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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1/한국사

한국사 강의록 4

by FraisGout 2020. 5. 5.

      주체적 군사활동
  신라의 삼국통일은 군사적 측면의 매우 효율적인 전략...전술에  기인한 바도 적지 않습니
다. 국내...외 상황에 대한  신라의 능동적 대처는 비단외교  부분에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진흥왕 12년(551)에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 죽령 이북지역을 탈취했고 깉은 왕 
14년에는 백제와의 연맹을 파기하며 한강 하류역에 진출했는데, 이로써 신라는 정치...경제...
군사...문화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대 신라인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물
론 실리였습니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에 고구려와의 관계는 비교적 
운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김춘추가 고구려에 억류되었을 때에는 김유신이 
1만여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위협함으로써 무사히 귀환시키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습니
다. 
  신라의 실리에 입각한 능동적 전쟁...외교 수행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뚜렷하게 부각되었
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가  야욕을 드러내자마자 신라는 과감히  당나라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 태종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전쟁이 신라의 본의
가 아니라는 뜻을 끊임없이 당나라에 전달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공손하고 겸손한 태도였지
만,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강렬한  투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신라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호국의지
  신라 사람들의 호국의지와 자신감 역시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라 불교
의 특징인 불국토 사상을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했지만, 구체적인 사례로는 선덕왕 14
년(645)에 승려 자장의 건의로 창건한 활용사 9층 목탑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황룡사 9층 목캅은 9한의 복속을 기원한 것인데,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
을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9'라는 숫자는 보통 '많다' 혹은 '극을 의미하며 중구의  선진 시대에는 천하...세계를 
의미하기도 했으니, 황룡사 9층 목탑은  결국 신라 중심의 세계관...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신라 사람들의 자신감은 통일  이후에 오악 정신으로 구현되었습니다.  국토 안에 
있는 명산 중 5곳을 지정해 국가적 제사를 지낸 것인데,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 남
족의 지리산, 북쪽의 태백산 그리고 중앙의 부악을 가리킵니다. 5악은 국토를 굳건히 지키고
자 하는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신라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의 분출이며왕권의신성함을  만방
에 과시하는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이상은 제가 배우고 생각한 것을 정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
닙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따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지켜야 하는 규칙 혹은 원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근거를 
충분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제 말에 수긍이 간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과 느낌을 다시 하번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근거'와 '공감'이라는 원칙에 주의하면서..........

      4) 닮은 꼴 - 고려의 후삼국 통일
  우리 역사상 (전) 삼국시대와 후삼국디새가 있으며, 그 두 시대의 상황이 여러모로 닮았다
는 점은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전)삼국시대는 
신라가 통일했으며, 후삼국시대는 고려가 최후의 승자로서 재통일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물
론 이때의 고려는 궁예가 세운 고려가 아니라 왕건이 다스리던 고려를 말합니다. 왕건은 어
떤 사람이었을까요?

      고려의 건국설화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의 사서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은 송악 곧 지금의 개성 지방에서 
행세하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신라  말기에 지방에서 행세하던 사람  내지 집안을 
우리는 흔히 호족이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제 7장에 보게 될 바와 같이 신라 하대에는 중앙
의 세력 다툼이 계속되면서 신라 정부의 공권력이 약해지고  사회 기강이 헤이해졌으며, 그 
결과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건의  집안도 그중 
하나였던 듯합니다. 조금 더 알아볼까요?
  옛날 스스로 성골 장군이라고 칭하던 호경이라는 사람이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부
소산 왼편 골짜기에 정착해 살다가 평나산 여신의 눈에 들어 산신이 되었는데, 그후 밤마다 
예전 부인의 꿈에 나타나 합방하더니 강충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강충은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으로서, 서강 영안촌의  부잣집 딸 구치의에게 
장가들어 갈다가 "부소군을 부소산 남쪽으로  옮기면 삼한을 통합할 사람이  태어나리라"는 
풍수가 팔원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른  뒤 송악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드디어  상사찬이되었
다. 제물을 많이 모은 강충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큰 아들은 이제건이고, 작은 아들은 손호
술이다. 손호술은 나중에 보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육은 이제건의 딸인 덕주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얻었는데,  그중 작은딸이 진의로서 아
름답고 재주와 지혜가 많았다. 어느날 언니가 오관산의 꼭대기에  올라 오줌을 누매 그것이 
흘러 천하에 넘치는 꿈을 꾸었는데, 진의가  비단을 주고 꿈을 쌌다. 그후 당나라의  숙종이 
아직 왕자일 때 신분을 속이고 동쪽으로 유람하다가 보육의 집에 들러 두 딸을 보고는 마음
에 들어 옷을 꿰매달라고 했다.  보육이 손님의 비상함을 알아채고는  큰딸을 들여보냈으나 
문지방을 넘는 순산 코피가 터져 그냥  물러나오고, 대신 작은 딸인 진의가 모셨다.  숙종이 
한달간 머무르는 사이에 진의에게는 태기가 있었다. 숙종이  길을 떠나면서 "나는 당나라의 
귀한 집안 사람인데,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이 활과 화살을 주시오 하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
았다. 진의는 사내아이를 낳아 작제건이라고 했다. 작제건은 나중에 보육을 국조 원덕대왕응
로 그리고 진의를 정화왕후로 추존했다. 
  작제건은 16세가 되어 어머니인 진의로부터 활동 화살을 붇자, 아버지를 찾아서 중국으로 
행했다. 상선을 타고 가던 중 서해 용왕의 부탁을 받아 도술을 부리는 늙은 여우르 대신 죽
이고 용왕의 장녀인 저민의와 혼인한 후 다시 돌아왔다.  저민의를 그냥 용녀라고 부르기로 
한다. 자손이 동방의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듣고 돌아온  작제건은 개주...정주...염주...백주와 
강화...교동...하음현 사람들의 영점을 받고 그들이 지어둔 영안성의 궁실에서 살았다. 작제건
은 나중에 의조 경강대왕 그리고 용녀는 원천왕후로 추존되었다. 
  작제건과 용녀는 사내아이 넷을 낳았는데, 장남이 용건으로서, 나중에 이름을 융으로 바꾸
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이다. 세조는 체격이 크고 도량이 넓은  사
람으로서, 삼한을 병탄할 뜻을 품고 있었다. 세조는 꿈속에서 매번 어떤 아름다운 여인과 만
나 부부되기를 약속했는데, 어느 날 송악에서 영안성을 가던 중 꿈속의 여인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나 혼인했다. 여자의 이름과 출신을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사람들은 그 여인을 몽
부인이라고 부르고 나중에 삼한의 어머니가 되었다 하여 한 씨를 성으로 감았다. 이 사람이 
곧 위숙왕후이다. 
  어느 날 풍수지리에 밝은 승려 도선이 찾아와 풍수에 맞추어 새로 집을 지으면 왕자가 태
어난다는 것과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 할 것을 세조(용건)에게 일러주고 떠
났다. 도선의 말대로 아이가 태어나 17세 되던 해에 도선이 다시 찾아와 왕건에게 용병술과 
지식에 관한 지식 등을 가르쳐주었다. 
  이상은 고려사의 고려세계편에 실린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위의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거기에는 전래의 신화 내지 설화를 참고한 듯한 흔적이 이 매우 많
기 때문입니다. 가령, 호경이 백두산에서 부소산으로 이주하는 대목이라든지 작제건이  용녀
와 혼인하는 대목 등은 고구려의 주몽설화를 연상케하며, 동생 진의가 언니의 꿈을 산 뒤에 
당나라 숙종과 맺어지는 부분은 김유신의 둘째 뉴이동생인 보희가 언니의 꿈을 산 뒤 김춘
추와 맺어졌다는 이야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이러한  짜깁기는 왕건의 출생신분을 신성하게 
꾸밈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고대...중세적 사유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건국설화에 담긴 사회상 - 근친혼과 균분상속
  여하튼, 위의 고려 세계에는 당시 사람들의 관념과 풍습,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어서  우리
의 흥미를 자아냅니다. 
  우선 손호술(보육)이 자기 친형의 딸인 덕주에게 장가든 것은 근친혼 풍습의 반영으로서,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신라...고려사회의 특징을  대변한 것입니다. 앞에서 잠시  소개한 
바 있지만, 신라에서는 골품제에 입각해 적어도  상류층에서는 근친혼이 일반적인 혼인형태
였습니다. 그것은 고려왕조도 마찬가지여서 원나라 간섭기에 이를 때까지 왕실 내부의 혼인
이 다반사로 이루어졌습니다. 신라의 신분질서가 고려시대에 그대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관념상으로는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호경이 성골장군을 칭했다
는 대목은 바로 그러한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작제건을 기준으로 외조부인 보육과 외증조부인  간충 그리고 자제건의 외고
조부인 호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계가 매우 중시되고 있다는  접입니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로 굳어져버린 엄격한 가부장제 내지 직계가족제와는  전혀 다른 혈통관념으로서, 여성
들의 지위와 역할이 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놓았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 한가지 
사례로서 충렬왕때 박유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지금 모두 처를 한 명만 두고  있기 때문에 
아들이 없어도 감히 첩을 둘 생각을 못하고  있다."면서 축첩제를 건의했다가 뭇부녀자들의 
항의와 지탄을 받고 곤경에 처했었다고 하는 고려사의 기록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말기만 하더라도 여자가 호주로 기재된  예, 호적에 딸과 사위가 기재된  예, 
호적에 아들과 딸을 구별 않고 나이순으로 기재한 예, 시집간  딸이 재산을 상속받는 예 등
을 부지기수로 찾아낼 수 있습니다. 특히 상속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화된 관념을 가장 분명
하게 표현해주는 것이라 하겠는데, 남자와 여자, 형과 아우의 차별이 없었던 것으로  알져집
니다. 이른바 균분상속이었기에 제사도 무론 똑같이 돌아가며 차례대로 지냈고, 나아가 인지
되는 친족의 범위도 후대에 비해 상재적으로 더 넓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평등권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고 독립 개체로서 인정되었기  가능했습니
다. 그래서 당시의 여서들은 정조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얼마든지  재혼할 수 있었던 것입니
다. 문덕왕후 유씨와 성종의 결합은 재혼이었으며, 순비 허씨의 경우에도 충선왕과의 혼인이 
재혼이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의 여성들이 누렸던 자유의 일단을 짐작케 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 고려세계를 일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왕건의  집안이 바다와 깊이 관련이 되었
을 가능성입니다. 강충이 서강 곧 지금의  예성강 근처에 살던 여자와 혼인한 것,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사위가 된 것  등은 바로 그런 점에서  주목되며, 정주(풍덕)...염주(연안)...백주
(배천)...강화...교동 등지의 사람들이 작제건과 용녀를 환영하고 궁실을 지어주었다는 대목은 
작제건이 예성강과 강화도 부근의 서해 연안 지역에서 크게 활동한 대표적  해상세력이었음
을 시사하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왕건은 신라 말기에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 
및 경기도의 일부 지역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장악했던 호족이라고 정리해도 무발할  것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왕건의 집안이 예성강 유역과 강화도에 설치되어 있던 패강진...
혈구진 등의 군지 세력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작
제건의 아버지를 당나라 숙종 운운한 것은 왕건의 집안이 중국과의 무역에 고나여했던 경험
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선이 왕건의 탄생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왕건에게 각종 능력을 전수했다는 대목은 신
라 말에 크게 유행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임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도선과 왕건이 만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왕건이  고려왕조를 세우고 민심을 신라로
부터 멀어지게 하는 데에 풍수리지설을 적극 이용했으며, 또  이후에도 각종 국가행사와 왕
실의 내규에 풍수지리설을 많이 반영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도선이 고려왕조를 개창한 태
조 왕건의 스승으로 묘사된 점을 통해 그 무엇보다 뚜렷하게 시사되어왔습니다. 

      왕건의 즉위와 고려 건국
  고려사에 의하면, 진성여왕 10년에 (896)에 송악군의호족인 용건은 아들 왕건과 함께 궁예
의 휘하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궁예에게 요청해 당시 20세이던  왕건을 개성에 새로 쌓은 
발어참성의 성주로 임명케 했습니다. 그후 왕건은 각종 전투를 통해 곡적을 쌓았는데,  특히 
해상활동이 두드러집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신라  효공와 7년(903)에 후백제의 허를 찔러 
한반도 서남부의 나주...광주 지역과 진도 등지를 점령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왕건이  수군
을 이끌고 금성군을 비롯한 10여개 군은 공격해 점령함으로써 후백제의 해상교통로를  차단
하는 배후의 군사거점을 확보한 것입니다. 궁예의 막료로서 해상대장군을 거쳐 수상인 시중
의 지위에까지 오른 왕건은  서기 918년에 홍유...배현경...신승겸...복지겸  등의 투재를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를 오른 다음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에는 자신의 본거지인 개성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을 견제했습니
다.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왕건은 개성과 평양을  새롭게 단장함으로써 고구려 계승의지를 kd
하게 표현했으며, 오월...후당 등과  교류해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군사적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를 자주 도움으로써 신라와의 우호를 대외에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대신 후백제에 
대해서는 다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러한 정책은 신라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듯합니다. 어찌 보면, 견훤의 신라에 대한 적대감은 고려의 친  신라정택 
때문에 더 고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서기 935년 고려의 신라 병합 그리고 이듬해의 후백제 멸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는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설명한 바 있으므로 다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반
드시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으며, 또한  같은 
시대 사람들에 의해 당연시되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라의  통일로 인해 하나의 국
가 안에서 함께 생활해온 사람들이기에 비록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재건을 부르짖긴 했지만 
다시 하나의 국가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공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신라의 삼국통일은 다시 한번 그 큰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당연시되
던 통일을 마침내 아무런  분열없이 성공적으로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고려의 재통일 역시 
그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통일을 이룬 사람 - 왕건의 매력
  그러면 고려는 과연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이 물음을 영웅사관에 입각한다
거나 '왕실=나라'로 인식했던 고대...중세적 관점에서 다시 표현한다면, 아마 이런 물음이 될 
것입니다. 도대체 왕건의 어떤 면이 그로 하여금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게 했을까요?
  우선, 왕건의 관용과 겸손 그리고 인내심을 장점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타
도해야 할 기득권 층의 표상인  신라의 경순왕 귀족층에 대해서, 또  생존을 걸고 다투어야 
했던 적국의 왕 견훤에 대해서 그는 항시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경순왕과 신라의 왕실
이 포로와 다름없는 상화에 처했을 때에도  왕건은 그들이 스스로 왕관을 벗어  자기들에게 
씌어 줄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다른 경로를 통해 그들을 협박하고 
회유했을지라도, 상대방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차지하는 데에 가장 평화
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견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견훤이 누구입니까? 왕건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왕조
의 원수국인 후백제의 괴수요, 공산 전투에서 자기를 죽음의 코앞에까지 몰아넣었던 사람이
며, 자신의 수족인 신승겸과 그 밖의 많은 충신들을 죽인 원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데도 왕건은 그가 자기에게 귀순한  뒤에도 상보라고 부르는 겸손함을  과시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식적인 겸손함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승리감에 도취되어 잠시의 섣부른 권위를 누
리기보다는 더 큰 승리를 위해 관용하고 인내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왔던 것
입니다. 이러한 왕건의 관용과 겸손은 고려왕조에적대적인던 호족세력들의 귀순을 재촉했습
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왕건의 통일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통일과정을 관망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새대를 열어가는  지도자의 덕목을 배워야 하겠습니
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반독립
적으로 활동하는 호족들과의 관계를 항상 원만하게 유지했습니다. 그가 재지 호족들과의 관
계를 항상 원만하게 유지했습니다. 그가  재지 호족들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방법으로서 
즐겨 이용한 것은 혼인과 사성이었습니다.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왕건은 정주 호족가문의유씨와 나주 호족가문의 오씨에게  차례로 
장가들었는데, 이는 모두 그의 군사활동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의 왕성한  해상활동의 
기반이 된 듯합니다. 정변(쿠데타)을 통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신의 불안
한 입지를 보강하기 위해 거경에 거주하던 행파의 두  딸과 혼인한 것을 비롯해 홍유...유금
필...박수경...왕유...왕규 등을 비롯한 무인...무인의 딸들과 혼인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박수경
은 누이...질녀...달을 차례로 왕건에게 시집보냈으며, 아 규는 두 딸을 시집보냈다고 합니다. 
후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에는 박영규의 딸을 19번째 비로 삼았는데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
습니다. 이처럼 혼인을 통해 세력간의 유대를 모색한 결과, 왕건은 왕후 6명과 부인  23명을 
두었으며, 더 많은 수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리러한 혼인정책은 나중에 왕위쟁탈전을 유발할 
소지가 매우 높았으므로, 나중에 고려 왕실은 내부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적극 
권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왕건이 자신의  맏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냄으로써 
경순황의 양위를 재촉한 것도 혼인을 이용한 심리적 압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혼인 이외에 유대를 맺는 방법으로는 성씨를 하사하는 방식을  이용했습니다. 명주 곧 지
금의 강릉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김순식이 서기  922년에 d아들을 보내 항복하자 그에게 자
신의 왕씨 성을 줌으로써 의제적 친족관계를 맺었으며, 청주의 대표적인 호족인 이가도에게
도 역시 마찬자지였습니다. 이처럼 서로 스스럼없이 성시를 주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
큼 당시 사람들이 명분과 위세보다는  실리를 중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곰곰히  따져보면, 
새로운 세상을 주도적으로 열었던 사람들은 모름지기 소탈한 실리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
겼던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참고문헌>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지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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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현강, 한국중세사연구, 일조각, 1988.
  정용숙, 고려시대의 후비, 민음사, 1992.

  제 6장 발해는 과연 우리의 역사인가?
    1) 발해의 건국과 성장
      고려의 멸망과 주민 이주
  발해의 건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구려의 멸망을 이야기 해야겠습니다. 발해가 건
국한 곳은 바로 고구려의 옛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서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 사람들은 대부분  당나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
다. 물론 이에 저항하며 고구려 재건 투쟁을 벌인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
어진 뒤였기에 그 웅대한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재건  투쟁에서 실패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신라로 망명하거나 당나라의 통치권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반면, 당나라의 통제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당나라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중
에는 자기의 터전을 떠나 당나라 각지로 강제 이주된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기록에 나타난 
것만 세어도 3만여 호를 넘습니다. 이를 인구로 환산하면, 보통 1호를 다섯 명 정도의  핵가
족 내지 직계가족으로 따지는 계산법에 의거할 때, 일단 15만  명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
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수도권에 거주하던 사람이거나 당나라에 끝까지 저항한 지역에 살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당나라에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다행히 요서의 영주, 곧 지금의  요령
성 조양시 근처에 정착한 사람도 잇지만, 서북쪽의 감숙성이라든지 산서성...안히ㅜ성 등  중
국의 선...남쪽 외곽지역에 배속되어 영영 되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옛날 정복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는 어느 지역을 정벌하고 나면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의 일부 혹은 전부를 전혀 동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킴으로써 반란의 소지를  없애는 
방법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는  비단 고구려만이 아니라 주변  각지의 소수 
종족 내지 국가를 자주 정복했고, 그 중 상당수를 고구려...백제 사람들처럼 수만 리 먼 곳으
로 이주시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7세기  후반 무렵 대릉하의 중...상류지역에 위치한  영주 
지방에는 고구려 상층부를 형성했던 사람들 이외에도 말간..거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
었습니다. 말간은 송화강 인근, 곧 지금의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북부지역에서부터 백두산 인
근지역에 걸쳐 거주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던 부족 명칭으로서, 거주지역에  따라 대략 속말
부...백돌부...안거골부...불열부...오실부...흑수부....백산부 등으로 구분되는데, 그중 흑수부가 가
장 강했다고 합니다. 이들 중 불열부와 흑수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족은 고구려의 영역 속에 
포함되어 고구려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했거나  예속되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특히 이들은 
매우 용맹하고 사냥을 잘했기에 고구려의 전위부대로서 이름을 떨쳤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
구려가 멸망하자 대부분의 말갈족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일부는 강제 이주의 대상이  되었
던 것입니다. 
  거란은 서요하 상류, 곧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에 있는 시라무렌강 인근지역에서 유목생활 
하던 종족을 말합니다. 이들 역시 말갈족처럼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는데,  고구려
의 광개토왕...장수왕 때 일부가 정복되어  고구려에 예속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의 
세력 팽창에 대항하다가 실패함으로써 당나라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맏게 되었으며, 일부는 
영주 등지로 끌려가 생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조영의 귀한
  한편 요동 지역에서는 고구려 유민의 저항이 계속되었던데다가 서기 676년에 새로이 설치
한 요동성의 안동도호부와 건안성의 웅진도독부 운영마저 신통치 않아서 이 지역에  당나라
의 통치력은 매우 미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서기  696년 5월에 영주에서는 거란족의 
이진충이 무리를 이끌고 일종의 독립투쟁을 일으켜  당나라를 매섭게 공격하자, 인근지역이 
매우 큰 혼란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같은 해 9월에 이진충이 죽은 뒤로는 그의 처남인 손만
영이 거란의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북경 근처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와 결탁한 
돌궐에 의해 배후의 근거지가 함락됨으로써 이듬해 6월경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이
러한 거란족의 독립투쟁을 사람들은 보통 중국측의 기록에 의거해 '이진충의 난'이라고 부릅
니다. 
  난이 평정된 뒤에도 일부는 당나라에 대항하는 군사활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진충이 군사를 일으킬 당시 강제로 끌려와 생활하던 다른 종족 집단들도 일부 난에 참여하
거나 당나라의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 알려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이 
이끄는 무리였습니다. 이들은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본거기가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으며, 요
동 지역에서 각각 정착했습니다. 
  이때 당나라는 측천무후가 나라이름을 주로 바꾸어 다스리고 있었는데 걸사비우에게 허국
공, 걸걸중상에게 진국공이라는 작호를 주면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절하
자, 이진충의 부하였다가 항복한 거란의 장군 이해고 등을 시켜 공격하게 했습니다.  이해고
의 군대는 먼저 걸사비우가 이끄는 무리를 격파한 다음 걸걸중상의 무리를 뒤쫓았다고 합니
다. 그런데 이때 걸걸중상은 이미 병으로 죽은 뒤였고, 그의 아들인 대조영이 아버지를 대신
해 무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구당서...신당서...오대회요 등의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재조영의 무리가 천문령을 넘어  피
신하자 이해고의 군대가 뒤쫓아가 공격했는데, 이 싸움에서 이해고는 간신히 빠져나올 정도
로 대태했다고 합니다. 천문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길림성의 혼하와 
휘발하 사이에 놓인 지금의 합달령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건국
이해고의 군대를 물리친 대조영은 거사비우의 휘하에 있던 무리가지 한데 모은 다음 동모산
에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국의 왕이라 칭하며 촌통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니, 이때가 서
기 698연으로서 고구려가 망한 지 꼭 30년이 지난  해였습니다. 동모산은 지금의 길림성 돈
화시 현유향에 위치한 산으로 이곳에는 해발 정상부에 성산자산성이 남아 전합니다. 그러나 
대조영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주변의 평지로 내려와 도시로 건설한 것으로 알려집
니다. 그 도시가 지금의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선사자산성에서 
동쪽으로 목단강을 건너 약 5km쯤 간 곳에 위치한 영승 유적일 개연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마침 영승유적의 북쪽 인근에는 발해의 초기 무덤으로 알려진 육정산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
어서 학자들의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각종 역사 기록에서는 발해의 건국지인 이곳이 
구국으로 칭해져 왔습니다. 
  고왕 대조영은 구국에서 주변의 여러 집단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우는 한편, 서북방의 돌
궐, 남방의 신라와 교류했습니다. 그리고 서기 705년에는 측천무후가 죽고 중종이  집권하게 
되면서 당나라와의 관계도 다소 호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서기 713년에는 당나라로부터 대
조영이 발군왕 홀한주도독에 책봉되었습니다. '발해'라는  국로가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시작
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그 이전에는 중국측에서  단지 '말갈'이라고 부름으로써 국가
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서기 719년,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어 아들인 대무예가 즉위하니, 이 사람이 바로  무왕입
니다. 무왕은 죽위하자마자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고구려 영토 회복을 목표로 세력 
확장에 주력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흑수말갈 공격계획을 반대하던 아우 대문예가 당나라
로 도망가자 그의 처벌문제로 당나라와 언쟁이 붙었고, 그결과 무왕은 거시 732년에 군사를 
보내 바다 건너 당나라의 등주  곧 지금의 산동성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이 전쟁은 발해의 
군대가 등주에 주둔하던 당나라 군대를 격파한 뒤 그대로 돌아가고, 또 당나라의 반격이 실
패함으로서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해인  서기 733년에 당나라의 요청
에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해인 서기 733년에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신라가 발
해 공격군을 출동시켰다가 폭설로 실패한 후로는 발해와 신라 사이의 외교 관계가 매우 악
화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신라정토계획과 발해의 호응
  신라와의 관계는 소원했던 대신 서기 727년에 개시된 일본과의관계는 발해가 멸망할 때까
지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발해와 일본의 외교사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8세기 중엽
에 일본에서 입안된 이른바 '신라정토계획'입니다. 서기 758년, 등원중마려의  지원하에 효겸
천황을 하야시키고 왕좌에 오른 순인 천황은 즉위하자마자 신라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운 
뒤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습니다. 발해를  끌어들여 협공 또는 양동작전을 펴기  위해서지요. 
일본의 사신은 다음해인 759년과 761년에도 빈버니 발해를 오가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처음에는 발해도 깊은 관심을 표명해 답례 형식으로 사신을 즉시 일본에 보내 세부계
획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발해는 신라정토계획에 매우 소극적
인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발해의 국내...외 사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기  758년은 
당나라에서 저도사 안록산과 사사명이 반락을 일으킨 해입니다.  흔히 '안사의 난'이라고 부
르는 이 반란은 사사명이 그의 아들에게 피살된 76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압되었을 정
도로 당나라를 혼란 속에 빠뜨린 큰 사검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사의 난이 발발한 지점이 발
해와 가까운 지역이었으므로 발해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당나라  정
부에서는 발해가 반란세력과 연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기 762년에 문왕을 '발해국왕'에 책
봉하는 선심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발해는  신라협공계획을 더 
이상 진전시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려고 한 표
면적인 이유는 신라의 '예의없는 태도'때문이었습니다. 즉, 서기 753년에 일본의 사신이 신라
를 방문했을 때 사신의 태도가 오만...무례하다고 하여 경덕왕이 접견을 거부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일본정부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어, 아예  신라정토계획을 세우도록 만들었다는 것입
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그 같은 이유에 대해 쉽게 수긍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
시 일본정부는 '신라정토'라는 거 한 계획에 비해 실질적인 준비는 그다지 서두르지 않았으
며, 더욱이 동쪽의 하이를 정벌하는 데에 군사력을 적잖이 투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일부에서는 당시 일본 정부의  신라정토계획이 실은 순인천황의 즉위와  등원중마려의 
집권에대한 반박을 무마시키기 위해 고안한 국내 선전용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
리고 여기에는 안사의 난 등으로 중국의정세가 불안해지자, 그  파장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
로 건너올 것에 대비하려는 목적도  개재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른바 바다를 
건너오는 파장으로서는 대표적인 것이 해적들의 활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하튼, 순인천황이 실각하고 등원중하며의 반란이  실패한 서기 764년, 효겸천황이  다시 
아 위에 오름으로써 '신라정토계획'은 전면 백지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발해와 신라 사
이에도 우려하던 군사적 충돌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8세기 중엽에 있었던 발
해와 일본 사이의 빈번한 사신  왕래는 신라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것은 거시 762년에 
신라가 서흥...봉산...고간...수안...해주...재령 등 서북쪽의 변경지대에  성을 쌓고 태수를 배치
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발해의 도성과 5경
  발해의 세 번째 왕인 문왕 대흠무는 무완의 아들로서, 서기 737년에 즉위해 793년에 죽을 
때까지 무려 56년을 재위했습니다. 그 사이에 그는 세 번을  천도했는데 우선 즉위한 후 얼
마 지나지 않은 742년경에 중경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756년경에는 상경으로 그리고 790년 
무렵에는 다시 동격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합니다.  문왕이 죽은 뒤 혼란 속에서  데 4대 왕 
대원의를 몰아내고 서기 793년에 추대된 성왕 대화여는 즉위하자마자 상경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으며, 이후 발해는 서기 926년에 거란의 공격을 받아 멸망할 때까지 천도하지 않았습니
다. 따라서 위에서 밝힌 연도는 대략적인 추정치에 불과합니다. 
  발해는 늦어도 9세기경에는 5경제도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5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상경은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에 위치한 동경성 발해진 (2) 중경은 길림성 화룡현의 서
고성자 (3)남경은 함경남도 신창군 토성리에 위치한  청해토성 (4) 동경은 길림성 혼춘시의 
팔련성 (5)서경은 길림성 혼강시의 임강진에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5경이외에 발해의 전 국토는 일단 15부...62주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아래에느 
s사시 100여개의 현이 설치되었습니다. 25개의 부 가운데5부는 5경에 중복 설치되어 있었습
니다. 예를 들면 상경에는 용천부, 중경은 현덕부,  남경은 남해부, 동경은 용원부, 서경에는 
압록부가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15부의 장관을 도독이라고 부렀으며, 62주의 장관은 자사 그
리고 100여개에 달하는 현의 장관은 현스이라고 불렀습니다. 도독은 관할하의 자사를 지휘...
감독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정구획은 사실  대부분 자연 촌락으로 한  것이었으로, 촌락민을 이끌던 
수령들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들 수령이 각 행정구
역의 군사...행정 책임자로서 적극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2) 대조영의 고향
  지금가지 우리는 보통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임을 굳게 믿어왔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선 
발해의 영토가 과거 고구려의 영토와 대부분 일치한다는 점,  고와 대조영이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라는 점, 문화적으로도 고구려 문화를  상당 부분 계승했다는 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발해의 지배층은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며, 피지배층은 다수의 말갈족이라고 
이해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 사람들은 우리와 매우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
르면, "발해는 당나라 때 속말말갈 사람이 서기 698년부터 926년까지 우리  나라(중국) 동북
지방과 소련의 연해주에 걸치 광대한 지역에 건설했던 지방 봉건정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
다. 위의 인용문은 그들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이러한 견해의 밑바닥에는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을 모두 보듬어야 하는 중국의  현실이 작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시말하면,  현재 
중국의 영토에 포함된 지역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에 귀속된다는 일종의 원칙이 작용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 역사의 일부임이 분명한 고구려조차 중국의 지방정
권쯤으로 간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발해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사람마다 전혀 다른 이유는 발해 지배층의 종
족계통에 대한 구명이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왕실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고대...중세적 
역사가 에입각한다면, 발해의 건국주체인 대조영의 출신지는 발해의 국가 성격을 규정지을 
수도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데, 그 중요도에 비해  연구자들의 해석은 여전히 제각각이어
서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대로,  중
국은 중국대로, 또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각각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발해 사람들의 종족계
통과 문화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이기적이고 비학문적인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학문은, 특히  인문과학은 
진리르 목적으로 탐구하는 것입니다. 다라서 탐구결과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용할 것인가는 
나중의 문제이며, 우선은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 곧 객관적인 연구가 이루어져하는  것입니
다. 이러한 노력과 연구가 선행되지 않은 그리하여 자신의  현재 입장만을 고려한 이기적인 
해석과 이해는 결국 학문의 존재 이유마저 뒤흔들어놓게 될 것입니다. 
  발해 왕실의 조상인 대조영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고, 또 
어떤 사람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을까요? 이러한 물음에 대해 간단 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자료가 워낙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발해말갈과 말갈발해
  발해사를 연구할 때 자주 이용되는 역사서로는 구당서와 신당서...오대회요...책부원구 등의 
중국측 사서와 속일본기...유츼국사와 같은 일본측 기록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리
고 우리의 역사서 중에는 삼국유사를 비교적 자주 거론한는  편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거론
한 역사서는 모두 발해의 역사 가운데 일부분만 전할뿐더러 각기 다르게 기록된 부분도 적
지 않아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조영의 출신에 관한 기록입
니다.
  (1) 10세기 엽에 편찬된 구당서는 발해의 건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 고려가 멸망하고 나서 대조영은 집안 식구들
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와 살았다. 만세통천중에 거란이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 재조영이 
말갈 사람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무리를 이끌고 망명해 동쪽으로 달아나 험한 곳을 차지하고 
수비를 굳혔다. .........대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술에 뛰어나자, 말갈무리와 고려의 
남은 무리가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에 오르고, 사신을 돌권에 보내 통
교했다. (구당서 북적전 발해말갈)
  (2) 서기 961년경 송나라의 왕부가 편찬한 오대회요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발해말갈은 보내 고려종이다. 당나라 총장연간에 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그 나라 사람들
을 중국에 분산시켜 살게 했으며, 요외에 주와 현을  설치하고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를 두
어 다스리게 했다. 만세통천 연간에 이르러 거란인 이만영이 반란을 일으켜 영부를 공격...함
락시키자, 고려 별종인 대사리  걸걸중상이 말갈 반란자 걸사비우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 
고려의 옛 땅에서 나뉘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 걸걸 중상이 이미 죽고, 그의 아들이 대
조영이 뒤를 이어 걸사비우의 무리를  아우르니, 병정을 배출할 수 있는  집이 40여만 호를 
넘었다. 읍루의 옛 땅에 근거를 보전했으며, 성력  연간에 신하를 칭하며 조공했다. (오대회
요 발해전)
  (3) 12세기 중엽에 편찬된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부속되어 있었는데, 성은  대씨이다. 고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니, 땅이 바로 영주 동쪽 2천리쯤에 있다. 남쪽으ㅗ는 
신라와 니하를 경계로 삼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쪽에는 거란이 있다. 성곽을  쌍호 
사니, 고려의 남은 무리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만세통천 연간에 거란인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강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려
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을 도망가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에 의거
해 성벽을 쌓고 굳게 지켰다. ...... 이때 걸걸중상이 이미 죽고 그 아들  대조영이 고려...말갈
병으로 이해고의 군대를 물리치니, 이해고가 져서 돌아왔다. 이에 거란이 돌궐에 붙어  당나
라 군대의 길이 끊겨 토벌할 수 없게 되자, 대조영은 곧 걸사비우의 무리를 합한 다음 거칠
고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의 왕이라  부르며 사신을 보내 돌궐과 교류했다. 
(신당서 북적전 발해)
  (4)우리의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통전에 이르기를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그 추장인 대조영 때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
고 스스로 진단이라고 불렀다. 선천연간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
고 부르기 시작했다. .........'라고 했다. 삼국사에 이르기를  '의봉 3년 곧 고조의 무인년에 고
려의 남은 무리가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아래에  의지해 나라이름을 발해라고 했다. .........'라
고 했다. 도한 신라고기에 이르기를 '고려의 옛 장군인  대조영의 성은 대씨이다. 그는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발해라고 했다.'고 했다. 위의 여러 
글을 조합해보건대 발해는 바로 말갈의 별종으로서, 단지 그 갈라지고 합한 것이 같지 않을 
뿐이다.(삼국유사 기이 말갈발해)
  위 기록을 통해 우리는 대조영의 출신 성분이  두 가지로 달리 전해져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당서...오대회요...신라고기처럼 고려의 별종 내지 옛 장군으로 전하는 입장과 
신당서...통전처럼 속말말갈사람으로 전한 입장입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
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고려의 별종
  먼저 위의 기록에서 '고려'라는 나라이름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후기 
국호임은 앞장에서 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고려의  별정'은 '고
구려의 별종'으로 다시 바꾸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고려의 별종'은 '고구려의 별종'
으로 다시 바꾸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고구려의 별종'이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왜 대조영을 그냥 '고구려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소개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대조영이 보통의 고구려 사람과는 다른 어떤 특징을  지녓기 때문인 듯합니다. 즉 
고구려 사람이기는 하지만, 고구려 왕실처럼 토종이랄까  뼈대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고구려의 5부를 형성햇던  집단 이외의 사람들이 포
함되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말강...옥저...동예 사람들이 해당되겠지요. 그리고 나중에 병합
된 부여 사람중 일부도 이에 포함되었을지 모릅니다. 
  대조영이 말갈 출신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사례로는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의 이름을  지적
할 수 있습니다. 앞에 제시한 인용문에서도 보았듯이 처음에  걸걸중상은 말갈 사람임이 분
명한 걸사비우와 함께 행동했습니다.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이 두 사람의 이름에서  우리는 
막연하지만 어딘가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객관화
를 추구하는 학문 연구에서 느낌을 운위한다는 자체가 매우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완
전히 무시되어서도 곤란하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면 구당서의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라고  한 대목은 신당서
의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부속되어 있었는데,  성은 대씨"라고 한 대목과 서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고려의 별종이  곧 '고려에 부속되어 있던 속말말
갈'의 도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점에서 구당서와 오대회요에서도 발해를  가
리켜 발해말갈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조영이 속말말살 출신이었다고 해도, 극것은 그의 가계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상
의 문제일 뿐입니다. '고려 별종'내지 '고려의 옛  장군'이라는 표현은 그의 관념이랄까 의식
이 '말갈 사람'보다는 '고구려 사람'을 지향하고 이성T다는 듯으로 받아들여질 수 잇기 때문
입니다. 그것은 걸사비우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말갈 사람'혹은 '말갈 추장'이라는 말을 붙엿
으면서 걸걸중상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표현을 적용하지 않았을뿐더러 은연중 '고려의 남은 
무리'와 연계시킨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시사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걸걸중
상)과 비교할 때, 훨씬 더 고구려화 내지 중국화한 이름9대조영)도 역시 그러한 의식의 일면
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발해 왕실의 고구려 지향성
  대조영과 그 후손들의 고구려 지향성은 일본과의 외교 과정에서 매우 뚜렷하게  드러났습
니다.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759년에 발해의 문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스스
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고 부렀으며 일본에서도 발해의 왕을 '고려국왕'으로 불렀던 것입니
다. 뿐만 아니라 '발해'를 가리켜 자주 '고려'라고 불렀으며, '발해의  사신'을 '고려의 사신'으
로 표현한 사례가 일본측의 기록에는 꽤 많은 편입니다. 
  이처럼 생물학적 출신과 관념성의 출신이 각기 달랐기 때문에 발해와 남북으로  정립했던 
신라측의 기록은 다소 혼동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라에서  9세기 말엽에 활동한 최치원의 
경우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 본래 보잘 것 없던 부락인 말갈의  족속이 번
성해져 속말소번이라 불리다가 일찍이 고구려를 따라 당나라로 옮겨와 살았는데, 그 수령인 
걸사비우와 대조영 등이 측천무후 때에 이르러 영주에서 죄를 짓고 달아나 문득 거친 땅을 
차지하고 비로소 진구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옛날의  고구려가 곧 지
금의 발해"라고 하여 말갈과 발해에 대한 이중적 잣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고영과 그의 후손들이 고구려 지향성을 띠게 된 데에는 과거 고구려의 핵심 지배층이던 
사람들이 발해의 건국과정에 깊이 참여하고 이후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한 사실도 적잖이 작
용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구려 왕실의 성씨였던 고씨가 발해  역사상 대씨의 다름의 대성
으로 등장한다는 연구 결과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입증될 수 있습니다. 즉 발해사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검토한 결과, 발해의 대회사절단의 대사와 부사에는  대씨 다음으로 고시가 많
이 임명되었으며, 특히 고씨는 발해 관료사회에서 중추 역할을  담당했을 개연성이 높은 것
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이상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발해는 말갈 출신의 고구려 사람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과
거 고구려의 핵심 지배세력들이 대서 참여해 건국한 나라이며,  나라 안팎으로 고구려 계승
을 표방한 나라였다고 하겠습니다. 

    3) 발해가 남긴 것 -  문화유산
      정리되지 못한 발해의 역사
  서기 926년 정월 14일, 발해의 왕 대인선이  수도인 홀한성에서 거란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발해는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그 전해인 925년 12월 16일에  거란의 태조가 발해 공격을 공
식 발표하고 군대를 출정시킨 순간부터 발해왕의 항복에 이르기까지의 한달에 걸친  전쟁과
정은 요사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사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역사를 기록
한 책으로 원나라의 탁극탁 등이 정리했다고 합니다. 
  요나라는 거란 사람 야율아보기가 서기  907년에 세운 나라로서 1125년에 멸망할  때까지 
중국의 하북성 이북지역을 포함해 동북  3성(길림...요녕...흑룡강성)과 내...외몽고 자치구, 소
련의 연해주 그리고 지금의 몽골까지 차지한 대제국이었습니다. 태조(야율아보기) 당시의 국
호는 거란이었으나, 그의 아들인 태종이 즉위한 후 곧바로 나라이름을 '요'로 바꾸었다고 합
니다. 
  요나라는 발해의 역사를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발해를  그들의 선행국가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패권을 넘겨 받은 금나라의 경우에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서기 1115년에 건국해 1234년에 멸망한 금나라는 여진족의 국가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발해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를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거란에 멸망당한  것입니다. 이럴 경우, 발해의 뒤를 이은  나라가 
발해의 뒤를 이은 나라가 발해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후속 왕조가 불분명해 
정리해주지 못한 듯합니다. 즉 발해의 왕자를 비롯해 많은  유민이 고려로 망명함으로써 형
통과 관념이라는 측면에서는 고려가 계승국가라고 할 만하지만, 영토를 모두 거란과 여진에
게 빼앗기는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해에  대한 공식 역사기록은 구당서
와 신당서 등의 외국열전에 실린 간략한 소개가 전부인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기록에서도 발해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대표적 고대사서인 삼국
사기에서는 기록이 편린마저 찾기 어려운 형편이며,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편적인 기록도 몇
몇 사료의 소개에 불과한 형편입니다. 아마도 관련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인 듯
한데, 그나마 삼국유사와 고려사등에 편린이라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발해와 고려의 연계
성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연계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 
조선시대의 유득공은 발해고라든가 이십일도회고시와 같은 글을 통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가 우리 역사의 중요한 축임을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여하튼, 발해 사람들이 밟던 땅의 대부분은 지금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 그해서 우리가 발
해 사람들의 발자취를 조사하고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발해사에 대한 현지 사람
들의 조사...연구는 아직 미진한 상태인데다 발해의 국가 성격을 한쪽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강해서 그들의 조사...연구 결과를 이용할 때에는 조심성이 요구됩니다. 

      발해의 고분문화
  발해 사람들의 정체을 보다 분명하게 차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분문화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장례의식과 무덤만큼  전통을 중시하는 부분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자들이 어떤 시대와 집단의 문화적 특성을 고찰한다고 할 때, 여러  가지 
문화유산 중에서 우선적으로 고분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 지니는 짙은 보수성 때문
입니다. 
  발해 시대의 고분은 각지에서 발견되지만, 특히 주목되는 곳은 구국의 소재지였던 길림성 
돈화시 일대와 화룡현 일대 그리고 상격이 있던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일대입니다. 북한의
함경도 일대에서도 발해 고분이  확인...조사되었는데, 그 수가 대략  1,000여 기를 넘는다고 
합니다. 고분은 크게 토광묘...석실묘...전실묘로 나뉘어지며, 그중 발해  지배층의 무덤으로는 
석실묘와 전실묘가 자주 거론됩니다. 
  발해 건국 초기의 무덤 떼로 알려진  돈화기의 육정산 고분군에서는 지금가지 8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그중 1949년에 발국...조사된 정혜공주묘는 당시 핵심 지배층의 문화적 
분위기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정혜공주묘는 편평한 대지의 일부를 골라 얕게 찬 다음 현무암 판석과 장대석을 이용해 반
하의 횡혈식 석실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이른바 봉토석실분입니다.  현실의 규모는 대략 남
북2.0m 내외, 동서2.7m 내외이며, 말각조정식 천장 때문에 높이는 2.7m에 달한다고 합니다. 
무덤앞에는 벽을 깐 묘도가 11m 정도로 길게 조성되어 있고, 여기에서 남벽 중앙부에 배치
된 연도를 통해 현실로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무덤안에서는 묘지명 1점과 암수 돌사자 한쌍 
그리고 목관 조각 등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의 내용을 통해  피장자가 문왕 대흠무의 둘쩨 
딸인 정혜공주이며, 서기 777년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해 780년에  진릉의 서쪽에 배장된 사
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릉은 보통 정혜공주의 할아버지인  무왕 대무예의 무덤으로 알려지
고 있습니다. 
  서기 1980년에는 중경, 곧 지금의 서고상자 근처에 위치한 용두산 고분군에서도 묘지명이 
있는 무덤이 조사되었습니다. 땅을 4m 깊이까지 깊게  판 다음 바닥과네 벽면을 모두 벽돌
로 쌓아올린이른바 전실묘인데 천장만은  판석으로 편평하게 조성했습니다.  현실의 규모는 
남북 길이 3.1m 너비 2.1m 높이 1.9m 내외이며, 현실의  남쪽 벽 중앙부에는 실이 1.9m 규
모의 연도가 있고, 그 바깥으로 다시 7.1m 정도로 길게 조성된 계단식 묘도가 있습니다. 현
실 안에서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의 인골이 수습되었으며, 모두  12명의 인물을 그린 
벽화가 확인되었는데, 주인공의 초상화는 없었다고 합니다. 현실 위의 지표면에는 벽돌로 탑
을 세워 불교의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으나, 일찌감치 파괴된  탓에 원래의 형태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무덤 앞에는 조그마한 건물 터가 있어 관리원의 숙소로 추정되고  있으며, 
산 아래에는 바닥 위에 세워져 있던 묘지의 내용에 의하면 피장자는 문왕의 넷째딸인 정효
공주로서 서기 792년 6월에 죽어 11월에 염곡의 서쪽대지에 배장되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간략한 검토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의 봉토 석실분이 발해 핵심 지배층의 묘제
로 계승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고구려의 풍습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변화에 따라 발해의 문화는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돌 대신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을 사용하는 예가 늘어나
고, 인물 벽화를 그릴 때에는 살이  쪄서 둥근 하얀 얼굴에 작은 눈,  가는 눈썹, 작고 붉은 
입술 등이 특징적으로 부각되는 당나라식의 인물상을 많이 따르게 된 것입니다. 

      도성 방위체제와 당나라 문화의 영향
  이러한 문화 흐름은 발해의 성곽을 통해서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발해 초기에는 산성을 
매우 중시하는 군사체계를 갖추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도시 중심의 광역 방어망
을 구성했던 것입니다. 
  구국에 도읍하던 시절의 방어체계를 살펴보면, 영승유적과 성산자산성 주변에  석호고성...
흑석고성...마권자고성...통구령산성을 비롯해 각종 보루를 배치함으로써 고구려 국내성과  그 
주변의 산성...보루 배치구조를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서고성자에 도읍했던 중경  시절에는 
장항고성...요천고성...홍성고성...하남둔고성 등으로 구성된 방어망을 구축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방어망 구축은 발해의 도성 방위체제의 근간이기에 쉽게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
지만, 상경을 도읍으로 삼은 시절부터는 일단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을 그대도 본떠 평지 방
어형 도성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상경 시절의 도성은 추정되는  동경성은 전체 둘레  16km가 넘는 장방형 평지성으로  외
성...내성...궁성 등 3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의 서남쪽에는 경박호가  있는데, 그곳에서 
흘러나온 목단상이 동경성의 서쪽과 북쪽을  감싸며 지나가기 때문에 도성방어에도  도움이 
될 뿐아니라 주변에 펼쳐진 비옥한 평야를 이용할 수 있어서 매우 좋은 입지입니다. 
  외성의 성벽은 먼저 돌로 일정한 높이의 담을 쌓고 그것을 흙으로 덮은 이른바 석심토축
으로 되어 있습니다. 외성의 동벽과 서벽은 길이가 대략 3.4km 정도미여, 남벽과 북벽은 각
각4.9km 내외라고 합니다. 성문은 남벽과 북벽에 3개씩 그리고 동벽과 서벽에 2개씩 배치해 
모두 10개이며, 성벽 바깥으로는 해자를 돌렸습니다. 
  외성 내부의 북부지역에는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전체 둘레 4km에  달하는 내성이 
있습니다. 황성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돌로 샇은 석성인데, 동...서...남벽에 각각 1개씩 문이 
설치되었습니다. 내성(황성)의 북부지역 중앙에는 돌로 쌓은 궁성이 있습니다. 이속에는 7개
의 궁전이 있었으며, 남벽과 북벽에 각각 1개식의 문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궁성의 남문과 내성(황성)의 남문 사이에는 큰길이 나 있고, 그 길 양쪽에서 각종 건물지
가 발견되었는데, 관아가 있던 곳으로 알려집니다. 내성의 남문과 외성의 중앙 남문  사외에
도 속칭 '주작대로'라고 부르는 큰길이  조성되었는데 너비가 110m에 달하는 초대형입니다. 
이밖에 외성 동문과 서문을 잇는 도로 그리고 북문과 남문을 잇는 도로의 경우 너비가 50m
에 달했다고 하니, 그 규모의 방대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나라의 문화가 발해에 급속히 영향을 미친 이유는,  비록 주민 구성이라는 측면
에서는 고구려 계승성이 강했으나, 고구려의 문화와 체제가 온전히 전달되지 못해 당나라의 
정치...행정체제를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발해의 3성 6부제도는 당나라의 것을 본뜬 것입니다. 다만, 당나라에서는 6부 아래에 24사
를 둔 반면, 발해에서는 12사를 두어 규모를 줄였을 뿐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상경의 외성만 
하더라도, 전체 둘레 36km가 넘는 당나라 장안성의  규모를 절반 정도로 줄여놓은 것에 불
과합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발해가 무조건 따라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모
방하는 가운데 새로운 형태의 독특한 문화를 창출했던 것입니다. 

      발해의 불교와 이불병좌상
  발해는 불교국가하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불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우선 발해의 제 3대 왕인 문황의 존호가 '대흥 보력 효감 금휸 성법대왕'이라는 사실을 통해
서 충분히 눈치챌 수 있지만, 정효공부묘에서 모듯이 무덤 위에 아예 탑을 만들어놓을 정도
로 부처와의 일체를 꿈꾸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인정됩니다. 
  발해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40여 곳에서 절터가 조사되었습니다. 그중 수도권에 위치한 것
만 골라 보면, 구국에서는 1곳, 중경 일대에서는 12곳, 동경에서는 9곳, 상경  일대에서는 10
여곳이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상격의 도성 내부에서는 최소한  8곳이상의 대형 절터가 확인
되어 불교의융성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금당의 양족 옆에 별도의 건물을 두고 회랑을 돌이
는 다소 특이한 형태의 가람 배치 속에서 사리탑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1975년에 동경성의 
한 절터에서 수습된 사리함은 사리 5과가 든 유리병을 정교한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은
합과 칠갑 등 7겹으로 싼 것이었습니다. 또한 상경  내부의 어떤 절터에서는 용암으로 만든 
6m 높이의 거대한 석등이 발견되어, 절의 규모를 가늠케 해줍니다.  석등이란 탑 앞에 세워 
놓는 돌로 만든 등을 말합니다. 
  발해의 불교와 관련된 유뮬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이 불상입니다. 지금까지 1천개 가까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재료에 따라 석불...철불...금동불...도불...소조불...칠불등으로 나뉘어집니
다. 그중 니불 혹은 전부이라고도 하는 도불은 흑으로 빚은 뒤 북에 구워 만든  불상으로서, 
상경과 동경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도불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견된 
바 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서  발견된 도불은 모두 납작
한 판의 형태였지만, 발해의 도불은 둥글고 입체적이어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한편, 동경과 서경 지역에서는 2개의 불상을 나란히 붙여 놓은 독특한 형태의 쌍둥이 불상
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대부분 나란히 결가부좌한 상태에서 왼편 부처의 오른손을 오른편 
부처의 왼손 위에 올려놓은 모습인데, 양 옆에 협시보살을 둔 것도 있습니다.하나의ㅡ커다란 
광배를 공휴하는 이러한 쌍둥이 불상을  보통 이불병좌상이라고 합니다 이불병좌상은  보통 
석가모니불과 다보불로 구성되며, 법화사상을 표현한다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4) 사대 외교 - 평화공존의 원리
      간지와 연호
  앞에서 소개한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명에는 그들의  아버지인 문왕을 가리켜 성인, 
대왕, 황상 등으로 부른 대목이 있습니다.  또한 8세기 후반에 일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는  
발해의 문왕이 천손을 자칭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발해의 왕이 대왕이니 천손이니하는 명
칭을 사용한 것은 과거 고구려의 왕이 대왕...태왕...성왕...성상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과 거
의 같은 취지에서 나온 행동으로 판단됩니다. 다만 자주적이랄까 스스로를 높인다는 측면세
서 본다면, 발해가 더 강한 자신감으로 보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예 때문입니다. 
  먼저, 발해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왕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연호란 어느 한해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왜 연호가 필요했을까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연대는 서양의  달력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입니다.  서기는 
예수의 탄생을 기준으로 삼은 연대계산법입니다. 그러니가 서기 2000년이라면, 예수의 2,000
번째 생일이 든 해인 셈이지요. 동양에서 서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인 근대 이후입니다. 
  그러면 동양에서는 어떻게 연도를 계산했을까요? 중국에서는 간지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
했습니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로 구성된 10간과  자...축...인...묘...진...사...오...
미...신...유...술...해로 구성된 12지를 짜맞추어 만든 것이 바로 간지입니다. 예를 들면, 10간의 
'갑'과 12지의 '자'를 합해 갑자년(쥐띠)을 만들고,  '을'과 '축'을 합해 을축년(소띠)을 만듭니
다. 또 '병'과 '인'을 합해 병인년(범띠)이라 불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정묘년(토끼띠)...무진
년(용띠)...기사년(뱀띠)...경오년(말띠)...신미년(양띠)...임신년(원숭이띠)...계유년(닭띠) 등이 이
어지며, 계속해서 갑술년(개띠)...을해년(돼지띠)...병자년(쥐띠) 등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렇
게 10간과 12지를 줄줄이  연결하다보면 61년째에 처음의 갑자년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이를 회갑 또는 환간이라고 합니다. 
  간지를 이용하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수백년전의 어던 사건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
습니다. 가령, 당나라 고종 때의 '경신년'이라고 하면 서기 660년 이외에는 달이 그에 해당하
는 연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왕의 통치기간이  60년을 
넘는다면? 간지의 명칭이 겹치게 되어 혼동을 일으키기 쉬운 것입니다.  물론 첫 번째 경신
년, 두 번째 경신년등으로 구별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매우 불편한 구분법에 불과합니다 또 
다른 문제점도 있습니다. 왕의 생존시에는 아직 시호를 사용할  수 업어 혼동이 불가피하고
왕이 죽은 뒤로 하더라도 감히 시호를 마구 부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새로이 즉위한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즉위를 세상에 널리 알려 새로운  시대가 
열렷음을 홍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었으므로,  자기가 
새로이 만든 달력, 자기의 즉위를 알리는 문구가 들어간 달력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
다 빠르고, 또 정확한 홍보방식이었습니다. 즉위했을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정
치제도를 혁신한다든지 분위기를 새롭게 한다는 측면에서도 새로운 이름을 간지 대신  달력
에 붙여 사용하게 함으로써  그의 의지를 세상에 널리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서기 
649년에 즉위한 당나라의 고종은 영위하는 연호를 사용하다가 656년 1월에 현경이라는 이름
으로 바꾸었으니, 서기 660년(경신년)은 현경 5년에 해당합니다. 
  연호 사용에는 실용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황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황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
신 다스리는 존재로 자처했습니다. 따라서 주변에 위치한 여러  나라의 왕들오 중국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대신 해당지역을  다스리는 신하에 불과했습니다. 주변  나라의 정치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간섭은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변 나라에서 
중국 황제가 정한 달력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것은 반대
로 주변 나라의 왕이 독자적인 달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연호 사용은 천자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연호를 발해의 왕이 사용한 것입니다. 이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물론 고구려에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도
한 신라에서도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정된 시기의 일이었습니
다 예컨대 신라의 경우에는, 법흥왕이 서기 534년에 처음으로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
래 진덕여왕 때가지 개국...건국...대창...홍제...건복...인평...태화 등의 연호를  사용하다가 여러 
차례에 걸쳐 당나라특의 항의 도는 책망을 들었는데 연호가 자꾸 외교상의 걸림돌로 작용하
자 서기 650년(태화 4년)부터는 결국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멸망할 때가
지 중국측의 연호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광개토왕 때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사실만 확인됩니다. 
  발해는 문왕이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래  말기가지 대흥...보력...중흥...정력...영덕..주
작...태시...건흥...함화 등의 연호를 계속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발해가 멸망한 뒤  그 
유민이 세우 s작은 나라 정안국마저도 원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연
호 사용이 매우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발해 조정의 자연스러운 연호 사용은 중국측에서 정한 각종 용어의 사용 제한규정마저 무
시하게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측의 용어 사용법으로 보면, 그 사라므이 신분에 따라 적
용되는 용어가 달라집니다. 
  황제의 명령은 조...제...칙...책으로 표현하며, 태자의 명령은 영, 그밖의  왕자...공주 그리고 
주변 속국의 왕이 내린 명령은 교라고  했습니다. 황제는 자신을 가리킬 때 짐이라고  하며, 
제후인 주변국의 왕은 자신을 과인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대의 사례이긴 하지만, 신하들이 황제를 부를 때에는 폐하라고 하고, 제후인 왕을  부를 
때에는 전하라고 했습니다. 태자와 세자 역시 품격의 차이를 그러낸 용어라고 합니다.  그런
데 발해는 이러한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조라는 용어를  마음대로 사용했으며, 심지서 선조
성이라른 관청까지 두었던 것입니다. 
  발해가 이처럼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
까요? 학자에 따라서 이렇게 정리하기도 합니다. 
  첫째,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용어를 계승함으로써 고구려  중심의 독자적인 세계관도 함께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천손...대왕...성왕 등의 용어가 그 증거입니다. 
  둘째, 지리적으로 당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견제를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었
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길제로 발해보다 더 멀리 떨어딘 곳에  있던 일본은 훨신 더 강하
고 분명한 일본 중심의 세계관은 지니고 있었습니다. 
  셋째, 주변의 말갈부족 등을 통제하거나 복속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번국을 거느린 중심
국, 곧 활제 나라로서의 지외를 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대와 조공 - 실리외교의 단면
  나름의 독자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여전히 중국 중심의 세계질
서를 벗어나지 못하는 조공국이었습니다. 
  조공이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일정한 세금 내지  특산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국가간 
불평등관계의 상징적 표현인 조공은 이른바 사대의 중요한 표징이 되어 왔습니다. 
  사대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대는 
비교적 일찍부터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형성시크는 요인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렇기에 정치...경제...군사...문화적으로 상대적 후진성을 면치 못한 발해에게 당나라에 대
한 조공은 현실 직시의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 직하는 측면에서 보면, 발해의 사대는 조선시대의 명분론에 입각한 관념적 사대주의
와 마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발해의 사대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유지하
는 가운데 현실의 상황을 감안해 대처하는 이른바 실리외교의 한 가지 방법에 불과했기 때
문입니다. 따라서 당나라에 대한 발해의 조공은 선진문물의 수입을 목적으로 계획된 실리외
교 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발해의 실리외교는 일면 삼국시대의 외교방식과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 나
라에 이익이 된다면 수십...수백 년 동안 대치해온 적국과도 기꺼이 동맹을 맺고, 필요하다면 
어제의 우방에게 칼을 들이대기도 하는 그야말로 철저히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가  삼국시대
에 펼져졌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4세기에는 백제에 대항해 고구려와 신라가 긴말한 우호를 유지했고,  5...6세기에
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었으며, 6...7세기에 신라가  한강유 
역을 차지하고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과의 외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고구려의 대중국외교 - 유연한 4세기
 다 알다시피 고구려는 압록강변의 국내성을 중심으로 만주 지역 그리고 요동 지역으로 그 
세력권을 점차 넓혀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경에는  요동 지역에서 전연이라고 하
는 매우 강력한 국가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전연은 요서 지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던 선
비족이 4세기에 들어와 중구의 북부지역을 호령하게 되면서 세운 나라입니다. 
  당시 중국의 화북지역에는 전연  이외에 후조라고 불리는 나라가  있어 서로 경쟁했는데, 
서기 38년에 후조는 전연의 수도인 극성 곧 지금의 요녕성 조양형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것
이 있습니다. 그후 후조는 전연을 공격한는  일이 여의치 않자, 30만 섬의 곡식을  고구려로 
보내 전연을 양쪽에서 공격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이에 고구려도 응한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는 분면하지 않지만, 다음해인 339년에 전연의 왕인 모용황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신성으로공격하며 고구려를 압박했고, 싸움에서 진 고구려는  왕자를 보내 모용황에게 맹서
함으로써 전연의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태도가 분명치 않자 전연의 모용황은 서기 341년에 직접 4만 대군
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인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은 이듬해인 342년에 전연
으로 사신으로 보내 조공하며 자신이 전연의 신하임으로 인정함으로써 겨우 이천왕의  시신
을 되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용준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 349년에는 십 여년 전
에 전연에서 반란에 가담했다가 고구려로 도망해온 장군 송황을 송환시킴으로써 전연의  환
심을 샀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서기 355년에는 드디어  왕의 어머니가 돌아올 수 있
었습니다.
 왕의어머니가 무사휘 귀환하자, 고구려는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전연과의 관계를 끊은 것입
니다. 그리하여 전연이 멸망하는 370년까지 단 한번의 조공사절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연은 추조를 깨뜨리고 화북지역 대부분을 지배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목표가 달성되자마자 전연에 대해 매우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대외 관계, 그것이 4세기 무렵 고구려 
외교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고구려의 양속 외교
  중국에서 5...6세기는 양자강을 기준으로 남쪽과 북족에 각각  다른 왕조가 서서 대립하던 
시기입니다. 즉, 북쪽에서는 북위...서위...북주...북제...수나라로  이어지며, 남쪽에서는 동신을 
이어서 송...남제...양...진왕조가 차례로 섰다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된 것입니다. 
  이처럼 화남과 화북의 두 세력으로 나뉘어 경쟁하던 시기,  특히 북위가 북량을 멸망시키
고 화북 지역을 제패한 거시  44년 이후를 남북조시대라고 합니다.  남북조시대에 고구려는 
주로 북조 국가들과 그리고 백제는 남조 국가들과 교류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서기 433년 무렵, 화북 지방 제패를 눈앞에 둔 북위가 북연 마저 격파하면서 요동 지역에 
관심을 보이자, 중국의 정세변동을 예의 주시하던 고구려는 일찌감치 조공하여 북위와의 마
찰을 피했습니다. 그리하여 435년에는 장수왕이 북위로부터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이라는 
작호를 받았으며, 이후 해마다 조공하는 친밀감을 과시했습니다. 물론 서기 436년경  고구려
로 방명한 북연 왕의 송환을 둘러싸고 북위와의 사이에  외교마찰이 빚어졌으며, 그로 인해 
전쟁 직전가지 가는 험악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해야 했던 북
위의 현실을 고구려가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우려하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440년부터 고구려와 북위 사이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가 다시 북위로 사신을 보낸  조공한 것은 거시 462년입니다.  그런데 일단 외교가 
재개되자 고구려는 전에 없던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특히 472년부터는 한 해에
도 2!3회나 사신을 보내 조공할 정도로 친밀한 국교를 과시했습니다. 고구려의 태도가 이렇
게 돌변하게 된 에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백제와의 외교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백제는 4세기 이후 줄곧 남조세력과  교류해왔
습니다. 그러던 중 472년에 백제가  갑자기 북위로 가신을 보내  고구려와 남조와 내통하고 
있다면서 고구려를 토벌하겠으니 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백제측의 이러한 
요청은 북위측의 완곡한 거절로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를 자극해 서기 475년
에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을 불러왔지만, 여하튼 백제가 계속해서 북위를 부추기게 된다면 
고구려로서는 언제든지 매우 위험한 상황이 닥쳐 올 수 있으므로 미연에 방지해야 했을 것
입니다. 그리하여 백제의 움직임이 완전히 둔화되는 478년까지 고구려는 해마다 2!3회식 북
위로 사신을 보내 긴밀한 유대관계를 도모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음으로는 중국 내부의 상황이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했을 것입니다.  , 
450~452년경 북위와의 전투에서 빈번이 패한 송나라는 이후 내분에 휩싸임으로써  30년가가
운 시간을 혼란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같은 기산에 북위는 오히려 정치...군사적,d로 안
정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소박한 북방계 문화대신 사치스러운 중국계 문화에 흠뻑 빠
져들고 있었습니다. 다라서 당시 고구려로서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강대둑과의 긴장을 피하
고 선진적인 문화를 보다 쉽게 많이  수입하기 위해서라고 반드시 북위와 긴밀히  교륙해야 
했을 것입니다. 
  북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중에도 고구려는 북위의 경쟁국인 남조세력과의  관계를 
게속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이중적인 태도는 사실 당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부
도덕하며 반인륜적인 행위를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가 북위에 신하를 칭하
며 조공하는 이상, 다른 나라 특히 북위의 적대국에 조공한다는 것은 마치 한 삶이 두 임금
을 섬기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세기 말엽에 남제로 가던 고구려의 사신이 북위의 군사에게 체포되는 사태가 벌
어졌습니다. 현장을 목격한데다가 물증이 분명하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북위의 효문제는  남제와의 교류가 옳지 못함
을 지적하는 원론적인 책망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서기 520년에는 남조의 양나라에 다녀오던 고구려의 사신이 다시 한번 북위 군사에게 체
포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번에는 고구려의 안장왕이  양나라로부터 받은 작호가 각종 
선물이 증거물로 압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
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중국의 남조와 북조 모두에게 조공하던 이중외교를 우리는 흔히 양속
외교라고 부릅니다. 양속외교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국제관계의 원리로  작용하던 당시의 
관점에서 본다면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부도덕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입장에
서 보면, 양속외교는 정확한 자기 인식과 상황판단이 낳은 실리외교, 자주 독립외교의  전형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해의 대중국외교의 한계
  발해의 당나라 이하 중국 왕조에 대한 입장도 기본적으로는 고구려의 태도와 크게 달았다
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상황은 달아서 이번에는 발해와 신라가  당나라를 사잉에 놓고 
경쟁을 벌이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문화란 물과 같아서 고이면 썩는  법입니다. 
따라서 항상 이웃과 교육하며 다른 문화, 새로운 문화를 많이  접해야 자기의 문화를 더 탄
력있고 건강하게 가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발해와 신라가 당시 초고의 선진국이
던 당나라와 열심히 교류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기발전방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잇습니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는 상호간의 은밀하고도 치열한 경쟁 그리고 당나라의 거대하고도  안정
된 국력 등으로 인해 외교의 주도권을 당나라에 일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발해와 신
라는 당나라 조정에서 의전 상의 서열을 다투는 데 몰두했던 것입니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열쇠를 쥐고  있던 당나라는 9세기 초엽에 설치한  빈공과라는 
과거시험을 통해 주변국들에 대한 자기 나라의 우월한 지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홍보했
습니다. 빈공진사과의 준말인 빈공과는 당나라가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따로 설치한 과서
시험입니다. 빈공과 합격자의 이름은 국내  ㅂ격자의 임름을 적은  방의 말미에 붙였을 뿐 
아니라 합격된 뒤에도 비천하거나 한가로운관직을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당나라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그리 대단치 핞은 시럼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일단 합격한  사람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습니다. 발해...신라  모두 합격한 사람에게 
큰 특전을 주며 우대했기 때문입니다. 
  신라는 서기 821년에 김운경이 처음으로 빈공과에 급제한 이후 멸망할 때까지 90명 가까
이 급제했으며, 9세기 중엽부터 참가한 발해는 10명 가까운 숫자가 급제했다고 합니다. 그런
데 빈공과와 관련된 여러 가지 단편적인 기록을 읽다 보면,  발해와 신라는 자기 나라 학생
의 빈공과 급제수 내지 장원을 놓고 경쟁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곧 당나라가 
빈공과를 이용해 발해...신라 등의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
니다. 말하자면, 당나라의 빈공과설치는 발해...신라와 같은 주변국들을 중국적 사고...고나념,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는 도 하나의  덫이엇던 셈입니다. 물론 거기
에는 '당나라 = 군사...문화적 선진국'이라는 강력한 무기와 유혹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0 - 발해, 1996.
  박시형, 발해사, 이론과 실천, 1989.
  서병국, 발해...발해인, 일념, 1990.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
  송기호, 말해정치사연구, 일조각, 1995.
  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 연구, 신서원, 1994.
  왕승예(정)...송기호(역), 발해의 역사, 한림대 아시아 문화연구소, 1987.
  임상선 편역, 발해사의 이해, 신서원, 1990.
  최무장 편역, 발해의 기원과 문화, 예문출판사, 1988.
  최무장 편역, 고구려...발해 문화, 집문당, 1982.
  송석상 편, 알아보는 문화재, 학연문화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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