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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1/한국사

한국사 강의록 3

by FraisGout 2020. 5. 5.

    3) 무한경쟁의 시대 - 삼국시대가 남긴 것
  경쟁이 국력 배양과 외부 진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중국의 춘추시대와 삼국시대를 통해 
분명히 입증됩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이 
경쟁하는 사이에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는 매우 넓어졌으며, 기술 수준도 급속히 향상될 수 
있었습니다. 불과 금속을 다루는 기술, 돌과 나무를 다루는  기술 등이 발달했고, 활동 영역
만큼이나 지식의 폭과 깊이도 더욱 화대되었습니다. 
  매우 단순하고 주고나적인 편가일 수 있지만, 후대의 역사와 비교할 때, 삼국시대의  역사
가 상대적으로 더 활기차고 역동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이유도 아마 치열한 경쟁에 있을 것
입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미덕이던 시대.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해도 국운 절멸의 위기를 
맞게 되며,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히 자기 발전을  이룩하고 단결해야 하는 무한경쟁
의 시대. 허례보다는 실질을 숭상하고, 명분마저도 실질에  맞추었던 시대, 삼국시대의 분위
기는 꼭 그러했습니다. 
  삼국시대는 우리에게 경쟁의 미덕이랄까 장점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최종 
승자로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시사해주었습니다. 비록 상황은 많이 달라졌지만,  삼국시
대가 주는 교훈은 지금 후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좋은 약이 될 수 있습
니다. 그리고 그 시대가 남긴 각종 유적과 유물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문화와 기술 수준을 알려주는 유적...유물로는 흔히 고분...성곽...주거지...사지...
불상...토기...장신구 등이 거론됩니다. 특히 고분은 피장자의 신분과 활동시기가 비교적 분명
하게 드러나는 유적일 뿐 아니라, 축조방식과 부장품 등을 통해 해당 시기의 시대상을 암시
합니다. 또한, 성곽은 일종의 군사시설이므로  당시의 전투방식과 영역 그리고 건축술  등을 
시사해 줍니다. 탑과 불상은 당시의 신앙체계를 알져주는 자료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미의식
을 드러내는 미술품이기도 합니다. 이제, 삼국시대의 문화유산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1) 고구려
  제 3장 3저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고구려는 요녕성 환인 지방에서 건국한 뒤 곧  압
록강변의 집안 지역으로 천도했으며, 이후 다시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도읍을 옯겼습니다. 따
라서 고구려 지배층의 무엄으로 보이는 고분들이 위의 세 지역에 각기 무리를 이루며 남아 
있습니다. 먼저, 환인 지방에서는 적석총 700여 기와  봉토석실분 30여 기가 조사되었고, 집
안 지역에서는 5,0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8,000기에 가까운 봉토석실분이 고구려  무덤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 평양에서는 봉토석실분이 1,000여 기에 이르는 대신 적석총은 희귀한 편
입니다. 

      돌을 쌓아 만든 무덤 - 적석총
  적석총이란 말 그대로 돌을 쌓아 만든 무덤입니다. 우선 바닥에 돌을 몇 겹 깐 다음 구획
된 장소에 시체를  놓고 다시 돌을 쌓아 완성하는 형식의  무덤인데, 강이나 하천에서 사람
머리 혹은 소머리 크기의 돌을 구해 쓰는게 보통이지만. 대형 석재를 가공해 사용하는 경우
도 있습니다. 무덤의 양식은 시기별로 조금씩 변해 일정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대부분  기
단이 없거나 있더라도 1단에 그쳤지만, 나중에는 평면 사각형의 기단을 3층이상 계단식으로 
올림으로써 마치 피라미드의 한 부분을 연상시킵니다. 
  적석총의 대표적인 예로는 집안 지역에 남아 있는 태왕릉과 장군총을 들 수 있습니다. 특
히 태왕릉은 밑변의 길이가 60m를 넘는 대형의 계단식 적석총으로서  맨위의 7층에 묘실을 
만들어서 시체를 안치했는데, 무덤의 돌무더기에서 "태왕릉이 안정되고 단단하기가 산 같기
를 바랍니다."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명문의 이
른바 '태왕'은 **대왕의 약칭일 수 있지만, 광개토왕의 시호인 호태왕의 약칭일 개연성이 무
엇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태왕릉은 광개토왕릉비와  불과 5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
지 않으므로, 이를 광개토왕릉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편, 태왕릉이 조사되기 전까지 광개토왕과 관련된 무덤으로 알려져 온 장군총은 밑변의 
길이가 30m이며 높이는 14mdlsep,  전체 7단 중 제  5단째에 횡혈식 석실을 만들었습니다. 
횡혈식 석실이란 돌로 무덤 안을 마치 방처럼 만들고 거기에 바같으로 통하는 길 혹은 복고
를 낸 무덤 형태로서, 시체를 방에  옆으로 놓는다 하여 횡혈식이라 부릅니다. 그렇지  않고 
시체 혹은 관을 위에서 아래로 안치하는 방식은 수혈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요즘의 무
덤은 모두 수혈식이라 할 수 있겠지요?

  흙으로 덮은 돌방무덤 - 봉토석실분
  봉토석실분은 돌로 만든 방을 흙으로 덮은 무덤입니다. 고구려의 봉토석실분은 대체로 따
을 파지 않고 지표 위에 석실을 마련한 다음 읅을  씌우는 방식을 택했는데, 위에서 내려다 
본 무덤의 외형이 둥근 이른바 원령분도 있지만, 그보다는 네보진 방대형이 더 많습니다. 대
부분의 봉토석ㄱ실분은 5세기 이후에 축조되었으나, 압록강 유역의 심귀리 89호분이나 대동
강 유역의 안악 3호분처럼 3세기대에 해당하는 고분들도 있습니다. 
  봉토석실분의 내부 형태를 관찰해보면, 초기에 만들어진 것은 시체를 안치한 현실 이외에
도 전실이라는 도 하나의 방을 만들어 놓아 대체로 복도...전실...현실의 구조를 보이며, 후기
에 축조된 고분은 비교적 단촐해 복도와 현실만으로 구성된 것이 많습니다. 즉, 이른바 다실
묘에서 단실묘로 바뀌는 것입니다. 바뀌는 시기는 일정치  않으나 대체로 6세기경이 기준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봉토석실분은 귀죽임천정이라  하여 천장의 높이를 한
층 높이면서 천장 구조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고
구려 지배층의 무덤은 초기의 적석총에서 후기의 봉토석실분으로 무덤 양식이 바귄다고  생
각하면 큰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고분벽화
  봉토석실분 중에는 석실 내부에 벽화를  그린 이른바 벽화고분이 꽤  발견됩니다. 앞에서 
거론한 안악 3호분은 그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벽화 고분으로 손꼽히는데, 연도(연
실)..전실...측실...현실...회랑 등으로 구성된 매우 호화로운 무덤입니다. 그래서  이 고분은 마
치 대문과 행랑채(연실), 사랑채(전실), 안채와 부속건물(측실), 사당(현실) 등으로 구성된 살
림집을 옮겨다 놓은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실제로 전실 벽에는 노래하고 춤추는  그림, 
서쪽 측실에는 주인 부부의 초상화와 시종들 동쪽 측실에는 부엌과 마구간 등이 그려져 있
으며, 현실과 회랑에는 250여 명의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서쪽 측실 입구의 왼편  그려진 인물상 머리 위에 67자에  달하는 묵서가 잇으며, 
그 내용이 전연의 장수였다가 고구려에 망명한 뒤 대동강 유역에 거주했던 동수가 서기 357
년에 죽자 만들어  준 무덤이라는 견해와  고분의 규모라든가 묵서명의  위치 및 행렬도의 
soeye 등에 주목하여 안악 3호분은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의 무덤일 것이라는 주장이 대립하
고 있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나름대로의 합리적 근거를 갖추고 있어 쉽게 단언하기는 어려
우며,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됩니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내용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벽화가 이제막 그려지기 시작한 
시기, 곧 4~5세기에는 피장자의 생전 모습을 그린 생활풍속화가 많으며, 후기로 갈수록 사신
도처럼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그림들이 많이 그려졌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벽화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몇가지 특징적인 표현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
다. 먼저, 장소에 따라 그림의 내용을 맞추는 방법입니다. 벽면에는 현세적인 그림을 그리고, 
천장에는 해...달...별이라든지 내세적인 상상도를 그리는 방법을 사용하거나, 연도와 같은 입
구에는 현세적인 그림, 관이  안치될 현실에는 내세적인 상상도를  그리는 방법응ㄹ 사용한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다음은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지위가 높은 사람은 크게 그리고, 지위가  낮
은 사람은 작게 그리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근법에 의한 거리감이라든지 입체감은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대신,  채색을 통해 입체감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그림에 
힘과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 고구려 벽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힘과 생동감이라고 하면, 집안지역에  남아 있는 사신총이  대표적입니다. 4신은 청룡...백
호...주작...현무를 가리키는데, 이들을 각각 동...서...남...북의 벽에 하나씩 그려놓은 것입니다. 
사방을 지켜 가운데에 있는 피장자를 보호하라는 뜻이지요. 사신도에서 드러나듯이 파랑...하
양...빨강...검정색은 각각 방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은 노랑색이었습니다.  이
러한 관념은 고구려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중국르로부터 들어온 것입니다. 

      고구려의 건국지 - 오녀산성
  고구려가 건국한 곳은 기록에 따라 달리 전해집니다. 삼국사기에는 비류수가 궁실을 지었
다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광대토왕릉비문에는 홀본서성에서 건국했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
특의 위서에는 홀승골성이 건국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중 홀본서성과 홀승골성은 같은 곳
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환인  지방의 오녀산성이 그에 해당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발 820m인 오녀산은 혼강의 서쪽 인근에 있는데, 정상부를 둘러싼 돌담이 곧 오녀산성
입니다. 돌의 크기와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대체로 가로 길이가 40~50cm 내외인 장방형 석
재를 많이 이용했으며, 아랫부분  곧 기단부에는 길이가 2m에  가까운 석재를 사용한 곳도 
있습니다. 돌사이의 틈새에는 작은 쐐기돌을  박아 놓어 압력으로 성돌이  어그러지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바깥에서 볼 때 4~6, 안쪽엣는 1~2m정도이며, 서쪽의 절별 부
분은 아무런 시설 없이 자연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오녀산성의 전체평면은 장방형에 가까워
서 동서 길이가 대략 300m, 남북길이는 1,000m정도입니다. 성문은 남쪽에 하나만 있다고 합
니다. 성안은 넓고 평탄하며 중앙부에 샘이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소천지라고 부릅니다. 

      국내성과 위나암성
  고구려가 오녀산성을 중심으로 활동한 기간은 매우 짧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는 유리명왕 22년(3)에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또 위나암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국내성은 지
금의 길림성 집안현성이고, 위나암성은 국내성 북쪽 2.5km지점에  위치한 산성자산성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압록강변의 통구 분지에 쌓은 국내성은 안팎을 모두 장형  돌로 쌓은 도시형 석성입니다. 
여러 번 고쳐 쌓았기 때문에 원형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최근의 조사결과  동서 길이 약 
700여m, 한북길이 약600m 내외인 방형의 평지성으로 밝혀졌습니다. 성벽은 잘 가공한 방형 
및 장방형  석재를 교차하며  편평하게 쌓아   대략 6m 높이까지  올렸는데, 기저부에서는 
10~15cm 씩 뒤로 무러나며 쌓는 방식을 사용해 4~11층의 기단을 형성했고, 그 위로는 대체
로 곧게 쌓았습니다. 기단의 폭은 10m 내외라고 합니다.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바깥으로 돌
출된 부분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치 혹은 치성입니다.  주로 성벽에 달라 붙은 적을 
공격하는 데 이용되는 곳이지요, 국내성에서는 도합 14개의 치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성문은 남...북벽에 각각 1개씩, 동...서벽에  각각 2개씩, 도합 6개가  있었다고 한. 동쪽과 
서쪽에 주 통행로가 있었음과 알 수 있습니다. 성안에서는 성문  사이를 잇는 큰 도로의 흔
적이 발견되었고, 중부와 북부에서는 건물지가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건불지는 규모로  보아 
일반 민가라기보다 궁전이나 공공건물  그리고 지배층의 주거공간이었을  개연성이 높습닏. 
성벽 바깥으로는 폭이 10m에 달하는 호 혹은 해자가 있었습니다. 깊이는  잘 알 수 없지만, 
큰 골에 물을 채워놓음으로써 적인 달려들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성은 원래 돌로 만든 성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석성 아래에서 발견된 토성 
흔적이 그 증거인데, 그곳에서는 중국의 전국시대에 해당하는 배수구 유적과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
실이 기억나는군요. 다시  말하면, 고구려현(토성) 자리에  고구려국(석성)이 들어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삼국사기에는 산상왕 13년(209)에 환동성으로 천도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의 환도성
은 아마도 앞에서 소개한 위나암성 곧 지금의 산성자산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데, 원래 산성자산성은 평지성인 국내성과 세트를 이루어 유사시를 대비한 성으로 알려집니
다. 동...서...북쪽의 산능선과 남쪽의 계곡에 대개 4m 높이로 돌을 쌓아 만든 산성으로서, 저
체 길이는 7km에 달하며, 성 안쪽의 가장 넓은 부분의 직경은  2km에 가깝다고 합니다. 성 
안네는 궁전...창고...장대...연못 등의 흔적이 있으며, 5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봉토석실분도 5
기나 남아 있습니다. 환도성은 동천왕 21년(247)에 관구검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의 침입으로 
환란을 당한 적이 있으며, 고국원왕 12년(342)에는 전연의 공격을 받아 궁전이 불타고 성이 
허물어지는 치역을 당하기도 한 곳입니다. 

      평양성
  환도성이 함락되고 폐허로 변하자 고국원왕은 343년에 평양 동황성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
는데, 이곳이 지금의 어지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지금의 평양 지역으로 도읍을 
완전히 옮긴 것은 장수왕 15년(427)의 일입니다. 당시의 수도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시 동북
쪽 7km 지점에 위치한 대성산성과 극 기슭의 안학궁성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입지..규모...축조방식 등이 산성자산성과 비슷한 대성산성은 대동강 북쪽의 산 능선을 동...
서...북벽의 기반을 이용한 전체 길이 7kmwjd도의 석성입니다. 대성산서으이 출입구는 가장 
낮은 지대인 서남쪽의 계곡에 위치한  남문관 북족 국사봉에 위치한  북문 등 2곳뿐이어서, 
군사적 목적의 성곽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성산성을  발굴 조사한 북란 락자들
의 보고에 따르면, 축조 연대는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라고 합니다. 
  대성산의 남쪽 기슭에 안학궁성 유적이 있습니다. 궁성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규모
가 매우 작아서 전체 길이가 610m에 불과한  방형의 석성입니다. 성벽을 쌓는 방법은 대체
로 국내성지와 같지만, 안팎의 표면은 돌로 쌓되 그 사이의  공간에 홁을 다져 넣었다는 점
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4m 정도입니다. 성문은 동...서...북족에 각각 
1개씩 그리고 남쪽에 3개를 설치해  도합 6개를 배치했으니, 규모에  비한다면 많은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궁성 안에는 대규모의 궁전과 회랑, 연못 그리고 호화롭게 구며진 정원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안성
  평원완 28년(589)에 고구려는 다시 장안서으로 도읍을 옯겼으니, 지금의 평양성이 바로 그 
곳입니다. 대동강 북쪽 연안에 디대어 쌓은 석성으로서, 내성...중성...외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체 길이는 무려 23km에 달한다로 하니 고구려 최대의 도성임이 분명합니다. 북족의 산지
에 위치한 내성은 구성이었을 것이고, 그 남쪽의 중성은 관아 건물 지역으로 장안성의 중앙
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남쪽에 위치한 외성에는 일반 민가가 들어섰을 텐데, 돌로와  배수
로 등이 비교적 정연한 점에서 볼  때 도시계획에 의거했던 듯합니다. 한편, 내성과  연접해 
북쪽의 험한 산지에는 북성이라는 작은 산성이 덧붙여져 있는데, 조선왕조 숙종 때 쌓은 성
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체인 장안성은 국내성과 산성자산성에서 보여준 고구려 사람들의 석
축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성곽으로도  유명한데, 핵심은 아무래도 
자연지형을 적절히 이용할 줄 하는 감각에 있는 듯합니다.  천연암반을 성벽의 일부로 이용
한 것이란든지 강변지역에서는 지반을 다진 다음 축성한 것 등이 바로 그러한 사례의 하나
가 될 수 있겠지됴. 장안성은 아마도 내성...중성...외성 순으로 오랜 기산 축성되었을 것입니
다. 장안성은 아마도 내성...중성...외성 순으로 오랜 기간 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양원
왕 8년(522)에 이미 장안성을 쌓기 시작한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 장
안서의 규모로 보아 축조기간 30년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유적을 보는 우리의 눈
  오늘날 우리는 이들 유적을 매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손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
게 훌륭한 유산을 물려준 고구려 사람들의 지혜와 솜씨 그리고 감각에 칭찬을 아찌기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유적의 이면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거친 숨과 땀만 흘려야 
했던 일반 백성과 노예들의 고통이 배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들 중 일부는 아마도 돌을 자르고 나르는 사이에 각종  사고로 피를 흘려야 했으며, 심지어 
목숨마저 잃었을 것입니다. 그 대사를 누린 것은 오히려 그들이  피땀을 흘리고 있을 때 호
의호식하던 지배층이었을 것입니다. 모순임에 틀림없지만, 이러한 모순이 당시의 고구려  사
람들에게는 도리어 순리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릅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의 사고를 비
배하고, 그것이 신분제로 포장되었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결과 비교의 구도에서 벗어나 전체 혹은 개인의 입장으로 돌아오게 되면 
노역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다소 달라지게  됩니다. 즉, 성곽처럼 공공 목적을 지닌  시설에 
쏟은 자신의 피와 땀이 다름아닌 이웃과 자손의 안녕을  위한 기반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피와 땀의  양을 따져 그만큼의  이익과 안정을 보장해주진  않을지라도,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를 구하는 데 쓰인다는 점에서 그 가치에 대해 인색하게  평가해서는 곤
란하겠지요.
  노동은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고분 건
축에 쓰인 힘은 소수의 개인을 위한 사치의 성격이 짙은 반면, 성곽은 나와 우리를 위한 공
익시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분은 그 웅장하던  모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낱 폐허로 
변하거나 심지어는 도굴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성곽은 끊임없이 보수되며 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고분은 고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분 조사를 통해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건축술과 공예기술을  알아내고, 그들의 사상과 미
의식을 유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미술 이상의 
그 무엇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여유와 사치 속에서 꽃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해줍니다. 

    (2) 백제
  백제의 초기 수도가 한강 유역에 있었음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서울시 송
파구에 남아 있는 풍납리 토성과 몽촌 토성을 그리고 석촌종...가락동...방이동에 분포한 고분
을 통해 충분히 입증됩니다. 백제가 지금의 천안 직산  지역에서 건국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통이 불편하던 고대에 수도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거주지였습니다. 그렇기에 당시의 
수도는 정치의 중심지인 동시에  경제...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에는 지배층이 생전에 거주했던 도시와 성곽이 있는가하면, 죽어서 묻힌 호사스
헌 무덤이 있는데 당연합니다. 그리고 성곽에는 한 사람만 살았던 것이 아니므로, 무덤도 무
리를 이루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천안 지역에서는 백제와 관련해 그런 흔적을 아직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회...집단과 관련된 유적이 다수 발견될 뿐입니다. 

      흙의 문화 - 풍납리 토성과 몽촌토성
  앞에서 살표본 고구려의 성과은 초기부터 돌을 상하 만든 석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제의 
성곽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라는 특징을 지닙니다. 물론 5세기경에 이르면 백제에서도 석
성을 쌓기 시작하지만, 그 이전에 축조된 성곽은 거의 대부분 토성이었습니다. 토성을  만드
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 다양한  방법을 단순화시켜 두 가지로 나누면  흙을 쌓아 만드는 
방법은 보통 평지에서 많이 이용되었는데, 판축이라  하여 흙을 10~50cm 의 일정한 두께로 
깐 다음 발과 각종 도구를 이용해 다짐으로써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흙을 깎아 만드는 방법은 산성을 만들 때 많이 이용되었는데, 사느이 경산면 중 일정부분을 
돌아가면서 'ㄴ'자 모양으로 깎아낸 다음 그 흙을  위로 퍼올려 절벽의 높이를 더하는 방법
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토성은 석성에 비해 성벽이 가파르지 못해 방위상 다
소 불안할뿐더러 튼튼하지도 못해 자주 보수해야 하는 약점이  있지만, 적은 인력을 단시간
에 완성할 수 있으며, 석공처럼 전문적인 기술자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제
성이 매우 뛰어난 건축물입니다. 
  토성은 중국에서 흔히 사용된 방위용  건축물입니다. 따라서 백제의 토성은  아마도 중국 
토성의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풍납리 토성입니다.  풍납리 
토성은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히한 토성으로 워래는 전체 둘레 3.5km의 방형내지 타원
형 평지성이었으나 홍수와 도로...주택 건축 공사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어 wlma의 동벽과 
북벽의 극히 일부분만 남아 있습니다. 성벽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은  약 26m에 달하며, 성벽 
기저부의 폭은 약 30m 정도로서 백제  최대의 토성이라 하겠는데, 내부에서는 과거 일제시
기에 청동제 초두와 금반지 유리구슬 등이 우연히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초두는 마치 국자
처럼 생긴 냄비에 세 개의 발이 달린  그릇으로, 음식을 조리하거나 술...약 등을 데우는  데 
사용한 듯합니다. 
  풍납리 토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학자들은 이구
동성으로 백제 초기의 성곽임에 틀림없다고 말합니다. 성의 규모라든가 축조시기 그리고 내
부에서 발견된 유물 등에 근거해 이곳을 백제 초기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백제가 서기 475년 공주 지방으로 천도하기 전에 도성으로 이용
했던 중국식으로 고친 이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풍납리 토성지의 동남쪽 인근, 곧 지금의 올림픽공원 내에는 몽촌 토성이 있습니다.  지금
은 도시개발로 인해 주변 환경과 지세가 많이 달라졌지만, 원래 몽촌토성이 있는 곳은 남한
산과 연결된 저산성구릉이 형성되었던 곳입니다.  따라서 몽촌 토성은 원래  산성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연구릉의 능선을 성벽의 일부로 이용했기 때문에 평면 형태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지만, 울퉁불퉁한 마름모에 가깝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성벽의 길
이는 2,285m 이며, 내부 면적은 67,000평이라고 합니다. 
  몇 차례의 발굴을 통해 몽촌 토성 안에서는 각종 건물지와  연못, 망대 등의 유정이 확인
되었고, 토기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수습되었으나, 토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라든지 
성격을 분명하게 알려줄 만한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라고 지금가
지의 조사를 통해 몽촌 토성이 4~5세기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백제의 전기 도성과 매우 밀
접히 관련된다는 사실 정도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당수의  학자들이 이곳을 백제의 왕성
이었던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흙무덤과 돌무덤 - 토촉묘 적석총
  몽촌 토성의 남쪽 방이동...가락동...석촌동에는 백제의  초기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고분의 성격은 크게 2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는는 흙을 쌓아 만든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돌
을 쌓아 만든 무덤입니다. 물론 토광묘처럼 흙을 파서 만든 무덤도 있고, 또 돌로 곽을 만든 
무덤도 있지만, 이들은 모두 백제의 특징적인 무덤이라기보다 우리 고대사회의 보편저인 무
덤양식에 속합니다. 
  토축묘는 백제의 세력 범위가 아직 한강 유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시기의 무덤으로서, 
먼저 지표에 흙을 쌓아 봉토를 만든 뒤 그곳의 일부를 파서 시체를 안치하는 방법이 사용되
었습니다. 
  적석총 외에 석적토축묘라고 하여, 외부는 적석총이지만 시체가 잇는 내부는 토축묘인 일
종의 변형이 있고, 또 흙무덤의 봉분 표면에 돌을 2~3겹 얹은 즙석봉토분이 있어 다양한 편
입니다. 백제의 중심지역에서 순수 적석총이  처음 조영된 시점은 아직  분명하게 정리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4세기경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제의 초기 문화는 고루려와 여러  모로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무덤을 
하천근처에 만들기를 좋아했다는 점인데, 이는 당시의 신라...가양와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
지는 특징입니다. 
  신라의 초창기 무덤은 평지에 있긴  하지만, 하천 근처라는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또 가야 제국은 일찍부터 산기슭이나 능선 근처에 무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고구
려와 백제는 하천변 혹은 하천과 가까운 구릉에 많은 무덤을 만들었으니, 그 문화의 기반이
랄까 정서가 서로 통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무령왕릉과 중국 남조문화
  그러나 5세기 후반이 되면 백제인의 묘지 선정 사상에  약간의 변화가 오는 듯합니다. 특
히 서기 475년에 웅진 곧 지금의 공주 지역으로 천도하면서부터는 지배층의 무덤이 모두 산
의 능선이나 그 주변에 조영되어 후대의 묘지선정 관념과 매우 유사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
니다. 그런데 이처럼 산맥을 중시하는 관념은 중국에서 전래된  풍수지리 사상에 기초한 것
입니다. 웅진시대에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받은 문화적  영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사례
로는 무령왕릉이 대표적입니다. 
  1971년에 발굴 조사된 무령왕릉은 화려한 문양의 각종 벽돌로 만든 전실묘입니다. 방처럼 
꾸민 내부는 아치 형 천장에 동...서...북벽에는 등잔을 놓는 감실과 가짜 창문이 있고 남...북
벽에는 벽화를 그린 흔적도 남아 있어, 호사스럽고  아름답습니다. 무덤 안에서는 '영동대장
군 백제 사마왕'으로 시작되는 지석 1매와 '백제국 왕태비'에 대한 지석 1매 그리고 돌짐승...
청동거울...머리베게...다리베게...도자기류를 비롯한 각종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화려하게 치
장한 왕과 왕비는 일본 남부지방산  금송으로 만든 관 속에 누웠던  흔적만 남겼는데, 왕이 
오른편 왕비가 왼편에 누웠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백제에서 벽돌로 만든 무덤은 무령왕릉 외에도 이웃한 송산리 6호분을 비롯해 공주 지역
에 몇 기가 더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전축분은 대부분 중국 남조의 영향 혹은 기술지원 아
래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은 당시 양자강  유역에서 조영된 무덤들과 무령
왕릉의 입지...구조...재료...축조방식 등이 매우 유사할 뿐  아니라 부장품에서도 중국 남조의 
영향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백제는 동진...송...남제...양으로 이어지는 남조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고, 그 결과 무령왕은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작호를 받았던 만큼 중국식 백제 무덤의 출현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남자
가 오른편, 여자가 왼편으로 자리가 고정되는 것도 중국  가부장제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됩
니다. 

      절터 - 사비시대의 유산
  충청남도 공주시에는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이 있습니다. 공산성은 왕성이었을 개연성이 
높은 곳이며, 송산리 고분군은 무령왕이 포함됨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핵심 지배층의 공
동묘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성격의  유적이 이웃한 부여군에도 있습
니다. 
  부여는 백제 당시에 소부리 혹은 사비라고 부르던 곳입니다. 그곳에는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이 있어, 공주시에서의 구조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렇습니다. 서기 538년
에 백제의 성황이 사비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궁이 부소산성의 바깥쪽에 있
었을 개연성이 높으며, 대규모의 나성이 부여시내를 감싸고 있다는 점에서 공주시와는 차이
가 나지만, 규모가 확대되었을 뿐  도시의 구조에 대한 기본적인 관념은  크게 바뀌지 않은 
듯합니다. 
  공주와 비교해 부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절터가 비교적 많다는 것입니다. 그중 시내에 위
치한 대규모의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에도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이 무렵 백제가  불교
를 얼마나 숭상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절을 가람이라 이르기도 하는데, 승려가  생활하는 
곳을 가리키는 범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절은 그 규모와 건물 배치가 매우 다양하고  자유분방하지만, 적어도 조선시대 이
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역사상 불교가 처음 전래된 삼국시대의 가람은 그 건물 
배치가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지요. 물론 신라 말기에  선종 불교가 유행해 사찰이 
산간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그 원칙이 흔들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일정한 기준은 있었던 것
으로 보입니다.

      가람배치
  복잡한 학설이 분분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정히하면, 절 곧 가람의 중심은 원래  탑이었습
니다. 물론 종교란 어디까지나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므로, 승려 역시 당연히 그 중심의 한자
리를 차지하겠지만, 경배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만 본다면, 부처의 사리를 모신 일종의 상징적 
무덤, 곧 탑이 핵심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평양 지역에서 조사된 청암리사지가 팔각형 목탑을 가운데 놓고 동...남...북쪽에 각
각 1개씩의 금당을 배치한 형태인 것음 비교적 초기의 가림이기때문이라고 합니다. 건물 배
치는 다르지만 경주의 황룡사지도 1탑 3금당식입니다. 금당이란 불상을 모셔두는  곳으로서, 
그 뒤에서는 보통 설법장소인 강당이 설치되는데, 청암리 사지에서는  북쪽 금당 뒤에 강당
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의 가치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탑과 금당
의 비율이 1대 1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보통 남쪽에서 중문을 들어서면 탑이 하나 있고, 그 
뒤에 다시 강당이 있는 가람 배치를 지향하게 된 것이지요. 부여 지역에서 조사된 감국시대 
가람은 대개 1탑 1금당의 건물 배치를 보입니다. 다만  궁남지 근처에 있는 군수리사지를 1
탑 3금당식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아직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탑 1금당식은 나중에 2탑 1금당식으로 변화합니다. 금당 하나에  탑이 두 개있는 구조로 
바뀐 것입니다. 금당은 하나인데, 탑이 2개이다 보니 탑은 금당 앞의 양 옆에 각각 한식  서 
있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절의 큰 문(중문)을 들어서면 예전에는 제일 먼저 탑과 만났
으나, 이제는 중앙의 탑이 양 옆으로 비껴 섰기에 금당 안에 놓인 부처님(불상)을 우선적으
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탑보다는 오히려 불상이 경배의 주된 대상으로 떠
오른 것이지요. 이와 같은 가람 배치를 쌍탑식이라고도 하는데, 삼국통일 이후에 지은  신라
의 감은사와 불국사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1탑 3금당, 1탑 1금당, 2탑 1금당 등을 시간적 
변화보다는 각각 고구려...백제...신라의 특징적 가람 재치로만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앞에서 말한 정림사지도 1탑  1금당의 범위를 벗아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왕이 
건설한 것으로 알려진 익산 미륵사지는 다소 특이한 예를 보여줍니다. 탑이 3개이고 금당도 
3개였던 것입니다. 하긴, 어찌 보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1탑 1금당식의 가람 
3개를 나란히 배치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실제로 조사 결과 탑과 탑, 금당과 금당  사이에는 
회랑이 남-북으로 나 있어서 3개가 각각 구획을 달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개의 가름을 
나란히 연결해 놓은 미륵사지, 그것만 보더라도 미륵사의 원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충분
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탑 - 백제인의 미의식
  미륵사지의 구모는 지금 남아 있는 탑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미륵사지의 서쪽 한켠에는 
높이 14.2m의 대규모 석탑이 반 정도만 남은 채 위태로이 서  있는데, 7세기 초의 건축물이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륵사지서탑을 자세히 들여다 보노라면  마치 7층내지 9층 목조건
물을 돌로 표현한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분위기만 그런 것이 압니다. 실제로  목
조건축의 배불림기둥이 그대로 표현되고 지붕과 구동,  문짝과 문고리마저 표현되어 있으니
까요. 미륵사지 서탑이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탑은 원래  목탑이
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상 탑에는 목탑, 전탑, 모전석탑, 석탑 등이 있었습니다. 목탑은 나무로 만든  탑
이며, 전탑은 벽돌로 만든 탑,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쌓은 탑 그리고  석탑
은 돌로 만든 탑을 말합니다. 
  그런데 초기에 들어온 탑은 중국 문화의영향으로 목조건물이었습니다. 고구려의 청암리사
지, 백제의 군수리사지, 신라의 황룡사지  등에 목탑 흔적이 있는  것도 바로 그래서입니다. 
이들 목탑은 전란 등으로 모두 소실되어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양식만큼은 속리산 법주
사의 팔상전 등에 전해져 오고 있어 참고가 됩니다. 
  전탑은 예가 많지 않은데 안동 조탑동의 5층 전탑, 여주 신륵사의 다층탑등이 대표적입니
다. 전탑은 삼국통일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집니다. 
  석탑은 가장 많은 예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지금 당장 근처의 절터에 답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미륵사지에서 확인된 3개의 탑지 가운데 중앙의 것은 목탑 흔적이라고 합니다. 기둥을 세
우기 위해 바닥에 깐 초석의 전체 구도를 잘 살펴보면 목탑의 규모라든지 대체적인 모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탑의 양 옆에는 석탑을 세웠는데  그것이 목탑을 그대로 
훙내낸 석탑이었던 것입니다. 
  백제의 석탑은 처음에는 목탑을  그래도 본떴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새약이 되는 부분이 
많아지고 돌의 특징을 살리는 쪽으로 건축기법에 변화가 옵니다 그리하여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는데, 기중이 보다 간소해지고 지붕이 길고 날렵해지며 1층
에 비해 2층 이상의 탑신이  훨씬더 작아지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백제탑의 
기본 특징, 곧 낮은 기단 위에 여러 개의 석재를  가구 조립하듯이 짜올려 목조건축의 느낌
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한 점, 2층 이상은 1층에 비해  폭과 높이가 비교적 급격히 줄어드는 
점, 건물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의 두께가 비교적 얇고 지붕의 네 귀퉁이가 가볍게 반전하
는 점 등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습니다. 
  한편, 신라 탑의 특징은 백제 탑의  특징을 뒤집어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읏합니ㅏ. 
즉, 기단부가 비교적 높으며, 큼지막한 석재에 기둥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한 인상 그리
고 1층부터 꼭대기까지의 체감률이 비교적 낮고 옥개석이 두툼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
다. 
  백제는 고구려난 신라와 달리 돌을 많이  사용한 나라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토성과  토축
묘, 전축분 등이 그런 분위기를 은근히 우리에게 전해주며, 마지막으로 석탑이 확인시켜  줍
니다. 돌마저도 나무처럼 다루려 했던 백제 사람들은 과연 어떤 미의식을 가졌던 것일까요?
  요란하지 않은 가운데 화려함을 추구한 사람들. 거칠고 큼지막한 물건을 만들어내기 보다
는 작지만 세심한 주의가 깃들인 물건을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들. 효율성이라는 찬단 기준
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동했던 사람들. 제가 생각하는 백제인들든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
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3) 신라
  경주에 가면 시내 곳곳에 봉긋봉긋 솟아 있는 작은 언덕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언덕
이라 하기에는 너무 작고 경사가 가파르며, 흙무더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일률적이라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분구말입니다. 평지에 만들어진 이 분구들은  단지 한 사람을 위한 
무덤에 불과해 규모에 비해서는 실속이 없는 편이지만, 나름대로는  그렇게 된 불가피한 이
유가 있습니다. 

      적석목곽분의 출현
  4세기초에 이르면 이제까지 통광묘와 소형  석곽묘가 주류룰 이루던 경주 분지에  새로운 
방식의 무덤이 출현하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바로 적석목곽분이지요.
 먼저, 땅을 편평하게 고르거나 돌을 깐 다음(적석목관분 중에는 땅을 얕게 판 것도 있습니
다. 그러나 적석목곽분의 전형을 보여 주는  대형 고분들을 보면, 모두 매장주체부 곧  관과 
지상에 놓인다는 것이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 위에 나무로 만든  곽을 세워놓고, 그 속에 
다시 나무 관을 넣습니다. 관은 시체를 보호하는 상자 그리고 곽은 관을 보호하는 나무상자
인 셈이지요. 그러나 관 안에도 각종  부장품을 넣지만, 보통의 경우 대부분의 부장품은  관 
바깥, 곧 곽 안에 넣기 때문에 곽은 관을  보호한다기보다는 부장품을 격납하는 공간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곽은 다시 돌로 덮습니다. 그리하여 외양은 마치  고
구려나 백제의 적석총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돌 무더기 위로는 흙을 덮습니다. 
마로 dln로는 진흙처럼 찰기가 있는 흙을 덮고, 그 다음에 맨 흙을 덮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목관+목곽+적석+봉토'의 구조가 되겠군요. 위의 네 가지 요소 가운데 
목곽과 적석을 가장 중요하며 특징적인 요소라고 생각해 적석목곽분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
입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적석목곽분이 북방아시아의 묘제로부터 영향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
는 듯합니다. 특히 카자흐 공화국과 중국의 접경지대에는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무덤등이 분
포하고 있는데, 그들 역시  '목곽+적석+봉토'로 구성되어 있어서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매우 
유사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쿠르간을 만들던 기마 집단  혹은 기마문화가 4세기 포 무
렵에 이동한 중 한 부리가 경주까지 내려옴으로써 신라에 쿠르간을 닮은 적석목곽분이 출현
하게 된 것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마민족에 의한 기마문화. 그 강력한 힘이 반영된 용어
가 바로 신라의 최고 지배자를 지칭하는 '마립간'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마침 적석목곽
분은 4~5세기의 마립간의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한 때문이지요.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중앙아시아의  일부지
역에서 쿠르간이 만들어지던 시기와 경구 지역에서 적석목곽분이 만들어지던 시기 사이에는 
400년 가까운 시기 차이가 있어서 문제가 되며, 또 중앙아시아의 쿠르간이 축조되던 지역과 
경주 지역사이에는 중국대륙이 가로놓여 있을 정도로  두 지역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중간의 그 넓은 공간에서 적석목곽분과 유사한 고분들이 아직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하는 것이지요. 쿠르간은 목곽이 지하로 깊이 내려가 있는데 반해 적석목곽분은 대형일
수록 목곽이 모두 지상에 놓이는 등, 세부적으로는 서로 다른  점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의
문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만약 신라의 적석목곽분이 쿠르간과 우연히 닮은 묘제라면, 즉  서로 전혀 상관없는 묘제
라면 어떻게 해서 경주지역에 적석목곽분이 출현하게 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렇게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먼저, 낙랑 지역, 곧 대동강 유역에서 유행했던 목곽묘가 경주지역에 전해져 조영되고  있
던 중, 고구려계 집단의 이주로 인해 적석총 문화가  함께 전래되면서 문화결합이 이루어졌
고, 그 결과 목곽을 사용하는 적석통 곧 땅에 목관과 목곽을 놓고 그것을 돌로 덮은 해로운 
형태의  적석총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 눌지 마립간  19년(435)경, 그러니까 5
세기 전반기에 기존의 적석총에 새로 봉토를 입히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한편으로는 아P 처
음부터 봉토를 씌운 형태의 적석목곽분이 축조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의 하나로서 적석목관분 중에 목곽이라든가 부장품이 심하게 부식된 고분들이  있
는 점을 들수 있는데, 진흙을 동반하는 봉토가 처음부터  있었다면 목곽부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부식이 완만하게 진행되었겠지만 원래는  적석총이었기 때문에 돌 사이로  공기와 
빗물이 흘러 들어 시체와 부장품이 급속히 부식되는 적석총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게 되어삳
고 합니다. 그렇다면 적석목곽분의 특징을 크게 부각시키는 요소로서 목곽보다는 오히려 봉
토가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이러한 생각을 용어에 반영한다면 적석봉토분이
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실제로 그러게 부르기도 합니다.

      횡혈식 석실분의 장점
  6세기에 들어서면, 경주지역에 새로운 묘제가 등장해 적석목곽분을 대체한 것으로 알려집
니다. 횡혈식 석실분을 소개하면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횡혈식 석실분은 기존의  적석
목곽분에 비해 만흥ㄴ 장점을 지닌 무덤이기에  경주 지역에 소개되자 마자 금방  유행했는
데, 장점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합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어서도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결혼한  사람이 죽으면 부부를 나란히  묻어주는 게 
아닌가요? 적석목곽분 중에는 2개의 고분을 나란히 세워놓아 옆에서보면 마치 표주박을 엎
어놓은 듯한 모습으로 만든 것이 있느데, 이를 표형분이라고 합니다. 표형분은 보통  부부의 
무덤으로 해석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황남대총으로서, 북쪽의 무덤에는 여성, 남족의 
무덤에는 왕인 듯한 남성이 묻혀 있었습니다. 작은 동산만한 무덤을 나란히 붙여 놓은 의도
는 죽어서도 같이 있으라는 뜻에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횡혈식 고분은 적석목관분처럼 남자
와 여자를 수 십미터씩 떨어뜨린 채 나란히 묻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손을 뻗으면 바로 
옆에서 만져질 수 있도록 가까이 눕혀놓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획적입
니까. 이런 방식의 무덤을 신라인들이 거부할 이유가 없지요.
  둘째, 기술만 있다면 노동력과 재료가 적게 들고도 훨씬 더 견고하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적석목곽분은 사람이 죽고 난  위에야 비로소 만들 수 있는  무덤입니다. 관과 곽을 
놓고, 그 위에 돌을 덮고, 또 흙을 덮는 방식인데, 직경이 수십 미터에 달하고, 높이 역시 최
소한 심여 미터를 넘으니,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요? 더군다나 다 만
들고 나면, 위에서 누르는 돌과 흙의 압력 때문에 속에 공간이 있는 관과 곽은 썩으면서 금
방 내려앉아버리는 단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경주를 방문하게 되면 적석목과분의 꼭
대기를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근래 새로이 보수한 것이 아니라면 중앙부가 살짝 내려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
으니까요. 시체가 돌과 흙에 깔린다고 생각하면, 보는 사람 마음이 좋을 리 없겠죠?  그런데 
석실분은 수십톤에 달하는 흙무더기의 압력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튼튼하
답니다. 그렇다고 만들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적석목곽분과 비교할 때 그저 
석재 약간과 석공 및 건축기술자 약간 명 그리고 땅을 파고 흙을 덮을 단순 노동자  약간명
만 있으며 멋있고 견고한 횡혈식 석실분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셋째, 축조 경비가 비교적 저렴하며 여러차례 이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적석목곽분을 만
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사람밖에 묻을 수 없었습
니다. 그러나 횡혈식 석실분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몇  명의 기술자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무덤이기에 인력 절감의 효과가 높으며, 한 사람만 묻는 것이 아니라 여러사람을 시간
에 관계없이 한 공간에 묻을 수도 있기에 경제적 효율도가 무척 높은 무덤입니다. 
 넷째, 언제든지 드나들며 관리할  수 있고, 내부가 위생적이며  깔끔하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다른 특징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이미 시사되었을 터이니 다실 설명할 필요
가 없겠지요?

      횡혈식 석실분과 풍수지리사상
  횡혈식 석실분은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사용한 무덤입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미 4
세기에 횡혈식 석실분을 사용했으며, 백제는 늦어도 5세기에  그리고 신라는 앞에서 말했듯
이 6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축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라의 지배층이 횡혈
식 석실분을 사용함으로써 삼국은 이제 횡혈식 고분시대를 맞이했다고 할 정도로 횡혈식 석
실분은 향후 수백년간 유행하게 됩니다. 
  놀라운 속도로 번져나간 횡혈식 석실분은 단순히 무덤을 만드는 방식이나 시굴의  문제만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하에 전해진 횡혈식 석실분은 그 축조방식 속에 작지만 위
력적인 관념을 감추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풍수지리사상입니다. 물론 횡혈식 석실분을 채
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풍수지리사상의  수용으로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횡혈식 
석실분을 만드는 사이에 사람들은 서서히 풍수지리사상의  수용으로 연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횡혈식 석실분을 만드는 사이에 사람들은  서서히 풍수지리설에 가까워졌고, 결국에
는 그에 얽매이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의 왕릉이 초기의 것은 평지에 축조된 데 반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산기슭으로 옮겨가고, 나중에는 산의 중턱에 자리잡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
한 상황을 반영한 구체적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횡혈식 석실분은 불교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무덤인 듯 합니다. 우선, 
석실을 만드는 기술은 가람 건축에 필요한 각종 기술의 한 부분을 원용한 것일 개연성이 높
으며, 부장품의 양이 예전의 적석목곽분에 비해 많이 간소해진 것도 불교사상의 영향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의 전래와 유행 그리고 문무왕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해진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대체로 눌지마립간의 
재위 무렵(417~458)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에서는 불교
가 처음에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불교의 포교활동을 반대하는  사랍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법흥왕 14년(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었으며, 그 
뒤 불교신앙은 신라 전역의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왕실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
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즉, 여러 가지  이유로 왕실은 불교계를 적극 지원하고 불교  유행을 
조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7세기에는  이미 불교가 신라의  국교로서 확실히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 신앙은 내세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바꾸어 놓았고, 또 매장 습관, 곧 장례  관습네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화장인데, 육체에 얽매이지 않는 불교의  인간관
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서기 681년에 세상을 등진 문무왕도 그랬습니다. 문무왕이  누구입니
까? 서기 661년 왕위에 오른 뒤 668년에 드디어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을 통일하고, 
이후 10년 가까이 당나라 축출작전에 돌입하여 성공을 거둔  입금입니다. 국가에 이익이 되
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누구보다 실질을 숭상했던 임금입니다. 그런 임금이었기
에 그는 죽어서 한줌 재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문무왕은 불교의 공력을 독실하게 믿은 왕이었습니다. 당나라와의 전쟁이 한창일 때 승려 
명랑의 건의에 따라 전쟁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사천왕사를 지어 서기 679년에 완공했으며, 
죽어서는 시신을 화장해달라고 유언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는 단지 화장만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뼈를 '동해의 입구'에 뿌려 달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삼국유사에 따
르면,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이 말한 '동해의 입구'란 토함산에 발원해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서 바다로 들어사
는 대종천의 하구를 가리킵니다. 그곳에는 대왕암, 즉 현지 주민들이 '뎅바위'라고 부르는 큼
지막한 암초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바위 중앙부에 문무왕의 뼈가 수장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호국불교와 감은사
  동해의 용이 되려고 한 문무왕, 그는 과연 누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려 했을까요? 그 이유
를 알기 위해서는 신라의 역사를 잘 살표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시조인 혁거세왕 때부터 왜인들의 습격과 약탈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대개의 경우는 동쪽 해변지역의 피해가 컸습니다. 이때의 왜인이 곧 지금의  일본이
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해적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만큼은 비교적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7세기 후반에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낸 신라로서는 이제 
평화로운 세상은 꿈꿀 수 있게 되었지만, 6세기 이후로  잠잠한 가운데 여전히 나라의 우환
덩어리로 남아 있는 해적과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국가세력에 대한 경계를 늦추기는 어려웠
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문무왕은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그들 해양세력의 침탈로부터 신
라를 보호하려 했던 것입니다. 
  문무왕의 이러한 생각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만년에 '국가를 보호한
다'는 뜻을 지닌 진국사를 동해안에  창건한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당시  호국불교의 
성격이 짙던 신라 불교계에서 사찰은 단지 승려들이 수도하며 염불만 외우는 장소가 아니었
습니다. 그곳은 종교적인 측면 외에도 평소 교통..통신의 중요 거점역할을 했으며,  유사시에
는 국토방위의 전진기지로서 기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동해안에 지은 진국사는 호국적 성
격이 가장 강한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문무왕은 진국사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진국사
가 완공된 것은 신문왕 2년(682)이었습니다. 사찰을 완공한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뜻에 
감격하고, 그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사찰 명칭에 반영시켜, 진국사라는 이름 
대신 새로이 감은사라는 이름을 붙이니, 그곳이 바로 장중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2기의 삼
층석탑으로 유명한 감은사인 것이다. 감은사만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다 표현하기 어
려웠는지, 신문왕은 해안가 고갯마루에 이견대라는 축대를 세웠습니다. 이곳에 서면  문무왕
의 뼈와 뜻이 잠긴 대왕암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동해의 용 - 효성왕
  그런데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된 임금은 비단 문무왕만이 아닙니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742
년에 효성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한 뒤 뼈를  동해 뿌렸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제 37대 임금인  선덕왕도 죽은 뒤 화장하여 그 뼛가
루를 동해에 뿌렸다고 한다.)
  효성왕이 과연 어떤 내용의 유언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지만, 이
런 식으로 추정해볼 수는 있습니다. 즉, 삼국유사의 기이편 효성왕조에는 개원 10년(722) 10
월 경주 동남쪽의 모화군에 관문을 쌓아 일본의 침입을 막는 요새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
바, 효성왕도 문무왕처럼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기 위해 일부러 화장을 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할 경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서기 722년은 효성왕대가 아니라 
효성왕의 아버지인 성덕왕 재위 21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효성왕은 서기 737년에 즉위
해 742년에 죽었으로 모화군의 관문 축성은 절대 효성왕 때의 일일 수 없습니다. 실제로 삼
국사기에는 성덕왕 21년에 모벌군성을 쌓아 일본 도적들의 침입로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습
니다. 이처럼 두 기록이 서로 다를 경우, 학자들은 어느 기록이 더 정확한지를 가려낼  의무
가 있습니다. 
  '개원'은 당나라의 현종이 서기 713년부터 741년까지 사용한  연호입니다. 따라서 개원 10
년은 서기 722년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약 이  연대에 잘못이 없다면, 효성왕이 관문을  쌓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만약 연대에 착고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어느 쪽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삼국사기의 성덕왕 21년조 기사로 보아,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
나 단순히 연대를 잘 계산해 성덕왕때의 관문 축조 사실을 효성왕 때 의 일로 적었다기보다 
모벌군(모화군)의 관문과 효성왕 사이에, 혹은 일본과 효성왕 사이에 무언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착오가 유발된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생각을 앞에서 소개한 효
성왕의 장례방식과 연계지어 보면, 효성왕의 유언 역시 문무왕과 마찬가지로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용이 되겠노라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
  효성왕은 재위 6년만에 세상을 등지고, 그의 동생인 경덕왕이 즉위했습니다. 경덕왕이  즉
위했습니다. 경덕왕이 즉위하던 해에 일본국에 사신이 왔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아마도  아들 없이  세상을 의형을 의  듯을 선양하려는  경덕왕 9년
(750), 김대정이 관직을 사임하자, 그로 하금 나라의 영산인 토함산에 불국사와 석불사를 짓
게 한 것입니다. 김대정은 삼국유사에 김대성으로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는 서기  751년부터 
24년간 두 사찰의 건축을 지휘...감독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그것을 정부가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불국사...석굴암의 창건 이유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역사 기록이 아닌  민간의 이야기가 
채록되어 있는데,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지었다는 내용입니다. 석불사는 석굴암의 원래 이름입니다. 아마도 김대정(김대성)
이 두 사찰의 창건에 처음부터 깊이 관여해 20여년을 한결같이 봉직했기 때문에 마치 개인
의 사찰인 양 서민들이 오해한 데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불국사는 현생의 부모를 위한 것이고, 석불사는 전생의  부모를 위한 것이라는 대목
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찰의 성경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지요. 특히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석불사(석굴암)에 주목해 봅시다. 
  토함산의 동쪽 산마루에 위치한 석굴암은 인도나 중국에서처럼 자연 암벽을 뚫어서  석굴
을 만드는 방법을 쓰지 않고 거대한 암반 위에 평탄한 터를 닦는 뒤 각종 석재를  쌓아올려
서 만든 인공 석굴입니다. 구조는 크게 보아 전실과 후실이 있는데 전실의 평면형태는 방형
이며, 후실은 원형입니다. 후실의 정가운데에는 본보인 아미타여래좌상(종래 석굴암의본존불
은 석가모니불상이라고 전해져 왔다. 특히,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점이라든지 10대 제자
가 둘러싸고 있는 점 그리고 신체  각 부분의 크기가 중국마하보리사의 본존불과  쪽같다는 
점에서 석굴암의 본존불이 석가여래를 형성화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불국사와 석굴
암(석불사)의 관계에 주목하고 본존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 본존불 바로 뒤에 
현세에서 중생 구제를 실현하는 관음보살상이 부조되어 있는  점, 신라에서 7~8세기에 아미
타신앙이 크게 유행한 사실 그리고 불상의 모양은 같더라도 그 명칭은 불교의 발달과 함께 
변화했다는 점등을 감안하면, 석굴암의 본존불은 아미타불일 개연성이 높은 듯하다.)이 결가
부좌를 한 채 연꽃무늬가 아래 위로 조각된 대규모의 원형 대좌 위에서 동남쪽을 향하고 있
습니다. 
  아미타불은 서방의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부처라고 합니다.  그런에 이 아미타불이 향하고 
있는 동남쪽, 더 정확히 말하면  동동남쪽은 놀랍게도 앞에서 소개한  '동해구' 곧 대왕암이 
위치한 곡이어서 우리의 비상한 관심을  끕니다.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의도적인  배치라고 
믿는 사라들이 많습니다. 아미타불이 어떤 부처입니까? 그가 언제 만들어졌습니까? 그가 바
라다보는 곳은 어디입니까? 이 세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연결시켜보면 전생의 부모를 위해 
만들었다는 석굴암은 용이 되기를 소망했던 그리하여 호국신이 되고자 했던 두 대왕의 명복
을 빌고, 그들의 바람대로 나라가 항상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긴 곳이었다고 결론지
을 수 있겠습니다. 
  뜻이 크고 아름다워서일까요? 불국사와 석굴암은 신라의  건축...미술 수분이 가장 고조되
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석가탑은 삼층석탑의 완성이라고 평가받을 정
도 단아하면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다보탑은 당시 건축...조각의 발달된 기교를 온
몸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석굴암의 전체 구조는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합
니다. 후실에는 아미타불을 둥글게 감싸며 십일면관음과 문수.보현보살, 10대 제자, 제석천...
범천 등이 부조되어 있고, 전실에는  팔부신장과 2구의 금강역사가 부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실과 후실 사이의 통로에는 사천왕상이 지키고 서 있습니다. 
  문화재에는 선조의 뜻과 솜씨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그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
다. 그 지혜가 탐난다면, 또 선조의 뜻이  궁금하다면, 경주에 다녀오십시오, 공주에, 붕여에 
다년오십시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십시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화재인지..........

    4) 전삼국과 후삼국
      후삼국시대란?
  삼국유사에는 전백제라는 표현과 후백제라는 용어가 자주  나옵니다. 후고구려 내지 후고
려라는 국명도 있습니다. 삼국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라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이 완
산주 곧 지금의 전주에 근거를 두고 '후백제'를 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효공왕 5
년(901)에는 궁예마저 송악 곧 지금의  개성에서 왕을 칭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이때 
구예가 고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보통 '후고구려'
라고 불러 왕건이 세운 나라와 구별합니다. 
  견훤과 궁예가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신라 왕실과는 전혀 다른 독
립정권을 세움으로써 통일 신라의 영토는 크게 3구역으로 구분되었습니다. 한반도 중부지역
을 차지한 궁예정권과 서남부 지역의 견훤정권 그리고 동남부의  신라로 나뉜 것입니다. 그
것은 마치 7세기 중엽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구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서기 935년에 신라 경순왕의 항복...선양을 받은 왕건이 이듬해인 936년에 대
군을 이끌고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종결되었는데, 9세기 말부터 왕건의 통일까지 반세기
에 가까운 기간을 우리는 보통 후삼국시대라고 부릅니다. 
  후삼국시대는 앞에서 살펴본 삼국시대와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얼핏 보더라도 
국명과 정국 구도가 같으며, 생존이 걸친  치열한 전쟁을 벌인 점이 같습니다. 특히  궁예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고구려 계승의지를 분명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리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은 아닙니다만, 고구려는 광개토왕 내지 장수왕 때에 국명을 '고려'로 바꾼 
바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특의 역사서에는 장수왕 이후의  고구려를 모두 '고려'로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궁예와 완건이 사용한 '고려'라는 국호가 고구려에서 '구'자를 
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옳은 설명은 아닙니다. 
  백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젼훤은 백제를  대신해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원수를 갚겠다고 공원했습니다. 그것은 백제 계승의지의 강력한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렇다면 견훤은 예전의 국명 앞에  굳이 '후'자를 새로이 첨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료에는 '견훤의 백제'라는 표현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따라서 국명으로만 본다면, 고
구려...백제...신라의 감국시대가 다시 한 번 열린 것입니다. 10세기 전반기의 정국 상황은 감
국시대와 비교해 별반 다를 바가  없지만, 사회의 분위기와 정권의 성격은  꽤 만은 차이가 
있습니다. 

      궁예정권의 한계
  9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신라의 지방에서는 각종 반란이 줄을 이었습니다. 특히 사회...경제
적인 문제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근거지를 떠나 유랑하게 되면서 도적화하는 현상이 발생했
습니다. 그러자 이들의 규합해 세력화하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죽주의 기훤, 북원의 양길등
이 재표적이며, 원래 군인 출신으로 도적 무리를 모아 나라를  세운 견훤도 이에 속하는 사
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궁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원래 승려 출신으로서 무리를  모아 처음에는 기훤의 휘
하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양길의 휘하로 옮겼으며, 결국  강원 지역에서 독립한 사람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훤...양길 등과 달리 점차 약탈적 성격을 벗어나 행정조직을 갖추는 
정치력을 발휘했으며, 그 결과 경기 지역의 각종 세력을 병합하고 기훤...양길의 세력까지 격
파함으로써 '고려'라는 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른 궁예는 원래 신라의 왕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출생시의 조
짐이 좋지 않자 버림을 받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라 왕실에 대한 궁예의 개인적인 원한이 대단했기 때문에 궁예정권은 시종일관 신라에 대
해 적대적이었다는 것이 사가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
은 지금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궁예는 기존 질서에 도전한  사람인데다 나중에 부하인 
왕건의 쿠데타로 실각한 사람이기에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편찬된 사서에는 매우  부정적
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궁예는 기존 질서에 도전한  사람인데다 나중에 부하인 왕건
의 쿠데타로 실각한 사람이기에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편찬된 사서에는 매우 부정적인 인
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상을 간접적으로 반영한 것이 바로 위의 인물 설
명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궁예의 '고려'국가 건설은 '고구려 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를 통해 그의 세력은 급속히 
증대되었습니다. 궁예가 고려를 건설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200년도 더 지난 때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려'재건이 폭발적인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신란의 삼국 통일이 그
다지 실질적인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라의 골품제라고 
하는 특징적인 신분질서에 큰 원인이 있었던 듯합니다. 혈통제일주의에 입각한 신라의 신분
질서는 경쟁이 사라진 상황에서 고구려...백제의 유민들을 소외시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것이 기본적으로 신분제 사회가 안고 있는 허약한 지서의식과 맞물림으로써 결국 국민 전
체의 결속력을 해쳤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하튼, 고구려 계승을 외치던 궁예는 구가의 기반이 어느  정도 갖춰진 서기 904년에 돌
연히 마진으로 국호를 바꾸었으며, 무태라는  연호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서기  910년에는 
국호를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로 고쳤습니다.  고구려 계승이라는 명분에 변화가 온  것입니
다. 도한 그것은 자신의 권력기반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
한 자신감은 오히려 궁예로 하여금 독선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했으며, 그로 인해 권력기반
이랄까 입지가 약화되어갔습니다. 
  한편, 연호 사용 역시 궁예의 자신감이 표출된 결과라고 할수 있겠는데, 궁예정권의  외교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도움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연호 사용은 당시 동아
시아의 정세를 주도했던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스스로 이탈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궁예정권의  연호 사용은 매우 주
체적인 행동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그에 걸맞는  힘을 아지 배양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에서는 독선적 정국 운영과 맞물려  민심을 잃기 쉬운 소재로 작용했던  것입니
다. 그것은 나중에 고려 태조  왕건이 연호를 사용한 것과는 도  다른 입장의 표명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궁예의 자신감은 신라 곧 기득권 세력에 대한 극단적 멸시로 나타났습니다 궁예가 부석자
에 그려진 신라왕의 벽화를 칼로 긁었으며, 경주를 멸도로 부르게 하고, 신라로부터 오는 사
람을 모두 죽였다는 등의 기록은 다소 과장된 것이겠지만, 궁예의 신라에 대한 반감을 상징
하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신라, 곧 기득권세력에 대한 궁예의 이러한 반감 표출은 사
실 궁예정권의 포용성 부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서, 결국  궁예정권의 성장에 장애가 되
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국익을 군사...외교정책의 절대 기준을 삼았던 (전)삼국시대의 상황과 
비교하면 매우 개인적인고 편협한 국가관이 가져온 일종의 족쇄였던 셈입니다. 

      견훤정권의 한계
  견훤은 상주 출신의 이씨로서 서남해안에서 비장으로 근무하다가 서기 892년에 무리를 모
아 무진주를 습격한 후 독립정권을 세웠으며, 효공왕 4년(900)에는 드디어'벡제왕'을  칭하고 
관직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월에 사신을 보내 조송하고 관작을 받는 정치.외교력을 
발휘했습니다. 거시 925년에는 후당에 사신을 보내 제후를 칭하며 조공하고, 백제왕의  작호
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견훤은 궁예에 비해 배우 세련된 정치감각을 지닌 인물이엇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서기  918년에는 왕건이 쿠데타를 통해  궁예를 몰아매고 왕좌를 
차지하자 곧바로 사람을 보내 축하하며 선물을 전한 것은 당시의 정국을 정치논리로 풀어가
려는 의도가 드러난 행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서기  925년에는 백제와 고려가 서
로 인질을 교환하는 우호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견훤의 신라에 대한 반감은 궁예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합니다. 사실 어지  보면 
구예와 견훤의 반 신라 감정은 그들이 신라 왕실을 부인하고  독자정권을 세운 이상, 그 정
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고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였는지 모릅니다. 또  신라의 지배층이 
사회 혼란을 자초한 사실이 분명히 인정되는만큼, 그들의 반신라 감정은 한 부분 민심을 모
으는 방편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 표출이 지나치게 되면,  필요이상으
로 과격해지거나 폭력적인 성향을 띠기 쉬우며, 그 결과 또  다른 모순을 낳게 되는 법입니
다. 대내...외적으로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던 견훤이 신라에 대한 반감을 끝내 억제하
지 못한 것은 차라리 그의 한계였다고 해야겠습니다. 

      견훤정권의 흥망
  신라의 경애왕 4년(927) 가을 9월에 견훤의 군대는 신라를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경우 근
처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러자 신라에서는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왕건이 출
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 요청은 오히려 신라측의 동태를 살피던 견훤을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공격의 고삐를 늦추고 있던 견훤의 군대가  10월에 갑자기 경주를 습
격한 것입니다. 
  이때 경애왕은 왕비와 궁녀 그리고 신하들과  함계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고  있다가 
황급히 별궁으로 돌아왔으나 끝내 포로가 되어 견훤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
데 견훤은 단지 경애왕만 죽인 것이 아닙니다. 궁중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왕비를 능욕하고 
군사를 풀어 약탈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견훤의 이러한 행동은 나중(931)에 왕건이  경주를 
방문했을 때 신라왕에게 예의를 다하고 군대의 규율이 엄격했던 것과 대비되어 신라인의 반
백제 감정을 고양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견훤은 경애왕의 집안 동생인 김부로 하여금 신라의 왕위를 잇게  한 뒤, 국가 창고의 진
귀한 보물과 무기를 압수하고 퇴각했습니다. 돌아오던 길에 견훤의  군대는 지금의 대구 팔
공산 아래에서 왕건이 이끄는 기병 5천명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게 됩니다. 이대 왕건
은 휘하의 장군인 심승겸이 목숨을 바치며 군사를 이끌던 가운데 혼자서 몸만 빠져 나올 정
도로 대패했다고 합니다. 이후 백제는 한동안 고려의 군대가 전투를 피할 정도로 확실한 군
사적 우위를 확보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신라의 지배층과 백성은 이미 회복 불가능 상태에 빠진 자국의 운명을 백제보다는 
고려에게 맡기고자 했습니다. 자신들의 왕을 죽이고 보물을 약탈한 사람을 새로운 지배자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갈가리 뜯기고 찢긴 자신들에게 따듯한 시선을 보내 위로하고 겸손한  태
도로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의 태도는 군사
적으로 열세에 처해있던 왕건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 힘을 기반으로  왕건은 다시 힘차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힘이 백제를 멸망시킬 정도로 컸던 것은 아닙니다. 
  백제의 멸망 원인은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에  있었습니다. 견훤의 겨듭되는 전투승
리에도 불구하고 왕건에게 귀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견훤의 포용성 부
재와 독선적 정국 운영에서 나온 결과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은 내부이었습니다. 
  견훤에게는 아들 10명이 있었는데, 견훤은 그중 넷째 아들인  금강을 특별히 사랑해 그에
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습니다. 그러자 맏아들인 신검이  서기 935년에 쿠데타를 일으켜견훤
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귀순했는데, 왕건은 견훤을 후하게 대접하며 존대했다고 합니다. 
  견훤에 대한 왕건의 후대는 백제인을 비롯해 고려에 적대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
니다. 더욱이 견훤이 고려에 귀순한 직후 정통왕조임을 자부하던  신라의 왕마저 스스로 왕
건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내외의 민심은  이제 급격히 고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리하여 
서기 936년에 왕건이 견훤을 앞세우고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의 군대는 저절로  무너졌으며, 
그 결과 후삼국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혼돈의 시대가 요구한 가치관
  가만히 생각해보면, 후삼국시대는 정치논리보다  개인의 감정이 우선한 시대인  듯합니다. 
힘이 일종의 기준인 동시에 절대적 가치로 작용한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군사력이 
지배의 근거이자 논리마저 되었던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후삼국시대는 보통 혼란의 시대로 
인식됩니다. 혼란은 욕심과 옥선을  부르게 마련입니다. 궁예의  고려...마진...태봉이 그랬고, 
견훤의 백제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비록  사회의 모순, 지배층의 부패를 규탄하며  호기있게 
일어섰지만, 지나치게 가격한 개력과  개인적 욕심 그리고 독선적인  태도로 인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후삼국시대의 최종 승자는 욕심과  독선을 누른 사람, 그리하여  관용과 포용으로 무장한 
사람, 바로 왕건이었습니다. 혹여 그가  보인 관용과 포용이 위선에  찬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위선은 궁예와 견훤의 독선보다 나았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보인 포용은 중세를 여는 
출발점인 동시에 통치자의 덕목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포용성으로 인해 기득권층의 상당수는 여전히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
다. 특히 신라의 평화적 항복은  신라의 지배층이 고려 왕조 개창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으며 이를 통해 기득권층의 전체 구도는 큰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
습니다. 역사란 그런 모양입니다. 정권 교체를 통한 기득권층의 대대적인 몰락이란 결코  성
립될 수 없는 허상일 지 모릅니다. 그저 점진적인 개혁, 순차적인 변화...발전이 있을 뿐입니
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가 항상 다수의 움직임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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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총무수(저)...이용범(역), 중국의 역사(상)...(중), 중앙신서, 1980.(문고판)

  제 5장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1) 북한의 교과서 - 역사교육의 특징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서기 660년, 백제의 의자왕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의 무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무릎을 끓었습니다.  그리고 태자 효,  왕자 태...융...연과 신료  88명, 백성 
12,807명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이에 백제에 남아 있던 귀족  복신은 
승려 도침등과 함께주류성을 근거지로 삼아 백제 재건투쟁을 벌였으며, 나아가 왜국에 볼모
로 가있던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감시까지 했습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짓밟히던 백제인
들이 재건투쟁에 호응하자, 백제는  다시 일어설 듯한 지세여Ttmqslke.  그리하여 당나라의 
장군 유인원이 주군하고 있던 사비성을 포위했는가 하면,  유인궤가 이끌던 군사를 1만여명
이나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세를 올리던 백제부흐군은 상황이  유
리해지자 다시 내분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
는 복마전이 펼쳐졌으며, 결국 그 틈을  노린 나...당 연합군의 총공격을 받아 서기  662년에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흑치상지와 지수신 등이 임존성에 웅거하며 저항했으나,  흑치상
지는 자진해 항복하고, 지수신은 흑치상지가 이끄는 당군에 의해 격파됨으로써 백제의 명맥
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습니다. 
  서기 668년,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영양왕 23
년(612)에 수나라의 양제가 이끄는 113만 대군을 무리치고, 이듬해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
둔 고구려입니다. 보장왕 4년(645)에는 당나라의 태종이 이끄는 대군마저 물리친 고구려입니
다. 그리하여 당나라 태종은 물론 그 뒤를 이은 고종까지도 신하들의 명분론에 입각한 고구
려 정벌 주장은 부담스럽게 여기도록  만든 나라입니다. 그런 고구려가  조심스럽게 군사를 
움직인 당나라와 그에 응한 신라의 협공을 받고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불과 20년만
에 고구려는 이미 예전의 고구려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이처럼 허무하게 무너진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동...서양의 고금을 통틀어  멸
망하는 집단이 공유했던 특징, 바로 내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서기 666년, 고구려의영유왕
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울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막리지 연개소문이 병으로 죽었습
니다. 그리고 그의 장남인 남생이 뒤를 이어 막리지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남생이 잠
시 출장을 나간 사이에 아우인 남건과 남산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남생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남생은 국내성은 날아나 웅거하다가 끝내 아르 헌성과 함께 당나라에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예전의 고구려가 아님을 알게 된 당나라는 서기 667년부터 신라를 동
원하며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고, 이듬해인 서기 668년 여름 9월에는 마침내 수도 평양을 함
락시켰습니다. 중국측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사람 38,300호를 
중국의 서쪽과 남쪽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고구려 땅에 9개의 도독부를 설피함으로써영구 지
배를 획책했습니다. 
  한편, 평양이 함락된 뒤에도 고구려 사람 중에는 계속 저항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선, 
왕족인 안승(안순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안승의 출신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설명이 달라 
분명치 않은데, 보장왕의 서자, 보장왕의 외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아들 등으로 전
한다.)은 고구려의 대형 검모잠과 함께 한성 곧  지금의 황해도 재령 지방에서 고구려 재건
투쟁을 벌였으며, 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습니다. 고구려인들의 재건투쟁에는 
당나라의 야욕을 간파한 신라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나라가 한번 쓰러지면 다시 세우기 어려운 법입니다.  더욱이 당나라는 당시 최고
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렵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싸움에서 연패하면서 고구려 유민들의 세
력은 점점 작아져 갔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상황이 어려워지자  내부의 의견충돌이 
발생해,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시성을 비롯해 지방세력  중에는 여전히 당나라의 지배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당나라 군대에 의해 차례로 격파됨으로써 고구려 재건
은 이제 점점 더 어려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의 저항을 부담스럽게 여긴 
당나라는 거시 677년 보장왕을 신성으로  보내 안동도호부를 통치하게 하는 등  고구려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형태의 회유책잉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적
어도 국가 재건이라는 당토의 목표는 끝내 달성되지 못했습니다.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그리고 통일신라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자마자, 당나라는 그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는 물론 신
라까지도 직접 통치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에  안동도
호부를 설치한 것처럼, 신라에는 계림도독부를 설치했던 것입니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문서
상의 통치조직에 불과했지만, 신라인들이 당나라의 야욕을 확인하는 증거로서는 충분했습니
다. 서기 670년, 신라는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망명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은 다음 
금마저 곧 지금의 익산 지역에서 살게 했는데, 이는 백제왕자  부여융을 통해 옛 백제 지역
을 통치하려는 당나라의 의도를 분쇄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듯합니다. 즉, 고구려 유민과  합
세한 뒤 옛 백제 지역에 남아 있는 당나라 군대와 대적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지요.
  여하튼,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예T 백제 지역에서는 신라와  당나라 상이의 전쟁이 본
격적으로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에는  신라가 사비성을 함락시켰고, 그  다음해에는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한상...임진강 
유역이 주된 전쟁터로 변했고, 그곳의 매초성에서 치열한 싸움 끝에서 서기 675년 신라군이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전쟁은 막바지로  치달았습니다. 그리고  문무왕 16년
(676), 마침내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에 위치한 요동성으로 옮겼으며,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의 신라를 우리는 통일신라라고 불러, 이전  시기의 신라와 구분하고 있
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통일신라'는 용어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중 상당수는 신라의 통일이 지니는 의의를 폄하하거나 아예 통일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특히 북한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역
사학계의 공식 입장이 되어온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통일신라'를 '후기  신
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라의 통일에 대한 불만 - 북한 역사교육의 특징
  1982년에 발간된 북한의 고등중학교 3학년 교과서 조선력사(상권)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
이 있습니다. 
  "신라의 통치배들이 당나라 침략자들의 힘을 빌어 제놈들의 정치적  야욕을 실현해보려고 
한 것은 아주 어리석고 옳지 못한 생각이었다."(70쪽)
  "신라의 나약성과 비굴한 사대 존중사상으로 인해 이전 고구려 따에서 당나라 침략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72쪽)
  신라에 대한 혐오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대단히 비판적인 시각입니다. 
  위에서 보듯이, 북한의 역사학계에서 신라의 통일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로 정리됩니다. 
  첫째, 신라가 외세를 글어들여 동족 국가인  고구려...백제를 멸망시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반민족적이라는 것이지요.
  둘째, 고구려의 영토를 다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라는 대동강-원산맘의 남쪽지
역만 영유함으로써 고구려 영토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만주지역을 상실랬는데  이처럼 
고구려 영토의 9할 이상을 잃고 단지 1할 정도만 병합한 신라에게 어떻게 '통일'이라는 용어
를 적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북한에서는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 왕조  고려로 
보로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고개가 끄덕여지나요? 제 생각으로는, 위의  지적이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가
지고 있긴 하지만, 반드시 옳은 평가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밝히기로 하고, 우선 북한의 역사학계가 왜 신라의 통일 전쟁에 대해 위와 같은 극단적으로 
비판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북한의 역사교육의 특징이  되
겠군요.
  먼저, 북한에서는 철저하게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교
과서나 각종 서적의 머리말과 장...절마다 본문에 앞서 제시한 김일성 교시라든지 김정일 유
시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직접적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궁
극적으로는 경직된 유물사관과 주체사상으로  연결되며, 그것은 또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역사학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역사학이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현재적 관점이랄까 현실 반영은 
필요하고, 또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의 상황을  무시한 것이어서는 곤란합니다. 가
령, 앞에서 소개한 조선력사에서는 발해와 통일신라의 통치기구 및 군사제도 정비를 인민들
에 대한 봉건적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설명하고, 유교와 불교에 대해서
도 "돈 있고 권세 있는 놈들이 인민을 착취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데 써먹는 아편"이라
는 논리로 일관함으로써 그것이 우리 문화 발전에 미친  영향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는 과거의 사실을 선과 악이라는 현재의  절대기준 아래 평가하려는 시각이 개재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리하여 일단 악한 인물로 분류된 이성계의 경우에는 왜구를 소탕하는 데 큰 공
을 세운 사실조차 거론하지 않는 편파성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둘째, 피지배층 중심의 역사관을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인민대중은 사회역
사의 주체"이며, "사회역사적 운동은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라는 논점 속에 그대로 담
겨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배층에 대해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비판적으로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놈의 죽은 노예소유자""권세 있는  놈들""왕과 지주놈들""반동적인 양반 
지주놈들""관리놈들" 등의 용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용어만이  안닙니다. 국가의 성
립과 변천 과정을 다룰 때에도 특정한 왕명을 거론하지 않고 단지 서기 연도만 거론한 것은 
지배층에 대한 극단적 반감때문인 듯합니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영토 확장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광개토왕...장수왕...문장명왕 등의 
역할은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의 한글창제에  대해서는 그것을 조선인민들의 창조
적 활동의 결과라고만 하여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을 무시했습니다. 왕의 이름을 
거론하는 경우는 각 왕조의 건국자,  의자왕와 같은 국가 멸망 당시의  왕 그리고 연산군과 
같은 폭군에 한정되고 있습니다. 
  반면, 일반 서민과 천민의 활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고  관심 깊은 태도를 견지해 
부족한 사료헤도 불구하고 많은 분량을 할애했는데, 예를  들면 망이...망소이의 난(무신란이 
일어난 뒤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고려 명종 6년(1176) 1월에 공주 명학소의 천민이던 망
이와 망소이가 굶주린 무리를 이끌고 일으킨 민란을 말한다.  그들은 공주를 함락시키고 예
산을 공략하는 등 세력을 떨쳤으나, 이듬해 정월에 정부군에 항복했다. 정부는 망이와  망소
이를 처벌하지 않고 곡식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는데, 그들은 돌아간 지 한달 후에 다시 
난을 일으켜 충남 일대를 휩쓸다가 7월경에 정부군에  격파당했다.), 김사미의 난(고려의 무
신집권기인 명종 23년(1193)에 김사미를  미혹하여 불평불만자들이 경북 청도와  경남 밀양 
사이에 있는 운문산을 근거지로 삼아 일으킨 난을 말한다.  김사미의 세력은 나중에 효심이 
이끄는 집단과 결합하여 각지를 돌며 약탈하다가  정부군에게 격파되었다.), 만적의 난(고려 
무신정권기에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 등이 일으켰다가  실패한 노비해방운동이다. 신종 원년
(1198)에 만적을 비롯하여 도성에 거주하던 노비들이 "왕이나  장군은 본래 정해진 것이 아
니라 누구나 때가 오면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정해진 일시에 폭동을 일으켜  각각 주인을 
죽이고 노비문서를 불살라 없애기로 약속했으나, 율학박사  한충유의 노비인 순정이 밀고함
으로써 실패했다. 이후 순정은 은 80냥을 받고 양민이 되었으나, 만적 등의 백여 명은  처형
되었다.), 임꺽정의  활동(조선시대 중엽에  경기도  양주의 백정이던  임꺼정이 명동  14년
(1559)부터 수년간 무리를 이끌고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산적으로  지내다가 정부군에 
의해 토벌된 사건을 가리킨다. 임꺽정은 탐관오리를 혼내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하여 의
적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장영실의 발명활동(조선시대 세종 때의 과학자로서, 측우기를  발
명하고 양부일구...자격루 등의 제작을 지휘감독했다. 세종의 신임을 얻어 벼슬이 정3품 무관
인 상호군에 올랐는데, 원래는 천출이었다고 한다.) 등을 자세히 서술한 것이 그에 해당합니
다. 
  셋째, 전쟁사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외세와의 전쟁(대외투쟁)과 
내부 세력간의 충돌(계급투쟁)이 모두 포합됩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나라의 력사는  우리 
인민이 반동통치배들의 억압과 예속을 반대하고  외래 침략자들의 침입을 쳐물리친  투쟁의 
력사"임을 천명한 데에서 분명하게 예고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에 관한 서술이 매우자세
하며,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특히 고구려와 수...당나라 사이의 전쟁, 고려와  요나라 사이
의 전쟁, 고려와 몽고사이의 전쟁, 조선시대의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각종 지도를 제시하며 마치 일지를 작성하듯이 서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봉건통치배들의  수탈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인민대중이 
결국 봉기하게 된다는 논리를 견지함으로써 피지배층이 다수  참여한 반란...민란을 예외 없
이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천민...노비...농민군의 
활동상을 최대한 자세히 다루면서 반봉건적 계급투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넷째,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를 평양 지방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1970
년대 주체사상을 강조하게 되면서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심지어 3...1운동이 평양지
역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할 정도로 전 시기의 역사 해설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1972년에 평안난도 덕천순 승리산의 동굴유적에서 구석기 시대 중기에 속하는 
사람의 어금니 2개가 발견되었으며, 1977년에는 평양시 력포구역 대현동의 석회암 동둘에서
도 사람 머리뼈의 파편이 발견되었습니다. 각각  '덕천인''력포인'이라고 부르는 이들 화석은 
구석기 시대 중기의 한반도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뚜렷한 증거하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에 앞선 1972년에는  위의 승리산 동국유적 상픙부에서 구석기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사람의 아래턱뼈가 출토되었는데, 이 화석을 '승리산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평
양시 승호구 만달이의 동굴유적에서도 구석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사람의 머리...어깨...다리뼈
와 각종 도구가 발견되어,  이를 '만달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묵한에서는  이들 
'만달인'과 '승리산인'을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단정지음으로써 한민족의  기원을 평
양 지역의 선사시대 사람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평양 지역에서 단군의 무덤으로 전해오는 횡혈식 석실분을 발굴한 뒤, 이를  '단
군릉'으로 단정하고 성역화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를 요동 지역에
서 찾던 과거의 입장을 다소 수정해 고조선은 평양 지역에서 건국하고 요동 지역으로 천도
했다가 나중에 다시 평양 지역으로 옮겨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시대는 고구려사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평양성 건설과 천도를 중시
해 "평양이 세계적인 도시이며, 평양성 건설이  고구려가 강대국가이며 경제 문화가 발전된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되는 
발해라든지, 오늘날의 개성과 평양을 2도 체제로 운영했던 고려 왕조에 대한 시각에도 반영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왕조사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땅과 사람 그리고 국가
      신라의 통일과 민족의식
  신라의 통일전쟁에 대한 북한 역사학계의 부정적 시각은 나름대로 일정한 설득력을  지니
고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 공격에 신라가 소극적이었다든지 그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한 것 
등은 통일의지를 의심케 하는 요소임에 틀립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결과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
다. 앞에서 소개한 두 가지의 비판적 시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신라가 외세(당나라)를 뜰어들여 동족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명말시키는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했으므로 '통일'이라는 신성한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입반에 대해서입니다. 
사실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원인과 과정이 옳지 않다면 긍정적인 평가를 얻기 어려운 것
이 역사입니다. 더욱이 우리처럼 단일민족임을 강조해 온 나라에서 반민족적인 해우이를 통
해 자시의 이득을 취했다면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의 사람들이 삼국을 
과연 동족국가로 인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반민족적'이라는 용어를 당시의 신라에 적용하
려면, 우선 '민족적'이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들이 
'같은 민족' 혹은 '동족'이라는  개념을 가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삼국은 혈동과 
언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가졌던 듯합니다. 그러나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
가하는 것과 같은 짙은 동족의식, 민족의식은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구속력이 전현 
없는 다소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습니다. 
  삼국은 수백 년동안 100여 회가 훨씬 넘을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었습니다. 그 사이 적과 
우방은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백제의 세력 팽창에 대항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했고, 고구려
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었습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
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계해 양공작전을 펼쳤습니다.  이처럼 급변하는 정체속에서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삼국의 목표는 오직 하나, '생존'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살아 남으려는 동
물적 본능이 정치...군사논리를 지배하고, 국가의 모든 정책을  좌우했을 것입니다. 서기 660
년, 황산벌 전투에서 장군 김흠순이 아들 반굴을 그리고 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을 적진으로 
뛰어들어 죽게 한 것은 바로 그 같은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따른 것이라 하게Ttmqslke. dEo 
신라인에게 백제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내가 사는 원수국가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지
난 수백 년동안 끊임없는 싸움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삼국은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하나였던 나라가 나뉘어서 형성된 것이 아닙니
다. 따라서 다시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삼한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국력을 키워온 것이 곧 고구려...백제...신
라로 정리된 삼국입니다. 이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상황이 이러한
데, 민족의식이라는 오늘날의 잣대를 신라인들에게 들이대는 것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아니, 
달리 생각해보면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유민들을 흡수함으로써비로서 우리 
역사상에 민족이라는 개념, 동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일 것
입니다. 
  삼국시대 사람들이 동족의식, 민족의식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 후삼국시대가 일종의 시사
점이 될 수 있습니다. 궁예가 기치로 내세운 명분은 고구려를 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
한 기치가 해당지역 사람들의 많은 공감을 불러왔고, 엄청난  폭발력과 파괴력을 지니게 되
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신라에 병합된 지 200여년이 흘렀는데도 고구려는 신라와 구별된다
는 의식, 백제 사람은 신라사람과 다르다는 의식이 여전히 존재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
다. 이러한 의식은 아마도 혈통을 특히 중시하는 골품제적  사고방식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
겠는데, 고려 중기에도 신라  재건 움직임이 한반도의 동남부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오늘날에 준하는 민족의식이 분명하게 자리잡게 된 시기는 아마도 고려 후기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려 후기를 다루면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습니
다. 

      신라의 통일과 만주
  다음으로 신라가 만주 지역을 상실하는 등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당나라에  빼았겼으므
로 통일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사실 그렇습니다. 백제의  영토는 
모두 신라 차지가 되었지만, 고구려 땅의 대부분은 당나라에 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가 멸망한 지 30년 이 지난 후, 당나라에 귀속된 땅의 상당부분은 다시 발해라는 새로운 왕
조의 영토로 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
면 고구려는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당시의 상황을 홀시한 패 현재의 가치관과 판단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역사의 발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먼저 당시의 영토 의식,  영토 
개념에 접근해야 합니다. 신라의 만주지역  병합은 지금 우리의 소망일 뿐입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신라를 도와 신라 영토 내에서 장기산  군사활동을 벌였으며, 또한 신라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또 장수왕 때에는  신라의 수도에 고구려 군사
가 주둔할 정도였다고 일본거시 웅략기는 전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삼국이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상시의 국가와 영토 개념이 지금 우리의 생각과는 많
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신라에게 만주 지역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습니다. 신라의 관심은 오로지 국가보존에 있
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신라로서도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이라고 하는 중국 최대의 제국과 국운을 걸고 정면 대결해야 하는 일이었
습니다. 한반도의 중...서부지역에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던 신라입
니다. 그런 신라에게 만주 지역 병합은  너무 지나친 요구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  삼아 
신라의 통일 전쟁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 인색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나라'란 곧 왕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왕조의 기준은 영토가 아닙니
다. 사람입니다. 왕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왕이 죽고,  왕실이 몰락했다면, 그것은 곧 나라
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중국 한나라의 왕실과 성이 다른 왕망이 즉위해 신을 세웠다가 다시 
왕족인 광무제가 한을 재건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후한이라 하여 전한과 구별했습니다. 
삼국시대에 체제...세력...지리적으로 중심이 되었던 왕조는  위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
람들은 단지 한나라 왕족의 일파인 유비가 세운 나라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촉한을 정통
왕조로 여겨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대의  국가 개념의 핵심은 왕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라는 비록 고구려의 영토를 모두 병합하진 못했지만,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과 고구려 재
건 투쟁의 주역들을 흡수함으로써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고구려를 신라에 병합했습니다. 그
것은 발해가 지리와 문화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사실과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의
리를 지니는 것입니다. 
  우리는 7세기 후반 이후의 신라가 과연 통일 왕조인가를 논하기 전에 먼저 끊임없는 대립
과 경쟁이 불러온  피해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삼국의 경쟁은  정치...경제...사회...군
사...문화적으로 발전 속도를 배가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  기간
의 긍정적인 측면일 뿐입니다. 삼국의 정립이 고착화하고 서로간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서로
의 불이익을 초래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중국의 역대 왕조는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통합왕조가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래서 삼국이 서로  다투지 않고 친하게 지내기를 
고대했습니다. 동이족의 힘을 최대한 분산시킴으로써 자기들에게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집단
으로 남게 하려는 계획이었지요.
  또한 삼국 중 고루려와 백제에서는 내부적으로도 이미 심각한 문제가 노정되고  있었습니
다. 군사적 대치 상황은 군사독재정권의 탄생과 부정부패를 엄호...은폐하고 호도하는 데  이
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기강이 해이해지고, 그것이 결국 내분으로 이어지고 말았습
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신라의 통일전쟁에 대해 인색하게 평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누르고, 당나라 군대를 몰아낼 수 있었다는  사실
에 높은 점수를 주며 박수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는 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앞에서의 
지적과 같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
리 민족사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높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체제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
들이 신라의 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체제, 하나의 문화를 누리는 가운데 뚜렷한 국가 공동체 
내지 민족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통일 신라의 지배체제가 붕괴되
면서 고구려와 백제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또 한 번의 삼국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으
나, 이번에는 (후)삼국 모두 통일을 당연한 과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정복전쟁이 일단락됨으로써 국력이 배가되어 국제사회에서의 국가 경쟁력이 높아졌
다는 점입니다. 과거 고구려의 경우에도 중국측의 왕조가 부담스럽게  느길 정도로 강한 군
사력을 자랑했고, 또 실제로 수차례의 대귬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힘을 실증해 보이기
는 했으나, 그것은 지리적 조선과 전략...전술에 의존한 군사 분야에서의 힘에 한정괸 것이었
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 이후에는 평화로움 속에서 전쟁으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가 최
소함으로써 정치...경제가 매우 안정되었으며, 그것은 곧 국제 사회에서 신라의 위상을  높이
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의 국가 체제 속에서 국민의 응집력을 기반으로 자랑스러운 문화를 꽃피웠다는 
점입니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각기 독특한  기술...문화를 가꾸어온 삼국의 사람들이  하나의 
체제하에서 결속됨으로써 이제 더욱 세련되고 풍요로운  문화를 꽃피울 수 있게 된  것입니
다. 더욱이 통일이 가져다준 평화를 한동안 기술...문화의 발전을 가속시키고 신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통일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적
지 않은 듯합니다. 시계를 되돌려, 만약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이후의 우리 역사는 어떠했
을까요?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이란 통하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고매한 가정이라도 그것
은 무의미한 넋두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또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가정
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가정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가슴깊이 새겨두어
야 하겠습니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신라가 어떻게 통일할 수  있었는지, 다시 말하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랄까 비결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일입니다. 시대
가 아무리 달라져도 원리는 같은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에게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3) 신라는 어떻게 통일할 수 있었는가?
  서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676년 당나라 군대 퇴각 등의 대규모 정세  변
동을 거친 후, 드디어 우리 역사상에도 정복전쟁의 종식이라는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 평
화를 가장 자랑스러이 만끽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물론 신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4~5세기경까지만 하더라도 신라는 삼국 중 가장 후진적이고 가장 군사력이 약
한 나라였습니다. 심지어 내물와 때에는 신라의 사신이 고구려  사신을 따라가서 전진에 조
공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고 정치적 간섭을  받을 정도였으며, 실성왕과 눌지
왕 때에도 역시 그런 상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신라가 대외적으로 크게 팽창한 시기는  법흥왕과 진흥왕의 재위 무렵입니다.  이 시기에 
신라는 금관가야를 병합하고(532), 대가야를 멸망시키는(562) 등  가야지역 정복작업을 성공
적으로 진행시켰습니다. 그리고 서기 551년에 백제와 힘을  합쳐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했으며, 553년에는 다시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역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처럼 명
분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면서  차근차근 세력을 양쪽으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신라의 국력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 내지 백제를 압도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습니
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여전히 열세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인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신라는 삼국간 경쟁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
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건강한 문화 - 화랑도
 먼저, 신라인의 결집력과 문화적 건전성이 삼국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당
시 고구려...백제에 비해 신라의 기술...문화는 후진적 상태였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후진'이라는 말은 남보다 뒤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뒤떨어져서 좋을  리 없지
요. 그러나 가끔은 촌스럽고 거칠고 단순한 것이 고급스럽고  세련되고 복잡한 것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필요한 순간도 있습니다. 사회의 분위기가 고급스럽고 사치스럽게 
되면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만연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대로 촌스러운 사회는 집
단화하는 경향이 잇다는 말로 대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불교만 하더라도 교리의 이론...법제화에 치중한 고구려의 삼론종, 백제의 율종
에 비해 신라에서는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데 사상적으로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화엄종이 유행했습니다. 
  신라인의 결집력을 과시하는 단적인 예로는 화랑도를 들 수  있습니다. 화랑도는 귀족 자
제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청년전사단을 조직해 평상시에는 일정 기간(3년?)
을 함께 수련하고, 유사시에는 정규  군부대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여했던 무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억지로 운영하는 지단이 아니며, 구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골품제 사회가 수반하는 필연적 모순, 곧 신분계층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사회적 기능도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화랑도의 사회적 기능은 6세기 말에 원광법사가 화랑 및 낭도가 지녀야 하는 덕목을 제시
했다는 이른바 '세속오계'를 통해서 더욱 긍적정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5가지 덕목은 다
음과 같습니다. 
  (1) 임금에게 충성한다.
  (2) 부모에게 효도한다.
  (3) 벗과는 믿음으로 사귄다.
  (4) 싸움에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5)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위의 5가지 덕목이 화랑도를 통해 신라 사회의 절대 가치와 
규범이 되었기에 귀산...사다함...해론...소나...취도...핍실...관창...김흠운...비령자...합저...죽죽...필
부...녹진...검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충신과 의인, 용사를 배출하고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 열거한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열전을 참고하시기 바
랍니다. 
  
      외교전의 승리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교전의 승리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신라의 외교역량이  발휘된 
작품이었습니다. 신라의 국내...외 상황에 대한 능동적 대처와 외교 역량은 김춘추의  행적을 
통해 퉁분히 시사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배경이랄까  연원은 진흥왕대의 한강유역 점령
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따져볼 수도 있지만 폭을 좁혀 설명해보겠습니다. 
  거시 642년은 백제의 의자왕 2년이자 신라의 선덕왕(선덕여왕)11년 그리고 보장왕이 즉휘
한 해입니다. 이 해 7월에 백제는 왕이 직접 신라를 공격해 40여개의 성을 빼앗았으며,  8월
에는 장군 윤충이 거느리는 군대가  신라의 대야성(기금의 경상남도 합천  지방을 가리키는
데, 대량주 혹은 대향주로도 표기된다.)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고 항복한 성주 품석과 그의 
가족을 모두 죽인 다음 머리를 베어 수도인 사비성으로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
는 망연자실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합니다. 대
양성주 품석은 김춘수의 사위였고, 춤석의 아내 고타소랑은 김춘추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제에 대한 김춘추 개인의 원한도 그리려니와 백제의 신라 공습이 확대되고  거세지면서 
당장 신라의 대중국 교통로인 한강 유역이 위협받게 되자, 김춘추는 고구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보장왕을 만나 백제 협공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보장왕은 오히려 예전에 신라가 
빼앗아간 죽령 이북의 땅을 되돌려 달라면서 김춘추를 억류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
다. 고구려-신라 사이에는 한  차례 긴장이 조성된 끝에  무사히 귀환한 김춘추는(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상)>조에 의하면, 김춘추가 억류되었을 때 고구려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인 선
도해에게 뇌물을 주고 풀어줄 것을 요청하자 선도해가 술좌석에서  '용왕 딸의 심장병을 고
치기 위해 뭍으로 온 거북의 꼬임에 빠져 용궁으로 끌려가던 토끼가 거짓말로 거북을 속인 
뒤 숲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 줌으로써 김춘추에게 도움을 주엇
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오늘날의 수궁가와 비슷한 내용의 고려왕조 이전에 이미 민간
에 널리 회자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서기  648년에는 당나라로 건너가 고구려 
문제로 고심하던 당 태종에게 백제를 정벌한 후 고구려를 정벌하자고 제의해 성공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셋째아들인 김문왕을 당나라에 남겨 숙위(궁궐을 숙직하여 지킨다는 뜻
으로, 당나라의 주변 나라들이 왕자나 귀족 자제를 보내  당나라에 머물게 함으로써 인질은 
물론 조공...문화사절 그리고 당나라 황제의 고문 역할이 되게 한  데어서 나온 말이다.)하게 
함으로써 양국의 결속을 굳게 다지고 당나라의 약속이행을 재촉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일
본서기에는 김춘추가 당나라로 가기 전인  서기 647년에 일본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데, 사실 여부를 떠나 당시 신라가 기울인 다각적인 외교정책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외교정책은 대략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국가 절멸의 위기에 처해 잇다는 것 그리고 백제는 당나라가 몹시 실어하는 
고구려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배제가 고구려와 내통하며 신라의 조공을 방해한
다는 호소는 당나라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백제와 고구려가 내통했는지는 정
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신라의 간절한 호소에 대해, 당시 백제와  고구려
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더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도 못했습니다. 
  김춘추가 당나라를 다녀온 뒤에도 고구려와 백제는 적어도 각각 3회와 2회 이상은 당나라
에 조공했으나, 신라의 외교전략을 꺾지 못하는 소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나라 태종이 김춘추에게 '평양 이남의 땅은 모두 신라에게 주겠다'고 호언한  바를 
실행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당나라의 패권주의가 강하게 작요해 고구려...
백제가 운신할 수 있는 촉이 처음부터 좁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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