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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한국의 사상

by Frais Study 2020. 5. 31.

한국 사상의 뿌리를 보여 주는 큰할아버지

단군

 

1. 한 민족의 사회적인 경험 이야기-신화

 

신화는 한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신화에는 한 민족이 집단으로

겪은 '고향의 체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한 민족의 본적지 즉

정신적 고향은 그 민족이 만들어 낸 신화속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신화에는

단순한 고고학적 측면이나 역사적인 측면을 넘어서는 어떤 원리가 있고 또 사상의

뿌리가 담겨 있다. 이것을 사상의 원형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우리 민족 사상의

뿌리에 해당하는 원형은 무엇일까 먼저 그 경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옛날에 환인이라는 하느님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환웅은 자주 하늘 아래의 인간 세계를 내려다보면서 그 세계를 탐내었고 거기에서

자기 뜻을 펴고 싶어하였다.

아버지 환인은 아들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하늘 아래를 내려다보고 세

봉우리로 솟은 태백산 언저리가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자 아들 환웅은 부하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산밑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곳을 신시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환웅 천왕이라고 하였다.

풍백과 운사 그리고 우사를 거느리고 곡식과 목숨 질병과 형벌 그리고 선악 등 인간

세계의 삼백육십여 가지 일을 주관하면서 인간 세상을 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환웅에게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수무 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곰과 범은

그것을 얻어 먹고 근신하기를 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범은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굴 밖으로 나가 버려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사람이 된 곰은

이름을 웅녀라 하였다. 웅녀는 사람이 되었으나 결혼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신단수 아래로 와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것을 본 환웅은 잠시

변신하여 웅녀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가 바로 우리의 시조인 단군 왕검이다

단군 왕검은 기원전 2333(요 임금 즉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이어서 도읍을 아사달로 옮겼다. 거기에서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 후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임금으로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으니 그때 그의 나이가

1908세였다(삼국유사)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이다. 그리고 건국 신화는 국가의 성립을 반영한다.

국가의 성립 시기는 고고학의 시대 구분으로 본다면 청동기 시대이다.

신석기 시대까지 돌로 만든 도구와 무기를 사용하다가 청동기로 만든 무기를 들고

싸우기 시작하면서 안으로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갖는 사회구조를 이루고

밖으로는 다른 집단을 복속시키는 단계에 이르러 나라라고 부를 만한 것이 생겨났다.

당시에 민족이 이동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배자가 된 이주민은 선주민을

아우르기 위하여 지배자를 높이고 선주민을 설득할 수 있는 이념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또 씨족이나 부족보다 규모가 큰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건국을 위한

투쟁과 승리를 기리고 국가의 질서를 수립하려면 권위있고 설득력 있는 이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합리적인 설명을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과 생각을 포용할 수 있어야 했다. 건국 신화는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그래서 신화는 사실 이상의 상징성을 담고 있고 또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고대인의 사유 체계를 볼 수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단군 신화를 제정 일치의

정치 사상이나 홍익 인간(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 재세 이화(세상에

나와서 이치로 교화한다는 뜻)를 핵심 이념으로 하는 우리 고대인의 정치 사상을

집약하여 표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 유구한 역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에 더하여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사유 체계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인데 사실 이 신화만큼 우리 민족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다. 단군 신화가 어느 때 한 개인의 손에 의해 작위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첨삭과 민간 전승을 거듭해 오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정착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거기에 우리 민족의 의식 구조와 가치 의식이 거의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2.한국 사상의 원형

천사상-현세적 이상주의

 

어떤 학자가 지적했다시피 시간을 나타내는 우리말에는 '어제' '오늘'이라는 단어는

있어도 '내일'이라는 단어는 없다. '내일'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라 한자어이다.

그 대신 미래를 나타내는 우리말로는 '모레'가 있다.

시간 개념으로 보면 '어제'는 과거에 오늘은 '현재'에 그리고 '내일''모레'

미래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서도 '내일'은 가까운 미래를, '모레'는 먼 미래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내일'은 구체적인 미래이고 '모레'는 추상적인 미래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지적한 학자는 우리 민족에게는 "가까운 미래는 없고 먼 미래만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볼 때 우리 민족은 현재를 중시하는 현세적인 성격과

가까운 미래보다는 먼 미래를 바라보는 이상주의를 동시에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현세주의

 

널리 알려진 대로 단순 신화는 환인 황웅 단군의 삼대기이다. 환인은 지고 지상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이고 환인의 서자라는 환웅은 천상에 속한 존재이면서 지상의

역사적 시간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천상과 지상의

상징적인 결합을 이루고 단군을 낳는다. 단군은 지상에서 태어나 지상에서 생애를

마친 지상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구조는 고구려 건국 신화인 고주몽 신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 뼈대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가 지상에 내려와 고주몽을 낳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할아버지

아들 손자로 이어지는 삼대가 있다. 그런데 두 신화에 나오는 삼대는 각각 다음과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여준다.

 

1. 환인 천제는 천상에 존재하는 초인간적 존재이다.

2. 환웅 해모수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초인간적인 존재이면서 또한 인간적인

존재이다.

3. 단군 주몽은 지상에서 태어나 지상에서 수명을 마친 인간적 존재이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은 인간 세계에 내려와 우리의 시조가 된 것은 단군과

주몽이고 그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 구조를 내포한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본래의 고향이

하늘이라는 것이고 땅에 내려왔다는 것은 현세에 대한 강한 애착을 의미한다. 환웅이

지상을 탐하였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이다

환웅 환인 단군 가운데 우리에게 신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지상에 내려온

환웅이며 그 의미는 단군에 와서 더욱 실제성을 띠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은

인간과 무관한 신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으며 인간과 관련을 가지고 인간사에

뛰어들어 개입할 때 비로소 신으로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생각했던 참다운 신은 천상에 있는 신이 아니라 지상에 있으면서 인간과 함께하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인간과 하나가 되어 있는 신이다. 곧 단군이다

이러한 현세주의는 우리 민족의 사상에서 주된 흐름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

 

이상주의-인간다운 인간되기

 

우리 민족에게 가장 의미 있는 존재인 단군은 신과 인간이 일체가 된 즉, 천과 인이

하나가 된 존재이다. 이것은 단군이 뿌리를 하늘에 두고 있는 신성한 존재임을

뜻한다. 다만 현재 지상에 살고 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지상을 천상처럼 이상적인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주창한 것이 홍익인간이고 재세이화이다

이 점이야말로 한국 사상의 가장 근본적인 특질을 이루는 것인데 우리 역사에서

그것은 줄곧 이상주의로 나타났다. 이런 가치관은 하늘을 뿌리로 생각하는 종교적인

가치관으로서 말하자면 하늘과 하나가 된 인간은 이상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이 되기

위한 전제이며 지상에 내려와서 건설한 신시는 이상적인 사회로서 현재 사회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내 마음이 곧 부처'임을 강조하는 한국 불교의 특징으로 그리고

'사람과 하늘이 간격 없는 하나'라는 한국 유학 사상으로 발전하였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 사상의 원천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단군의 출생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앞의 기록에 의하면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환웅은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쪽을 주면서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한다.

이 가운데 곰만이 목적한 바를 달성하게 된다. 21일 동안 견디었다(환웅이 약속한

것은 본래 백 일이었다. 그런데 21일로 줄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관대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불철저한 것이다. 이것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한

단면이다)는 것은 죽음의 시련을 겪고 다시 태어남을 뜻한다. 그 결과로 웅녀가

환웅과 결혼한 것을 보면 시련이란 인간이 되기 위하여 치르는 절차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동물 수준의 인간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금기와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러한 과정은 큰 인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정신 지향성을 확인하게 된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육체적 존재이자 정신을 가진 정신적 존재이다. 그런데 육체적 욕구를 중심으로 보면

인간은 많은 한계를 가진 존재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동물 일반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유형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모양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동물적 수준을 면치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범과 곰으로 상징되는

육체적 인간(동물 수준의 인간)은 백 일 동안의 금기와 수련을 견뎌 낼 수 있는

정신적 경지에 이르러야만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화를 위한 의미 있는 노력이며 단군신화에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정신'을 가진 고결한 인간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가치 의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가치 의식은 한국 선종의 중심 내용인 참선 수련으로 이어지고 또 한국

성리학의 중심 내용인 '수양 철학'으로 발전한다(자세한 내용은 본문 중 '한국 불교의

특질''한국 유학의 특질' 참조)

 

현세의 의미

 

우리 민족이 현세에 대하여 품었던 소망은 물질적인 풍요나 실질적인 이익이

아니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하늘과 소통하는 것이었다

하늘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현재 살고 있는 사회는 본질적으로 신이 사는

사회이고 따라서 이 세상은 신시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 세계는 기독교에서 말하듯

버림받고 추방당함으로써 내던져진 고난과 핍박의 저주받은 세계가 아니고 자연과

동화하면서 무한한 조화와 질서의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는 아름답고 찬란한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본 모습이 하늘이고 또 자신이 사는 세상이 신시라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자기 안에 있는 하늘의 요소를 회복하지 못하여 자신을 하늘로

인정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은 다시 동물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뿐 아니라 이

사회도 본연의 신시의 모습을 잃어버리면 동물의 왕국으로 타락한다. 따라서, 인간과

사회의 현상이 이상적이지 못할 때에는 개인적으로는 수양을 하여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이 세상의 의리를 회복하여 이 땅에 하늘의 이치를

구현해야 한다. 이러한 이상이 좌절되면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한을 갖게 된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 한은 이상의 좌절이 낳은 역사화된 민족 정서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치 의식은 한국 불교의 한 특징인 '현실 정토 사상'으로 그리고 한국 유학의

특징을 이루는 '지치주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정신적 일체주의(하나주의)

 

하늘은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은 매우 종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추상적이며 통일 지향적인 것으로 전개되어 구체적이고 분석적이며

다양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과학보다는 철학과 종교가

발달하고 산문보다는 시가 발달한 것도 그러한 가차관에 영향받은 바가 크지 않을까.

이러한 가치관은 '인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늘'을 매개로 하면 모든 인간이

똑같기 때문에 아무리 육체적인 모습이 다르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의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역사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 정서에 녹아들어 한국인

고유의 '우리 의식'을 형성했다. '우리 의식'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여 따지지 않는

공동체 문화를 이루었다. 또 소박하고 순수한 것을 좋아하고(백의 민족 백색 숭앙)

합일과 통일을 추구하게 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한국 불교에서 종파를 초월하여 화합과 통일을 도모하는 화통 불교의

전통을 만들었으며 조선조 유학을 성리학 일색으로 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체주의는 인간 내부에 있다고 믿는 하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대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심할

경우에는 파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적당한 타협에 의한 '일체'가 아닌

순수하고도 완전한 일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풍부한 발전을 이루기보다는 한결같은 일체를 추구하는 극단적인

순일주의로 흐르는 폐단도 보인다. 조선조의 사색 당쟁은 그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풍류 정신

 

하늘은 만물을 포용하고 종합하여 조화를 유도하여 자연 세계의 대조화를 이루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숭상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하나되고자 했던

우리 민족에게 '풍류'라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탈속한 것이었고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파격적인 것이었으며 결국은 자연과 하나되는 물아 일체의 고급스러운

자연주의였다.

이러한 자연주의 사상이 현실적 인간관으로 연결되면서 풍류 사상을 낳게 하였다

풍류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대화해의 사상이다.

우리 민족은 원래 가무를 좋아하는 멋있는 민족이었다 한다. 그러나 가무를

좋아했다는 것도 예술성이 강한 민족이었다는 의미보다는 집단적이고 공동적인

가무를 통하여 하늘을 받들고 인간들의 화해와 하나됨을 구현하고자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화해 정신은 신라 시대에 이르러 개인의 인격 수양의 지침이자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발전한 화랑 정신을 낳게 하였다.

또 최치원의 '삼교 융합 사상'을 낳게 하였고 여러 계파로 분리되어 발전한 중국

불교를 받아들여 하나로 원융 화통시킨 원효의 '화쟁 사상'을 낳기도 하였다.

한국인의 가치 의식에 따르면 인간다워진다는 것은 자신의 '신성'을 회복하여

고결하고 순결한 이상적인 인간이 됨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인간이

'하늘'을 공통으로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개인과 이상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현실이 이상에 부합되지 않을 때에는 그

반작용으로 개인적 이상주의가 강하게 발현되면서 개인적인 주관주의와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도 나타나게 된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공동체적 이상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에는 개인적인 개체 의식이

다 같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사상의 원형은 외래 사상인 유교 불교 도교를 모두 한국식으로

받아들이게 하였고 유 불 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민중 속에서는 유, , 도가

통합된 민간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 , 도 합일의 풍류 사상

고운 최치원

 

가을 바람에 괴롭게 읊조리노니

온 세상에 날 알아 주는 벗이 드물구나

창 밖에는 한밤의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에서 고향을 향한 만 리의 마음이 인다

(추야우중 계원필경)

 

1. 당나라 유학

 

신라 말엽 868년 열두 살 어린 소년이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고 있었다.

곁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전송하고 있었다. 아버지 최견일은 신라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를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리고 어린 아들은 장차 문장으로

당대와 후세에 이름을 떨칠 최치원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보내면서

당부하였다. 최치원은 훗날 헌강왕에게 '계원필경'을 지어 올리면서 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는 배를 타려 할 때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네가 십 년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하지 못한다면 나의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도 아들 두었다고 하지 않겠다. 그 곳에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다하여라"

당부하셨습니다. 신은 엄격하신 훈계를 마음에 새겨 조금도 잊지 않고 숼새없이

머리를 묶고 다리를 찌르는 노력을 하여 아버님의 뜻을 받들고자 하였고 그리하여

진실로 남보다. 열 배 백 배의 힘을 기울여 노력한 지 6년 만에 급제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그 모습이 한눈에 그려질 정도로 비장하다. 아버지는 기필코

성취해야 할 그 무엇을 아들에게 당부하고 있고 아들은 그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다 한다. 성취하지 못하면 아들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협박에

가까운 당부가 너무도 절실하다. 열두 살이면 만리 타국 유학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마음을 다잡는다. 그가 아들을 통하여 실현해

보고자 하는 소망은 아주 간절한 것이었다. 그러한 소망을 갖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는 타고난 혈통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엄격한

골품제의 통일 신라였다. 그리고 최치원의 가문은 진골 가족에 비해 차별받는 육두품

귀족이었다.

최치원은 결국 아버지의 꿈을 이루었고 재능을 발휘하여 중국에서도

인정받는 문장가가 되었다. 그가 남긴 글로는 스스로 엮어 펴낸 계원필경이 있고

왕명을 받고 지은 사산 비명을 비롯하여 많은 비문이 있다. 동문선이라는 책에 실린

신라인의 작품이 모두 192편인데 그 가운데 최치원의 것이 146편이나 된다.

후세 사람들은 최치원을 동국의 문종으로 추앙하였고 동방 문학의 달마 조사라고

일컬었다

 

2. 골품제

 

삼국 통일은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대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통일 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정비한 것은 그의 아들 신문왕에 이르러서이다. 늘어난 주민과 넓어진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행정을 정비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여야 했다.

그를 위하여 신문왕은 유학을 정치에 반영하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마립간 이사금등의 호칭이 중국식 호칭인 ''으로 바뀌고 국호와 연호 지명 등이

한자식으로 개정되었다. 그리고 신문왕 때에는 국학이 설치되고 이어 원성왕 때에는

유학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과 문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독서 삼품과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개혁은 사회 구조의 전면적 개편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지배적인 이념은

여전히 귀족 불교였고 신라 하대로 내려올수록 진골 귀족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으며 엄격한 골품제의 벽은 더욱 높아졌다. 삼국은 통일되었어도 화쟁의

논리로 상하를 아우르려는 원효의 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라벌의 귀족들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백성의 고난은 가중되었다. 같은 귀족이라도 진골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

등의 골품제에 의한 구분이 있었고 육두품의 정치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설령 탁월한 재능이나 경륜이 있더라도 진골 중심의 체계를 정치적으로 밑받침해

주는 구실밖에 할 수 없었다.

육두품 이하의 지식인들은 아무리 뛰어난 실력과 덕성을 갖추었더라도 행정 실무에

종사하는 기술자 이상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육두품 지식인들은 지배 체제의 큰 불만을 품었고 이를 해소하는

한 방법으로 당나라 유학을 택했다. 당나라는 과거를 통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 제국으로서 주변 민족을 무마하고 포섭하기 위하여 외국인을 과거에

의해 등용하는 빈공과를 두어 실시하였다. 육두품 지식인들은 당나라를 능력을

기르고 시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당나라의 선진 문화를 도입함으로써

신라 집권층의 보수적인 의식에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하였다. 당나라

유학은 이를테면 인재를 능력에 따라 등용하지 않는 신라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유학의 형태는 당나라 측에서 비용을 대서 숙위라는

이름으로 공부하게 하는 것 신라 조정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 개인이 사비로

가는 것 등으로 다양했는데 837(희강왕 2)에는 당나라에 유학 간 학생이 한

해에 216명이나 되었다. 유학 기간은 10년으로 정하여 그 사이에 급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최치원은 바로 그 일을 해냈던 것이다

 

3. 성공과 번민

 

머리를 묶고 다리를 찌르는 노력으로 18세에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은 2년간의

유랑 끝에 당나라 선주의 표수현위가 되었고, 이어 절도사 고변의 막하에서 4년간

종사관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때 황소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는 고변을 대신하여

황소를 토벌하기 위한 격문을 써서 일약 문명을 날리게 되었다.

황소 토벌에 공을 세운 최치원은 더욱 높은 벼슬에 올랐고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황제의 대궐을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당나라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이국인으로서 당나라에서 출세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타국 생활이 주는

고독과 서글픔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최치원은 늘 고향을 그리워했고 자신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다. 세계 제국의 국제인이면서 엄연히 변방의

외국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느껴야 했던 소외감은 심각한 것이었다. 이 고민을 그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해내(당나라)의 누가 해외의 사람을 가엾게 여기리

묻노라 어느 길이 내가 갈 나루로 통하는가

애초에 식록을 구하였을 뿐 이익을 구하지 않았고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였을 뿐 내 몸 위하지 않았다

나그네 길 이별의 시름은 강 위의 빗소리요

고국에 돌아가는 꿈이 아득히 멀구나(최문창후전집)

 

"해내의 누가 해외의 사람을 가엾게 여기겠는가"라는 표현이 그가 변방의 힘 없는

나라 국민으로서 느끼고 겪어야 했던 소외감과 고난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비록 당나라가 세계 제국을 표방하고 외국인에게 과거 기회를 주고 벼슬을 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세계 지배를 위한 것이었고 주변 민족들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나라 황제에게 자금어대를 받을 정도로 문명을 떨쳤던 최치원이 '당서'

'문예열전'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 문제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규보가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지적했듯이 그런 사실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했을 뿐 아니라 그의 문학이 결국은 중국 문학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신라(한국)인이고 결국 그의 문학은 신라 문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진골 중심 체제에서 차별받는 처지에 불만을 품고 중국으로 갔으나

중국에서는 다시 외국인으로서 고난과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으로서 받는 고난은 신라에서 육두품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차별보다. 더욱

큰 것이었다. 재능을 발휘하고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건만 출세에는 한계가 있었고

또 평가를 받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자신 만만한 학문과 재능으로도 급제후 "낙양에 유랑하여 붓으로 밥거리를 삼았다"

술회한 것처럼 2년이나 벼슬을 얻지 못하고 방랑해야 했고 그 후에도 구석진 곳의

한직인 현위 벼슬을 지냈을 뿐 태반은 고변이라는 무장의 서기로 지내면서 그의

주장을 대필해 주기가 고작이었다.

'토황소격문'으로 평가를 받은 뒤에 몇 차례의 승진도 했지만 앞서 말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었다. 이국인으로서 이제 더는 활로를 찾을 수 없었던 최치원은

귀국을 결심하였다. 이에 고운이라는 당나라의 시인이 아쉬워 시를 지었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 건너와

글로써 중국 천지를 흔들더니만

열여덟에 과거 마당에서 싸워

단번에 급제 한 장 쏘아 맞혔네

 

최치원은 이렇게 답하였다

 

열두 살의 철모르는 나이에

중국에 실날같이 들어왔다가

은하인 양 찬란한 젊은 나이에

비단옷 입고 동국으로 돌아가려오(최치원전 삼국사기)

 

그리고 스물아홉의 나이로 귀국하게 된다

 

4.한국 사상의 뿌리 찾기

 

동방 사상과 군자국

 

최치원은 중국에서 화려한 문화에 접함과 동시에 이국인의 설움과 소외를 맛보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역시 신라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에서 키운 안목으로 신라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으며 자기 뿌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 있으면서 느꼈던 고독과 소외감은 오히려

제 나라 신라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하였다.

최치원은 본래 우리의 것 그리고 우리의 본바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본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 나라를 동방이라 하고 군자국이라 하였으며

우리 민족을 나름대로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빛나고 성대하고 실다워서 온 누리를 비춰 주는 것으로는 태양처럼 고른 것이 없다

기운이 화평하고 만물의 성공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는 봄바람처럼 넓은 것이 없다

봄바람이나 태양은 모두 동방에서 나온 것이다. 하늘이 이 두 가지를 뽑아 특별히

하나의 신령함을 주어 군자의 나라에 태어나게 하였다(무염화상비명)

 

동방에서 시작된다는 태양은 '빛과 밝음 그리고 흰색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형상을

표상한 것이 바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이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우리의 고어에서 왕의 성으로 알고 있는 해가 실제로는

태양을 의미하는 ''의 음역이며 왕의 호칭을 '불구내'라 한 것도

불구레(붉으레)라는 태양의 광휘를 취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특히 신라의 경우에는

그 시조인 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그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박은 ''이라는 광명을

나타내고 혁이란 붉은 적이 두 개 합하여 진 것이니 거서간을 '해의 밝음'을 나타낸

것이다. 거세는 세상에 거한다는 것이니 거서간을 박혁거세라고 이름붙인 것은

광명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근거로 하여

우리 나라를 빛날 환자를 써서 환국이라고도 한다. 이는 우리 고대 건국 신화에서

난생 설화가 주류를 이루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동방이라 함은 얼핏 보기에는 중국을 중심에 놓고 볼 때 동쪽이라는

뜻이지만 의미상으로 살펴보면 밝고 포용력이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최치원은 이어서 "동방국의 사람은 성질이 유순하고 또 지기는 좋은 물건을

생산하게 하며", "군자국의 풍속은 예의가 바르고 작작하여 여유가 있다"고 함으로써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십 년 가까이 외국에서 활동하면서 그리워한 것은 바로 '고향의 정신'이었고

'고향의 정신'에 대한 그리움은 자기 뿌리의 확인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동방

사상이었고 군자국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었다.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우리는 밝고 포용력이 있으며 하늘을 숭상하는 군자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 , 도 합일의 풍류 정신

 

동방의 군자국이라는 선민 의식을 가진 최치원은 동방 사상의 내용으로 '풍류'

들고 있다. 풍류란 밝고 포용력 있는 하늘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조화시키는 정신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유교와 도교 불교를 서로 다른 사상으로

보지 않고 세 사상을 조화시켜 보려고 하였다. 그는 난랑이라는 화랑을 기리는

비문에서 삼교 사상의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여기에서 한국 사상의 뿌리를 찾으려는

그의 목적 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는 실로 삼교를 포함한다. 들어가

집에 효도하고 나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에 처하고

불언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 악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선을 받들어

행하게 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

 

삼교를 풍류라 하고 그 내용을 현묘한 도라 하였다. 유교의 가르침을 충효라 하고

도교는 무위 불언 불교는 선이라 하였으니 똑같다고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치원

사상의 일관된 맥은 태양이 하나인 것처럼 '(진리)는 하나'라는 것이고 도의

관점에서 보면 삼교가 궁극에서는 하나의 도로 통하여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차이를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 , 도 삼교 사상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유, ,

도의 도가 따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한 스님의 비문을 쓸 때에도 불교에 관해서만 쓴 것이 아니라

사서 오경은 물론 유교 경전을 두루 인용하고 노자, 열자, 장자, 회남자, 신선술 등

도가의 맥을 망라하면서 불교의 설과 비교하여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의 박학 다식을 보여 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세 가지 사상을 하나로

융합되어 있거나 단계적 차이를 갖는 하나의 사상으로 파악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부처와 공자의 학문이 출발점을 달라도 귀법은

하나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최치원뿐 아니라 신라 전체가 공유하고 있던 사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화랑도로 대표되며 이것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화랑도 정신이야말로 '하늘과 인간은 하나'라는 사상에 뿌리를 둔 삼교 사상이 모두

용해된 대화해의 사상이었다. 아울러 사회 사상으로 발전한 철학 체계이자 종교적

신념이기도 하였다. 최치원이 현묘한 도라 한 것은 바로 이 화해 사상을 일컫는

것이다.

중국에 있으면서 우리의 전통을 새로운 안목으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최치원이 발견한 우리의 뿌리는 바로 화해와 조화의 큰 정신이었던 것이다

 

5. 신선이 된 비운의 사상가

 

최치원의 화려한 영광의 이면에는 고뇌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그는 이룰 것을

다 이룬 사람이 아니었다.

귀국 후의 최치원은 자기 뜻을 만족스럽게 펴 보이지 못했다. 귀국 직후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경륜을 펴 보려 하였으나 신라의 집권층인 진골 귀족들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당시의 신라 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국가의

재정은 아주 궁핍한 상태였다. 진성 여왕의 실정은 극에 달하였고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이 내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최치원은 중앙과 지방 관직을

전전하면서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개혁안으로 시무책 10여 조를

제시하였으나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여졌을 뿐 실행되지 않았다. 육두품으로서는 최고의

관직인 아찬에 올라 개혁에 힘썼지만 사회 모순을 외면하던 진골 귀족에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였다.

자신의 충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라 왕실에 대한 그의 실망과 좌절은 아주 큰

것이었다. 그는 40여 세 장년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은거의 길을 택했다. 당시의

사회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빚어 내는 심각한 갈등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세속을 등지고 바람따라 구름처럼 떠돌면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다음의

시는 당시에 그가 느꼈을 심정을 잘 전해준다.

 

첩첩한 돌 사이 미친 듯 내뿜어 겹겹 봉우리 울리니

사람 말소리는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항상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림을 두려워하여

짐짓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둘러싸네

 

그러나 최치원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족했던 것도 아니었고, 밭 갈고 김매는

농사꾼이 된 것도 아니었다. 당나라 유학이 그러했듯이 은거 또한 제 뜻을 펼 수

없는 현실에 맞서는 한 방편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자

신라 말 삼최라고 불리던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가운데 최승우는 후백제를 최언위는

고려를 택하였다. 최치원은 "계림(신라)은 시들어 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고려)

곡령은 푸른 솔"(삼국 사기)이라는 서한을 왕건에게 보내 고려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다. 하나, 고려 왕조를 택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야산에서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이인로의 '파한집'에서는 최치원의 마지막을 이렇게 전한다.

 

어느 날, 그는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는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다.

다만 갓과 신발만이 숲 속에 버려져 있었다. 아마 신선이 되어 간 것일 게다.

 

갓과 신발만 남겨놓고 사라진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민간에서는

그것이 전설로 전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신선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살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어쨌든 현실에서

맛본 좌절과 안타까움을 자연으로 달래다가 끝내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만 것이다

 

 

화쟁과 절대 자유의 고승

원효

 

쟁론은 집착에서 생긴다. ...불도는 넓고 탕탕하며 막힘이 없다. 그러므로 해당하지

않음이 없으며 일체의 다른 의가 모두 부처의 뜻이다. 백가의 설이 모두 옳지 않음이

없고 팔만의 법문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러나 견문이 적은 사람은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견해에 찬동하는 자는 옳고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그르다하니 이것은

마치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본 사람이 그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모두 하늘을 보지 못한 자라고 깔보는 것과 같다(십문화쟁론)

 

1.해골 물을 마시고 얻은 진리

 

신라 진덕 여왕 4(650), 늘 자기의 배움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승려가 있었다.

법명은 원효라고 하였는데 항시 부처님께 자신을 가르쳐 줄 높은 스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이 찾아왔다. 의상은 진골 출신의 승려였는데

둘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밤을 세워 불경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음을 나누었다. 문득 한 사람이 말했다.

"아무래도 불법을 완전히 배우려면 당나라에 가야지요"

"예 옳은 말씀입니다"

두 사람은 불교를 더욱 깊이 공부하려면 불교의 역사가 깊은 당나라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육로를 이용한 첫 번째 시도는 요동 지방에서 고구려 국경 수비대에 체포됨으로써

좌절되었다. 신라의 간첩으로 오인되어 신라로 다시 쫓겨온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나라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10년 후 이번에는 해로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때 원효가 45세 의상은 37세였다

당나라로 가는 배편을 안내받은 두 사람은 배를 타기 위하여 당주계(지금의

남양만)로 가고 있었다. 걸어서 당주계 근처의 산기슭을 지나고 있을 때 해가

저물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날까지 흐려 사방을 분간조차

하기 힘들었다. 별 수 없이 길을 더듬어 잘 곳을 찾아보았다. 간신히 하늘을 가릴

만한 곳을 한 군데 발견하고 두 사람은 바랑을 베고 누웠다. 피곤했던 탓인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원효는 목이 말라 눈을 떴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혀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골짜기로 내려가면 물을 마실 수 있겠지만 어두워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별 도리 없이 참고 있던 원효는 뭔가가 손에 닿는 것을 느꼈다.

물바가지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 안에는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정신없이 물을 들이켰다. 그것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시원한 맛이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날이 밝자 두 사람은 일어나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주위에 뼈다귀 같은 것들이 많이 있었다. 살펴보니 그들이

잔 곳은 낡은 무덤이었다. 기가 막힌 듯 사방을 둘러보던 원효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자기의 머리맡 바랑 옆에 해골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썩은 물이

반쯤 고여 있는 것이 아닌가 원효는 몸을 떨며 구역질을 해 댔다.

두 사람은 허둥지둥 무덤을 나와 갈 길을 재촉하였다. 당주계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두 사람은 또 하루를 근처의 인가에서 보내게 되었다. 피곤한 탓인지 의상은 곧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아무리 잠을 자려고 애를 써도 잠이 들지 않았다.

"허어 세상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이상하였다. 의상은

아무 일도 없이 잠을 잤는데 자기만 목이 타는 듯하여 깬 것도 이상하였다.

"게다가 밤에 마신 물이 그토록 시원하고 달지 않았던가 그런데 썩은 물인 줄을 안

뒤에는 이렇게 괴롭다니"

그는 지난 밤 해골 물을 마시기 전과 물을 마신 후의 자기를 비교해 보았다

어느덧 부옇게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날이 밝는 줄도 모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원효는 갑자기 큰 소리로 "아하 내가 미처 몰랐구나!" 하고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나는 이제껏 불법을 공부하였지만 헛공부를 하였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모든

분별은 마음에서 생긴다고 하지 않았는가? 간밤에는 시원하다고 여겼으면서 해골

물인줄 알자 구역질을 하고 잠을 자지 못하였다. 더럽다는 것은 모두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면 극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바로 극락일 수도 있다. 불교의

근본 이치는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이치를 바로 깨닫기만 한다면 구태여

불법을 배우기 위하여 다른 나라에 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허어 진리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그는 기쁜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어 길을 떠날 채비를 마친

원효는 환한 얼굴로 의상을 바라보며, "불법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 나는 내

나라에서 마음의 법을 구하도록 하겠소" 하며 의상만을 당나라로 떠나 보냈다.

그리고 '진리는른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깨달음을 얻고 10년을 별러 온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서라벌로 돌아왔다.

원효(617-686)는 우리 사상사에서 우뚝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신라의 고승이다.

성은 설씨이고 속명은 서당이다. 육두품의 귀족 출신이고 경상 북도에 있는 경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친정에 가던 길에 밤나뭇골이라는 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를 느껴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하고 거기에서 열린 밤이 이상하게 커서 서러밤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의 어머니가 유성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하며 해산할 때에는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는 소년 시절에 대부분의 귀족 자제들이 그런 것처럼 화랑이 되었다.

그는 화랑 시절 거듭되는 고구려 백제와의 전투를 치르면서 숼 새 없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며 본뇌하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그처럼 쉅게 죽어 버리는 것이

너무 허무하였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자기 집을

헐어 초개사라는 절을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32세 되던 해에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지 않았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경전을 공부하여 한국

불교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기록에는 고구려에서 망명한 보덕을 스승으로 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시대로

보아서는 당시의 고승이던 원광(세속 오계를 지은 고승)이나 자장으로부터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원효는 스스로 경전을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하다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돌아와서 자신의 독창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우리 나라 최고의 고승이요 사상가가 되었다

 

2. 신라의 귀족 불교와 원효의 민중 불교

 

의상과 헤어져 서라벌로 돌아온 원효는 이전의 원효가 아니었다.

계율만을 엄히 지키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스님이 아니라 속인과 같은 행동을

거침없이 해내는 사람이 되었다.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고기도 먹었고 먹지 말라는

술도 마셨다. 여자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을 무시하고 기생이 있는 술집에도

드나들었다. 이를 보고 모두가 비난하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금도

거리낌없이 행동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당당하였다. 그는 진과 속은 다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풀어보면 이렇다.

 

불경에 염정 무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이 속된 짓이며 계율을 어기는 짓이라고 하지만

속된 것과 참된 것은 다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없고 길고 짧은 것이 없으며 좋고 싫은

것이 따로 없었다. 그런 그에게 계율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가 구분될 리 없었다.

그는 별다른 이유 없이 미친 사람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사람들을 놀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가야금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또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좌선을 하기도 하는 등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을 하지 않았다. 행동 또한 뚜렷한 어떤 규범을 따르지 않았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받았던 밥상을 내동댕이치는

방법으로 교화하기도 하고 또 입 안에 물고 있던 물로 불을 끄기도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똑같은 시간에 여러 곳에서 똑같음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온 천하를 다 뒤져도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는 백제와의 싸움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되어 살고 있던,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 공주와 관계를 맺어 아들 설총을 보았는데, 이 실계는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으로 전환하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후 그는 스스로

소성거사라고 칭하면서 속인 행세를 하였다.

 

신라의 귀족 불교

 

원효는 삼국 통일을 전후한 다툼의 시대를 살았다. 밖으로는 고구려 백제와 싸우고

안으로는 귀족과 일반 백성이 화합하지 못하고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면서

불교와 세속 사이에서 그리고 불교의 여러 종파 사이에서 논쟁과 다툼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다툼은 강한 쪽이 이김으로써 해결된다고 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원효가 보기에는 그것은 무책임하고 옹졸한 생각이었다.

다툼은 싸워야만 결판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서도 결판을 낼

수가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다툴 만한 일이 아닌데도 다툰다고 생각하게 되면 다툼을

근본적으로 해결학 수도 있다. 그리하여 다툼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논리를

발견하고 그 해결의 길을 연 사람이 바로 원효였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유명한

화쟁 사상이었다.

신라 불교는 고구려나 백제의 불교보다 늦게 정착하고 더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 후 일단 공인된 다음에는 스스로 왕이면서 승려까지 겸했던

법흥왕과 진흥왕의 보호에 힘업어 국가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그 때문인지 신라 불교는 다분히 국가 주도의 귀족 불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진흥왕 때 원광(542-640)이 이른바 세속 오계를 편 것은 불교가 신라 귀족 사회의

이념으로 자리를 굳히고 세속의 문제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국가적인 단합을 이룩하는 데 불교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라가 원래 부처의 나라이고 신라 왕이 바로 부처라는 이른바

불국토사상이 형성되었다

훗날 진골 출신인 자장, 원측, 의상 등의 고승이 나타나면서 신라 불교는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자장은 계유을 내세우며 엄격한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원측은 그 난해하기로 유명한 유식론을 심오한 경지까지 연구해서

중국에서의 유식학을 이끌어 나가는 역량을 보였다. 또 의상은 화엄 사상의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신라 귀족사회의 기본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신라의

귀족 불교는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국왕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진골 귀족의

이념으로 자리를 굳힌 귀족 불교는 지배 체제를 옹호하는 구실을 했으며

일반인으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고답적인 정신 세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원효는 이러한 추세에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민중 불교로의 전환

 

원효는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고 분열과 갈등에서 벗어나 거리낌없이 살아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유와 무의 구별을 넘어서고 진과 속을 아우르는 데 진정한 삶의 길이

있다면서 귀족적이 편견을 깨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옳은 도리를 깨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데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불교의 교리를 연구할 뿐 아니라 그

교리를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졌다"고 하고 "진리는 자기의 마음 속에 있다"고 하면서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주막에서 술손님들과 어울려 소리 높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저 노는 것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불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광대가 이상한 모양을 한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것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광대 흉내를 준비하였다. 광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퍼뜨린다면 배운 것이 없는 백성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마을에서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화엄경의 이치을 담은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그것은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이었는데 노래 이름을 무애가라 하고 두드리고 다닌 바가지를 무애박이라

하였다. 무애란 '걸림이 없다' 또는 '구애됨이 없다'는 뜻이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도 무애가를 부르면서 불법을 조금이나마 나누게 되었고

민중 속에서 불법이 점차 확산되어 갔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효는 무애박을 두드리고 무애가를 부르며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다녔다. 그래서 가난하고 몽매한 무리들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염불 한

마디는 다 하게끔 되었으니 원효가 끼친 교화는 참으로 컸다(원효불기조)

 

그러나 원효의 그런 행동을 다른 승려들은 손가락질하며 못마땅히 여겼다.

한번은 국왕이 고승 100명을 초청하여 나라의 태평과 발전을 비는 '인왕경 대회'

열었는데 이때 인왕 반야경을 강의할 법사로 원효가 추천되었다.

그러나 여러 승려가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잡인배들과 어울리는 파계한 사람이니

법사로 모실 수 없다"고 하여 원효가 참여하지 못할 정도였다.

원효는 이러한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러면서 귀족과 일반 백성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고 중생과 부처를 둘로 나누지

않으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넘어서는 원융 회통(모든 것이 융합되너 하나로 통합

된다는 사상)의 화해 사상을 완성하게 된다.

 

3.원효의 사상

 

원효는 평생 불교의 이론을 탐구하여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 '반야경',

'열반경', '아미타경' 등 대승 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밝게 통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차원

높은 사상 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조화의 사상을 화쟁 사상이라고 한다

원효는 '하나의 마음'이라는 근본 개념으로 불교 각 종파의 이설들을 포괄하고자

하였으며 해동종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리를 완성하여 신라 불교의 이론적 기초를

닦고 신라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에 이르렀다. 모든 종파을 통합하고 있다고 하여

이를 '통불교'라고 한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만물은 '하나의 마음'으로 통한다는 '일심 사상'과 그로 인하여

모든 다툼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화쟁 사상이다.

 

화쟁 사상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에 다투게 된다. 유에 맞서서 무를 주장하고 진에 맞서서 속을 주장하며

한 부분에 맞서 다른 부분을 주장하는 것이 다툼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그런데 원효는 이러한 다툼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화쟁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이설을 열 가지로 모아 정리하면서 쟁론은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하고 열반 진여(참된 본체) 등으로 지칭되는 마음의 근원을

향하게 되면 쟁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한 마음의 근원은 있고 없음을 떠나서 홀로 깨끗하다. 그리고 불법의 바다는 진속을

아우르며 고요하다. 둘을 아울렀어도 하나가 아니고 홀로 깨끗하다.

그러므로 주변을 떠났어도 중심이 아니다. 중심이 아니면서 주변을 떠났기 때문에

있지 않다고 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또 없지 않다고 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아울렀으니 참된 것이 아니라 하여 세속적인 것이 되지 않고

세속적이 아니라 해서 참된 것이 되지도 않는다(금강삼매경론)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발하자면 있는 것과 없는 것 참된 것과 세속적인 것

주변과 중심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는 길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둘 사이의 중간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사태를 깊이 살펴서 깨닫고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인데 '있다' '없다', '참된

'이다 '세속적인 것'이다, '주변'이다 '중심'이다 하면서 다투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철저하게 논파한다.

원효는 "다툼은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고 "견문이 적은 사람이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견해에 찬동하는 자는 옳고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그르다고 하니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흉보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면서 다툼은

상황이나 사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 그 자체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아우르고 둘을 아울렀으면서도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다툼에 휩쓸리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다툼의 현장을 떠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대단히 역설적인 것이어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밖의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마치 부정의 부정'과 같은 역설인데 원효는 이것을

마음의 근원을 열반이나 진여로 지칭하는 것에 대하여 논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원효에 의하면 마음의 근원이라는 것은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마음이지

피안의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열반이나 진여니 하는 것은 마음의 근원을 피안의

그 무엇으로 오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는 이렇게 말했다.

 

열반의 도는 도가 아니면서 또 도 아닌 것도 아니다. 머무르지 않으면서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것은 그 도가 아주 가까우면서도 아주 멀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고 또 고요하면서도 시끄럽다는 것을 알려 주는 증거이다(열반경종요서)

 

이 말은 역설에 또 역설을 거듭한 것인데 여기서는 도도 부정되고 도 아닌 것도

부젇되며 머무르는 것도 부정되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부정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도와 도 아닌것 머무르는 것과 머무르지 않는 것

고요한 것과 고요하지 않은 것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다 부정하면서 또한 인정하는

역설이다. 이 역설은 부정이 귿 긍정이고 다툼이 귿 화해라고 풀이할 수 잇는 것으로

원효가 내세운 화쟁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논리로 보이지 않고 비논리로 보인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도와 도 아닌것 머무르는 것과 머무르지 않는 것 나아가 유와 무, 진과 속 등은

같은 것이 아니다. '있음''있다' 하고 '없음''없다' 하며 '참된 것'

'참된다' 하고 '세속적인 것''세속적'이라고 해야 이치에 닿는다. 그러나 원효는

그것은 말의 이치이지 이치의 이치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말의 이치 때문에 파괴된

이치의 이치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유이면 유이고 무가 아니라는 것은 말

때문에 이치가 파괴된 모습이고 유이면서 무라고 하는 것은 파괴된 이치의 이치가

회복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말로 하는 언설은 어느 것이든 일방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말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모든 언설은 다만 거짓 이름에 지나지않는다. 그래서 실상과 단절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언설에는 망념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앎과는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대숭기신론소)

 

이런 말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마음의 근원'을 돌이키는 길이다. 그리고

이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여 진리의 세계에 들자는 사상이 바로 '일심 사상'이다.

 

일심 사상

 

원효는 인간은 성인이건 범부이건 누구나 물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불성이 마음의

근원으로서 이를 회복한다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마음의 근원이 바로 '일심'인데 그는 이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축이며 이 일심이

구현된 세계가 바로 불국토인 극락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대승이며 열반이라고 하였다.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다는 것은 마음을 깊이 통찰하여 일체의 차별상을 없애고

만물이 똑같이 평등함을 깨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물을 차별없이 사랑하는

대자대비의 마음을 얻는 것인데 누구나 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처와 중생을 별개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중생의 마음은 모든 것을

아울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큰 바다와 같기

때문에 모두 평등하고 일체의 차별상이 없다"고 하고 있다. 말하자면 조금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의 마음에 깃들여 있는데 다만 사람들이 아직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마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육바라밀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육바라밀이란 대승 불교의 수행 덕목으로서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여섯 가지 수행법이다. 그 내용은, 1. 남에게 재물이나 참된 진실을 베푸는

보시, 2. 계율을 잘 지키고 선행을 하는 지계, 3. 온갖 모욕과 번뇌를 참고 어려움을

이기는 인욕, 4. 순수하여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꾸준히 노력하는 정진, 5. 절대의

진리를 얻기 위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고 사념과 망념을 제거하는 선정, 6. 반야의

지혜를 얻고 수행하는 반야 바라밀이다. 이 여섯 가지를 꾸준히 실천한다면 마음을

다스려 부처의 마음인 일심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생이 힘써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스리는 중생은 반드시 큰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열반경종요)

 

그래서 그는 "조금도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고 하여 이

마음을 회복한다면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절대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무애(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철저한 자유의

상태)사상'이라고도 한다.

 

4. 살아있는 부처

 

원효의 저술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금강삼매경론'이다. 이것은

'금강삼매경'이라는 불교 경전에 원효가 주를 달아 설명한 것인데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송나라 '고승전'에 전한다. 그러나 실제로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책에 의하면, '인왕경 대회'에 원효가 다른 승려들의 반대로 참석하지 못한 얼마

후 왕후가 종기를 앓았다. 아무리 약을 써고 효험이 없었고 왕자와 신하들이 기도를

올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어느 무당이 다른 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약을 구하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가는 도중에 바다 물결을 헤치고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사신들을 용궁으로 안내했다. 용왕은 사신들에게 "당신들

나나릐 왕후는 원래 청제의 셋째 공주이다. 우리 용궁에는 '금강삼매경'이라는 불경이

전해 오는데 원만하게 열린 보살행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신라 왕비의 병을 좋은

인연으로 삼아 이 불경을 당신들의 나라에 보내고자 사신을 부른 것이다" 하며 책을

주었다고 한다.

신라 조정에서는 이 책을 놓고 당시에 고승으로 이름난 대안스님에게 강설을

부탁하였다. 대안은 이 책을 차례대로 정리한 후 왕에게 "이 책을 강설할 사람은

원효밖에 없습니다. 속히 그를 불러 강설하게 하십시오" 하며 물러났다.

그리하여 원효는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 세권을 지은 뒤 황룡사에서 설법하게

되었다. 왕을 비롯하여 왕비 왕자 공주 그리고 여러 대신들과 전국의 절에서 온

고승들에게 그는 설법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

정연하게 장내에 퍼져 모든 사람이 원효를 우러러보며 귀를 기울였다.

왕도 왕비도 그리고 원효를 비방하며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들도 모두가 원효의

막힘 없는 강설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장내의 여기저기에서 그에

대한 찬사가 일기 시작하였다. "원효는 산 부처이다" "원효는 보살의 화신이다"

긴 설법을 마친 원효는 장내를 다시 한번 훑어보며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나라에서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감히 그 속에 끼일 수 없더니,

오늘 단 한 개의 기둥을 찾을 때에 홀로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소.

 

이 말을 듣고 그를 비방하며 '인왕경 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반대하던 스님들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쩔쩔 매었다고 한다.

이 책 '금강삼매경'은 중국에까지 전해져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의 마명 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또 하나의

대표적 저술인 '대승기신론소'와 함께 중국의 고승들에게 격찬받으며 즐겨 인용되었다

한다 이로써 원효는 그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5. 철저한 자유인 원효

 

황룡사에서 설법한 뒤로 원효는 절에 파묻혀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모든 불경을

차례로 파헤쳐 정리한 것이 모두 140여 권에 달한다고 하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금강삼매경론'을 비롯하여 '십문화쟁론', '화엄경소', '법화경종요',

'대승기신론소' 23권에 지나지 않는다.

686(신문왕 6), 그는 70세의 나이로 산 속에 있는 토굴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들 설총이 아버지의 유해를 가루로

만들고 대사의 모형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해서 생전에 함께 지내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여겨 엎드려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갑자기 원효의 상이 설총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아들을 낳고도 함께 지내지

못한 것을 슬퍼한 원효가 죽은 후에나마 그 아들의 모습을 똑똑히 보고자 일으킨

기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뒤에도 돌아보는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혼자 공부하여 독창적인 우뚝한 사상을 이루었으면서도

광대가 되어 광대 스승에게서 배우고 무애박을 두드리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민중 속을 돌아다닌 원효는 편협한 주장에 사로잡히지 않는 보편적 인간이었다

그는 귀족적 편견에서 벗어난 민중적 인간이었으며 분열을 극복한 통일적

인간이었다. 그러면서도 철저한 자유 정신의 소유자였고 또 실현자였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만물을 차별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대자 대비의

부처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었고 또 일체의 구애가 없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시대의 사상적 문제를 해결한 독창적 이론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의상, 자장, 혜공 등과 더불어 신라 10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한국 불교의 특질

 

부처님께서 교외 숲 속을 제자들과 거니실 때의 일이었다. 마침 낙엽들이 뒹굴고

있는 것을 보시고 부처님께서는 그 낙엽을 한 웅큼 쥐시고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내 손에 있는 나뭇잎과 저 숲 속에 있는 나뭇잎 중 어느 것이 더 많으냐?"

"그야 숲 속의 나뭇잎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설한 가르침은 손바닥의 나뭇잎 정도로 적고

내가 설하지 않은 부분은 저 숲 속에 있는 나뭇잎처럼 많으니라"(상응부)

 

1. 근본 불교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통하여 진리를 얻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불교를 연 고타마 싯타르나는 26백 년 전 인도의 작은 나라인 카필라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인간이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즉는 네 가지 고통에 시달리는

것에 관하여 깊이 회의하고 그 답을 구하기 위하여 지위와 명예를 버리고

출가하였다. 그리고 6년간의 피나는 정진 끝에 큰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그는 인간이 유한한 시간 속에 던져져 병들고 언젠가는 마침내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있는 것에 관하여 먼저 회의하였다. 그리하여 유한한 인간의 실존

그 자체를 '괴로움'으로 보고 '어떻게 하면 이 괴로운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중심 문제로 삼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제자와 나눈 대화에서 잘

나타난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부처에게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이시여, 인간은 사후에도 존재하는지요?"

그때 명쾌한 대답을 기대하는 제자에게 부처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느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때 그 화살은 누가 쏘았고 또 어떤

방향에서 왔으며 독의 성분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일이 급한가 아니면 응급 치료를

하는 것이 급한가"

"물론 화살을 뽑고 응급 처치를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러자 부처는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공론이 아니라 괴로운 현실을 알고 이를

극복하는 일이다.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지혜화 깨달음의 길이요 열반의

길이다"

 

십이 연기

 

연기(인연이 되어 일어나는 것)의 진리에 의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럴 만한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생겨난 것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도

이유없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조건과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원인을

알면 그 괴로움을 해결할 길도 열릴 수 있다

십이 연기는 연기의 진리를 인간의 삶에 적용하여 조명해 본 것이다.

즉 괴로움이 어떻게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 살펴보니 열두 가지 인연의

고리들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면서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이 연기라 한다.

열두 가지 인연의 고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노사:인간이 괴로운 것은 늙어 죽기 때문이다

2. :늙어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이다

3. :태어난 것은 업이 있기 때문이다

4. :업이 생긴 것은 욕심을 부려 집착이 있기 대문이다

5. :집착이 생긴 것은 사랑함이 있기 때문이다

6. :사랑하는 것은 좋다. 싫다 하는 고락의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7. 촉 고락의 감정이 있는 것은 접촉하여 인식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8. 육입:인식 작용이 있는 것은 눈 귀 코 혀 모 의 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9. 명색:감각 기관이 작용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주체가 있기 때문이다

10. :몸과 마음의 주체가 있는 것은 나라고 하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11. :나라는 의식이 있는 것은 행위의 업이 있기 때문이다

12. 무명:행이 있는 것은 광명한 지혜를 가지지 못하고 무명의 어둠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열두 가지 연기는 계속해서 연쇄 반응을 일으키면서 괴로움을 일으키는데

이 마지막의 무명을 깨달아 그것에서 벗어나는 순간 밝은 지혜를 얻어 ''해지고,

''라고 하는 자기를 의식하는 행위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 '나의 몸' '나의

마음'이 없어지고 그리하여 태어났다하여도 몸은 태어났지만 ''가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태어나지 않은 것이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는 것이다.

''라는 의식이 없으므로 '우주'''가 하나가 되는데 이러한 상태가 바로

브라만이고, 깨닫는다는 것은 아트만에서 브라만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는 해탈이다

 

삼법인

 

삼법인은 불교를 상징하는 푯대가 된다고 할 만큼 불교의 기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가르침이다. 법인은 진리의 도장이라는 뜻이나 삼법인이란 세 가지의

틀림없는 진리라는 의미이다. 삼법인은 십이 연기에 견주어 다분히 함축적이고

종교적인 표현이다

 

1. 제행 무상:모든 존재는 시간적으로 볼 때 무상하다는 것이다. 늘 변함없이

일정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이런 변화를

통하여 생로병사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인생은 태어나서 늙어 가고 병들어 앓으며

마침내 죽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무상한 것을 유상한 것으로

착각하여 영원히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정신없이 살고 있다. 그러나 항상 변화하고

무상하며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인간의 사는 모습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2. 제법 무아: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고정 불면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사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또 ''라고 하는 것도 없고 영구 불변의 '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 역시 사대가 모이고 인연이 화합하여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변화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3. 열반 적정:열반에 고요하게 머문다는 뜻이다. 열반은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모든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를 가리킨다. 이때의 불은 마음의 불인데 ''라고 하는

것이 심지가 되어 욕망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의 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열반의 세계는 제행 무상 제법 무아를 체득하여 ''라고 하는

자의식과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상적인 상태이다

 

사성제와 팔정도

 

십이 연기 삼법인이 근본 불교의 사상이라면 근본 불교의 실천 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이다. 사성제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고, 팔정도는 '여덟 가지의

바른 실천'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 근교의 사슴 동산까지

25십 킬로미터를 달려가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설법한 것인데 그의 첫

가르침이었다. 하여 초전 법륜이라고 한다

이 가르침은 아주 논리적이고 조직적이다. 무작정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왜 실천이 필요한지 그 이유를 밝히고 이상적인 세계를 제시한 다음 그런

세계에 도달하려면 이러저러한 실천을 해야 한다고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1. 고성제:고성제는 인간이 살고 있는 현상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일체가 모두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이 괴로움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설명되는데 첫째는 육체적 고통이다. 아프고 배고프고 춥고 하는 등의 괴로움이다.

두 번째는 있는 것이 없어졌을 때 겪는 괴로움이다. 즉 재물이나 지위 명예 등을

상실했을 때의 고통이다.

나머지 하나는 모든 것이 무상하게 변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으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느껴야 하는 실존적 고뇌와 불안을 가리킨다. 이 가운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

생로병사의 사고이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격는 고통이고 여기에 네 가지

괴로움을 합하여 팔고라고도 하는데 나며지 네 가지는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인 애별리고와 원망스럽고 짜증나는 것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인

원증회고 그리고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인 구부득고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색수상행식에서 오는 오음성고이다

불교는 인간의 실상이 이렇게 괴롭다고 진단을 하고 그 괴로움에 정면으로 맞서

그것을 해소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괴로움 자체를 진리를 알 수 있는

출발점으로 보아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였다. 괴로움을 절실하게 알 때에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집성제:집성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그 원인을 밝히는 가르침이다.

괴로움이란 열두 가지 연기가 연쇄 작용을 일으키면서 생기는 것인데 집성제에서는

이것을 간략하게 갈애라고 요약하였다. 갈애는 목마른 사람이 갈증을 일으키듯

지나친 욕망을 일으키고 거리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모든

괴로움은 탐욕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3. 멸성제:멸성제와 도성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밝히는 진리인데

그 중에서도 멸성제는 괴로움을 멸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 독인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모두 멸하고 열반의 세계에 들 수 있다는 이상을 제시하여

확신을 심어 주는 가르침이다. 말하자면 괴로움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도성제:도성제는 괴로움을 해결하고 열반(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는 여덟 가지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팔정도이다.

 

팔정도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바르게 보라는 정견 온화하고 자비롭고 청정하게

바르게 생각하라는 정사, 진실되고 곧고 부드러운 바른 말을 하라는 정어, 모든

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올바르게 행동하라는 정업, 올바르고 정당하게 생활하라는

정명,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정정진 항상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관찰하라는 정념, 마음을 번죄 망상에서 벗어나게 하여 고요하게

안정시키라는 정정이다.

이 사성제를 줄여서 고집멸도라고 하는데, 부처는 이것에 대하여 그는 마땅히

느껴야 할 것이며, 집은 마땅히 끊을 것이며, 멸은 마땅히 체험하여 얻을 것이며,

도는 마침내 실천하여 닦을 것을 권하였다. 교종이든 선종이든 사성제와 팔정도의

실천을 통하여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의 세계에 눈뜰 수 있다는 것이 부처의 근본

가르침이다

 

2. 한국 불교

 

중국 불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곧 중국에 전해졌다.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중국의 고유

사상인 유교 사상 노장 사상 등과 서로 접촉하면서 변화 발전하여 중국 불교라는

독창적인 사상 체계를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불교는 중국의 전통 사상과도

다르고 인도의 불교와도 다른 새로운 사상으로 전개되었는데 우리 나라에 유입된

불교는 중국 불교였다. 한국에 전래된 불교는 또다시 한국적인 토양에 기초하여

중국 불교와는 다른 독자적인 불교로 발전하였다. 일반적으로 인도 불교는 원시 불교,

중국 불교는 종파 불교, 한국 불교는 회통 불교라고 하고 그 특징은 논하기도 한다.

 

한국 불교의 전개

 

신라 불교

 

한국에 불교가 유입된 것은 삼국 시대였고 본격적으로 발흥한 것은 신라에서였다.

신라의 법흥왕은 국가의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불교에 대하여 국가적 의의를

부여하였고 진흥왕은 흥국 이민(나라를 부흥하고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뜻)

국가 이념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불교는 이러한 국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호국 사상과 현실 정토 사상인 불국토 사상(신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는 사상)을 그 내용으로 삼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원광과 자장이 있는데 원광은 세속 오계를 만들어

불교를 전파하고 사회 윤리를 수립하는 데 힘썼다. 특히 그의 세속 오계를 토대로 한

화랑도 정신은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자장은 계율 중심의 불교를

세웠다.

삼국 통일 후 불교는 더욱 발달하여 여러 고승들을 배출하였는데 원측, 원효, 의상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원측은 당에 들어가 현장의 제자가 되어 유식학을 연구하여 일인자가 되었다.

원효는 세계적인 고승으로 불교의 총체적 수용과 화쟁 사상으로 통일 불교의 건설을

꾀하여 한국의 통불교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불교의 주된 특징인 호국

불교적 성격과 회통 불교적 성격이 그에 이르러 정립된다. 또한 그는 사변적이지 않고

알기 쉬운 정토 사상으로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 불교의 차원으로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통일적인 불교를 건설하고 이를 사회와 국가에 적용하여 질서, 통일,

화합, 조화의 실천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의상은 당에가서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통일 신라 후기에 이르러 법랑은 처음으로 중국의 선종을 전파하였고 도의가

당나라에서 선을 공부하고 돌아와 선문을 열면서 선문 구산을 이루었다. 이로써

기존의 귀족 불교인 교종에 대하여 선종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종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신라인들의 신앙의 바탕에는 호국 안민이라는 현세적인

관념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라말에 이르러 야기된 종파의 난립과 귀족과 결탁한

교종의 타락에 반기를 들고 풍수 지리 등의 토속적인 조교 사상을 가미하여 새로운

불교를 일으킨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도선인데 이 도선 사상은 신라말에 크게

세를 얻었다

 

고려 불교

 

고려 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불교를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았으며 불교의 황금 시대였던 신라의 문화를 이어 받았다. 고려 왕실은

새로운 국가 질서를 이념적으로 밑받침하기 위하여 불교 교단을 정비하고 불교 사상의

통합을 꾀하였다. 이러한 통합 노력은 신라말부터 계속되어 온 교종과 선종을

화해시키는 일에 집중되었다.

의천은 중국에 가 천태종의 종지를 체득하고 돌아와 교종과 선종이 편협하게

대립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교선 일치를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 수행에서

외향적 탐구인 경전 공부와 내향적 탐구인 선관은 긍극적으로는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천태종을 세웠다. 이러한 의천의

혁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천태종은 크게 성장하였고 불교계는 새롭게 재편되었다.

그러나 천태종은 실제로는 교종을 중심으로 교선을 통합하려 한 것이고 또

귀족적이며 정충적인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사원들이 귀족들의 재산 도피처가

되고 권력 싸움의 수단이 되고 있던 당시의 고려 불교계의 사회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는 정신 세계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지눌이 나와 중국의 이식 불교를 지양하고 한국적인 체질에 맞는 새로운

선종을 중심으로 한 교선의 통합을 시도하여 정혜쌍수를 주장하였다. 이로써

침체되었던 선종이 다시 활기를 띠고 분열되었던 선종의 아홉 분파가 통합되어

독자적인 한국 선종이라 할 조계종이 확립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선종 중심의 불교가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보우와 나옹 같은 뛰어난 고승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선승이었다

이처럼 고려 불교는 왕실의 비호 속에 크게 번성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점차

그 폐단도 커져 승려들이 안일에 빠지고 정치에 관여하는가 하면 정권 쟁탈전에

가담하기까지 하였다. 사원 경제는 극도로 비대해졌고 당시에 유행하던 풍수 지리

음양 오행과 결탁하면서 그 타락의 정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폐단은 고려 말

새롭게 등장한 신진 사대부들에게 배불론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조선 불교

 

조선의 불교는 지속적인 숭유 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대체로 침체의 길을 걸었다.

고려조에 왕실과 귀족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불교 법회가 성대하게 열렸던 것에

견주어 사회 정치적으로는 극도의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비록 이전과 같은 번영을 누리지는 못하였지만 불교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태조나 세종과 같이 왕실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불교를 신봉한 왕들에 의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세조는 호불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불교는 이렇게 명맥을 유지하다가 명종대에 섭정을 행한 문정 왕후에

이르러서는 문정 왕후의 흥불 사업에 힘업어 휴정 유정과 같은 고승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불교는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차츰 자리를 잡아 갔으며 임진 왜란

당시에는 5천 명에 달하는 승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나서기도 하여 호국

불교로서의 저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당대의 대표적인 불교 사상가인 만해 한용운이 민족 구원의 차원에서

독립 운동에 앞장선 것도 삼국 시대부터 태동한 호국 불교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한국 불교의 특질

 

호국 불교와 현실 정토 사상

 

한국 불교는 한국 사상의 고유한 전통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어 독자적인 불교를

이룩하였다. 현세주의적 성격은 호국 불교의 정착으로 이어졌고 이상주의적 성격은

이 땅이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하는 '불국토 사상''현실 정토 사상'을 낳았다.

또한 일반 대중게까지 널리 퍼져 서민 불교로 발전하였으며 종파간의 대립을

묵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조화시키고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였다.

 

회통 불교의 전통

 

중국에서는 불교의 종파가 산만하게 대립하여 종파 불교로 정립된 데에 반하여

한국 불교는 모든 종파를 하나로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논구하려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이러한 통불교의 전통은 원효의 화쟁 사상과 의상의 화엄 사상에서 출발하여 의천의

천태종을 중심으로 하는 교선 일치와 지눌의 선 위주의 교선 일치로 나아가며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휴정과 유정의 선교 일치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한국 불교의 통불교적인 성격은 결코 분명한 지향접 없이 이설들을 얽거나

평면적으로 종합해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승적 견지에서 중도적이고

총체적으로 이루어진 조화이면서 통합이었다. 이러한 대승적 견지의 이면에는 개인의

해탈보다 중생의 제도를 앞세우려는 자비 행사의 염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단군

이래로 전해 온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홍익 인간의 정신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한국 화엄종의 종조

의상

 

이 도를 지은 뜻은 이에 의하고 교에 의하여 간략한 시를 만들어 이름데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함이라(화엄일승법계도 서문)

 

1. 화엄종의 2대 조사 지엄

 

661, 신라 문무왕 때의 일이었다. 당나라 신주에 있는 종남산의 지상사는

아침부터 분주하였다.

지상사의 최고 어른인 지엄은 그 날따라 일찍 일어나 방을 소제하여 자리를 깨끗이

하고 여러 제자들에게 오늘 해동에서 귀한 사람이 올 듯하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그는 중국 화엄종의 일인자로 초대 조사인 두순에 이어 2대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해동에서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의 잎이 번성하더니 그것이 중국에까지 뻗어

지상사까지 닿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나뭇가지 위에 봉황의 둥지가 하나 있었다.

올라가서 보니 봉황은 없고 찬란한 빛을 발하는 마니보주(귀한 구슬)가 있었다.

너무 황홀하고 눈이 부셔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문득 잠이 깨었다.

 

아무래도 신기한 꿈이었다. 틀림없이 해동에서 귀한 사람이 찾아올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날 오후 지상사에 웬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지엄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는 말했다

"스님의 높으신 이름은 멀리 신라에서도 들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스님의 문하에

들어와 배우고 싶었으나 여러 가지 어려운 조선 때문에 이렇게 늦었습니다. 부디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지엄은 이 사람이 바로 지난 밤 꿈에서 본 해동의 귀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고맙소 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멀리까지 찾아 주다니 여기서 함께 열십히 불법을

공부해 봅시다"

지엄은 쾌히 승낙하였다. 지엄을 찾아온 이 해동 사람이 바로 원효와 헤어져 혼자

당나라에 온 의상이었다.

 

의상(625-702)은 신라의 귀족 출신 승려이다. 속성은 김씨라고도 하고 박씨라고도

하는데 부모 중 한 쪽이 진골이다. 서라벌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의 이름은 일지라고

했다. 화랑이 되라는 부모의 뜻을 어기고 20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미

신라에서는 손꼽히는 고승이었으나 늘 배움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매사에

활달하고 얽매임이 없는 원효와는 달리 무슨 일이든 따져 보고 계율에 철저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의상은 당나라에 화엄종이라는 불법이 성행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화엄경'을 깊이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원효와 뜻이 맞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지만

첫 번째는 고구려를 지나다 신라의 간첩으로 오인되어 신라로 쫓겨오는 바람에

좌절되었고 10년을 기다려 떠난 두 번째 유학길에서는 원효가 중도에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 버려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홀로 당나라에 유학하였다.

 

2. 스승보다 뛰어난 지혜

 

의상의 스승인 지엄의 문하에는 뛰어난 제자가 여럿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의상은 가장 뛰어난 제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지엄도 의상의 뛰어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공부하던 현수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좋은 동지였다. 현수는

법명을 법장이라고 했는데 훗날 화엄종의 3대 조사가 되어 중국에 화엄학을 꽃피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현수도 의상에게는 혀를 내둘렀다.

"의상 스님은 하늘이 내려 주신 사람인 모양이오"

"아닙니다. 제가 어찌 현수 스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확실히 두 사람은 재질이 남달랐다. 화엄학의 깊은 뜻이나 이치를 통찰하는 데에는

의상이 뛰어나지만 문리를 따지는 데는 현수가 의상보다 낫다고 스승인 지엄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의 장점을 잘 키워 주기 위하여 의상에게는 '의지'라는

호를 현수에게는 '문지'라는 호를 주었다.

현수는 의상보다 열아홉 아래였는데 두 사람의 교류는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이어져 현수는 의상에게 그의 저술과 서신을 보내었고 의상은 현수에게 금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불법에 뼈를 깍는 정진을 하기를 8년 어느 날 스승 지엄은 모든 제자를 한자리에

불렀다.

"이제 내가 세상을 떠날 날도 멀지 않았다. 오늘은 화엄경의 뜻을 요약하여

설명하겠다. '화엄경'은 그 뜻이 너무 많고 복잡하고 깊어서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한번 요약하여 그림으로 표시해 보았다"

지엄은 손수 그린 72장의 그림을 놓고 화엄경의 전체 이론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림은 다양하였다. 그러나 설명을 듣고 보니 화엄경 전체의 뜻이 그 72장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요약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간편한 해석인가. 제자들은 모두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의상은 아무래도 그 보다 더 요약할 수 있을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의상은 자기 생각을 하나의 그림으로 종합하여 스승에게 보였다. 지엄은 한참

그림을 살펴보더니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과연 그대는 해동의 부처가 될 만하다. 그대의 이 한 그림이 나의 일흔 두 개의

그림보다 낫다"

지엄은 크게 기뻐하며 그림에 해석의 글을 붙여 보라고 하였다. 의상은 곧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으며 모든 법은 본래 움직임이 없어서 고요하다"

시작하는 30구절의 시를 지어넣었다. 이것이 의상의 그 유명한 대표작인

'화엄일승법계도' 이다. 지엄은 의상이 "참으로 화엄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기뻐하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마침내 의상은 현수와 함께 스승의 도통을 이을 3대 조사의

물망에 오를 정도로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3. 의상의 화엄 사상

 

의상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저술은 역시 '화엄일승법계도'이다.

이것은 도장 모양의 그림에다 30구절의 해석을 붙여 화엄경 전체의 사상을 요약한

것인데 지금도 우리 나라 절에서는 의식 때마다 낭송되고 있다.

화엄 사상은 '화엄경'(인도의 고승 용수가 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기본으로 하여 정립된 불교 사상인데 그 철학적 뼈대는 모든것은 연관되어

일어난다는 '법계연기'이다. 말하자면 우주 만물은 그 어느 것도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고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그리하여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화엄에서 가르치는

'무진연기'의 법칙이다. 그래서 화엄 사상을 원만무애의 진리의 가르침이라고도 한다.

사법계, 십현연기 등은 이 무진연기를 설명하는 화엄 사상의 골자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사법계에 대해서 설명해 보면 사법계란 현상과 본체의 관계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이것을 나누어서 살펴보면 이렇다.

 

1. 이법계:만물이 차별 없이 하나가 된 평등한 본체의 세계

2. 사법계:모든 사물이 대립하고 있는 차별적인 현상의 세계

3. 이사무애법계:현상의 세계와 본체의 세계에 걸림이 없다는 뜻으로 평등 속에서도

차별을 보이고 또 차별 속에서도 평등을 보이는 세계

4. 사사무애법계:현상의 세계 자체에 걸림이 없다는 뜻으로 차별적인 각각의

현상들이 밀접한 융합을 이루어 하나가 된 세계

 

화엄 사상의 궁극점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차별 없이 하나가 된 통일을 지향하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하나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고, 또 하나가 있으면 모든 것이

있다는 논리를 세운다. 즉 모든 것이 홀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도 되고 열로도

되며 모든 것으로도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엄의 서로 대립하고 투쟁을 거듭하는 사회와 나라를 정화하고 사람들

사이의 대립과 경쟁 그리고 투쟁을 극복시킴으로써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게 하는

교설이다. 게다가 하나가 모든 것을 포섭하고 융합한다는 것은 본래는 천지만물의

차별성과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명제였지만 하나가 군주이고

모든 것이 백성이라고 한다면 군주의 통치 질서를 이론으로 밑받침하는 구실도 한다

그래서 화엄 사상은 중국이나 우리 나라 같은 왕권 국가의 체제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는 이러한 화엄의 사상을 그림 하나와 30구절의 시로써

요약한 것인데 몇 구절 설펴보면 이렇다.

 

1.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고

2.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해

3.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 일체를 넘어섰으니

4. 밝혀서 아는 바가 다른 경지 아닐세

5. 참된 본성은 깊고도 오묘해

6. 자기의 성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따라 있는 것

7. 하나 안에 일체요 여럿 안에 하나

8.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

9. 한 티끌 속에 모든 세계가 포함되고

10. 모든 티끌이 역시 그러하도다

11. 무량한 먼 시간이 곧 일념이요

12. 일념이 곧 무량한 그 시간이다

...

16. 생사와 열반이 항상 어울리고

...

22. 중생이 그릇에 따라 이익을 얻네

...

29. 마침내 실제의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30.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는 부처라 이름하네

 

이 시는 그대로 따르면서 읽고 풀이하면 이치가 다 드러나도록 되어 있는데

그 핵심은 하나로 통일되는 조화와 평화이다. 의상은 신라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늘 이 '법계도'에 의거하여 가르쳤다고 하며 제자가 깨달음을 얻으면 그 공을

기리는 뜻에서 이 '법계도'를 내려 주었다고 한다. '법계도'는 조선 시대에

김시습이 해석을 붙여 열독했을 정도로 그 내용이 심오하다. 그림은 네모난 도장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모양은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질서를 구현하고자 하는 염원을

상징한다

 

4. 고국에 돌아와 화엄 사상을 펴다

 

문무왕11(671), 의상은 1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침략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사신으로 왔다가 붙잡혀 있던 승상 김흠순에게서 듣고 신라에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귀국했다고 하고 또 '송고승전'에 의하면 화엄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귀국했다고 한다

화엄 사상은 의상 이전부터 자장이나 원효 등에 의하여 전개되어 어느 정도 기틀이

잡혀 있었고 방대한 사상 체계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원효의 '화엄경소'는 중국

화엄학의 대가인 법장이 즐겨 인용할 만큼 정평이 난 것이었다. 그러나 원효는 화엄

사상에 매이지 않고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접하는 경전마다 그 가치를 논하였다

의상은 676(문무왕16), 부석사를 창건하여 화엄의 종종지를 편 이래 오늘날까지

화엄종의 종조로 숭앙받고 있는데 그는 원효와는 달리 조직 체계를 갖추고

체계적으로 화엄 사상을 폈다. 그의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많은 제자의

양성이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제자는 3천명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에는

뛰어난 고승이 많았다. 십대 제라고 꼽히는 표훈, 신림, 능인, 의적 등은 화엄 사상을

전수하여 통일기의 신라 불교를 융성하게한 인물들이었고 그 중에는 '송고승전'

오를 만큼이나 이름난 고승이 셋이나 되었다

이 제자들은 늘 스승 의상을 모시고 화엄 사상을 배웠는데 의상은 주로 자신이 지은

'화엄일승법계도'를 가지고 가르쳤고 또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제자들이 도춤을 청하여 둘어올 때에는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 의심나는 점을 풀어 주었다.

그의 사상은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그 사찰들은 문무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나라를 지키는 산들에 지어졌다. 부석사 해인사 갑사 화엄사 범어사 등

열 개의 사찰인데 이를 화엄 십찰이라고 한다. 또 유명한 낙산사와 의상대도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부석사이다. 부석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재미있는

전설이 전한다.

통일의 정신적 토대를 다지기 위해서 불교를 장려했던 문무왕의 명으로 처음

부석사를 창건할 때의 일이다. 사찰을 건립하기 위하여 터를 닦고 있었는데 5백여

명의 도적이 나타나 방해하였다. 이 방해로 사찰의 건립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큰 돌이 하나 날아와 도적들을 위협했다. 그 돌은 계속

공중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도적들은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고

그 덕분에 무사히 사찰을 건립할 수 있었다. 부석사라는 절 이름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부는 '뜬다'는 뜻이다

그 돌은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 옆에 있는데 작은 아랫돌 몇 개 위에 커다란

윗돌 하나가 겹쳐져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윗돌이 바로 공중에 떠 있었다는 돌인데

실제로 아랫돌과 윗돌 사이에 긴 실을 지나게 하면 그대로 통과가 된다.

그리고 그 돌에는 '부석'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래서 지금도 신기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돌은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여기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송고승전'에 전한다

 

의상이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도착하여 탁발을 하며 목적지로

가던 중 어느 선비의 집에서 며칠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의 딸 선묘가 그를

사모하여 결혼을 청해 왔다. 의상은 정중하게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녀를 감화하여

볼법에 귀의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를 위하여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원을 세웠다. 10년 후 의상이

귀국하는 길에 잠시 들러 인사를 하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의상을 직접 만나보지

못하고 어머니를 통하여 소식을 들은 선묘는 의상에게 주기 위하여 준비해 두었던

법복을 상자에 넣어 들고 선창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지극한 정성으로 배를 향하여 상자를

던지고는 원을 다시 세우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리하여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후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부석사에 있는 돌도 바로 선묘룡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해진다

 

5.화엄의 실천

 

의상이 제자들에게 화엄학을 가르치자 그 소문이 전국에 퍼졌고 또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문무왕은 이에 감사하여 전장과 노복을 하사하였다. 그러자 의상은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불법은 평등하여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고 신분의 귀천이 없습니다. '열반경'에서도

여덟 가지의 부정한 재산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전장과 노복이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불법의 세계를 집으로 삼고 세 끼의 바리때 밥으로 만족합니다. 법신의

지혜로운 생명이 제 몸을 빌려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송고승전)

 

의상 사상의 실천적인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일화인데, 같은 문하의 동료였던 중국의

3대 조사 법장이 당나라 측천무후의 대접을 받아들인 것과 대조가 된다.

또 다른 일화도 전한다. 문무왕이 통일 이후 성을 쌓는 일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의상은 이로 인하여 백성들의 노역이 과중해지는 것을 보고 왕에게 정책을 바꿀

것을 호소하는 글을 보냈다.

 

왕의 정치와 가르침이 밝다면 풀언덕 땅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 하여도 백성들이

감히 넘어오지 못하고 오히려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와 교화가

바르지 못하다면 장성이 있다 하여도 재앙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삼국유사)

 

이 글을 보고 문무왕은 성을 짓는 일을 중지했다고 한다. 이 일화 역시 의상의

실천적인 성격을 거듭 보여 주는 것으로 '송고승전'에서도 의상의 인품에 대하여

"그는 실천을 귀하게 여겨 강의를 하는 일 외에는 수련을 부지런히 하였다"

적고 있다.

 

의상은 화엄종을 폄으로써 통일 신라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고 호국 불교의 기틀을

세웠다. 또 원효와는 달리 저술보다는 화엄 사상을 심는 일, 제자를 길러 내는 일,

사찰을 세우는 일 등 불교의 기초를 닦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그는 원효와 더불어

한국 불교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다. 호국 불교의 정신은 고료의 의천과 지눌

그리고 조선의 서산대사와 사명으로 이어졌다.

의상의 화엄 사상은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다. 동문 수학한 법장은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드신 후 의상만이 올바른 법을 펴고 있다"고 하며 자신의

저술을 보내어 옳고 그름을 가려 달라고 서신을 보내올 정도였다. 그리고 일본의

묘에(1173-1232)는 신라의 화엄을 계승하여 원효와 의상의 족자 탱화를 만들어 늘

바라보고 흠모하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오늘날까지도 전하여 일본 명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의상은 노후에 원효와 함께 강원도를 돌며 조용한 산사를 물색하던 중 동해

용왕에게 여의주를 받았다고 하며 관세음 보살이 나타나 일러준 장소에 낙산사를

지었다고 하는데(삼국유사) 이 설화를 통하여 신라가 원래 불국토였다는 사상을

확인하게 된다. 의상은 이러한 사상을 정교한 논리로 체계화하여 모든 것은 하나로

통일되고 이 현실이 부처의 이상이 실현되는 불국토라는 사상으로 정립하였다

그는 78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교종과 선종을 통합한 한국 천태종의 개조

대각 국사 의천

 

한가하게 앉아 뜻을 세우지 않고

촌음의 시간을 아낄 줄 모른다면

경전과 논을 수련한다 하여도

담벼락이나 바라보고 있는 줄을 어찌 알리.

(자계)

 

1. 출가한 왕자

 

고려 문종(11대 임금) 때의 일이다. 1065년 그러니까 의천이 열한 살 때였다.

문종은 가족들을 모아 놓고 자그마한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문종과 왕비 그리고 여러

왕자들이 모인 자리였다. 문종은 왕자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중 누가 출가하여 불법을 닦겠느냐?"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였고 왕실에서 불교를 크게 장려하였다. 8대 임금인

현종이 어릴 때 출가한 적이 있으며 10대 임금인 정종(문종의 형) 때부터는

사자 출가가 시행될 정도였다. 사자 출가란 왕자가 넷이면 그 중 하나를 출가시켜

불법을 닦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자를 부처님께 바친다는 문종의 발상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곧 넷째인 의천이 일어나 말했다

"제가 출가하여 불도를 닦겠습니다. 부처님의 생각과 뜻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정진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원효 스님이나 의상 스님과 같은

훌륭한 스님이 되어 보겠습니다"

어머니인 인예 왕후는 아들의 출가를 섭섭히 여겼으나 아버지인 문종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 해 5월 의천은 머리를 깍고 영통사에서 출가하여 경덕 국사에게서 화엄학을

배웠다. 경덕 국사는 의천의 외숙부뻘 되는 사람이었다. 의천은 출가한 지 5개월 만에

구족계(중이 지켜야 하는 계율)를 받고 완전한 승려가 되었다.

의천은 늘 송나라에 가서 더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였으나 부왕인 문종이 허락치

않아 실행하지 못하다가 부왕이 죽자 몰래 송나라로 건너갔다. 그는 1년이 넘게

송에 머물면서 여러 종파의 고승들을 만나고 여러 종파의 문헌을 수집하였으며

천태종의 교의를 집중적으로 토론하고 폭넓게 불교의 교리를 습득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귀국하여 한국 천태종을 열었다

 

2. 고려의 불교

 

고려가 불교 국가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태조인 왕건은 통일의 과업이 부처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며 전국에 사원을 세우고 고승을 모셔 스승으로 삼았다. 그리고

국가적인 이념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불교가 지도적인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려 불교가 국가적인 번영을 이루었던 이면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신라 불교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신라 불교는 원래 종파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파쟁도 심하지 않았다.

여러 경전을 두루 공부하여 통합적인 불교를 이룩하고자 하는 기풍이 오히려

지배적이었다. 또 원효에 의해 왕실 불교 귀족 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종 불교를

이룩하자는 운동이 나타나면서 더욱 생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고 백 년이 지나자 온갖 재화를 그러모아 부귀를 누리는 귀족과

그 때문에 더욱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백성들 간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또 불교계도 귀족 불교를 추구하는 세력과 이에 반대하여 지방 호족이나 반란

세력들과 손잡고 민중의 불만을 수럼하여 혁신을 표방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의 구체적인 모습이 오교구산으로 대표되는 여러 종파의 난립이었다.

중앙의 귀족 불교는 교종으로 굳어지고 지방 호족들의 세력과 깊이 연계된 선종의

고승들은 이에 반기를 들고 각기 새로운 교단을 열었다.

이때 불교는 여러 종파로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종파 안에서도 통일을 기할

수 없을 젇도로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고려 왕조는

수립되었고 태조 왕건도 이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후 고려에서는 불교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계속 진행되었다.

광종이 이 일을 앞장서서 수행하였고 의천 역시 그 일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통합은

선종은 선종대로 결속하고 교종은 교종대로 결속하는 데 그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넘어서는 차원 높은 통일적인 불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의천의 생각이었고 그의 사상의 핵심이었다. 그는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는

새로운 종파를 열었다. 바로 천태종이었다.

 

3. 원효를 계승하고자 하다

 

출가한 의천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용맹 정진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의천은 늘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다고 한다. 김부식은 의천에 묘비명에 쓰기를 의천은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도가 높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쫓아가서 배웠으며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의

경전은 물론 유교의 경전과 역사 서적 및 제자 백가의 사상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많은 사상의 본질과 핵심을 꿰고 있어 논의를 펴는 데 막힘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렇듯 지식과 덕망이 높았으면서도 스스로는 늘 부족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학문에 정진한 덕에 그의 나이 13세에 스승인 경덕 국사가 죽자 스승의

강의를 대신 맡게 되었고 훌륭한 강의로 인하여 온 나라에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

이때 그는 문종에게서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의 직책을 받았다. 우세란 넓은

지혜와 덕으로 '세상을 도우라'는 뜻이고 승통은 승려들을 다스리는 직책이다

의천은 특히 원효를 사모하고 추앙했다. 그리고 그를 계승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원효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경주 분황사를 찾아가서

원효에게 제사를 지내는 글을 지어 올렸다. 그는 법을 구하는 사문 의천이 '해동

보살'인 원효에게 글을 올린다면서 그 동안 풍속이 야박하고 어지러워져 사람은

떠나가고 도가 멸했으므로 내려 주신 가르침을 이을 길이 없다고 한탄하였다.

그리고 원효가 나서서 만 가지 다툼의 실마리를 화홥시키고 일대의 공정한 논의를

내놓았다고 찬양하면서 원효보다 훌륭한 스승은 없다고 하였으며 원효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처럼 원효를 칭송한 의천이 원효에게서 계승하겠다고 한 것은 화해와 통일의

사상이었다. 앞 장에서 서술했다시피 원효는 우리나라의 '통불교' 전통을 수립한

고승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10여 개의 종파가 서로 시비를 다투며 논쟁하고

있었는데 원효는 당대에 한역된 불교 경전 약 오천 군을 섭렵하고 난 후 그러한

다툼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툴 만하지 않은데도 다투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경전이 그 내용은 서로 달라도 궁극적인 취지는 똑같이 '부처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경전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은 같은 수학

책이라도 학년별로 다른 것처럼 사람의 정도에 맞추어 인도하른 방편일 뿐 최종

목표는 한결같이 부처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시비할 이유도 논쟁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하나의 불법으로 모든 종파를

회통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종파를 아우르고 위와 아래를

아우르는 민중 불료고서 전환할 수 있었다.

의천도 분열된 불교를 통합하여 국가 불교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를 위해 의천은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용하는 방침을 택했다. 그리고 천태종을 교리 자체가

선종을 수용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일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의천이

불교 통합의 기초라고 여긴 천태종이란 어떠한 사상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4. 천태종

 

천태종은 '법화경'을 근본 경전으로 삼아 지의가 완성한 불교 사상으로 중국에서

최초로 성립된 종파이다. 지의가 천태산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천태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법화경'을 근본 경전으로 삼는 것은 그것이 부처가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을 때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은 부처가 열반한 당시에 설법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천태종에서는 이를 '오시 판교'라 하여 부처가 설법한 시기를 다섯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시기:도를 이룬 뒤 21 일간의 설법으로 대승을 가르침(화엄경)

둘째시기:12년간 녹원에서 강의한 때(아함경)

셋째시기:그 후 8년간 대승을 설법한 시기(방등경), (유마경)

넷째시기:21 년간 반야를 강의한 때(반야경)

다섯째시기:열반할 당시(법화경), (열반경)

 

이처럼 천태종에서 부처 가르침의 진수를 담고 있고 다른 경전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법화경'의 내용은 이전의 여러 가르침은 모두 방편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회통하여 귀일한다는 것이다. 범부을 인도하고 그 다음에는 소승을 배격하고 대승만

내세우는 두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는 대승과 소승이 하나임을 밝힌다는 것이다.

천태종의 중심 사상은 진실한 본마음으로 세 가지를 본다는 일심삼관, 우주의 삼천

가지 법이 하나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일념삼천, 세 가지의 진리는 하나로 원융되어

있다는 삼체원융이다

 

1. 일심 삼관:진실한 본마음으로 세 가지를 본다는 것은 이 현상의 세계가 공이라는

것을 보며 또 현상의 사물은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허상이라는 것을 보고 나아가

마침내 공이나 허상의 어느 일면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참된 본체인 중을 본다는

것이다.

2. 일념 삼천:삼천이란 전생 현생 내세의 삼세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 삼천 법계를

말하는데 이를테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도 천도 부처 등등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 세계가 모두 일념에 달려 있다는 것은 지옥과 부처의 세계가 다 마음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마음 먹기에 따라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고 부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가을의 국화 한 송이에 우주 전체의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3. 삼체 원융:삼체란 세 가지의 진리이다. 즉 모든 것은 공이라는 공체 모든 사물은

허상이라는 가체 그리고 공과 가를 포함하면서도 또 그것을 넘어서는 절대 본체인

중체를 말한다. 원융이란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뜻이니 이 세 가지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깨달아야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천태종에서는 천지 만물이 비록 천차 만별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다만

마음에서 생긴 허상에 불과하며 진실한 본체는 마음을 바로 가짐으로써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음이야말로 가장 근본이 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천태종은 화엄종보다 더 실천적인 성격이 강할 수 있고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선종도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5. 천태종을 세워 국가 불교를 정립하다

 

의천은 이 세 가지 중심 사상을 계승하고 전파하면서 경전 공부를 통한 깨달음과

마음 공부를 통한 깨달음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교관병수를 주장함으로써 교와

선의 일치를 주장한다. 말하자면 경전 공부를 통한 깨달음만을 주장하는 교종과

참선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둘을 다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천은 당시의 교종과 선종의 문제를 이렇게 말하였다.

 

교를 배우는 자는 대부분 안을 버리고 밖을 구한다. 선을 닦는 자는 인연을 잊은 채

내면만 관조하기를 좋아한다. 모두들 자기 쪽에만 치우쳐 거기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대각국사문집)

 

의천은 마음을 버리고 바깥에서만 진리를 구하는 것과 바깥을 버리고 마음에서만

진리를 구하는 것에 모두 반대하면서 양면을 아우르는 교선일치를 주장하였지만

평면적으로 두 학설을 합친 것이 아니라 교종을 중심으로 하여 선종을 포용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의천은 선종의 '불립 문자', '이심 전심', '견성 성불' 등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것은 아주 뛰어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은 교종의 경전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의천은

귀족 불교의 전통인 교종을 중심으로 하여 그 체계를 세웠지만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여 개방성을

한껏 살렸다는 점에서는 화엄종보다 일보 진전을 이루었다.

의천의 이러한 통합 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197년 국청사라는 대사찰이

완성되자 그 절의 주지가 되어 천태종을 강의하였을 때 전국에서 모여든 고승이

1000여 명이 넘을 정도였고 2년 뒤 천태종을 세웠을 때에는 당시의 고승들이 제자를

이끌고 와서 의천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말부터 불료의 주류를 이루었던

선종의 승려들이 열에 예닐곱은 천태종에 귀의하면서 천태종은 국가 불교로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6. 고려 속장경의 간행

 

의천은 원효를 계승한다고 하였집만 민중 불교를 계승한 것은 아니었다.

왕실 불교와 국가 불교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불교계의 통합을 위하여 그의 화쟁

사상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불교를 정신적 지도 원리로 삼아 국가를

통합함으로써 불교 국가를 이룩하고자 했던 당대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불교계의 통합을 위하여 천태종을 표방한 의천은 그러한 교리를 설득력 있게

전파하기 위하여 불령 간행 사업을 벌였다.

그는 송나라에서 돌아오자 그 동안 수집했던 불경을 정리하였다.

먼저 교장 도감을 설치하고 경전을 간행하였다.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4000여 권의 서적과 원효를 비롯한 국내 고승을의 전적을 합하여 모두 4740권의

속대장경을 간행하였다. 이를 고려 속장경이라고 한다.

의천은 불교 경전의 간행에 힘씄을 뿐 아니라 폭넓은 견문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속대장경의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 세 권을

비롯하여 화엄 경전의 핵심 사상만을 정리한 '신집원종문류', 22권 불교 사상 공부에

도움이 되는 문장을 모은 '석원사림' 250권 등이 있고 제자들이 그의 설법과 문장을

모은 '대각국사문집' 23권이 있다. 게다가 화엄경을 국어(당시의 이두)로 번역하여

강의한 것이 300여 권에 이른다고 하지만 그 중 몇 권만이 전해지고 있다.

 

7. 높은 경지에서도 쉼없이 정진하다

 

의천은 평생을 불법을 닦으며 나라의 기강을 잡고 국민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닦은 불법으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는 스스로

경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선종의 한 승려에게 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해인은 고요하게 만물을 비추는 바다

모든 것이 커다란 도량인 것.

나는 바아흐로 교를 전하기에 급하고

그대는 또한 참선을 하기에 바쁘다.

참된 뜻을 얻는다면 둘 다 아름답겠으나

정을 따르면 양쪽이 상처를 입는다.

모든 것이 하나이니 어찌 위하고 버릴 것이 있겟는가.

법계가 바로 내 고향이다(기현거사)

 

교종과 선종의 승려가 각기 자기 길만 주장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꼬집으면서

자기 일만 주장하며 바쁘게 움직일 것이 아니라 무한한 진리와 합치되어 법계가

내 고향이라는 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야 할 과제가 있고 그 과제는 만만치 않았다.

인심이 어지러워지고 풍속이 야박해져서 도가 멸할 지경인 상황을 바로잡아야 했고

나라의 힘을 한곳에 모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그는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가하게 지내면서 뜻을

세우지 않고 시간을 아껴 수련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경전 공부를 많이 하여도

담벼락을 마주보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자신을 조이는 끈을 늦추지 않았다.

자기의 마음을 다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의천이 교종과 선종을 포용하는 일에서 성과를 보았다지만 완전한 통합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귀족 불교를 누르면서 국가 불교를 이룩하기 위하여 선종을

포용햇지만 그 근본에서는 귀족 불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선종의 많은

승려들이 천태종에 귀의하긴 했지만 선종은 천태종에 흡수되지 않았다. 오히려 선종은

귀족 불교의 밖에서 명맥을 유지하면서 그 나름의 춤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원효를 계승한다면서 추진한 통합 운동이 귀족 불교와 민중 불교로서의

불교를 아우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데서 보이는 한계이다. 선종도 이미 민중

불교로서의 생기를 잃었고 화엄종 천태종 등은 이론이 아주 번잡하고 난해한 데다

특정한 귀족 계층과 결합해 있었다. 그리하여 완전한 종파의 통합을 이루고자 한

의천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종파를 하나 늘려 놓는 결과를 낳았다. 의천은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채 젊은 나이인 47세에 열반에 들었다. 왕은 대각 국사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덕을 기렸다.

의천이 채 이루지 못한 불교 통합의 꿈을 다시 들고 나온 이는 고려말의

지눌이었다. 의천과 더불어 고려 불교의 쌍벽을 이룬 그는 그러나 의천과는 다른

방향에서 통합을 모색하였다.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려 한 것이다.

 

 

한국 불교의 큰 횃불 고려 불교의 혁신적 사상가

보조 국사 지눌

 

누가 물었다

"조사들의 묘한 도를 알 수 있는가요?"

"옛적에 말하지 않았던가 도는 앎에도 속하지 않고 모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안다고 하면 망상이요, 모른다고 하면 헤아림이 없는 것이다. 만일 참으로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른다면 커다란 허공이 펼쳐져 있는 것과 같은데 어찌 구태여 시비를

가리겠는가"

또 물었다

"그러면 조사들이 세상에 나왔어도 중생에게 도움이 되지 않나요?"

"부처나 조사가 나서서 사람들에게 법을 준 적은 없다. 다만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본성을 보게 했을 따름이다"(보조법어 중 진심직설 서문)

 

1. 죽음으로 보여 주는 삶

 

1210년 고려 희종 63월이었다. 한 이름난 선승(선종의 승려)이 새벽에 목욕

재계하고 법당에 올라 향을 사르고 큰 북을 쳐 송광사 안에 있는 대중을 불러모았다.

그러고는 육환장(긴 몽둥이)을 들고 법상에 올라가 대중과 일문 일답으로 자상하게

진리를 논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제자가,

"옛날에는 유마 거사가 병을 보였고 오늘은 스님께서 병을 보이시니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고 물었다. 같고 다름을 묻는 것은 선가에서는 진리를 시험해 보는 질문이다.

병이 들어 임종이 가까운 스승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러한

자리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대답에 바짝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스승은 육환장을 높이 들어 법상을 두어 번 내리친 다음에 이렇게 말하였다.

"일체의 진리가 여기에 있느니라"

이 말을 끝으로 스승은 법상에 앉은 채 조용히 입적하였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이 선승이 지눌(1158-1210)이다. 고려 중기의 고승이자 선종을 중흥시킨 인물로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여 한국의 독창적인 선종을 이룩하였다. 원효와 더불어

우리 불교사에 우뚝한 큰 봉우리이다. 속성은 정씨이고 황해도 출신이다. 아버지

정광유는 국학의 학정을 지낸 학자이다.

지눌은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여 병치레가 잦았다.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도 병에

차도가 없자 아버지가 불전에 기도하며 병만 낫게 해 준다면 자식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한다. 그런 기도를 한 후 신기하게도 병이 깨끗하게 나아

부모는 약속을 지켰다. 여덟 살 되던 해 그는 부모님이 정해 준 구산 선문의 하나인

사굴산 파에 속해 있던 사찰에 가 승려가 되었다.

지눌은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았다. 자기가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고, 또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대립이 심했던 종파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다. 꾸준한 정진 끝에 25세의 나이에 승려들이 보는 국가 고시인 승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출세의 길을 가지 않았다. 구도에 정진하면서 자기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뇌하였던 것이다.

 

2. 지눌의 고뇌

 

지눌이 살았던 12세기는 고려 중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고려 사회는 여러 가지

모순과 폐단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반란의 시대이다.

지배층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이 빈번하게 벌어졌고 이는 이자겸 척준경 등의

(1126)으로 표출되었다. 또 서경(평양) 천도를 주장하다가 김부식 등 개경파의

반대로 좌절되자 묘청이 난을 일으켰다(1135) 그리고 문신을 높이고 무신을

천대하는 지배층에 반감을 품은 정중부가 난을 일으켰고 급기야 무신들의

반란(1170)이 성공하여 4대에 걸친 최씨들의 무신 정권이 수립되었다.

게다가 만적의 난(1198)을 비롯한 민란이 도처에서 발생하여 척박해진 백성들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불교계는 불교계대로 내부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지눌보다 100여 년 앞서 살았던

의천의 화해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종과 교종 간의 대립과 갈등은 여전하였고 심지어

원수처럼 등을 돌리고 있었다. 선종에서는 교 밖에 따로 가르침이 전한다는

'교외별전'의 심법을 주장하면서 경전의 문자와 이론을 무시하였고 교종에서는 경전의

법문만이 부처의 가르침일 뿐 선은 중국에 와서 성립된 한 종파에 불과하다고 하여

정통 불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측은 서로의 우열을 논하염서 시비 다툼을

그치지 않았다.

게다가 왕실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귀족 불교로 자리잡은 많은 사원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다는 특혜를 이용하여 많은 재물을 축적하고 노비를 거느리며 권세를

부리고 있었고 많은 승려들이 권세와 부에 입맛을 들여 타락에 타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눌은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고 원수처럼 등을 돌리고 있는

선종과 교종을 화합시킬 방도를 모색하며 고뇌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귀족 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선종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는 대단한

성과를 가져왔다. 조게종이라는 독창적이고 한국적인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창도한

것이다.

 

3. 선교 합일의 노력-정혜 쌍수 운동

 

선교 융합

 

12세기의 혼란한 정치의 틈바구니에서 지눌은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아 바른 법을

구현하고 불교계 내부의 선종과 교종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자기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는 이 둘이 과연 화합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을 품고 스스로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선종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계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종의 해탈 방법을 알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 합일점과 조화를 꾸준히

모색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선과 교가 모두 부처의 가르침에서 비롯한 것인데 어째서

대립하는가 하는 의문을 강하게 품게 되었다. 그는 둘로 갈라져 버린 선종과 교종의

근원을 밝히기 위하여 화엄종의 여러 대가들을 방문하여 교종의 수행 방법을 물었다.

그러나 모두 교리를 바라보는 관점과 방편을 말할 뿐 그 답변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중심 뜻과는 거리가 있어 수긍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시 그는 3년간 대장경을 열람

하였다. 선승이었던 그가 3년이나 교종의 경전인 대장경을 열람했다는 사실은 선교

갈들의 해소를 위하여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노력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대장경을 열람하던 그는 드디어 선과 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구절을 발견하였다.

그때 그는 "그 경책을 머리에 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고 할 정도로

감격하였다. '화엄론'을 읽으면서 손과 교가 하나라고 확신하게 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이 교요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선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은 필경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닌데 어찌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기 제가 익힌 것만을 고집하고 망령되이 온쟁함으로써 헛되이

세월을 보내겠는가(화엄론절요)

 

이렇게 교와 선이 융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지눌은 무엇보다도 불교가 마음을

닦는 것에 투철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음을 닦는 불교로 돌아갈 때 바른 법이

구현될 수 있으며 선교의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닦는

비결을 밝힌 '수심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자를 잡지 말고 뜻을 바로 알아 하나하나 자기에게 돌려 근본 이치에 합치되도록

하면 스승 없는 지혜가 자연히 앞에 나타나며 찬연한 이치가 밝아 어둡지 않으리라.

 

지눌은 사람이면 누구라 자기 마음에서 불성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불성을 구한다면 티끌처럼 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우면서 뼈를 두드려 골수를 꺼내고 몸을

찔러 피로 경을 베낀다 하여도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 같아 헛수고만 할

따름이라고 단언했다.

자기의 마음에서 불성을 찾는 것이 진정한 수행의 유일한 길이라면 수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경전을 읽고 연구할 겨를이나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

백성이라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귀족 불교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수행

방법을 역설하느라 이렇게 충격적인 주장을 편 것이다.

그러나 지눌은 극단론에 기울지는 않았다. 문득 깨닫는 돈오와 함께 오래 두고 닦는

점수가 또한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정혜 쌍수(선정과 지혜는 함께 닦아야 한다는

)라는 말로 선종의 공부와 교종의 공부를 함께 아우르고자 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 뜻은 새로운 종파를 만들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라

이래로 이상으로 삼아 온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통합적인 불교를 일으키되

이론이 아닌 실천에 초점을 맞추어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제시하느라고 새로운 노선을

천명한 것이다.

 

돈오 점수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고 선종과 교종의 합일을 근본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불교의 종파가 마음을 닦는 일에 투철해야 한다고 생각한 지눌은 마음을 닦는

일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깨침(돈오)과 닦음(점수)의 성격과 내용을 밝히는 데

힘썼다.

그에 의하면 올바른 수심의 길은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고 그 깨달음에 의거하여 점차로 마음을 닦아 나가는 것이다. 즉 돈오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점수라는 것이다.

돈오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며 자기 존재에 대하여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밖으로만 내달리던 마은의 빛이 존재의 원천을 돌이켜

비추면 우리의 참다운 모습이 밝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둥으로부터

밝음으로의 전환인데 마치 어두운 방 안에 불을 밝히면 갑자기 환해지는 것처럼 문득

이루어지므로 돈오라고 한다. 돈은 '갑자기'라는 뜻이다.

하지만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수심을 마친 것은 아니라고

지눌은 말한다. 그것은 아직 완성된 부처의 경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깨달았으면

깨달은 것을 기본으로 하여 점차 닦아 나가는 점수가 필요하다. 지눌은 점수가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비록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오랫동안의 습기(그릇된 습관)

갑자기 버리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에 의거하여 차츰 닦아나가 공이

이루어져 점차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점수이다(수심결)

 

말하자면 돈오가 자기 존재의 실상에 대하여 눈뜨는 것이라면 점수는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이다. 어떤 학자의 비유를 빌리자면 돈오가 아기의

탄생이라면 점수는 그 아기가 어른이 되기까지의 성숙이요 계발 과정이다.

그러므로 돈오만 하고 점수가 필요없다고 하는 것은 마치 갓나아기가 어른 행세를

하려는 것과 같으며 점수를 통헤서 어른이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정혜 쌍수

 

수심은 돈오로써 이루어지고 돈오한 후에 점수가 필요하다고 한 지눌은 점수의

방법으로 정혜 쌍수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이른바 악을 끊으면서도 끊은 것이 없고 선을 닦으면서도 닦는 것이 없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끊음과 닦음이 될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이 선정과 지혜를 아울러서 온갖

행을 닦으면 어찌 이것을 헛되게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나 다만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에 견주겠는가(권수정혜결사문)

 

말하자면 선종과 지혜는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정이란 참선으로 마음의

내면을 닦는 것이고 지혜란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여 사물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를 발한다. 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분리될 수 없듯이 마음의 본체를 찾는

선정과 마음의 작용을 바르게하는 지혜를 별개로 분리해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심을 함에 있어 선정에만 치우치는 것을 '헛되이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라고 했고 지혜에만 치우치는 것을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라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그는 정혜 쌍수의 구체적 실천을 위하여 25세에 승과에 급제한

직후 동료 승려들과 정혜 결사를 조직하고 이어 33세 되던 해에는 본격적인

정혜 결사 운동을 벌였다. 그는 정혜 결사를 조직하면서 취지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땅히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사를 만들자 그리고 늘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닦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예불과 경전 공부를 하면서 직접 노동으로

운력하여 각각 맡은 바를 이룩해 나가자 인연에 따라 양성하고 평생 구속없이

지내자(권수정혜결사문)

 

그리고 그 첫머리에서는 "삼가 들으니 땅에서 엎어진 자는 땅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땅을 떠나 일어나기를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마음에서

넘어졌으면 마음을 잡고 일어나야 하며 마음을 떠나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할 수 있다고 천명하고

그 방법으로서 선정과 지혜를 거듭 강조하였다.

지눌의 결사 운동은 귀족 불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조직 운동이었다.

그가 조직하려고 한 것은 사가 아니라 사였다. 사와 사는 다르다. 사는 승려만 모여

있는 단체이고 사는 승려와 신도가 함께 모여 만든 단체이다. 그래서 사에 모여든

사람들은 선정과 지혜 그리고 예불과 독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까지도 함께

한다. 이는 기존 불교의 세력 기반인 사원에 들어가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지눌은 따로 사를 결성하고 그 구성원을 널리 개방하여 선종, 교종, 유학,

도교 등에 속한 사람이라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원한다면 결사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실제로 지눌의 수제자로 조계종의 제 2대 조사가 된 혜심은 유학을

공부한 사대부 출신이었다. 이 결사 운동은 정법 불교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한 기존 불교의 이념과 형태를 혁신하기 위한 일대

선언서였다.

 

4.구도의 길

 

지눌의 사상은 선종에서 시작하였고 또 선종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정한 스승을 두지는 않았지만 평생 동안 중국 선종의 제 6대 조사인

혜능(638-713)을 마음의 스승으로 섬겼다. 얼마나 혜능을 사모하였던지 송광산에

지금의 송광사를 지은 후 그 산의 이름을 조계산으로 고칠 정도였다. 조계산은 혜능이

머물렀던 중국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혜능을 조계

선사라고도 하였다. 지눌에서 비롯한 조계종이라는 이름도 거기에서 다온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위대한 선승 지눌이 흠모한 혜능은 어떤 인물인가.

혜능은 중국에서 선종에 불을 지핀 사람이다. 중국이 낳은 위대한 천재 중의

하나이며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등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의 제자들이 '육조단경'(또는 '법보단경'이라고도 함)이란 제목으로

정리해 놓은 그의 가르침과 남긴 말은 중국의 불교 서적 가운데 걸작으로 꼽힌다.

별로 두껍지도 않은 이 책이 불교 경전 가운데 경으로 떠받들어지는 유일한 중국

작품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자나 맹자처럼 혜능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젊은 시절에는 땔나무를 해다 팔아서 어머니와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으며

따라서 글자를 읽고 쓰는 것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단골 손님에게 장작을 배달하고 돈을 받은 후 문을 나서던 혜능은 문득

문 밖에서 어떤 사람이 불경을 읽는 소리를 들었다. 한 구절 듣는 순간 그는 대번에

그 뜻을 깨쳤다. 그는 독경하던 사람에게서 그것이 '금강경'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황매산이라는 곳에서 제 5조 홍인이 가르침을 펴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노모가 생활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은 후 홍인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혜능이 큰 그릇임을 대뜸 알아본 홍인은 이 무식한 이방인이 제자들의

질투를 살까봐 그를 절 구석에 있는 방앗간으로 보내 막일을 하게 하였다.

어느 날 홍인은 법통을 전해 줄 시기가 암박했음을 느끼고 제자들을 모아 각자 마음

속의 지혜를 살펴 스스로 깨우친 바를 시로 써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누구든지 큰 뜻을 깨친 사람에게 의발(승려가 입는 옷과 밥그릇으로 도통을

전수한다는 의미가 있다)을 전하여 6대 조사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때 홍인에게는 신수라고 하는 큰 제자가 있었다. 제자들은 모두가 신수를 새

조사로 모시는데 이의가 없었다. 신수 또한 매우 겸손하고 정신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시를 지어 올렸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

먼지 묻지 않게 하라(육조단경)

 

홍인은 이것이 신수의 작품임을 대뜸 알아차리긴 했지만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 시에 따라 수행하면 나쁜 길로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신수를 가만히 자기 방으로 불렀다.

네가 지은 시를 보니 아직 자신의 참 본성을 알지 못했다. 문턱까지는 왔지만 아직

문 안으로 들어서진 못했다. 평범한 중생들이야 너의 시를 따라 수행하면 나쁜 길로

떨어지진 않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최상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최상의 지혜를 얻으려면 직관을 가지고 곧바로 자신의 참 본성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항상 모든 생각을 초월하여 세상 그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그것을 스스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홍인은 이렇게 말하며 시를 하나 더 지어 오라고 하였으나 신수는 며칠이 지나도록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더 이상 다른 시를 짓지 못했다.

이때 혜능은 방앗간에서 절구질을 하고 있다가 한 중(신수)이 시를 외고 있는 것을

듣고 그 시를 지은 사람이 아직 참 본성을 깨치지 못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까막눈이었기 때문에 시를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옆의 사람에게

부르는대로 적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시를 남겼다.

 

보리나무 원래 없고

거울 또한 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가 일까(육조단경)

 

이 시를 본 홍인은 혜능이 이미 참 본성을 깨치고 잇음을 알았다. 홍인은 헤능을

조용히 불러 창문을 가리고 금강경을 설법하였다. "마땅히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이

그 본마음을 내어라"는 구절에 이르자 혜능은 홀연히 크게 깨달아 세상의 만 가지

물건이 모두 참 본성을 잃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는 무아의 경지에서 이렇게 외쳤다.

 

본마음은 본디 맑고 깨끗하거늘, 내 어찌 알았으리오. 본래 나고 죽음이 없거늘

내 어찌 예상했으리오. 본래 다 갖추어 있거늘 내 어찌 눈치나 챘으리오.

세상의 만 가지 법이 다 거기서 나오거늘 내 어찌 알았으리오.

 

홍인은 그런 제자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본마음을 열지 못하면 아무리 법을 배워도 소용이 없다. 자신의 본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대장부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요 바로 부처인

것이다.

 

한밤중에 스승은 의발을 꺼내어 혜능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는 6대 조사가 되었다. 아무쪼록 잘 지키어 나가며 널리 중생을 건져

앞으로 끓어짐이 없도록 하여라.

 

이때 혜능의 나이 스물 세 살이었다.

 

지눌은 청년 시절에 혜능의 '육조단경'을 보다가 "본마음은 바깥의 일로 물들거나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을 보고 문득 깨달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기쁨을 가눌 길어 없어서 불전을 수없이 돌며 감사드렸다고

한다. 이것을 지눌의 '1차 심기 일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문사에서 '대장경'

열람하면서 선종과 교종이 근본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아 '돈오 점수' '정혜 쌍수'

이론을 내놓게 되는데 이를 '2차 심기 일전'이라고 한다. 그때 심성의 본바탕을

발견한 지눌은 평생 동안 혜능을 사모하여 스승으로 모셨다.

정혜 결사를 시작한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왕족과 관리 및 일반 백성을

비롯하여 수백 명의 승려가 결사에 참여하여 수도를 하고 있던 중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엄격한 금욕 생활을 기피하면서 시비를 일삼고 있었다.

지눌은 이들을 교화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기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물러나 대중 교화에서 손을 떼고 교제를 피하여 홀로 참선을

하며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였다. 그때 그는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다.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다. 또 날마다 부딪치는

사물에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의 인연이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개의치 말고 진실로

궁구해야 한다(대혜종고의 어록)

 

지눌은 이 문구를 보자 홀연히 눈이 열려 자기의 본분을 활연히 체득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참선의 근본은 은둔적인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이때의 심경을 그는 "내가 대장경을 열람한

이래로 방심한 일 없이 만족스럽게 수행을 해왔건만 오히려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지리산에서 '대혜어록'을 보다가 홀연히 눈이 열리어

마음이 당장에 안락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써 그는 세 번째 심기 일전을 한

것이다.

그는 그 뒤로 송광사에 머물면서 수행자들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해 교화에

힘썼다. 늘 대화 시간을 베풀어 고매하고 어려운 것을 멀리하고 가까우면서도

절실한 사례를 알려 주려고 문답과 비유 그리고 일화를 들어 대중을 깨우쳤다.

그러면서도 문자에 매이지 말도록 하였고 경전이나 스승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자기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대답을 말로 다 일러 줄 수 없는

까닭에 옛날의 어떤 스승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몽둥이로 후려치거나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다면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단도 직입적인 화두선을 선양하였다.

사람마다 타고난 소질과 능력에 따라 자기의 불성을 발견할 수 있는 방편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수행자들을 위하여 많은 지침서를 내고 10여 년간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고 교종과 선종을 합일하는 데 힘을 쏟다가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의 사상을 계승하여 정립된 종파가 지금까지도 한국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조계종이다

 

5.높은 정신 세계

 

지눌이 입적한 후 고려의 불교계는 완연한 변화를 보였다. 부귀와 권세를 다투며

대립하던 선종과 교종이 조화와 화합의 길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불교계는 의천의 종지를 받드는 천태종과 보조 국사 지눌의 종지를 받드는 조계종으로

양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유학을 공부한 사대부 출신인 혜심이 지눌의 사상을 이어 종파를 이끌었다.

지눌은 혜심을 보고 '너를 만났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면서 '너는 마땅히 불법을

스스로의 소임으로 삼아 애초에 뜻한 바를 바꾸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혜심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비문을 이규보가 썼다.

그 후 고려 말의 사대부들은 불교계의 폐단을 들어 불교가 새로운 사회의 이념

정립에 장애가 된다면서 척불론을 폈고 조선 왕조의 건국과 함께 불교는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불교는 회통 불교의 전통과 호국 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 나갔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태고 화상 보우과 무학 대사 자초도 지눌의

맥을 이어 조계종의 조사가 되었다. 그리고 조계종은 조선 시대의 가장 큰 교단을

유지하며 내려왔다. 임진왜란 당시에 승병을 이끌고 구국의 길에 나선 서산 대사나

사명 대사 들도 모두 조계종의 선승이었다.

한국 불교의 전통 사상은 통불교 사상이다. 이 사상은 원효에 의해 처음 창달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도의 불교를 원론 불교 중국의 불교를 종파 불교 한국의

불교를 회통 불교라고 한다. 이는 늘 통합을 추구하는 한국 불교의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혼란이 심한 상황에서 통합을 시도하다 보면 고민과 해결 노력에

깊이가 더해져 더욱 위대한 사상이 창출된다. 원효가 그랬고 지눌이 또한 그러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눌은 원효의 사상을 온전히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형태만의 합일이나 조직만의 통합을 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위와 아래 귀족과 민중을 아우르며 종파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본원적

통합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눌에 이르러 중국적인 선에서 탈피한 독창적인 한국적 선이 확립되었다.

그 이전의 선은 중국 선의 연장이거나 그 영향 아래 놓여 있었는데 지눌에 이르러

돈오와 점수를 하나로 보는 회통적인 선의 전통이 수립된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사상은 오늘까지도 한국 불교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으며 원효 사상과 함께 외래

사상의 주체적이고도 독창적인 수용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한국 유학의 특질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성이라 한다.

그리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것에 두려워한다(중용)

 

1. 유학의 본질

 

공자

 

공자는 중국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사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유학이라는 하나의

사상체계를 정립한 인물이다.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에서 살았으며 고대 사상들을

종합하여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약경 등을 정리하여 유가의 시조가 되었다.

유학에서 중심으로 다루는 것은 인간의 문제이다. 그래서 유학은 인간의 주체성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인도주의적 성격과 백성을 모든 것의 근본으로 삼는 민본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유학은 유가 또는 유교라고도 불리며 공자에 의해

집대성된 이래 동양 사상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 시대는 극심한 혼란기였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는 길은 인간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인간다워짐에 관심을 기울였고 인간이 개인적으로 완전한 인격을 갖추고

사회적으로 남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였다.

공자는 인간이 모든 사람과 일체가 될 수 있는 인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이상적인 인격자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상 사회를 이룰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욕심과 개체적인 소망 그리고 개별적

차이를 갖는 유형적인 한계 탓에 대립과 투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예와 명분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양면적 성격을 갖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러나 공자는 얼핏 모순되는 듯한 이 양면적인 성격을 평면적으로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는 인간이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본성인 ''을 기본으로 하여 유형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공자가 제시한

것이 바로 '중용' 사상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수양하여 남을 편안하게 한다'는 수기 치인의 사상을 내어

개인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통일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내성 외왕 이라고도 하는데 내성이란 개인적으로 자기를 수양하여 이상적

인격자인 성인이 되는 것이고 외왕이란 사회적으로 이상적인 정치를 펴 차별 없는

평등 사회인 대동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맹자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유학의 체계를 확립한 인물이다. 그는 공자가

주장한 ''에 더하여 ''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대립과 투쟁을

일삼는 당시 사회의 근본 원인이 인간이 본래의 선한 마음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성선설(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는 주장)'

제창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본질을 추구함으로써 천인 합일의 인간관을

수립하였다. 본래 선하다고 하는 성은 공자의 개념으로 보면 ''이고 '천명'인데

맹자는 인간이 물질에 구애받고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도 영속적인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이 위로 흐르지 않고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도 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맹자는 본래 선한 인간의 성의 구체적인 내용을 인의예지의 네 가지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관계의 질서를 오륜으로 설명하였다. 모든 사람이

학문에 힘쓰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정성스럽게 실천하여 이 본성을 알아 회복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일체가 되고 대립과 투쟁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힘으로 다스리는 패도 정치가 아닌 덕으로 다스리는 왕도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맹자는 군주가 포악하여 덕으로 백성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면

혁명을 일으켜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혁명 사상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주자

 

주자는 송나라 사람이다. 이 시대는 불교와 노장 사상이 널리 유행하고 유학이

상대적으로 쇠퇴한 상황에서 불교와 노장 사상의 사회적 폐단이 두드러지던

시기였다. 이에 송의 유학자들은 그러한 폐단을 비판하고 유학의 윤리 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불교와 노장 사상의 이론적 성과물들을 흡수함으로써 유학의 전통을

새롭게 수립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주자에 의해서 집대성되었다.

주자가 깁대성한 유학을 그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이라고도 하고 성이 곧 이라고

주장한다. 하여 성리학이라고도 한다. 또 송나라 때 완성되었다. 하여 송학이라고도

하고 도의 실천을 근본 문제로 삼는다고 하여 도학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유학을

새롭게 일으켰다고 하여 신유학이라고도 한다.

주자는 자연의 구조와 인간 심성의 구조가 동일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우주 자연의 질서가 곧 인간 사회의 도덕적 당위가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기론을 폈는데 그 목적은 우주 자연의 근본 이치인

이가 인간의 본성과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이 격물 치지의 인식공부와 거경(경이란 마음을 한곳에 모아 달아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니 거경이란 마음을 거울같이 맑고 깨끗하게 가져 사사로운 마음이나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 함을 뜻한다)의 수양 공부였고 최종 도달점은 천명을 알아

성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철학적 토대에 기초하여 주자는 사회 윤리학을 확립하였다. 그는 오륜

중심의 질서를 구축하고 왕도 정치의 이상을 확립하여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 주자학은 명나라에 이르러 왕양명에 의해 비판되었지만 중국과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 한국 성리학

 

한국에 유학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활발하게 연구된 것은 고려 말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이때 유입된 유학은 송나라의 주자가 체계화한 성리학이었다. 고려 말기는

정치와 경제가 피폐하여 민심이 극도로 불안한 시기였다. 또 지배 이념이던 불교의

폐단도 날로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새로이 등장한 지식인인 신진 사대부들은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수립하는 데 바탕이 될 이론으로 성리학을

택하였다. 성리학은 본래 불교 배척을 목적으로 출발한 사상이었고 이러한 성리학의

성격은 고려 말의 상황에 그대로 부합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수용된 성리학은 한국적 토양에 맞게 변용 과정을 거치고 한국 사상의

특질을 그대로 반영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성리학과는 달랐다.

중국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의 곧 하늘의 의지이므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여

그것으로 하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천인 합일의 논리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하늘과 사람이 애초에 분리되지 않는

하나였다는 '천인 무간(하늘과 사람은 간격 없는 하나라는 뜻)'을 전제로 하여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한국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여 성인이

되고자 하는 수양 철학과 인간 사회의 본래의 모습인 지상의 낙원을 이룩하고자

하는 지치주의가 발전한다. 그리하여 한국 성리학은 중국 성리학에 깊이와 체계를

더하여 고도의 수양 철학과 철저한 정치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3. 한국의 성리학자들

 

한국 성리학은 '하늘과 간격 없는 하나'를 실현하는 문제를 놓고 세 가지 흐름으로

발전한다. 한 흐름은 인간의 내면 수양을 통하여 하늘과 하나(인간=하늘)되고자 하여

인성론을 중심 논제로 삼아 경 중심의 수양 철학을 정립한 이언적 이황의 노선이다.

이들은 정치적 실천보다는 내면 수양을 강조한다.

그 반면에 하늘의 이상이 현실적인 사회에서 실현되어야 한다(천리=인사)

지치주의 정치 사상을 정립한 조광조 이율곡이 또 한 노선을 이루는데 이 노선을

택한 사람들은 내면 수양도 강조하지만 그 보다는 정치적 실천을 더 중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앞의 두 노선이 인간의 사회적 속성을 문제로 삼았다면 세 번째 노선에선 조식

서경덕은 인간의 자연적 속성을 문제로 삼았고 자연과 우주를 연구하면서 자연과

하나(자연=인간)되어 물아 일체를 이루고자 하였다

 

사람=하늘

 

고려 말 최고의 학자였던 목은 이색은 한국의 전통적인 '천인 일체'의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늘과 사람이 간격 없는 하나'라는 사상을 이끌어 냄으로써 중국의

성리학을 수용하고 정학시켰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수양 철학의 맥이 이어진다.

이색의 제자였던 권근은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여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는 사실을

그림을 그려 치밀하게 논증하였다. 이 논증을 위하여 작성한 것이 '입학도설'이다.

그는 사람을 하늘과 같이 소중한 존재로 보아 전통적으로 유학에서 사용해 온

'소인'의 개념을 없애고 그 대신에 '중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정도였다.

이언적은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는 것을 확대하여 인간의 일과 하늘의 일을

일치시켰다. 그래서 그는 자연 재해를 하늘이 부덕한 인간에게 내리는 재앙이라고

해석하여 도덕성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 중심의 수양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황은 수양 철학의 완성자로서 사단 칠정론을 전개하여 '천인 일체'의 본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한국적인 수양법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기론이 심성론을

심화시키는 차원에서 더욱 발전하여 깊이 있는 형이상학적인 체계가 구축되었다.

그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로 손꼽힌다.

 

천리=인사

 

하늘과 사람이 원래 하나라는 전제를 확대하면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사회도 본래는

하늘의 이치가 구현된 이상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하여 이

현실의 세계에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정치 운동이 전개되고 정치 사상이 발전하게

된다.

조광조는 유학을 토대로 하여 천인 일체의 이상 사회를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적극적인 교화와 정치적 실천을 통하여 임금과 백성을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듦으로써 요순 시대의 이상을 자기 시대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상의 실현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과감히 개혁하고 이상 실현에 반대하는

자들을 소인배라 하여 과감히 제거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과 사를 가르는

기준을 지나치게 엄격히 적용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의 대쪽 같은 정신은

그 후 의리 정신으로 발전하여 '선비 정신', '지사 정신'으로 계승되었다.

이이는 지티주의의 정치적 실천 운동을 계승하여 그것을 깊이 있는 이론 체계로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독창적인 사상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에 으르러 한국

성리학은 중국 성리학보다 일보 진전하게 된다 현실 세계에서 이상을 구현할 방도를

모색한 그의 사상은 그 후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자연=인가

 

, , 도 삼교를 통일하려는 한국 철학의 전통은 한국 성리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서경덕은 성리학자이면서 자연 철학을 발전시켜 노장적 성격을 갖는

유학을 발전시켰다. 조식도 같은 계열에 속한다. 그리고 김시습 역시

성리학자이면서도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를 두루 섭렵하여 자기 사상으로 녹여

냈다. 김정희도 이와 맥을 같이하였다.

 

4. 조선 후기 성리학

 

이황과 이이에 이르러 철학적 발전의 절정에 달했던 성리학은 임란 이후 서서히

퇴보하면서 공리 공론으로 치닫게 되고 사색 당쟁의 이론적 무기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예송 논쟁'(조선 후기 효종 숙종 연간에 남인의 거두인

허목과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중심이 되어 벌인 논쟁 효종이 갑작스레 죽자 복상

기간을 1년으로 하느냐 3년으로 하느냐를 놓고 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 훗날 효종의 아내인 인선 왕후가 죽자 다시 상복을

입는 문제로 논란이 일었는데 이 논쟁은 예의 엄격한 시행에 의미가 있기보다는

명분을 앞세운 권력 다툼의 성격이 강하였다)이 일어나고 '인물성 동이 논변'(조선

후기에 성리학자들이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문제섬아 논쟁한

것을 말한다. 이 논쟁이 일기 전에는 인간의 본성을 논하면서 모든 인간이 기질이나

성격 모양은 달라도 그 본성은 같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었다. 이 논변을 계기로

당시의 성리학계는 호론과 낙론으로 나뉘었다)이 일어났다. 이 논변은 논변 자체로는

철학적 의미가 없지 않았지만 17세기부터 당쟁에 문벌 의식 지역 의식까지 합세하게

된 상황에서는 지배층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부작용도 보였다.

같은 유학 계열인 양명학까지도 철저히 배척하면서 전개된 성리학은 종교적 신념과

명분론적 사고의 발전으로 절대적 가치관애 따른 살신 성인과 멸사 봉공의 차원

높은 희생 정신을 발휘하게 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조 사상계를

성리학 일색으로 물들여 학문의 다양한 발전을 저해하였고 성리학을 무비판적으로

묵수하게 하는 폐단도 낳았다.

그리하여 조선 전기에는 혁신적인 역할을 하고 중기에 이르기까지는 사회의 질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해 왔던 성리학은 당파간의 알력이 심해진 중기 이후에는

사상적 진정을 이루지 못하였고 임진, 병자, 양란 이후의 심각한 사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채 무기력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절박한 현실 상황을 타개하려는

실학자들에 의해 유학에 대한 대대적인 반성이 이루어졌고 근대화의 문제가

대두하면서 개화파의 등장을 보게 되었다

 

 

조선 왕조의 이념을 정립한

삼봉 정도전

 

전하! 권세가 막강한 자들이 땅을 많이 차지하여 힘이

없고 약한 자들은 그들에게 땅을 빌려 경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난 것은 다시 절반씩 나누어 가져갑니다.

땅을 경작하는 자는 하나이지만 그 땅에서 먹고 사는 자는

둘이니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집니다. 심지어는 스스로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땅을 버리고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도둑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 그 폐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그들이 사는 곳에 나가 친히 그 광경을 보시고

과감한 전제의 개혁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소서

(조선경국전 상)

 

1. 이성계와 손잡다

 

때는 고려 말이었다. 스스로를 장량(한나라 고조 유방의 참모)이라고 생각하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데 반대하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난

6년 간 이리저리 떠돌며 생활한 끝에 김포에 자리를 잡고 제자를 가르치며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1383(우왕 10) 가을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홀연히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함흥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시에 함흥에는 이성계가 동북도 도지휘사로 있었다. 그는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쳐

용맹을 떨치고 나라 안에 한창 명성을 올리고 있었다. 게다가 막강한 군대까지

거느려 당대의 용장이던 최영과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마침내 함흥에 당도한 선비는 이성계의 군막에 이르렀다. 이성계의 군대가 기강이

잘 잡히고 대오가 잘 정돈된 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암울했던 세상이 다시

훤해지는 듯하였다. 그는 감탄하며 말했다.

"훌륭하도다. 군사여! 이 힘으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이성계는 문득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짐짓 둘러대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오. 남쪽에서 노략질하는 왜구를 친다는 말이외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미 그 선비의 속마음을 읽고 있었다. 군대의 힘을 이용하여 낡고

부패한 데다 혼자 일어날 힘조차 없는 고려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일으키자는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말하자면 역성 혁명을 하자는 것이다.

두 사람이 얼마나 이야기가 잘 통했던지 이때부터 조선 왕조가 개국한 1392년까지

9년간 이 선비의 주선과 계략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선비는

장량을 자처하며 이성계의 군사가되어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이 개국하자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태조가 되었고 선비는 일등 개국 공신이 되었다.

그가 바로 조선 왕조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통치 이념을 정립하였으며 국가의

기틀을 수립한 정도전이었다. '태조실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정도전은 개국한 즈음에 가끔 취중에 중얼거리기를 "한고조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썼도다"라고 했다. 무릇 나라를 세울 적에 그의 계략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대업을 이루어 으뜸가는 공을 세웠다(태조실록

78월조)

 

2. 성리학을 배우다

 

정도전(1337-1398)은 충청도 단양에 있는 삼봉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의 어버지는 중앙의 제법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어머니 우씨는 미천한

천민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정적들에게서 '미천한 데서 몸을 일으켜 권력을

탐내며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비난을 받곤 하였다.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그는 글을 읽는 선비이면서도 무를 겸비하였고 성격이

호방하여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다고 한다. 그리고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많은 서적을 널리 읽어 이로가 정연하였다고 한다.

2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성균관의

박사로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말의 유명한 학자 이곡(가전체소설 '죽부인전'

저자)의 친구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이곡의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던 이색의 문하에서 종몽주 이존오 권근 이숭인 등과 함께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고려 말 안향 백이정 유탁 들에 의해 도입된 성리학은 권근의 할아버지인 권부를

전승자로 하여 이제현 이곡 이색의 순으로 그 맥을 이었다. 그 후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정도전 권근 길재 들의 대학자들이 배출되면서 성리학은 큰 발전을 이루었다.

사물의 존재나 현실의 문제를 중시하면서 인륜의 근본이 되는 포괄적인 원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성리학을 자기 이념으로 받아들인 신흥 사대부들이 세를 키워 굳혀

가는 과정에서 더욱 뚜렷하게 되었고 이러한 원리를 현실 속에서 실현하려는 실천적인

활동은 조선 왕조의 건국에서 큰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역사적 전환기에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활동한 이가 바로 정도전이었다.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들은 지방의 중소 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계층이었는데 당시의

사회에 대하여 대체로 비판적이었고 불교의 폐단을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가 개혁을 필요로 한다는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3. 역사적 전환기

 

고려 말의 상황은 그야말로 난세였다. 고려 중엽의 무신 정권 수립 과정에서 빚어진

내란과 그 뒤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인한 외환이 겹치면서 나라안은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피해가 채 회복되기도 전에 고려 말엽에 다시

북쪽에서는 홍건적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침략하여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다.

정치적으로도 원나라의 강요로 그 나라 공주를 왕비로 삼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왕의 호칭도 조나 종을 쓰지 못하고 왕 자를 붙이게 되었다. 원나라는 끈임없이

고려를 침식하려고 하였으며 금, , 포목, 인삼, 해동청 심지어 처녀와 환관까지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매를 잡는 기관 결혼을 감독하는

기관 처녀와 과부를 찾아서 원나라에 공납하는 기관 등이 별도로 생겨날 정도였다.

정치적인 자주권만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경제 질서도 철저하게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지배 이념이던 불교가 타락하면서 승려들이 사원들을 중심으로 치부에

앞을 다투었고 승려의 특권을 탐하여 출가하는 자들이 속출해 생산 노동을 하지 않는

승려의 수는 점차 늘어났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사원의 농장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권문 세가들의 농장도 거듭 확대되어 사원과 권세가들의 토지가 산천을 경계로

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이렇듯 심각한 토지의 집중으로 농민들은 거의 자기 땅을

가질 수 없었다. 권문 세가와 사원은 나라 집중으로 되는 토지를 어마어마하게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나라를 지키는 일에는 뒷전이었다. 그 부담은 모두

농민들에게 전가되어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결국은 무거운 부담과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 되어 심한 경우에는 한 군현이 텅

빌 정도였다.

이렇게 말기적 증후가 뚜렷하던 당시에 중앙 정계로 진출해서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권문 세가들과 개혁을 위한 한판 대결을 벌이려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색의 문하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

사대부였다. 이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주기 위한 전제 개혁을 주장하였고

나아가 이미 국운이 쇠한 고려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가능성마저

배제하기 않았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 신흥

사대부들 가운데에서도 강경 노선을 내세운 급진파였다. 그는 단순한 개혁만으로는

고려 사회의 뿌리 깊은 모순을 해결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정도전이 이처럼

강경 노선을 택하게 된 데에는 그의 미천한 출신 성분과 오랜 귀양살이(9년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4. 새 왕조의 이념을 세우다

 

오랜 귀양살이가 역성 혁명에 대한 사상적 준비 기간이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정도전은 그 시기에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은 원나라의

간섭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친원 정책을 취하고 있는 조정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정몽주, 권근, 이승인 등 함께 중앙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대부들도 마찬가지로

귀양을 갔다. 이 귀양살이는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귀양갔던 곳은 소재동이라는 천민 마을이었다. 그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감회를

적은 '소재동기'라는 글에서 그는 그곳 사람들이 순박하기만 하고 허영심이라고는

없으며 농사짓는 것만을 업으로 삼으면서 자기를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고

고마워하면서 천민의 마을인 부곡에 사는 무식하고 지체가 낮은 농사꾼들이 자기와

생각이 통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인정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답전부'라는 글에서는 평생 농사일만 한 노인이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하는

치사하고 부끄러운 행동들을 꿰뚫어보고 있다면서 이인이라고 생각되어 가서

배우고자 했더니 노인은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더라고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금남야인'이라는 글에서는 지위나 재물을 탐내는 벼슬아치가 아닌 진정한

선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학문을 하고 도리를 밝히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되짚어 보고 있다.

이렇게 농민들의 실정을 이해하고 그들과 마음을 나누면서 새롭게 눈을 뜬 그는

선비된 자의 진정한 도리를 찾기 위하여 유학의 이론을 연마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정당성을 재삼 확인하였다. 그는 유배지에서 이런 시를 남겼다.

 

예로부터 죽음은 한 번 있을 뿐

목숨을 붙여 안락히 살고 싶지 않네.

적막한 천 년 뒤에

영웅 열사가 가을 하늘에 빗겨 보이네(감흥 삼봉집)

 

이 시를 보면 유배 시절에 이미 그가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이를테면 혁명가의

길을 꿈꾸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대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을 절감하면서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갔던 것이다

 

사상적 준비-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세우다

 

정도전은 고려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불교의 폐단과 토지 소유의

집중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대토지 소유를 억제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며 외적의

침략을 방비하고 성리학을 세움으로써 불료를 철저히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점에서 정도전의 성리학은 불교를 비판하고 통치 이념을 수립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적 무기였다.

그는 불교가 인륜을 도외시하여 사회의 질서를 파괴할 뿐 아니라 군신과 부자의

도리를 무시하고 걸식 들의 비생산적 태도와 호사스런 불교 행사로 나라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불교를 받들다 화를 입었던 역사적 사례'를 일일이

들어 해국의 증거로 삼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현실 세계는 진실한 모습이 아니며

그것을 초탈하는 정신적 실체만이 진실한 것이라 하고 또 그것만이 영원 불렴할 뿐

이미 운명이 정해진 영혼은 해탈하기 전까지는 전생, 현생, 내생의 삼세를 떠돌며

부단히 윤회를 계속한다는 '윤회설'을 주장하는 데 대해서는 정도전은 천지 만물은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기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불교의 '영혼 불멸'이나 '운명 윤회설' '삼세 윰회설' 등은 허황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극락, 지옥설을 부정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죽었다. 다시 살아나서 지옥에 들어가 이른바

염라 대왕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왜 그런가 이는 그런 일이

있지도 않고 또 있을 수도 없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어떤 이는 불교의 지옥설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끌어서 착하게 살게 하려고 지어 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석씨지옥지변 불씨잡변)

 

나아가 그는 불교의 인과 응보설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불교에서 사람들의 생사,

화복, 수명, 부귀, 빈천 등에 차이가 있는 것은 전생에 지은 바에 따라서 현생에서

받는 응보라 하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빈부 귀천 등의 차이가 나는 것은 타고난

기질과 성격에 따른 것이며 인과 응보를 내세우는 것은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약속함으로써 사람들이 현실에서 열심히 사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 불교가 '', '', ''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여 현실 세계란 한낱 가상이고

환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반박하였다.

 

부처가 죽은 지 수천 년이 지났어도 저 위의 둥근 하늘은 또렷하기만 하다.

그 아래의 그득한 땅은 부드럽기만 하고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다른 것들은

눈부시게 아름답기만 하다 해되 달이 지나고 더위와 추위가 오고 가는 것은 질서

정연하기 짝이 없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그러하겠는가 반드시 실리가 있어서

주재하기 때문이다(불씨잡변)

 

이 실리가 곧 유학의 이치요 그 유학이 바로 성리학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성라학만이 실질적인 학문이요 올바르고 합리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하였지만 스승인 이색이나 정몽주와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그는 은거하며 심성 수양에 전념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세상에 적극적으로 부딪치면서 나라를 구하는 방책을 구하는 것이 학자의 도리라고

하였다. 그는 스승과 선배들이 호를 목은이니 포은이니 하면서 은자를 자처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으며 중요한 것은 올바른 도리를 현실에서 어뗳게 구현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도라는 것은 혼자 은둔하여 마음의 결백을 찾는 데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맞서는 대결 정신을 통하여 인식되고 또

실행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이치가 그러한데도 당시의 선비들이 왜소하고

소심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고 분노를 터뜨리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 선비라고 청하는 자들은 헌 갓과 낡은 옷으로 조심조심 고개를 뽑았다. 움츠렸다

하면서 그저 관망만 하여 겨우 자기 보신할 것만을 생각한다. 부끄럼을 모르는 자는

말을 꾸며서 작은 재주를 부리고 요행에 따라 분주하며 이록을 가로채고 벼슬하지

않고 지낼 때에는 고담 활론을 이르지 않을 떄가 없지만 일을 맡기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송조생부거서 삼봉집)

 

, 선비를 자처하는 무리는 헛된 명분이나 찾으며 작은 이익을 꾀할 것이 아니라

소극적이고 퇴영적인 기풍을 스스로 혁신해야만 역사의 전환을 감당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야만 유학의 도리가 실천적인 의의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현실과 맞물려 아주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덕, 윤리, 경세 등의 성격을 갖는 성리학에서도 특히 경세의 측면

다시 말해 국가 운영에 관계되는 측면을 주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부국 강병에 유용한 제도와 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으며 그래서

성리학에서는 이단시하는 한당의 공리적인 사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또 기층 신앙으로 굳어진 도교나 도참설 등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민본 사상과 왕도 정치 사상

 

그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임금의 하늘'이라는 '민본 사상'을 통치 이념의

전제로 삼아 군주의 임무는 '하늘을 대신하여 하늘이 낸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라

하여 군주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을 편안하게 잘 살도록 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사사로운 생각으로 구차스럽게

얻는 것이 아니고 또 도를 어기면서 칭찬을 구하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역시

인으로 얻을 뿐이다"라고 하여 인정을 주장하였다. 즉 통치권의 정당한 근거로

민본을 내세우면서 그 통치권의 실천 규범으로서 덕치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창고가 가득해야 예절을 안다"고 하고 또 "사람의 성품은 모두

착하다. 그러나 남의 물건을 훔치고자 하는 것이 어찌 사람의 변함없는 정이겠는가.

사람이 못된 짓을 하는 것은 대부분 이리저리 몰리다 보니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급선무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의 사상이 백성을 다스리고 국가를 경영하는 경세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세금 걷을 생각을 하기 이전에 민생을 넉넉히 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고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또 형벌을 쓰는 것은 형별을 쓰지 않기 위해서고 나아가서는

형벌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 하여 정치의 도덕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정치의 근본은

''에 있다는 것을 거듭 밝혔다. 그리하여 그는 유교 이념을 정치적으로 구체화하고

사회적으로 제도화하여 유교 사회의 기반을 확립하고 왕도 정치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5.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한 쿠데타에 성공하자 정치적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뒤로 7년 동안 눈부신 일을 해내었다.

그가 맨 처음으로 착수한 것은 국가 이념의 정립과 통치 제도의 정비였다.

그는 유교로 국가의 이념을 삼았고 성리학을 정통의 학문으로 내세웠다.

그는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의 저술을 통하여 유교 이념에 기반을 둔 통치

체제의 체계와 통치 철학을 제시하였다. 통치 체계로는 중앙 집권을 통치 철학으로는

왕도 정치와 민본주의를 근간으로 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기리편''불씨잡변'을 통하여 불교의 이론을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문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주례'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 체계와 과거 제도 그리고 병농 일치의 군사 제도를 받아들이고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는 조세 제도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는 '대명률'을 빌려

왔다. 그가 이상으로 삼은 정치 제도는 재상을 최고의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중앙 집권 체제였는데 그는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쓰일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는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 혁명을 긍정하였으며 또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하여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그는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려면 반드시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 농업 생산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고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장 힘들여 단행한 것이 토지 개혁이었다.

정도전은 권문 세가돠 사원이 소유하고 있던 사전을 혁파한 데 이어 국가의 공전과

균전을 늘렸다. 이것은 기득권 세력의 토지를 박탈하여 토지를 국가 소유 또는 직접

생산자인 농민의 소유로 하는 조처다.

또한 정도전은 공업과 상업, 염전 사업, 광산업, 산림업, 수량업 등을 국가

경영으로 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렇게 자작농을 광범하게 창출하고 산업을

발달시킴으로써 부국 강병을 달성하고자 하였으며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중심의

관료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혁안은 모두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가 법제화되었다.

한양 천도도 정도전이 수행한 중대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의 유신들과

권세가들이 살고 있던 개경은 언제나 저항적 기운이 감돌았고 또 새로운 왕조의

이념과 정책의 실현을 위해서는 과감한 혁신이 필요했다. 북쪽에 있으면서 늘

북쪽의 오랑캐에게 시달린 경험과 원나라에 지배를 받았던 사실을 감안하여

처음에는 남쪽의 계룡산 근방으로 천도하려고 하였으나 너무 후미지다 하여 양주

일대를 도읍지로 물색하였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적극적 지지와 무학 대사의 동의를

얻어 삼각산 아래에 도읍의 터를 잡았다. 그리고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산을

진산으로 하여 경복궁의 위치를 잡았다. 그는 경복궁의 이름은 물론 근정전, 광화문,

숭례문, 흥인문 등 서울의 궁궐과 대문의 이름을 손수 짓고 수도의 행정도

분할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 왕조의 사회, 경제, 정치적 기틀이 마련되었다

 

6. 왕자의 난에 희생되다

 

나라의 규모와 기틀을 정하고 왕조의 반석을 다진 그는 마지막 할 일을 시작하였다.

바로 세자를 정하는 일이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 곧 세자를 결정하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8명 있었다. 여섯은 전비인 한씨의 소생이었고 둘은 후비인 강씨의

소생이었다. 이성계는 한씨의 소생인 여섯 아들이 모두 조선 왕조를 건설하는 데

공을 세우긴 했지만 왕업이라는 큰 일을 맡기에는 학문이 부적하고 또 무장

출신들이어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강씨 소생인 두 아들 중 유달리

영리하고 자질이 총명한 막내 방석을 잘 다듬어 세자로 삼고 싶어하였다

정도전은 이에 동의하였고 이성계는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뒤 정도전에게 교육을

맡기기도 하였다. 이에 왕위를 서로 넘보던 여섯 아들은 불만이 많았다

특히 용맹과 지략을 자랑하던 넷째인 방간과 다섯째인 방원이 특히 그러했다

이들은 자기들의 사병을 동원하여 아버지의 쿠데타에 참여한 전력이 있었다.

조선조가 들어선 뒤에도 이들은 사병을 해산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세자가 아직 어린 제다가 왕위를 노리는 이복형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심히

불안한 형국이었다. 정도전은 왕자들이 계속 세자의 자리를 노리는 분위기가 있자

행정 감독을 명분삼아 왕자들을 각 도에 분산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방원과 방간 그리고 셋째인 방의는 하수인들과 함께 정도전 등을 한밤에

습격하여 죽이고 대궐에 들어가 장자인 방과(훗날의 정종)를 세자로 세워 달라고

상소하였다. 이성계는 정도전이 이미 죽었음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세자였던 방석을 궐 밖으로 보냈으나 방석은 나가다가 방원의 손에 죽었다.

또 방석의 친형인 방번도 양화진 나루에서 맞아 죽었다. 이 두 아우의 죽음을 방원은

비밀에 붙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다.

 

그 후 병약한 정종에게 후사가 없자 방간과 방원 사이에 왕위를 놓고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에 이성계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상왕으로 함흥에 머물고 있었다.

방원은 형을 잡아 귀양 보내고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이다.

이로써 이성계의 여덟 아들 중 다섯은 죽고 하나는 귀양 가고 다른 하나는 왕이

되었다. 살아남은 셋째 아들은 방원의 눈치만 보면서 몸조심을 하고 있었다.

상왕에서 태상왕이 된 이성계는 왕이 된 방원을 몹시 미워하였다. 그래서 계속

함흥에 머물면서 방원이 보낸 사신들을 활로 쏘아 죽었다. 바로 여기에서 유명한

'함흥 차사'라는 말이 나왔다.

 

7. 역사의 명암

 

정도전은 혁명가였다. 그는 당대의 모순을 바로잡고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실질적인 통치 이념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염려한 정치가였다. 그는 스스로 장량을 자처하여 '한고조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쓴 것'이라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장량은 나라를 세운 뒤에 물러나 '적송자(고대의 신선)를 따라 놀고자'

한다고 한 덕에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 반면에 장량만큼이나 공을 세운 용장 한신은

계속 남아 권세를 누리려 하다가 '토끼를 잡고 나니 사냥개를 잡아

먹는구나(토사구팽)'라는 말을 남기고 삼족이 죽임을 당하는 화를 입었다.

장량은 그만큼 현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은 끝까지 일을 벌이다가 비명에 갔다.

그 최후를 보다면 그는 장량이 아니라 한신이었다

정도정의 죽음은 죽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방원과 후대의 왕들은 그를

여지없이 깍아 내려 '악명'을 남게 하였다. 방원의 재위 중에 씌어진 '태조실록'

이런 기록이 있다.

 

정도전은 끝내 대업을 이루어 진실로 으뜸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국량이 좁고

시기심이 많았다. 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해치고자 하였고 묵은 감정을 꼭 갚으려

하였다.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라고 권하였지만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태조실록 78월조)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도 성리학의 연원을 말하면서 정도전을 일쑤 논외로 하고

정몽주에서 길재로 내려오는 도통을 중시하였다. 정도전은 훈구파의 선봉이엇는데

후대의 훈구파들은 성리학의 근본 문제에 소홀하였고 그러면서 성리학은 집권층에서

소외된 재야 사림의 전유물처럼 되었다. 그런데 사림파의 입장에서는 두 왕조를

섬기고 또 새 왕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정도전은 숭상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여말 선초의 혁명 건국파와 절의 충절파의 대표로 꼽히는 정도전과 길재에 대한

상반되는 평가가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 준다. 정도전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열어 그 터를 닦는 등 커다란 과업을 이루고 피살되었다. 그런가 하면 길재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심성의 도리를 찾고

제자를 길렀다. 그 밖의 다른 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천명을 누렸으며 오히려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조선 왕조가 자리를 잡자 정도전처럼 과감한 인물은

더욱 배척되었고 길재가 택한 길이 인정되고 숭상되었다. 어떤 학자는 그런

의미에서는 정도전이 최후의 고려인이고 길재가 최초의 조선인이라 할 만하다고

하였다.

이런 평가는 국가적인 개혁이나 민족적인 과업보다는 좁은 의미의 ''을 강조하는

풍조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지배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이 피살되면서 정몽주와 길재가 복권된

것이 그런 사정을 잘 말해 준다.

정도전은 역신으로 몰렸기 때문에 사후에 바로 시호도 내려지지 않았고 (후대에

문헌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한 사람의 일생을 적어 알리는 행장이나 묘비의 글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심지어 출새 연도까지도 불확실하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을 피하며 세상을 비판한 방외인

매월당 김시습

 

만 골짜기 천 봉우리 밖에서

고독한 구름 외로운 새가 돌아온다.

올해는 이절에서 지내지마는

오는 해에는 어느 산으로 향할 건가.

바람이 멈추니 소나무 창이 고요하고

향이 스러지니 선실도 한가롭다.

이번 삶을 나는 이미 단념하였기에,

발자취를 물과 구름 사이에만 남기리라.

(만의 매월당 전집)

 

1. 보기 드문 신동

 

1435년 성군으로 이름높은 세종 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17년째 되던 해였다.

그 해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양의 성균관에서 공자의 사당을 지키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다. 궁 북쪽 근처에 있는 충순위라는 벼슬을 하는

김일성의 집에서 공자가 다시 태어나는 꿈이었다. 깨어나서 같은 꿈들을 꾼 사실을

알고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직접 그 집을 찾아가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갓난아이가 태어나 있었다. 크게 놀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바로 기인 광인 천재로 너무 유명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자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의 작가인 매월당 김시습이다.

이 아이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말이 서툴러

잘 읽지는 못했으나 붓을 쥐여 주면 그 뜻을 써 냈다. 아이의 외할아버니는 크게

기뻐하며 말도 할 줄 모르는 아이에게 천 자문을 가르쳐 주었다. 천자분은 단지

한자를 첮 자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넉 자에 대구를 이루도록 하면서 중국의 산천과

문물과 역사를 읇은 시인데 아이는 그 뜻을 척척 이해하였다. 이 놀라운 재주를 본

이웃의 최치운이라는 사람이 시습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시습이란 '논어'

나오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것으로 '재주만 믿지 말고

끊임없이 배워 노력을 계속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다섯 살이 되자 시습이 신동이라는 소문은 온 장안에 퍼졌다. 허조라는 정승이 그

소문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시습에게 "나는 늙은 사람이니 늙은 노 자로

시를 지어 보렴" 하자 "늙은 나무에도 꽃이 피듯 마음이야 늙겠습니까"라고 응답하니

그는 "이 아이야말로 말 그대로 신동이구나" 하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 대왕도 신하를 시켜 그를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그의 재주를

알고 탄복하며 그 재주를 아껴 상을 내렸다. 게다가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고

뒷날 크게 쓰기로 약속하였다. 김시습은 다섯 살에 이색의 손자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의 아버지 이계전의 문하에서 '대학''중용'을 배웠다. 보통 10대에

배우는 사서의 반을 다섯살에 배운 셈이다. 그는 여남은 살에 이미 거의 배우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학문을 넓혀 나갔다

 

2. 수양 대군과 생육신

 

그러나 천재 소년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5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김시습은 어머니의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모신 후 삼각산에 있는

중흥사에 들어가 공부에 전념하였다.

20세가 되던 해였다. 절에서 공부하던 그는 서울에 더녀온 친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수양 대군이 어리 조카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 김종서 등의

정승들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른바 계유 정란이다.

어려서부터 놀라운 재주로 세종 대왕을 감탄하게 하고 왕의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에 몰두하던 그로서는 청천 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문을 잠근 채 사흘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저녁 방을 나온 그는 따을 치며 크게 통곡하고 그때까지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긴 머리를 서슴없이 잘라 마지막 불꽃 속에 던져넣었다.

그는 자신의 젊음과 꿈과 야망이 모두 한오리의 연기 속에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학문도 희망찬 미래도 세상을 사는 보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마음 속에는 다만 잘못되어 가는 세상에 대한 저항심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새남터에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사육신의 주검들을 하나 하나 업어다가

정성껏 묻어 주고 난 후 시통 하나를 달랑 들고 전국을 방랑하였다. 그는 평생

벼슬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저항하였고 방외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러면서 정신적 소요의 자유와 현실적 모순 사이의 고민을 담은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매월당집'이 있고 유명한 '금호신화'가 있다.

의리와 절개가 높다 하여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불리기도 한다.

 

3. 광인이라 불린 방외인

 

김시습(1435-93)은 방외인을 자처했다. 방외인이란 한마디로 세상을 등진 사람이다.

일반적인 유학자들은 나아가면 벼슬하고 물러나면 산림에 묻혀 음풍농월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지만 방외인은 그와 달랐다. 세속의 통념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자기

뜻대로 호방하게 살았다. 김시습은 시대의 기인이요 괴짜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세조가 '묘법연화경'의 번역 사업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불교계의 많은 승려들이 그

일을 맡을 사람으로 김시습을 추천했다. 세조의 부탁을 받은 효령 대군은 김시습에게

간청해서 다른 승려들과 함께 내불당에 들게 하였다. 내불당에 머문 지 열흘 쯤 되던

날 임금이 내정으로 스림들을 불러 법회를 열었는데 김시습도 이에 참여하였다가 이른

새벽에 행방을 감추었다. 사람을 기켜 행방을 찾으니 설잠(김시습의 승명)은 거리의

거름 구덩이에 들어가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김시습이 술에 거나하게 취해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영의정 정창손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시습이 그 앞을 가로막고 큰 소리로

", 이놈아 너는 이제 그만 좀 해먹어라!"

하였더니 정창손은 못 들은 체하고 지나가 버렸다.

또 어느날 김시습이 때묻고 더러운 옷에 새끼줄을 두르고 한양 거리를 지나고

있자니 뒤에서 물렀거라 는 벽제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어릴 적의 친한 친구인 서거정의 행차였다. 김시습이 썩 앞으로 나가,

", 강중(서거정의 자)! 자네 요즘 편안한가?"

하자 당시 대제학이었던 서거정은 수레를 멈추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그래, 그런데 자네도 편안한가?"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 넋을 잃고 서 있었다고 한다.

이퇴계는 김시습을 평하여 "일종의 이인이며 색은 행괴(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행동을 하여 남의 시선을 모으고자 하는 사람 '중용'에 나오는 말)에 가깝다"

하였다. 다른 기록에서는 김시습이 "미쳐서 읊조리고 다니며 세상을 구경거리로 여겨

희롱하고 세상을 피해 선승이 되었으나 불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그를 광승으로

취급했다"고 했다. 그리고 또 "여러 아이들이 흉보고 비웃으며 다투어 기와 조각과

돌을 던져 몰아냈다"고도 했다. 그러나 김시습은 단순한 이인이나 광인이 아니었다.

그의 기괴한 행동은 당시의 사회적 이념적 모순과 결부시켜 해석할 때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김시습은 자신은 일하지 않고 편안히 지내면서 입으로만 애민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 땀흘려 일하는 괴로움을 겪으면서 농민을

대변하는 시를 썼다. 이런 시가 있다.

 

농부는 한 해가 다 가도록 땀흘려 애쓰고

누에 치는 아낙네는 봄 내내 쑥대머리로 고생하는데

취하고 배부르고 좋은 옷 입은 무리들은 성 안에 가득하니

만나는 사람마다. 편한한 분들일 뿐이로구나.

(영산가고 제 4)

 

4. 그의 시대

 

그가 살았던 시대는 역사 구분으로 보명 중세였다. 중세의 사상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가치나 이념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중세적

이념에서는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기보다는 보편적 존재로 보며 개별적인

것보다는 보편적인 것을 중시한다. 그리고 존재보다는 당위가 우선이다. 그래서

'실상이 이러이러하다'는 현실보다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를 더욱 강조한다.

말하자면 '있는 것' 보다는 '있어야 할 것'이 더 중요하다. '있어야 할 것'

바로 이기철학에서 말하는 이 이다.

서양은 기독교 사상으로 모든 모순과 사회적 불평등을 다스리려 하였고 중국들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이기 이원론을 기본으로 하는 성리학을 채택하였다.

중세의 질서는 모든 힘을 하나로 돌리려고 하는 권위주의적인 것이었고 그 권위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 서양의 하나님과 동양의 천 다시 말해서 불변의 이 였다

번함없는 우주의 이치요 원리인 이 는 변화하는 모든 것 말하자면 '있는 것'-그것을

기라 한다-을 주재하고 통괄하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 이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이처럼 이를 중심에 두고 입장을 주리론이라고 한다. 예컨데 개별적인

부자 관계가 있기 전에 이미 부자간의 이가 있으므로 모든 부자 관계에서는 부자의

이를 지켜 친애하여야 한다는 식이다.

조선 왕조 창건을 주도한 신흥 사대부들은 고려 귀족의 이념인 귀족 불교를

비판하고 이기 철학을 새로운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그들이 제시한 이기 철학은

이를 중시하는 입장에 선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사회 체제를 안정시키려는 목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신흥 사대부들은 모든 사회 질서가 불변의 이치인

본원적인 이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하였고 사회적으로 모순이 확대되는

것은 왕도 정치가 불철저하기 때문이라고 보아 왕도 정치의 철저한 실현을

주장하였다. 또 설령 왕도 정치가 철저하게 실현되지 않더라도 그러한 이상을 가지는

한 사회는 근본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상에 자신을 맞출 수 없는 학자들은 이단적 지식인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세적 질서에 반대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면서 조선 왕조는 사회적,

이념적 모순을 점차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김시습은 기존 권위를 거부하고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철학적 노력을

펼쳤다. 스스로가 "성격이 편벽되어 궁해도 빌리지 않고 주어도 받지 않는다",

"나쁜 버릇인 줄 알지만 습관이나 성격은 고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듯이 타협을

거부하고 독선적이어서 자아을 굽혀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기 철학을 비판하고 이를 별도로 인정하지 않는 기 일원론을 폄으로써

중세적 이념에 심각한 도전을 결행한다.

 

5. 기 일원론의 선구자

 

김시습은 중세적 질서에 부딪혀 이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는 자아 의식을 최초로

심각하게 느낀 선구자이다. 이러한 자아 의식은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념까지도 배격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념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사회 모순을 절실히 체험하였다. 하여도 종래의 방법으로 해석하여 왕도 정치의

불철저한 실현으로 인한 잘못으로 보든가 소인배들의 폐단으로 세상이 어지러우니

그럴수록 물러나 안빈 낙도하면서 심성을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은 사회 모순을 비판한 것 이상으로 이념 비판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세상과 철저히 대립하였고 세상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평생을

방회인으로 남았으며 중이 되어 자기를 용납하지 않는 세상을 의식적으로 조롱하며

살았다.

김시습은 기 일원론을 수립한 선구자이다. 서경덕이나 임섣주 회한기 등으로

이어지는 기 일원론의 풀발점이 바로 김시습이다. 일원적 주기론이라고도 하는 기

일원론은 주리론과 대립하는 이론이다. 주리론은 자연 현상이나 사회 현상을 이에

따라 파악하여 중세 사회를 합리화하고 그 윤리적 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구실을

하였다. 주리론은 정도전 권근에서 비롯하여 이언적 이황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주리론에서는 이가 기보다 먼저 있으면서 기를 있게 하며 태극에서 음양이 나뉘고

음양에서 천지 만물이 생기니 태극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본원이라고 주장한다.

그 태극이 바로 이 이고 음양은 기에 해당한다. 여컨대 중세적인 질서의 근원은

(태극)이고 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는 이의 구현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은 '태극설'을 지어, 주리론을 반박하였다.

그는 태극이 음양을 낳는 것이 아니라 태극이 곧 음양이고 모든 존재자는 음양에

의해 대립적인 운동을 하며 태극은 음양의 대립적인 운동을 가장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태극 곧 이 에서 생간다는 견해를

부정하고 이는 기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기의 대립적인 운동

자체의 원리일 뿐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말하자면 이와 기의 관계는 주종

관계나 선후 관계가 아니라 대등 관게이며 그 자체로 의미 잇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음양의 대립적인 운동은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의 속성이라고 한다. 그는 '귀신설'이라는 논문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다만 하나의 기가 풀무질하고 있다"로 하여 기만을 인정하고 이를 별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화의 자취는 두 가지 기(즉 음양)가 저절로 그런 것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함으로써 이가 기를 주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김시습은 삶과 죽음도 기로써 설명한다. '생사설'에서 그는 기가 모여 태어나면

사람이 되고 기가 흩어져 죽으면 귀가 된다고 했다.

김시습의 기 일원론은 선구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하지 못한

구석도 있고 체계도 덜 잡혀 있었다. 특히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주리론을 과감하게

비판하였지만 윤리적인 문제에서는 주리론을 과감하게 비판하지 못하고 주리론적인

윤리관을 인정하고 들어간 점은 중요한 한계로 지적될 만하다.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존재론에서는 진보적이었으나 윤리론에서는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제왕이 다섯 가지 가르침을 베풀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조목을 제일 첫머리에

두었고 또 삼천 가지의 죄를 별여 놓으면서 불효를 가장 큰 죄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천지 사이에 살면서 누군들 길러 주신 은혜를 져버릴 수 있겠습니까.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조상을 뵈오리까(해동명신록)

 

그러나 비록 윤리적인 문제에서는 구체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데에 이르니 못했지만

그의 존재론은 중세적인 이념의 근거를 비판한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김시습이 보인 한계는 훗날 허균에 의하여 극복된다.

 

6. 금오신화의 탄생

 

김시습의 철학과 그의 소설 '금오신화'는 무관하지 않다. 아니 무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기 일원론과 소설의 구조는 정말로 닮은

꼴이다.

김시습은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고독한 예외자요 방외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온갖 기행을 거듭하며 세상과 끊임없이 대결하였다.

그 과정에서 세상을 개조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확보할 수 없는 처지에 있던

그는 철학적인 비판을 저항의 무기로 삼았다. 물론 김시습이 기종의 이기 철학을

깊이 터득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 일은

가능하였고 또 그래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올릴 수도 있었다.

김시습의 소설은 그가 벌인 철학적 투쟁의 문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금오신화'는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이라고

불리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소설이 신화나 전설, 민담 등과 구별되는 점은

'갈등' 다시 말해서 자아와 세상의 대림 그 자체에 중심을 둔다는 것이다.

'금오신화'는 그런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이 소설은 그 시대 유학자들이 비판과

탄압의 표적이 되었다.

그 시대의 공식적 가치관인 주리론에 어긋나고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금오신화'는 매월당집에 수록되지 않았고

김시습 자신도 "책을 지어 석실에 감추니 후세에 알아볼 자가 있으리라" 하였다.

기 일원론의 입장에서 보면 대립은 기의 속성이고 따라서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기에 의해 생겼다가 해결되고 또 해결되면서 생기는 항구적인 것이다.

기 일원론을 주장한 자들이 소설을 썼다는 것은 그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김시습은 스스로 소설을 썼고 서경덕은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제자인 허엽의

아들 허균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홍길동전'을 썼다. 더욱 주목한 만한

것은 '금오신화''홍길동전'은 권선 징악의 구조를 택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결과 모순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선한 자는

복받고 약한 자는 벌받는다는 전형적인 노선에서 벗어난 것이기도 하다.

'금오신화' '만보사저포기''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등의 세 편은 쉽게

말하면 연애 소설이다. 그리고 '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은 글쓴이의 이상과

정치관을 피력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남이

이해하지 못할 고독한 경험을 하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방황하며 또 혼자 비극을

겪는다. 그리고 그들이 부딪힌 문제들은 해결해 줄 수 있는 절대적 원리는 보이지

않는다. 즉 열심히 일하고 착하게 산다고만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이 자취를 감추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그는 그 후에 혼인하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캤는데 그가 어떻게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만복사저포기)

 

그는 뼈를 수습하여 부모의 무덤 곁에 장사지냈다. 장사를 마치자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에 병을 얻어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은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외로움을 사모했다(이생규장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분향을 하고 땅을 쓸고 뜰에다 자리를 펴고 턱을 괴고

잠시 누웠다가 문득 세상을 떠났다(취유부벽정기)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의지를 거듭해서 보여 주는 비장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김시습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바로 작가 자신인 것이다.

 

7. 세상 밖에서 세상을 비판하며 살다 간 방외인

 

숙부가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며 충성을 맹세한 신하들이 변절하는 것을

본 김시습에게는 절대적 당위인 이가 권위를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그러한 이치가 실현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절대적 권위를 누리며 군림하는

성리학의 이기론에 승복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권신들을 거리낌없이

조롱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수양 대군이 권력을 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권신 한명회가 한강가에

압구정이라는 화려한 정자을 짓고 거창하게 현판을 걸어 놓았다. 어느 날 김시습이

그 앞을 지나다가 그 현판을 보니 거리에 이런 시가 씌어 있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붙들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김시습은 이렇게 고쳐 놓았다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한 행에 한 글자씩 즉 부자를 위자로 와자를 오자로 바꿈으로써 뜻을 정반대로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이 보고 그럴듯하다고 수근거렸다. 한명회가 곧 현판을 치워

버렸음은 물론이다.

 

김시습은 명리나 부귀를 추구하지 않았고 또 그랬기 때문에 자기의 사상에 규제를

받지도 않았다. 한때 승려가 되어 방랑하면서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도교의

신선술의 일종인 선가의 수련에 몰두하기도 하였으나 그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았다.

'묘법연화경'의 번역 사업에 참여할 만큼 불교에 안목이 깊었으면서도 불교를

비판하고 또 도교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세적 입장은

늘 유학이었다. 평생을 속세에 초연하여 은일하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율곡은 그를 심유적불 즉 마음은

유가이나 그 자취는 불교적이었다고 일컬었다.

결국 김시습의 사상은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노자와 장자를 많이 닮아 있다.

다만 서경덕에서는 그것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추구하는 자연 철학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김시습에서는 그것이 호방과 거침없는 비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공통된 점은 둘 다 탈속한 삶을 살 수 있었고 종래의 학문적 체계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기 일원론의 맥락은 한국 유학의 한

줄기를 이룬다.

 

이율곡은 김시습을 "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 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평하고 "그가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더라면 그 업적이 한이 없었을 것이다"고 하면서 애석해 하였다.

선조는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해 생육신으로 떠받들게 하고 이율곡으로 하여금

'김시습전'을 윤춘년으로 하여금 '매월당전'을 짓게 하였다. 또 정조는 그가 죽은 지

거의 300년 후에 이조 판서를 추중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이 벼슬하지 않은 것을 세종

대왕에 대한 의리나 단종에 대한 절의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보다는 잘못된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그의 사상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방외인으로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치의 이상주의자

정암 조광조

 

학자는 성현이 될 것을 기약하나 반드시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군주는 요순 삼대의 이상 정치를

기약하나 반드시 요순의 정치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뜻을 이와 같이 세우고 사물을 탐구하여 참된 앎에

도달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면 점차

성현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요순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정람집)

 

1. 기묘 사화

 

중종 14(1519) 가을이었다. 대궐 안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궁녀들이 대궐 안의

뜰에서 주워온 나뭇잎이 벌레에 파먹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벌레들이 파먹은

자리가 글자들을 이루고 있었다. 주초위왕 즉 주초가 왕이 된다는 것이었다.

주초는 합치면 조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것이었다. 궁중에서는 벌레들이

이런 모양으로 잎사귀를 파멱은 것은 하늘의 뜻이라면서 온통 소란이었고 몇몇

후궁은 중종에게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가고 있다'고 고하였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조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돈다'고 수근거리고 있었다.

훈구파의 대신들인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왕에게 조광조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침소하며 즉시 체포하여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디어 조광조 김정 김식 등이 체포되었다. 뒤늦게 달려온 영의정 정광필은 눈물로

호소했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러시면 앞으로 상감께 바른 말을 할 사람이 없게 됩니다"

또 우의정 안당도 호소했다

"상감께서 뽑으셔서 요직에 올리시고 그의 말이라면 안 들어 주시는 일이 없었는데

하루 아침에 벌을 주신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두 헛일이었다. 이미 중종은 혁신 정치가 조광조의 도학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조광조 일당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었다. 조광조는 말하였다.

"나는 서른여덟이오. 사람들이 사사로이 개인의 이익만을 좇는 것이 이 나라의

큰 병이라고 생각하고 나라의 생명을 언제까지나 새롭게 하고자 한 것 외에

다른 뜻은 없었소"

그러나 판결은 '조광조, 김정, 김식은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종을 삼으며 재산을

몰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오후 성균관 유생 150여 명이 대궐 문에 모여 조광조

등이 죄가 없다고 호소하면서 데모를 했고 중신들도 죄가 없다고 거듭 상소하였다.

그리하여 조광조들은 처형을 면하고 귀양을 갔으나 곧 다시 아약을 받게 되었다.

그가 귀양길에 오를 대 '거리를 지나가던 모든 백성들이 옷깃을 모으로 절을 할

정도'였고 그가 죽었을 때 '시골의 노인이 올라와 통곡을 할 정도'로 백성들의 신망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기고 갔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이 하고

나라 사랑하기를 우리 집 사랑하듯이 하라

밝은 해 땅에 임하여 살피니

내 붉은 충정을 비추는구나.

 

과감한 추진력과 타협할 줄 모르는 정신으로 5년간 개혁 정치를 펴 조선 전체를

흔들어 놓았던 혁신 정치가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반대파의 모략으로

그렇게 갔다. 이것을 기묘 사화라고 한다

 

2. 스승 김광필과 무오 사화

 

조광조(1482-1519)는 너무 강직하고 비타협적이어서 꺾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요 정치가였다. 감찰 조원강의 아들로 한양 태생이고, 호는

정암이다.

조광조는 열일곱 살에 어천 찰방(지금의 철도 역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근방의 희천에서 귀양살이하던 한훤당 김굉필에게 수학하였다.

김굉필은 당대의 이름 높은 학자였는데 조광조는 그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몇 년 되지 않아 조광조는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탁월하고 촉망받는 청년 학자로

부각되었고 스승의 학통을 이어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광조의

도학을 이해하려면 그 스승의 학통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굉필의 스승은 김종직이다. 김종직의 스승은 김숙자이고, 김숙자는 길재에게서

배웠다. 이렇게 이어지는 학통이 사림파를 이룬다. 사림파의 줄기는 이성계의 역성

혁명에 참여하지 않고 저항하였던 정몽주 길재 등에서 시작된다.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죽고 길재는 산림에 숨어 금오산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이렇게 양성된 이들은

정도전 권근을 중심으로 하여 혁명에 참여했던 집권층의 훈구파와는 달리 의리와 절개

그리고 명분을 중시하면서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의리를 핵심 이념으로 지키면서 권력 집단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사림파는 지방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그 세력이 형성되엇는데 대체로 중소

지주층이었다. 사림파는 지방의 중소 지주로서 머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중앙 정계로

진출을 꾀하면서 새 왕조 창건의 명분을 철저하게 수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초기에 힘이 약했던 사림파는 점점 성장하여 이미 귀족화한 훈구파와 거의 맞설 수

있게 되었다. 관직과 토지는 제한되어 있고 사대부는 널어만 가는 상황에서 훈구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반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여러

차례의 사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 첫 번째가 무오 사화이다.

무오 사화는 연산군 때 일어났다. 연산군은 선왕인 성종이 자기의 어머니인 윤씨를

죽였다는 이유로 성종과 그 비호를 받고 있던 사림파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1498년 훈구파인 이극돈 유자광 등이 당시 언관이었던

사림파의 김종직이 '성종실록' 편찬 초고에서 항우가 의제를 죽인 일에 빗대어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죽인 것을 은근히 비난한 것을 구실로

연산군을 부추겼다. 그리하여 짐종직과 관련된 사림파의 선비들이 관직에서

내쫓기고 처형되거나 유배되고 재산을 몰수당한 사건이 무오 사화이다.

이때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굉필도 마찬가지로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조광조가 23세 되던 해 갑자 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김굉필은 죽음에 임하여서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사형의 명을 받자 목욕하고

관대를 갖추고 나오는데 안생게 변함어 없었으며 우연히 신이 벗겨지자 다시 신고

수염을 가다듬으며 태연히 죽어 갔다.

스승의 사망 소식을 들은 조광조는 더욱 시대를 기탄하며 공부에 열중하였다

사화 직후 공부에 더욱 독실해진 그를 보고 사람들이 '광인'이라 할 정도였고,

친구들과의 교류도 자주 끊기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무오 갑자 두 차례의

사화를 겪는 동안 훌륭한 학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고 생각하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헛되이 하지 않으리라 선생님이 못다 편 학문을 마음껏 펴 보리라'

다짐하였다. 결국 조광조의 문제 의식은 사화에서 시작하여 사화로 종격된 셈이었다.

조광조가 25세 되던 해에 '중종 반정'이 일어났고 이어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였다.

 

3. 도학의 도통을 세우다

 

조광조는 29세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절도가 있기로

유명했다.

중종 반정 이후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전반적 흐름 속에서

'탁월한 재능과 품행이 있다' 하여 성균관 유생들과 당시의 이조 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34세에 조지서 사지라는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출세를 바라고 공부한 것이

아닌데 관직의 명을 받았으니 과거를 보고 정식으로 임금을 모시는 것만 못하다"면서

그 해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 좌랑 들을 역임하였다. 이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과 신진 사대부들의 명망을 한몸에 모았다. 36세에 교리가 되어 임금에게

강의하는 경연관을 겸하였고 37세에 부제학을 거쳐 같은 해 대사헌으로 승진하여

5년간 중종의 총애 속에 특진을 거듭한다.

'연보'의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었을 때 법을 집행하는 것이 지극히

공평하고 교화를 극진히 하였기 때문에 풍속이 아름답게 변화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도성의 백성들이 효도와 경애를 알았고 상인들의 매매에 사기가 없었으며

관리들은 청렴 결백에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조정에 출입할 때에는 도성의

백성들이 그의 말 앞에 엎드려 절하며 '우리 상전 오신다'고 할 정도로 그는

백성들의 지극한 사랑과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조광조는 정치적으로만 명망이 높았던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이학을 한층 발전시켜

우리 나라 도학의 도통을 열어 놓은 학자라는 칭송도 듣고 있다.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고 '경전에 능통하고 글을

잘 짓는' 사장이 존중되었다. 그리고 과거 시험도 사장 중심으로 시행되고 도학은

경시되었다. 당시의 도학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이학에 포괄되는 것이지만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도학은 사장이나 시부를 중시하는 기풍에 반대하여 사물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철학적으로 사고하고자 하는 것이며 특히 한갓 명분만 내세우지 말고

현실과 생활에서 실제로 중요하고 기능적인 지식인보다는 인격을 갖춘 실력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광조는 도덕을 강조하며 도덕적 순결성을 중시한다.

중국에서는 성리학과 도학이 같은 의미로 쓰였고 우리 나라에서도 전혀 별개의

학문으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이해나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이이 같은 학자는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설총, 최치원, 안향 같은 이들은

우리의 도학과 관계 없다"고 하였고 더욱이 정몽주에 대해서는 "이치에 통달하여

어떤 말을 하든 다 이치에 맞는다" 하여 동방 이학의 비조라고는 칭하면서도 결코

도학의 비조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그 이유를

설명해 줄 만한 일화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정몽주가 조정에 다닐 때 한 제자에게

"나에 대한 평이 어떤가"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제자:선생님께서는 남의 잔치에 가시면 술을 많이 드신다고들 합니다.

정몽주:그래 어릴 적에는 가난해서 친구와 술 한잔 같이 마시지 못했는데 지금은

잘살게 되어 나도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손님으로 남의 집에 가면 술을 많이

마시지.

제자:선생님은 여자를 좋아하신다고들 합니다.

정몽주:그래 호색은 인지상정인데 여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제자:선생님께서는 중국제 물건을 많이 거래하신다고들 합니다.

정몽주:(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안색이 달라지며)지금 풍습으로는 혼사 때에

중국제 물건을 많이 쓰지않느냐 나도 자식이 많아서 간혹 사두지.

 

이 일화는 결코 정몽주의 학문과 인격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학과

도학의 차이를 보여 주는 일면에 불과할 뿐이다. 학문적 통달이나 이론적

치밀함보다는 실천적인 도덕성을 중시하는 조학의 입장에서 보면 일화에서 보이는

정몽주의 처신에는 비판받을 만한 점이 없지 않다. 그의 처신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도덕적으로 순력해야 하며 남이 보지 않는 데에서도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공맹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고 바로 그 점에서 도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고려 말 혁명파에 반대하여 이방원의 하여가에 그 유명한 단심가로

응수하고 선죽교에서 피흘리며 죽어 갔던 그 충절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학의

비조라고는 칭하여도 도학의 비조라고 칭하지는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듯하다.

도학은 도덕성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처럼 도를 구하고 도를 깨우치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조광조는

당신의 선비들이 '단지 문자만 배우고 이를 모르기 때문에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도학에서는 단지 학문이나 지식을 구하기 위해서만 공부하는 것보다는

지켜야 할 의리와 도를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는 순도 정신을 더 강조한다.

시퍼런 칼날이 목에 들어와도 지킬 것을 지키겠다는 이 의리와 지조의 정신은 다소

경직된 면도 있기는 하지만 순결한 정신을 좋아하는 우리의 심성에 지금도 남아

있다.

조광조 역시 지키는 것이 아주 철저했던 사람이다. 얼마나 철저했던지, 도학을

공부하면서 조금이라고 문젯점이 발견되면 자신보다 나이가 많더라도 반드시

지적하곤 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스승인 김굉필이 꿩 한 마리를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보내 드리려고 삶아 말리고

있었다. 그는 한 아이에게 그것을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그 아이의 부주의로

고양이가 꿩고기를 물고 달아났다. 김굉필이 그 아이를 불러 불같이 호통을 치자

이것을 본 조광조가 스승에게 가서 말했다.

"선생님 어버이를 받드는 것은 비록 간절한 일이지만 군자는 항상 말의 기운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군자가 그렇게 성을 낼 수가 있습니까 소생은 적이

의심이 갑니다"

그러자 김굉필은 그의 손을 잡으며 "나도 곧 스스로 위우쳤는데 네 말을 들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네가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도학을 하는 선비들은 같은 도학자끼리는 서로 군자라고 존중해주면서도

도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인이라고 하여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조광조가 절친한 친구 유운(1485-1528)과 술을 마시고 있을

떄였다. 유운이 술에 취해 나가다가 화장실에 가지 않고 근처에서 오줌을 눈 일이

있었다. 이것을 본 조광조가 "종용(유운의 자)아 종용아 이게 무슨 짓이냐" 하자

"난 도학이 싫어 이게 좋아"라고 하였는데 그 뒤로 조광조는 유운을 도학을 하지

않는다고 배척하였다. 그러나 유운은 조광조가 쫓겨날 때에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그의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의리 있는 친구였다.

조광조는 대쪽 같은 원칙주의를 내세워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소인이라

배척하다가 주위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조광조를 모략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남곤, 심정 두 사람은 젊은 시절에 출세욕이 강하고 마음이 간특하다 하여 사림의

선비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그후 두 사람은 면목을 일신하고 사림의 부류에 함께

하기를 백방으로 힘썼지만 사림은 끝내 허락하지 않고 그들을 소인배라고 배척하였고

결국 두 사람은 원한을 품고 절치 부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해묵은 원한이 훗날

조광조의 지치주의 개혁 운동을 좌절시키는 한 원인이 된다.

조광조가 그처럼 철저하게 도를 구하고 지키고자 했던 것은 성인이 되는 것을

학문의 목적으로 삼고 현실 사회를 유학에서 말하는 이상 사회인 대동 사회로

만들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성리학에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개인

차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수양하여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회 차원에서 옛 성왕인 요순의 정치를 현실에 옮겨 이상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이러한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4. 지치주의 운동

 

지치주의

 

지치란 '잘 다스려진 인간 세계'라는 말이고 이러한 세계가 바로 유가의 이상향인

요순의 대동 사회이다. 지치라는 말은 '서경'(군진편)에 있는 '잘 다스려진 인간

세계의 향기는 신명을 감응시킨다'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인데 한국 성리학의 특징이

담겨 있는 사상이라고 하여 왕도 정치와 구별하여 지치주의라 이름붙인 것이다.

조광조의 지치주의가 왕도 정치 사상과 다른 점은 융평 사상에 있다. 융평 사상이란

인간 사회를 현재의 상태에서 평안히 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상태 즉 융의

상태로 끌어올려 평안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철학의 기본 특징이 드러난

것으로 하늘의 이치가 땅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는 '하늘이 곧 인간' 사상을 근거로

삼고 있다. 대동 사회란 대도가 행해지는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1) 세상을 공동 소유로 여겨 사적인 소유를 하지 않으며

2) 힘이 세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출하여

대표()로 삼고

3)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가족처럼 사랑하고

4) 자기만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며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으며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이 사회는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사랑과 화해의 사회이고

대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공동체 사회이다. 왕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어버이처럼 따뜻하게 보살피는 대표에 불과하고 남의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처럼

섬기고 남의 아이를 자기의 아이처럼 사랑하는 그런 사회이다.

그러나 대동 사회는 보통의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대동 사회를 이룰 수 있는 왕은 요순과 같은 완전한 인격자인 성인이어야 하고

백성들 역시 요순 시대의 백성처럼 이기심이 없는 어진 백성이어야 한다.

그래서 자연 상태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사회이다. 대동 사회를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먼저 성인이 된 사람이 모범이 되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방법이 바로 맹자에 의해 창도되어 전통으로 이어

오는 왕도 정치이다. 왕도 정치를 다른 말로 성인 정치라고도 하는데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 정치와 닮은 점이 많다.

 

개혁 정치의 실행

 

조광조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이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어진 임금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중종도 유가의 이상을 숭상하고 문치와 덕치에

심혈을 기울일 때였으므로 조광조를 두터이 신임하고 중책을 맡겼다.

조광조는 이를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라고 보고 "우리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우리 백성을 요순 시대의 백성으로 만들 수 있다"

자신하였다. 그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1) 왕을 요순과 같은 성인으로 만들기

2) 제도를 요순 시대의 제도로 개혁하기

3) 백성들을 요순 시대의 백성으로 교화하기

4) 소인을 제거하기

5) 이단을 배척하기

 

등을 내세우고 정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임금을 가르치는 경연관이 되어 왕이 진력을 낼 정도로 열심히 강의하였고

'여씨 향약'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으며 이단 배척의 일환으로 궁중 미신의 상징인

소격서를 폐지하였다. 현량과를 두어 숨은 인재를 등용하여 그들과 함께 부패 세력을

내쫓고 낡은 구제도를 재혁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는 인물이 많지도 얺은데 서얼 제도까지 있다"고 서얼 제도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서얼법의 불합리한 부분을 손질하고 "사람들이 모두 과거

공부에만 매달려 관직에 있다 하여도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면서 관리들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조처로서 위훈 삭제(가짜 공신을 삭제한다는 것)를 단행하였다.

당시에는 공이 있는 신하라 하여 별로 하는 일 없이 나라의 녹을 축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수가 너무 않아서 적지 않은 국가 예산이 들 뿐 아니라 요직을

차지하고 있어 합리적인 국정 운영을 저해하였다. 조광조는 이들이 세웠다는 공의

진위를 밝혀 거짓이 있으면 훈작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왕과 많은 중신

그리고 공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조처를 강행하였다. 그 결과 전체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살탈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급진 개혁은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을 사 그의 개혁 정치가 중도에서 좌절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훈구파인 남곤, 심정, 홍경주 들은 후궁(홍경주의 딸)을 시켜 조광조를 왕에게

참소하게 하는 한편 궁녀를 매수하여 대궐 안의 나뭇잎에 과일즙을 발라 벌레에게

파먹게 하고 자신들은 왕에게 직접 조광조가 모반을 하려 한다고 거짓을 고하였다.

그리하여 조광조의 5년에 걸친 개혁 정치는 막을 내리고 만다.

 

5. 짧은 인생 큰 정신

 

조광조는 일찍 갔지만 남긴 것은 많았다. 유운, 김세필 등 4천 명의 선비들이 그의

신원을 위한 상소를 올렸고 사후 기대승, 이황도 그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이는 선조에게 "조광조가 도학을 창명하였다"며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청하였다. 결국 선조는 조광조를 영의정에 추서하고 문묘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조광조는 오직 의리와 바른 도만을 고집하다 의연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종교적 신념을 가진 도학자요 정치가였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훗날의 선비 정신,

지사 정신으로 그 맥을 잇게 된다.

조광조는 학문 면에서도 조선 성리학이 한 걸음 진전할 수 있는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여 이황 이이 같은 대철학자들이 나올 수 있게 하였으며 특히 이이는

조광조의 지치주의를 계승하여 체계를 갖춘 이론으로 완성하였다.

율곡은 "오늘날의 선비들이 옳은 것을 알고 이익에 매달리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정암 선생의 가르침 덕분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조광조의 원칙주의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과도한 소인 제거와 이단

배척은 흑백 논리로 발전하여 포용력을 잃고 마는 결함을 가진다.

이것은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학문적인 순일화 운동은 조선 오백 년 사상계를

주자학 일색으로 물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성리학 이외의 노장 사상이나 불교

사상은 뮬론이고 같은 유학 계열의 양명학까지도 이단으로 배척하고 학자들을

사문 난적으로 몰아 처단한 것은 조광조의 학문 정신에서 그 기풍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조광조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순일주의는

하나되기 즉 완전한 일체를 추구하는데 이는 적당한 타협에 의한 일체가 아닌 완전한

일체를 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대상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심할 경우에는 파쟁으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유난히 우리 사회에 흑백

논리가 강한 것도 이러한 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탈속한 자유 정신

화담 서경덕

 

독서하던 당일에는 경륜에 뜻을 두었지만

만년에 이르니 안연의 가난이 달구나.

부귀는 다툼이 있어서 얻기가 어렵고

임천은 금하지 않으니 몸을 편한히 할 수가 있다.

나무하고 고기 잡아 배를 채우고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어 정신을 펴기에 족하다.

공부가 의심없는 데 이르니 쾌활함을 알아서

백년 인생이 헛되지 않도록 가르쳐 준다.

(술회 화담집)

 

1. 탐구심 많은 소년

 

어느 봄날 한 소년이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들에 나물을 캐러 갔다. 소년은 번번이

밤 늦게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도 그의 바구니는 언제나 비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는 들녘에 나갔다가 종달새에게 정신이

팔려 나물을 캐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들녘에 가니 종달새가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이틀전에는 어린 종달새가 한 치쯤

날아오르더니 어제는 두 치를 날아롤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 치쯤

날아올랐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치를 생각하느라 나물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화담집 서)

 

소년은 봄 들녘의 새끼 종달새가 하루가 다르게 점점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현상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나물 대신 그 이치를 캐기 위하여 고심했다.

그 결과 그의 바구니는 텅 비고 머릿속은 회의로 가득찼다. 나중에 그는 종달새가

가벼운 깃털로 위를 향해 오르는 지기(땅의 기운 봄 아지랑이)에 힘입어 날아오른다고

풀이하였다. 이 탐구심 많은 소년이 훗날 기 철학을 확립하여 한국 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화담 서경덕이다.

화담(1489-1546)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화담의 할아버지는 종9품의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 서호번은 부의라는 말단의 관리를

지냈는데 남의 토지를 경작하는 처지였다. 어머니가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화담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모든 사물을 그냥 지나치는 일없이 관찰하고

궁리하였다. 한미한 무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정한 스승을 두지 못하고 거의

독력으로 학문을 이루었으며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빈한하게 살았다.

31세에 조광조에 의해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받았으나 사양하고 연구와

제자 교육에 힘썼다. 43세 되던 해에 어머니의 간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역시 벼슬하지 않았고 56세에 후를 참봉에 추천되어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호는 복재라 하나

화담에 살았다 하여 화담 선생으로 알려졌다.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해지며 박연 폭포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 삼절이라고 일컬어진다.

 

화담은 중국 송나라의 주렴계, 소강절, 장횡거 들의 우주론을 조화시켜 기존

성리학과는 다른 독자적인 기일원론(일원적 주기론)을 제창하였다.

송도(지금의 개성) 동문 밖 화담위에 조그만 초막을 짓고 혼자 사색하고 연구하며

산천을 벗삼아 살았는데 그 생활의 청정함과 기쁨 그리고 우주의 오묘한 원리를

터득한 감흥을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 끝에 달이 밝게 올라 오고

비 뒤에 풀이 향기롭다

하나가 둘을 타고 있는 것을 보니

물물이 서로 의지해 있다

아득한 기미에서 꿰뚫어 얻은 경지에서

허실에 앉으니 빛이 난다(천기 화담집)

 

화담이 태어나던 15세기 말엽의 우리 나라 사상계는 이미 성리학의 수용 단계를

넘어서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정착되던 단계였다. 모든 학자가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를 신봉하였고 성현을 본받고 배우기 위하여 온 힘을 다 쏟아 붓고

있었다. 모든 학설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기준을 주자에서 찾았고 성현을 독실히

믿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화담은 같은 시대의 다른 학자들과는 학문하는 태도가

달랐다.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고 맹목적으로 암기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학습하는 내용을 실증적인 방법과 합리적 사색을 통하여

이해하려고 하였다. 한 구절이라도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에

부딪히면 '선배 학자가 왜 이 곳에 이 내용을 써 전하려 했을까?' 회의하며 그 뜻을

캐고 또 캤다.

화담의 탐구 정신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무슨 일이나 깊이 생각하고 의문스러운

것이 있으면 끝까지 깨달으려 했으며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탐구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화담이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서당에서 글을 배우다가 '서경'이란 책에서 태음력에

관해 해설한 '기삼백편'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이 "이 대목은 나도 배우지 못한

바이고 세상 사람 누구도 아는 이가 드물 것이다" 하며 설명을 해 주지 못하였다.

화담은 더 물어야 소용없음을 알고 홀로 생각하고 계산해 보았다. 1년의 시간이

어떻게 되고 어떻게 해서 한 해가 되돌아오는가 그는 보름 동안 침식을 잊고 이

문제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꼭 보름이 되던 날 기어이 그 이치를 깨닫고야 만다.

 

2. 스스로 터득하는 학문 방법

 

학문을 하는 데는 의양(본받고 따르는 것)의 방법이 있고 자득(스스로 터득하는

)의 방법이 있다. 화담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하는 자득법을 자신의 학문

방법으로 삼았다.

그 시대의 학자들이 따랐던 방법은 의양이었고, 그 대표적인 학자가 퇴계였다.

그들은 지배 이념으로서 권위를 누리던 전통적 견해인 성리학을 옹호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래야만 그 권위에 힘입어 자기의 권위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 도학을 하던 학자는 누구나 의양을 존중했다. 퇴계는 물론이고 율곡 역시

주자를 따르는 의양을 했다. 퇴계는 스스로 "어리석고 고루하며 소견이 막혀 다만

성현을 독실히 믿을 따름이다"라고 하면서 의양을 학문의 방법으로 내세우고 성현의

말을 인용하고 풀이하는 것을 논리 전개의 주요한 방법으로 삼았다.

그는 "사물을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고 또 설사 안다 해도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우니 오직 성현을 따르는 것이 배움의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리 정연하고 체계적인 의양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자득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의양을 주로 한다 해도 자득은 있게

마련이며 그런 차원에서 모두 자득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모든 학자들의

지향점이었다.

그러나 화담이 방법으로 삼은 자득은 훨신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믿지 않았으며 스스로 터득하여 알았다는 것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의 학설이 "천고의 의문을 논파하기에

충분하니 잃어버리지 말고 후학에게 전해 중국과 변방에 동방에 학자가 나왔음을

알게 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화담이 선배 학자들의 학설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선배 학자들의 학설은 화담에게 문제를 발견하고 사색을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화담이 학문의 방법으로 구태여 자득을 고집한 것은 선배 학자들의

학설에 불만스러운 점이 있고 또 완전히 승복할 수 없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배 학자들의 부족한 점이나 잘못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삼은 것이

그들의 학설을 직접 따져 보기보다는 자연의 실상을 직접 탐구해 보는 격물치지였다.

격물치지란 온갖 일과 사물의 이치를 하나하나 연구함으로써 점차 지식과 참된

앎을 이루어 자기의 생각을 바로잡아 맑고 곧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화담의 나이 열여덟 살일 때였다. '대학'이라는 유학의 경전을 읽다가 '참된 앎에

도달하는 것은 사물을 직접 탐구해 보는 데 있다'는 글귀를 보았다. 그는 이에

"공부를 함에 있어 먼저 사물을 탐구해 보지 않는다면 독서는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며 그날부터 천지 만물의 이름을 모두 써서 벽에 붙였다.

그리고 매일 그 사물의 이치를 사색하고 탐구하는 것을 일삼았다(화담집 권 3)

 

이렇듯 화담은 선배 학자들에게 배우기보다는 자연의 실상 그 자체에서 배우는 것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화담은 방법에서만 차이를 보인 것이 아니라 학문의 내용에서도 남달랐다. 당시의

학자들이 인간 사회의 윤리를 확립하는 일을 학문의 중심으로 삼았다면 화담이 중심에

두었던 것은 자연이었고 우주였으며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물아 일체의

경지였다.

 

3. 격물과 물아 일체

 

화담은 일생을 빈한하게 살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은 세상에 진출하기

위한 명분이 아니었고 심섬을 닦는 수양의 길도 아니었다. 오로지 우주의 근원과

자연의 질서를 규명하고 스스로 그 질서에 함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담이 제창한 것이 기 일원론인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이미 조선 사상계에서 정통 이념으로 자리잡은 주리론(이기 이원론)과 대립하는

것이었다.

주기론에서는 경험적 관계의 판단보다는 불변의 이치인 이를 앞세운다. 주리론의

이러한 특성은 "이 일이 있기 전에 그 이가 먼저 있으니 군신이 있기 전에 군신의

이가 있고 부자가 있기 전에 부자의 이가 있다"는 이황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변화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확고한 절대적 진리로 자리잡고 있어야

하며 변화하는 다른 모든 것들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영원하고 변함없는 군신의

이치가 있어야 군신간의 의리를 주장하고 불의를 배격할 수 있으며 부자의 이치가

있어야 군신간의 의리를 주장하고 불의를 배격할 수 있으며 부자의 이치가 있어야

부자간의 친애를 강조하고 패륜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리론에서 이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여러 관계를 통괄하고 질서를 바로잡는 데 기준이 되는

원리를 밝히려는 목적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 반면에 화담은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밝히고 그 안에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물아 일체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사물을 탐구하는 격물에 학문의 중심을 두게 된다.

객관적 자연물을 하나하나 대상으로 삼아 그것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왜 그렇게

변화하는지 묻고 그 해답을 구하는 것이 화담 철학의 중심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화담이 취했던 태도가 경이었다. 경이란 마음을

한곳에 모아 다른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즉 사물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선입관을 버리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사물에 마음을 모아야 하며 그렇게 하면

마음이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맑은 거울과 같은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담은 문제 해결에 몰두하면 밥먹는 것도 잊고 화장실에 가서 용변 보는 것도 잊을

정도로 대단한 집중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4. 화담의 철학 세계

 

화담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의 시선을 집중한 곳은 자연이었다. 그는 사물

하나하나의 움직임과 그것들을 자연물이게 하는 보다 큰 자연의 본체 우주의

본체(그는 이를 선천이라 하였다)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었다.

화담의 제자였던 허엽(허균의 아버지)이 전한 말에 의하면 화담은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춤을 추어야 할 정도의 감격은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감흥만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꿰뚫어 낸 감격이었다.

화담이 꿰뚫어 낸 것은 바로 우주 자연의 본질이었고 그것을 해명한 것이 그의

기 철학이다. 기란 우주 만물에 꽉차 있는 알갱이와 같은 기운이고 나아가 '생명의

기운'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기를 에너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화담은 기가 만물의 근원이며 천지간의 만물은 모두 기의 모이고 흩어짐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물질적 실체라고 생각하였다. 우주에 꽉차 있는 이 기는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은 하지만 그 자체가 소멸하지는 않는다. 기가 한데로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소멸한다. 이는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로 다시 환원되는 것과 같다.

기라는 개념은 장자가 먼저 사용한 것인데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삶이란 죽음의 길을 걷는 것이고 죽음이란 태어남의 시작이지만 누가 그 법칙을

다스리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사람의 태어남은 기의 모임이고 모이면 생겨나고

흩어지면 죽음이 된다. 그러므로 천하는 하나의 기로 통한다고 한다(장자, 지북유편)

 

장자도 화담처럼 우주의 본질은 기이고 이 기가 모이면 만물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소멸하는 것처럼 사람도 기가 모이면 태어나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기의 운행이 곧 우주의 운행이고 자연의 질서이지만 그 모두가 인간의

인식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자동차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꽃이 피는 소리나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들을 수 없다고 해서 꽃이 피지 않거나

지구가 자전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들을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주 자연에서 새로운 생명체들이 모체에서 생겨나고

자라나는 과정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져 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쉼 없이 생겨나고 자라나며 죽어 간다. 말하자면 우주는 기로

꽉차 있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든 없든 귀로 들을 수 있든 없든 모두가 기로

이루어져 있고 기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담은 우리의 경험 세계 안으로 들어오기 이전의 기의 상태를

'선천(자연)'이라 하고 우리의 경험 세계에 들어온 가시화한 세계를

'후천(자연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는 볼 수 없는 것까지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선천의 세계에 대한 통찰을 통하여

새로운 경지를 자득한 그는 자기 학설의 도달점이야말로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자부하였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소리가 없어도 들을 수 있고 냄새가 없어도 접할 수 있다.

옛 성인이 말하지 않은 곳이다(화담집 권 2)

 

배우는 자가 진실로 힘써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비로소 옛 성인이 다

전하지 못한 그 은미한 뜻을 꿰뚫어 낸 것이다(화담집 권 2)

 

기 불멸론:죽어도 죽지 않는 것

 

화담은 기는 결코 멸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그것을 촛불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심지가 타들어가 초가 녹으면 초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모양을 바꿀 뿐이다. 이처럼 기는 멸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흩어져 다시 우주의 기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유사한 그의 이 주장을 '일기

장존설'이라고 한다.

초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삶도 우주의 기가 모여 육체와 정신을 이룬 것이고

사람의 죽음은 마음과 몸이 흩어져 우주의 기로 되돌아간 것일 뿐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따름이다.

이것은 '개체적인 개인'의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우주'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리고 화담이 주장하는 삶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삶을 뛰어넘어

우주와 하나가 되고 자연과 하나가 된 물아 일체의 삶인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죽음이란 우주의 기로 환원되는 것일 따름이라는 '사생일여'

관점에서 "진실로 이러한 이치를 밝게 안다면 장구 치면서 우리 님을 보내오리라"

화담은 자신의 죽음도 남다르게 평온한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한

제자가 "선생님 지금의 생각이 어떠십니까?" 하고 묻자 그는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

지 이미 오래다. 지금의 내 마음은 편안할 뿐이다"라 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5. 세속에 초연한 삶과 정신

 

화담의 기 철학은 노장 철학과 많이 닮았고 또 상통하는 점이 많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성리학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졌고 성리학의 격물 치지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다만 다른 특징이 있다면 자득의 방법에 의해 자연의 이치를

보고자 했던 자연 철학이라는 것이다. 종래의 성리학은 사회 윤리적인 학문으로서

인성론과 도의론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화담은 자연에 학문의 중점을 두었고

그것에 기초하여 색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철학을 자기의 삶 속에서 실현하였다.

화담은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자연의 원리를 알아 그 통찰 안에서

대조화를 이루어 물아 일체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다. 그의 삶은 온전히 진리에

바쳐졌다. 그에게는 세상의 부귀 영화나 지위도 다 소용이 없었다.

늘 가난했지만 재물을 모으기 위해 학문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억지와 집착을

버리고 물 흐르는 대로 자연스런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다.

 

나를 잊고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는 경지에 이르니

마음이 곳에 따라 절로 맑고 따뜻하구나.

(무제 화담집)

 

'나를 잊는다는 것'''라고 하는 자의식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라고

하는 대립 의식을 잊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과 삼라 만상에 대하여 차별심을

갖지 않고 자기의 몸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이 곳에 따라 맑고 따뜻하듯이

나도 상황에 따라 맑고 따뜻하게 된다"고 한 것인데 이를 유학에서는 시중(때에

알맞음)이라고 한다.

 

6. 화담의 철학이 남긴 문제

 

화담은 한국 성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성리에는 세 흐름 즉 '하늘과 간격 없는 하나'를 실현하는 세 가지 노선이 있다.

먼저 인간의 내면 수양을 통하여 하늘과 하나(하늘=인간) 되고자 하여 인성론을

중심 논제로 삼아 경 중심의 수양 철학을 정립한 이언적 이황의 노선이 그 하나이다.

이 노선에서는 수양을 강조하고 수양한 후에 실천하자는 논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실천이 약화되는 면을 보인다. 그 반면에 하늘의 이상이 현실 사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천리=인사)는 지치주의의 정치 사상을 정립한 조광조 이이의 입장이 또 한

노선을 이루는데 이 노선에서는 수양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실천하면서 그 과정에서

수양하자는 논리로써 실천을 더욱 강조한다. 이 두 노선이 인간이 가진 사회적 속성을

중심 문제로 삼았다면 세 번째 노선을 택한 남명 조식(1501-1570)과 화담은 인간이

가진 자연적 속성을 문제로 삼았고 자연과 우주를 연구하면서 그 우주(선천과 후천)

하나(자연, 하늘=인간) 되어 물아 일체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 세 번째 노선은 후대에

녹문 임성주(1711-1788)에게 계승되어 '기 일원론'으로 완성된다.

이처럼 화담은 한국 성리학의 한 흐름을 떠맡아 이황, 이이와 더물어 한국 철학의

지평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철학은 인간의 사회적 속성보다는

자연적 속성을 중심 논제로 삼는 탓에 사회, 정치 활동에 소극적이고 은둔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화담이 평생 벼슬하지 않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화담은 많은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 남긴 '원이기(이기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뜻)'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 네 편의 논문과 그의 삶과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시 부 등의 문학 작품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은 당대의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후대의

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제자인 박순은 훗날 영의정이 되었다.

또 이지함은 '토정비결'을 지어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허엽의 아들인 허균은 유명한

'홍길동전'을 지어 당시의 사회 제도를 비판하고 사회 개혁 사상을 내놓았다.

화담의 가장 돋보이는 점은 자득을 중시하는 주체적인 태도이다.

이러한 자주적인 학문 태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개항 이후

우리의 옛 학문을 버리고 서양학을 주로 하면서 이전에 지녔던 자득의 주체적인

능력을 많이 잃었다. 스스로를 낮추고 외국의 학설을 잣대로 삼아야 자기 학문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또 우리에게는 철학도 학문도 없었다는

식의 자기 비하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강요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기

철학이 공리 공론이라는 선입견은 식민지 교육의 잔재이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에

우리 문화 전반을 낮추어야 했던 데서 비롯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고 민족 허무주의의

한 표현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 동안의 노력으로 상당히 바로잡혔으나 철학 사상

분야에서는 아직도 뿌리깊이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담의 주체적이고 용기있는

학문 태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러나 스스로 깨우쳐 얻는다는 자득의

주체성과 독창성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현실에서 우리

스스로가 그 필요성을 깨닫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때에야 비로소 그 가치가

살아나는 것이다.

 

 

세상을 밝힌 만인의 스승

퇴계 이황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가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하리라.

(도산십이곡 중에서)

 

1. 퇴계의 문제 의식

 

퇴계(1501-1570)는 도학을 일으키는 것을 일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그는 자기

시대를 말세라 생각했고 그런 까닭에 도학을 일으켜야 하는 사명은 더욱 저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런 시로써 자신의 문제 의식을 밝혔다.

 

말세에도 천도는 바뀌지 않나니

우리 동방은 성인이 살고자 했던 곳이다.

노나라의 기풍은 오히려 변할 수 있으나

기자의 가르침은 어찌 헛되어 없어지겠는가.

 

앞사람은 문장을 꾸미는 것에만 뛰어났고

지금의 사람도 술업이 성글기만 하다

어느 누가 능히 스스로 분발해서

도를 샐행하며 경서를 향할 것인가

(퇴계집)

 

퇴계가 말하는 말세는 중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 명나라에서는 주자가 완성한

성리학의 도통이 끊겼다. 나흠순이 나와 심학을 제창하였고 왕양명이 시작한

양명학이 성행하였다.

이것은 퇴계의 견지에서 보면 비판하고 경계해야 할 사태였다.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의 기풍으로 유학의 종통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중국이

이렇게 변하였으니 퇴계는 이제 동방이 도학의 본고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퇴계는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동방'이 옛날에 공자가 와서 살고 싶다고 한 곳

(이 말은 논어에 나온다)인 데다 기자(기자 조선의 시조)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능히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비록 말세라 하더라도 천도는

바뀌지 않았으니 어디에선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신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퇴계는 동방에서도 도학이 올바르게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생각하였다. 앞의 시에서 '앞사람은 문장의 꾸밈'에만 뛰어났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선비로서 문장에 힘을 쓰고 문장에 탁월한 실력을 보인 예는 적지

않았지만 퇴계는 문장을 꾸미려는 태도야말로 도학을 해치는 원흉이라고 보았다.

퇴계는 또 선비라면 마땅히 학문에 힘쓰고 도를 실행하여 경서의 근본에 도달해야

하는데도 그 모범을 보인 이가 많지 않고 그나마도 온전히 이루지 못하여 '성글다'

한탄하였다.

퇴계는 유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 이색, 정몽주, 권근, 김종직, 조광조,

서경덕 들을 꼽고 그들의 노력을 치하하면서 그 뒤를 잇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루어야 할 것을 온전하게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었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크다고 생각하였다.

이색은 스스로 불교에 반대한다면서도 불교를 다룬 글이 많고 또 자세한 반면에

유학에 대해서는 적확하지 않는 말이 많아 문장에 환설이 많다고 퇴계는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불교를 비판하는 것이 우선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종직에 대해서는 "학문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종신토록 힘쓴 것은 문장의

꾸밈이었다는 것은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비판하여 문장에 힘쓰는 것을 불교

다음으로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였다.

정몽주는 절의를 실행하기는 하였으나 저술을 남기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고

권근은 '입학도설'을 통하여 천인 합일의 원리를 보여주기는 하였으나 무리하게

끌어댄 점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조광조가 뜻을 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아주 애통하게

생각하며 불행한 일이라고 하였다. 또 서경덕에 대해서는 사물의 원리를 꿰뚫어보는

데에는 이르렀지만 성현의 생각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선배 학자들의 한계는 퇴계가 자신의 길을 정하는 데 지침이 되었다.

그는 동방에서 도학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여겼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자기의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퇴계는 공자부터 주자까지 이어진 성현의 가프침을 돈독하게 믿고

따르리라고 다짐하면서 무리하게 끌어대거나 성현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려 하였다. 또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지 않고 항시 겸허하고 신중한 태도를

지켰다.

 

2. 사화의 시대

 

퇴계가 일생의 사업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일으키겠다고 한 도학은 인간 윤리의

내면을 밝혀 인간의 도리를 극진히 하는 것을 본령으로 삼는 것이다.

즉 권력이나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인간의 본성을 구현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정치적인 이상을 이룩하려는 것이다. 이익보다는 의리를 앞세우고

도심(양심)을 높이고 인욕(욕심)을 누르는 표준을 세우려는 것이 도학의 정신이다.

그러자면 끊임없이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마할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도학의

정신은 단순한 윤리 차원을 넘어서 일종의 종교적 정서마저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퇴계가 살았던 시대는 사화로 얼룩진 시대였다. 권력 투쟁과 사화로 정의와

불의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퇴계가 출생하기 3년 전에 무오 사화가 일어나고

퇴계가 4세 되던 해에는 갑자 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19세 때에는 기묘 사화가 일어나 혁신 정치가 조광조가 죽음을 당하였고 그가

벼슬길에 올라 활동하던 시대에도 이러한 사화의 후유증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45세 때에는 을사 사화가 일어나 퇴계의 바로 웃형이 죽음을 당하였고 퇴계 자신도

연루되어 관직을 잠시 박탈당하였다.

퇴계는 과거에 급제하여 환로에 올라 벼슬이 대제학까지 이르렀으나 사화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정계에서 뜻을 펴려고 애쓰기보다는 물러나 학문에 몰두하며

교육에 힘쓰는 것이 더욱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50세 이후의 말년에는 은퇴하여 고향인 도산에 머물면서 학문에 몰두하며

도학의 명분을 밝히고 더 나아가 인재를 교육하며 의와 이가 혼돈된 사회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분명히 하여 학문적으로 진리를 밝히고 가치 체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는 어둡고 험한 사회를 진리의 빛으로 밝혀 만민을 도탄에서

구하려는 결의와 사명감에 불타 진리 탐구와 영재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수양이었고 스스로가 완벽한

도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인격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의 밑바탕에는 적극적인 학문과 교육을 통하여 진리의 표준을 높이

드러내고 사회를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는데 그런 의지야말로 퇴계 학문의

근본적인 동기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퇴계의 학문이 인륜 도덕을 바로잡기 위한

경 사상의 수양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3. 성인의 학문을 배워 성인이 될 것을 목적으로 하다

 

한국 성리학의 특징은 한국의 전통 사상인 하늘과 하나인 인간을 전제로 삼아

하늘의 큰 성질을 체득하여 인간에 깃들인 천지의 기운과 만물의 이치를 마음에

포용하여 운용하는 것인데 퇴계의 사상에는 한국 성리학의 이러한 발전 과정이

압축되어 있다.

철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삶 자체를 문제삼을 때 동양에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죽음'의 문제 즉 인간의 핑연적인 한계의 문제이다.

그런데 유학에서 문제삼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인 삶이고 또 이러한 사회적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학문(유학에서 학문이라 함은 대학 즉 철학을 말한다)

수양이다. 유학에서 '죽음'의 가치는 바로 삶의 내용과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죽음보다는 삶이 중요하며 또 삶의 내용과 질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삶의

질로써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개인으로 볼 때 최고의 삶은 이상적인

인격자인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유학자의 최고의

이상이었다.

퇴계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죽음을 보고 세월을 탐내어 한탄하고 학문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세속의

비루한 생각이다. 주자는 옛 친구의 부음을 들으면 언제나 더욱 뜻을 가다듬어

학문에 정진하였다고 한다(퇴계집)

 

퇴계의 생각에 의하면 정진해야 한다는 학문의 목적은 '죽음에 대한 슬픔'

극복이고, 이는 곧 성인이 됨을 뜻한다.

퇴계는 "학문을 함에 그 방도를 알고 노력을 중단하지 않고 오래도록 익혀 완성해

나가면 거의 인생의 일대 환희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학문의 완성을 일생

일대의 환희사로 추앙하고 있다. "기에는 생사가 있고 이에는 생사가 없으므로"

이를 잘 배워 이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요컨대 퇴계는 학문의

완성을 가장 기쁜 일이자 죽음을 뛰어넘는 일로 본 것이다.

생사가 없다고 한 이는 물론 '영원 불변의 진리'를 뜻하고 생사가 있다는 기는 일희

일비하는 인간 세상의 일을 말한다.

학문은 자신의 마음과 이가 하나가 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즉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고 달리 말하자면 도를 깨우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룬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퇴계는 더운 여름철에도 방문을 닫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몰두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더위에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염려하면 "이 책을 연구하니

마음이 시원해지는데 더위 같은 것이 무슨 걱정이겠소" 하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다.

 

퇴계는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태극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어서 본래는 성인과 우매한 인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우매한 인간들이 인간사에 얽매여 그 본성을 빼앗겼기 때문에

어리석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본체(양심)를 온전히 하여 이와 일체가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학문에 정진하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이렇게 읊었다.

 

당시에 녀던 길을 몇 해를 바려 두고

어듸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온고

이제나 도라오니 년뒤 마음 마로리(후육곡 4)

 

'당시에 가던 길'이란 물론 성인이 되는 학문의 길이고 '어디가 다니던 길'

정치에 참여했던 일을 말한다. 이 시에서 퇴계는 잠시 학문의 길을 중단하고 정치에

참여했던 것을 후회하며 이제 돌아왔으니 다른 마음 먹지 않고 오직 성인이 되는

학문의 길에 전념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퇴계학은 성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고 거리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수양이다.

 

4. 자연의 도에서 사회 인륜의 도를 세우다

 

성인이 되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세운 퇴계가 배우고자 했던 것은 이였다.

그는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고 생각했다. 퇴계는 도덕적 당위로서 이가 확고한

근거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을 철학의 주된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언제나 이가

기보다 선행하고 능동적인 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즉 당위가 존재보다 우선할 뿐

아니라 중요하다는 것이다.

퇴계가 열두 살 때였다. 그는 숙부에게서 '논어'를 배우고 있었다. 한번은 이

'논어'에 나오는 ''라는 글자에 대하여 문득 환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숙부에게 물었다.

"숙부님 ''라는 글자의 뜻이 무엇입니까?"

"글쎄, 잘 생각해 보아라. 무엇을 뜻하겟느냐?"

그러자 퇴계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일의 타당한 것이 ''입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숙부는 크게 기뻐하며 이미 글 뜻을 이해하고 있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퇴계의 말을 빌자면 이란 '옳은 것' 그리고 '지당한 것'이다.

'영원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천지 자연은 무심히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식으로 운행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만드는 까닭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를 밖에서 보면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운전자가 잇는 것처럼 천지 자연을

움직이는 운전자가 있고 그것이 바로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는 바로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이치이고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퇴계는 이를 배워 이에 도달하는 것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형체도 색깔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직접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현이 이라고 한 것이 이이다. 그래서 퇴계는 사물을 직접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고 또 설사 안다 해도 오직 성현을 따르는 것이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맥락에서 퇴계는 말했다. "어리석고 고루하며

소견이 막혀서 다만 성현을 독실히 믿을 따름이다"라고.

율곡은 퇴계를 가리켜 "주자를 한결같이 따랐다"고 하였다. 퇴계가 견지한 학문하는

방법을 본받는 것 즉 의양이라고 한다.

 

원래 송대 성리학의 이기론은 천명을 인식하기 위한 우주론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인데 이 이기론이 우리 나라에 수입되면서 인간학적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의 전통 사상에 따르면 '하늘과 내가 이미 하나'이므로 따로

하늘을 알기 위한 인식론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하늘의 큰

성질이 내포되어 있는 인간의 내면 구조를 밝히고 내면의 수양을 통하여 심성의

이를 밝혀 실현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심선의 이가 바로 성인데 성의 내용은

인의예지이다. 그러나 이 인의예지는 우리의 본성에 구비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형이상학적인 이이기 때문에 감각이나 의식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수양의 대상은 인의예지가 직접 드러난 네 가지 마음으로 옮겨간다.

어진 마음인 인이 발현된 '측은지심'(불쌍히 여기는 마음), 의로운 마음인 의가

발현된 '수오지심'(부끄러워하는 마음), 질서를 존종하는 마음인 예가 드러난

'사양지심'(사양하고 양보하는 마음), 지혜로운 마음인 지가 발현된

'시비지심'(옳고 그를 것을 가리는 마음)이 바로 그것인데 본성의 네 가지 측면이

마음의 단서로 나타났다 하여 '사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심성의 이는 사단의

마음과 사사로운 마음이 개입되지 않은 도심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쉽게 말하면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양심'이다.

이 양심을 잘 지켜 확충해 나가고 인간의 일곱 가지 정인 희노애락애오욕을 잘

다스려 욕심을 제거하자는 것이 그의 사상의 핵심인 ''사상이다.

그러므로 퇴계의 사상에 따르면 경견한 태도로 마음가짐을 성실히 하면 영원 불변의

진리요 당위인 이는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는 실제로는 윤리적인 당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이 이가 있으니 군신이 있기 전에 군신의 이가

있고 부자가 있기 전에 부자의 이가 있다"고 한 그의 말의 이는 곧 죽어도 지켜야

하는 윤리요 당위였다. 그리고 사단의 마음이나 도심도 모두 윤리적으로 꼭 지켜야

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5. 어진 성품 고매한 인격

 

퇴계는 경상 북도 안동 도산 출신이다. 이름은 황이고 퇴계는 호이다. 고향 마을

토계 앞에 한서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짓고 공부하면서 토게의 이름을 퇴계로 고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아버지 이식은 진사 벼슬을 하였으나 퇴계가 난 지 일곱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 채 홀어머니의 엄한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다. 퇴계의 어머니는 늘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글공부를 한다고 글이나 잘 외고 짓는 것만을 능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보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다"

퇴계는 어머니의 그러한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너무도

어진 마음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였다.

퇴계가 여덟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퇴계의 형이 칼을 갈다가 손을 베었다. 피가

흐르는 것을 본 퇴계는 형 옆에서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어머니가

"형은 손을 베고도 울지 않는데 왜 네가 우느냐?"

하자 퇴계는 울먹이면서

"형이 비록 울지는 않지만 저렇게 피가 흐르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어머니는 그의 어진 성품을 기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워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벼슬을 하여도 조그만 시골의 원님쯤 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조정의 높은

벼슬을 하다가는 그 어진 성품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는지 걱정이다"

23세에 성균관에서 공부를 시작한 퇴계는 24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연달아

세 번을 낙방하였다. 그리고 27세에 비로소 진사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다른 사상가들이 그들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퇴계는 천재성으로 이름을 날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러 번 시험에 낙방하는 유례없는 전례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늘 "학문은

세상의 이치를 깨치고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찾아내는 데 목적이 있다"면서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오히려 즐겼다.

또한 퇴계는 매사에 검소하기로 유명하다. 세숫대야도 질그릇을 썻으며 베옷을 입는

것에 만족하였고 나들이할 때도 칡으로 삼은 신에 죽장을 짚고 소박하게 차리고

다녔다 한다.

한번은 영천 군수가 그의 서재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의 서재가 너무도

초라한 것을 보고 놀라,

"이렇게 좁고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견디십니까?" 하니

"오래도록 습관이 돼서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네"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서재에는 이런 글이

걸려 있었다.

'번거러움을 바로잡는 데에는 고요함만한 것이 없고, 졸렬한 것을 바로 잡는 데에는

부지런함만한 것이 없다'

그는 또, 늘 자기 한 사람의 이익보다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하였다.

이것은 이보다는 의를 중시하고 사보다는 공을 우선하는 그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가뭄이 심한 해였다. 물이 모자라 논바닥이 갈라질 정도였다. 마침 퇴계의

논은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논물을 먼저 댈 수 있었다. 퇴계는 말하였다.

"우리 집은 아직 굶주리고 있는 형편이 아니다. 우리 논이 말라 밭이 되는 한이

있어도 밑에 있는 다른 논에 먼저 물을 대 주어라"

그러자 하인들이

"남의 사정만 봐 주다가 굶어 죽겠습니다"

하고 못마땅해하면서

"나리께서 장사를 하시면 밤낮 밑지기만 하겠습니다"

하고 핀잔을 줄 정도였다

퇴계는 가난하게 사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장남 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가난함은 선비의 예사로운 일이다. 무엇을 개의할 것이 있겠느냐 아비는 평생에

이로써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많았다. 너 스스로 몸을 수양하여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퇴계가 말하는 천명은 바로 영원 불변의 진리인 이이다. 끊임없는 수양과 학문

연마를 통해 이치를 터득하여 만물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게 된 퇴계는 여간해서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68세 되던 해였다.

광나루를 건너 한양으로 들어가는데 광풍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안절부절못하였다.

"침착하게 가만히 앉아 계시오. 이리저리 뛰면 오히려 배가 뒤집히고 맙니다.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비바람과 싸워야 합니다. 죄지은 사람은 이 배 안에

없는 듯하니 두려울 것 없습니다. 걱정 말고 사공의 지시에 따릅시다"

퇴계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타일렀다. 어찌 보면 너무 터무니없는

믿음을 확고하게 가진 듯하지만 그는 하늘의 명이 언제나 변함없이 관철된다는

신념을 마음 깊은 곳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비바람은 가라앉고 배는

무사히 강가에 닿을 수 있었다.

비바람을 이겨내고 한양에 당도한 퇴계는 선조 앞에서 강의를 하는 자리에서 기묘

사화로 죽은 조광조의 사람됨과 그의 학식 행적 등을 바른대로 아뢰고 기묘 사화가

남곤 등의 참소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조광조에게 오히려 상을 내려야

한다고 상소하여 조광조의 복권을 이루어내었다. 또 암행 어사가 되어 탐관 오리들을

떨게 하고 왜구의 약탈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참신한 제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퇴계는 학문의 세계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과 일상 생활에서도 높은

인품과 어진 마음으로 널리 존경받고 흠모받게 되었다.

 

6. 만인의 스승이 되다

 

퇴계는 벼슬이 예조 판서 대제학 등에 이르렀으나 50세 이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명종이 성균관 대사성, 이조 판서 등의 요직을 내리면서

불렀으나 퇴계는 거듭 넑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이에 명종은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음을 한탄함'이라는 시를 짓고 몰래 사람을

보내어 퇴계의 고양인 도산을 그리게 하여 둘러 놓고 조석으로 퇴계를 흠모하였다고

한다.

퇴계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는 선조에게 임금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무진육조소'(이것은 어진 일과 효성을 다할 것부너 시작하여 정성되게 몸과 마음을

살피고 닦아 천명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끝이 나는 여섲 조목으로 된 임금으로서

힘써야 할 시급한 문제를 다룬 글이다. 특히 선조에게 이러한 배려를 한 것은 선조가

명종의 적자가 아니기 때문에 왕가의 어른을 각별히 섬겨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학십도'(성학이란 성군의 학문이고 십도는 열개의 그림이라는

뜻이다. 유학의 근본 원리와 실천 방법을 상세하게 밝힌 글이다)를 올렸다.

당시 퇴계는 왕을 가르치는 경영관으로 있었는데 그것을 마지막으로 퇴계는

고향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그것들은 그의 마지막 저술이자 그의 최대의 역작이

되었다. 선조는 이 '성학십도'를 열 폭의 병풍으로 만들어 둘러 놓고 볼 정도로

퇴계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흠모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온 퇴계는 고향인 도산에 도산 서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나섰다. 그러자 멀고가까움을 에아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 때마다 퇴계는 상대편이 아무리 젊은 사람이더라도 ''라고

부르는 법이 없았다고 한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 늘 겸손과 경의를 잊지 않았고

자리에 마주않으면 반드시 가족의 안부부터 물었다. 제자가 질문을 하면 비록 대단치

않은 이야기라도 잠시 생각하였다가 대답을 하였지 당장 무어라 대꾸하는 법이

없었다. 토론중에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 나오는 경우에도 단번에 부정하지 않고

천천히 오직 사리가 이러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꿈속에서까지 제자의 신변을

걱정했다. 또 제자에게 서신을 통하여 가르친 것은 모두 기록하여 가르친 바에

스스로 위배됨은 없었는지 늘 반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저술된 것이 '자성록'이다.

'자성'이란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퇴계는 서재에는 책이 가득하였으나 늘 흩어짐이 없었고 벼루에 먹을 갈 때도 항상

똑바로 갈았다. 새벽에 일어나 향을 피우고 바로 않아 날이 밝도록 글을 읽되 한번도

흐트러진 태도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어쩌다 몸이 고단해지면 눈을 감고 그대로

단정히 앉아 고요히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를 '산부처'라고까지

일컬었다.

퇴계는 점잖았고 절도를 존중했다. 자기를 내세울 줄 모르고 모든 일에

조심하였으며 자신의 잘못을 알면 곧 고치기에 힘썼다. 그러한 그에게서 제자들은

엄격한 스승의 면모를 보면서도 늘 포근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퇴계의 그러한

면모는 제자인 기대승과 벌인 '사단 칠정논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논변은 퇴계가 59세이고 기대승이 33세일 때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신을 통한

긴 논쟁이 8년 동안 지속되었다. 발단이 된 것은 정추만(1509-1561)이란 학자가

'천명도설'이라는 책을 지어 자문을 구하자 퇴계가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한 데서 연유한다. 기대승은 이에 반대하여 발현되지 않은 것은

''으로서 이라 할 수 있으나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 발현한 것이니 똑같이 ''이다.

그러므로 모두 기가 발한 것이라고 반대 의견을 내었다. 퇴계는 곧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고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 ''이라는 제자의 견해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양심이고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은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여 움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마음은 잘 보존하여 발현되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고 칠정은 잘못될 수도 있으므로 잘 다스려서 치우이지 않도록

수양해야 하는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처럼 논쟁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논변을 정당화하기 위한 치밀한 논구와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성과불들은

한국 성리학이 중국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깊이를 갖추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퇴계는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자기의 학문에 잘못이 있음을 깨우쳤으면

바로잡기를 스슴지 않았고 그런 잘못을 지적해 주는 제자들이 있음을 더없이

기뻐하였다. 심지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도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어 제자들조차도 퇴계의 몸이 불편한 줄을 모를 정도였다. 도량이 그러했기에

큰 학문을 이룰 수 있었고 또 큰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언행록'에 의하면, 한 제자가

"퇴계 선생에게는 성현이라고 할 만한 풍모가 있다"고 하자, 또 다른 제자가

"풍모만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에서 정자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은 우리 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탕생하여 일정한 스승 없이 초연히

도를 획득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밀한 견해, 넓고 큰 마음, 고명한 학문은 성현의

도를 한몸에 계승하였고 성인의 학문을 후학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 조호익이라는 제자는 이렇게 말했다.

 

주자가 작고한 뒤, 도의 바른 맥은 중국에서 끊어져 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이렇게 퇴계는 제자들에게 성현의 예우를 받으며 임금을 비롯한 만인의 스승으로

그 정신을 남겼다.

70세 되던 해의 어느 날 우환이 악화된 퇴계는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 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제자들과 만나는 최후의 자리에서

 

자네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어리석고 게을러서 변변치 못한

일뿐이었다.

 

하고 탄식하면서 간단한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간단한 비문만 새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언대로 비석을 세우지 않고 작은

자연석에 '진성 이공의 묘'라 새긴 비문만을 세웠다. 죽은 후 4년 만에 도산 서당

위에 도산 서원이 세워져 사액 서원이 되었고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7. 그 학문이 세계를 향하다

 

퇴계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중 철학과 관련된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주서절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록', '논사단칠정서변', '자성록',

'성학십도'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퇴계집'(68)에 실려 있다.

그는 수많은 인재를 육성하여 제자들 가운데 승상을 역임한 자만도 10여 명에

이르고 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은 자가 30여 인 대제학을 지낸 사람도 10여 명에

이른다. 유명한 학자로는 조목, 이덕홍, 정구, 유성룡, 김성일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제자들이 영남 학파를 이루어 율곡을 계승한 기호 학파와 더불어 한국

성리학의 두 산맥을 이루었다.

퇴계의 철학 사상은 국내뿐 아니라 널리 국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임진 왜란 때 일본에 전해진 퇴계의 학문은 후지와라 세이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그로 하여금 일본 자자학을 창시하게 하였고 그 뒤로도 일본 유학을 대표하는

구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에 큰 영향을 끼쳐 두 학파 사람들은 퇴계를 대대로

신명처럼 받들었다. 기몬 학파의 창시자인 야마자키 안사이는 퇴계를 '주자의

직제자나 다름없는 조선의 제일인'이라고 평가하였고 그의 제자 사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의 학문이 이룬 바는 월등하여 원명의 학자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1926년에 중국에 북경 상덕 여자 대학에서 대학 기금을 모으기 위해 퇴계의

'성학십도'를 목각 병풍으로 만들어 널리 반포할 때, 양계초는 '아득하신

이부자님이여'라는 시를 지어 거리낌없이 퇴계를 성인이라고 불렀다.

현재 일본의 동경과 대망에 퇴계학 연구소가 있으며 워싱턴, 뉴욕, 하와이 등에

퇴계 연구회가 조직되어 있다. 1976년에 국제 퇴계 학회가 창설되어 거의 해마다

국제 학술 회의가 열려 세계의 석학들이 모여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

퇴계는 명실 공이 세계적인 철학자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진보적이 현실적 이상주의자

율곡 이이

 

전하, 음식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식탁을 가득 채워

서로 자랑하는 것이 되었고 의복은 몸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화려함을 서로 뽐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옷 한 벌의 비용은 헐벗은 자 열 사람의 옷값이 될

것이요, 밥 한 상의 비용은 굶주린 자의 두어 달 식량이 될

것입니다. 열 사람이 밭을 갈아 한 사람을 먹이는 데도

부족한데 일하는 자는 적고 먹는 자는 많으며 베 짜는

자는 적고 입는 자는 많으니 어찌 백성이 굶주리지

않겠으며 헐벗지 않겠습니까(만언봉사)

 

1. 용꿈으로 태어난 신동

 

중종 31(1541) 율곡이 다섯 살 때의 일이다. 하루는 외할머니가 율곡을 데리고

걷다가 문득 석류나무에 달려 있는 석류를 보고 율곡에게 물었다.

"이것이 뭔지 알겠느냐?"

""

"어디 한번 대답해 보아라 잘 대답하면 이것을 하나 따 주마"

"할머니는 참 제가 뭐 어린앤가요"

"아니 그럼 네가 어린애가 아니고 어른이란 말이냐"

다섯 살밖에 안 된 깜찍한 소년 율곡은 할머니의 놀라는 얼굴을 보고,

"전 시도 지을 줄 알아요. 시로 한번 대답해 볼게요"

하며 거침없이

"홍피낭리쇄홍주(붉은 가죽 주머니 안에 빨간 구슬이 부서져 있네)" 하였다.

"그게 무슨 뜻이냐"

"이건 석류 아녜요. 이 안에 든 석류 알이 꼭 구슬 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붉은 가죽

주머니 안에 빨간 구슬이 부서져 있다고 한 거예요"

다섯 살짜리 이 깜찍한 대답에 할머니는 그저 놀란 얼굴로 볼을 부벼대며 대견해

할 따름이었다.

율곡은 어릴 때부터 유달리 총명하여 비범한 앞날의 싹이 이미 내다보였다.

별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칠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

그리하여 일곱 살 때에는 이미 사서 오경을 체어 어른들을 무색케 할 정도의 어린

학자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효성스러움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다섯 살 때 어머니 사임당이 무거운 병에 결려 눕게 되자 온 짐안이 병구완에

매달려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저녁 나절이 되어서 어린 율곡이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저녁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마당에는 땅거미가 지는데

온 동네를 뒤져도 율곡은 나오지 않았다. 아픈 병자도 문제거니와 없어진 아이

때문에 온 집안이 야단이 났다. 집안 식구가 모두 나서서 찾아보았지만 허탕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외할머니가 뒤뜰에 가보니 외할아버지의 사당 섬돌에 조그마한

그림자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율곡이었다. 어린 그는 앙증스럽게 꿇어앉아 고사리

같은 손을 땅에 짚고 무어라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그랬는지 초겨울

저녁 바람에 어린 율곡의 몸은 꽁꽁 얼어 있었다. 어머니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할아버지의 영전에 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덕이었는지 사임당은 곧 병이 나아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년은 훗날 그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아홉 차례에 걸친 시험에 전폐 없이

모두 장원으로 합격했고 그런 까닭에 구도 장원공이라는 병명을 얻었다.

그리고 원효와 더불어 자생적이고 독창적인 사상을 내어 한국 사상사의 우뚝한

거봉이 되었다. 한국 성리학을 중국의 성리학과는 또 다른 하나의 학문으로 완성시켜

퇴계가 이룩한 봉우리 위에 또 하나의 찬란한 봉우리를 올려 놓은 것이다.

 

율곡(1536-1584)1536년에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너무나 유명한

신사임당이고 아버지는 한양 출신의 이원수이다. 율곡이 태어나기 전날 밤에 어머니

사임당의 꿈에 검은 용이 나타났다고 하여 어릴 적의 이름을 현룡이라 불렀고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한다. 그가 태어난 강릉의 오죽헌에는 지금도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11세 되던 해에 아버지 이원수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나라의 큰 선비감이니

이름을 이라고 하라'고 일렀다고 한다. 이는 귀걸이의 옥을 뜻하는 한자인데 대체로

귀한 인물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때부터 현룡이라는 이름 대신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율곡이라는 호는 친가의 고향 마을 이름인 율곡촌에서 따온 것이다.

열세 살에 소과 시험을 쳐서 많은 어른들을 물리치고 장원으로 합격하여 모든

사람을 졸라게 하며 진사가 되었다. 소년의 몸으로 진사가 된 율곡의 명성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그의 학문은 점점 깊어 갔다.

율곡은 특별히 정해진 스승을 모시지 않았다. 그래서 조광조와 같은 사승관계가

없다. 율곡의 학문은 거의가 어머니인 사임당에게서 비롯하였다.

어머니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율곡은 어머니를 무척이나 의지하고 사모하였다.

그래서 16세에 어머니를 여읜 율곡의 충격과 슬픔은 그만큼 컸다.

율곡은 깊은 허무감 속에서 '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고민하며 3년간 혼자서 묘막을 짓고 어머니의 산소를 지키며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신사임당 행장기'를 썼다.

3년상을 마친 후 율곡은 그 문제를 풀기 위하여 명종 9년 열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버리고 금강산으로 수도의 길을 떠났다.

 

2. 진리를 향한 구도의 몸부림

 

율곡은 금강산에 들어가 절에서 침식을 잊고 수행에 정진하여 의암 대사라는

법호까지 얻고 학승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당시에 이단 취급을 받던 불교를 열심히

공부해서 불과 20세의 나이에 생불소리를 들었다.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한 번에 여남은 줄씩 읽어내리는 그의 독서력을 생각한다면 그 동안에 엄청난 양의

불경을 읽었을 것이다. 불경 공부를 하면서 그는 불교와 유교가 몹시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수행 과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율곡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내가 풍악(금강산의 다른 이름)에서 공부할 때였다. 어느 날 혼자 깊은 골짜기를

걸어 몇 리를 들어가니 조그만 암자가 있고 거리에 한 늙은 스님이 가사를 입고

정좌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 일어나지도 않고 아무 말도 없었다.

암자 안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었고 부엌은 끼니를 끓이지 않은 지 여러 날이 된

듯하였다.

"여기서 무얼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을 먹고 요기를 하십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스님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이것이 나의 양식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말을 시험하려고

"공자와 석가 중 누가 성인입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그대는 늙은 중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내가

"불교는 오랑캐(인도를 가리킴)의 가르침이니 나라 안에서 시행한 것이 못 됩니다"

하니

"순은 동이인이고 문황은 서이인인데 이들도 오랑캐인가?"

하였다. 내가 다시

"불가의 경지는 우리 유가보다. 뛰어난 것이 없으니 유교를 버리고

불교를 구하지 않아도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스님은

"유가에도 즉심즉불(마음이 곧 부처)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였다. 내가

"맹자가 본성의 선함을 말할때 언제나 요순을 일컬으니 어찌 즉심즉불과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유가는 실을 압니다"라고 답하자 스님은 한참 있다가

"비색 비공은 무슨 말인가?" 하였다. 내가

"그것도 전 단계의 경지입니다"라고 하니 스님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곧바로

"솔개가 날아 하늘에 오르고 물고기라 물에서 뛰는 것(이 구절은 '중용'에 나오는

말로 원전은 '시경'이다. 그 의문은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고 하였으니 그 위와 아래의 지극함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도는 실마리가 부부의 도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에

나타난다"이다)은 색 입니까? 공 입니까?" 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비색 비공은 진여체(참된 본체)이다. 어찌 시에 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이미 말이 있었으면 그것이 바로 경계입니다. 어찌 본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유가의 심오한 경지는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고, 불가의 도는 문자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스님은 놀라면서 나의 손을 잡고

"자네는 세속의 속된 선비가 아니다. 나를 위해 시를 지어 연어(솔개와 물고기)

구절을 풀이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시 한 절구를 써주었다. 스님은 그 시를

옷소매에 넣고 몸을 돌려 벽을 향하여 앉았다. 나도 골짜기에서 나왔다. 사흘 째 되던

날에 다시 가 보니 암지는 여전히 있었지만 스님은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풍악증소암노승병서)

 

율곡이 노승에게 써 준 시는 이렇다.

 

물고기는 뛰고 솔개는 날지만 위아래가 같은 것

이는 색도 아니요 공도 아니다.

부질없이 한 번 웃고 이 몸을 쳐다보니

석양 벗긴 나무 숲속에 홀로 서 있네.

 

이 시에서 율곡은 물고기가 물에서 뛰고 솔개가 하늘을 나는 현상을 서로

대립하거나 상반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동일한 존재의 본질이 위아래로 나타난

조화로운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솔개는 물 속을 헤엄치지 못하고 물고기는 하늘을

날지 못하기 때문에 불공평하고 평등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존재의

본질에서 보명 모두 자연의 이치인 '생명의 의지'가 드러난 것이고 자연의 이치인

천명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도 사실은 동일한 본질에서 나타난 조화로운 현상인 셈이 된다.

그리하여 율곡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죽음의 문제를 가장

본격적으로 다푼 불교에 입문하였다가 유가 사상 속에서 그 문제가 해결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가 현실을 구제하고 타개해 나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현실 타개 능력을 갖춘 유가 사상으로 다시 회귀하게 된다.

 

3. 하산하여 공부에 힘쓰다

 

한평생 나오지 않을 각오로 들어갔던 금강산에서 내려온 율곡은 한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강릉의 외가집에 들렀다. 그때까지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듣고난 외할머니는

"진리를 찾는 성실한 사람은 때로 의문에 부딪히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진리가

없을까 하고 마음이 방황하게도 되는 법이다.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반재하는 사람들보다는 너같이 한번 그 길을 밟아 보고 나오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율곡은 그 말들 듣고 자신의 생각도 그러하다면서 스님들이 고행하는 태도로 성현이

되는 길에 정진하겠다는 각오로 앞으로 지켜야 할 열한 가지의 조목을 정하고 실천할

것을 다짐하였다. '자경문(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이라 하는 열한 조목은 이렇다.

 

1.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한다.

2. 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말을 적에 한다.

3. 놓아 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4. 공손하고 신중하게 처신 한다.

5. 일에 앞서 생각한다. 실천이 없는 독서는 무용한 학문임을 알아야 한다.

6. 재산과 명예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7. 할 만한 일이면 정성을 다한다.

8. 죄 없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9. 아무리 포악한 사람이라도 감화해야 한다.

10. 때가 아닌 잠을 자지 않는다.

11. 수양과 공부는 서두르지도 쉬지도 않고 꾸준히 한다.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던 율곡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벼슬길에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21세에 다시 국가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나라

안에 그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25세 되던 해 퇴계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처가에서 강릉 외가로 가던 길에 율곡은 도산에 들러 퇴계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틀 동안 도산에 모문 율곡과 더물어 학문의 근본 문제들을 논한 퇴계는 율곡을

기리켜 "후생이 가외(후배 학자의 탁월한 진전이 가히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

하였다.

이때 퇴계는 이미 학문과 인격이 원숙하여 마치 고요한 거울과 같았고 율곡은

재주가 뛰어난 데다가 아직 넒었기 때문에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고 실천적이었다.

말하자면 두 학자는 서로 퍽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차이 때문에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를 가르칠 수 있었고 또 도울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그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율곡은 퇴계와는 다른 방향으로 학문을 전개했지만 이는 퇴계가

구축해 놓은 기초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퇴계의 인격과 학문의

본령을 존경한 율곡은 퇴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 나라 유학의 큰 봉우리가

무너지니 이보다 더한 슬픔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시 한 수를 지어

이를 애도하였다. 그리고 훗날 퇴계를 조광조와 더불어 문묘에 배향애 달라고

선조에게 청원하였다.

 

퇴계를 만난 그 해, 율곡은 다시 별시에 응시하여 유명한 '천도책'으로 장원

급제하여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천도책'은 시험관이 감탄할 정도의 답안이었는데

중국에까지 알려져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천도책'의 저자를 알아보고 예를

표하였다고 한다.

율곡은 29세에 다시 사마시에 자원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호조 좌랑으로 관직을 시작한 그는 사간원의 정언을 거쳐 대사간 홍문관 직제학 등

요직에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4. 철학적 문제 의식

 

율곡은 당시의 학자 가운데 최고의 학자로 명나라의 나흠순을 들었고 그 다음으로

퇴계를 그 다음으로는 서화담을 들었다. 그런데 율곡은 그들의 인격과 학문은 높이

사면서도 구체적인 논점에서는 만만치 않았다.

율곡은 화담과 퇴계의 사상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기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두 사람에 대한 불만은 우선 인물 평에서 나타난다. 선조가 서화담에 대해

물었을 때 율곡은 "그 저서가 성현의 뜻에 꼭 부합하는지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화담은 깊이 생각하고 널리 조예가 깊어 대체로 자득의 깊이가 있습니다.

문자와 언어의 학문이 아닙니다" 하고 말하여 화담의 학문하는 태도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학문의 내용성현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데 대한

숨길 수 없는 반감을 보였다.

그리고 퇴계에 대해서는 성현의 도를 계승했다는 점을 늘 높이 평가하면서도

'윤리적 당위에 너무 침잠한 인물(이굴침잠)'이라고 불만을 말했다.

이는 퇴계가 나아가 나라를 다스리고 현실에 참여하는 데 열의를 보이지 않고

물러나 수양하고 성찰하는 것을 중시한 점을 지적한 말이다.

나라가 그것을 극복하는 데 힘쓰는 것이 의리를 중시하는 성리학의 임무인데

그 점에서 퇴계의 태도는 환영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조광조에 대해서는 "정암 선생(조광조)만 생각하면 눈물을 금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 행적을 존중하고 도학을 창도한 인물이라고 높이면서도 "그러나 학문이

익어 깊이를 갖추어 완성되기 전에 혁신적인 개혁에 나섰다"고 하여 그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율곡은 조광조의 지치주의 정치 사상을 철학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을 자기 철학의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율곡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였다. 선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백여 년

동안 비교적 안정을 누리던 조선 왕조는 서서히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율곡은 선조에게 올리는 글에서 이렇게 경고하였다.

 

우리 조정은 나라를 세운 지 이백 년이 되어 중쇠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서 간신들이 어지러운 짓을 한 영향이 심해져셔 지금 마치 노인과 같이 원기를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상이 나타나셨습니다. 이때야말로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워지느냐의 갈림길에 선 시기입니다. 만일 분발하여 진흥한다면 동방은 무궁한

태평을 누리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장차 핍진하여 구해 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경연일기)

 

율곡은 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간신들의 횡포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간신은 구체적으로 보면 명종 때 권력을 독점했던 윤원형 일파이다.

선조 때에 이르러 훈구 권신들이 물러나고 사림의 도학파가 정권을 잡고 새로운

정치를 시작했는데도 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깊어진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율곡은 선조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우려 하였지만 왕은 율곡이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권력을 잡은 사림파도 동서로 나뉘어 당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결국 율곡이 바랐던 무궁한 태평은 이루어지지 않고 나라의 기력은 날로 쇠퇴해

마침내 조선 왕조는 임진, 병자 양란에 휩싸이고 만다.

율곡이 위기라고 생각한 것은 다만 사화와 당쟁으로 얼룩진 정치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대지주의 출현에 따른 토지 집중과 그로 인한 민생의 피폐, 그리고 윤리적

도덕 질서의 붕괴도 문제였다. 율곡은 나라가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백성의 참담한 생활상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지금 민생의 곤란함은 거꾸로 매달린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급히 구하지 않는다면 그 형세가 장차 나라를 텅 비우고 말 지경입니다.

나라가 비게 되면 눈앞의 물품들은 다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만언봉사)

 

작년에 백 가구나 되던 마을이 올해는 열 집도 못되고 작년에 열 가구이던 마을이

올해는 한 집도 없게 되었습니다. 마을은 쓸쓸하고 사람의 자취와 굴뚝의 연기가

끊어졌으니 만약 이 폐단을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의 근본이 무너져 다스릴 방법이

없게 될 것입니다(소찰)

 

율곡은 백성이 곤경에 처한 것은 권력자들의 사치스런 생활 때문이라고 보고 이러한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을 주창하였다. 그는 "가진 자의 밥 한 상의 비용은

굶주린 자의 두어 달 식량이 될 것이며 옷 한 벌의 비용은 헐벗은 자 열 사람의

옷값이 될 것"이라면서 "열 사람이 베를 짜서 한 사람을 입히는 데도 부족한데 베를

짜는 자는 적고 입는 자는 많으니 어찌 백성들이 굶주리고 헐벗지 않겠느냐"

개탄하고 있다.

그리하여 율곡은 학문과 수양을 통하여 성인이 되는 것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치적

실천에 참여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한국 성리학사에 전례가 없는 독창적이고

실천적이며 현실적인 이상주의적 정치 철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5. 지치주의 정치 철학의 완성

 

이기론

 

율곡은 퇴계에 비하여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사상과 저술은 한국 사상사에

빛나는 업적으로 우뚝하게 남아 있다. 그는 '이치는 따져 보지 않고 단지 스승의

설이라 하여 믿고 따르는 학풍에 반대' 하고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아 터득하는'

자주적인 학문 태도를 존중하였다. 그래서 그는 퇴계를 존경하고 신뢰하면서도

비판하였고 심지어는 성리학을 완성시킨 주자에 대해서도 "내가 주자 이후에

태어나서 학문에 거의 착오가 없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라고 주자를 높이면서도

만약 주자가 진실로 이와 기가 서로 발용하여 각기 따로 나간다고 생각했다면

이는 자자도 틀릴 것이라고 하여 주자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율곡이 이와 기가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보아 이를 존재의 근본 원리이자 당위로

인정하고 이는 순수한 선이지만 기는 선악의 구분이 있다고 하여 윤리적 질서를

분명히 하고자 한 점은 퇴계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러나 율곡은 당위인 이가 존재인

기보다 앞서 존재하지 않으며 이와 기는 별개의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퇴계를 비판하여 "이기의 선후를 나누는 병통이 있다"

하였다.

예컨대 퇴계는 군신이 있기 전에 군신의 이가 먼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군신

관계의 실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군신의 이는 변함이 없고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가 작용하여 기가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군신의 이가

작동하여 군신의 이에 함당한 군신 관계를 자연히 이루게 된다는 논법도 성립한다

그러나 율곡이 보기에는 그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다. 그것은 태평 성대를

구가하는 시대의 명분론일 수는 있어도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고 위기의 극복을 당면

과제로 삼는 철학일 수는 없다. 퇴계에 대한 율곡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퇴계는 이를 자연의 존재 원리이자 도덕적 당위로 보아 절대 불변의 것으로

상정하였다. 그리고 도덕적 당위쪽에 더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율곡은 존재 원리인

이와 도덕적 당위인 이 가운데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입장에서 그의

철학을 수립하였다. 말하자면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이상적 당위를 실현하겠다는

것인데 율곡은 그것은 "물은 그릇의 모양에 따라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지만 모두

물이며 허공은 병의 크기에 따라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지만 모두 공기이기는

마찬가지이다"라는 비유로 설명하였다. 둥글기도 하고 모나기도 한 현실에 따라 모두

차이를 보이지만 본질은 모두 물이라는 것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동일성을 본다는

것인데 이때의 차이가 바로 기이고 동일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는 천리이고 기는 인사이며 또 이는 하늘이고

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을 그 자체의

원리에 따라 문제삼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넘어서 있는 도덕적 당위를 설정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위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곡은 하늘의 이치가 이 땅에서 구현되도록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한편 심성을 바로잡아 천리를 구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율곡이 생각한 학문의 목적은 바로 실천이었다.

그런 생각에서 율곡의 현실관이 나오고 아울러 이상의 실현도 현실 밖에서가

아니라 현실 자체의 개혁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논법도 성립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의 책임은 더욱 무거워지고 인간의 자주성이 부각된다.

 

지치주의의 계승-진보적 이상주의

 

율곡의 철학은 두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마음을 맑게 하고 마음 속의 찌꺼기를

쓸어내어 심성을 바르게 하는 수양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사회의 실정을 잘 알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여 세상에 적극적으로 부딪치는 것이다. 이것은 성리학의

전통적인 두 가지 학문 조목인 거경과 궁리(격물치지)에 다시 역행(노력하여 행함)

더한 것인데 바로 여기에 실천을 강조하는 율곡 사상의 독창성이 있다.

이 두가지는 모두 천리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현실이 천리가 구현된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율곡은 개혁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왕도 정치의 완전한 실현을

꾀한다.

그래서 율곡은 선조에게 올린 '만언봉사'라는 글에서 옛 조상의 법은 바꿀 수

없다는 통념에 반대하는 것이다. 율곡은 때에 따라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즉 당대의 문제는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율곡은 정치적 실천의 핵심으로서 시의와 실공을 주장하였다. 그는 "무릇 시의라는

것은 때에 따라서 변통하는 법을 정해 백성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고 실공이란

일을 성실하게 하고 빈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 하면서 정치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실공에 힘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당대의 위기의 본질을

깊이 통찰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때에 따라 개혁을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율곡은 문제의 성격을 올바로 파악하는 것을 가장 중시하였다.

문제의 경중 완급에 따라 선후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백년 대계에 관한

일은 근본으로부터 시작하고 시사에 관한 개혁은 사건 자체에서 시작하여야 한다고

구별하였다. 여기서 국가의 백년대계에 관계된 중대한 일이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에 관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강력산 개혁을 주장하면서 당시의 썩어 빠진 사회 실정을

일곱 가지로 간추렸다.

 

1. 상하에 서로 믿음이 없는 것

2. 관리들이 맡은 바의 직분에 성실치 못한 것

3. 경연에 공론만 부성하고 성취가 없는 것

4. 어진 인물을 등용하지 않는 것

5. 재앙을 만나도 대응한 방책이 없는 것

6. 여러 정책이 백성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

7. 민심이 착한 데로 향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정치하는 사람이 스스로 수양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여야 한다면서 수기의 방법으로 네 가지를 안민의 방법으로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그러나 개혁에 앞장선 율곡은 조광조와는 달리 원칙 제일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보다 넓은 관점에서 문제를 포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자기와 의견을 달리한다고

하여 소인이라 배척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당파 싸움을 화해시키려고

한 것이다. 당시에 정치권에서는 김효원이 중심애 된 동인과 심의겸이 중심이 된

서인이 맹렬한 당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대립에서 그 뒤로 몇백 년이나 계속된

사색 당파의 갈등이 싹트는데 율곡은 이러한 대립이 나라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고 보아 그들을 화해시키는 데 힘썼다.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율곡에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경우는 없는 법인데 선생께서는 지금 두 파의

싸움에 임하여 옳고그름을 가리지 않고 화해시키려고만 하시니 사람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곡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세상에는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경우가 있다. 지금 두 파의 싸움은 나라와 백성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으니 둘 다 그른 경우이다. 마땅히 화해해야 옳은 일이요,

한 편만을 고집하면 두 편의 사이를 더욱 벌리는 결과밖에 안 된다"

율곡의 이러한 충정을 이해한 선조는 김효원, 심의겸 두 사람을 중앙에서 떨어진

지방의 관리로 보내 사태를 일단 수습 하였다.

율곡의 이상 실현을 위한 개혁 노력은 중앙 정치권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치는 벼슬을 하면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대사현의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온 율곡은 '만언봉사'

비롯한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왕에게 훌륭한 정치를 위한 의견을 자주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율곡의 유명한 '상소 정치'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자립 자치할 수 있도록

향약 운동을 장려하고 해주 향약을 통하여 그 모범을 직접 보여 주었다. 그는 몸소

농사를 지었으며 대장간을 지어 농기구를 만들어 싸게 공급하였다.

율곡의 정치 원칙의 제 1조는 '백성을 우선 제대로 먹고 살게 하는 것이 제일 큰

일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산업을 진흥하고 천재 지변을 당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또 백성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악법 폐지를 상소하고

신분의 명에를 풀어 주기 위하여 노예를 속량하고 서얼들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었으며 현대 의회 제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졍제사의 설치를 제안하고 여론

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렇게 실무와 역행을 중시하는 정치 사상은 그 후 실학으로

계승되어 더욱 치밀하게 전개된다. 율곡은 죽기 1년 전 48세 되던 해에 '시무육조'

선조에게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어질고 유능한 선비를 신임할 것

2. 군사를 양성할 것

3. 산업을 진흥하여 재물을 풍족히 할 것

4. 변방의 경비를 귿건히 할 것

5. 전투용 말을 준비할 것

6. 교육에 힘쓸 것

 

그리고 그 해 4월에는 나라의 힘이 약해 10년안에 큰 날리를 당할 것이니 한양에

2, 각도에 1, 도합 10만의 군사를 길러 유사시에 대비해야 한다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컨대 한 젊은 사람이 젊고 건강했을 때 주색에 빠져서 몸이 많이 손상됐어도

혈기가 왕성하여 손상괸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면 해로운 독이

몸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한꺼번에 나타납니다. 그때 가서는 아무리 근신을 하고

조리를 하여도 원기가 없너져 걷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의 상황이 꼭 이와

같으니 10년을 지나지 않아서 큰 재화와 변란이 닥칠 것입니다(만언봉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율곡의 주장은 당쟁의 와중에서 실현되지는

못하였지만 앞일을 미리 내다보는 그의 뛰어난 슬기와 통찰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과연 9년 만에 나라안을 온통 불바다로 몰아넣은

임진 왜란이 터졌다.

 

7. 부싯돌 하나를 남기고 떠난 거유

 

율곡은 많은 저서를 남겼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담성호원(문인인 호원 성혼과

서신으로 전개한 문답이다. 전후 수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율곡 사상의 핵심적인

부분이 이 논쟁을 통해서 정리되었다), '역수책', '만언봉사', '동호문답',

'격몽요결', '성학집요', 그리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사서를 언해한

'사서언해', '소학'에 주해를 한 '소학집주' 등이 있는데 모두 '율곡전서'(44)

수록되어 있다.

 

158449세의 율곡은 자리를 바꿔 발라고 하여 머리를 동족으로 두게 하고 의관을

바로 잡은 후 잠자는 듯 고요하게 눈을 감았다. 율곡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사흘 동안이나 조회를 거르면서 슬픔에 잠겼고 제자들뿐 아니라 온 나라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십만 양병설에 반대했던 유성룡도 임진 왜란이 일어난 후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면서 율곡을 이렇게 칭송하였다.

 

이제 와서 보니 이문성공(율곡의 시호)이야말로 진성인이다.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나라의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행장)

 

율곡은 죽는 날까지도 나라 일을 걱정하였고 또 꿈속에서도 백성의 생활을

염려하였다. 그런 그였던지라 호조 판서, 이조 판서, 대제학 등 최고의 벼슬을

역임했으면서도 남긴 재산이 거의 없었다. 다만 기묘한 유산이 남아 있어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것은 해주에서 향약 운동을 전개하던 때에 대장간에서 손수

쳐서 만든 부싯돌이었다.

퇴계와 더불어 한국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는 율곡은 한국 철학의 지평을 한 단계

끌어 올렸고 만세의 귀감이 되었다. 퇴계가 유학의 정통 사상의 본질을 발휘하여

궁극점에 도달한 순유였다고 한다면 율곡은 통유로서 불교 분 아니라 노장을 비롯한

제자백가 사상에 두루 통한 거유였다. 그는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주해서인

'순언'이라는 저술을 남겼으며 양명학에 대해서도 무조건 반대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광인 취급을 받던 김시습에 대한 전기를 썼으며 당대에 독특한 철학을

전개하여 퇴계에 의해 비판을 받았던 서화담에 대해서도 독특한 발견처가 있다고 높이

평가해 주었다.

협소한 틀에 구애받지 않는 이러한 점은 서화담의 제자이자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과의 우정 어린 교류에서도 발견된다. 토정 이지함은 너그러운 성격에

산수를 벗하고 방랑 생활을 즐기며 풍수와 비기에 심취한 재야의 지사로 김시습과

비슷한 방외인이었다.

율곡이 벼슬을 사양하고 은퇴하려고 할 적마다 토정은 율곡에게 "깊은 병이 든

부친이 약사발을 접어던지기로서니 울면서 약 들기를 계속 권해야지 그낭 물러서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며 조정에 남아 정치적 도의를 실현하라고 권했고 율곡이

물러나면 나라 꼴이 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토정은 율곡의 뛰어난

경륜을 인정하여 더 많은 일을 이루기를 당부하였고 율곡은 토정이 격식에 매이지

않으면서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생각하는 점을 남달리 이해하였던 것이다.

 

퇴계가 이를 기보다 우위에 놓음으로써 사회 질서와 윤리의 이념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면 율곡은 추상적인 이념을 사회 경제의 현실에 조명하여

주어진 현실을 더욱 진보된 방향으로 이끌어 이상적인 상태로 승화시켜 나가고자

하는 현실적 이상주의 사상을 낳았다. 퇴계가 경 중심은 수양 철학을 완성하였다면

율곡은 성 중심의 실천 철학을 완성하였다. 이로써 우리 나라에 수입된 성리학은

퇴계와 율곡에 이르러 한국 성리학의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확립하게 된다.

율곡의 사상은 그 제자들에게 이어져 기호 학파를 이루었고 실학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실학자인 성호 이익은 "우리나라에서 시무를 아는 사람은 율곡과 유형원 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율곡의 시무 사상을 인정하고 존중하였다.

율곡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던 한국 성리학은 이후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유학의 자기 반성인 실학 사상을 보게 되고 더 나아가 중세 질서 전반에 대한

반성이라 할 동학 사상을 만나게 된다. 그 점에서 율곡 사상은 당대 성리학의 극치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종말을 예고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유학의 자기 반성

실학

 

1.유학의 자기 반성

 

율곡이 예견한 대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것을 시작으로 한 임진, 병자

양란은 조선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을 뿐아니라 사상사에서도

한 획을 긋는 변화를 낳았다. 지베 이념 자체의 변화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계에 대한 반성의 기운을 싹 틔운 것이다.

훈구파와 대립하여 여러 차례 사화를 겪은 끝에 어렵사리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사림파가 다시 동서로 나뉘어 당쟁을 벌인 탓에 이 시기에 정치는 어지러웠고 사회

기강도 해이해져 있었다. 이에 따라 민중의 생활은 더욱 피폐하여 궁핍하기 그지

없었다.

이처럼 사회 내부의 모순이 심각해졌을 대 이 시기를 경장기로 보고 사회의 구조와

폐단을 개혁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율곡이었으나 당시의 모순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나라 밖에서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의 분열을 수습하여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었고 그 뒤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 정치를 펴기

시작하였다. 북쪽에서는 누르하치가 만주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팽창을 거듭한

결과 중국 본토을 점령하고 청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주변 정세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데도 조선 왕조는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할

아무런 준비도 갖추고 있지 않았고 심지어 사태의 진상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정황을 깊이 통찰하여 사태를 예견한 율곡의 '십만 양병설'은 당쟁의 와중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듯 나라 안의 모순과 나라 밖의 압력이 날로 심각해지는데도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조선 왕조는 양란을 당하여 붕괴의 귀기를 맞지않을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임진, 병자 양란의 상처가 그렇게 깊었던 것도 조선 사회가 그만큼

허약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사상계는 성리학의 발전과 심화 과정을 통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으나 그에 따른 문제도 없지 않았다. 퇴계와 율곡으로 대표되는 성리학의

심오한 논변은 그 시대의 철학적 사고의 수준을 극치에 이르도록 높여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이단으로 여겨 규제하고 성리학의 정밀한 분속과 의리론을 제시하였다

즈러나 그 과정에서 성리학의 규범화, 교조화가 가속되어 사고의 자율성을 제약하게

되었고 성리학이 초기의 건강성을 잃고 형식과 관념으로 흐르는 경향이 날로 더해

갔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그 시대의 집권 사대부층은 사회적

격동을 흡수하고 해결하는 능동적 자세를 보여 주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양란을 치르면서도 극복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심해지는 양상마저 보였다.

전쟁에 임한 도학자들은 침략을 막고 외적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적의

전술을 파악하고 우리의 무기와 전술을 정비하기보다는 불의에 의리로 맞서야

한다는 식의 의리론을 펴는데 더 열심이었다. 그 결과 적이 얼마나 불의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도학의 의리론적 자세는 현실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인 피해를 민중이 고스란히 떠맡아야 했다.

결국 현실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한 사대부 계층을 민중은 더 이상 신롸하지 않게

되었고 민심을 잃은 지배층 내부의 동요는 막을 길이 없었다.

현실의 긴박한 상황은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당위적이고 보편적인 이념에 앞서

눈앞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이른바 정통 이념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이단으로 취급되던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관심이 주어지기 시작하였다.

또 정통 도학과는 구별되는 양명학, 서학, 고증학 등의 새로운 학풍도 나라 안에

전해졌는데 정통 도학파들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에 현실에서 문제 의식을

느끼던 많은 학자들은 그것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다.

 

2. 실학파의 문제 의식

 

실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은 도학(성리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도학의

정통성을 긍정하는 바탕 위에서 다른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또는 도학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도학이 지배 이념으로 정립되면서 사회 제도나 경제 정책을 논하는

경세론이 제시되었고 또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시무론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양란을 거치면서 혼란에 빠진 사회 문제를 보는 도학파의 자세는

의리론에 입각한 도덕 의식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사회의 유지와 안정을

도모하는 데 치중하는 소극적 입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실학파는 도학파가 중점을 두는 예학이나 의리론에서 벗어나 현실의 경제,

사회 제도, 산업 문제 등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성리학의 논리적 형식보다는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합리성에 입각하여 사물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실학파는 개방적인 태로로 같은 시대의 여러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요소들을 흡수하려고 애썼다. 양명학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고 17세기 초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에 대해서도

학문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또 청나라에서 실학이 고증학적 연구로 발전한 사실도

염두에 두었는데 고증학의 실증적 연구 태도는 경전(사서 삼경)에 대한 성리학적

해석(즉 주자의 해석)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해의 길을 열어 주었다.

 

3. 실학을 준비한 학자들

 

실학파의 등장은 17세기 초인 임진 병자, 양란 직후에 시작되었다.

지봉 이수광(1563-1628)은 임진 왜란을 전후하여 세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이 때의 경험에 근거하여 백과사전격인 '지봉유설'을 썼다. 그는

'지봉유설'을 통하여 서양을 포함한 세계의 지리와 마테오 릿치의 '천주실의'

소개하였다.

또 교산 허균은 연경에 다녀오면서 천주교의 기도문인 '게십이장'을 들여왔으며

"성인의 가르침인 분별의 윤리보다 천부의 본성인 남녀의 정욕이 더 근원적인

"이라고 보아 감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당대의 도덕 규범에 도전하였다.

같은 시대 사람들로부터 '천지간의 한 괴물'이라는 평을 들은 그는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호민론''유재론'을 써서 사회의 불평등이 초래한 항거는

막을 수 없으며 하늘이 낸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명문가의 출신이면서 서얼 문제를 다룬 '홍길동전'을 써서

그 시대의 신분관과 인간관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이 실학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다음 세대에서 다욱 구체화할 문제 의식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학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반계 유형원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이학총론'을 저술하였으며 그 시대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덕적인 근본 문제로부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이러한 관심의 전환을 통하여 이론을 체계화하고 혁신적인

개혁안을 냈다는데서 그의 실학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반계수록'에서

정치, 사회, 경제 제도의 개혁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데 율곡의 시무론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서계 박세당(1629-1703)은 병자 호란 이후에 대두된 북벌론과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웠다 하여 청나라에 반대하는 '배청 의리론'을 거부하고 청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사대론을 내세워 도학파의 정통적 입장에서 이탈하였다. 그리고 '사변록'을 통하여

주자의 해석 체계에서 벗어나 경전을 해석하였고 이단 취급을 받던 노자와 장자를

긍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정치적 입장뿐 아니라 철학적 입장에서도

주자학으로부터의 분리를 명확히 하였다. 따라서 16세기 후반에 박세당이 보인

실제의 사회 제도에 대한 관심이나 주자학으로부터의 이탈은 실학파의 입장을

좀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에는 이전 세기에 제기된 사상적 요소들과 현실적 문제 의식들이

정리되어 실학파가 하나의 학파로서 확립된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실학은 성리학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이루는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그 관계는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성리학과 크게 대립하지 않으면서 실학을 추구한 경우이다. 초기 실학자들인

유형원, 이익, 안정복 같은 학자들이 그 보기이다. 둘째는 성리학의 이념보다는

성리학의 학풍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거부했던 갈래인데 주로 18세기 후반의 북학파

학자들이 이에 속한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셋째는

성리학의 이론 체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제시한 부류인데 정약용,

최한기 들이 이러한 경향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리학이 유학의 유일한 이론

체계가 아니라는 데 공감하고 있었으며 또 유학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정약용은 "선진 시대의 공맹 사상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데 이는 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주자 이전의 원시 유학으로 돌아가 유학 본연의

정신을 되찾자는 의미이다.

요컨대, 실학 사상은 유학이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서 서로 다픈 관심 영역에서 서로

다른 방법론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사회 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실학파의 두 조류

 

18세기에 학파로서 확립을 본 실학파는 전반기에 출현한 성호학파와 후반기에

출현한 북학파로 구분될 수 있다.

성호 이익에서 출발하는 성호학파는 유형원을 계승하여 토지와 농업 및 행정 제도

등의 개선에 치중하였다고 해서 경세치용학파라고 부르는데 당시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기호학파의 남인 계열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익은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주로 사회 제도의 개선에 학문적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서양의 과학 지식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서도 신앙에 관한 내용은 비판하면서도 윤리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가졌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성호사설'이 있다.

이익의 제자들은 서학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두 학파로 나뉘었다. 서학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보수적인 태도를 위한 신후담 안정복 등의 공서파와 서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수용하는 입장에 선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정약전(정약용의 형)등의

신서파가 바로 그것이다.

신서파 중에서 다산 정약용은 이익을 사숙(직접 문하에서 배우지는 않았어도

간접적으로 배우고 본받는 것) 하고 그 사상을 계승하여 실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공서파의 안정복은 이익의 수제자라 할 만한데 스승의 학문적 입장 가운데 도학의

전통적인 측면을 주고 계승하는 보수적인 면을 보였다. 그런 그가 모처럼 실학

사상을 발휘하여 쓴 책이 '동사강목'이다. 안정복은 이 책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보편적 합리성에 따라 재인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신서파의 이승훈, 정약전 등은 서양 과학을 꽤 깊이 있게 이해하였고 과학을

통한 자연 법칙의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텸을 가지고 있었다. 신서파의 이러한

태도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며 실학 사상의 발전에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유교적인 기반을 부정하고 천주교 신앙으로 전환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격렬한 비판과

배척의 표적이 되고 결국은 불법화되기에 이르렀다. 신서파의 학자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천주교 신앙과 관련하여 처형이나 유배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한편 집권층이던 노론 계열의 일부 지식인들이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그 문물에

영향을 받아 실학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이를 북학파라 한다. 상업의 발달과 상품의

유통 그리고 기술 발전을 추구한 이들을 이용후생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담헌 홍대용(1731-1783)은 도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였으나 연경을 다녀온 것을

계기로 하여 당대의 철학적 기풍이 "성인의 업적은 높이면서 그 진리는 잊었고 그

말씀은 익히면서 그 뜻은 잊었다"고 비판하면서 청나라의 서양의 과학 지식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북학파의 선두가 되었다. 지구 자전설을 내에워 자영 과학적

사유를 심화시켰고 청나라를 재척하는 '배청 의리론'에 대하여 오랑캐이기 때문에

배척할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를 침략한 적이기 때문에 저항해야 하며 청나라의

문물을 오랑캐의 것이라는 이유로 무조선 거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라면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전통적 질서의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생산 기술과 생산 기술과 유통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소설 형식을 통하여 기존 질서의 모순을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서얼 출신의 박제가(1750-?)는 뛰어난 자질로 신분의 한계를 이겨 내어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연경에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북학의'를 써서

북학파의 사상을 정리하였다. 박제가는 빈곤이야말로 조선 왕조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 그 해결을 위하여 청나라의 기술을 도입하고 생산물의 교역을 통하여

부를 획득할 수 있도록 생산 기술과 상업을 진흥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농업

생산에 수레를 써서 생산성을 높여야 하며 선박, 도로, 교량 시설을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페쇄적인 세계관을 개방적인 세계관으로 전환하고 신분제의

굴레에 매인 사회 질서를 생산과 능률 중심의 사회 제도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실학 사상이 지향하는 이념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활동을 통하여 실학파의 철학이

확립되었다.

정약용은 서학의 영향을 폭넓게 수용하면서 거기에 고증학적 지식을 더하여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고 민본주의의 입장에서 사회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였다. 그리하여 겅험론적인 인식 태도와 자연 과학적인 합리주의에서

출발하여 종교, 미신, 신비설, 숙명론 따위의 비과학적인 관념과 습속을 통렬히

비판하고 그 허위성과 해독을 폭로하였다.

김정희(1786-1856)는 박제가의 영향을 받아 북학파를 계승하면서도 고증학을

수용하여 금석학을 발전시킴으로써 고증학적인 실학 사상을 확립하였다.

 

5. 실학과 그 이후

 

그러나 실학은 사회 사상으로서는 대단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그에 걸맞은 철학적인

체계를 수립하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기 때문에 백과 사전적 지식의 나열로

인한 폐단을 차츰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유학에 대한 반성으로서 실학이 전개되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이기

철학도 새로운 진전을 보고 있었다. 그러한 진전을 대표하는 인물이

임성주(1711-1788)인데 그는 정약용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다. 정약용의 뒤를 이은

최한기는 고증을 위한 고증이나 지식의 백과 사전식 나열로 발생한 실학 사상의

병폐를 극복하는 데 힘썼다. 최한기는 정약용과 임성주를 동시에 계승하였다.

실학과 이기 철학을 아울러 게승한 것이다.

그는 전통 사상과 서학을 한데 녹여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전통

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모범을 보였다.

이처럼 19세기는 실학 사상과 이기 철학의 성숙 그리고 최한기에 의한 전통 사상과

서양 사상의 종합이 이루어져 근대화에 임할 사상적 준비가 갖추어진 중요한

시기였다. 19세기 말엽에 개화 사상이 등장한 것도 그러한 사상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를 위한 여러 여건이 채 성숙하기 전에 밀어닥친 제국주의의 물결과

일제의 조선 강점으로 말미암과 우리 민족은 예속의 길로 접어들었고 전통 사상의

발전적 계승 과정 또한 일시적 단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실용적인 학문에 평생을 바친 대학자

성호 이익

 

지금 가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비가 천민이고 어미가

양민이면 그 자식은 아비를 따라서 천민이 된다. 사람은

아비와 어미를 합하면 둘이지만 조부모를 합하면 넷이

되고 사대를 합하면 열여섯 명이나 된다. 그 사이에

천민이 한 사람이라도 끼여 있으면 모두 천민이 됨을 면할

수 없고 또 만대를 내려가도 이를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지금 나라 안에 천민이 열에 아홉은 된다.

그들 중에 성현과 같은 인재가 있어도 양민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논노비)

 

1. 세상에 좌절하다

 

1681(숙종 7), 경기도 광주를 근거지로 하여 살던 이하진이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게 되었다. 언관의 총수인 대사헌 벼슬을 하던 그가 남인의 거두 허목과

행동을 함께 하다가 숙종 6년 서인들이 정권을 잡고 남인들이 밀려나게 되자 진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평안도 운산으로 귀양가는 몸이 된 것이다. 귀양 갈 당시

이하진의 나이는 53 세였다. 그의 부인이 남편의 귀양지에 따라와 수발을 들었다.

비운이 닥친 그들의 생활은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하였다. 성호 이익(1681-1763)

이하진을 아버지로 하여 귀양지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의

비운을 함께 하는 꼴이었다.

아버지의 귀양지에서 태어난 이익은 돌이 채 되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경기도 광주로 돌아왔다. 어려서부터 늘 병치레를 하던 그는 글공부를

시작도 못 하다가 열 살이 넘어서야 나이가 스물 남짓이나 차이가 지던 둘째 형

이잠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이익은 형을 몹시도 좋아하여 따랐고 스스로 분발하여

배우기에 힘쓰며 종일토록 앉아 공부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였건만 25세 되던 해에 증광시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고 말았다.

그 다음해에 형이자 스승이기도 했던 둘째 형 잠이 원세자의 생모인 장희빈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모진 형벌 끈에 옥에서

죽게 되었다. 그토록 사모하고 따르던 형의 죽음을 본 그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듯하다. 이익은 그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 나아가 벼슬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고향 광주에서 칩거하며 살았다. 고향 마을에는 '성호'라는 호수라 있었는데

그의 호는 거기에서 따온 것이다. 이익은 선대에서 물려받은 전장(토지와 집)

'성호장'이라 이름짓고 그 곳에서 재야의 선비로서 일생을 은둔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아들의 죽음과 가산의 몰락으로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을 만큼 극심한 생활고로 고생을 하게 된다.

정치적 불우함과 경제적 곤궁 속에서 일생을 보낸 이익은 당시의 사회와 사상계에

대한 깊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잘못된 사회 현실을 개혁한 방도를 찾으며

고뇌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농민들과 함께 산 그는 농민들이 일년

내내 열심히 일하여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현실을 보고 마음아파하였다.

그 마음이 얼마나 절실하였던지 육체 노동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신을 '좀벌레'

비유할 만큼 심하게 자책할 정도였다.

또 처음부터 벼슬에 듯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가정에 미친 거듭된 당쟁의 화가

그에게 좌절과 실의를 안겨 주었고 그만큼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익이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성호사설에서 정치 분야를 다루면서 당쟁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학문의 출발점으로서

그로 하여금 실학의 길을 걷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이룬다.

 

2. 그의 시대와 문제 의식

 

이익이 살던 시대는 양란을 전후한 당쟁이 치열하던 때다. 당쟁에서는 옳은 사람도

없고 그른 사람도 없었다. 특히 양란 후에 조정에서 권력 다툼이 더욱 치열해졌는데

효종, 숙종 그리고 경종 연간이 가장 심하였다. 당시에 조정에서는 예송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논쟁을 대표하던 인물들은 남인의 거두인 허목(1595-1689)과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1607-1689)이었는데 나이는 허목이 많고 벼슬은 송시열이 높았다.

효종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아 상복을 입는 기한을 놓고 논쟁을 벌인 것이 논쟁의

발단이었다.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라 소현 세자의 뒤를 이었고 당시의 대비가 생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례 법도를 정하는 데에 논란의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어쨌던 조정

전체를 둘로 가를 만큼 심각하게 진행된 이 논쟁은 발전을 위한 이론 투쟁이거나

의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단지 서로 명분을 앞세워 당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고 하는 권력 다툼에 불과하였다. 그 뒤에 효종의 아내인 인선 왕후가 죽자

또다시 상복을 입는 문제로 논란이 벌여졌는데 이것 역시 앞의 싸움과 별 차이 없이

권력 다툼의 양상을 띠며 소모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훗날 숙종 때에 장희빈과 인현

왕후의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는데 이 경우에도 두 당파가 의견을 달리하여 왕비를

들이고 내쫓는 일을 정치 싸움에 악용하였다.

남인과 노론의 대립은 허목과 송시열이 죽은 뒤에도 해소되지 않았다. 남인들은

허목을 강직하고 시비를 옳게 가리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높였고 노론들은 송시열을

성인의 지위로 추어올렸다. 그러면서 서로 혼인은 물론 상종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의식이나 의복까지도 달리하면서 서로를 구분하려 들었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쓰면서 그들의 화해를 도모했지만 묵은 원한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익은 이렇게 실질적인 경세에는 힘쓰지 않고 헛된 명분 싸움에만

열중하던 당시의 사상계를 매섭게 비판하였다.

정치권에서 도리에 맞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동안 농민들은 전란 후의 복구 사업에

힘쓰고 있었다. 도학자들이 지배 질서의 유지와 안정을 위한 소극적인 경세에 힘을

쓰고 있는 동안에 농업 생산에서는 커다란 변화와 진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황폐화한 농지가 개간되고 향촌 질서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그리고 이앙법이

보급됨에 따라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고 생산력 발전에 발맞추어 화폐가

유통되게 되었다.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화폐가 활발하게 유통됨에 따라 농촌 사회는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앙법의 실시로 필요한 인력은 종전보다 80%나 감소한 반면에

소출은 두 배로 늘었는데 이와 같은 필요 인력의 감소는 농민층의 분화를 촉진하였다.

대지주들은 자영 농민이나 중소 지주로부터 토지를 매수하여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몰려들어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거리의 유랑배가 되었다. 이른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이익은 이러한 실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부자의 땅은 동서남북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고 가난한 자는 송곡 꽂을 땅도 없다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점점 더 가난해진다(균전론)

 

우리 마을에서는 작년에 몇 집이 파산하였는데 올해도 몇 집이 파산하였다.

파산자들은 땅이 많던 자는 줄어들고 땅이 적은 자는 땅이 없게 되었다. 땅이 이미

없으니 어찌 파산하지 않겠는가(성호전서)

 

농민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현상은 일차적으로는 아앙법의 실시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그러한 경향을 한층 가속한 것은 화폐와 상품의 유통이었다. 이익은 상품

경제의 발전이 당시의 사람들을 영리 추구의 길로 내몰고 공동체 의식을 각박하게

하여 농민의 농촌 이탈을 촉진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상품과 화폐의 유통이 마을의

풍속을 망치고 생업에 전념할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사치 풍조를 조장하고 나쁜 돈을

돌게 하며 고리 대금업 등을 부추겨 농민들을 파산으로 몰아가는 직접적인 요인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그 후의 실학자들 특히 북학파 학자들의 사고 방식과는 매우 다른

점이 많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에서 농민을 구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던 그의

문제 의식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가 경제 사상을 펼 때

근본으로 삼은 것은 1. 농사에 힘쓰는 것, 2. 절약하고 검소할 것, 3. 이익을

추구하는 간사한 짓을 막는 것이었다. 이익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백성들의

생업 바로 농업이었기 때문이다.

 

3. 당대의 사상계에 대한 비판

 

이익은 먼저 당시의 경직되고 관념에 치우친 학풍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백성들의 실질적인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쓸데없는 명분

싸움에만 몰두하던 당시의 정치가와 학자들이 이익의 눈에는 한심하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먼저 주자의 말만 외면서 다른 견해들을 사문 난적이라고

몰아붙이던 도학파의 권위주의적 경직성을 이렇게 비판하였다.

 

한 글자라도 의심을 두면 망녕되다고 하고, 비교하여 검토하면 죄라고 한다.

주자의 글에 대해서도 이러하니 옛 경전에 대해서랴 이 때문에 우리 나라의

학문이 우둔함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성호사설)

 

이익은 그 시대 사상계의 폐쇄성을 이렇게 비판한 다음 "의심이 적으면 적게

나아가고, 의심이 크면 크게 나아간다"는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주자의 학문을

주자의 본 뜻과 어긋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의심할 줄 모르고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경전을 설명하면서 세상의 일에 쓰지 않는다면 이는 단지 읽을

줄 아는 것일 뿐이다"고 하여 경전의 본래 목적이 한 마디로 '치용' 즉 실용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이익의 학문관이 실학 정신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익에게는 그의 아버지가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청나라 황제에게서 선물받은

은으로 사온 수천 권의 책이 있었다. 그는 이 책을 공부함으로써 옛 경전과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또한 그는 이퇴계와 이율곡 그리고 유형원의 학문에도

정통하였다. 이익은 퇴계와 문인들의 언행록인 "이자수어"('이자'는 퇴계를 높인

말이고 '수어'는 순수한 말이라는 뜻이다)라는 책을 저술할 정도로 성리학적

인식면에서 퇴계를 존경하였다. 그리고 율곡이 경장론을 통하여 사회적 폐단을

개혁하려고 했던 것은 명쾌하고 절실한 것이라면서 그를 조선 왕조가 세워진 이래

시무를 인식하는데 가장 뛰어났던 인물로 인정하였다. 또한 유형원이 율곡의 뒤를

이어 철저한 개혁의 방안을 제시한 것은 뒷날에도 반드시 법을 삼고 영원히 스승으로

삼을 만한 것이라고 칭송함으로써 경세론 면에서 율곡과 유형원을 계승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사상이 지닌 폭과 객관적 합리성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익의 사고 방식에서 우리는 중세적 보편주의에서 벗어나 개체를 중심으로

사고하려는 근대적 시민 의식이 싹트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잘하는 가운데

못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 가운데에도 잘하는 것이 있다"고 하여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다는 식의 흑백 논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모든 현상적

존재가 '자기 나름의 존재 근거와 운행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개체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모범을 보인 것이다.

결국, 그의 개혁 사상은 유학을 근간으로 하여 절실한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이런 까닭에 그의 학문을 경세 치용의 학문이라고 한다.

 

4. 민본주의적 개혁 사상

농본주의

 

이익은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혁신적인 개혁안을 많이 내 놓았다.

그의 개혁안은 관리 제도, 토지 제도, 조세 제도, 군사 제도 등 사회 제도의 기본

형식들을 두루 문제삼는 것인데 단순한 제안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모순과 개혁의

조건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민생 보호에 도움이 될 구체적인 방법들을

모색하는 특징을 보였다.

먼저 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농업을 들었다. 그는 "재물은 토지에서 나오고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토지와 사람의 노력이 아니면 근거할 곳이 없다"

강조하면서 농업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자신을 좀벌레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성품이 글이나 좋아하여 하루종일 읊어 대지만 실오라기 낟알 하나 생산하지

못한다. 어찌 이른바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라 하지 않겠는가(식소)

 

일하지 않는 자는 적게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에서 한 말인데 이익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비들도 생업에 종사하여야 한다는 '사농 합일'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농업을 근본으로 여겨 중시했던 그였기에 상업은 '말단의 이익'이라 하여

억제하여 할 정도였다.

 

사회 정치 경제 개혁안

 

이러한 농본주의에 기초하여 이익은 첫째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하였다.

이를 균전제라고 한다. 이익은 균전제 실시를 밑받침할 구체적인 방안으로 농가마다

일정한 면적의 영업전(영원히 경작할 수 있는 토지)을 주어 매매할 수 없도록 하는

영업전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농민들이 지주에게 토지를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익은 이어서 신분 제도의 폐단을 문제삼았다. 그는 서자들을 차별하여 사회

진출을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노비들이 양반들 시중 드는 일에

얽매여 있는 것은 비인간적일 뿐 아니라 농사를 지을 수 없게 하므로 국력의

낭비라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서얼의 차별을 철폐하고 노비들도 점차로 속량하여

과거에 응할 수 있도록 하며 양반들의 노비 사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익이 정치면에서 중심 문제로 삼은 것은 당쟁의 폐단이었다. 그는 당쟁의 원인이

수가 한정된 벼슬 자리를 놓고 많은 선비들이 투쟁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과거 제도를 현실에 맞게 개혁해야 하고 모든 선비가 과거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생산 활동에 종사하여 벼슬을 하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개혁안은 신분의 차별을 줄이고 균등한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동요하는 계급

질서를 현실에 맞게 정비하고자 한 것이고 그럼으로써 민생을 안정시키고 일반

백성이 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점에서

그의 사상은 근대적 의식에 접근한 것이라 하겠다.

 

5. 서학의 수용과 자주적 역사 의식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통하여 서양 사상을 소개한 지 100여 년 만인 이익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학이 본격적인 검토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이익은 서양의 자연

과학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긍정함으로써 중국의 고전적 자연 과학 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천문학에서는 서양이 첫째이고 그 다음이

아라비아이며 중국이 가장 뒤떨어져 있음을 인정하였다. 또한 천문학이나 수학, 과학

등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더욱 정교해지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계속 발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과학 지식의 진보를 강조하였다.

서학에 대한 이익의 이러한 긍정적인 입장은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전기를 제공하였다. 그는 서학을 대표하던 천주교 교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예리한 평가를 내림으로써 서학 인식의 수준과 입장을 밝혀 주었다.

즉 천주교의 천당 지옥설이나 예수 부활설 등에 대해서는 황당한 설이라 하여

비판하면서도 그 윤리적인 측면이 유교와 비슷한 점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다. 결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그의 면모가

이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학에 대한 관심과 서양 자연 과학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은 이익의 역사 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서양 문물을 접함으로써 인식의 폭을 넓혀 중국 중심의 낡은

세계관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안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는 종래의

주관적이고 의리와 시비를 가리는 것을 위주로 하던 역사 인식의 태도를 버리고

객관적이고 비판적이며 실증적인 태도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익은 그 시대 사람들의 역사 의식을 이렇게

비판한다.

 

지금 사람들은 우리 나라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우리 나라의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

심지어 '동국통감'을 누가 읽겠느냐고 할 정도이다. 우리 나라는 독자적인 나라로

그 규모와 제도가 중국과 다르다. 이것이 더욱 우리의 역사를 세워 밝혀야 하는

이유이다(성호전서)

 

이처럼 우리 역사의 독자성과 자주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한 이익의 정신을 그의

수제자 안정복이 계승하여 '동사강목'을 저술하였다.

 

6. 그의 제자들

 

이익은 학문과 사상뿐 아니라 생활에서도 모범을 보였다.

연이은 참화 탓에 그의 집안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익은 모진 형벌 끝에

옥에서 숨진 둘째 형 잠에게 후사가 없자 양자를 들여 대를 이어 주었고 고아가 된

조카들을 모두 거두어 직접 길렀다. 또 과부가 된 누이를 어머니 곁에서 살도록 해

주고 집안의 머슴이나 종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직접 종사짓지 않는 것을 늘 한탄하던 그는 조금씩 손수 농사를 짓기도 하였으며

늘 농민들의 아픔을 잊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익에게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맹휴라는 외아들이 있었다. 그가 어느

고을의 원으로 근무할 때에 가난으로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빈궁한 아버지를 위하여

식량을 보내 준 일이 있었다. 이익은 이를 내치면서 이런 편지를 보냈다.

 

대체로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은 열이면 아홉이 비리인데 이런 것으로

아버지를 공양하는 것이 옳겠느냐 나는 내 밭을 일구어 주림을 구하고 추위를 면할

만하니 역겨운 고기는 마땅히 게워 낼 것이다(가상)

 

평생을 고향에서 농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학문에 열중한 그는 인근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러자 이웃 고을들에서 제자 되기를 청하여 찾아오는 이가 많았고

그의 문하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어 학해를 이룰 정도였다. 안정복,

권철신, 신후담, 이가환(이익의 종손), 이승훈(정약용의 매부) 등이 손꼽을 만한

제자들이다. 그들은 스승의 뜻을 이어 실학 사상의 확산에 힘쓰게 된다.

안정복은 스승을 이렇게 칭송하였다

 

굳세고 의연하여 독실한 것은 선생의 뜻이요 정대하고 광명한 것은 선생의 덕이다.

선생의 학문은 정밀하여 깊으면서도 넓고 광활하다.

 

이익은 정통 유학자로 출발하여 백성을 혈육처럼 아끼고 백성과 함께 고민하고

호흡하면서 실학 정신을 키워 간 진지한 학자였다. 그는 는 현실을 개선하는 일에

앞장섰고 스스로 실천하기에 힘썼다. 그의 인간관 직업관 신분관 들은 그 바탕에

인간에 대한 차별 없는 애정이 깔려 있어 근대 사상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그의 학문은 훗날 정약용에게까지 이어져 커다란 진전을 이루게 된다.

 

 

허위와 기만을 고발한 이용 후생의 기수

연암 박지원

 

엄행수는 똥지게를 져서 먹고 산다. 그래서 지극히

불결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가 발벌이하는 방법은

아름답다. 그의 몸은 지극히 비루하고 더러운 곳에 처해

있지만 그 의를 지키는 것은 지고하다. 그 뜻을 잘

생각해 보면 고관들이라도 모두 이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깨끗한 자에게 불결함이 있고 더러운 자에게 깨끗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예덕선생전)

 

1. 까막눈이 새신랑

 

1752(영조 28), 전주 이씨인 이보천의 집안이 시끌벅적하였다. 열여섯 살

연암 박지원과 이보천의 딸이 혼례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로라 하던 선비

가문인지라 이씨 집안의 연암 또래의 글 잘하는 젊은 선비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장안의 명문가 출신인 연암이 얼마나 똑똑한지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장가든 첫날 신랑 방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새신랑과 점잖게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였고 새신랑인 연암은 등줄기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주앉은 이씨 집안의

젊은이들도 아직 파악되지 않은 신랑의 실력 때문에 함부로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첫날은 넘어갔다.

둘쨋날이었다. 모여든 젊은이들은 새신랑과 제법 낯이 익었다고 은근히 농부터

걸어오더니 슬슬 장난을 치기 시작하였다. 신랑을 시험해 보려고 벼르고 있던터라

장난에도 뼈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장난이래야 주로 글짓기 같은 것이었다.

이씨 집 젊은이들은 먼저 "'맹자'의 무슨 책에 나오는 무슨 구절은 그 뜻이 뭔가"

하고 거창하게 물었다. 연암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연암이

아는 글자라고는 자기 이름자와 제 집 대문 앞에 붙여 놓은 '입춘대길'이라는

네 글자뿐이기 때문이었다. 연암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답답해진 이씨네 젊음이들은 은근히 다그쳤다.

"너무 쉽다는 거요?"

"다 알면서 시치미를 떼는 거요?"

딱하게도 새신랑의 무식은 기어이 들통이 나고 말았다. 이씨네 집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고 새색시도 그 소리를 듣고 기가 막혔다. 연암은 장가든 둘쨋날부터

처가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연암이 그 나이에 이르도록 공부하지 않은 것은 할아버지 박필균의 생각 때문이었다

한다. 할어버지는 정2품의 벼슬인 지돈녕부사(왕실의 친척을 보살피는 벼슬)

지냈는데 당시에 박씨 집안은 한양 서대문 일대에서 소문난 양반으로 그 세도가

아주 당당헤 동네의 개들도 함부로 짖지 못하는 명문이었다. 연암은 어린 시절에 아주

짖궂은 장난으로 동네에 악명을 날려 어머니의 염려와 동네의 원성을 샀지만

할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암을 감쌌다. 그 까닭은 할아버지의 아들 즉 연암의

아버지 사유가 아주 젊은 나이(연암이 두 살 때)에 병으로 죽었다는 데 있었다.

할아버니지는 손자가 공부 때문에 건강을 해칠까봐 그저 열심히 놀고 건강하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당시에 홍문관 교리로 있던 연암의 처삼촌 이양천은 자기 집안에 까막눈이 신랑으로

온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조카사위인 연암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맨

처음 배운 것은 '맹자'였다.

연암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양원은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연암은 영민하고

총명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지경이었다. 한 번 배운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고

노력도 남달랐다. 연암은 두문 불출하고 3년 동안 사서 삼경, 제자 백가 등 다방면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공부할수록 점점 딴사람이 되어 갔다. 그러나 그는 그런

학문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맹자가 이렇게 하였으니 나도 이렇게 한다'

식의 사람이 아니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연암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 준 처삼촌 이양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연암은 마치 부친상을 당한 듯 슬퍼하며 손수 제문을 지어

애도하였다. 이 제문이 그가 지은 최초의 글이었다.

 

2. 출사를 포기하다

 

연암의 학문과 문장 실력이 점점 높아지자 집안에서는 큰 벼슬을 할 인물이라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과거 볼 생각을 통 하지 않았다. 모두

안타까워했으나 연암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선비들이 모두 과거에만 미쳐 있으니 어찌 나랏일이 제대로 되겠느냐"

비판하였고, '제 한 몸과 명예를 위하여 과거를 보는 것은 학문의 목표일 수 없고

학문이란 나 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해 쓰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당시에는 권력을 놓고 당쟁이 치열하였고 선비들은 다툼을 정당화할 명분을

세우기에 열심이었다. 병자 호란 이후에는 만주족인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를 배척하고

의리를 세우자는 '배청 의리론'이 선비들이 내세우는 주된 명분이었고 심지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도 청나라 문물을 수용하자는 견해를 펴기는 커녕

'중국이 오랑캐의 땅이 되어 볼 것이 없다'고 해야 뜻이 높은 선비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조선 성리학이 이미 내리막길에 들어서 지배 이념다운 면모를 상실한 마당에

새롭게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는 못하면서 허울 좋은 명분만

내세우는 선비들을 박지원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가 딛고 있는 땅덩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밤낮이 왜 생기는지 까맣게 모르면서도 배우기를 거부하고 점잔만

빼면서 쓸데없는 권력 싸움만 일삼으니 참으로 큰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던 연암에게 과거를 보라는 것은 쇠귀에 경 읽는

꼴이었다. 아무리 흥분하여 설득하려 해도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서른넷에 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서 친지들의 강권으로 회시(초시보다 큰

시험)장에 들어갔을 때에도 일부러 시험지를 내지 않고 나왔다 한다. 겉모습도

가관이었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옷고름은 풀어 헤치고 깃은 아무렇게나 뒤집어 쓰고

다녔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광달하기는 장자 같고, 공손하지 않기는 유하혜 같고, 술마시기는 유령 같고,

저술하기는 양웅 같고, 스스로 견주기는 제갈량 같다.

 

결국 그는 집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나이 사십이 넘도록 벼슬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그는 끼니조차 간신히 이어

나가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살림이 궁하다 보니 아내의 바가지는 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점에서 연암의 '허생전'에 나오는 주인공 허생은 작가 자신의 모습을

슬쩍 비춘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연암은 가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다.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같은 이들은 연암의 집 근처에 살면서 늘 함께 토론하며

고금의 역사를 논하고 당대의 문장에 관하여 평하였다. 모두가 예리한 눈으로

비평하였고 거리낌없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연암이 41세 되던 해에 고난이 닥쳤다. 정조 시대의 권신이던

세도가 홍국영이 벼슬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는 박지원과 그의 일파를 정조를

반대하는 세력이라 하여 벽파로 몰아 탄압하였다. 이에 연암은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피하여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그의 호 연암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때 연암의 손자뻘 되는 박홍수가 벽파로 몰린 억울함과 원망을 담은

편지를 보내 왔는데 연암은 이에 "세상의 힘없는 자는 천만 가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그 억울함을 풀어 볼 길이 없으니 참으로 한심하지만 힘없는 자의

고난과 지조도 열사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니 가난한 선비에게도 지키는 것이 있다"

답장으로 그의 심경을 나타냈다. 세상을 향한 남다른 뜻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슬픔을 토로한 것이다.

어느 날 즐기던 술도 떨어져 며칠 동안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에 드러누워

세상에 관해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의 가장 친한 벗 중의 한 사람인 홍대용이

찾아왔다.

 

3. 홍대용을 만나다

 

갈릴레이가 지구는 돌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일단 화형을 면하고 나서 종교 재판소를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린 것은 1633년이었다. 그로부터 백 년쯤 지난

후 우리 나라에서도 지구가 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왔으니 그가 바로 북학파의

선두인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

홍대용은 어린 시절에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면서 그 첫구절인 '천지현황'

훈장이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고 해석하자

"선생님, 하늘이 왜 검습니까. 파랗지요. 푸른 하늘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따지고 또 '달은 차기도 하고 기울기도 한다'는 대목에서는

"선생님 달은 왜 초승이면 작아지고 보름이면 커집니까?"

"선생님 구름은 왜 생깁니까?"

하고 물어 스승을 쩔쩔매게 하였는데 훈장은 그 질문들에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였다고 한다.

홍대용은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자연 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천하의 큰 바탕인

농사가 바로 되게 하려면 수학과 천문학의 연구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늘의

신비만 캘 수 있다면 홍수나 가뭄을 만나 일 년 농사를 망칠 염려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농민이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의 연구 과제였다.

그런 생각을 가진 홍대용은 청나라를 통하여 수입된 서양의 수학과 천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동지사(해마다 동짓날에 중국에

보내던 사신)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직접 가서 그 문물을 접하고 무척이나 놀랐다.

홍대용은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길로 몇 권의 책에 술까지 들고 연암을 찾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매일 보고들은 것을 적은 일기를 보여 주었다. 연암은 이전부터

선배격인 홍대용과 사궈어 오면서 지구가 자전한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천문학적

지식을 많이 배우게 되었고 나아가 우주 만물이 이루어진 과학적 원리를 깨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홍대용의 이야기를 들은 연암의 마음에는

청나라에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불같이 일었다. 그 곳에 가 직접 서양 문물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벼슬도 없는 연암이 청나라에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뜻밖에도 기회가 왔다. 그의 8촌 형인 박명원이 청나라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가게 된 것이다. 연암은 달려가 데려가 주기를 청하여 사신들을

호위하는 졸개 군사가 되었다. 정조 4(1780) 연암은 한양을 출발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4. 그의 사상

 

연암은 청나라에 다녀오는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소상하게 일기 형식으로

적었는데 이 26편의 일기가 바로 불후의 명저인 '열하일기'이다. 열하는 중국의

지명인데 청나라 황제가 별궁이 있던 열하 지방에 가 있었기 때문에 사신 일행이

북경에서 다시 열하로 간 데서 말미암은 이름이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었다. 서양의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백성들의 살림을 살찌우는 청나라의 정치 제도와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학문을 일으키는 방법에 대하여 글쓴이의 새로운 의견을 더하여 적어 놓은 것이다.

글쓴이인 연암의 문제 의식과 그가 생각하던 사회 개혁의 방안을 담고 있어 그의

사상을 알려주는 혁신적인 저술이다. 연암은 이 책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청나라 배척

풍조, 소중화 의식, 북벌론 등의 허구성을 꼬집고 지배 계층의 허상을 풍자하면서

그런 허위 의식들을 버리고 청나라를 보고 배워야 할 것은 배우자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열하일기'에는 연암 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 그러면 이제 그의

사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혁신적 문제 의식

 

연암(1737-1805)은 영, 정조 시대에 주로 활약하였는데 이 시기는 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라고 일컬어진다. 실학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두 왕이 탕평책을 펴

온건하게 통치한 에 힘업어 당쟁의 열기가 조금 수그러들고 비교적 중흥의 움직임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이면에서 봉건 사회의 모순이 날로 더해 가고

있었다.

토지 제도가 문란해져 대토지 소유가 점점 확대되었고 화폐와 상품의 유통으로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늘어난 세금과 공납 탓에 영세한 자작농과

소작농들은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생활고를 못 이겨 고향을 버리고 유리 걸식하거나 빚에 몰려 노비로 전락하는

농민이 부지기수였다. 신분의 굴레를 벗기 위한 노비들의 도주는 끝이 없었고 추적을

피하여 산이나 섬으로 숨어든 노비들이 무리를 지어 화적으로 둔갑하기 일쑤였다.

또한 온갖 정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양반 지배층에 대한 몰락 양반들의 불만도

더욱 증대하였다.

수가 크게 늘어난 서얼들도 신분의 족쇄를 풀기 위하여 다양한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라 밖에서는 서양 세력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렇듯 안팎으로 격동이 예고되던 상황에서도 지배 계층은 여전히 공리 공론을

일삼을 뿐 사회 변동을 감당할 만한 역량을 전혀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연암은 위기에 처한 현실을 날카롭게 꿰뚫어보았으며 이미 곪을 대로 곪은 봉건

모순에 대한 대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그 실행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세상을 향한 예봉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한 연암은 수술 방법의 하나로 문학을 택하였고 실학에 근거를

둔 문학을 주장하고 또 실행에 옮겼다.

연암은 세상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인정하는

가치관을 격파하고 자기의 주장을 펴는 반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글을 썼다.

그에게는 글 쓰는 것 자체가 반란이었다. 반란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장군을

내세워 사졸을 지휘하고 필요한 전술을 두루 동원하여 싸워야 하듯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글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반란을 일으켜 세상을

뒤엎으려는 사람처럼 세심하게 준비하였고 작전을 구상하면서 글을 썼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면 군사의 일을 잘 알 것이다. 글자는 비유하자면 사졸이고

뜻은 비유하자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고사라고 하는 것은 전장이며

성루이다. 글자를 묵어서 구절을 만들고 문장을 이루는 것은 대오의 행진과 같으며

운자를 맞추고 수식을 하는 것은 북을 치고 깃발을 올리는 것과 같다(연암집)

 

연암은 글자는 사졸이요 뜻은 장수라고 한다. 글자는 겉으로 나타난 말이고 뜻은

주제를 가리키는데 제대로 된 문학이라면 두 가지를 다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연암은 장수가 적군을 격파하기 위하여 사졸을 지휘하듯이 주제란 반대되는 주장을

격파하기 위해서 설정되어야 한다고 한다. 공격 목표가 없는 문학은 공허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연암의 공격 목표는 무엇인가.

그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옛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구태 의연한 학문 태도였다.

세상이 변하면 문장도 의식도 제도도 달라져야 마땅한데 권위주의에 젖어 현실의

변화를 보지 못하고 옛것만을 숭상하고 모방하려는 당대의 학풍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모방은 생명이 없고 창조에만 생명이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존재의 본질이 그러하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연암은 이것을 거울에 비친 모습이 마치

제 모습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좌우가 뒤바뀐 것이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정상이 아니라 기형이고 생명이 있는 것을 생명이 없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연암은 또 "글자는 같아도 글은 독자적이어야 한다"면서 한문을 사용한다 하더라고

그 내용은 우리의 것을 담은 족자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연암이 다음으로 공격한 것은 위기에 처한 현실을 도외시하고 의리론만 내세우던

지배층의 태도였다. 단순히 오랑캐의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을 침략한

적국이기 때문에 청나라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실학자에게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 점은 연암도 마찬가지여서 "청음 선생(김상헌 병자호란 때 남한

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끝까지 목숨을 걸고 반대하다 청나라로 끌려간

주전파)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머리털이 서고 맥이 뛴다"고 토로한 정도였다.

그러나 연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흙장난을 하는 아이에게도

물을 수 있고 하인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한 글자라도 더 알면 그에게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만 못함을 부끄러워하면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곡 고루하고 무식한 지경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북학의서)

 

청나라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나은 것은 폭넓게 배워야 한다는 것인에 실제로

연암은 청나라를 직접 가 보고 조금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에 가서 보니 "대들보가 높고 지붕은 아주 원칠하며 문은 가지런하고 거리는

쭉 뻗어서 먹줄로 금을 그은 것 같고 수없이 많은 수레가 오고가 살아가는 모습이

윤택해 보여 횽대용이 일찍이 그들의 생활 규모가 크고 마음씀씀이는 세밀하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고 놀라움을 표하면서 "변방인데도 이러하니 나라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훌륭하리라 생각되어 어서 우리 나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온 마음이

화끈해진다"고 탄식한다. 그러면서 연암은 사신으로 간 조선 사람들의 태도를 다섯

가지 점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곧 자신의 문벌을 뽐내는 것,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 상투 머리와 의관을 뽐내는 것, 중국에 문장이 없다고 헐뜯는 것,

청나라 조정에 복종하는 한인들을 보고 의로운 선비가 없다고 개탄하는 것이 그것인데

연암은 그러한 태도에서 청나라에 대한 반감에 사로잡혀 현실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보지 못하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연암은 청나라 사람과 이야기할 때에는 먼저 청나라 조정을 좋게 말하여 그들을

안심시키고 공손하게 배우기를 청하여 마음 놓고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심정과 실정을 파악해야 한다면서 스스로도 길을 가던 농부와도 필담을 나누어

그들의 농사 방법을 배울 정도로 세밀하게 그들을 관찰하였다. 그는 청나라 민가들이

외양간부터 거름더미까지 법도 있게 정돈된 모습에서 이용의 실제를 발견하였고

그리하여 "이용을 이룬 후에야 후생을 할 수 있고 후생을 한 후에야 덕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이용 후생(사물을 잘 사용하여 싦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의 실용주의

사상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농업 기술을 개발하고 상품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며 공인들에게 혜택을 주어

공업을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선비의 과제라고 주장하면서 그 일들을 직접 실천하게

된다.

현암의 세 번째 공격 목표는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키는 대토지 소유제였다.

한번 대토지를 소유하고 나면 계속해서 더 많은 토지를 차지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인데 연암은 그 대안으로서 토지 제도를 바꾸어 토지 소유에 한도를 정하고

한도를 넘는 토지는 몰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토지 소유를 제한해야 토지

겸병을 막고 토지 겸병을 막은 후에야 산업이 고르게 발달하여 농민이 잘살 수 있게

되며 그런 후에야 농민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독접적인 특권을

누리던 벼슬아치들과 양반 지배층이 그러한 개혁안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였고 하루도

허리 펼 날 없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백성의 분노가 폭발하여 민란의 물결이 곧 조선

전역을 휩쓸게 된다.

연암이 네 번째로 공격한 것은 특권 지배층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였다. 그는 먼저

서얼의 차별을 논하면서 "모든 일에 부계를 중시하면서 오직 서얼에서만은 모계

위주로 따지니 모순이다", "크게 잘못된 것 중 이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비판하면서 기회 균등을 주장하였다.

연암은 단지 서얼 문제에 그치지 않고 양반 지배층의 잘못된 점들을 본격적으로

폭로하였다. 신분적 특권에 기대어 힘 안 들이고 부와 사치를 누리는 그들의 생활

양식과 현실을 외면하는 허위 의식에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 것이다.

 

문학을 통한 사회 고발

 

연암의 문학은 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대결과 반항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연암이 선택한 것은 문학 중에서도 시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이며 그 점에서 놀이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기존의

관념과 정면으로 대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연암의 소설은 놀이처럼 보여도 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격해야 할 세계의 허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무기였다. 연암은 그 무기를 이용하여 허위에 사로잡힌 무능한 지배 권력층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허생전'을 보면 당시에 사대부들이 내세우던 북벌론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영 대장 이완이 효종의 분부로 청나라를 칠 북벌론의 계획을 짜느라 고심하다가

허생의 소문을 듣고 혹시 묘책이 있을까 하여 찾아왔다. 그가 용건을 말하자 허생은

물었다.

"그대는 진실로 청나라를 치고 싶어서 군사를 기르는가?"

이완이 그렇다고 답하지 허생은 비웃는 얼굴로

"그렇다면 청나라를 미리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적을 알지도 못하면서 군사만

기르면 무얼 하겠는가?" 하며 적을 완전히 알고 그들을 이길 힘을 기르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이완이 이에 대하여 한 가지도 실천할 수 없다고 하자 허생은

그렇다면 북벌은 하나 마나이며 공연히 청나라를 친다는 구실로 백성들의 살림살이만

축낼 뿐이라고 크게 호통을 친다.

'예덕선생전'의 주인공은 엄행수라는 똥치는 이다. 연암은 이 작품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무시하고 구속하는 잘못된 관념이 판치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

엄행수는 덕을 지닌 이로 성인이 될 만하다 하여 예덕 선생이라고 칭송받는다.

'민옹전'에서는 무관 출신의 재미있는 기인이 등장한다. 그는 신선은 세상을

싫어하는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세상을 싫어하니 곧 가난한 사람이 신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매일 먹는 밥이 불사약이라고 한다. 이는 터무니없으면서도

일면으로는 진실이 담긴 말이다. 신선이나 불사약 같은 허황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의 생활이야말로 진실한 것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의리나 체면이 아니라 밥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만옹은 또 양반을 놀고

먹는 메뚜기에 비유하는데 이것은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 부귀를 누리는 사람을

풍자한 것이다.

'호질'에서는 열녀문을 받을 정도로 정숙한 과부 동리자와 간통을 하다가 그

아들들에게 들켜 학식 높고 점잖기로 소문난 북곽 선생이 황급히 도망치다가

오줌통에 빠졌는데 나오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자기들끼리

회의할 때 사람 고기 중에서 선비 고기가 제일 맛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호랑이는 더러워서 잡아먹지 않겠다고 꾸짖으며 바람처럼 사라진다.

간신히 살아난 북곽 선생은 지나가는 농부를 보고 "에헴, 새벽 공기를 마시려고 산보

나왔지"라고 말한다. 양반들의 위선을 풍자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양반전',

'김신선전', '열녀함양박씨전', '마장전', '광문자전' 등이 있는데 모두 하층민의

문제를 다루면서 양반 지배층의 위선을 폭로하고 신분 제도의 철폐를 우회적으로

주장하며 '선비'의 소임이 신분제적 특권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을 잘 살 수

있도록 이끄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5. 문체 반정

 

연암이 열하일기를 내놓자 그 글을 베끼려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었다.

한양에 있는 선비와 벼슬아치들치고 그것을 읽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많은 책을 읽고 또 많은 책을 지었다는 정조도 그것을

읽었다. 게다가 연암의 문장은 당시에 유행하던 고문을 본볻은 것이 아니라 새롭고

기예한 문체였기 때문에 젊은 선비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또 많은 선비들의 문장

표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대체로 그의 신랄한 풍자와 비평을 비난하였고 그의 문장이

점잖은 선비의 글이 아니라 이야기책에나 쓰는 비속하고 천박한 글이라고

매도하였다. 심지어 그의 집안에서도 집안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하여 곱지 않게

보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연암이 집안의 손자뻘 되는 박남수의 집에서 규장각에서 벼슬을 하던 남공철과

박제가 이덕무 등의 후배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모두 얼큰히 취해 있었고

밖에는 휘영청 달이 밝았다. 연암은 '열하일기'를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박제가와 이덕무는 귀를 기울이며 즐거운 표정이었으나 박남수는 불쾌한 표정으로

연암에게 대들었다.

"형님의 글은 비록 훌륭하긴 하지만 바른 글이 못되고 패관 잡기의 투라 이

'열하일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글이 모두 저속한 이야기체의 글이 될까 걱정입니다"

그러나 연암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읽어 내렸다. 박남수는 더욱 못마땅했던지

벌떡 일어나 '열하일기'에 촛불을 당겼다. 그러자 놀란 남공철이 급히 박남수의 손을

낚아채었다. 그래서 '열하일기'는 촛불의 재로 화하는 위기를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열하일기'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자 정조가 1792년에 이런 글을 내렸다.

 

요즘 선비들의 문장이 점잖지 못하고 나빠진 것은 그 원인이 박지원에게 있다.

'열하일기'는 과인도 자세히 읽어 보았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읽히면서 선비들의

글짓는 버릇이 나빠졌으니 모든 것은 박지원에게 그 책임이 있다. 그 타락한 문체를

버리고 고문대로 순정한 글을 지어 과인에게 바치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문체 반정이라는 것인데 그 뜻은 문체를 바로잡는다는 것이다. 그런

명을 받은 연암은 "벼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척해서 궁한 슬픔과 무료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포 자기에 빠져서 문장으로 회롱을 했고, 잡박하고 내용 없는

말을 해서 배우과 같이 웃음거리가 되었다"면서 "성질이 게으르고 산만하여 행동을

다스리는 데 서툴러서 사소한 재주를 발휘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잘못되게

하고 다른 사람도 잘못되게 하였다"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말은 스스로를 낮추고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은

연암이 자기의 문학을 옹호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한 내심의 확신과는

반대되는 번어적이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문장으로 세상을 희롱하는 것은

낙척해서 불우해진 사람이 상승의 염원을 버리고 자기에게 적대적인 사회를 풍자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작전상 후퇴도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인 풍자

의지를 보인 것이다. 말하자면 자포 자기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풍바하면서 자신마저

풍자하는 비판 정신을 보인 것이다.

 

6. 이용 후생의 기수

 

연암은 오십이 넘어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가 한 벼슬은 현감, 군수, 부사

등이었는데 주로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관이었다.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실제로 생활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자기 주장을 실천에 옮겼다. 농민들과 함께 형편이

나아지도록 하기 위해 벼농사뿐 아니라 누에치기 나무가꾸기 등의 사업을 벌이고

연구하였다. 그는 그렇게 고을 일을 보면서 실제로 얻은 경험에 기초하여 기후와

땅의 성질에 따라 농사짓는 방법을 적은 '과농소초'를 지었다. 연암은 이 책에서

"농민들이 하는 말로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소금 값도 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그 으뜸가는 원인은 토지 겸병이니 토지 제도를 개혁사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농사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면서 국가 정책으로 밀고 나갈

것을 주장하였다.

경세 치용을 주장한 성호 학파의 학자들은 농업을 근본으로 삼는 부국강병과 민생의

개선을 내세우고 그를 위한 방법으로 검소와 절약을 들었다. 심지어 이익은 일하지

않는 자는 하루 한 끼만 먹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중농 학파에서는

상공업을 말단의 업으로 보아 천시하였다. 그러나 이용 후생 학파의 학자들은 상업과

공업이 발달해야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이 잘살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연암은 농업과 상업 그리고 공업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농업을 기초로 하여 상공업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북학파를 중심으로 더욱 치밀하게 전개되었고 개화파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연암의 손자인 박규수가 훗날 개화파의 선두에 서게 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연암은 사회 전반의 혁신과 개선 그리고 인간다움의 회복을 위하여 문학을

무기로 삼아 자기 시대를 탁월하게 그려내고 비판한 선진적인 사상가였다.

그는 과거와 권위주의에 얽매이지않고 시야를 현재와 미래에 둔 창조적인

개혁가였다.

 

 

인도주의 실학의 완성

다산 정약용

 

노인에게 한 가지 즐거운 일이 있으니

붓가는 대로 쓰면서 미친 말을 따른다.

까다로운 운에 구애될 필요 없고

늦추어서 퇴고할 필요도 없다

흥이 나면 바로 뜻을 움직이고

뜻이 나타나면 바로 쓴다

나는 조선사람이어서

조선시를 즐겨 짓는다.

(노인일쾌사육수효향산체 제 5)

 

1. 똘똘한 개구쟁이

 

북한강과 남한강이 갈라지는 양수리의 윗쪽 마을 마재, 땅거미가 내려앉는 저녁

무렵이었다. 한 여인이 소년의 손을 질질 끌며 집으로 가고 있었다. 소년을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을 땅에 붙이고 버티면서 동네가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소년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온통 때가 묻어 시커멓고 손은 터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인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소년을 끌어다. 얼굴을 씻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년은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빠져나와 도망을 쳤다. 여인은 세숫대야를

들고 소년을 쫓았다. 소년은 다시 잡혀 할 수 없이 얼굴을 씻었다. 어찌나 소리를

질러 대는지 동네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이 소년이 바로 조선 후기 최대의 학자인 다산 정약용이고 여인은 그의 형수인

이씨였다. 다산은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형수의 손에서 컸다. 얼마나 때투성이로

장난을 치고 다녔던지 형수 이씨가 대야에 물을 담아 들고 그를 쫓아다녀야 할

지경이었고 억지로 붙잡아 얼굴을 씻기려 하면 이 개구쟁이 시동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생떼를 써 이웃이 창피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다산이 어른이 된

뒤에 형수 이씨를 생각하며 쓴 글에 나오는데 그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하기 그지없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아버지 정재원은 여러 고을의

원을 지낸 남인 계열의 청렴한 학자였다. 당파 싸움이 심해지자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마을에 묻혀 살았는데 자식들에게도 늘 파당에 가담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어머니 없이 형수 밑에서 큰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총기를 발휘하여 뛰어난 재주와

글솜씨를 보였다고 한다. 장난은 심했으나 네 살에 천자문을 떼고 일곱 살에는 이미

글을 짓는 숙성한 아이였고 열 살에는 그때까지 지은 글을 모아 '삼미집'이라는 책을

엮을 정도였다. 삼미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눈썹 위에 마마 자국 세 개가 있어

붙은 별호이다. 집안에서는 그 때문에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몹시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의 유명한 학자이던 이서구가 양평에서 한양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는 길에서

열 살 가량의 소년이 나귀 등에 책을 잔뜩 싣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무심히 지나친

그는 열흘 가량 한양에서 머물고 양평으로 돌아오던 길에 다시 그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예전처럼 나귀의 등에 책을 잔뜩 싣고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이서구는

이상하게 여겨 소년에게 물었다.

"열흘 전에 네가 책을 싣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 또 책을 싣고 다니니 너는

책을 읽지도 않고 싣고만 다니느냐?"

"아닙니다. 다 읽었습니다. 다 읽고 가져다 두려는 것입니다"

이서구는 깜짝 놀랐다. 나귀의 등에 실린 책을 열흘 만에 다 읽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럼 나귀의 등에 실은 그 책이 무엇이냐?"

"강목(원래는 자치통감강목 주자가 지은 역사서)입니다"

"아니 그렇게 어려운 책을 그 동안에 다 읽었단 말이냐"

"예 읽어서 다 외웠습니다"

이서구는 소년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나귀의 등에서 책을 하나

집어들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소년은 척척 대답하였다. 이서구는 그 총기에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소년을 잘 기억해 두었다고 한다. 그때 다산은 강 건너 양평의

권철신(이익의 제자)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다산이 15세 되던 해에 정조가 즉위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한양으로 부름을 받았고

다산도 한양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2. 성호 이익을 사숙하다

 

한양으로 이사온 다산은 학식이 높기로 유명한 이가환(이익의 종손)과 매형인

이승훈을 찾아갔다.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들은 당시의 쟁쟁한 실학자들로서 모두

이익의 제자들이었다. 다산을 이들을 통하여 성호학에 접근하였고 이익의 실학

사상을 사숙하였다.

다산은 그때 처음으로 이익의 문집인 '성호사설''곽우록'을 보았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유학뿐 아니라 천문, 지리, 역사, 문학 등 여러 분야에 관한

지식을 자세히 설명하는 한편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개혁해야 한다고

힘주어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필요한 주장만을 뽑아 간략하게 다시

짠 것이 '곽우록'이었다.

다신은 두 책을 보고 얻은 바가 많았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은 백성을 위하여

학문하리라고 거듭 다짐하였다. 다산은 뒷날 이들 형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큰 꿈을 갖게 된 것은 성호 선생을 사숙하여 깨우침을 받은 덕분이다.

 

다산은 또 이벽(이익의 제자 신서파의 선두)에게서 처음으로 서학과 서양의 과학

지식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북학파의 학자들과 달리 청나라에 다녀온 적이 없는

다산은 이벽의 집에서 서양 서적을 접하면서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벽을 찾아가 물을 정도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3. 정조와 다산

 

정조와의 첫 만남

 

22세가 된 다산은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로 성균관 학생이 되었다. 이때 정조와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호학의 군주였던 정조는 성균관 학생들에게 늘 시험을

보였는데 그때는 학생들에게 '중용'을 내려 주고 강의하게 하였다. 학생들의 강의를

듣던 정조는 옆에 있는 승지(임금의 비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강의하는 선비 가운데 정약용이 으뜸이군. 그의 강의는 명쾌하고 조리가 있어"

정조는 다산의 강의에 감탄하면서 앞으로 크게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산은 28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사헌부, 사간원

등의 언관이 되어 임금에게 간언하는 소임을 맡았다. 정조가 젊고 재기 있는 그를 늘

곁에 두고 자문을 구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다산이 정조의 부름을 밭고 입궐하니 정조가 그에게 글을 지어 달라

하였다. 이때 지은 글이 특별히 정조의 마음에 들었다. 그가 지은 글을 읽어 나가자

정조는 가지고 있던 부채로 장단을 맞추며 뛰어난 글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국조보감' 한 질과 고급 흰 종이 백 장을 상으로 내렸다.

그 후에도 또 글을 지어 올렸다. 임금은 더욱 마음에 들어 상을 주려고 이 책 저

책을 물어 보았다. 다신이 모두 가지고 있다고 대답하자 정조는 할 수 없이

계당주라는 술을 한 대접 주었다. 그리하여 군신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여 다산이

거나하게 취하여 대궐을 나올 정도였다. 그들은 잘 통하는 임금과 신하였다.

 

발명가 정약용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하다.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 세자을 생각하며

늘 마음 아파하였다. 정조는 사도 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1년에 몇 번씩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의 능행길에 올랐다. 그때마다 한강에 배다리가 놓였는데 그 설치를 다산에게

맡기자 훌륭하게 해내었다.

정조는 사도 세자를 기리기 위하여 수원성을 쌓기로 하였다. 정조는 이 일 역시

다산에게 맡기고 체제공(당시 영의정)에게 총주관하도록 하였다. 다산은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지고 올라가는 것을 보고 개선할 방법을 열심히 찾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모양 있고 든든하게 성을 쌓을 수 있을까 연구하였다. 이미 서양의

수학을 이벽에게서 배운 바 있는 그는 그 지식을 활용하였다. 기하학적 방법으로

거리와 높이를 측량하였고 무거운 돌을 들어올릴 수 있는 거중기와 활차(도르레)

그리고 고륜(바퀴 달린 달구지)을 발명하여 성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였다. 정조는 성을 둘러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거중기를 써서 돈 4만 냥을 절약했구나"

다산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정조가 영의정 체제공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로 장년층의 이가환과 청년층의 다산을 꼽았다는 말이 날 정도였다.

수원성 공사에 공로가 컸던 다산은 그 해 가을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다시 정조의

명으로 경기도 암행 어사가 되어 연천 방면으로 나가게 되었다.

 

4. 세도 정치와 백성들의 삶

 

암행 어사길에 오른 다산은 먼저 당시에 경기도 관찰사로 있던 서용보의 부정을

적발하였다. 서용보는 정조의 신임을 받고 있던 명문 대가 출신이었는데 나라의

곡식을 빌려 주고 백성으로부터 많은 이익을 챙기는 한편 마전 향교의 토지를

가로챌 계획을 그의 문객과 세우고 있었다. 이 일로 서용보는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그 뒤로 그는 늘 다산을 적대시하였다.

경기도 땅을 둘러본 다산은 백성들의 비참한 삶에 고심하였다. 낡아 빠진 게딱지

같은 집, 다 떨어진 옷, 굶기를 밥먹듯이 하는 생활, 관리의 부정과 조정의 부패와

무능 등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다. 그는 탐관 오리를 승냥이와 이리에 비유하면서

백성들의 참상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승냥이여 이리여

우리 소를 잡아갔으니

우리 양일랑 그만두어라.

옷장 안에는 저고리도 없다.

옷걸이에 치마도 없다.

항아리에는 남은 장도 없다.

독에는 남은 쌀도 없다.

무쇠 솥 가마솥 다 빼앗아가고

숟가락 젓가락도 모두 가져갔다.

도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데

어째서 이다지도 착하지 못한가(시랑)

 

정조가 죽고 나자 이러한 참상은 더욱 심해졌다. 안동 김씨가 세도를 부리고 있었고

곧이어 풍양 조씨가 세도를 부렸다. 이렇게 19세기는 이 땅에 세도 정치가 들어선

시기였다. 이런저런 문벌가가 번갈아 정권을 잡고 나라와 민중을 휘저었다.

높은 벼슬을 독차지하고 남은 자리도 정당한 방법으로 인재를 뽑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팔았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산 관리는 그 본전을 뽑기 위해서

더욱더 백성을 길취하였다. 심지어는 벼슬을 이중 삼중으로 매매하여 한 수령이

부임하여 부임 잔치를 벌이는 동안 다음 수령이 부임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수탈을 견디지 못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백성이 많았다. 그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섬으로 들어가 어민이 되어 수탈의 손길을 피하려 하였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산적이 되었다가 화적떼로 뭉쳐 부자나 관가의 재물을

빼앗았고 마침내 곳곳에서 정면으로 관권에 저항하였다. 이른바 민란이다.

다산은 이렇게 탄식한다.

 

군자의 학은 몸을 수양하는 것이 반이요 나머지 반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요즈음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들은 이익을 좇는 데만 정신이 팔려 목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찌들고 병들어 줄줄이 구렁텅이에

빠져 죽고 있다. 그런데도 이자들은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제 몸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목민심서 서문)

 

그가 황해도 곡산의 부사로 있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곡산은 민란이 빈번하여

모두들 부임하기를 꺼리던 곳이었다. 전임 부사가 사건의 발단이었는데 그는

포수들에게 받는 조세 무명베 한 필 대신 돈 900냥을 거두어들였다. 이 고을에

이계심이란 사람은 이 부정을 따지기 위하여 천여 명을 이끌고 관가에 들어갔다.

그러자 부사는 이계심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고 이계심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달아났다.

다산이 부임하는 길에 이계심이 엎드려 있다가 백성들의 괴로움 10여 가지를 적어

들고 와서 자수하였다. 수행하던 사람들이 잡아 가두도록 권하였으나 다산은

"관가에서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모두들 제 몸을 아껴 아무 말도 못하는 터에

자네같이 의로운 사람은 관가에서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들여야겠네" 하고 놓아

주었고 그의 건의 사항을 해결해 주었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민란을 막을 수 있었으니 다산의 넓은 국량과 목민관다운 면모를 잘 보여 주는

일화라 하겠다. 곡산은 물산이 적은 고을인데도 다산이 부임한 지 3년 만에 백성의

살림살이가 윤택해지고 관아의 재정도 튼튼해졌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목민심서'

저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천주교 박해와 유배

 

경기도 지방 암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산은 몇 차례에 걸친 천주교 박해에 연루된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천주교도 윤지충이 보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운

사실이 발각되어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다산은 자신이

서학의 책을 읽은 것은 사실이나 서학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밝혔다.

그리고 10일간 유배를 당하였다.

4년 후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잠입하여 포교하다 잡히자 공조 판서였던 이가환이

좌천되고 이승훈은 유배되었다. 다산도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정조의 지극한

총애에 힘입어 지방 한직으로 좌천되는데 그쳤는데 정조의 이러한 총애가 오히려 그를

시새우는 세력을 키워 훗날의 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움직임이 부산해졌고 그 결과로 신유 사옥이

일어났다. 이 해에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고 다산의 조카사위인 황사형의 밀서가

발각되었다. 아무리 서학을 신앙하지 않는다고 했다지만 처형된 정약종의 동생이고

이승훈의 처남이며 황사형의 처숙이었던 다산이 무사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더구나 이가환과 다물어 정조의 적대적인 신임을 받던 남인 시파라는 정치적 입장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했다.

이 일로 다산의 집안은 거의 멸문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셋재 형 약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산 자신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0세 였다.

그리하여 40세 부터 57세까지 18년 간의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귀양살이로 그치지 않았다. 이 유배 시절이야말로 다산의 위대한 사상이

집대성되는 의미 있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5. 유배지에서 완성된 그의 사상

 

강진에서 주막 뒷방을 빌어 귀양살이하던 다산은 윤박이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그의

산정이 있는 다산으로 옮겼다. 다산은 그 곳에 다산 서옥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는데 그의 저술이 거의 그 곳에서 이루어졌고 호도 거기에서 따왔다.

 

유학 사상의 재정립

 

다산은 성리학이 당대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크게 반성하였다.

그러면서도 유학의 도를 실학으로 정립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다산은 도학에 머무르지 않았다. 다산은 당시 사람들이 주체성 없이 사모하고

모방하기에 급급하다고 비판하였는데 물론 사모하고 모방한 대상은 유학의 정통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문화의 고전적 규범이다. 그는 이렇게 주체적인 사상은 모색하지

않고 우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을 가지지 않는 태도는 어리석은 무리들이

허상을 놓고 함께 떠받들고 절하자고 하는 꼴이라고 규탄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단군

시대의 질박한 고풍이 그립다고 하였다.

다산은 우리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는 민족 문화의 기풍을 계승함으로써

확립할 수 있고 또 자연스럽고 주체적인 사상이야말로 살아 있는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나는 조선 사람이어서 조선시를 즐겨 짓는다"고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다산은 학문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의 다섯 학술을 비판하였다.

'오학론'이 그것인데 다섯가지 학술이란 성리의 학, 고증의 학, 문장의 학, 과거의

, 술수의 학이다. 성리의 학은 공연한 시비를 일삼고 헛된 명분만을 숭상하기

때문에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또 고증의 학은 지업적인 것을 풀이하는 데 몰두하기

때문에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과거의 학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기술이기

때문에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문장의 학은 건실한 생활 태도를 해치는 부화한

풍조를 낳으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관심은 자기 시대의 문제에 집약되어 있었다. 그는 송대 이래의 도학을 버리고

선진 유학(공맹의 원시 유학)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였다. 성리학의 논의는 공자의

본마음과 어긋나는 것이니 공자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자기 시대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그는 성리학의 논리와 그 의의를 깊이 이해하면서도 추상적 관념을 저마다 달리

해석하여 사분 오열하는 학풍을 비판하였다. 다산은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이기 논쟁은 세상이 마치도록 서로 다투어도 끝이 없을 것이니 인생에 일이 많은데

그대와 나는 이를 할 겨를이 없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관심은 현실의 문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다산은 천지와 만물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자기 사상의 목표로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늘 자기 시대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특히 '무력한 사람을 도와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측은하게 방황하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려는 뜻'

실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차별 없는 평화의 세계'를 꿈꿨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소망이 있다면 온 나라 안이 모두 양반이 되는 것이니 곧 온 나라 안에 양반이

없어지는 것이다(여유당전서)

 

다산은 유학의 본뜻이 '백성을 편히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유학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시경', '춘추', '논어', '대학',

'중용', '맹자', '주역', '서경' 등에 대하여 새롭게 치밀하게 연구하여 주석을

달았다. 이는 이전 학자들의 주장을 따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따져 보고 형편에 맞게

연구한 것인데 그 핵심은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자기를 수양하는 것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이다"고 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육경 사서로 자기를

수양하고 12('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천하 국가를 위하니 수기

치인의 본말을 갖추었다"고 요약하였다. 원리 추구에 치중하여 이상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 유학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명실 상부한 실용적인 학문으로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그가 주장한 개혁 사상을 보기로 하자.

 

경세유표

 

'경세유표'는 이름 그대로 세상을 경륜하는 데 필요한 제도와 당시의 제도를 개혁할

방도를 밝힌 책이다. 다산은 이 책에서 관리 제도, 행정 제도, 토지 제도, 조세 제도

등 국가 경영을 위한 제도의 큰 줄기를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 다산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구제하는 데에서는 나라의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보다 관리들의 수탈과 아전들의 협잡을 바로잡는 것이 더욱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산은 '경세유표'를 쓰던 붓을 멈추고 지방 행정을

바르게 펴 나라도록 지방 수령들에게 일러 주는 '목민심서'를 먼저 쓰게 된다.

비록 미완의 책이지만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나라의 제도 가운데 개혁해야 할

부분이 많다면서 먼저 우리 나라의 제도가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많아

우리의 형편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 실정에 맞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략을 보면 이렇다.

 

1. 중앙 정부의 기구를 간소하게 고치고 불필요한 관리를 줄일 것

2. 백성들만 교육할 것이 아니라 관리들도 교육할 것

3. 관리 등용에서 신분 차별을 철폐할 것

4. 관리 선발 제도를 간소화하고 선발 인원을 법으로 한정할 것

5. 벼슬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관리들을 엄중히 감독할 것

6. 문관과 무관을 차별하지 말고 국가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는 반드시 벼슬을 줄 것

7. 문란해진 군포 제도를 없애고 옛 조세법에 따라 국가에 대한 백성들의 노동

봉사를 고르게 할 것

8. 국방력을 강화할 것

9. 은을 절약하고 해외로 유출되기 않도록 할 것

10. 향리의 수를 엄격히 제한하고 세습하지 못하도록 할 것

11. 이용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사람들을 청나라 북경으로 보내어 기술을 배워

오게 할 것

 

이처럼 다산은 제도 개선책을 제시하면서 특히 나라 살림을 맡은 호조를 개선하려고

산업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흠흠신서

 

이 책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옥사와 관련된 문제들을 다룬 글로서 옥사를 관장하는

관리들로 하여금 공정하게 하여 원한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쓰다가 붓대를 옮겨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목민심서'이다.

이 책은 다산이 귀양살이를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오기 직전에 완성한 책으로 그의

사상의 진수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그 시대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더듬어 보는 데

가장 귀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심지어 어떤 외국인 학자는 "조선 후기의 정치가

썩은 것은 조선 왕조로 본다면 불행한 일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다산과 같은 학자가

나온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다산은 어린 시절에 지방 수령이던 아버지글 따라 이곳 저곳 옮겨 살면서 수령의

태도와 농민들의 실정을 보았고 또 암행 어사로 전국을 돌면서 직접 백성들의

참상을 목도하였다. 게다가 유배 시절의 산경험도 있었다. '목민심서'는 그처럼

백성의 살림살이를 직접 보면서 평생을 노심 초사하던 일을 글로 옮긴 것인데

'목민'이라는 것은 '백성을 잘살게 한다'는 것이고 '심서'라는 것은 '직접 목민해

보고 싶으나 실행할 수 없으니 마음으로 한다'는 뜻이다.

다산은 이 책에서 지방 수령들에게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정치를 바르게 하라고

되풀이하여 당부하면서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몇 가지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수령으로 부임할 때에는 한턱 내는 등의 비용을 쓰지 말고 현지에 가서도 청렴과

절약의 모범을 보여야 실제로 백성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은 되도록

데려가지 말아야 하며 말을 많이 하지 말고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2. 백성의 세금으로 연회 따위의 놀이를 하지 말고 백성 사랑하기를 자기 아내나

자식처럼 하라. 틈이 있으면 늘 책을 읽도록 하라. 책은 '서경''논어', '중용',

'대학'과 송대의 '명신언행록'을 보는 것이 좋다.

3. 무엇보다 청렴해야 한다. 봉급만으로 생활하고 떠나올 때 남은 돈은 그대로 두고

오라.

 

세 번째 문장과 관련하여 다산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땅 속에서 옥을 발견하여 관가로 가서 수령에게 바쳤다.

그랬는데 수령은 그 옥을 받지 않았다. 그 사람은 하도 이상해서 "이것은 분명히

보물이오니 받아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수령은 "당신에게는 이 옥이 보물이지만

나에게는 이것을 받지 않는 것이 보물입니다. 내가 이것을 받으면 당신과 내가

동시에 보물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며 끝내 옥을 받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 이어서 다산은 돌아갈 때의 짐이 부임할 때의 짐과 같아야 깨끗한

관리라고 덧붙이고 있다.

 

4. 공과 사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예컨대 아버니나 형 또는 아내나 자식이 임지에

따라가서 관가의 일에 간섭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나랏일을 문란하게 하는

짓이니 부득이하게 같이 가는 경우에는 관가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5. 고관들에게 선물을 하지도 받지도 말아야 한다.

 

다산을 이런 예를 들었다.

 

숙종 때 어떤 나이 든 벼슬아치가 집에 돌아와 아내와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요새 조정의 고관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야기하는 것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일이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보내 온 물건들의 품평회를 하느라 바쁘니 이래서는

나라가 망할 도리밖에 없다"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다산은 그 밖에도 흉년에 대한 대책 법을 집행하는 원칙 등을 상세히 밝혀 놓았는데

그 핵심을 자신이 명을 받아 백성에게 봉사하는 관리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수령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가. 백성이 수령을 위해서 사는가. 백성은 곡식과 베를

바쳐 수령을 섬기고, 또 말을 바치고 따라가서 맞이하고 보내며 고혈을 짜서 수령을

살찌게 하니, 백성이 수령을 위해서 사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원목)

 

이 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다산이 백성을 가리키는 ''에 근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만 백성을 불쌍히 여기거나 보살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떳떳한 '나라의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고전적인 민본 사상을 계승한 것이기는 하나 다산은 단지 백성을 휼민하고

애민하면서 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정치 구조나 경제 구조가 백성을

억압하고 수탈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관념적인 덕치가 아닌

근본적인 해혁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다 쓰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 백성이라도 그 혜택을 입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마음이다.

 

7. 백성과 함게 한 만년

 

58세에 귀양살이를 끝내고 돌아온 다산은 '흠흠신서'를 완성하고 우리말을 연구한

'아언각비'를 정리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백성들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또 당시의 위정자들은 그의 개혁안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심지어

'목민심서'를 읽어 주지도 않았다. 다산은 결코 농민들이 이대로 당하기만 하다가

죽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한 번도 자신을 참소하는 자들에게 화내지 않고

스스로를 해명하는 데 그쳤던 너그러운 성품의 다산이 회갑을 맞이하여

자찬묘지명을 적으면서 이렇게 분노를 터뜨렸다.

 

알아 주는 적고 비방하려 드는 자는 많으니 만약 천명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 줌의 불쏘시개로 태워버려도 좋다.

 

다산은 농사 짓는 사람에게만 토지를 주고 토지 소유를 재한하며 세금은 10분의

1로 하자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전론'을 제출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제안을 받아

다산을 다시 등용하려 하였으나 예전에 경기도 관찰사 시절에 다산에게 당한 경험이

있는 서용보(당시의 영의정)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 뒤로 다산은 고향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면서도 늘 농민들과

함께하였다. 다산이 72세 되던 해, 고향 마을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곡물값이 뛰고

인심이 몹시 어지러워졌다. 장사꾼들이 매점 매석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여 사람들은

아우성이었다. 그는 이때의 쓰라린 마음을 시로 읊었다. 굶주린 농민들이 어찌 일어날

줄을 모르느냐며 울분을 터뜨린 '저 가문 강변 마을의 봄을 노래한 시' 열 수가

그것이다. 이 시들에서 다산은 72세의 노인이면서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의협심을

보였다. 그것은 오로지 농민을 제 몸처럼 생각하는 깊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산은 그 저술이 무려 300여 권에 이르며 그 학문적 업적은 조선 후기 최대의

학자로 추앙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의 학문은 다산학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다산은 주체적이면서도 개방적이었다. 또 현실적이면서도 진보적이었고

합리적이면서도 인간적이었다. 다산은 늘 인간을 깊이 이해하려 애썼고 마음 깊이

신뢰하였다. 그의 학문하는 태도는 구체적이면서도 종합적이었고 따라서 잡다한

지식의 집적에 빠지지않고 통일된 사상 체계를 이룰 수 있었다.

또한 다산은 유학의 도를 지키면서도 실학을 완성하였다. 유교 경전을 창조적

실용적인 학문으로 정립하였다. 삼강 오륜 중에서 오륜은 인정하면서도 군신, 부자,

부부의 종속적 관게 윤리를 담은 삼강을 끝까지 거부하는 입장을 보인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는 수기와 치인을 별개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보았으며 이상을 현실

속에서 현실에 맞게 구현해 보고자 평생을 노력했다. 언제나 현실을 잣대 삼아

이상의 실현을 꿈꾼 것이다. 그의 이상은 모든 백성이 주인 되는 참다운 평화와

평등의 사회였다

 

실학 사상과 개화 사상의 가교

혜강 최한기

 

천지로부터 나를 보면 바다의 물거품에 지나지 않고

만물로부터 보면 평지의 모래알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추측으로부터 천지를 본다면

처음보다 앞서고 끝보다 뒤까지 가며, 땅 덩어리를

받아들이고 끝없는 하늘을 담는다. 추측으로부터 만물을

본다면 털끝이라도 분석할 수 있고 금속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만물을 포용하는 것은 하늘이지만 마음은

이것을 추측한다(추측록)

 

1. 생애

 

18세기에 활발하게 일었던 실학 사상은 19세기의 세도 정치의 파란 속에서 더

꽃피지 못하고 위축되고 말았다. 거의 1세기 동안 개혁을 외친 실학자들의 주장은

세도 정치가 자리를 잡으면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더욱이 위정자들이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는 데에 몰두하면서 사회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그 결과 도처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혼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서 공장제 수공업이

시작되고 상업 자본이 형성되는 등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고 그 결과

봉건제적 통치가 아래로부터 흔들려 더 이상 실학자들의 개혁안 정도로는 감당한

수 없을 만한 혼란과 격동이 일어났다. 새로운 사상이 요청되는 시기였다.

그 요구에 응하고자 한 이가 바로 혜강 최한기(1803-1877)였다.

스스로 자기 시대를 '새로운 것으로 낡은 것을 바꾸는 시대'라고 했다시피 최한기는

실학 사상이 개화 사상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살았다. 그러나 무슨 벼슬 같은 것을

한 것은 아니었고 평생을 학문에 몰두하면서 묻혀 살았다. 그 탓인지 방대한 저술과

학문적 업적을 남겼는데도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기록이 거의 없다. 서얼 출신인

이규경(이덕무의 손자)과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와 사귀었다는 사실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는 김정호와 함께 중국에서 나온 세계 지도를 대추나무에 판각하였고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에 서문을 써 주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 김정호와 사이가

각별했음을 알 수 있는데 최한기가 남의 글에 덧붙이는 글을 쓴 것은 그 서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규경은 최한기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최한기의 자는 운로이고 본관은 삭녕이다. 사마시의 진사로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여러 서적을 공부하고 또 저술하였다. 많이 기억하고 넓게 공부하였으니 범속한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오주연문장전산고)

 

최한기의 15대 조상은 세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최항이라고 하는데 그 이후에는

거의 몰락하여 한미한 가문으로 전락하였다.

그의 아버지 최치현이 백면 서생으로 26세에 요절하여 최한기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갔다. 양부는 무관 출신으로 지방 군수를 지냈는데 혜강은 양부의 재산을

물려받은 덕분에 생활에 쪼들리지 않으면서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출생지가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평생을 거의 한양에서 살았다. 스물 세 살에

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안동 김씨가 판을 치던 세상이어서 그랬는지

벼슬길에는 아예 나가지 않고 평생을 학문에 몰두하여 살았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저술이 천여 권이 된다고 하나 조금 과장된 듯하다. 지금까지 발굴된 것은 백여

권이고 지금도 계속 발굴중이다.

그보다 좀 앞서 살았던 정약용이 근 20년 동안 귀양살이로 고초를 겪고 박지원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생하면서 가난을 딛고 큰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과는

대조적으로 최한기는 한미한 가문 출신인 데다 벼슬도 하지 않은 탓에 정치적

우환에 휩쓸리거나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하지도 않고 대체로 평탄하게 살면서

학문적 업적을 남겼는데 이는 우리 나라 사상계에서는 보기 드문 경우이다.

 

2. 그의 사상-1

 

최한기는 스승을 찾아다닌 적이 없고 자기의 책을 남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늘 혼자 공부하고 저술하면서도 현실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였고 동양과 서양의

학문을 종합하여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정통 유학에서 이론을 찾았지만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고 실학을

계승하였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다. 또 서양 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과학에 조예가 깊었지만 인문 정신 또한 중시하였다.

그는 경험을 쌓을수록 절대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면서 경험을 퉁한 실천을

강조하였고 저술에서도 자기의 주장을 중심으로 하였지 다른 학자의 설을

인용하지 않았다.

요컨대 최한기는 유학 사상을 재해석하면서 거기에 서양 과학의 정신을 접목시켜

새로운 사상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개화 사상으로 나갈 수 있는 가교를 마련하였다.

 

유학 사상의 재해석-기학

 

최한기는 성리학적 해석과는 달리 유학을 '주공과 공자의 도'라고 하였다.

성리학적 해석이라는 것은 유학의 중심을 우주론과 인성론에 두는 입장을 말한다.

곧 우주 자연의 본질과 인간 심성의 본질이 같으니 우주 자연의 원리가 곧 인간

사회의 도덕적 당위라고 보는 것이다. 그 점을 본격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전개된

것이 이기론인데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그것이 더욱 치밀히 궁구되어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전개된 것이 바로 사단 칠정 논변으로 대표되는

유명한 '이기 논쟁'이다

그런데 최한기가 말한 '주공과 공자의 도''보편적 윤리''백성을 위하는 민본'

사상에 바탕을 둔 경세론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을 경륜하는 데 필요한 실용적

학문이다. 성리학이 형이상학적인 철학성이 강하다면 경세론은 사회 사상적 성격이

강하다. 최한기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현재요 현실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만약 옛날과 현재 중에서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할 것인가를

논의한다면 내가 성장하고 의지할 것은 현재에 있지 옛날에 있지 않으며 내가

써야 하고 따라야 하는 것도 현재에 있지 옛날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옛날은

버릴지라도 현재는 버릴 수가 없다. 글을 배우는 선비들이 지금의 흐름을 모르면서

옛글의 자취만을 가지고 지금의 백성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반드시 많은 착오가

생길 것이다(인정)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최한기 사상의 기본 논리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만약 알아야 할 것이 이라는 도덕적 당위라면 그 내용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성현이 말한 불변의 이치가 이라면 알아야 할 것은

도덕적 당위인 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인 이이다. 그런데 이 존재의 원리인 이는

기를 근거로 해서 이를 아는 추기 측리의 방법으로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는 계속 운동하고 발전하므로 지금의 기는 옛날의 기가 아니다.

기에 대한 인식도 시대마다 다르로 계속 발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만 아는

사람은 소견이 막혀 있고 지금(현재)을 아는 사람이라야 소견이 트여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하고 의지해야 하고

써야 하고 따라야 할 것은 옛날의 기가 아니고 현재의 기라는 사실이다.

옛날의 기는 버린다 해도 지장이 없겠지만 현재의 기가 단절되면 살아갈 수가 없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현재의 기로써 이루어지고 있는데 옛글의 자취만 가지고

학문을 하겠다는 것은 백성을 무지하게 하고 진실을 왜곡할 수 있으며 역사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다.

옛것만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의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조선 후기의 여러 사상가들이 거듭 강조해 온 바이다. 그런데 최한기가 이 문제에

대하여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경험과 추측의 강조-신기론

 

성리학에서는 존재의 원리로서의 이가 우리 마음 속에 성(양심)이라는 형태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마음을 바르게 가지면 저절로 드러난다고 했다. 그런데

최한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사물에 계속 부딪히고 경험하고 추측해야만 그

이를 얻어낼 수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추측한 결과가 하늘의 이치와 합치하는 것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는 이유를 따져야만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최한기는 서화담 임성주로 이어지는 기 일원론을 계승하여 천지는 기로 이루어져

있고 천지의 기는 사람의 기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므로 사람이 헛된 관념을 버리고

추측과 경험에 힘쓰면 자기 안에 있는 기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경험을

중시한 그는 심지어 맹자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 인의예지조차도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습성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때의 기를 그는 신기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의 기를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통하게

해 주는 것이 감각 기관이므로 인간은 눈 코 입 귀 등의 감각을 통하여 경험을

쌓음으로써 자신의 신기를 더욱 밝혀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경험과 경험을

통해 축적된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확장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 과정이

바로 추측이다. 그는 추측의 방법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1. 현상적 존재를 통하여 본질을 추측하는 것

2. 드러난 정을 통하여 본성을 추측하는 것

3. 움직임을 보고 정지 상태를 알아내는 것

4. 자기 자신을 미루어 남을 알아보는 것

5. 사물을 바탕으로 그 일을 짐작하여 아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험론적 방법론이 서양 과학의 영향을 얼마나 받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가 서양의 과학 지식을 예로 많이 들면서 설명한 것으로 보아 서양의

과학 정신을 전통적인 유학 사상에 접목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상을

집약해 놓는 것이 그의 기측체의라는 저서인데 이 책은 북경에서 출판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고 한다.

 

3. 그의 사상-2

 

과학 실학

 

최한기는 서양의 과학 서적도 많이 연구하여 유리 사정에 비춘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열린 세계 의식을 가진 학자였다. 그는 "인간의 일이란 대동 소이하기 때문에

남에게 배우는 것은 원근을 가릴 것이 없다"면서 동양과 서양이 문물과 사상이

서로 넓게 유통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천주교 탄압을 필두로 하여 위정 척사의

주장이 위세를 떨치던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용기 있는 외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서양의 의학 과학 지리학 천문학 등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그 결과를 다시 책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실용을 중시한 그는 그렇게 얻은 지식으로 기구의 개량에 힘썼다. 그가 지은

'심기도설'을 보면 그가 물건을 들어 올기는 기중기, 물을 퍼올리는 기계, 곡식을

빻는 기계, 나무를 자르는 기계, 기름을 짜는 기계 등 생활 도구의 발명에 힘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경험을 통한 실천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적

입장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근대적 사회 인식

 

최한기는 좌학의 필요성만을 역설한 것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에도 눈을 돌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어서 옛것에 집착하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기 시대를 '새로운 것으로 낡은 것을 바꾸는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전통의 개혁이 온전하지 않고 새로운 제도의 실행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그것이 혼란과 갈등의 시대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한기는

"유능한 인재가 기용되어 정치와 교화를 펴면 바람에 따라 풀이 눕듯이 개혁이

순조로울 것이다"고 하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시대에 맞는 바른 교화가

이루어진다면 안정을 회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자기 시대를 진단하여 일곱 가지의 큰 행운과 다섯 가지의 큰 불행이 있다고

하였다. 그라 말한 일곱 가지 행운이란 1) 지리와 천문학에 밝아짐, 2) 물리학과

화학에 밝아짐, 3) 세계적으로 통일된 도를 얻을 수 있음, 4) 과학적인 기계를 얻을

수 있음, 5) 의학을 얻어 인체를 밝게 볼 수 있음, 6) 정치 교육과 학문의 실질성을

확보할 수 있음, 7) 새로운 서적을 많이 구하여 볼 수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섯 가지 불행이란, 1) 인재의 등용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

2) 국경을 제한하는 쇄국으로 세계의 학자와 기계를 보지 못함, 3) 옛것을 고집하는

인습으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함, 4) 이단과 잡술에 미혹된 자가 많음, 5) 외국의

상인이 총기로 우리 나라의 백성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시대를 이렇게 진단한 그는 인간이 처한 사회적 조건을 강조하면서 가족이나

국가에 사로잡힌 닫힌 의식을 버리고 인류와 세계로 열린 개방된 사회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인간의 역사와 문명은 변화를 통하여 진보한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대가 갖는 변동기적 성격을 선명하게 인식하면서

개혁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운화론이라고도 하는 이 주장은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밝힌 것이다.

아울러 최한기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인간이 하는 일은 어느 것이든 제 나름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것은 나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최한기는 이전의 실학이 철학 면에서 인식론적 기반이 취약했던 점을

보완하는 한편 경전에 의거하여 전개된 '경학적 실학'을 과학 실학으로 변모시켜 그

실용성을 한층 강화하였다.

 

4. 그의 학문이 남긴 것

 

최한기는 19세기 중엽의 격동기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실학파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에 도입된 서양 과학과 세계 정세에 대한 지식을

수용함으로써 이전의 실학자들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독창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인류가 평등한 상호 불가침, 평화로운 발전, 상호 교류, 공동 번영 등을

이루는 이상적인 대동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일한 '만국 공통어'를 만들어서

각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하나로 통일하고 사상을 통일하여야 한다면서 한자를

세계어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또 불교는 허무적이고 기독교는 황당하며 유교는

고루하여 세계인의 사상을 통일시키기에는 부족하므로 오륜과 인의등의 규범과

서양의 선지 과학 기술을 결합한 세계적인 사상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서 우리는 과학성, 진보성, 현실성, 세계성 등 근대적인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모든 연구 결과는 '명남루전집'에 실려 있다. 그 가운에서도

중요한 것은 '기측체의''인정'이다.

그의 사상은 동양 정신과 서양 정신을 결합한 새로운 사상 체계로 개혁 사상인

실학을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정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 주는

이가 없었고 또 평생을 재야의 학자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제안들을 현실에 적용할

기회도 갖지 못하였다.

그의 사상은 훗날 개항을 전후하여 서구 열강의 근재 문명을 자주적 입장에서

능동적으로 섭취함으로써 근대 국가로 전환하자고 한 개화 사상으로 그 맥이

이어지게 된다.

 

 

사람이 곧 하늘:동학의 창도

수운 최제우

 

가련하다 가련하다

조국의 운수 가련하다

전세 임진 몇 해런고

이백사십 아니던가

개 같은 왜적놈아

너희 역시 하륙하여

무슨 은덕 있었던고

내가 또한 신선되어

날아 하늘에 오른다 해도

개 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하룻밤에 멸하고저

(안심가, 용담유사 중)

 

1. 천서를 얻다

 

1885(철종5), 최제우는 그의 집 초당에서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누워 있었다.

졸다 깬 듯이 몽롱한 상태에서 앞을 보니 눈앞에 웬 낯선 중이 서 있었다.

최제우는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중은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하였다. 중은

금강산의 유점사라는 절에서 왔다고 한다. 최제우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자.

 

저는 금강산에서 온 중인데 뜻한 바 있어 백일 동안 하느님께 정성을 드렸습니다.

바로 정성을 마치는 날 뜻밖에도 탑 위에 이상한 책이 한 권 놓여 있었습니다.

얼른 펴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책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알아볼

사람을 찾아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연히

선생님을 뵙고 느낀 바가 있어 이 책을 올리겠습니다. 부디 이 책을 풀어 주십시오.

 

하며 공손히 책을 건네 주었다. 최제우가 그 책을 받아 펴 보니 과연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책이었다. 그는 그 책을 받고 3일 동안 연구한 끝에 그 뜻을

풀어내었다. 그러자 중은,

 

선생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십니다. 하늘이 내린 사람이 아니고는 어찌 이 글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은 하늘이 선생님께 주신 것입니다. 저는 다만 전해 드렸을

뿐입니다.

 

하고는 두세 발짝 걸어가더니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최제우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그 책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과

그 책이 눈앞에 선하였다. 그리고 그 책의 글까지도 모두 선명하였다. 그럼 그 책을

준 사람이 신령이었던가. 하늘이 준 책이라니, 그럼 천서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한 일이었다. 훗날 최제우를 체포하여 압송한 관원은 조정에 최제우가 천서를

얻어 공부를 하여 도를 깨쳤다고 보고하였다.

 

최제우(1824-1864)는 경상도 경주 출신이다. 본래의 이름은 제선이었는데 득도를 한

후 제우라는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제우''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한다'

뜻이다. 7대조 최진립이 임진 왜란 때 공을 세우고 병조 판서를 지냈다고 하나 6대조

이후에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 양반 출신이다. 아버지 최옥은 근암 선생으로

통하던 학덕 있는 선비였다. 문장과 도덕으로 경상도 일대에서는 손꼽히는 학자였으나

평생 뜻을 펴지 못하여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살았다. 최옥은 본처가 있었으나 자식을

두지 못하고 양자를 들이고 있다가 60이 넘은 청상 과부로 지내던 청주 한씨를 소실로

맞아 최제우를 얻었다. 이처럼 자신이 몰락한 양반의 서출이라는 사실은 최제우를

평생을 두고 좌절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최제우는 여덟 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의 경전에 소양이 깊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얼굴이 남달리 빼어났고 체격이 좋아

주위의 시선을 모았다 한다. 그리고 두 눈의 정기가 날카롭게 빛나 어떤 이들은

'역적의 눈'을 가진 아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다. 그는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세 살 때에 결혼하였으며 열여섯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 듯하다. 그는 아버지를 잃은 일에 대해 이런 말을 하였다.

 

세월이 흘러감을 막기 어렵다. 슬프게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니 외로운 내

한 목숨, 겨우 열여섯의 나이에 무엇을 알았으랴.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선친의 일생 사업이 불에 타 흔적조차 없으니 불초한 자식의 여한이 세상의 일에

낙심만 일으킨다. 어찌 애닯지 않으며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 집안 일에 뜻이 있으나

어찌 농사일을 알 수 있으며 글공부가 독실하지 않으니 청운의 뜻마저 꺾이었다.

가산은 점차 기울고 앞날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나이는 점점 늘어 가 신세가

장차 어려워질 것이 한탄스럽고 팔자를 헤아릴 수 없으니 헐벗고 굶주릴 것도

염려스럽다(수덕문, 동경대전)

 

몰락 양반의 서출로서 양반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물려받은 가산도 없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의 고뇌는 큰 것이었다. 그는 아바지의 3년상을 마친 후

집을 나가 전국을 유람하며 방랑하였다. 그 동안에 장사도 하고 의술, 복술 등

잡술에 관심을 보였으며 세상의 어지러움과 인심의 동향을 파악하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는 그의 이 방랑 기간을 예수나 부처가 큰 깨달음을 얻기 전에 밟은

영혼의 방황과 고행 과정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그는 10년간의 방랑 끝에

고향인 경주로 돌아왔다.

그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보고 들은 것도 많았고, 느끼고 깨달은 것도

많았다. 극도로 어수선한 세상을 직접 확인한 그는 이 세상이 뿌리부터 뒤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팔도 강산 다 밟아서

인심 풍속 살펴보니

어찌할 수 없게 되었네

우습다 세상 사람

천명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몽중문답가)

 

이 시에서 그는 세상이 어지러워 인심과 풍속이 각박해진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절망을 털어놓고 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절망적으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최제우는 고뇌하였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워진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늘의 뜻인 천명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사람들이 하늘의 뜻을 알고 그에 따르면 세상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하늘의 뜻을 알아야 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천명을 알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얻었다는 것이

바로 천서이다. 아버지가 지어 놓은 용담정에서 서책을 보며 천명을 알아 세상을

구제할 길을 찾는 일에 골몰하던 32세 되던 해 봄 초당에 누워 봄볕을 받고 있다가 한

이승에게서 천서를 받게 된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어느 행상인을 통해

백련교나 도교의 술서를 받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 이적을 행하다

 

최제우는 동학 사상을 창도한 인물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고유 종교를

창도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교주인 셈인데 그러다 보니 그와 관련된 신비한 일들이

기록에 여럿 남아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엇는지 아니면 계기가 될 만한 일이

신비화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어쨌든 기록에 따르면 그가 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금강산에서 왔다는 이승으로부터 천서를 받은 최제우는 그 책의 가르침에 따라

선성산에 있는 한 암자에서 49일 동안 기도를 드리기로 하였다. 천성산은 옛날

원효 대사가 당나라의 중 1천 명에게 화엄경을 가르쳐 모두 성인이 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산이다. 산 이름이 천성인 것도 그 때문이다.

기도를 시작한 지 47일째 되던 날 그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천도교에서는

최제우의 이것을 신통력이라고 해석하는데 그는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도를 다 마치지 못한 그는 경주로 돌아왔다. 과연 그가 예감한

그 날 그 시각에 작은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도착했을 때에는

장례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기도 하고 신통한 사람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앞날을 미리 내다본다느니 도술을 부린다느니 하는 소문이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하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듬해 가을 그는 다시 세상 사람의 눈을 피하여 대장간을

차리고 한 쪽에 기도를 할 수 있는 기도장을 만들었다. 그 일에 필요한 비용에 대려고

그는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남겨 둔 여섯 마지기의 땅을 팔기로 하였다.

그는 이 땅을 일곱 사람에게 차례로 속여 가며 팔았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49

동안의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때 속아서 논을 산 일곱 사람이 아우성을 치며 그를 관가에 고발하였고 그는

관가에 끌려다니면서 고초를 당했다. 관가에서는 맨 처음에 땅을 산 사람에게

그 땅을 소유하게 하고 나머지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어떤 노파가 아들과

사위를 데리고 와서 최제우에게 항의하며 덤볐다. 그런데 한창 승강이를 벌이던

노파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곧 집으로 옮겨 갔으나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파의 아들과 사위가 몰려와 노파를 살려 내라고 하자 최제우는 노파의 집으로 가

침착하게 닭털 꼬리를 노파의 목구멍에 넣었다. 그러자 잠시 후 노파는 조금씩

기침을 하다가 이어 피를 한 모금 토하더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정신을 차리고 앉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최제우는 신명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뒤로 수행에 더욱 정진하였다.

 

3. 득도

 

186045일이었다. 이날은 우리 나라 사상사의 역사적 전환점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그때 최제우의 나이 37세였다.

그 날은 그가 태어나기 전 양아들로 들어온 형의 아들 즉 조카의 생일이었다.

산에서 두문 불출하고 수행에 전념하던 그에게 조카는 사람을 시켜 옷과 갓까지

보내면서 오라고 기별하였다. 생일 자리에 참석하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최제우는 몸에 심한 한기를 느끼며 곧 쓰러질 듯하여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거처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때 공중에서 홀연히 소리가 났다. 상제의 음성이라고 했다. 그는 상제로부터 병을

고칠 수 있는 영부(신령스런 부적)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조화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이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뜻하지 않던 중 4월에 몸과 마음이 떨리고 무슨 병인지 모를 증세가 나타났다.

말로 그 상태를 다 설명할 수 없는 순간에 홀연히 어떤 신선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놀라 일어나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들어 보니,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은 나를 상제라 부른다. 너는 상제도 모르는가?"

하였다. 내가 상제께서 이렇게 나타난 이유를 물으니,

"나 역시 공을 이룬 바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고자 하니 의심치 말라" 하였다. 내가 다시,

"그럼 서학으로 사람을 가르칠까요" 하니

"아니다. 나에게 신령한 부적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고 그 모습은 태극같기도

하고 궁궁같기도 하다. 나에게 이 부적을 받아 질병으로부터 사람을 구하고 나에게

이 주문을 받아 나를 위해 세상 사람을 가르치면 너 또한 장생할 것이요, 덕을

천하에 펼 수 있으리라" 하였다(포덕문,동경대전)

 

최제우가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여 마음을 잡지 못하면서 이 소리를 듣고

있을 때 이상하게도 집안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집안 사람에게는 안 들리는데 그만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무아지경에 빠져 몸을 떨고 있는 최제우를 본 가족들은 그가

실성하였다고 단정하였다. 가족들은 캄캄한 밤중이라 약도 의원도 대지 못하고

그저 아우성만 치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집안 사람 거동 보소

경황 실색하는 말이

애고애고 내 팔자야

무슨 일로 이러한고

애고애고 사람들아

약도 사 못해 볼까(안심가)

 

이렇게 혼비백산한 가족들은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심지어 부인 박씨는 남편이

실성한 데에 낙담하여 세 번씩이나 물에 빠져 죽으려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체험을 통해 최제우의 종교적인 신념은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또 그의 행동도 결정적으로 달라졌다. 최제우는 그 후 한동안 하느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깊이 체득하는 데 힘썼다. 처음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당황하고

흥분하여 마음의 안정을 잃었으나 1년간 더욱 정진한 뒤인 다음해에는 차츰 마음도

가라앉고 그 가르침을 깊이 체득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거의 1년 동안 그(상제의) 가르침을 잘 익히면서 미루어 생각해 보니

그 가르침에는 당연한 이치가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주문을 짓고 한편으로는

강령의 방법을 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잊지 않기로 하는 맹세의 글을

지었다. 결국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은 바로 주문 스물한 자에 달려 있다(논학문)

 

이렇게 도를 닦는 절차와 방법이 정해지자 그는 포덕을 시작하였다. 뜻밖에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것은 그 무렵의 사회 현실이 너무 어수선하고

암담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였다. 최제우는 이를 동학이라고 불렀다.

 

4. 동학의 창도

 

전환의 시대

 

최제우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전환기였다. 즉 봉건 시대의 암울한

질곡을 깨고 근대적 역동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시대적으로 중세적 말기와

근대적 질서로 재편되고 있었고 이러한 근대화 과정에서 외세의 침략과 내정의

문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민중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고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외척 중심의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과거 제도의 모순,

매관 매직의 성행, 법도와 기강의 문란 등 정치가 극히 혼미하였고 그 부담이 모두

백성들에게 떠넘겨져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하기 그지 없었다.

특히 양반 세도가들이 경제적인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백성에 대한 착취 행각을

일삼아 농민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고리 대금업과 삼정의

문란의 폐단이 가장 심하였다. 삼정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전정이었는데 20년마다

실시 되던 양전 사업이 중단된지 이미 130여 년이나 되어 토지의 경계 의식마저

혼란한 지경이었다. 전정의 문란은 호남 지역이 가장 심했고 다음이 영남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민생이 도탄에서 허덕이고 있어 비록 좋은 계책이 있어도 수습할 수

없다"는 말이 고위 관리의 입에서 공공연히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에 동요하고 침체되어 유리 결식하는 농민들이 늘어났고

심지어는 화적 떼를 짓거나 광대패와 어울리는 농민도 생겨났다.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조금씩 눈뜨게 된 농민들은 음으로 양으로 지배층에 저항하게 되었다.

도처에서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민란이 속출하였으며 철종 때에는 최대 민란인 진주

민란이 남도 지망을 휩쓸고 있었다.

, 1841년 겨울에는 괴질이 전국에 크게 돌았고 18466월에는 지진이 났다.

또 그해 9월에는 큰 홍수가 졌다. 이어 18517월에도 전국을 휩쓴 물난리로 서울

지방과 삼남 지방에 유민이 많이 생겼다. 게다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점차

심해지면서 처형당하는 신도들도 늘어나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러한 국내의 위기 상황에 더하여 외세의 침범이 민심을 더욱 동요시키고 방황과

혼란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낯선 서양배들이 우리 나라 연안에 자주 출몰하였고 아편

전쟁에서 중국이 굴복하였다는 소식이 나라 안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 등화에 놓여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였고 농민들은 만나기만 하면 이

나라는 망할 것이며 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망국가로 세월을 보낼 지경이었다.

 

사상적 혼미

 

조선 왕조의 지배 이념이던 성리학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이미 현실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제시되었던 실학은 이단으로 몰려 개혁

사상으로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유학자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상은 아직 출현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 부재 현상으로 말미암아 황당 무계하다는 이유로 무시되기

일쑤였던 정감록이 민간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고 동요하게 하였다. 게다가 서학(천주교)이 지배층까지 번질 만큼 유행한

것도 위기 의식을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온 백성이 사상적 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하였으며 새로운 사상에 대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최제우는 이렇게 말했다

 

아서라. 이 세상은 요순의 다스림으로도 족히 건지지 못하고 공맹의 덕으로도 족히

다스리지 못한다(몽중가)

 

새로운 사상의 창도

 

이러한 상황을 맞아 최제우는 심한 위기 의식을 느꼈고 그 위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나라는 요즘 나쁜 질병이 나라 안에 가득하고 또 백성은 일년 내내 편안할

날이 없다. 이것도 상해를 입을 운수의 한 본보기이다. 한편으로는 서양 사람들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빼앗으니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게 중국이 온통 망해 없어지면 우리 나라도 따라서 그렇게 될 우려가 없지 않다.

! 이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이 앞으로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포덕문,

동경대전)

 

천재지변이 잦고 나쁜 질명이 돌고 정치가 문한하여 민심이 어수선한 당시 국내

현실을 최제우는 남과 달리 보았다. 서양이 무력으로 중국을 무찌르고 우리 나라에도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인식은 그를 너무 놀라게 하여 어떤 초인간적인 힘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는 나라 안의 현실을 '상해를 입을 운수'라 하였고 서양이 위세

좋게 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도 그들이 '천명'을 받아 그렇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유도 불도 수천 년에 역시 운이 다했던가" 탄식하면서 기존

이념으로는 이 나라의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은 천명을 아는 것이라고 보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 큰 깨달음을

얻고 동학을 창도하기에 이르렀다.

 

5. 동학 사상-사람이 곧 하늘

 

시천주 사상

 

동학의 사상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의 사상을 종합하고 민간 신앙적인 요소도

아우른 우리 고유의 사상이며 우리 고유의 종교이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을

구제하려는 염원이 담겨 있으며 크게는 시대를 넘어서 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염원이

우리 고유의 방식으로 전개되어 있다.

동학은 서학(천주교)에 상대하여 이름한 것으로 최제우는 이에 대하여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를 받았으니 비록 천도일지라도 학문인즉 동학"이라고 하였다.

최제우는 스스로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이 21자에 달려 있다고 했다. 21자는

이렇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이 주문의 내용을 해석하면 '지극한 기운이 지금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가 된다.

최제우는 '동경대전' '논학문' 부분에서 이 주문에 대한 결정적인 해설을 붙이고

있는데 이 주문 가운데 앞의 8자의 뜻은 본 주문 13자의 뜻속에 겹쳐져 있거나

반복되어 있어서 핵심적인 의미는 본 주문 13자에 다 들어 있는 셈이다.

13자를 하나씩 보면 ''는 모신다는 뜻이고 '천주'는 한울님이니, '시천주'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내 안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뜻인데

넓게 보면 모든 사람 중생이 끊임없이 활동하는 일체의 생명을 제 안에 모신다는

의미이다. 한울님을 모신다는 사상은 더 나아가 한울님을 기른다는 양천 사상과

한울님을 사회적으로 구현한다는 체천 사상으로 발전하는데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로

통일되어 보다 실천적이 의미를 띠게 된다. 즉 동학은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실천이요 행위의 가르침인 것이다.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를 말하는데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는 가운데

끊임없이 변화하고 활동함으로써 어떤 것도 하지 않음이 없는 일체의 생명 활동을

의미한다. 이것은 노장철학의 '무위사상'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란

그 활동의 덕에 마음을 정하는 것이고, '영세'는 사람의 일평생이며, '불망'은 언제나

생각을 두어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사'라 함은 모든 일을 말하고, ''란 그 도를

알아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13자의 주문을 합하여 종합해 보면 '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밝고 밝은 덕을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는다면 지극한 기로

화하여 지극한 성인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는 뜻이 된다.

 

최제우는 세상 사람 누구나 성인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인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체천이 필요한데 체천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한울님을

체현한다'는 뜻으로 다만 '사람이 곧 한울님'인 데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한울님이 되도록 하라'는 명령이다. 즉 적극적으로 보면 개인적으로 천명을

알아 성인 군자가 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성인 군자의 이상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소극적으로는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명제에 반대되는 모든 도덕, 언어, 심리,

경제, 정치, 사회에 대한 거부와 저항을 의미한다. 그러자면 사람을 거짓말로 속이지

말고, 사람을 오만하게 대하지 말고, 사람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 입히지 않고,

사람을 교란시키지 말고, 사람을 일찍 죽이지 말고, 사람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말고, 사람을 굷주리게 하지 않고, 사람을 파괴하지 말고, 사람을 싫어하지 말고,

사람을 굴복, 예속시키지 않아야 하는데 이를 십무천이라고 한다. 이를 실천할 수

있다면 시천과 체천의 도리를 구현하여 이미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신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을 인간화할 수 있는 방안을 낸 것으로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을 노예 취급하면서는 한울님을 모실 수 없으므로 모든 정치, 경제, 사회,

사상적 침략 행위, 수탈 행위, 기만 행위 등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동학이 갖는 위대한 혁명성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입도한 세상 사람 그 날부터 군자가 되어 무위이화될 것이니 지상 신선 네가

아니냐(포덕문)

 

후천 개벽사상

 

최제우는 역사란 시세에 변화한다는 변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곧 혁명

사상으로 연결되는데 적극적으로 왕조의 성쇠가 있다고 하여 변화를 강조하면서 당시

왕조의 기운이 지극히 쇠진하여 새로운 시대가 개벽되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최제우는 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양반 사회의 질서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순환한다는 주역의 이치를 빌어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 법칙적 필연성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변혁 사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그의 이른바 후천 개벽

사상이다.

그는 자신이 상제의 음성을 듣고 깨우침을 얻은 186045일을 기점으로 그 전을

선천이라 하고 그 후를 후천 개벽의 새 세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마치 서양사에서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그 전 시대를 암흑기로 보고 그 후의 시기를 광명기로 보는

것과 흡사하다.

그는 새로 열린 개벽의 시대에는 극도의 빈곤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부귀해진다고

하였고 '시천주' 신앙으로 모두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최제우가 말하는 새 세상은 자연 법칙처럼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당위를 실현하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이룩되는 것이다. 그는 "운수가 좋거니와 닦아야

도덕"이라는 말로 인간의 능동적인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에 의하여 모두가 하나 되는 군자 공동체의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후의 극락이나 천당을 내세우지 않았고 끝까지 현세의

'동귀 일체의 군자 공동체'를 추구할 따름이었다. 군자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

시천주의 신앙으로 도덕적인 이상인이 되어 이룩하는 도덕 사회이다.

이러한 후천 개벽 사상에 동학의 혁명 정신이 결합하면서 동학은 동학 운동으로

발전하고 우리 나라 역사상 최대의 민중 혁명인 갑오 종민 혁명에 사상적인 기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6. 포교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하지 뜻밖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도를 설법하고 입교한 사람들에게 스물한 자로 된 주문을

외게 하였다.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도 그를 찾아왔다. 그는 선비들과 자기의 도에 대하여

당당하게 문답하였다. 그리고 입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는 삼천 명의 제자를

거느렸다는 공자에 자신을 비유하면서 자기의 도가 성대한 운수를 맞이했음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갈수록 최제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렇게 동학이 하나의 종파를 이루게 되자 세상의 눈에 띄게 되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시련이 닥치기 시작했다. 포교를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기 전이었다.

먼저 근동의 지방과 일가에서 최제우를 비방하고 동학을 중상하기 시작하였고 또

관헌에서는 서학이라고 지목하여 탄압을 하였다. 최제우는 당장 험악한 세상의 지목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전라도 남원 땅에 있는

은적암에 피신하였다.

최제우의 이러한 피신 행각은 그의 사상이 발전하는 데 큰 의의를 갖게 되었다.

그는 피신하는 동안 자기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되었던 점에 대하여 반성하고 자기의

도를 표현하는 데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사상을 더욱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는 데 힘썼다.

'동경대전'에 있는 '논학문'은 이 시기에 쓴 것인데 여기에서는 서학을 이론적으로

비판하면서 자기 사상을 문답식으로 정연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용담유사'

있는 '안심가', '교훈가', '도수사' 등도 이 기간에 지어졌는데 거기에 그의

사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최제우는 피신한 지 1년이 못 되어 혹세 무민한다는 죄목으로 경주 진영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학이 관에 그 정당성이 입증된 것으로 인식되어 신도가 더욱

늘어났으며 최제우는 포교 방법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

신도가 전국적으로 늘어나자 각지에 접(지역 단위 조직)을 두고 접주가 신도를

관장하게 하는 접주제가 만들어져 교세가 경상 전라도뿐 아니라 충청 경기도까지

확장되었다. 그러자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염려한 최제우는 해월 최시형을

후계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그래서 먼저 최시형을 거쳐야만 그를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자 교세가 크게 불어 그 규모가 거의 전국을

망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조정에서도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급기야 186312월 최제우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자들이 이 정보를

입수하고 몸을 피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조용히 체포되었다. 한양으로

이송되던 중 철종이 승하하여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국상이 나면 한양에서 옥사를

벌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가 대구 감영에 갇혀 있을 때 제자들이 그를

구출하려고 하였다. 그 일에는 그의 후계자인 최시형도 끼어 있었는데 최제우는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고문을 당한 상태에서 최시형이 대구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빨리 멀리 도망치라"고 지시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최시형은 동학의 포교를 위하여

눈물을 머금고 스승을 뒤로 한 채 대구를 벗어났다. 그리고 제 2대 교주가 되었다.

최제우는 1864310일 사도 난정(사악한 도로 바른 도를 어지럽힌다는

)이라는 죄목으로 평생에 걸친 구도와 4년에 걸친 포교를 끝내고 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가 처형된 후 그의 제자들이 그의 글들을 모아

기본이 되는 가르침으로 삼게 되었다. 한문체로 된 것을 엮어 놓은 것이

'동경대전'이고, 가사체로 된 것을 모아 놓은 것이 '용담유사'이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도는 전국에 거대한 들불로 타올랐다.

 

7. 타오르는 봉화

 

최제우는 일반적인 종교와는 달리 순수한 믿음을 강조하기보다는 대중의 의식을

개혁하여 새로운 세계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은 그가 일반적인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바와는 달리 자신을 신격화하지도 않았고 우상화를 시도하지도 않았다는

데에서 잘 볼 수 있다. 게다가 사후의 내세관이라든가 영생에 관한 언급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의 모순된 삶에서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을 주로 하여 자신의

사상 체계를 전개하였다.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으며 이를 위하여 보국 안민과 척왜의 민족주의 정신을 보여 주었고

근대적인 의미의 인간 평등 사상을 주창하였다. 또 사회 안의 비인간적인 모든 차별,

예컨대 양반과 평민, 적자와 서자, 노예와 주인, 남녀, 노소, 빈부 등의 차별에

철저히 반대하였고 모든 백성이 평등하게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사상을 폈다.

점에서 그의 사상은 가장 철저한 반봉건적인 평등 사상이며 민주적이고 근대적인

사상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어떤 학자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이야말로

현대의 어는 민주주의보다도 철저하고 깊이있는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동학 사상은 궁핍에 시달리던 그 시대 농민들에게서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당시의 한 관리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신이 듣건대 동학의 무리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번성하는 것은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백 수령의 수탈이 심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능히 살 길이

없어 동학당에 들어가는 것입니다('취어', '동학난기록' , 국사편찬위원회)

 

동학에 입도하는 백성이 많아지면서 그 교세는 불길같이 퍼져 나갔다.

당시에 선전관이던 정운구가 글을 올려 "조령으로부터 경주에 이르기까지 400

걸쳐 동학에 관한 얘기를 듣지 않는 적이 하루도 없으며 경주를 둘러싼 이웃

마을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심하여 주막의 아낙에서 산골의 나무 하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그 주문을 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동학은 농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고 생활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유명한 민족주의자 백범 김구는 자신이 동학에 입도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상놈 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 왕조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장에서

정치의 부패함을 실제로 보고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백범일지)

 

최제우가 순교한 후 대통을 이어받은 제 2대 교주 최시형은 지하로 숨어다니면서

포교에 힘쓰는 한편, 경전 간행을 통하여 교리를 확립하였고 조직을 강화하여 동학을

완성하였다. 그에 이르러 1대 교주인 최제우가 창도할 당시 모든 사람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 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개인과 나라의 구제 신앙이었던 동학이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한다"

가르침으로 발전하여 인간 존중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아가 인간 뿐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산천 초목에까지 한울님이 내재한

것으로 보는 '물물천 사사천'(모든 사물과 모든 일에 하늘이 있다는 것)의 범천론

사상이 널리 민중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제 3대 교주인 손병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을 동학의 종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은 봉건적인 양반 사회 해체기에 농민 대중의 종교가 되었고 동학 사상과 동학

운동은 반봉건적인 민중의 사회 개혁 운동적 성격을 띠었다. 초기의 창도 단계에서는

일반에 널리 유포된 신앙의 형태였으나 교조 신원 운동 등 집단적인 시위 운동으로

전환하면서 탐관 오리의 혁파 외세의 배척 등을 주장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갑오 농민 혁명에 이르러서는 '만민 평등의 이념''조직적 역량'이 기반이 되어

우리 나라 농민 운동의 집대성인 사회 개혁 운동으로 힘차게 발전하였다. 1905년에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천도교 운동은 신민회 운동과 함께 민족 운동

세력으로 그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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