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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훈민정음

by Frais Study 2020. 6. 3.

  Ⅰ. 훈민정음의 창제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서문이나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에 대한 힐문에서는 세종 스스로 훈민정음을 
지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또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 서문과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비롯한 
당시의 문헌들은 한결같이 세종대왕이 몸소 지은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세종대왕은 언어 정책 수립
에 그쳤고, 연구는 신숙주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했다고 추측 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세종대왕이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이개, 최항,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고 알려진지 한달 보름만인 세종 26년(1444)음력 2월 16일 세종이 집현전 교피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이선로.이개, 돈녕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처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였는데, 동궁과 진양대군 유 및 안평대군 용으로 하여금 이 일을 관장하게 한 것과 신숙주의 <홍무정
운역훈> 서문 등에 근거하여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왕자들이 도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Ⅱ. 한글창제의 동기
  한글을 만든 동기는 어제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무식한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
     어도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어제훈민정음>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한글창제의 동기는 우민계층을 위해서 언문을 만들었음을을 공식적으
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우민은 문화활동을 하는 문화문자도, 공문서를 작성하는 관용문자도 필요없는 계층이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문자의 필요성이 전혀 없다.
  세종의 훈민정음의 창제동기는 최만리들의 반대상소문에 대한 반박문에서 알 수 있다. 우선 행정상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두번째 <삼강행실도>를 번역하는 등의 우민교화를 위해서, 세번째 국어문자론적 의미로서, 즉 우
리나라 말소리를 적는 글자를 만듦이 목적임과 동시에 우리말 소리를 적는 글자의 필요성에 의해서, 네번째 세종 
스스로 언문으로 공문서에 사용하거나 시험에 훈민정음을 함께 치루도록 한 점 등을 미루어 관용문자로서 쓰기 
위해, 다섯번째 한자음을 적기 위한 글자로, 여섯 번째 <용비어천가>에서 왕가의 전통성과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합리화 및 방원의 부도덕성의 미화를 위한 세종의 시민에 대한 교화정책을 이루기 위해 창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언어학적인 측면과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강신항 교수는 <한국문화사대계>를 통해 언어.문학사편에서 한글 창제의 동기
를, 첫째 표기 수단을 갖지 못한 백성들에게 표기 수단을 주기 위하여, 둘째 문자없는 국가적 체면을 생각해서, 
세째 이두 사용의 불편을 느껴, 네째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다섯째 한자음 정리를 위한 언어정책적인 
면 등을 들고 있다.
  역사학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한국사대관>에서 이병도는 자아를 비판 및 반성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중을 
애닮게 여겨 한글을 만들었다 하였고, <한국사신론>의 이기백은 일상 쓰는 말에 부합하는 민족의 문자가 있어야
겠다는 민족의식과 누구나 쉽게 문자를 배워 쓰게 해야겠다는 민중애가 세종으로 하여금 한글을 만들게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우근은 한국통사에서 한학은 치자계층에만 독점되어 일반국민이 습득할 겨를이 없어서 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의사 소통의 길이 없었기 때문에 한글이 만들어진 것이라 하였다.
  Ⅲ. 훈민정음의 기원설
  1940년 7월 훈민정음을 반포하던 그때의 원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타나게 되기 전까지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에 대해서 구구한 학설들이 난무하였다. 이러한 혼란은 한글기원에 대해서 밝게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하고 구
체적인 문헌기록이 없고, 한글의 성격이 다른 글자에 비하여 특수성을 지니며, 또한 한글 기원에 대해서 구체성이 
없는 문헌 기록이 전하여 해석이 여러가지로 된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도 한글의 어미글자에 대한 
것은 다 풀지 못하고 있는데, 아래는 여기에 대한 대표적인 학설들이다.
  1. 고전 기원설
  <세종실록> 제 102권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 30일 그믐조에,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였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우리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
     고 요약되었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이른다.
라고 하였으며,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서,
     형상은 옛 전(篆)자를 모방하고 소리는 7조(調)를 화협하였는데, 삼극(三極) 의 뜻과 이기(二氣)의 묘(妙)가 
     모두 포괄되어 있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훈민정음이 중국 옛글자인 고전을 본받았음을 말해주는 유력한 고전 기원설이다.
  세종대왕 때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에서도,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본받은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 篆字를 모방하였다 할지라도 소리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때가 없사
     옵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중국 옛글자를 모방하였음을 시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덕무(1741~1793)도 그의 <청장관전서> 제 54권 훈민정음조에,
     훈민정음에 초성, 종성이 통용되는 8자는 다 고전의 형상이다. [가] 고문의 급(及)자에서 나온 것인데, 물건들
     이 서로 어울림을 형상한 것이다. [나] 익(匿)에서 나온 것인데, 은(隱)과 같이 읽는다. [다] 물건을 담는 그릇 
     모양인데, 방(方)자와 같이 읽는다. [띵] 전서의 기(己)자이다. [링] 옛날의 위(圍)자이다. [밑] 전서의 구(口)
     자이다. [삥] 전서의 인(人)자이다. [아] 옛날의 원(園)자이다. 또 [가]는 위아래로 통하는 것이니, 고(古)와 
     본(本)의 번절이다.(번절<번:펄럭일번 절:切>을 세속에서는 언문이라 하여 反자를 배반한다는 반자로 읽고 
     반절의 反자 음이 번인 줄은 알지 못한다.) 1행에 각각 11자이다. 모두 14행인데 글자를 좇아 횡으로 읽으면 
     가.나.다.라의 類와 같다. 자연히 범주와 같다. 대체로 글자의 획은 전주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성인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하여 고전 기원설을 세웠으나, <세종실록>의 글이나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 서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이
러한 설명이 없다. 훈민정음의 초성의 띵과 전서의 己가 글자 모양이 비슷하고, 삥과 전서의 人이 글자모양이 비슷
하다고 해서, 바로 그것을 모방하였다고 단정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이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여 유기적 
관련성이 없으므로 그 일치에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종실록>에 나타난 글이나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 서문의 글의 뜻은 훈민정음이 바로 고전 글자에서 왔다는 것이 아니라, 꼴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
어 놓았는데, 그 상형한 것이 고전의 글자와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2. 梵字기원설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 제 7권에서,
     세종께서 언문청을 설치하여 신숙주, 성삼문들에게 명하여 언문을 짓게 하니, 초·종성이 8자, 중성이 12자
     였다. 그 글자체는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와 다른나라의 어음문자로써 표기하지 못하는 것
     도 모두 막힘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
라고 하여 글자체는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최초로 말하였고, 이수광 (1563∼1628)은 <지봉유설>에서 '우리
나라 언서는 글자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 떴다'라고 하여 역시 범자 기원설을 주창하였다.
  황윤석(1729~1791)은 <운학본원>에서 '우리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여기에 근본하였으되 결국 범자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1932년간)에서 언문 글자법이 원래 범자에 근원한 것임을 말하고 범자와 언문 글자
의 꼴과 소리가 서로 비슷한 것 몇가지를 들어보였다.
  3. 몽고 파스파문자 기원설
  몽고에서는 위글문자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몽고문자를 쓰다가, 원제국을 건립한 뒤로는 위글문자식 몽고문자
의 결함을 보완하고, 원제국 판도내의 여러 언어들까지도 다 표기할 수 있는 문자로서 파스파(八思巴)문자를 창안
했다. 이 파스파문자는 범어 계통인 티베트문자를 기초로 한 것으로서, 티베트의 고승 파스파가 1249년에 음소문자
식으로 만들고 음절문자처럼 쓰도록 마련한 문자였다. 즉, 八思巴文字는 자유로운 몽고어를 표기하고, 한음(중국자
음)의 정확한 표기, 원제국판도내의 모든 언어의 적절한 표기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八思巴文字의 창제목적이 그 뒤의 원나라 시정에서 제대로 완전히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하였으나, 이 
문자는 한자와 병용되었고, 이 문자로 표음한 운서(<몽고자운> 등)도 편찬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우리나라에서는 원나라의 문자생활이나 언문정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훈민정음과 같은 신문자를 창제함에 있어서, 音標문자인 八思巴文字를 당연히 참고하였을 것이
며, 그와 함께 원나라의 문자·언어정책까지도 참고하였을 것이다.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 제 16권 인사문 언문조에서,
     우리나라의 언문 글자는 세종조 28년(병인년)에 지었다. 대개 소리가 있으면 이에 대한 글자가 없는 것이 
     없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창힐과 태사주 이후로 처음있는 일이라 하였다. 원나라 세조때에 파스파가 불씨
     (佛氏)의 유교를 얻어 몽고의 글자를 만들었는데, 평(平)·상(上)·거(去)·입(入)의 네가지 음으로써 순,설,
     후,치,아,반순,반치 등 7음의 母字로 나누어 무릇 소리가 있는 것은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무릇 중국의 글자는 형상을 주장하므로 사람들이 손으로 전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몽고의 글자는 소리를 
     주장하므로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고 귀로 듣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형상이 전혀 없으니, 또 어찌 능히 없어지
     지 않겠는가? 이제 그 자세한 내용을 얻어 볼 길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규례를 미루어 문자를 만들었더라면 천하 후세에까지 통용되어 우리나라의 언문과 같은 공효가 있었을 
     것이니, 생각컨대 명나라 초엽에는 반드시 그 법규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언문을 처음 지을 
     때에는 궁중에 관서를 차리고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들에게 명하여 찬정(撰定)하게 하였다.
     이때에 명나라의 학사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으로 귀양왔었는데, 성삼문들로 하여금 가서 묻게 하였으니, 
     오고감이 무릇 13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측하건데 이제 언문이 중국의 문자와 판이하게 다른데 
     황찬과 무슨 관련이 있었겠는가?
     이때는 원나라가 멸망한 지 겨우 79년이니, 몽고의 문자도 반드시 남아 있었을 것이나, 황찬이 우리에게 전
     한 것은 아마도 이것(몽고문자)밖에 다른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살피건대, 고려 충렬왕 때 공주가 조비의 총애를 투기하여 위굴글자로 편지를 써서 원나라로 보냈는데, 이것
     은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고자 함이다. <사기>에는 '위굴의 글자는 곧 회골의 글이다'라고 하였다.
     우신행은 송나라 가정 3년(1210)에 위굴국이 몽고에 항복했으니, 이것은 당나라 때의 고창땅이요, 감주에 
     있는 서역 나라 이름이며, 불교를 신앙하는 자다.
     파스파의 전한 바에 이미 불교에 의거하여 몽고의 글자를 지어 원나라 시대에 통용했다고 하였으니, 공주가 
     사용한 글자는 이 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즉 이제 언문자는 꼴은 다르지만 뜻은 같았을 것이다.
     무릇 중국의 문자는 소리는 있으나 문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반이 넘는다. 입술과 혀와 목구멍과 이를 
     여닫아 맑고 흐린 음성이 입에 따라 다른데, 무슨 까닭으로 이를 형용하는 문자가 혹은 있고 혹은 없는가? 
     이제 언문은 반절이 무릇 14모음이며, 모음만 있고 절은 없는 것이 도합 4가지이니, 세속에서 이른바 입성이 
     이것이다. 그 혀를 윗잇몸에 붙이는 한가지 소리는 우리나라에도 또한 글자가 없으며, 침(侵), 담(覃), 염(鹽), 
     함(咸) 4운은 진문 등과 절이 동일하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입성이 중국에는 없는데, 다만 兒과 二 두자가 있으며, 소(蕭), 효(爻), 우(尤) 3운은 모두 
     한 자에 두 음이 되니, 이는 이해할 도리가 없다.
     생각컨대, 오호의 난리 후에 원위를 거쳐 북방의 음으로 모두 변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의 
     습속이 서도에 흐린 음성이 많고 도성 가운데 泮村(성균관을 중심으로 그 근처에 있는 동네를 일컫는 말) 
     또한 그러하며, 북도의 백성이 제주로 옮겼으므로 그 음성이 북도와 비슷하니, 이로써 증험할 수 있다.
     서역의 문자는 음성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으며, 옥(屋)·옥(沃) 이하 입성 17운 밖에는 아마 별다른 음성
     이 없을 것이니, 황찬에게서 얻은 것이 이와 같은 유이다. 그런 즉 이것이 파스파의 끼친 뜻임을 또 알수 
     있는데, 후일에 나온 것이 더욱 공교하다고 할 만하다.
     다만 그 글자의 꼴이 전혀 의의가 없고, 오직 1점 2점으로써 분별하는데, 1점은 모두 혀끝에서 나와 정음이 
     되고, 2점은 모두 혀의 우편에서 나와 편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처음의 범례는 이제 상고할 길이 없다.
라고 하여, 몽고 문자 기원설을 세웠다. 유희(1773∼1873)는 <언문지>에서,
     훈민정음 15초성은 우리 나라 세종대왕이 사신에게 명하여 몽고 문자의 모양에 의하여 지은 것으로 명나라 
     학사인 황찬에게 질문하여 제작한 것이다.
라고 하고, 또 같은 책 끝에서,
     언문은 비록 몽고 문자에서 기원하여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실로 세간에서 가장 정묘한 작품이
     다.
라고 하여, 한글의 몽고 글자 기원설을 인정하고 있다.
  1968년에 한국을 다녀간 바 있는 가리 레디야드 박사(미 컬럼비아大 한국사 교수)는 그의 한글 창제를 다룬 
박사 학위 논문에서,
     훈민정음이 중국 언어학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외에도 몽고의 팔사색(八思色) 문
     자의 흔적도 보이고 있다.
고 하였으며, 일본의 북리(北里)박사도 레디야드와 같이 한글이 몽고의 파스 파문자의 영향에 의한 창제설을 제시
하였다.
  한글의 어미글자(母音)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창균은 파스파기원설을 내놓았다. 자소체계의 근거가 한자음체계
에 있음이 파스파 문자와 한글이 같음을 들었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분석된 자소의 성격이 파스파문자와 같음을 
들었으며, 자형을 비교하여 밑글자와 획을 더한 글자 일부가 한글과 비슷함을 지적하였다.
  4. 고대문자 기원설
  한글은 중국문화에 속하는 한자와는 성격이 다른 우리 민족이 만든 글자이므로 우리 민족의 옛 글자에 그 기원
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고대문자 기원론을 주장한 학자들은 여러 문헌에서 우리 민족이 옛날에 가졌
던 글자나 고유한 글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들과 글자로 보이는 이상한 부호의 이야기들을 찾는데 노력
을 기울였다.
     평양 법수교(法首橋)에 옛 비석이 있었는데 언문도 아니고 범자도 아니고 전자(篆子)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밝힐 수가 없었다……계미년(선조 16년) 2월에 비석이 법수교에 묻힌 것을 파서 찾아내어 보니 끊겨 세 단
     (段)인데 비석의 글은 예자(隸字)가 아니고 범서의 모양과 같았다. 어떤 이는 이것이 바로 단군 때의 신지가 
     쓴 것이라고들 말하였다. 세월을 오래 지나면서 잃어버렸다.
라고 <平壤志>에 쓰여 있는가 하면,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24권을 보면,
     근초고왕 30년……古記에 이르되, 백제 개국이래 글자로써 사실을 기록함이 없더니, 이에 이르러 박사 고흥
     을 얻어 비로소 <書記>를 가졌다. 그러나 고흥은 다른 책에서 나타나지 않아서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못한
     다.
고 하였으며, <균여전>에는,
     우리나라의 才子와 이름있는 분은 당나라의 시편을 해독하여 이해하나 저 땅의 큰 선비나 선덕은 우리나라
     의 노래를 해독하지 못한다. 하물며 또 당나라 글자는 제강을 섞어 벌린 것과 같아 우리나라에서 쉽게 읽으
     나 향찰은 범서를 이어 편것과 같아서 저 땅에서 알기 어렵다.
라고 하였다.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서문에서 말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옛부터 속용문자가 있는데. 그 수는 갖추지 아니하고 그 꼴은 법이 없으며 한 쪽의 소리(音)는 
     나타내지 못하나 한 쪽의 씀(用)을 갖추었다.
  정인보 역시 우리나라의 옛적에 문자가 있었다는 추증을 하면서 다음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다만 고초(古初)의 문자-단군 古祖이래 북방의 문화를 실어가지고 내려오는-面, 내려 오면서 수익없는 전쟁
     에 시달려 문자의 발전이 자연히 지후(遲後)함을 면치 못하게 되자 漢족의 문자가 점점 융성하여 방취(傍取)
     하는 손이 어찌할 수 없이 그리 향하게 되매 뒤에 미쳐서는 한자로 고문대책(高文大冊)에 사용하기까지도 
     마침내 주저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까지 전하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가 그 하나이다.(정인보 <조선사연
     구> 하권 典故甲 三 藝文典 : 안호상 <민족정론> 31쪽)
  또 신경준(1712 - 1781)은 옛적에 문자가 있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방에는 옛적에 통속으로 쓰던 문자가 있었으나 그 수가 불비(不備)하고 그 형틀이 무법(無法)하여 제대로 
     말이 못되어 일반으로 쓰이지 못하였으니……우리 세종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신경준 <諺書韻解> 
     : 안호상 <민족정론> 31쪽)
라고 하였으니 어쨌든 훈민정음이 나오기 이전에 한자가 아닌 우리의 고유 문자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고유한 글자를 만들어 발전시켜 왔다는 분명한 기록은 없다.
  고대문자 기원론은 가설적 상태에 머물렀을 뿐 글자 자체의 비교 분석의 학구적 기원 연구 작업으로 진전하지 
못하고 문화전통론으로 합리성을 가지면서도 민간 기원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한문화에 가려진 우
리 문화 전통의 인식을 자각케 하고 겨례 문화 전통관에 선 한글 기원 연구의 탐색적 업적을 세웠으며 우리 고대문
자 존재에 대한 암시점도 제시하였다.
  5. 기타
  서장문자 기원설, 팔리(Pali)문자 기원설, 고대문자 기원설, 상형 기원설, 태극사상 기원설, 역리 기원설 등이 있
다.
  ⑴ 역리(易理)기원설
  훈민정음 창제 당시 그 학문적 배경이 되었던 성리학을 확대 해석하여 훈민정음이 성리학의 바탕이 된 역학의 
원리에 의하여 창제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원설은 훈민정음이 역의 기본원리나 생성원리에 의하여 
제자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리와 결합되어 있는 象數의 개념이 훈민정음 창제 때 상형으로 나아가게 하였다고 주
장한다. 신경준의 <운해훈민정음>은 역학의 상형설에 바탕을 두고 훈민정음의 자형을 설명한 것이지만, 초성자는 
음양과 오행 등의 원리를 가지고 설명하고 중성자는 역학의 기본이 되는 태극설을 가지고 설명했다. 이래서 신경
준과 같은 이의 설명을 따로이 <태극사상기원설>이라고 하기도 한다.
  ⑵ 창문상형기원설
  서양학자 에칼트(P.Andres Eckardt)가 주장한 것으로 훈민정음의 모든 글자가 우리 고유 가옥의 창문을 본떠서 
만들어졌다고 설명하였다. 우리나라 가옥의 창살은 우연히 훈민정음 28자의 자체들과 비슷한 무늬가 많아서 이런 
기원설이 나온 것이다.
  ⑶ 일본 신대문자 기원설
  일본에서는 옛 글자 즉 신대문자(神代文字)를 연구하는 학자가 많아서, 저서들도 상당히 나와 있고(대략 97종) 
또 옛 글들도 여러가지 유형이 꽤 발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소위 그들이 말하는 신대문자 중에서 아히루문자(阿
比留文字)는 우리나라의 한글과 너무 일치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히루 문자가 역사적으로 오래된 문자라 하여 '친(親)'격이라 하고, 우리의 한글 곧 언문이 '자
(子)'격이라 하여 일본의 아히루문자와 한글은 '친자(親子)관계'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대마도와 구주 
지방에서 주로 발견되었고, 고대의 신궁(神宮) 및 신사(神社)의 위패(神體)가 그렇고, 또 그들의 최고 조상신을 모
신 이세(伊勢) 신궁에서만도 한글과 비슷한 아히루문자로 기술된 문헌들이 도합 99점이 있다고 다다이(田多井四郞
治)는 그의 <일본신대 문자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 신경(神鏡)의 이면에 부각되어 있는 글자 역시 
아히루문자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須賀神社 등의 위독(位 )에도 아히루문자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까노(中野
裕道)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아히루신자(阿比留神字)는 조선으로 건너가서 언문(諺文)의 원형이 된 것이다. 지역적으로도 당연히 생
     각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경우에 일본의 학자는, 화자(和字)편에서 언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
     하기 쉽다. 전다정(田多井)씨도 말한 바와 같이 시대 고증에서 말하더라도 和字편이 훨씬 고대 것이다.
라고 하였는가 하면, 아고(吾鄕淸彦)씨는 '아히루문자와 언문(한글)과는 친자(親子)의 관계'라는 제하에서,
     아히루 문자와 언문과의 사이는 親子의 관계가 있다 하여도 아무런 불사의(不思議)한 것이 아니다……아히
     루 문자, 즉 대마(對馬)의 복부아비류가(卜部阿比留家)가 천아옥근명(天兒屋根命)의 직전(直傳)으로 비장보
     존(秘藏保存)하여 온 고대화자(古代和字)인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吾鄕은 한글 창제가 일본의 아히루문자의 영향하에서 이루어졌음을 주장하고 있다.
  ⑷ 檀君조선의 '가림다(加臨多)문'
  옛날 단군조선 때 단군 가륵 2년, 삼랑 을보륵이 정음(正音) 38자를 가림다(加臨多)라 하여 기록하였다. 가림다
토(加臨多吐)는 신라 때 설총이 이두식(吏讀 式) 발음으로 한자의 표의를 표음했던 것으로 이것을 구결식(口訣式) 
이두(吏讀)의 말이라 하였다. 이두식 표기는 의미부에 표의문자인 한문자(韓文字)의 훈을 취하고 형태부에 한문자
(韓文字)의 음을 취하였으며 특히 곡용이나 활용에 나타나는 조사나 어미를 표기하였다. 그 예로 <서동요> <혜성
가> 등이 있다. 이러한 표기는 한문자의 번역에 구실을 담당하였다. 이것이 조선조 세종때에 이르러 복합한 구어
의 표기인 표음을 통일한 체제로 집대성하에 한문자를 한글로 표음하여 사용에 편하게 한 것이다.(대전대 부총장 
임균택)
  Ⅳ. 훈민정음의 제자원리
  1. 훈민정음의 제자원리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는 <훈민정음해례>에서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정음 28자는 각각 그 꼴을 본따서 만들었다
  이 원칙에 의하여 만들어진 글자들의 구체적 설명을 살펴보면 어떠한 꼴을 본 뜻 것인지 알 수 있다.
  어금니소리 [가]는 혀 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꼴을 본떴다.
  혓소리 [나]는 혀가 윗잇몸에 붙는 꼴을 본떴다.
  입술소리 [링]는 입이 아래 위 입술을 합하는 꼴을 본떴다.
  잇소리 [삥]는 혀 허리가 입의 지붕에 붙는 꼴을 본떴다.
  목구멍소리 [0]는 입술과 목구멍이 열려 통하는 꼴을 본떴다.
  (훈민정음해례 제자해)
  초성: 17자-발음기관을 상형하여 만듦
  {{기본5음}}
  {{상형원리}}
  {{명칭}}
  {{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아음(牙音), 엄쏘리}}
  {{나}}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
  {{설음(舌音), 혀쏘리}}
  {{링}}
  {{입의 생긴 모양}}
  {{순음(脣音), 입시울쏘리}}
  {{삥}}
  {{이의 생긴 모양}}
  {{치음(齒音), 니쏘리}}
  {{아}}
  {{목구멍의 둥글게 생긴 모양}}
  {{후음(喉音), 목소리}}
  초성의 덧난 글자로는 획더한글자(가획자)와 몸꼴다른글자(이체자)가 있다.
  [칭]는 [가]에 비하여 소리남이 세므로 획을 더했다. [나]하고 [다], [다]하고 [킹], [링]하고 [밑], [밑]하고 [팅], 
[삥]하고 [잎], [잎]하고 [차], [아]하고 [나], [나]하고 [하]가 그 소리에 의하여 획을 더하는 뜻이 모두 같다.(<훈민정
음해례 제자해>)
  몸꼴 다른 글자는 유사한 그 소리의 밑글자에다 그 글자가 가지는 고유한 음성적 특징을 상징하는 획을 더하여 
만든 글자이다. 초성의 몸꼴 다른 글자는 [힝] [띵] [힝] 세 글자가 있는데 이 몸꼴 다른 글자에 대해서는 제자해에 
글자를 만든데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다만 [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다.
     오직 아음의 [힝]은 비록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고 숨기가 코로 나가나 그 소리가 [아]와 서로 비슷하므로 
     운서에 疑(힝)나 喩(아)가 서로 혼용됨이 많았는데, 지금 또한 목구멍을 취하여 본뜨고 [아]음 글자 만듦의 
     처음을 삼지 않았다.(<훈민정음해례 제자해>)
  [띵]은 그 기본획은 [나]와 같이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꼴을 본뜬 것을 알 수 있는데, 혀끝 그림에 획이 더 붙은 
것은 그 소리를 낼 때 혀 끝이 많이 굽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상징하는 획인 것 같다.
  [힝]도 밑 획은 [삥]과 같이 혀 허리가 입의 지붕에 붙는 꼴임을 알 수 있다. [삥]이 혀바닥에 좁은 통로가 있어 
숨기가 막히지 않고 갈려 흘러나는 소리인데, [힝]는 그 보다도 더 간격이 큰 소리임이 분명하므로 [삥] 아래에 
[가] 획을 더하여 막아 둥근 모양보다는 쭈그러진 꼴을 만든 것은 그것을 소리낼때 입술과 목구멍이 불완전하게 
열려 있는 듯한 느낌을 상징한 것 같다.
  중성: 11자의 천·지·인의 삼재(三才)를 상형하여 만듦(여기서 모음은 아래아 +가, 가 형태임)
  {{구분}}
  {{양성모음}}
  {{음성모음}}
  {{중성모음}}
  {{기본자}}
  {{하늘의 둥근모양}}
  {{가 땅의 평평한 모양}}
  {{가 사람이 서있는 모양}}
  {{초출자}}
  {{가,가}}
  {{가, 가}}
  {{}}
  {{재출자}}
  {{가,가}}
  {{ 가, 가}}
  {{}}
  {{}}
  가는 ·와 같으나 입을 쭈그리고……
  가는 ·와 같으나 입을 벌리고……
  가는 가와 같으나 입을 쭈그리고……
  가는 가와 같으나 입을 벌리고……
  가 가 가 가 의 둥근 점이 위와 밖에 있는 것은 그것이 하늘에서 나서 빛이 됨 이라
  가 가 가 가의 둥근 점이 아래와 안에 있는 것은 그것이 땅에서 나서 그늘이 됨이라
  (훈민정음해례 제자해)
  2. 훈민정음 창제의 이론적 배경
  한글창제와 훈민정음의 찬술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두가지 학문적 배경은 중국음운학과 송대의 성리학이다. 
전자는 당시의 유일한 동양언어학적 원리요, 후자는 이를 뒷받침하는 철학적 배경이다.
  3. 책의 체재
  1) 예의 - 세종의 어지, 자모의 음가, 자모의 운용법, 음절이루기와 점찍기
  2) 해례 -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자례
  3) 정인지서
  Ⅴ. 한글의 명칭과 유래
  한글의 이름에 대한 기록으로는 <세종실록> 25년 12월 쪽의 한글의 공표에 대한 다음 글이 가장 첫 글이다.
     이달에 임금님께서 손수 언문 28자를 만드셨다. 글자는 고전을 본받았고 초성과 중성과 종성이 나뉘어져 
     있으며, 그것을 합한 뒤에야 글자가 이루어진다. 무릇 문자에서 우리나라 속말까지 모두 적을 수 있고, 글자
     는 비록 간단하고 쉬우나 돌려씀이 그지없다.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訓民正音(새로 만든 문자의 명칭인 훈민정음에서 '訓民'은 유교의 민본주의와 관련되는말이며, '正音'은 주역이
나 성리학의 내용과 관련시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글자의 명칭에 '文'이나 '字' 또는 '書'자를 넣어 훈민정문 
등으로 부르지 않고, 소리를 뜻하는 '音'자를 넣어 훈민정음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훈민정음 서문에서는 중국 글자를 가리켜 '문자'라고 하였고, 새로 만든 글자는 '予爲 此憫然, 新制二十八字'라고 
하여 '字'를 쓰면서도 새로 만든 글자의 명칭은 훈민정음이라고 '音'자를 썼다. 훈민정음은 상형의 요소도 있지만 
성음을 따라서 그 이치를 나타낸 글자임을 <제자해>와 <정인지서>에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성음의 이치를 담은 
글자이기 때문에 '正音'이라고 '音'자를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은 '訓民'(백성에게 가르치는)이란 말과 '正音'(바
른 소리)이라는 두 낱말을 어우른 말이다. 正音은 俗音에 대립된 뜻으로 표준음의 뜻이다.
  세종은 세종 25년에 한글의 이름을 '훈민정음'('훈민정음'은 창제된 글자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과 글자를 만든 
원리를 풀이한 반포용으로 펴낸 책의 이름을 나타낸다)이라 하여 공표하였지만, 한글을 속된 글자라고 경멸하는 
당시의 일반 유신들과 유생들은 아예 한글을 언문이라 하여 속된 글자로 일컫었으며, 한글에 따로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여 '언문'(속된 글자)으로 이름삼아 일컫었다. 그래서 한글은 처음부터 언문이 이름아닌 이름
으로 통용되었다.
  세종의 명을 받고 편찬한 <훈민정음해례>와 각종 언해 운서에서는 '훈민정음' 또는 '정음'이라 일컫었는데 주로 
'정음'이라 하였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정음 28자는 각각 그 꼴을 본떠서 만들었다.(<훈민정음>, <훈민정음해례>, <제자해>)
     이에 성조는 사성으로 하고 91운모, 23자모로 정하여 임금님이 지으신 훈민정음으로써 그 소리를 정하였
     다.(<동국정운.신숙주서문>)
     훈민정음에서는 치두음과 정치음의 나눔이 없다.(<홍무정운역훈> 권1 신숙주 <사성통고 범례>)
     우리 세종 임금님과 문종 임금님께서는 이점을 애닯게 생각하시고 이미 훈민정음을 만드시어 천하의 소리를 
     비로소 모두 적을 수 없는 것이 없었다.(<직해동자습역훈평화 서>)
  중종 22년(1527) 최세진이 펴낸 <훈몽자회>에서는 반절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반절(反切)이란 한자의 두 자음을 반씩 따서 한자음을 표시하는 방식을 뜻한다. 예를 들어 '東'자의 음은 '德'의 
초성 '다'와 '紅'의 중성과 종성 '옹'을 합쳐서 '동'이 되는 것이므로 '덕홍반' 또는 '덕홍절'이라고 표시하였다.
  '반어'나 '반절'의 이름은 없었으나 실제로 사용된 증거가 있으며, 반절법은 중국에서의 불경 번역에서 비롯되었
다고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승려가 만들었다고도 한다. 또한 세종이 백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서 양반들
의 한자음을 이해하는데 알맞은 교재인 훈민정음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우민용 학습교재인 반절(反切)을 따로 
개발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그 시대는 <훈몽자회>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영조 이후로 보는 이도 있다.
  백성들은 이 반절에 의해서 배우기 때문에 한글을 '반절'이라 하였고, 그 후 계속해서 조선말기까지 백성들은 
한글을 '반절' 또는 '언문'이라 하였다.
  한문에 대하여 한글을 속된 글자로 여기는 일부 유생들은 한글을 언문이라 불렀으며 이와 비슷한 이름으로 '언
서'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문을 '진서'라 함에 대하여 정음을 '언서'라 한 것이다. 언문을 '언자'라고도 하는
데 이는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에 나타나 있다. 또한 경상도 시골말에는 '언에', '은에'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이 되기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
면 배울 수 있게 된다'고 하여 '아침글'이라고도 하였다.
  한편 한글의 이름 '훈민정음'과 책 이름 <훈민정음>까지도 고의로 '언문'이라 일러서 언문과 훈민정음을 혼동하
면서 언문이란 글자 뜻에 끌려서 착오를 이르키기도 하였다.
  또한 사대부들은 우리 글자가 부녀자들이나 익히고 쓰는 글자라고 해서 '암클'이라고 일컬었으며, 세종이 용변을 
볼 때 창살을 보고 만들었다면서 '창살글자' 또는 '뒷간글자'라고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한 
최만리 등은 한자는 보기에 의젓한 좋은 예술스런 글자인데 반하여, 우리 글자는 마치 올챙이가 기어가는 꼴의 
'과두문자'라고 하기도 했다.
  몇 학자들은 한글에 대해 특수한 이름을 짓기도 하였다. 이상질은 그의 저서 <훈음종편>에서 한글의 이름 '훈민
정음'이 글자와 소리를 함께 이르는 이름이어서 글자와 소리를 나타내는 이름을 분별할 필요를 느끼고, 글자의 
이름으로는 '훈문', 소리의 이름으로서는 '훈음'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의 강위는 그의 <동문자모분해>에서 한글의 이름을 '동문(東文)'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시대 고종 3년(1894) 갑오경장 이후 한글을 '國文'이라고 불렀으며, 일제 시대에는 다시 '언문'이라 불리
기도 하고 韓의 글자라는 뜻의 '한글'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한글'이란 명칭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며 한글이란 명칭이 언제 누구에 의해 비롯되었는지는 분명치는 않으나 주시경이나 최남선에 의하였을 것이
라 추정하고 있다. 두 사람 중 주시경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주시경은 '한나글, 한나라말, 한말, 배달말글' 등의 
술어를 창안했는가 하면 '한글모, 한글배곧' 등의 학회명을 창안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박승빈의 증언
처럼, 실용 이전에 최남선이 제의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체할 수는 없다.
  한편, 한글이란 명칭이 최초로 쓰인 최고 기록은 1913년 3월 23일 배달말글 모임이라 개칭했던 조선어문회를 
이때 다시 '한글모임'으로 개칭한 데서 찾아 볼 수 있 다. 이후 한글이란 말이 보편화된 것은 1927년 <한글>지가 
간행되고 훈민정음 반포일을 '한글날'로 개정하게 된 뒤로 보여진다.(최현배, 1941)
  Ⅵ. 한글의 우수성
  1. 문자의 발달과 한글의 지위
  지금 세계에서 쓰이고 있는 말의 종류는 3천 종 가량되고 글자는 50종 가량된다. 그러나 인류발달사의 초기시대
에는 말이나 글자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말은 있고 글자는 없었던 시대를 거쳐서, 말도 있고 글자도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말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눈으로 보고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기호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문자란 넓은 뜻으로 사람의 생각을 평면에다 볼 수 있는 꼴로 나타내어 그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문자로 취급하는 것은 그러한 평면에 나타난 그림이나 기호가 사람의 말과 직접 대응관
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말 특히 말의 소리와 대응관계를 갖지 않는 그림이나 기호로 생각을 나타내는 것은 일반
적인 문자의 전단계 형식이다. 그러나 문자의 발달은 이러한 말과 직접 대응되지 않는 그림이나 기호로부터 발달
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⑴ 결승문자
  중국 고대의 매듭글자(결승문자=結繩文字), 곧 끈의 매듭으로써 서로의 언약이나 결정 사항을 간직해 두는 방법
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서기 10세기경 Inca족에 의해서도 형성되었다고 한다. 매듭글자처럼 기억을 돕기 위한 
방법으로서는 북미 토인의 패대(貝帶)가 있다. 용건의 수대로 자개를 노에 꿰었다가, 한 용건이 끝날 때마다 그 
자개를 상대에게 주는 방법이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토인의 심부름 막대기(사자봉=使者棒)도 있다. 나뭇가지
에 새김눈으로써 어떤 일을 전하는 방법이다. 
  ⑵ 회화문자
  고대 중국이나 이집트의 그림글자(회화문자=繪畵文字)는 물체의 그림으로써 그 뜻을 나타냈다. 사물의 여러 그
림을 그리고 추상적인 뜻을 기호로 나타내어 어떤 생각을 전하는 것을 그림글자라 하는데 이 그림글자는 몇가지 
사물의 그림이 합친 한 폭의 그림의 성격을 가진다.
  ⑶ 상형문자
  이러한 방법에서 발달한 것으로는 여러가지 사물을 함께 그리는 것이 아니고 한가지 물건을 단순화시킨 선으로 
본떠서 그것과 뜻이 같은 말을 대응시키는 꼴본 뜸글자(象形文字)가 있다. 꼴본뜸글자로는 한자나 이집트의 신성
문자, 우리나라의 속용문자 등이 있다.
  ⑷ 표의문자
  이들 글자들은 원래의 꼴봄뜸의 그림의 성격이 사라지고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뜻에 대응되는 기호의 성격으로 
변한다. 이꼴이 바뀐 글자들은 그 꼴에 의하여 그 사물 곧 뜻을 연상하는 것이 아니고 그 기호에 관습적으로 약속
된 뜻을 연상하여 그 뜻에 대응된 말소리를 연상한다. 이런 글자를 뜻글자(表意文字)라 한다. 
  ⑸ 표음문자(소리글자)
  ① 소리마디 글자와 소리내는 짓 글자
  뜻글자들은 그것에 대응된 뜻을 버리고 그것에 대응된 소리만을 이용하여 다른 말소리를 적는 기호로 쓰이게 
되는데, 이러한 글자들은 소리글자라 한다.
  소리글자의 첫번째 형태는 소리마디 글자(音節文字)이다. 한 기호가 한 소리마디(音節)의 소리를 나타낸다. 우리
의 속용문자나 향찰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일본의 가나 등이 이러한 글자이다. 소리글자가 더 발달된 것은 낱소리 
글자(單音文字)이다.
  이 낱소리 글자는 한 소리마디(音節)을 이루는 낱소리를 분석하여 그 낱소리를 어울러서 소리마디를 표기한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향찰, 범자, 파스파 문자 등이 속하고 서양의 알파베트가 속한다.
  이 낱소리 글자보다 더욱 발전된 첨단 글자가 소리내는 짓 글자(調音文字)이다. 이 소리내는 짓 글자는 소리 
내는 짓을 본뜬 글자이다. 글자의 꼴에 상응하는 소리 내는 짓을 연상하므로서 그 글자가 지시하는 소리내는 짓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러한 소리내는 짓을 행하면 절로 소리가 이루어진다. 이 소리내는 짓 글자는 글자 꼴이 어떤 
행위를 본떠서 그 행위를 연상케 하므로 뜻글자이며, 소리를 표기하는 점에서 소리 글자이다. 소리내는 짓 글자는 
이 세상에서 한글 하나 뿐이다.
  글자가 소리의 기호일 뿐 아니라 그 기호는 표기하려고 하는 소리를 소리내는 짓의 꼴본뜸을 한 것으로, 한 
소리를 그 소리를 내는 짓의 꼴봄뜸으로 글자를 만들었으므로 글자의 꼴을 보고 표기한 소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또 그 소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과학적이고도 실용적인 것으로 소리글자로서는 가장 
우수한 문자이다.
  ② 한글은 한국말을 넘어서 주변의 다른 언어를 적는데도 매우 강력한 표음능력을 가지도록 만들어졌다. 또한 
<훈민정음> 발문의 표현대로 '닭소리며 개 짖는 소리'까지 다 적을 수 있을만큼의 표음능력을 가졌다.
  <세종어제훈민정음> 곧 <훈민정음> 언해문 뒤에 더한 부분에서 중국말의 두가지 잇소리가 한국말의 잇소리 
[삥] [잎] [차] 등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중국말의 잇소리를 적을 때는 [삥] [잎] [차] (여기서 아래의 두 획 중 
한 획이 더 삐쳐 나온다) 등으로 획을 변경해서 적도록 하고, 나머지 소리는 한국말의 소리와 대체로 같기 때문에 
이미 만든 한글을 고치지 않고 융통해 쓰도록 한다고 규정한 사실로 잘 드러나 있다. 즉, 한글은 우선적으로 한국말
을 적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주변의 다른 언어들을 적을 때는 어지간하면 그대로 쓰되 정 맞지 않을 
경우에는 획을 부분적으로 고쳐 가며 쓰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외국말 적기를 위한 변형의 원칙은 15세기로
부터 17,18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말 뿐만 아니라 만주말, 몽고말, 일본말, 인도말 등의 모든 외국말에 대해서 한결
같이 적용되어 갔다.
  2. 간단하고 단순한 글자꼴
  한글의 밑글자는 극도로 간단한 획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초성: [가] [나] [링] [삥] [아]
  중성: [.] [가] [가]
  두번 꺾음으로 쓸 수 있는 [링]만 빼면 모두 한 번 꺾음으로 쓸 수 있고 중성은 한번 그음이나 한 번 찍음으로 
되어 있어 그 간단함이 극에 달했다.
  3. 음절단위철자법
  한글은 초성, 중성 또는 초성, 중성, 종성을 음절단위로 철자한다. 이러한 맞춤법은 범자, 파스파 문자, 여진자 
등 다른 글자들에서도 음절 단위의 철자형태를 취하고 있다.
  말은 선조성(線條性)을 지녀서 초성, 중성, 종성의 순서로 차례로 발음을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음절단위로 된
다. 실제 소리나는 대로 낱소리(單音)를 차례로 적었더라도 우리는 음절은 끊어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 
인식의 면에서 보면 소리글자는 음절 단위로 철자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런 점에서 한글이 음절단위로 
철자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다른 글자와 더불어 우수한 철자법을 가진 소리글자의 하나이다.
  한글에 있어 모음의 초성 [아]는 특히 음절 분석이나 언어 기술에 있어서 퍽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모음과 모음
이 이어질 때 음절의 나뉨과 나누지 않음을 기술 할 수 있는 기능을 발휘한다.
  ① 아이[a#i]
  ② 애[ai]
  [아]가 둘 있는 [아이]는 두 음절이며, [아]의 하나인 [애]는 한 음절의 복모음이다. 이런 경우 음성기호로 쓰면 
혼동 될 수 있으나 [아]를 가진 한글로 쓰면 그 구분이 분명하다.
  한글은 또 소리나는 대로 음성기술이 필요하면 초성, 중성, 종성의 낱소리로 펴 쓸 수도 있어 또한 언어의 선조
성의 실상에 맞게 표기할 수도 있다.
  초성, 중성, 종성 이렇게 3가지 음소를 모아쓰는 음절글자로서의 한글에 비해 영어의 알파벳은 소리글자이지만 
알파벳은 모아쓰는 형태가 아닌 풀어쓰기 형태이기 때문에 음절글자를 표현할 수가 없다. 즉 '단어'는 있지만 '단'이
나 '어'와 같은 음절 글자는 없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일본의 가나는 소리글자이긴 하지만 음절은 있으나 음소가 없다. 즉 '가'는 있으나 'ㄱ'이나 'ㅏ'는 없다
는 말이다. 특히 가나는 음절수(글자수)가 약 80여 자로 매우 적기 때문에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일본인들이 '김치'를 '기므치'라고 말하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다. 일본의 가나엔 '기'라는 음절(글자)은 있지만 
'김'이라는 음절(글자)은 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중국의 한자를 살펴보면, 한자는 뜻글자이며 음절글자이다. 즉 '한자'는 모든 '뜻' 하나마다 '음' 하나를 
가지며 또한 하나의 '모양'을 가져야 한다. 때문에 한자는 그 수가 많고 모양이 복잡하다. 그것이 '뜻글자'의 가장 
큰 문제점이자 '한자'의 가장 큰 단점이다.
  이에 비해 한글은 자음 19개, 모음 21개 그리고 받침 27개로 총 67개의 음소를 가지며 이 67개의 음소로 총 
11,172자의 음절글자를 만들 수 있다. 이같은 글자는 사람의 말이 가지고 있는 구성원리를 그대로 글에 적용한,  
즉 한글은 말의 생긴 모양을 그대로 완벽하게 나타낼수 있는 매우 독창적인 글자이다.
  * 글자의 과학성 비교표 * 
  {{글자\구성}}
  {{말}}
  {{단어}}
  {{음절}}
  {{초성}}
  {{중성}}
  {{종성}}
  {{과학성}}
  {{한글(소리글자)}}
  {{O}}
  {{O}}
  {{O}}
  {{O}}
  {{O}}
  {{O}}
  {{100%}}
  {{알파벳(소리글자)}}
  {{O}}
  {{O}}
  {{X}}
  {{O}}
  {{O}}
  {{X}}
  {{70%}}
  {{가나(소리글자)}}
  {{O}}
  {{O}}
  {{O}}
  {{X}}
  {{X}}
  {{X}}
  {{40%}}
  {{한자(뜻글자)}}
  {{O}}
  {{O}}
  {{O}}
  {{X}}
  {{X}}
  {{X}}
  {{20%}}
  위에 있는 비교표는 공병우 박사가 만든 글자의 과학성 비교표이다.(이 비교표는 글자의 과학성을 비교한 것이
며 또한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비교가 아닌 한글의 과학성을 100%로 보았을 때 각 글자의 상대적인 비교이
다.) 이 비교표를 보면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인 구조를 지녔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래의 공병우 박사의 설문통계를 통한 '글자의 과학화 수준 비교표'를 보면 한글의 뛰어난 과학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얼마나 한글을 발전시키는데 소홀해왔던 가를 알 수 있다.
  * 글자의 과학화 수준 비교표
  {{과학화\글자}}
  {{알파벳}}
  {{가나}}
  {{한글}}
  {{과학화 수준}}
  {{100%}}
  {{80%}}
  {{30%}}
  위의 표는 한글에 비해 70%의 과학성을 갖고 있는 알파벳의 과학화 수준을 100%로 보았을 때 세 나라 글자의 
과학화 수준을 비교한 것으로, 한글은 한자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가나보다도 못한 과학화 수준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본 글자는 글자의 과학화가 상당히 더디 진행될 것임을 예견할 수 있다. 그것은 어려운 한자를 가르치
는데 긴 교육시간이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과학화에 상당한 어려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일본글자는 한자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글은 계속 이어져 있어 읽기에 상당한 불편함을 준다. 일반적으로 한자 한 글자는 일본글자로 두 글자 정도
이다. 한자로 쓰면 짧아질 단어를 일본글자로 쓰면 길어진다. 이처럼 길게 써 놓으면 글자마다 눈을 스쳐야 하기 
때문에 피로도 가중되며 또 변별력도 낮아져 읽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한자의 도움으로 단어 길이를 짧게 해 
독서 능률을 올리고 있다.
  다만 한자를 일본인이 일본의 말소리에 맞추어 쓰고 있는 방식은 일본인의 뛰어난 지혜라 할 만하다. 그래서 
일본인은 한자라 하지 아니하고 일본 한자(Japanese kanji)라 하여, 우리의 한자와는 그가치를 아주 달리 부여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일본말에는 같은 소리에 다른 뜻을 담는 말이 많다.
  그래서 이해가 어려워 한자를 써서 극복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 단어를 구성하는 데 있어 영어는 평균 5자소이지
만 다섯번째의 손질에는 단어 사이를 떼는 손질도 들어 있어 사이띄기 손질을 빼면 4개의 알파벳 자소로 이뤄진다
고 할 수 있다.
  만일 4개 알파벳을 조합해 단어를 만든다면 수십개의 단어를 만들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글은 문장 안에서는 한 단어가 평균 3자(8자소)이다.
  어미를 빼는 경우에 두 글자가 한 단어를 구성한다고 볼 때, 예를 들어 자음 [ㄱ]과 [ㄴ]과 또 모음 [가]와 [가]의 
4자소로 두 글자까지 조합하여 단어를 만들어 보면, 200개 단어수를 만들 수 있다. 말은 자꾸만 변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글의 조어력은 더욱 돋보일 것이다.
  일본 글자는 음절글자이기 때문에 두 음절 글자로써 만들 수 있는 단어는 고작 6개이다. 조합력이 낮은 불과 
50개의 음절 글자로 만든 소수의 단어로 여러가지 사물을 나타내는 말을 만드려니까, 같은 소리에 뜻이 다른 단어
가 많을 수밖에 없고, 이를 분간해 놓으려니 갯수 많은 한자를 빌려 쓸 수 밖에 없다.
  일본의 글자는 글자 수가 적어 배우기 쉽고 익히기에는 쉬울 수 있으나, 음소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서 글자 
구성 조합력이 낮아 단어에 동음이의어가 많이 발생해서 복잡한 사물을 변별력 있게 나타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음이어가 많게 되면 듣는 사람이 생각하는 사물과 또 말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사물이 다룰 수 있고 글로 주변 
현장 상황을 써 놓지 않으면 이해에 보조 여건이 없어 동음이어의 내용을 가려내며 이해하기에는 어려워 결국 
판단에 많은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4. 정보화 시대와 한글
  한글은 다른 글자에 비해 필기체나 약어가 없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다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① 글자획이 간단하여 빨리 쓸 수 있기에 따로 빨리 쓰는 글자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② 한글은 태어날때부터 인쇄되어 나왔으므로 인쇄체에 맞춰 글씨도 인쇄체로 되고 인쇄체 글자만으로 나왔다.
  오늘날의 문자생활은 완전히 기계화되고 있다. 타자기와 컴퓨터가 생활화되고 있어 필기체는 점차 필요가 없어
져 가고 있다. 한글의 원래 글씨는 바로 이러한 현대 문자에 맞는 앞선 걸음을 걸은 글씨가 할 수 있겠다.
  Ⅶ. 한글창제에 관한 공박
  1. 최만리의 상소문
  <세종실록> 제 103권에 따르면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에 참여한 사람은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 직제학 신석
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 등이다.
  이들의 반대 상소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저희들이 엎드려 살펴보건데, 언문의 지으심은 지극히 신묘하여 物을 새로 만들고 지혜를 내심이 천고에 
     멀리 뛰어 나십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변변치 못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서 감히 
     위태로운 간청을 펴서 삼가 뒤에 조목을 들어 아뢰오며 엎드려 임금님의 결단을 생각합니다.
     ① 우리 조정은 태조와 정종 이래에 지극한 정성으로 큰 나라를 섬겨서 한결로 중국의 제도를 좇았습니다. 
     지금 같은 글을 쓰고 같은 수레 자취로 달리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새로 만드시니 보는 이와 듣는 이가 놀랍
     니다.
     ② 예로부터 구주의 안이 풍토가 비록 다르나 지방의 소리에 의하여 따로 글자를 만드는 나라가 있지 아니하
     였습니다. 오로지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따위가 각각 제 글자를 가지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 오랑캐의 
     일이니 이를만한 것이 없습니다. <傳>에 이르기를 중국 것을 써서 오랑캐를 변하게 한다고 하였으나, 오랑
     캐에게 모두가 우리나라를 箕子가 끼친 풍속이 있다하고 문물과 예약을 중국과 견줍니다. 이제 따로 언문을 
     지으시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에게 동화하니 이것은 이른바 蘇合의 향을 버리고 쇠똥구리의 쇠똥뭉
     치를 취함이니 어찌 문명의 큰 더러움이 아니겠습니까?
     ③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낮고 천하나 모두가 중국에서 통용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에 붙여 쓰니 한자와 
     원래 서로 떨어진 사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서리나 종의 무리가 그것을 꼭 배우고자 하면 몇 권의 한자 
     책을 먼저 읽어 한자를 어슴프레나마 알고 난 다음에야 이두를 씁니다. 그러므로 이두로 해서 한자를 아는 
     사람이 매우 많으니 또한 학문을 일으킴에 한 도움이 됩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원래 한자를 알지 못하고 새끼 맺음의 시대와 같다면 처음에 언문을 빌어서 일시적 사용을 
     취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게 논의하는 사람은 언문을 사용하면서 임시의 편함을 취하기보다는 더
     디고 느리더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한자를 익혀서 오래도록 편리하게 쓸 계획을 세움만 같지 못하다 할 
     것 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수천년을 사용하여서 장부와 문서 회계의 일에 막힘과 거리낌이 있는 것이 없으니 
     어찌 옛날부터 쓰는 폐해가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낮고 천하고 속된 말인 이익이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어 
     쓰겠습니까? 만약 언문을 행하면 서리들은 언문 글자만 오로지 익해서 학문은 돌보지 않게 되어 한자와 
     서리들이 둘로 갈라지게 됩니다.
     만일 서리가 된 사람이 언문으로써 벼슬을 높이 오른다면 뒤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을 것이니, 
     27자의 언문으로 넉넉히 세상에 출세한다면 어찌 애를 쓰고 생각함에 힘을 써서 성리의 학문을 연구하겠습
     니까? 이렇게 하면 수 십년 뒤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적어질 것이며, 비록 언문으로써 서리들의 일은 잘 
     처리 하더라도 성현의 글을 알지 못하면, 배우지 않은 이는 담에 마주 선 격이어서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리
     는데 어두울 것이니 한갓 언문에 능통한들 무엇에 쓰겠습니까? 우리나라가 더하여 쌓아 문명을 숭상하여 
     쌓아올린 교화가 점차 땅을 쓰는데 이를 것입니다. 이보다 앞 서 이두가 비록 한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나 
     지식이 있는 사람은 늘 낮고 천하게 여겨 吏文으로 그것과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하물며 언문은 한자와는 
     잠깐도 교섭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뒷골목의 속된 말에 쓰여짐에랴.
     설사 언문이 앞 임금님때부터 있었다 하더라도 오늘날 문명의 치세를 魯를 변하여 道에 이르는 뜻으로 늘 
     옛 습관을 버리지 않고 지켜서 그 전대로 널리 쓸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고치어 새롭게 논의할 사람이 있을 
     것이며,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입니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즐기는 것은 예와 이제에 두루 통하는 
     병입니다. 지금 이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재주에 지나지 아니할 뿐이어서 학문에 손실이 있고, 나라 
     다스림에 덕이 없습니다. 되풀이해서 헤아려 보아도 아직 그 옳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④ 만약 죄를 물어 사형에 이르게 한 자백서는 이두글자로 적으면 글자 하나의 차이로 혹시 원통한 처벌에 
     이를 수도 있으나, 이제 언문으로써 말을 바로 적어서 읽고 그것을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
     라도 모두가 다 쉽게 알아서 굽힐 사람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옛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으나 옥사
     와 송사를 하는 사이에 원통하게 굽힌 일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빌어 말하더라고 죄수가 이두를 
     아는 사람은 몸소 조서를 읽고서 없는 일을 꾸며대어 고발한 것을 아나 매질에 못 이기어 원통하게 항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함은 조서의 글 뜻을 알지 못해서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만약 그
     러하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한들 무엇이 다들 것입니까? 이러한 사실은 형벌과 옥사의 공평함과 공평하지 
     않음은 옥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있는 것이지, 말과 글이 같고 같지 않음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언문으로써 조서 처리를 공평하게 하고자 하심은 저희들로서는 그 옳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⑤ 무릇 일의 功을 세움에는 가까운 것을 취하거나 빨리함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데, 나라의 근래의 조치
     는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나라 다스림의 체통을 세우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가령 언문은 부득히 해야한다고 하신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화시키고 바꾸는 큰 일이니 마땅히 재상에게까지 
     상의하셔야 하며, 국민들이 모두 좋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처음 법령을 만듦에 먼저 삼 일의 홍보기간을 두고 
     법령을 시행함에도 먼저 삼 일의 홍보 기간을 두어 세 번이나 다시 생각을 하셔야 하며, 여러나라의 임금님
     에게 질문하여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그것을 중국 것에 고증하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百世에 聖人을 
     기다려 미심쩍지 아니한 것으로 된 뒤에라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의론을 널리 캐지 
     아니하고 갑작이 서리들 십여 명에게 가르쳐 익히시니다. 또 옛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운서를 가벼이 
     고치시어 터무니 없는 언문을 억지로 맞추어 장인바치 수십명을 모아서 그것을 새기어 갑작이 천하에 널리 
     펴고자 하시니 후세의 공론이 어떻하겠습니까? 또 지금 청주의 초수에 행차하심에 흉년을 특히 염려하시어 
     모셔 따르는 여러 일들을 간략하게 하도록 힘 쓰시고 맡기시되 저 언문같은 것은 나라의 더디고 빠르게 함이 
     부득이 기일에 맞추어야 하는 일이 아님에도 어찌 홀로 나가 계시는 자리에서도 쉬지 않고 그것을 하시어 
     임금님께서 몸을 돌보고 쉬어야 할 때에 번거롭게 하십니까? 저희들은 더욱 그 옳음을 볼 수 없겠습니다.
     ⑥ 선유가 이르되 무릇 백 가지 놀음은 모두 뜻을 뺏으며, 편지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일에 가장 가까우나 
     한결로 즐겨 집착하면 또한 스스로 뜻을 잃습니다. 지금 동궁은 비록 덕성을 성취하였으나 오히려 성인의 
     학에 마음을 깊이 둠이 마땅 하고, 더욱이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을 구하여야 합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하더라도 특히 선비의 여섯 가지 재주의 하나일 뿐입니다. 하물며 다스림의 도에는 만에 만의 하나의 이로움
     도 없는데 정신을 잃으며 마음을 쓰심에 날을 마치고 시간을 보내어 실로 시간이 촉박한 학문에 손실이 있습
     니다.
     저희들은 함께 글의 잔재주로써 받들어 모심에 죄를 기다리옵는터이라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감히 침묵
     을 지키지 못하고 삼가 마음을 다하여 우러러 임금님의 밝으신 지혜를 더럽힙니다.(<세종실록> 26년)
  최만리의 상소는 그 당시 보수 기득권층의 중세적 사고 방식인 '중화주의'라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곧 중국은 
대국으로 문명 국가인데, 조선은 그러한 나라의 보호를 받는 작은 중국(소중화)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 대해
서는 한없이 비굴했지만 소중화도 못되는 이른바 오랑캐에 대해서는 우월감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그 당시 국제 정세로 볼 때 합리적이었는지는 모르나, 사실과 진리에 대한 객관적 인식까지 방해하는 엄청
난 생각의 편견을 낳았다.
  이를테면 과학적 사실까지도 중화사상으로 해석했다. 서해의 밀물 썰물이 동해보다 심한 까닭을, 바닷물 흐름의 
근원이 중국에 있으므로 서해는 중국에 가깝고 동해는 멀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말글을 보니 그 것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언어 중심주의의 오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최만리들은 한문으로 성립된 것만을 학문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중국 글을 익히고 중국 경전에 충실한 것이 학문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던 시기였으므로 그러한 생각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 글은 학문의 유용한 수단은 되지만 그 자체가 학문은 아닌 것 인데도, 사대주의 
편견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국한문 혼용의 근거도 바로 이와 같은 문자 중심주의 오류라 볼 
수 있다. 곧 한자를 외국문자로 인식하지 않는데서 출발하여 한자어를 한자로 써야 의미가 통하고, 한자를 일반인
들까지 전부 익혀야 문화 전승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그것이다.
  한편 사실 조선의 위민 사상인 민본주의 이상은 근본적으로 지배 계층의 정신 자세와 피지배 계층의 능동적 
자세에 있는 것이지 한글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피지배 계층은 인간다운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그 시대이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한글이 
벽서나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지배 계층에 대한 항거의 수단이 되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민본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간접적 수단은 되었으므로 무조건 무시하는 것은 극단적인 생각이다.
  이러한 분석과 그 당시 정세 흐름으로 볼 때 최 만리는 중화라는 사대적 세계관과, 기득권을 수호하고 왕권을 
견제하는 처지에서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고 볼 수 있다.
  2. 상소문에 대한 세종의 대답
  임금님께서 상소문을 보고 최만리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이 소리를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 옛 것에 어긋난다고 하였으나 설총의 이두 또한 다른 소리가 
     아닌가? 또 이두를 지은 본래의 뜻은 곧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함의 뜻이 없더냐? 만약 그것이 백성을 편하
     게 하는 것이면 지금의 언문 또한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너희들이 설총을 옳다하면서 제 임금
     의 한 일은 그르다 함이 무엇인가?
     또 너희들이 운서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과 자모는 몇개가 있느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그 누가 그것을 바르게 하겠는가? 또 疏文에서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재주'라고 하였으나 내가 늘그막에 
     소일 하기가 어려워 책으로 벗을 삼을 뿐이다.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즐겨서 그것을 하겠는가? 
     또 밭에서 매를 놓아 사냥하는 따위가 아닌데 너희들은 말이 너무 지나침이 있다.
     또 내가 나이가 많고 늙어 나라의 뭇 일을 세자가 전적으로 관장하니 비록 적은 일이라도 진실로 참여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늘 하물며 언문이랴, 만약 세자가 동궁에만 늘 있으면 환관에게 일을 맡길 것인가? 너희
     들이 나를 모시는 신하로서 내 뜻을 환히 알면서 이런 말을 하여서 옳을 것인가?
  임금님께서 또 말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문이 계를 올려 언문을 만듦은 옳지 않음이 아니라고 하더니 이제 도리어 옳지않다 하는구나. 
     정창손이 말 하기를 '삼강행실을 펴낸 뒤에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됨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행하고 
     행하지 않음은 단지 사람의 자질이 어떠함에 있을 뿐이니 어찌 반드시 언문으로 그것을 번역한 뒤에 사람들
     이 그것을 본받겠습니까?' 하니 이따위 말은 어찌 선비의 사리를 아는 말이겠는가? 심히 쓸모없는 속된 선비
     로다.
  이보다 앞서 임금님께서 정창손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약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백성들 사이에 펴내면 
어리석은 남자나 어리석은 여자들이 모두 쉽게 깨쳐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배출될 것이다" 하시니 창손이 
이에 계를 올렸으므로 지금 이런 말씀이 계시는 것이다.(<세종실록> 26년) 
  3. 반대 상소자들에 대한 세종의 처벌
     임금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에는 죄를 줄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소문 안
     의 한두마디를 물어 볼까 할 뿐이었는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보지 않고 말을 바꾸어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어나기 어렵다" 하셨다.
     드디어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다음날 풀어 주라고 명하시고, 오직 창손은 벼슬을 파하고, 인하여 의금부에 뜻을 전하여 
     김문이 전후로 말을 바꾸어 계를 올린 까닭을 문초하여 이르라 하였다(<세종실록> 26년) 
  4.세종의 신문자(한글)정책
  <용비어천가>와 함께 부처를 예찬하는 내용의 <월인천강지곡>을 지었으며, 당시 한자의 소리값을 교정하기 
위하여 <동국정운>을 지어 음성기호로서의 한글의 표음 능력을 유감없이 활용하고 과시했다.
  또 한글을 보급하는 방편으로 <효뎨레의(孝悌禮義)>라는 한글을 새긴 동전을 만들기도 하고, 과거 시험에 한글
쓰기를 필수과목으로 넣기도 하고, 신하들에게 한글로 문서를 짓게 하기도 했다.
  Ⅶ. 한글창제의 역사적 의미
  어떤 사실이 역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시대에 따라 항상 새롭
게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문화사상 가장 높은 사실로 지적되고 있는 한글창제의 의미도 시대의 변천
에 따라 계속 새롭게 추구되어 왔다.
  언문일때의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미와 국문이 되었을 때의 그것이 달라졌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의 
긴 역사시대를 통해 왜 15세기, 즉 조선 성립초기에 와서야 한글이 창제되었나하고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으며 
대답은 대체로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고유한 문자를 가지지 못한 국가적 체면과 여기에서 나온 민족의식의 문제.
  둘째, 백성이 글을 알지 못하여 백성 스스로가 불편하였거나 혹은 치자층과 백성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불편하였던 점. 
  셋째, 글을 모르는 백성들의 처지를 세종대왕이 어여쁘게 혹은 애닯게 느낀점 등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한글창제 동기론 가운데 첫째로 지적한 고유한 문자를 가지지 못한 
국가적 체면과 민족의식에 대해 살펴보면, 고대 국가 성립 시기에 수나라나 당나라와 같은 중국의 큰나라들과 당
당히 싸울수 있었던 삼국시대와, 당나라의 야심을 물리치고 최초로 민족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말해지는 통일신라
시대,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의 유민까지 포섭하여 삼국통일보다 한층더 진전된 민족의 재통일을 달성하
였다고 평가되는 고려시대를 통해서도 고유의 글이 없어서 국가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은 절실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흔히 사대주의가 본격화한다고 말하는 조선 초기에 와서 왜 국가적 체면을 생각하고 우리글을 만들게 
되었는가하는 점에 의문이 있다.
  또한, 양반 국가하고 말하는 조선왕조가 국가적 체면 때문에 고유의 글을 만들었다면 양반글을 만들고 그것을 
국문으로 삼았어야 했는데 백성글을 만들어 언문으로 취급한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음, 백성들이 글을 몰라서 불편하고 치자층과 백성들 사이에 의사 소통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글을 창제
하였다는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면, 역사시대로 접어든 후 최소한 천년 이상이 지난 15세기까지 극소수의 지배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이 글을 모르고 살아왔지만, 치자층이 글 모르는 백성의 고통을 생각해 주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글을 모르고 치자층과 백성들 사이에 문자를 통한 의사 소통이 없었어도 삼국시대
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지배층은 백성을 다스리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고 따라서 백성글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15세기에 와서는 갑자기 글 모르는 백성들의 처지를 치자층이 동정하게 되었으며, 또 왜 지금까지 없었던 백성
들과의 의사 소통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 던가 하는 점에 의문이 남는다.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하여 대체로 두가지 대답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이 시기에는 이미 치자층만이 문자생활을 누리고서는 더 지탱할 수 없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이 백성의 
세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고, 둘째는 15세기 이전의 전체 역사 시대를 통하여 어느 군왕도 
가질 수 없었던 백성에 대한 어여삐 여김을 세종대왕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글 모르는 백성의 불편함을 이때 
처음 알게 되었고 백성과의 의사 소통도 비로소 생각하게 된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이 두가지 대답 가운데 어느 것이 역사적 대답이 될 수 있는가를 가려내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세종대왕의 백성
에 대한 어여삐 여김이 한글 창제의 동기라고 보는 생각을 음미해보자.
  한글 창제와 같은 우리 문화사상 최대의 사실이 비록 전제권력을 가진 군주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자애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역사적인 해석이 될 수 있겠는가?
  어느 개인의 능력이나 심리상태가 역사적 사실의 중요 원인으로 부각되면 역사가 우연의 소산물로 이해되거나 
영웅주의적 역사관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글창제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다시 의문이 재게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
다. 첫째는 한글을 만든 것은 분명히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었지만 그들로 하여금 한글을 만들지 않을수 없게 
한 것은 누구인가하는 의문이며, 둘째는 한글이 정말 전적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우선 한글을 만들게한 것은 백성 세계의 변화이며 그것은 또 15세기 우리의 역사조건이다. 15세기에도 양반때문
에는 전혀 새로운 문자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한글이 만들어진 뒤에도 양반들의 문자생활은 한문중심으로 계속되었다. 15세기에 와서 한글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왕조의 훈민정책에 일환이었다.
  고려시대까지도 글을 가르쳐서까지 백성을 훈도하지 않아도 다스릴 수 있었는데, 조선초에 와서는 글을 가르쳐
서 다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었거나 혹은 글을 가르치지 않고는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될만큼 백성의 
세계에 변화가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가 바로 한글, 즉 훈민정음을 만들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성립초기의 조선 왕권이 안정을 얻고 중세적 지배질서를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할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고려 중기의 무신의 난까지 소급되어 이후 천민의 난과 몽고의 침입 및 고려의 몰락 
등을 통해 한 단계 높아진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을 간구하는 일이었다.
  이 중 자의식이 한 단계 높아진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이익 조건 중의 하나로 문자생활의 영위를 
가능케 할 수 있는 한글이라는 글자의 창제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치자층의 자애심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백성세계가 스스로의 자의식을 높여감으로써 얻을수 
있었던 전리품과 같은 것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한글이 정말 백성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글이 만들어진 후 그것이 조선시대에 어떻게 사용
되었는가하는 문제를 추적해보면 한글이 본래 지배층의 지배목적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음이 한층 더 분명해질 것
이다.
  지배목적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한글은 창제 당초부터 백성들을 대상으로 조선 왕조의 정당성과 존엄성을 고취
하는데 사용되었다. 한글로써 무엇보다 먼저 <용비 어천가>를 지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용비어천
가>는 조선왕조의 왕권을 뿌리깊은 나무와 샘 깊은 물에 비유한 일종의 왕실찬양가로서, 한글로 지어 널리 읽혀지
기를 목적한 것이다.
  한글의 창제보급은 또 정부의 정책을 관료들의 해석없이 백성들에게 직접 전달 할수 있는 지름길을 마련하였다. 
이제까지 한문으로 내려오던 정부의 교서나 방문이 창제 이후 언문교서와 같이 내려옴으로써 이것을 통하여 백성
과 정부가 직결될 수 있었다. 특히 한글로 된 방문, 즉 언문방문은 그 효과가 대단히 높았는데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란이 일어났을 때는 정부가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하여 각 지방마다 언문방문을 붙여 소위 '효유'하였다. 임진
왜란 때 왜군에게 부역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왜군의 진영에서 나와 아군을 도우면 부역죄를 
용서할 것이라 알린 왕이 내린 방문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렇듯 한글은 지배권력의 처지에서 보면 통치수단의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지 만, 그것을 만들지 않을수 없게한 
백성의 처지에서 보면 값높은 전리품이었다.
  한글을 배운 백성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정치적, 사회적 의사표시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스스로의 의식
수준을 한층 더 높여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글이 반포된 지 3년 후에 벌써 대신들을 비방하는 언문벽서가 나왔고,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연산군 시대에는 
그의 폭정에 항거하는 언문투서, 언문패서가 빈번하여 한글 사용 금지령이 내리고 한글책이 불태워졌다.
  패서나 문학작품 등을 통하여 백성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요구와 주장을 펼치는 수단이 됨으로써 중세 양반사회
를 무너뜨리고 근대 민중사회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의 구실을 다했던 것이다.
  한문이 진서의 자리를 잃어가고 한글이 언문의 위치를 탈피하면서 국문의 자리를 굳혀가는 과정은 바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며 우리 역사가 근대화해 가는 과정이었던 것이었다.(<분단시대의 역사 인식> 강
만길)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의미는 최만리의 상소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결국 한글의 
창제가 세종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최만리보다 물리적 힘이 우세한 탓도 있지만, 근거와 결과의 타당성이 훨씬 
높았고 역사의 합법칙적인 발전 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세종은 백성의 처지, 통치자의 처지, 
언어 모순에 대한 객관적 인식, 한자음 정리 등의 모든 목적을 합리적으로 해결해 주는 최상의 문자 창제에 성공했
던 것이다.
  Ⅷ. 기타
  1. 한글의 의미
  그렇다면 한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三韓/大韓帝國의 韓에 글(文)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윤재에 따
르면
     역사를 상고하면 조선 고대 민족이 환족이며 나라 이름이 환국이었습니다.
     '환'의 말뜻은 곧 '한울'입니다. 조선 사람의 시조 단군이 한울로써 명칭이 된 것 입니다. 그래서 환은 한의 
     소리로 한울의 줄인 말이 되었고, 그만 한이란 조선을 대표하는 명칭이 된 것입니다.
     고대 삼한이란 명칭도 이에서 난 것이요, 근세에 한국이란 명칭도 또한 이에서 난 것입니다. 또 '한'이란 말의 
     뜻으로 보아도 '크다(大)' '하나(一)'이니 '한울(天)'이란 말로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 글을 한글이라 
     하게 된 것입니다. 한글의 '한'이란 겨레의 글이며 나라의 글 곧 조선의 글이란 말입니다.(이윤재, 1929)
  이외에 한글의 '한'을 '一, 大, 正'으로만 본 것도 있다.
     한글의 '한'은 一이요, 大이요, 또 正이다. 그리하여 첫째로 한글은 바른 글(正音)이니 모든 것이 법에 맞도록 
     정리되어야 할 것이요, 다음에 한글은 큰 글이니 사내나 계집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어른이나, 어린이나,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다 한가지로 이 글을 알아야 하며 써야 할 것이요, 끝으로 한글은 하나된 글이
     니 온 누리에서 첫째가는 글이요, 또 조선에서는 누구에게든지 한가지로 쓰이어야 할 글이다. 이리하여 整理
     과 普及과 統一의 세 가지는 실로 한글의 根本義가 되는 것이다(최현배, 1941)
  2. 한글날의 역사
  한글날은 1926년, 일제의 어문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조선어학회가 음력 9월 마지막 날인 29일을 양력으로 고쳐 
10월 28일을 훈민정음 반포일로 정하고 이 날의 이름을 '가갸날'이라고 정한데서 비롯한다. 1928년에는 이를 다시 
'한글날'로 바꾸었으며, 1932년과 1933년에는 음력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지정했
다. 1934년부터 1945년까지는 그레고리우스력에 따라 양력으로 환산한 날인 10월 28일에 행사를 거행하였다.
  1940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됨에 따라 날짜를 추정한 결과 늦어도 세종 28년 음력 9월 10일까지는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으로 되어, 세종 28년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인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 
1946년부터 시행하였다. 이후 1991년에 한글날은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3. 한글 읽기쉬운 글자(나)와 힘든 글자(히)
  중앙병원 진당한 박사팀의 '시인도 조사'에 따르면 한글 가운데 가장 읽기 쉬운 글자는 '나'이며 가장 읽기 힘든 
글자는 '히'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서울 중앙병원 진당한 교수팀(안과)이 실시한 '한글의 시인도' 조사 결과 나타났다. 시인도는 글
자의 인식정도를 일컫는 말로 진교수는 한글의 시인도를 밝히기 위해 한글과 아라비아숫자 및 로마자를 무작위로 
두번씩 배열한 검사용 시력표를 만든 후에 두 눈으로 볼 때 0.1-0.2의 시력에 해당하는 거리에 성인 남녀 25명을 
앉히고 시력표를 한줄씩 빠른 속도로 읽게 했다.
  예컨대 '가'라는 글자를 25명이 한번도 틀리지 않고 읽어내면 시인도는 1백%에 해당하며 한번 틀릴 때마다 시인
도는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번 시인도 조사에 따르면 가장 읽기 쉬운 글자는 90%의 시인도를 나타낸 '나'였으며 '히'는 16%의 시인도에 
불과해 가장 읽기 어려운 글자로 조사됐다.
  진교수가 한글이 읽기 쉬운 대로 1-3군으로 나눈 결과 '나 사 느 스 구 누 가 다 수 도 서 즈 드 주 소 마 고 
으 이'등은 시인도가 60%를 넘는 1군으로 분류됐다.
  반면 시인도가 40%를 밑도는 '히 무 흐 머 루 비 시 부 허 르 미 로 리 더 모 버'는 가장 읽기 힘든 3군으로, 
40%-60%의 시인도를 보인 '기 아 두 라 호 거 너 조 노 바 하 오 므 우 후 니 지 자 어 보 저 브 디'는 2군으로 
분류됐다.
  또 자음중에서는 'ㄱ ㄴ ㅅ'이, 모음 중에는 'ㅏ ㅡ'가 시인도가 높았고, 'ㄹ ㅁ ㅂ ㅎ'과 'ㅓ ㅣ'는 읽기 힘든 글자들
로 나타났다.
  4. 세종대왕상
  유네스코(UNESCO: 유엔 교육-과학-문화 기구)는 1989년 6월 21일 세종대왕상을 재정했다. 우리 나라는 비교
적 문맹률이 낮은 편이지만, 세계적으로는 아직도 문맹자가 매우 많다. 선진국에도 예상외로 문맹자가 많다. 유네
스코는 지구촌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이 상을 제정했다. 매년 문맹 퇴치를 위해 가장 노력한 단체나 개인을 선정
하여 3만 달러의 상금과 함께 이 상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상을 재정해 놓고 보니 그 상에 붙일 마땅
한 이름을 정하기가 쉽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으로 이름을 정하고 시상일도 한글날
인 10월 9일로 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언어와 문자가 있지만, 어느 특정한 시기에 어느 특별한 인물이 문자를 창제한 것은 '한글'이 
유일하다. 창제 동기도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서다. '어리석은 백성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기에 이를 만들어 사람
마다 쉽게 익혀서 일상적으로 사용함에 편안하게 하고자 함'이라는 <훈민정음> 서문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유네스코는 1989년에 세종대왕 상을 제정하여 1990년부터 매년 이 상을주고 있다. 1990년에는 인도의 과학 대중
화 운동 단체인 KSSP가, 1991년에는 아프리카 가나 대학의 성인 교육 연구소가 이 상을 받았다. 그리고 올헤 10월 
9일에는 인도의 '지식의 등불 운동 단체'가 본상을, 브라질의 아마존 지역 농촌 연구소가 차상을 받았다.
  세계 최고의 권위 기구인 유엔의 산하 기구가 이 상을 제정하여 한글날을 잡아 '세종대왕 상'이라는 이름으로 
시상하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한글날을 공휴일에서조차 제외시키는 작업을 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문자 창제를 경축하는 국경일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문자를 '언제, 누가' 창제한 일이 없었
기에 그런 경축일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하지 못한 일을 우리만이 했기에 
우리는 그 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없어서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있어서 자랑스럽게 하고 있는 우리가 
본뜨자는 말이었다.
  그런데 유네스코가 세종대왕 상을 제정하여 매년 한글날에 주고 있지만, 우리 나라 신문은 제정당시 그 사실을 
문화면에 단신으로 취급하고 말았고, 그 뒤로는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5. 한글의 글꼴
  한글의 글씨는 같은 폭의 직각, 정원, 정삼각형, 직선으로 된 기하도의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화려한 느낌을 
주는 모습은 아니나 실용적인 반듯한 아름다움을 이룬다.
  한글의 글자꼴은 해례본 <훈민정음>의 글자꼴이 원래의 글자꼴이다.이것은 획의 폭이 일정하고 직각, 정원, 정
사각형, 정삼각형, 직선, 정원점으로 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6. 원본 <훈민정음>의 보존과 발견 경위
  <훈민정음>이 관계문헌에 대하여 지금까지 발견된 것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실록본(세종 실록에 실린 훈민정음 본문과 정인지의 서문)
     ② 일본 궁내성본(일본 궁내성 도서료 사본, 이것의 사진 판본이 현재 서울대학교에 간수되어 있음)
     ③ 가나자와본(가나자와 간수의 사본)
     ④ 희방사본(1459년에 간행된 월인석보 첫째 권 책머리의 부록)
     ⑤ 박승빈본(박승빈 간수, 단행 판각본)
     ⑥ 전형필본(전형필 간수)
  앞의 ①과 ⑥은 순 한문체로 된 이른바 한문본이다. 전형필본은 실록본의 해례(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자례, 정인지의 서문)가 붙어 있어 이를 따로일컬어 해례본이라고 한다.
  <훈민정음>의 원본에 대하여 여러가지설이 있지만 대체로 전형필본 곧 해례본 을 원본으로 본다는 편이 지배
적이다.
  7. 미국 과학전문잡지 디스커버호
  미국 과학전문잡지 디스커버 최신호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이며 그 독창성과 기호배합의 효율
성 면에서 특히 돋보인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 잡지 6월호는 제이드 다이어먼드가 기고한 '쓰기, 정확함'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한글이 이러한 장점 때문에 
'지식의 확산'이라는 문화적 측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얻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글은 한글이 언어학자가 아닌 세종대왕이 지난 1446년에 만들었다고 소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이 
세계에서 가정 우수한 알파벳이며 뿐만아니라 쓰기에도 가장 과학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 잡지가 칭찬하는 한글의 우수성은 대략 세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모음과 자음이 쉽게 구별된다. 또 자음이 입술 입 혀의 위치를 확실히 해준다는점, 그리고 28개 자모(현재
는 24자모)가 수직 수평의 조합으로 반듯한 사각형태를 이루면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는 점을 적시했다.
  특히 두번째 자음의 장점에 대해서는 지난 1940년 세종대왕이 처음 만든 한글체 원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비전문가가 글을 만들면서 우연히 이같은 특징이 주어진게 아니겠느냐'는 것이 세계 학계의 다수의견이었을 만큼 
그 과학적 체계성이 독보적인 것이었다고 이 잡지는 설명했다.
  한반도에 문맹률이 극히 낮은 것도 한글의 이같은 간결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기고문은 부연했다. 
또 남한이 여전히 한글과 한자가 혼용되고 있는 반면 북한은 한글만 고집하고 있는 점은 대조적이라고 이글은 
소개했다.
  이글은 영어를 한글과 비교, 영어의 경우 단어 구성이 지극히 불규칙적이어서 학습에 혼란을 주고 있다는 점을 
들고, 이때문에 컴퓨터에 오자 수정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며 국민학교 4학년 미만 아동들이 틀린 단어를 쓰는 경우
가 다반사라고 지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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