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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1/한국사

한국사 강의록 2

by Frais Study 2020. 5. 5.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과 관련해 우리 나라에 전하는  사서로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들  수 있습니다. 
규원사화는 조선시대 숙종 2년(1675)에 북애거사가 편찬한 것이고, 환단고기는 각종  고서를 
계연수라는 사람이 1911년에 새로이 편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 책 보두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처음 간행된 생소한 책입니다.  그중 환단고기에 실린 삼성기에 의하면,  우리의 
고대사는 7대에 걸친 환국시대와 18대 1,565년간 이어진 배달시대 그리고 47대  2,096년간에 
걸친 조선시대로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고조선 이전에 환국과 배달국이 더 있었다는 것입니
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학적 지식에 근거하면, 위와 같은 전언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
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국가의 출현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생각
되는데, 우리의 경우 청동기시대는 아무리 소급해도 서기전 1500년 이상은 거슬러 올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요임금과 같은 때(서기전 2333년경)라고 한 단군신화
의 내용도 매우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과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아마도 국가와 민족이 어려운 상황에
서일 것입니다. 삼국유사는 대몽항쟁기에 씌어졌으며,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잉제 식민지하
에서 처음 출간되었다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규원사화에는 한말의 상으로 보
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이들 사서가 고조선시대의 기록에 근거했
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한다면, 고조선측이 남긴 기
록의 흔적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고조선은 대제국?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반
도 서북부의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상정합니다. 특히  지금의 평양 
지역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한사군을 설치했지요. 그중 낙랑
군에는 조선현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고조선의 중심지가 낙랑군에 편재되었다
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평양지역에서는 한나라 시기의 유적과 유뮬이 대향으
로 발견 조사된 바 있습니다.  그러니 고조선의 중심지와 강역을  한반도의 서북부지역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그러나 고조선의 문화와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비파형 동검과 지석묘...적석총의 분
포 범위를 생각한다면,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훨씬 넓어져야 합니다. 요동반도를 비롯해  요
하 동쪽은 물론 요하 서쪽에서도 고조선의 문화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을 발견할 수 있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중국의  대능하 혹은 난하에서부터 한반도의  예성강 혹은 
청천상에 이르기가지의 지역으로 모두 고조선의 강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고조선은 대제국
이엇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만약 기록 속의 조선이 연나라와 인접한 나라였으며, 2천여 리를 
빼앗기도 여전히 국가 규모가 작지 않았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의 높은 개연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 견해가 모두 나름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으므로 시비를 가리기가 쉽지 않
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견해 모두 홀시하고 잇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시기입니다. 고조
선이 언제 건국해서 언제 멸망했는지, 또 어떤 역사적 변천을 겪었는지를 먼저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초기의 패수는 대능하에 비정될 수도 있습니다. 인근지역에서 고조선과 관련된 문
화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고선을 대제국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화유적의 
해당 시기가 지역데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령 비파형 동검의 경우, 요서...요동...한
반도에서 모두 발견되지만, 시기는 각기 달라서 요서 지역이 가장 빠르고, 한반도의 유적 편
년이 가장 늦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렇습니다. 고조선이 이동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요동반도의 남담인 여순에서 늦어진 서기전 6~4세기에 조영된 대규모의 적석총이  발견된 
것을 보면 한동안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 지역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한변의 길이
가 20여 미터에 달하는 적석총 묘역에서 23기의 묘곽과  144명분의 인골이 비파형 동검...동
경 등 다량의 청동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중 많은 인골을 순장된 사람의 것으로 보기
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무덤의 주인은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요동의 요양...무순 등지에서는 전국시대의 장성유적도 발견됩니다.  연나
라 혹은 진나라가 적어도 이곳까지는 진출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딸사서 고조선의 강역과 
중심지는 그보다 훨신 동족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연나라 장군 진개가 있는 군대가 고조
선으로부터 2,000여 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을 상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기록을 고소
선이 최소한 2,000여 리 이상의 땅을  가졌던 증거로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동족으로 
밀려났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갔다는 전설
을 기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이 동쪽으로 이동한 시실의 반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고
조선의 이동은 더욱 실감납니다. 역사학이란 이처럼 미궁 속을 걸을 때가 많습니다. 

    2) 동명신화 - 부여
      동명신화의 내용과 분석
  우리는 흔히 부여를 고조선의 후손이 세운 나라쯤으로 알고  있지만, 역사상 부여라는 명
칭이 출현한 것은 이미 고조선의 당시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조선과 함께 중국측 기
록에 실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여의 국가적 성격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서기 1세
기경에 이미 부여에서 왕호를 사용했고,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부
여의 국가 형성은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부여를 건국한 사람은 동명이라고 합니다. 그의 건국 과정에  대해 후한서 동이전은 이렇
게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 북쪽 색리국(한원에는 탁리국으로 나오며,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는 고리국으로 되
어 있다.)의 국왕이 출장을 나가 있었는데, 그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이 돌아와 시녀를 죽
이려 하니,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하늘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더니 계란 크기만한 것이 저
에게 내려온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
지 않고 가두어 두매, 나중에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려두데 
했으나, 돼지들이 입김을 불며 보호해 죽지 않았으며, 마구간에 버리자 말들도 역시  그러했
다. 왕이 기이하게 여겨 어미가 기를  것을 허락하고,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  동명은 
커서 활을 잘 쏘았다. 왕은 그가 용맹해지는 것을 염려해 다시 죽이려 했는데, 동명이  달아
났다. 남쪽으로 가다가 엄호수에 이르러 활동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모여 동명을 
건네주었다. 마침내 부여에 와서 왕노릇 했다. 
  위의 신화에서 하늘의 이상한 기운이란 해 혹은 햇빛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체로 몽고와 만주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설화들 중에는 햇빛에 감응되어 임신...출산했다
는 식의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모두 주인공의 비범함을 드러내기 위한 과장된 표현일 것
입니다. 
  동명이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건넜다는  엄호수는  지금의 송화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동명은 송화강의 북쪽에 살던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화 속의 개인은 종종 집
단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그 것은 이미 단군신화를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명
의 남하는 동명집단 혹은 동명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의 남하로 바꾸어볼 수도  있겠습니
다. 왕이 죽이려 하자 남하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북방의 어떤  세력 혹은 집단에 밀려 송화
강을 건너 남하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동명이 부여를 건국한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신화에 아무런 언급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중국 길림성의 길림시 일원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단
산과 동단산일대에서는 석관묘(흔히 따을 판 다음  그 안에 넙적 편평한 돌로  바닥과 벽을 
만들고 시체를  안치하는 방식의 무덤을 가리킨다. 머리 쪽과 발 쪽의  벽은 판석 1장을 사
용하며, 양 협의 긴 벽은 여러 장의 판석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뚜껑 돌 역시  넙적한 판
돌을 사용한다. 석관묘가 발전한 것이 바로 지석묘라는 견해로 있다.)... 토광묘(땅을 파서 광
을 만든 다음 시체를 묻는 방식의 무덤을 가리킨다. 관 없이 시체를 직접 흙으로 덮는 방식
을 순수토광묘라고 하며, 나무로 만든 관속에 시체를 넣은  다음 묻는 방식을 토광목관묘라
고 한다. 또 토광 안에 관보다 더 넓고 큰 형태의 곽을 만든 다음 시체 또는 관을 안치하는 
방식은 토광목곽묘라고 한다. 토광묘는 지금도 흔히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인류 역사상 가
장 보편적인 무덤형태이다.)...옹관묘(독무덤이라고도 하며, 항아리 속에 시페를 넣어 땅 속에 
묻는 방식의 무덤을 말한다. 땅속에 항아리를 세워 놓고 그  안에 시체를 쭈그려 앉게 만드
는 경우에는 항아리를 하나만 사용하고, 시체를 길게 드러눕게  하는 경우에는 보통 2개 내
지 3개의 항아리를 길게 연결해서 관처럼 이용했다. 전세계적으로 널리 분포한 무덤 형태로
서, 우리나라에서는 영산상 유역의 대형 옹관묘에서 금동관 등의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등의 고분과 산성유적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서단산 문화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같은 청동제 무기류와 반월형 석도 그리고  조...기장 등의 추위에 강한 곡물
을 들 수 있습니다. 농업과  목축의 증거일 것입니다. 방사선 탄소  연대 축정법(1940년대에 
미국의 물리학자 리비가 개발한 방법으로서 목탄...뼈등 생명을  읽은 유기물질이 지닌 탄소
량을 확인함으로써 해당 유적의 조성연대를 알아내는 데에 주로 사용된다. 자료 분석결과는 
1950년을 기준삼을 때 시간적으로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는가 하는 뜻에서 BP로 표시된다. 
즉, 만약 BP 1,1550+-100으로 표시되었다면 서기 400년을 전후한 시기로서 오차의  폭은 전
후 100년이라는 뜻이다) 후석산유적에서는 서기전  1000+-100년 장사산 유적에서는 서기전 
405+-85년이라는 자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동단산 문화의 남성자 유적 인근을 부여의 왕
성지로 보기도 합니다.
  부여가 처음부터 끝까지 길림시 인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용씨가 침입하는 서기 
3세기 후반에 이르면, 부여가 분열하면서  일부 세력이 두만강 유역으로  옮겨가 또 하나의 
국가를 세우게 되는데 이를 동부여라고 합니다. 그리고  4세기 초에 이루면 원래의 부여(북
부여) 역시 서쪽의 농안...장춘 방면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영향권이 확대되었기 때
문입니다.
 
      여섯 살 어린왕과 사출도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여 부여시는 늦어도 2세기경부터 부자 상속제가 실시되었다고  합니
다. 위구태 - 간위거 - 마여 - 의려 - 의라로 이어진 왕위 계승에서 마여는 서얼이었기 때
문에 제가가 함께 옹립했으며 의라는 불과 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상 물
정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왕위에 앉힐 수 있었던 것은 아이의 아버지, 곧 전왕의 권위를 인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지 전왕의 아들이라는 한가지 이유만
으로 아무런 반대없이 왕위에 오른 시기를  학자들은 보통 왕권 안정기로 이해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부여의 왕권이 처음부터 안정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모두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어야 한다' 고  하러
나 죽여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기도 했답니다.
  부여에는 사출도라는 군사...행정체계가 있었습니다. 왕  밑에 있는 마가...우가...저가...구가 
등이 각각 한 지역을 맞아서 다스리며 방위를 담당하는 체계입니다. 일종의 지방자치이지요. 
가는 몽골 계통어의 한...가한 그리고 고조선 등의 한...간...한...금 등과 통하는 말로서, 귀인... 
대인을 뜻합니다. 이들 가가 다스리는 지역은 큰 곳이 수천 가, 작은 곳이 수백 가였다고 합
니다. 이러한 사출도가 부여의 전  시기에 걸쳐 시행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만약 서기 2세기경에 부여의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면, 
사출도와 같은 체게는 더 이상 시행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여 사람들은 평소 흰색 옷을 많이 입었으나 외국에 나갈 때는 수를 놓은 비단옷이나 모
직옥을 즐겨 입었다고 합니다. 은 나라 정월에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지냈으며, 전쟁을  벌일 
때에는 소를 잡아 발굽의 모양을 보고 실흉을 점쳤다고 합니다. 은나라 정월은 축월로, 음력 
12월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동맹, 도예의 무천과 같은 추수감사제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
습니다.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얼음을 넣어 장사를 지냈으며, 지위가 놓은 사람이 죽으면 아
랫가람을 죽여 함께 묻는 순장을 했는데, 많을 때에는 백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형벌은 매우 엄격했는데, 그중 몇 가지가 중국측 기록을  통해 전합니다. 첫째, 살인한 사
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둘째, 도둑질을 하면 12배를 갚게 한다. 셋째, 
간음한 사람은 남녀를 모두 죽인다. 넷째,  부인이 투기하면 죽인 다음 시체를 남산에  버려 
썩게 하되, 친정에서 가져가고자 하면 소와 말을 내게 한다. 이와 같은 형법은 아마도  관습
법이었을 것입니다. 그중 여자의 투기를 미워한 대목은 가부장적인 관념의 표출로 해석됩니
다. 
 부여의 충속 중에는 형사취수제가 있습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드는 풍습
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앞의 제 2장에서 이미 다룬바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다시  다
루지 않겠습니다만, 이 풍습은 고구려에서도 널이  행해진 풍속이라는 사실만큼은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문화적 친연성을 알려주는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여와 고
구려가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리라는 생각은 양국의 건국신화를 비교하고 나면 더욱  굳어지
게 됩니다. 

   3)주몽신화 - 고구려
      주몽신화의 내용과 분석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주몽입니다. 그의 시호는 동명성왕입니다. 시호란 정승처럼  지위
가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고인의 행적을 기려 새로이 붙여 주는 이름입니
다. 아마도 눈치가 빠른 사람은 곡려 건국자의 동명성왕이라는  시호에 대해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살펴본 부여 건국자의  이름
과 같기 때문입니다. 비록 고구려의  동명성왕에는 성이라는 글자가 덧붙여져 있긴  하지만, 
그것이 주몽의 신성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부가된 수식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알
아챌 수 있습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이름만 같은 것이 압니다. 내용도 유사합니다. 다음은 삼국사
기에 실린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대략적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부여의 왕 해부루는 늙어서 아들이 없으므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산천에 제사를 지냈는
데, 왕이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을 때 큰 돌을 보더니 마주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
게 여겨 돌을 치우게 하자  금색 개구리 모양을 한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하늘이 
나에게 준 자식이다."하고는 데려다  길렀다.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하자 태자로 감았다. 
나중에 재상인 아란불이 부여왕 해부루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제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다 
근처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비옥해 오곡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해 그곳으로 도읍을  옯기고 나라이름을 동부여라고 
했다. 예 도읍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나 자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는 가람이 
와서 도읍했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여자를 데려와 물으
니,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하백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입니다. 동생들과 나와 노는
데, 어떤 남자가 자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수 가의 집
안으로 유혹해 정을 통하고는 가버렸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안을 좇아갔다고 꾸
짖고는 우발수로 쫓아냈습니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안에 가두어놓았는데,  햇빛이 비추
므로 몸을 피했으나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추더니 임신을 해 다섣 되 크기의 알 하나를 낳았
다. 
  왕이 알을 버려 개...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고,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와  말
이 피했다. 나중에 들에 버리니 새가 날개로 덮어주었다. 왕이 쪼개려 했지만 깨뜨리지 못하
고 마침내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라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사내아니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이이했다. 나이가 겨우 7살이었을 때 남달이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매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소는 것을 
주몽이라고 했으므로,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금와에게 일곱 아들이 있어서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 기예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
게 미치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가 아니어서 그 
사람됨이 용감하니 만약 일찌감치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따 두렵습니다. 청컨대 없애
버리십시오"라고 했다. 왕이 듣지 않고 말 기르는 일을  시켰느데 주몽이 날 말을 알아보고 
먹이를 적게 주어 수척하게 만들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웠다. 왕은 살진말을 자기가 타
고 말은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나중에 들판에서 사냥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상
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은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왕자와 신하들이 또 주몽을  죽이자고 
모의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눈치채고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
와 지략으로 어디로 간들 안되겠느야? 머뭇거리다가 욕을 당하느니 멀리 가서 사는 것이 낫
다."고 했다. 
  주몽은 이에 오이...마리...협보 등 3명과 함께 가다가 엄시수에 이르러 건너려 했으나 다리
가 없었다. 추격병에게 잡힐까 염려해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
인데, 오늘 도망가매 추격병들이 쫓아오니 어지하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물고기와 자
라가 떠서 다리를 만들어 주몽이 건넌 뒤 흩어져 추격병이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모둔곡에 이르러 3명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있었고, 한 사람은 승려복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자네를 어디 사람인가? 성은 무
엇인가?"하니, 삼베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이름은 재사입니다."라고 했고, 승려복을 입
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입니다."했으며, 마름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입니다. "라고 했
으나,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 무골에게 중실씨, 묵거에게 소실씨라는 성
을 주고 그들에게 "내가 하늘의 명령ㅇ르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명
의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마침내 그들의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함께 졸본펀에 이르렀다. 
  그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도읍하고자 했으
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이 단지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그로써 고를 성으로 삼으니, 당시 주몽의 나이는  22세였으며, 한나라 효워제 건소 2년이요,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고구려의 건국설롸는 대체로 이와 비슷한 내용인데,  위에 인용한 삼국사기외에 광개토왕
릉비문과 모두루 묘지명, 삼국유사, 동명왕편, 위서 등에도 혹은  길게 혹은 짧게 실려 있습
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해 서기전 37년에  건
국하는 과정이 부여의 건국신화인 동명신화와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부여와 
같은 문화배경 하에서 성장했음을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또한 신화의 내용을 통해 고구려의 
건국주도 세력은 부여에서 분파해 나온 집단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의 
언어와 각종 풍습이 부여와 같다는 당시 중국측의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위의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엄시수를 건너 졸본천  가에 건국했다고 했으나, 광개토왕를
비문에서는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곡의 홀본서성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
가 있습니다. 여기의 엄리대수는 엄시수...엄호수...시엄수...엄체수...  등으로도 표현된 지금의 
송화강일 것입니다. 또 홀본서성이 위서에는  홀승골성으로도 되어 있는데, 남아 있는  유적 
등으로 볼 때, 아마도 중국 요녕성 환인 지방의 오녀산성 일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고구
려는 유리명왕 때 지금의 길림성 집안현에 위치한 국내성 일대로 도성을 옮기게 됩니다. 
 
      부족연맹채제 - 5부
  신화에 따르면 주몽은 남하할 때 3명의 부여인과 동행했으며, 엄시수를 건던 뒤에도 다시 
재사 등의 3명을 만나 수하로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설화 속의 개인은 종종 집단을 상징하므로, 부여로부터의  남하집
단이 비교적 큰 규모였으며, 남하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여려 부족을  병합한 사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지역을 빈번히 공
격해 많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중 가장 큰 성과는 동명성황 재위 2년에 비류
국을 병합한 것인대, 비류국은 당시 그 일대에 분포한  여러 소국들을 이끌던 주도세력이었
던 듯합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비류국을 병합함으로써 신흥 중심세력으로 부상한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묘사한 듯한 기록이 중국측의 역사서에는 다소 짧고 건조하게 실려 있습니
다. 즉,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 등의 5
개의 부족이 있어서 그중 연노부 사람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연노부가 점
점 힘이 미약해지더니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 왕위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종족
으로서 대사인 사람들만 고추가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는데, 유독 연노부의 적통대인만큼
은 고추가라는 칭호를 얻을 뿐 아니라 종묘와 영성사직에 제사 지낼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연노부가 후한서에는 소노부로 나옵니다. 한편 왕은 대대로 절노부의 여자와 혼인했다고 합
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노부를 왕비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의 중국측 기록을 보노라면, 혹시 비류국이 연노부(소노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비류국의 왕으로서 주몽에게 항복한  송양의 이름이 소노부의 소노
와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고구려에서는 물가 혹은  계속 등에 해당하는 지역
을 나...노...내라든지 양...양...양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참고가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5부
가 삼국사기에는 연나부...환나부...관나부...비류부 등의  명칭으로 나와 혼란을 줍니다.  어느 
쪽이 원래 명칭인지는 정확이 확인할 수 없으나, 연나부는 절노부, 환나부는 순노부, 관나부
는 관노부, 비류부는 소노부를 각각 달리 표현한 것인 듯합니다. 
  한원..통전 등 중국측 사서에 의하면, 계루부는 나중에 내부 혹은 황부로 칭해졌으며, 절노
부는 북부...흑부...후부, 순노부로 칭해졌으며, 절노부는 북부...흑부...후부,  순노부는 동부...청
부...상부...좌부, 관노부는 남부...적부...전부, 소노부는  서부...백부...하부...우부 등으로도 불려
졌습니다. 그중 왕을 배출한 계루부의 명칭은 국호에까지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고구
려라는 국호가 초기에는 중국측에 구려로 표기된 적도 있는데 이것이 성을 뜻하는 고구려어 
구루에서 왔다면, 계루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사와 순장
  5부의 대사는 각자 사자의...선인과 같은 관직을 따라 두고  왕에게는 그 명단만 보고하면 
그만이었다고 합니다. 부족 차지 혹은 지방차지적 성격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적어
도 3게기경의 고구려에서는 일하지도 않고 지내는 자만 1만여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
을 위해 하호는 멀리로부터 쌀과 생선...소금 등을 운반해야 했다고 하니, 당시 고구려가  전
투집단적 성격을 띠었으며, 많은 국민들이 전사로서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고구려 사람들의 성격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마다  무기를 
지니며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가 있다는 중국측의 기록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같은 
기기의 부여 사람들에 대해서는 "용감하다고 온후하다"고 평가했으면서도  고구려 사람드르
이 성격을 흉악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고구려가 중국특과 군사적 마찰을 자주 일으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기 3세기경에는 고구여레 이미 상사...대로...채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
과 같은 관직이 설치되어 국가적 면모를 분명하게 갖추었으나, 감옥은 없으서 wlh  지은 사
람이 있으며 제가 의논해 죄인을 죽이고 그의 처자를 노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관습법과 연
좌제를 시행한 것이지요.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가무를  좋아했으며, 10월에는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벌였다고 하는데, 동맹은 아마도 추수감사제의  성격이 강한 축제이자 정치행사였던 
듯합니다. 고구려에서는 데릴사위제가 널리  행해졌던 모양입니다. 양쪽 집안이  혼인하기로 
합의하고 나면, 여자 집안에서는 뒤뜰에  서옥이라는 작은 선물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위가 여자 집 대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면서 재워줄 것을  무릎꿇고 비는데,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해야 여자 집에서 사위를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이후  사위는 여자 집에서 몇 년
을 살다가 둘 사이에 낳은 아이가 크면 비로소 부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
다. 이 같은 데릴 사위제는 장차 남자 집안에 기여하게  될 여자의 노동력과 생산력에 대한 
보상적 의미가 강한 것으로서, 일종의 신부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독특한 혼인방식
의 하나로서 형사취수제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부여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서도 순장이  실시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데, 동천왕이 죽자 그의 은덕을 사모한 나라 사람들이 매우 슬퍼하고 가까운 신하 
가운데 자살해 순장 당하겠다는 사람도 여럿이었으나, 다음 왕(중천왕)이 순장을 막았으므로 
공식적으로 순장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명으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들이 묘 앞에서 가서 자살하매 다른 사람들이 나뭇가지  등으로 시체를 덮어주었는바, 그후 
동천왕의 묘가 있는 곳을 시원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무덤은 대체로 4세기경까지
는 적석총을 많이 사용했으며, 평양천도(427)를 전후한 무렵부터는 봉토석실분을 많이  조영
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무덤을 만들이 위새서는 많은 인력과 재물을 들여야 하므로, 그곳에 
묻힌 사람은 일단 당시의 중...상류층에 속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4) 온조실화 - 백제
  삼국의 건국신화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백제의 온조설화입니다. 여기에는 묘하게도 신
이라든가 기적과 관련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매우 사실적이고  소탈한 방법으로 백제 건
국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백제의 건국설화가 뒤늦게 채록되었거나 중국화된 합리
주의적 시각에서 채록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해 다
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로서 주몽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
본부여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왕이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딸을 시집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부여의 왕
이 죽자 주몽이 왕위르 fdlt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아들을 온조라
고 했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
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가운
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했다.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컨대 이곳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
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 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체 얻기 어려운 지세
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비류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오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했다.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돕게 하고 나라이름을 십제라고 하
니, 이때 전한 성제의 홍가 3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
었는데,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했다. 마친내 비류가 부끄러
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이 올 때 즐거
이 따라왔다. 하여 나중에 국로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 세계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
서 나왔으므로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이처럼 백제의 건국설화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처제의 
아들 내지 손자라고 소개한 주몽을 백제에서는 부인 덕에 왕위를 계승산 비범한 일물 정도
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백제인의 고향
  그런데 더욱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의 건국시조를 백제에서도 역시 건국시조화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상당히 치열하게 다투던 경쟁 상대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백제에서는 자존심 상하게 고구려의 건국시조를 백제 건국시조의 아
버지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다 백제의 건국집단이 고구려 지역에서 남
하한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의 유적을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석
톤동에는 대규모의 적석총 유적이 있습니다. 적석총은 고구려의 특징적 묘제입니다.  그러네 
그것이 백제의 수도, 특히, 지배계급의 공동묘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1~2기
가 아닙니다. 그 사이 도시개발 등으로 밚은 고분이 파괴되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래
는 수십기의 적석총이 석촌동 일대에 조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중 어떤 것은 왕릉
일 개연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확정적으로 말해도  좋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위의 설화에 의하면 주몽은 어디까지나 북부여  출신의 졸본부여 사람이었습니다. 백제왕의 
성도 부여씨입니다. 그래서인지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부여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기 528년에 백제의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긴 뒤남부여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부여계승의식의 강력한  표출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백제 초기의 묘제 가운데 하나인 토광묘는 부여지역의 토광묘와 축조방
식 등이 매우 흡사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백제에서 고구려식의 적석총이 
축조되는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3세기 이후이기 때문입니다. 

      유리왕 - 고구려의 실질적 건국자
  주몽을 부여 출신의 고구여 건국자로 설명하지 않고 졸본부여의 계승자로 소개한  백제의  
온조설화가 어떤 면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보다 주묭의 입지에 때해 더 정확하게  묘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한 가지 예로서, 고구려의 유리왕에 대한 설화를 들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소개된 유리왕의 설화에 따르면, 유리는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얻은 부인이 
주몽의 독신 남하 후에 낳은 아들입니다. 부여에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멸시를 당하던 유
리는 아버지가 낸 수수께끼를 풀어 주춧돌 아래 숨겨진 칼 조각을 찾아낸 위 남녘에서 왕이 
된 아버지 주몽을 탖아갔다고 합니다. 아버지 주몽과 마찬가지로  유리도 옥지...구추......도조 
3명과 함께 남하했으며, 주몽을 만나 태자에 책봉된 뒤 왕위를 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실린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는  한 매목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칼을 맞대어본 주몽이 "너는 진짜  내 아들이다. 무슨 신성한 것이  있느냐?"하고 물었더니, 
유리가 몸을 날려 공중에 솟아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타는 재주를 보였다는 것입
니다. 아버지 주몽의 능력에 육박하는 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국사기보다는 동명왕편에 
인둉된 설화가 원형에 더 가깝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주몽의 건국에서 끝나는 것이 유리명왕의 출현과 즉위로 종결되는 셈입니다. 다
시 말하면 고구려의 건국은 유리명왕의 즉위를 통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백제의 온조왕은 건국하자마나 동명왕묘부터 세웠다고 합니다. 위패를 모셔두고 제사지내
는 곳을 묘라고 합니다. 여기의 동명왕이 부여의 건국자를 말하는지, 아니면 고구려의  주몽
을 지칭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온조왕이 주몽의 아들을 자차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
마도 주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백제인들은 왜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냈을까요? 주몽은 졸본부여의 
계승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인에게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가 아닌  졸분부여의 
계승자로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동명왕묘를 세우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
해 '유리왕의 고구려'와 경쟁적인 계승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비류전승 - 부여계승의 건국실화
  여하튼, 온조실화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이복형제의 국가로 묘사되는 친밀감이 나타납니
다. 그러나 백제에는 온조설화 이외에  또 다른 건국설화가 있습니다. 이른바  비류설화라고 
하는 것인데, 내용상 온조설화와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삼국사기에 조그맣게 실린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우태는  북부여와 해부루의 서손이며, 어머니
인 소서노는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
으니, 맏아들이 비류이고 둘째아들이 온조이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과부가 되어 졸본에서 
살았다. 
  나중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해 졸보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고구려라고 불렀다. 주몽이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왕비로 삼았는데, 소
서노가 국가의 기틀을 열고 자지는 데에 자못 내조가 컸으므로, 주몽이 소서노를 특히 두텁
게 총애했고 비류 등을 자기 아들처럼 대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유유가 오자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왕위
를 잇게 했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을 도망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가며 도와 방업을 이루니 그 노고
가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국가가 유유의 소유로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서는 
한낱 혹과 같아서 답답할 뿐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해 따로 국도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구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 
  앞에서 본 온조 설화와 달이 비류를 중심으로 한 비류설화는 주봉과의 연계가 매우 약합
니다. 비류설화에서 주몽은 단순히 비류  형제를 예뻐해 준 의붓아버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류형제의 친아버지는 주몽과 마찬가지로 북부여 출신의 졸본 사람 우태입니다 우태  역시 
남하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몽에 대한 비류 형제의 감정은 매우 우호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강하진 않으나마 주몽과 백제의  연계는 비류설화레서도 여전히 인정되
고 있는 것입니다.

      백제는 연맹왕국?
  비류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와 함께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미추홀이 
수도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온조설화와 비류설화가 각지 다른 경로로 전승되어 왔
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온조설화는 하남위례성 지역에서 비류설화는  미추홀 
지역에서 각각 전승되어온 설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설화  모두 온조와 비류를 형제로 
설정한 점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이즘에서 신화속의 개인은 집단을 상징한다는 말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온조집단과 비류집단은 형제라는  말이 됩니다. 집단과 집단간의  형제관계? 다소 
어색한 이 말은 집단과 집단 사이의  연명관계라는 말로 바굴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시기 온조 집단과 비류집단 사이의  연맹관계를 이야기로 만든 것이 바로  온조설화와 
비류설화라고 하겠습니다. 설화에 따르면, 비류는 미추홀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자리잡앗습니
다. 미추홀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세간에서는 흔히 지금의 인천이라고 
이해하지만 그 증거는 매우 미약합니다. 오히려 각종 자료를 분석해보면, 지금의 경기도  양
주...파주...연천을 잇는 지역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반면,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
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 특히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을 포함하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화에서는 비류가 형이며, 온조가 동생입니다.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에  따른다면 
형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동생인 온조가 시조로 존숭되었습니다. 비류의  현명하
지 못한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 설화의 입장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형이
란 먼저 태어난 사람입니다. 다라서 이것ds 비류집단이 먼저  한강 유역에 자립잡은 사실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뒤이어 온조 집단이 남하해 한강 유역에 정착했는데,  온조딥단
의 경제...군사력이 비류집단을 압도한 결과 자중에는 비류집단의 구성원까지 흡수하게 되었
다는 것이 온조설화에 숨은 속뜻이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간략한 분석을 종합하면 부여에서 고구려 방명으로의 주민 이동과 부여...고구
려 방면에서 한강 유역으로의 주민 이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한
강유역에 여러 집단이 공존하다가 하나의 정치체제 속으로 통합된 역사적 사식이 백제의 건
국설화에 반영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백제의 건국설화로는 도모라는 사람이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와 구태라는 사람이 백제의 시조라는 이야기가 각각 일본과  중국측
의 역사서에 전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백제를 건국하고 발전시키는  데 참여한 집단이 다양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제국과 백제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처음 국호는 십제였다고 합니다. 온조왕이 나라를 세울 때  10
명의 신하가 도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비류가 죽고  미추홀의 주민들이 
위례성으로 이주할 때 즐거이 따라왔으므로 국호로 백제로 고쳤다는 것입니다. 한편, 중국측 
사서인 수서 백제전에는 처음에 백여 호가 바다를 건너 남하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
라고 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산국기 한전에 마한 54개국의 국명을 열거하던 중 백제국이
라는 구로를 소개한 대목이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백제와 백제는  한자만 약간 다를 
뿐 같은 음으로 된 글자이며, 또 백제국의 위치가 한강유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여러 모로 
백제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백제국이 국력을 신장한 결과 국호를 한 뜻이 더 좋고  세련
된 백제로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삼국사기에 거론된 십제라는 구로는 어딘지 어색합니다. 나라가 성장함에 따
라 '십'에서 '백'으로 나라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마치 '백'을 염두에  두고 숫자논리에 입
각해 지어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하튼, 백제는 서기 538년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
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또 한번 바꾸었으며, 얼나 지나지  않아 다시 백제로 
환원시킨 것을 알려집니다. 

      백제의 건국 시기와 풍속
  백제가 건국한 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전한 성제의 홍가 3년  곧, 서기전 18년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 중에는 나중에 지어낸 듯한 부분이 없지 않
아서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른 자료를 통해 검증할 필요가 있는데, 중국측의 당
시 자료와 남아 있는 유적...유물을 검토해보면, 한강 유역에서 백제가 건국한 시기는 대략 2
세기 무렵의 일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백제의 건국 및 성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 유적으
로는 춘천시 중도의 적석총, 가평군 마장리의 주거지, 양평군 대심리의 취락지, 양평군 문호
리의 적석총, 하남시 미사리의 주거지와 밭 유적, 서울시 송파구의 석촌동...가락동 백제고분
군, 풍납동토성 몽촌토성등이 대표적입니다. 
  배겢의 주민으로는 왕실을 차지하고 귀족층이 주류를 이룬 부여...고구려계 남하민과 마한
의 구성원이던 토착민이 주류룰 이루었으며, 그 밖에 낙락...대방군이 멸망하면서 백제에  흡
수된 중국계와 교류를 통해 백제에  거주하던 일본계 백제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지리적 
조건과 중국계 백제인들의 활동 때문인지 백제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빨리  그리고 
많이 받은 국가에 속합니다. 백제인들은 일직부터 유학을 널리 배우고 익혔으며, 혼인  충습
이 중국과 같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을 치르는 등, 중국의 예법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
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같았으며,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중시하는  등
의 풍습 또한 고구려와 같았다고 합니다. 백제의 여자들은  시집을 가시 전에는 머리카락을 
한 살래로 땋았지만 시집을 가면 양 갈래로 땋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역시 고구려의 풍습과 
같은 것이 듯합니다. 그리고 절을 할 때에는 양 손을 바닥에 대어 존경을 표시했으며,  투호
와 저포 등의 놀이와 바둑...장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투호란 멀찍이 서서 항아리 안에  화살
을 던져 넣는 놀이이며, 저포는 주사위로 하는 놀이를 말합니다. 

    5) 박...석...김 3성 신화 - 신라
  고구려의 경우, 처음에는 해씨가 왕위에 올랐으나, 나중에는 고씨가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백제에서는 분명하진 않지만 아마도 해씨가  왕위를 차지하다가 부여씨에게 빼앗긴  듯합니
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매우 특이한 현상을 보입니다. 물론 그렇게 설명한 삼국사기와  삼국
유사의 기록을 믿지 않고 달리 해석하는 학자도 적지  않습니다만, 아직은 이른바 3성 교립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신라의 건국신화는 위의 3성을  중심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박혁거세 신화
  심라를 건국한 사람든 박혁거세라고 합니다. 그에  고나한 이야기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에서 찾아낸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옛날 산골짜기에 고조선의 유민이 내려와 여섯 개의 촌을 이루고 살고 이썽T다. 알천 양
산촌, 돌산 고허촌, 자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등이 그것이다. 6
촌에는 촌장이 있었으나 이들 통합해 다스리는  왕은 없어 사람들이 걱정했느데 마친  양산 
아래 나정 부근에서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기에 가서 보니 말은 하늘로 올라가  버리
고 붉은 빛의 큰 알 하나만 남아 있었다. 이에  알을 쪼개니 사내아이가 나왔으므로 고허촌
장 소벌도리가 거두어 길렀다. 아이가 나온 알이 마치 박  크기만 하다고 해서 박을 성으로 
삼고, 아이를 목욕시키고 난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을 추며 하늘과 땅이 진
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으므로 이름을 혁거세라고 했다. 혹은 불구내라고도 하는데, 광명
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위호는 거서간이라 했다.  한편, 사량리의 알영정에서는 계
룡이 나와 왼쪽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느데 입이 닭의  부리같았다. 물에 아이를 씻기
니 부리가 떨어져나가고 수려한 용모가 드러났다. 우물 명칭을 따서 이름을 알영이라  했다. 
사람들이 두 아이를 잘 기른 뒤 13세가 되던 해에 혼인시키고 왕과 왕비로 맞이했으며(서기
전 57), 두 사람을 두 성인이라고 일컬었다.
  위의 축약된 설화를 통해 우리는 먼저 신라가 여러 개의 씨족 혹은 부족집단을 기반으로 
형성된 국가였음을 시사받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명맹 혹은  연합적 성격을 띠는 정치제라
는 것이지요, 삼국유가의 기록에 따르면 앞의 6촌 중 양산촌은 급량부로 바뀌었으며, 고허촌
은 사랑부, 대수촌은 점량부, 진지혼은 본피부, 가리촌은 한기부, 고야촌은 습비부로 각각 바
뀌었다고 합니다. 6촌의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서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지
만, 아마도 씨족집단일 개연성이 높은 듯합니다. 
  6촌이 6부로 바뀌었다는 것을 자연촌락 혹은 족단적 성격을 지닌 사회가 하나의 행정구역
을 편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라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
쳐야 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l 다만 그러한 변화가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서는 아직 분명하
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일부에서는 기록에 준하여 유리니사금 9년(32)이라고 주장하기도  하
지만, 신라의 국가 형성 및  발전단계로 볼 때 너무 이른  듯합니다. 또 dfl부에서는 왕도의 
행정구역 명칭을 정한 자비마립간 12년(469)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보다 조금 더  늦은 
소지마립간 무렵(479~500)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위 신화의 주인공은 박혁거세입니다.  그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알은  새가 
낳는 것입니다. 새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하늘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해와 하느님이  있
는 곳입니다. 그러니가 새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전
령사입니다. 따라서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는 하느님이 보낸 사람, 곧 하느님의 대리인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신라인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박혁거세 신화와 같은 난생설화를 남방계설화로 분류하면서, 부여...고구려에서처럼사람이 햇
빛 등에 감응되어 알을 낳는 식의 감정형 난생설화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
다. 
  신화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은 붉은 색이었다고 합니다. 붉은 색은 타오르는 불, 
나아가 하늘의 태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박혁거세를 목욕시키니 그의 몸에서 광태
가 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고 합니다. 광명천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붉고 밝은 현상즐
을 이른에 적용한 것이 바로 '박'과 '력'이요, '불구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양신 숭배사상
이 반영된 이름이지요, 거기에 덧붙여진 거세는 거서간의 '거서', 거슬한의  '거슬' 그리고 백
제의 길지...길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옛 말입니다.  우리말
을 중국문자인 한자 가운데 비슷한 음이 나는 글자에 맞추어 표현하다 보니 이렇듯 각기 달
라진 것이지요, 따라서 박혁거세란  '밝은 임금'이라는 보통명사를  이름처럼 사용한 거이라 
하겠습니다. 
  신라의 건국시조인 박혁거세는 '거서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거서'가 군장처
럼 정치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뜻한다는 것은 '거세'를 통해 이미 알았습니다. 그리고 간 역
시 정치적 지배자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거서간'은 정치적 수장을 중복 존칭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신라느이 건국 시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박혁서세 신화에서 신라의 건국은 서기전 57년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간지로 나타내면 갑자년이  됩니다. 갑자년을 간지가 시작되는 첫  해입니다. 
그래서 참위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는 해로 꼽아왔습니다. 바로 그러한 갑자년에 신라가 건
국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사서인바, 신
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과거의 역사를 신라 중심으로  서술하고, 그것이 다시 삼국사기와 
같은 후대의 역사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으하면, 신라는  서기
전 57년에 건국했고,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백제는 서기전 18년에 건국한 것으로  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국측 사서를 검토해보면 오히려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건국한 듯
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즉,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 동이전에는 '부여전'과 '고구련전'이 
있는데, 거기에 고구려는 당시 상당한 국력을  지닌 국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면,  '백제
전'과 '신라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한전'이라는 항목에 마한 54개국  중 하나로서 백
제국이 있으며, 진한 12국 중 하나로서 사로국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백
제국이 백제의 초기 단계, 사로국이 신하의 초기 단계 명칭일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발전단계가 서로 다를 경우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는 쪽(백제...신라)보다 국가의 
면모다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 쪽(고구려)이 더 일찍 건국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중국측의 당시 역사 기록을 통해 백제와 신하의 건국의 순서를 추정해 볼 수도 있겠습
니다. 송서는 남제의 심약이 488년경에 편찬한 역사서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고구려전과 
백제전이 전합니다. 북제의 위수가 554년경에 편찬한 위서에도 고구려전과 백제전만 전합니
다. 신라전이 처음 보이는  것은 양서 단계에 와서의  일입니다. 양서는 당나라의 요사렴이 
636년경에 편찬한 사서입니다 그만큼 신라는  국가의 수숮능 가늠하는 척조의 하나인  외교 
면에서 백제에 현격하게 뒤져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중국 사서에  기재되었느냐 아니냐가 
두 나라의 국가 수준이라든가 건국순서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러나 당시 중국은 한반도의 국제정세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므로 그들의 기록 유무를 일종의 
차고자료로 삼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백제와 신라의 국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준을 통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의 전래 시기라든가 율령 반포시기 그리고 군사력의 비교 등입니다. 특히 4세기경의 군
사력을 비교해보면 백제와 신라의 차이는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
는 황해도 일대를 놓고 일진일죄의 호각세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에  인질을 보내고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전진에 사신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문화 수준에서도 많은 차이가 났음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 같은 측면 때문에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건국되었으리라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면 신라가 서긴전 57년에 건국되었다는 기록이 반드시  틀렸
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조양동 고분군 등 경주지역에서 조사된 각종 유적을 통해  서
기전 2~1세기경에 이미 정치체로 보아도 좋을 정도의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
입니다. 따라서 연맹왕국이사의 국가와 서기전 57년경에 건국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성
읍국가 단계에 해당하는 구가로서의 사로국의 출현은  오히려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신란의 건국 연대에 대한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단순히 후대의 조작으
로만 보아서도 곤란하다고 하겠습니다. 

      신라의 여성과 골품제
  박혁거세 신화에서 특이한 점은 알영에 대한  부분입니다 왕비에 대한 신화를 따로  만들
고, 왕비를 왕과 함께 '성인'이라고 칭송한 예는 우리 역사상 매우 흐귀한  경우에 속합니다. 
출생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알영은 결코 박혁거세에 뒤지지 않습니다. 계룡이란 닭을 
닮은 용이란 뜻이겠는데, 나중에 알게 되듯이 닭은 김씨족의  토템이자 국가의 상징으로 작
용한 동물입니다. 따라서 알영은 장차 국가의 주인이 될 김씨들의 원조로 보아도 무방한 일
물이라 하겠습니다. 
  알영신화를 통해 받는 신라의 국가 이미지는 성차별이 적은 사회입니다 가부장적인  권위
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사회, 나아가 남성과 여성이 비교적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사회라
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독 신라에서는 3명이 여왕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
라가 현대사회처럼 자유주의에 입각한 개방적인 문화를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혈
통을 기준으로 그 사람의 위치를 평가하는 철저한 시분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신분
제란 바로 골품제를 지칭한 것입니다. 
  골품제는 성골...진골로 나뉘는 골과 육두품...오두품...사두품 등의 품으로 구성되어 있었습
니다. 왕위는 물롬이고 정부의 각 부서 장관과 군부대 지휘관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
은 '골' 신분을 지닌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품'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들 '골'신분을 
지닌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품'품에 속하느 사람들은 그들 '골'족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적어도 7세기전까지 성골은 왕실의 구성원에 한정되었고, 진골은 그밖의 귀족층에게 적용
되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성골이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
다. 진골은 박...석...김씨에 한 정되었습니다. 진골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가  모두 진골이어야 
합니다. 
  만약 부모 가운데 한명이 6두품이라면 자식은 당연히 사회적 지위가 6두품으로  강등되어 
신라의 17개 관등 중 제 6등급인 아찬의 지위보다 더  높아질 수가 없었으며, 그 결과 정부
의 각 부서에서 차관이상의 지위로는 오를 수 없었습니다.  각 부서의 중간관리자이자 일선
책임자에 해당하는 대사가 대부분 육두품에 속한 사람들의 일자리였던 듯합니다. 
 오두품은 더 낮은 지위인 제10등급의 대나마가 한계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의한 등의 기술
직에 종사했으며, 각 부서의 실무진에 해당하는 사지의 직위에  오르는 것이 최고의 출세였
을 것입니다. 사두룸 역시 대부분 기술직이나 각 부서의  말단 실무진이었던 사로서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제 12등급인 대사까지만 승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태어나면서부터 그 사람의 지위가 결정되는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혈동입니
다 누구의 피를 이어 받았느냐 하는 것이 최대의 기준이지요, 그런데 만약 한쪽의 혈통만을 
중시한다면 지배층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늘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배층의 권
위는 물론 그들 내부의 이익 역시 현저하게 감소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배층이 자신들의 기
득권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쪽의 혈통을 모두 중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혈통 중시는 보통 여자의 입지를 한껏 올려놓을 수는 있는 최상의 여건입니다 그래서 유
산 상속도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왕위도  상속의 개념이 적용되는 부문입니
다. 왕위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남자가 계승하는 것을 원틱으로 했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 
남자가 없을 경우 다른 혈동의 남자를 계승권자로 인정하기보다 여자로 하여금 계승토록 하
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골품제와 같은 엄격한 신분제는 필연적으로 족내혼을  수반하게 됩니다. 혈통을 중시하므
로 근친혼이 성행하게 되는 것이지요.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법흥왕에게는  지소라는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딸을 법흥왕의 동생, 그러니까 자기의 삼촌인 입종에게 시집을 갔
고, 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입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혼인시킴으로서 혈통의 순수성을  이어가겠다는 새 각, 그것이 바로 
신라 골품제의 핵심입니다. 

      석탈해 신화
  박혁거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남해입니다. 박혁거세와 알ㅇ영릐 아들인 남해는 차
차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무당을 의미하는 방언이었습니다. 고급스럽게 표현하
면 제사장이지요. 신라의 왕이 아직 제사장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차차웅은 자충으로도 기재되었는바, 이것이 불교 승려를 가리키는 '중'이
라는 말과 통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렇하면, 신라에서 기존의 무당이 누리던 지위가  불
교가 전래된 뒤에는 불교 승려에게로 계승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겠지요? 무론  그렇더라도 
신분과 정치적 기능은 많이 달라졌겟지만..........
  여하튼, 탈해신화는 남해 차차웅 때를 배경을 산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재
된 신화를 간략하게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타나국의 왕이 여왕궁의  왕녀에게 
장가들어 임심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아니
라고 하면서 알을 버리게 했으나 왕비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각종 보물과 함계 알을 독  속
에 놓은 후 배에 태워 바다로 떠나 보냈다. 배는 물길을 따라 처음에 금관국의 해변에 도착
했으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다시 길을 떠나 진한의 아진포에 도착했
다. 어느 날 해변에 살던 노파가  하늘에 가치가 모여 울고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보니 
배에 궤짝이 있고, 그 속에는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노파가 아이를 거두어 이름을 탈해
라 하고, 까치 작자에서 조를 빼낸 석을 성으로 삼았다. 탈해는 그러던 어는 날 성장하여 키
가 9척이나 되었으며, 학문에 힘써 지리가지 통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탈해가 토함산에  올
라 경주 지역을 내려다 보더니 양산 아래에 있던 호공의 집이 길지입을 아아채고 내려가서
는 그 집이 자기의 집이라고 우겼다. 시비가 일자 관가에서 재판하게 되었는데, 탈해는 미리 
그 집 따에 숯을 묻어놓은 뒤 '그 집은  대장장이였던 우리 선조의 집이다'라고 주장했다.이
에 사람들이 호송의 집 한켠을 파보니과연 숯이 나오는지라  탈해의 말을 인정했다. 호공의 
집이 있던 곳은 나중에 월성이 되었다. 탈해가 집을 빼앗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그가  매우 
어질다는 소문을 들은 남해왕은 탈해에게  자기의 맏딸을 시집보내는 한편, 대보로  삼았다. 
남해왕이 죽을 때 '아들이냐 사위이냐를 따지지 말고 나이 많고 어진 사람이면 누구나 왕위
를 잇게 하라'고 유언했으므로, 남해왕의 아들인 유리와 탈해 가운데 한 사람을 다음 왕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는  속설에 따라 떡을 깨물게 하
여 비교하니, 유리의 잇금이 더 많았다. 그래서  유리가 왕위를이었으며, 칭호를 이사금이라 
했다. 유리는 34년간 재위하다가 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석탈해의 고향
  위의 설화는 고구려의 주몽설화와 매우  유사한 구성을 보여 주목을  맏아왔습니다. 우선 
사람이 낳은 알을 통해 태어난다는 점에서 똑같으며, 어머니가  물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
에서도 연관성이 인정됩니다. 또한, 자신의 출생지를 떠나 따른 곳에 정착할 때 기지로써 근
거를 마련한다는 발상도 같습니다. 즉, 탈해가 꾀를 내어 호송의 집을 빼앗는 장면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뒤 비류국과 서로 우열을 겨룰 때 어느 쪽이 더 전통 깊은 국가인가 하는 문
제가 제기되자 궁실의 기둥과 자재를 마치 오래된 것인 양 변조시킴으로써 비류국왕의 양보
와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야기와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삼국유사에는 탙해가 궤짝에서 나오자마자 토함산 꼭대기로 올라가 석총으로 만들
어 놓고 그안에서 7일 동안  머물다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기의 석총이 고구려식의 
적석총을 의마하는 것이라면 탈해집단이 혹여 고구려계가  아닌가 생각해 볼수도 있습니다. 
마침 탈해는 자신의 조상이 대장장이라고 했으므로, 이를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지닌 북방계 
이주민의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해봄 직합니다. 
  물론 탈해가 바다를 이용해 신라로 이주했다는 신화의 일부  내용을 참작하면, 탈해를 해
양계 이주집단의 상징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이후 신라의 수준 등과  바다와 관련된 일에 
많이 종사한 탓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금관가야국과 충돌한 것이 설화에  반영
되었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탈해가 호공에게서 빼앗은 집이란 지금의 월성입니다.  월성은 신라의 왕성이었던 곳입니
다. 다라서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는 대목은 장차 일어날 왕위계승을 암시하는 것인지 모
릅니다. 그러나 탈해는 왕위를 탈취하지는 않았습니다. 남해왕의 딸롸 혼인함으로써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그것은 탈해집단이 무력으로 경주 지역으로 제패한 것이 아니라 토착집단과
의 제휴를 통해 정치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알지 신화
  산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탈해니사금은  서기 57년에 즉위했다고 합니다. 물론  기록 
그대로 믿기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연대를 무시하는 학자들도 적
지 않습니다.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 초기사에서 연대 문제는 매우 복잡한 부분이므로, 여기
에서는 따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일단 미흡하나마 삼국사기의 기록에 준하여 설명
하겠는데, 나중에 경주 김씨는 물론 신라의 국조로까지  추앙되는 김알지는 탈해니사금 9년
에 탄생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알지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
다. 
  탈해니사금 9년 봄 3월이었다.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날
이 새기를 기다린 다음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나뭇가지에 금빛 나는 조그만 궤짝이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아뢰자,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
을 가져와 열게 했더니, 그 속에는 조그만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와가 기이하고 컸
다. 왕이 기뻐하여 주위를 둘러보며 "이는 어찌 하늘이 나레게 보낸 아늘이 아니겠는가?"라
고 말하고 거두어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빛 궤
짝에서 나왔다 하여 김을 성으로 삼았다. 시림이 명칭이라는 명칭을 바꾸어 계림이라  하고, 
그것을 국호를 삼았다. 
  김알지의 탄생과정은 박혁거세의 탄생과정과 매우  흡사합니다. 다만 흰 말이  흰 닭으로 
바뀌고, 붉은 색 알이 금빛 궤짝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기재된  알지신
화를 참고하면 박혁거세와 김알지의 공통점은 더 많아집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일부 인용
하면 이렇습니다. 
  영평 3년(60) 8월 4일이었다.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다가 시림 속에서 매우 
밝은 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다. 붉은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우고 구름 속에는 황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는데, 빛은 궤짝에서 나오고 있었으며, 또한 흰 닭이 나무 아래
에서 울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왕에게 아뢰자 왕이 숲으로 행차하여 궤짝을 열어보니 사
내아이가 누워있다가 곧 일어나 혁거세의 고사처럼 했다. 그래서 그 말에 따라 알지라고 이
름지었다. 알지는 그곳 말로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중략)......... 왕이 길일을 택해 알지
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나중에 파사에게 양보해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빛 궤짝에서 나왔
으므로 김을 성으로 삼았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유를 낳고 
수유가 욱부를 낳고, 욱부가 구도를  낳고, 구도가 미추를 낳았는데  및가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게서 시작되었다. 
  삼국유사의 알지신화는 마치 삼국사기에 생략된 부분을 보충 설명하는 듯한데, 붉은 구름 
운운한 대목과 밝은 빛 운운한  대목은 태양신 숭배사상의 반영으로  생각됩니다. 혁거세의 
고사라는 것은 사람들이 알을 깨뜨리니 알 속에 있던 박혁거세가 사람들을 처음 보고 "알지 
거서간이 한번 일어났다"고 말했다는 대목을 가리킨 듯 합니다. '알지'가 어린아이를 가리킨
다고 설명한 부분도 참고가 됩니다 어린아이를 지역에 따라 '아기' '애기' '아지' 등으로 부른
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알지를 '낟알'과 연관된 것으로 보아 곡
령신앙의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 

      신라와 계림
  신화에 따르면 김알지는 신라 김씨, 곧 경주 김시의 시조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숲을 신성시해 시림 혹은 계림이라 했고 계림ㅂ은 국가의 별명으로까지 이용된 덧입
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신라의 국호화 별명은  참을 많습니다. 먼저, 국내 기록에서  신라의 
국호와 관련된  명치을  찾아보면, 서벌...서나벌...서야벌...서라벌...사로...사라...시라...계림...계
귀...추림...신로......구구타예설라 등이 있습니다.  중국측 기촉에는 사로...사라,,,계귀...신로...신
라...구구타예설라 외에 설라라고 적은 곳이  있습니다. 일본 기록에서는 신라...신량...사라.계
림...지라기 등의 명칭이 나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를 국호로 사용한 것은 지증왕 
4년(503)의 일이라고 합니다. 한편, 알지가 신라 김씨의 시조라는  기록은 약간의 검토를 필
요로 합니다. 신라 흥덕왕릉비문에 '태조 성한'이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조'란 시조
왕을 뜻합니다. 신라의 김씨는 자신들의  시조를 성한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표현했으 
것입니다. 흥덕왕에 앞선 문무왕릉비문에는 '15대조 성한왕'이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비문은 
당시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신라인들은 고연 누구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여겼는지 가장 분명
하게 알려 줄 수 있는 자료입니다. 그런데 신라 당시의 자료에서는  한결같이 '알지'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성한'이라는 인물이 나올  뿐인데 여기의 성한이 알지와 동
일인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알지라는 인물의 실존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신화이외에 별다른  기록
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가 탈해왕 때의 인물인지 그리고 알지 - 세한 - 아도 - 수유 
- 육뷰 - 구도 - 미추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시실인지를 달리 확인할 길도 아직 묘연합니
다. 그래서 신화를 동반한 족보를 볼 때는 매우 신중해져야 합니다. 신화를 그대로 믿어  역
사에 반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특히 신화 속의 '신간을 그대로 믿
어서는 곤란합니다. 그 이유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검토하는 가운데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다
는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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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 고대편, 일조각, 1982.

  제4장 중국의 삼국시대와 우리 삼국시대
    1) 솥의 다리는 세 개 - 삼국지의 무대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삼국지통속연의를 읽은 적이 있습니까? 중국의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를 살았던 나관
주이나를 사람이 쓴 책이지요. 청나라 때 모종강이라는 사람이  다시 정리한 후로는 삼구지
연의 혹은 그냥 소설 삼국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후한 영제의 중평 원년(184)부터 이야기
를 시작해 진 나라 무제의 태강 원년(280)가지 약 97년에  걸틴 역사를 소설로 꾸민 책입니
다. 진수가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를 저본으로  했으나, 역사를 보는 시각은 여러 모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삼국지통속연의의 장면 장면을 읽고 있노라면,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또  등장인물의 
좋고 나쁨, 행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용기와 지략, 관용과 믿음, 천운과 무욕 등에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책 곳곳에서 펼쳐지는 정치술과 전략...전술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흥미
진진해 읽는 이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책에는 과장이 너무 심하며, 
역사를 보는 시각도 매우 편파적이라는 단점이 있습니다. 소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삼국지통속연의는 물로닝고, 그 책의 저본인 삼국지는 위...촉...오 3국의 역사에 대한 책입
니다. 위나라는 그 유명한 조조라는  가람과 그의 아들 조비가 세운  나라로서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화북 지방 대부분을 차지했던 대국이며, 촉나라는 후한의 왕족이던 유비가 
양자강 상류 지역에 세운 나라로서 지금의 사천성과 부근  일대에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손
권이 세운 오나라는 양자강 남쪽을 다스렸습니다. 이처럼 세 나라가 중국 전역을 나누어 통
치하던 시기를 가리켜 후대 사람들이 '삼국시대'라고 불렀고, 그 시대에 대한 역사서를 삼국
지라고 했던 것입니다. 

      정립
  세 나라가 공존했던만큼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촉나라가  오나라를 거세게 공격하면 위나
라가 오나라를 도와주고, 위나라가 촉나라를 공격하면 오나라가 촉나라를 도와주어, 어느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는 일을 막았습니다.  만약 촉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
켜 자기 땅으로 삼게 되면 촉나라의 국력이 배가되어 그대로 있던 위나라는 상대적으로 불
리해지며, 또 위나라가 촉나라를 멸망시키면 가만히 있던 오나라도 나중에 위헙해지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두 나라가 싸울 때 그중 약한 나라를 응운한 것은 자기 나라를 안전하게 보
전하는 방책의 하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위...촉...오  3국은 후한인 멸망한 후 수십년
간 서로를 경계하며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화을 한자용어로 정립이라고  합니다. 
솥 정, 설 립. '솥이 서 있다.' 즉, 솥의 다리처럼 세 개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솥의 다리? 그것도 세 개? 이렇게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둥그런, 둥그런 솥의 다리는 세 개였습니다. 예날 중국의 청공기시대에 만들어진 솥에는  모
두 다리가 붙어 있는데, 세 개입니다. 그 세 개의 다리가 감각구도를 이루어서 솥이  쓰러지
지 않게 버텨주는 것입니다. 만약 다리 하나를 나머지 두 개 중 어느 한쪽에 가까이 배치한
다면, 솥은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지거나 작은 충격에도 금방 넘어져 버릴 것입
니다. 중국 삼국시대의 정치가들이 한때나마  결쟁국가를 도와준 것은 바로  솥이 넘어지는 
장면을 연상했기 때문입니다. 

      하 은 주와 봉건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중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하 
왕조라고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왕은 있었으나, 국가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단계였다고 
합니다. 바로 3황 5제의 시대인 것입니다 3황은 보통 수인씨(백호통 등에 기록된 중국의 전
설에 따르면, 사람들이 음식을 날 것으로 먹는 바람에 병에 걸리는 일이 잦던 시절, 문득 어
떤 성인이 나타나더니 나무를 부비고 부싯돌을 때려서 불을  피유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로
써 사람들이 음식을 익혀 먹게 되니 병이 깨끗이 나았다.  이후 사람들은 그의 은혜에 감사
하며, '불을 얻어 낸 가람'이라는 뜻으로 수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와 같
은 다른 기록에는 불을 발견한 사람이 복희씨로 기재되어 있다. 복희는 포희 혹은 포희로도 
불렸는데, 그것은 '희생물을 부엌에 채운다' 또는 날고기를  익힌다'는 뜻이라고 한다.)...복희
씨(복희시에 대한 전설은 지역과 기록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상반신
은 사람이며 하반신은 뱀 또는  용의 모습을 한 성인이라는  것이다. 복희는 포희...포희...복
희...복희 등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복희씨는 자연을 살펴 건(하늘)...곤(땅)...감(물)...리(물)...간
(산)...진(천둥)...손(바람)...태(늪)로 이루어진 팔괘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사람들은 점을 쳐서 
신의 의지를 알아내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복희씨는 사람들에게 노끈
을 짠 다음 그물을 만들어 고기잡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고 전한다. 그림에서는 부인인 여와
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신농씨(백호통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먼 예날 사람들은  주
로 고기를 잡아먹었으므로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는데, 어느 날  소머리에 사람 몸을 한 성
인 나타나더니 사람들에게 밭 갈고 곡식 심는 법을 가르쳐 주어 사람들의 음식 걱정을 해결
해 주었다. 이에 사람들이 그 성인을  신농이라고 높여 불렀다고 한다. 신농씨는 또  태양이 
충분히 빛나게 하여 사람들의 농사를 도와주었으므로 '태양의 신'이라는 뜻에서 염제라는 별
명을 갖고 있으며, 의약의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중국 사천성 지역의 전설에 따르
면, 신농씨가 사람들을 위해 각종 약초를 일일이 맛보다가  단장초라는 독초를 먹는 바람에 
창자가 끊어지고 썩어서 죽었다고 한다.) 등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
로서, 자신의 초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켰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은 황제(염제 신농씨와 싸워 이겼다는 하늘나라  중앙의 상제이다. 황제의 어머니는 처녀
의 몸으로 황제를 낳아 희수라는 물가에 키웠다고 한다.  황제는 4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어
서 사방을 살폈으며, 신들의 나라의 최고 통치자 그리고  신들의 싸움을 중재한 재판관으로 
유명하다. 황제는 발명도 많이 했는데, 수레...솥...시루...축구와  집 짓는 법을 고안했다고 한
다. 그중 특히 수레를 발명했다고 하여 황제를 헌원씨라고도 부른다. 황제라고도 하며, 서방 
주나라에서 섬기던 상제로 전한다.)...전욱(황제의 손자(사기) 혹은 증손자(산해경)로서, 황제
를 이어 하늘나라 중앙 상제의 지위에 오른 뒤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버림으로써 신의 세
계와 인간세계를 보다 분명하게 구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각종 재난 속에서 고통
받게 되었다. 또한 전욱은 질서와 예법을 중시했는데, 여자를 경시했기 때문에, 여자가 길에
서 남자를 만나면 얼른 길을 양보해야 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 빡에 전욱은 음악을 
좋하했으며 죽은 뒤에는 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의 모습으로 부활했다고 한다.)...제곡(황제의 
자손으로 인간세계를 다스렸다는 반인반신의 존재이다. 음악을 무척 좋아했으며, 하늘의  상
제인 제준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제준은 동방 은나라에서 섬기던  상제이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제곡에게는 4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후직을 낳았고, 둘
째부인은 설을 낳았으며, 셋째 부인은 제요 그리고 넷째 부인은 제지를 낳았다고 한다. 여기
서 후직은 주나라의 시조이며, 설은 은나라의 시조이다.)...요(제곡의 아들오서 인간세계를 다
스린 성인이며, 제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엉성한 초가에 살면서 거친 옷을 입고 흙으로 
빚은 그릇에 거친 밥과 야채만 담아 먹었을 정도로 근검 소박하고 백성들을 사랑한 매우 모
범적인 왕으로 전한다. 요는 훌륭한 신하를 많이 두었는데, 사위인 순은 교육을 담당하는 사
고였고, 설은 구사를 담당하는 사마였으며, 후지은 농가, 고요는 법을 담당했다고 한다. 아들
인 잔주의 성품이 교만하고 포악하자,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왕위를 사위인 순
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순(고수라는 눈먼 사람이 봉황의 꿈을  꾸고 낳은 아들로서 눈의 
눈동자가 각각 두 개씩이었다고 하여 중화라고도 부른다 고수는 순을 낳은 지 얼마 안가 아
내를 잃고, 새 아내를 맞아 다시 상이라는 아들과 과수라는 딸을 낳았는데, 그는 성질이  고
약한 후처와 후처의 자식만을 예뻐하여순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으나, 순은 끝까지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지켰다고 한다. 순은 농사와 고기잡이 그리고  그릇 만들기를 차례로 하는 
동안 크나큰 덕행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킨 공이 인정되어 요임금의 두 딸 아황...여영과 혼인
했으며, 요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수십년간 다스리다가 상균을  비롯한 9명의 아들 
대신 홍수를 잘 다스려 큰 공을 세운 신하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등의 5제는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 걸쳐 각종 문물을 마련하고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
를 이은 것이 하왕조라는 것이지요. 
  하왕조를 처은 연 사람은 우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순임금의 신하였는데, 홍수를 잘  처리
해 신임을 얻고는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임금은 신하들 중 어진 사람을 뽑
아서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이후 5백년 가까이 그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게 만들었
습니다. 왕조를 연 것이지요. 하왕조는 서기전 1700년을 전후한 무렵에 동쪽에서 일어난  은
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게 됩니다. 
  중국의 옛 문헌에 동이적의 국가로 소개되기도 한 은나라는 원래 상이라는 국호를 사용했
습니다. 또한 그것은 도시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은나라는 도시국가적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은이라는 명칭은 그 뒤를 이은 주왕조 때 붙여진 것입니다.  은나라
의 수도는 몇 번에 걸쳐 바귀었으마 멸망하기 전 3백년 가까운 기간은 지금의 하남성  안양
현의 소둔촌 일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초에 그곳을 발굴하자 갑골문자를 비롯해 각
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그로 이해 소둔촌 일대를 은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중국사에서 은나라 이전의 역사를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
은 논란이 있었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왕조가 존재했다는  시기의 
대부분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왕조와  관련된 듯한 유적에서 정치체
의 출현을 암시하는 요소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확정지어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
러나 은나라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들은 대단히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갖춤으로써 국가로서
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허를 조사하는 과정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도시
국가적 성격이 강한 은나라는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가부장제 사회였으며, 은나라의 왕은 
제사장적 성격이 강했다고 합니다. 신권정치를 한 것이지요.
  서기전 1100년경에 이르러 은나라는 봉건제하에서 자주권으 뱅취하려는 부녀 세력들의 도
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서방을 제패한 주 왕실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습니다.주왕
조는 처음 약 300년간을 지금의 섬서성 위수지역에 있던  호경에 도읍했으나, 거시전 770년
에 북방족 견융의 침입을 받아 국가 멸망의 위기에 봉착하자 도읍을 하남성의 낙양으로 옮
겼는데, 호경에 도읍하던 시기를 서주시대라 하고, 낙양으로 천도한 후 약 550년간을 동주시
대하고 합니다. 왕실의 권위가 실추된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됩니다. 

      춘추...전국시대와 통일왕조
  존왕양이의 기치 아래 제후들이  각자 패권을 추구하던  춘추시대는 진...제...진...초의 4강 
구도로 진행되면서 약육강식에 의한 정복전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춘추 
초기에 170여 개국에 달하던 제후국이 춘추 말기에  이르자 10여개국정도로 정리되었고, 진
이 자체 분열을 일으키면서 시작된 전국시대에는 조...한...위...제...진...초...연 등 7국으로 압축
되었습니다. 
  열국이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사이에 중국의 정치...경제...문화는 급속히 변화했습니다. 각
자 최종 승자가 되기 위해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실리에 입각한 제도개혁이 이루어  졌으
며, 영토를 비롯한 정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합종...연횡과 같은 외교정책, 관료제에 
입각한 군현지배체제, 제자백가의 출현 등이 모두 이 무렵의 특징적인 요소들입니다. 
  전국시대는 상앙의 변법이래 꾸준히 국력을 키워온 진나라가 나머지 6개국을 차례차례 멸
망시킴으로써 서기전 221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진나라의 왕은 정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통일하자마자 왕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자신을 첫 황
제, 곧 시황제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또한 법가인 이가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존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눈 다음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시행했으며, 도량형과 화
폐...문자를 통일하고 사상조차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정치...제도 개혁은 너무나 급격해 불만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불거져 나
왔습니다. 게다가 만리장성 축조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빈번히 시행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이 
매우 커졌습니다. 그러던 중 서기전  210년에 시황제가 죽자 정치  혼란마저 더해져 서기전 
206년에는 결국 진나라가 멸망하고, 반란세력을 주도하던 유방과 항우의 패권다툼이 시작되
었습니다. 

      거대한 중국 - 한
  농민 출신인 유방은 귀족계급을 이끌던 항우의 군대를 격파하고 서기전 202년에 한나라를  
세우니, 이 사람을 고조하고 합니다. 제국을 형성한 한나라는 진나나의 제도를 대부분  계승
했으나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군현제의 경우에도 그것을 그대로 시행하
는 것이 아니라 예저의 봉건제적 요소를 덧붙임으로서 군국제도라고 하는 새로운 제도를 탄
생시켰던 것입니다.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한나라는 실리를 추구하는 법가 위주의 정치에서 벗너
나 유교의 통치이념을 채용하는 등 새로운 가치관과 관료제도 구축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무제 때에는 주변지역 정벌에 나서 남쪽으로 베트남 북부지역에까
지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함으로써 중국의 정치 범위를 
확대시켰습니다. 그러나 애제때인 서기전 1년경  신하인 왕망이 길권을 차지하더니,  급기야 
서기 8년에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활제를 칭하고 국명을  고쳐 신이라 했습니다. 서기 14년 
익구에서 일어나 반란과 북방의 대기근을 계기로 곳곳에서 반란이 줄을 이었고, 그 결과 왕
망은 서기 23년에 전사했습니다. 홍란을 수습한 것은 유수라는 호족이었습니다. 그는 한나라
의 왕족임을 내세우며 서기 25년에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후한의 
첫 임금 광무제입니다. 
  국호에서도 드러나듯이 광부제가 세운 한, 곧 후한은 전한시대의 정치기구와 제고응 거의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다만, 징병제도를 페지하고 전문적인 병사제를 두는 등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후한에서는 유교를 더욱 중시해 통치의 원리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후한은 건국된지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외척과 환관의 득세로 부정부채가 만
연하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반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서기 184년에 폭발한  농민봉
기, 곧 황건적의 난능 후한 왕도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권 없이 명백한  유지하
던 후한 왕실은 결국 서기 220년에 마지막 왕인 헌제가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선양함으로써 
종막을 고했습니다. 조비는 국호를 위로 고치고 낙양에서 즉위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와 서진...동진
  서기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곧 조조가 이끄는 정부군에 진압되었지만 그 과정에 
난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비장에서 병사를 모아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서두에 소개한 삼국지통속연의의 주인공인 유비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서기 221년에 
성도를 중심으로 한나라를 재건했는데, 사람들은 이 나라를 보통  촉한 혹은 촉이라고 부릅
니다. 한편, 회하 유역과 양자강 중...하류역에서 호족세력들을 통합하며 세력을 확장한 손권
은 건업에서 오나라를 세움으로써 삼국시대의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삼국 중 가장 강성한 국가는  중원지역 대부분을 차지한 위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위나라 
왕실은 얼마 안가서 군대를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마 씨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으
며, 결국 서기 265년에 협박을 받은 원제가 사마염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진나라가 서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263년에 촉나라는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 이미 멸망했으며,  280년에는 
위나라를 이은 진나라가 오나라마저 멸망시킴으로써 중국은 다시 통일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통일기간은 잠시였습니다. 300년경에 일어난  사마윤의 쿠데타를 계기로 
왕실 내부의 공육상쟁이 벌어지자, 혼란을 틈타  흉노...선비...저...강...갈 등 북방의 이른바 5
호가 반란을 일으켜 화북  지방을 경쟁적으로 장악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진나라는 서기 
316년에 민제가 수도인 낙양에서 흉노족이 세운 한 나라의 공격을 받고 체포...살해됨으로써 
멸망했는데, 다음해인 317년에 양자간 남쪽의 건업에서 사마씨의 일족인 사마예가 진나라를 
재건하니, 이를 동진이라 부릅니다. 
  이상 간단하게 정리하는 가운데 드러난 바와 같이, 중국의  감국시대는 불과 50년 정도의 
매우 짧은 기간입니다. 그 기간에 삼국의 계속된  저쟁으로 인구는 크게 줄었으며, 경제...문
화의 발전 역시 부분적으로 다소 저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국간의 치열한 경쟁
은 각국을 국력 배양에 힘쓰게 했으며, 그 결과 중국의 정치...군사적 영향권이 외부로  크게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와 관련된 사건으로는 서기 245년에 위나라의 관구검이 이
끄는 군대가 고구려의 환동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요동을 확보하고 고구려를 위축시킨 사건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중국의  삼국시대는 춘추...전국시대의 분위기와 일부분  통하는 면이 
있는 듯합니다. 한족의 활동범위가 중원지역을  벗어나 지금의 중국과 같은  광대한 지역데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경쟁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시대  배
경과 상황은 다르지만 살아남기 위해 무한히 경쟁해야  하는 시대였다는 점에서 춘추...전국
시대와 삼국시대는 닮은꼴이라고 하겠습니다. 

    2) 고구려는 남성, 백제는 여성?
      고구려인의 기상
  삼국시대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매우 다양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러나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합치하는 듯합니다. 그중  한 가지가 삼국의 
통일에 대한 것입니다. 즉, 신라가 안니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우리도 매우 넓은 땅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의 표현들입니다. 이렇
게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고구려의 강인함과  씩씩
함을 거론합니다. 한마디로 고구려에게서는 남자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백제에 대해서는 매우 세련된 사회라는 인상을 갖고 있지만, 어딘가 연약한  국가인 
듯한 느낌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세련된 사회라는 표현 뒤에는 
사치스럽다는 기분이 깔려 있고, 그런 부분들이 한데 어우러져, 백제는 전체적으로 마치  곱
게 화장한 여자 혹은 예쁘장한 미소년의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꽤 있는  듯합니다. 그리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을 똑똑하지도 건강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은 사람이 잔꾀 하나로 건강하고 솔직하고  따
뜻한 사람을 짓밟으며 자신의 이익을 챙긴 사건처럼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는 물론 대다한 
적대감을 드러낸 표현입니다만, 그만큼 고구려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크고, 고구려의 멸망에 
대한 아쉬움이 짙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고구려'하면 으레 ' 기상'이라는 단어를 뒤따라 붙이고는  흐뭇한 감
회에 젖곤 합니다. '기상'이란 '사람의 타고난 성질'을 뜻하는 평범한  단어에 불과하건만 '고
구려의 기상'하면 무언가 거친 숨결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숨결 속에는 투발한 손길
과 함께 끝없는 도전의식, 개척정신 등을  담아 놓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를  정
치...군사적인 면으로만 바라볼 뿐,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인상을 갖지 못하는 
것도 사실 그 때문인 듯합니다. 그것은 마치 바깥 일을 잘하는 남자는 집안 일에 소홀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다분히 개인화된  국가관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습니다.  너무다 대범하기 
때문에 꼼꼼한 면이 부족한 문화를 소유했던 국가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구려는 단지 군사력만 갖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칼과  창을 앞세워 이웃 나라
와 집단을 노략질함으로써 제 배를  채우는 그런 호전적이고 비정치적인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효율적으로 짜여진 관제 조직을 운영했고,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중국 등의 
이웃나라와 교류하면서 건강하고 다양한  문화를 형성했던 국가입니다.  그러면서도 중심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창의적인 문화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자와 교육
  고구려 사람들은 나름의 문자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단지 중국인의 한자를 사용했을 뿐입
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자기 풍토에 맞추어 매우 독특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사람이름이라든지 땅이름과 같은 고유명사  그리고 각종 말을 나타내기 
위해 한자의 외양만 빌리는 차자표기법을 개발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차자표기법은 신라에 
전해져 이두를 성립시켰으며, 또  그것이 일본의 음절문자인 가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신라의 이두는 7세기 후반에 설총이 정리했습니다. 
  고구려의 문화 수준은 소수림왕 2년에 태학 혹은 대착이 설치된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
도 엿볼 수 있습니다. 태학(대학)은 중앙의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사서 오경과 사기 등의 역사서를 교과서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한편, 지
방에는 경당을 설치해 지방민의 자제들에게 독서와 활쏘기 등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습니
다.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그리고 각종 벽화고분에 발견된  묵서명 등은 4~5세기 당
시의 높은 한문 수준을 반영해줍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역사서 편찬사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
다. 그리하여 국초에 이미  유기라는 역사서를 만들었으며, 영양왕  11년(600)에는 이문진을 
통해 신집을 편찬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유기를  만든 국초란 소수림왕대일 것으
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령제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소수림왕 3년(373)에 율령을 반포했다고 합니다. 율령이란 지
금의 형법에 해당하는 율과 토지...관제등 국가제도 전반을 규정한 영 그리고 시행규정에 해
당하는 격...식을 총칭한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율령이란 금지법과 명렬법의 합
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야 사회가 매우 복잡해지고 문화 수준도 크게 높아져서 조그마한 모임에  회칙을 
두고 또 규정을 두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정치...경제...사
회...문화가 제대로 분화되지 않은 단조로운 사회에서는 그저 관습에 따른 단간한 약속이 있
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따라서 율령 반포는 사회가 이미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단계로 돌입
했음을 알리는 증표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율령은 법전으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율령을 반호했다'는 표현은 보통 '법전을  만들어 공
표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다면 고수려가 과연 4세기 후반에 법전을 반포했을까
요? 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중 어떤 이들은 고대의 율
령 반포를 단순히 공복 제정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성문화되지 못
한 법체계를 상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라면 고구려는 3세기 이전에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는 중국의 현도군으로부터 매년  조복과 의책을 당어갔다고 합니
다. 그리고 왕과 제가는 각각 사자...조의 ...선인과 같은 가신을 둘 수 있었는데, 왕의 가신과 
제가의 가신 사이에는 지위상의 격차가 있었다고 합니다. 늦어도 3세기 중엽경의 일입니다. 
  매년 가져갔다는 조복과 의책을 고구려의 관제와  연결시켜보면, 고구려에서 공복제의 시
행은 생각보다 일찍 시행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흔적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 바
로 조의라는 관직명입니다. 조의란 '검은 옷'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관직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물론 이를 역설적으로 해석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조의'가 검은
색 제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다른 색깔의 제복도 상정할 수 있겠습니다. 제복이 모이면, 그것
이 공공 복장, 곧 '공복'입니다. 
  고구겨는 3세기 중엽에 이미 적어도 9개  이상의 관직을 설치할 정도였으므로 그에  따른 
법체계도 상당히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조선이 멸망하고 낙랑군이 설치된 뒤 얼마 
안 가서 법 조항이 최소한 60여개로  늘어났다는 중국특의 기록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는 태학이 설치되고  역사서를 편찬하던 무렵에는 법전을 
편찬했을지도 모릅니다. 
  소수림왕 3년에 율령을 반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러한 법전편찬을 전한 것으로 생
각됩니다. 다만 이때 고구려에서 반포한 율령은 비교적 단순한  법체계이거나 남의 것을 그
대로 모방한 것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만약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라면, 진 나라에  무제의 
태시 3년(267)에 집대성된 태시율령이 모본으로 이용되었을 것입니다. 
 
      불교의 전래
  곡려의 소수립왕대는 불교의 전래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시기입니다. 서기 372년에 
승려 순도를 통해 중국  화북 지방의 패자로  등장한 전진으로부터 불상과  경전을 받았고, 
374년에는 승려아도가 들어왔으며, 375년에는 고구려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에숨으로써 순
도와 아도가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을 벌이도록 적극 후워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흔
히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를 소수림왕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상에 드러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이보다 더 빨리 불교가 고구려에 소
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즉. 정치적 교섭에 구애받지 않은 민간에서의 포교는  생
각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전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지요.
  여하튼 고구려의 불교는 호국적  성격을 띤 것으로 알려집니다만,  그렇다고 불교 자체가 
정치성이 강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삼론종의 기반
하에 공사상이 유행한 사실이라든지, 6세기 이후에는 천태종과 열반종이 활발하게 연구되는 
등 교리 탐구가 넓고 깊게 이루어딘 사실을 통해 시사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5세기 말에 양나라에 유학해 삼론종의  대가로 활동한 승랑과 7세기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성덕태자의 스승이 된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라고  합니다. 이밖에 일본에서 활
동한 인물로는 혜자와 담징 등이 재표적입니다. 

      도교의 유행
  고규려 후기에는 도교가 크게 성행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도교는 영유왕 7년에  당나라
의 고조가 도사와 천존상 그리고 도법을 보내온 것이 계기가 되어 고구려에 전래되었고, 이
후 연개소문이 도교 진흥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중에는 절 일부를 도관으로 바꾸게 했을 
뿐 아니라 유교학자보다 도사를 윗자리에 앉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는 물론 보장왕과 연
개소문 등의 개인적인 호감도 적지 않이 작용했겠지만, 유교와  불교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
도 있었던 듯한데, 그 결과 보덕과 같은 승려는 신라 등지로 망명하게 됩니다. 
  한편, 도교와는 별도로 신선사랑은 일찍부터 있었을 것으로 새각됩니다. 그것은  고분벽화
의 천인상...선인상 등 장생부로를 나타내는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상 간략하게 고구려의 법제...학술 수준을 소개했는데, 그 사이 우리는 고구려가 단지 말 
타고 활 쏘는 일에만 치중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면, 이러한 법제...학술 수준은 반드시 기술적인 부분을 동반한다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겠습
니다. 가령 불교가 전래되면 부처 신앙만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교리를 따르기 위
해서는 부처의 사리가 내장된 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들면 절을 건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지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다라서 불교 전래를 통해 고구려는 건축...조각...금속공예 등
에 관련된 각종 기술도 함께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이러한 문화 수입이 외교활동과 긴말히 연계된다는 사실입
니다.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유...불...도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제도를  배우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과 고구려 사이를 오가야 했을 것입니다. 
  문화 교류와 파생은 끊임없는 인적 교류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
구려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회였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개방성은 광대한 영토를 
유지...운영하는 데 매우 유효한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개방적인 사회는 보통 건강한 법입
니다. 

      백제의 국가 성장과 근초고왕
  사회의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백제만큼 두드러진 국가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
선 백제는 부여...고구려계, 한계,낙랑...대방군 및 중국계, 왜계  등 많은 종족들이 함께 꾸려
가는 국가였기레 종족의 다양성만큼이나 문화도 다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양성은 외부
에 대한 흡입력으로 작용할 때가 많은데, 그래서인지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급속히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4세기경에는 백제는 이미 북쪽으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백제사에서 근초고왕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무렵에 백제는 정치...군사...문화적
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는 관제를 정비하고 지방 세력을 
적절히 통제하는 동시에 대중국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군사적으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연승함으로써 북방 영토를 크게 넓혀놓았을 뿐 아니라 남쪽으로도 주변의  소국들
을 병합하면서 충청도 일원을 영유했고, 문화적으로는 서기를 장성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
던 것입니다. 
  서기 313년경 고구려는 낙날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으며,  이듬해에는 대방군마저 멸망
시킨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런데 낙랑...대방군의 멸망은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이 맞닿는  결
고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와 기나긴 혈투가 시작되었지요, 영역의  크기로만 
본다면 고구려의 우세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이 재위하던 무
렵에 벌어진 전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몇 번에 걸쳐 백제가 대승을 거두고, 그로 인해  고
구려의 남진은 한동안 꺽이게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 세력을  물리치고 황해도 일대를 확보
한 백제는 과거 낙랑...대방군을 통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과의 교류를 더욱 
깊게 해 372년에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라는 작호를 받았는데, 이는 해당 지역
에 남아 있던 낙랑인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그들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공고히 함으로써 고
구려 세력의 남하는 억지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백제의 역사서
  낙랑...대방군 지역에 대한 백제의 유화책은 매우 성공적이었던 모양입니다. 백제인 중에는 
낙랑...대방군계로서 중국과 교류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
기 때문입니다. 근초고왕대의 인물인 고흥도 그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 근초고왕 30년(375) 조에는 '왕이 돌아가셨다'라는 기사에 이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
니다. 
  "고기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한 이래 문자로 사건을 적은 적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서기가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고흥은 다른 책에 나온 
적이 없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
  고흥에게 '박사'라는 칭호가 붙은 것으로 보아 그는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이 매우 탁월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이 백제에서 덩은 칭호라면  당시 백제에 태학이 설치되었
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또 태학이 설치되었을 정도라면, 고구려의 예로 보아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졌을 터이고, 따라서 '서기'를 역사서의 이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윗글의 내용이 다소 애매해 '서기'가 과연 책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즉, "백제는 개국한 이래로 문자로 사건을 적은  적이 없었는데"라는 표현은 
근초고왕 때부터 기록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풀이될  여지도 있어서, '서기'를 단
순한 기록물 정도로 이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서기를 단순한 기록물 정도로 보게 되면, 이번에는 또 다른 의문점을  낳습니다.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는 기록을 남길 정도가 못될 만큼 문화 수준이 낮았는가 하는 의문입
니다. 당시 백제가 남긴 문화유적과 유물을 감안하면, 그렇게 볼 수는 없겠지요. 따라서  '서
기'에 대해서는 다른 각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서기'가 역사서는 아니지만 그
에 준하는 기록물이라든지, 역사서에 기재될 초안에  해당하는 기록이라는 식의 해석말입니
다. 여하튼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백제 사람들이 남김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일본서기에 인용된 이른바 백제 3서를 들 수 있
습니다. 일본서기는 거시 720년에 일본 정부에서 편찬한 관찬사서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 백
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의 3책이 인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용된 시기는 대체로 3세기 중
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인데, 아무도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가겨간 책
의 일부이거나 그 사람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새로이 편찬한  책일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 3
서에는 백제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사료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개재됨으로써 사료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의심케 하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역사서가 기본적으로 정치적 사건을 피해가서는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정치적 의도를 띠어
서는 더욱 곤란합니다. 역사서와 역사가는 정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되 가장 먼 곳을 지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제의 해외 진출
  근초고왕대에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를 연파하고, 남쪽으로  마한의 여러 세력을 병합했
으며, 가야 지역과 군사...문화적으로 교류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또한 동진과 같은 중국세력
과 연계를 가졌으며, 일본과도 교류했습니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백제사에서 근초 고왕대
는 그야말로 가장 탄력 넘치는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백제가 이 무렵에 중국의 요서...산동 지역에 정치...군사적으로 진출했고, 일본
열도에도 세력을 뻗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송서, 양서, 남제서, 통전  증에는 
백제가 요서 지방을 경략했다는 기록(송서 이만전 : 백제국은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
여리 바깥에 있었다. 그후 고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
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양서 제이전 :  그 나라(백제)는 본래 구려와 함
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자 백제도 역시  요서...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동성왕대에 백제신하들 중 상당수
가 남제로부터 광릉...청하...성양의 지명이 붙은 태수호를 받았으며, 위덕왕은 동청주 자사를 
받았다응 기록이 있는데, 이들 지명을 산동 지역과 발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으로 본
다면, 백제가 이들 지역에 진출한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반대 증거가 매우 뚜렷합니다. 우선, 광릉...청하등의 지명이 그것
을 준 남제왕조와는 전혀 상관없는 국토 바깥의 지명이어서 실질적이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
습니다. 도한 후대에 작성된 위의 역사서들과는 달리 백제  당시에 중국의 양나라에서 만들
어진 양직공도에는 조금 다른 기사가 실려 있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즉, 위의 송서
의 내용 중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라고 한 대목이 양직공도에는 "낙랑은 또한 요서 진평
현을 차지했다."(직공도 백제국사 : 백제는 옛날  동이족의 마한에 속하던 나라이다. 진나라 
말기에 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낙락은 또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로 기재된 것입니다. 
  낙랑이 요서를 차지했다? 그렇습니다.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낙랑군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
고 멸망할 무렵(313년경)낙랑군민 중 1천여 가구가  요서 지역으로 이주한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진도 모릅니다 모용씨 세력의 통제 아래  요서 지역(요녕성 조양
시 부근)에 새로이 설치된 낙랑군은 이후 5세기  전반기에 하북성 일대로 자리를 옯겼으며, 
그곳에서 6세기 중엽까지 존손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렇다고 송서와 양서의 기록 가운데 '백제의 요서 경략'이 모두 '낙랑의 요서결략'을 잘못 
기재한 것이라고 단언해서는 곤란합니다. 양나라 직공도의 백제국사 조에서 왜 낙랑의 요서 
지역 진출을 언급했는지가 더욱 큰 의문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왜  직공도는 백제와 아무 상
관도 없는 낙랑의 요서 진출을 백제국을 소개하는 자리에 끼어 넣었을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서기 314년경에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키고 이듬해에 대방군마저 
멸망시키자, 고구려와 백제는 이제 영토를 맞대면서 군사적 치열히 경쟁하게  되엇슷ㅂ니다. 
그리고 그 결과 4세기 후반에는 백제가 대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잇었습니다. 바야
흐로 옛 대방군의 영토 전부와 낙랑군의 영토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영통반이 
아닙니다. 그곳에 살고 잇던 낙랑...대방군의 유민들까지  통제하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에 흡수된 낙랑유민 둥에는 요서 지역으로 이주한 낙랑세력과 연계해 활동하던  사람들
도 있었을 것입니다. 해양을 통해 요서 지역의 낙랑과 연계한  채 무역활동을 벌이고 대 고
구려 견제정책을 벌인 백제! 백제의 그 같은 활동을 지칭한 것이 바로 이른바 요서경략설의 
진원이 아닐까요?
  여하튼, 백제는 지금의 황해도 일대를 놓고 고구려와 정면으로  맞서는 가운데 그들의 군
사적 역량을 충분히 과시할 수 있었는데, 지리적 특성과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수륙 양면의 
활동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고구려와 적대적이었던 탓에  중국과의 교류에는 반드시 해웅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과의 교류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백제는  일찍부터 
해상활동이 활발했고, 그에 따라 항해와 관련된 기술이 매우 발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점에 착안해서인지 어던 사람들은 백제의 지방 행정단위인 담로가 중국의 해안 일대는 
물론 일본과 동남아 지역에도 설치되었으며, 이를 통해 백제는 해상왕국을 건설했다고 주상
하기도 합니다. 백제인의 후예임이 분명한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듣기에 매우 흐뭇한 추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듣기 좋다고 해서 쉽게 말하고, 듣기 나쁘다고 해서  감추
는 학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학은 이미 학문의  범주를 벗어나 3류 소설로 전락하
게 되는 것입니다. 다라서 그런 추론에 합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간혹 중국 남부지역에서 발견된  백제현을 해외 담로의 증거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더 세심한 연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을  비롯
해 적어도 1만 2천 8백명 이상의  백제 사람들이 당나라로 끌려가 당나라의 변방지역  등에 
집단적으로 배치되었는데, 이들 백제 유민의 집단 거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앞서의 백제
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백제가 해외에 식민지를 개척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백제의 군사력이 그런 
활동을 충분히 사능케 할 정도엿음을 비교적 분명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남조 국가들은 대
대로 백제와의 교류에 열중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백제가 단지 해상활동에서만 두각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흔히 고구려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말타기와 활쏘기가 백제에서도 매우  중시되었다는 주서의 기록은 백제군이  어떤 
방식으로 고구려와 대적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줍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백제인의 기상에서도 역시 고구려에 못지 않은 거친 숨결과  개척정신을 느낄 수 있겠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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