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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1/한국사

한국사 강의록 1

by Frais Study 2020. 5. 5.

제1장 우리는 왜 국사를 배워야 하는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일기와 기록
  여러분은 요즘 일기를 쓰고 있습니까? 쓴다면  얼마나 솔직하게 쓰나요? 혹시 다른 사람
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순간적으로 둘러댄  일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쓰나요?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대목이 정확하기는 한 겁니까?
  요즘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들은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봅시다. 일기장을 매일, 혹은 일 
주일에 한번씩 선생님께 검사받던 그 시절 말입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희미한 기억분이
라면 여드름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사춘기를 떠올려봅시다. 그때 여러분은 아주 정직하게 그
날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던가요/
  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제 일기장이 거짓말 투성이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만약 다른 사람이 제 일기장을 읽었을 때 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도덕성에 심각
한 흠을 남길 수 있겠다 싶은 대목만 아예 빼놓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의 어린시절 일기
장에는 남이 알아도 조금밖에 상관없는 저의 고민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들로 꽉 차 있습니
다.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저는  다른 사람의 일기에 대해서도 자주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특히 책으로 출간된 일기류를 읽다 보면 마치 짙은 화장으로 자신의 기미와 주름
살을 감춘 여인을 만난 듯 연민의 정부터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대개의 경우, 일기는 비밀을 전제로 자신과 관련된 각종 진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가장 솔질한 고백록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공개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는 이기김과 자시
보호본능이 작용할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왜 그토록 심하게 화를 내었는지, 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변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심지어 어떤 사실은 아
예 의도적으로 은폐할 수도 있겠지요.
  개인의 비밀스러운 일기가 그럴진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읽게 될 기록을 남기는 
경우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다행히 자기에 관한 사항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져서 어는 정도 객관적일수 있겠지만, 이제는 
사건을 보는 그 사람의 능력과 성격이 문제됩니다. 
 같은 일을 겪고서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불순한 목적에서 어느 한쪽
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해 말과  기록이 다른 경우도 있지만, 각자  나름대로 겪고 생각한 
바를 사심없이 이야기하는데도 원인과 결과 그리고 향후 대책 등 의견이 많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자시중심적인 사고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는  기혹을 통해 그대로 전달됩니
다. 그런데 역사는 기본적으로 기록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가의 기록과 평가를 맹신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주관적으로 사고한다는 사실, 그리고  객관적이며 종합적인 가호극 신봉하는 
역사가의 분석... 평가 역시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나면, 이제  우리의 
눈은 달라집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의의가 단순히 단답형 끝나지 않
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록과 역사
  우리는 지금 역사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근대 이전의 동양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간단하게 사라고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통을  되살려 요즈음도 많은 대학에서 
역사학과라는 명칭 대신 사학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는 본래 '기록하는 사람'을 뜻하는 상형문자였다고 합니다. 이는 '태사공기'('태사
공이 기록한 책'이라는 뜻으로, 태사공서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사기'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은 중국의 삼국시대라고 한다. 태사공은 사마천을 가리킨다.)를 출인  것이 바로 사기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재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글자의 뜻은 조금씩 
변해 '사람'보다는 '기록'이라는 의미로 더 자주 쓰여졌습니다. 그 결과, 기록하는  사람을 뜻
할 때에는 가나 관 같은 글자를 덧붙여  가가 혹은 사관이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
다. 
  한편, 역사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역'의 뜻은 
'지나다'이므로, '역사'는 '지나간 일에 대한 기록을 뜻하는 셈이 되는데, 사실 이것은 의미가 
중복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록은 그 자체로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것이니까요. 그럼에
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굳이 역사라는 용어를 새로이  쓰게 된 데에는 서양의 Historyfksms 
단어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번역어라는 것이지요.
  History의 어원은 라틴어의 Historea입니다.  Historea는 '쓰다'라는 뜻의  Hi와 '이야기'를 
뜻하는 Storea를 합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를 쓰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중
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사와 같으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구체적
으로 무엇이 다를까요?

       춘추와 춘추필법
  현존하는 동양 최초의 사서는 춘추입니다. 봄과 가을을 책의  이름으로 삼은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춘추는 춘추시대 제후국의 하나인 노나라와 관련된 각종 사건을 날짜별로 기록한 
책입니다. 전하는 말로는 공자의 저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춘추는 역사서라기보다  일종의 
경전으로 취급되어 이른바 오경의 한자리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춘추가 씌어질 무렵에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서 나무를 알맞게 깎고 그곳에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춘추는 매우 간단한 서술이 돋보입니다. 좌씨춘추전과 같은  주석서가 
후대에 필요해진 이유도 춘추의 글이 너무 짧은 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하튼 몹시 제한
된 지면 탓에 춘추는 그저 보고 들은  사실을 짤막하게 가감 없이 기술하는 방법을 썼습니
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읽더라도 똑같은 도덕적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는 그런 내용이었
습니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복잡한 시기였습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주
나라 왕실의 힘이 미약해지자 각지에서 왕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던 봉건제후들이  왕실의 
권귀를 공공연히 부시하던 패자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쿠테타와 같은 하극상이 빈
번히 일어나고, '실리'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각종 타협과 야합이 횡행하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기를 살면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정명과 존왕양이였습니다. 정
명은 명분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고, 존왕양이는 왕을 높이  받들고 도전세력을 물리치자는 
뜻입니다. 
  공자의 이러한 사상은 춘추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대로 적는다'라는 
춘추의 편찬 방침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부도덕한 이들의  행위를 세상에 널리 알려 
뭇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포폄(포상과 
폄하. 포는 칭찬, 폄은 비방을 뜻함.)을 보이지 않는 서술의 기준으로 삼은 셈이지요.
  따라서 춘추에서는 은연중 감상의 윤리가 강조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춘추는 마치 사실
과 도덕의 결합체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춘추의  서술방식을 우리는 흔히 춘추필법
이라고 하는데, 춘추필법은 중국의 송나라 때 성리학을 주도한  주희를 통해 크게 강조되었
고, 우리 나라에서는 명분론이 횡행하던 조선 후기에 맹위를 떨쳤습니다. 
  고대의 중국에서는 정부의 관료가 역사 기록과 역사서 편찬을 전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
리고 정부의 관직 중에는 그 일을 전담하는 자리가 있어, 그 자리를 맡아 일하는 사람을 흔
히 사관이라고 했습니다. 사관은 전문직이었습니다. 춘추가 일종의 역사서이긴 하지만, 전문
적인 역사서는 못 됩니다. 그래서 춘추의 편찬자라고 하는  공자를 일반적인 역사가로 분류
하지는 않습니다. 

       사기와 정통역사서
  전문적인 역사가, 곧 사관이 쓴 최초의 역사서는 사기입니다. 한나랄 무제 때  사마천이라
는 사람이 아버지 사마담의 작업을 이어받아 태초부터 한나라 당시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책
이지요. 사기는 당시로서는 정말 특이한 형태의 역사서였습니다. 본기...표...서...세가...열전 등
으로 구성되었는데, 본기는 제왕의 사적을  시대순으로 기록한 곳이며, 표는 제왕과  제추의 
출생...즉위...중요 활동 등을 요약 기재한 곳입니다. 서에는 예법...형법...음악...경제 등 시대별 
사회상을 적어놓았고, 세가에는 제후에 관한 사항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열전은 신하와 백성 
중 특기할 만한 사람들에 대해 적어놓은 부분입니다. 이러한  체제의 역사 서술방식을 우리
는 보통 기전체라고 부릅니다. 본기과 열전으로 구성되었다는 뜻이지요. 풍부한 정보를 수록
한 사기의 체제...구성과 분향은 이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하는 역사서의 모델이 되었
습니다. 
   기전체는 정치 중심의 역사의식을  철저하게 반영한 서술방식입니다. 맨  앞을 차지하는 
본기라는 단어에서도 짐작되듯이, 제왕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그들의 활동을 전하는 일
에 모든 촉각을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신하들의 각종 행위를 기록하는 데 많
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제왕과 신하, 권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각종 정치적 사건
들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가의 본분이요 역사서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렇
게 보면, 역사서란 일종의 정치 자료...기록인 셈이지요.
  서기 8년에 한나라가 멸망하고, 왕망의 신나나를 거쳐서, 서기 25년에는 광무제가  한나를 
재건했는데, 이를 이전의 한나라와 구분해 보통 후한이라고 부릅니다. 후한의 반고가 아버지 
반표를 이어 전한의 역사를 사기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한서입니다. 한서는 본
기...표...지...열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한서는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사람 범엽이  지었
고, 후한이 멸망한 뒤 전개된 삼국시대의 역사서 삼국지는  진나라의 진수라는 사람이 편찬
했습니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한 왕조가 멸망하고 나면  왕조가 앞선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을 
당연시했는데, 이처럼 국가가 주도해 만든 공식 역사서를 보통 정사라고 합니다. 정사는  모
두 기전체로 되었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기전체는 사안별로 매우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편찬방식입니다. 그러나 일목요연하
게 읽어가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체제와  분향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책이 나오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송나라 때의 사마광은 읽기 편한 역사서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 결과 바로 자치통감입니
다. 역사상 중요한 사건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이른바 편년체의 역사서이지요. '자치통감'이라
는 이름에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는 역사서'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말하
자면 군자의 정치적 교훈서인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치통감은 교훈적이고 실용적인 성
격을 매우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교훈적이기에 다분히 도적 지향적입니다. 그러면서도 편찬
자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원칙을 세우고 있습니다. 즉, 사실 지
향적이지요. 앞서 말한 춘추필법의 영향일 것입니다. 

       동양에서의 역사 개념
  지금까지의 거론한 역사서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징은 이들 
본뜬 후대의 동양 역사서들에서도 똑같이  발견되는 성격입니다. 이제 그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조와 지배자 중심의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
입니다. 춘추, 사기, 자치통감 모두 위정자를  대상으로 했거나 그들을 위해 만든  책입니다. 
또 한서, 후한서, 삼국지, 수서, 당서 등에서 보듯이 한 왕조를 단위로 삼아 역사를 정리했습
니다. 다라서 당연히 정치사 중심의  역사 인식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동양의  역사서에서 
평민에 관한 부분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둘째, 술이부작 정신이 서술의 원칙이었다는 점입니다. '술이부작'이란 '(듣고 본 대로)기술
하기는 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글을 
쓰는데 자기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객관적 서술을 지향하는 태도는 
역사서를 지금 당장 이용하기보다 후손들이 과거의  사실을 정확히 알고 평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어떤 역사적 사
건에 대해 역사가가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고 싶으면 사론을 이용했는데.  사론은 역사가의 
생각을 논술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평론과 유사합니다. 
  셋째, 유교적 역사관이 지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동양의  역사
서는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강합니다. 그리고 역사서를  통해 포폄하려는 의도가 강
합니다. 그리고 역사서를 통해 포폄하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이른바 춘추필법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따라서 동양의 역사서는 그 자체로 교육용 도덕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신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히려는 노력은 크지 않아서 서양의 역사개념과 큰 차이를 보여줍
니다. 

       그리스의 역사서
  서양에서는 헤로도투스(Herodotus)의 히스토리아(Historia)가 가장 이른  시기의 역사서입
니다. 히스토리아는 서기전 492~480년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Persia)  전쟁의 역사를 다루
었는데,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리스(Greece)  소도시연맹이 페르시아 대제국을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인지를 구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책입니다. 
  이를 위해 헤로도투스는 전쟁이 절어진 곳의 지형과 풍물...기후 등을 직접  조사했습니다. 
따라서 그 책에는 페르시아...이집트...그리스,...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한 경험이 다양하게 반영
되어 있습니다. 다분히 실증적인 역사 서술태도이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문학적 설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아서 시대적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
다. 여하튼 서양 사람들은 헤로도투스를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공적을 높이 기
린답니다. 
  헤로도투스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사람으로는 투키디데스(Tukidides)를  들 수 있습
니다. 그는 사람들이 역사를 알면 정치에 많은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에서 히스토리아를 집
필했는데, 이 택은 투키디데스 자신이 경험한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 전쟁사를 주로다
루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싶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서기전 431~404년에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Sparta)와 아테네(Athene)가 벌인 전쟁입니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화와  전설을 배격하고 합릭적으로 각
종 자료를 검토한 것입니다. 따라서 투키디데스는 역사 사실을 초자연적인 사실과 구별하려
고 한 최초의 과락적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경제적인 면을 도외시
함으로써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로마(Rome) 제국의 폴리비우스(Polybius)는  로마가 융성하게 된  원인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역사를 교훈의 원천으로 인식해 역사 지식을 인간  행위의 귀감으로 여겼습니다. 그래
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폴리비우스를 서양 역사에 실용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문헌비판학과 근대사학
  서양 역사에서는 서기 4세기 말 로마 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이후를 중세로 봅니다. 여러
분도 잘 알다시피 서양의 중세는 봉건제와 농노제를 그 특징으로 합니다. 그리고 사회...종교
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가 유럽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역사관도 기독교의 교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락이 신학에 
예속되었다고나 할까요?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기준을 둔 학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학문이 신에 기준을 둔 신학의 영향하에 있었으니 학문 발전에 적지 않은 제약이 가해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은 조금씩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관련
된 각종 사건과 믿음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사료를  수비하고 정리하는 일들이 한
쪽에선 꾸준히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있는  근대적  의미의 역사학은  19세기에 독일의  랑케(Ranke  : 
1795~1886)와 그 제자들이 주장하고  추구하던 것입니다. 랑케는 사료를   경시한 18세기의 
계몽주의 역사가들을 비판하면서 사료를  비판적으로 분석...연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방법론은 17세기의 사료  수집...정리 경향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콩트(Conte : 
1798~1857)의 실증주의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크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역사서 이외에도 회
고록...일기...편지...외교문서 등을 사료로 채택함으로써  사료 부족의 골을 메우려  했습니다. 
그는 역사학의 방법론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말을 남겼는데, 그중 "그것이 본래 있는 그
대로"와 "사실의 엄격한 제시는 역사 서술의  최고 법률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끊임
임없이 연구해 63권의 저작을 남긴 랑케를 서양 사람들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릅
니다. 

       서양에서의 역사 개념
  위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서양의 역사학은 동양과 달리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구명하고 해석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는 점입니다.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 그리고  폴리비우스에게서 확인되듯이 그들
의 역사서 편찬은 개인의 호기심이  학문적으로 확대된 형태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서는 다분히 분석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동양처럼 당
시의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기능을 소홀히 했고, 그것이 오늘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둘째, 문험비판적 역사학이 발달했다는  점입니다. 종말론에 입각한 중세의  기독교사관은 
종래의 순환가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했지만, 개인적 탐구열에 입각한 자유
로운 분석...연구의 기회를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14세기경에 이르러 사람들의 생각이 신  중
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인간의 자유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 동안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했던  각종 서적들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활기를 
띠게 됩니다. 한 대 그 활기에 대한 반작용이 유행을 타기도 했지만, 결국 19세기  이후에는 
과학적 서술을 역사학의 원칙으로 삼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러한 문헌비판학이 역사학을 주
도하고 있습니다. 

    2) 역사의 주인
      역사학의 대상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그 문화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역사학은 인문학의 
한 분야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잇습니다. 인간과 고나련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역사학자의 연구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것
들은 제외하기 때문입니다. 개인 문제에 한정된 활동도 역시 제외하는 게 보통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학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사회적인 활동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지요. 인간
의 사회적 활동이 모두 역사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고 파는 일도 사회적 활동이고, 옆집에 사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활동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역사가의 서술 범위에 들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 그럴
까요? 역사가들은 사회의 변화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활동 중에서도 사회에 변화
를 일으킬 수 있는 활동에 주목하는 것이 바로 역사학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의 실체를 '사실'이라고 합니다. 역사학은 이 사실을 밝히는 일에서부터 출
발합니다. 그러나 밝혀진 사실이 모두  역사서에 수록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 가운데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의미있고 가치있는 사실만을 뽑아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을 우리는 특별히 '사실'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사회적 가
치가 역사학자의 서술기준이 되는 셈이지요, 이는 아마도  '역사=교훈'이라고 하는 관념때문
일 것입니다. 

      역사의 주체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동...서양 모두 "역사는 정치  기록"이라는 인식이 전통적 역
사관을 지배해왔습니다. 이는 기존의 역사가 지배픙 중심의 기록을 일관해온 사실에서 입증
됩니다. 다만, 동양의 경우 유교 경전의 영향으로 백성  혹은 백성의 뜻을 중시햇고, 심지어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아 같이 
주권재민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성이 통치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조
세...군역...요역의 대상이요, 왕을 위시한 지배층의 생활 근거였으므로  무시할 수 없었던 것
이지요, 다시 말하면, 다수 혹은 집단으로서의 백성은 중시되었어도 개별화된 백성은 홀시되
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오랜동안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해온 사관이 하나 잇습니다. 바로 영웅사관입니다. 영웅주의 또는  영웅중심사관
이라고도 불리는 영웅사관은 어떤 한 사람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고, 그에 맞추어 해당 시
대를 설명합니다. 영웅을 시대를 대표하는 일종의 상표로  인식한다고나 할까요? 예를 들자
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와 같은 용어가 그에 해당됩니다. 우리 나날의 경우에는 광개토
왕 시대, 세종대황 시대라는 용어를 지적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나아가서는 조선왕조를  일
컫는 이조라는 명칭도 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이 아주 특별한 공적을 세우거나 특출한 지도력을 발휘했을 때 
그를 부각시킬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  사람도 사회 구성원의 하나이
며, 사회의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개인의  한계를 분명히 전제해야 합니
다. 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도와 조직  그리고 인력 등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영웅사관은 이 점을 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웅사관에는 한 사람이 시대 혹은 사건에 대한 공적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
다. 어떤 전통에서 승리하고 난 뒤, 지휘관 한 사람만 훈장을 받는 등 각종 포상을 독차지하
고 나머지 병사들의 공적이 무시된다면 이처럼 불공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웅
사관하에서는 이런 일이 공공연히 일어납니다. 살수대첩-을지문덕, 귀주대첩-강감찬, 한산대
첩-이순신 등의 역사 인식은 그 대표적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시대 상황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들을 한 사람의  능력으로만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왔
습니다. 거기에는 거대한 물줄기를 연상시티는 그 무엇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
대 개인이 아닙니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 있는 것입니다. 

      민중사관
  영웅사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주목을 받은 것이 이른바 민중사관입니다. 역사의 주
체는 민중이라는 것입니다. 역사 인식의 폭을 녋혔다는 점에서 민중사관은 영숭사관에 비해 
한 단계 발전한 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민
중'의 범위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민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누구를 민주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보총 민중과 
피지배층을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민중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느 
먼저 피지배층의 범위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피지배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주류는 일당 하층민입니다.  그리고 서기에 중류층이 포함
될 수 있겠지요. 따라서 민주이란 보통 하층민과 중류층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말뜻만으로 본다면 대부분의 상류층 역시 지배자는 아니기에 민중과 유리될 수 없습
니다. 크게 보아서는 지배층도 민중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오늘날 자신을 
민중과 무관한 존재로 보는 사람은 없은 것입니다. 
  비록 분명하게 분류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역사상 누구를 민중이라 할 수 있을지 관념적
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중심에는 일반 서민들이 자리하고 잇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제 그들 서민층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그들의 역할을 강조해야 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을수록 한 자기 심각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합니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
이지요, 동...서양 모두 정치사 중심의 역사 지속되는 동안 피지배층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
시피 했고, 그에 따라 민중에 관한 문헌자료가 빈곤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단
편적인 자료를 통해 그들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인데 그나마도 쉽지는 않습니다. 
  설령 자료가 충분하다 해도 역사의 주체를 항시 민중으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인간 사회의 변화에 어느 정도나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점 때문입니다. 현
대 사회에 가까워질수록 민중의 역할은 강조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
록 그들의 덩치는 점점 작아집니다. 왜 그럴까요?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치
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민중은  물론 
소중한 존재이지만, 역사상 그들을 무한정 강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종말론의 비밀-필연과 우연
      기독교의 종말론
  20세기가 끝날 무렵이 되니까 요즘 인류의 종말에 관한 주장 등이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
처럼 제기되고 거의 모든 종교에는 종말에고나한 교리가 잇고 그것이 가끔 사람들에게 공포
감을 심어줍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종말에 가까우면 세상은 악의  세
력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착한 사람들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
다. 그러다 때가 되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악마의 세력들이 그리스도가 이끄는 천사의 군대
와 결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악마의 세력은 영원히 소멸하게 된다고 합니다. 선과 악이  충
돌해 선이 영원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죠, 이러한 줄거리는 이미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예
정되어 있으므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를 믿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기본적으로 역사의 진행 방향을 필연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결정해놓은 각본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는 필
연으로 점철되어온 셈입니다. 삼국 통일은  신라가 이룰 수밖에 없었고, 임진왜란도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겠지요,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과 남북 분단 등은  이미 예정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전쟁의 시발점을 살펴보면 아주 작은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리고 그 사건은 마치 우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의 마차가 우
연히 그 길을 지나던 시민에게 발각됨으로써 루이 16세의 망명이 실패했고, 그것이 결국 일
개 장교에 불과하던 나폴레옹의 황제등극으로 까지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우연한 사건의  파
급효과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물론 이를 우연을 가장한 필연
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필연과 우연을 가늠케 하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무심코 들은 아이의 방  침대 밑에서 수 개월이 지난 
아들의 빵점자리 시험지를 발견한 뒤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원인
이 1년 전에 끊은 담배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갔는데 가게 앞에서 
그 동안 소식을 모르던 동창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근처  술집에서 친구과 술을 거나하게 
마신 남자는 집으로 돌아오던 중 무단횡단하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 많은 대목에 우연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수개월이나 지
난 시험지가 왜 하필 그때 거기 떨어져 있었는지, 그 날따라 아내의 신경은 왜 곤두서 있었
는지, 어쩌자고 그 차는 시내에서 과속을 했는지 등등..........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남자의 죽
음을 숙명으로 여기고 앞서의 과정을 빈큼없이 짜여진 프로그램의 일부로 이해할 수도 있겠
습니다. 

      필연 - 역사의 법칙성
  만약 필연을 믿는다면, 역사의 진행 방향에 대해 일종의  법칙을 적용하려는 시도도 가증
합니다. 맹자라는 책에는 맹자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5백 년마다  새로
운 왕조가 탄생한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왕조의 흥망성쇠가 반복된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이
와 같은 전통 깊은 사관을 우리는 흔히 순환사관이라고 부릅니다. 단순 반복으로 보느냐, 아
니면 나선형으로 진행되는 순환으로 보느냐에 따라 순환사관을 다시 둘로 나누기도 하지만, 
역사행로를 생명체와 동질시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순환사관은 신국으로의 단선 진행이라는 시각에서 역사를 이해한 기독교 사관에 의해  부
정되었습니다. 한 예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직접 목격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류 역
사는 6시대로 구분되는데, (1)아담부터  노아의 홍수까지 (2)노아의  홍수부터 아브라함가지 
(3)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4) 다윗부터 바빌론 유수까지 (5) 바빌론 유수부터 그리스도 탄
생까지 (6)그리스도 탄생부터 최후 심판가지라고 합니다. 
  그대에 들어와서 서양에서는 진보주의사관이 등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고대에서 
중세로 퇴보했지만 다시 근대로 진보했으며  앞으로는 계속 진보만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학에서 진보...퇴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정
신활동과 관련될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철학...문학...예술분야에서 진보라는 용
어는 매우 어색하다고 하겠습니다. 
  진보사관을 수정...발전시킨 것이 발전사관입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발전한다고 보는  입장
인데,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론이 대표적입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란 자유가 확대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고대에는 군주 한 사람만 자유로
웠던 반면, 중세에는 귀족들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그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모든  사람이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기준은 다분히 추상적이어서 명확한 
실체를 제시하기가 어렵고, 구분점도 모호합니다. 보다 분명한 기준은 없을까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마르크스는 경제라는 기준을 찾아냈습니다. 특히 생산수단에 기준을 두어 (1)원시공산체사
회 (2)노예제사회 (3)봉건 농노제사회 (4) 자본주의사회 (5)공산주의사회 등으로 도식화했습
니다. 여기에서 (2)노예제사회는 고대, (3) 봉건 농노제사회는 중세, (4)자본주의사회는 근대
와 각각 대응한다고 하는데, 이 같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유물사관이라고 부릅니다. 경제를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파악했다는 것이지요. 
  마르크스의 이론은 인류 역사의 핵심을 정확하게 찾아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양 역사
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한국...중국 등의 동양  역사
에 적용한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국의 고대는 그리스...로마의 경제체제와는  달
라서 노예가 기본적인 생산을  담당하지 않았으며, 중세 역시  봉건영주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의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동양의 고대를  '아시아적 
생산양식' 그리고 중세를 '중앙집권적 봉건사회'라고 명명함으로써 동...서양간의 차이를 봉합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서양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해 서양은 전형,  한국들의 
동양은 변형이라는 자기비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주목되는 것은 역사의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결국 지구상의 인구 중 절반을 사회주의 체제 속으로 인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적어도 논리의 일관성만큼은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역사학은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학
은 다만 과거에 비추어 미래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것은 또한 시기구분이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과도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4) 국가를 왜 배우는가?
  구사란 자시 나라의 역사입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걸어돈 길을 적
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분노, 성공과 좌절, 진취와 시련  등
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기쁨과 만족, 성공과 진취만 골라내어 가슴 뿌듯해 해서는 안됩니다. 또 슬픔과 분
노, 좌절과 시련 등을 은폐해서도 안되며,  오히려 과장시켜 분한 마음을 갖게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손으로 해를 가리는 일과 같으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습
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을 되새김으로써 보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기 위
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어어야 합니다.  미래는 
항상 불투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길을 되돌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언제나 충분한 사고와 냉
철한 판단으로 자신의 갈 길을 선택해야 나주에 후회가 없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
리는 항상 선택을 강요당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선택말입니다. 자신의 결정을 나중
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최선이 무엇인지를 정화가게  판단해내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국사는 역사의 범위를 자신의 문제로 한정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
습과 같습니다. 내 얼굴에 흉터가 있다고 해서 나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도 거울의  흉터 
부분을 가린다고 해서 얼굴의 흉터가 정확히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양이고 얼마나 깊은지
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흉터가 왜 생겼는지를 곰곰이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분석을 충실히 한 사람은 앞으로 다시는 똑같은 상처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흉터마저 잘 치료해 깨끗한 얼굴, 밝은 얼굴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국사는 차가운 머리로 배워야 합니다.  역사는  사실의 기초 위에 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자신의 희망대로 그릴 수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그림을 그려야 현대의 내 위치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에세 가장 필요한 덕목은 냉철한 판
단력과 분석력을 은연중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확한 좌표를 스스로 구할 수 있
게 될 것입니다. 
  단답형 사고는 금물입니다. 이완용 때문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식의 생각은 
당시의 많은 문제들을 호도할 수 있는 부정확한  판단입니다. 당시 조선의 정치...경제...사회
상 그리고 일본 내부의 정치....경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문제에 답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국사를 배우는 데에는 따듯한 가슴도 필요합니다. 구사는 남의  나라 역사가 아니라 우리 
역사입니다. 내 얘기인 것입니다. 내 얘기를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하게 말할 줄도 알아
야만 하지만, 때론 자랑스러워하고 때론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착심을 함께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국사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모진 풍파를 많이 겪는 우리의 어머니는 그 사이에 한족 눈과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밖에 나갈라치면 가끔은  남의 눈이 신경에 거
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어머니를 속이고 남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일입니
다. 어머니의 초상화를 만들 때, 두 눈을 예쁘게 그려  넣고, 두 다리를 멋있게 그려 놓거나 
긴 치마로 다리를 가리는 방법은 옳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것은 또한 역경을 이겨온 어머니
의 삶 자체에 대한 왜곡...부정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자식들은 모름지기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남다른 여건 속에서 얼
마나 꿋꿋하게 살아오셨는지를 자랑하고, 남다른 자식 사랑을 자랑하며, 음식 솜씨를 자랑해
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짙은  화장으로 화사하게 멋을 낸 다른  사람의 어머니와 비교할 
때, 눈이 성하지 못하고 다리가 성하지 못한 우리 어머니가 최선을 다해 자식들을 남부럽잖
은 어엿한 성인으로 키워온 사실을 자못 반복하지 않는 법입니다. 자부심이 깊은 사람은 그
것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관련해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
야 할 '나라'의 본질과 실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국사를 공부해야 gksekss 것
입니다. 
  근대 이전의 '나라'는 그 자제로 왕조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하늘아래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고,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였기 댐문입니다. 
이때의 '나라'는 개인의 소유화된 영역, 개인의 노예화된 백성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
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 개인의 소유로 인정될 수 있는 '나라'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
코 존해해서도 안됩니다. 단지 시간적...공간적...부문적으로 제한을  밪는 '정권'이 있을 뿐입
니다. 정권은 국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소수가 다수를  대표하여 일할 때 비롯 정당성
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원칙입니다. 그런 점에 볼 때,  이제 우리에게는 '통치'하는 
사람도, '통치받는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정권에 대한 사랑을 나라 사랑과 혼동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애국심 곧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더 멀리 퍼질 수 있을 것입
니다. 
  모쪼록 국사 공부를 통해 여러분의 진정한 애국심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참고문헌>
  박성수, 역사학개론, 삼영사, 1977
  이기백 외, 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삼성미술문화재단, 1976.(문고판)
  이기백... 차하순 편, 역사란 무엇인가, 문하과 지성사, 1978.
  Toynbee(저)...홍사중(역), 역사연구1...2, 동서문화사, 1978.
  고려대 사학과 교수실 편, 역사란 무엇인가, 고려대 출판부 1979.
  E. H Carr(저)...황문수(역), 역사란 무엇인가, 한림미디어, 1996.
  차하순 편, 사관이란 무엇인가, 청람문화사, 1982.
  제등효(저)... 최민(역), 역사와 역사학, 형성사, 1983.
  정구복, 한국인의 역사의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문고판)

  제2장 선사시대이 모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 흙은 살아 있다 - 고고학의 원리
      살아 있는 흙-생토
  요즘 환경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제...산업 발전에만 정신을 쏟
는 사이에 우리 국토의 많은 부분이 오염되었고, 그 결과  우리의 건강은 물론 후손들의 생
활 터전가지 위협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국토의 오염원으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 생활쓰레기와 폐수 등 땅을  병들에 하는 요소들은 우선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땅이 
병든다? 언뜻 보기에 상당히 문학적인  표현인 듯하지만, 이건 지극히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몸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생동감을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
게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 어른으로  자라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표현하면 
세포의 끊임없는 분열과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같은 동물만 그런 것이 아닙
니다. 풀...나무와 같은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체는 모두 세포로 구
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포가 성장 혹은 활동을 멈추면 큰일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생명체가 땅으로부터 생깁니다. 그리고 땅 위에서 생활합니다. 따은 흙알갱이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식물의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흙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동물의 피부
색이 다양한 것처럼 흙의 색깔도 다양합니다. 흙도 변합니다. 먼지가 날아와 모이더니  흙덩
이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흙덩이가 돌이 되기고 합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흙을 생토하고 합니다. '살아 있는 흙'이란 뜻이죠,  생토는 자연퇴적
한 상태의 흙입니다. 그 위에 흙먼지가 날아와 덮이고,  낙엽이 떨어져 쌓입니다. 그것을 받
아들이며 생토인 흙은 마치 세포처럼 성장합니다. 그래서 생토의 색깔도 천연색 그대롭니다. 
생명력이 있기에 탄력이 있습니다. 

      죽은 흙 - 부식토
  인간의 손길이 닿은 후의 흙은 부식토 혹은 부토라고 합니다. '썩은 흙'이란 뜻이죠.  부토
는 마치 활동을 멈춘 세포와 같습니다. 다른 흙 조직으로부터 강제로 이탈되어 생명을 잃은 
흙입니다. 이들은 생명체의 세포가 그렇듯이 급속히 썩어갑니다. 그리고 매생물의 온상이 되
는 것입니다. 생명을 싫고 썩어가기에 부토의 색깔은 검은색입니다. 탄력을 잃어 푸석푸석합
니다. 
  우리가 비옥한 땅이라고 부르는 속은 대부분 부토로 이루어진 땅입니다. 석어가기에 그것
이 자양분이 되어 식물의 성장으로 촉진시키는 것이죠. 농사를 지을 때 가래...삽...곡괭이 등
으로 논밭을 가는 이유는 흙을 썩게 해 그곳에 심을 벼와 보리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입
니다 따라서 비옥한 땅을 만들기 위해서는 흙을 보다 깊이 파서 더 많은 흙을 썩게  해야겠
지요. 이처럼 논밭을 깊이 사는 것을 심경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손길이 거쳐간 자연 재지는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한 부분은 죽음을 맞이합니
다. '흙도 죽는다.........'. 이 원리를 이용한 학문이 있습니다. 바로 고고학입니다. 역사학이 기
록에 의존해 인간의 발자취를 목원하는 학문이라면, 고고학은 남겨진 물건을 이용해 인간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무덤...성곽...살림터...절터 등이 주요 연구대상이죠.
  현행법에 의하면, 어느 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곳에 민족문화유산이 있는지
를 알아보고, 있다면 먼저 발굴을 통해 유적의 성격을 구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개발을 앞둔 
지역을 반드시 고고학의 조사를 거쳐야 하는데 조사 과정에서  토기 조각이라든지 석기, 혹
은 금속기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유물이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주변 일대
에 대한 발굴이 진행됩니다. 
  우선 유적이 폐기된 뒤에 쌓인 자연퇴적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거합니다. 그러면 유
적이 만들어질 당시의 지표면이 드러나는데, 그 중에는 다른  곳과 구별되는 특성을 보이는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흙의 색깔이 다르고, 성질이 다른 곳, 바로 썩은 흙이죠, 부토를 조
심스럽게 걷어내면 유적을 사용하던 당시의 땅 모습이 그대로 복원됩니다. 그리고 복원과정
에서 당시 각종 유물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물론 충분히 교육받은 
고고학자에 의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적이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발굴은 또 다른 파괴다'라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2) 지구와 인간
      지구의 역사
  우리 인간은 지구상의 한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지구는 우주 속의 수없이 많은 행
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죠. 다라서 인간은 지구가 생긴 뒤에 출현했고, 지구는 우주가  탄생
한 이후에 생겼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체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주는 지금부터 약 180억년전쯤에 탄생했을 것이라
고 합니다. 어떤 한 덩어리의 물질이 폭발해 팽창하면서 지금의 우주와 같은 공간이 생겨났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부터 약 45억년 전쯤에 이르면 지구가 탄생합니다.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하는 것은 약 40~30억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방상충...해면과같은  미
생물이 그에 해당하는데, 이들이 나타나 활동한 시기를 시생대라고 합니다. 그러다 지금부터 
약 9억년전쯤에 이르면, 원시 조류, 박테리아 그기로  각종 단세호 동물들이 태어납니다. 우
리는 이때부터를 원생대라고 부릅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부터 약 6억년 전쯤에는 해초와 양
치식물 그리고 무척추동물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고생대이지요. 이무려박지 지구상의 생염
체 중 동물은 모두 물고기류였습니다. 육지동물이 나타나는 것은 지금부터 약 3억 5천만 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약 3억년 전쯤에 이르면 중생대가  펼쳐집니다.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다시 구분되는 중생대에는  활엽수계의 식물과 파충류...양성류...경골어  등이 번성했습니다. 
중생대 말기 곧 지금부터 9,000만년  전쯤에는 대뇌가 발달하는 대신 얼굴이  짧고 한 쌍의 
유방과 손발을 가진 원시 형태의 영장류가 출현했다고 합니다. 
  신생대는 지금부터 약 6,500만 년 전 쯤에 시작되었습니다. 신생대는 다시 제3기와  제4기
로 나뉘어지는데, 지질학에서는 제3기를 다시 고신세, 중신세, 선신세등으로 구분하고, 제4기
를 홍적세와 충적세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출현
  인류는 지구의 지각 변동이 심하고 포유류가 번성한 제 3기의 말기쯤에 출현했습니다. 남
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처음 발견된 '남쪽 원숭이 사람'이 바로 그것인데, 그들의 출현 시기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지금부터  400~300만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물
론 이들에 앞서 라마원숭이처럼 인류의 조상일지도 모르는 존재들이 이미 1,000여만 년전에 
인도...케냐...터키...중국 등지에서 서식한 흔적을 찾을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의 
조상이라는 확증이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화석을 조사한 결과 '남쪽 원숭이 사람'의 두뇌 용량은  평균 약 500cc로 추정되며, 성인 
남자(수컷의 평균 키는 140cm, 몸무게는 52kg으로 추정됩니다. 평균 수명은 11~12살이어서, 
여자(암컷)의 경우 늦어도 7~8살쯤에는 출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쪽 원숭이 사람'이 과
연 현생 인류의 조상인지에 대해서는 의무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화석 구
조로 볼 때 두 발로  서서 걸었으며, 치열이 현생인류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과의 관계를 쉽게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연장을 사용한 듯한 흔적도 역시 우리의 
관심을 끕니다. 
  아프리카의 케냐 지역에서는 지금부터 약 200만 년 전쯤에 해당하는 인류 화석이 발견되
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솜씨 좋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화석 주변에서 석기가 발견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중국 운남성에서도 돌과 나무로 된 도구를 사용했던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대략 170만 년 전 쯤으로 추정되는데, 학자들은 원모인이라는 이름을  붙였
습니다. 
  지금부터 약 180만년 전 쯤, 그러니까 신생대 제 3기  말엽에 이르면 지구의 기온이 낮아
지면서 남극지방과 고산지역을 중심으로 빙하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 4기의 홍
적세에는 한랭성 기후의 영향으로 4~5번의 빙하기가 펼쳐지고, 그  사이 사이에 3~4번의 간
빙기가 찾아옵니다. 빙하기는 지구전체가 얼음으로 뒤엎였던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보다  평
균 온도가 약 17도정도 낮은 상태로서 극지방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에 빙산이 형성되던 시기
일 뿐이죠, 따라서 비록 제한을 받긴 했지만, 각종 동...식물의 번식이 여전히 가능했던 시기
입니다. 

      인류의 진화
  정확한 시기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지금부터 약 100만년  전쯤에는 '곧 선 사람'들이 출
현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곧 선 사람'의 출현 시기를 150만년 전까지 소급
시키기도 하는데, '남쪽 원숭이 사람'과는 한동안 병존했다고 합니다. 뼈의 구조 등에서 현생
인류의 조상임이 분명한 '곧 선 사람'의  초기 두뇌 용량은 성인남자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700~800cc정도이며, 후기의 뇌용량은 1,000cc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인 남자의 평균 키는 
162.5cm, 몸무게는 76.5kg으로 추산됩니다. '곧 선 사람'의 화석 중 대표적인  예로는 50만년 
전에 해당하는 북경원인과 자바원인을 들 수 있습니다. 중국의  남전인은 60만년 전에 해당
하는 인류 화석이라고 합니다. 
  홍적세의 중기 후반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35만년  전쯤에 이르면 '슬기사람'이 출현합
니다. 두뇌 용량이 1,300~1,400cc니까 현생인류와 비슷하며, 골격도 유사하지만, 눈두덩과 턱
이 더 크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타제석기를 사용한 이들은 기둥을 세운 집을 만든 듯하며, 
원시적 종교 관념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이라크의 한  동굴유적에서 시체 위에 꽃을 
뿌리고 흙을 덮은 흔적이 발견되었다든지, 중앙아시아에서 주검 둘에 염소 두개골 6개를 뿔
을 땅에 꽂아 배치한 유적이 발견된 것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슬기사람'의 대표적인 예로는 독일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을  꼽을 수 있습니다. 
20만년쯤에 해당하는 네안데르탈인 관련 유적에서는 실과 바늘을 이용한 듯한 가죽옷의  흔
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 발견되 화석 중에는 정촌인, 장양인, 오르도스 인 등이 
슬기사람에 해당합니다. 북한에서도 '슬기사람'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1972년 덕천 승리산에서 2개의 어금니와 어깨뼈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덕천인'이라고 부
릅니다. 또 1977년에는 평양에서 '역포인'으로 명명된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현생인류와 같은 '슬기슬기사람'은 늦어도 4만 년 전에는 지구상에 출현한 것으로  생각됩
니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크로마뇽 인의 골격이 현재의 유럽인과 유사하며, 두뇌 용량  역시 
1,500~1,600cc로서 지금의 우리들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산정동인, 기린
산인, 유강인 등이 같은 시기의 화석입니다. 북한에서는 덕천 승리산에서  발견된 '승리산인'
의 화석이 이에 해당합니다. 

  타제석기의 사용
  지금까지 소개한  화석은 모두 홍적세에 살다간 인류의 흔적입니다. 이 무렵 인간은 돌을 
연장 혹은 무기로 사용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연 그대로의 돌을 사용했지만, 시
간이 지나면서 돌을 깨뜨려 더 날카롭고 편한 모습으로 바꿀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돌을 개뜨려서 만든 도구를 타제 석기라고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구석기 혹은 뗀석기라고
도 하는데, '곧 선 사람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체로 전기 구석기 시대, '슬기사람은 중기 구석
기 시대, '슬기슬기사람'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인류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시대에 대한 위의 지식은 모두 고고...인류학자의 발굴...조사를  통해 
얻은 것입니다. 또 그중 상상부분은 단순 사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위의 사실들은  필수조
선으로 삼아 유추의 날개를 펼치다보면 의외로 구석기인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타제석기는 대부분 꽤 큼지막합니다. 물론 후기 구석기 시대의 말기
쯤 오면 작고 가는 세석기가 사용되긴 하지만, 그  이전에는 주로 몸돌을 사용했습니다. 1.5
리터짜리 주스 병보다 조금 짧은 크기의 울퉁불퉁한 뾰족한 석기로 그들은 과연 무엇을 했
을까요? 사냥을 했다고 합시다. 무엇을 잡았을까요? 돌의 크기로 보아 꽤 큰 짐승을 잡았을 
겁니다. 만약 토끼나 다람쥐처럼 작고 날쌘 짐승을 잡았다면 석기가 그처럼 클 필요는 없었
을 것입니다. 아니, 절대 그처럼 커서는 안되겠죠. 마침 당시의 자연환경을 조사하고 구석기
인들의 생활유적지에서 발견된 짐승의 뼈를 관찰해보니, 북반구에는 순록...매머드처럼  덩치
가 크고 피하지방층이 두터운 짐승들이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연환견이 석기
의 크기를 결정지은 것이지요.

      구석기인의 생활상
  구석기인들은 순록 혹은 매머드를 어떻게 사냥했을까요/ 아마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을 것
입니다. 그래서 형제들과 같이 움직여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3~4명 혹은 4~5명만으로  순록 
산양이 가능했을까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형제와 그 자녀들,  그
러니까 사촌들까지 포함하고, 그것으로도 일손이 모자라면 6촌...8촌 형제들과도 함께 움직여
야 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리지어 사냥했으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석기 시대에 
30~40명 정도가 함께 생활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단의 규모는 노천에서 생
활할 때가 많았던 구석인들이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에도 효과적이었을 것
입니다. 
  도구가 시원찮은 탓에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오랜만에 사냥에 성공을 했다고 합시다. 한쪽
에서는 사냥감을 몰고, 한쪽에서는 끈으로 짐승의 다리를 잡아채고, 또 몇 사람은  달려들어 
돌도끼를 던지거나 휘둘어서 함께 잡았으니, 당연히 공평하게 나누어야지요. 
  순록 한 마리를 잡았으나, 나누고 보니 각자에게 돌아온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순록만 잡아서야 어디 생활이 되겠습니까?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거나, 아이들을 돌보아야 g
는 사람들은 사냥에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놀아서는 공평하지 않
지요. 그런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먹을 것을 구해야 하겠지요. 근처의 나무열매라든가  그 
밖의 먹을 만한 것들을 채집해야 했을 것입니다. 구석기인들의 생활유적지에서 각종 식물의 
잔흔이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순록이나 매머드는 채식을 하는 동물입니다. 그들이 일정한 지역에서 한동안 생활하고 나
면 먹을 만한 식물은 바닥나고 맙니다. 그들만이 아닙니다. 구석인들도 역시 식물을  섭취해
야 했으므로 한 자리에 오래 머물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석기인들은 그들의 먹잇
감이 있는 곳으로, 다시 말하면 순록이나 맘모스가 움직여  가는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럴듯한가요? 이처럼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마치 탐정처럼 이리저리 상상
하다 보면 어느새 구석기인들의 숨결이 내 손을 스쳐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구석기 유적으로는 공주시 석장리와 웅기군 굴포리, 제천시 점말동굴, 단양군 
금굴과 상시, 제주도 빌레못 등이 유명합니다. 

      세석기의 사용
  지금부터 약 12,000년 전쯤에 이르면 지구의 기후가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후빙기가 시작
되면서 기온이 상승하게 된 것이지요. 날씨가 따뜻해지자 미생물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먹이
사슬이 풍부해지면서 몸집이 작고 재빠른 동물들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작고 째빠른 동물
들을 쥐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크고 무거운 석기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지요. 다라서 
효과적으로 사냥하기 위해서는 사냥감에 맞춘 도구를 개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전에 덩치가 큰 짐승들이 많을 때에는 돌을 깨어 잔편은 버리고 알맞게 다듬어진 핵심만 
골라 썼는데, 작은 짐승들이 번성하게 되자  이번에는 잔편중에서 알맞은 것을 골라내어 사
냥도구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손가락 굵기만한 작고 가는 석기 말입니다. 그래서 세석기입
니다. 잔석기라고도 합니다. 세석기를 주로 사용하던 기를 중석기시대라고 합니다. 
  세석기로 사냥을 한다? 그렇습니다. 세석기를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화살과 창 그리
고 작살 등을 만들어 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가볍고 빠른  동물을 잡으려고 가볍고 빠른 도
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사냥감이 작은  동물로 바뀌고, 또 더 효과적인 무기를  갖추게 
되었으니 사냥방식도 달라져야 하겠지요? 이제는 예전처럼 대규모로 무리지어 사냥할  필요
가 없어졌습니다. 개별적으로 사냥하다 보면  사람마다 능력이 달라 수확에  차이가 나겠지
요? 이제 곧 재산에 대한 다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것, 사유재산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겨나는 것과 함께 말입니다. 
  작고 가는 무기를 사용하다 보니 가끔은 상처만 조금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짐
승을 잡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운 좋게 생포하는 수도 있었을 테지요.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던만큼 그것을 길러 나중에 사냥이 잘 안될 때를 대비했을 법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
축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특히 중석기기대의 생활유적에서 개의  뼈가 자주 다량으로 발견
되는 것은 개의 가축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중석기인들은 대체로 
동굴생활을 했던 것을 알려집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물고기들이 번성했으니, 그냥  두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연히  작살 
등으로 어렵에 나섰겠지요. 그러나 깊은 물에서는 작살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그래
서 개발된 것이 그물입니다. 비록 지금의 그물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세석기인들은  그물
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세석기를 사용했던 시기는 매우 짧습니다. 지역마다 차이가 잇지만, 유럽  일
대를 기준삼을 때, 대략  서기전 9000년경을 전후해 1,000~2,000년  정도 지속되었으니까 그 
긴 구석기시대에 비한다면 찰나라고 할 만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세석기 문화
에 해당하는 뚜렷한 유적을 아직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저 중석기 문화와 관련되었을 개
연성이 높은 유적 몇 군데만 확인된만큼, 앞으로 한 반도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
입니다. 여러분도 강가나 들판을 거닐 때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농경과 문화 - 혁명의 시대
      토기 제작
  짧은 중석기시대가 지나자, 신석기 시대가 왔습니다. 돌을 일정한 모양으로 깨거나 떼어낸 
뒤 그것을 갈아서 만든 석기를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돌을 갈아서 만들었다 하여 간석기 혹
은 마제석기라고 합니다. 마제석기의 사용은 인류가 돌의 성질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재활
동의 개념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부러지거나 날리 무디어진  석기를 다시 갈아 쓰는 
일이 빈번하던 시기입니다.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요소 중 또 한 가지는 토기를 만들어 썼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
든 그릇 가운데 잿물이나 유약을 쓰지 않고 그냥 불에  구운 것을 토기라고 합니다. 지금가
지의 자료에 의하면 토기는 신석기기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토기의 
제작 시점은 곧 신석기시대의 기준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서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대략 서기전 8000년 쯤에는 토기가 이미 제작되었습
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서기전 6000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코기가 제작된 듯합니다.  그
런데 이웃일본에서는 서기전 1만년쯤에 만들어진 듯한 토기가 발견되어 한동안 논란이 일었
습니다. 실제로 그 시기에 이미 토기를 만든 것인지, 아니면 과학기구를 이용한  연대측정에 
약간의 오차가 발생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몇 번에 걸쳐 재검토한 그 연대가 확
실하다면 인류의 토기 제작 및 신석기시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다소 수정되어야 하겠습니
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후대의 토기와 달리 가마 속에서 굽지 않고 노천에서 구웠기 때문에 
그리 단단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릇의  두께가 매우 두꺼우며, 면이  거친 것이 특징입니다. 
그저 저장하는 데 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보통 붉은 색을 띱니다. 노
천에서 구웠기 때문에 산화작용으로 그릇의 색깔이 변한 것이지요. 물론 부분적으로는 연기 
때문에 시꺼멓게 그을은 곳도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입니다. 토기의 표면에 빗금을 돌린 것이지요, 
물론 이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토기도 있습니다. 원시무문토기라고도하는 '이른  민무늬
토기'와 융기문토기라고도 하는 '덧무늬토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은 웅기군 굴포기, 양
양군 오산리, 부산시 동삼동 등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곳으로 서울시 암사동, 하남시 미사리,  양양군 오산리, 무산시 동
삼동 그리고 북한의 온천군 궁산리가 유명합니다. 
  인류가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토기를 만드는 기술에 비한다
면 돌을 갈아 석기를 만드는 기술은 한낱 잔기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만큼 코기는 고도화
된 지식과 기술의 집적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흙에 대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불에 대한 지
식과 기술이 일정 수준에 합치되었을 때, 비로소 토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과 정착생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토기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필요했기 때
문입니다. 무엇이 토기의 발명을 재촉했을까요? 바로 농경입니다. 신석기시대 최대의 혁명이
라고 할 수 있는 농경은  인류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농사는 주로 
돌괭이와 돌삽 등을 이용했습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의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는 탄화
된 '피'가, 그리고 평양시의 남경 유적에서는 탄화도니 '조'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처
음에는 피...조와 같은 잡곡류가 많이 재배된 듯합니다. 농경에는 보통 목축이 수반된다는 사
실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한 곳에 오
래 머물러야 합니다. 이 점이  문화의 급진전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예전처럼  떠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물게 되니,  각종 편의시설을 공들여 짓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변화에 
백없이 순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도전적으로 환경을  변화시키려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문화란  전통위에 
서는 법입니다. 신석기인들의 정착생활은 바로 그러한 전통의 기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
습니다. 전통을 사람의 형질적인 면에 적용했을 때,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나게  됩니
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했던 사람들을 역사상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신석기인들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터전을 한반도와 그 인근지
역에 마련해준 한민족의 조상이라 하겠습니다. 

      움집 건축
  신석기인들은 농사를 지었으므로, 농토 근처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움집을  지었습니
다. 당을 둥글게 혹은 원형에 가까운  네모 모양으로 판 다음 그 위로  나무를 세우고 풀을 
얹어 만든 집이지요, 중앙에는 화덕을 만들고 그 주변에 저장구덩을 만들었는데, 토기와  각
종 도구들이 주로 이 부근에서 수습되었습니다. 출입군ㄴ 보통  한켠의 땅을 골라 계단모양
으로 만들었으며, 간혹 나무 사다리를 이용한 흔적도  발견되는데, 남향이 일반적입니다. 출
입구 근처에 저장구덩을 만들어놓은 곳도 많습니다. 
  신석시시대의 주거지는 보통 강가나 바닷가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신석기인들이 물과 싶
은 관련 속에서 생활했음을 의미합니다. 농사를 지시고, 어렵을 하는 일 등이 우선적으로 그
에 해당할 것입니다. 바닷가에서는 흔히 패총이라고 부르는 조개더미가 많이 발견되는데, 그
들이 한곳에 오랜 동안 거주하며 조개류를 많이 섭취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일종의 쓰레
기장이지요.
  강가나 바닷가는 모래 성분이 많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신석기인들은 다른 
속보다는 수월하게 집을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주로 스던 
빗살무늬토기는 바닥이 뾰족하거나 둥글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밑둥이  뾰족하거나 둥글기 
때문에 맨바닥에 그냥 세워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토기를 대체 어떻게 사용했을
까요?
  아마도 토기의 밑둥을 땅에 묻어 세워놓은 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냥 땅바닥을 파고 음
식물을 저장하기보다는 구멍에 토기를 끼워 세우고 그 안에 농산물을 담아놓은 것이 곤충...
습기 등의 피해로부터 식량을 지키는 좋은 방편이 되었을 것입니다. 구멍을 파는 일은 모래 
성분의 흙바닥이기에 어렵진 않았을테지요. 그만큼 신석기시대의 뾰족밑토기는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을 우리에게 함축적으로 전해줍니다. 
  한편, 뾰족밑 토기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단단하지 않은  그릇의 경우 억지로 바
닥을 편평하게 만드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기벽을 한 곳을 모아 뾰족하게 처리하는 것이 그
릇의 수명을 늘이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농사를 지으면서 신석인들은 기후와 같은  자연의 섭리에 더 민감해졌을  것입니다. 특히 
해의 소중합과 비의 필요성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겠지요.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생
명이라는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산이나 나무,  강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무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오늘날처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터전 주변에 만들어졌습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이 같이 지내는 것이죠. 또  사람을 묻을 대에는 머리를 동쪽이난  동남쪽으로 두는 풍습이 
있었던 듯합니다. 아마도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요. 이러한  사실
은 신석인들이 영혼의 불멸을 믿고 이었으며, 나아가 조상숭배의식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
한다고 하겠습니다. 
  조상숭배의식은 혈연에 입각한 집단화를 수반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무렵 씨족 혹은 부족 
단위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것은 신석기인들의 주거지가 취락을 이루었으
며, 몇 개의 취락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는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
하면, 씨족은 같은 조상을 모신 직께의 혈연집단이며, 부족은 혼인 등을 통해 씨족과 씨족이 
결합해 공통의 언어와 신상을 지니며 나중에는 같은 조상을 숭배하게 되는 지연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상은 대부분 특정한 동...식물과 연관되어 매우 미묘한  신앙 
내지 관념을 형성시키는데, 이를 토테미즘이라고 합니다. 가령,  어떤 부족에서는 소나 말을 
자기들의 조상과 연관시키고, 어떤 부족에서는 범이나 늑대를 수호신으로  믿는 것 등이 이
에 해당합니다. 
  이상, 신석기시대의 문화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추측에만 의존한 것이 아닙니다.  19~20세
기에 활발히 활동했던 서양의 인류학자들이 아직도  원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가지의  씨
족...부족사회를 조사한 결과와 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에 다른  것입
니다. 비록 한계는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수천 년 전에 일어났던 상황을 현존하는 다른 사회
를 통해서 추정해본다는 것이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문화란 무엇인가? - 진화론
  문화를 아주 단순하고 간략하게 정의히면, 어느 한 인간 집단의 생활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앙...예술...법률...도덕...관습...상식 등이 모두  문화의 한 부분인 것입
니다. 문화는 공유되며, 학습되고, 축적되며, 변화한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
면, 취락을 이루고 부족 사회를 형성시킨 신석시대는 문화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
을 것입니다.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 동안 연구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문
화인류학자들입니다. 그들 중 현대 인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궁의 타일러를 비록해 19
세기에 활동한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문화는 진화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의 경
우에는 '에니미즘 ->(주술) ->다신교->일신교'로 발전하며. 가족제도의 경우에는 '난혼->혈
연가족->집단혼가족->대우혼가족->가부장제->단혼제'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진화
론자들은 첫째, 모든 문화는 저차원->고차원, 단순->복잡, 불완전-> 완전으로 진화하며, 둘
째, 단선...보편적 발전의 형태를 취하고, 셋째, 발전 속도에 차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해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종교...윤리 등 사상적인  분야에서도 
발전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 그리고 문화가 지역...종족마다 매우 다양하다
는 사실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 등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당시 서구인들이 지
녔던 편견과 자민족중심주의를 학문에 반영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0세기 포반에 들어서자, 진화론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미국을 중심으로 독자적 기원론
(역사적 특수주의)이 제기되었습니다. 일종의 창조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은 문
화그들은 문화는 인종이나 지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집단의 특수한 역사적 배
경에서 생성되고 역사과정에서 변화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이 일제시기의 우리 나
날에 영향을 주어 일본 제국 주의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조시키고 표현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자적 기원론은 진화론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서는 유용하지만, 문화의 복
잡성과 유사성을 설명하고 효율적인 이론 틀을 세우는 데에는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파론
  진화론의 대안으로 제기된 이론으로는 전파주의가 있습니다.  문화란 특수한 환경에서 단 
1회 발생하며, 시간적으로 앞서고 질량면에서 우세한 문화가 사방으로 전파...차용되어  다른 
지역의 문화를 형성한다는 이론입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농경'을  중시해 고대 문화의 기원
을 이집트에서구하려는 견해가 제기되기고 했는데, 이에  동조한 사람들을 이집트 학파라고 
합니다. 
  반면, 세계를 여러 개의 문화권으로 나누고, 문화권마다 중심부와 주변부를 설정해 문화의 
일방적 전파...차용을 상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전파주의는 우리에게 국제적인 넓은 시야에
서 문화를 이해할 것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 그 기여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현상 배후의 시대...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려한 것 같지  않습니다. 
문화가 전파될 때 왜 모두 수용되지 못하고 거절당하거나 변형되는 것들이 생기는가하는 문
제에 대해서는 답변이 궁색하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모양이지만 지역에 따라 기능과 의미가 
다른 것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전파론은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또모든 문화
가 중심부에서만 발생한다는 시각은 인간의 문화창조 능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시각을 문화사대 주의를 유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제
국주의적 시각을 문화에 적용한 결과하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능주의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자, 기능주의에 입각한 해석도 나왔습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회제
도와 문화요소는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분으로서 각기 적절히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기
능주의를 제창한 말리노프스키는 개인의 심리적 욕구를 중시해, "문화란 사회구성원인 개개
인의 심리와 생리적 욕수를 충족시키고 그 결과가 분배된 뒤에는 상호간 교환을 거켜 소비
가 이우러지는데 바로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효율적으
로 통제하기 위해 각종 조직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매력적인 설명이지만, 의문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문화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인 변화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능주의가 시간이라는 요소를 경시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문화요소의 복합적 기능에 대한  고려가 미흡하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습니다. 물론 구조기능주의라 하여 이에 대한 보완적 성격이  강한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
지만, 아직 의문점이 다 해소되었다는 말할 수 없습니다. 

      형사취수혼과 문화이론
  이상, 인류학의 중요 이론을 몇 가지 소개했습니다만, 간략히 설명하는 바람에 이해가  쉽
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위의 3가지 이론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
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형사취수혼이라는 매우  특이한 관습이 있습니다. 형
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혼인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례에 대해 진화론의 입장에서는 강시의 고구려 사회가 적장자 상속 단계로 발전하
기 전의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사회의 상속문화는 집단 상속에서 
형제상속을 거쳐 부자 상속으로 발전했는데, 당시 고구려는 형이  자기 여자를 재산과 함께 
동생에게 물려주었으니 형제상속 단계에 속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파주의적 입장에서는 북방사회 문화권의  소산으로 이해합니다. 중국측의  고대 기록에 
따르면, 형사취수혼과 같은 관습이 고구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부여...고구려...흉노...
선비 등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했던 북방민족 사이에는 이와  유사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
를 들어 흉노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과 생모를 제외한  나머지 
첩들을 모두 자시 여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형태와 모양만 다를 뿐, 여자를 재산으로 인식하
고 상속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기능주의적 입장에서는  자기 집단의 인적...물적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합
니다. 즉 목축 사회의 경우, 남편이 죽고 나면 부인이 자녀들과 재산을 이끌고 자기의  친정
집단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의 집단은 대단한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
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망인에게 새 남편을 제공함으로써  집단의 재산을 보호하고 안
정을 모색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세 이론  모두 그럴듯합니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아직도 
갈증이 해소되진 않았지요? 왜 그런지는 여러분 스스로 고민하면서 직접 찾아보는 것이 좋
습니다. 

    4) 권력과 약탈 - 국가의 탄생
      청동기의 사용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만들면서 불을 다루는 기술을  향상시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는 700~800도에 이르는 고열을 낼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우연찮게도 청동이라는 매우 귀
중한 금속을 얻을 수 있게 된 듯 합니다. 청동은 구리에 비소라든가 주석, 아연과 샅은 이물
질이 섞여 더 단단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지중해 해안에서는  서기전 3500년경에 이미 청동
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서기전 1000년경에야 비로소 청동
기시대를 맞이한 듯합니다. 물론 이 연대는 개략적인 추정치에 불과하므로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만주와 그  인근지역을 포함해 우리의 청동기시대
가 서기전 15세기까지 소급된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청동기시대라고는 하지만 모든 도구가 청동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아닙니다. 각종 농기구
와 공구는 여전히 석기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돌괭이, 돌삽, 반달 모양 돌칼, 돌도끼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석기입니다. 
  청동기는 주로 무기와 의기에 한정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청동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던 탓
도 있지만, 청동이 단단하지도 않아서  나무를 베거나 땅을 파는 일에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청동도끼라든가 낫, 칼 등은 공구가 아닌 살상용 무기로  보아야 
합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그것을 계승한 세형동검, 동모...동과 그리고 
동경...동령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비파형동검을  비롯해 무기류가 많이 만들어진 것을  보
면, 이 시기에는 크고  작은 전투...전쟁이 집단간에 빈번히  발생했던 모양입니다. 집단간의 
전쟁은 승리와 패배, 우위와 열등, 지배와 피지배의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단군신화에 
나타난 선민사상은 바로 그러한 상황의 반영이라 하겠습니다. 
  청동기시대에도 토기는 계속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의 대표적 토기는 민무늬토기인데, 신석
기시대의 토기보다 높은 온도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더 단단하며, 그릇의 두께도 얇습니다. 
그릇의 모양은 매우 다양하지만 밑바닥은 편평하고, 색깔은 적갈색인 것이 많습니다. 

      지석묘와 취락
  제작 기술이 향상되고, 품목이 늘었다는 것은 사회와 문화가 그만큼 복잡해졌음을 의미합
니다. 그 예로서 청동기시대로 들어서 농업과 수공업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
다. 이 사실은 유적의 발굴을 통해 알려졌는데, 청동기 제작지가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전문 
집단이 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업의 분화, 곧 전문직의 출현은 소유의  격차를 
유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인간 신분의 차별화를 유도합니다. 계급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계급은 권력의 기반하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생전에 누리는 것이지만 죽은 뒤에도 
과시할 수 있습니다. 무덤을 통해서이지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로는 지석묘와  석관
묘를 들 수 있습니다. 특히 고인돌이라고도 하는 지석묘는  권력을 지닌 지배층의 무덤으로 
많이 사용된 듯합니다. 
  지석묘의 형태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서 일괄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보통 
4개의 지석과 1개의 개석으로 조성된 북방식(탁자식) 지석묘의 경우 돌의 무게가 수십 톤에 
달하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개평현 허가둔에서  조사된 지석묘는 개석의 무게
사 무려 70톤에 달하며, 길이는 8.4m, 폭은 5.6m에 달하는 대형입니다. 이런  지석묘를 만들
려면 적어도 수백 명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묻기 위해서 말입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는 조...피...콩...수수...보리...벼와 같은  곡물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
다. 그리고 돼지...소...말 등을 가축화한 흔적을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농업의  발
달은 남성의 역할을 증대시켜 여성 및 모계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 내지 부계 중심의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계...모계사회의 구체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더 필요하며, 또 신석기시대를 모계사회, 청동기시대를  부계사회로 
일반화시키는 것도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으로 더 싶이  연구해 밝혀내양 할 부분입니
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주로 야트막한 구릉에 취락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근에는 
하천이 있어 식수와 농업용수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취락을 둘러싸고 목책
이나 호를 조성해놓은 곳도 있습니다. 아마도 맹수 혹은  다른 집단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취락의 구조를 살펴보면, 개인의 주거공간 외에도 대형 
창고와 공동작업장 그리고 집회용 공공건물로 판단되는 대형 건물들이 취락의 중앙부나  한
쪽에 지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건물마다 각기  다른 유물이 발견되는 것은 해당 
유물이 그 건물의 성격을 대변하기 때문이겠지요.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평면 형태가 일반적을 원형이었던 데 반해 청동기시대에는 장방형이 
일반적이었습지다. 화덕이 한쪽 별 근처로 물러나고, 저장구덩도 한쪽에 큼지막한 자리를 차
지하게 된 것도 달라진 풍경입니다. 저장할 물건이 많아서인지  아예 부속건물을 만들어 딸
린 방 혹은 저장공간으로 쓴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수 목적의 대형 주거지를 제회하고 대부
분의 주거지는 대략 5~6명 정도의 인원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크기여서, 기본적으로 핵가족 
내지 직계가족의 생활형태를 취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가조직의 탄생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청동기시대의 특징은 권력과 계급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은 곧 국가조직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국가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시대마
다 그리고 연구자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릅니다. 고대와 중세에는 국가는 모두 신의 뜻에 따
라 창조되거나, 신을 대신한 영웅에 의해 건설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
대에 들어와서는 국가도 인간 역사의 진전에 따른 자연적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팽배
했으며, 그러한 인식을 입증하기 위해 몇 가지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계급국가론입니다. 원시공산체사회가 기술...문화의 발전에 
따라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사회로 발전하게 되면 소유의 격차로 인해 평등한 인간관계가 깨
어지면서 계층내지 계급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불평등 관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고 
그 관계를 조직화한 것이 바로 국가라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란 사회...경제적 우위 
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서, 사회가 모순에 빠지고 분열되었을 
때 출현하는 일종의 권력결집체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집단간의 전쟁과 그를 통한 정복이 국각조직을  형성 시켰다는 입장도 있습니
다. 이른다 정복국가론입니다. 이웃 집단과의 약탈전쟁이 지배, 피지배의 관계를 성립시키게 
되고, 그것이 곧 계층화를  초래해 국가 형성의 요인이 되었다는 이론이지요, 그러나 정복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복집단 내부의 사회구조라든가 정복활동의 원인과 동력에 대해서
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계급국가론과의 연계성에서 정복국가론
을 이해할 때 국가의 형성 과정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여하튼 국가는 기본적으로 일정한 영역과 조직(관료...군대), 제도(법령), 수취체계(조세) 등
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자가 꼭 필요한 법입니
다. 청동기시대 문자 출현이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역사현상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 점을 웅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아직 이 시기에 독자적인 문자를 창안해 사용한 흔
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중국의 한자를 차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신 당
시의 자연환경과 자신들의 생활상 그리고 각종 기하학 무늬를 마치 낙서하듯이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을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중 특히 고령군 양전동과 울주군 반구대의 
암각화가 유명한데, 아마도 수렵...어렵...농경의 무난함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담
겨 있는 듯합니다. 

      철기의 사용
  철기를 처음사용한 사람들은 지중해 연안의 히타이트 족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늦어어  서
기전 1000년경에는 이미 철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보다 
늦어 서기전 300년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서력기원 이전에
는 세형동검과 같은 청동기를 여전히 사용해 온전한 철기시대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따라
서 서기전 300~0년 사이를 보통 초기 철기시대라고 합니다. 
  철기 제작은 그만큼 불을 사용한 기술이 발전했음을 의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동기와 
마찬가지로 초기에 제작된 철기도 그리 단단한 것은 못되어서 사용하는 데 제한이 따랐습니
다. 가령, 쇠도끼의 경우나중에 단조철부가 제작되기까지 거푸집을 이용해 만든  주조철부로
는 큼지막한 나무를 베기조차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의 쇠도끼는 우선적으로 무
기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철기 제작은 1,000도가 없는 고열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청동을 만들 대보다 어려운  일입
니다만, 재료를 구하기가 훨씬 쉬워서 대량생산이 가능하는 이점이 있습니다. 특히 종래  석
기를 사용했던 농경 부분에서는 땅을 더 깊고 넓게 파면서도 힘은 덜 들게 하는 철제  농기
구를 이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같은 인력으로 더 많은 땅을 경각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자연그럽게 생산력이 상승했습니다 생산력의 상승을 통해 얻은 잉영생산물이  군량
미로 이요되는 경우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장기간의  전쟁이나 원거리 정복을 가능
케 했으며, 그를 통해 국가  형성과 통합...발전이 더욱 촉진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대규모 고대국가의 출현은 모두 철기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김정배, 한국민족문화의 기원, 고래대락교 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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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론12-한국의 고고학1, 국사편찬위원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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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룡, 한국고고학개설, 일지사, 1986.
  이선복, 고고학개론, 이론과 실천, 1988.
  최몽룡, 재미있는 고고학 여행, 학연문화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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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복...이문웅...김광억, 문화인류학개론, 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제3장 신화와 실제 역사는 다른 것인가?
  신화란 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언뜻보면 그것은 역사학과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과 유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가가운 존재입니다. 고대...중세의 신은 더욱 그러합니다. 특히 고대의 사람들은 신과 인간을 
자주 일치시켰습니다. 그리스의 올림푸스 이야기, 중국의 삼황오제 이양기 등은 모두 신  같
은 인간, 인간 샅은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들 신화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신들의 각종 활동을 통해 고대의 자연환경과 고대인들의 생활방식 그리고 그들의  보편적인 
인생관...역사관...자연관 등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사고방식만을 반영한 것은 신화가 될 수 없습니다.  신화란 사회적 의식의 반영이
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의식은 사회 공통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됩니다. 사회 공통의  경험
과 의식, 그것은 역사학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에서 신화는 사료의  하나로서 
존중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건국신화입니다. 신화 속에서 신인 혹은 성인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장면은 그 나라의 건국배경  뿐 아니라 신화를 만든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단군신화 - 고조선
      고조선과 조선 - 위만의 고향
  고조선이라는 국가명칭이 처음 기록된 곳은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
의 승려 일연이 쓴 책입니다. 그 책의 기이 편 첫머리에 고조선이라는 제목이 나오고,  이어
서 그에 관한 역사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000년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사람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
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부르니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때이다"라고 했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지상세계에 내려가 사람들을 잘 다스리고 
싶어하니 아버지가 그 마음을 알아채고 천부인 3개를 주며 허락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천
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세웠다. 환웅천왕은 풍백...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의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사람
들을 교화시켰다. 그 무렵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동굴에서 살았는데, 항상 신웅에
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심지와 마늘 20매를 주
며 백 일동안 해를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곰과 범이 받아 먹었는
데, 곰은 삼칠일을 잘 지내 여자가 될 수 있었으나, 범은 참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
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자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임신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
람으로 변해 혼인하여 아들을 낳게 하고 단군왕검이라 했다.  단군완검은 중국 요임금 즈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서 조선이라 칭했으며, 나중에 백악산의 아사달로 도읍을 옯
겼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이 지났을 때, 주 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니, 단
군은 장당경으로 옯겼다가 나중에 돌아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 1,908세까지 살았다."고 
했다. 
  위 내용에 의하면 고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함께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그것은 고
조선 항목에 이어 위만조선 항목이 나오는 데에서도 입증됩니다. 그러니까 '고조선이란 위만
의 '조선'이전에 존재하던 '옛날의 조선이라는 뜻이 담긴 명칭인 것입니다.  삼국유사에서 이
처럼 단군...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한 이유는 위만이  중국 사람이므로 그 이전의
조선과 국가 성격이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조선전에 따르면, 중국의 연나라 사람위만이 진...한 교체기의  전란
을 피해 무리 1,000여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가니, 조선왕 준이 그에게 서쪽 변경의 수비
를 맡겼는데, 그곳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서기전 194년에 정변을 일으켜 수도인 왕검성을 
급습해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왕은 남쪽으로 내려가 한황
이 되었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위만은 중국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곰곰히  따
져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인접했던 연나라와 조선은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충돌이 잦은 편이었지
요. 그러다가 연나라에 소왕이 재위하던 무렵(서기전 311~279)에 진개라는 장군이 이끄는 연
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조선은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휴유증으
로 국력이 많이 미약해졌다고 합니다. '2천여 리'라면 매우 넓은 땅이지요. 그런데 조선이 어
디 그 땅만 빼앗겼겠어요? 그 넓은 땅에 살던 사람들도 함께 연난라의 백성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연나라는 중국의 변방지역으로서 주민 구성이 매우 복잡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따라서 사기의 연나라 사람 위만이라는 문구만으로 위만이 종족적으로 중국 사
람이었는지, 아니면 중국따에 살던 조선 사람이었는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기에는 위만이 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의 옷을 입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조선인의 풍속을 따랐다는 것인데, 위만이 조선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휘애서  일
부러 다른 민족의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자기 모국으로 돌아오면서 원래
의 복장으로 갈아 입었다는 뜻인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앞서의 시대상황과 준왕이 처음부터 
그를 매우 신임한 실에 비추어 보면 원래의 복장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위만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조선이라는 구로를 계속 하요한 점이라든지,  나중에 
볼 바와 같이 위만전권하에서도 여전히 토착인 글이 고위직을 차지했으며, 세형 동검문화를 
계속 이어나간 점 역시 위만이 조선 사람이었을 개연성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만정권 이전의 조선과 이후의 조선을 따라 분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
나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여전히 매우 유용한 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조선과 근세의 
조선을 구분하는 명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고조선'은 바
로 그러한 구분점으로서의 편의적 명칭일 뿐입니다. 

      단군신화의 형성시기
  다시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돌아갑시다. 삼국유사는 '위서'와  '고기'를 인용해 단군신화를 
소개했습니다. 해당 기사의 공신력 높일 수  있는 방법이죠.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
다. '위서'와 '고기'가 과연 어떤 책인지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위서라는 
제목의 역사서가 몇 번에 걸쳐 제작된 적은 있습니다. 그중  어떤 책은 지금 전하지 않지만 
남아 있는 책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군조선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물
론 '위서'를 우리 쪽의 역사서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그럽게도 그런 책은 아직 확
인할 수 없습니다. '고기'는 더욱 이상합니다. 그것이 책 이름인지, 아니면 '옛날 기록'이라는 
뜻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문점 때문에 한때 단군신화를 몽고항쟁기에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만든  이야
기고 치부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환인과 같은 불교식 명칭이 차용된 것이라든지, 단군
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즉위했다고 하여 역사의  유구함을 드러내려 한 것 등이 바로 그 
증거라고 지적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신화의 내용을 살피다 보면 거기에 얼마나 오랜 동안 
인간이 겪어온 경험들이 반영되어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단군신
화의 내용의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봅시다. 

      신화의 상징성
  환인은 인도의 신 이름을 한자로 옮긴 석제환인타라에서 따온 것으로 천제 혹은 태양신을 
불교식으로 바꾼 칭호인 듯합니다. 신화는 원래 구전되어오던 것을 나중에 채록한 것이므로, 
채록할 당시의 용어가 많이 차용되는데, 단군신화의  경우에도 고려시대에 채록되면서 당시
의 국교인 불교의 영향이 반영된 거이라 하겠습니다. 신화의  이러한 속성을 보여주는 대표
적인 사례로는 제왕운기에 실린 단순신화를  들 수 있습니다. 1287년  편찬된 제왕운기에는 
단군신화가 유교식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상의 줄거리를 소개하면, 상제 환인의 서자 단
웅이 귀신 3천을 이끌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뒤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으로 만든  다음 
단수신과 혼인시켜 단군왕검을 낳게 했다는 식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부 조에도 비슷
한 내용이 있습니다. 무릇 신화는 세월 따라 이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신단수는 수목숭배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애니미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곰
과 범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과 범을  토템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일 
수 있으며, 환웅 역시 천신족을 자처하는 집단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물론 곰에 대한  숭배
는 동북아시아 일대에 광범위하게 퍼진  의식이므로 어느 한씨족의 상징으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곰을 숭배하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환웅이 거느린 풍백...우사...운사는 기후를 주관하는 신입니다. 특히 비와 관련된 신들이지
요. 비는 해와 함께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쑥과 마늘은 농경문화의 잔편을 반영
한 것으로 볼수 있겟습니다.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다면서 곡식을 가장 먼저 열거
한 것도 농경문화의 반영으로 생각됩니다. 백일 동안 해를 보지 말라고 한 것이라든지 삼칠
일 만에 곰이 여자가 되었다는 것을 갓난아잉 대한 어른들의 금기와 우려를 달리 표현한 것
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단군신화에는 신석기시대 이래의 경험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단군의 
자손은 곧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이래의 계급의
식이 작용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중세인 고려시대에 창작된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낡아 보입니다. 
  그런데 중국 산동성 가상현에 위치한  무시사당의 화상석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우리의 누길을  끕니다. 물론 내용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어ㅓ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다른 신화를 형용한 것이라 하더라도, 과거 동이
족이 활동하던 지역에 동이족을  대표하는 집단(조선)의 건국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신화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목받기에 충분합니다. 석실로 된  무시 사당ㅇㄴ 서기 147
년을 전후한 무렵에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단군신화는 청동기시대에 고조선이 형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여주는 건국신화임에 틀림없습니다. 고조선은 농경 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회였으며,  제정
일치의 사회엿을 것입니다. '단군'은 무당을 의미하고,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무당을 고상하게 표현하면, 제사장이지요. 따라서 단군왕검은  제사와 정치가 한 사
람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나온 명치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와 정치가 따로 분
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지배자가 바로 단군황검이라는 것입니다. 

      한 제국과의 전쟁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중국측에 오히려 더 많이 전합니다. 특히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 조
선과 한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를 살았던 사마천이 남긴 기록이기에 매우 자세
하고 생생합니다. 주로 서기전 109년에 양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
과를 기록했는데, 그것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조선의 우거와은 주변의 진국 등이 중국과 교통하려는 것을 자꾸 막을 뿐 아니라 한 나라
에 대해서도 제후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양국간의 몇 가지  사소한 다툼을 계기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한나라의 무제가 보낸 5만여명의 군대는  한 차례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했고, 1년 가까이 대치 상태를 거친 뒤 서기전 108년에 내분을 
이용해 조선을 멸말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그곳에 4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에 앞서 한나라 군대와 조선의 군대가 대치할 때, 조선에서는 태자를 화의 사절로 보내 
말 5천 마리와 군량을 바치려 했으나, 태자를 수행하던  만여명이 지닌 무기를 처리하는 문
제로 국경인 패수 근처에서 시비가 일어 그만 평화제의 가 무산된 덕이 있다. 
  지나치게 간추린 내용이어서 입체적인 전달은 불가능하지만, 조선의 수도가 왕검성이었고, 
중국과의 경계를 이루던 것이 패수였다는 단순 사실만큼은 분명히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또 
태자의 사절단이 만여명에 달했으며, 말 5천 마리를 한나라에 보내려 했을 정도로  인적...물
적 자원이 풍부하고, 군사 기반이  튼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상...니계상...상...장군...대신 등 다양한 관료조직을 암시하는 명칭들을 자주 접할 수도 있습니
다. 
  한서 조선전에도 사기와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지리지에 낙랑...임둔...현
도...진번 등이 이른바 한사군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어, 조선 멸망 이후의 상황을  추정
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사람들을 교화시킨 
이야기를 전하면서 당시의 형법 8개 조목 가운데 3개  조목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그 즉시 사형에 처하고,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 배상하게 하며, 도둑질한 자는 노
비로 삼되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50만(전?)을 물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이 적용된 
시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고조선의 사회상과 문화 수준의 단면을 알려주는 매우 유용
한 자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에도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합니다. 
그중에는 위략이라는 책을 인용한 부분도 있는데 그곳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 연나라의 베
후가 스스로 왕을 칭하며 조선을 치려 하자 조선의 제후로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연나
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조선의 대부 예가 설득해 두 나라 모두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연
나날의 제후가 왕을 칭한 시기는 역왕 때이니, 서기전 332~321년경입니다. 그리고 그후 소왕 
대인 서기전 311~279년 사이에는 연나라의 장군 진개가 군사를 이글고 고조선을 공격해 2천
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조선왕 부는 진나
나라가 습격할 것을 걱정해 진나날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
의 부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의 아버지입니다. 모두 서기전 4~3세기경 고조선의 군
사력이 매우 강했음을 암시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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