 B선생님에게 기술실의 공구를  훔쳤다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기술실의  망치가 
없어진 것을 안 B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봐, 네가 갖고 가지 않았어?'
  전 아니라고 대답했지요. 그런데도 마구 다그쳤어요.
  '가지고 있으면 빨리 반납해.'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정색을 했지만 선생님은 계속 도둑 취급을 하는 거예요.
  '좋아, 알았어. 어쨌든 빨리 반납해.'
  그러자 주위의 아이들이 와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꼼짝없이 도둑이 된 거지요. 그렇게 
분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람을 도둑 취급하다니! 나는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졸업한 뒤엔 그 일을 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름방학 때 우연히 만난 후배가 
이런 말을 하는 거였습니다.
  'B선생님이 그러는데 형이 망치를 훔쳤다면서?'
  졸업한 뒤에까지 나를 도둑놈으로 몰아대다니... 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지려고  전화
했더니 B선생님은 없고 사모님이 '용건이 뭐지?'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어요. 그래서 화가 울
컥 솟구쳐 '시끄러, 당신 때려죽이겠어. 당신  자식도. 공짜가 아니라 돈 받고.' 라고  고함을 
쳤지요."
  T는 이런 말도 했다.
  "나 같은 놈은 경찰서에 가면 무조건 나쁜 놈 취급을 받아요. 경찰이란  사람들은 모두 B
선생님하고 똑같으니까요. 나는 나쁜 짓은 해도 숨기는 일은 없어요. 도둑질을 했으면  훔친 
것은 훔쳤다고 말하고 분명히 사과합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잘못했다
면 분명히 사과를 드리겠어요. 하지만 B선생님은 나를 도둑놈 취급했으니까  분명히 사과하
세요. 전화에 대고 함부로 말한 것은 제가 잘못했지만 B선생님이 내가 도둑질했다고 퍼뜨리
지 않았으면 그런 전화 따위는 걸지 않았을 테니까요. B선생님이 먼저 사과하세요."
  T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도대체 내가 훔쳤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있다면 증거를 대보세요."
  T는 완전히 제멋대로의 변명으로 일관했다. 논리고 뭐고도  없었다. T가 B선생에게 증거
가 있냐고 따졌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훔치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었다. 하급생 누가 B선생
에 대해서 말했냐고 묻자 T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아이 이름은 댈 수 없어요. 절대로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T가 후배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가 'B선생이 T를 도둑이라고 소문을 퍼
뜨렸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제멋대로인 졸업생을 이해하자
  나는 T의 변명을 들으면서, 아무리 이  아이가 제멋대로라고는 해도 이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그의 깊은 원한에 관해서이다. 재학 중에 몇  차례나 절도에 가까운 사건을 일
으켜 놓고도 자신이 억울하다고 하면서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상대방을 몰아붙
임으로써 자신이 억울하다는 증거를 대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두 번째는 '사과'에 상당히 집착한다는 점이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나는 사과했다. 그러니
까 나는 옳다는 억지주장. 게다가 자신은 깨닫지 못했을 테지만, 상대가 사과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비겁하기 때문이라는 비약. 죄가  잇는가 없는가를 입증할 수  없는데도 사과하지 
않으니까 나쁘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다. 단순히 의심하는 것을 나쁘다고 하면,  모든 
악을 남에게 떠넘길 수 있다. 그 동안 자기가 저지른 행동 때문에 자신이 의심을 받아도 도
리가 없다고는 반성하지는 않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그의 억지주장의 밑바닥에는 피해의식이 깔려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신뢰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거짓말도  했고 도둑질도 했다. 내가 도
둑질을 하거나 거짓말을 했던 것은, 나를 믿어 주지 않았던 모두의 책임이다.'
  이런 감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가 될 수 없으나  그에게는 합리화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교사는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 그에게 어머니가 있었다면... 모성을 느끼게 해주는 품이나마 체험했다면..'
  어머니가 있었다면 그 아이에게 '무조건의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무조건의 신뢰'와 
'무조건의 사랑'을 주었을  것이다. 성적이 좋으니까  신뢰한다거나, 솔직하니까  사랑한다는 
'조건 붙은' 관심은 아니었으리라. T가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체험했다면 이렇게까지 
태도가 거칠어지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삐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그의 주변에 있던 어른들은  모두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들이었다. '조
건 붙은' 신뢰를 보내 준 사람도 가끔 있었지만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 준  사람은 없었다. 
그는 항상 주변 삶들의 낯빛을 살피면서 살아야 했다. 그의 하루하루의 삶은 긴장의 연속이
었다.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맛볼 수 없었다. 그런 환경이 그가 처한 불행 가운데서도  가
자 처참한 것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교사는 학생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어떤  자세로 접근해야 할까. 나는 B선생
이 참으로 어른스럽지 못한 언행으로 일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B선생이 T를 보자마자 화
부터 벌컥 낸 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다그치는 태도를 취한 것은 
교육적이지 못했다. 교사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
일까를 고려한 뒤에 대처해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의 인간미를 깊게 하는 수행이기도 하다.
  
    3 꾸짖는 사람 자신이 꾸짖는 원인을 제공한다.
    지나치게 빈틈없는 사람은 진심으로 칭찬할 수 없다.
  사람들 중에는 빈틈없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허술한 성격을 가진 사람도 있
다.
  그런 성격은 그 사람의 특징에 지나지 않지만, 세상의 통념은 빈틈없는 것이 좋고 허술한 
것은 나쁘다고 보기 때문에 문제가 까다로워진다. 사실 빈틈없는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그 
근거는 없다. 조금 억지를 부려서 말한다면, 허술한 사람은 이것저것 다 받아들이니까  너그
럽다고 할 수 있고 빈틈없는 사람은 ㄴ융통성이라노는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나치게 빈틈없는 사람은, 강박증에까지 빠지지야  않겠지만 완벽주의 경향을 보
인다. 그래서 무엇을 하더라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만족하지  못한다. 아직 이점이 부족하다, 
여기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으로 불충분한 부분이 눈길을 끌어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교사의 성격이 이러면 학생들은 잔뜩 긴장해서 한시라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군대가 그
렇듯이 무엇을 해도 어떤 트집을 잡힐지 모르고 최고 점수를 받기에 애초에 어렵다.
  옛날에는 중학교에도 교련 과목이 있었다.  군대에서 나온 현역 장교가  중학생들의 군사 
훈련 광경을 보고 평가까지 했는데, 이를 '사열'이라고 했다. 사열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으면 
교장 이하 교사들은 더할 나위 없는 명예로 여겼고, 당시의 중학생들은 사열 준비를 하느라 
구호에 맞춰 기계처럼 탁탁 움직이는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사열에서는 '대체로 양호'라는 평가를 내려 주면 아주  높
은 점수를 받은 것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군대에서는 자만할까 봐 일부러 최고점을 주지 않
는다는 소리도 들은 일이 있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빈틈없는 선생님은 무엇을 봐도 결점부터 눈에 들어온다. 청소 상태를 
봐도, 학생의 작품이나 공책을 봐도, 무슨 소리를 들어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 
참 잘했다'라고 마음 깊이 감격하는 일이 없다. 최고점을 주면 자기가 왠지 바보가 되는  느
낌이라도 받는지 진심으로 상대방을 칭찬하는 일이 없다. 어딘가  학생을 갈보는 듯한 느낌
도 없지 않다.
  
    일 주일 만에 등교한 학생에게 사무적인 말만 한다면
  "그 정도야... 내가 전에 가르쳤던 졸업생은 훨씬 잘했어."
  "옛날 학생들은 정리를 얼마나 잘했는지 알기나 해."
  교사들은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내뱉는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소 눈앞에 있는  학생들의 수준이 한 단계 낮
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면서 좀처럼 기뻐하지 않
는다. 어떤 사람은 그런 말버릇을 쩨쩨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마음이  좁고 
쩨쩨하다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른다. 교사의 버릇이라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아무래도 문제
가 있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인 A가 오랜만에 학교에 등교했다. 그는 툭하면 학교를 빠지는 아이였다. 게
으름, 학력 부진, 학습 의욕  상실, 느슨한 가정교육 따위가 한데  어우러져 문제 학생이 된 
것이다. 사실 그날도 A는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격으로 등교를  한 것이었다.A와  마음도 
맞고 역시 학습 의욕이 떨어져 있는 B가 등교시간에 늦어 혼자 등교하기가 어색하니까 A를 
부르러 갔던 것이다. 그래서 둘은 의기투합해 등교를 했던 것이다. 이미 4교시가 시작된  뒤
라서 담임 선생은 둘이  학교에 온 ㅈ;도 몰랐다가  급식시간에 둘을 발견했다. 담임선생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희 둘, 오늘 중으로 이 달의 체중을 측정하도록 해."
  B야 어찌되었든 A는 일 주일  만에 학교에 온 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담임선생으로서 
할 말이 그렇게도 없었을까. 담임  선생의 말투는 너무나 사무적이고 형식적이었다.  나중에 
그 말투가 문제되었을 때 그 교사는 말했다.
  "아니, 도무지 두 아이의 체중을 잴 수 없다고 양호 선생님이 말했기 때문에... 학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시켰을뿐입니다."
  그 후에 A는 또다시 결석을 하기 시작했다.
  담임교사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학생이 학교에 오는 게 당연하고 오지 않는게 이상한 것 아닙니까? 학교에 오면  당연히 
체중을 재야 하구요. 당연한 일을  하라고 주의를 준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들어야 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굳이 빈틈없는 교사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일  주일 만에 학교에 나온 학
생에게 맨 처음으로 체중을 재라는 말을 해야 했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꾸짖음의 씨를 교사 스스로 뿌리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
  이 교사는 정말 잔소리가 심했다. 학생들이 조금 장난을 해도 "언제나 철이 들려나, 이 예
쁜 녀석들" 하고 미소짓는 일이 없다. 너그럽게 봐주는 일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너그럽게 
봐주면 느슨하게 풀어져서 학생들이 업신여긴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예를 들어 학생이 청소를 하지 않고 귀가하면 시간이 어찌되었건 그날 중에 전화로 불러
낸다. 불러내서 청소를 시킨다. 본인이 없을 때는 어머니를  오시게 한다. 그리고 그날 있었
던 일을 설명하고 가정에서도 엄하게 꾸짖으라고 단단히 이른다. 철저하기는 하지만 유연한 
태도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것이다.
  교사 자신이 학생들에게 전해야 할 전달  사항을 잊으면 비상연락망을 통해서 전화를  한
다.
  "오늘 깜빡 잊고 내일 준비물을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내일, 사친회 강연회의 신청서를 들
려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비상연락망을 통해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정도로 철저하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고집스러운가는 눈치채지도 못한다.
  학생이 준비물을 잊고 가져오지 않으면 집까지 가지러 보낸다. 시간에 댈 수 없으면 전화
를 걸어서 부모에게 가져오라고 시킨다. 준비물이라야  어던 행사에 참석하겠느냐 불참하겠
느냐를 묻는 신청용지 정도일 때도 있어서 지나치다는 불평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교사는 이렇게 불평을 일축한다.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불평이나 하는 족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러니 가정과의 교류가 점점 어렵고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너무 엄격한 선생님이다. 성실한 것이야 좋지만 지나치면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된다. 앞
뒤가 꽉 막힌 사람은 운시늬 폭이  좁다. 고집스럽고 딱딱하다. 그 교사는 언제나  벌레씹은 
듯이 못마땅한 표정이다. 모든 것이 못마땅하니 스스로도 유쾌할 리가 없다. 사람들이  그에
게 앞뒤가 꽉 막혔다고 지적하면 정색을 하고 주장한다.
  "내가 왜 나빠요? 나쁜 것은 흐리멍덩한 학생과 학부모지요."
  이 사람은 '우격다짐으로라도 상대방을 바꾸고야 말겠다'는 신념밖에 지니지 못한  교사이
다.
  이런 교사와 날마다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ㄴ 학생도 불행하고,  그런 식으로 학생을 보아
야 하는 교사도 불행하다. 이런 교사는 언제나 학생을 야단치지만, 야단치는 원인의  대부분
을 스스로 만들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스스로는 진지하게 지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
실은 꾸짖을 씨를 열심히 뿌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이지야 않겠지만 우리에게도 이것과 비슷한 완고함이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적어도 자신의 수용력을 크게 높이도록 힘써야 한다.
  
    4 교사의 변덕과 자만
    학생 쪽에서 본 '자기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교사'
  교사 중에는 변덕과 자만이 심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란 원래 제멋대로인 경우
가 많으므로 이 점을 깊게 인식하고, 변덕과 자만에 물들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자기 변호와 변명은 그만두고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교사 자신이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선생님들에게 느꼈던 생각을 정직하게 떠올려 보자. 
다음에 소개하는 학생의 목소리와 겹치지 않을까?
  졸업생 몇 명이 우연한 기회에 교장인 나를 찾아와 말했다.
  "K선생님은 자기 기분이 나쁘면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곤 하세요. 우리들에게  분
풀이를 하는 거지요.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K선생님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드릴 
수도 없어요. 아른 선생님한테 이야기해도 K선생님  귀에 들어가고 마니까 결국 말한 아이
만 혼나요. 그래서 선생님들한테는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선생님들은 다 한 편인데  어떻게 
있는 그대로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또 한 학생이 열변을 토했다.
  "그래요.선생님들은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시지만  행동은 반대예요. 우리들한테는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해 놓고는  선생님들은 거침없이 포력을 휘둘러요.  선생님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했다고 하지만 당하는 쪽은 얼마나 기분이 상하는지 아세요?
  대개는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지만, K선생님처럼  우리한테 분풀이를 하는 격으로 야단
을 치면 앙심을 먹게 돼요. 우리는 알아요. 또 사모님하고 다퉜구나. 심기가 불편하구나.  이
런 걸 금방 느끼지요. 그런 날은 별 것 아닌 일로도 불같이  화를 내고 고함을 치고 때리거
나 물건을 던지거든요. 그럴 때면 '저런 한심한 사람, 정말 꼴불견이네.' 하고 느끼지요. 건방
지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학생들의 이야기는 거칠 것이 없었다.
  "K선생님은 우리에게 일렇게 말하지요. '물건을  잃어버리지 마라. 물건을 분실하는  것은 
정신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끝까지 책임지고 스스로 해내라.'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도 선생님은 분필을 잊고 오면 이렇게 태연하게 말해요.
  'ekdq번, 미안하지만 교무실에 가서 노란 qsvlf하고 흰 분필 하나씩 가져와라. 부탁한다.'
  우리야 선생님이 시키시니까 할 수 없이  가지러 가지만 모두들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요.
  '자기가 정신이 해이해서 분필을 놓고 오고는 왜 우리한테 시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끝
까지 책임지고 하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야?'
  선생님은 우리의 심정을 모르니까 '물건을 잃어버리지 마라. 정신이 해이하기 때문에 분실
하는 거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끝까지 스스로 책임지고 해라.' 라고 말씀하세요. 말이야 누
군 못 하겠어요? K선생님은 스스로 인기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학생들은 그 선생님
을 신뢰하지 않아요."
  
    존경받는 교사는 학생에게 솔직하게 사과한다
  나는 등골에 흐르는 식은 땀을 느끼며 학생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존경한다는 단어는 있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은 좀처럼 볼 수가 없어요. 그래도 전 Y선생
님은 존경해요. 그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는 달리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사과하세요. ', 
그런가, 내가 나빴다. 미안하다. 용서하렴.' 하고요.
  게다가 우리 이야깅에도 귀를 기울여  주세요. 꾸짖을 때도 우리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 
꾸짖으시구요.
  사실 이유도 듣지 않고 호통부터 치면서 우리를 억누르려고  하는 선생님이 많아요. 얼마 
전에 한 선생님하고 T가 어떤 일로 의견이 맞지 않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K선
생님이 끼어들어서 호통을 쳤어요.
  '선생님한테 그런 말버릇이 뭐야! 태도가 그 따위니까 선생님들이 너를 싫어하지. 좀더 고
분고분해져 봐!'
  그렇게 심하게 호통칠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영눈도 모르면서 어쨌든 학생이 나쁘다고 
단정해 버리면 당하는 쪽은 고분고분해지기는커녕 반감만 커지게 되지요.
  그런 때는 무엇보다 정중한 말을 골라서 쓰기가 어렵잖아요. 선생님 W#Hr에서도 말을 마
구 하시니까요. 가는 말이 고와야 고는 말도 곱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선생님이 '뭐 이런 자
식이 다 있어.' 하고 얼굴을  붉히면 '왜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세요!'하고 되받아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Y선생님은 다릅니다. 그 선생님은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상대가 학생이든 누
구든 사과를 하십니다. 그 점이 다른 선생님하고 달라서 전 Ytjstodsladmf 존경하지요.
  조금 전에 학생이든 누국든이라고 말했는데, 제가 말씀드린 '누구든'이란 '상대가 문제아라
고 해도' 라는 뜻이에요. 문제아도 잘못하지 않았을 때가  있어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저 녀석이야 언제나 반항만 하니까라고 단정짓고 욕을 하거나 의심을 해요. 그 아이가 이렇
다저렇다 따지면 아예 귀를 막고 듣지도 않는 선생님이 많은데  Y선생님은 상대가 설사 문
제아라고 해도 학생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래서 Y선생님이 잘못했거나 오해한 일
ㅇ이 있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를 하세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Y선생님이 인기가 있
어요."
  졸업생들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편협하다고 부정할 수 있을까. 교사란, 많은 사람들의 시
선을 받는 존재이다. 졸업생들의 목소리 가운데 많은 부분은, 우리 교사가 스스로를  연마하
고 뒤돌아보는 따끔한 채찍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5 교사가 빠지기 쉬운 자만
    어제와 같은방법이 오늘도 그대로 통한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졸업생들의 목소리를 전해 들은 교사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우선 K선생이 말했다.
  "나는 그 졸업생이 말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로 학생들에
게 분풀이를 한 일이 없어요. 학생들은, 특히 문제행동을 일삼는 녀석들은 터무니없는  말을 
잘하지요. 그런 녀석들이 하는 말에 일일이 귀를 기울일 수는 없어요. 게다가 내가 학생들을 
때리는 취미가 있기라도 한 듯이 말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체벌이 좋지 않다는 것쯤
은 나도 알아요. 그래도 때로는 몇 대 쥐어박는 쪽이 효과적일 때가 있어요. 체벌은  절대로 
금해야 한다는 것은 원칙일 뿐이에요. 만약 그렇다면 가정에서도  아이들을 때려서는 안 되
지요. 부모가 때리는 것은 괜찮고 교사의 체벌은 안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모순 같아요.
  그러나 가정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기분이 나쁠 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럴 때
에는 학생들이 보기에 선생의 표저이 평상시와는 다르게 보이겠지요.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러나  좀더 생각하면 교실이라는 상자  속에는 다양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모두들 기분이 똑같을 수는 없죠. 집에서 싸움을 하
고 온 학생도 있고, 가정에 환자가 있어서 마음이 어두운 학생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좋은 
일만 있어서 즐거울 수밖에 없는 학생도 있지요. 교사의 표정이 그날그날 다르듯이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표정도 날마다 달라진다고 생각해야 옳을 겁니다.
  그러므로 어제 이런 말을 해서 잘 통했으니까 오늘도 그런 소리를 하면 잘 ㅁ먹힐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물론 학생에 따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서 어렵기도 하구요.  그렇지
만 지도라는 것은 상대방이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달라져야 하니까 교사는 이모저모 고려
해서 학생들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을 지적했다면 졸업생들의 말을 경청해야겠
지요. 반성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학생들이 내 앞에서 직접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교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 꾸짖는 방법이 달라진다.
  A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교사란 학생을 잘 관찰하며 지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학생들이 교사를 더 
잘 관찰해요. 서투른 짓을 하면 그대로 알아차리지요. 하지만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멋대로 
행동할 때가 있어요. 직접 주의를 주거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우쭐거리는지도 모르지
요. 우쭐거리고 싶다는 의식을 갖고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교실은 밀실이고 상대는 나
이가 어린 어린이들이이까 마음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거지요.
  결과적으로는 학생들을 바보취급한다는 지적을 받아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학생을 꾸짖
을 때도 나는 완전무결하다는 착가을 안 한다는 보장도 없어요. 학생을 꾸짖을 때도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을 때도 많구요.
  예를 들어 물건을 사는 체하다가 훔친 학생에게 호통을 칠 때가 있어요.
  '왜 그런 지을 했지? 어째서 바보같은 짓을 했냐 말이다.'
  하지만 우리라고 무언가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던 일이 없을까요? 그것을 들켰을 때 몸둘 
바를 모르고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없나요?
  '제발 더 이상 말하지 말아 줘. 나도 속으로 이렇게 반성하고 있으니까 더 이상 자꾸 들춰 
얘기하지마!'
  우리에게도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
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무의식중에 그 생각하고 싶지 않은 체험을 억누르고 있
는지도 모릅니다.자신의 의식에는 없으니까 자기는 모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그런 
체험을 하지 안았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대부분의 사라믕 부모의 지갑에서 잔돈을 빼내거나 어떤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속여서 
가졌거나 하는 경험이 있어요. 어렸을 때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짓을  합니다.빌렸
다가 결국 돌려주지 않은 물건도 있을 거고, 도서관의 책이라든가 하찮은 필기도구 같은 것
을 슬쩍하기도 했을 거고, 학급비로 군것질을 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뒤돌아보면 누구나 다 
그런 체험을 햇지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책상에 볼펜 몇 자루가 쌓인다거나 집에서 
사용하는 편지지가 학교의 것인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교사는, 아니 인간은 남에 대해서는 잘 보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잘 볼 수가 없지요.  확
실히 말과 실천이 다르거든요. 이것이 교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
하면ㄴ 변명이 되겠지요. 우리의 죄를 어떻게든 가볍게 만들려고  하는 비겁한 마음의 표현
일 뿐이죠.
  우리는 교사니까 더욱더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롞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그런 노력을 하다 보면 학생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눈을 부라
리고 화를 내거나 꾸짖지 않게 될 지도 모릅니다. 교사가 마음가짐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꾸짖음 그 자체가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한다
  S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졸업생들이 했다  말을 들었을 때는 괘씸한 놈, 학생인 주제에 건방지다고 생각
했습니다. 불만이 있으면 익명이 아니라  당당하게 이름을 밝히고 직접 말해야지,  이ㅏ위로 
뒤에서 수군거리다니 참 비겁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지요.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 자신도  중학생 때 선생님에 대
해서 똑같은 감정을 가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반성되는 일이지만,  중학
생 시절에는 한창 건방져서 친구들 끼리 있을 때는  선생님 이름을 막 불러댔습니다. OO선
생님이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마구 비판했지요. 영  서투르
게 가르친다거나, 글씨가 엉망이라거나, 영리하다 혹은 멍청하다든지 어쨌든 선생님이  들으
면 화내실 만한 말을당연하다느 듯이 지껄였어요. 기분이 언짢은 선생님을 가리켜 '저  자식 
어제 부인하고 싸워서 저래.' 하고 헐뜯으며 불벼락 맞은 울분을 풀기도 했습니다.]
  뒤에서 교사를 헐뜯으면서 맺힌 감정을 풀었다는 점에서는 지금의 중학생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요. 그러니 내가 그 학생의 말을 듣고 화낸 일은 없습니다. 화를 낸 까닭은 뜻밖
에 자기도 모르게 와락 화를 낸 것입니다. 한심하고 부끄럽지만 그것이 내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급소가 어디일까요? 이 점에 관해서는 정직하게 말하기가 영 괴롭습니다만 앞으
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자숙할 계획입니다. 졸업생 여러분에게 사과하고 싶고, 멋쩍지만  감
사드립니다. 역시 교사는 정직하고 자기  감정에 솔직해야 합니다. Y선생님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자신이 전능하다고 생각하는 자만을 깨닫지 못했다.
  끝으로 D선생님의 소감을 소개하겠다.
  "나는 교단에 선지 20년이나 됩니다. 수업준비를 특별하게 하지 않아도 막힐 곳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수업 전에 교재연구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실에 가서  교과
서만 펴면 수업을 척척 진행할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지요. 내 자신감은 점점  커져서, 
수업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은 학생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수업에 이해 못할 부분은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학생의 잘못이다.' 이렇게 치부
해 버린 거지요. 너무나 오만한 태도였습니다. 자신이 전지전능하다는 자만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오늘 나는, 교실에서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던 
학생들의 다른 면을 보았습니다. 그 졸업생이 말했듯이 저도 입에 발린 말을 자주 했습니다. 
나 자신은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일을 학생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날마다 너희들 학년수와 똑같은 시간 동안만 공부해라. 그것도 못하는 녀석은 인간쓰레기
가 될 수 있다. 사람이란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대개는 해낼 수 있다. 할 수 잇다는 정신으로 
노력해라. 그것이 하루이틀 쌓이면 힘이 된다. 지속적인 노력이 힘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학생들을 독려했습니다. 하지만 나 자시능 ㄴ수업준비를 게을
리했지요. 피곤하다는 핀계로 책도 변변히 읽지 못했습니다. 바쁘다 피로하다 핑계를 대면서
도 술집에 가서 술도 자주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고는 늦게 귀가해서 텔레비젼이나 보며 빈
둥거리다가 잠자레에 들곤 했습니다. 한마디로 태만한 생활이었지요.
  나는 그렇게 나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학생들에게는 입에 발린 번지르르한 말을 했습니다.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아니, 그런 자신에게 일종의  능력같은 것을 느끼고, 득의양양했다
고 말할 수도 있어요. 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학생에게 하는 말과 나 자시의 행동이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런데도 학생을 야단쳤습니다.  야단치면 학생은 무엇이든 한다고  생각했습니
다. 참으로 천박한 근성이었지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학생들은 나의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화를 잘 내
는 내 기분을 맞추려고 했고 나를 거역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존경하기보
다는 알게모르게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교실에서  내 수업을 들으며 학생들은  과연 나에게 
얼마나 호감을 갖고 있었을까요? 이 점을 생각하면  비참해집니다. 존경받는 어른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학생들의 비웃음의 대상이었다니 한심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겠스니다. 아직 어린 학생들일지라도, 아니 학생들이  아
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나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능력을 다해서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
리고 무엇보다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싶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의 깊은 의
미를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절절한 감회에 감히 나의 주석을 붙일 필요는 없겠다. 우리는 이 교사의 감회에서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





    제 3장 이럴 때는 이렇게 꾸짖자
    1 교실이 시끄럽다
    수업시간을 테이프나 비디오에 담아서 다시 본다.
  신참교사들은 수업 중에 잡담을 못 하게 하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입을 모아 말한다. 도대
체 어떻게 해야 잡담이 없어질까, 시끄러운 교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조언한다. 
  "자신의 수업시간을 테이프에 담아서 들어보세요."
  대부분의 교사는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떠들면 잔소리를 한다.
  "떠들지 마."
  이렇게 호통친 경험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교무실에서도 잡담에 관한 화제가 단연 많이 나온다.
  "선생님 반의 oo군과 **군은 너무 떠들어요. 어찌나  떠드는지 수업하기가 어려울 정도예
요."
  생각해 보면 우리 교사들도 학창시절에는 꽤나 떠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을 
뿐이다. 요즈음에는 대학에서도 학생들이 떠들어 교수들이 강의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
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잡담하는 아이들은 수업을 방해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 수업에 열중하
지 못하는 것뿐이다. 학생들이 수업에 열중할 때는 소근거리더라도 그것은 수업분위기를 좋
은 쪽으로 이끈다. 수업에 활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중할 수 없는  수업, 집중할 수 
없는 수업이 문제가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짓는 것은 신출내기 교사에
게는 너무 가혹하다. 그래서 우선 교사 자신이 자신의 수업광경을 보거나 듣도록 권하는 것
이다. 비디오에 담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소리만이라도 담아서 스스
로 들으면 학생들이 소란스러워지는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만으로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교사 자신의 교수법,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교실이 소란스러운 원인을 
학생에게만 돌린다면 그것은 교사의 아전인수이다. 실제로 1시간  동안 교실의 딱딱한 의자
에 앉아서 선생인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인 자신을 상상해 보자. 어떤 느낌이 드는가.
  
    학생들의 감각도 계산에 넣고 있는가
  어떤 학교에서 교사연수의 한 방법으로 교사 전원이 학생이 되어 교실 의자에 앉아 수업
을 받은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몸으로 학생의 입장을 체험한 것이다. 수업이 긑난 뒤에 평가
회가 열리자, 대부분의 교사들은 수업을  하는 것과 수업을 받는 것이  이렇게 다를지 미처 
몰랐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수업시간에 떠들어도 그냥  놔두라는 뜻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때는 차분하게 경청하는 것이 예의이고 에티켓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유아시절부터 교육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정에서는 그런 교육을 소홀히 하고 있
다. 그러니 학교에서라도 그런 예의나 에티켓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대화를 나눌 때의 원칙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언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어떤 사람의  발언을 방해하는 듯한 야
유를 한다든가 헐뜯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상대방의 이야기가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른 발언을 하는 것은 천박한 짓이라는 되새김이 철저하게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은 어떤 일이 있어도 조용하게 교사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
려는 건 아니다. 수업은 인내의 장이 아니라 자기표현의 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표현이 수업의 주제와는 상관없는 '수다'여서는 안 된다. 수업이란 전원이 수업의 주제를 인
식하고, 공통의 문제의식을 심화하는 장이다.  일정한 규칙과 예의를 서로 지키면서  주제에 
관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떠드는 것을 시끄럽다거나 소란스럽다
고 느끼는 것은 편파적이다. 학생들의  수업분위기가 떠들썩한가의 여부는 그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감각도 계산에 넣어  생각해야 한다. 수업하기 어려운가  아닌가는 학생들이 
느끼고 판단해야 하는데, 교사가 일방적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야단을 쳐서 조용하게 만드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은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마음가짐을 바르게 육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침자습으로 차분한 학습 기회를 체험하게 한다.
  어떤 도시의 학교에서 있었던 사례이다.
  이 도시는 대도시의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는데 농가와 신흥주택과 시영주택이 뒤섞여  있
어서 거칠고 불안정한 느낌을 주었다. 학생들의 분위기도 그랬다. 안정된 분위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고, 수업은 떠들썩함 그 자체였다. 당연히 학력도 낮았다. 수업시간인지 쉬는 시
간인지 구별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이 심했다. 교사들도 정신적으로 지쳐 있어서 수업중
의 잡담을 꾸짖을 기력까지 상실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수업을 포기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몇몇 교사가 아침자습을  실시하자는 안을 냈다. 그래서  아침자습 지도가 
시작되었다.
  <여러분, 안타깝게도 우리학교 학생들은 학력이 높지 못합니다. 우리 도시에서도 낮은 편
에 속합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낮다면 아쉬울 것이 없겠지만, 여러분은 자율적
으로 공부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교실은 소란스럽고, 수업시간엔 태도가 엉망인 사람도  많
습니다. 이래서는 여러분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실력은 미지수라고 
해도 좋아요.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학생
이 있어도 교실이 소란스러우니 의욕이  꺾이고 맙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 학교의 커다란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사들은 여러분에게 '차분한'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점을  미안
하게 생각합니다. '좋은 환경'에서 학습하는 기쁨을 맛보면  여러분의 학력도 높아지리라 확
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없이 호소했습니다. 수업시간에 조용히 하라고 얼마나 주의를 줬는지 모
릅니다. 개인적으로 잡담을 하다가 주의를 받은 사람이 몇 명인지 몰라요. 그러나  유감스럽
게도 그것은 효과가 거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공부한 경
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경험을 하면 새로운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그래서 
학습에 대해 좀더 진지해져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조용하고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런 기회를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희망자에  한해 다음과 같은 '아침
자습'을 실시하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적극적으로 참가해서 자신의 숨은 실력을 발휘하기 바
랍니다.
  1. 아침자습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은 참가신청을 할 것
  2. 참가는 자유이지만, 신청한 사람은 최소한 일 주일간은 빠지지 말고 참석할 것
  3. 학습내용은 자유로 한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라 선생님도 자신의 공부를 하
는 시간으로 한다. 단, 질문은 자유. 아침자습 시간에 숙제를 해도 좋다. 만화책을 제외한 독
서를 해도 좋다.
  4. 아침자습 시간은 오전 7시에서 8시까지로 한다. 시간은 정확하게 지킨다.
  5. 아침자습 장소는 식당으로 한다. 그 이외의 장소는 안 된다.
  6. 아침자습 시간에는 절대로 떠들어서는 안 된다. 질문을 할 때는 손을 들고 선생님과 함
께 별실로 가서 한다.
  7. 아침자습은 O월 O일부터 시작한다.
  8. 선생님은 A, B, C 세 분이 참가한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학습경험을 합시다. 참가  희망자는 위의 세 선생님에게  오기 바랍니
다.>
  
    아침자습으로 교실 분위기가 변했다.
  위와 같은 내용의 인쇄물을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다음 주부터 아침자습을 시작했다. 처음
에는 20명 정도가 참가했지만 매일 조금씩 늘어서 다음  주에는 26명이 되었다. 1시간 동안 
독서하는 학생, 숙제하는 학생, 문제집을 푸는  학생 등 다양했지만 모두가 '조용한  시간'을 
경험하면서 학습의 맛을 깨달았다. 어떤 학생은 아침자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침자습에 참가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왠지 답답한 느낌이 들었
지만 어느샌가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시간 동안 이렇게 많
은 공부를 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되었고 공부도 잘  되었습니다. 교실에서는 언제나 
시끌벅적한 주위에 정신이 팔려서 집중도 안 되고 생각도  잘 정리되지 않았는데, 아침자습 
시간에는 아주 정숙하기 때문에 집중이 무섭도록 잘 되었습니다. 잡담을 하지 않는 것이 이
렇게 중요한가 하고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밝힌 학생의 수는  적지 않았다. 학생들이 그런 체험을  하다 보니 느리기는 
했지만 수업시간에도 진지한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움은 여전했지만 도가 지나
치게 산만한 학생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2개월 정도 지나서 학년 전체회의를 열고 아침자습에 대한  소감을 발표하게 했다. 한 번
도 발표해 본 적이 없는 학습 이야기인데도 모든 학생이 조용히 들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학년 전체회의가 끝났다. 그후 각 교실에서 '수업중의 태도에 대한 반성회'가 열렸고, 
수업중에 서로 지켜야 할 약속을 토론하고 수업규칙을 제정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이 학교는 진지한 수업자세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학업 성적도 향상되었다. 
수업시간에 입이 닳도록 꾸짖고 힐책을 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아침자습을 통해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분위기를 체험하게 해서 어떤 것이 옳은 수업태도인지 학생들 스스로 자각하게 했
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인식되었다.
  
    2 준비물을 잊다. 
  학생이 준비물을 잊고 오면 애를 먹는 것은 교사 자신이다.
  교사는 학생이 준비물을 잊고 오면  칠칠치 못한 녀석,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닐까 하고 
화가 뻗친다. 그러나 교사 자신도 할 일을 깜빡 잊고는 허둥대는 경우가 많다.
  반복되는 행동은 습관이 된다. 우리는 자신의 습관에 대해 아무런 저항이 없지만, 그 습관
이 소위 '빈틈없는 습관'인지의 여부는 의심스럽다. 가령 교사들 중에는 매주 제출해야 하는 
교수안의 제출을 잊는 일이 적지 않다. 일직이나 주번 등 교사가 맡아야 할 당번을 잊는 때
도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잊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이 '준비물'을 빠뜨리고 오는 것이 좋다거나 어쩔 수 없다는 뜻은 아
니다. 당연히 잊지 않는 쪽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생이 준비물을 가
져오지 않았다고 꾸짖을 때 자신도 가끔 잊을 때가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꾸짖는가, 아니면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 꾸짖는가 하는 점이다. 꾸중이란, 꾸중 당한 사람이 마음 깊이  반
성하여 스스로가 스스로를 꾸짖는 것이어야 한다. 꾸중한 사람에게 반발심을 느끼거나 앙심
을 품으면 그 꾸중은 역효과를 낼뿐이다. 
  교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 손해야."
  "준비물을 잊고 오면 낭패를 당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까, 스스로가 정신을 차리는 수밖
에 없어."
  어딘지 비꼬는 듯한 말투다. 학생들은 그런 분위기를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그러나 사실은, 학생이 준비물을 잊고 왔을  때 크게 마음에 걸리는 쪽은 교사이다.  교사 
자신이 수업을 진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준비물을 잊고 온 학생들 중에는 낭패라고 생각하는 학생도  있지만, 대개는 별일 아니라
고 치부해 버린다. 사실 교과서가 없든 공책이 없든 수업받는 데는 큰 고충이 없다.  그리고 
잊고 왔다간 큰 낭패를 겪을 준비물이라면 절대로 잊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준비물
을 잊었다가는 큰 어려움을 겪을 수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만 손해다'라는 말은 언제나 준비물을 잊는 단골, 학습에 거의 관심이 없는 학생에게는 
실감나게 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로 학생을 위해서 하는 말인가는 학생이 더 잘 안다.
    솔직하게 자기 심정을 얘기해서 잊고 오는 것을 추방한다.
  교사는 좀더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얘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교사는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말한다.
  "여러분이 책이나 공책을 가져오지 않는 것은, 내 수업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다는 뜻이
다. 여자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날을 잊는다면 그 만남은 깨지고 만다. 잊는다는  것은 
그 일에 관심이 적다는 증거이다. 너희가 학교에 올 때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오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수업에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무관심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
게 만들기는 어렵다.
  그것은 떡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떡을  먹이는 것과 같다. 그럴 때는  억지로 입을 벌리고 
떡을 밀어넣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떡을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떡
이 아니라 약이 있고, 그 약을 먹이지 않으면 상대가 죽는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약을 
먹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공부는 어떨까? 공부는 떡인가  약인가? 여러분은 어느 쪽이
라고 생각하는가?
  무언가를 잊고 오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사인 내 쪽에서 보면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내가 수업을 엉터리로 한다는 이야기와 똑같기 때문이다. 책이나  공
책 따위를 가지고 오지 않는 학생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내 수업을 업신여긴다는 의미이다. 
나로서는 분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분이 준비물을 꼭 챙겨올  만큼 매력적인 수업을 하
지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나는 아직 능력이 뒤떨어지는 교사라는 생각이 들어 울컥 
화가 치밀기도 한다. 그래서 교사로서의  실력을 더욱 닦아서 여러분이  준비물을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수업을 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어쨌든 나도 여러분을 열심히 가르치겠다. 어떻게 해서든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업을 하겠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기 바란다. 서로 노력해서  진
지한 수업시간을 꾸미자. 준비물을 잊는  따위의 시시한 일로 내 성의에  물을 끼얹지 말기 
바란다. 여러분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수업에 좀더 관심을 갖기 바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좋은 수업을 할 수 있도록 협력해 주기 바란다.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나 자신도  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을 잊은 적이 있다. 학생인 여러분만도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교과서나 공책을 잊고  온다
는 것은 목수가 톱이나 대패, 쇠망치를 잊고 오는 것과 같다. 이래서는 큰 그릇이 될  수 없
다. 나도 멍하니 있다가 수업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여러분도 함께 노력해서 멋진 수업시간을 꾸려가도록 하자."
  이 교사의 호소는 논리가 아니다. 이 교사는 수업을 진지하게 하고 싶다고 호소하면서 학
생들에게도 진지함을 요구한다. 학생을 일방적으로 꾸짖거나  힐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흡함을 스스로 탓한다. 학생들은 이런 교사에게서 솔직함과 정직함을 배우고 느끼는 것이
다. 
  이 학급에서는'잊고 오기 추방'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학급회의를  하게 되었다. 이 토론은 
한 단계 발전해서 '교실의 3악'인 '준비물 잊고 오기', '지각', '잡담'을 추방하기로 자율적으로 
결정했다. 학생들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실마리는 젊은 교사의 정직성이었다..
  만일 이 교사도 대부분의 교사처럼, '준비물을 잊고  오면 결국 너희들 손해'라든가 '잊고 
오는 것은 너희들 문제'라고 학생만을 꾸짖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부 학생들의 반발을  샀
을 뿐 아니라 학생들의 마음에서 점점 멀어졌을 것이다. 나는 이 교사의 정직성에서 교육의 
근본을 배웠다.
  
    3 지각을 한다
    지각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해이한 생활자세를 꾸짖는다
  시간을 지키는 것은 사회생활의 기본이다. 따라서 지각을 한다는 것은 늘어진 생활자세에
서 비롯되는 것이다. 시간을 지키지  않고 사회적인 약속에 소홀하면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잃는다. 특히 시간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은 대개  해이한 생활자세를 지녔다고 말
해도 좋다. 그런 사람은 복장, 두발도 어딘지 모르게 단정하지 못하고 칠칠치 못하다는 느낌
을 준다. 걷는 모습을 봐도 허리를 쭉 펴고 힘차게 걷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재빠르
지도 못하고 동작이 굼뜨다. 자세도 좋지 않다. 표정도  밝지 못하다. 매사에 긴장감이 느껴
지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동작이 재빠른 사람이 지각을 해서 빈축을 사는 일은  드
물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지각하지 말라!"고 꾸짖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 정신
을 차리고 해라. 목표를 세우고 전력을 다해 노력해라. 굼뜨게 어슬렁거리지 말고  데꺽데꺽 
해치워라."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각한 것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지각을  하는 해이
한 정신자세를 꾸짖는 것, 풀어진 생활자세를 꾸짖는 것이다.
    부모가 흐리멍덩하면 아이까지 무기력하다
  그러나 현실은 간단치 않다. 사실 부모가 흐리멍덩하고 가정이  풀어져 있는 집의 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한다.
  '꾸짖는 것으로 이 아이의 풀어진 정신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해이한 정신자세는 이 
학생의 고유한 특성이 아닐까. 고유의  특성이라면 꾸짖고 야단쳐서 일시적으로  긴장케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얼마나 길까?
  어떤 중학교에 다니는 A가 바로 그랬다
  A는 키 175센티미터, 몸무게 80킬로그램으로 학급에서 단연  체격이 좋았다. 그러나 젊은 
녀석이 몸이 무거워 답답하다는 느낌을 주었고, 무엇을 해도 시원스럽게 하질 못했다.  무엇
을 하든 "아, 지겨워!"라든가 "귀찮아 죽겠네."하고 투덜거렸다. 반항적인  면도 있는 아이였
다.
  이 아이에게서는 젊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야  반항적인 아이들은 애늙은이인 경우가 
많다. 기백 있는 젊음이 없고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어둡고 칙칙하게 산다. 음습한 생활
자세가 몸에 밴 것이다. 반항아들은 세상의 밝은 면을 보지 못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말을 시키면 체념투로 이렇게 푸념한다.
"우리는 멍청하고 공부를 싫어하니까 앞으로 크게 되지는 못해요. 노력해 봐야 효과도 없고, 
무엇보다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질색이에요. 우리는 어떤 일을  해도 쓸모 없는 녀석들이지
요."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한 적이 없고 인정받은  적도 없다. 공부도 못하고 운동
도 서툴다. 유머스러운 행동인 말로 반 분위기를 밝게 만들 줄도 모른다. 재치 있는  조크하
고도 거리가 멀다. 부지런히 몸을 놀려서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없다. 완력이나 과시하며 
반 아이들이 은근히 자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만족감,  마음의 
안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반항아들에게는 이런 심리적인 중압감을 떨쳐 버릴 
지혜나 에너지가 없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창 밖으로 먼동이 터와도 "자, 오늘은 이렇게 보내자!"하는 의욕을 느끼지 못한다. 
젊은이다운 패기가 없는 것이다. 내뱉는 말끝마다 귀찮다, 재미없다하는 불만뿐이다. 클럽활
동도 귀찮다고 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운동도 하지 않으니 완력은 있어도 체력은 없다. 금방 
지치는 것이다.
  이 학교의 교사들도 A에게 유도를 가르치려고도 했고 육상경기로 그의 완력을 살려 보려
고도 했다. 그러나 A는 무엇보다 달리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운동을 기피했다. 긴장을 하고 
규칙에 따라 운동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귀찮은 것이다.
  그는 친구들과 떠들고 놀면서도 마음  깊이 즐거워하지는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흥이 깨지기 때문이다. 자포자기가 되어 오토바이를 난폭하게 몰기도 하지만, 흥분하는 것만
큼 가슴 가득한 만족감이 일지는 않는다.
  이런 학생들은 맡아놓고 지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 학생의 지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
니고 다른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저 녀석들은 아무리 지각해도 그냥 무사통과야."
  "우리들이 지각하면 야단을 치면서 쟤네들은 왜 그냥 놔두는 거야."
  일부 학생들에게서 이런 불평이 제기된다. 그러나 이런 불평을  제기하는 것은 그 학생에
게서 반항아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어머니가 기대를 포기한 것이 무기력으로 연결되다

  문제가 단순한 지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교사는 어떻게  지도해야 좋을까.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문제해결의 출발점은 반항아들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데 있다. 그들이 재미있어하
면서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주는 것이다..
  A의 학교 교사들은 이리저리 머리를 짜냈다.  밭작물을 재배하게 해서 하고자 하는 의욕
을 불러일으켰다는 다른 학교의 사례를  듣고는 그것을 시도하려고도 했다.  문제아가 만든 
손우동을 다른 학생들에게 먹게 하여 반항이 아닌 다른 일로도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인식케 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사례를 듣고 그
런 시도를 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A는 이것저것 모두 내켜하지 않았다.
  "그런 바보 같고 유치한 짓을 나보고 하라고요?"
  A는 이렇게 따지며 A는 근본적으로 풀어진 녀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A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어머니가 학교에 온 일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하는 말이 아들과 
오십보 백보였다.
  "애를 너무 성가시게 하지 마세요. 우리 아이든 잔소리하면  도리어 아무 것도 하지 않으
니까요. 일단 중학교만 마치면 취직시킬 거예요. 몸집이 저렇게 크니까 건축회사에 취직해서 
육체노동은 할 수 있을 거예요. 돈이야 그런 대로 벌 테니 먹고야 살겠죠."
  교사들은 '만일 자신이 A라면 어떤 심정일까'를 놓고 토론하며 그 어머니가 한 말을 곰곰
이 따져 보았다. A의 어머니는 A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것이었다. 교사들은 새삼스러운 사
실을 깨닫고는 아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오직 하나뿐인 어머니의 기대를 받지 못하는 아이의 
심정은 어떨까? 교사들은 자기의  소년시절의 불안과 비교하면서 의견을  교환했다. 게다가 
A의 어머니는 왜 자기 아들을 내팽개치는 듯한 말을 하게 되었을까하는 의문도 생겼다.
  교사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설왕설래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억측일 뿐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A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그때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A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부모의 지나친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바람에 그 압력에  짓눌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기
대를 포기한 듯한 어머니를 바라보며 부모의 애정을 의심하는 불행한 아이도 있다. A가 바
로 그랬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어머니는 체념한 채 꾸짖지 않는다. 이것은 참을 수 없이 쓸
쓸한 일이다.
  흔히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한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가 없다. 부모도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아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부모와  자식 
사이가 된 인연을 소중히 여길 때, 그 인연은 깊고 견고한 것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기 아이를 가리켜 '둘도 없는  아이'라고 부른다. 거꾸로 아이에게도 
부모는 '둘도 없는 존재'이다. 부모가 아무리 파렴치하고  무식하더라도 자식은 부모를 타인
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남들이 부모에 대해 "얼마나 멍청한 사람인가!"하는  식으로 생
각하더라도 자식은 부모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똑같
은 심정을 자식도 부모에게 품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기대를 모으지 못하는 아이는 부모에
게 버림받은 아이다.
  교사들은 A의 흐리멍덩한 태도, 매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어
느 것 하나에 진지하게 몰두하지 못하는 그의 태도 이면에 깔린 무서운 진실을 보았다.
  '그러나 A의 어머니도 처음부터 A를 그렇게 처참하게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
각한 교사들은 A의 심리상태에 대해 이모저모 따져 보았다.
  A는 독자였다. 부모는 별거상태, 이혼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A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복잡
하기 그지없는 갈등의 연속이었고, A는 지금도 그런 것들에 질질 끌려서 살고 있음에 틀림
없다. 
  A의 갈등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심리적 갈등의 사슬에 묶여 도저히 벗
어날 수 없는 A의 입장은 어떤  것일까. 교사들은 A의 입장에 서서 토론하는  가운데, A의 
지각이나 반항을 적어도 표면적으로만 판단하지는 않게 되었다. A의 어머니를 놓고 이야기
할 때도, "저따위로 말하니까 A가 그렇게 삐뚤어지지."하고 차갑게 단정짓지 않게 되었다.
  
    아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자 지각이 줄었다.
  그후에도 A는 변함없이 지각을 했고 교사는  그런 그를 꾸짖었다. 그러나 꾸중을 한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A를 닦아세우는 일은 없어졌다. 닦아세우거나 추궁하는 일이 없어지자, A
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다.
  "알았어요. 한번 해볼게요."
  A는 매사에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을 부정하면 상대방도 이쪽을 부정한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비난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교사들은 A를 그저 부정
적인 시각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교사들은 이런 말도 했었다.
  "나쁜 건 나쁜 것 아닙니까? A만 특별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교사들은 일종의 반발심리를 느껴서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교사도 
있었다.  'A의 응석을 받아줬다가는 끝 모르고 기어올라서 귀찮아질 것이다.'
  이런 생각은 A의 반항으로 내가  귀찮은 입장이 되지 않을까라는 교사의  심리를 반영한 
것이지 A의 심정을 고려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교사 자신에게 어떤 결점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상대방이 그것을 직선적으로 
지적하며 인격전체를 부정하면 어떻게든 변명하고 싶지  않을까. 공평하고 평등하게 대접받
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특별한 사정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얼핏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런 마음이 공존하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불합리한  존재이
다.
  A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A의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 나아가  A의 어머니의 입
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A의 응석을  받아 줘서 우쭐거리게 만드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자극이 다르면 반응도 달라진다.'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결론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A가 
전에 없이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신선한 자극이었다.  좋은 자극을 받은 교사들은 
당연히 좋은 반응을 보였다. 교사들이 보이는 좋은 반응이 A에게는  좋은 자극이 되니까 A
는 또다시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A와 교사의 인간관계는 원만한 관계로 전환되
었다.
  교사들은 묘하게 느껴질 만큼 자연스러운 말로 A를 꾸짖었다.  지금까지처럼 A의 반발이
나 A의 패거리들의 반항을  두려워하는 꾸중이 아니었다.  서로 자연스럽고도 편한 관계가 
된 것이다.
  교사들이 A의 지각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을 때 A의 지각도 적어졌다. 이 학교
의 교사들은 인간관계의 오묘함을 체험적으로 느꼈다. 
  
    4 규칙 위반, 규율 무시
     규칙이나 규율은 타율적으로 강요하는 느낌을 준다.
  규율이나 규칙에 구애받는 것은 참으로 성가신 일이다. 규칙이나  규율은 대개 남이 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규율이나 규칙의 본질이다.
  예를 들어 교통 규칙이 그렇다. 교통규칙은 도로는 공공시설물이라는 관점에서 교통의 안
전과 질서의 유지와 확보를 위해 학식있고 경험있는 각종 위원회가 심의하고 일정한 과정을 
거쳐 법적으로 정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교통규칙을 지키는  것은 개개인의 안전과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면서도 때로는  거북하게 느낄 때가 있다.  적발되었는가 안 
되었는가는 별도로 하고 차를 모는 사람치고 교통위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지
나치지 않다.
  이 점에서는 교통규칙만이 아니다. 병원창구에는 접수시간이 정해져 있다. 언젠가 그 시간
에 5분 정도 늦은 사람과 창구직원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을 우연히 본 일이 있다. 
  "시간이 지났으니 안 됩니다."
  "아니, 그래도 부탁합니다.."
  창구직원은 얼굴을 찌푸리며 핑계를 댔다.
  "그런 부탁을 받아 줬다가는 한이 없습니다."
  진찰권을 내민 사람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다그쳐 물었다.
  "확실히 그렇습니까?"
  주위 사람들의 눈에도 창구직원이 너무 융통성이 없어 보였지만 창궂2 원의 입장에서는, 
의사가 접수시간을 정확하게 지켜 달라고 하기 떔눈에 융통성을  발휘할 ㄴ여지가 없다. 그
래서 창구직원은 반은 사정하듯이 설명한다.
  "시간을 니키지 않으면 제가 꾸중을 들어요. 의사도 인간인데  무제한 일을 할 수 있겠어
요?"
  그러나 진찰받으러 온 사람도 기를쓰고 매달린다.
  "그거야 그렇지요. 그래도 이렇게 부탁하니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끝까지 창구직원이  안 된다고 버티자. 그사람은 문을 부술 듯이 거칠게 닫고 가버렸다.
 ㅇ 언젠가 가까운 공립도서관으로 책을 반납하러 간 일이 있었다. 반납기한이 지났기 때문
에 사과하고 다른 책을 새로 빌리려고 했다.
  그러나 담당자가 말했다.
  "반납기한을 넘기시는 분에게는 일 주일간  대출을 못 하게 되어  있어요. 미안하지만 일 
주일 후에 오십시오."
  자못 획일적이고 융통성없는 직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한을 넘겨 책을 반납했음
을 아는 다른 직우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대출권도 특별관리 대상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기한을 넘겨 반납했음을 아는 사람은 담당자와나 단  두 사람뿐이었다. 결구 기한을 
지키지 않은데 대해 벌칙을 부과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그 담당자의 마음에 달린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불평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후에 다시 그 도서관에 갈 때는 발걸음이 가볍지 못했다.
  규칙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규칙대로, 더구나 규칙으로만 시종일관하고 전혀  융
통성이 없는 상황에는 반발심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이 정도면 됐지 않은가 하는 대략의 기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면 규
칙은 서서히 무너진다. 규칙이 무너지면 질서가 사라진다. 그러면 혼란이 일어나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생긴다. 의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창구직원은 꾸중을 듣고 기분이  상한다. 
바로 이 때문에 창구직원은 끝까지 거절을 한 것이고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도서관의 담당
자에게도 나름대로 곤란한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규칙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입장으로 대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규칙
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바람직하다.
  
    규칙과 규율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어떤 학교에서는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규칙과 규율을 지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자
료를 활용해서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규칙과 규율은 답답한 것이다. 규칙이나 규율 따위가  없으면 좋을 테지만, 그것이 없어
지면 사회생활은 금방 혼란에 빠진다.
  우리는 현재 크게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규칙을  지키고 있다. 전철을 탈 때도 '서로  밀지 
않고 순서대로 타자'라는 '상식'을 지키고 있다.
  그래도 전쟁 직후의 혼란기에는 그런 '상식'이 지켜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내가 먼저'라는 
생각에 집착하여 남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전차의 좁은 입
구로 밀려들었다. 기를 쓰는 정도가 지나쳐 전차의 창문으로 기어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는 무엇보다 전차의 수가 적었다. 이번 전차를 놓치면 집으로 못 돌아갈 수도 있었
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사람을 가득 태워 초만원인 전차가 느릿느릿 정거장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전차가  완전
히 멈추기도 전에 전차 창문으로 기어올랐다. 게다가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의자에 앉
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의자를 세운 뒤에 그 위에 올라서기도 했다. 콩나물시루를 찜쪄
먹을 만큼 태워야 전차는 달리기 시작한다. 정차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배차시간도 엉
망이 된다. '생명을 걸고 덤벼서 타라!!'는 풍자적인 노래가 생겼을 정도이다. 상황이 이러니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든 그런 것을 염두에 둘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실로 한
심한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은 전차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먹을 것이 없었다. 정말로 사회는 지옥 그 자체였
다.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자기가 부정을 저지른다고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정부가 정한 규칙을 지키다가는 굶어죽을 판이라고 대놓고 말했다. 당시에는 먹
을 것이 없어서 쌀은 물론이고 보리, 감자, 야채, 생선이 모두 배급제였다. 배급제라는  규칙
을 깨고 농가에서 직접 쌀이나 보리 따위를  사오는 것을 '암거래쌀, '암거래품'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암거래가 횡행해서 '암거래쌀'의 가격이 자꾸 올라  무서운 인플레를 야기했다. 배
급쌀을 적었지만 가격은 정부가 정한대로 팔렸다. 그러나 '암거래쌀'은 그 10배, 심지어 20배
나 가격을 올려 받았다.
  돈을 들고 가도 농가에서는 쌀을 감추어 두고 쌀이 없다며 쌀을 사려면 좋은 물건을 가지
고 오라고 했다. 도시사람들은 옷이나 양복 따위를 가져가서 쌀과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어
렵사리 구한 쌀을 몰래 숨기고 싸우다시피 초만원인 전차에 올라타면 경제경찰이라는  통제
관에게 쌀을 몰수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들켜서 도망치는 사람, 뒤쫓는 사람 등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고 서로 미워했다. 도시사람들은 "농촌 촌놈들, 쌀가지고  되게 뻐기
는데 어디 두고 보자!"며 농촌 사람들을 미워했다. 그런가 라면 농촌사람들은 "도시 녀석들, 
지금까지 우리가 비지땀을 흘리며 일해서 만든 쌀을 먹고 좋은 옷 입고서 뻐기며 놀더니만 
꼴 좋다. 어디 한 번 맛좀 봐라!" 하고 도시사람들을 비꼬면서 큰소리쳤다.
  도시사람 중에는 암거래로 돈을 벌어서 순식간에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들을 '암거래졸부'라고 부르며 비난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암거래를 해서라도 한밑천 잡으
면 잘 살 수 있다는 부러운 마음도 갖고 있었다. 부정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짐에 따라 사람
들의 삶도 퇴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뭐니뭐니해도 물건을 풍부하게  생산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그 당시 모든 국민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했다. 이를 악물고 일했다.
  오늘날 일본이 잘살게 된 배경에는 서민들의 지옥 같은 사연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자
가 풍부해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사람들은 마음이 변해서 규칙은 지겨운 것 규율은 성
가신 것이라고 생각하며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게 되었다. 그것이 잘하는 일일까? 그래도 되
는 일일까? 이제 우리는 앞 세대가 겪었던 전후의 혼란,  지옥의 모습을 다시 돌아1ㅘ야 할 
것이다. 전후라고는 하지만 불과 4,50년 전의 일이다.
  이 자료는 직접적으로 규칙과 규율은 생각게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이 자료를 
읽고, 할아버지나 할머니, 부모님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 토론하면서 현재  사회의 
질서나 치안의 고마움을 깨닫는 학생이 적지 않다고 한다.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는 것, 그리
고 그 신뢰가 주는 기쁨과 규칙이나 예절과의 관계, 규칙과 규율이 지켜지는 고마움, 그  밑
바닥에 깔린 풍요로운 경제, 이런 것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면서 진정 풍요로움이란 무엇
인가, 무엇이 인간적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고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교사들도 자신의 생활
을 되돌아보면서 지도에 임한다고 하니 교육적 효과가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이 학교에서는 규칙을 위반하거나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아주  적다. 어쩌다 무심코 위반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교사가 반드시 꾸짖는다. 그러나 그야말로 '꾸짖는'것이
지 결코 '힐책'하는 일이 없다. 꾸짖음으로써 서로 규칙이나 규율의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고 
한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적은 오늘날, 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보여 준 자료는 정말  귀
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5 흐트러진 복장
    작은 묵인이 커다란 문제로 발전한다
  신발 뒤축을 꺾어 신고 발을 질질 끌면서 걷는 학생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거친 느낌
과 반항기를 함께 풍긴다고 생각하면서 묘한 심리적 만족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
생들의 그런 태도를 보는 주변의 4,50대 어른들의 시선은 고울 리가 없다. 그래서 중년 이상
의 교사들은 참지 못하고 호통을 친다.
  "신발이 그게 뭐야! 꼴 보기 싫다. 에이, 칠칠치 못한 놈."
  그러나 꼴 보기 싫고 칠칠치 못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중년의 교사뿐이다. 당
사자인 학생은 칠칠치 못한 것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다.
  대개 학교에서 지정한 신발은 평범하다. 그런데 학생들은 지정된 신발을 단정하게 신으면 
자신이 지극히 평범한 아이라는 느낌을 받는 모양이다.
  학생들이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대개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하는 것은 어린애, 코흘리개나 할 짓이라는 묘한 반항심을 갖고 있다. 신발 뒤
축을 꺾어 신는 별일도 아닌 일에 잔소리나 퍼붓는 선생님들은 정말 귀찮은 존재라는 어른
에 대한 차가운 조소 같은 감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구두 뒤축을 꺾어 신는 것은 사소한 문제이다. 그런 일에 일일이 쌍심지를 돋우고 
꾸짖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짓'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복장을  단정히 해라. 
신발도 단정하게 신어라 하고 주의를 주며 지도한다. 작은 묵인이 커다란 문제로 발전(?)한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왜 작은 묵인이 커다란 문제로 발전하는 것일까?  묵인이 문제학생들을 '우쭐
거리게' 했고, 한 걸음 나아가  '제멋대로 설치게' 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것만도 아니 것 같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잔소리를 하면서  지도하기 때문에 오히려 갈등
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너무 자주 주의를 주는 것이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해도 학생에게는 스트레
스로 작용하는 일이 적지 않다. 학생들은  마음속으로, '아이구 귀찮아 죽겠네.'라든가, '별것
도 아닌 일에 일일이 잔소리를  하니 되게 까다롭네. '라든가,'입만 열면  규칙, 규칙 노래를 
하니 지겨워서 어디 학교에 다니겠어.'하고 느낀다.
  그런 느낌이 다른 일에도 영향을 미쳐서 '매사에 엄격한 학교', '하찮은 일에  시끄러운 학
교',라는 평가(?)를 내리는 일도 충분히 있다.
  반면에 학생의 잘못에 대해 '별일 아닌 걸 뭐.'하고  묵인하는 것은 교사 자신의 스트레스
가 된다. 구두 뒤축을 꺾어 신는 행위가 한 걸음  나아가 머리를 빨갛게 염색하거나 헐렁헐
렁한 바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치마로 발전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모두가 신발 뒤축을 꺾어 신고 다닌다면, 이번에는 좀더 유별
난 복장이나 특이한 행동을 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어질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그런 
심정이 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나쁜 밭에서는 좋은 작물이 자라지 못한다.  신
발 뒤축을 꺾어 신고 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는 것은 좋은  분위기, 좋은 밭이라고 할 수 없
다.
  앞에서 복장이 한층 더 흐트러질 '위험'이 있다고 썼는데 이 '위험'은 교사가  느끼는 위험
이다. 학생들은 그런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학생들은 교사가 흐트러진 복장이나 신발 뒤축을 꺾어 신는 행동 따위를 그대로 방치했을 
때 어떤 영향이 있을지 예상하지 못한다. 흐트러진 복장이 자신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지
를 깨닫는 통찰력이 없다. 교사가 설명해 준다고 해도  체험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니까 이해
하지도 못한다. 설사 이해할지라도 감각적으로는 깨닫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교실  분위
기가 깨지면 수업이 제대로 되지 못한다.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학생들은 무언가 득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학교나 교실  분위기가 가속도가 붙은 
채 붕괴되는 과정이며, 계속 나빠져 되돌릴 수 없는 심각한 지경으로까지 이르면 다시 진지
해지고 싶어도 진지해질 수가 없다. 이것을 몸으로 느끼려면  실제로 붕괴되는 교실이나 학
교에 있으면서 체험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어 후회막급일 뿐이다. 손을 쓰고 
싶어도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손해와 돌이킬 수 없는 허무함을 느끼며 그저 후회만 
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서 미움과 손가락질을 받으면서까지 학생들을 세세
하게 지도한다. 단추가 채워져 있지 않다, 호크가 열렸다, 명찰이 지워졌다, 혁대가 너무  가
늘다, 배지가 없다, 머리에 무스를 발랐다, 이런 것을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외부인이 보면 틀림없이 너무 자질구레하고 성가신 일이라고 느낄  것이다. 물론 교사 자
신도 그 지겹도록 자질구레함에 진절머리가 날 것이다.
  '학생들이란 좀더 상식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존재인가. 좀더 바람직한 감각을  발휘해서 
품위 있고 단정한 복장, 머리로 양을 하고 다닐 수는 없을까. 보기만 해도 눈꼴신  멋대로의 
태도, 게다가 그런 태도에 난 어울리는 건방진 복장과 머리 모양, 꼴사나운 언동. 어떻게 보
면 단순한 것들인데 왜 제대로 바로 잡히지 않을까?'
  교사는 교과학습의 기쁨을 전하고, 학습의 즐거움에 공감하는 교실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
런데 그런 것과는 관계없는 복장이나 머리모양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지도하는데  정력을 
허비해야 한다. 무언가 크게 낭비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현실은 현살이다, 그래서 교사
들은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은 학교는 없을까 그런 학교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내
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바란다.
  
    신발 뒤축을 꺾어 신는 것은 마음의 뒤축을 꺾어 신는 것이다.
  생활지도에 정력을 허비하지 않아도 좋은 학교, 그것이 이상적인  학교라는 말을 한 사람
이 있었다. 이 사람은 학생들과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실랑이를 벌이는 일에 신물이 난다
고 했다. 아무리 입이 닳도록 주의를 줘도 학생들은 고치지 않는다. 배지를 다는 상태가  좋
아졌다 싶으면 다음에는 두 발  두 발을 고치라고 귀찮게 잔소리를  해서 나아졌다 싶으면, 
이번에는 엉망이 되는 식의 반복에 지쳤다고 한다.
  학생회의 활동으로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학교에서도 신발 
뒤축을 꺾어 신는 행동은 끝까지  고쳐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신발 뒤축을  꺾어 신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부리 지도방법을 갖가지로 짜내서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침 텔레비젼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야 건강에 좋고 두뇌활동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
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슬리퍼를 신으면 발뒤꿈치를 들고 
걸을 수 없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소
재로 삼아 학생들을 지도했지만 2, 3일 동안 주의하는 듯 하더니 금방 원상태로 돌아갔다. 
  '신발 뒤축을 꺾어 신어야 직성이 풀립니까' 라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여도 효과가 없었다.
  결구 교사들은 효과란 우엇일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효과란 결구 교사가 원하는대로 되는  것이 아닐까. 구두 뒤축을 꺾어  신고 다니는 꼴이 
보기 싫어서 자기 마음에 들도록  학생들의 마음을 바꾸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학생들이 볼 
때에는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교사들이 "문제야, 정말 문제야."라고 소란을 피우는 게 우
스꽝스럽지 안ㅎ을까. 그렇게 반성하니 지금까지의 지도에는  어딘지 과장된 구석이 있었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교사들이 좀더 솔직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런 교사들의 심정을 알아
차린 교장은 조회시간에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생님들이 구두 뒤축을  꺾어 신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뒤축을 꺾어 신으면 걸을 때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아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없다는 등 여
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구두 뒤축을 꺾어 신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선생님들 볼 때  '눈에 거
슬렸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선생님들이 '단정한'느낌을 받도롣  복장에 신경을 쓰세요. 무
척 성가시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런 자질구레한 일이 아무려면 어떠냐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깨끗한 신발을 깨끗하게 신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단정한 느낌을 주자는데 반
대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그것이  에티켓이고 호감가는 마음씀씀이, 좋은 예절일  테니까
요.
  구두를 신을 때 잠깐 손을 빌려서 뒤축 안으로 발을  넣어 주세요. 여름이라 더워서 불쾌
할 수도 있겠지만, 뒤축을 꺾어 신어도 찌는 듯한 날씨가 멀리 도망갈 리는 없고 맨발로 걸
어도 더운 것은 더운 것입니다. 복장을 단정히 할 때 마음도 긴장되어 단정해집니다. 이  점
에는 선생님의 복장이나 신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발을 꺾어 신어서는 풀어진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복장은 역시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니까요.
  '마음은 모습을 만들고,모습은 마음을 반영합니다.'
  자기의 복장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신발을 꺾어 신는 것은  마음의 뒤축을 꺾어 신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교사들은 이런 관점에서 계속 지도하기로  했다. 이 학교의 학생지도의  배경에는 학생과 
교사사이에 서로의 신뢰를 확신하는 따뜻한 인간관계가 깔려 있었다. '우리 학생들은 교사의 
지도를 잘 따른다' 라는 교사들의 마음과 '선생님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들어 주신다'라는 
학생의 마음이 밑바닥 깊은 곳에  깔려 있는 것이다. '선생님의  바람'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학생의 마음과 '학생들의 심정'을 충분히 고려하는 교사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교사
의 지도가 학생들의 자기 지도로 발전한 것이다.
  
    6 산만하게 어지르기
    정리정돈을 어떻게 바라볼까
  예절에 관련된 꾸중이나 자질구레한 잔소리 가운데에는 정리정돈에 관한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학생의 견해와 느낌, 그리고 교사의 견해와 느낌 사이에는 커다란 격
차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교사 사이에도 개인차가 있어서,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잇
는가 하면 산만해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있다.
  정돈된 상태가 좋고 산만한 분위기가 나쁘다는 것은 단순한 사회통념일 뿐  개인적으로는 
어느 쪽이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 학생의 공부방이 얼마나  정돈되어 있는가 산만한가는 개
인취향의 문제이다. 그래서 부모가 교사에게 이렇게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집 아이는 정리하는 것을 싫어해서 큰일이에요. 선생님이 뭐라고 타일러 주세요."
  그렇다면 학교에서 정리정돈 교육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인가.  가정교육을 할 때 정리
정돈하는 교육은 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인가.
  말할 나위 없이 인간은 혼자서는  살지 못한다. 아무리 방이 가정  속에 숨겨져 있다고는 
해도 가정도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장이므로 그 속에서 서로 기분좋게 생활할 수 있도록 힘
써야 한다. 자기 방이니까 자기 멋대로 해도 된다는 전제는 어디에도 없다. 가족이 기분좋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무너뜨리는 생활태도는 무례한 것이다.
  만약 가족 전부가 정리정돈에 무관심해서 쓰레기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도 개의치 않는다
고 해도 문제는 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기 때문이다. 구더기  밑살
같은 방에 앉아서 나느 이래도 좋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쓰레기를 잔뜩 쌓아 
주변에 있는 집들에 악취를 풍기면서 사회생활을 할 수는  없다. 정리정돈은 사회생활을 위
한 기본적인 요구이기 때문이다.
  낙서나 장난도 마찬가지이다. 혼자 자기 방에서 기분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라면 사회적으
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그런 자기  멋대로의 기분을 학교나 전철 속, 도서관과  같은 
공공장소까지 옮겨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떠날 때 관광버스를 이용함을써 예의범절이 나빠지는 일이 있다. 전
세버스라는 자기들만의 공간이 확보되었다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전세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날 때 예의를 잃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것은 모두 개인과 사
회를 구별하지 못하고, 진정한 의미의 개인의식이 제대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연하
면, 공공정신을 제대로 기르지 못한 사람, 사회적인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 많기  때
문이다. 실상이 이런데도 사람들은 개인을 존중하라, 개성을 존중하라고 추상적인 요구를 한
다.
  개인의식 혹은 개성이라는 개념은,자기하고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는  남이 존재한다는 
인식 위에 성립한다. 사회의식이 희박한  곳에서는 개인의 존중이나 개성의  신장을 기대할 
수 없다. 자기와 타인을 구별하는 의식이 싹틀 때 자기와 남을 동시에 존중할 수 있고, 자아
존중의 xch대에서 자기의 개체의식이 살아 숨쉰다. 개성의 존중이란, 자기가 남과 특별하게 
다르다는 것, 기이한 짓을 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큰 소리로 자기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
며, 기성을 질러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모으는 것도 아니다.
  남과 같아도 좋고 달라도 좋으니 나는 내 생각대로 이렇게 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자기
의 개성이다. 이때 우리의 생각 속에는 당연히 사회의식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
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상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정리정돈은 쾌적하게 살아가기 위한 기본예절
  학교는 학생들의 개성을 충분히 기르는 동시에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기관
이다. 따라서 학교도 정리정돈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정리정돈은 기본적으로  개
인의 미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그 교육은 어렵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정리하라고 이르면 오른쪽에 있던 물건을 왼쪽으로 옮기고 서랍이나 사물함  따위
에 물건을 마구 쑤셔 넣어서 '남들의 눈만 피하는' 딱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아이들의 경우
만이 아니다. 교무실이나 사무실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몇 년이나  케케묵은 
인쇄물도 잔뜩 쌓아놓고 정리를 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렇게 정리정돈을 못하면서 학생들에
게는 정리정돈을 잘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니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결구 교사가 먼저 정리정돈의 교육적 의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
하는 교사들이 많다.
  "정리정돈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너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정리정돈을 잘하면 다
믕에 불건을 사용할 때 금방 찾을 수 있지 않니.  게다가 마구 흩어놓으면 물건을 잃어버리
기도 쉽다."
  그러나 이런 교육은 교사의 생각이 얼마나 짧은가를 말해 줄 뿐이다. 이유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 쪽에서 "나는 그래도 좋은 걸요." 하고 반박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정리정돈에 대해서는 이렇게 교육하는 쪽이 바람직할 것 같다.
  "정리정돈은 다양한 사고를 지닌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쾌적하게  살아가기 위한 
기본예절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말끔히 정돈하는 버릇을 들여라. 
사람들은 누구나 깨끗한 장소, 말끔하게 치워서 정리정돈한 환경을 좋아하니까."
  학생들은 크게 대수로운 것이 아니더라도 근거가 타당하면 긍정한다. 
  "입다물고 치워!"
  그저 이런 식으로 야단친다면, 학생들은 야단맞은 것에 대해  반발을 느껴 청소하기 싫어
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다."
  이처럼 위하는 척 말을 해도 안 된다. 교사들은 사물의  본질을 보다 정확히 인식하고 그
것에 따라 교육해야 한다.
  
    7 학습의욕이 없다
    교사도 학습의욕에 대해 오해나 착가을 하고 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자기가 좋아서 해야 금방 숙달된다.'  맞는 말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노력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무리하게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스스로 좋아서 하는 편이 낫고, 그냥 좋아할 뿐  아니라 즐거워서 하는 것이라면 그
것을 당해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학생들은 왜 학습의욕을 잃는 걸까. 어쩐지 학습에 대해 오해나 착각이 존재하고 있는 듯
하다. 더구나 그 오해나 착각은 교사의 마음속에조차 뿌리박고  있고 부모의 마음속에도 뿌
리를 내리고 있어서, 자녀가 유아ㅇ리 때는 전혀 돌보지 않다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 협
박조로 말한다.
  "공부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하돌록 해. 그렇지 않으면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부모가 이런 식으로 말한면 아이는 모처럼 느끼던 공부의 재미까지 싹 달아나 버린다. 사
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런 감정이 숨어 있지  않을까. '공부는 어렵고, 
어려우니까 고상하고, 공부하는 자는 위대하고 훌륭하다. 하지만 공부 따위를 좋아하는 녀석
은 좀 별종이고, 위대한 학자는 괴짜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사랆들은 '적당히 중간을 가는' 사람을 좋아한다. 공부에만 파묻혀서 한 눈 팔지 
않는 사람은 왠지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위대한 학자라  해도 세상의 어려움과 즐거움
을 잘 알아 누구나 쉽게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음미할 
줄 아는 인물이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
  교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교사가 가르치는 과목이 좋아질리가 없다. 
  교실의 학생들은 많건적건 교사의 영향을  받는다. 아니,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는  의식을 
하든 못 하든 주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옛시조에 '비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비춘다고도 생각하지 안고 비치는 달과 물'이라는 구
절이 있다. 연못의 수면에 달의  모습이 선명히 비친 것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읊은 노래라고 한다. 달은 자신의 모습이 수면에 비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 또한 달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달의 모습이 수면에 
선명하게 비치고 있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해도 자신은 남에게 무언가를 비추고,  자
신도 남의 무언가에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는 생각하지 못해도 서로 비추고 비치는  것이다. 
서로가 달이고 물인 것이다.
  
    학생의 흥미와 관심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가
  교사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자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교사 자신은 자기가 가르치는 과목을 좋아하는가.
  *가르치는 일이 즐거운가. 스스로 즐기면서 가르치고 있는가.
  *교사 자신은 공부를 좋아하는가.
  *자신의 과목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만을 인정하고,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을 부정
하는 경향은 없는가.
  *학생은 결국 각자에게 흥미롭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낼 것이다.  그는 그것에 하루 종일 
몰두할 것이다. 교사 자신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과연 교사 자신은 학생들의 관심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이런 말투는 어떨까.
  "네가 좋아하는 천문학에 대한 관심의 반만이라도 내 설명에 기울인다면 가르치는 보람이 
있을 텐데."
  "네가 좋아하는 조류관찰에 쏟는  에너지를 반만이라도 내 수업에  나누어 주면 기쁠  텐
데."
  교사가 이렇게 말하며 접근하면 학생들은 상당한 기쁨을 느낀다. '내 흥미에 관심을  기울
이는 선생님'이라고 친근감을 느낄 것이다.
  "천문학을 아무리 파봐라, 입시에 붙을 수 있나."
  "학과공부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새 따위나 관찰하다니, 뭐가 되려고 그래!"
  이런 말투에 비하면 앞에 소개한 표현은 긍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학생들은 자기를 좋
아하는 선생님을 좋아한다. 자기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선생님은 자기를 좋아하는 
선생님이다. 따라서 교사가 학생을 바라볼  때에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깃든  시선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학생의 흥미가 천문학, 조류관찰이 아니라 오토바이나 음악에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는'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교사들이 왜 그것들을 부정적인 것으로 느끼는가 하면, 우리  마음 속에는 오토바이나 록
음악의 이미지가 불건전한 것, 폭주족이나 비행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일부 학생들이 오토바이나 록음악에 매력을 느끼는 걸까? 오토바이나 록음악에 푹 빠
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과의 매력이 '그것들'을 압도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교사들이 그것을 학생들에게 배우겠다는  자세로 접할 수는 없을까. 교사  자신이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상황은 지금과 많이 알라질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이들이 흥미를  보이지 않는 공부에  "흥미를 가져라. 의욕을  가져
라."하고 질타와 격려만 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흥미를 갖고 있는 것에는 그저 질타만 하
기 때문에 도리어 학생들이 우리를 기피하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자동차와 오토바이 안내책자를 훔쳐보던 학생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교사
가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자동차에 흥미가 많구나. 나도 자동차를 좋아하지만 차종을 조사하는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너에게 배우고 싶으니 내게도 한 번 보여 주렴. 하지만 지금은 국어시간이니
까 안내책자는 덮거라."
  그 학생은 틀림없이 야단맞고  안내책자도 빼앗기리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부드럽게 
말하자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 학생은 수업이 끝난 뒤에국어  선생님과 하께 자동차 안내책
자를 보면서 신나서 토론을 했다. 그 후에 그 학생은 국어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학습의
욕이 없다' 의 사실의 배경에는 '오직 무시만 당하는 나 자신'이라는 불행이 깔려 있다. 따라
서 교사 자신이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학생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학생
들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8 성적인 흥이를 갖는다
    나도 그랬다.
  어떤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D선생은 수업이 끝난 뒤에 2학년 남자아이들 몇 명이 아까부터 여자화장실을 들락날락하
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들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무언가에 흥분을 했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쿡쿡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얼굴이기도 했다. 이상했다.
  "이 녀석들, 뭣들 하는게냐!"
  D선생이 소리치자 아이들이 일제히 달아나려 했다.
 "도망친다고 내가 놔둘 줄 아냐!"
  다시 호령을 하자 아이들은 복도에 나란히 섰다.
  "뭣들 하고 있었지?"
  D선생은 이번에는 약간 작은 소리로 말하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부드러운 눈길이었다. 
녀석들은 꿀먹은 벙어리였다.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 게다.창피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겠지."
  D선생이 그렇게 말하자 아이들은 모두 동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 좋다. 잠깐 이 교실로 들어가자."
  D선생은 바로 옆에 있는 자기 교실로 학생들을 데리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거기에들 앉거라. 뭐...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게다...."
  D선생은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말꼬리를 흐렸다. 모두들 자리에 앉자, D선생은 그 중에
서 평소에 가깝게 지냈던 X에게 물었다. 
  "뭘 하고 있었지?"
  "... 저, 여자화장실에 이상한 것이 있다고 해서..."
  X가 머뭇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이상한 것이라니?"
  "저, 냅킨처럼 생긴 것을 자동판매기에서 판다고 해서..."
  X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
  "뭐야? 생리용품 말이냐? 그게 어떻다는 거야?"
  D선생은 일부러 큰 소리로 밝게 말했다.
  "저... 별로 어떻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얼버무렸다.
  "뭐, 좋다. 여자의 생리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구나. 하기야 나도 그랬지.  그래도 방과후에 
좀도둑처럼 살금살금 여자화장실로 숨어 들어가는 꼴이 뭐냐?  여자아이들이 알아 보라, 얼
굴을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있겠니?"
  D선생은 여전히 밝게 말했다.
  "그런 것 갖고 있어 봐야 쓸데도 없으니 선생님한테  맡겨라. 선생님이 기계에 도로 넣을 
테니까. 생리에 관해 알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라. 나도 예전엔 아무도 몰래  그
런 책을 읽은 적이 있어. 특히 우리들 때는 그런 것을 읽으려면 남의 눈치를 봐야 했어. 아
니, 그건 지금도 그럴걸."
  D선생은 반은 자기에게 이야기하듯이 말하며 아이들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듣고 싶은 말 있어? 하고 싶은 말은?"
  "아뇨, 없습니다."
  아이들은 아까와는 달리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살며시 속삭였다.
  "저, 선생님... 이 일을 비밀로 해주세요."
  "알았다. 다른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는 알리지 않으마."
  D선생은 대답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창피한 일을 내가 누구한테 말하겠냐? 너희들이 알아서 충분히 반성해, 알았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D선생이 마지막으로 따뜻하게 말했다.
  "좋아, 알았으면 돌아가거라."
  "죄송합니다."
  녀석들은 그렇게 말하고는 꾸벅 절을 하고 교실을 나갔다. 밝은 표정이었다.
  
    닦달해서 지도할 필요는 없다.]
  그 후에 졸업을 한 X와 X의 친구들은 D선생의 집에 자주 놀러 갔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여자화장실 사건'이 화제에 올랐던 적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마음에서 그 사건이 완전히 
지워졌는지도 모른다. D선생은 지금도 그때 화내며 닦달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고 한다.
  인간은 성장을 거듭하며 개인으로 독립해간다. 유아기에는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의존하
지만, 이윽고 홀로 서려고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난다. 지금까지 의존하고 있던 품에서  벗어
나려니 양쪽 모두 상처를 입는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부모의 슬하를 떠난다고  표현한다. 
독립하고 자립하는 것은 비밀을 간직하는 일이기도 하다. 부모가 아이에 관한 일을 모두 알
고자 하는 것은 자식을 품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심정의 표현이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
의 마음과는 달리 내부에서 솟구치는 강렬한 자립에의 욕구를 저항할 수 없다. 그래서 심통
사납게 부모에게 반항한다.
  그때, D선생이 '여자화장실 사건'을 부모에게 알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동료 교사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잘한 일이었다. 특히 여자 선생님에게 이야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
마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여자 선생님들은 X와 그의 친구들을 '나쁜 녀석들'로 바라봤을 것
이다.
  D선생이 그 사건을 학생지도 사례로 보고하고, 남자아이들을 이해하는 자료로써 제시했던 
것은 X와 그의 친구들이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D선생은 오히려 X와그의 친
구들의 행동을 통해서 학생들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 4장 꾸짖는 방법이 서투른 선생님
    1 꾸짖지 않는 교사
    학생은 꾸짖지 않는 교사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다
  학생이 무슨 짓을 해도 꾸짖지 않는 교사가 늘고 있다고 한다. 왜 꾸짖지 않을까? 꾸짖을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인가? 꾸짖는 방법을 모르는 것인가/
  학생들 중에는 정곡을 찌르듯이 교사들의  본심을 지적하는 경우가 있다.  교사와 가깝게 
지내면서 교사를 잘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는  자신이 학생을 관찰한다고 생각하지
만, 실은 학생들이 교사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꾸짖지 않는 교사'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저 선생님은 매사를 귀찮아하세요.  학생들을 야단치다 보면  학생들과 입씨름하는 일도 
생기잖아요? 그게 귀찮은가 봐요. 그래서인지 우리들에 대해서는 도통 신경을 안 쓰세요. 우
리들에게 신경을 쓰느니 뭔가 선생님의 일을  하는 쪽이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요? 특별활동도 별로 하지 않고 수업도 적당히 하시는 것 같아요.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맞
아요, 샐러리맨 교사라고나 할까요? 교사 일은  아르바이트고, 진짜는 좀더 다른 것을  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가끔 전혀 꾸짖지 않는 선생님이  있어요. 그것은 결구 우리를  무서워하는 것 아니겠어
요? 잘못을 지적했다가 학생들이 반발하는 일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들이 하는 짓을 보
고도 모른 척하고 지나가요. 우리를 무서워하는 거지요. 그런 선생님은 불쌍해 보여요. 그러
니 학생들이 그 선생님을 무시하지 않겠어요? 우리는 그런 선생님에게 장난을 치거나 야유
를 퍼부어요. 우리를 상대하지 않는 데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무서운 선생님에게 고자질까
지 하니까요. 마치 어린 아이 같아요. 그러니 누가 그런 선생님한테 ㅐ우고 싶은 마음이  생
기겠어요? 아예 무시하고 바보취급을 하는 게 속편하지요.  그런 사람이 선생님이라니 화가 
치밀어요."
  "꽁무니를 빼는 거예요. 우리를 사뭇 깔본다고나 할까요. 우리를 상대하지  않으니까 우리
도 무시해요. 도무지 선생님이란 느낌이 들지 않아요.  그래요, 그런 선생님은 있으나마나예
요."
  "그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아첨해요. 학생을 살짝 불러서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시지요.
  '교무회의에서 나온 얘긴데 네게만 살짝 이야기하는 거야.  너를 신뢰하니까 말이야. 누구
누구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길래 내가 이렇게 말해서 너를 구해 주었단다.'
  이렇게 쉽게 남을 헐뜯는 선생님을 학생이 신뢰할 줄 아세요? 그런 선생님껜 꾸중을 들어
도 그것이 마음에 와닿지를 않아요.  그러면서 선생님 스스로는 학생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그러니 더 싫지요."
  
    꾸짖지 않는 교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이 어떻게 말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가 문제다.
  확실히 꾸짖지 못하는 교사는 교사의 길을 선택한 것  자체가 잘못이고 불행이다. 위에서 
발언한 학생들은 결코 반항적인 학생들이 아니다. 안, 오히려 반항적인 학생이라면 그  목소
리의 배후에 있는 불만에 더욱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학교에 이런 교사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학교 전체에 주는 영향이 무척 크다. 교사들은 
토론과 평가를 활발히 벌여 꾸짖지 않는 선생님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꾸짖을 수 없는 교사
    꾸짖을 수 없다는 것은 위선이다.
  "나는 학생을 꾸짖을 수 없다."고 말하는 교사가 있었다.
  이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 자신도 완전한 인간이 못됩니다. 그런 내가 어린 중학생의 결점을 왈가왈부하며 꾸짖
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에요. 학생들을 꾸짖느니 차라리 저의 못남을 꾸짖겠습니다. 나는  아
직 남을 꾸짖을 수 없습니다."
  얼핏 들으면 무척 겸허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만약 이 교사가 정말 가슴에서 우러나와 
그런 소리를 했다면, 그는 학생을  가르칠 수도 없다. "나  자신도 완전한 인간이 못됩니다. 
그런 내가 어린 중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지요. 배울 살함은 미숙
한 나 자신입니다. 나는 아직 남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테니까.
  무엇보다 완전한 인간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주제넘는다. 그런 식으로 말한
다면 그는 평생 교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명한 것을 핑계삼아 교사의 입장에서 꽁
무니를 빼고 있다. 꾸짖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를 방어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신있는 
사람은 없다. 자신있게 살고자 하지만 좀처럼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이 미숙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학생의 미숙함을 그대로 놔둘 수 없는 것이
다. 학생들의 유약함이나 변명, 합리화, 핑계 따위를 자신의 것으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는 우리가 위대해서 꾸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과  똑같이 미숙한 학생들의 거짓말이
나 게으름을 그대로 놔둘 수가 없으니까 꾸짖는 것이다.  따라서 꾸짖음이란 자신의 아픔을 
맛보는 일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꾸짖으면서  스스로를 조금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위선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꾸짖을 수 없다'며 꽁무니를 빼는 것도  위
선임에 틀림없다.
  
    꾸짖을 수 없는 까닭은 학생에게 애정이 없기 때문이다.
  교사는 언제 학생을 꾸짖는가? 꾸짖는 의도는 무엇인가?
  교사는 결국 '눈앞의 학생들을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학생상에 접근시키고 싶어
서',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생각대로 학생을 좌지우지하고 싶어서'  학생들의 언행
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나는 교사로서 이 점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
는 자신의 생각을 정성스럽게 가다듬어야 한다.
꾸짖지 않는 교사는 이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정열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꾸짖을 만한 
자신이 없다. 아니, 이것은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몸만 지키려는 보신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학생에게 애정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교사인 자신은 학생을 어떤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
는가, 그리고 그것은 학생에게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학생이 원하는 방향과 다른 것은 아닐
까 따위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에 있다.
  꾸짖을 수 없다는 것은 꾸짖는 방법이 능숙한가, 서투른가 하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학생의 입장이나 체면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가, 
상대방의 감정에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는가 하는 공감의 능력의 문제이다.
  꾸짖는 방법은 기술론이 아니라 애정론과 관련된 문제로 상대방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교
사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3 꼬치꼬치 따지는 마음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다 올바른가
  J선생은 꼬치꼬치 따지며 꾸짖는다는 평을 듣는다. 부모들도  교장을 찾아와 이렇게 말하
곤 했다.
  "어떻게 손 좀 써주세요. 아이들이 저 선생님은 싫다고 해요. J선생님 곁에는 가고 싶지도 
않다고 한다구요."
  그 말을 전해 들은 J선생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교장에게 항의를 했다.
  "교장 선생님, 그것은 지극히 일부의 학부모가 하는 말일 겁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
무것도 모르면서 아이의 말을 그대로 믿고 무책임하게 저를  헐뜯은 겁니다. 정말 어처구니
가 없군요. 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인간성을 심어 주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아이들이 책이나 공책을 가져오지 않으면, 저는 그 의미를 일깨워 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저 간단하게 '준비물을 잊고 왔구나. 그럼 옆사람 책을 함께 보도록 해라.'
라고 말하고 넘어가지를 못해요. '어젯밤에 몇 시까지 깨어 있다가 잤냐, 뭘 했냐?' 라고  그 
아이의 생활전체를 파악하려고 하지요. 그리고 그 아이의 좋지 않은 생활자세를 지적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성가시다'라거나 '꼬치꼬치 따진다'라거나 '상관하지 마세요'하고는 가버리
지요. 그렇다고는 해도 마음속으로는 저를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지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 
본심을 모르고 제멋대로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직접 저에게 말을 할 순 없으니까 어머니에
게 있는 일 없는 일을  몽땅  끄집어내 저를 헐뜯은 겁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욕먹을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장 선생님, 믿어 주세요. 저는 아이들에게 건강한 삶을 가르치려고 했을 
뿐입니다. 어머니들이 과장되게 거론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J선생은 자신은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올바르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교장은 
함께 일하는 교사의 편을 들어 주어야 하는데 일부 학부모가 헐뜯는 소리를 곧이듣고 오히
려 교사를 힐문한다며 불쾌해했다.  J선갱은 뭐니뭐니해도 자기  방법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자신감으 갖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주변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다.
  
    겸허해지려면 자신을 뒤돌아보자
  꼬치꼬치 따진다는 것은 자신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꼬치꼬치 따진다고 느낀다면 일단 조금 거리를 두고 자신의 방법을 뒤돌아볼 필요
가 잇다. 교사에게는 그 정도의 아량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인간의 그릇이라고 표현하는 사
람도 있다. 큰 그릇은 이것저것 많이 담을 수 있는 법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 금방 화
를 내거나 변명으로 일관하며 자기를 보호하기에  급급한 사람은 그만큼 그릇이 작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릇이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사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학생들이 그  말을 듣고 무엇을 느
꼈는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J선생은 자기의 뜻은 선의니까  상대방은 무
조건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자기본위,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학생들을 열심히  설득하려면 할수록 학생들에게  기피당하는 불행을 
낳는다. 그런데도 J선생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거꾸로 상대방을 헐뜯고 공격하며 자기를 
변호하는 것이다.
  인간이 겸허해지는 것은 읭외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겸허해지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뒤돌아보기는 쉽지 않다.
  교사는 특히 상대방에 관한 것, 학생의 개인적인 일을 캐묻는 경우가 많다.
  "어제 어디에 갔었지? 무엇을 했지? 누구하고? 몇 시까지? 그런 짓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
니? 나쁘다고 생각하면 왜 그런 곳에 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캐물어 학생들을 추궁하기 쉽다.
  자신을 뒤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어떤 학생을 지도할  때 자신이 어떤 언행을 보였고  그런 
언행을 한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고 세세하게 글로 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때 난 어떻게 마음이 움직여서 어떤 말을 했다. 상대방 학생은 아마 이런  심정이었기
에 그런 말투로 말했을 것이다. 나는 학생의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이렇게 느껴서 이렇게 
꾸짖었다. 상대방은 이런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 이런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내용을 정직하게 써보자.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확인이다. 글을 쓰면 자기 마음의 움
직임이나 상대방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자기를 이해하고, 나나가 학생
을 이해하기에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아마도 여러분은 자신은 J선생처럼  완고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스스로를 뒤돌아보면 의외로 어떤 한  가지에 집착하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다. 독자 여러분도 때때로 자기를 뒤돌아보기 바란다.
  
    4 오만한 꾸짖음
    독단적인 행동으로 적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는 교사
  E선생은 호탕하고 활달하다. 그래서  거침없이 고함을 치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수업을 
할 때도 우렁찬 목소리가 복도 반대쪽까지 들려온다. 스스로는 호탕한 성격이라고 생각하지
만, 이런 유형의 교사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E선생과 같은 교사의 결
점은,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듣지 않고 서둘러 결론을 내린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E선생님은 이유도 듣지 않고 호통부터 치세요."
  밝은 성격이라 좋다는 학생도 있지만, 기분이 수시로 바뀌고  성질이 급해서 마음놓고 상
담하기가 무섭다는 학생도 적지 않다. 기분이 좋을 때와 화가 났을 때의 차이가 크고,  일단 
화가 나면 무엇을 할지 모른다.  이러니 싫어하는 학생이 많을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교무실에 들어온 3학년 학생 S가 아까부터  몇 번이나 같은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억지주장으로 잘못한 일에 대해 변명하는 눈치였다.  S는 문제학생은 
아니었지만 학습의욕도 적고 매사에 적당히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맡은 일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청소당번일 때는 게으름을 피워서 아이들의 눈총을 받았다.
  T선생은 젊지만 학생들의 변명을 잘 들은 뒤에 끈기있게 지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
생들은 별다른 용무없이도 T선생을 자주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E선생은, "시끄러워. 
좀 작은 소릴로 얘기해."라든가, "용무도 없는데 교무실에는  왜 왔어!"라든가, "잡담을 하려
면 복도에서 해!"라고 학생을 꾸짖었다. 그 말은 학생을 향한 것이었지만 T선생도 기분나쁘
게 들릴 말이었다.
  그날도 긴 이야기를 나누는 S와 T선생을 흘깃흘깃 곁눈질하던 E선생이 느닷없이 S를 향
해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이봐. S! 너, 그 말투가 뭐야! 그게 선생님한테 하는 말투야! 어디서 그런 못돼먹은 태도
를 배웠어! 너 잠깐 이쪽으로 와! 내가 학생의 예의를 가르쳐 주마. 이리 와!"
  그러더니 s의 소매를 거칠게 잡아채고는 억지로 복도로 끌어내려고 했다.
  "왜 이러세요. 왜 이러시는 거예요!"
  s는 비명을 질렀다. T선생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S와 E선생은 교무실 안에서 몸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태세였다.
  "자자, E선생님 진정하세요."
  S, 빨리 사과드려."
  교사 두명이 끼어들어 말렸다.
  이 사건으로 교무실은 갑자기 난장판이 되었다. 주위의  교사들은 영문을 몰랐다. 사실 E
선생도 S와 T선생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다고 직감적으로 느꼈을 뿐이었다.  T선생이 학
생을 지도하는 태도에 W자증이 난 것일 수도 있었다. E선생 쪽에서 보면 아니 밤중에 홍두
깨격으로 E선생이 느닷없이 호통을 치기 시작한 셈이었다.
  직선적인 사람은 근본이 정직하다. 게다가  인정이 많아 눈물도 잘  흘린다.. 그래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자신의 정에 발목이 잡히는 결점도 있다. E선생의 성급한 실수는 옳
지 못했다. E선생은 자기중심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
다. E선생과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교사 중에는 적지 않다.
  
    오만하지 않은가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교사가 상대하는 대상은 나이차이도 크고 생활경험도 적은 미숙한 학생이다. 자
연히 교사는 모든 면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아차 하다가는 폭군이 되기 쉬운 것이다.
  "이유는 필요없다! 경험이 풍부한 나에게 만사를  맡겨라. 내가 말하는 대로 순순히  하면 
된다!! 잠자코 나를 따르라! 그렇게 하는 것이 득이 된다. 알았나!"
  이런 식으로 큰소리를 치고 호탕함을 자랑하며 우쭐거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독선은 곤란하다. 어린 학생이라고 무시하는 것밖에 될 수 없다. 게다가 E선
생은 S의 무례함을 고쳐 준답시고 자신은 젊은 T선생을 무시하는 무례함을 저질렀다. 그러
고도 모순을 깨닫지도 못했다. 교사는 오만이라는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이런 교사도  학교
내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E선생의 언행이 과연 남의 일일까. 교사는 자기 안에 
E선생이 없는지 스스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5 호통치는 교사 
    호통치는 원인은 정서불안
  S선생은 호통치는 일이 잦았다. 학생지도 주임이라 날마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교내
를 구석구석 돌아보다가 하교시간이 지났는데도 남아  있는 학생들을 보면 호통을 치곤  했
다. 처음엔 "빨리 돌아가거라." 라고 말하다가 그 말이 몇 차레나 반복되면  화가 나기 시작
한다. 그러면 호통이 "빨리 돌아가!"로 변하고 "몇 번 말해야 돌아가계서!"로 발전한다. 그러
면서 S선생은 학생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고 꾸물거리고 있으니까 호통을 치는 것이라고 말
한다.
  방과후의 특별활동도 S에게는 눈엣가시이다. 교무회의에서 협의해 하교시간을 정했는데도 
하교시간을 넘겨가며 특별활동을 지도하는 교사들도  S선생이 하교시간에 둘러보러 나타나
면 성가신 사람이 왔다는 표정을 짓는다. 지도교사가 그러니 학생들이 하교시간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도 그 중에는 미안한  얼굴로 양해를 구하는 교사도 있
다.
  "시합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러니 너그럽게 봐 주세요. 가능한 한 빨리 돌려보낼게요."
  그런 교사라 해도 1시간 이상씩 학생들을 잡아두기 일쑤이다.
  교무회의의 결정사항을 제대로 지키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S선생은 하교시간
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지도해야 하는 생활지도 주임이라 하교시간마다 잔소리를 하니  사람
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S선생을  대하는 걸 거북해 했고, 마찬가지로 
학생들도 성가셔 했다.
  그런데 학부모 몇 명이 S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불평을 한다.
  "우리 애가 서클이다 특별활동이다 뭐다 해서 녹초가 되어 늦게 돌아와서는  집에선 공부
도 하지 않고 빈둥거려요. 밥을 먹으면 곧바로 곯아떨어지니 이래서 되겠습니까. 숙제도  아
무렇게나 적당히 하는 눈치이고, 입학시험도 다가오는데 부모로서 몹시 걱정이 됩니다. 어떻
게 손 좀 써 주세요."
  그러면 S선생은 학생지도 주임이라는 입장 때문에 그때마다 전화에 대고 사과를 한다. 아
무리 매번 겪는 일이지만 화가 치밀 것이다.
  열려 잇는 창문을 닫으면서 긴  복도를 둘러보며 걷노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럴 
때 교실에 숨어 잡담을 나누는 학생들을 발견하면 저절로 호통이  터져나온다. 그러나S선생
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아, 오늘도 또 나는 호통을 치며 걷고 있구아.'하는ㄴ 참담한 기
분을 느낄 것이다. 정신건강에도 좋을 턱이 없다.
  오늘도 S선생은 A와 친구들을 발견하고 호통을 치고 말았다. 
  "Q발리 돌아가! 지금 몇 신줄 알아! 바보 녀석들!"
  그렇게 짜증을 내면서 자기 꼴이 흉하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모습을 가족들이 보면 어
떻게 느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졌다.
  그때 작지만 날카로운 A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괜히 호통치고 난리야, 바보같이."
  그 소리에 s선생은 불끈했다.
  '바보라고...? 선생보고 바보라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S선생이 소리를 질렀다.
  "뭐라구? 지금 뭐라고 했어?"
  "아니, 제 이야기입니다."
  "거짓말하지마! 바보라는 둥 지겹다는 둥 종알거렸잖아!"
  "지겹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뭐라구? 그런데 얼굴은 왜 우거지상을 하는 거야!"
  "이게 제 본얼굴인데 어쩌라는 겁니까?"
  "뭐! 이 녀석이 순어거지를 쓰고 DltDJ!"
  "..."
  "..."
  그런 상태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글로 옮겨 적자니 참 한심하다. 교사로서 부그럽기 w작이 없지만,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
다. 우리에게 S선생과 비슷한 구석이 없다고 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A도 잘한 것은 아니지만, 뭐가 어떻더라도 교사는 어른이니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수 있
어야 한다.
  이런 실랑이는 무엇보다 S선생의 정서불안에서  야기되었다. 그리고 S선생의 정서불안의 
원인은 무책임한 자세로 특별활동 시간을 연장한 동료교사들과 S선생에게만 하교지도를 맡
긴 학교에 있었다.
  
    호통은 호통으로 되돌아온다
  인간이 인간을 호통쳐서 자기 뜻대로 만들고자 하는 태도에도 커다란 문제가 있다.
  한 학교에서 '호통'에 대해 토론을 하는데 한 교사가 정색을 하며 다른 교사를 반박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 학생들이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지시를  들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건 현실을 모르는 낙관적인 생각입니다. 큰 소리로 호통치지 않으면 학생들은 꿈
쩍도 하지 않아요."
  S선생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설사 이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교사가 마음을 담아 전하는 전하는 말이 왜 학생들의 가슴에 와닿
지 않는걸까.
 교사가 이렇게 되었으며 하고 간절히 바라며 전하는 마음이 왜 학생들의 심장의 현을 튕길 
수 없는 것일까?
  부정하면 부정당하는 법이다. 호통은 호통으로 돌아오는 것이 상식이다. 교사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던 시절에는 교사가 호통을 치면 학생들은 주눅이 들었다. 군대가 그랬듯이 내
가 학생일 때는 교사난 상급생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절대복종이라는 말이 아무런 거부감없
이 받아들여지던 시대였으니 교사가 호통치면 학생들은 움츠러들었다. 아니, 움츠러들었다기
보다는 교사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똑같이 호통치고 싶은 생각이 굴
뚝같은데도 호통칠 수 없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두고 보자라고 복수심을 불태웠었다.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자극이 다르면 반응도 달라지는 법이다. 응석꾸러기인 학생들이 조용히 말하고 부드럽게 깨
우치는 말을 듣고 금방  고분고분해지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반발하거나  원한을 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타이름은 어느샌가 그들의 마음속으로 서서히 배어 들어가 
발효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큰 소리로 거칠게 말하더
라도 교사의 마음에 학생을  무시하거나 통째로 부정하는 구석이  없다면, 그것은 조용하게 
말해서 깨우쳐 주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가져 온다.
  옛 성인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꾸짖지는 않는가'라고 노래하며 스스로를 경계했다.
  하버드대학의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A.멜라비언 박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커뮤니케이션의 3요소는 언어, 얼굴표정,  목소리이며, 그 영향을  백분율로 나누어 보면 
언어가 8퍼센트, 표정이 55퍼센트, 목소리가 37퍼센트이다."
  그리고 해설에서 얼굴표정과 목소리의 상태는 말하는 사람의 마음자세를 그대로 반영한다
고말했다. 커뮤니케이션은 사람이 지닌 마음의 교류 그 자체인 것이다.
  서로를 어떻게 느끼는가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학생과 교사의 인간적 교류이다. 교사가 
학생을 진실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는 감정을 갖고 있다면 그 마음이 저절로 표
현되어 뜻이 통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꾸로 학생을 기피하고 부정하는 마음이 잇으면, 아
무리 단어를 골라서 사용하려고 주의를 해도  학생이 반발하고 반항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자꾸 파탄으로 치닫게 된다.
  교사는 자신의 지도에 자신감을 갖고 싶어한다. 학생들의 옳지  않은 점을 바로잡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교육을 실천함으로써 자신감을 갖고자 한다. 이것은 흠잡을데 없는 자
세이다. 그러나 자칫하다가는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할 때 가장 겸허해지기 어렵다. 이
때가 상대에게 가장 상처주기 쉽고, 가장 자기 반성하기 어려운 때이기도 하다.'라는 교훈을 
잊기 쉽다.
  옛날의 고승은 그것을 경계해서 '악을 미워함을 선이라고 생각하는가. 미워하는 마음이 곧 
악인 것을'이라고 가르쳤다. 교사들이 특히 마음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다.
  
    6 빙빙 돌려서 하는 꾸짖음
    아이들은 빙빙 돌리는 말투를 싫어한다
  학생들은 말한다.
  "선생님께서 꾸짖으실 때 우리들의 이유도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우
리의 변명도 들어 주TU야 한다고 생각해요."
  타당한 말이다.
  학생들은 교사가 학생들의 말을 듣는 자세, 학생에게 말하는 자세, 묻는 자세와  관련해서
도 나름대로 분명한 주문을 한다.
  T선생은 부드러운 성품과 격한 성품을 한데 지닌 교사로 격한  성품을 스스로 꾹 눌러참
고 미소를 짓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자기일치를 이루지 못하며 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T
선생이 학생에게 주의를 줄 때 특히 그런 일이 많았는데 묘하게 빗대어 말하거나 망설이며 
빙빙 돌려 말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도리어 싫어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T선생님은 사
람은 좋은데 맺고 끊는 맛이 없다"고 말한다. 격한 성품을 억누르다가 도리어 손해를 본 것
이다.
  9월초, 학생 몇 명이 근처에 있는 중학교 학생과  언쟁을 벌이다가 집단으로 치고받는 난
투극을 벌였다. 다행히 싸움이 커지기 전에 경찰이 달려와서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경
찰에서는 학생들의 차림새와 충분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고 불량학생들의 패싸움도  아니고 
앞으로 다시 싸울 일도 없을 것 같아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다음날, 담임교사가 분담해서 싸움을 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앞으로의 지도를 맡기로 
했다. T선생 반의 학생인 A도 수업이 끝난 후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T선생이 A를 지도하
는 양상은 이러했다.
  "언제부터 어제 함께 싸운 친구들을 사귀었지?
  "저, 학원에 다니면서..."
  "학원? 어느 학원?"
  S동에 있는 학원이요."
  그 학원에는 누가 다니지?"
  "누구라뇨?"
  "그러니까, 우리 반 아이라든가 우리 학교 학생 말이야. 누가 있지?"
  "우리 학교 아이는 없어요."
  "그래? 다른 지역의 학원엘 혼자 다녔단 말이지?"
  아뇨, 여학생이 있기는 한데..."
  "아, 그래, 누구?"
  T선생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며 좀처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학생에게 버거운 질문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떤 마음으로 싸움을 했지?"
  "경찰 아저씨들한테 잡혀서 이런저런 훈계Fmf 들을 땐 어떤 기분이었어?"
  "앞으로 어떤 점에 주의할 생각이지?"
  "반아이들에게 뭐라고 할래?"
  "부모님께 어떻게 해드릴래?"
  핵심을 찌르는 질문은 이렇게 많은데 T선생은 겉에서 빙빙  도는 것이다. "사실, 왜 그런 
짓을 했지?"라는 질문 하나만 놓고 보아도 만만치가 않다. 우리는 일상생화 속에서 '나는 지
금 이런이런 이유로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일일이 의식하면서 행동하는 은 거스이 없다.
  그러나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저지른 행위에 대해,'나는 그때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
까?라고 마음속으로 묻는 것,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따라서, "어떤 마음으로 싸움을 했지?"라는 질문은  교사에게 대답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학생 자신이 스스로에게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으로 싸움을 했
지?"하는 교사의 질문은 '인간은 일일이  의식하면서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마음에서 나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선생님과 함께 생각해 보
자.'라는 마음의 표현이어야 한다.
  "네가 한 행동이니까 네 마음은 네 자신이 가장 잘  알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식의 힐문
은 무리이며 난폭한 강요이다. 어른조차도 자신의 마음,  감정, 가슴속에서 물결치는 심정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냉
정함과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정말 비범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교사
는 학생을 추궁하며, 터무니없이 버거운 질문을 강요할 위험이  있음을 스스로 경계해야 한
다.
  주변적인 것, 관계없는 것을 너무 물어서는 안 된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그런  질문을 도
대체 왜 하지요?"라든가 "벌써  잊어먹어서 기억도 나지  않아요."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너무 많은 것이다.
  역효과를 낳는 질문은 끝이 없다.
  "네가 그런 짓을 하면 친구들이 네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1학년 때는 친한 친구였다가 점점  멀어진 아이가 있잖아. 왜 그렇게  됐는지 생각한 적 
있어?"
  "이제 열심히 공부해. 분발해서 공부하고 행동도 진지하게 하고 청소 같은 것도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해. 그래야 다른 아이들로부터 신뢰를 받는단 말이야. 아이들에게 신뢰받지  못
하면 결국은 질도 좋지 않고, 밤늦게  싸돌아다니기나 하는 친구밖에 사귈 수가 없어.  그런 
생각한 적 있어?"
  참 답답하고 번거롭기 짝이 없는 질문들이다. 이렇게 되면 학생은 자신이 무엇에 대해 꾸
중받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혼란스럽게 된다. 결구 
"모르겠습니다"라든가, "글쎄요."라든가, "잊어먹었습니다."라는 대답만 되풀이하기  쉽다. 공
연히 꾸중받는 시간만 길어지니 신물이 나서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고 답답한 질문만 
하는 선생님을 마음속으로 경멸할지도 모른다.
  
    차분히 준비해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전한다
  위에 든 예는 꾸짖는 방법의 문제라기보다는 T선생의 '대화법'의 문제이다. 좀더 직선적으
로 이야기하는 것,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이럴 땐 무엇보다 핵심을 찌러 적절하고 짧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문장형
식으로 질문해서 학생이 자신의 심정을 글로 쓰도록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처음부터 
우격다짐으로 추궁해서도 안 되고 나름대로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어떤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별 것 아닌 말을 할 때도 이야기의 구성을 생각합니다. 처음에 이런 말을  하고, 중
간에는 이런 예를 들고, 마지막에는 이런 말로 결론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학생들 앞에 
섭니다."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교사라 해도 준비 없이는 좋은 교육을 할 수 없다. 꾸짖는 것도 하
나의 중요한 교육이므로 우격다짐이나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자세로 임하는 것은 예의에 어
긋나는 것이다. 예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학생에게 선생님이란 고작 이런 존재인가  하는  
실망감을 안겨 주게 되어 인생의 길을 잘못 가게 만들 수도 있다.
  
    7 과거의 일을 들춘다
    꾸짖을 때는 감정이 아니라 냉정한 이성을 앞세운다
  '아이들을 꾸짖을 e대 과거의 일을 들추지 말고 형제나 친구와 비교하지 말라.'
  여러분들은 이런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그러한 실수가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교사가 학생을 꾸짖을 때 옆에서 지켜보면 뜻밖에
도 위와 같은 얘기를 상기시키는 일이 많이 있다. 누구나  자신에 관해서는 제대로 보지 못
하고 남이 꾸짖는 방법만 비판할 수 있는데, 정작 자신이  학생을 꾸짖을 때 똑같은 실수를 
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떤 학부모가 이런 감회를 밝힌 적이 있다.
  "부모로서, 내 아이를 칭찬할 때는 상당히 이성적이 되고, 벌할 때는 상당히  감정적이 됩
니다. 넓은 의미에서 교육적 효과를 고려한다면 이것은 거꾸로 되어야 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꾸짖는 방법은 상당히 감정적이다. 그래서 꾸짖었을 때의 아픈 기억도  '상
당히 감정적'으로 남는다. 감정적이지 않다면 꾸짖은 후에도 마음이 편안하고 좋을 텐데  그
것이 쉽지가 않다. 화가 벌컥 치밀어서 상궤를 벗어났다가, 나중에야 한심하고 부끄러운  짓
을 했다고 후회를 한다.
  언젠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웃사람이 불같이 화가 나서 개를 곤봉으로 때리는 
것을 보았다.
  "이 똥개 새끼, 때려죽이겠어!"
  이 사람은 걸쩍지근하게 욕설을 퍼부으며 개를 쫓아갔다. 나는 차마 그 사람의 얼굴을 보
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서 도망치듯이 살금살금 그 자리를 떠났다. 어쩌면 그 사람
은 나중에 쥐구멍이 있다면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을  맛보았을 것이다. 상궤를 벗어난다
는 것은 자신이 비참해질 뿐이다.
  꾸짖은 뒤에 나름대로 기분이 개운하다면  그 꾸짖음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꾸짖는 방법과 꾸짖게 된 경위를 의식해서 재현할 수 있는 객
관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효과가 없는 꾸중은 반발을 산다
  꾸짖어도 효과가 없을 때는 많은 경우 아이들의 마음에  반발이 일어난다. 일단 반발심이 
생기면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달리 무슨 일이 생겨도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로, 일단 마음이 틀어지면 금방 밝은 얼굴을 하고 대할 수 없는 것이 보통이
다.
  "너는 지난번에도 똑같은 말을 하게 할 작정이지?"
  "네 누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었다. 네 어머니께서 지금의 네 태도를 보면 뭐라고 하시
겠니?"
  "요전에 너는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잖아. 그런데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지?"
  이런 말투는 꾸짖는다기보다는 힐책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추궁당하고, 힐문당하고, 구박
받으면 반성하기보다는 반발하는 마음이 머리를 쳐들게 된다. 그리고 일단 반발심이 머리를 
쳐들면 도저히 고분고분해지지 못한다.
  이런 꾸짖음은 꾸짖음이라고 할 수 없다. 부모나 교사가 아이를 꾸짖는 목적은, 아리가 스
스로 반성하고 자신을 꾸짖게 하는 데 있다. 아이의 마음속에 반발심, 반항심이 머리를 쳐든
다는 것은 완전한 역효과이며, 결국은 아이가 마음의 문을 닫고 삐뚤어지게 만들 뿐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균열이 생기면 영원히 남게 된다
  어떤 부모가 자신의 감정대로 아이에게 호통을 치고 나서 나를 찾아와 이렇게 호소한 일
이 있었다.
  "이젠 조용히 타이를 기분이 안 나요. 화가 얼마나 뻗치는지 '이따위 녀석을  낳지 않았다
면 이렇게 화가 뻗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이제 너 같은 녀석은 어디라도  좋으니 꺼져 버
려!'하는 심정이 됩니다. 녀석한테 한바탕 퍼붓지 않으면 화가 가라앉지를, 않아요."
 자기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아이를 꾸짖는다면, 이것은 이미 공격이다. 보답받지  못
하는 사랑이 미움으로 변한 것이다.
  영국의 교육실천가 A.S 니일은 이렇게 말했다.
  "미움은 ㅅ랑의 반대가 아니다. 미움은 사랑의 변형이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다."
  부모나 교사가 자기 아이나 자기 학생을  미워하는 까닭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사이와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는 유사한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관계이다. 부모는 아무리 자식을 미워해도 이  아이는 부모인 내게서 떠날 수 없고,  부모인 
나도 이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믿음, 혹은 운명이랄 수 잇는 감정이 있다. 얼핏 생
각하면 모순 같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리 독한 소리를 해도 양쪽 모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안심을 한다.
  그러나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 교사가 자신의  울분을 풀기 위해서 학생들
의 언동을 책망하고, 공격하고, 힐문하고, 추궁하면 그 균열은 영원히 남아 메꿔지지 않는다. 
교사가 아무리 깊은 애정을 쏟아도 골육의 정에는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부모는 감정적으로 흥분한 채 아이를 야단친다.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일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부모만의 애정표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교사가 그렇게 행동하면 
교육관계는 무너진다. 교사의 애정은 감정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는 애정인 것이다.
  
    8 체벌은 변변치 못한 교사의 상징이다.
    화가 치밀어서 학생을 때리고 말았다
  "저... 교장선생님한테 잠깐 상담할 일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중년에 이른 k선생이 교장실로 들어오면서 물엇다. 그는 문을 반듯이  닫고 내 앞으로 오
더니 머뭇거렸다.
  "실은..."
  k선생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k선생은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교사였다. 그는 조금 지나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제 반에 s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은 교무실에서도 자주 화제가 되는 아이인
데, 그 학생의 부모가 제게 뭔가 감정이 뒤틀린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S에게 한 지도
에 반감이 있는 듯합니다."
  K선생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작년 세모 무렵의 일이니까 벌써 2개월이나 지난 일이다. 어느 날 아침, K선생은 너무 화
가 난 나머지 그만 S를  때리고 말았다. 다리를 걷어차기까지  했다고 한다. 메더꽂고 싶을 
만큼 흥분햇던 것이다.
  S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아이였다. 아무리 말해도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기 일쑤였
다. 주의를 주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기는 하지만 언동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날도 S가 학교에 정교한 장난감수갑을 가지고 온 것을 본K선생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
었다.
  "등교길에 주웠습니다."
  S의 대답이었다.
  K선생은 일단 자신이 수갑을 보관하겠다고 하고 S의 집에 연락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다
른 소리를 했다.
  "그건 내가 못 사게 한 것을 몰래 산 거예요. 수고스러우시겠지만 학교에서 잘 처리해 주
세요."
  그리고 S의 어머니는 이런 당부까지 곁들였다.
  "선생님께서 좀 엄하게 꾸짖어 주세요. 요즈음에는 벌써 엄마의 말에는 콧방귀를 뀌어요."
  '자기가 산 것을 주웠다고 거짓말을 했구나. 학교에 그런 것을 가져오면 혼난다는 것을 아
니까 나까지 속인 거야. 1학년 녀석이 너무 되바라졌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K선생은 화가  벌컥 치밀었다. K선생은 S를  불렀다. 그러나 호가 
뻗친 상태라 꾸지람이 나니라 힐책이 먼져 터져나왔다.
  "어째서 이 수갑을 주웠다고 거짓말을 했지! 이유를 말해 봐."
  S는 잠자코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업ㅂㅅ지? 벙어리야?"
  그래도 S는 입을 굳게 다물고 열지 않았다.
  K선생은 이 아이가 고집스럽게 버틴다고 생각했다(이 대목이 실수의  근원이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서술하겠다).K선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S의 뺨을 몇 차례 때렸다.  S의 
다리를 걷어차기까지 했다. S는 기우뚱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S는 들릴락말락하게 말했다. 그때는 K선생도  내심 지나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나도 지나쳤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그 아이가 "죄송합니다."
라고 반성한 것이 물거품이 될 우려가 있었다.
  '교사가 사과하면 학생이 제멋대로 군다. 그러면 지도의 효과가 없다.'
  한순간이었지만 이렇게 생각을 한 K선생은 "반성했다면 이제 됐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
런 일이 없도록 해. 이만 돌아가도 좋다."라고 말했다.(여기에서도 k선생은  잘못했다. 이 점
에 대해서도 나중에 서술하겠다). 
  k선생으로서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한 말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
지 못했다.
  
    부모에게 솔직하게 아이를 때렸다고 말하지 못했다
  k선생은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아이에게  손찌검을 했고, 아이가 저지른 일로 흥분해
서 펄펄 뛴 자신의 어른답지 못함이 한심스러웠다. 흥분해서 뺨을 때리고 발로 차기까지 한 
자신의 모습을 아내나 아이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장면을 들킨다면 난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s를 때린 일이 마음에 걸려 떨쳐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못해서 k선생은 그날 밤 S의 집에 전화를 걸어 S의 어머니에게 말
했다.
  "엄하게 지도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때렸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이렇다저렇다는 말없이 
그저 알았다고만 했다. K선생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이 전화통화, 특히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이것도 나중에 서술하기로 하겠다).
  K선생은 S의 어머니에게 사과했기 때문에 마음이 어느 정도 편해졌고 그 일도 어느 사이
엔가 잊게 되었다.
  며칠 후, S가 똑같은 짓을 했다. 이번에는  학교에 장난감경찰봉을 가져온 것이다. K선생
은 이것도 압수하고 S의 짐으로 연락을 했다. 전화 저쪽에서 어머니가 "미안합니다."라고 대
답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쌀쌀한 느낌이었다. 담임인 자기에게 반감이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디에서 곤봉을 샀을까요?"
  "모르겠어요."
  S의 어머니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집에서도 주의를 주세요."
  "네."
  S의 어머니가 짧게 대답하고 더 이상 말이 없자 K선생이 물었다.
  "뭔가 언짢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그때까지 억눌렀던 흥분을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듯이 S의 어머니가 퍼부었다.
  "선생님은 우리 아이만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 아닙니까? 요전에도 우리  아이를 때리고 
차고 하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은 그래 놓고 엄한 지도를 했다고 헐렁뚱땅 넘기려고 하는 듯
한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 아이가 규칙을 어겼으니까 꾸중을 들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
지만 아무래도 뺨을 때리고 발로 찬 것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해요. 부모들이야 어리석으니
까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군요. 아이가 물건을 들고 가서 반아ㅣ들한테 자랑을 했을 뿐
인데 뺨을 맞고 발길질까지 당했다고 볼이 잔뜩 부어서 집에 왔어요. 아이가 더 반항적으로 
변해서 다루기가 더 어려워졌어요."
  전화 너머에서 S의 아버지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워! 그만 하지 못해!"
  "그런 말이나 하려면 당신이 받아요. 당신도 선생님이 너무했다고 했잖아요."
  송화기를 막고 말하는 모양이었지만 목소리가 커서 K선생에게까지 다 들렸다.
  "이제 그만 해. 전활로 따져 봐야 소용이 없어. 언제 내가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한테 말
하고 오지."
  부부가 주고받는 대화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오늘은 S의 아버지도 집에 있는 모양이
었다. K선생은 새삼스럽게 지난번에 졸렬하게 지도했던 일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역시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어.
  K선생은 낙심을 했다.'
  
    교사도 솔직하게 사과하는 것이 중요하다
  K선생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간신히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교장실로 알리러 왔다는 것이
다.
  나는 K선생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몇 가지 감회를 느꼈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K
선생의 이야기는 졸리웠다. 그런 식으로 전화를 설명했다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
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K선생은 처음에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오는 자제분이 수갑을 가져와서 길에서 주웠다고  거짓말을 하기에 나도 모
르게 화가 나서 따귀를 3대 정도 때렸습니다. 자제분도  수갑을 가져온 일과 거짓말한 것을 
반성했으니 저도 때린 것을 반성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했다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던 것을 처음에 대고 "엄하게 지도했습니다."라고  어물어물 넘어가니까 부모의 감정
이 뒤틀렸던 것이다. 아이가 집에 돌아와서 "선생님한테 뺨을 맞고 발길질을 당하기까지 했
어요."라고 이르면 부모 쪽에서도 울컥 화가 치밀 것이다. 그러나 화가 치밀어도 따질 수 없
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흔히  아이를 선생님한테 맡긴 몸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성가신 부모로 비치지는 않을까?  우리 아이가 잘못했는데도 따진
다고 그 아이에 그 엄마라고 흉보지는 않을까? 더구나 우리 아이는 공부도 못하니 떳떳하지
도 못해.'
  그래서 불만을 꾹 삼키고 잠자코 있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도 마음속에서는 화가 울컥
울컥 솟구치니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남편한테 푼다. "들어보세요."하고 아
이 이야기를 전한다. 감정이 쌓였으니 과장되게 전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로서는 내  아이의 
선생이 아이를 때리고 차는 지독한 폭력교사라는 이미지를 가질 위험이 있다. 
  이렇게 되어 학교와 가정 사이에 어색한 균열이 생긴다. k선생은 처음에 나에게 이야기할 
때 "그 아이의 부모가 감정이 뒤틀려서 지도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내 생각에 
그 이야기는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처음에 학생이 장난감수
갑을 들고 와서 길에서 주웠다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지도가 졸렬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어째서 주웠다고  거짓말을 했지?"라고 물은  것도 문제였다. 학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선생님이 무서워서 거짓말을 하고 말
았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무서운 선생님에게 무서운 꼴을 당할 테니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자
코 있을 도리밖에 없다.
  거기다 대고 "왜 말이 없지!"라고 다그쳐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댔으니 S는 "왜냐구요? 
대답할 수 없어요."라고 대들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K선생은 너무 감정적인 질문을 던
진 것이다.
  학생이 입을 다물고 있는 까닭은 대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질
문이 아니라 힐문에 불과하다. 힐난하면 힐난  당한다. 학생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은  무언의 
저항을 하는 것이다. 고집부리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대답할 수 없어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선생님한테 야단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거짓말을 했니?"
  이렇게 시작하면 좋았을 것을 처음부터 추궁하고 힐난하다가 화를 내고 따귀를  때렸으니 
본인이 반성했듯이 부끄러운 일이다. 게다가 학생의 다리를 걷어차기까지 했으니 감정에 휩
쓸려 이성을 잃은 행동이었다. 학생을 그렇게 대한다면 솔직하게 반성할 리가 없다.
  K선생도 이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화가 뻗쳐서 몇 대 때리고 나서 퍼뜩 정신을 차리
고는 지나쳤다, 한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K선생의 양식과 정직성의 표현이다. 그래
서 그날 밤에 S의 집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화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솔직성이 부족해서 부모의 오해를 증폭시켰을  뿐이
다. "엄하게 지도했습니다."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때렸습니다."라고  알아듣는 
부모는 별로 없다. 게다가 아이가  돌아와서 "선생님이 때리고 찼다."라고  울먹이면 부모는 
아이의 굴욕을 자신의 굴욕으로 느끼게 된다. 그것이 부모이다.
  화가 나서 따귀를 때렸을 때, 그래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
는 쪽이 교사 자신에게도 솔직하다.
  "내 실수다! 너를 때리고 말았구나. 미안하다. 때린 것은 선생님이 나빴다. 나도 모르게 화
가 뻗쳐서 그랬다. 하지만 너는 왜 그렇게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지?"
  사실 인간이 솔직해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무래도 자기를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니까 얼렁뚱땅 넘기거나 애매하게 만들어 속이려고 한다.
  S도 속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수갑을 가지고 왔다고 꾸중을 들었을 때 이렇게 솔직하게 인
정했다면 선생님한테 맞기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어요."
  그랬다면 선생님의 따뜻한 말과 함께 아무 일 없이 넘어갔을 것이다.
  "어, 너한테 이런 취미가 있었니?"
  "음, 나도 경찰관을 동경했었지."
  "그래도 이런 걸 교실에서 갖고 있으면 안 돼. 내가 맡아 두마."
  
    벌컥 화를 내지 않기 위한 수련
  이런 사례는 너무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체벌을 둘러싼 갈등  밑에는 대개 이런 한심
스런 배경이 깔려 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체벌 자체는 졸렬한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다지 고상한 존재가 못된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후끈 달아오를 때
가 있다. 냉정을 잃으면 올바른 사리판단을 할 수 없다.
  나는 화가 벌컥 솟구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다. 그러나 쉽게 흥분하
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K선생이나 S가 이 사건에서 무엇을 배우는가가 바람직한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실수를 주고받으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  실수를 
어떻게 교훈으로 삼는가는 개인에게 달렸다.
  인간은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면서 성장한다. 실수에 깔려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는 요
건은 역시 그 사람의 학습능력이다.
  
    제 5장 교사의 오해
    1 교사도 오해한다.
    오해받은 아이는 교사를 싫어한다
  교사는 학생의 편지나 작문을 보고 허를 찔린 듯이 깜짝 놀라는 때가 있다 교사는 무심코 
꾸짖었는데 꾸짖음을 당한 쪽은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지는 졸업생인 M이 교장인 내게 보내 US지이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몹시 부끄
러웠다. 그러나 이 편지는 학생들의 마음을 가르쳐 준 고마운 편지였다.
  <교장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몸 건강하게 OO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고등학교와 중학교는 많은 것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그다지 친하게 
지내거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들과는 수업시간에만 만나는 느낌입니다.  수업이 
끝나면 얼른 선생님 방으로 가버립니다. 선생님 방이라고 해도 교무실이 아니라 연구실이나 
준비실 같은 곳입니다.
  친구들과 재잘재잘 떠드는 것은  중학교 때와 똑같지만, 선생님과  상담하는 것은 어쩐지 
어린애짓 같아서 선생님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장선생님과 음식을 함께 먹거나 대
화를 나누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중학교 때가 재미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도 교장선생님을 오해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교장선생님께 사과하지 않으면  그 일이 너무나 마음에 
걸려 이제 모교인 중학교를 찾아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다져먹고  편지를 
씁니다. 화내지 마시고 읽어 주세요.
  10월의 어느 월요일, 조회시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전날부터 감기기운이 있어서  어지러
웠습니다. 그날 아침에도 어지럼증이 계속되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교장선생님
의 말씀을 들으면서 '머리가 너무 아파, 어떻게 하면  좋지'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좌우로 힘
껏 흔들어 보았습니다. 목의 근육을  꽉 조여서 어깨결림을 풀려고도 했습니다.  그때였습니
다, 교장선생님께서 저를 꾸짖으신 것은! 무슨 말씀인가 열심히 하시다가 갑자기 저를 보고
는 꾸짖으셨습니다.
  "그쪽 학생,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는 좀더 진지하게 들으세요. 그것이 예절입니다."
  교장선생님은 저를 노려보셨습니다.
  처음에는 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똑똑히 듣고 있
었으니까요. 지금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잊었지만 그때는 분명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께서 "저 여학생 말예요!"하고 한층 힘주어 말씀하시면서 저를 노려 보셨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겨우 '앗, 나다!'하고 깨달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저를 지목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너무나 창피해서 새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때부터는 교장선생님이 무슨 말씀
을 하시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교장선생님의  말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조회
시간에는 몇 명의 학생이 연락사항 등을  설명했는데 그것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
다.
  그후,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교장선생님이  싫어졌습니다. 교장선생님이 무슨 말씀
ㅁ을 하시더라도 반항심 같은 것이 일어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못된 녀석이
지요?
  하지만 입학시험이 코앞에 다가온 때라 서운해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교장선생님도 어느 
무렵인지 아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후 기쁘고 괴로운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겨우 희망
하는 고등하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너무 기뻐서 친구와  함께 교장선생님을 뵈러 갔습니
다. 교장선생님께서는 "그래, 그것 참 잘 됐다. 정말  잘 됐어, 축하해!"하시면서 제 손을 꼭 
잡으셨습니다. 저는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기뻐하시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
때까지 오해를 하고 교장선생님을 원망했다는 사실도 깨달았지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중학교 때는 좀처럼 기회가  나질 않아 교장선생님께 사과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어서 이렇게 마음을 먹고 편지를 썼습니다. 이상이 제가 사
과드리고 싶은 내용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언제까지나 건강하십시오. 안녕히 계세요.
                                      M올림>
  
    오해했을 때는 늦기 전에 사과하자
  이 편지를 받고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아름다운 M의 마음씨에는 이제 내게는 없는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과연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어서 사과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을까? 있더라도 잊
어버렸다고 편지로 사과하는 솔직함은 있을까? 게다가 교장인 나는  그때, 한 사람 한 사람
의 몸상태를 알 수 없으니 많은 사람 중에서 머리나 목을 흔들흔들 움직이던 학생에게 주의
를 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리화하거나 스스로를 납득시키지는 않았을까?
  나도 학생을 오해한다. 내 멋대로 '이 아이는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에 근거해서 꾸짖고, 주의를 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단한 오만이다. 오만에 근거한 지도란 기껏해야 잘난 체에 불과하
지 못할까? 내가 무심코 오해하는 바람에 분한 마음을 느꼈던 아이들이 더 있을 것이다. 다
행히 M은 편지로 그 일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내게 앙심을 품고서 '선생님이란 본디 저런  사람이야.'라고 단정지어 버린 아이들
도 있을 터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교사란 정말 두려운 직업이라는 생각에 몸이 움츠려진다.
  그렇다. 오해했을 때는 늦기 전에 사과해야 한다. 오해가 있다면 즉시 와서 말하라고 늦기 
전에 사과해야 한다. 오해가 있다면 즉시 와서 말하라고 학생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좋은 방
법이다. 나는 다음주 조회시간에 M의 편지를 소개하고, 내 심정과 학생들 모두를 향한 바람
을 이야기했다.

 

    2 학생의 행동을 오해하고 꾸짖는 교사
    친절한 행동을 오해하고 아이를 때린 교사
  조회시간에 졸업생인 M의 편지를 소개하고 오해가 있다면 염려하지 말고  이야기하러 오
라고 했더니, 몇 명의 학생이 나를 찾아왔다. 교장실에 찾아오는 것은 8할이 여학생이다. 그 
가운데 한 명인 K는 자못 분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랬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어요. 점심시간에 화장실 옆에서 2학년쯤 되는 여자아이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지요. '무슨 일이니?'하고 물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쩍거리기만 했어요. '배가 
아프니?'하고  물었더니 머리를 가로젓더군요. '그럼  넘어졌니?'하고 물었더니 역시 머리를 
가로저었어요. '그럼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프면 언니가 양호실로 데려다 줄게.'라고 다정하게 
말해도 여전히 훌쩍거리기만 했어요.
  '자, 언니 얼굴을 보렴.' 저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려고 했어요. 얼굴표정을 보면 슬픈 일
인지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 아이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내 두 손
으로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자자, 괜찮아.'하며 아이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아
이가 어찌나 고집을 피우는지 아이의 얼굴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어요.
  지금의 나라면 낯선 상급생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인가 보다 하고 잠자코 자리를 비
켰을 거예요. 그러나 그때는 나도 국민하교 5학년  때라 조금은 오기가 나서 '도대체 왜  그
래?'하고 조금 거칠게 말하고 말았어요. 그러자 아이는 으앙하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어요.
  그때 운 나쁘게도 D선생님이 지나갔어요. 이 선생님은 성격이 급한 분이어서  여자아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때리는 선생님이었지요. 저절로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전 아마 겁먹은 표정을 지었을 거예요.  D선생님은 느닷없이 '이 녀석!1 2학년 아이
을 왜 울리는 거야!'라고 호통치면서 내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습니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 선생님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들어 주지 않으리라는 생각
이 들어서 잠자코 있었지요.
  D선생님은 '잠깐 따라와!'라고 말하며 제 소매를 잡아끄셨어요. 그 2학년 아이에게는 부드
러운 목소리로 '얘, 무슨 일이지? 이 언니가 때렸니?'하고 물었지요. 결구 나와 2학년 아이는 
D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끌려갔어요."
  
    아무리 이유를 설명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교사
  K가 아무리 이유를 설명하려 해도 D선생은 들으려고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2학년 아이
는 "저 언니가 팔을 비틀었어요."라고  말해서 K를 완전히 곤경에  빠뜨렸다. 2학년 아이의 
말을 들은 D선생은 화를 내며 K를 다그쳤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아까는 왜 잠자코 있었지? 요녀석 엉큼하게 핑계를 지어내고 있어."
  그렇지 않다고 하소연했더니 이번에는 이렇게 다그쳤다.
  "선생님의 오해라니, 오해받을 짓을 한 네가 나쁘지!"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이제 누가 뭐래도 K는 나쁜 아이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교무실이
라는 곳은 누가 뭐래도 교사편만 모여 있는 곳이다. 많은 선생들이 들어오고 나가다가 멈춰
서서 K를 빤히 바라보았다. K는 너무 창피했다. 교사들은 D선생의 말만 들을 뿐이다. 게다
가 D선생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 녀석 단단히 야단 좀 쳐요."
  K는 잘못하지 않은 일을 의심받고 있는데도 그녀의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담
임선생까지도 오해를 하고 있었다.
  "K, 네가 저 아이를 때렸니? 때렸으면 빨리 사과해."
  K는 분하고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심정으로 입
을 꾹 다물었다.
  "이 아이는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어요. 워낙 지기 싫어해서 다루기가 어려워요."
  담임선생은 아예 여자아이를 때린 것으로 단정해 버렸다. 그래도 K가 잠자코 있자, "어머
니하고 학교에 오시라고 할까?"하고 을러댔다.
  "나는 정말이지 어머니가 오시기를 바랐어요."
  K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날의 일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오셔도 결과는 똑같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학년 아이가 무엇을 했
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으니까요. 다만 내가 손을 비틀었기  때문
에 울었다는 말만 했거든요. 분명히 내가 그 아이의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려고 한 건 사실
이에요. 그리고 그때 아이가 으앙하고 섧게 울기 시작했던 것도 분명하구요. 그렇다고는  해
도 그 아이는 그전부터 훌쩍훌쩍 울고 있었어요.
  바쁜 엄마를 불러내서 몇 시간이나 울렸다, 울리지 않았다는  시시한 이야기를 듣게 하다
가 결구 2학년 아이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그런 바보같은 짓도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알았어요. 내가 울렸어요."라고 말하고 나도 울음을 터뜨렸지요.
  그때의 그 참담한 기분을 이해하시겠어요? D선생님 같은 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나요. 내 말을 의심했던 담임선생님도 미워요. 그래서 국민
학교를 졸업한 뒤로 한 번도 찾아가지 않게 되었어요."
  
    교사를 불신하는 원한을 품게 하지는 않는가
  K는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괴로웠다. 이 아이에게 쓰라림을 안겨  준 사건, 그것은 우리들 교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우리는 학생들을 업신여기지는 않는가? 교사 자신의 견해가 항상 옳다고 착각하지는 않는
가?
  고작 5학년짜리 여자아이가 2학년 아이를  울렸다고 꽉 믿어 버린  사이에, 5학년 아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교사와 학교를 불신하는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 죄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나는 K에게 교장인 내 앞에서 그동안 쌓였던 화를 훌훌 털어 버려 고맙다고 말했다.
  교사는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적어도 학생들의 말을 끝까지  진지하게 듣도록 해야 한
다. 학생들의 세계에는, 어른이 된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숨쉬고 있음을 항상  염
두에 두자.
  
    3 자신감(?)을 갖고 의심하는 교사
    교사가 학생을 의심하는 것은 불행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믿으라고 가르친다.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도 교사인 자신을 
신뢰하기를 바란다. 신뢰가 없는 곳이라면 교육은 없다고조차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서도 교사들은 학생을 전면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진 천성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요구하
면서도 자기는 상대방의 어느 구석인가를 의심하는 일이 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 중심적
인 존재인 것이다. 교사가 학생을 의심하는 것은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불행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그 학교에서는 학생이나 교사 모두 각자의 가슴에 명찰을 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렇게 하
면 서로 이름을 부르기에도 편리하고, 기억하기에도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명찰은 교실에 보
관했고, 등교한 학생은 자기 명찰을 가슴에 달고 각자의 자리에 앉도록 되어 있었다.
  보통 그렇듯이 학생들은 명찰을 갖고도 장난을 쳤다. 명찰을 숨기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남학생의 명찰상자에 여학생의 명찰을 넣어두기도 했다. 이런 장난이 점점 심해지자 학급회
의에서 문제로 산아 토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학급은  분위기가 워낙 화기애애해서 명찰
장난이 반의 화제가 될 정도일 뿐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어는 날 아침, 담임선생이 C의 가슴에 명찰이 안 달린 것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명찰이 없니?"
  C는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했다.
  "누군가가 훔쳐갔나 봐요."
  "누가 훔쳐갔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면 쓰겠니? 사람을  의심하는 것 아니냐. 네가 잃
어버렸거나 착각했을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해 봐."
  담임선생이 일렀다.
  그 다음날, 반 아이들이 각자의 소감을 담아서 서로 돌려보는 낙서장에 C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낙서장은 반 아이들이 생각한 것, 느낀 것, 사색한 것을 자유롭게 적는 공책이었다.
  
    남이 막다 남은 밥을 억지로 먹게 한 교사]
  C가 낙서장에 적은 글을 소개한다.
  어제 선생님께 사람을 간단하게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 정말 맞는 말이라
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국민학교 5학년때 의심을 받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국민학교에서는 급식을 남기면 상당한 꾸중을 들었다. 편식해서는 안 된다,고마운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는 따위의 여러 가지 훈계도  들었다. 그래서 입맛에 맞지 않아도 참고  먹었다. 
그날도 그랬다.
  전부 먹은 사람부터 운동장에 나가려고 신발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때 뒤에서 B가  나
를 불렀다.
  "C야, 선생님이 잠깐 오라고 하셔."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며 교실로 들어가자 선생님이 호통부터 쳤다. 
  "야, C, 이거 네 거지? 네가 남겼지?"
  선생님은 급식쟁반과 접시를 내 가슴으로 거칠게 내밀었다. 그 쟁반과 접시에는 생선튀김
의 껍질과 양상치의 찌꺼기가 달라붙어 있었다.
  내가 말했다.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다그치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 소리 마, 네 것이  틀림없어! 생선껍질을 싫어하는 건 너잖아.  선생님은 모르는 게 
없어."
  분명히 나는 생선을 싫어한다. 특히 미끈거리는 껍질은 영 먹기가 힘들다. 마요네즈도  싫
다. 그날의 반찬은 정말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우겨넣듯이 억지로 전부 먹었다. 
양상치도 남기지 않았다. 선생님이 내민 접시는  절대로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울고  싶었
다.
  "자, 먹어."
  선생님은 다그치며 접시로 내 가슴을 쿡 찔렀다. 나는 내가 남긴 것도 아닌 것을 먹을 수
가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이 녀석, 선생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먹지 않으면 선생님께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 더러운  생선껍질과 눌러 붙은 
양상치를 눈을 감고 먹었다. 정말이지 토할 것만 같았다.
  "좋아."
  선생님은 그제서야 만족스럽게 말했다.
  내게는 선생님의 의심을 사서 이렇게 굴욕을 당한 경험이 있다. 그 선생님은 성격이 급해
서 곧바로 주먹으로 후려치곤 했다. 선생님은 때리고 나서 사랑의 매라며 웃었지만,  우리로
서는 참기 힘들었다. 언젠가 학부모회의에서 시정을 요구한 후에는 그다지 심하게 때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선생님이 내게 그 더러운  생선을 억지로 먹인 일을 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우리는 오만한 교사가 아닌가
  우리들은 이 학생의 수기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우리에게는 이 국민학교 교
사같은 오만함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선생님은 모르는 게 없어."
  "선생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
  이런 말투에는 얼마나 한심한 잘난 체가 배어 있는가. 그것은 교사로서 가질 만한 자신감
이 아니다. 자만심, 오만, 그리고 인간의 비천한 속성이 아닐까.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교사는 나이가 어리고 사회적 경험이 미숙한 아이들을 상대한다. 더
구나 교실은 밀실이어서 자신의 언행이 어른의 눈에 띌 일도 별로 없다.
  아무리 서투른 수업을 해도 아무리 엉터리  화법으로 이야기해도 아이들은 "선생님, 선생
님."하고 부른다. 학부모도 얼굴을 맞대고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다. 교사는 오만해지기 쉽
다.
  그러나 오만해진다면 하루하루 무덤을 파는 꼴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교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항상 잘 살펴서 겸허하게 행동해야 한다.
  
    4 진정으로 학생을 이해하고 있는가
    학생에 대한 이해는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는 교사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인생경험이 일천한 교사가 아이들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교사의 오만이라고 할  수 있
지 않을까? 오랜 세월을 함께 산 부부나 가족의 마음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일
이 있는데."
  이해를 하든 오해를 하등 그것은 사실 자신의 사고방식에  달려 있는데도, 교사는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말이 있다.
  '이해하려면 사랑해야 하고, 사랑하려면 이해해야 한다.'
  교사가 아이들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교사의 애정에서 비
롯되어야 한다.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인간이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얼
까?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해는 수용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 수용은 무엇일까? 교사는 아이들의 무엇
을 수용할 수 있고, 무엇을 수용할 수 없는가? 우리는 이 점을 스스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문제는 더더욱 까다로워진다.
  아이들에 대한 이해란, 사실은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는 자기에 대한 이해이다.  따
라서 교사는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느끼는 방식의 습벽을 철저히 뒤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사는 아이들에 관해서는 조사하고 살피지만 자신을 뒤돌아보는 데는  태
만하다. 아니, 살피기는커녕 자신은 아예 뒷전으로 밀어놓은 교사가 대부분이다.
  교사는 학생의 기본적인 생활습관에 대해서는 이러니저러니 말을 많이 하지만, 자신의 기
본적인 생활습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  학교에서도 "교무실을 때때로 외
부인의 눈으로 바라보자."고 호소하지만, 그 호소의 내용이 기껏 정리정돈을 잘하는 것 정도
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하다.
  학생의 눈으로 교무실 분위기를 보면 어떨까? 교사의 언행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이런 것을 진지하게 문제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해받는 쪽에 서 보는 일의 중요성
  우리 교사들은 자기는 바담풍하면서 아이에게는 바람풍하라고 이르고 있지는 않을까?  이
런 반성을 잊지 말고 아이들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방법과 기술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아이들을 이해하려면 애정과 지혜가 바탕에 깔려야 하며, 나아가  교사의 자기 이해와 인
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교사는 자칫하면 아이들이 미숙하다는 사실에 사로잡혀 자신이 모든 면에서 전지전능하다
고 착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자신이 명령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
사는 세상물정 모르는 폭군이 되기 쉽다.
  학생을 이해하는 방법과 기술에 관해 말할 때도 이해하는 쪽에 서는 것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해받는 쪽에 서 보는  것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며, 그것은 말만큼 쉽지 않음을 자각해야 한다.
  
    5 도산사건을 지도하며
    숨막히는 도난사건
  교내에서 일어나는 도난사고는 골치가 아프다. 교육과 범인을 색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누가 했는지 밝히지 않을 수도 없다. 불특정 다수
를 상대로 지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
에게 무기명으로 짐작가는 사람을 적어내게도  한다. 학생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교육과는 
거리가 먼 일인데 하물며 학생의 알리바이를 조사한다거나 은밀한 고자질을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이렇게 골치가 아프고 마음이 무거운  사고 가운데 하나가 도난사
고이다. 
  중하교 2학년 교실에서 학생들의 현금이 도난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체육, 실습, 음악수업
을 하느라 이동을 해서 교실에 아무도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액수가 크지는 않았지만 
2학년생들만 피해를 입었고, 더구나 두 번 세 번  거듭되자 각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일반적
인 주의를 주는 것만으로는 끝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불필요한 돈은 가져오지 않도록 하
거나 무심코 가져왔을 때는 담임선생에게 맡기도록 지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소극
적인 방법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교사들은 머리를 쥐어짰다. 교장, 교감, 생활지도 주임까지 모여서 머
리를 짜냈지만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지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목소리도 나왔다.
  "현장을 잡을 도리밖에 없습니다. 붙잡는 것 자체가 지도의 실마리가 될 테니까요."
  "학생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파악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의심쩍은 아이가 지각이나 조퇴를 하면 특히 눈여겨 보아야겠습니다."
  직접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몇몇 학생이 의심을 받았다. 교내순시를 강화하자는 의
견도 제기되어 교사들끼리 분담을 해서 순찰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마음이 개운
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 또 도난사고가 일어났다. 피해자는 2명이었다. 2하견 A반의 사물함에 넣어
둔 외투 주머니에서 현금이 없어졌다는 거였다. 피해를 입은  학생들은 도리어 꾸지람을 들
었다.
  "왜 공연히 돈을 가져와서 잃어버려!"
  교사들, 특히 2학년 교사들은 이마를 맞대고 상의했다. 도난당하면 자기만 손해라는  말도 
나왔고 누구누구 아니냐고 구체적으로 학생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개중에는 편견으로 
보이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일반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부모는  뭐라고 느낄까, 교사의 
허술한 지도에 불신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교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너무 공공연하게 떠들지 않는 쪽이 좋습니다."
  아니, 널리 알려서 폭넓게 정보를 제공받도록 합시다. 학부모의 협조를 받는 것도  바람직
하겠죠."
  의견은 분분했지만 사태를 결정적으로 해결할 만한 것은 없었다.
  11월도 어느덧 말에 접어들어 해가  짧아졌고, 교사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피해자는 
13명, 피해액도 5만원에 달했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상황이었다. 도
심의 명문학교라는 자부심도 상처를 입었다. 다른 학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데 2학년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이상했다.
  
    돈을 훔치는 짓은 애정을 훔치는 짓임을 자각시키다
  그날도 2학년 교사들이 모였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복된 이야기가 이날도 나왔다. 푸념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니 분위기가 우울해졌다. 그때 누구 못지않게  이 사건에 대해 근심
하던 여교사가 무언가를 깊게 생각한 듯이 말했다.
  "저처럼 경험이 없는 교사가 이런 말을 하는 게 건방지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만 제 생
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누가 훔쳤을까,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에 대해서는 
이야기했지만, 왜 훔치게 되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런 짓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서
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요?"
  나이 많은 교사가 물었다.
  "글쎄요...,훔친 아이는 가장 불행한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든지 친구가 없다든지 하는 욕구불만이 있어서 그건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돈을 훔친 나쁜 아이라는 관점에서 빨리 범인을 잡아서 호되게 야
단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생각했지만, 남의 돈이나  훔치는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하
면 뭔가 다르게 접근하는 길이 있지 않을까...."
  "...."
  정곡을 찌르는 발언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도난사건의  주인공에 대해 단단히 혼구멍을 
낼 녀석이 있다고만 생각했지 불쌍한 아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남에게 말할 수 없
는 고민을 안고,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아이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물건을 훔치는 짓은  애정을 훔치는 짓이라고 심리학 
교과서에 쓰여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머리로만 알았지 마음은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
다.
  '사건이 자꾸 일어나면 교사들이 난감해진다. 야무지게 지도하지 못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부모에게도 불신감을 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 자신들의 체면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불행한 아이야말로 좀더 애정 어린 말을 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야 하는 대상이었
다. 도난사고(?)의 용의자로서 이름이 거론된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eKemT한 
관심을 받아야 할 아이들이 아니가. 그런데도 교사들은 이런  학생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여교사의 혼잣말 같은 발언을 듣고 교사들은 누이 번쩍 뜨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
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논의가 시작되었다.
  다음날, 조금 추운 체육관에 2학년 전원이 모여 2학년생 임시 전체회의를 열었다.  학생들
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교사들의 분위기와 자세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어느 때보다  팽팽하게 
긴장한 채 앞에 선 교장의 얼굴을 응시했다.
  교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우리 선생님들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남의 돈을 훔치는 나
쁜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늦기는 했지만 선생님들은 마음을 바꾸었습니
다. 남의 돈을 훔치는 짓은 확실히 나쯘 일이지만 그  아이가 처음부터 나쁜 아이였던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 아이는 짐에  불행한 일이 있다거나, 친구가  없다거나, 마음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다거나, 선생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는다거나 해서 뭔가 욕구
불만이 있는 아이일 뿐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
게 돈을 훔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그런 약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이른바 마음의 병에 걸린 불행
한 아이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따뜻하게 위로해서 빨리 치료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돈을 잃은 13명의 학생들에게는 내가  그 돈을 전부 갚겠습니다. 우리  학교 학생의 병이 
그토록 깊어지도록 방치한 내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 병에 걸릴지 모릅니다. 그러니  서로서로 몸과 마음을 튼튼
하게 단련시킵시다. 괴로운 일, 고민스러운 일,  분한 일, 세상에는 견디거나 극복해야  하는 
그런 일이 많습니다.
  친구란 바로 그런 때 힘이 되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  선생님들도 힘이 되어 주고 싶습
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선생님에게 상담하십시오. 괴로운 일, 고민스러운 일, 분한 일이 있으
면 선생님과 긴밀하게 상의하기 바랍니다. 물론 교장인 나도  여러분의 상담에 기꺼이 응할 
생각이니까, 내게도 상담하러 와주십시오.
  인간은 모두 많건 적건 불행한 면을 지지고 있었습니다. 서로  손을 잡고 서로 힘을 합해
서 병을 이겨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불행이 더 이상  가지를 뻗지 못하도록 힘찬 사
람이 됩시다.
  사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지금까지  병들어 있었습니다. 병든 학생을 나쁜 놈,  바보같은 
녀석이라고만 생각했으니 병든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반성하
고, 나처럼 그릇된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학교를 만듭시다."
  학생들은 쥐죽은 듯 교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담담한 말투였지만  학생들의 마음 깊이 파
고드는 진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가 다른 학년의 학생들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12월에 열린 학부모회의에서
도 "아이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여러 분에게 들었다.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지도가 최선의 지도
  그후, 돈을 잃어버리는 사고는 없어졌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돈을 가져오지 않았고, 관리
도 확실하게 했다.
  이렇게 된 데는 학년주임의 지도가 큰 역할을 했다.  2학년 전체회의에서 교장이 한 발언
을 받아, 학년주임은 다름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은 모두 슈바이처 박사에 관해 알고 있을 겁니다. 박사가 쓴 저서에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박사의 일상생활을 돕는 원주민들은 주어진 일은 아주 충실하게 했지만, 돈이나 물건에의 
유혹에는 무척 약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 누구라도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들어가
지 못하게 했으며 모든 물건에는 열쇠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그것을 모욕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에게 도둑질하는 죄를 저지르게  하지 않으려는 따뜻
한 배려라고 느끼고 감사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박사가 '죄를 저지르게 하는  죄'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나 물건을 
엉성하게 다루는 것은 죄를 저지르게 하는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지도이다.  물질적인 배고픔을 모르는 시대라
고는 해도, 정신적인 허기를 느끼는  아이들은 적지 않다. 흔히  듣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런 상황을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는 좀처럼 구체적으로  감
이 잡히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제 6장 꾸짖는 일의 어려움
    1 좋아할 수 없는 아이를 사랑하는 어려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아주 못된 망나니
  임시로 A라고 해두겠다. A는 지독한 망나니였다.  나는 지금 도저히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없다. 교장인 내가 그의 이름을 잊을 리가  없는데, 정말로 잊고 말았다. '교장인 내가'라
고 한 까닭은, A가 잊을 구 없는 망나니였었다는 의미이다.
  교장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한다고 쓴 책을 읽으면 나는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몇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이
름을 외우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사귄다는 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가능한 일  같
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나라도 지독한 망나니는 기억한다. 아주 모범적이거나  훌륭한 상을 탄 학
생의 이름도 기억하지만, 그 이상으로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왈패의 이름이다.
  그러나 A의 경우에는 달랐다. A가 한 짓,  나를 공격했던 일은 기억해도 그의 이름은 정
말로 잊어먹었다. 아니, 내가 쓴 구절은 정확하지 않다. 그가 교장인 나를 공격했던 일은 기
억한다고 썼지만, 사실 그때 내가 그에게 품었던 혐오감은 기억해도 그가 어떤 장면에서 어
떤 짓을 했고 어떤 눈빛이었던가, 어떤 말을 했던가는 잊어버렸다.
  나는 지긋지긋하게 그 학생을 싫어했다. 지금 A를 학생이라고 지칭했지만, 사실은 학생이
라고 쓰기보다는 '그 녀석'이라고 쓰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A를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심상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기피한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 아이를  소름끼치도록 
기피했다. 학교에서도 그 아이를 마주치는 것조차 싫었다. 저쪽에  A의 모습이 보이면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내 면전에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멍청한 교장! 이 바보."
  그는 내가 끔찍하게 밉다는 표정으로, 나를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대들었다.
  "당신,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교장! 뻔지르르한 말만 하는 위선자."
  그는 반항아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반항아였다. 날마다 지각을 했고, 학교에 오면  몇몇 
패거리와 함께 수업중인 교실까지 들어와서 행패를 부렸다. 고함을 치고, 기성을 지르고, 소
란을 피워 수업을 방해했다.
  그들의 행패를 그들의 자기 주장이라거나 교육에 대한  원한(?)의 표현이라고 평론가들은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A의 경우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너무 터무니없고 엉망
진창인 아이였다. 그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재미있어서 그럴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들과 얼마나 대화를 나누었던가. 그들 한 사람 한 삶의  마음을 알려고 얼마나 많은 시
간을 쏟았던가.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 곁에 붙어서 그들의 주장이나 변명을 들었던 것이 몇 
번이었던가. 나는 벽창호같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끄집어내서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
어하는지, 자신들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지 따위를 깨우쳐 주고 싶었다
  그들 가운데는 행패나 부리며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한 학생
도 있었다. 폭력이나 파괴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 붓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푸
념한 아이도 있었다. 도저히 가정이라고 할 수 없는 가정에서 살아가는 아이도 있음을 알았
다. 불행과 불운에 파묻혀 발버둥치는 아이들. 그들 부모의 불행과 불운이 그들의  생활자세
와 성품에 영향을 주어, 인생을 포기한 듯이 말하고 사고하고 행동하게 된 그들의 구조적이 
불행과 불운! 나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고 기피했던 나
  a는 그 중에서도 특히 지독한  망나니였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손톱만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장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그들 패거리 사이에서는 권위를 세우는 방법이었다. 의
심을 담은 눈, 어떻게 해서든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눈으로 교장에게 덤벼드는 것이 패거리
들에게 자신을 부각시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A에게는 철저하게 반항하는 것 
외에는 자신을 부각시킬 방법이 없다.
  그의 심리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마음
속에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나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내가 갈등했다. 나는 어른인 나
를 이런 상태로 몰아넣은 A를  미워하며 심리적으로 기피했다. 그때의  일이 몇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름만큼은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현상을 야기한 것이다.
  
  한마디로 '어쩔 수 없는 놈'이라는 말을  한다. 그 '어쩔 수 없는  놈'이 바로 A였다. 말은 
간단한 것 같지만 교사가 '어절 수 없는 놈'이라고 할 때에는 이미 그의 교사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A에 대한 내 심정이 그랬다. 마음속으로 A는 '어쩔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
하는 순간부터 나는 A에게서 도망쳤다. 심지어는, '오토바이를  난폭하게 타고 다니는데, 저
런 놈은 전신주에라도 박아서 죽어 버리는 편이 낫다.'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너무나 한심하
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참 냉혹한 교장이라고 비난하겠지만, 그땐  그런 심정이었다. 나는 A
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리고 A의  일이 언제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견딜 수 
없었던 나 자신을 기피했다.
  
    아무리 망나니라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
  지금 와서 솔직하게 하는 말이지만 나는 A에게 교육자가 아니었다. 교육자는 기본적으로 
학생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를 사랑하기는 쉽지만 도저
히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교육자엑게 
요구되는 자질이다.
  교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을 모아서 교육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이만 교육하는 것
도 아니다. 교육하는 아이를 사랑할 수 없으면 이미 교사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가
혹하지만, 교사라는 직업은 그런 가혹한 요구를 내포하고 있다. 교사가 자기가 좋아하는  아
이만 사랑하고, 함께 웃고 울며 생활한다면 그것보다 편한 일은 없을 것이다. 교사의 고충은 
이렇게 좋아할 수 없는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데 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을  들 수 있겠지만 역시 '사
랑하려면 이해해야 한다.'라는 진리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나는 A를 기피했다. 그래서 그를 꾸짖은 적이 없다. 비난한  일은 있어도 꾸짖은 일은 없
었다. 사랑하지 않는 아이를 꾸짖을 수는  없다. 꾸짖는 것은 비난하는 것과는 다른  사랑의 
행위이다. 사랑하면 그 아이의 잘못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꾸짖고 충고하는 것은  기본적
으로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이렇게 하기 바라고,  이렇게 
하는 것이 상대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꾸짖는 것이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들고 참기 힘들어 그런 짓을 못  하게 하려고 꾸짖는다면, 그것은 자기
애에 토대를 둔 행위에 불과하다. 교사 자신이 록음악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학생에게 록음
악을 듣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교사의 이기주의이다. 자기가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
서 만화를 보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 역시 오만한 행동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이나 흥미가 깊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공감하고 싶어한다. 부모는 자신의 자식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직업을 계승
하기 바라고, 자기가 자랑스러워하는 삶의 방식을 계승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
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다분히 자기본위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거기에 약간의 제동을 거는 것이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나 역시 
A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어야 한다. A가 끝까지 나에게 대든  까닭은 조금 듣기 좋게 
말하면 나에게 이해 받기를 원하는 자기 주장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부끄러
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자꾸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교사는 참으로 어려운 직업임이 사
무치도록 느껴진다.
  
    2 의사전달의 어려움
    각각 다른 진실을 받아들이는 방법
  학교는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조직이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의사전달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학생지도를 하려고 조직적으로 움직일 때 A, B, C 세 학생을 X, Y, Z 세 교사
가 각각 지도하고 그 결과를 서로 논의하는 일이 있다.
  글로 적자면 간단히 '논의하는 일'이지만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학생지도
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실감하리라.
  우선 논의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다. 그 이상으로 어려운 것은 이야기하
는 방법과 듣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자. 특정한 학생과 30분간 이야기한 내용을 그  자리에 없던 사람에게 5분 만에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학생의 심정이라든가,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조성된 미묘한 분
위기를 그 자리에 없던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설사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방식은 세  선생 X, Y, Z에 따라 차이가 나
다. 학생지도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사리관계 한  가지만을 놓고 보아도 A, B, C  세 학생이 
말하는 것이 똑같을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사들도 개개인의 성격이나 경험
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실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가 들은 것에 대한 해석을 듣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실관계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렇게 맞아떨어지지 않을 경우 교
사들은 사실과 어긋난 것을 캐묻는다. 학생인 A, B, C 쪽에서 보면 집요하다는 느낌을 받는
다. 어른의 경우라면, "그런 시시하고 자질구레한 일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런 일 따위를 
어떻게 일일이 기억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 때문에, 무엇을 했는가를 캐물었는데, 같은 일을 한 A, B, C가 
말하는 내용이 다르다. 이때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다거나 속인다고 단정짓는 것은 성급하다. 
그들이 착각했을 수도 있고, 대체로 인간은 일일이 의식하면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
처 생각을 못 했을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사람이 자신이  어제 한 행동을 
빠짐없이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곧 알 수 있다.
  내가 학생인 A를 불러서 그의 마음을 듣고 그것을 담임인  X선생에게 전한다. 글로 적자
면 이렇게 쉬운데 이 전하는 내용이 문제가 된다.
  특히 서로 대화를 나눈 내용을 전하기가 어렵다. 전하는 것은  결국 두 사람의 대화에 대
한 자신의 요약과 결론적인 자신의 감상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요약과 감상은 어
디까지나 나라는 개인의 주관이다. 더구나 나와 A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나의 주관이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 X선생은 사실을 듣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중에  X선생이, 
"그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라고 하며 그것이 내 책임인 양 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X선생의 입장 차이거나 그것과 연관된 해석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일이 Y선생과 X선생, Y선생과 Z선생  사이에서도 있을 수 있다. 오해나  곡해는 인간 
사이에서 흔히 일어난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산 부부나 가족간에도 오해가 있고 곡해가 있지 
않은가.
  
    얼마나 상대를 신뢰하는가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교육자로서 똑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
이 그 자리에 없어도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지거나 자기 결점을 헐뜯는 일은 없으리
라고 믿는 것이다.
  "아무리.... 그런 생각을 하는 바보가  있을까."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교육현장이다.
  예를 들어, 교장이 직접 학생을 만나서 그의 변명을 들으려고  할 때 교장에 따라서는 엉
뚱한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있다.
  '교장선생님은 담임인 나 몰래 저 아이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있을까? 또  저 녀석은 나 
몰래 교장선생님에게 무슨 소리를 하고 있을까.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마구 지껄여대서 나를 
헐뜯고 있지는 않을까?'
  씁쓸하기 그지없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교사라면, 학생이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교육전문가인  교장은 교사나 학생에게 악영향
을 미치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믿어야 한다.
  이것은 교장에게만 한정된 말이 아니다. 교사인  X, Y, Z사이에서도 있어야 하는 일이다. 
교사 사이에 의구심, 이유 없는 불신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무조건 신뢰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조건
적으로 신뢰받으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에 보답하게 된다.
  동료를 서로 신뢰하는 토대 위에서 논의와 전달의 성질과 성격을 파악하는 것, 나아가 자
신의 듣는 버릇이나 이야기하는 버릇, 해석 경향을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마
음가짐이 필요하다.
  서로 논의하는 것은, 전달하는 능력과 듣는 능력의 종합이며, 자신이 얼마나 상대를  수용
할 수 있는가 하는 그릇 크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달의 어려움은 교사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간의 문제이고, 
학생들끼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3 솔직하게 사과할 수 있는가
    솔직하게 사과하지 못하는 교사
  교사는 학생을 꾸짖을 때 솔직하게 사과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일이 적지 않다.
  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솔직하게 사과해라."
  "죄송하다고 말해라."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교사 자신은 스스로 생각할 때, 실수했다고 생
각하는 경우나 오해했다고 느끼는 경우에 솔직하게 사과하는가? 상대가 학생이든, 동료교사
든, 혹은 학부모든, 지역주민이거나 관계기관의 직원이든 불문하고 자신이 잘못했을 때 진심
으로 사과하는가?
  "나는 단 한 번도 실수한 일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허풍쟁이이다. 누구나 오해하고 곡해하는 일이  있다. 
설령 그것이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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