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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1/한국사

한국인물사전

by FraisGout 2020. 5. 31.

  ㄱ
  각훈(?∼?)  고려 시대의 승려. 각월이라고도 하며, 호는 고양취곤이다. 당대의 일류 문인이었던
이인로, 임춘, 이규보, 승려인 문선사, 시랑 조충 등과 교유(서로 사귀어 왕래함)하였으며, 문장가
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개경의 흥왕사와 영통사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1215년경에 영통사
의 주지가 되었다. 저술로는 현존하는 유일의 고승전인  해동고승전 이 있다.

  강감찬(948∼1031) 고려의 문신, 장군. 처음 이름은 은천. 1010년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이유로 서경을 침락하자, 이를 설득하여 돌아가도록 했다. 1018년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
군을 이끌고 다시 침공하자,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독특한 전술로써 적군의 습
격을 막아 내기도 했다. 특히 귀주 대첩은 대외 항전 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로써 거란은 고려에 대한 침락 야욕을 버리게 되었고, 평화적인 국교가 성립되었다. 묘는 충북
청원군 옥산면 국산리에 있다. 저서로는  낙도 교거집 과  구선집 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강명규(1896∼1983) 독립 운동가. 호는 위석. 황해도 봉산 출신. 보성 전문 학교 상과에 재학
중, 3, 1 운동에 참가하였고, 일본에 대한 무력 항쟁을 계획하려다 비밀이 누설되어 상하이로 망
명하였다.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원의원이 되었고, 1924년에는 통의부 군사부의 의용 군사
과장에 임명되어 군사 훈련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한국 독립당 중앙 감찰 위원, 반민 특위 조사
관을 역임하고, 육군 보병 학교를 거쳐 육군 대위를 지냈다. 1963년에 건국 훈장 국민장이 수여되
었다.

  강세황(1713∼1791) 조선 시대의 문신, 서화가, 호는 첨재, 표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이익, 심사정, 강희언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제자로는 김홍도, 신위 등이다. 61세에 처음 벼슬
길에 올라 64세에 기로과, 66세에 문신 정시에 장원, 영릉 참봉, 병조 참의, 한성부 판윤 등의 관
직을 두루 거쳤다. 시, 서, 화의 삼절로 불리었다. 한국적인 남종 문인 화풍의 정착에 크게 기여했
으며, 진경산수의 발전과 풍속화, 인물화 등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작
품으로는  첨재화보  ,  삼청도  ,  난죽도  ,  사군자 병풍  등 자화상과 초상화를 남겼다.

  강소천(1915∼1963) 아동 문하가. 함경 남도 고원 출신. 함겅 북도 영생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
하고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50년에 남한으로 내려왔다. 1930년에  아이 생활  ,  신소년 에 동요
 버들나무 열매  등을 발표, 같은 해에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 가 조선 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되었
다. 1937년 이후에는 동화 및 소설을 쓰기 시작,  돌멩이 와  토끼 삼형제  ,  전등불 이야기  ,  마늘
먹기  등의 단편과  희성이의 두 아들  등 장편을 발표했다. 1952년부터 어린이 잡지인  새벗 과
 어린이 다이제스트 를 주관, 아동 문학 연구회 회장 , 한국 문인 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5
년 배영사에서 그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하여  소천 아동 문학상 을 제정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동
요 동시집  호박꽃초롱 ,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  ,  꽃들의 합창  ,  꽃신 , 소년 소설집  해바라기 피
는 마을 , 전집으로  강소천 아동 문학 전집  등이 있다.

  강수(?∼692) 통일 신라의 한문학자 , 문장가. 본명은 자두. 태종 무열왕 때 당나라 사신이 가져
온 국서를 잘 풀이하여 왕의 신임을 얻은 뒤, 당나라와 고구려, 백제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맡아
작성하여,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 문장학을 가
지고 진출한 지식층이며, 현존하는 기록상 최초의 유교적 문인이기도 하다.

  강재구(1937∼1965) 군인. 1960년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되었다. 1965년 한국
군의 월남 파병이 결정됨에 따라, 제1연대 제10 중대장으로 근무하며, 월남 파병을 앞두고 대원의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하던 중 한 병사의 실수로 중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수류탄이 떨어졌
다. 순간 그는 폭발하려는 수류탄에 몸을 던져 중대원 1백 명의 생명울 구하고 자신은 목숨을 잃
었다. 그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1계급 특진과 4등 근무 공로 훈장을 내렸으며, 그
가 소속했던 맹호 부대 제1연대 3대대를  재구 대대 라 이름 붙였다. 또한, 육군 사관 학교에는 그
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육군에서는  재구상 을 제정하여 매년 모범 중대장을 선발하여
시상하고 있다.

  강조(?∼1010) 고려의 무신. 1009년에 김치양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 후, 나라가 어지럽자 목종
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왕으로 내세웠다. 그는 새로운 국가 기강을 위해 관제 개혁과 관직 개편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010년 거란의 성종이 목종을 폐위시킨 이유를 묻겠다는 구실로 쳐들어오자
이를 막았지만, 계속적인 승리에 자만심이 생겨 경계를 않고 있다가, 결국은 대항할 겨를도 없이
패하고 말았다. 포로가 된 그는 자신의 신하가 되어 달라는 성종의 권고를 거절하여 고려인의 늠
름한 자세를 보여 주었으며, 다른 포로에게도 고려인의 긍지를 잃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최후를
마쳤다.

  강희맹(1424∼1483) 조선 시대의 문신. 자는 경순. 호는 사숙재. 1447년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
한 뒤, 1450년에 예조 좌랑과 돈년 판관을 역임하고, 병조 판서, 이조 판서, 우찬성, 좌찬성에 이
렀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하여 맡은 일을 잘 처리했으며, 경사와 전고에 뛰어난 문장가였다.  경
국대전 의 편찬과 사서 삼경의 언해,  동문선  ,  동국여지승람  ,  국조오례의  ,  국조오례의 서례 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사숙재집  ,  금양잡록  ,
 촌담해이  등이 전해진다.

  강희안(1417∼1464) 조선 시대의 문신. 자는 경우. 호는 인재.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 불렸으며, 전서, 예서와 팔분에서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경지를 이루었다.1443년
에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이고, 1445년에는 최랑
등과  용비어천가 의 주석을 붙였다. 1447년에는 이조 정랑이 되어 최랑`성삼문`이개등과  동국정
운 을 완성하였다. 작품으로는  여인도 가 유명하며,  청학도 ` 청천강 ` 경운도 는 기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교두연수도 ` 산수인물도 ` 고사관수도 ` 강호한거도 등이 있고, 글씨로는  강지돈녕석덕묘
표 / 윤공간공형묘비 등이 있다.

  거칠부(?~579) 신라의 장군`재상`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큰 듯을 품고 승려가
되었다.545년에 왕명을 받아서  국사 를 편찬하였으며, 551년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군을 탈취 하였다. 특히 군사`정치적인 분야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진흥왕순수
비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진흥왕 때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장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검모잠(?~?) 고구려 부흥 운동의 지도자.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유민을 모아 대동강 남쪽에
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한성에 자리를 잡고, 귀족 안승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당나라 장군 고간이 이끄는 대군이 쳐들어자, 이의 해결방안을 놓고 의견대립으로 안승에게 피살
되었다.

견훤(?~936:재위 892~935) 후백제의 시조 본래성은 이씨였으므로, 신라의 상주에서 태어났다. 신라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892년에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입성하여 후백제의 왕이 되었다. 견훤
은 신라의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내세워 세력을 떨치려 했으나 고창(지금
의 안동)에서 왕건에게 대패하면서 세력이 약해져 왕위 계승 문제로 아들 신검과 다투다가 936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겸익( ? ~ ? ) 백제의 승려. 529년 인도에 다녀와서 백제 율종을 개조하였다. 인도에서 율부를
공부, 귀국하여 국내의 고승들과 함께 범어로 쓴 율문을 율부 72권으로 번역하였다. 겸익의 율학
으로 인하여 백제 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가 되었고 그 뒤 일본 율종의 근거가 되었다.

경덕왕 ( ? ~ 765:재위742 ~ 765) 신라 제35대 왕.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헌영. 효성왕의 뒤를 이
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궝의 강화를 위해 제도와 관직의 이름을 당의 제도에 따라 바꾸고, 백성
을  위하는 정신에 바탕을 둔 유교정치를 수행하였다. 또한, 불교의 발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
려, 황룡사범종을 주조하고, 불국사`석굴암 등을 세워 신라 문화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계백 ( ?~660) 백제의 장군.  관등은 단솔. 660년 김유신과 소정방의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 오자,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벌에 나가 신라군과 맞
서 싸웠다. 전장에 나가기전 가족이 적에게 잡혀 노비로 욕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직접 처자를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의 결사대는 신라군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계백의 이러한 생애는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이 되었고, 조선 시대 유학자들에게는 충절의 본보기가 되었다.

  계용묵(1904 ~ 1961) 소설가. 1925년  조선 문단 에 단편  상환 으로 등단한 이래 40여편의 단편
을 남겼다. 초기에는  최서방 . 인두지주  드의 현실적인 작품을 발표하다가, 1935년  백치 아다다 를
발표하면서 순수 문학을 지향하는 그의 문학적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은 1930년대
의 한국 문학의 언어적 미감을 세련시키고, 단편양식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켰다는 점에 문학사적
의의를 두고 있다. 저서로는 단편집  병풍에 그린 닭 ` 별을 헨다 외에 수필집  상아탑  등이 있다.

  고경명(1533 ~ 1592) 조선시대의 문신. 의병장. 호는 제봉`태현. 1558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다. 1581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91년에 동래 부사가 되었다. 그러
나 당쟁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6천여명을
모아 금산에서 밀려오는 왜적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와 유팽로`안영등과 함께 순절하였
다. 시`글씨`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무등산 기행문인 서석록 , 각처에 보낸 격
문을 모은  정기록  등이 있다.

  고선지 (?~ 755)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군. 고구려 멸망후 당나라에 가서 20세에 장군이 되었
다. 747년에 토번과 사라센 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나라에 대항하자,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제 1
차 원정에 나섰다. 그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개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사라센의 동쪽 진
출을 막았다. 여러 차례의 원정에서 세운 공으로 현종으로부터 안서 사진 절도사라는 벼슬을 받
기도 했다. 제2차 원정 때는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을 토벌하였으나, 이듬해에는 서
역 각국과 사라센 연합국과의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였다. 그 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위해 출전 했다가, 변영성의 모함으로 진중에서 참형당하였다.

  고종(1852∼1919:재위 1863~1907) 조선 제26대왕. 호는 성헌.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12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10년동안 통치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실권을 잡았으나 명성 황후의 척족들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임오군란`갑신정변`갑오개혁
및 한`일 의정서 조인과 을사조약체결,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 파견등 많은 사건을 격어야
했다. 그는 이완용, 송병준 등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 매국 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
로 한일 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퇴위,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910년 국권 피탈 때 이
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따. 그의 국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군중이 서울에 몽
일 것을 예측하여 삼일운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고흥(?∼?) 백제 근초고왕 때의 학자. 백제 최초의 역사책이라 할 수 있는  서기 를 편찬하였다.
이외에도  백제기 ,  백제신찬 ,  백제본기  등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의
학, 관상술, 음양 오행술에도 뛰어났다.

  공민왕(1330∼1374:재위 1351~1374) 고려 제31대 왕. 이름은 전. 호는 이재, 익당.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 원나라의 노국 대장 공주를 비로 맞이하여 고려에 돌아와 1351년 왕위에 올랐다.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대륙정세의 변동을 이용하여 고려의 발전을 꾀하는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즉, 변발, 호복 등의 몽고풍습 및 몽고의 연호, 관제를 폐지했으며, 고려의 정치를 간섭하는 정동
행 중서성 이문소와 100년간이나 존속해 온 쌍성 총관부를 폐지,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다
시 찾았다. 그러나 1365년 노국 대장 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나라의 모든 일을 신돈에게 맡기
고 그 자신은 최만생, 홍륜에게 암살당하여, 왕조 멸망의 실마리를 만든 결과를 낳게 했다. 공민
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로 꼽히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 가 있
다.

  곽재우(1552∼1617)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호는 망우당. 3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으나, 지
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무효가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
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 장군이라 불렸으며, 김시민의 1차 진주성 싸움에는 원군을 보내어 승리
를 이끄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 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기
도 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사양하고 창암에서 조용히 지냈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
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죽은 뒤에 그의 사당에 예연 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 병조 판
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중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 이 있다.

  관륵(?∼?) 백제 무왕 때의 고승. 중론, 십이문론, 백론의 삼론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의학에
도 지식이 깊었다. 602년에 역본과 천문, 지리서 및 둔갑술에 관한 책을 일본에 전하고, 원흥사에
머물면서 불경을 가르쳤다. 왕에게 건의하여 승려가 계율을 잘 지키어 도를  닦는 일을 감독할
수  있도록 교단 통제 기구로서 승정과 승도라는 제도를 두었다. 일본 최초로 시행된 이러한 승
직 제도는 백제의 제도를 본뜬 것으로 이를 통하여 최초로 승려의 기강이 확립되었다.

  관창(645∼660) 신라 무열왕 때의 화랑. 품일 장군의 아들로 어려서 화랑이 되어 사람들과 널리
사귀었으며, 왕에게 그의 재주를 인정받아, 16세에 부장으로 출전, 황산벌에서 백제군과 싸우다가
적의 초로가 되었다. 계백 장군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데 감동하여 돌려보냈으나, 관창은 다시 적
진에 뛰어들어 죽음을 당하였다. 관창의 용감한 죽음에 자극된 신라군은 백제군을 대파함으로써
삼국 통일의 박차를 가했다.

  광개토 대왕(374∼413:재위 391∼413) 고구려 제19대 왕. 재위시에는 영락이라는 연호를 써서
영락 대왕이라 일컬어졌다.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켜, 392년에는 백제의 석현성을
비롯한 10개의 성을 빼앗고, 396년에는 한강 유역에까지 진출하여 58성 700촌락을 정벌했을 뿐만
아니라, 398년에는 숙신을 정벌하여 조공을 받치도록 하였고, 410년에는 동부여를 굴복시킴으로써
북쪽과 동쪽으로 고구려의 세력권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정복 사업의 결과, 재위 기간 중 64성과
1400촌락을 빼앗았으며, 고구려의 영역은 서로는 요하(중국 만주 남부의 강), 북으로는  개원(중
국 요북성에 있는 한 현), 동으로는 혼춘(중국 길림성 동남쪽의 도시),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
르렀다. 또한,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 관직을 신설하고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다음 장수
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장수왕이
생전의 공적을 기록한 능비를 건립하였다.

  광종(925∼975:재위 949∼975) 고려 제 4대 왕. 광종은 재위하자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쌓아 왕
권을 확보하는데 힘썼으며, 고려 초기 왕권 강화에 큰 성과를 거둔 왕으로 주목되고 있다. 956년
에 노비 안검법을 세웠으며, 958년에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고,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
였다. 또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968년에 혜거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음으로써,
고려의 국사, 왕사 제도의 문을 열었다. 국방 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고려의 영역을 서북과 동북
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
왕조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광해군(1575∼1641:재위 1608∼1623) 조선 제15대 왕. 선조의 둘째 아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야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1608년에 선조가 죽자 왕위 계승문제를 놓고 대북은 광해군
을, 소북은 영창 대군을 내세우며 치열한 당쟁을 벌이다가, 결국은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
은 즉위 후 전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선혜청을 두어 대동법을 실시하고, 경덕궁을 세
웠다. 또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 서적의 간행에도 힘써  국조보
감 ,  선조 실록 ,  동의 보감  등을 편찬케 했다. 그러나 대북의 책동으로 형인 임해군과 아우인 영
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그후, 1623년에 인조 반정으로 왕위에 쫓겨나
강화로 유배,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궁예(?∼918:재위 901∼918) 후고구려의 왕. 신라 제47대 헌안왕의 서자. 당시 신라 왕실이 극도
로 쇠약해져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궁예는 기훤, 양길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운 뒤, 자
신을 따르는 무리 3500명을 세력 기반으로 하여 금성, 철원 등을 점령하고, 901년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마진이라고 하였다. 그후, 부하인 왕건의 해상 세력이 나주를 정벌
하자 해상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날로 세력이 강대해지자 사치에 빠졌고, 성격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아 처자와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 918년 신숭겸, 홍유 등의 모의로 왕건에게 나라를 빼
앗기고 달아나다가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권근(1352∼1409)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호는 양촌. 고려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
하여 춘추관 검열, 성균관 직강 등의 벼슬을 지냈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로 예문관 부제
학, 중추원사 등의 벼슬을 하였다. 성리학자이면서도 경학과 문학을 연마하였고,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여 고려 말의 학풍을 새롭게 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
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 과  오경천견록 으로 대표되며, 시문집으로는  양촌집  40권
을 남겼다.

  권율(1537∼1599) 조선 시대의 문신, 명장. 호는 만취당. 158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 전
라도 도사, 경성 판관 등의 벼슬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만 명의 군사를 모집하
여 왜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1593년에는 행주 산성에서 왜장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3만 명의 왜군
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를 행주 대첩이라 한다. 그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하였으
나,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당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도원수로 임명되어 활
약하였으며, 1599년 노환으로 죽었다. 1604년 선무 1등 공신으로 영가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균여(923∼973) 고려 광종 때의 고승.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당시 화엄교 승려들이
남북 양종으로 갈리어 서로 자파의 교법만을 주장하면서 대립하자, 그는 양파를 통합하고 향찰로
써 불경의 석기를 저술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덕이 높아 광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귀법사
의 주지로서 왕명에 따라 향화를 받들며, 민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널리 펴다가 973년에 귀법사에
서 입적(불교에서 승려의 죽음을 이르는 말)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수현방궤기 ,  공목장기 ,  오십
요문답기 ,  법계도기  등과 그의 전기인  균여전 에 향가  보현십종원왕가  11수가 실려 있다.

  근초고왕(?∼375:재위 346∼375) 백제 제13대 왕. 조고왕, 초고왕이라고도 한다. 즉위한 뒤 왕권
을 강화하는 데 힘써, 남으로는 마한의 남아 있는 세력을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체를 점
령하였고, 371년에는 북방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백제는 사상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백제의 지정학적인 조건을 이용하여 고대 상업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무역의 중심 구실을 하게 되었다. 지배 영역이 확대되고 통치 조직이 정비됨에 따라 왕권이 확립
되고 문화가 발전하였다. 아직기와 왕인을 일본에 보내어  천자문 과  논어 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
에 유학사상을 일으켰으며,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 라는 국사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근초고왕 때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길재(1353∼1419) 고려말, 조선 초기의 학자. 호는 야은. 1388년에 성균 박사가 되어 여러들을
가르쳤다. 1389년에 문하주서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조
선이 건국되고 태상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거절하고, 후학의 교육에
만 힘썼다. 훗일에 그를 기리기 위해 금산의 성곡 서원, 인동의 오산 서원에 향사하였고, 이색, 정
몽주와 함께 삼은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는  야은집 ,  야은속집 ,  야은언행습유  등이 있다.

  김교헌(1868∼1923) 독립 운동가. 대종교 제2대 교주. 호는 무원. 1898년 독립 협회에 가입하여
대중 계몽 운동을 하였고, 만민 공동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대종교에 들어가 영계를 받고,
1916년에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교주가 되었다. 삼일운동  이후에는 독립군 교도들을
이끌고 활약하였고,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구국 투쟁에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신단민사 ,  단기
실기 ,  홍암신형조천기  등이 있으며, 1977년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김구(1876∼1949) 독립 운동가, 정치가. 호는 백범. 황해도 해주 출신. 1893년에 동학에 입교,
1894년에 팔봉 접주가 되어 해주에서 동학 혁명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에 만주로
피신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을미사변 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
다를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감형된 뒤 탈옥하였다. 삼일운동
직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경무 국장을 지내고, 1928년에 한국 독립
당을 창당하였다. 1945년 8, 15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민
족 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 통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1949년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
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추서했다. 그후, 서울 남산 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 가 있다.

  김규식(1881∼1950) 독립 운동가, 정치가. 호는 우사. 1897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 학
위를 받고 귀국하여, 경신 학교 교감, 연희 전문 교수 등을 지내면서 청년 교육에 힘썼다.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 민족 대회 및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고, 1935
년 만주에서 민족 혁명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임시 정부 부주석으로 활약하였고, 8 15
광복이 되자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6 25전쟁 때 납북되
어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시집  양자강의 유혹  등이 있다.

  김기수(1832∼?) 조선 말의 문신. 호는 창산.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수신사로 일본에 다
녀와 근대 한일 교섭의 시초를 열었다. 그는 개화한 일본의  문물, 즉 전신과 철도의 가설, 군함
과 대포의 제조와 군사, 기계, 학술, 교육 등의 시설을 관람하고,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하여,
 일동기유 ,  수신사 일기  등의 견문기를 썼다. 그의 견문기로 인해 일본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과 1881년 신사유람단을 파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김대건(1822∼1846)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 세례명은 안드레아. 천주교 103위성인 가운
데 한 사람이다. 1831년 조선 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중국 마카오
에서 신학교를 졸업했다.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어 귀국, 활발한 전교 활동을 폈다.
1846년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올 수 있는 해로를 답사하려다가 체포되어, 그의 나이 25세 때 새남
터에서 처형당하였다. 1925년 로마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한국 카톨릭
교 200주년 기념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위에 올랐다.

  김대문(?∼?) 통일 신라의 학자, 문장가. 진골 귀족 출신으로 여러 저술을 통하여 삼국 시대 이
래의 귀족적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저술로는 신라 역사상의 중요한 사건을
다룬  계림잡전 , 화랑들의 전기인  화랑세기 가 있으며, 이 책은 훗일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외에  한산기 ,  악본  등이 있다.

  김대성(700∼774) 신라의 대신. 건축가. 745년에 이찬으로 중시가 되었으며, 750년에 물러났다.
그 뒤, 부모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녀을 기원하기 위해, 불국사, 석불사(석굴암), 장수사 등의 창
건 공사를 주관하였다. 설계, 건축, 조각, 공예 등 공사 전반을 맡아 지휘했으나,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했다. 불국사와 석굴암의 건축미는 신라 시대 불교 미술의 걸작으로 빛나고 있다.

  김동인(1900∼1951) 소설가. 호는 금동, 춘사. 평양출신. 일본 도쿄 메이지 학원 중학부 및 가와
바타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9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문학예 동인지인  창조 를 펴내고, 거
기에 첫 단편 소설  약한 자의 슬픔 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주의 문학의 길을 최초로 열었다. 초기
의 작품인  목숨 ,  배따라기 ,  감자  등의 단편 소설을 통하여 현대적인 간결한 문체로써 문장의
혁신에 이바지했다. 또한, 우리 나라의 근대 단편 소설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1951년 1.4 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을 간 사이, 홀로 중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작품으로는 단편,  광화사 ,  광염소
나타 , 역사 소설  젊은 그들 ,  대수양 ,  운현궁의 봄 , 평론  조선 근대 소설고 ,  춘원 연구  등이
있다.

  김동환(1901∼?) 시인. 호는 파인. 함경 북도 경성 출신. 서울 중동 학교를 거쳐 일본 도요 대학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문단 활동은 1924년  금성  5월호에 시  적성을 손가락질하며 를 처음 발표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우리 나라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 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
으나, 6.25때 납북 되었다. 작품으로는 시  북청 물장수 ,  승천하는 청춘 ,  산너머 남촌에는 , 시, 소
설, 평론을 함께 묶은  조선 명작 선집 , 수필집  꽃피는 한반도  등이 있다.

  김마리아(1891∼1945) 독립 운동가, 교육자. 황해도 장연 출신. 서울 정신 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히로시마 여학교와 도쿄의 메지로 여자 학원 전문부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에 귀국, 2.8운
동에 가담하여 활약하였고, 대한 애국 부인회를 조직하여 여성 항일 운동을 위해 활동하던 중 일
본군에 붙잡혀 복역 중 병으로 풀려 나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요원으로 활약하였
다. 그 뒤 귀국하여 원산의 마르타 윌슨 신학교에서 신학 강의를 하면서 여생을 기독교 전도 사
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김만중(1637∼1692) 조선 후기의 문신. 소설가. 호는 서포. 1665년에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경서 교정관, 교리 등을 역임하였으나, 당파 싸움으로 여러 번 유배 생활을 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남해에 귀향 가 있을 때 늙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국문 소설  구
운몽 과 인현 왕후를 폐출한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지은 소설  사씨남정기 는 한국 소설 사상
대작으로 꼽히고 있다. 저서로는  서포집 ,  서포만필  등이 있다.

  김말봉(1901∼1962) 현대 여류 소설가. 부산 출신. 1932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망명녀 라는
단편 소설로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어서  고행 ,  편지  등을 발표하였고, 1937년  동
아일보 에  찔레꽃 을 연재함으로써 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장편 소설
 화려한 지옥 ,  푸른 날개 , 단편 소설  이슬에 젖어 ,  바퀴 소리  등이 있다.

  김명국(1600∼?) 조선 시대의 화가. 호는 연담, 취옹. 도화서의 화원으로 지내면서 1651년에는
한시각 등과  가례도감의궤 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의 그림들은 힘이 있고 자유 분방한 필치, 몹
시 거친 필치와 흑백 대비가 심한 묵법, 날카롭게 각이 진 윤곽선 등의 화법으로 그를 우리나라
화가 중 제일 거칠고 호방한 필법을 구사했던 인물로 손꼽고 있다. 그는 절파풍의 산수 인물화
이외에도 대담하고 힘찬 감필로 처리된 선종화도 잘 그렸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  설중귀려도 ,
 심산행려도 ,  기려인물도 ,  달마도  등이 있다.

  김병연(1807∼1863) 조선 시대의 방랑 시인. 호는 난고. 별명은 김립으로 흔히 김삿갓으로 불린
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던 조부 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사실을 모르는 김
병연이 과거에 응시, 그의 조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 급제하였다. 후에 그는 조상을 욕되
게 한 죄인이라 하여 삿갓을 쓰고 방랑 생활을 하며,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는 시구로 세상 인심
을 비웃고 개탄한 내용들의 시를 읊었다. 1978년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
를 세웠고, 유작으로는 후세 사람들이 모아 엮은  김립 시집 이 있다.

  김부식(1075∼1151) 고려 시대의 유학자, 역사가, 정치가. 호는 뇌천. 109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참군사, 직한림에 발탁되었다. 1134년에 묘청이 서경 천도설을 주장하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집
압하여 수충 정난 전국 공신의호를 받았다. 1145년에는 왕명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정사인  삼국
사기  50권을 편찬하였다. 이 밖에도 인종 초년에  예종 실록 을 편찬하였고, 의종 초년에는  인종
실록 을 편찬하였다.

  김생(711∼791) 신라 시대의 서예가. 평생을 서예에 전념하여, 예서, 행서, 초서 모두 입신의 경
지에 이르렀다. 고려 시대 문인들은 그를 해동 제일의 서예가로 평가하였고, 이규보의  동국이상
국집 에서는 신품 제일로 평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백률사 석당기 ,  창림비 ,  화엄사 화엄경 석각
등이 있다.

  김성수(1891∼1955) 교육가, 정치가. 호는 인촌. 전라 북도 고창 출신.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
부를 졸업하고, 내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민족의 교육이 앞서야 된다고 생각하여, 1915
년에 중앙 학교(중앙 중고등 학교)를 인수하였다. 1919년에는 민족의 산업 발전을 위해 경성 방직
주식 회사를 세웠으며, 1951년에 대한 민국 제2대 부통령이 되었으나, 정부의 국회 탄압 사건에
반대하여 스스로 물러났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추서하였다.

  김소운(1907∼1981) 시인, 수필가, 번역 문학가. 본명은 교중. 부산 영도 출신. 1929년에 매일 신
보 학예 부원으로 근무했으며, 아동 교육 기관을 경영하여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1923년  시대
일보 에 시  신조 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에 한국 문학을 번역, 소개하
여 한국 문학의 바른 모습을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수필집  마이동풍첩 ,  목근통
신 ,  희망은 아직 버릴 수 없다 ,  물 한 그릇의 행복 , 동화집  보리알 한 톨  등이 있다.

  김소월(1902∼1934) 시인. 본명은 정식. 평안 북도 구성 출신. 오산 학교 시절 김억의 지도와 영
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920년  창조 지에 시  낭인의 봄 ,  야의 우적 ,  오과의 읍 ,  그리
워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2년  개벽 지에  금잔디 ,  첫치마 ,  엄마야 누나
야 ,  진달래꽃 ,  강촌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산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으며, 민요 시
인으로 등단하여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으로 표현하였다. 1981년 예술
분야에서 대한 민국 최고인 금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김수장(1690∼?) 조선 후기의 가인. 호는 노가재, 십주. 김천택과 더불어 숙종, 영조기를 대표하
는 가인이다. 1755년에 시조집  해동가요 를 편찬하였는데, 1763년에 이를 고쳐  계미본 을 편찬하
였다. 또한, 가단의 지도자로서 제자들에게 작가법, 가창법, 연주법 등을 가르쳤다. 그는 모두 129
수에 이르는 시조 작품을 남겼다.
  김시습(1435∼
1493) 조선 시대의 학자이며 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호는 매월당, 동봉, 1455년 수양 대군이 단
종을 몰아 내고 왕이 되자, 중이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람하며,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1465년부
터 금오산에서 살면서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 를 지었다. 저서로는  매월당집 ,
 십현담요해  등이 있다.

  김안로(1481~1537)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희락당. 1506년 문과에 급제하여 유윤, 이황 등과 함
께 사가독서(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한 일)를 하였으며 대
사간 등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 후, 아들 희가 효혜 공주와 혼인하여 중종의 부마가 되자, 이
를 계기로 권력을 남용하여 허항, 채무택 등과 함께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였고, 문정 황후
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저서로  용천담적기 가 있다.

  김영랑(1902~1950) 시인. 본명은 윤식. 전라 남도 강진 출신. 1917년에 휘문 의숙에 입학, 이 때
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1920년에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 진학했다. 귀국 후  시문
학 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  언덕에 바로 누워 ,  사행소곡칠수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
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80여 편의 시와 번역시 및 수필, 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잘 다듬진
언어로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영랑 시집 ,  영랑 시선 ,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이 있다.

  김옥균(1851~1894) 조선 시대의 정치가, 개화 운동가. 호는 고균 또는 고우. 공주 출신. 일찍이
개화 사상에 눈을 떠 개화당을 조직하는 한편, 1884년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더불어 새 내
각을 조직,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권을 잡았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청나라로 건너가 뜻을 펴려 했으나, 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
였다. 그 뒤,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자 죄가 사면,  복권되었으며, 1910년 규장각 대
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기화근사 ,  치도약론 ,  갑신일록  등이 있다.

  김유신(595~673) 신라의 명장. 김수로왕의 12대손. 15세 때에 화랑이 되어 여러 차례 고구려, 백
제와 싸워 이겼다. 645년 진덕 여왕이 왕위 계승자 없이 죽자,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
년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대군과 연합하여 5만의 정예군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에
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후 당나라 군사를 몰아 내고 대동강 이남의 땅을 회복하여 삼국 통
일을 이루었다. 삼국 통일의 영웅으로서 태대의 높은 지위를 받았다.

  김유정(1908~1937) 소설가. 강원도 춘천 출신. 휘문 고보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 학교 문과를 중
퇴했다. 1935년 단편 소설  소낙비 가  조선 일보 에,  노다지 가  중앙 일보 의 신춘 문예에 각각 당
선되어 문단에 올랐다. 그는 불과 2년 남짓한 작가 생활을 통하여 30여 편의 단편과 1편의 미완
성 장편, 그리고 1편의 번역 소설을 남길 만큼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였으나, 30세의 짧은 나이로
인생을 마쳤다. 토속적인 어휘, 전통적인 유머 등을 사용하여 서민들의 인간상을 잘 그려 냈다.
작품집으로는  동백꽃 ,  김유정 전집  등이 있다.

  김육(1580∼58)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잠곡. 160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대사헌, 우의정을 지
내고,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여 충청도에 시행하여 성공하였다. 또한 수레를 만들고,
400년 동안이나 써 오던  역법  대신에  시헌력 이라는 새 역법을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새 화폐의
주조 및 유통을 건의하는 등 경제 발전에 공이 컸다. 저서로는  인조 실록 ,  유원총보 ,  조천일기 ,
 잠곡필담  등이 있다.

  김윤경(1894∼69) 국어학자. 호는 한결. 경기도 광주 출신. 연희 전문 학교 문과 및 일본 릿쿄
대학 사학부를 졸업했다.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하였다. 광복 후 연희 전문 대
학 교수로 취임한 이래 1955년에는 학문의 업적과 교육가 및 한글 운동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희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7년에는,  고등 나라말본 ,  중등 나라말본 을
펴냈고, 기독교 공로상, 국어 공로상을 받았다. 저서로  조선문자급어학사 ,  용비어천가 강의  등이
있다.

  김윤식(1835∼22) 조선 말의 정치가, 학자. 호는 운양. 서울 출신. 정부의 개항 정책에 따라 이
홍장과 7차에 걸친 회담을 하고, 그 결과 조, 미 통상 수호 조약을 체결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와 함께 일본군을 공격하여 성공함으로써 정변을 마무리 지었다. 1894년
에는 김홍집 내각에 외무 대신으로 등용되어 개혁 정치에 힘썼다. 저서로는  운양집 을 비롯하여
 임갑령고 ,  천진담초 ,  음청사 ,  속음청사  등이 있다.

  김이석(1914∼64) 소설가. 평양 출신. 일찍부터 문학적인 재질을 보여 연희 전문 학교 재학 중
에 단편 소설  환등 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8년 단편 소설  부어 가  동아 일보 에 입선되면서 작
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1956년에 단편집  실비명 으로 제4회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했다. 1964
년 제14회 서울시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 해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는  뻐꾸기 ,  동면 ,  학
춤 ,  아름다운 행렬  등이 있다.

  김인문(629∼4) 신라의 장군, 외교가.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아우이다. 예서를
잘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났으며, 향악을 잘하여 넓은 지식과 훌륭한 기예로 많은 사람들
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김춘추와 김유신 등을 도와 백제, 고구려 정벌에 힘썼고, 여생을 당나라에
서 보내면서 양국 간이 정치적 문제의 해결에 많은 공을 세웠다.

  김장생(1548∼1631)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호는 사계. 서울 출신. 송익필로부터 예학을 배우
고,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조선 예학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그의 제자로는 송시열, 송준길,
조익, 최명길 등이 이름을 떨쳤으며,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 학파를 이룸으로써 조선 성리학계
에 있어서 영남 학파와 쌍벽을 이루었다. 저서로는  경서변의 ,  서소잡록 ,  가례집람  등이 있다.

  김정호(?∼1864) 조선 말의 실학자, 지리학자. 호는 고산자. 불우한 생활 속에서도 오직 지도 제
작과지지 편찬에 온 정성을 다했다. 30여 년 간 전국 각지를 답사하며서 실측하여 1834년  청구선
표도  2책을 만들었고, 이어서  지구도 를 만들었으며, 특히 서양 지도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동양
의 전통적인 도법을 이어받아 집대성한  대동여지도 는 10리마다 눈금을 찍어 거리 측정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산과 산맥, 하천의 이름과 형상, 관청, 병영, 성터, 도로 등을 상세히 기록한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한 지도였다. 이  대동여지도 를 목판에 새겨 흥선 대원군에게 바쳤는데, 그
정밀하고 자세함에 놀라 나라의 기밀을 누설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판각을 압수하여 불태우
고, 김정호를 옥에 가두어 마침내 옥사하였다.

  김정희(1786∼1856) 조선 말의 문신. 서예가. 호는 추사.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 병조 참
판 등을 지냈다. 24세에 청나라에 가서 완원, 옹방강, 조강 등과 사귀며 견문과 학식을 넓히고, 고
증학과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의 학문을 공부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금석학의 연구에 몰두하여,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고 조선에 금석학파를 성립시켰으며,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그림은 시, 서, 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기법으로 난을 잘 그렸으며,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저
서로는  완당집 ,  금석과안록  등이 있고,  묵죽도 ,  묵란도 ,  세한도  등의 그림을 남겼다.

  김종서(1390∼1453) 조선 시대의 충신. 호는 절재. 1405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우정원, 지평
집의, 우부대언 등을 지냈다. 1433년에는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육진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
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452년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어 왕을 보필했
으나, 수양 대군에 의해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김종직(1431∼1492)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 호는 점필재. 1459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 독서하
고, 승문원 박사, 이조 좌랑, 홍문관 제학, 공조 참판, 등을 역임 하였다. 정몽주,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그의 도학 사상은 그의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남효온, 조위 등에 큰 영향을 주
었다. 후일 그가 죽은 뒤, 생전에 지은 그의  조의제문 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문제
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그의 시신이 목이 잘리는 형을 받았고, 나중에 죄가
풀려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청구풍아 ,  유두유록 ,  점필재집  등이 있다.

  김좌진(1889∼1930) 독립 운동가. 호는 백야. 충청 남도 홍성 출신.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대
종교에 입교하고, 무오 독립 선언서에 39명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
정의단을 북로 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노력하였다. 1920년 청산
리 전투에서 나중소, 이범석 등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여 독립 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웠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추서하였다.

  김진섭(1906∼?) 수필가, 독문학자. 호는 청천. 목포 출신. 1927년에 호세이 대학 독문과를 졸업
했다. 일본 유학 시절 손우성, 이하윤, 정인섭 등과  해외 문학 연구회 를 조직하고, 1931년 윤백
남, 홍해성, 유치진,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연극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7년 첫
수필집  인생예찬 에 이어 1948년 제2수필집  생활인의 철학 을 간행하였다.

  김천일(1537∼1593) 조선 시대의 의병장. 호는 건재. 1592년 임진왜란이 고경명, 박광옥 등과 께
의병을 일으켜 강화성을 지켰다. 한편, 전라 병사, 경기 수사, 충청 병사 등의 관군과 합세하여 양
화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1593년 명나라의 원군이 개성으로 진격할 때에 이들의 작
전을 도왔으며, 진주성 싸움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아들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송천집 ,  건재집  등이 있다.

  김천택(?∼?) 조선 영조 때의 시조 작가 및 가객. 호는 남파. 평민 출신으로 창과 시조에 능했
으며, 1727년에 시가집  청구영언 을 편찬하여 처음으로 시조를 정리하였으며, 후대에 가악의 발달
과 가집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창작에도 힘써  해동가요 에 수록된 시조 57수 외에  청구영
언 에 30수가 전해진다.

  김헌창(?∼822) 신라 헌덕왕 때의 반란자. 신라 왕족으로 신라 제37대 선덕왕이 죽은 다음, 왕
위 계승을 하지 못하고 원성왕이 즉위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
을  장안 이라 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한때 신라의 9주 5소경 가운데 4주 3소경을 점령하여 기세
를 올리기도 했으나, 한 달 만에 관군에게 패하여 웅주에서 자살하였다.

  김홍도(1745∼?) 조선 시대의 화가. 호는 단원, 단구. 당대 문인화의 가인 강세황의 지도를 받았
으며, 그의 화풍은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풍경을 바탕으로  단원법 이라 불리는 세련되고 개성
이 강한 독자적 화풍을 담고 있다. 특히, 그의 풍속화는 익살과 풍자를 담은 서민적인 것으로, 조
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삼세여래후불탱화 ,  투견도 ,
 소림명월도 ,  청앵도  등의 작품이 많이 있다.

  김홍집(1842∼1896) 조선 말의 문신, 정치가. 호는 도원 또는 이정학재. 1867년 문과에 급제하
여, 훈련도감, 호조, 공조, 예조 참의를 역임하고,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황준헌의  조선
책략  정관응의  이언 을 가지고 돌아와 개화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 대신이 되었다. 그는 내정 개혁의 목표로  홍범 14조 를
발 표하여 새로운 국가 체계를 세우고 갑오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재정의 궁핍과 일본의 압력을
받아단발령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규탄을 받았다. 1896년 아관파
천으로 친러 정권이 수립되자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그는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
살되었다. 1910년 충헌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이정학재일록 이 있
다.

  김활란(1899∼1970) 교육자. 호는 우월. 세례명은 헬렌. 인천 출신으로 1918년에 이화 대학을 졸
업,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대학 졸업생이 되었다. 그 뒤, 미국의 웨스리언 대학과 보스턴 대학을
졸업하였고, 광복 후에는 이화 여자 대학교 총장에 취임, 정부의 공보처장, 한국 여자 기독교 청
년회 연합회 간부, 대한 적십자사 부총재, 한국 여학사 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63년에는 교육
부문의 대한 민국장을 수상하였고, 필리핀에서 주는 막사이사이상의 공익 부문상을 받았다. 1970
년에는 대한 민국 일등 수교 훈장이 추서되었다.

   나도향(1902∼1927) 소설가. 본명은 경손. 도향은 그의 호이며 필명은 빈. 서울 출신. 경성 의
학 전문 학교를 중퇴하였다. 1922년에 현진건, 홍상용, 이상화,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참여하여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 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낭만주의적
인 작품을 썼으나, 1923년 후반부터 사실주의적인 경향으로 바뀌었다. 작품으로는  벙어리 삼룡
이 ,  물레방아 ,  뽕 ,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 ,  여 이발사 ,  행랑 자식  등이 있다.

  나석주(1892∼1926) 독립 운동가. 황해도 재령 출신. 23세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 학교인
무관 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귀국하여 김덕영, 최호준 등 50명의 동지들과 비밀 항일 결사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 활동, 친일파 숙청 공작을 전개하였다. 1926년 항일 독립 운동 단체인 의열
단에 입단, 우리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일본이 만든 동양 척식 회사와 조선 은행, 조선 식산 은행
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자 자결하였다.

  나운규(1902∼1937) 민족 항일기의 선구적인 영화인. 호는 춘사. 함경 북도 회령 출신.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간됨으로써 일 년여 동안 북간도와 만주 지방을 유랑했다. 1924년 부산에 조
선 키네마 주식 회사가 설립되자, 연구생이 되었다. 조선 키네마가 제작한  운영전 에 단역인 가마
꾼으로 첫 출연, 연기력을 인정 받아 1926년 조선 키네마 프로덕션의  농중조 에 출연하여 찬사를
받음으로써 일약 명배우가 되었다. 그는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 독립 운동을 배경으로 한 저
항적인 작품  아리랑 과  풍운아 를 직접 쓰고, 감독, 주연을 맡아 영화계의 귀재로 불리게 되었다.
1929년 문예 영화  벙어리 삼룡이 를 발표하였고, 1936년에는  아리랑  제3편을 제작하면서 녹음
장치에 성공하여 무성 영화에서 발성 영화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
한 예술의 주제는 식민 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
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약자에 대한 동정을 담고 있으며, 악덕, 난륜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
를 담고 있다. 그는 민족 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 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영화의 정신
과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불세출의 영화 작가로 평가된다.

  나철(1863∼1916) 대종교의 초대 교주. 독립 운동가.본명은 인영호는 홍암.전라남도 승주 출
신.29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승문원을 역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유신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을사 조약 체결 후 을사 오적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하여 귀양살이
를 하였다. 고종의 특사로 귀양에서 풀려난 후 서울 재동에서  단군 대황조 신위 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포하고, 단군의 개국과 입도를 구분하여 기원전 2333년에 124를 가
산하여 단군교의 원년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단군교의 이름을 빙자한 친일파들의 행각으로 인
해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남궁억(1863∼1939) 독립운동가.교육자.언론인. 호는 한서.서울 출신. 1889년 궁내부별군직을 거
쳐, 1893년에는 칠곡 군수를 지냈다. 1896년 서재필,이상재등과 함께 독립 협회를 창립하여 국민
을 계몽하고 독립 협회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려다가 17명의 지도
자와 함께 붙잡혔다. 출옥 후, 배화 학당의 교사 및 상동 청년 학원의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 사상
고취, 애국 가사 보급, 한글 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으며, 나라꽃인 무궁화의 보급 운동을 전국
에 걸쳐 전개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동사락 과  조산 이야기  등의 저서
가 있다.

  남이(1441∼1468) 조선시대의 무신.시호는 충무. 17세에 무과에 장원 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하였다. 이시애의 반란을 토발한 공으로 적개 공신 1 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건주의 여진을 정벌하여 이등 군공을 받았으며, 28세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예종이 즉
위하던 1468년에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함으로써 처형당하였다. 그 뒤 1818년에 관작이
추복되었다.

  남효은(1454∼1492) 조선 시대의 문인,생육신의 한 사람. 호는 추강,행우. 1478년 세조가 물가로
옮겼던 단종의 생모 현덕 왕후의 무덤을 다시 소릉으로 옮길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
자 세상을 유랑 생활을 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떼에는 소릉 복위를 상소하였다는 죄목으로 그
의 시체는 목이 잘리는 형을 당하였으나, 1513년에 소릉 복의가실현되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 ,  추강냉화 ,  사우명행록 ,  귀신론 등이 있다.

  내물 마립간(?∼402:재위 356~402) 신라 제 17대 왕. 성은 김씨. 마립간은 수석장 또는 상감에
해당되는 왕호로 내물왕때 처음 사용하였다. 381년 위두를 전진에 보내 중국과 교류하였고, 중국
문물의 수입에 힘썼다. 또한, 국가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왕권이 보다 강화되어 고대 왕국으로서의
체제가 두루 갖추어졌다.

  노사신(1427∼1498) 조산 시대의 문신. 호는 보진재. 1453년 문과에 급제하여 곧 집현전 박사에
선임되었다. 그 뒤 우부승지를 거쳐, 1463년에는 도승지가 되어국가의 기무를 관장하였다. 호조
판서에 재직할 때는  경국대전 의 편찬을 주관하였고, 성종 때는 여러 사서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1476년에는 서거정,이파 등과 함께  삼국사절요 를 찬진하고,1481년에는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
을 편찬하였으며, 서거정,강희맹,성임,양성지와 함께  동국여지승람 을 편찬하는 등 많은 학문적 업
적을 남겼다.

  노천명(1911∼1957) 여류 시인. 초명은 기선. 황해도 장연 출신. 이화 여전 재학 때부터 시를 쓰
기 시작하여 1935년  시원  동인으로 시  내 청춘의 배는 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초기
에는 고독과 향수, 소박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정감의 세계를 표현했으며, 후기에는 반공
애국시, 종교적인 참회를 다룬 시를 많이 썼다. 그의 시는 전통적인 여류시의맥락을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당대 여류시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 올렸다. 저서로는 수필집  산딸기 ,  나의 생활 백서 ,
시집  산호림 ,  노천명시집 ,  사슴의 노래 등이 있다. (친일파였음)

  눌지 마립간(?∼458:재위 417~458) 신라의 제 19대 왕. 내물왕의 아들. 401년 고구려의 세력을
등에 업고 정변을 일으켜 실성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고구려와는 정상적인 외교 관
계를 유지하는 한편, 종래 적대 관계에 있던 백제와도 동맹을 체결하였다. 왕실 내부의 분쟁을 막
기 위해 왕위 계승의 부자 상속제를 확립시켰으며, 저수지인 시제를 축조하여 농업 생산력의 증
대를 도모하였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우차의 사용법을 가르쳐서 화물 유통을 쉽게 하였다. 재위
기간 중 승려 묵호자가 들어와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단군(?∼?) 우리 민족의 시초. 단군, 왕검 천왕이라고도 한다. 천제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 조선을 개국하여 1500년동안 나라를 다스린
후 산신이 되었다.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중국의  위서 와 우리나라의  삼국유
사 를 들 수 있다.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이며, 건국이념인 홍
익인간은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의 기본 정신이 되고 있다.

  단종(1441∼1457 : 재위 1452∼1455) 조선 제 6대 왕. 이름은 홍위.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죽고
어린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이 조정의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 및 여러
종친과 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하는 수 없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말았다.
1456년에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나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자, 그의 작은 아
버지인 금성대군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처형 당하였다.단종도 노산군에서 평민으로
격하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 숙종 때 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698년 복위되었고, 묘호를 단
종이라 했다.

  담징(579∼631) 고구려의 승려, 화가.610년에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채색과 종이,먹,연자방
아 등의 제작 방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호류사에 석가,아미타,미륵,약사 등으로 구
성된 사불정토도인 금당의 벽화를 그렸는데 이 벽화는 경주의 석굴암, 중국의 윈강 석불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이름나 있었으나, 1949년 화재를 당하여 소실되었고, 현재는 흉내내어 그
린 그림 일부만이 남아 있다.

  대구 화상(?∼?) 신라의 승려. 888년 왕명에 따라, 각간 위홍과 함께 신라의 노래를 모은 향가
집  삼대목 을 펴냈으나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다. 향가의 대가로  현금도곡 ,  대도곡  등을 작곡
하기도 하였다.

  대조영(?∼710:재위 699~719) 발해의 건국자. 시호는 고왕. 668년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의 대
장군 이해고의 군사를 천문령에서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모아, 699년 지린성 동모산
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 이라 하고, 왕위에 올랐다. 쑹화 강 이남 지방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되찾아  해동성국 의 기틀을 다지고. 713년에는 국호를  발해 라 고쳤다.

  도선(827∼898) 신라 말기의 승려. 풍수설의 대가. 성은 김씨. 15세에 출가하여 울유산 화엄산에
서 승려가 된 그는 풍수 지리설과 음양 오행설에 독창적인 학설을 세워  도선비기  라는 책을 지
었는데, 이 책은 고려의 정치·사회·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침(?∼661) 백제의 승려.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의 왕족이던 복신
과 함께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모시고, 주류성(지금의 한산)을 근거지로하여 백
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승려인 도침은 스스로 영군 장군, 복신은 스스로 상잠 장군이라 칭하
고, 백제의 유민들을 모아 임존성(지금의 예산)에 모여 한때 수도 사비성을 포위할 정도로 기세를
떨쳤으나, 백제 부흥군을 지휘해 오던 복신과 도침 사이에 분쟁이 생겨 도침은 복신에게 피살되
었다.

  동천왕(209∼248: 재위 227∼248) 고구려 제11대 왕. 이름은 우위거 또는 위궁이라 한다. 초기에
는 공손씨와의 대립이 계속되었으나, 238년에 위나라 군대를 도와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그
러나 위나라와는 국경이 접하게 됨에 따라 위의 서안평을 선제 공격 했지만, 두 차례에 걸친 위
의 침입으로 수도 환도성을 함락당하여 북옥저로 피신하였으며, 다시 평양성으로 일시 천도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밀우·우유 등의 지략으로 국토를 되찾았다.

  득오(?∼?) 신라의 문신. 일명 득오곡. 진평왕 말기에 화랑 죽지랑의 낭도로 있을 때에 아찬 익
선에 의하여 부산성 창직으로 차출되어 나갔다가, 강제로 그의 밭에서 부역하게 되었다. 이에 죽
지랑이 낭도를 이끌고 익선을 찾아가 득오에게 휴가를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
소식이 조정의 화주의 귀에 들어가자, 익선은 처벌을 받았고 득오는 부역에서 면제되었다. 뒷날
죽지랑을 사모하여  모죽지랑가 를 지었다.

  마의 태자(?∼?)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 경순왕은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왕건의 세력
에 눌려 더 이상 국가를 보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군신 회의를 열어 고려에 항복하고자 하였
다. 이에 마의 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가벼이 남에게 넘겨 줄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더 이상 죽일 수 없다하여 고려에 항복하였다. 마의 태자
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풀뿌리와 나무 껍질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
다.  마의 태자  라고 하는 명칭은 그기 베옷을 입고 일생을 보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마해송(1905∼1966) 아동 문학가·수필가. 본명은 상규. 호는 해송. 1921년 일본 대학 예술과를
졸업하자, 곧 일본의 종합 교양지  문예 춘추  의 초대 편집장을 거쳐 1930년에는  모던 일본  지
를 발행하다가 귀국, 송도 학술 연구회 위원장, 국방부 한국 문화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아
동 문화 운동에도 크게 관심을 가져, 1957년에는  대한 민국 어린이 헌장 을 기초하여 발표하였고,
1964년에는  떡배 단배  로 제1회 한국 문학상을 각각 수상하였으며, 같은 해에  고마우신 선생님
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는  홍길동 .  아름다운 새벽  등이 있고, 동화집으로는  해송 동화집  .  토
끼와 원숭이  가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편편상  .  속편편상  .  씩씩한 사람들  등이 있다.

  맹사성(1360∼1438) 고려말·조선 초의 문신. 호는 고불. 온양 출신. 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우헌납 등을 역임하고, 조선이 건국된 뒤 예조의랑·이조참의·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11년 예조는 관습도감 제조인 그를 선왕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음악
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태종 실록  편찬을 감독했고,  팔도 지리지 를 편찬했으며, 조정의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는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한다.

  명성 황후(1851∼1895) 조선 고종의 비. 성은 민. 흔히 민비로 불린다. 1866년에 흥선 대원군의
부인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가 되어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치열한 정치
싸움을 벌여, 마침내 대원군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빼앗겼으나, 곧 청국 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이 때부터 민비는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면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1895년 일본 군대와 정치인
들이 왕궁을 습격한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의 손에 살해되고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
쳤다. 2년 뒤 대한제국으로 국체가 바뀌자, 왕비 민씨는 명성 황후로 추책되었다.

  묘청(?∼1135) 고려 인종 때의 승려. 서경 출신. 정지상,백수한 등의 추천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
하였다. 1128년 새로이 등장한 금나라의 압력이 점차 거세지는 등 민심이 동요하고 있던 때에 김
부식 등 개경 출신의 사대주 의자들을 누르기 위해 정지상·백수한·김안 등의 지지를 얻어 서경
천도론을 처음 제기하여 천도를 위한 준비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문신들
에 의한 탄핵이 끊이지 않았고, 풍수도참에 기반을 둔 천도론이 점차 명분을 잃게 되자, 1135년
서경에서 조광,유참등과 함께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광의 배
신으로 부하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무령왕 (462∼523:재위 501∼523) 백제 제25대 왕. 이름은 사마 또는 융. 동성왕의 둘째 아들,
혹은 동성왕의 동생이라 한다. 501년에는 고구려 수곡성을 습격하였고, 503년에는 쳐들어온 말갈
을 격퇴 하였다. 512년에는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자 친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한편,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강
화하여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513년과 516년에 오경 박사와 고안무를 각기 왜국
에 보내어 문화 계발을 돕게 하였고 민생의 안정에도 노력하였다.

  무왕( 600∼641) 백제의 제30대 왕. 이름은 장 또는 무강. 재위 기간 중 계속되는 신라의 침공
에 서쪽 변방을 공략하여 국내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고, 왕권의 안정 및 왕권의 강화를 위해
630년에는 사비궁을 중수하였고, 백제의 중심적인 사원으로서 왕흥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또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동방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익산에 창건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사
치와 유흥을 일삼아 백제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삼국유사  에 의하면 미모로 이름난 신
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 공주를 사모하여 지은  서동요 를 금성(지금의 경주)에  퍼뜨려 선화
공주를 왕비로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묵호자 (?∼?) 고구려의 승려,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하여 들어갔으나 실패하자, 일선군에 숨
어 살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 후, 성국 공주의 병을 고쳐 준 공으로 왕은 흥륜사를 지어 주고 불
법을 펴게 하였다. 그 뒤 영흥사를 창건하고 살다가 왕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해치려 하므로, 일
선군 모례의 집 굴 속에 들어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문무왕(?∼681:재위 661∼681) 신라 제 30대 왕. 성은 김씨. 이름은 법민.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661년에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미처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왕위를 계승하여 668년에는 당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삼국 전체를 자국의 영토를 삼으려는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 내고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
하였다.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경상 북도 경주시 감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에 안장하였다.

  문익점(1329∼1398) 고려말의 문신, 학자. 호는 삼우당. 13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 부사록,
순유박사 등을 지냈다. 1363년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에서 실을 뽑아 무명을 만든
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종자를 붓대 속에 숨겨 가지고 와서 시험 재배를 하였다. 3년간의 재배
끝에 성공하여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종자를 전국적으로 보급하였으며, 목화 섬유를 이용한 의류
제조 등에 크게 공헌하였다.

  문일평(1888∼1939) 사학자, 언론인. 호는 호암. 평안 북도 의주 출신. 1905년 일본 메이지 학원
에서 이광수와 같이 공부하였고,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등과 박달 학원을 세워 후진 교육에 힘
썼다. 신문사의 기자 및 편집 고문 등으로 일하면서 언론을 통한 역사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으
며, 국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조선 사화 . 호암 전집 . 한국의 문화  등을 남겼다.

  미천왕 (?∼331:재위 300∼331) 고구려 제 15대 왕. 호양왕이라고도 함. 성은 고씨. 이름은 을불
또는 우불이다. 293년에 아버지가 형인 봉상왕에 의하여 반역 혐의로 죽음을 당하자 피신하여 고
용살이, 소금 장수 등으로 전전하다가, 300년 봉상왕이 폐위당하자, 국상 창조리 등에 의하여 왕
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적극적인 대외 팽창책을 추진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을 오랜 투쟁 끝에 각각 정벌하였고, 317년에는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서방과 남방으
로의 급속한 팽창을 도모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민영익(1860∼1914) 조선 말기의 문신, 개화 사상가, 예술인. 호는 운미.죽미.원정. 1881년에 별
기군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를 지냈다. 1883년에 전권대신으로서 최초로 서양 문물을 시찰하고,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 개화당을 압박하다가 갑신정변 때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
의 강제 체결로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상하이로 망명하였으며,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행서에 능
했으며, 많은 묵화 중 묵죽도, 석죽도가 전하며, 필세와 화품이 뛰어났다. 중국 문인화의 대가이기
도 하다.

  민영환(1861∼1905) 조선 말기의 문신. 호는 계정. 1877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 참의, 호조
판서, 한성 부윤, 주미 전권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6년에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서 유럽 6개
국의 특명 전권 대사로 임명되어 선진국들을 방문함으로써, 구미 제국의 발전된 독립 협회를 적
극 후원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3통의 유서를 남기
고 자결하였다. 한 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구하는 내용이었고, 또 다른 한 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려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 대신  이라는 최고 관직이 추종되었다.
유고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해천추범 . 사초속초 . 천일책 등이 있다.

  민종식(1861∼1917) 한말의 의병장. 호는 퇴초자.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운동을 폈다. 왜병과 싸워 크게 이김으로써 을사 의병 중에 경상 북도의 신
돌석, 정환직, 정용기 진영과 함께 3대 전투 의병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홍주성에서 크게 패하여,
자신은 몸을 피하여 다시 의병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다가 일진 회원의 밀고로 잡혔다. 그는 체포
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왕실 친족이라는 신분 덕으로 풀려 났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
이 추서되었다.

  박규수(1807∼1877) 조선 말기의 문신, 개화 사상가. 호는 환재 또는 환재거사. 일찍이 할아버지
인 박지원의  연안집 을 통하여 실학적 학픙에 눈을 떴다. 1866년 평양 감사로서 대동강에 불법
침입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의 격침을 직접 지휘하였다. 국제 사정에 밝아 문호 개방을
주장하였으며, 김옥균, 박영호, 김윤식, 유길준 등은 그 문하에서 배출된 개화 운동의 선구적 인물
들로서, 박규수는 곧 북학파와 개화파를 하나로 뭉치게 한 중심 인물이다.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
으며, 저서로는  환재집 ,  환재수계 등이 있다.

  박목월 (1916∼1978) 시인. 본명은 영종. 경상 북도 경주 출신. 대구 계성 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문장 지에 정지용에 의해  길처럼 ,  그것은 연륜이다  등으로 추천을 받았고, 이어서  산 그
늘 ,  가을 으스름 ,  연륜  등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 조지훈, 박두진 등과 3인
시집  청록집 을 발행하여 청록파라 불리웠고, 그의 초기 시들은 향토적 서정에 민요적 율조가 가
미된 짤막한 서정시들로 독특한 전통적 시풍을 이루고 있다. 시의 소재는 가족이나 생활 주변에
서 택하여 담담하고 소박하게 쓰고 있다. 민요조를 개성 있게 수용하여 재창조한 대시인으로 평
가 받고 있다. 저서에 시집   청록집 ,  산도화  등과 수필집  구름의 서정 ,  행복의 얼굴  등이 있
다.

  박문수 (1691∼1756)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기은. 17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고, 병
조 정랑에 올랐다가 노론의 집권으로 사직되었다. 1727년에 사서로 다시 등용되었고, 영남 지방의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군정과 세정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설화로서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했던 행적이 많
이 전해지고 있다. 저서에  탁지정례 ,  국혼정례  등이 있다.

  박세당 (1629∼1703) 조선 시대의 문신, 실학자. 호는 잠수, 서계초수. 1660년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 좌랑, 병조 정랑, 함경 북도 병마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육경의 글은 그 생각이 깊고
근본이 깊고도 멀어 그 본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하였으므로,
이를 바로잡는 뜻에서  사변록 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이 주자학을 비방하였다하여 유배되
었으나, 학문과 행적에 대하여 억울한 것임이 인정되어 1722년에 문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의 저서로는  서계 선생집 ,  신주도덕경 , 편저로는  색경 이 전한다.

  박연 (1378∼1458) 조선 세종 때의 음악 이론가. 호는 난계. 1405년에 생원, 1411년에 진사에 등
과했으며, 그 뒤 집현전 교리, 사헌부 지평, 악학 별좌,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세종을 도
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으며, 특히 율관 제작을 통한 편경의 제작은 조선 초기
의 음악 완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순 임금 시대의 유명한 음률가인 기에 비교되기도 하는 박
연은 대금을 잘 불었으며,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 나라의 3대 악성으로 일컬
어진다. 시호는 문헌이다.

  박영효 (1861∼1939) 조선 말기의 정치가. 호는 춘고, 현현거사. 1872년에 철종의 딸 영혜 공주
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북학파의 학맥을 이은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
균, 서광범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2년 수신사가 되어 일본으로 가는 도중 배 안에서 택극
사괘의 국기를 제정,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다.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삼일
천하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제 2차 김홍집 내각의 내부 대신을 지내
면서 조선의 부국 강병을 도모하는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국권 침탈 이후 일제가 회유 정
책의 일환으로 수여한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3.1 운동 후 동아 일보 초대 사장, 중추원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 부의장 재직 중 죽었다. 저서로  사화기략 이 있다.

  박위 (?∼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1388년 요동 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을 몰아 내고 경상도 도순문사로 있으면서 전함 100여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쳐서 적의 배 300여척을 불태워 크게 이겼다. 뒤에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
한 공으로 지문하부사가 되고 충의군에 봉해졌으며 공신이 되었다. 조선초에 양광도 절도사가 되
어 왜구를 물리쳐 큰 공을 세웠다.

  박은식 (1859∼1925) 독립 운동가, 역사학자, 언론인, 호는 겸곡, 백암. 황해도 황주 출신. 1898
년 독립 협회의 회원으로 만민 공동회에서 문교부 간부로 활동하였다. 1910년까지  대한 매일 신
보 의 주필을 지내면서 국권 회복, 애국 사상, 대동 사상 등 애국 계몽 운동을 폈다. 1919년 3.1운
동 때는 대한 국민 노인 동맹단을 조직하여 그 취지서를 쓰고 지도자로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
으며, 1925년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제 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
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 책임제로 바꾸고 대통령을 사임하였다.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동포들에
게 독립 쟁취의 최후 목적 달성을 위하여 반드시 통일, 단결하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기고, 그의
장엄한 애국적 일생을 마쳤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안중
근전 ,  한국 통사 ,  조선반도사 ,  조선사 ,  이순신전 ,  한국 독립 운동 지혈사 ,  대동민족사 ,  단조
등이 있다.

  박인량 (?∼1096) 고려 시대의 무신, 호는 소화. 시호는 문열, 문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문장이 우아하고 아름다워 중국에 보내는 많은 외교 문서를 지었다. 그가 저술
한 천독, 표, 장, 시 등이 김근의 시문과 함께  소화집  이라는 이름으로 송에서 간행되어 중국에
까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저술로는  고금록  10권과  수이전 이 있다.

  박인로(1561∼1642) 조선 시대의 문신, 임진왜란 때는 무인으로도 활약하였다.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 1599년 무과에 등과하여 거제도 조라포에서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
가 세워지기도 했다. 문인으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40세 이후이며, 성현의 경전과 주석 연
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있다. 작품으
로는 가사  누항사 ,  사제곡 ,  노계가  등이 있고, 시조  노계집  등이 전한다.

  박정양 (1841∼1904) 조선 말기는 대신, 호는 죽천. 1866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참판을 지냈
고, 1881년 신사 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 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개화 운동에 힘썼다.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 공동회에 참석하여 시정의 개혁을 약속하였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좌
절되었다. 조선 마기의 온건 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 사상을 가지고 이상재 등 개화파 인사들
의 뒤를 돌보았다. 편저로는  죽천고 ,  해상일기초 ,  일본 내무성급 농상무성 시찰서계  ,  일본 내
무성 시찰기  등이 있다.

  박정희 (1917∼1979) 군인, 정치가. 제 5,6,7,8,9대 대통령. 호는 중수. 경상 북도 선산에서 태어
나, 대구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문경 소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만주 군관 학교와 일본 육
사를 나왔다. 광복 후 포병 사령관, 육군 본부 작전 참모 부장을 거쳐, 1961년 제 2군 부사령관으
로 재직 중, 5.16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이 되었다. 1963년 대
통령 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박정희 정부의 통지권자가 되었다. 이미 1962년부터 추진하던 제 1
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경제 성장은 급속도로 이루어 졌으며, 국가 안보면에서 빈틈없는
태세를 구축했고,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남북 대화에 힘쓰기도 했다. 1979년 유신 독재 체제에
항거하는  부마 사태 가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중앙 정보 부장 김재
규가 쏜 총탄에 맞고 죽었다. 저서로  지도자의 길  ,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  국가와 혁명과 나 ,
 민족의 저력  등이 있다.

  박제가 (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초정, 정유, 위향도인. 19세를 전후하여 박지원
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덕무, 유득공 등 북학파들과 교유하였다. 1778년에는 청나라에 가서 신
학문을 배우고 돌아온 뒤  북학의 를 저술, 내편에서는 생활 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 사
회 제도의 모순점과 그 개혁 방안을 다루었다. 그림에도 뛰어나 문인화풍의 산수, 인물화와 생동
감이 넘치는 꿩 그림과 물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 유작으로  대련 글씨 ,  시고 ,  목우도 ,  의암관수
도 ,  어락도 ,  야치도  등이 있고, 저서로는  정유집 ,  명농초고  등이 있다.

  박제상 (?∼?) 신라의 충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김제상이라고도 한다. 신라는 백
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왜국에 미사흔을, 고구려에 복호를 보내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왜국과 고구려는 왕자들을 인질로 붙잡아 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내물왕의 큰 아들
눌지왕은 즉위한 뒤 두 동생을 구출하기 위하여 박제상을 적절한 인물로 천거하고 그를 보냈다.
그는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로 들어가 지혜롭고 조리 있는 말로 장수왕을 설득시켜 복
호를 구해 오고, 일본에 가서는 일본왕에게 거짓으로 항복한 체하고 신임을 얻어 미사흔을 신라
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자신은 붙잡혔다. 왜왕은 박제상의 충절에 감동해 그를 신하로 만
들려고 했으나, 박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수하가 될 수 없다고하
여 끝가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받아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알
려지자, 눌지왕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으로 책봉
하였으며,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박제상을 기다리다 망부
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박종화 (1901∼1981) 시인, 소설가, 비평가, 호는 월탄, 서울 출신. 1920년 휘문 의숙을 졸업하였
다. 1921년 국내 최초의 시 동인지  장미촌  창간호에  오뇌의 청춘 과  우윳빛 거리 의 시를 발표
하면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2년대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
히며, 문단 시평이나 문담 회고담 등을 발표하였다. 1955년 제 1회 예술원상을 수상하였고, 1966
년에는 제 1회 5.16민족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금삼의 피 ,  임진왜란 ,  세종 대왕 ,
수필집  한가닥 세월을 열고  등이 있다.

  박지원 (1737∼1805) 조선 시대의 실학자, 호는 연암. 1780년 청나라의 북경에 있는 열하를 여
행하고 돌아와 이 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열하일기 를 썼다. 여기에는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
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
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뒤떨어진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한 그의 노력을 집대성하고 있다. 그
뒤 한성부 판관, 안의 현감 등을 지냈으며, 1800년 양양 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910
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작품으로는  허생전 ,  민옹전 ,  광문자전 ,  양반전 ,  역학대도전  등이
있다.

  박팽년 (1417∼1456)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취금헌, 사육신의 한 사람. 1434년 문과에 급제하
여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그는 경술과 문장, 필법이 뛰어나 남북조 시대의 종유와 왕희지에 버
금간다 하였다. 1455년 수양 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이 왕위를 빼앗자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 복
위를 꾀하였으나,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
응부 등 사육신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 왔으며, 마침내 1691년에 이르러 관작이
추복되었다.

  박혁거세 (기원전 69∼서기 4: 재위 기원전 57∼서기 4) 신라의 시조, 불구내라고도 하며 왕호
는 거서간이다.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따르면 그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커다랗
다 해서 성을  박  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왕위에 오른 뒤 국호를 서라벌, 서울을 금성이라 정하
고, 그 곳에 궁성을 쌓아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기원전 53년에 왕비를 맞아들여 함께 마을을 순
시하면서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는 등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박덕룡 (1561∼1598)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낙천, 1588년(선조21)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
에 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원균의 휘하에 들어가서 크게 활약하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낙안 군수였던 그는 부사 이영남, 만호 안여종과 함께 절이도에서
복병을 하였다가 협공하여 적을 크게 이겼다. 이듬해 통제사 이순신의 선봉이 되어 노량 해전에
서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형조 참의에 추증되고, 선무 원종 공신 2 등에 녹훈되었다.

  방정환 (1899∼1931) 아동 문학가, 호는 소파. 선린 중학, 보성 전문을 거쳐, 일본 도요 대학에
서 아동 예술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1921년  천도교 소년회 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 날 을 제정하였다. 그는 민족주의를 바탕
으로 한 최초의 아동 문학 운동가로서, 또 사회 운동가로서 어린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1597
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소파상 이 제정되었고, 1978년 금관 문화 훈장, 1980년 건국 포장
이 수여되었다. 그가 생전에 발간한 책은  사랑의 선물  있고, 사후에 발간된 책은  소파 전집 ,  칠
칠단의 비밀 ,  글벗집 ,  소파 아동 문학 전집  등이 있다.

  배중손 (?∼1271) 고려 원종 때의 장군, 서반의 장군인 동시에 삼별초의 지휘관으로 항쟁이 계
속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몽고를 방문하고 돌아온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 삼별초를
폐지하여 하자, 이에 삼별초는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새 정부를
수립하고 강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삼별초를 공략했으나 번번이 실패하
였다. 그러나 몽고의 홍다구가 김방경, 흔도의 연합군과 합세하여 격전 끝에 진도를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하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남은 군사는
진도 함락 이후에도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2년간이나 항전을 계속하였다.

  배현경 (?∼936) 고려 태조 때의 무신, 군졸의 신분으로 담력이 있어 관위가 대곤에까지 이르렀
다. 궁예 때부터 활약했던 인물이며, 특히 마군 장군으로 있을 때 신숭겸, 홍유, 복지겸과 함께 혁
명을 일으켜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즉위후 일등 공신에 녹훈되었고, 태조
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994년 태사로 추증되어 태조묘에 배향되었다. 그 뒤
마전의 숭의전, 평산의 태사사, 나주의 초동사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이다.

  백결선생(?∼?) 신라 시대의 음악가로서 거문고의 명수.  삼국사기 에 의하면 그는 이름도, 성도
알 수 없으며, 몹시 가난하여 옷을 100군데나 기운 누더기 옷을 이고 다녀 그를 백결 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영계기(사슴 가죽 옷에 새끼띠를 매고 늘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
르고 다녔다는 중국 춘추 시대의 인물)을 흠모한 나머지 스스로도 거문고를 타며 인생의 희노애
락을 달래어 나갔다 한다. 어느 해 세모에 이웃에서 떡방아 소리가 들리는데, 선생의 집안은 가난
하여 이것마저 여의치 않아 그의 아내가 이 같은 가난을 한탄하자, 이내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
리를 연주하여 그의 아내를 위로해 주었다 한다. 이 때의 음악이 후세에 대악, 즉 방아악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백이정(1247∼1323) 고려 충선왕 때의 유학자. 호는 이재. 원나라의 연경에 10년간 머물면서 성
리학을 연구하고, 귀국할 때 정주의 성리학 서적과 주자의  가례 를 가지고 돌아왔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 온 사람은 안향이나,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체계를 파악하여 크
게 발전을 이루었고, 도학과 예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법흥왕(?∼540:재위 514∼540) 신라 제23대 왕. 성은 김씨. 이름은 원종. 지증왕 때의 개혁 정치
를 이어받아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로서의 통치 체제를 완비하였다. 520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 공복을 제정하였다.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고, 532년에는 본가야를
합병함으로써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국력이 신장된 신라는 536년
에 독자적 연호인 건원을 사용하였다.

  변영로(1898∼1961) 시인·영문학자. 서울 출신. 호는 수주. 1918년  청춘 에 영시  코스모스 를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다. 1920년에  폐허 , 1921년에는  장미촌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당시에는
천재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조선의 마음 이 평문관에서 간행되었
으나, 이 시화집은 내용이 볼온하다하여 발행과 동시에 일본 총독부에 의하여 압수되어 폐기 처
분된 바 있다. 그의 시들은 가락이 부드럽고 정서적이며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가 깊게
깔려 있다. 1948년에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저서로는 수필집  명정 사십년 · 수주 시문선
영문 시집으로는  진달래 동산  등이 있다.

  보우1(1301∼1382) 고려 말의 고승. 성은 홍씨. 호는 태고.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의 승려가 되
었다. 1346년에 원나라의 연경에 가서 창공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의 시조가 되었다. 1348년 공
민왕이 광명사에 원융부를 짓자 왕사가 되었으나, 신돈의 횡포로 불법을 해치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자 왕사의 인장을 반납하였다. 이에 왕이 뉘우치고 예를 갖추자 그를 국사로 봉하였다. 현재 대
한 불교 조계종의 종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  2권과  태고유음  6권이 있다.

  보우2(1509∼1565) 조선 시대의 고승. 호는 허응당 또는 나암. 1548년 명종의 어머니인 문종 대
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다. 1551년에는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켜 불교의 교세를
부흥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1552년에는 승려 과거 시험인 승과 제도를 부활시켜, 승
려들의 자질을 향상시켰으나, 1565년 문정 대비가 죽자, 유생들의 배척과 불교 탄압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죽었다. 저서로는  허응당집  3권과  나암잡저  1권,  권념요록  등이 있다.

  보장왕(?∼682:재위642∼668) 고구려 제28대 왕. 이름은 장 또는 보장. 영류왕의 아우인 태양왕
의 아들이다. 642년 연개소문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연개소문의 그늘에 가려 왕의로서의 실권
을 가지지 못했다. 665년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지배층 내의 분열과 동요가 일어나자, 당나라는 신
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668년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는 멸망하고, 보
장왕은 당나라로 끌려 가서 요동 도독 조선 군왕에 봉해졌고,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요동에서 고
구려 부흥 운동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여 공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여풍(?∼?)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풍왕이라고도 한다. 660년 백제가 나·당 연
합군에게 멸망하자, 복신과 도침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신라와 당나라를 상대로 싸워 한때 나,
당 연합군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복신과 도침 사이에 내분이 생겨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그 여세를 몰아 부여풍까지 죽여 정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부여풍은 이를 미리 눈치채고 복신을
살해한 뒤 실권을 잡았으나, 백제 부흥군과 일본의 구원군이 나,당 연합군에게 전멸당하자 고구려
로 망명하였다. 그 후,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 군사에게 붙잡혀 당의 오령 이남으로 유배되었다.

  사다함(?∼?) 신라 진흥왕 때의 화랑. 화랑으로 추대되어 1천여 명의 낭도를 거느렸으며, 562년
에는 대가야를 정벌할 때 15세의 어린 나이로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대가야를 멸
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포로 300명을 노비로 하사받았으나 모두 놓아 주었다. 그
는 어려서부터 무관랑과 우정을 맺어 한날 같이 죽기를 약속하였으나, 무관랑이 병사하자 7일간
을 통곡하다가 17세의 나이로 자결하였다.

  서거정(1420∼1488) 조선 시대의 문신·학자. 호는 사가정 혹은 정정정.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
문·지리·의약·복서·성명·풍수에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나고 특히 시에 능하였다. 조
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 시대까지 문·병을 장악하였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
과 사상은 15세기의 학문의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으며, 그가 지은  동문선 은 우리 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 나라 역대 한문학의 가장 빼어난 것을 모은 책이다. 그 밖의 저서로는
 오행총괄 · 사가정집 · 동인시화 · 필원잡기  등이 있다.

  서경덕(1489∼1546) 조선 시대의 학자. 호는 화담. 1531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
하고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하며, 박연,황진이와 함께 송도
삼절로 불리운다. 서경덕의 학문과 사상은 이황과 이이에 의하여 그 독창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한국 기철학의 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1575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85년 신도비가 세워
졌다. 저서로는  화담집 에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의 글을 수록하였다.

  서광범(1859∼1897) 조선 말기의 정치가. 호는 위산. 일찍이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의 영향
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박영효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4년 개화당의 일원으로 갑신정
변에 가담하여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법무 대신에 임용되어
갑오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사법 제도의 근대화에 노력을 기울여 재판소 구성법,법
관 양성소 규정 등을 제정, 공포하고 참형 대신 교수형 제도를 채택하였다. 뒤에 주미 공사 등을
지냈다.

  서유구(1764∼184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호는 풍석. 179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이조판
서,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다. 특히, 농학에 큰 업적을 남긴  임원경제지 는 여러 국내의
농업책 및 중국의 문헌 등 800여 종을 참초하여 완성하였다. 1834년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 가난
에 허덕이는 백성을 위하여 구황 식물인 고구마의 실제적인 보급에 도움이 되도록 여러 농서를
참고하여  종저보 를 펴 재배법을 널리 알렸고,  경계책  등 농정에 대한 경론 및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의 개혁을 주장했다. 저술로는  난호어목지 · 경솔지 · 옹치지 · 누판고  등이 있다.

  서재필(1864∼1951) 개화기의 정치가,독립 운동가. 호는 송재. 전라 남도 보성 출신. 1884년 김
옥균 등과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가, 병조 참판 겸 정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889년 칼럼비아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이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었다. 1895년에 귀국하여 국민의 계몽 및 국민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 및
국내 온건파의 도움으로, 1896년 독립 협회를 조직하고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 신
문 을 창간, 순 한글로 간행되어 폐간될 때까지 우리 나라의 개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897년
에는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고,  협성회 라는 학생 토론회를 조직하여
청년 학생들을 교육,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48년 대한 민국 수립 때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이승만에게 패하여,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고,
1994년 국립묘지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서희(942∼998) 고려 시대의 정치가,외교가. 960년 문과에 급제하여 내의시랑 등을 거쳐 병관어
사,태보내사령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982년에 십수년간 중단되었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 외
교를 다시 트고,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이를 물리치고,
그 결과 994년부터 3년간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내쫓고 장흥진,귀화진,곽주,귀주,흥화진 등에 강
동 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영토를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선조(1552∼1608:재위1567∼1608) 조선 제14대 왕. 초명은 균,뒤에 공으로 개명하였다. 1567년에
왕위에 올라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다. 훈구 세력들을 물리치고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
였으며, 이황과 이이 등의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어진 정치를 펴기에 힘썼다. 조식,성운 등 유
능한 인재들로 하여금  유선록 , 근사록 , 심경, 소학  등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관계되는 서적과  삼
강행실 을 짓도록 하고, 이것을 모두 간행하여 널리 읽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선조대에 들어와 정
국을 주도하던 사람들이 김효원과 심의경을 각각 중심 인물로 하는 당쟁이 시작되어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국정이 어려워 뚜렷한 국방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기도 했으나, 곳곳에서 의병,승병들이 일어나 활약하였으며, 바
다에서는 이순신 등 우리 수군이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였고, 권율의 행주 대첩으로 적의 사기가
꺾여 남으로 물러나자 왕은 환도하였다. 다음 해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강화시키고,
조총 쏘는 방법과 탄환 만드는 기술 등을 관군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의 전후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설총(?∼?)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 호는 빙월당. 원효의 아들.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
함으로써 한문을 국어화하고 유학 내지 한학의 연구를 쉽고 빨리 발전시키는 데 공이 컸다. 또한,
향찰(이두)을 집대성한 향찰의 권위자이다. 오늘날 설총이 남긴 글로는 우화적 단편 신문인  화왕
계 가  삼국사기  설총열전에 실려 있다. 이  화왕계 는 신문왕이 충고한 일화로서  풍왕서 라는 이
름으로  동문선 에도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숭앙받았으며, 고려 현종 때 홍유후라는 시
호를 추증받았다. 신라 십현의 한 사람이다.

  성삼문(1418∼1456) 조선 시대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호는 매죽헌. 충청 남도 홍성 출신.
1438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 학사,수찬직,집현전의 벼슬에 올랐다. 명나라에 사거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해 귀국하여 1446년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455
년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르자, 박팽년,이개,유응부,유성원,하위지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조선 시대의 대
표적인 충신으로,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학문이 높았으며, 뒷날 남효온이  추강집 의 육신전에
의로운 일을 위하여 혼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개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성왕(?∼554:재위523∼554) 백제 제26대 왕. 무령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이다. 동성왕,무령왕
의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하여 538년에 사비성(부여)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양나
라와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켰으며, 의학 박사,역박사 등의 전
문가와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 문물을 전해 주는 구실을 하였다. 그리
고 신라와 동맹 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유역 탈환 작업에 힘을 기울여,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성왕은 직접 신라를 공격, 초기에는 우세를 보였다가 신라
복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사함으로써 대패하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
에 맺어졌던 나,제 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성종1(960∼997:재위981∼997) 고려 제6대 왕. 이름은 치. 최승로의 정책 건의와 보좌를 받고 새
로운 국가 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정치,교육의 지도 이념으로서 유교적 이념을 채택, 유학을
숭상하고 억불 정책을 위하여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하였다.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정책을 펴 고려 왕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993년에는 거란족이 침입하자 서희의 외교적 성
과로 거란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강동 6주를 되찾아 영토를 넓히게 하였다. 997년에 병이 위독해
지자 조카인 개령군 송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내천왕사에 옮겨 살았다.

  성종2(1457∼1494:재위1469∼1494) 조선 제9대 왕. 13세에 왕위에 올라 20세에 비로소 친히 정
사를 보았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 년 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교지,조례,관례 등
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하여 오던  경국대전 을 여러 차례 개정한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서 1492년에는  대전속록 을 완성하여 통치의 근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였다. 경
사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는 한편,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또한, 국방에도 힘을 기울여 1479년에 압록강을 건너 건주 야인의 본거지를 정벌하였
고, 1491년에 두만강을 건너 야인의 소굴을 소탕했다. 이렇게하여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 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켰다.

  성충(?∼656) 백제 의자왕 때의 충신. 정충이라고도 한다. 656년 의자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알고 왕에게 충고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옥중에서 일생을 마쳤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렸는데,  머지
않아 반드시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며, 만일 적군이 육지로 쳐들어오면 탄현을 넘지 못하게하
고 수군은 백강구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이다. 라
고 하였다. 그런데 백제 조정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 결국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의
해 멸망하였다. 왕은 그 때서야 성충의 충언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현재 부여에서는 그를
흥수,계백과 함께 삼충사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성현(1439∼1504) 조선 시대의 학자. 호는 용재,부휴자,허백당. 1466년에 발영시에 급제하여 박
사로 등용된 뒤, 예문관 수찬,승문원 교검,형조 참판,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음률에 뛰어
나 장악원 제조를 겸하면서 유자광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 을 편찬하였고,
1504년에  용재총화 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뒤에 억울함이 밝혀져 청백리에 올랐다. 그 밖의 저서로는  허백당집 , 부휴자담론  등이 있다.

  세조(1417∼1468:재위1455∼1468) 조선 제7대 왕. 이름은 유.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
우이다. 처음에 진양 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에 수양 대군으로 구쳐 봉해졌다. 1452년에는 관습
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 보았다. 이 해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
하자, 그는 측근인 권람,한명회 등과 함께 왕위를 빼앗을 음모를 진행시켜, 이듬해에 계유정난을
단행하여 폭력으로써 왕위를 빼앗고, 군국 대권을 한 손에 쥐고 나라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1456년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이 사
건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학문 연구의 전당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정치
문제의 대화 토론장인 경연을 정폐시켜 왕권을 확립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하였다. 농업,양
잠을 장려하고 상평창 제도를 마련했으며, 두 차례에 걸친 여진 정벌을 성공시키는 등 조선 초기
의 왕권 확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세종(1397∼1450:재위1418∼1450) 조선 제4대 왕. 이름은 도.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세종 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 및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로 집현전을 통
하여 많은 인재가 배양되었고, 많은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1443년에는 우리 민족의 문자인 훈
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만들고, 해시계,물시계,혼천의 등 각종 천문,과학
기구를 만들었다. 농사법의 개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농업 서적을 통하여 농업 기술
의 계몽과 권장을 하였으며,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 을 편찬, 반포하였다. 의약 분야로는  향악채집
월령 , 향약집성방 , 의방유취  등의 의약 서적이 편찬되었다. 또한,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세종은 박연으로 하여금 중국의 각종 고전을 참고하여 아악기 제작과 아악보를 새로 만들게
하였으며, 친히  정대업 , 보태평 , 발상 , 봉래의  등 대곡을 작곡하였다. 법전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
여  속육전  6책과  등록  1책, 신찬경제속육전  6권 등을 완성하게 하였다. 시호는 장헌, 능호는 영
릉이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소수림왕(?∼384:재위371∼384) 고구려 제17대 왕. 이름은 구부. 제16대 왕 고국원왕의 아들로,
고국원왕이 평양성까지 진격해 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72
년 전진에서 외교 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를, 374년에는 아도를 각각 맞아들여 초문사와 이불
란사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372년에는 유
교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 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373년에는 국가 통치 기본법인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377년에는 백제의 3만 대군을 물리쳤다.

  소자왕(?∼500:재위479∼500) 신라 제21대 왕. 성은 김씨. 487년에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국내
의 기간 도로인 관도를 수리하였으며, 490년에는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와 화폐를 유
통시켰다. 493년에는 백제의 동성왕의 결혼 요청을 받아들여 결혼 동맹을 맺었다. 그 뒤, 고구려
의 남하에 대비하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동맹 관계는 더욱 두터워져, 494년 고구려의 백제 공격
때에는 신라가 구원병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소현 세자(1612∼1645) 인조의 맏아들. 이름은 왕. 1625년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636년 청나
라의 침략으로 일어난 병자호란 때에 인조와 함께 남한 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동생 봉림 대군과 함께 인질로 청국으로 끌려가 조선,청국 양국
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청의 왕족 및 장군
들과 친교를 맺고 양국간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644년 청군을 따라 북경으로 들
어가, 그 곳의 독일인 신부 아담 샬과의 친교로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지구의,천주상 등을 가지
고 귀국했으나,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과 물건은 인조의 누여움을 기중시켜, 뜻하지 않은 부왕과
의 갈등으로 인해 병석에 눕게 되었고,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병사하였다.

  손병희(1862∼1922) 독립 운동가,천도교 지도자,교육 사업가. 호는 소소거사. 22세에 평등 사상
을 내세운 동학에 입도하였다. 1892년에는 최시형 등과 함께 교조(최제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
고, 1897년에는 천도교 제3대 교주가 된 뒤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동학의 참신한 정신을
되살리며 본래의 종교 운동으로 되돌아갔다. 1919년 일본 동경의 2.8독립선언에 찬동하였고, 그
해 3.1 만세 운동에서 천도교측의 대표로 참가하여 검거된 후 복역 중, 1년 8개월 만에 병보석으
로 풀려났다. 논저로는  수수명실록 , 도결 , 명리전 , 천도태원설 , 진심불염 , 권도문  등이 있다. 1962
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손진태(1900∼?) 민속학자. 호는 남창. 1927년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1932년 송석하,정
인섭과 더불어 조선 민속학회를 창설하고, 1933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인  조선 민속
을 창간하였다. 민속학계에 남긴 그의 가장 큰 공로는 민속학을 독자적 과학으로 인식하고 이를
학문으로 정립시킨 점이다. 6.25 때 서울대 문리과 대학장으로 재직 중 납북되었다. 저서에는  조
선 신가 유편 , 조선 민족 설화의 연구 , 조선 민족 문화의 연구  등이 있다.

  솔거(?∼?) 신라 진흥왕 때의 화가. 농민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에 뛰어났으며, 그의 대표
작인 황룡사의  노송도 는 노송을 실감나게 잘 그려 새들이 착각하고 날아들다가 벽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밖에  분황사의  관음보살도 와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 , 단군 초상 , 진흥왕 대렵도 팔폭 을
그렸고,  관음 보살 삼상 을 조각했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황룡사  노송도 는 소나무 그림이 생
동감 넘치는 사실적인 채색화로 당시에는 사실적인 묘사 중심의 회화가 발달하였음을 입증해 주
는 사례이다.

  송상현(1551∼1592)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천곡. 157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춘
추관 기사관,경성 판관,예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1년 통정 대부에 오르고 동래 부사가 된
후, 임진왜란을 맞아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을 남문밖에 목패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
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 고 하자, 부사인 그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
는 어렵다. 라고 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조복
을 입고 바른 자세로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왜장 다이라 등이 그의 충절에 탄복하여 동
문밖에 장사지내 주었다 한다. 후에 이조 판서,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송순(1493∼1582)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면앙정 또는 기촌. 151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
사헌,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50년 대사헌,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부정한 주장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갔다. 이듬해에 풀려나면서 면앙정을 증축하여 많은 인사들이 출
입하며 글을 지었는데, 특히 그는  면앙정삼언가 , 면앙정제영  등 수많은 한시와 국문 시가인  면
앙정가 를 지어 조선 시가 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송시열(1607∼1689) 조선 시대의 문신,학자. 호는 우암 또는 우재.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
격하였으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벼슬길로 나아가 왕에게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기축봉사 는 효종의 북벌 의지와 뜻이 합해져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
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계획을 밀고함으로써 조정에
서 물러나, 재야에 은거하면서 선왕의 신임과 사림의 두터운 믿음으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나,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우며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
으로 평판이 높았다. 그에 의하여 재정비된 정통 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 작용하였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 주자어류소분 , 경례의의 , 심경석의 , 주문초선  등이 있다.

  송진우(1890∼1945) 정치가. 호는 고하. 전라 남도 담양 출신. 1915년 메이지 법과 대학을 졸업
하고, 독립 운동을 하다 3.1 운동이 일어난 며칠 뒤 구속되었다. 1년 옥고를 치르고 1922년에는
 동아 일보 를 통하여 물산 장려 운동을 벌인데 이어 민립 대학을 제창, 추진하였으며, 재외 동포
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내 각지를 순회하며, 위문금품의 모집 운동을 추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
자, 한국 민주당의 결성으로 수석 총무에 추대되고, 신탁 통치 문제로 미군정 장관과 회담을 통하
여 반탁 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미군정과의 충돌을 피하고 국민 운동으로 반탁을 관철하
여야 한다는 신중론을 피력하고 자택으로 돌아온 뒤, 다음 날 한현우 등의 습격으로 살해되었다.
1963년 건국 공로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숙종(1661∼1720 : 재위167∼1720) 조선 제 19대 왕. 이름은 순. 숙종 때에는 조선 중기 이래 계
속되어 온 당쟁이 절정에 이르면서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 온 사회 체제 전반의 정
비 작업을 끝내는 등 상당한 공적을 남겼다.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시켰으며,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상업 활동을 지원 하였으며, 1712년에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
시기에 편찬된 서적으로는  선원계보 , 대면집례 , 열조수교 , 북관지 , 대전속록 , 신전자초방  등이 간
행되었다.

  순도(?∼?) 고구려에 들어와 우리 나라 최초로 불교를 전한 전진의 승려. 372년 전진의 왕 부견
이 순도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하였고, 이에 소수림왕은 부견에게 사신을 보내 감사
의 뜻을 표하고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그는 덕망이 높고 너그러운 인품을 지녔
으며, 고구려에 왔을 때 모든 군신들이 예를 갖추어 정중하게 성문이라는 곳으로 영접하였고, 성
의를 다하여 신심을 표하였다고 한다.

  순종(1874∼1926 : 재위 1907∼1910) 조선 왕조 마지막 제 27대 왕. 이름은 척. 호는 정헌. 고종
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 1897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일제
의 강요와 친일파들의 매국 행위로 왕위를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대한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1907년 한.일 신협약을 맺은 후 내정 간섭권을 빼앗은 일본은 친일 매국노 이
완용,송병준,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한 매국 단체 일진회를 앞세워,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한.일
합병 조약을 성립시켜 대한 제국을 멸망시켰고, 한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국가 최고의 권력자
로서의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한 제국이 일제의 무력 앞에 최후를 고한 뒤,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긴 후 예전의 왕으로 예우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며 나라 잃은 한을 달래었다. 1926년에 서거하자 6월에 국장을 치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
동에 있는 홍유릉에 안장되었다. 순종의 인산례를 기하여 6.10 독립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
되었다.

  신검(?∼? : 재위 935∼936) 후백제의 제 2대 왕. 후백제의 시조 견훤은 왕자를 10명이나 두었
는데, 그중에서 넷째 아들 금강을 특별히 사랑하여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맏아들 신검은 두 아우 양검,용검 등과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아우 금강을 죽이고 즉
위하였다. 한편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은 사람을 보내어 고려 태조를 만나기를 청하자, 고려 태조
는 그를 데려와 양주를 주어 식읍(지난날, 나라에서 공신에게 내리고 그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
쓰게 한 고을)을 삼게 하였다. 고려 태조는 군사를 이끌고 후백제로 진격, 후백제의 신검은 대군
을 이끌고 대진하였으나, 패배하여 왕위에 오른지 1년 반 만에 멸망하였다.

  신경준(1712∼1781) 조선 시대의 학자. 호는 여암. 1754년 향시에 합격하여 정언,장령,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문자학,서운학,지리학 등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 문헌들을 남겼다. 특
히  운해훈민정음 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이 문자론을 전개한 학술적인 업적이었다. 그밖
에  일본증운 , 언서음해 , 거제책 , 수차도설 , 부앙도 , 장자변해 , 사연고  등이 있다.

  신규식(1879∼1922) 독립 운동가,대종교인. 호는 예관,여서,일민. 충북 청원 출신. 1895년관 한어
학교에 입학, 2년 뒤 육군 무관 학교에 진학하여 졸업 후 참위,부위에 올랐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거사를 계획한 뒤 실폐하여 음독 자살을 기도, 이 때 오른쪽 눈의 신경이 마
비되어 흘겨 보는 상이 되므로 스스로 예관이라 하였다. 그 뒤, 대한 자강회,대한 협회 등 애국
계몽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1919년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법무 총장을 거쳐 국무 총리 대리겸 외
무 총장도 겸하였다. 1962년 건군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한국혼 과 시집  아목루
등이 있다.

  신돈(?∼1371) 고려 말기의 승려. 호는 청한거사. 1358년 왕의 측근인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
을 처음 만나게 되어, 이 대부터 나라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공민왕 자신이 독실하게 불교를 신봉
하였고, 신돈 또한 총명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믿고 권력을 마음대
로 휘둘렀으며, 1367년에는  도선비기 에 의해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으나 왕과 신하들의
반대로 계획이 뜻대로 안 되었다. 그 후 공민왕의 신임을 잃자, 그는 반란을 잃으키다 실패, 살해
당하였다.

  신돌석 (1878∼1908)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명은 태호.  태백산의 호랑이 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리어었다. 19세의 젊은 나이로 울진군 평해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삼척, 강릉, 양양, 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는 한말의병 투쟁에 있어서 평민 출신의 의병 대장으로는 가장 먼
저 의병을 일으켜 민중적 기반 위에 막강한 의병 세력으로 성장, 교묘한 게릴라 전법으로 장기간
전투를 계속하였는데, 이는 그의 의병 부대가 군율이 엄격하고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 이르
는 곳마다 민중들의 환영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따. 그러나 일본군이 건 현상금을 탐
낸 그의 부하인 김상렬에게 암살당하였다. 1963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대통령을 추서하였
다.

  신문왕 (?∼692:재위 681∼692) 신라 제 31대 왕. 성은 김씨. 문무왕의 맏아들. 682년 인재의 교
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국학을 설립하고,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685년에는 봉성사와 망덕사를 준
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한 뒤 증대한 중앙 관서의 업무와 확대된 영역의 지
방 통치를 위한 제도 정비가 이루어졌으며, 689년에는 관리의 녹봉으로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
고 해마다 조세를 차등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와 같이 중앙과 지
방에 걸친 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하여 전제 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를 완비하였다.

  신사임당 (1504∼1551) 조선 시대의 여류 문인, 서화가. 사임당은 당호이며, 시임당, 임사재라고
도 한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것으로, 태임을 퇴공
여성상으로 꼽았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시, 글씨, 그림에 능하였다. 그림이 매우 섬세하고 아
름답다는 평을 듣는데, 풀벌레, 포도, 화죽, 어죽, 매화, 난초, 산수 등이 주된 화제였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다. 그는 뛰어난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현모로서 아들 이
이는 백 대의 스승으로, 아들 우와 큰딸 매창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운 훌륭한 어
머니였다. 또한, 어진 아내로서 우리 나라 여성의 모범이 되고 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  초충도 ,
 노안도 ,  연로도  등이 있다.

  신숙주 (1417∼1475) 조선 시대의 문신, 학자. 호는 희현당 또는 보한재. 1493년 문과에 급제하
여 집현전 부수찬을 지내면서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웠다. 탁월한 능력으로 세종-성종 간
의 6대왕을 섬기면서,   세조 실록 ,  예종 실록 ,  해동제국기  등의 편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송설체에 뛰어났다. 뒤에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을 때, 이
에 가담했다하여 후세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신숭겸(?∼927) 고려 태조 때의 무장. 초명은 능산. 몸집이 장대하고 무술이 뛰어났으며, 918년
에 배현경.홍유.복지겸 등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개하려 고려를 건국,
이 때의 공으로 개국 일등 공신이 되었다. 927년 견휜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 태조는 친히 군사
5000을 거느리고 견휜과 싸웠으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당했다. 이 때 신숭겸은 대장이 되어 태조를
위기에서 구하고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시호를 장절이라고 하고, 지묘사
를 창건하여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에 태사가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 절공으로 태묘의
태조 사당에 배향되었다.

  신위 (1769∼1847) 조선 후기의 문신.화가.서예가. 호는 자하.경수당. 1799년 문과에 급제, 1812
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 중국의 학문과 문학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당대 대학자 옹방강과 깊
은 교유 관계를 맺었다. 글씨. 그림.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강세황에게서
묵죽(먹으로 그린 대나무 그림)을 배웠던 그는 남종화의 꽃을 피웠으며, 이정. 유덕장과 함께 조
선 시대 3대 묵죽 화가로 손꼽힌다. 저서로는  경수당전고 와 김택영이 600여 수를 정선한  자하시
집 이 간행되어 전하여지고 있다.

  신윤복 (1758∼?) 조선 후기의 화가. 호는 혜원. 주로 부녀자를 중심으로 한 풍속화를 잘 그렸
으며, 당시의 살림.의복과 장신구 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
하여 주고 있다.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하였던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
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는  미인도 . 단오도 . 연당의 여인 .  무무도 . 산궁수진 . 선유도
등이 있다.

  신익희 (1894∼1956) 정치가. 독립 운동가. 호는 해공. 경기도 광주 출신. 한성 관립 외국어 학
교와 이론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중동 학교에서 교펀을 잡았다. 1919년 3.1
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상하이로 떠나 26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 상하이에 있는 동안 임시 정부
의 초대 대의원. 내무총장. 법부 총장. 문교 부장. 외무 부장 들을 두루 맡았다. 광복이 된 뒤 귀
국하여 국민 대학 학장과 자유 신문사 사장, 국회의 장직을 맡았다. 1956년 야당의 대통력 후보로
출마,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 마비로 죽었다. 그에게는 추모표로서 185
만여 표가 던져졌으며,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신채호 (1880∼1936) 조선 말기의 사학자. 언론인. 독립 운동가. 호는 단재. 충남 대전 출신. 18세
때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들어가. 26세 때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
고 국사 연구에 노력하여,  조선상고사 .  조선 상고 문화사 . 조선사 연구초  등 그의 역사 연구의
주저들을 집필하였다. 또한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  을지문덕전 .  동국거걸 최도통전  등 영웅
사관을 일정하게 보여 주는 저서들을 집필하여, 한말의 위기를 구해 줄 영웅의 출현을 대망했다.
그는 한말의 애국 계몽 운동과 더불어 일제하 국권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그러한 운동 못지않
게 한국사 연구를 통하여 민족 운동에 앞장 섰다.

  심온 (?∼1418)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 자는 중옥.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 왕조 창업에 참여하여 간관의 직부를 맡아 보
았다. 1408년 그의 딸이 충녕군의 비가 되면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벼슬도 높아졌다. 1414년
변정도감 제조.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에 그의 동생
정이 병조 판서 박습과 같이 상왕인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심의겸 (1535∼1587)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손암. 간암. 황재. 1555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
이조 참의. 대사헌 들을 지냈다. 그는 구세력을 대표하는 서인으로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과 대
립해 동.서 당쟁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러나 인물됨은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하였으며. 외척으로
있으면서도 권세를 함부로 부리지 않아.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세습으로 청양군에 피봉되었
다.

  심훈 (1901∼1936) 소설가. 시인. 본명은 대섭. 호는 해풍. 서울 출신. 경성 제일 고보 재학시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위안장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6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 소설  탈춤 을  동아 일보 에 연재하기도 했다. 1935년 장편  상
록수 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넌 기념 장편 소설 특별 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행동적이고 저항
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 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 정신으로
담겨져 있다. 특히, 농민 계몽 문학에서 본격적인 농민 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
서 의의를 지닌다.

  아비지(?∼?) 백제의 장인. 이름은 아비이며, 지는 이름 뒤에 붙은 미칭으로 신라의 이름 표기
법에 의한 것이다. 시란 선덕 여왕은 황룡하에 목조 9층탑을 건립하기로 하고, 백제에 건탑 기술
자를 요청하여 아비지가 발탁되었다. 처음 찰주를 세우던 날, 꿈 속에서 아비지는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놓았다. 그러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어둡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문당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것을 본 아비지는 백제
의 운명이 다하였음을 알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아직기 (?∼?) 백제의 학자. 아지길사라고도 한다(길사는 귀인 또는 대인을 의미함). 왕명으로
좋은 말 두 필을 가지고 왜나라에 가서 왜왕에게 선물하고 말 기르는 일과 승마술을 전하였으며,
경서에 조예가 깊어 왜나라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귀국하면서 백제의 박사 왕인을 왜왕에
게 추천하여,백제의 문화와 학술이 일본에 전수되어 일본 고대 문화의 기초를 이룩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안견 (?∼?) 조선 시대의 화가. 호는 현동자 또는 주경. 신숙주의  보한재집 애 의하면 그는 본
성이 총명하고 정직하였으며, 안평 대군을 가까이 섬기면서 안평 대군이 지니고 있던 고화들을
보고 배움으로써 자신의 화풍을 이룩하는 토대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화풍은 지금 일본의 덴리
대학 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 나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대표
적 작품인  사시팔경도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는 산수화에 가장 뛰어났으나, 그 밖에도 초
상, 화훼, 매죽, 노안, 누각,말, 의장도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그의 화퐁은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까지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회화사에서는 안견과 그를 추종한 많은 화가들을 합쳐서 안
견파라고 지칭하는데, 이들의 영향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 수묵 산수화 발전에도 적지 않은 도움
을 주었다.


  안명근 (?∼?) 독립 운동가. 황해도 신천 출신. 안중근의 사촌 동생. 어려서부터 안중근의 감화
를 박도 항일 독립 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포살 사건이 있은
뒤에, 이완용 등을 총살하고 북간도로 갔다. 그 곳에서 양병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할 계
획을 세워 배경진. 박만준. 한순직과 자금 모집을 추진하던 중, 배신자의 밀고로 평양에서 붙잡혔
다. 뒤이어 군자금을 보관해 두었던 배경진과 박만준. 한순직. 원행섭 등이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된 이른바 안명근 사건, 즉 안악 사건이 일어났다. 재판 결과 안명근은 종신형, 김구를 비롯
한 7명은 15년 형을 받았다. 그는 10년간 복역 후 출옥,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계속하다가
길림(지린)성의 의란현 팔호리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 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안수길 (1911∼1977) 소설가. 함경 남도 함흥 출신. 일본 와세다 대학 영어과에서 수학하고 귀
국, 1935년 단편  적십자 병원장  과 콩트  붉은 목도리 가   조선 문단 지에 당선된 것을 계기로 작
품 활동을 시작하여, 장편 20여편, 단.중편 60여 편을 남겼다. 그의 작품 세계는 조국의 현대사와
국토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나라 잃은 사람들의 한을 그린 것과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 주류를 이룬다. 작품으로는 단편  새벽 .  망명 시인 .  라자 머자니크  등과 장편  제2의 청춘 .
화환 등 다수가 있다.

  안용복 (?∼?) 조선 숙종 때의 민간 외교가. 일찍이 동래 수군에 들어가 부산의 왜관에 자주 출
입하여 일본말을 잘 하였다. 1693년 동래 어민과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고기를 잡기 위
하여 침입한 일본 어민을 힐책하다가 부하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다. 이 때 그는 울릉도
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문서를 가지고 오는 도중 대마도주에게 그 문서는 빼앗겼다. 1969년
안용복은 어부들과 울릉도에 출어하여 마침 어로 중인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송도까지 추격하여
우리의 영토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 침범 사실을 문책하였다. 또, 일본 호키 주에 가서 태수에게
영토를 침범한 사실을 항의, 태수의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의 허락없이 국제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었으나, 남수만의 간곡한 만류로 귀양을 보
냈다. 이듬해인 1967년에 대마도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도를 조선 땅으로 확인한다
는 막부의 통지를 보냈으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그의 활약으로 철종 시대까지는 일본
과 울릉도에 대한 분쟁은 없었다. 한어부로서 영토를 보전하고 지키는 나라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안익태 (1906∼1965) 지휘자. 작곡가. 평양 숭실 학교 재학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
여 퇴학 당한 뒤, 일본에 건너가 구니다치 음악 학교를 나와, 이어 미국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첼
로 주자로 입단하여 동양인 최조의 주자가 되었다. 1934년 유럽으로 가서 지휘 및 작곡을 공부하
였으며, 1936년에  애국가 를 작곡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지휘자로 활약하였으며,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런던, 남미. 등의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였다.
특히,1936년에 작곡한  애국가 를 주제로 한  한국 환상곡  등을 자작, 지휘하였으며, 많은 국제음
악제를 주도 지휘하였다. 작품으로  강천성악 .  한국 환상곡 , 첼로곡  한 송이 흰 백합화  등을 남
겼고, 작품은 후기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안재홍 (1891∼1965) 정치가, 사학자, 독립 운동가. 호는 민세. 경기도 평택 출신,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1915년에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 만세 시위를 지휘하는 한편, 비밀 결사인 대
한 민국 청년 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하이 임시 정부의 연통부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
잡  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0년 동안 언론인 생활을 하였으며, 8.15 광복 이후 한국 독립당 중
앙 위원,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정부 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 2대 국회 위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에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 .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  한민족의 기본 노선  등이 있다.

  안정복(1712∼1792)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순암, 한산병은, 우이자. 제천 출신. 학문은 실제
사회에 이바지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에 목표를 두고, 학문이 실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구
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 정립을 꾀하기 위해  순암 선생 문집 ,  하학지남 ,  열조통기 ,  임관정
요 ,  계갑일록 ,  가례집해  등의 책들을 저술하였으며, 특히 당시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고 역
사적 현실을 실증적으로 새로 정립, 확립하기 위하여  동사강목 과  열조통기 를 편술하였다.

  안중근(1879∼1910) 항일 독립 투사. 황해도 해주 출신. 어릴 때의 이름은 응칠이다. 1907년 국
채 보상 기성회 관서 지부장이 되어 항일 운동을 행동화하기 시작, 이 해에 한·일 신협약이 체
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한 뒤 노령으로 갔다. 이 곳에서 이범윤을 만나 독립 운동의 방법을 논의하
였다. 1908년에는 특파 독립 대장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고, 1909년 3월 12명의 동지가 모여 손가
락을 끊어 맹세하고 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그 해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
빈 역에서 쏘아 죽이고 체포되어, 이듬해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한편, 글씨에도 뛰어나 그가
남긴 많은 유묵이 있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추서하였다.

  안창호(1878∼1938) 독립 운동가, 교육자. 호는 도산. 평안 남도 강서 출신. 1896년 미국인 선교
사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 학당에 입학하여, 이 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서구 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과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
에는 고향에 돌아와 근대 학교인 점진 학교를 설립하여, 점진적으로 대성하는 인물을 기른다는
정신을 목표로 하였다.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라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 매일 신보 를 기관지로하여 민중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8년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웠다. 1912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서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3·1 운동 이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내무 총장 겸
국무 총리 대리직을 맡아 연통제를 수립하고, 각 지역 독립 운동가들의 상하이 소집 등을 실행하
였으며,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홍구) 공원 폭탄 투척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서울
로 송환, 옥살이를 하다가 가출옥하여 숨어 살았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
께 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병보석으로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훈장 중장을 추서하였다.

  안평 대군(1418∼1453)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 서예가. 이름은 용. 호는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
헌. 함경도에 육진이 신설되자, 1438년 야인을 토벌하고 인사 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를 장악하였
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고, 수양 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자, 안
평 대군은 이의 회복을 위하여 힘썼으나, 1453년 계유정난으로 강화도로 귀양 보내졌다가 교동으
로 옮겨져 사사되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이라 창하였으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다. 그는 당대의 서예가로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를 따랐
으나,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기풍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 영향으로 조선 전기에 크
게 유행하였다.

  안향(1243∼1306) 고려 시대의 명신, 학자. 호는 회헌.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 직한림
원을 역임하였다. 그 뒤, 원나라에 여러 차례 왕래하여 그 곳의 학풍 및 교육 기관을 두루 살피고
직접 주자학을 가지고 와 국내 보급에 힘썼다. 섬학전을 마련하여 박사를 두고 그 출납을 관장하
게 하였으며, 이는 오늘날의 육영 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
할을 가져왔다. 1543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그를 모시기 위하여 경상 북도 영주에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양만춘(?∼?) 고구려의 명장. 645년 당나라 태종이 대군을 동원, 고구려에 침공하여 안시성을
포위했을 때, 당시 안시성 성주로 있던 그는 당나라와의 치열한 전투 끝에 당나라 군대를 철수하
게 하였다. 이 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를 하니,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기와 충성을 격려하
였다. 그 후,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하여 끝까지 저항한 11성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
을 생각할 때, 그의 생존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 운동으로 계승되
었음을 알려 준다.

  양주동(1903∼1977) 시인, 국문학자, 영문학자. 호는 무애.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광복 후 동국 대학교 교수 및 연세대 교수로 부임하였다. 시인 및 문학 이론가로서 문단에서의
활약이 화려했으나, 향가 해독을 몰입하면서부터는 주고 고시가의 해석에 전념하는 국학자로 전
환하였다. 1923년에  금성 의 동인으로 등장하여 민족주의적 성격의 시를 주로 썼다. 우리 나라 사
람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을 하였으며, 1947년에 출판되어 나온  여요전주
는  고가연구 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고려 가요에 대한 해석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62년 문화 훈장 대통령장, 1970년에는 대한 민국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번역서에
 영시 백선 ,  세계 기문선 이 있고, 수필집에  문주 반생기 ,  지성의 광장  등이 있다.

  어윤중(1848∼1896) 개화기의 정치가. 호는 일재. 충청 북도 보은 출신. 1869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헌납, 교리, 지평, 군수, 전라도 암행 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신사 유람단으로 선발되어
재정, 경제 부문을 담당하여 일본을 시찰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내각이 수립되자, 탁지부 대신
이 되어 잡세 혁파 및 조세 제도의 개혁으로 농민층의 부담을 크게 덜어 주어 국민들로부터 상당
한 지지와 환영을 받았으나, 1896년 아관 파천으로 인하여 갑오개혁 내각이 붕괴되자, 김홍집과
함께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하던 중 묘지의 문제로 원한을 품은 향반배가 자기의 머슴을 동원하여
살해하였다.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동래어사서계 ,  수문록 ,  서정기 ,  간
독요초 ,  종정연표  등이 있다.

  연개소문(?∼666) 고구려 말기의 재상, 장군. 대인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승하였다. 뒤에
천리 장성을 쌓는 최고 감독자가 되었으며, 그의 세럭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여러 대신들과 영
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챈 그는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대신들과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웠다.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
를 감행하였다. 645년 당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오자 이를 물리쳤으며, 그 뒤에도 네 차례
나 그들의 침입을 막아 내었다. 그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의 도사 8명과 노자의  도덕경 을
들여 오기도 하였다.

  염상섭(1897∼1963) 소설가. 호는 제월 또는 횡보.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 소, 중학교를 거쳐 일
본 게이오 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오사카에서 자신이 쓴  조선 독립 선언문  과 격문을
나누어 주고 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귀구,  동아 일보  창간과 더불어 정치부 기
자가 되었다. 이후 문예 전문지  폐허 의 동인 활동을 계기로 습작기를 청산하고, 출세작  표본실
의 청개구리 를 발표하면서 한국 근대 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만주, 신경에 살면서
 만서 일보  편집국장, 회사 홍보 담당관 노릇을 하면서 절필하였고,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경
향 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6·25 중에는 해군 소령으로 입대하여 반공 전선에
나아가 휴전이 되는 해까지 정훈일을 보았다.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남겨 서울 특별시 문화상, 3
. 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 등을 받았다. 그의 문학의 특징은 식민지 사회를 투철히 인식하면서
당대 사회의 진실을 파헤쳤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사실적 문체인 내간체를 계승, 발전시켜 자
신의 문학의 기본으로 삼았고, 서구 근대 물질 문명을 점진적으로 수용하면서 보수적인 자세를
보였다. 작품으로는  금반지 ,  고독 ,  두 파산 ,  삼팔선 ,  미망인  등이 있다.

  영조(1694∼1776:재위 1724∼1776) 조선 제 21대 왕. 이름은 금. 호는 양성헌. 숙종의 넷째 아들
이다. 재위 중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을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을 고르게 확대시켜 나갔다.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
접 알리도록 하였고, 경제 정책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영조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 필요한 것은 널리 반포시켜
일반 백성들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감란록 ,  숙묘보감 ,  퇴도언행록 ,  여사서 ,  천문도 ,  양역실
총  등의 서적이 그것이다. 1770년에는 우리 나라 종합적 백과 사전인  동국문헌비고 를 만들어 오
늘날  증보문헌비고  의 골간을 이룩하였다. 영조는 조선 시대 역대 왕 가운데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긴 52년으로, 왕세제 때부터 당론에 휘말려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기를 탕평
정국으로 슬기롭게 이끌어 나가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하였다. 말년에는 사도 세자를
죽이는 등 과실을 범하기도 하였으나, 손자 정조와 함께 조선 중기 이후 가장 안정된 정치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예종(1079∼1122:재위 1105∼1122) 고려 제 16대 왕.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
진정벌에 힘써, 1107년에 윤관, 오연총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치게 해서 크게 이기고, 이듬해에는
함흥 평야 일대에 9성을 설치하게 하였다. 1112년 혜민국을 설치하여 빈민들에세 무료로 약을 지
어 주게 하였다. 1119년 양현고(학생 장학 재단) 를 국학에 설립하고, 훌륭한 학자를 뽑아 학생을
가르치게하여 학문을 숭상하는 풍습이 크게 일어났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태조 때의 공신인
신숭겸,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 를 지었다.

  오달제(1609∼1637) 조선 시대의 충신. 호는 추담. 삼학사의 한 사람.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 정언, 지평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 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다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윤집과 함께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가
게 되었다. 청나라 적장 용골대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협박도 하였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라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다
시 심양(선양)으로 옮겨져 결국 그는 윤집, 홍익한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후에 이들을 삼학사
라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었다. 좌승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충렬공
유고 가 있다.

  오세창(1864∼1935) 서예가, 언론인, 독립 운동가. 호는 위창. 서울 출생. 1886년 박문국 주사로
서  한성 순보 의 기자를 겸하였다. 1906년  만세보 ,  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3. 1 운동 때에
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8년 근대적 미술가 단체
의 효시인 서화 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민족 서화계의 정신적 지도
자로 활약하였다. 6·25 때 피난지 대구에서 별세,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1962년 대한 민국 건
국 공로 훈장 복장이 추세되었다.

  옥보고(?∼?) 신라 경덕왕 때의 거문고의 대가. 지리산의 운상원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
를 배워 익히고 스스로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으며, 그의 가락을 속명득에게 전
해 줌으로써 신라에 거문고의 전통을 뿌리내리도록 큰 공헌을 하였다.  세종 실록 지리지 와  신증
동 여지승람 에 의하면 경상 북도 금오산에 있는 금속정이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 한다.

  온달(?∼590) 고구려의 장군.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며, 생김새가 우스꽝스러워
 바보 온달 이라 불리었다. 당시 평원왕에게는 어린 공주가 있었는데, 울기를 잘하여 바보 온달에
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던 평원왕의 놀림을 진실로 믿고 궁중을 나와 온달을 찾아 부부가 되었
다. 이 후에 온달은 공주에게 글을 배우고 무술을 닦아 매년 3월 3일 왕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하는 사냥에 참여하여 뛰어난 사냥 솜씨를 발휘하여 왕의 감탄을 샀다. 그 뒤, 북주의 무제가 고
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나아가 대공을 세워 비로소 국왕의 사위임을 인정받고,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이 있자 그는 자원
하여 참전하였으나, 아차산성 전투에서 화살을 맞아 전사하였다.

  온조왕(?∼28:재위 기원전 18∼서기28) 백제의 시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 성왕의 셋째 아들이
다. 북부여에서 동명 성왕의 전처의 소생인 유리가 졸본부여로 와서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얼마 후,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자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동명왕 묘
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기원전 5년에는 남한산에 천도하고 서기 9년에는 마한을 멸망시켰으며,
10년에는 아들 다루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온조왕이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온조왕 묘는 경기도 광주의 남한 산성과 충청 남도 직산의 두 곳에 있다.

  왕산악(?∼?) 고구려 사람으로 거문고의 제작자이며 거문고 연주의 대가.  삼국사기  에  의하면
진나라에서 보낸 칠현금을 개량하여 새로운 현악기를 만들었는데, 그 개량된 악기가 바로 오늘날
의 거문고라 한다. 당시 그는 고구려의 제2국상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가 만든 새로운 악기로 곡
을 지어 연주하였더니,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다고하여 새로 만든 악기를 현악금이라 했
으며, 뒤에 현금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가 언제 거문고를 만들었는지는 불확실하나, 문헌 자
료와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4세기 무렵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인(?∼?) 백제 시대의 학자. 왜왕이 귀국하는 아직기(혹은 전지 태자)와 함께 아라타와케 등
을 보내어 학덕이 높은 학자와 서적을 보내 주기를 청하자, 이에 왕인이 추천되어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건너가 왜왕의 태자 토도치 왕자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경서에 통달하였
으므로 왕의 요청에 의해 군신들에게 경, 사를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치에 살면서
왕실의 공적을 기록하는 사가 되었으며, 일본 조정에 봉사하여 일본 고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다. 그의 이름은 일본의  고사기  에는 와니키시,  일본서기  에는 와니라 기록되어 있다.

  우륵(?∼?) 가야금의 명인. 가야국 성열현에서 살았으며, 가실왕의 명을 받아  하가라도 ,  상가
라도 ,  보기 ,  달기 ,  물혜  등 12곡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신라 진흥왕
에게 투항하였는데, 왕은 그를 맞이하고, 계고, 만덕, 법지 등을 보내어 그의 기술을 이어받게 하
였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 그 후, 진흥왕에 의해 가야금 곡은 궁중 음악이 되었다. 충주의 금휴포, 탄금대는
그가 가야금을 탔던 곳이라 한다.

  우장춘(1898∼1959) 농학자. 1916년 동경 제국 대학 실과에 들어가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업 시험장에 취직하여 18년간 육종 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농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50년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계속 연구에 전념하였다. 연구 업종은  종자로써 감별할 수 있는 나팔
꽃 품종의 특성에 대하여  를 비롯하여 1931년  유채 품종의 특성 조사  등 여러 가지 논문을 발
표하던 중, 1935년 십자화과 속의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을 시도한 박사 학위 논문을 발표하여
연구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연구를  종의 합성  이라 하여 세계적으로 이 방면 연구의 새 길을
터놓았다. 또한, 씨없는 수박 및 벼의 1식 2수작 연구에 성공하여 세계적인 농학자가 되었다.

  원광(555-638) 신라의 고승.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589년 중국 진나라 장안에 가서
혜원, 영유 등에게서  성실론 ,  열반경  등을 배우고, 오나라의 호구산에 들어가서 선정에 힘을 기
울여 설법을 시작하자,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대승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
을 신라에서 강의한 최초의 중으로 불교의 토착화에 노력하였으며,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깊
은 지식을 쌓아 국가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귀산, 추항 두 사람에게 세속 오계를 주어 신라
화랑도의 기본 이념이 되게 했으며, 진평왕의 명을 받아  걸사표  를 쓴 것 등이 이를 입증한다.

  원균(1540-1597) 조선 중기의 무신.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부령 부사, 경상 우수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 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하여, 옥포, 당포 등지에서 이순
신과 함께 연전 연승하였다. 1597년에는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어 수군을 이
끌고 부산의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여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
호 등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1604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 공신 1등으로 책록되어,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에 추봉되었다.

  원효(617-686) 신라 시대의 고승. 아명은 서당 또는 신당. 648년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각종 불
전을 배워 익히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큰 깨달음을 얻고 되
돌아와,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 사상 체계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
에 널리 알림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중에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금강삼매경  을
지어 당시의 왕과 왕자, 공주, 대신들과 고승들로부터 찬양의 소리를 들었다 한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  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현재 알려져 있는 저서
로는  대혜도경종요 ,  금강반야경소 ,  법화경종요 ,  법화약술 ,  유마경소  등 많은 책들이 있다.

  위만(기원전 ?-?) 기자 조선의 준왕을 쫓아 내고 왕위를 찬탈한 위만 조선의 창시자. 연나라 사
람으로 수많은 유망민을 이끌고 조선왕 준에게 항복하고 조선을 지키는 제후가 되기를 원하였다.
준왕은 이를 허락하여 위만을 박사(지방 장관)로 삼아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유망민
들과 결탁하여 자기 세력을 늘려 준왕을 쫓아 내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라 하였다. 그는 한나라에
서 원조받은 병력과 물자로써 이웃의 진번과 임둔 등 소읍을 쳐서 자기 지배하에 넣어, 그 땅이
수천 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만이 죽고 손자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한나라와 대립, 기원전 108년
에 한나라 무제의 동방 침략에 의하여 위만 조선은 멸망하였다.

  유관순(1904-1920) 3, 1 운동 때의 순국 열사. 충청 남도 천안 출신.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 학당에 입학하였고,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뒤, 고향으로
돌아와 학교와 교회를 방문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을 추진하고, 이 해 음력 3월 1일 아
오내 장날을 기하여 수천 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 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 만세 시위를 벌
였다. 이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잡혀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계속
옥중 항쟁을 벌이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유길준(1856-1914) 개화 사상가, 정치가. 호는 구당. 서울 출신. 1881년 일본에 유학하여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 삼국의 단결을 목적으로 조직된 흥아회에 참가하여 일본의 학자 및 정치가들
과 고유하였다. 그 후, 미국의 담머 고등 학교에서 수학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
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귀국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분 관계가 있었다하여 체포되었으나, 극형을 면하고 연금 생활을 하면서  서유견
문 을 집필, 1895년에 출간하였다. 국한문 혼용체로 된 이 책은 서양의 근대 문명을 한국에 본격
적으로 소개하였고, 한국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를 주장하였다. 1896년 아관 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내각이 수립되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갇히게 되었다. 1907년 고
종이 폐위당한 뒤 귀국하여, 계산 학교, 노동 야학회 등을 설립하여 국민 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민족 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1910년에 태극 대수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구당시초 ,  노동
야학 독본  등이 있다.

  유득공(1749-?)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영재, 영암, 고운당. 영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규장
각 검서로 뽑혀 활약이 컸으며, 국수를 거쳐 만년에 풍천 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북학파에 속하
는 학자로서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와 더불어 신한학 4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경도잡지 ,  영재집 ,  고운당필기 ,  앙엽기  등이 있다. 특히  경도잡지 는 조선 시대 서민 생활과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서적이며,  발해고  는 그의 학문의 깊이와 사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
서 중요한 저서이다.

  유몽인(1559-1623) 조선 시대의 문신, 설화 문학가. 호는 어우당, 간재, 묵호자. 1582년 진사가
되고, 1598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질정관으로 다녀오다가 임진
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그 뒤, 병조 참의, 도승지를 거쳐 부좌윤, 대사간 등
을 지냈다. 1623년 인조 반정 때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 하여 사형되었다. 정조 때 억울함
이 밝혀지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 예서, 해서, 초서에 모두 뛰어났으나, 저서로는  어우야담  과 시  어우집 이 있다.

  유성룡(1542-1607)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서애. 의성 출신. 1566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 공
조 좌랑, 부수찬, 병조 좌랑,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한 뒤, 1582년 대사간,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헌
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를 지어 올렸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권율
등을 추천하여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다. 도학, 문장, 덕행,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
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서애집 ,  정비록 ,  영모록 ,  관화록 ,  무오당보  등이 있고, 편서
로는  대학연의초 ,  황화집 ,  구경연의  등이 있다.

  유성원(?-1456) 조선 시대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호는 낭간. 1444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
전 저작랑으로 당시의 의학 총서  의방유취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3년 수양 대군이 단종을 보
좌하는 황보인,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스스로 영의정 부사, 이조 판서를 겸하여 정권을 잡은 뒤,
자신의 공을 옛날 주공에 비교하여 교서를 억지로 쓰게 하였다. 협박을 당하여 교서를 쓴 유성원
은 집에 돌아와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1456년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자 그
는 자결하였다. 뒤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인정하여 1691년에 관작을 추복, 영조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됐다.

  유수원(1694-1755)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 호는 농암. 1718년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에 나간지 5년째 되던 해에 옛 제도를 새롭게 바꾸자는 글을 경종에게 올렸다가, 원로 대신을 함
부로 비난하였다는 조정 중신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는 불행을 맞았다. 1755년에 변서(변란, 혁
명을 주장한 글)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그는 당쟁에 희생되어 불우하게
일생을 보냈으나, 그의 학문과 경륜은 당시에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저서에  우서 가 있다.

  유응부(?-1456) 조선 시대의 무신. 사육신의 한 사람. 호는 벽량. 무과에 급제하여 1448년에 첨
지 중추원사에 임명되고, 경원 도호부사, 경원 절제사를 거쳐 의주 목사, 동지 중추원사를 지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김질의 밀고로 탄로나, 모진 고문 끝
에 죽었다. 후에 남효온이  육신전 이 세상에 공포된 뒤 사육신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확정되어,
1691년에 사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인정하여 6인의 관작이 추복되었다.

  유인석(1842-1915) 조선 말기의 의병장. 호는 의암.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때 강원도, 경기도
유생 46인과 함께 척양소를 올려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
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그 후 관군에게 패하여 안양으로 물러났다가 연해주로 망명
하였다. 이 곳에서 연해주 의병 세력의 통합체인 13도 의군의 결성으로 이상설, 이범윤 등에 의하
여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는 위정 척사, 존화양이 정신에 입각, 철저하게 수구적 자세를 견지하
면서 적극 항일하였으며, 이항로의 학문을 전승, 발전시킨 학자이다.

  유정(1544-1610) 조선 중기의 승려, 의병장. 호는 사명당 또는 송운. 경상 남도 밀양 출신. 1592
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아 평양성을 탈환하였고, 권율과 함께 의령에서 왜군을 물리쳤
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울산, 순천에서 큰 공을 세웠다. 1604년에는 일본으로 가서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우리 나라 사람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해인사에 들어가,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사명당 대사집  7권과  분
춘서난록  1권 등이 있다.

  유치진(1905-1974) 극작가, 연출가. 호는 동랑. 경상 남도 출신. 일본 릿쿄 대학 영문과를 졸업
하고 귀국하여, 해외 문학파 동인들과 함께 극예술 연구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신극 운동을 벌
였다. 1947년에는 이해랑 등을 내세워 극단  극예술 협회  를 조직하였고, 국제 연극 협회 한국 본
부 위원장, 드라마 센터 소장 등을 지내면서 연극의 토착화에 힘썼다. 그는 우리 나라의 최초의
본격적인 리얼리즘 희곡 작가로서, 역사극의 장르를 개척한 극작가이며, 연출.연극 비평.연극 교
육.연극 행정 등 연극 전반에 걸쳐 활동한 근대 연극사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 저서로는  유
치진 희곡 전집  상.하권과  동랑 자서전 , 그리고 많은 연극에 관계되는 논문을 남겼다.

  유치환(1908-1967) 시인. 호는 청마. 경상 남도 통영 출신.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이다. 연희 전
문 학교 문과에 재학시 정지용의 시에 감동하여 형과 함께 회람 잡지  소제부  를 만들어 시를 발
표하였다. 1931년  문예 월간  지에 시  정적  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광복 후에는 청년
문학가 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6.25때에는 문총 구국대의 일원
으로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그 후 교직 생활을 하던 의지, 비정의 철학, 신채호적인 선비 기질의
시인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청마 시집 .  청령일기 .  유치환 선집 .  미루나무와 남풍 ,
수상록으로는  예루살램의 닭  등이 있다.

  유형원(1622-1673)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호는 반계. 벼슬을 하지 않고 전국의 명승지를 돌아다
니며 학문에만 전념하여, 스스로 농촌 생활에서 겪은 체험과 농촌 경제의 안정책 등을 제시한  반
계수록 을 지었다. 특히 그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하였으며, 이익. 안정복 등으
로 이어져 뒤에 후기 실학자로 불리는 정약용 등에게까지 미쳐 실학이 집대성되게 하였다. 저서
로는  기행일록 .  주자찬요 .  이기총론 .  정음지남 .  지리군서 .  동사괴설변 .  도정절집  등이 있었
으나 목록만 전해진다.

  유홍기(1831-?) 개화 사상가.개화 운동의 지도자. 호는 대치. 여여. 서울 출신. 조선 역사에 통달
하여 친구 오경석이 중국에서 가져온  해국도지 ,.  영환지략 ,  박물신편  등 새로운 서적을 통해,
국제 정세의 변화와 서양의 제도.문화를 알게 되어 일찍이 개화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는 당
대의 최고 선각자이며, 뛰어난 청년 개화 사상가들이 모두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사
람들은 그를  백의 정승  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그의 지도를 받은 김옥균 등 개화당은 1884년 갑
신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치를 시작하려 하였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나자 집을
나가 행방 불명이 되었다. 10년 후 갑오개혁 때, 그의 제자들이 집권하여 갑신정변의 지도자들을
모두 복권시켰을 때도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며, 갑신정변 실패 직후 수구파들이 개화당 인
사들을 닥치는 대로 참살할 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유희(1773-1837) 조선 후기의 유학자.음운학자. 초명은 경. 호는 서파.방편자.남악. 신경준과 함
께 조선 후기의 대음운학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학문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종수. 농정.
풍수. 충어. 조류 등에 두루 통하였고,  시물명고 .  물명유고 .  언문지 는 국어학사적 자료로서 논의
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물명유고 는 여러 사물들을 한글로 설명한 것으로서 그 설명에 쓰인 우리
어휘는 무려 1600이 넘는다. 그리고 섬세한 기술과 희귀한 어휘 등으로 그의 대표적 저술로 손꼽
을 수 있으며, 그를 어휘학자로 평가되게 하였다.

  윤관(?-1111) 고려 시대의 문신. 장군. 시호는 문숙. 1104년 동북면 행영 병마 도통사가 되어 여
진 정벌에 나서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은 바 있으며,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조련을 진언하여,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여진은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으
로 성을 돌려주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윤관이 장병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싸워
탈환했던 9성 일대의 땅을 다시 여진에게 돌려주고 강화를 맺었다. 그렇게 되자 그는 전투에서
패한 장수라는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의 호까지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예
종의 덕으로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윤동주(1917-1945) 시인. 북간도 출생. 1941년 연희 전문 학교를 나와 일본의 릿쿄 대학 영문과
에 입학했다가 다시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전학하였다. 1943년 귀향 직전에 항일 운동의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
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쳤다. 첫 작품은 15세 때 쓴 시  삶과 죽음 ,  초한대 이며, 자필
로 3부를 남긴 것이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20세
를 전후하여 10여 년간 전개된 그의 작품들은 1905년 대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민족의 슬픔과 광복의 소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작품으로는  겨울 .  조개
껍질 .  빗자루  등이 있다.

  윤두서(1668-1715) 조선 후기의 화가. 호는 공재. 정선.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삼재로 일
컬어졌다. 169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이 심해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
를 보냈다.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였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
희와 손자인 용에게 계승되었으며, 조선 말기의 허련도 그의 화풍을 익혔다. 작품으로는  자화상 .
 채애도 .  선차도 .  백마도 .  노승도 .  출렵도  등이 있다. 저서로는  기졸  과  화단  이 있다.

  윤봉길(1908-1932) 독립 운동가. 의사. 호는 매헌. 충청 남도 예산 출신. 1930년 만주로 망명하
여 김태식, 한일진 등과 함께 독립 운동을 준비하였다. 1932년 한인 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의 주
관하에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의 도움을 받아 중국 상하이 홍커우(홍구) 공원에서 일본왕 생
일  겸 전승 축하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상하이 파견 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하이의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 등은 즉사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직후 현장에서 잡혀 그 해 11월에 일본에 호송되어 가나자와 형무소에 수감
된 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윤선도(1587-1671) 조선 시대의 문신. 시인. 호는 고산 또는 해옹.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
이첨.박승종 등 당시 집권 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
로 유배되었다. 인조 반정때 8년의 귀양에서 풀려나 형조 좌랑과 예조 좌랑 등 여러 벼슬을 지냈
으나, 강석기의 모함으로 성산 현감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병자호란으로 인조
가 항복하고 화의를 맺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여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아름다운 경치에 이
끌려, 그 곳에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 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된 금쇄동의 자연속에
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며,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를 지었다. 정철.박인로와 함께 조선
시대 삼대 가인으로 불리며, 이들과는 달리 가사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
하다. 작품으로는 문집  고산유고  에 시조 77수와 한시문이 전한다. 그 외에  산중신곡 .  몽천요 .
 고금영 .  증반금  등을 지었다.

  윤집(1606∼1637) 조선 후기의 문신. 삼학사의 한 사람. 호는 임계.고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신하들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하고 청나라와 화친할 것을 주장하자, 그는 이를 규탄하는 극
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려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왕이 간사한 신하
의 말을 따르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결국 화의가 성립되자, 그
는 오달제, 홍익한 등과 함께 척화론자로 몰려 청나라에 강제로 끌려 갔다. 청나라에서는 그들의
충절을 생각하여 그들의 뜻을 돌리려 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자 마침내 심양성 서문밖
에 끌려가 사형당하고 말았다. 오달제, 홍익한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불리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윤치호(1865∼1945) 정치가, 민족운동가. 호는 좌옹. 충청 남도 아산 출신. 신사 유람단의 일원
인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찰을 마치고 동인사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귀국
후, 독립 협회에 가담하여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 협회 운동을 이끌어 갔다. 또한, 독립 신문의
사장과 만민 공동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자주 국권 운동과 자유 민권 운동 및 자강 개혁 운동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 운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장지연 윤호정 등과 대한 자강회를 조직하여, 국
민의 자주 자강 정신과 능력을 기르는데 힘썼다. 저서로는  우스운 소리 ,  영어 문법 첩경  이 있
고, 역술서로  찬미가  가 있으며, 번역서로  의회 통화 규칙 ,  이솝 우화 ,  걸리버 여행기  등이 있
다.

  을지문덕(?∼?) 고구려 영양왕 때의 장군. 612년 수나라의 양제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
하였다. 이에 을지문덕은 왕명을 받들어 거짓 힝복을 청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군량이 부족한 수
나라군의 약점을 간파하고, 수나라군과 충돌할 때마다 후퇴하는 척하면서 적을 유인하여 수나라
군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의 구실을 찾는 수나라군에게 희롱조의 오언시
를 보내어 철수할 것을 권하는 한편, 다시 거짓 항복을 청하여 살수를 건너 퇴각하는 수나라 군
을 뒤에서 공격하여 수나라 장수 신세웅을 죽게하고, 불과 2700명만울 살려 보내는 대승리를 거
두었다. 이를 살수 대첩이라 한다.

  의상(625∼702) 신라 시대의 고승. 우리 나라 화엄종의 시조. 성은 김씨. 19세 때 경북 황복사에
출가한 후, 661년 당나라로 건너가 승려 지엄으로부터 화엄종을 배웠다. 귀국 후 676년에는 왕명
으로 부석사를 짓고, 제자들에게 화엄 사상을 가르쳤다. 의상의 교화 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많
은 제자들을 양성했다는 점인데, 그에게는 3000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한다. 저술로는  신문간법
관 ,  입법계품초기 ,  소아미타의기 ,  화엄일승법계도 ,  일승발원문  등이 있다.

  의자왕(?∼640:재위 641∼660) 백제의 마지막 왕. 무왕의 맏아들이다. 태자 때부터 효로써 부모
를 섬기고 형제와 우애하여  해동증자  로 칭송되었고, 즉위하여 관산성 패전 이후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여, 귀족 세력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이 보다 강화되었다.
642년에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과 대야성을 함락 시켰다.
또한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여 신라의 대당 교통로를 차단하였다. 그러나 이
러한 의욕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만년에는 사치와 방종, 귀족들의 내부 분열로 결실을 맺지 못
하고, 궁중 안에서는 군대부인이 권세를 장악하고 어진 사람을 마구 죽여 국가의 통치 질서는 붕
괴되고 말았다. 660년 나 당 연합군에게 포위되자,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하였다가 사비성이
함락되자 마침내 당나라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왕은 태자 효와 왕자 융 및 대좌평 사택천복 등
대신들과 장사 88명 및 백성 1만 2천여 명과 더불어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의천(1055∼1101) 고려 시대의 명승. 고려 천태종의 시조. 성은 왕씨. 이름은 후. 호는 우세. 시
호는 대각국사. 고려 제 11대 왕인 문종의 아들이다. 1065년 경덕국사를 은사로 삼아 대승과 소
승, 유교의 전적, 역사 서적 등 배우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스승인 경덕국사가 죽자 그의 강의를
대신 맡게 되었고, 훌륭한 강의로 인하여 온 나라 안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1067년 왕
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의 직책을 받았다. 중국 송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에서 수집한 불교 서적 4000여 권과 국내의 서적들을 모
아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경서를 간행하였다. 또한,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의천은 이러한 고려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 사상을
확립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서로는  고려속장경 ,  신편제종교장총록 ,  대각국사문집  등이
있다.

  이괄(1587∼1624) 조선 시대의 무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 좌랑 태안군수를 역임하였
다. 1622년 인조 반정에 참여 폭정을 일쌈는 광해군을 몰아 내고 새 왕을 추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623년  평안 병사 겸부원수에 임명되어 평안도 영변에서 군사 훈련에 힘쓰는 한편, 성책
을 보수하여 진지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데 힘썼다. 그 무렵, 그의 외아들 전이 반대 세력에 의해
반역 음모를 꾀한다는 혐의를 받아,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 등이 영변으로 내려와 그의 아들 전을
붙잡고 사실 여부를 조사하자, 이괄은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서울을 점령하여 기
세르르 떨쳤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괄은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각처에 방을 붙여 백성들로 하여금 각자 생
업에 충실하도록 하였고, 이와 함께 새로운 행정 체체를 갖추었다. 그러나 관군의 연합군이 서울
근교에 이르러 공격하자, 이괄은 크게 패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는 이천으로 도망가던
중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살해당하였다. 이괄의 난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힌 원인이
되었다.

  이광수(1892∼?) 시인, 평론가, 소설가. 호는 춘원. 1905년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의 메이지 학원과 와세다 대학을 나왔다. 1917년 한국 신문학 사상 획기적인 장편 소설  무정  을
연재하고, 그 뒤 상하이로 가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  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여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썼다.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 민족주의
인도주의의 작가이기도 하다. 대체로 이광수의 초기 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
하여 자유연애를 고취하고,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무정  에서는 신교육 문제를,  개척
자  에서는 과학 사상을,  흙  에서는 농민 계몽 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 사상을 계몽하였다.
광복 후 일제 말엽에는 친일파라는 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였으며, 6,25당시 공산당에게 납치되
어 생사 불명이 되었다.

  이규경 (1788-?) 조성 시대의 실학자. 호는 오주, 소운거사. 당대의 실학가 이덕무의 손주로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선후기의 실학을 대성하였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금 사물에 대한 수백
종의 서적을 탐독한 후 정밀한 고증으로 천문, 역사, 지리, 문학, 종교 등 모든 학문을 고정변증하
여, 1400여 항목을 담아  오주연문장전산고  60권을 집대성하여 폭리를 자행하자, 이러한 행위를
비판하면서 매점 매석을 적극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익의 폐전책을 지지하였고,
대외적인 매매, 교환 행위에 있어서도 개시와 교역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벼슬
을 하지 않고 할아버지가 이룩한 실학을 계승, 조선후기 실학을 꽃피운 박물학자로 평가받고 있
다. 저서로는  오주서종박물고변 ,  백운필  등이 있다.

  이규보 (1168-1241) 고려의 문신. 호는 백운거사. 만년에는 시, 거문고,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
선생이라 불렸다. 1189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벼슬이 태자대보에까지 올랐다. 한 편으로
왕정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백성들의 피폐, 그리고 지방의 농민 폭
동등은 그의 사회, 국가의식을 크게 촉발하여,  동명왕편 ,  개원천보영사시  등을 지었다. 몽고군이
고려에 쳐들어왔을 때, 그의 뛰어난 문장으로  진정표  라는 글을 써서 적을 격퇴시킨 이름난 문
장가였다. 저서로는  백운소설 ,  동국 이상국집  등이 있다.

  이긍익 (1736-1806) 조선 후기의 학자. 호는 완산 또는 연려실. 이이,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최림 등 서인 계열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역사 의식은  연려실기술  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으며, 그는 고증(옛 책이나 유물 등을 자세히 검토하여 증거를 대어 설명함) 을 역사에서
제일의 생명으로 여기고, 객관성, 공정성, 체계성, 계기성을 중심으로 국내의 자료들을 많이 읽고
이를 인용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역사는 내 나라의 자료에 의하여 이루어려야 한다는 강한 자아
의식때문이었다. 실학을 연구한 고증학자로서 조선사연구의 선구자이다.

  이기붕 (1896-1960) 정치가. 호는 만송. 서울 출신. 서울의 보성 학교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 학
교를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데이버 대학 문과를 졸업했다. 졸업후 뉴욕에서 허장 등과 함께  삼
일 신분  발간에 참여하다가 귀국, 이승만의 비서가 되었다. 1946년 대한 기독 청년회의 이사를
역임하면서 사회적 발판을 다졌다. 1951년 국방부 징관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이범석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려 발췌 개헌안 통과에 일역을 담당하였다. 1954년 제5차
자유당 전당 대회에서 대승하여 제2대 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국민의 규탄을 받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고, 맏아들 강석의 총격으
로 집단 자살하였다. 그가 살던 집은 4,19 혁명 학생 도서관이 되었다.

  이덕형 (1741-1793) 조선시대의 실할자. 호는 형암, 아정, 청장관, 박지원, 홍대용, 유득공, 서아
수 등의 북학파 실학자들과 깊이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779년 규장각 와각 검서관이
되어  도거집성 ,  국조보감 ,  홍문관지 ,  송사전 ,  규장전운  등 많은 서적의 정리와 교감에 종사하
였다. 시문에 능하여 규장각 경시 대회에서 여러번 장원함으로써 정조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1781년에는 내각 검서관으로 임명되었고, 사도시 주부, 사근도 찰방, 적성 현감 등을 거쳐 사옹원
주부가 되었다. 병으로 1793년에 죽자 정조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아정유고  간행비
를 내어 주고, 1795년 그의 아들 광규를 검거관으로 임명하였다. 저서로는  관독일기 ,  이목구심
서 ,  영처시고 ,  예기고 ,  앙엽기 ,  협주기  등이 있다.

  이동녕 (1869-1940)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석오, 암산. 충청 남도 천안 출신. 1892년 응제 진
사시에 합격하였고, 다음 해 아버지를 따라 원산에 가서 육영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896년 독립
협회에 가담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동지들
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만주 북간도로 망명,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 광복회 정부를 수립하
였으며, 1919년에는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장원 의장, 내무 총장, 국무총리, 대통령 서리 등을
지냈다.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김구, 이유필 등과 지도, 윤봉길의 쾌거를 이룩하였다.
1940년 임시 정부의 주석으로 김구와 함께 일하다가 급성폐렴으로 죽었다. 임시 정부 국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1962년 건국 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동휘 (1872-1935) 독립 운동가. 함경 남도 단천 출신. 호는 성재. 군관 학교 졸업 후 육군 차
령을 지냈다. 이동녕, 안창호등과 식민회를 조직하여 개화 운동과 항일 투쟁을 벌였으며, 개성, 평
양, 원산 등지에 여러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문화 사업에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또한, 민족계몽
을 위한 단체로서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북 흥학회를 조직하고, 후에 서우 학회와 발
전시켰다. 1919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무의 국무 총리가 돠었다. 임시 정부 국무 총리 사임 후, 시
베리아에서 생을 마쳤다.
 이범석 (1900-1972) 독립 운동가. 호는 철기. 서울 출신. 1919년 중국의 운남 육군 강무학교를 수
석으로 졸업하고 신흥 무관 학교 북로 군정서 교관사관 연성소 교관 등을 지냈다.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총사령관 김좌진을 도와 제2대대 지휘관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1940년 대
한 민국임시 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 , 광복군의 참모 총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초대 국무 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였고, 1950년에는 주중국 대사 내무부 장
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저서로는 회고록인  방랑의 정
열  , 노설집인  민족과 청년  ,  우동불  등이 있다.

  이범윤 (1863-?) 한말의 관리, 독립 운동가. 훈련 대장 이경하의 아들이며, 이범진의 동생이다.
1902년 청나라가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자 간도 관리사로 부임하여 간도 지방의 한인 보호에 힘
썼다. 1907년 일제가 간도에 출장소를 두자 시베리아에 망염하여 의병을 모아 총대장이 되었다.
그 후 대종교에 입교했으며, 1925년에는 신민부 조직에 침가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이범진 (1853-1910) 조선말기의 문신, 순국지사. 자는 성삼. 187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서 1887년 협판 내무 부사가 되었다. 친러파로 농상공부 협판으로 있다가 을미
사변으로 파면되었고, 춘생문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 아관 파
천을 계기로 경무사가 되었으며,이후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공사를 역임하였다.
러 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자결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병기 (1891-1968) 국문학과, 시조시인. 호는 가람. 전라 북도 익산 출신. 1921년 조선어문 연
구회를 조직하고, 시조에 뜻을 두어 1926년  시조회    발기 하였다. 후에 이를  가요 연구회  로
개칭한 다음, 시조 혁신을 제찬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조선어 철자법제정위원이 되었
고 연희 전문학교, 보성전문 학교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 학회사건으로 옥고
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 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강사로 지냈다. 6, 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
도 전시 연합대학 교수, 전북 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 퇴임하였다. 1962년 문화
포장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가람 시조집 을 비롯하여  국문학 개론 ,  국문학전사 , 가람문선  등
이 있다.

  이봉창  (1900-1932) 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 등 막일로 생계를
꾸려 나가다가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이 들자, 1931년 상하이로 가
서 김구가 지도하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여 일보 천황 암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1932년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그 해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추서하였다.

  이상  (1910-1937)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서울 출신. 경성 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과 건축 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 구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
였고,  조선 중앙 일보 에 시  오감도 를 1936년에는  조광 지에  소설  날개 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
목을 끌었다. 그는 1930년대를 전후하여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 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시작품으로는  소영위제 ,  정식 ,  명경  등과 소설  봉별
기 ,  종생기 , 수필  권태 ,  산촌 여정  등이 있다.

  이상설  (1870-1917) 독립 운동가. 호는 부재. 충청 북도 진천 출신.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교수 관장, 한성 사범 학교 교관, 궁내부 특진관에 승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
되자, 이듬해 이동녕, 정순만 등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항일 민족 교육의 요람인 서전
의숙을 건립하고 숙장이 되었다. 1907년 이준 이위종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
국 평화 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각 국가들의 이익 다툼으
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대한 제국의 주장을 밝힌  공고사  를 평화 회의에 참석한 각국
위원에게 보내고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여,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조
국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재 (1850-1927)  정치가, 사회 운동가. 호는 월남. 충청 남도 서천 출신. 1894년 갑오개혁내
각 총무국장에 올라, 탐관 오리를 몰아 내고 국운을 바로 잡기에 힘썼다.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
립 협회를 조직하고, 독립 협회가 주최한 만민 공동회 의장과 사회를 맡아 보았다. 1914년
YMCA(와이엠시에이) 를 비롯한 세브란스, 배제, 경신과 개성의 한영 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등 YMCA를 모두 합하여 조선 기독교 청년회 전국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떄, 모든 민간
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 출판,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 은 해
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 단체가 되게 하였고,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좌 (?-?) 조선 초기의 화가. 호는 학포. 어숙권의  패권잡기  에 의하면, 본래 어느 선비의
종이었으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중종의 특명으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한다. 그는 화풍
의 그림을 잘 그렸으며, 툭하 산수화와 인물화에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한다. 공신들상을
그려 원종 공신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작품에  송화보월도 ,  한강 조어도 ,  어가 한면도  등
이 있다.

  이상호 (1926-1945) 항일 독립 투사. 대구 출신. 1924년 대구 상업 고등 학교 4학년 재학 중 김
상일, 서상교 등과 항일 비밀 결사 태극간을 조직하고, 그 단장으로 취임, 독립 투쟁을 전개할 것
을 결의하고 일본군 입대 기피, 침략 전쟁에 대한 비협력 등을 골자로 하는 선전 유인물을 만들
어 살포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1943년 체포되었다. 김천 소년 형무소에서 복역 중 8,15 광복 직전
에 병보석되었으나 곧 사망했다. 장례는 대구에서 사회장으로 치루어졌고, 1969년 대구 상업 고등
학교 제 41회 절업식에서 명예 졸업장이 수여되었다. 1963년 대한 민국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었다.

  이상화 (1901-1943) 시인. 호는 무량, 백아, 상화,  경상 북도 대구 출신. 21세 때에 현진건의소
개로 박종화를 만나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의 동인의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
을 시작하였다. 이어  단조 ,  가을의 풍경 ,  이중의 사망 ,  나의 침실로  를 발표해 이름을 떨쳤다.
그의 작품은 일제에의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 사상을 노래하고 있으
며, 작품으로는  몽환병 ,  가상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역천  등이 있다. 그의 시비는 1946
년 시인이었던 김소운의 발의로 대구 달성 공원에 세워졌다.

  이색 (1328-1396) 고려 말의 문신, 학자. 호는 목은. 고려 삼은 중의 한 사람. 1341년에 진사 시
험에 합격하였고, 1348년에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귀국하여
인사 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울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가 되어 유학
에 의거한 삼년상 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그 뒤 지공부사, 지예부사, 좌승선, 우대언 등을 지내
고, 대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
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89년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옹립하고 판문하 부사가 되어 명나라로 가 이성계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성
계 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장단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 불교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떄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했다. 한편, 유교 역사관을 가지고 역사 서술에
임했으며 그의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했다.
저서로는  목은 무고 ,  목은 시고  등이 있다.

  이수광 (1563-1628) 조선 중기의 유학자. 호는 지봉.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고,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의 신부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
  교우론 ,  심인기의 ,   속이담  등을 가지고 와 그것을 바탕으로  지봉유설  을 지어, 우리 나라
최초로 서양의 문물과 천주교의 지식을 소개하여 실학 발전의 선구가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과
호란, 이괄의 반란을 겪으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지켜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요 선비
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66세로 세상을 떠난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저술로는  지봉집  31
권과 부록 3권이 있으며,  찬록군서  25권이 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순신 (1545-1598) 조선 중기의 명장. 시호는 충무. 서울 출신.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발
포 수군 만호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을 역임하고, 1591년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군비를 확충하고, 군량의 확보를 위하
여 해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노량,
고성, 사천, 당포, 한산도 등지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최초로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일본이 다시 침입해 ,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
을 기하였다. 그러나 반대파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게 되었고, 풀려난 후 함선 12척으로 명량 해협
에서 왜군 함대 133척을 무찔러 큰 전과를 올리던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지극한 충성
심과 위대한 통솔력으로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민적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 시
조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 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
히고 있다.

  이숭인 (1349-1392) 고려 말기의 학자. 호는 도은.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 부승, 장흥
고사 겸 진덕 박사 등을 지냈다. 그 뒤 밀직 제학이 되어 정몽주와 더불어 실럭을 편찬하였으며,
친원파와 친명파의 모함을 받아 여러 차례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조선이 개국할 떄, 정도전의
원한을 사서 그의 심복 황거정에 의하여 유배소에서 장살되었다. 문장에 매우 뛰어났으며, 이색은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  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명나라
태조도 그가 올린 들을 보고 감탄했으며,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은 이
가 없다 한다. 저서로  도은 시집   5권이 있다.

  이승만 (1875-1965) 독림 운동가, 정치가. 대한 민국 초대 및 2, 3, 4대 대통령. 초명은 승룡. 호
는 우남. 황해도 평산 출신. 1896년 협성회 독립 협회에 가담하여 개화, 독립 운동에 앞장 섰다가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워싱턴 대학
과 하버드 대학을 거쳐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9년 상하이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 총리에 추대되었고, 워싱턴, 하와이 등지에서 항일 투쟁과 외교 활동
울 계속하였다. 1948년 초대 국회 의장에 선출되었고, 그 해 7월에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대한
민국 정부 수립과 함꼐 취임하였다. 그 뒤, 강력한 반공, 배일주의자로 나라를 이끌어 갔으나, 제2
 3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장기적인 집권을 위하여 여러 차례 불법적인 개헌을하여 정치 발전에
지장을 주었으며, 결국 3,15 부정 선거와 자유당 독재로 인한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어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유희는 하와이에서 국내로 옮
겨 와 가족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독립 정신 ,  일본 내막기  등이 있다..

  이승훈 (1864-1930) 독립 운동가, 교육가. 본명은 인환. 호는 남강. 평안 북도 정주 출신.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느 유기상 점원으로 들어가 근면성과 성실함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1887년에는
유기 공장을 세워 민족 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907년 안창호의   교육 진흥론  에 대
한 강연을 듣고, 개인의 이익보다는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결심 아래 신식 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 의숙과 오산 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11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
배 생활을 하였으며, 그 해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주동자로 몰려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에 가출옥하였다. 그 후, 1919년 3,1 운동 떄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 대표로 만
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복역 후 동아 일보 사장을 지내었고, 물산 장려 운동,민림 대
학 협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62년에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승휴 (1224-1300) 고려의 문신. 호는 동안 거사. 125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뒤에 서장관으
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가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귀국하여 우사간,전중어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제왕운기  가 있고, 아들 이연종이 편찬한 문집  동안 거사집  이 있다.  제왕운기 는 중
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로 엮은 서사시로서, 이승휴를 비롯한 당대의 신진 사류
들의 역사 의식을 보여 주는 귀증한 자료이다.

  이시영 (1869-1953) 독립 운동가, 정치가. 호는 성재. 서울 출신. 1885년 관직에 나아가 10년간
형조 좌랑, 홍문관 교리, 승정원 부승지,  궁내부 수석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일제의 국권
침탈 후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여, 교육 진흥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 설
립을 주도하여 항일 독립군의 핵심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광
복 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국정 혼란과 사
회 부패상의 책임에 대한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 정부를 떠났다. 1962년 건국 훈장 대
한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이암 (1297-1364) 고려의 문신, 서화가. 초명은 군해. 호는 행촌. 1313년 문과에 급제한 뒤 충선
왕이 그 재주를 아끼어 도관 정랑에 임명하였으며, 1359년 홍건적이 침입할 때 큰 공을 세워 철
원 부원군에 임명하였으며, 1359년 홍건적이 침입할 때 큰 공을 세워 철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글
씨에 뛰어나 동국의 조자앙이라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하였고 필법은 조맹부와 대적할
만하여,  문하원장경비 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은 묵죽을 잘 그렸다.

  이억기 (1561-1597) 조선 시대의 무신. 17세에 사복시 내승이 되고, 그 후 무과에 급제, 여러 별
슬을 거쳐 경흥, 온성 부사를 역임하면서 북방의 경비에 만전을 기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 우도 수사가 되어 이순신을 도와 당포, 옥포 등지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이순신이 원균의 참
소로 하옥당하자, 이항복, 김명원 등과 함께 무죄를 변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 휘좌익
군을 지휘, 용전하다가 칠전량 싸움에서 원균과 하몎 전사하였다. 선무 공신 2 등에 완흥군으로
추봉되고, 병조 판서에 추증, 여수의 충민사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이언적 (1491-1553)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호는 회재. 자계옹.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
랑, 사헌부 장령, 밀양 부사, 사간 등을 지냈다. 선정을 베풀고 조정에 정치의 도리를 논하는 상소
를 자주 올려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1547년 유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
되어 강계로 유배되었으며, 그 곳에서 많은 저서를 남기고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이황에게로 계승되는 영남 학파의 성리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
쳤다. 저서로는  구인록 ,  대학장구보유 ,  중용구경의 ,  봉선잡의  등이 있다.

  이완 (1602-1674) 조선시대의 무신. 호는 매죽헌.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을 동성령으로
유인하여 복병으로 하여금 이를 크게 무찌르게하여 공을 세웠다.효정이 즉위한 뒤 어영청의 대장
으로 임명되어,효정의 북벌론에 깊이 참여하여 신무기의 제조, , 성곽의 개수 및 신축, 군사훈련
등 여러 대책을 강구하여 때를 기다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성품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결단력
이 있어, 매사에 공사를 분명히 하였다. 1685년 정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완용(1858-1926) 조선 말기의 문신. 친일파. 호는 일당. 경기도 광주 출신. 1882년 문과에 급
제하여 규장각 대교, 동학 교수, 의정부 검상 등을 지냈다. 1905년 학부 대신이 되어 일본 특파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조약 체결을 제의하자, 고종을 협박하여 조약을 체결하게 됨으로써 을사 5
적이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 선 공로로 의정 대신 임시 서리 및 외부 대신 서리까지 겸하
였다. 190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동회장을 받았다. 1910년에 한.일 합병 조약을 체결하여
나라를 일제에게 넘겨주고 말았다.저서로는  황후폐하 치사문 이 있다.

  이용익(1854-1907) 한말의 정치가. 함경북도 북청 출신. 1897년 왕실 재정을 관리하게되어 왕실
수입을 늘렸고, 탁지부 대신을 겸직하였다. 철도의 부설과 근대 금융 기관의 설립 등을 적극적으
로 지원하는 등 근대적으로 지원하는 등 근대적 개혁에 큰 힘을 기울였다. 정치가로서 항일 투쟁
의 선두에 섰으며, 특히 일진회의타도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국권
이 박탈되자,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프랑스로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가던 중 일본 관헌에게 발각되
어,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였다. 그 뒤, 해외를 돌면서 구국 운동을 전개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
고 블라디보스크에서 병사하였다.

  이원수(1911-1981) 아동 문학가. 경상 남도 양산 출신. 1926년 동요  고향의 봄  이  어린이 지에
뽑힘으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동화 및 아동 소설에 힘을 기울여 현실을 직시한 고발적 사실
주의 아동 소설을 발표하였다. 1970년  고마우신 선생님상  을 받았고, 1980년 대한 민국 문학상을
받았다. 1968년 마산 성호 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와 1984년 서울 어린이 대공원에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작품으로는 동화집에  숲 속 나라 ,  메아리 소년  이 있고, 소설에  5월의 노래 ,  민들
레의 노래  가 있으며, 동시집  빨간 열매 ,  종달새  등이 있다.

  이원익(1547-1634)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오리. 156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형조 좌
랑, 황해도 도사를 지냈다. 광해군 즉위 후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김육이 건의한 대동법을 경기도 지방에 한하여 실시하였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스스로
위험을 무릎쓰고 형제간의 우애, 국가 재정의 절검 등을 상소하였고, 임해군의 처형과 인목 대위
폐위론이 나오자, 가족의 반대를 무릎쓰고 폐위 반대 상소문을 올려 그 뒤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
냈으므로 광해군을 죽여야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득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소박하고 맡은 일에 충실하며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
나, 그의 집은 겨우 비바람을 피할 정도였으며, 관작에서 물러난 후에는 식량조차 없을 정도로 청
빈했다 한다. 저서로는  오리집 ,  속오리집 ,  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가 있
다.

  이위종(1887-?) 조선의 외교관. 독립 운동가. 서울 출신. 7세 때부터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유럽
각국을 순회하였으며, 영어, 프랑스 어,  러시아 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특사로 임명되어 각국 대표와의 외교 교섭과 문서 작성 등
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회의 참석에는 성공하지 못하
였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공고사를 지어 평화 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는 한편, 만국 기자 협회의 도움으로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일제의 한국 침
략을 규탄 하였다. 을사조약은 일본이 무력을 사용하여 강제로 체결된 것으로 무효이며, 우리는
한국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열망하고 있으므로, 세계가 한국의 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강력히 호
소하였다. 이 연설은 참석한 각국 언론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 이
위종 등 세 특사에게는 일본 통감부에 의해 종신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
장이 추서되었다.

  이육사(1904-1944) 시인. 독립 운동가. 경상 북도 안동 출신. 호 육사는 대구 형무소 수감 번호
264를 사용한 것이다. 보문 의숙, 교남 학교, 북경 조선 군관학교를 나왔다.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
입하여 1927년 조선 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 밖에도 1929년 조선
은행대구 격문 사건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문단 활동은 1930년  조
선 일보  에 시  말  과 평문  대구 사회 단체 개관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30여 편
의 시와 소설, 수필, 문학 평론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일생은 잦은 옥고와 가난으로
이어졋으며, 그의 작품세계는 저항적 주제와 실향 의식과 비애, ㄸ는 초인적 의지나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이 주류를 이룬다. 유작으로  육사 시집 ,  광야  외에 그의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
야에서 부르리라 ,  이육사 전집  등이 있다.

  이윤재(1888-1943) 항일 독립 투사, 국어학자, 사학가. 호는 환산, 한뫼, 경상 남도 김해 출신.
마산의 창신 학교, 의신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3.1운동에 관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
옥 후 오산 학교와 배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9년 조선어 연구회,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
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위원이 되어 국어 통일 운동
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42년 유고  표준 한글 사전  이 간행되었다. 그밖에  성웅 이순
신 ,  도강록 ,  문예 독본   등의 저서가 있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이은(1897-1970)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고종의 셋째 아들이다. 영친왕 또는 영왕이라 칭
하기도 한다.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 의하여 유학이란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 갔다. 일본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 육군 사관 학교,
육군 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고 일본이 패망하자 황족으로
서의 특권을 상실하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지냈으나, 1963년 당시 박
정희 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이방자 여사와 함께 귀국하였으나, 오랜 병으로 그가 꿈
꾸어 오던 불우한 이웃을 돕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회 봉사 정신
은 뒤에 이방자 여사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이은상 (1903-1982)  시조 작가. 사학자. 호는 노산.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 학교
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 중퇴,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24년  조선 문단 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평론, 수필, 시 등을 발표하였으며, 1930년 후반부터 시조 시인으로서 자리를 굳혀 시
조를 쓰면서 당나라 시를 시조 형식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시조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기로 하였
다. 초기의 시조는 향수·감상·무상·자연 예찬 등 쉽고 감미로운 서정성을 주제로 하다가 광복
후에는 국토 예찬, 조국 분단의 아픔, 통일에의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
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갔다. 저서로는 시문집으로  노산 문선  , 노산 시
문선  등과 수필집으로  무상 이 있고, 전기로는  탐라 기행 한라산  , 피어린 육백리  ,이충무공 일
대기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의민 (?∼1196) 고려의 무신. 천민 출신이나 신체가 장대하고 용감하여 경군에 선발된 뒤, 의
종에세 발탁되어 별장이 되었다. 1170년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장군으로 승진하였으
며, 병마사 김보당이 정중부의 집권에 반발하여 의종을 복위시키려 반기를 들자, 이 난을 평정하
여 대장군이 되었다. 서경 유수 조위총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여 무반의 최고직인 상장군
에까지 올랐다. 1179년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전권을 장악하자, 고향인 경주에 내려가 숨어
살다가 경대승이 죽은 뒤 정권을 장악하였다. 1194년에는 공신에 책록되어 막대한 권력을 기반으
로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빼앗았다. 그러나 반역을 모의하다가 최충헌 일파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이 (1536∼1584) 조선 시대의 학자. 정치가. 호는 율곡, 석담, 우재. 강원도 강릉 출신. 어려서
부터 어머니 신사임당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모두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하여  9도 장원공 이라 일컬어 졌다. 29세에 호조 좌랑에 처음 임명되어 예조 좌랑, 부교리,
춘추기사관  등을 지내면서  명조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임진왜란 전
에는 10만 대군을 양성할 것과 대동법, 사창제 등을 건의하여 사회 정책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 향약 ,  해주 향약  등의 규례를 만들었다. 저서에  성학집요 ,  격몽요
결 ,  경연일기 ,  동호문답  등이 있다.

  이익 (1681∼1763) 조선 후기의 실학자.호는 성호. 그의 학문은 철저한 유교적 바탕 위에 이루
어졌으며, 이이와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받아 천문, 지리, 역사, 제도 ,의학 등에 밝았고, 당시 중국
으로부터 들어온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여 세계관 및 역사 의식을 확대, 발전시켜 나갔고, 보다 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학 사상을 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편, 와도 정치ㅡ이 실
현을 위하여 덕치로써 인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유교 정치를 근본으로 삼았다. 저서로는  성호사
설 ,  성호선생문집 ,  사칠신편 ,  사서 삼경 ,  근사록  등이 있다.

  이인로 (1152∼1220) 고려 시대의 문인. 초명은 득옥. 호는 쌍명재. 1180년 29세 때 진사과에 장
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직사관, 우간의 대부 등을 지냈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오세재, 임춘,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과 함께 강좌 7현이라 불렸다. 초서와 예서의 글씨에
도 능하였다. 저술로는  은대집 ,  쌍명재집 ,  파한집  등이 있다.

  이인영 (1867∼1909) 한말의 의병장. 경기도 여주 출신.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 황후가 시해
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익선, 이강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원주에서 의병을 일
으킨 이은찬, 이구재가 500명의 의병을 모집해 와 그에게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그는
이를 수락하고 횡성, 지평, 춘천 등지의 의병을 규합하여 진격 도중에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고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후퇴, 여주 지방
전투에서 패했다. 그 후,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서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대
한 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인직 (1862∼1916) 신소설 작가, 언론인. 호는 국초. 경기도 이천 출생. 1906년  국민 신보  주
필과  만세보  주필 등을 역임하였고, 1907년  대한 신문 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1908년에는
원각사를 세워  은세계 를 상연하는 등 신연극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하였다. 친일 지식인으로 이
완용의 비서로서 일본에 협력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06년에 한국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 를
발표하였다. 그는 최초의 신소설 작가로서 문장에서는 입말체와 묘사체 시도의 효시를 보여 주었
으며, 객관적 묘사와 심리 묘사의 뛰어난 기량 등 신소설 최고의 작가로 평가된다. 대표작으로는
 귀의 성 ,  치악산 , 은세계 ,  모란봉 ,  빈선량의 일미인  등이 있다.

  이자겸 (?∼1126) 고려 시대의 문신. 1108년에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면서 문벌 귀족으로 성
장하였다. 1122년 예종이 죽고 외손이 되는 인종이 어린 나이로 이자겸의 보필에 힘입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새 왕이 오르자 그는 인신으로서는 최고직에 올랐을 뿐 아니라, 그의 여러 아들들
의 관직도 승급되어 그의 일가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지군 국사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으로 인신은 대유할수 없는 직함)가 되고자 일을 꾸미던 중, 상
장군 최탁과 오탁 등이 이자겸과 그의 일당인 척준경 등을 없애려 하자, 난을 일으켜 궁성에 불
을 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또한,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인종을 여러 차례
독살하려다 실패하고 인종의 밀명을 받은 최사전이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떼어놓는 데 성공하
여, 이자겸은 척준경에 의하여 거세당하고 유배지인 영광에서 죽었다.

  이재명 (1890∼1910) 독립 운동가. 평안 북도 선천 출신. 1909년 평양을 순행하기로 되어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자 평양성 부근에서 기다리던 중, 안창호의 만류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
고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갔다. 그 뒤,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친일 매
국노 이완용, 이용구, 송병중 등을 없앨 것을 맹세하고 기회를 엿보던 둥, 1909년 12월 명동 성당
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를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찔러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
히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이듬해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대
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정 (1541∼1622) 조선 중기의 화가. 호는 탄은. 세종의 5대손으로 묵죽화에 있어서는 유덕장,
신위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화가로 꼽힌다. 묵죽화뿐만 아니라 묵란, 묵매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 적의 칼에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이를 극복하고 더욱 힘
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작품으로는  풍죽도 ,  우죽도 ,  난도  등이 있다.

  이제마 (1838∼1900) 조선 말기의 한의학자. 호는 동무. 함경 남도 함흥 출신. 어려서부터 비범
한 재질을 발휘하여  경사자집 뿐만 아니라 의약과 복서에도 능통하였다. 평소부터  주역 을 애독
하여 태극설에 의한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사상 원리를 인체의 기질과 성격에 따라 사상인을
구분하였다. 따라서 질병 치료에 있어 병증보다는 체질에 중심을 두어 같은 병에 걸리더라도 환
자의 체질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여야 한다고 주장아였다. 저서로는  동의수세보원 과  격치고 가
있다.

  이제현 (1287∼1367) 고려시대의 학자, 정치가. 초명은 지공. 호는 익재, 역옹. 1301년 성균시에
장원을 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모함을 받아 원에 가있던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만권당
에 머물면서, 조맹부 등과 교유하며 고전을 연구하였다. 당대의 대문장가로서 외교 문서에 뛰어났
으며, 성리학의 수용, 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고, 문학 부문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시
는 바르고 품위가 있으며, 웅장하고 막힘에 없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가 특징을 이룬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한다. 저서에  일재난고 ,  역옹패설  등이 있다.

  이준 (1859∼1907) 순국 열사,  애국 계몽 운동가. 초명은 성재. 호는 일성. 함경 북도 북청 출
신.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에 가입하여 가두 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세계 평화 회의에 특사로 참석하여,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체
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선언하고, 한국 독립에 관한 여러 나라의 지원을 호
소하였으나, 강대국들의 대표들이 냉담하자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중섭 (1916∼1956) 서양화가. 호는 대향. 평안 남도 평원 출신. 오산 고등 보통 학교에서 미술
교사 임용련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1937년 도일, 분카 학원 재학 중 일본의
미술단체인 독립전과 자유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신인으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그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으며, 불상, 풍경 등도 몇점 전하고 있다. 주로
향토적이고 동화적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소재로 한 그림이 주를 이룬다. 대표작으로는  소 ,
 싸우는 소 · 닭과 가족 ,  집 떠나는 가족  등이 있다.

  이지함 (1517∼1578) 조선 시대의 학자. 호는 수산 또는 토정. 이색의 후손으로 어려서 서경덕
의 문하에 들어가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후일에 그가 수리, 의학, 복서, 천문, 지리, 음향, 술서
등에 통달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
에서 청빈하게 지냈으며, 그 때문에 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이 마
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에 비유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토장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
이 퍼지자, 1년의 운수를 보아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져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  토정비결 이
라 한다. 1713년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차돈 (506∼527) 신라 최초의 불교 순교자. 성 박씨. 이름 염촉. 법흥왕은 불교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불교의 힘에 의하여 국가의 번성을 꾀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가 없
었다. 이 때, 이차돈은 불교의 공인을 주장하다가 순교를 자청하여, 만약 부처님이 살아 있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 하였다. 예언대로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나오고 하
늘이 컴컴해지더니,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군신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음
을 깨닫고 국가적으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이에 법흥왕은 천경림에 절을 세우고 왕위를 진흥왕에
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이라 불렀다.

  이천 (1376∼1451) 조선 시대의 과학자, 무신. 호는 불곡. 1402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세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워,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에 임명된 후 병선을 만드는 일에 힘
썼다. 그는 무예를 닦으면서도 여러 가지 기계 장치의 원리를 생각하며 연구에 몰두하여, 왕의 명
령으로 새로운 청동 활자인 경자자를 만들었다. 1434년에는 갑인자를 만들어 조선의 활자 인쇄
기술의 완성을 보게 하였고, 서운관에서 정초, 장영실, 김빈 등과 오랜 연구 끝에 1437년 대간의,
소간의, 정남일구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선기옥형이라 불리는 혼천의를 제작했다. 또한, 여진족
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무쇠를 연철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부족한 구리 대신
에 쇠로써 대포를 만들어 화포의 개량에도 큰 업적을 남기는 등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항로 (1792∼1868)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호는 화서. 경기도 포천 출신. 조두순의 천거로 동
부 승지, 공조 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을 비판한 상소를 올리고 만동묘
의 재건을 상소한 바 있는데, 이 일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주리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호남의 기정진, 영남의 이진상과 함께
조선 말기 주리 철학의 3대가라 불린다. 그의 사상은 민족 사상인 위정 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고, 민족 운동의 실천적 지도 이념으로 승화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  등이 있다.

  이항복 (1556∼1618)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필운 또는 백사. 고려의 대학자 이제현의 후손으
로 후에 오성 부원군에 봉군되어 오성 대감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죽마 고우인 한음 이덕형
과 매우 친하여 그들 사이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1575년에 진사 초시에 오르
고, 158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
지 무사히 호휘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오성군에 봉해
졌고, 이어 형조 판서, 예문관 대제학, 의정부 우참찬에 승진되었다. 1617년 인목 대비 김씨가 서
궁에 유폐되고, 이어 왕비에서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관
직을 삭탈당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술로는  사례훈몽 ,  주소
계의 ,  노사영언  등이 있다.

  이해조 (1869∼1927) 신소설 작가.호는 동농,이열재. 경기도 포천 출신. 어려서 진사 시험에 합
격하여 신문학에 관심을 두어 고향인 포천에 청성 제일 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 잡지  소년한
반도 에 소설  잠상대 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부패관리의
부정에 대한 비판과 여권 신장, 신교육, 미신타파 등의 새로운 근대적 의식과 계몽성을 담고있으
면서, 동시에 고대소설의 전통적인 구조를 기본바탕으로 엮어 나갔다는 점에서 이인직과 더 뚜
남겼다.


  이황 (1501^1570)  조선 시대의 문신, 학자. 호는 퇴계.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참판,성균
관 대사성, 대제학 등을 지냈다. 그 후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안동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
였다. 60세에 도산 서원을 지어, 독서, 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당대
의 유성룡, 기대승, 황준량, 성혼, 이재, 이익, 이항로, 기정진 등을 잇는 영남 학파를 포괄한 주리
파 철학을 형성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소개되어 일본 유학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도 크게 존중을 받아,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에서
도의 철학의 건설자이자 실천자였다.

  이효석 (1907∼1942) 소설가.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 출신. 경성 제국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도시와 유령 이 당선된 후 문단 활동을 하였다. 이 떄부터 유진오와 더불어 카프 진영으
로부터 동반 작가라는 호칭을 들었다. 그의 문학 세계는 향수의 문학이라 할 수 있으며, 안으로는
고향 산천을 무대로 한 향토적 정서를, 밖으로는 서구적인 것에 대한 동경의 세계를 서정적 문체
로 표현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주요 작품으로는  오리온과 능금 ,  돈 ,  분녀 ,  메밀꽃 필 무렵 ,
 황제 등이 있다.

  인조 (1595∼1649 : 재위 1623∼1649) 조선 제 16대 왕. 이름은 종. 호는 송창. 선조의 손자.
1607년 능양도정에 이어 능양군에 봉해졌다. 1623년 서인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목 대비
의 윤허를 받아 왕으로 추대되었다. 인조는 정묘, 병자호란 등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군사 제도
를 개편하고 북방 정책에 힘썼다. 학문에도 힘써  황극경세서 ,  동사보편 ,  서연비람  등의 서적을
간행하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등 우수한 학자를 배출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마련하
기도 했다.

  일연 (1206∼1289) 고려 시대의 고승. 성은 김씨. 호는 목암. 1219년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하여
고승 대웅의 제자가 되었고, 1227년 승과의 선불장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다. 1283년 충렬왕으
로부터 국존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라는 호를 받았다. 일생 동안 많은 책을 지었으며, 특히  삼국
유사 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와 더불어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대표적
인 제자로는 혼구와 죽허가 있으며, 저서로는  화록 ,  게송잡저 ,  조파도 ,  제승법수  등이 있다.

  임경업 (1594∼1646) 조선 시대의 명장. 호는 고송. 충주 달천촌 출신. 1618년 무과에 합격하고,
1620년 삼수의 소농보 권관으로 임명되어, 군량과 군기를 구비하는 데 공을 세워 절충 장군에 임
명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 산성에서 청의 진로를 차단하는 등 큰 공을 세웠으
나, 끝내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 후,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대항, 병자호란의 부
끄러움을 씻으려 했으나, 사회 여건이 이를 뒷바침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충의, 지
조, 용기 등으로 점철되어 민족의 마음 속에 자리하였으니, 뒤에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
소설  임경업전 이 널리 읽혀졌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자장 (590?∼658?) 신라 시대의 고승. 성은 김씨. 이름은 선종. 636년 당나라로 가서 불경을 연
구하고 가사와 사리 등을 받았다. 643년에 귀국하여 분황사의 대국통으로 임명되었다. 645년에는
당시의 어려운 국난을 극복하고자하는 호국 정신과 삼국 통일의 염원에서 왕에게 건의, 황룡사에
9층석탑을 세우고 주지가 되었다. 649년에는 국가의 복식을 중국의 제도와 같게 만들었고, 그 이
듬해에는 당나라 연호를 쓰도록 하였으며,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중요한 업적은
불교의 교법을 널리 퍼뜨려 국민 교화와 불교 교단의 기강을 확립시키는 데 있다. 저서로는  아미
타경의기 ,  십송률목차기  등이 있다.

  장면(1899∼1966) 정치가. 호는 운석. 서울 출신. 1917년 수원 고등 농림 학교를 졸업하고, 1919
년 와이엠씨에이 영어 학교를 나와미국으로 건너갔다. 1925년 미국 맨해튼 카톨릭 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귀국,카톨릭 교 평양 교구에서 활약하다가 서울 동성 상업 고등 학교 교장에 취임, 8,15
광복 때까지 근무했다. 1946년에 정계에 투신하여 입법 의원과 민주 의원을 역임하면서 ,미,소 공
동 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을 추진하였다. .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조병
옥, 장기영 등과 한국 수석 대표로 참석하여 대한 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받아 냈다. 1949년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되었고, 6, 25 당시 유엔의 한국 파병에 큰 역할
을 하였다. 1955년 신익희, 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여 최고 의원이 되었고, 1956년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으며, 4, 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내각 책임제의 국무 총리
가 되었다. 그러나 5, 16 군사 정변으로 하야, 반혁명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보고 (?∼846) 신라 흥덕왕 떄의 장수. 대상인. 본명은 궁복 또는 궁파로  활 잘 쏘는 사람 이
라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의 장교로 활약하던 중, 신라인이 당나라의 해적들에게
잡혀 중국의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고 이에 분노하여 귀국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남해의 해상
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여,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 승인을 받아 민군으로 조직된 1만여 명의 군대를 창설,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해적을
소탕한 뒤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837년 왕위 계승 분쟁에 패배한 김우징(후의 신무왕)이 청해진으
로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
다. 그 후, 장보고의 세력은 중앙 정부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으나, 이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는
염장이라는 자객을 보내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그는 불의에 피살되었으나, 8세기 후반 이래의 신
라인의 해상 활동의 한 정점이었으며,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 세력의 선구적 존재였
다.

  장수왕 (394∼491 :재위 413∼491) 고구려 제 20대 왕. 본명은 거련 또는 연. 광개토 대왕의 맏
아들이다. 408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하던 해에 동진
에 사신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도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고,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
여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중국 및 북아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외교를 통하여 서방의 안정을 이
룩하였고, 이를 토대로 왕권의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414년에는
부왕인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 대왕릉비를 건립하였다. 427년에는 국내성에
서 평양성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475년에는 자신이 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 개로왕을 살해하였고, 신라를 공격하여 7성을 빼앗았다. 이로써 서쪽으로는 요하, 동쪽으로
는 혼춘, 북쪽으로는 개원, 남쪽으로는 아산만, 남양만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고, 인
구도 늘어나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하게 되었다.

  장승업 (1843∼1897) 조선 시대의 화가. 호는 오원, 취명거사, 문수산인. 40세를 전후하여 화가
로서 명성이 높아지면서 왕실의 초빙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감찰이란 관직을 받았다. 그
의 그림은 강렬한 필법과 묵법,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을 특징으로 하여, 산수, 인물, 영모,
사군자 등 여러 분야의 소재를 폭넓게 다루었다. 그의 화풍은 조선 말기의 회화를 마지막으로 꽃
피우면서 안중식과 조석진에게로 전해져 우리 나라 근대 회화의 토대를 이루었으며, 안견, 김홍도
와 함께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진다. 대표작으로는   삼인문년도 ,  산수도 ,  귀거래도 ,
 기명절지도 ,   호취도 ,  고사세동도  등이 있다.

  장영실 (?∼?)  조선 세종 때의 과학 기술자. 동래현의 관노로 있을 때, 그의 재주가 세종에게
인정되어 중국에 파견, 천문 기기를 연구하게 되었다. 귀국하여 궁중 기술자로서 활동하였다.
1424년에는 물시계를 만들고, 1432년에는 이천과 함께 천문 기기를 설계하고 제작을 지휘하였다.
먼저 간의와 혼천의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는 대간의, 소간의를 비롯하여 천평일구, 정남일구, 앙
부일구, 일성정시의, 규표 등을 만들었다. 1434년에 자격루를 만들었고, 그 공으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하였으며, 그 은혜에 보답라고자 옥루를 만들었다. 옥루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문헌을 철저히 비교, 연구하여 이룩한 천상 시계였다. 또한, 이천과 함께 금속 활자의 주조 사업
에도 노력을 기울여,조선시대의 활판인쇄 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였다.

  장인환 (1876∼1930) 독립 운동가. 평안 남도 평양 출신. 1904년 미국으로 가서 막노동자로 일
하면서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조국의 주권이 침탈된 데 통분하여, 대동보 국회에 가입, 독립 투
쟁을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1908년 통감부의 친일 매국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한국
인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은혜롭게 여기고 있다. 라고 망언을 하자,스티븐스를 죽이기로 결십,스
티븐스가 귀국하는 도중, 오클랜드 역에서 사살하였다. 장인환은 체포되어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교포들로 구성된 재판 후원회와 변호인들이 장인환의 거사는 애국 행위이므로 무죄임을 주장하
여, 2급 살인죄로 25년 형 금고형 판결을 받았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장지연 (1864∼1921) 언론인, 애국 계몽 운동가, 초명은 지윤, 호는 위암, 경상 북도 상주 출신.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자(아관파천),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를 지
었다. 1901년 황성 신문사의 사장이 되어 민중 계몽과 자립 정신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 신문 에  시일야 방성 대곡 이라는 일제의 침략과 을사 5적을
규탄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국민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논설을 써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일로 투
옥되었으며,  황성 신문 도 중지 처분되었다. 1906년 윤호정, 심의성 등과 함께 대한 자강회를 조
직하고, 국권 회복울 위한 본격적 애국 계몽 운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1909년  경남 일보 의 주필로서 언론 구국 운동을 계속하였다. 저서로는  증보대한강
역고 ,  위암 문고 ,  동국 역사 , 대동 문수 ,  대한기년 ,  농정전서  등 많은 작품이 있다. 1962년 건
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전봉준 (1854∼1895) 조선 말기 동학 운동의 지도자. 호는 해몽. 몸이 왜소하여 흔히 녹두라 불
렸으며, 뒷날 녹두 장군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부친이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당하자, 동학에 입교
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임명된 조병갑이 많은 세금과 백성들의 재물을 빼
앗는 것을 보고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1894년 동학 농민군
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전주를 점령하는 등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러
나 일본군과 연합한 정부군의 반격으로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전봉준은 정읍에 피신하였
다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영택 (1894∼1968) 소설가, 목사. 호는 늘봄, 불수레,장춘. 평안 남도 평양 출신. 1919년 단편
 혜선의 사 를  창조 에 발표함으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서울 감리교 신학 대학 교수
를 거쳐, 미국 패시픽 신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흥사단에도 입단하였다. 귀국 후, 문교부 편수국
편수관, 대한 기독교 문서 출판 협회 등 학계,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1961년에는 한국 문인 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의 문학은 식민지 시대의 사회 문제와 개인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다루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주로 기독교 신앙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
종교인이자 작가로서의 정신 세계를 구현하였다. 작품으로는  화수분 ,  한 마리 양 ,  생명의 봄 ,
 청춘곡 ,  순교자 ,  소 ,  크리스마스 전야의 풍경  등이 있다.

정극인 (1401∼1481) 조선 시대의 문신, 학자. 호는 불우헌, 다각. 145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5년 단종이 세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자, 벼슬을 그만두고 태인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472년 그 곳 자제를 가르친 공으로 3품 산관의 벼슬이 내려지자,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우
헌가 ,   불우헌곡 을 지어 이를 송축하였다. 문학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 과 단가  불우헌가 , 한림별곡체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 시가사에 공헌을 하였
으며, 송강 정철과 더불어 가사 문학의 쌍벽을 이루었다.

  정도전 (1337∼1398) 조선 건국의 정치가, 학자. 호는 삼봉.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 일
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 부사로 승진하여 전제 개혁안을 적극 지지하였고, 구세력을 제거하여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92년에는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그 공
으로 조선 건국의 왕조의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 문인이면서도 무를 겸비하여 성격이 호방하고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유학의 대가로서  학자지남도 ,   심문천답 ,   불씨잡변  등의 철학서를
저술하여 귀족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여 유교를 크게 발잔시켰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 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저서에  삼봉집 ,.  경제
문감 ,.  조선경국전  등이 있다.

  정몽주 (1337∼1392) 고려의 문신,. 학자. 초명은 몽란. 호는 포은. 136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성계와 함께 여진 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농시승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끝까지 고려 왕조를 지키려다 이방원의 부
하인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고려 말 정승의 자리에 오른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시조  단심가 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
다. 교육의 진흥을 위해 기강을 정립하여 국체를 확립하고, 의창을 세워 궁핍한 백성을 구제하고,
수참을 설치하여 뱃길 이용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길재, 이색과 함께 고려 삼은이라 일컬어지며, 저서로는  포은집 이 있다.

  정문부 (1565∼1624) 조선 시대의 문신, 의병창. 호는 농포. 1588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 참
군,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명천, 길주에 주둔
한 왜적과 장덕산에서 크게 이기고,쌍포 전투와 백답교 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 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그 후, 영흥 부사, 공주 목사, 호조 참의, .형조 참판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 반정
으로 전주 부윤이 되었고, 이괄의 난에 관계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농포집 이 있
다.

  정발 (1553∼1592) 조선 중기의 무신. 호는 백운. 157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곧바로 해남 현감, 거제 현령이 되었다. 이어 비변사의 낭관이 되었고, 위원 군수.훈련원 부정이
되었다. 1592년 절충 장군의 품계에 올라 부산진 첨절제사가 되어 방비에 힘썼다. 이 해 4월 임진
왜란이 일어나 부산에 상륙한 왜병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성이 함락당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좌찬
성에 추증되었으며, 동래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이다.

  정상기 (1678∼1752) 조선 영조때의 지리학자. 호는 농포자. 평생 학분에만 전념하였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실학파의 지리학자로서 오랫동안 전국을 답사하여 역대 국경 변천의 지리학적인
검토를 꾀하였다. 지도 제작에 있어 과학적인 백리척을 이용한 축척법을 사용한 점은 특이하다.
그가 제작한  동국지도 에 대하여 이익은  성호사설 에서  정상기가 처음으로 백리척을 축척으로
써서 지도를 그렸고, 또 가장 정확하다.  라고 찬탄하였다. 그의 지도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축척이 밝혀진 지도일 뿐만 아니라, 도와 도를 이으면 전 국도가 되도록 동일 축척에 의하여 제
작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인자비감 ,   농포문답 ,   심의설 ,   도령편 ,   향거요람 ,   치군요람  등
이 있다.

  정선 (1579∼1676) 조선 후기의 화가. 호는 겸재, 난곡, 겸초.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으며,
김창집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위수, 한성부 주부, 훈련도감랑청,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고, 화단에서 명성도 얻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자연을 다룬 그의 작품들은 금강산, 관동 지
방의 명승지,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수 있는 것들과 그가 실제 지방 수령으로 근무
하던 소재지를 화폭에 담은 것이다. 회화 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이나 채색화의 맥을 이으
면서 나름대로의 필묵법을 개발하였다. 조선 시대의 어느 화가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긴 그는 선
비나 화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어 겸재파 화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을 이어
가게 하였다. 그의 화법은 김윤겸, 김응환, 김홍도 등으로 전해졌으며, 그의 집안에서는 손자 황만
이 화법을 이어받고 있다. 작품에  입암도 ,   내금강도 ,   여산초당도  등이 있다.

  정약용 (1762∼1836) 조선 시대의 문신, 실학자. 호는 사암, 탁옹, 태수, 다산. 1789년 문과에 급
제하여 부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다. 16세 때부터 이가환, 이승훈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이벽
을 통하여 서양의 여러 학문에 대해 배웠다. 그의 유교 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모시강의 ,
 내강중용강의 ,   희정당대학강의  등이 있다. 기술적인 업적으로는 1789년 배다리의 준공과 1793
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5년 천주교 주문모 신부의 조선 잠입 사건으로 천주교 신자인
다산은 위기에 처했으나, 다산을 총애한 정조는 그를 황해도에서 봉직하게 하였다. 여기서 지내는
2년 동안  마과회통 ,   사기찬주 와 같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 지 1년도
채 못 되어 정조가 죽자, 책롱 사건으로 채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나, 1801년 신유사옥 떄, 조
카 사위인 황사영의 백서 사건에 관련되어 출옥과 동시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으며, 그 곳
에서  목민심서 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지었다. 그는 유형원, 이익을 거쳐 내려온 실학 사상을 집
대성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조선 최대의 정치, 경제학자이다.

  정약전 (1758∼1816)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호는 손암 또는 연경재. 1790년에 문과에 급제하
여, 부정자, 병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벽, 이승훈 등과 교유하면서 서양의 역수학을 익히고 천주
교의 신자가 되었다.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게 되자, 아우 정
약용과 함께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었다. 그는 다시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청소년들을 가
르치고 틈틈이 저술 활동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자산어보 를 비롯하여  논어난 ,  동
역 ,  송정사의  등이 있으나, 현재  자산어보 만이 전해 오고 있다.

  정여립 (1546∼1589) 조선 시대의 사상가. 1570년 문과에 급제 예조 좌랑, 수찬 등을 지냈다. 본
래 서인이었으나 동인이 정권을 잡자 이에 아부하고, 스승인 이이와 성혼을 비판하고 배반, 선조
의 노여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동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인망과 영향
력이 있어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 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세력을 확장하여 갔다. 1587년 왜선
들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하였을 때, 남언경의 요청에 의하여 대동계를 동원, 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 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도참 사상을 신봉하여 이씨가 망하고 정
씨가 득세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 반란을 꾀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관군에 쫓기자 자살하고 말았다.

  정인보 (1892∼?) 한학자, 교육자. 호는 담원 또는 위당. 서울 출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부모
와 더불어 진천, 목천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신채호 박
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여 교포의 정치적 문화적 계몽 활동을 벌이며 광복 운동
에 전념하였다. 1918년 귀국, 연희 전문 학교, 협성학교, 불교 중앙 학림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광복 후에는 국학 대학의 학장에 취임하여 국학의 부흥과 교육에 힘썼고, 국민에게
민족를 바르게 알리고자  조선사 연구 를 간행하였다. 6 25당시 공산군에 의하여 납북되었다. 저서
로는  조선사 연구 와  양명학 연론  등이 있다.

  정인지 (1396∼1478)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학역재. 1414문과 급제로 예문과 부교리, 예조 좌
랑,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집현전에 들어갔다. 유학과 전고에 밝아 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으며, 세종 대에서 문종 대까지 신임을 받아 문학
을 관장하고 역사, 천문, 아악을 정리하였고, 한글 창제에도 참여하는 등 학문의 발전과 제도 정
비에 기여하였다. 단종에서 성종 초에는 학덕을 구비한 원로 대신으로 빈번한 정변과 어린 국왕
의 즉위로 인한 경직되고 혼란된 정치 분위기와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
는  학역재집 이 있다.

  정인홍 (1535∼1623) 조선 시대의 문신, 의병장. 호는 내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
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 남이공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1618년 인목 대비 유
폐 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나, 1623년 인조 반정으로 이이첨 등과 함께 참형되었다. 저
서로는  내암집 이 있다.

  정조 (1752∼1800 :재위 1777-1800) 조선 제22대 왕. 이름은 산. 호는 홍재. 아버지 장헌 세자
(사도 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 세자의 후사가 되어 문화 사업을 추진
하고 인재를 야성하였다.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임진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 새로
운 활자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실사구시 를 목표로 하는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가혹한 형벌을
금지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한편,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
하여 선왕(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조선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대한 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종되어 선황제가 되었다.

  정중부 (1106∼1179) 고려 시대의 무신. 인종 때 견룡대정의 벼슬에 올라 상장군을 지냈다. 당
시 무신 멸시의 풍조가 만연하자 1170년 의종이 화평재에 행차하였을 때, 견룡행수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정중부는 왕을 호종하던 신하들을 살해하고, 곧바로 개성으로 들어가
궁궐과 태자궁을 휩쓸면서 문신 50여 명을 죽이고 왕을 거제현으로, 태자를 진도현으로 귀양보내
고, 왕의 아우 익양공 호(명종)를 즉위시키고 무신 정권을 수립하였다. 1173년 무신 정권을 타도
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려는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고 의종을 살해하였다. 1179년 무신인 경대
승에게 아들 균과 사위 송유인 등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정지상 (?∼1135) 고려 시대의 문신. 서경 출신. 호는 남호. 11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 좌
사간 등을 지냈다. 정치에 깊이 간여하면서 음양 비술에도 관심이 많아 묘청, 백수한 등과 함께
삼성으로 불리었다. 서울을 서경으로 옮길 것과, 금나라를 정벌하고 고려왕도 황제로 칭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1135년 묘청의 난 때 이에 관련된 혐의로 김부식에게 참살되었다. 그는 정치적 인
물로서만이 아니라 문인으로서 특히 뛰어난 시인이었다. 1130년 왕명에 따라 곽여를 위하여  산재
기 를 짓기도 했으며, 고려 12시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노장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역학, 불교에
도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 글씨에도 능통하였는데, 특히 사륙 변려문을 잘 썼다고 한
다. 작품으로는  동문선 에  신설 ,  향연치어 가,  동경잡기 에  백률사 ,  서루 등이 전한다.

  정천익 (?∼?) 고려 공민왕 때의 독농가. 사위 문익점이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목화씨를 심어 3년간의 노력 끝에 재배법을 터득하여 종자를 널리 보급하였다. 그의
아들 문래가 실을 뽑는 방법과 그 손자 문영이 무명 짜는 법을 고안해 냈다. 이후부터 우리 나라
에 무명옷이 크게 퍼지게 되었다.  문익점과 함께 목화를 처음 심어 번식시킨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 면화 시배지가 사적 제 108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정철 (1536∼1593) 조선 시대의 문신, 시인. 호는 송강. 서울 출생.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
헌부 지평, 좌랑, 현감, 전적 등을 거쳐 암행어사, 직제학,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45세 때
그으ㅢ 최초의 가사  관동별곡 과  훈민가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 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
휘하였다.  1584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사미인곡 ,  속미인곡 ,  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가사 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대가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시
대의 시가 문학에 쌍벽을 이루었다.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정충신 (1576∼1636) 조선 중기의 무신. 호는 만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권율
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 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하 사람을 모집하였으나 응하는 사
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청하여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그에게  사서 를 가르쳤는데, 머리가 총명하여 아들같이 사랑하
였다.  이 해 가을에 무과에 합격하여 만포 첨사,안주 목사, 저누 대장, 경상도 병마 절도사 등을
지냈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하였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천문, 지리, 복서, 의술 등 다
른 방면에 걸쳐서 점통하였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만운집 ,  금남집 ,  백사북 천일
록  등이 있다.

  조광조 (1482∼1519) 조선 시대의 문신. 김굉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김종직의 학통을 이
은 사림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510년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그 후 전적, 감
찰, 예조, 좌랑을 지냈다.  그는 유교에 의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주장하였다.  미신 타파를 내세
워 소격서의 폐지를 실행하였고, 현량과를 처음 실시하게하여 자기 일파의 신진 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킴으로써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도의 개혁,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특
히, 정국 공신의 솓을 깎아내려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
롯한 조광조의 도학 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 오던 왕은 훈구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
여 조광조를 투옥하기에 이르렀다.  영의정 정광필의 변호로 일단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구파의
끈질긴 탄핵으로 마침내 사사되었다.  그 뒤, 선초 초에 죄가 풀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
향되었다.  또한, 율곡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등과 함께 그를 동방 사헌이라 불렀다.  저
서로는  정암집 이 있다.

  조만식 (1882∼1950) 독립 운동가,  정치가. 호는 고당. 평안 남도 강서 출신. 일본 세이소쿠 영
어 학교와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유학 중 장로교, 감리교 연합회 조선인 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의 부저항주의 심취하여 민족 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졸업 후 설립한 오산 학교
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평양 기독교
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1922년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
여 국산품 애용 운동을 벌였다.  1932년  조선 일보  사장이 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 섰다.  광복 직후 조선 민주당의 당수가 되어 북한에서 반탁 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소련군에 위해 연금되어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평생을 기독교 정
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 무저항, 불복종 운동으로 대항하였으며,
6.25 때 공산군에 의하여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병갑 (?∼?) 조선 막기의 탐관 오리.  1892년 고부 군수가 되어 흉년이 들자, 농민들에게 강
제로 세를 징수라고, 부유한 농민들을 잡아들여 갖가지 죄명을 씌워 재물을 빼앗고, 태인 현감을
지낸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하여 강제로 금품을 거두기도하였다.  또한,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
하여 만석보를 쌓고 추수기에 수세를 거둬들여 착복하였다.  이에 농민들이 전봉준을 내세워 억
울한 사정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4년 농민들이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추
대하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그의 탐학 행위에 항거하여 일어난 고부 민란은 곧 동학 농민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조병세 (1827∼1905) 조선 말기의 문신,  순국 열사. 호는 산재. 노론파의 명문에서 태어나 1864
년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 대사헌, 이조 판서,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우의정에 올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하여 을사 5적의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민영환, 이근명 등과 함께 입궐하여 을사조약의 무효, 5적신의 처형, 새로 인재를
뽑아 외부 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주장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 해산당하고 연금되었다.  곧 풀려났으나 또다시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며 비분을
참지 못하고, 각구 공사와 동포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
령장을 추서하였다.

  조병옥 (1894∼1906) 독립 운동가,  정치가. 호는 유석. 충청남도 천안 출신이다.  평양 숭실 학
교와 연회 전문 학교를 거쳐 미국 칼럼비아 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연회 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광주 학생 사건, 신간회 사건, 동우회 사건 등 항일 운동에 연루되어 5년에 걸쳐 옥중
생활을 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대통령 특사로 각국을 순방하고, 유엔 총회에 참석하여
대한 민국의 국제적 신임을 얻는 데 크게 기여 하였다.  1950년 내무부 장관으로 남침해 온 북한
군을 대구에서 방위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그 해 5월, 이승만의 독재 정권에 반대, 사직
하였다.  1958년 민주당 최고 위원으로 추대되면서 자유당 독재 정치에 반대하는 반독재 투쟁을
선도하였으며,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병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 세상
을 떠났다.  저서로  만주주의와 나 ,  나의 회고록  등이 있다.  1962년 건국 훈장 국민장을 추서
하였다.

   조소앙 (1887∼1959) 독립 운동가,  본명은 용은. 경기도 양주 출신. 선균관을 수료하고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귀국하여 경신 학교, 양정 의숙, 대동 법률 전문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중국 혁명가 천궈푸,  황줴와 함께 항일 단체 대동단을 조직하였다.  1917년 스
웨덴의 사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 사회당 대회에  주권 불멸론 ,  인민 민유론 의 취지를 제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또한, 유럽을 순방하며 한국의 자주 독립과 그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1929년 이동녕, 이시영, 김구, 안창호 등과 한국 독립당을 창당, 독자적 이념 체계인 삼균주의(정
치.경제.교육의 균등)에 입각한  태극기 민족 혁명론 을 제창하는 등 임시정부의 이론 전개와 외교
문제를 거의 전담하였다.  광복 후에는 국민 회의를 조직하여 상무 위원회 의장, 반탁 투쟁 위원
회를 조직하여 상무 위원회 의장, 반탁 투쟁 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50년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전국 최고 득표자가 되었으나, 6.25때 강제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한국 문원 ,
 소양집 ,  유방집  등이 있다.  1989년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조식 (1501∼1572) 조선 시대의 학자. 호는 남명. 지리산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루었으며, 성명을 닦은 후의 실행을 주창하고, 경의를 신조로 하여, 반궁 체험과 지경
실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헌릉 참봉,  전생저 주부,  단성 현감,  상서원 판관 등 여러 벼슬
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퇴하고 두류산 덕산동에 들어가 대유학자로 쌍벽을 이루었다.  선
조 때에 대사간에 추증되고, 광해군 때에 영의정 추증과 함께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남명집 ,
 남명학기 유편 ,  파한잡기  등이 있다.

  조엄 (1719∼1777)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영호. 173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752년 정시 문과
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 지평, 수찬, 교리, 동래 부사, 충청도 암행 어사 등을 지냈다.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고구마의 종자를 가져와, 그 저장법과 재배법을 알려 구황 작물로 널리
이용하게 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 경
상도 관찰사로 재임시 창원의 마산창. 밀양의 삼랑창 등의 조창을 설치하여 전라도에까지만 미치
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까지 통하게 함으로써, 세곡 납부시 민폐를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
을 증가하게 하였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 가 전하고
있다.

  조위총 (?∼1176) 고려의 문인. 정중부, 이의방 등이 의종을 시해하고 많은 문신들을 죽이자, 이
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토벌군을 내보냈으나 크게
패하고, 조위총은 그 여세를 몰아 대동강까지 추격하여 관군을 물리쳤으나, 토벌군의 총공격으로
서경이 함락되고 그도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조윤제 (1904∼1976) 국문학자. 문학 박사. 호는 도남.  경상 북도 예천 출신. 경성 제국 대학
법학부 조선어과를 나왔다.  그 뒤, 경신 학교, 양정 중학교, 동성 상업 학교, 천주교 신학교 등의
강사를 역임하고,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 대학교 대학원 부원장, 문리과 대학 교수, 동 대학원
장 및 부총장을 역임한 뒤, 청구 대학, 영남 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다가 71세 때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조선 시가사강 을 필두로  교주 춘향전 ,  조선 시가의 연구 ,  국문학사 ,  국문학 개설 ,
 한국 문학사  등 20여권에 이른다.  논문은  조선 문학과 한문과의 관계 를 시작으로 50여편, 수
필, 잡문 등은 100편에 이른다.

  조준 (1346∼140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호는 우재 또는 송당. 1374년 문과에 급제하여 통
례문 부사, 강원도 안렴사, 밀직제학, 도검찰사 등을 지냈다.  1388년 윤소종, 조인옥, 허금 등과
우왕의 폐위와 왕씨의 부흥을 꾀하였다.  이 무렵에 이성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뒤에 오도 도
통사, 판문하 부사 등을 지냈다.  그는 사학을 잘 하고 경학과 시문에도 능하였으며, 문집으로  송
당집 을 남겼다.  또한, 토지 제도에 밝은 학자로서 하윤 등과  경제육전 을 펴냈는데, 이는 뒤에
 속육전 ,  육전등록  등으로 보완되어  경국대전  편찬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전제 개혁안은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에 목표를 둔 것이었다.

  조지훈 (1920∼1968) 시인. 본명은 동탁. 경상 북도 영양 출신. 혜화 전문 학교 문과를 졸업했
다.  1939년  문장 지에 시  고풍의상 ,  승무 ,  봉황수 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박목월,
박두진과 공동으로 간행한  청록집 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
세한 민족 전서를 노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여운 과 수상록  시의 원리 , 번역서  채근담  등
이 있다.

  조헌 (1544∼1592) 조선 시대의 문신, 의병장. 호는 중봉, 도원, 후율, 경기도 김포 출신. 1567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의 정자, 호조 좌랑,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승병들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금산에서 왜군과
끝까지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으며, 후세에 이를 금산 전투라 일컬어 숭모하게
되었다.  1604년 선무 원종 공신 1등으로 책록되었고, 173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주세붕 (1495∼1554) 조선 시대의 문신, 학자. 호는 신재, 무릉도인, 손옹. 1522년 문과에 급제하
여 승문원 정자, 수찬, 공조 좌랑, 병조 좌랑, 사간원 헌납 등을 지냈다.  1541년 풍기 군수가 되
어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룰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 기관으로 우
리 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 서원은 1550년에는 풍기 군수였던 이황의
청원으로 소수라는 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되었으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함께 지녔다.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을 때,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였으며, 기묘사화 이후 폐지되었던 여씨 향약을 다시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
도 하였다.  저서로는  죽계지 ,  해동명신언행록 ,  진헌심도 ,  무릉잡고  등이 있다.

  주시경 (1876∼1914) 국어학자. 호는 한힌샘. 배제 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1896년  독립 신문
을 창간한 서재필에게 발탁되어 똑립 신문사 회계 사무 겸 교보원이 되었다.  배제 학당 협성회
전적, 찬술원, 교보원 등을 통해 애국 계몽 운동을 펴는 한편, 여러 학교와 강습소의 교사, 강사직
을 맡아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일요일에는 조선어 강습원에서 수많은 후
진을 깨우쳐  조보따리 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한글의 교육, 보급에 정열을 불태웠다.  대표적 저
술인  국어 문법 은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 국어 문법의 하나로서 국어의 특성에 입각한 음운,
품사, 구문, 어휘의 4부를 갖추고 있다.  저서로는  국문 연구 ,  말의 소리 ,  고등 국어 문전  등이
있다.

  주요섭 (1902∼1972) 소설가, 영문학자. 호는 여심. 평양 출신. 중국 후장 대학 교육학과, 미국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수료하였다.   신동아  주간, 중국의 북경 푸렌 대학 교수,  코리안 타임스
주필, 경희 대학교 교수,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사무국장, 코리안 리퍼블릭 이사장, 한국 문학 번
역 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개벽 지에 소설  추운 밤 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
작하여 40편 가량의 단편 소설과 4편의 장편 소설, 2편의 중편 소설을 남겼다.  초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과 갈등을 인도주의적 자세로 그렸고, 기성 윤리나 외모 또는 배신으로 인한 사랑
의 좌절이나 향수 등을 그리다가 광복 후의 무질서와 혼란을 고발하고 비판하면서 사회 의식을
각성하고 자아의 자작을 탐색해 나갔다.  말기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다운 삶의 문제 등으로
변모하면서 근대적인 리얼리즘을 한국 문학 속에 보편적인 태도와 기법으로 그려 나갔다.  작품
으로는  깨어진 항아리 ,  구름을 잡으려고 ,  사랑 손님과 어머니 ,  아네모네의 마담  등이 있다.

  지눌 (1158∼1210) 고려 시대의 고승. 성은 정씨. 호는 목우자. 황해도 서흥 출신. 당시의 불교
계가 선종과 교종의 대립으로 극심하던 때, 교종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선종의 가르침을
섭렵하였고, 그 합일점과 조화를 모색하여 꾸준한 구도 끝에 1182년 승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보
문사에서  마음이 부처 라는 선종의 종지에 의거하여 먼저 깨닫고 수행하는 돈오 점수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는 정혜 쌍수를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권수정혜결사문 ,  수심결 ,  계초심학인문 ,
 화엄론절요 ,  상당록  등이 있다.

  지석영 (1855∼1935) 의사, 문신, 국어학자. 호는 송촌. 의학 교육을 받은 일이 없으나, 일찍부터
서학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 의학책을 탐독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일본과 체
결되면서 통역관으로 일본에 갔던 스승 박영선이 가져온 구가의  종두귀감 을 전해 받고,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79년 부산의 제생 의원에 가서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와 종
두침 2개를 얻어 서울에서 40명에게 우두를 놓아 주었다.  이는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였다.  그는 전라도 어사 박영교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
두법을 가르쳤다.  1885년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우두 신설 을 지어 냈다.  1894
년에는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하게 되어 우두를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1902년
그의 제창으로 훈동에 의학교의 부속 병원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19명의 의대생을 배출하였다.
11년 동안 의학 교육에 헌신하여 근대 의학을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독립 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또한,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여 주시경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1908년 국문 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
한  자전석요 를 지어 냈으나, 국권 침탈로 모든 공직을 버렸다.  일본의 간곡한 협조 요청이 있었
으나, 초야에 묻혀 살다가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지증왕  (437∼514: 재위 500∼514)  신라 제 22대 왕. 성은 김씨.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철로라
고도 한다.  64세에 즉위하여 502년에 순장(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신하나 종을 함께 묻던 일)
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고, 우경(소를 이용한 농사 방법)을 시행하도록 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
시켰다.  503년에는 사라, 사로, 신라 등 다양하게 사용되던 나라 이름을  신라 로 확정하였고, 왕
호를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었다.  이는 중국의 정치 조직과 문물에 대하여 적극적으
로 수용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상복법의 제정, 선박의 이용 등 민생에 관한 시책을 실
시하였다.

  진덕 여왕  (?∼654:재위 647∼654) 신라 제 28대 왕. 성은 김씨.  이름은 승만. 신라 시대 3인
의 여왕 중 한 사람이다.  즉위하던 해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
고,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652년 김춘추의 들째 아들 인문을
당나라에 보내 외교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또한, 김춘추의 건의에 따라 중국의 관제와 연호
를 사용하여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다.

  진성 여왕 (?∼897:재위 887∼897)  신라 제 51대 왕. 성은 김씨. 이름은 만. 즉위 후 주, 군에 1
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는 등 민심 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 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완산
주에서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여 무주 동남쪽의 군현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양길과 궁예의 난으
로 실제 신라의 통치 영역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지역에 그쳤다.  897년 조카인 헌강왕
의 아들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진흥왕 (534∼576:재위 540∼576)  신라 제 24대 왕. 성은 김씨. 이름은 삼맥종 혹은 심맥부. 지
증왕의 손자. 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황태후 김씨가 섭정하였다.  551년부터 친정을 시작하
면서 개국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적극적인 대외 정복 사업을 전개하였다.  554년 대가야와 연합한
백제군을 관산성에서 물리치고,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함으로써 낙동강 유역을 전부 차
지하였다.  활발한 정복 사업의 결과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여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웠다.  또한, 대내적인 정치에도 힘을 기울여 545년에는 이사부의 건의를 받
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 를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 법흥왕 때에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 지원하였으며, 566년에는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를 지었다.  576년에는 여성 중심의 원
화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되게 하였다.

  ㅊ
  채만식 (1902∼1950)  소설가. 극작가. 호는 백릉. 중앙 고보와 일본 와세다 고등 학원을 중퇴하
였다. 그 뒤 조선 일보사, 동아 일보사, 개벽사 등의 기자 생활을 하였다. 1924년 단편  새길로 를
 조선 문단 에 발표하여 장편, 단편 소설과 희곡, 평론, 수필을 썼다. 작품 세계는 당시의 현실 반
영과 비판을 다룬, 식민지 상황에서의 농민의 궁핍, 지식인의 고뇌, 도시 하층민의 몰락, 광복 후
의 혼란상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투철한 사회 의식을 가진 사실주의 작가의 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치숙 ,  탁류 ,  어머니 ,  레디메이드 인생  등이 있다.

  처용 (?∼?)  신라 헌강왕 때의 관리. 처용랑이라고도 한다. 설화상으로는 동해 용왕의 아들이
다. 헌강왕이 개운포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하자, 동해의 용이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
타나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에 와서 왕의 정사를 도
왔는데,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은 그에게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고 급간의 관
등을 주었다. 아내가 매우 아름다워서 역신들이 흠모한 나머지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몰래 가 함
께 잠을 잤다. 이 때 밖에서 돌아온 처용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 를 부르며 춤
을 추었다. 이에 역신은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어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역신은
당신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맹세코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린 부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물리쳤다 한다.

  척준경 (?∼1144)  고려 시대의 무신. 계림공(뒤의 숙종)의 종자로 있다가 추밀원 별가가 되었
다. 1107년 윤관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고, 길주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워
공부원 외랑이 되었다. 1126년 이자겸의 난 때, 군사를 일으켜 궁궐에 침입하여 불사르고 반대파
들을 살해하였다. 그 뒤, 왕의 밀지를 받은 최사전의 설득으로 뜻을 바꾸어 이자겸을 잡아 귀양보
냈다. 이듬해 권세를 함부로 부려 유배되었다. 그러나 1130년에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얼마 뒤
병으로 죽었다.

 최남선 (1890∼1957) 문화 운동가, 작가, 사학자. 호는 육당, 한샘, 곡교인, 백운향도 등이다. 서울
출신. 일본 와세다 대학 지리역사과를 중퇴하였다. 18세 때 출판 기관인 신문관을 창설하고 민중
을 계몽하고 교화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였다. 1908년에 종합 잡지  소년 을 창간하고, 창간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 를 실어 한국 근대 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를 선보였으며, 3 1 운동 때는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또한, 민족사를 파악하기 위해 민족 문화가 형성, 전개된 모습을 한국사, 민
속, 지리 연구와 문헌의 수집, 정리를 통해 밝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활동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 문화 운동사에 높은 봉우리가 되었으나, 3 1 운동으로 구금 투옥되고 나서 석방된 뒤
계속 일제의 감시, 규제를 받아 친일의 길을 걸었다. 일제 말기에 침략 전쟁을 미화, 선전하는 언
론 활동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죽은 뒤 1958년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975
년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전집이 간행되었다. 저서로는  백팔 번뇌 ,  조선역사 ,  불함문화론
등이 있다.

  최무선 (1325∼1395)  고려 말의 장군. 무기 발명가. 우리 나라에서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사용하였다. 중국인 화약 제조 기술자인 이원에게서 초석(염초)의 제조법을 알아 내었다. 실험해
본 결과 자신감을 얻은 그는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화약과 각종 무기를 만들어 냈다.
1380년에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오자,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아들 해산과 손자 공손도 화약과 화기의 연구에 참
여하였다. 저서로는  화약수련법 을 남겼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최세진 (1473∼1542)  조선 시대 중국 성운 학자. 한어, 이문,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1502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질정관, 군자감정, 오위장, 상장군, 동지중 추부사 등을 지냈다. 능통한 중
국어와 외교 문서에 사용하는 특이한 문체인 이문 실력 때문에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통역
을 담당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40여 년 간에 걸쳐 저작 7종과 번역, 언해 10종을 합쳐 모두 17
종의 저술을  남겼다. 중요한 자료는  사성통해 ,  번역노걸대 ,  번역박통사 ,  훈몽자회 ,  이문집람
등이 있다. 중국어 교과서인  번역노걸대 와  번역박통사 에 번역된 문장은 당시 국어의 구조를 정
리,파악한 것이며, 풍부한 어휘가 실려 있다.  훈몽자회 는 아동들에게 한자의 음과 뜻을 실물을
통하여 정확히 가르치기 위하여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이름을 처음으로 정하고, 순서와 받침 등
을 정리하여 한글 실용화와 옛말 연구에 도움을 준 책이다. 그의 저서로는  친영의주언해 ,  책빈
의주언해 ,  번역여훈 ,  소학편몽  등이 있다.

  최승로 (927∼989)  고려 초기의 문신, 재상. 시호는 문정. 982년에 행정의 요직을 맡게 되자,
태종에서 경종에 이르는 다섯 왕의 치적평과 북계의 확정과 방위책, 공덕재의 폐지, 승려의 궁중
출입 금지 등 불교의 폐단에 관한 건의문과 그 밖에 사회 문제, 대중국관 등 28조에 달하는 시무
를 올려 성종을 크게 공감시키고, 새로운 국가 체제 정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최시형 (1827∼1898)  동학의 제2대 교주. 초명은 경상. 호는 해월. 경주 출신.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에 동학을 믿기 시작하였다. 1863년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되어 관헌의 감
시를 피하여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신도들을 조직하였다. 동학 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관헌의 수색과 탄압이 가중되어 1892년부터 교조의 신원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전라 북도 삼례 및 광화문, 충청 북도 보은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으나, 이에
조정에서 탐관 오리를 파견하자 자진 해산하였다. 1894년 전봉준이 고부 군청을 습격한 것을 시
발로 하여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전봉준이 신도들을 집결시켜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 운동이 진압되자, 피신 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전력을 다했다. 1897년 손
병희에게 교주를 전수했고, 1898년에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교수형을 당했다.

  최영 (1316∼1388)  고려의 명장,재상. 왜구를 자주 토벌하여 우달치가 되었으며, 홍건적을 무찌
러 그 공으로 전리 판서가 되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
이동을 요동에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 정벌을 결심하고 팔도 도통사가 되어 이성계, 조민수 등으
로 하여금 출정케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 정벌
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 합포, 충주로 귀양갔다가 참수되었
다.

  최우 (?∼1249)  고려 무신 정권의 집권자. 아버지 최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교정별감이 되
었다. 1225년 사제에 정방을 설치하고 문무 백관의 인사 행정을 처리하였다. 1227년에는 사제에
서방을 두었는데, 이는 도방과 더불어 최씨 정권의 숙위 기관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1232년에 몽
고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 천도를 하게 하였다. 1234년에는 국자감을 수축하고, 양현고에 쌀 300
곡을 바치는 등 장학에 힘썼다. 또한, 강화에서 대장경 제조에 착수하게 하여, 그가 죽은 뒤인
1251년에 완성을 보았다. 해서, 행서, 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최익현 (1833∼1906)  한말의 애국 지사. 호는 면암. 경기도 포천 출신. 1855년 명경과에 급제하
여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신창 현감,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
결하여 자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1868년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흥선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리고, 만동묘를 비롯한 많은 서원의 철폐를 단행한 대원군의 시정을
건의한 상소를 올리는 등 상소문을 여러 번 올려 그의 미움을 사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셍활 동안 그는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우국 애민의 위정 척사의 길을 택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 체결되자 곧 바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오작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고,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시
마 섬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우국 애민의 정신과 위정 척사 사상은 한말의 항일 의병 운동
과 일제 강점기의 민족 운동, 독립 운동의 지도 이념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성리학
에 기본을 두고 있는 이항로의 학문을 이어받아 애국의 실천 도덕과 전통 질서를 수호하는 명분
론이었다. 저서에  면암집  48권이 있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최자 (1188∼1260) 고려의 문신. 호는 동산수. 1212년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감 학유, 국자감 대
사성, 한림학사, 문하시랑, 판이부사 등을 지냈다. 시문에 뛰어나 당대에 크게 문명을 떨쳤으며,
문학 평론 사상 이인로와 함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또한, 학식과 행정력을 겸비하여 많은
치적을 쌓았다. 저서로는  최문충공가집 ,  속파한집 ,  삼도부  등이 있다.

  최제우 (1824∼1864) 동학의 교조. 초명은 복술, 제선. 호는 수운, 수운재. 경주 출신. 1860년 경
주 용담정에서 종교 체험을 통해 도를 깨우치고 동학을 창시하였다. 포교를 시작하자 많은 사람
들이 동학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나라에서는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탄압하자, 그는 남원의 은적암으로 피신하여 동학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고,  논학
문 ,  안심가 ,  교훈가 ,  도수사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자 교세가 크게 확장되
었으나,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864년 대구 장대에서 41세의 나이로 효수형에
처하여졌다.  저서로 동경대전 ,  용담유사  등이 있다.

  최찬식 (1881∼1951) 소설가. 호는 해동초인, 동초. 경기도 광주 출신. 갑오개혁 후 1897년에 아
버지가 설립한 시흥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07년 중국에서 발행한 소설 전집  설부
총서  를 번역한 뒤, 우리 나라 현대 소설의 토대가 된 신소설 창작에 착수했다.  자선 부인회 잡
지  편집인과  신문계 ,  반도시론  등의 기자로 지냈고, 말년에는 뚝섬에 있는 그의 농장에서 최익
현의 실기를 집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추월색 ,  안의성 ,  금강문 ,  도화원 ,  능라도 ,  춘몽  등 많
은 작품을 발표했다.

  최충 (984∼1068) 고려의 문신. 사학 12도의 하나인 문헌공도의 창시자이다. 호는 성재,  월포,
방회재 등이다. 1005년 문과에 급제하여 우습유에 올랐고, 1013년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 수찬관을 겸하여  7대 실록  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정조 초에는 지
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현종 실록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법률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인재
양성에 힘썼는데, 그의 사숙 구재 학당이 그 예이다.  고려사  열전에  동방 학교의 일어남이 충에
비롯하여 그를 해동공자라고 일컬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을만큼 교육에 쏟은 공이 크다.

  최충헌 (1149∼1219) 고려 무신 정권기의 집권자. 초명은 난. 1174년 조위총의 난 때 반란을 진
압하였고, 1196년 이의민 일당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집권하고 나서 아우 충수와 함
께 폐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10조  를 올렸다. 그러나 왕이 이를 시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
하자 왕(명종)을 창락궁에 유폐한 뒤, 왕의 아우 평량공 민(신종)을 맞아 왕으로 삼고, 자신의 가
족들에게 각기 벼슬을 주어 최씨 독재 정권을 확립하였다. 또한,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의 네 왕
을 자기 뜻대로 세웠다.

  최치원 (857∼?) 신라 말기의 학자. 문장가. 자는 해운.  신라 말기 3최  의 한 사람으로, 새로
성장하는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
에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토벌에 참가하였고,
 토황소격문 을 지어 이름이 높았다. 885년 귀국하여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
게 진언하였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 여왕에게 진언하였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 여왕에게 올려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저술로는 시문집  계원필경 ,
 금체시 .,  오언칠언금체시 ,  사륙집 , 사서로는  제왕연대력 , 불교에 관계되는 저술로는  부석존자
전 ,  법장화상전 ,  석이정전 ,  석순응전 ,  사산비명 등이 있다.

  최현배 (1894∼1970) 국어학자, 국어 운동가, 교육자,  호는 외솔. 경상 남도 울산 출신. 경성 고
보를 거쳐 일본 경도 제국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나왔다. 1942년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4년간 옥
고를 치르고 나서 연희 전문 교수, 연세 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49년 한글 학회 이사장
에 취임하여 20년간 계속하여 한글 학회를 이끌어 왔으며, 한글 전용 촉진회 위원장,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이사 등으로 국어 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국어학의 연구, 국어 정책의
수립, 교육학의 연구와 국어 운동의 추진에 전념하여 20책에 이르는 저서와 100편에 이르는 논문
을 발표하였다. 1955년 제 1 회 학술원 공로상, 1967년 5.16 민족상 학예 부문 본상을 수상하였고,
사후 1970년 국민 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저서로는  한글갈 ,  우리말본 ,  글자의 혁명 ,  조선
민족 갱생의 도 ,  나라 사랑의 길 ,  나라 건지는 교육  등이 있다.

  충렬왕 (1236∼1308:재위 1274∼1308) 고려 제 25대 왕. 이름은 거. 초명은 심. 1274년 5월 원나
라에서 쿠빌라이 딸인 제국 대장 공주와 결혼했다. 대륙 국가와의 왕실 혼인으로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어, 양국의 우호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역대 권신들의 발호에 억눌려
오던 왕실의 지위도 회복,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원나라의 간
섭을 받게 되었다. 원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을 감행했으나, 태풍을 만나 실패, 2차 정벌
때도 폭풍을 만나 실패하였다. 야인과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었으나, 김방경의 활약으로 국운을
보존할 수 있었다. 후에 정치에 염증을 느껴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 주고 원나라로 갔다가, 원의
간섭으로 다시 왕위에 올랐다. 원의 내정 간섭으로 영토의 일부가 원나라의 직속이 되어 쌍성 총
관부, 동녕부, 탐라 총관부 등이 설치되었다.

  침류왕 (?∼385:재위 384∼385) 백제 제 15대 왕. 근구수왕의 맏아들.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384년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자, 그를 맞아 궁중에 두고 예로서 받들었으며,
백제의 불법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음 해에는 한산에 불교 사원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두
었다.

  탄연 (1070∼1159) 고려 시대의 고승. 성은 손씨. 호는 묵암. 밀양 출신. 1085년 명경과에 합격
하였고,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088년 궁중에서 몰래 나와 안적사에서 중이 되었다. 그 뒤,
광명사의 혜소국사 정현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여러 곳을 다니면서 참선과 교학을 연구
하였다. 1104년 대선에 합격하여 왕명에 따라 중원 의림사의 주지가 되었고, 그 후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가 되었다. 1129년 보리연사의 주지가 되어 법회를 개설하였다. 대선사가 되어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뒤에 왕사에 역임되었다. 1148년에 은퇴하여 많은 제자
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여 선교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서예에도 뛰어나 왕희지의 필체를
따랐으며, 춘천 청평사 문수원의 중수비와 예천군의 복룡사비, 삼각산 승가사 중수비 등을 썼다.

  태조1 (877∼943:재위 918∼943) 고려 제 1대 왕. 성은 왕. 송악 출신.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하
반도 중부 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이로써
궁예와 주위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알찬으로 승진되었다. 그 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의 추대를 받아, 918년 궁예를 내쫒고 철원의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왕실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
우했으며, 같은 해에 신라의 자진 항복을 받게 되었다. 936년 후백제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최
후 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  1권과
 계백료서  8편을 친히 저술하여, 새 통일 왕조의 정치 이념과 신하들이 지켜야 할 훈요 십조를
반포하였다.

  태조2 (1335∼1408:재위 1392∼1398) 조선 제 1대 왕. 이름을 성계. 호는 송헌. 함경도 영흥 출
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여러 차례의 홍건적과 왜구 토벌
에서 크게 활약하여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388년 요동 정벌이 결정되자, 이에 반대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 도통사로서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회
국을 단행하여 자신은 정치적, 군사적 실권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고, 전국의 병권을 장악하였다. 1391년 조준의 건의에 따라 전제 개혁을 단행하
고, 1392년 공양왕을 원주로 내쫒고 태조로서 왕위에 오른 후,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고, 사대주의,
 배불 숭유, 농본주의를 건국 정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자들 사이에 치
열한 쟁탈전을 벌여 왕자의 난 이후 방과(정종)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태종 (1367∼1422:재위 1401∼1418) 조선 제 3대 왕. 이름은 방원.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정안군으로 책봉되었다. 1398년 왕위 계승 문제에 불만을 품고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 방석 등을 제거한 뒤 정지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1400년에는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위,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였다. 그는 왕권의 강화와
중앙 집권 확립을 위하여 병권 장악 및 중앙 집권을 위하여 사병을 폐지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
군부로 고치면서 군정을 담당하였다. 1401년에 신문고를 설치하여 민정을 살피게 하고, 1414년에
는 종부법을 제정하여 국역 인구를 확보하면서 노비주의 세력 약화를 도보하였다. 숭유 억불 정
책을 실시, 5부 학당을 열고 유학을 장려하였으며, 도첩제를 강화하고 각종 부역에 승려를 동원하
는 등 불교를 배척하였다. 권근과 하륜 등에게 명하여  동국사략  을 편찬하게 하엿고, 1409년에는
 태조 실록  을 편찬케 하였다. 태종은 이성계를 보필하여 조선 왕조 개창에 공헌하였고, 정종의
뒤를 이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 집권을 이룩하므로써 세종 때의 태평 성대의 토대를 닦았
다.

  태종 무열왕 (602∼661:재위 654∼661) 신라 제 29대 왕.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외교 수완이 뛰어나 당나라와 일본의 외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654년 진덕 여
왕의 뒤를 이어 여러 신하들의 천거로 왕에 추대되었다. 즉위한 후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군사 제도를 정비하였다.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 정벌을 추진하여 김유신
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하였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항복해 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 등을
주는 회유책을 쓰는 등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ㅍ
  평강공주 (?∼?) 고구려 평원왕의 딸.남편은 장군 온달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의하면, 공주
는 어릴 때에 잘 울어서, 왕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였다. 그 뒤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을 때, 왕이 명문 귀족 집안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공주가 이를 거부
하였다. 왕이 노하여 궁궐에서 쫓아 내니,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혼인하였다. 그녀는 눈먼 시어머
니를 잘 봉양하고, 바보스러운 남편 온달에게 무예와 학식을 가르쳤다. 공주의 도움으로 뛰어난
무예를 지니게 된 온달은 매년 3월에 열리던 사냥 대회에서 남다른 활약을 보여 왕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온달은 고구려의 장수로 발탁되었다. 그 뒤 북주의 군대가 침공하여 왔을 때, 온달
이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고 대공을 세웠다. 평원왕을 이은 영양왕 때에, 온달이 한
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시체를 넣은 관을 운반
하려 하였지만 움직이지 않다가 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말하니,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평원왕 (?∼590:재위 559∼590) 고구려 제 25대 왕. 이름은 양성 또는 탕. 일명 평강상호왕, 평
강왕, 평국왕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진, 수, 북제, 북주 등과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두루 가짐으로
써 국제 관계의 안정을 이루려 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재난을 구휼하기 위해 왕의 음식을 줄이고
농업, 상공업을 장려하며, 552년 이래 계속된 장안성의 축성을 일시 중단하는 등 양원왕의 즉위
이래 계속된 내분과 민심의 수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586년에는 지금의 평양 대성 산성 일대에
서 장안성으로 궁을 옮겼다. 그의 딸인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의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다.

  표경조 (1909∼1972) 가정학자, 교육자. 호는 남옥. 밀양 출신. 경성 여자 고등 보통 학교를 거
쳐 일본 나라 여자 고등 사범 학교 가사과를 졸업한 뒤 귀국, 대구 여자 고등 보통 학교, 이화 여
자 고등 학교 교사를 지냈다. 광복 후 서울 대학교 사범 대학 가정과에서 가르치는 한편, 우리말,
우리 생활에 바탕을 둔 가정과 교과서를 처음으로 저술하여 우리 나라 중등 교육의 가정과 교육
에 큰 공헌을 하였다.

  표연말 (1449∼149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신창. 자는 소유. 호는 남계. 함양 출신. 147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고, 1486년 문과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
령.사간 등을 거쳐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성종 실록  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소릉 추복에 관
한 사실을 사초에 적은 것과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해 썼다는 이유로, 1498년 무오사화 때 경원으
로 유배가던 중 객사하였다. 1854년에 후손 석준에 의하여 간행된  남계문집  4권 2책이 전한다.

  표영준 (1896∼?) 독립 운동가. 일명 최승환. 평안 남도 강동 출신. 1919년 3.1 운동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국내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귀국하였다. 1920년 임시 정부 특파
원 김석황과 평양 기홀 병원에서 항일 비밀 결사인 의용단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8월, 만주의 광
복군 총영에서 미국 국회 의원단이 통과할 즈음, 특파되어 온 결사대와 함께 평양에서 무장 봉기
를 행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평양 경찰서를 폭파하기로 하고 8월 3일 평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어 실패하였고, 도피중 칠성문에서 일본 경찰에 검문을 받게 되자 이를 사살하였
다. 그리고 8월 20일에는 평안 남도 경찰 부장이 승차한 승용차에 총격을 가하여 운전사를 부상
시켰고, 22일 기홀 병원에서 다음 거사를 협의하던 중에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고 붙잡혔다. 1921
년 평양 복심 법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
다.

  품일 (?∼?) 신라 태종 무열왕 때의 장군. 관창의 아버지이다. 진골 출신으로 관등은 이찬에 이
르렀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품일도 김유신, 흠순 등과 함께 백제군
을 공략하였다. 이 때, 관창이 계백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고 베어진 그의 머리만 말안장에 매
달려 되돌아왔다. 이 때 품일은  우리 아이의 면목이 살아 있을 때와 다름이 없다. 나라일을 위하
여 죽었으니 다행이다.  라고 말했다 한다. 이것을 본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 큰 승리를 거두었다.
661년에는 이미 멸망한 백제의 남은 군사들이 다시 사비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침공하자, 왕으로
부터 대장군에 임명되어 백제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했다.



  하위지 (1412∼1456) 조선 시대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호는 단계. 1435년에 생원이 되고,
1438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1450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
하여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문종이 즉위하자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대간의 직분으로 권
세에 굴함이 없이 직언을 꺼리지 않았으며, 집현전 학사들과  역대병요 와  병서 의 수찬에 참여하
였고, 수양 대군 즉위 후 예조 참판 등을 지냈으나, 세조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의
강권 정치에 맞섰다. 1456년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성삼문 등과 모의하여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배반으로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한규설 (1848∼1930) 조선 말기의 무신. 애국 지사. 호는 강석. 서울 출신. 일찍이 무과에 급제
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와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한성부 판윤을 거쳐 포도 대장, 장위사,
의정부 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에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직하였고, 일제가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내세워 을사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끝까지 반대하여 파면당하였다. 을사조
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곧 징계에서 풀려나 중추원 고문,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고,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 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가 주어졌으나 받지 않았다. 이후 집에서만 생활
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 교육회를 창립하고, 이를 민립대학 기성회로 발전시켰
다.

  한명회 (1415∼1487)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압구정 또는 사우당.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 대
군의 참모로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가 되고, 정난 공신 1등으로 사복시 소윤에 올랐다.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고 좌승지를 거쳐 상당군,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
정 등을 지냈다. 1468년 세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러 벼슬을 하였다. 1471년에는 영춘추관사
로서 최항.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 실록 을 완성하였으며, 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
하였다. 또한,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 확충을 위하여 경서 관계의 서적을 많이 인출하여 비
치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성이다.

  한백겸 (1552∼1615)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구암. 1579년 생원시에 합격되었다. 1585년 교정청
이 신설되자 정구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  의 교정을 보았다. 역학에 밝아 선
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주역전의  의 교정을 보았다. 실학의 선구자로서 실증적이고 고증학
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 지리를 연구하였고, 종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 수정하여  기자도
,  기전설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밖에 저서로  구암집  이 있다.

  한용운 (1879∼1944) 승려.시인.독립 운동가. 본명은 정옥. 호는 만해.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
였으나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머물면서 불교의 기초 지식을 쌓았다. 27세 때 설악산 백담사
에서 연곡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식으로 득도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
말로 옮기는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였으며,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조선 불교 유신
론  을 저술하였다. 3.1 운동 때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으며,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
어 3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26년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시집  님의 침묵  을 발간하
였고, 이듬해에 항일 단체였던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62년에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을
추서  했다. 저서로는  불교대전 .  조선 독립의 서  와 소설  죽음 ,   흑풍 ,   박명  등을 남겼다.

  한치윤 (1765∼1814) 조선 시대의 학자. 호는 옥유당. 1789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 학문에만
전력하였다. 1799년 친척 형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함께 따라가 청나라의 문물을 살펴보고
돌아온 뒤, 이를 널리 소개하였다. 또한, 청나라의 고증적 학술 방법을 학문적 기틀로 삼아  해동
역사  70권을 지었다. 이 책은 그의 만년의 10여 년 동안에 저술한 업적이다. 이밖에도 북경을 여
행할 당시의 연행 일기와 많은 유고(죽은 사람이 남긴 원고)가 있으나 현재는 일부만이 전해진다.

  한호 (1543∼1605) 조선 시대의 서예가. 호는 석봉.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흡곡 현령과 가
평 군수를 지냈다. 글씨를 잘 써 사자관으로써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도맡아 썼다.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인 사자관체가 형성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이러한 서체를 간록체라 하였다. 또한, 사자관 제도가 이루어졌다. 그는 왕희지, 안진
경의 필법을 익혀 해서, 행서, 초서 등에 뛰어났으며,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 황주서대수비, 이윤
식비 등을 비롯하여 여러 묘비에 그의 글씨가 남아 있다.

  허균 (1569∼1618) 조선 시대의 문신, 소설가. 호는 교산, 학산, 백월거사 등이다. 1594년에 문과
에 급제한 후 황해도 도사, 춘추관 기주관, 사복시정 등을 지냈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으로서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1614년 천추사가 되어 중국에 다
녀왔으며, 귀국할 때  태평광기  를 비롯한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 등을 가지고 왔다. 1617년 폐모
론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었으나, 이듬해에 하인준, 김개 등과 반란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국문학사에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한극 소설인  홍길동전  을 지
은 작가로 인정하고 있다. 이외에도  학산초담 ,  국조시산,  허문세고 ,  고시선 ,  당시선 ,  송오가시
초  등의 시선집이 있다.

  허난설헌 (1563∼1589) 조선 시대의 여류 시인. 본명은 초희. 호는 난설헌. 강릉 출신. 허엽의
딸이며 허균의 누이이다. 8세에  관한전백옥루상량문  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
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김성립과 혼인하였으나 두 남매를 모
두 잃었고, 친정 오빠와 동생이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사회의 모순과 가정의 비극으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지가 128수나 된
다. 작품 일부를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 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
았다. 유고집에  난설헌집  이 있고 , 그의 국한문 가사  규원가  는 허균의 첩 무옥이,  봉선화  는
정일당 김씨가 지었다고도 한다.

  허목 (1595∼1682) 조선 시대의 문신, 학자. 호는 미수 또는 대령노인. 1657년에 벼슬길에 나아
가 이조 참판, 우의정, 지평, 좌랑 등을 지냈다. 허적을 탄액했다가 벼슬에서 쫓겨난 뒤 고향에서
저술과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다. 조선 시대에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글씨는 전서
에 능하여 동방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사 ,  방국왕조례 ,  경례유찬  등이 있으며,
그림에  묵죽도 , 글씨에  척주동해비 ,  이성중표문 ,  영상 이원익비  등이 있다.

  허준 (1546∼1615) 조선 시대의 의학자. 호는 구암. 1574년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에 봉직하면
서 내의, 태의, 어의로서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  을 지여 우리 나라 의학의 실력을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96년 선조의 명을 받들어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
보감  을 편집하기 시작하여 1610년에 25권 25책을 완성하였다.  동의보감  은 당시의 의학 지식을
통틀어 완성한 의학의 백과 전서로서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동양 의학의 모범으로, 출판된 뒤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서 오늘날까지 계속 출판되고 있
으며, 귀중한 한방 의학서가 되었다. 그 밖의 저서로는  언해구급방 ,  신찬벽온방 ,  벽역신방  등이
있다. 선조가 죽은 뒤 임금의 치료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한때 파면되었으나, 광해군의 만류
로 다시 사면되었다. 70세를 일기로 죽게 되자, 호성 공로의 어의로서 선조가 일찍이 보류하였던
부원군과 보국의 가자를 추증하였다. 허중은 의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의 지
위를 가졌다.

  헌종 (1827∼1849:재위 1834∼1849) 조선 제24대 왕. 이름은 환. 1834년 순조가 죽고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여 대왕 대비 순원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세도 정치의 여파인 과거 제
도와 국가 재정의 기본이 되는 삼정의 문란으로 국정이 혼란해졌으며, 재위 15년 중 9년에 걸쳐
수재가 발생하여 민생고가 가시지 않았다. 순조 때의 천주교 탄압 정책을 이어받아 주교 앵베르
와 신부 모방, 샤스탕 등 많은 신자들을 학살하였으며,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을
실시하고, 1846년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을 처형하였다. 재위 기간에  열성지장 ,  동국사략 ·
 문원보불 ,  동국문헌비고 ,  삼조보감  등을 편찬케 하고, 각 도에 제언(물을 가두기 위해 쌓은 둑)
을 수축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글씨를 잘 썼으며, 23세로 후사 없이 죽었다.

  현제명 (1902∼1960) 음악가, 교육자. 호는 현석. 대구 출신. 평양 숭실 전문 학교를 졸업한 뒤,
전주 신흥 학교에서 음악 교사를 역임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무디 성경 학교에서 수학
한 후 돌아와 연희 전문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9년 귀국 동창회를 비롯하여 빅타와 컬럼비
아 레코드 등에 가곡을 취입하였다. 1933년에 한국 최초의 작곡 발표회를 가졌으며, 1945년에는
경성 음악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고, 1953년 음악인들을 규합하여 한국 음악가 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대표 작품으로는 가곡  고향 생각 ,  산들 바람 ,  그 집 앞 ,  희망
의 나라로 ,  나물 캐는 처녀  등이 있다.

  현종 (991∼1031:재위 1010∼1031) 고려 제8대 왕. 처음에는 승려가 되어 숭교사와 신혈사에 있
다가 강조의 정변에 의하여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대내적으로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군현제를 완성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
하려는 강력한 북진 정책의 실천으로, 북방 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하였으며, 태조
이래 북방 외교의 문제였던 거란의 침입을 물리침으로써, 그 후로는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
하였다. 특히, 부처의 힘으로 외침을 방어하고자 6000여 권의 대장경을 착수, 제작하였다.

  현진건 (1900∼1943) 소설가. 호는 빙허. 1920년  개벽  에  희생화  를 발표, 문단에 등장하여
1921년  빈처  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22년에는 홍사용, 이상화, 박종화 등과 함께 문예 동인지
 백조  를 펴내었다. 김동인, 염상섭과 더불어 근대 문학 초기에 단편 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
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술 권하는 사회 ,  타락자 ,  적도 ,  무영탑 ,  할
머니의 죽음 ,  B사감과 러브레터  등이 있다.

  혜경궁 홍씨 (1735∼1815) 사도 세자 빈.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0세 때
사도 세자에게 시집을 갔으나, 사도 세자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속에 갇혀 죽음을 당한 뒤
혜빈이 되었다.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혜경궁으로 격이 올랐으며, 1899년에 사도 세
자가 장조로 올려지면서 경의 왕후로 되었다. 그가 지은  한중록  은 사도 세자의 죽음을 중심으
로 자신의 외롭고 슬픈 인생을 회고하여 지은 우리 나라의 궁중 문학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혜량 (?∼?) 신라 불교의 승통. 원래는 고구려 승려였으나, 고구려를 정탐하러 온 신라의 중 거
칠부를 재빨리 귀국케하여 체포를 면하게 되었다. 그 뒤, 나.제 연합군이 고구려를 칠 때 거칠부
를 따라 신라에 귀화, 진흥왕의 명에 따라 승통이 되었다. 그는 백고좌 법회와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고, 불교의 여러 사무를 통괄하였다. 신라 초기 교단의 형성과 불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하
였으며, 새로운 불교 의식의 정착에 힘을 기울였다.

  혜자 (?∼?) 고구려 승려. 595년 일본으로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같은 해 백제
의 혜총도 일본에 건너왔는데, 그와 함께 호코 사에 머무르면서 20년 동안 태자를 가르쳤다. 특
히, 삼론학 등 불교의 이론뿐만 아니라  법화경 ,  유마경 ,  승만경  등을 가르침으로써 쇼토쿠 태자
가 폭넓은 불교 관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또한, 수의술에도 능통하여 그 방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약 20여 년 동안 일본에 머무르다가, 615년에 고구려로 되돌아왔다.

  혜초 (704∼787) 신라의 고승. 719년 중국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에게 밀교를 배웠다. 그 뒤 인
도 등지를 답사하며 카슈미르·아프가니스탄·중아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하였다.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 천복사에서 도량을 열고 스승 금강지와 함께 밀교 경전을 연구하였다. 그 뒤, 수년 동안
장안에서 불경 번역과 제자 양성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인도 기행문  왕오천축국전 은
1908년에 프랑스의 펠리오 박사가 둔황 천불동 석실에서 발견하였으며, 고대사 연구에 있어 세계
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프랑스의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홍경래 (1771∼1812) 조선 시대의 농민 반란의 지도자. 1798년 사마시에 낙방하였으나, 경서에
대한 교양과 병서나 술서, 특히  정감록  등에 통달하였다. 당시의 과거 제도의 부패와 안동 김씨
의 세도 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불만을 가
지게 되었다. 그는 1811년 극심한 흉년으로 민심이 혼란해진 틈을 타, 그의 동지들과 함께 평안
북도 가산에서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분이 일어나고 홍경래마저 부상을 당하자 사태는 불리해
져 갔으며, 결국 관군에게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그는 조선 후기 사회가 가진 모순을 깊이 인
식하고 사회 변혁을 위하여 10년간 동지를 규합하고 치밀한 준비 끝에 거병하여 5개월간 평안도
일대를 휩쓸었으나, 반봉건적인 거대한 힘과 당시의 사회적 제약으로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홍국영 (1748∼1781) 조선 정조 때의 세도 정치가. 정후겸,홍인한 등의 책동을 물리치고 1776년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힘을 기울여 동부승지에 특진하였으며, 숙위소를 창설하여 그 대장을 겸하
고 도승지에 올랐다. 이 때부터 세도를 부려 갖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았으나, 1780년 왕비 살해
음모가 발각되어 가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나 강릉에서 죽었다.

  홍난파 (1897∼1941) 음악가,지휘자. 본명은 영후. 경기도 화성 출신.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
과 동경 음악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재일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항일 운동에 가담하였고, 귀국한
뒤로는  대한 매일 신보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창작곡집  처녀혼 을 출간하였다. 대표작  봉선화
는  처녀혼 의 첫머리에  애수 라는 곡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1922년 서울 연악회를 창설하고 교육
및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31년 바이올린 수업을 위해 도미, 셔우드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하여 경성 보육 학교,이화 여전 교수,경성 방송 현악단의 지휘자,빅터 레코드의 영업부장 등을 지
냈다. 작품으로는  성불사의 밤 , 옛동산에 올라 , 사랑 , 봄노래 , 달마중 , 낮에 나온 반달  등이 있다.

  홍대용 (1731∼1783) 조선시대의 실학자. 과학 사상가. 호는 홍지. 1766년 북경을 방문하여 청나
라의 학자들과 사귀면서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귀국 후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
한  유포문답 과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 을 지었다.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의 자전설과 경제
정책의 개혁, 과거 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각 지방의 인재를 추천함)를 통한 인재 등용 등 혁신
적인 개혁 사상을 제창하였다. 저서에  담헌설총 , 건정필담 , 주해수용 , 사서문의  등이 있다.

  홍만선 (1643∼1715) 조선 시대의 문신,실학자. 호는 유암. 1666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사옹원 봉
사,한성부 참군,공조 좌랑,상주 목사 등을 지냈다. 덕망이 높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당쟁이 심하였
던 때에 판단을 공정히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의견을 들었다. 그의 저서  신림경제 는 농
예,의약,구황에 관한 저서로 18세기 이후 새로운 농서 발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유형원과 동시대
의 인물로서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실용 후생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
다. 유중림,서유구 등의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홍범도 (1868∼1943) 독립 운동가. 1907년 전국적인 의병 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일제기
민중의 무장 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함경 북도 북청 후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
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교포들에게 광복 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
였다. 1920년에는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켜 대전적을 올렸다.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 전투이다. 같은 해에 김좌진,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청산리
싸움 후 여러 독립군 부대가 우수리 강변에 집결하자,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그 후, 시베리아에 가서 고려 혁명 군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
이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을 추서했다.

  홍사용 (1900∼1947) 시인. 호는 노작. 최초의 작품은 정백과 함께 쓴 수필  청산백운 이다. 박종
화,정백 등과 함께  피는 꽃 과 서광사에서  문우 를 창간했으며, 문예지  백조 와 사상지  흑조 를
기획하였다. 작품은  백조 의 창간호의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를 비롯하여  나
는 왕이로소이다 , 묘장 , 구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등 20여 편과 민요시  각시풀 , 붉은 시름  둥
소설,희곡 및 수필,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그 뒤, 8·15 광복을 맞아 근국 청년단 운동에 가담하였
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하고 폐환으로 1947년에 생을 마쳤다. 그의 시 세계는 비애의 눈물과 허망
감을 형상화한 장시와 민요의 율조를 바탕으로하여 민족 관념을 노래한 민요시로 구분된다.

  홍영식 (1855∼1884) 조선 말기의 문신. 호는 금석. 서울 출신.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박영효,
서광범 둥과 함께 개화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1873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의 정자,대교,직각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에 신사 유람단의 조사로 선발되어 일본의 육군을 시찰하고,  일본 육군
총제 와  일본 육군 조전 을 작성하였다. 1884년에 우정국을 개설하고 이를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
으켰으나 ,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개화당 지도층의 대부분이 일본에 망명
한 것과는 달리, 박영효와 함께 국왕을 호위하다가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
원되었으며, 정1품인 대광 보국 숭록 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증직되었다.

  홍익한 (1586∼1637) 조선 시대의 문신. 삼학사의 한 사람. 초명은 습. 호는 운옹이다. 1636년
천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 오자, 그 사신을 죽여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 등의 화의론을 극구 반대하였으나, 끝내
화친이 이루어져, 그는 청나라로 끌려가 화친을 반대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윤집
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저서로는  화포집 , 북행록 , 서정록  등이 있다.

  홍재학 (1848∼1881) 조선 말기의 애국 지사. 1880년 일본에서 돌아온 김홍집이  조선책략 을 고
종에게 올려 개혁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자, 이에 반대하여 정부의 수구파에 가담하였다. 그는
유생들과 함께 외국 세력을 물리칠 것을 상소하였다. 이 때, 왕까지도 노골적으로 공격, 개화를
적극 반대 하다가 위정자들의 격분을 사서 참형을 당하였다. 이 상소는 한말의 정통적인 위정 척
사 사상과 애국 정신의 발로이며 우국적인 상소이다.

  황윤석 (1729∼1791) 조선시대의 문신,운학자. 호는 이재. 1759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장릉 참봉,
목천 현감 등을 지냈다. 그의 학문은 실학 시대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으로, 처음에는 이
학의 공부에 힘쓰다가  주역 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다. 서양의 지식을 받아 이를 소개했으
벼, 또 이학과 서양의 지식과의 조화를 이루도록 시도한 점이 특색이다. 저서로는  이재유고 , 이재
속고 , 이수신편 , 자지록  등이 있다.

  황진이 (?∼?) 조선 시대의 시인,명기 ,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 개성 출신. 용모가 출중하고
시,서,음률에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다.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였으나, 실패하고 사제 관계
를 맺었다. 문인이나 학문이 높은 선비들과 교유하며, 미모와 탁월한 시재로 이름을 떨쳤다. 박연
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 삼절로 불렸다. 시조 작품으로는  청산리 벽계수야 , 동짓달 기나긴 밤을
 , 내 언제 신이 없어 , 산은 옛산이로되 , 어져 내일이여  등이 있으며,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황집중 (1533∼?) 조선 시대의 화가. 호는 영곡,비목당. 포도를 특히 잘 그려 이정의 묵죽(대나
무)과 어몽룡의 묵매(매화)와 함께 삼절로 일컬어졌다.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구도와 소재 처리 반
식에서 그의 뛰어난 격조와 기량을 보여 주며, 이와 같은 화법은 같은 시대의 이우,이계호, 홍수
주 등에게 어어져 조선 중기 묵도포 전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의 작품 중  묵포도도  1점만이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황현 (1855∼1910) 조선 말의 학자, 우국지사. 호는 매천. 전라 남도 광양 출신. 1888년 생원 회
시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부정 부패가 극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통분을 금치 못하고 국권 회복 운동을 위
해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를 남기
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매천집  ,  매천시집  ,
 매천야록  , 동기비략  등이 있다.

  황희 (1363∼1452) 조선 시대의 문신. 초명은 수로. 호는 방촌. 사마시 , 진사시 , 문과에 각각
급제하고 선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조정의 간청으로 성균관 학
관 , 세자 우정자 , 직예문 춘추관 , 감찰을 거쳐 형조 , 예조 , 이조 , 병조 판서와 우의정, 영의
정을 지냈다. 18년 동안 국정을 맡아 보면서 농사 개량법, 국방 문제에 대한 방비책 등 많은 업적
을 남겼다. 특히,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왕을 보좌하여 세종 때의 태평
성대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여,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저서로
 방촌집 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이다.

  휴정 (1520∼1604) 조선 시대의 고승. 승군장. 이름은 여신. 호는 청허 또는 서산대사 , 두류산
인 등이다. 평안도 안주 출신. 1549년 승과에 급제하여 선교 양종 판사가 되었다가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여 그만두고 절을 찾아다니면서 수도에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 격
문을 돌려 승병을 조직했다. 이에 제자 처영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
강산에서 1000명의 승군을 모아 휴정의 지휘 아래 평양을 되찾았다. 1594년에는 제자 유정(사명
당)에게 군사 지휘권을 맡기고 묘향산에 들어가 열반을 준비하였다. 이 때 선조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그
는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였으며, 유 , 불 , 도가 결국은 일치한다는 삼교 통합론의 기원을 이룩하
였다. 저서로는  청허당집  ,  선교결  ,   심법요초  ,  선교석  ,  운수단  ,  설선의  등이 있다.

  흑치상지 (?∼?) 백제 시대의 장군. 7척이 넘는 키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장수로, 660년 사
비성이 나 , 당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백제가 망하자, 패잔병 3만여 명을 모아 임존성을 근거
지로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200여 성을 수복하고 한때 기세를 떨쳤다. 그 후 나, 당 연합군
의 총공격으로 힘들게 되자, 당나라 장수 유인궤에게 항복하였다. 당나라로 건너간 그는 토번과
돌궐을 치는 데 공을 세워, 연도대총관 연국공에까지 이르렀으나, 측천무후의 통치 때 반란을 일
으키려 한다는 주흥 등의 무고로 옥사하였다.

  흥덕왕 (?∼836 : 재위 826∼836) 신라 제 42대 왕. 성은 김씨 이름은 수종 또는 경휘. 헌덕왕의
동생이다. 809년 언승(뒤의 헌덕왕)이 애장왕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웠고, 헌덕왕
대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 즉위하면서 귀족 세력의 억제와 왕권 강화를 위해 일련의 정치 개
혁을 시도하였다. 김헌창의 난을 평정한 김유신의 공을 인정하여 그를 흥무 대왕으로 추증하고,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장보고로 하여금 해적을 내몰게 하였다. 834년에는 모든 관 등
에 따른 복색 , 옥사 등의 규정을 반포하여 사치를 금하게 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
다 돌아온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와 전국적으로 차의 재배를 성하게 하였다.

  흥선 대원군 (1820∼1898) 조선 왕족. 정치가. 호는 석파. 이름은 이하응. 조선 제26대 고종의
아버지이다. 철종이 후계자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의 아
명)이 즉위하여 흥선 대원군으로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을 맡았다.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
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우며 과감
한 혁신 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또한, 탐관 오리를 처벌하고 정치,재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사회의 악습 개량에 힘쓰고 복식을 간
소화하였으며, 사치를 금하였다. 그리고  대전회통  ,  육전조례  ,  양전편고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의정부를 부활하고, 삼군부를 두어 군국 기무를 맡게 하고
국방을 강화하였다. 왕권을 드러내고자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어 국
민의 원성을 샀으며, 천주교도 박해령을 내려 8000여 명의 천주교도 학살을 감행하였다. 통상 수
교를 거부하여 근대화의 길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며느리 명성 황후(민비)와의 대립으
로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서화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흥수 (?∼?) 백제 시대의 충신. 성충과 함께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라일을 돌보지 않는 의자왕
에게 충고를 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려 하자, 전쟁에 대비하여
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이 분분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의자왕은 사람을 보내어 흥수에
게 그 대책을 물었다. 그는  백강과 탄현은 우리 나라의 요새지이므로 마땅히 군사를 가려 보내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는 백강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
게 하라. 그리고 대왕께서는 굳게 성문을 닫아 지키고 있다가 적군의 양식이 떨어지고 또한 사졸
들이 지칠 때를 기다려 이를 치게 한다면 반드시 적병을 깨뜨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
신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왕도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결국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는 황
산벌 싸움에서 패하고, 백강에서는 수군이 패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부여에서는 백
제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을 삼충사에 제향하여, 매년 가을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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